강남강의

유골단지

아빠와 함께 2020. 11. 3. 07:08

강남-누가복음 4장 10절 (유골단지) 20102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10절부터 하겠습니다. 4장 9절부터 보면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이 성경말씀인데 시편 91편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에요. 이 성경 말씀인데 이 성경 말씀을 누가 사용을 하느냐 하면은 악마가 사용하지요. 시편 91편에 나오는 그 말씀을 악마가 그걸 사용하여 주님에게 시험을 하는 대목입니다. 시험을 한다는 것은 시험 치는 자가 있고 시험을 출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되지요.


그럼 시험 출제를 내버리면 출제 내는 사람은 선생님이고 문제 풀어야 될 사람은 학생이죠. 문제를 출제한다는 것은 이 선생님은 문제 삼지 말라는 뜻이죠. 학생아 너는 학생의 그 영역에서 머물라. 학생이 내가 내는 문제를 시험 치면 되지 우리가 선생님한테 시험문제를 받았으니 이제는 제가 문제 낼 테니 선생님 맞춰보세요 이러지 말란 말이죠.


그래서 악마가 예수님께 시험한다는 것은 나에게 함부로 나의 영역에 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악마가 여기 이렇게 나와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악마를 어떻게 뽑아낼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이미 악마가 오늘 누가복음 4장 10절에서 알려줬습니다.


악마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악마는 언어에 있다. 언어에 실존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악마는 사진 찍으면 나타나지 않아요. 그리고 만져도 오감으로 만져지지 않고. 악마는 언어를 사용하죠. 말을. 말과 글을 사용해서 나타납니다.


악마가 시편 91편 11절부터 사용했다는 말은 시편 91편을 주님한테 가면 완성이 돼요. 주님한테 가면 완성이 되니까 주님은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91편 이것이 악마한테 가면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말이 돼요. 말씀이 아니고 말이 됩니다. 언어가 돼요. 언어.


그러면 말과 말씀 사이에는 대척 관계에 있어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밀어내는 관계에요. 서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밀어내는 관계입니다. 마치 자석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밀어내겠지요. 그럼 여기도 시편 90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예수님도 시편 91편 말씀이 있다면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서로를 밀어내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똑같은 말씀을 사용했는데 그 말씀에 대한 그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와있지요.


그러면 인간의 그 악마가 쓰는 말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하면은 악마는 십자가까지 갈 수 있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희생, 순교. 그냥 순교가 아니고 장렬한 순교, 희생, 봉사 이런 것은 악마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악마는 인간에게 말을 주었고 그 말에 대해서 악마가 말을 줬기 때문에 그 말을 그냥 던져주는 것이 아니고 작살에 꽂힌다 하지요. 말을 탁 던지게 되면 그 말에 내용을 이해한 내가 그 말과 내가 일치하려고 애를 쓰겠지요.


예를 들어서 악마가 이런 겁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지셨다 한다면 그거는 악마한테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 아니고 말이 되겠지요. 말씀이 말이 되어버리면 이 말이 우리한테 꽂혀버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려고 애를 쓰겠지요. 이게 바로 악마의 고난 안에서 놀아나는 겁니다. 희생하고 장렬한 봉사하고.


선교사로 가고 뭐 온 난리를 하고 천주교 신부 같으면 신부될 때 바닥에 십자가로 엎드려가지고 이렇게 하거든요. 마귀 짓이죠. 십자가에 엎드려가지고 하고 가족들은 울고 있고 울면서도 주님께서 제 아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울긴 또 왜 울어요? 섭섭하다 이 말 아닙니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말한대로 합치 또는 일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애를 써요. 애를 쓰는데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하면은 불교도 마찬가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하면은 이게 십자가는 가는데 부활까지는 가지를 못합니다. 이게 악마의 안타까운 점이에요. 여기 간격이 있거든요 간격. 그 간격을 뛰어넘을 수가 없네요. 그냥 예수님 믿고 죽을똥 살똥 해요. 거의 초죽음 될 정도로 해요. 그러나 백날 초죽음하고 심지어 잘못 실수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부활에 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악마는 이 인간세계에서 뭐냐 하면은 기호이기 때문에 그래요. 기호. 언어이기 때문에.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기표라고 하는데 그냥 쉽게 기호라고 생각하면 돼요. 기호기 때문에 그냥 ‘말’이에요. 기호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말을 할 때 날라다니는 말을 주워 담습니까? 아니면 말하는 그 사람을 먼저 전제로 하는 거에요?


소리를 들으니까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살피는 거에요. 살피죠? 그 말은 인간의 세계에서는 말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체를 찾아가게 되어있어요. 어떤 말을 해도 그 실체는 말한 본인들에게 있거든요.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런데 사람이 있다는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고 물리적인 탐사도구를 사용 해도 악마는 포착이 된다? 안된다? 악마는 포착이 안되지요. 포착이 안돼요. 악마는 포착이 안되고 악마가 던져주는 말에 대해서는 인간이 미친 듯이 그것에 대해서 일치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그러니까 여기 순교, 악바리 희생을 해봤자 그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 말에 대해서 이끌린 내가 그 말의 내용과 일치되겠다고 애쓰는 본인이에요. 본인. 본인은~~ 본인이라고 본인. 어떤 순교의 현장에 가도 거기서 만져지는 것은 물컹물컹한 본인의 근육들이에요. 본인뿐이에요. 그럼 본인이 악마에요? 아니잖아요. 악마 안보이고 되는 모든 일은 사람의 일이지.


그러니까 사람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악마를 뽑아내고 집어내야 될 것을 사람보고 이야기 안하고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인간보고 이야기하면서 똑바로 하라는 거에요. 똑바로. 본인이 똑바로 안하고 싶어서 안합니까? 자신도 그 말에 현혹되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들 다시 한번 시편 91편을 다같이 한번 볼께요. 악마가 사용한 말입니다. 시편 91편 11절에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시편 91편 11절, 12절 그렇게 되어있지요?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이 우연히 봤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말씀은 내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자기가 모른다는 거에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되느냐? 요새 단풍 좋겠다. 설악산 절벽 있잖아요. 울산바위나. 절벽에 올라가는 거에요. 올라가서 본인이 본인을 테스트 시험하는 거에요. 내가 믿음 있으면 여기서 뛰어내리는 겁니다.


뛰어내려 버리면 천사가 와서 성경말씀 그대로 천사가 와서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면 나는 신앙인이고 신앙인 되면 어디 간다? 천국 가는거고. 만약에 여기 울산바위 낭떠러지에서 설악산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발모가지가 와장창 부서지게 되면 이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 패로 여겨가지고 내가 나는 천국가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절벽에 올라서면 주저주저 하겠지요. 주저주저 할 때 옆에서 내가 내 속에서 어떤 양심의 소리인지 무슨 소리가 있어요. 왜 주저하느냐? 왜 머뭇거리느냐? 너는 성경에 다른 구절 못 봤느냐? 야고보서 못 봤느냐? 호세아 못 봤느냐? 두 마음을 품은 자여 이런 식으로 나오거든요. 두 마음을 품은 자여 정함이 없느니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 이거는 어차피 믿음은 오기야. 모험이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이래가지고 뛰어내릴려고 할 때 누가 그 일을 시키겠어요? 방금 우리가 누가복음 4장에 의하면 누가 시켰습니까? 악마가 시킨 거에요. 인간은 악마의 하수인이니까. 악마는 어디까지 들어간다? 성경말씀까지 말로 인간의 말로 다 집어넣는 거에요. 말로.


뭐 울산바위나 살벌하게 절벽 안 뛰어내려도 나는 십자가를 그냥 집에서 가만 앉아있으면서 십자가를 믿는다. 내가 믿는다는 것이 믿음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한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 일방적인 착각일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를 믿지도 않으면서 십자가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여기면서 십자가 믿을 경우에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같이 잠을 자는데 아내는 휴거받아서 올라가버리고 아침에 딱 일어나니까 옆에 아내가 없네. 어디 갔지? 아무리 봐도 휴거한 거 같애.


그러면 아내가 휴거한 것이 지금 문제가 아니고 본인이 휴거 안 당했다는게 문제 아닙니까? 이 세상에 이만큼 절대적인 낭패는 이보다 더 큰 낭패는 없어요. 왜? 다시 휴거될 어떤 다음 기회라는게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사다리도 없을 뿐더러 한번 이렇게 휴거 안 되면 끝장난 거에요. 볼일 다 본거에요. 뭐 선교단체에다가 뭐 성공회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게.


우리 아들이 의사고 판사고 내가 어떻고 그게 휴거가 안 되어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내가 아는 훌륭한 목사가 몇 명이고 뭐 나는 장로하고도 잘 놀고 잘 놀면 뭐합니까? 다 같이 이 땅에 바닥에 남아있는데. 그동안 무슨 짓 했어요? 결국 교회를 50년 다녀놓고 무슨 짓 했어요? 휴거도 되지를 못한 그 짓을 한 거에요. 휴거도 되지 못할 짓을 한 거에요.


아내가 휴거되면 나도 휴거됩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안되지요. 완전 닭 쫓던 개 꼴이 된 겁니다. 이제 와서 주여 용서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백날 해봐야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문 닫았단 말이에요. 끝났어요. 이게 하나의 소설 같으면 우린 뭐 소설 짜릿하네 반전있네 하겠지만 소설이 아니고 이게 실제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상황.


이게 실제상황인 이유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이런 이야기 끄집어내는 내가 밉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 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지요. 이 세상에서 휴거 된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 뿐이고 나머지는 땅에 그냥 다 남아있어요. 끝났어요. 제자들도 끝났어요.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한지. 가신 님을 쳐다보고 있다고요. 가신 님을. 뭐에요 지금. 우린 놔두고 가버린 거에요. 놔두고. 애 키워본 엄마는 알겠지요. 그렇게 잘 놀다가 엄마가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애가 따라와요. 그냥 좀 놀면 될텐데. 기어이 막 따라와요. 걷지도 못하면서 기어서 따라온다고요. 엄마하고 떨어지기 싫어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 다 방치하고 홀로 휴거된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뭡니까? 황당하지요. 결국 따라가다 따라가다 못 따라간 거에요. 버려진 겁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 짐 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뭐가 없느냐? 구원은 애초에 없었다. 구원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 내가 알려줄께요. 그것이 알고 싶다. 구원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걸 주님이 증명했어요. 주님의 생애를 통해 증명했어요. 아무도 휴거될 자격은 없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악마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악마를 포착해야 악마를 패든지 죽이든지 하는데 언어 자체 바깥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애를 써도 내가 내뱉은 그 말과 내 행동이 합치되지 못한다는 그 미흡 점이 있는 이상은 온전히 그 성경말씀대로 못 지키거든요. 지금 시편 91편 11절 지금 예수님도 사용하지만 누구도 사용해요? 오늘 본문에서. 악마가 사용하지요.


악마는 시편 91편 11절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지죠. 악마가 못 지킨다는 말은 악마에 예속된 모든 인간들은 이 성경 말씀을 못 지키는 거에요. 못 지키니까 말씀을 말씀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는가. 말로 보는 겁니다. 말로 봐야 내가 행함으로 그 내용과 합치시킬려고 애를 쓸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 헛된 희망이지만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잖아요. 희망.


희망을 갖는 것 하고 실제로 휴거되는 것 하고 이거는 하늘과 땅 차이지요. 희망이야 누군들 못 품어요. 희망인들. 다 희망 품지요. 고3 애들 보세요. 지금 수능 얼마 안 남기고 전부 다 희망한다고요. 막 꿈에 400점 만점에 400점 막 꿈꿔요. 깨보면 꿈이에요. 그 날이 12월달 올 때 까지 점점 초조해져요. 자기가 공부한 그대로 나왔으면 좋겠다. 희망이죠.


그런데 내가 공부한 거 하나도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또 걱정이 되고. 합치되지 못해요. 성경말씀 자체가 시험이거든요. 성경말씀 시편 91편 11절에 대해서 악마가 예수님 보고 시험하는 것은 악마 본인도 못 지켰고 악마의 예속된 모든 인간들도 이 말씀 지킨 위인이 아무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악마가 하는 말이 너도 마찬가지지 뭐 너도. 너도 마찬가지야. 악마가 테스트한 테스트가 얼마나 실감나는 테스트인지 그 많은 성경 가운데서 실제로 뛰어내리라고 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은 어떤 전도사는 기도 많이 하다가 뭘 응답받았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 바치는 대목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가지고 “네가 전도사냐?” “네 전도사입니다.” “네가 목회자로서 앞으로 하늘나라를 이 땅까지 확장시키겠는가?” “예, 하늘나라를 확장시키고 악마를 몰아내겠습니다.”


악마가 뭔데. 악마를 봐야 몰아내지 보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큰소리는 다 치는 거에요. “그렇다면 네가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믿음 저 있습니다.” “정말 믿음 있다면 방금 믿음 있다고 이야기했나?” “예, 했습니다.” “두 말 못하지? 너 사나이지?” “사나이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있다면 네 아들 죽여라. 왜? 쫄아? 너 지금 쫄은거야? 지금?” “아닙니다. 쫄다니요?! 지금 당장 기도원 내려가서 아들 잡겠습니다.” 잡았잖아요. 자기 아들만 죽었지. 자기 아들만 죽었어요.


우리는 악마한테 속았다하는 게 아니고 말을 달리 해야 돼요. 악마한테 속은 게 아니고 악마한테 못 벗어났지요. 악마의 권세에서 못 벗어 난거에요. 속은 게 아니에요. 속기는 뭘 속아요. 악마를 알아야 속지요. 악마도 모르면서 자기가 생각한 악마는 자기가 이겨요. 하지만 악마는 인간의 말로 물러나고 말고 할 퇴마사가 아니고요 지금 우선 만나야지 퇴마하고 말고 하는데 만나지도 못해요. 악마를 만나지도 못해요. 만날 방법이 없다니까. 만날 방법이.


악마를 만날 방법이 분명히 성경에는 있다는데 우리는 못 만나고 주님은 만나고 있고. 악마부터 만나야 소문을 내든지 하는데 만나지를 못하는데요. 악마다 싶으면 악마가 언어를 바꾸거든요. 그래서 악마의 세계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정리하면 악마의 세계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고 했습니까? ‘아들이어든’ 이죠.


그러니까 언어가 먼저 언어 안에 당신은 이걸 지킬 경우에만 당신은 실존이 된다. 언어 안에 실존이 되는 거에요. 인간의 실제가 언어 안에 들어있어요. 네가 시편 91편 못 지킨다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다루어왔다. 악마가 나 다루는 방법이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은 악마의 말 바깥으로 못 벗어납니다. 악마의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왜? 악마는 성경말씀 다 알고 있으니까. 성경말씀 언어로 못 벗어나지요. 그걸 성경말씀을 지켜야 악마를 벗어날 수 있는데 못 지키니까 계속 악마한테 추궁을 당하는 겁니다. 지켰어? 지켰어? 네가 아브라함처럼 믿음 있어? 네 아들 잡아봐. 에이 이거 못 하는 것 봐. 못 잡는 것 봐. 어디서 믿음, 너 믿음 없는 거야. 그럼 믿음 없습니다 하면 네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럼 천국 못가지 이런 식으로요. 지속적으로 악마는 우리를 정죄합니다.


아까 그 사도행전 1장에 다시 보게 되면 예수님만 휴거하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둔 거에요. 인간들 속에서 대책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런 대책 없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어요.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말이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말씀, 십자가 죽기까지 해야 되고 자기를 부인 하면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그런데 자기를 부인을 해야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그 나는 또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를 치워도 또 내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흔히 인간들은 악마를 어떤 사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죄처럼. 그러나 악마는 중립적인 중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백군일까? 청군일까? 골라잡을 대상이 아니고 악마는 이미 우리를 덮쳐 있는 덮치고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제자들은 휴거도 못하고 주님이 혼자 휴거해버리고 제자들은 덩그러니 남아있고 이 대책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러면 그 12제자 사랑한다고 한 말은 빈말이 되고 그 다음에 그들이 사도 바울부터 해가지고 12제자의 물론 가룟 유다는 빼놓고 12제자의 구원은 어떤 조치가 되느냐? 그 과연 12제자가 나중에 마지막 때 그 전에 다 휴거됐지만 마지막 때까지 어떤 성도가 있다면 휴거가 된다 안 된다를 결정짓는 근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 안 할 수가 없지요. 우리의 실존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는 이렇게 돼요.


우선 실존이란 말해도 되고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 밖에 없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 인간이 있고 악마에 예속된 인간, 인간이 있고 예수님이 있다면 인간이 인간을 통해서 두 개로 나눠요. 삶과 그리고 죽음. 인간에 의해서 삶과 죽음이 있겠지요. 인간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좀 모호하면 좀 바꾸겠습니다. ‘육’. 육적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사는 것과 죽음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가지고 이걸 같이 보지 않고 이중으로 보게 하는 거에요. 이중으로 보게 해요. 여기서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이라는 공식이 여기서 나옵니다.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인간은 결국 사는 것이 결국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결국 죽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이게 뭐냐 하면은 그 살아 있는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죽음이 들어있어요. 이게 육의 힘이거든요.


인간은 결국 뭐냐 하면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휴거 안 되고 남으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이고 부끄럽다 이것도 성립이 안돼요. 아이고 걱정이다. 이것도 안돼요. 아이고 내 자식 누가 키우지? 이것도 안돼요. 왜냐하면 죽은 자한테는 고민거리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이것이 뭐냐 하면은 첫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둘째 사망이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에게는 뭐냐? 첫 사망이 있으니까 인간에게는 참 낯설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그냥 살다 죽는 그냥 사망이에요. 사망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아담은 뭐가 돼요? 흙이 되지요. 흙은 소멸이죠. 소멸이죠. 언어 속에 있던 인간이 악마한테 빠져나오는 방법은 인간이 죽음으로써 뭐가 되느냐 하면은 흙이 됨으로써 악마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만약에 흙이 아니고 흙이 됐으니까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만약에 살아있다고 여긴다면 어떤 노력을 살아있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이 사람은 악마한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가는 코스를 정하신 거에요. 나 봐라. 나 지금 죽으러 간다. 죽으러 간다. 없어지러 간다. 제자들은 죽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야. 내가 죽는 그것이 악마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거에요.


오늘 동영상 오전 기억하시죠? 속죄. 속죄하는 방법은 우리가 지옥을 가면 돼요. 참 쉽죠 잉? 지금 속죄가 안 되는 문제가 지옥을 어떻게 하면 안 갈려고 하기 때문에 속죄가 안 되는 거에요. 지옥에 들어가면 돼요. 왜? 들어갈 만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거에요. 지금 우리는 아담은 지옥에 마땅히 가야됩니다. 그래서 마땅히 가야되기 때문에 휴거 안 되고 남겨지면 어떠냐. 그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지옥가면 돼요.


가는데 주님께서 대신 지옥 간걸로 해버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 이미 지옥을 다녀온 사람이 돼요. 지옥을 다녀온 사람이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이미 죄 값을 치룬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를 않습니다. 정말 쉬워요. 얼마나 맛있게요 이게. 온 정신을 내가 실존, 살아있는 나. 실존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살아 있는 나.


살아있는 나를 지옥 갈 나를 방향 틀어서 천국 가도록 혼신의 노력을 할려고 하다 보니까 마귀의 테스트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것도 지켜야 되고 저것도 지켜야 되고 예수도 믿어야 되고 십자가도 믿어야 되고 온갖 진짜로 모든 노력을 다 해보는데 하면 할수록 일이 점점 더 진흙 판에서 꼬이는 겁니다. 그걸 꼬이도록 누가 앞장서서 해주느냐 하면은 교회 목사들이 그렇게 해주지요. 일이 꼬이도록.


왜? 본인도 지옥가고 있으니까. 본인이 아무것도 몰라요. 교회 키우는 것만 생각하지. 내 교회 커지는 것만 생각하지 아무것도 몰라요. 자존심이니까. 왜? 내 실존이 살아 있으니까. 이왕 사는 거 복 받고 살고 싶다는 거에요. 그게 본인이 마귀인줄 모르고. 목사님 마귀는 어디 있습니까?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눈에 보여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모든 인간들이 그리고 모든 인간 속에 마귀는 언어로 살아있어요. 언어로. 그리고 실제 죽을 때 그때 마귀가 보이고.


마귀가 우리하고 상대해서 마귀가 자기가 보인다 안 보인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똘마니이기 때문에 우리 상대 안해요. 마귀가 주님하고 상대했던 그 원칙을 악마는 고집합니다. 마귀가 어떤 식으로도 인간이 아무리 시도해도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 해도 꿈쩍도 안하지요. 마귀가 싱긋이 웃습니다. 더 심하게 하면 마귀가 막 뭐라고 해요. 언어를 바꾼다고 해가지고 마귀를 체포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는 전에는 부처를 믿습니다 하다가 말을 바꾸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마귀가 놀라고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사망, 주님께서 이 전체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첫째 사망으로 만들어 버리죠. 그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인간에게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마귀 어디 있느냐 하는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뭐 죽은 자가 죽은 자로 이미 종결되었는데 더 이상 내가 나한테 기여할 것은 완전히 끝났어요. 내가 나 구원하는데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그 다음에 보세요.


자, 제일 쉬운 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휴거했잖아요. 구름타고 위로 올라갔지요. 이끌려서. 그러면 여기 12제자 남아 있잖아요. 그럼 이 사람들 휴거 안 되고 남아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주님의 그 다음의 주님께서 다 계획이 있었던 거에요. 뭐냐 하면은 이들이 지금 12제자가 악마층을 못 벗어나고 있지요. 악마층을. 악마를 못 벗어나고 율법을 못 벗어나고 사람을 못 벗어나고 죄를 못 벗어나고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사 하나님 우편에 계셔가지고 이들에게 뭘 보내느냐 하면은 10일 뒤에 성령을 보내버려요. 성령을. 성령을 보낸다는 말은 작살을 보내는 겁니다. 작살이라는 뜻은 그냥 꽂히고 쏘고 쏜 쪽으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못 벗어나도록 쏜 쪽으로 이끌려오는 그런 관계. 이게 작살 아닙니까. 고래에 딱 꽂히면 고래가 그 배로 어쩔 수 없이 끌려오듯이 어쩔 수가 없어요. 성령이 릴을 막 돌려버리니까.


돌려버리면 고래가 원래 어디서 삽니까? 육지에 삽니까? 배 위에 삽니까? 아니면 바다에 살아요? 살던 풍습이 뭐냐? 바다에 적응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잡아당기니까 아프긴 아프고 바다를 떠나거든요. 바다를 떠나니까 고래가 아주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아 나는 저 선원들 먹는 밥 못 먹는데 이런 식으로. 잡아당기니까. 강제로 끌어당겨요 강제로.


내 돈 주고 내가 맛있는 것 사먹는 것은 애굽에서 충분했잖아요. 애굽에서.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어디로 보냅니까? 만나를 보낸다고요. 만나는 주께서 배급 끊어지면 죽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알아서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은 광야에서는 전혀 먹히지를 않는 삶의 방식이에요.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살겠다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광야 세계거든요.


성령을 보내니까 성령을 보냈다는 말은 성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일대기가 다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 사랑이 다 들어있다고요. 다 들어있으니까 예수님이 이 악마를 예수님이 이 율법을 예수님이 죄를 예수님이 이 저주를 예수님이 심판을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그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꽂혀버립니다. 꽂혀버린다고요. 그 능력이. 그 능력을 무슨 능력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사랑의 능력’. 사랑의 능력입니다.


예전에 설교 시간에 오후 설교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아가에 보면 오른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안아버려요. 그래서 제가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표현하기를. 비닐로 랩 싸는 거 있잖아요. 숨도 못 쉬게 안아버려요. 빠져나갈려고 해도 못 빠져나가죠. 강력한 손으로 안아 버리니까. 일방적인 사랑이죠.


그 오빠들은 그 술람미 여인이 거무튀튀하고 과수원에서 일해가지고 피부도 안 좋고 민낯이고 기초화장도 안하고 가슴도 작고 해가지고 누가 너를 색시로 받아주겠냐 하는데 신랑은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꼭 조여오는 거에요. 조여오는 거에요. 갈수록 점점 더. 숨도 못 쉬겠어 아주. 진짜 숨 못 쉬게. 절대로 내가 너를 놔주지 않으리라. 이게 사랑의 힘이에요. 이걸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이야기하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십자가란 그 강가에서 건너올 수 없었는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순종하니까 아버지가 준비한건 사랑이거든요. 사랑으로 훌쩍 뛰어서 사흘만에 뭐로 했습니까? 부활한 거에요.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 ‘첫 열매’.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은 요단강에서 비둘기처럼 뭘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지요 ‘성령’. 그 성령이 예수님이 아버지 자리에서 마치 아들이 있는 자리인 것처럼 줘버리는 거에요. 주는 거에요.


내 이름을 주의 이름 안에 내 이름을 무슨 이름으로? 죽은 자 이름으로 바꿔버려요. 죽은 자 이름. 죽은 자 이름으로 바꿔놓고 아까 죽은 자 이름, 같은 말로 죽은 자 또는 이미 죽어버린 자. 이걸 오늘 제목으로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유골단지. 좀 섬뜩하지만 어차피 오늘 악마 이야기니까 ‘유골단지’. 내 몸이 나의 유골단지에요.


나의 안에는 신장, 심장 뭐 이런게 있지만 사실은 먼지가 들어있어요. 먼지. 먼지가 들어있어요. 나는 유골단지. 애도해도 내가 나보고 애도하는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데 내가 나보고 애도하는데 애도할 필요 없어요. 기뻐해야 돼요. 첫째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죽으실 때에 히브리서 보면 성령으로 죽었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는 코스 있잖아요. 코스. 그 코스를 그대로 밟게 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접시를 들고 뷔페에 가가지고 제일 먼저 김밥부터 먹고 김밥 안 먹는 사람 있지만 김밥 두개하고 그 다음에 탕수육도 좀 하고 한다면 이게 성령이 역사한다면 그 뒤에 가는 12제자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김밥 두 개 덜고 자기 먹고 싶은 거 못 먹어요. 해야 되고 성령의 작살 꽂혀가지고 그 가는 코스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성령 오게 되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그 코스를 필히 밟아야 한다면 바로 그 아버지의 오른편에 있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양보한 거죠. 모든 걸 이루셨으니까.


언약의 주가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줘버리면 이제부터는 주님이 주의 자존심을 걸고 오른팔, 내가 십자가에서 악마를 통과한 것이 이게 사실이었다.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아요. 그래서 주의 백성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믿음 좋다가 아니라 아 주께서 이 코스로 가셨구나. 주께서 이 코스로. 주께서 이 길로 가셨구나. 우리야 뭐 죄 있어서 죽는게 마땅한데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면서 죽는 코스로 방향을 틀었구나.


악마는 죽일려고 했지만 악마가 죽일려고 하는 그것이 악마가 실수하고 있는 거에요. 악마는 예수님을 안 죽였어야 되는데 악마조차도 주님의 종이 되가지고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악마야 나를 죽여라. 가룟 유다야 너 할 일 해야지. 날 팔아먹어야지. 지금까지는 악마한테 권세가 있었는데 이제는 악마의 권세마저 예수님의 권세가 악마의 권세를 조정하면서 기어이 악마를 통해서 자기가 죽게 만들어버려요. 그래야 통과가 되니까. 탈출이 되니까요. 그래야 구멍이 생기니까. 세상에 악마마저 통과한 사람이 여기 있다가 되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 구원받았어요? 라고 하게 되면 성도의 이야기는 나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악마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주님 말고 너 말이야 너. 너. 나는 이미 죽은 몸이고. 나는 이미 죽었고 움직이는 유골단지고 주께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답답해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 이렇게 하거든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지.


그거 믿을려면 내가 또 상정되야 돼요. 내가 또 설정되야 돼요. 죽은 놈이 뭘 믿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은 놈 건드려봤자 움직이지도 않는데 뭘 믿어요. 내가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라고 할 때 그 이야기가 죽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 하신 일만 이야기해요. 하신 일만. 예수님 빼놓고 모두 다 죄인입니다.


따라서 그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도 본인이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나온 말이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 내가 사도된 것도 내 행함이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어떤 조건하에? 내가 이미 죽었다는 조건하에서 자꾸 뭔가 말이 나오죠. 그때는 말이 아니고 그게 뭐냐 하면은 이미 악마의 말의 세계에서 벗어난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난데없이 기적적으로 말이 나와야 될 그 현장에 말씀 완성이 나와버리는 거에요. 말씀 완성이. ‘다 이루었다’가 나와버려요.


예를 들면 악마가 여러분들한테 와가지고 너 믿음 있나? 네가 믿음 있으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여든 시편 91편 11절 있잖아. 그거 한번 해봐라.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12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건 말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말씀은 주님만이 할 수 있어요. 아버지만 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다시 말해서 네가 시험치는 것은 나는 더 이상 해당사항이 없다. 네가 어떤 문제를 내던지간에 내가 네 시험에 응할 어떤 권한도 책임도 필요도 필요치 않다. 이미 끝난 사항이다. 이미 합격했는데 무슨 시험쳐요. 합격했는데.


우리보고 시험치라고 하면 0점 내면 돼요. 믿음 있습니까? 없습니다. 소망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옥 갑니까? 예. 어떤 거라도 마음 편안하게. 편하게. 헌금했습니까? 한 번도 안했습니다. 교회 나온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몇 번 봤습니까? 한 번도 안 봤습니다. 그 뭐 아무 말 잔치죠. 아무 말하면 돼요. 아무 말이나. 애 교육 잘 시킵니까? 자기 맘대로 삽니다. 만화책 보고 있고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엄마의 도리. 저 엄마 아닙니다. 죽은 자입니다. 한 때 엄마였는데 이미 죽었어요.


오늘 이걸 통해서 오늘 누가복음 4장을 통해서 어떤 인간도 지금 악마가 언어를 통해서 말을 통해서 시험문제를 냈을 때 악마가 있는 줄 몰랐는데 악마의 말은 적혀 있잖아요. 그러니까 악마가 있긴 있어요. 악마가 말을 했기 때문에. 이 악마가 한 말에 대해서 예수님 빼놓고 이걸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악마도 얍삽하게요 시편 한번 봅시다.


시편 91편 12절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 뒤에도 13절 내가 사자와 독사를 밟아도. 이 이야기는 왜 안 해?! 악마가. 그런데 악마가 여기까지는 이야기할 거에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악마가 이걸 말해도 악마고 뭘 해도 악마 아니고. 그러니까 악마가 한 말에 11절 이야기해도 12절 13절 다 악마가 다 포함해서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네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면 성경에 보면 지켜준다고 했잖아. 한번 보자. 지켜주는지 안 지켜주는지 말만 하지 말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일단은 뛰어내려봐. 일단 한번 보자. 뛰어내리고 진짜 천사가 와서 딱 지켜주는지 한번 보자. 확실한 게 좀 낫지 아니하냐. 과학적으로 확실한 것. 하여튼 그놈의 과학이 문제라.


그럴 땐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하는 체험은 모든 체험은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손가락질 하는 체험밖에 없어. 악마야 네가 하는 것은 너는 살아야한다는 체험이지만 주님의 말씀이 주는 체험은 너는 이미 죽었어. 죽었기 때문에 네 주장과 네 의도는 아무 소용없어. 아무 짝도 실효성 없어. 그쪽으로 결과를 알려주는 그러한 체험. 그게 무슨 체험입니까?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체험이에요. 부인하는 체험이거든요. 부인한다고 울고불고 절에 가서 중들 하는 것처럼 고생하고 자학하고 이게 아니라 그냥 할 것 다 하면서 일상 속에서 매일같이 우리는 자아부인이 되게 하는 거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내가 또 체험할려고 하지 마세요. 죽은 놈이 무슨 체험을 해요. 성령께서 왔다가셨는지 올라가시다가 삐져서 안 갔는지 성령 다녀가셨는지 안 다녀가셨는지 내가 체험하고 싶다. 그 체험을 해버리면 결국 우리에게는 뭐가 남느냐 하면은 결국 우리는 기억으로 살아가요. 기억으로. 쓸데없는 기억이에요.


사람은 기억은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케 합니다. 왜 기억이 혼란케 하느냐 하면은 기억은 뭐가 있느냐 하면은 기억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역사에서 기억이 나와요. 기억을 한다는 것은 지난날 지난 역사를 못 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역사를 벗어나거든요. 그런데 기억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역사를 쥐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쥐고 있으면 이 기억이 나를 괴롭히고 나로 하여금 주님의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육적인 일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4장 10절 (유골단지) 201020b-이근호 목사



제가 첫째 사망 이야기하고 둘째 사망과 둘째 부활에 대해서 언급을 안 했거든요. 첫째 부활도 언급을 안 했고. 인간의 그 삶도 두 개고 죽음도 두 개. 이 이중성, 이중성으로 악마를 잡습니다. 악마는 안 보여요 인간에게. 찾아도 악마가 여기 있다고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보이지 않습니다. 악마를 포착하는 방법은 언어가 못 따라오는 그 쪽에서 악마를 포착해야 돼요. 언어가 못 따라오는데. 그게 바로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이게 못 따라와요.


왜 십자가냐 하면은 십자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거든요. 현재 역사적 실제적 사건이잖아요. 실제적 사건은 전부 다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악마가 다 따라합니다. 땅의 세력이. 십자가 비슷한 십자가 죽음 이런 거 다 한다고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도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역할 다 했어요. 십자가 같이 졌는데 지옥 간 사람. 그게 바로 십자가 지기까지 했잖아요. 다 했다 이 말이죠.


하지만 언어가 여기까지는 오고 그 다음에 넘어서지를 못해요. 부활에까지는 넘어서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부활을 둘로 나눠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언급해서 이 사망 자체를 뭐냐? 악마로 봐요. 사망자체를 악마로 본다고요. 공격하는 거에요. 공격. 부활을 통해서 사망을 공격하는 거에요.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한바탕 붙자. 우리 한바탕 붙을까? 사망아.


우리 성도를 딱 가운데 두고 사망아 이 성도를 한번 공격해봐. 네가 이 사망 네가 이 사람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지. 그럼 성도한테는 사망이 못하잖아요. 왜냐하면 이미 그걸 통과한 능력이기 때문에 못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첫째 부활이에요. 성도가 살아있는 게 첫째 부활이란 말이죠. 인간은 자체가 이중성이죠. ‘이중성’. 이중성입니다. 인간이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악마와 같이 붙어있는 이중성. 그러나 성도는 인간이 있으면서 성령이 함께 붙어있는 이중성.


예수님도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이면서 육이 되신 이중성. 그 이중성에 대해서는 언어가 이중성에서는 건너올 수가 없어요. 이 이중성에 대해서는 언어가 합치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언어란 그 최종 의미는 단 하나로 남아야 그게 언어답기 때문에. 언어, 말답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물이잖아요. 인간 세상에서 이걸 물이라고 하지요. 주님의 세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해요. 주님이 주신 물이라고 이중성으로 된다고요.


그러면 주님이 주신 물이라고 만약에 제가 어떤 사람한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뭘 찾느냐 하면은 물에다가 주님이 왼쪽에 있나? 오른쪽에 있나? 이걸 찾는다고요. 왜냐하면 주님이 따로 또 단일 의미이여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떻게 따로따로의 의미가 한 단어에 뭉치는 것은 악마의 세계, 인간의 세계, 언어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 했다 이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이미 십자가 건너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게 공격이 무기로서 충분한 겁니다. 쏘아댈 수가 있어요 이게.


교회가면 너 오늘 교회 왔구나. 단일 의미죠. 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중 의미잖아요. 그러니까 이중 의미라고 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왔어. 그냥 왔어. 그냥 왔어. 자세히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주께서 보내서 왔어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하지만 귀찮으니까 그냥 왔어. 밥 먹었어? 그냥 먹었어. 주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그런 거 안돼. 너무 길어요. 그냥 먹었는데 맛있게 먹었어.


맛있게 먹었어? 주께서 맛있게 해주셨어. 귀찮아. 그냥 맛있었어. 그냥 맛있었어. 주께서 하게 하셨어. 도대체 너 등 뒤에 주님이 계셔? 어디 있는데 너 입맛에 맞게 했지? 못 찾아. 나도 못 찾아. 그냥 계실 뿐이지요. 이게 연합 관계거든요. 이게 세례 관계고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는 거에요.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다니까요. 같이 사는데 무슨 믿음이 있어요.


아버님, 아버님 맞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지금? 집에 아버지와 같이 살면 아버지 맞습니까? 이거는 너 술 좀 과했구나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미쳤구나 이렇게 되지. 아버지와 같이 사는데 뭐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지 믿습니다! 이게 또 돈 궁하구나. 뭐 대출 얼마 필요한데? 대출. 아버님 사랑합니다. 이게 또 돈 떨어졌구나 이거 또. 이렇게 된단 말이죠.


둘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악마가 악마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한번 보자. 악마가 악마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힌트를 드렸습니다. 악마가 다루는 방법은 바로 기억, 인간의 기억, 다른 말로 하면 역사성. 역사성으로 인간들은 악마가 악마를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악마를 만들어버려요. 적그리스도니까 성경에 나왔지요. 말이잖아요. 문자 아닙니까. 적그리스도를 누가 만든다? 악마가 적그리스도를 만들어내요. 내가 만든 적그리스도 조심하라고. 역사적으로.


항상 말씀이 아니고 말씀은 이중성이고 이거는 악마는 단일성이에요. 그러면 내가 한번 적어 볼께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적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나에게 유리하지요? 그렇지요? 라고 묻는데 앞에 뭐가 있습니까? 내가, 단일 ‘나’가 등장한다고요. 단일 내가. 이미 우리는 이중성에서 이미 죽은 자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삽니까? 그리스도가 살잖아요. 이중성이잖아요. 성도는 다 이중성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나’가 등장해서 나에게 유리합니까? 이익입니까? 아마 도움 될 걸요 이렇게 되어 버리면 여기 ‘나’는 단일적 ‘나’에요. 인간들이 궁금하니까 악마가 여기에 충족 안 시킬 수가 없지요. 그래 기다려봐. 내가 적그리스도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그 적그리스도 네가 공격하고 피해버리면 너 구원받아라고 악마가 그렇게 설교하게 되지요. 악마의 역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역사를 이 시간에 공개합니다.


기원전 445년 예루살렘 중건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요. 이것이 7이레, 7곱하기7. 49년이죠. 그 다음에 그렇게 중건하라고 명령한 후에 성벽이 중건되었습니다. 이건 성이 아니고 성벽 중건입니다. 성벽 중건되고 62이레 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앞에 A.D 32년, 이 앞에 B.C 4년 때 예수님께서 초림. 예수님이 태어나요.


그 다음에 여기서 이방인의 구원, 이걸 가지고 이방인의 때 또는 다른 말로 교회시대. 계시록 2장 3절에서 6절. 그 다음에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난 뒤에 용의 공중 군대가 등장하고 여기 지상 군대가 합세하고 여기 미카엘이 미카엘 군대가 여기서 공격을 해대고 여기서 아직 남아 있던 1이레 기간 동안에 두 증인,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짐승, 두 짐승이 여기 마흔두달 이거는 1260일하고 기간이 비슷해요. 해놓고 여기 1이레 용 + 짐승이 여기 지시를 해서 하는데 이게 계시록 13장 2절.


그리고 여기 예수님 재림, 예수님 재림하고 여기서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 9장 1절에서 11절에 아마겟돈 전쟁하고 그 다음 여기 예수님 재림하니까 천년왕국. 천년왕국 하고 난 뒤에 마지막의 최고의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 이렇게 악마가 스케줄을 내놨어요. 왜 이렇게 스케줄을 내 놓았느냐 하면은 다니엘에 보면 다니엘 1장과 2장에서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그다음에 3장에서 7장까지는 아람어로 되어 있고 8장에서 12장까지는 히브리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여기 히브리인에 대한 히브리인으로 예언했다는 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위한 다니엘의 계시니까 여기 칠십이레 나오니까 여기 모든 역사를 유대인 중심으로서 하다보니까 칠십이레 중에서 여기 7있고 62이레 있고 나머지 한 이레는 이방인의 때는 훌쩍 뛰어 넘어서 미흡된 1이레는 여기서 채우면 요한계시록 딱 맞아 떨어진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은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은 제가 그 청도에서 한 대구특강에 보면 나와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이다? 아니다? 이다 했습니까? 아니다 했어요? 아니다했지요. ‘아니다’라고 했거든요. 대구강의에서 구약의 성신에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성전을 할 때 그 성전은 나타나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다면 성령이 만든 성전은 나타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신이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십자가 오기 전까지는 전부 다 나타난 거에요.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는 육과 영의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종말 들어가버리면 인간 자체로써 파악될 수 있는 그러한 복음은 어디에도 없어요. 절대 인간으로 파악되지 못해요. 그럼 인간이 뭔지 알아야 돼요. 인간은 구약을 통해서 뭐냐 하면은 육적이고 육적이란 말은 아까 ‘기억’ 했지요. 역사적이에요. 모든 성경 말을 역사적으로 푸는 거에요. 역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풀어야 납득이 돼요. 납득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고요.


이렇게 쭉 해가지고 여기 들어가는 것은 전부 다 성경구절 다 집어넣는데 아까 제가 첫째시간에 했잖아요. 마귀가 뭘 사용한다? 언어를 사용하지요. 성경이 언어로 되어 있잖아요. 원래 성경은 이중성으로 말씀으로 되어 있거든요.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은 말로 되어 있다고 보는 거에요. 왜?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죽은 자는 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죽은 자는 죽으면 되고요 죽은 자는 지옥가면 돼요.


우리가 지옥을 못가는 이유가 누가 먼저 대신 다 치뤘다는 소식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를 해줬기 때문에 작살에 꽂혔기 때문에 아 지옥 한번 가보는 건데 아~~지옥도 못 가보고. 형편이 이런 형편이 된 거에요. 우리는 이미 지옥을 다녀온 거에요. 심판을 받은 거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 받은 거에요. 그걸 내가 알았습니까? 성령이 와서 알았어요? 성령이 와서 이미 알게 한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했거든요. 결정적인 순간은 없어요. 결정적으로 다 끝난 것을 확인하는 순간만 있을 뿐이에요.


악마가 하는 이 짓거리, 전부 다 바탕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살아있는 나를 기어이 내가 지식으로 습득해서 나를 살려내야 되겠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교회가 그걸 할 일이에요. 교회가 그게 할 일이라고 우기는 거에요. 목사가 할 일이. 목사는 외치는 것이지 꼬시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삼성화재 영업사원들 보고 하라고 하세요 그거는. 다단계보고 하라고. 꼬시고 사람 모으고 하는 게 아니고 외치는 거에요.


사도 바울의 모든 설교나 편지는 외치는 거에요.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죽는 게 소원이다.” 외쳐버린 거에요. 그런데 자기처럼 성령 받은 사람 와가지고 사도 바울만 죽고싶어요? 나도 죽고싶어요 등장하니까 이게 굉장히 신기한 거에요. 굉장히 신기하고 이상하죠. 그게 빌립보교회에요. 교회는 신기하고 이상해야 돼요. 미쳐도 혼자 미치지 왜 같이 미치지? 이상하고 낯설어야 돼요. 어떻게 이 말을 다 알아들어? 이게 무슨 조화냐. 어떻게 이런 말을 다 알아들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스스로 살려고 하는게 인간인데 상식인데. 어떻게 상식에 없는 상식을 이걸 부수는 그런 이야기를 그걸 어떻게 알아듣냐? 두렵고 겁난다. 왜? 주님 살아계시니까. 주님의 솜씨거든요. 그 사람의 인품이 아니고 인품 같으면 뭐가 인품이 있겠어요. 인품 없지요. 여러분 007 영화같은 거 보면 결국 007이 이기는걸 알면서도 도중에 007 잡혀가지고 곧 죽을 것 같은 그런 장면이 한두 장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느 007에 보니까 속에 잡혔는데 나무 묶는데 007이 잡혀가지고 누워있는데 저기 전기톱이 위이잉~~하면서 들어오는 거에요. 나중에 좀 있으면 이제 007이 두 조각 날거에요. 옆에서 막 안 볼래 안 볼래. 어떤 007 보게 되면 007이 화장터에 들어갔어요. 위에는 관을 잠궈 버리고 관 자체가 뜨거운 그 가스불에 들어 갔으니까 불이 확 타오르면서 관속에 연기 들어와요.


아무리 천하의 007이라도 저거는 못 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고 안 볼란다 하면서 보니까 그 불을 누가 껐어. 끈 이유가 다이아몬드가 가짜였어요. 진짜는 어디 있는가 끄집어내기 위해서 나쁜 인간들이 꺼내줬어요. 진작 이야기하지. 괜히 속 타게. 초반에 중반도 안 넘어갔는데 벌써 007 죽는 줄 알았지요. 007은 살려고 하는데 기어이 역경 이기고 살아남았잖아요.


성도는 그게 아니고 애초부터 죽었어요. 천국 가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이거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지옥 가는 게 당연하지 천국 가는 것이 이게 왠 소리냐. 뭐 이런 소리가 다 있어. 그래서 기쁜 소식 아닙니까. 뭐라는 거야? 당신 지금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뭐라고 했어? 휘장이 찢어지고. 왜 그게 찢어지지요? 갈 수 없는 천국이 보이고 거기에서 주님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성령이 와서 꽂혀버리면 예수님 코스가 휴거잖아요. 예수님 코스대로 휴거당하는 거에요.


휴거되고 싶은게 아니고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 코스만 고집해요. 다른 코스는 없어요. 주님 코스대로 구름타고 하늘 올라가는 거에요. 그게 그런 소리가 기쁨으로 들릴 때 이미 성령 받은 거에요.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어떻게 조치하는지를 이제는 기대를 하면 돼요. 주께서 어떻게 조치해서 주의 가신 길로 십자가 길로 몰아세울지. 십자가 길을 갈 때 주님께서 참 억울하고 서러운 일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크게 좌절하지 않았어요. 기도하고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지요.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 기도가 우리한테도 계속 수시로 일어납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미 죽은 놈인데 데쳐 먹으나 튀겨 먹으나 마음대로 하세요. 주의 뜻대로 하시는 줄로 제가 이렇게 인정되네요. 믿어지는 거죠 그냥. 모든 하루하루의 삶이.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 시간 또한 악마가 악마 자신을 어떤 식으로 조작해내는지를 다니엘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다니엘 8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사용하는 게 유대인들 했다 이 말이거든요. 유대인들 역사가 나온다는 거에요. 역사. 역사라는 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로 풀어진다는 말은 우리가 역사적 감각을 갖고 있는 우리가 시간적 감각을 갖고 있는 우리가 이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가 드디어 접속점이 있다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환상 후 벨사살 왕 제삼년에 다시 한 환상이 나타나니라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가에 두 뿔 가진 숫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다 길었으며 그 중 한 뿔은 다른 뿔보다 길었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7장 봅시다 7장.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다니엘이 그의 침상에서 꿈을 꾸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짐승 넷이 나왔지요. 넷이. 그러니까 짐승이 나온다고요.


짐승이 나오니까 짐승은 뭡니까? 악마지요. 악마가 어느 속에서 나타난다? 역사 속에 등장하니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역사 속에 나타난 짐승을 우리는 언제든지 해석해낼 수 있고 포착해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으로 성경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 거에요. 인간들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여러분 예수님 모르면요 악마 몰라요. 예수님 역사적으로 오셨지요.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지요. 예수님 못 알아보면서 악마는 알아본다? 말이야 막걸리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예수님은 못 알아보는데 예수님의 원수는 알아본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원수에요. 그 생각 자체가. 호세아 14장 9절에 보면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자빠진다고 했어요. 넘어진다고 했어요. 도에 대해서.


짐승이 나왔다 이 말이죠. 짐승이 딱 나오니까 “큰 짐승이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곰 같은 짐승 그 다음에 여기는 처음에는 무슨 짐승? 사자 같은 짐승. 세 번째는 표범 같은 짐승 네 번째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네 번째 짐승. 짐승이 이렇게 쭉 나와요.


특히 곰 같은 짐승 같은 경우 이빨 사이에 세 개의 갈빗대가 있는데 세 개의 갈빗대가 뭐냐? 역사적으로 볼 때 갈빗대는 뭐 메대와 이집트 그리고 바벨론이다. 그런 주장도 해요. 역사적으로. 갈빗대 세 개가 있으니까. LA갈비, 한국갈비 그런거 아니고. 강대국 세 개 이빨 물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짐승이 첫째는 바벨론, 그 다음에 메대 바사 세 번째는 헬라 마케도니아인데 쉽게 해서 그리스, 네 번째가 로마잖아요.


이게 누가 받은 역사냐 하면은 이게 바로 느부갓네살이 봤던 짐승 그 시대에는 누가 봤다? 다니엘이 본거에요. 다니엘이. 다니엘이 본거에요. 그렇다면 이 다니엘이 생각했던 이 바벨론, 메대 바사, 그리스 나라 그 다음에 로마. 로마라는 말은 안 나왔지만 그냥 열왕국과 열뿔이라고 했을 때 다니엘 입장에서만 이게 의미 있게 보여요. 다니엘 입장에서만. 그것도 이중성으로.


그럼 다니엘서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인자라고 해요 ‘인자’. 다니엘을 인자라고 했다고요. 에스겔도 인자라고 했지요. 다윗도 인자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인자, ‘인자’라고 불렀다고요. 다니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인자야. 인자야. 그러면 이 인자라는 그 말이 인자라는 말이 되어 버리면 과거에 한때 있었던 역사 속의 인물 다니엘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다니엘 인자가 말씀이 되어버리면 누가 되느냐 하면은 다니엘 속에, 이중성. 다니엘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들어있는 거에요. 죽은 다니엘을 아까 무슨 단지라고 했습니까? 유골단지를 삼고 그 안에 누가?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었던 거에요. 예수님이 들어 있었던 거에요. 이중성이죠. 오늘날 우리처럼. 주의 영이 들어있고 우리는 유골단지가 되죠. 유골단지 제목 괜찮네. 유골단지로 확정짓자. 유골단지로 하는 이중성이란 말이죠.


만약에 사람이 유골단지 아니고 내가 살았다고 하면 이건 누굴 가로막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해석, 내 안에 그리스도의 해석을 악마에 속한 내가 가로막는 셈이 돼요. 이게 엎어자빠지는거에요. 전부 다. 제대로 해석을 못하고. 여러분들이 언제 근심되고 언제 걱정되고 고민되고 울화통 터지고 억울하고 언제 그렇던가요? 예수님 생각할 때 십자가 생각할 때 그렇던가요? 본인 생각할 때 그렇던가요? 본인 생각이죠.


본인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지난 시간에 소유된 것 속에 동그라미, 소유된 것을 바운더리 쳐서 ‘나’라고 했지요. ‘나’. 오늘 뭡니까? 인간은 언어 속에서 이 악마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뭘 가진다? 악마가 다루는 그냥 실제적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악마한테 뭐냐? 쫓기는 겁니다. 제대로 왜 못해? 신자답지 못해? 성경말씀 두꺼운데 너 하나라도 지킨 거 있어? 이런 식으로 자꾸 추궁당하고 쫓기고.


그러면 우리의 실존은 뭐냐? 벌벌 떠는 거에요. 벌벌 떠는 거에요. 실존이라는 말 쉽게 하면 나의 나 다움이고 그냥 ‘나’라고 하는 것은 소유에서 나온 것이 ‘나’고요. 그래서 걱정된다면 결국은 뭡니까? 뭐가 깨지는 거에요? 내 소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다 와장창 깨질 때 걱정이 되는 거에요. 아프다. 갑자기 말씀이 은혜가 안 되고 갑자기 걱정 되가지고 집에 가자.


왜냐하면은 갑자기 내가 되어버리면 나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살아난 자가 되고 살아난 자는 뭐냐? 실존이 되고 그 다음에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 기억 속에 어제까지 내 아들은 안 아팠다가 기억이에요. 안 아팠는데 오늘 아프니까 빨리 뭐로 회복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안 아픈 그 시절로 회복되어야 돼요. 이게 뭐냐? 어제와 연결된 역사입니다.


이 역사의 사는 버릇이 마지막에 주님 재림하실 때 재림 아마겟돈 할 때 피하고 666코드 피해가지고 재림할 때 내가 휴거되가지고 살아남기를 원할 때 그 있는 고리는 무슨 고리입니까? 역사고리죠. 역사고리잖아요. 그럼 이 역사고리는 무슨 고리가 있느냐 하면은 성령의 고리가 아니에요. 성령의 연결고리가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이 땅에 이 땅이라는 조건에 성령은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거에요. 저주받게 하는 겁니다.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는 거에요. 그러나 역사는 뭡니까? 나를 안 다치는 거에요. 멀쩡하게 갈수록 더 멀쩡하게 만드는 겁니다. 근사하게 만들고 남 앞에 자랑거리가 있게 나 봐 이정도야. 이러고 싶은 거에요.


다니엘은 인자기 때문에 인자로 봤을 때 인자는 다니엘 9장에 보면 나오지만 7장에도 나오죠. 인자는 이미 선제하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인자가 나와요. 그럼 이거는 선제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니엘서는 시간이 아니고 완료된 겁니다. 완료된 것에서 나와서 여기서 칠년이 아니고 이레란 말은 뭐냐 하면은 이중성, 시간의 이중성. 7년 곱하기 시간의 초시간성, 이레. 완료된 7년. 완료된 7년이 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제 주장은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그 논문을 십자가마을에 보면 이렇게 신앙의 샘물인가 올려놨어요. 무지 무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설교 취지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완성된 시간으로 봤을 때 그 70이레의 의미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바로 이렇게 돼요.


①이 인류 전체를 7이레에 깔아요. 인류 전체를. ②그 다음에 그 위에다가 시루떡처럼 60이레를 깔아요. ③그 위에 뭐냐 1이레를 깔아요. 그 1이레에 무슨 사건이 일어나느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역사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는 일이 벌어지고 이걸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심으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 완성에 도달했다는 예수님의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예수님의 자기의 성과를 다니엘 속에 담아서 미리 그 시대에 복음으로 알려준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성과.


그러니 다니엘을 달달 외우고 아람어 다하고 히브리어 다 해도 나와봤자 결국 역사밖에 안 나오죠. 다니엘 7장 13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인자 같은 분이 있지요. 바로 다니엘의 이중성. 다니엘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신 그 분이 또한 인자. 장차 오실 인자.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미리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거에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거죠. 미래가 벌써 와버렸어요. 다니엘 속에 미래가 와버린 거에요. 장래의 모든 완성이 지금 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완료가 우리 안에 같이 지금 실려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첫째 사망에 의해서 유골단지가 된거죠.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담겨있어요? 둘째 부활이 담겨 있어요. 그 영원한 첫째 부활이 담겨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이중성이 같이 있는 거에요. 죽었는데 분명히 살았고 살았는데 현재적 형상은 죽은 모습으로 살고. 점점 더 갈수록 늙고 병들고 아프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것은 없다. 왜? 이미 죽은 사람 붙들고 책임지라고 돈 내라고 할 필요 없잖습니까. 죽은 사람 붙들고. 이미 죽었는데 기도 똑바로 왜 안 해. 새벽기도 왜 안 해 붙들고 하지 않는단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했는데 기도하게 되면 내가 기도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죽은 내 속에서 기도케 하신 거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 마지막에 뭘 붙였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는 거죠. 그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나는 어디가 있습니까? 죽었으니까 예수 이름이죠. 나를 죽이게 한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에요. 기도 내용에 대해서 제가 언젠가 기도 내용에 대해서 그 기도 내용과 당신의 목숨과 바꿀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도 엉터리입니다.


우리 애가 안 아프게 하옵소서. 그럼 애 안 아프게 해줄테니까 네 목숨 바칠래? 미쳤습니까? 나도 나 살고 봅시다. 그럼 그 기도는 그냥 지금 재롱이에요 재롱. 장난치고 있는 거에요. 오히려 주님을 향하여 테스트하고 있는 거에요. 마귀의 주특기가 뭡니까? 맨날 테스트.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누굴 테스트한다는 것은 너는 나한테 테스트받기는 받되 너는 나한테 테스트하지 마. 나는 너한테 테스트 당할 위인이 아니야 이런 전제를 깔고 하는 거에요. 이런 전제를. 아이고 참 여러분들이 유골단지로 빨리 살아가셔야 되는데.


자, 적그리스도가 뭐냐? 요한1서 2장 18절 한번 봅시다. 요한1서 2장 18절. 이놈의 적그리스도. 이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진짜 마음 졸이고 살았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 믿고 복음 알고 기쁘다 해도 그놈의 적그리스도 안 왔는데 벌써 네가 긴장을 푸냐 이 한마디에 음메 기죽어. 이제는 또 적그리스도 찾아다닌다고 난리야. 교황인가? 당회장인가? 너야 너. 찾는 너. 요한1서 2장 18절 봅시다. 얼마나 적그리스도 때문에 쫄았습니까.


여기 보면 2장 18절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여기 뭡니까. 많은. 한둘이 아니라 적그리스도 많다는 거에요. 많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완성 안에서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반복되는 거에요. 왜? 왜 반복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로서 끝나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의 그 바퀴라면 이 바퀴가 계속 굴러가면서 역사가 펼쳐지거든요. 펼쳐지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반복해야 거기서 자기 백성이 생산돼요. 생산된다고요. 주님이 하신 일을.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적그리스도 있었는데 한 바퀴 돌면 또 적그리스도 또 생기죠. 또 돌면 적그리스도 또 생기겠죠. 네가 살던 네 시대의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에요. 네가 살던 네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뭐냐? 적그리스도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 24장 15절 한번 보겠습니다. 자꾸 성경구절 찾으니까 일반 교회 성경공부 하는거 같애. 그런 느낌 안 듭니까? 들지요? 왜 그런 느낌 드느냐 하면은 목사들이 시간 때울려고 시간 때우기 괜찮은 방법이거든요. 안 들키고. 시간도 잘 간다.


24장 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여기에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뭐 있어야 됩니까? 무슨 곳이 있어야 돼요? 거룩한 곳이 있어야 돼요. 거룩한 곳. 그러니까 이게 말 같으면 역사적 찾겠지만 이게 말씀이라면 우리 집 부엌일수도 있고 우리 직장일수도 있고 우리 삶의 현장일수도 있고 하루에 적그리스도가 둘이 나올지 셋이 나올지 그거는 우리 소관 아니지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요.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중성에 대해서 단일성으로 의미를 단일성 의미로 반박하는 그 힘, 그 세력 그게 적그리스도에요. 이중성에 대해서 단일성으로. 쉽게 말해서 너 적그리스도 모르면 너 지옥 간다. 이미 다 했는데 새삼스럽게 지옥 천당 구원을 논하고 있어요. 너 그럼 지옥 가. 너 그 믿음 가지고 천당 못가. 휴거 안돼. 새삼스럽게 기를 팍 죽이고 새삼스럽게 뭔가 겁박을 하는 거에요. 뭐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뭐를 한다는 것은 일치시킨다 에요. 의미를 일치시키지 않으면 너는 실패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한 거 실패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십자가를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생산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이미 구원받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효과에 대해서 넉넉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깜짝깜짝 놀랄만한 진짜 믿음에서 다 떨어진 것 같은 사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왁스란 가수가 불렀던 ‘화장을 고치고’란 노래 듣자마자 화장품 사러 갔거든요. 이선희의 ‘책장을 넘기며’라는 노래 듣고 앨범 사러 간 것같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놓쳐버려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마 또는 적그리스도 이런 것을 가지고 해가지고 우리가 놓쳐버린 십자가를 다시 되새길 수 있는 효과를 주기 위해서 적그리스도 같은 요소들을 많이 매일 우리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적그리스도 있는 것조차 뭐가 돼요? 굉장히 고마운 일이죠. 굉장히 감사한 일이에요. 악마는 절대로 우리보고 안녕이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거는 이승철 이야기고. 악마는 우리한테 안녕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달라붙을 거에요. 끊임없이.


자, 이거는 말로 하는 거 말고 실제로 봅시다. 뭔가 투자를 할려고 해서 나는 투자 잘하는데 만약에 어떤 남편이 투자를 하라고 해서 자기 절친한 30년 친구보고 투자해가지고 집에 없는 돈 2억을 가지고 주식투자를 했다. 보니까 사기꾼이에요. 사기꾼. 미국으로 요트 사러 갔는지 도망가고 말았어요. 그럴 때 부인이 성령 받은 성도라고 칩시다.


남편이 진짜 먹을 거 안 먹고 시장에서 아낀 돈 2억을 친구한테 속아가지고 친구한테 다 날렸을 때 성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제가 묻는 게 잘못이지. 너 죽여버린다 이렇게 나오지요. 평소에 그렇게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유골단지입니다 오직 나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돈을 가져가든지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해놓고 이건 이론이고 실제로 딱 돈이 남편이 사기 맞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순간적으로 모든 화와 분노와 당신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라는 거에요. 당신한테 너무 실망이고 당신하고 만나서 산 것이 후회스럽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분노가 나오겠지요.


자, 그럴 때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남편 사지 맞는 일을 하느냐 하면은 바로 평소에는 우리는 적그리스도와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충분히 그 정도는 이긴다고 생각했어요. 왜? 오늘 강의 잘 들었으니까. 이긴다고 봤단 말이에요. 보니까 뭐냐 하면은 적그리스도는 이거는 항상 이중성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아요. 이 세상은 뭐만 살아 있느냐 하면은 돈만 살아있어요. 돈이 있을 경우 조건하에 인간은 살아있는 거에요.


돈이 없으면 본인도 이야기하고 남도 이야기하고 우리는 산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돈도 없는데 당신을 살았다고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너 나가 죽어라. 너 돈 2억을 날려? 그게 어떤 돈인데. 피땀 흘려 번 돈인데. 너 나가 죽어라. 너 꼴보기 싫다. 나가 죽어라. 돈 없다는 것 때문에 남편보고 죽으라고 한다는 말은 결국 그 아내는 적그리스도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평소에 어디에 둘러쌓였습니까? 돈에 둘러쌓였지요.


그럼 돈이 있다는 조건하에 본인이 지금 살아있다는 느낌 들지요. 그럼 본인이 살았어요? 돈이 살았어요? 돈이 살았어요. 돈은 아무 죄가 없어요. 돈은 그냥 지폐, 종이에 불과하고 아무 죄도 없는데 사람은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돈이 살아있다는 것. 돈이 최고다라는 사실을 믿고 온 거에요. 지금까지.


그리고 모든 행동과 언어가 반드시 무엇과 결부시켰습니까? 돈 되냐? 돈 더 벌수 있어? 못 벌어요? 그것과 전부 연결된 거에요. 이 돈이 뭐냐? 그럼 돈과 관련된 모든 것은 결국 십자가의 복음을 그동안 우리를 가려왔지요. 그게 적그리스도지요. 우리는 그럼 매일 적그리스도와 사네. 동거중이네. 동거중이에요.


그러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이거 다 한 순간 그 순간은 아무 힘을 못 쓰는 거에요. 왜 힘을 못 쓰느냐? 내가 이걸 지식으로 내 쪽에서 소유했기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거에요. 이건 누가 소관이냐? 내가 사용하는 말의 소관이 아니고 말씀의 소관인데. 말씀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다뤄요. 돈도 적그리스도로 만드는 것도 말씀의 능력이란 말이죠. 우리는 그 주님의 능력 속에 쌓여있어요.


내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가 그런 능력을 소유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능력 안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말을 공격하는 말씀의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얼마나 돈 좋아하고 있다 얼마나 적그리스도와 단짝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까발려지는 사태가 일어나야지요. 그것도 반복해서 매일같이. 일어나야 돼요.


뭐 시댁은 복음도 모르고 나는 복음을 아니까 또 명절 되가지고 다 모인다고 하니까 다 모여가지고 제사한다는데 나는 예수 믿는 며느리이기 때문에 제사 안 드리고 그냥 음식만 조금 흉내내다가 형님 다 하세요. 절에 다니는 형님 하세요. 저는 교회 다니니까. 이래가지고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집을 일단 가요. 마음먹고 간다고요. 딱 마음먹고 가보면 그 다음부터는 시어머니의 칭찬시리즈가 시작되는 거에요. 전 이거 누가했어? 이쁘게 했네. 교회 다니는 며느리가 제가 했어요. 제가 했어요. 아이고 이거 국물 간이 딱 맞네. 누가 했어? 교회 다니는 제가 했어요 이렇게 나온다고요.


결국 복음 위주가 아니고 나 위주가 되는 거에요. 어떤 시댁에 가기 전까지는 나는 주님만 생각하다가 막상 가보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는 뒷전이고 칭찬받고 싶은 거에요. 사랑받고 싶은 거에요. 그 시어머니 적그리스도입니다. 시어머니 적그리스도에요. 십자가 가리면 다 적그리스도에요.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는 통과했다는 거에요. 이미 너는 죽은 자고 이미 하나님께서 통과해서 죽은 자를 주님의 몸으로 한 몸 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주님의 존재성이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주님의 존재성과 실존이 뭐냐? 예수 안에 실존이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 말씀안의 실존이 되는 거에요. 실존이란 말은 나를 위한 실존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오직 찬미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일만 천국에서 하고 있잖아요.


세상에서는 전부 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성도로 하여금 그렇게 표현했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는 머리 속의 지식에 불과하고 실제는 뭐냐? 대인과 대인 관계.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어떤 관계? 육의 관계. 육의 관계 특징은 나는 안 죽어야 돼. 살아있으면 이왕 사는 거 칭찬받아야 돼. 사랑받아야 돼. 나는 나 독자적으로 자랑거리가 되야 돼. 이런 걸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뭘 끄집어내요? 말속에서 말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누굴 보낸다? 적그리스도와 그 패들을 보냅니다. 보내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다투었고 싸웠던 그 현장을 성도를 통해서 이걸 재현시키는 겁니다. 반복하는 겁니다. 아 우리가 안 되는 것 주께서 하셨구나. 우리가 일치시키지 못하는 이 복음을 주께서 이미 다 이루셨구나.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일이 벌어졌구나. 내가 갑자기 절에 다니는 시어머니에게 잘 보일려고 하는 이 조차도 주께서 일으킨 주께서 시키신 일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있는 곳은 감사가 나와요. 하나님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이런 게 아니고 이런 거 하지 말고 주여 시어머니한테 사랑 받도록 내가 알랑방구를 뀌는 이런 일을 일으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럼 주께서 충실한 종아, 네가 수고했다. 네가 네 본색을 드러내는 일에 착실하구나. 내일 또 보자. 네가 너만 챙기는 일에 충실히 하라 이 말이죠. 왜? 그게 감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고마움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님 그렇게 해도 고맙지 않던데요. 그건 성령이 없는 사람이고.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일은 해 놓고 이건 주께서 내가 나쁜 짓한 게 아니라 주께서 이 일을 시키신 일이고 또 시키신 일을 통해서 이중성, 나와 주님이 함께 있어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현상을 죽을 때까지 되풀이했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지 말게 해주시고 죄 짓지 않기 위해서 애쓰지 말게 해주시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나오거든 이 모든 능력이 주와 함께 살아있다는 그 실존을 이야기하는 그 현상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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