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12절 (시험) 20100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홀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난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무슨 구조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을 빼고 간다는 것. 인간을 제치고 악마와 예수님이 직접 만나는 생각이에요. 다수의 인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군상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인간들은 전부 다 같은 인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악마가 그 중에서 단 한사람, 예수님하고 꼭 집어서 그렇게 만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주선을 하셨어요. 그러면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들러리가 되는 겁니다. 어디 들러리냐 하면은 진실의 들러리가 되어요.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악마와 상대해봤자 거기서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 빼고 어떤 인간과 상대해도 진리는 안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을 철학이라고 하고 과학, 학문이죠. 그건 진리가 아니고 진실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를 제쳐놓고 사용한다. 그러면 인간은 예수님하고 상대할려고 하다가 이 자체가 이 노선 자체가 허락이 되지를 않아요. 이거는 끊어집니다.
그럼 뭐냐 하면은 여기 중간에 뭐가 끼어드느냐? 악마가 끼어들어서 예수님과 이 형성된 그 관계 속에서 진실이 나올 때, 이 진실에 대해서 그 다음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 챙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빠지고 악마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구성되는 진실. 그 진실에서 인간은 그 다음에 이것이 마련되고 난 뒤에는 인간은 여기에 접촉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마하고 만났다는 이 사실 하나만 해도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의미 없다. 인간이 살고 죽는 것. 내가 인생이 힘들다 안 힘들다 내가 편하다 행복하다 이 자체는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다는 것은 진실하고 무관하다. 진리하고도 무관합니다. 인생을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 안 사느냐 그런 것 자체가 전혀 진실과 무관한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들러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빼놓고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뺍시다. 빼고 예수님하고 악마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만 주목합시다. 일단 우리는 빠지는 거에요. 빠지게 되게 되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을 일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라는 장소가 특정 공간입니다. 광야. 거기는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빼고 다른 인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만나서 진실한 진짜 진리된 것을 내놨다고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정 시간, 특정 공간을 그냥 일방적으로 점유하신 거에요. 그걸 사용하신 거에요.
제가 말한 이 뜻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주님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실은 주님의 일방적인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을 일방적으로 그걸 진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이 나서서 저건 진리야 라고 손 내밀 수 없습니다. 우리 시간과 우리 공간은 안 받기 때문에.
그걸 쉽게 하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교회는 없지요. 교회는 없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출몰될 때만 교회 있고 출몰된 교회를 교회라고 붙잡는 순간 교회는 사라져버립니다. 왜? 우리는 들러리니까. 그러면 도대체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출몰했다가 사라져버린 그 진리를 왜 우리는 자꾸 갖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은 객관적인 것을 소유격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특정 객관적 형성된 것을 소유, 내 것으로 만들어버릴려고 해요. 뭐든지 내 것. 진리, 복음, 십자가, 하나님 모조리 전부 다 소유, 내 소유. ‘~~~의’죠. ‘~~~의’로 만들어버려요. 그 앞에 주인공에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한 진리. ‘나’를 구원해 주는 진리.
왜냐하면 나는 출몰되는 게 아니고 나는 여전히 여기 고정 자리가 있으니까. 내가 고정되어 있으니까. 고정되어 있는 나. ‘나’에 의해서 예수는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고 무슨 의미를 주고 무슨 가치를 줄 것이냐를 누가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나는 고정적인데 놀랍게도 주님은 고정적이 아닙니다. 출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만났다는 이 내용에 대해서 어떤 이 근처에 이 현장에 제자들이 있을 수가 없지요. 제자들 하나도 안됐으니까. 제자도 하나도 없어요. 뽑지도 않았어요. 예수님 단독입니다. 단독 작업이에요. 방금 이렇게 설명한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더 쉽습니다. 인간세계의 공허함은 인간들이 모른다. 인간세계의 공허함을 인간들은 몰라요.
왜? 자기는 늘 있으니까. 거울 보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는데 왜 공허해요? 공허할 수가 없지요. 인간은 허상이다. 허상일 수가 없습니다. 눈앞에 있고 내가 손으로 만지면 만져지고 이게 왜 허상이에요. 이미지에 불구한 거 아니잖아요. 실제가 있잖아요. 여기 숨 쉬고 있고 팔이 있고 손이 있고 다 있단 말이죠. 내가 허상이 아니지요.
허상이 아니라면 허상이 아닌 것은 반드시 거기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에요. 무의미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허상이 아니면 내가 왜 사는가? 왜 여기 있는가? 그 의미는 당연히 뒤에 붙어있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해요. 인간들이 공허함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비유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비유하면 쉬워요. 화롯불. 자, 화롯불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은 화롯불이 없을 때 인간은 어두움을 모릅니다. 감지 못하죠. 화롯불이 없으면.
그런데 두 번째 화롯불이 있을 경우에는 화롯불을 피워 놓게 되면 그 주변이 어두움으로 둘러 쌌다는 것을 비로소 감지가 돼요. 빛이 옴에 비로소 얼마나 지독한 어두움인가를. 그냥 어둠이 아니고 지독한 어두움인가를, 화롯가에 손 쬐면서 아는 거에요.
사막 같은데 여행 가가지고 화롯불 피우면 그렇지 않아도 깜깜하다고 여겼는데 화롯불 피우는 그 지점으로 인하여 더욱더 깜깜해요. 정말 깜깜해요. 화롯불 없으면 그냥 뭐 공기가 밤공기네 이렇게 하다가 화롯불 피우면 진짜 칠흑같이 어둡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더 적절해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어두움을 모르냐 하면은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지도 모를 정도로 본인 자체가 어두워요. 본인도 어둡다 보니까 자꾸 긍정적 의미를 얻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그냥 태어난 게 아닐거야. 무슨 의미가 있을 거야. 주께서 나를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을 거야. 자기가 공허하다는 생각이 없고 절대로 공허하지 않다고 남들에 의해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오는 순간 우리는 그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살고 죽는 것은. 그러면 예수님께서 화롯불처럼 오셨다는 말은 예수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재개발업자 같애요. 재개발업자. 자기 회사에 불도저하고 포크레인 한 100대 가지고 있는 재개발업자.
자, 서울시 봉천동에 옛날 피난민들 살던 그 동네에 시대가 지나가지고 재개발한다고 합시다. 한 몇 년 동안 보상금 토의하고 보상금 협의 끝나고 난 뒤에 보상금 다 받고 갈 사람 80% 이상 되가지고 갈 사람들은 가고 거의 다 가서 빈집 있다고 합시다. 거기 재개발업자가 거기 들어간다고 합시다. 한 달도 안 되어서 이 봉천동 언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가 되겠어요?
폐허가 되겠지요. 완전히 폐허가 되겠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만났을 때에 그 때 우리가 사는 동네가 이렇습니다. 그냥 폐허에요.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요. 산다는 게 다 부질없는 거에요. 산다는 게 다 부질없는 것. 구태여 부질없는데다가 의미를 찾지 마세요. 분명한 것은 이 폐허를 만든 이유는 뭐냐 하면은 왜 주께서 폐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인간이 대표자가 아니고 악마가 대표자기 때문에. 악마가 대표자 된 세상은 뭐 그 꼬락서니는 보나마나죠.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한구석도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이 다 폐허입니다. 우리는 폐허에서 태어났고 폐허에서 살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 그것 다 폐허 위에 흘러가는 겁니다.
그 시간과 공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특정 시간대의 특정 공간대의 악마와 만나서 진실을 뽑아낼 때 비로소 그 현장에만 진리가 있고 그 현장에만 그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현장에서. 그렇게 보시고 누가복음 4장 읽어보면 여러분 의미가 확 당겨옵니다. 폐허를 빼지 말고 읽으세요. 우리가 살고 죽고 의미 없다는 것. 우리는 아예 들러리로 여기고 우리 자신을 빼버리세요.
그러면 그 현장은 뭐냐? 딱 석자가 적당해요. ‘음소거’. 음소거가 너무 난해합니까? 그러면 쉬운 단어 할께요. ‘먹먹함’. 갑자기 먹먹해져 버려요. 이 세상 전체가. 음소거되는 거에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요란스럽게 시끄러워야 변화가 있을 때 변화를 하는데 그런게 없어요. 완전히 모든 것을 음소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아 너희들은 가만 있거라. 제발 좀 가만 있거라. 그냥 뭘 하든 어디서 살든 그냥 살아. 그냥. 그냥 뭘 하든지 미국 가서 살든지 북한 가서 살든지 모르겠어. 뭘 해서 살든지 살아. 어떻게 살아도 너는 먹먹해. 너는 먹먹한 거에요.
진리는 네가 이 땅에 살면서 구한 진리는 쪼가리 난 이불 같아가지고 한창 크는 사춘기 남자 아이들 보세요. 남학생들. 엄마가 이불 덮어줬는데 2년도 안 지나가지고 발 나오죠. 짧아가지고. 이불이 작아져버린 거에요. 몸은 큰데 다 못 덮지요.
인간이 만든 진리라고 하는 것은 덮어보면 슝슝 사지가 다 나와요. 이쪽은 덮었는데 이쪽은 안 맞아. 이쪽 사항은 그럴싸하게 적용이 되는 것 같은데 이게 또 의문점으로 남는 거에요. 온전하게 덮을 수 있는 온전한 진실과 진리는 인간세계에서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먹먹함, 우리를 배제하고 악마하고 싸우는 이유가 뭐냐?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께서는 시험받는 예수님의 몸을 장차 성도가 된 우리에게 떠넘깁니다. 떠넘겨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몸은 하나인데 여기 주인공 쟁탈전이 벌어져버리지요. 나 나름대로 의미 있습니다. 객관적인 것을 나는 소유화시킵니다라고 버티는 것과 네 육체 내가 접수할게. 너는 악마를 안 만났잖아. 악마의 시험을 못 이겨. 네가 네 식대로 하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다고. 악마 이길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시험을 이겼잖아. 그럼 나한테 일임해야지. 너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 안에서 이루리라. 오늘 이 본문 두 번째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뒤에 있으니까. 방금 한 걸 여러분들이 실력들이 있기 때문에 좀 진짜 난해하게 써보겠습니다.
강의한 것 중 가장 난해한 이야기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만은 하나님 안에 예수님과 예수님 안의 하나님은 달라요. 이게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인간이 관여할라고 만들어 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일단 재벌 총수, 그럼 예수님은 재벌 2세라는 그러한 감각을 가지고 이해가 시도되는 거에요. 인간 속에서.
왜? 우리는 신을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부터 먼저 하나님이 제일 높은 분이니까 챙기고 그 다음에 부수적으로 추가해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정보. 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었어? 그럼 아버지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숟가락 하나 얹는 식으로 아들까지 챙기면 온전하게 하나님까지 아는 게 아니냐?
오! 뒤에 보니까 부수적으로 또 하나 달라붙은 분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영, 성령. 그래서 삼위일체. 그까짓 것 뭐 이해하기 쉽잖아요. 전부다 아버지, 아들, 영 전부다 한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세분이고. 삼위일체 뭐 어려운거 있어요? 방금 10초만에 이야기 했어요. ‘삼위일체’. 이게 뭐가 어려워요.
하나님은 하나이시며 세분으로 일하신다. 세가지 기능을 하신다. 이거 알았으면 몽땅 한꺼번에 진리에 대해서는 다 습득한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바로 엉터리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 손에 붙잡히지 않고 단독으로 마귀를 만난 거에요.
왜냐하면은 인간은 내가 마귀 속에 속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인간들은 인정을 안할려고 해요. 마귀의 생각에 중무장되어서 악마적 생각을 품고 하나님을 삼위일체다 하든 이위일체다 하든 하나님을 내뱉는다는 그런 한계를 갖고있는다는 것을 생각 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메시아 챙기겠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고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이냐. 예수님 안에 하나님 되야 되는데. 정확하게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에요. 왜냐하면 이 아버지는 예수님만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철저하게 폐쇄적입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 그걸 에베소서 1장이나 3장에 보면 이게 비밀입니다. ‘비밀’.
그러면 악마의 하는 일은 이제 드러났습니다. 악마가 예수님 만나기 전부터 인간을 다루었던 방식은 이 비밀은 수수께끼죠. 이 비밀 자체가 아예 비밀 자체가 없다고 여기는 일을 악마가 인간 세계에 유포하고 있는 겁니다. 비밀은 없다. 비밀 있어도 인간은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비밀은 폐쇄적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거든요.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에요. 따라서 예수님이 다가온다는 것은 비밀이 다가오는 거에요. 비밀 자체가 다가오는 거에요.
그러면 거기서 여러분들이 악마라면 그 비밀에 의하면 악마는 이미 지옥불에 들어간 게 확정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밀이 이 땅에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안 들키게 하는 거기에 전력을 다하겠지요. 그 방법이 뭐냐? 궁금해요? 악마가 우리에게 비밀이 있고 수수께끼가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그런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악마의 방법.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이겁니다. 이거에요.
노동입니다. ‘노동’이에요. 마르크스적인 노동이고 리카도의 노동, 경작이란 노동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일하게 되면 그 일의 의미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수고해서 일했는데 힘들여서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해서 일했는데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 노동을 함으로써 내가 더욱 고정적 존재가 되고 고정적 존재에서는 객관적인게 필요해요.
노동의 객관성은 바로 임금이라고 합니다. ‘임금’. ‘삯’. 월급이에요. ‘월급’.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 보니까 분명히 300 원했는데 월급 보니까 50만원 주더라. 그러면 화나겠어요? 화나지요. 그 때 우리는 뭘 들이대냐 하면 계약서를 들이대는 겁니다. 계약서. 노동 계약서 하니까 점점 더 현실적이죠. 복음이 현실적입니다. 계약서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인간의 법이에요.
자, 악마의 방법은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뭉개버려요. 이 땅에서 인간들은 신의 법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은 이거는 가족과 가정에서 찾아요. 왜? 엄마가 설거지 한다고 아빠보고 월급 달라고 하던가요? 이상해. 일은 했는데 값을 못 받는 것. 일은 했는데 값을 못 받는 것 어느 직장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어느 공간에서? 일은 하면서도 값을 못 받는 공간이 어디 입니까? 가정이잖아요. 가정.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라고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엄마, 아빠, 가족들, 형제들 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 가족은 뭐냐 하면은 자연법이에요. 인간은 혈육적으로 타고난 법 있잖아요. 자연법. 이 신의 법은 성경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건 세상법이 관여하지 못한 아주 고상하고 존엄한 것. 사람들은 그렇게 분류를 한다 이 말이죠.
노동을 왜 합니까? 자기 결혼한 가정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잖아요. 또는 결혼 안하신 분은 나 혼자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고요. 그럼 내가 나의 법은 자연법이에요. 나는 절대적이니까 신의 법이죠. 그러나 세상에서는 나 여기 있다 돈 줘 하면 돈 아무도 안 줍니다.
왜냐 사회에서는 노동법, 인간의 법이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거 받아 챙기라는 노동법. 노동에 있다. ‘노동’. 일도 안했는데 월급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한항공에서 다 쫓아내잖아요. 일해야 주지 일도 안했는데 무슨 돈을 생기겠습니까. 안주지요.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세상의 법이 이렇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가정법에 있는 이것을 이 세상에 가정만 있습니까? 국가도 있잖아요. 국가가 일을 하기 위해서 가정법을 이걸 쪼개야 되겠지요. 쪼개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쪼개는 방법이. 전쟁입니다. 옛날에 봉건사회부터 해가지고 전쟁을 하게 되면 무조건 각 집안의 남자 하나는 다 나와야 돼요. 뮬란이라는 영화에도 나오지요. 전부다 하나는 끄집어내야 돼요.
그러면 가정에서는 울고불고 합니다. 전쟁하지 않더라도 전쟁을 대비해서라도 그 가정의 맏이는 아들 둘 있으면 아들 하나는 군에 가도록 되어있어요. 지금 법은 안 그래도 옛날 법은 그랬어요. 4대 독자는 군에 안가고 그런 거 있었단 말이죠. 지금도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러면 그 집안에서는 아들 군에 간다고 엄마가 논산 훈련소에 따라 와가지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지요. 면회 오면 치킨 사가지고 김밥 싸가지고 가지요. 군대 갔다왔어요.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게 아니고 의미 없으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보지 말고 현실과 결부시킵시다. 현실은 내가 노동함으로서 나의 출근부터 월급날 될 때까지 모든 관심은 이 직장에서 내가 잘리지 않아야 되고 여기에서 돈이 있어야 내 가족과 내가 산다. 여기에 몽땅 모든 정신을 쏟아붓게 되면 봉천동 폐허가 생각이 납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사실이 그게 감추어져버린 거에요.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갑니다. 진실? 누가 진실을 말합니까? 진실? 진리? 그딴 거 알아서 뭐하는데. 돈이 중요하지 그 진리, 진실 알아서 뭐할건데. 그거는 배부를 때 시간 남을 때 나 천당갈려고 대비할려고 보는 것이지요. 이 노동을 하게 되면 음소거가 아닙니다. 막막한 게 아니라 되게 바빠요. 직장갈려고 준비할려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노동을 하게 되면 결과는 노동의 결과는 뭐냐? ‘산다’지요. 그러면 방금 제 이야기를 들었으면 여러분 이런게 떠오를 거에요. 사는 것이 뭘 방해한다?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사는 것이. 내가 열심히 살면 살수록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에요. “예수 이름, 피 믿었으면 구원받겠지” 끝이에요. 구원이 현실화 되지 않는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현실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내가 구원을 훼방하는 자에요. 내가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되어버린 거에요. 이게. 그러다보니까 예수님하고 악마가 만났다. 예수님하고 악마가 만났다고 하지마세요. 예수님하고 내가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 그래야 이 본문이 이해가 돼요. 예수님과 내가 만났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할 소리가 이만큼 있다. 할 소리를 다 터놓는 거에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한테 먼저 들이대고 공격하거에요. 내가 열심히 노동했는데, 나 왜 힘들게 삽니까? 노동했는데. 월급이 왜 이것밖에 안됩니까? 내가 죽기 싫고 살고 싶은데 예수님 당신이 나한테 도와준 게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예수님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 누구도 나를 건들지 말아야할 조건을 내가 노동해서 이걸 챙기게 되어있어요.
나는 할 때 여러분 ‘나’ 하니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나’인줄 알지요. 나를 조금 더 뒤에 붙여봅시다. 나는 어떤 존재냐? 거울로 봐서는 몰라요.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말아야 될 조건을 내게 쌓는 것. 내가 둘둘 감는 것. 그게 나에요. 건들기만 해봐. 진짜 죽여버릴 참이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한 세상의 모든 객관적인 것은 뭐가 된다? 소유욕이 되지요.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되면 나의 것이 되는 거에요. 나의 것. 그래서 소유를 둘러싸게 되면 이게 바로 ‘나’라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내 것이 없으면 자살해야 됩니다. 왜? 내 것이 없으면 그건 존재가 아니에요. 죽은 존재에요. 살아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내 것이 있다면 그게 내 것이 되는 거에요. 내 것이 있다면 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죽고싶지만 자식 봐서 못 죽는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지금 죽고 싶지만 자식 봐서 내가 지금 기어이 살아있다 이거 무슨 뜻입니까? 자식은 뭐가 돼요? 자식은 내 소유가 되는 그 자식을 둘러치면서 그게 나의 존재가 돼요. 자식보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힘써 노동을 하게 되고 그 노동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뭐냐? 인간 대 인간이 만든 법에 억매여야 되고 그 법에 의해서 결과는 어디에서 돌리느냐 하면은 전부 다 나의 자연적인 법. 내가 떨어질 수 없는 혈육적인 관계, 가족이죠. 내 가족과 가정을 위해서 그걸 전부 다 저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법이 있다고 했지요. 그게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국가. 국가가 뭘 해요? 전쟁을 벌리게 되면 전부 다 착출돼요. 그 귀한 자식들. 그래서 출애굽에 보게 되면 하나님과의 인간과 전쟁할 때도 맏이가 착출되었습니다. 그걸 유월절이라고 하지요. 유월절. 왜 둘째는 안 되고 맏이여야 되느냐? 맏이가 아버지 어머니를 대리하기 때문에.
그걸 성경에 보면 기력의 시작이다. 나의 시작을 내가 죽기 전부터 ‘나’라는 존재가 시작이 되는 것은 맏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뜻은 맏아들 되신 예수님이 다 갖고 있잖아요. 맏이.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맏아들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맏아들이 맏아들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성도가 양자로 같이 성령받은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이 맏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다시 해볼께요. 중요한 것. 이렇게 이야기하고 여러분들이 한번 이 차이점을 여러분들 속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과 예수님 안의 하나님의 차이점. 막상 이야기할려니까 모르겠지요? 막상 이야기하면 모르겠지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을 거기에다가 하나의 추가적인 내용으로서 딱 갖다붙이는 거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조건하에.
그런데 하나님을 지금 누가 안다는 거에요? 내가 안다는 거죠. 나는 뭐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무장된 나에요. 그냥 ‘나’가 아니고. 거울 앞에 있는 내가 ‘나’가 아니라 거울 앞에 있는 나는 ‘나’가 아니죠. 내 얼굴 보인다고 내가 아니라 나는 나의 그 본성을 알아야 돼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하에 나에요.
그러면 나는 누구를 필요로 합니까? 타인이에요. 남이에요 남. 그러니까 악마가 인류를 대표해서 광야에서 오늘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결국은 악마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뭐로 봅니까? 뭐로 봐요? 타인으로 보잖아요. 타인으로. 남으로 본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오셨지만 자기 백성을 남으로 보지 않고 자기 속으로 집어넣어버리죠.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치 않지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못하는 조건을 걸쳐서 ‘나’라는게 규정되는 거에요. 그때의 이 나는 몸을 보고 ‘나’라고 하지 않고 이 나를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자아는 어떤 일을 합니까? 노동을 한다고 했지요. ‘노동’. 노동을 하니까 노동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현실에 인간 대 인간이 만든 법에 종속되는 거죠. 법이니까.
몇 시간 일하면 월급 얼마 준다 법 아닙니까 ‘법’. 이런 법들, 인간의 법들. 인간의 법이 있는 한 인간들은 인간들 세상에서 사는게 굉장히 요란스럽죠. 음소거가 안됩니다. 먹먹함이 아니에요. 되게 바빠요. 무지하게 바빠요. 그런데 광야에서 광야 분위기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시험받은 광야는 조용해요. 모든 인간을 다 배제해버렸어요.
자, 이제 여러분 어느 쪽이 진리입니까? 분주하고 요란스럽고 바쁜 시장통이 진리입니까? 아니면 인간 빼버리고 악마하고 예수님 만남, 그 만남에서 진리가 나오는 겁니까? 어느 쪽이 진리입니까? 악마하고 예수님하고 진리죠. 왜? 우리는 들러리니까.
우리는 결과만 기다릴 뿐이에요. 결과만. 결과만 기다릴 뿐이지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드라마 보는 것이 지루하거든요. 이렇게 보세요. 제일 마지막회만 보시면 됩니다. 앞에 것 설명 다 해줘요.
인간은 자기만 쳐다보게 되면 그 자체가 사실을 의미에서 배제된 죽음이지요. 템플대학교 신입생 여학생들이 파티에서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다고 4층에서 두명이나 떨어져 죽진 않고 다쳤다고 되어있지요. 셀카봉, 본인이 본인 찍는 거에요. 세상 사는게 그렇잖아요. 다 본인이 본인 위해서 살잖아요. 본인이.
자기의 노동 이 전체가 이미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게 아니고 진리가 있어요. 진실이 있는데 누구를 위한 진실입니까? 나를 위한 진실이죠. 나를 위한. 나를 위한 진리고. 내가 여기 고정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나 고정적으로 있을려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 쏠려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점령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주님께서 자동적으로 오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주님은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그걸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붙잡아도 주님께서는 가보면 그 현장에 없어요. 지금 가봐도 주님 안 계셔요. 저도 이스라엘 광야에 가본 적 있지만 주님 못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을 다녀갔지요. 그 다녀간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은 그냥 다녀간 것이 아니고 누굴 만났습니까? 영원한 타인, 그냥 타인이 아니고 만났다가 그냥 헤어지는게 아니고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영원히 갈라서야 될 타인, 그 이름은 사탄입니다. 악마. 악마에요.
악마와 만났던 그 몸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맡겨버립니다. 안겨버립니다. 던져놔버립니다. 악마와 만났던 예수님. 그 예수님 만나는 순간 아!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예수님 힘들게 하기 위한 악마의 생각을 악마가 대변했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가 접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신앙생활할 때 그야말로 신앙생활이 정말 자유롭지요. 고맙소. 고맙소. 그냥 고마운거 밖에 없지요. 고맙고 그 누구한테도 나한테도 누구한테도 미안하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미안하면 안돼요. 우리가 미안하다 할 권한이 없습니다. 뭐 잘할 수 있어야 그다음에 앞으로 잘할게요 가 되는데 애초부터 우리한테 주님께서 어떤 것도 원한 적이 없는데 뭘 미안해요. 원한 적도 없는데.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아들이 논산훈련소 군에 갔는데 그 상사가 자기 이등병보고 막 나무래고 일 그렇게 하면 너 벌 받는다 고쳐라 이렇게 하니까 우연히 그 소리를 듣고 엄마가 군대까지 찾아와가지고 에미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하고 나올 때 그 부대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줌마는 상관없고요 아줌마는 상관없어요 하는 것처럼 빼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한테 미안할 게 없어요. 우리는 애초부터 상관없어요. 구원은 상관없다니까요.
구원은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의논해서 일방적으로 합격통지 내려가지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확정해서 자기 백성 훑어서 가져가는 것뿐인데 왜 우리가 주님한테 미안해야 됩니까. 자꾸 우리가 나를 고정적으로 봐가지고 잡을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주님은 잡히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한다고 포착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적당한걸 제가 생각하다가 적당한 노래가 있어서 적어왔습니다.
이연실이라고 옛날 우리 60년대에 불렀던 목로주점 가사에 보면 “멋들어진 친구 내 친구야” 하는 노래거든요. 중간에 보면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잡을 수가 없어.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늘 이렇게 우리는 고정적인데 주님은 종잡을 수없이 흔들려요. 주님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네가 진리야? 왜 나를 만나? 너는 노동이야.
기적은 내가 기적이야. 주님이 미라클. 주님이 기적이지 우리는 기적이 아니고 노동이에요. 그것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 노동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는 인간의 법에서 굴레에서 못 벗어나요. 그런데 인간의 법보다 더 센 거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아까 국가의 법이죠. 그 국가가 바로 짐슴의 나라, 악마의 나라입니다. 자,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본문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구원을 훼방한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구원을 훼방하는 거에요.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왜 주님을 붙잡을 필요도 없고 붙잡으려 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평소에 나의 모든 생활이 주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짓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노동이었고 노동에서 소유가 생기고 소유를 둘러치는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존재에요. 내 것이라도 있어야 살맛이 나요. 내 것도 없는데 왜 삽니까? 내 것도 없는데. 집도 논도 아무것도 없는데 ‘나’라는 자체가 껍데기만 남아있는데 살 수가 없지요. 내 것을 존재하기 위해서 노동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게 소유가 돼서 그 소유가 내 것이라고 있어야 산다.
그런데 내 것이라는 것이 노동이 되어버리면 반드시 세상 법에 묶이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세상법이 뭐냐? 짐승이고 아까 화롯불 이야기했지요. 그거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두움인줄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빛이 오매” 비로소 어두움이 제대로 짙은 어두움답게 빛과 대비해보니까 아 이게 악마에 속한 세상이구나 라는 것을 이렇게 밝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문 한번 봅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동에서 소유, 존재, 존재 다음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예수님 앞에 악마가 영원한 타인이다라는 말은 도약할 수 있는 길은 없어요. 타인이니까. 나는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조건을 만드는데 노력을 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마는 자체적으로 자족해서 건드리면 안 되는 조건들을 만들어놨어요. 그것들을 인간들도 그 마음을 인간에게 그대로 주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조치에 없는 한, 악마의 자리 말고 여기에 제자들이나 우리가 들어선다 하면 예수님하고 얘기가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십자가 전에는. 안 통하지요. 악마도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광야에서 만나봤자 예수님하고 얘기가 통할 수가 없어요. 악마로 하여금 우리가 아 이래서 우리는 주님과 괴리상태에 있구나 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와 만나서 뚜렷하게 드러내줍니다.
문제, 원인은 뭐냐? 살아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살아야겠다와 구원의 관계는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그냥 살아야겠다고 해서 구원을 챙겨버리면 이거는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그러면 살아야겠다가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죽어 마땅하구나가 경유해야 비로소 그 때 보이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구원이 보이는 겁니다.
살아야겠다가 아니라 살아야겠다라는 그 자체가 나를 죽이는 내 발등을 찍는 그러한 의식이었구나를 아는 게 그럴 때 내 자신이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이 자체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짓인 것을 아는 그 순간이 바로 비로소 구원이 보이는 순간이에요. 구원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천국에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우리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곳이 천국이죠. 산다가 아니라 한다. 제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산다가 하는 거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거에요. 내가 인생이 어떻게 풀리든 간에 그것은 내가 관여할 바가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만약에 주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자꾸 둘둘 말리는 것이 뭐냐?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이 정도 되니까 나 건드리지 마라 조건만 자꾸 추가되고 추가될 뿐입니다.
이렇게 보셨으면 오늘 본문을 들어갈 수 있는 준비는 됐다 싶습니다. 4장 1절에 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성령 없이는 예수님께서 악마를 만날 수 없다 이렇게 되겠지요. 주선을 한 겁니다. 자, 예수님이 계시고 여기 악마가 있는데 여기 중간에 주선을 누가 했습니까? 성령께서 주선을 해서 둘이 만나게 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은 빠집니다. 모든 인간은 이 공간과 이 시간에 대해서 전혀 도통 모릅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자기 노동하기 자기 밥 먹고살기 바빠가지고. 진리가 여기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몰라요. 성령에서 집어넣은 것은 이미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굳히기 위해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모든 산과 들과 바다는 뭐해야 돼요? 불 심판을 당해야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만나서 이 세상이 개선되면 안돼요. 이 국가가 좋은 국가가 되면 안돼요. 절대로 아름다운 우리나라 하면 안 된다니까요.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살만한 세상 되면 안 됩니다. 그걸 추구해서도 안 되고. 성도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 되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이 망하기로 운명 지어진 세상인 것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해야지요.
악마가 있다는 말은 지옥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거는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잖아요. 어느 교과서에 나옵니까 지옥이 있다는 게. 악마가 있다는 게. 심지어 주일에도 아이들에게 지옥 이야기하지 말라고 압력 받는 입장인데. 지옥이 있고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는 말은 곧 무슨 의미냐 하면은 인간이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소용없잖아요 그래. 맞잖아요. 소용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마음 편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뭘 해도 내가 뭘 꼭 해야 된다 이게 불편해요. 성도한테는. 이거 에비앙 이거 먹어봤자 다른 물보다 비싼 물 먹어봤자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나. 뭐 하겠어요. 고맙습니다 써놔 봤자 목마른데 아무거나 먹자. 이래야 마음 편하지 나는 에비앙 먹었으니까 빰빠라 빰빰빠 뽀빠이처럼 시금치 먹은 것처럼 힘내고 그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는 게 죄입니다.
인생의 어떤 기대나 목적을 만들지 마세요. 희망을 갖지 마세요. 우리는 의미 없습니다 그거. 그냥 하루하루 주께서 맞닥뜨린대로 그냥 휘파람 불면서 그냥 시키는대로 살 뿐이죠. 괜히 욕심부려봤자 더 살기 좋은 내 미래, 더 행복한 나의 가정, 더 우수한 우리나라. 이번에 대통령 한번 바꿔볼까? 바꿔 봐도 몰라 나훈아가 하면 몰라도 다른 사람 안 된다니까요. 나훈아는 자기목숨 논개처럼 받치겠다는데 뭐. 이 세상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그거는 불행할래야 불행할 수가 없어요. 절로 행복이 돼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4장 12절 (시험) 201006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의 예수님과 그 당시는 메시아니까 메시아, 예수님 안의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은 누구를 데리고 왔습니까? 악마를 데리고 왔지요. 그러면 하나님 안에 예수님 =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같지가 않다. 왜?
악마가 여기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줘요. 성령이 악마를 데리고 옴으로써 유대인들이 하나님 믿으면 뒤에 누가 온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이 설정에서 하나님 자체가 이 엉터리, 이게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이게 하나님이 아닌 거에요 이게. 그동안 악마가 지배하에 구성된 하나님의 이미지에 불과한 거에요. 악마가 만들어낸 하나님이에요. 이 하나님이.
그러면 하나님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인간이 여기에 있다고 여기면 하나님이 없는 거고 인간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 있는 거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렵죠? 인간이 없을 수가 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없을 수가 없잖아요. 인간이 없다면 비로소 있는 하나님. 이 말은 인간이 없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남는 건 이것만 남아요.
인간이 있다면 생각나는 하나님은 무조건 가짜에요. 무조건. 내가 있기 때문에. 왜? 나는 광야에서 배제되어야 될 대상인데 악마가 우리의 대표자잖아. 그러면 우리는 빠져야 된다. 빠질 인간이 하나님을 꾸준히 믿어왔다는 것은 악마의 선을 못 넘어왔다는 조건하에 완전히 악마가 가르친 가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여기고 거기에 성경을 갖다 들이붓는 거에요. 성경을.
네비게이토 사람들 보세요. 성경교사 아닙니까. 여호와의 증인. 성경을 갖다 붓는 거에요. 붓고 난 뒤에 메시아가 온다고 기다리는 거에요. 스케줄 시간 계산해가지고 중동 전쟁 이런 거 계산해가지고. 삼년 환란 계산해가지고 계산하는 거에요. 하는 자체가 이거 엉터리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예수님부터 출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부터 출발하려면 이걸 악마의 선을 넘어서야 하는데 우리가. 넘어서야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사탄하고 만나지 뭐 때문에 예수님 만나겠습니까. 우리와 악마의 만남은 성령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같은 편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만나서 뭐 할 건데요. 악마는 알거든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누구냐? 악마가 도사 아닙니까. 악마의 할 일은 비밀을 지워버리는 그 일에 그 모든 걸 몰빵한 거에요.
구원의 비밀을 지워버리는데. 비밀은 없어.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걸로 그냥 줄창 그걸로 가. 교회 갈 때 그 하나님 가지고 가면 되는 거야. 그래서 재롱잔치 벌이고 시간 맞춰 헌금하고 그러면 구원받는 거야. 계속 그런 식으로 몰아세웠던 거에요. 그게 전면적으로 아니라는 생각은 상상 못했지요.
여러분 사울이라는 사람 알지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뭘로 바뀌느냐 바울로 됐습니다. 그 사람이 바뀔 때 눈에서 뭐가 떨어지느냐 하면은 비늘이 떨어졌어요. 비늘이 떨어질 때 무슨 과정하나 붙지요. 멀쩡하다고 여겼던 눈이 갑자기 뭐가 됐습니까? 주님 만나고 소경되었고 그 다음에 비늘 뜯어지니까 다시 정상적인 눈을 가졌고.
자, 이 비늘이 뭐냐? 그동안 내가 악마한테 속아서 실제 진리도 모르면서 진리인 척했던 그 모든 것이 소경이라는 과정을 겪고서 이제 떨어졌다 이 말이죠. 눈이 밝아졌다. 이걸 베드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마음에 새로운 빛이 떠오른다. 샛별이 떠오른다. 성령의 바람을 전부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에요. 획기적으로 다른 거 없거든 입 다물라. 획기적으로. 어느 정도로 획기적이냐. 내가 아는 하나님은 바로 내가 구상한 또는 악마가 구상한 가짜였습니다.
그렇게 달라졌다 해서 달라질게 뭐가 있는데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하나님 바꿨다고 해서 달라질게 뭐가 있느냐. 어떤 점이 그럼 이제부터 바꿔지느냐. 그거는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알 수 있지요.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였었는가가 이제부터 내가 누구였었는가를 알게 되는 거에요. 내가 누구였었는가.
이 때는 적당하게 노래가 하나 들어가야 이해가 될 거에요. 이문세가 불렀던 노래 있어요.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노래에 보면 이런 내용 있어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이게 말이 돼요? 알면 서로 아는 사이인데 왜 그대는 나를 알아도 나는 모르겠느냐. 이미 주님은 우리를 알고 있었어요.
다만 우리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사랑의 대상인 것을 내가 몰랐어요. 사랑의 대상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라도 사랑할려고 주님을 사랑할려고 애를 써 온 거에요. 목사 시키는 대로.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한 거에요. 내가 사랑해줘야 많이 봐줘서 긍휼히 여겨서 천당 보내줄 그렇게 착각을 해온 겁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해, 생각도 못했지요.
내가 여기 있으면 누구 하나 타인이 의식하게 되어 있고 내 나름대로 그 사람을 위해서 잘해주면 내가 잘해주면 그 사람도 잘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노동시장에서 노동해서 배웠던 거에요. 노동해서. 뭐가 내가 움직여야 내가 필요한걸 전체적으로 줄 수 있는 요건이 된다. 이게 노동시장이에요 이게. 매일 이런 삶을 산다고 바빠요.
이 노동시장처럼 그렇게 해서 ‘나’가 구성되기 때문에 이런 나를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나 하나님 상대할 때도 이 버릇을 그대로 사용한 거에요. 뭐를 바쳐야 복을 받지. 바쳐야 복을 받지. 제가 예수 믿고 교회 부흥회 하는데 부흥회 부흥 강사님들 하는 거 참 어지간히 따라다녔습니다. 이미 시작한 구원을 도중에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만큼 해왔는데 여기서 탈락하게 되면 너무 후회스럽다 해가지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부흥사들이 뭐를 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하면은 로마서 11장을 안 가르쳐줬어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뭐냐?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건 안 가르쳐줬다 이 말이죠. 네가 바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필요치 않고 이미 다 줬다는 이야기를 로마서 11장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는 방향으로 구원을 받겠느냐 묻는 거에요. 네가 바친게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라는 논리는 아예 하늘나라에는 없고 저기 지옥에는 있다는 거에요.
만약에 드려서 복 받는다면 지옥에나 가라 이 말이에요. 지옥에나 가라. 주님이 우리에게 하는 노래는 딱 한 노래에요.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이 고백 말고 다른 고백이 더 필요할까요? 이문세 할렐루야다. 누가 작곡했나. 이문세 아니고 이영훈 친구가 작곡했지만. 오늘 저녁에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노래도 괜찮아요. 여러 가지 버전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이 정도로 나는 죽은 자였었습니다. 죽은 자를 성령이 와서 깨웠어요. 깨 보니까 내가 바쳐서 선교하고 헌금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런 짓 하나 안 하나 보지도 않고 선교를 몇 번했고 헌금을 얼마 그런 거 보지도 않고 충성하고 이런 거 보지도 않고 아예 처음부터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 사랑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을 1도 빼지 않고 조금도 빼지 않고 아버지가 예수님 사랑한 그대로 우리에게 “자 먹어라.”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랑 그대로 온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새삼 뭐 달라고 하지마세요. 그 사랑만 해도 우리는 받을 거 다 받아 챙긴 거에요. 하나 빼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 사랑한 그 사랑을 그대로 준겁니다.
그 사랑이 뭐냐? 죽어라 내가 살릴게. 그 사랑이. 죽어라. 너 어차피 죽을 자 죽어라 그래도 내가 살릴게. 이게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주신 사랑. 버림받아라 내가 너를 건지마. 그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일찌감치 준비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중간 결론은 뭐냐? 이렇습니다. 내가 준비한 것보다 주님이 친히 준비한 것이 더 크다. 내가 마련한 것보다 주님이 우리 줄려고 마련한 것이 더 커요.
이걸 시간적으로 한번 써 볼까요. 시간적으로 쓰면 이렇게 됩니다. 기다림이 내가 기다린다고 애썼던 것보다 더 크다. 초조하게 기다렸던 그 긴긴 세월보다 막상 주어진 그 결과는 내 기다림이 하나도 아깝지도 않아요. 손실한 느낌이 들지를 않아요. 어마어마하게 큰 걸 준비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 걸 준비했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복음을 알면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올 영광은 이 고난과 족히”, 족발같은 거 생각하지 마시고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남하고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말라. 세상에 지옥갈 거하고 경쟁, 비교하지 말라는 거에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물론 이 땅에서 일하게 하십니다. 놀면 안 되지요. 성도가 노동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낯설게 보도록 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낯설게 보도록. 내가 이번 프로젝트만 따내가지고 나는 이제 몇 십억을 벌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얼마나 기쁠까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20억을 딱 손에 쥐니까 ‘나’라는 것이 기껏 20억 줄려고 주께서 찾아 오셨냐. 에이 20억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지금 제가 상상하는겁니다. 20억 없어요. 그런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20억 이게 뭔데. 친구가 그럼 20억 필요 없으면 나 줘 하면 미쳤나? 당장 펀드에 집어넣어야지. 20억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뭐.
갑자기 20억 벌면 마치 행복해지려는 내가 마치 낯설게 느껴지는 거에요. 낯설게. 이번에 교회에서 권사 투표 있는데 내가 권사 되게 되면 진짜 이 교회 갈아치운다. 이 교회 완전히 개혁시킨다. 내가 바른 소리해가지고 주의 종처럼 해가지고 친히 솔선수범해서 봉사하고 와~역시 권사 되더니 당신 없이는 교회 안 돌아간다라는 칭찬받을 줄 알고 딱 했는데 딱 되고 난 뒤에는 아이고 권사 이게 뭔데. 이것 할려고 했나. 본인이 굉장히 날이 갈수록 낯설게 돼요. 이게 전부가 아닐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한테 이별해야 돼요. 늘 나한테 이별해야 돼요. 제가 주일에 설교 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늘 밀어내야 됩니다. 밀어내지 않는 사람은 나 자신을 그대로 있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지옥 갈 사람들 다 집결되어 있어요. 자기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 지옥 다 갔어요. 부자 있잖아요 부자. 나사로한테 에비앙 이거 달라고 주문한 사람 있잖아요. 아직도 거지인줄 알고. 내가 지금 목마르니까 부탁한단 말이죠. 아직도 내가 있는 거에요.
그러나 천국 간 사람은 면류관을 미쳤어 이걸 왜 내가 써. 면류관을 주님 발 앞에 던지는 거에요. 내가 평소부터도 이 땅에 있을 때부터도 내가 나를 밀어냈어요. 주여 나 같은 것은 갖다버리세요. 나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런 생활을 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보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여러분 감사해야 돼요. 우리 교회부터 해가지고 100% 가짜입니다. 100% 가짜에요.
교회가 교회 붙들려고 하면 안돼요. 복음만 전하면 되지 교회 붙들어서 뭐 할 건데요. 필요 없어요. 교회를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교회 오백명 모이는 것이 나의 기다림의 끝은 아니란 말이죠. 고작 500명 기다릴려고. 500명도 있지도 않으면서. 500명 기다릴려고 이렇게 애썼습니까? 주님 기다려야지요. 왜 중간에 토끼처럼 잠을 자요. 거북이 보세요. 기어이 올라가잖아요. 기다림의 끝장 아닙니까 거북이가. 기다림의 끝장이잖아요. 속도는 느리지만 방향은 바르게 간다.
자, 그렇다면 이 악마의 만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왜? 우리가 어떤 한계를 왜 못 벗어나서 자꾸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님, 내가 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꾸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느냐.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수님인데 도대체 우리 생각하고 예수님 생각이 얼마나 격차가 났기에 이러한 우리는 자꾸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만 찾느냐. 거기에 대해서 여기 나옵니다.
여기 2절에 나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거에요. 이게 마귀가 선빵 날리는 겁니다. 마귀는 왜 우리를 선빵 안 날리느냐. 우리는 똑같은 인간인데 뭐 가치도 없는데.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소리할 자격도 없습니다. 자기가 사탄이면서 뭐 사탄아 물러가래. 그냥 마귀는 나 죽을래 이러면 오지를 않아요. 자꾸 어떤 노동의 댓가나 내 것을 자꾸 다독거리고 쥘려고 하니까 마귀가 오는 거에요. 나는 거기서 달려든다고 화내고.
그래서 봅시다. 그래서 성령께서 일부러 최악 조건을 일부러 걸어버려요. 인간은 나를 건들지 말라는 조건을 만드는 쪽에 모든 노력을 혼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나 건들지마. 나 이 정도 된다고. 그런데 성령께서 일부러 예수님한테 40일을 굶어버려요. 40일을 굶어버립니다. 몸무게 몇 키로 빠졌겠어요?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예수님 시험받은 곳에 제가 가봤습니다. 광야에 올라갔어요. 갔는데 꼭 광야까지 가야했나 나는 우리집에서도 잘하는데 이런 생각 들었어요. 40일을 굶은 겁니다. 굶으니까 얼마나 인간이 죄 된 육신을 갖고 있잖아요. 인간은 자기 육신을 못 이긴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 조건을 예수님은 반대로 우리의 죄를 이길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기한테 둘둘 감아버립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킬 수 없도록. 그래야 그 다음 말이 돼요. 뭐냐 하면은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가 말을 너무 길게 했어. 쉽게 하면 되잖아요. 살아라. 너 살고 싶지? 이러면 되는 문제를 너무 길게 이야기했어요.
돌이 떡덩이 되게 하고 하는 그것은 뭐냐? 네가 기적을 베푸는 메시아라면 멋들어지게, 살아도 폼나게 사는 돌이 떡 되는 폼으로. 목적이 뭡니까? 인간 세계에서 기적의 목적은 뭡니까? 추구하는 것은? 죽는 거에요? 사는 거에요? 사는 거죠. 인간 세계의 사는 게 전부 다 악마의 기적이에요. 주님 덕분에 살았다. 그건 악마가 준 기적이죠. 모든 기적은 끝지점을 봐야 돼요. 끝지점이 나를 살리면 이것은 전부 다 천국 못가기 위해서 복음 감추기 위해서 더불어 준 기적입니다.
스데반의 기적이 뭡니까? 병 고치는 거였어요? 아니면 돌에 맞아 죽는 겁니까? 성령이 충만했을 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었어요. 아마 이 세상 사람 이걸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기야 뭐 자기가 믿는 신 믿고 장렬하게 폼 나게 어이구 믿음 좋다 하고 칭찬을 기대하면서 죽는 건 좋은데 너 자식새끼는 어떡할래? 너는 폼난다만은 오늘날 우리가 늘 듣는 시험입니다.
네가 재미나하는 그 복음, 그 복음 재미나게 해가지고 밤늦도록 코로나 무릎쓰고 듣는건 좋은데 이 순간 네 자식들 저녁 굶고 있는 건 생각 안 하나? 그럴 때 여러분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여기 나오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마태복음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했지요.
대구강의할 때 제가 어떤 청년 이야기하면서 청년이 있는데 청년한테 둘 중에 하나를 준다고 했지요. 하나는 사람을 주시던지 아니면 말씀을 주시던지 둘 중에 하나를 주는 거에요 . 사람 받아 버리면 이건 사람 세계에 속해요. 말씀 받아버리면 이 사람은 서울 와서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어디에 섞여서? 떡을 섞어서. 그래서 집에 가서 식사를 하되 말씀 섞인 채 식사준비해주면 돼요. 어떻게 섞이냐 하면 얘들아 나 기다린다고 수고했다. 고맙다. 고맙소 고맙소 그래가지고 맛있는 밥 해주면 되는 거에요. 엄마 성경공부 하는데 그것도 못 참아!!! 이러지 마시고. 고맙소. 고맙소. 고맙다 하면 되는 거에요. 너같은 시험거리 있기 때문에 내가 자꾸 사는걸 포기하게 만들어요.
모든 일이 말씀이 밑에 딱 담겨있어요. 제주도 가니까 망개떡 있어요. 망개떡은 위에서 보면 떡인데 밑에 보면 나뭇잎파리가 전부다 하나씩 다 붙어 있지요. 그처럼 성도한테는 똑같은 일이에요. 똑같이 영화보고 똑같이 백화점 물건사고 똑같이 식사하고 운동해도 뭐냐. 말씀이 밑에 깔려있는 게 성도의 특징. 그 말씀이 없으면 내가 나를 지켜야 돼요. 그런데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뭐냐?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사랑했다는 것이 밑에 해버리면 이런 일로 인해서 실패한다 성공한다 내 인생 꼴아박았다 이겼다 하는게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말씀 자체가 완결성이기 때문에 종결적이거든요. 종결자거든요. 최후의. 마지막. 제가 지난 수요일인가 설교할 때 어떤 분이 그런 전화를 했어요. 시간이 컴팩트됐단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시간이 CD, 컴팩트 디스크, 시간이 압축됐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하길래 장래의 예수님이 하실 일이 이미 아모스의 예언 속에 다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아모스가 예언하고 예수님은 이루고 그걸 도로 아모스가 거꾸로 아모스 예언 속에 거꾸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시대의 이 예언으로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 시대의. 우리 신약은 십자가 이후에 구원받고.
그러니까 컴팩트란 우리가 지난 지루한 시간, 인생, 나 몇 년 살았다 이거 말고 컴팩트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순간 구원이에요. 순간 구원. 딱 하면 구원돼요. 마치 E.T가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는 것처럼. 또는 미켈란젤로의 그 명화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비스듬히 아담하고 누워있으면 손가락 내밀잖아요.
그러면 손가락과 손가락 해가지고 맞춰오면서 흙이 사람이 되는 장면 있지요. 순간 창조죠. ‘순간 창조’. 성령이 오게 되면 떠나지 않습니다. 왔다면 오게 되면 새 창조가 일어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비록 순간이지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모든 창세전부터 마지막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다 컴팩트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 인생은 컴팩트된 다 이루었다가 흘러들어와서 우리 인생 자체가 어떤 인생이라도 만족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화평이다 평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컴팩트되는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그래서 항상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이 없습니다”라는 그런 자세로 보시면 돼요. 이게 어렵습니까? 아니 이걸 몰랐다니. 이런 감사거리가 있는 것을 내가 놓쳤다니. 이렇게 해야지. 지키겠습니다. 다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거는 하나님 속의 가짜에요. 그냥 고맙습니다. 그 고마움 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물론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게 되면 먼저 내 노동의 가치, 노동에 의한 것을 뜯어낼 필요가 있어요. 내 꿈과 희망이 좌절될 필요가 있어요. 아파요. 그리고 이럴려고 예수 믿었나 대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수술할 때는 좀 아파도 할 수 없어요. 수술할 때는 강제로 마취해가지고 배를 자르듯이 우리 아픈 곳을 찌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아픈 순간순간들도 장차 올 주께서 마련하신 것에 비하면 족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맛집 새벽부터 줄서서 기다리지만 먹고 난 뒤에는 뭐 만족했다 안합니까. 그건 내가 못 믿겠어. 아무리 골목식당이지만 못 믿겠어.
다시 말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밥 안 먹는다는 뜻이 아니고 밥을 먹든 죽을 먹든 그 바닥에는 망개떡 잎사귀처럼 항상 말씀의 완성에서 주님께서 더 살으라고 내가 지금 데려갈 수 있는데 지금 아직도 할 일 있으니까..
참 주님이 미안해.
내가 데려가야 할 텐데 좀 수고스럽지만 고생 좀 해라. 내가 한 25억 줄 테니까 고생 좀 해라. 차 벤츠로 바꿔줄 테니까 고생 좀 해라. 너 애 사법고시 수석 합격시켜줄 테니까 고생 좀 해라. 네 아이 수석합격해가지고 네가 성에 안 차는 거 다 알지만 그러나 이왕 고생하는 거 다시 고생 더 하기 위해서 이정도 일단 참아내라 하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60평짜리 아파트 강남 아파트 사주고 이렇게 해주는데요.
그럼 아 또 살아야 되나. 주님의 십자가 고난 위해서 살아야지 뭐. 우짜노 이래가지고 해야죠 뭐. 할 일이 천지 삐까리로 많잖아요. 할 일이 아직도. 따라서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시험 받음을 껴안게 돼요. 주께서 이런 시험을 당했구나.
그래서 이 시험에 대해서는 우리한테는 추가 시험이 없구나. 이 시험 합격한 다음에 너 지옥 가라는 시험이 우리한테는 면제되어 버리는 거에요. 면제되어 버리는 거에요. 예수님 단순히 모범이 아니에요. 껴안은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십자가에서 이루었다 할 때는 시험을 버틴 시험을 이겨버린 그 몸을 껴안으니까 우리로 하여금 마귀의 시험이 어떠함을 인생을 통해서 오늘이든 내일이든 알게 하실 거에요. 아 주님께서 이 시험을 당하셨구나.
그런데 똑같은 시험을 우리가 지금도 당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주님과의 동류,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동류 또는 요한복음에는 친구. 동류라고 해요. 운명을 같이 한다고요. 가는 길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동류, 같은 부류라고 이렇게 표현했어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예수님이 시험받은 것을 체험하면 되지요. 자 오라~ 시험이이여 오라. 어차피 우리는 합격된 입장에서 까짓것 시험받지 뭐. 일부러 굶지는 마시고요. 굶게 하실 때가 있을 거에요. 밥 안줘서 한 24시간 굶을 때가 있을 겁니다. 밥 할려고 하는데 삐져가지고 싸워서 밥 안 할 때는.
그 다음에 5절에 봅시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째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두 번째에 나와있어요. 천하만국을 보여줬다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요. 천하만국을 예수님이 마귀하고 같이 갔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우고 이 자리에 여러분을 세우는 거에요. 왜냐하면 여러분들 속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마찬가지인거에요. 세웠다 합시다. 마귀가 하는 말이 다 줄게. 다 줄 거란 말은 이 모든 것은 지금 누구 권한 안에 있다? 줄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세상 모든 이 세상 신, 마귀 손에 있다는 것을 마귀가 예수님 앞에서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내용증명하는 거에요. 이미 최고 지도자 그런 것 따지지 마. 최고 지도자 이미 정해졌어요. 마귀, 악마. 악마가 최고 지도자에요.
사람이 정신에 문제에 있어서는 육체도 그렇지만 정신을 장악하면 모든 걸 장악한 겁니다. 정신 문제에서 가장 우수한 도를 닦는다든지 진리는 깨우친다든지 뭐 하늘을 해도 그 최종 지점에는 누가 가 있어요? 예수님이에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인간은 나 중심이기 때문에. 나 중심인 이상은 우리의 대장은 악마가 우리 대장입니다. 나 중심. 내 중심으로 되어있는 거.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자아라는 것은 원래 없었는데 자아라는 것은 자의식이거든요. 자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었는데 내가 나를 볼 필요가 없었는데 나를 보고 벌거벗었음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순간 이 사람은 이것이 그 사람의 몸의 기본이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인간이 하려고 하는 것은 그 부끄러움을 감추는 일에 모든 노동을 다 거기다 쏟아놓는 거에요. 부끄럽지 않는 조건을 만드는 거에요. 인간이 한평생 노력하는 것은 내가 절대 부끄럽지 않는 존재인 것을 증명할려고 인간은 모든 한평생을 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소모했어요. 내가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나를 무시하지마라 또는 나는 남한테 지기 싫다는 것.
그 악마의 본성을 악마가 딱 내가 나를 보는 그것만 딱 집어넣어버리면 그 정신만 집어넣어 버리면 나머지는 뭐 악마가 시키는대로 하는 거죠. 그 자기 하수인들을 시켜 놓으니까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부지런히 만들어 놓은 그 모든게 뭐냐?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문명이라고 합니다. ‘문명’. 악마의 지시를 받아서 죽을둥 살둥 젖 먹는 힘으로 한번 가봅시다. 오늘 죽던 살던 한번 가봅시다. 자, 갑시다. 청춘을 돌려다오. 젖먹는 힘으로. 테스형한테 배워가지고 하는데.
문명이에요 문명. 어떤 문명? 우리들이 잘 사는. 내가 필히 포함된 내가 잘 사는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지혜와 그 성의와 그 정열과 모든 아이디어를 다 쏟아붓는 겁니다. 코로나를 정복해야 되고 이겨내고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야 되고.
문명의 역사는 질곡과 좌절과 극복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구에서 못 살면 화성에 옮겨 살면 되지. 화성 못 살면? 목성에 가나? 전부 다 무슨 소리해도 마지막엔 뭡니까? 살자. 이 ‘살자’ 때문에 구원을 훼방한다니까요. 악마가 이걸 노린 거에요. 협박과 급박과 공갈 모든 것은 결국은 우리가 어떤 자신일 때 오는 거에요? 유의미있게 오는 겁니까? 내가 살고 싶을 때 협박, 공갈.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습니다. 아주 정의로운 형사가 딱 체포됐어요. 재벌 3세가 사람 사가지고 “너는 절대로 우리를 고소하지 마라.” “어림도 없지 나는 정의로운 법을 지키는 형사로서 내 본분을 다 할 것이다.” “그래?!” 그 때 전화 딱 해. “통화해봐라.” “아빠!” 딸의 음성. “네가 만약 우리말 안 들으면 딸은 죽는다.”
그러면 일관되게 딸이 죽든 말든 딸이야 늙으면 죽는다. 나도 죽는다. 그러면 되는데 이러지 않아요. 내 딸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는다! 딸도 정의롭죠.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니까. 아버지 구하지 마세요. 저는 어떻게 되든 괜찮습니다. 그 딸 그렇게 외쳐도 나중에 데이트 폭력 당하면 신고할 건데.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뭡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가정법을 뭐라고 했던가요? 자연법이라고 했지요. 이건 타고난 것. 내가 스스로 어떻게 지울 수 없는 본능적인 것. 국가의 법 말고. 엄마가 밥 하면서 월급 달라고 합니까?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노동해도 이거는 사랑이라. 댓가 없어. 내 새끼 내 남편 우리 가족은 내가 책임진다. 여기에 무슨 돈이 있어요? 남편이 바깥에 노동하고 관계없어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이 영적 전쟁, 이 세계 전쟁에 대해서는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누구든지 무조건 착출해가지고 전쟁에 내보내지요. 애굽의 맏아들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괜히 히브리인들 보내가지고 모조리 온 집안에 전쟁 통, 여호와의 전쟁에 다 죽었잖아요. 다 전사했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싸움하는 나라에요. 그 싸움통에 영적 전쟁통에 귀한 육적인 아들 애굽의 맏아들까지 바로 왕의 맏이까지 죽어버렸단 말이죠.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이건 그냥 성경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 그대로를 말해줘요. 현실 그대로를 말해주는 거에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거에요. 우리가 주어진 태어난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새삼스럽게 손쓸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또 나온다. 네 번째다.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볼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되고 죽고 싶어도 죽기 싫고 어떻게 내가 내 단도리를 못해요. 주님께서는 못해도 괜찮다는 거에요. 못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내가 너 조건보고 사랑했던가? 이미 네가 나를 사랑하기 이전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 천하만국을 보게 됐을 때 우리가 여기 서게 된다면 악마가 다 줄게 라고 하지요. 거기에 대한 답변. 객관식 1번 안돼. 2번 다오. 몇 번입니까? 몇 번이에요? 악마가 다 줄게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경상도 말로 “도”. 몇 번입니까? 정답 2번이지요. 2번이지요.
이래야 우리가 죄인답죠. 챙길 건 일단 챙기고 구원은 구원대로 챙기고 이거 남는 장사 아닙니까. 이거 요령이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어려운거 뭐가 있습니까? “안돼”라고 한다고 해서 보통사람들은 “안돼”를 정답으로 하는데 이게 이제 얍삽한 거에요.
“안돼”하면 더 줄까 싶어서. “안돼”라고 신앙티를 내게 되면 혹시 하나님께서 아이고 착하구나.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그럼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그럼 다 가져가거라. 그걸 딱 알아가지고 다 챙길려고. 욕심쟁이 우후훗. 그냥 줄 때 받아 챙겨놓으세요. 어차피 아무리 많아도 나의 존재는 주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마귀가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이 주신 거에요. 우리가 지금 없어서 난리지. 주면 입이 헤~벌어지지요. 주님이여 이것 가지고 참 떠나고 싶지만 주님이 떠나지 말라면 돈 한 250억 쓰고 돌아가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쓰고 가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해요. 천하권세 모든 영광이 성도한테는 그 영광과 권세가 다 불쏘시개 지옥의 불에 들어갈 벌벌 끓는 그거 있잖아요. 도가니 속의 영광이에요. 곧 불로 재가 될 영광. 그러니까 우리는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거에요. 쓰레기니까 뭐 당신한테는 귀하지만 나한테는 쓰레기다. 쓰레기 가져가라 이 말이죠. 죽음이 끓고 있는 현재 이 죽음 같은 세상을 사람들은 속이죠. 영광이라고. 복음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온갖 개념들을 다 반대로 다 바꿔놓는 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안의 아버지는 몰라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체적으로 폐쇄적이기 때문에. 기껏 우리는 이걸 대체해서 하나님 속의 메시아로 이것 가지고 천당갈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러나 이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예수님의 시험을 극복 못한 자들이 쳐다보는 그러한 가짜 이미지입니다.
진짜 이미지는 얼마든지 이런 시험이 오더라도 반길 수 있어요. 이겼으니까. 이미 이쪽으로 건너왔으니까. 주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니까. 마음 편안하게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잘못에 대해 묻지도 않고 잘못에 대해 지적하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보세요 또 소유격. 하여튼 이 세상은 내 것 아니면 네 것, 네 것 아니면 내 것. 전부 다 것으로 놀아요. 왜? 인간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사니까. 내 것이 될 때 그걸 둘러치는 그게 존재가 되는 거에요.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소유 있어야 돼요.
자살할 때 내 몸 내가 버린다 하잖아요. 자기 소유잖아. 우리는 소유가 없는데 자꾸 소유를 찾고 있어요. 악마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오늘 제일 중요한 게 7절이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그 다음에 다 같이 읽어볼께요. “다 네 것이 되리라.” 네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네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번듯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게. 이게 악마라는 말 하지 말고 여러분의 선배고 친구라고 생각하세요. 가볍게 여러분의 친척이고 형제로 생각해보란 말이죠.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안돼” 하지 말고 “도”. 그 쓰레기 줘.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악마가 하나님 안에 있는 메시아를 생각할 때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 경배하고 그 하나님 경배했다고 그 댓가로 주어지는 그 축복으로서 내 것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 악마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축복으로 준 것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욥기에 나오지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 될 때 그 때 그 인간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내 것 없는데 존재가 생기는 거에요.
이 세상은 내 것이 있어야 존재가 되는데 가져가도 주의 것입니다가 되는 그런 조건이 성립되는 것.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 경배할 때 주어지는 주님의 것으로서의 내 모습이죠. 그게 존재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전도서의 말씀대로 너무 아낄려고 하지마세요. 아낄려고 아낄려고. 너무 아낄려고 하지마세요. 샤바샤바 그런거 하지 마시고 쓸 때 써야 되지 아껴봐야 눈독 드린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와가지고 아버지 오늘 뭐 샀는가 한번 보자. 명절날 와가지고 쓰윽 한번 검열해요. 친정집에 뭐 새로운게 들어왔는가. 어! 로봇청소기 들어왔네. 말하게 되면 또 엄마가 얘야 너희 없는데 가져가라. 이야기 안하겠어요? 왜? 자연법이니까. 딸이 잘 되는게 누가 잘된다? 내가 잘되는 거니까. 나는 없어도 돼. 너희만 잘 살면 되지. 나 같은 건 뭐 없어도 괜찮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이게 자연법, 혈육적. 그래서 우리의 원수가 집안 식구.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왜 성전꼭대기에 서커스할 일 있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건 뭐냐 하면은 뛰어내리라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적. 자, 악마의 생각은 이겁니다. 악마의 생각은 이거에요. 뛰어내려도 죽었다? 살았다? 어느 게 기적이에요? 뛰어내렸는데 죽었다? 살았다? 살았다가 기적이죠.
항상 악마의 기적은 항상 마지막에 멀쩡하게 살았다. 인간답게 살았다. 존경받고 살았다. 살았다가 악마의 카드에요. 그 악마의 카드를 친척의 카드, 내 친구의 카드 심지어 내가 나한테 내민 카드. 사람은 한평생 사는데 사람답게 살아야지. 이렇게 지지리 궁상. 이게 사는 건가. 내가 나를 불평을 하고 내가 나를 체벌하고 나무래고 따지고 그러면 안돼요.
인간의 모든 범죄는 본인이 본인한테 미안할 때 생긴다고 했지요. 내가 나를 다독거리면서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지금 돈을 못 벌었구나. 기다려봐라. 내가 사기 치더라도 내가 너 호강시켜줄게. 이게 범죄의 시작 아닙니까. 범죄 뭐가 있어요. 자기가 자기하고 의논해서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요.
뛰어내리라 할 때 10절에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기록되었다는 말은 악마가 이야기한 거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한 거에요? 이 귀한 시편의 말씀을 누가 인용한 겁니까? 악마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지금 대사가 각본대사 잘 봐야 돼요. 이 대사를 악마가 한다고요. 악마가. 성경구절 달달 외우는 여호와의 증인이 한다니까요 이걸. 성경구절을 외우는 건 좋은데 마지막에 뭐가 있으면 안 된다? 산다가 있으면 안돼. 산다가 되면 안된다. 이렇게 하면 빨리 세상 끝난다 이게 되야 되는데 산다가 되어 버리면 성경 구절 잘못 적용한 거에요.
여러분 기도합시다. 기도해서 코로나 시대 우리나라 위해서 기도합시다. 기도하면 얻는 게 뭡니까? 우리나라 잘 삽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기도하게 되면 우리 교인들 많이 옵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 안 되는 거에요. 그 기도 엉터리 기도에요. 이쯤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발 뺄 수 있습니다 이런 거.
그러니까 그 말 듣고 옛날부터 저보고 하는 소리가 목사님 기도할게 없어요. 기도할게 없으면 기도 안하면 되잖아요. 나 참 답답해. 기도 안하면 되는데 왜 꼭 기도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있는 거라도 날라갈까 싶어서. 있는 거라도 망칠까 싶어서. 있는 것 내 것 아닙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요. 내 것 아니에요.
우리는 소비만 돼요. ‘소비’. 남편 되시는 주님이 월급 주거든 우리는 아내가 되가지고 백화점에 가가지고 룰루랄라 쇼핑백 여러개 놓고 이 땅에서 싸돌아다니면서 백화점마다 다 돌아다니면서 소비하면 되는 거에요. 소비도 못합니까. 바보들이지. 소비하면 돼요.
우리의 목숨도 소비하고 우리의 간, 신장부터 해서 다. 지금도 소비하고 있어요. 지금도 날이 가면 갈수록 간이 안 좋고 피곤해지고 그렇잖아요. 연세 많은 분들 다 느끼잖아요. 알아서 빨리 소비하란 뜻이에요 그게. 오래 지탱하지 말고 떠날 때 되면 빨리 떠나란 말이죠. 떠나야 반가운 분을 만나지요.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거에요. 긴긴 기다린 시간을 끝장낼 때가 오면 반갑지요 도리어.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네 쪽에서 내 쪽으로 건너올 생각하지 마라. 절대로 너와 나는 끝난 상태다. 관계가 끊어졌을 때는 이미 시험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관계가 끊어졌을 때.
우리는 주님을 시험할 필요 없어요. 주님 것이 우리 것이기 때문에. 하나이기 때문에 구태여 테스트할 필요가 없어요. 테스트한다는 것은 거리가 떨어졌다는 거에요. 사회적 거리두기 합니까? 주님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이만큼이라도 우리를 지금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살려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마귀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이야기가 된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마귀를 무서워하지 말고 주께서 경험했던 그 경험을 기쁘게 받아내는 남은 생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