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26절 (정착과 뿌리) 20111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21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사야 61장에 나와 있는 그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두 가지를 구분하시면 간단합니다.
하나는 내가 어디에 정착하느냐? 이거는 구약초기 출애굽 당시의 사정이라고 보면 돼요. 내가 어디에 정착하느냐? 애굽에서 일단은 나왔는데 어니 갈 거냐? 우리들이 어디에 집단적으로 갈 것이냐.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이렇게 되겠지요.
두 번째는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솟아날 것인가? 이것은 신약이죠. 이것은 신약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솟았느냐 하는 것은 여기는 내가 있고 우리 또는 집단이 있고 난 뒤에 이 집단이 애굽에서 살았는데 또 어디 가서 이렇게 살 것이냐 이렇게 되는 거죠.
이 집단이 이렇게 있는데 땅이 있는데 애굽에서 나왔던 홍해 건넌 우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위에서 이 땅이 아래 있고 이들이 위에 있다면 위에서 땅을 그냥 정착하는 거죠. 이것은 정착이죠 ‘정착’. 정착하는 거에요. 이미 우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있음 또는 우리가 있음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거는 뿌리가 있고 그 뿌리가 자라서 우리가 되는 거에요. 우리라는 자체가 애초에 없는 겁니다. 없는 거에요. 이거는 신약입니다. 솟아나느냐? 아예 우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없고 뭐부터 먼저 있느냐 하면은 뿌리가 먼저 생겼고 뿌리가 자라나서 새로운 우리가 되는 겁니다. 신약적이에요.
구약은 이미 있는 우리가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이것은 신약적이 아니고 구약적이죠. 구약적. 시골 살다가 서울에 취직했다. 그러면 서울에 전셋집 어디쯤 얻겠느냐? 서울 시내 가까운데 교통 좋은데 전셋집 알아 봤는데 없어요. 어디 갈까 하는데 의정부로 가. 멀리 가죠. 이것은 정착 문제죠. 여기는 이미 있는 내가 또 어디 가서 또 살 것이냐의 문제고 구약적입니다. 구약적.
신약적은 뭐냐 하면은 아예 ‘나’라는 게 없어요. ‘나’라는 게 없는데 그 천국 가는 나는 없는데 뿌리부터 뭔가 박혀서, 뿌리가 박혀서 뿌리가 땅에 있는 뿌리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뿌리니까 옥토에 떨어지니까 옥토가 저절로 뭘 냅니까? 우리라는 백성을 내는 거에요. 그게 나중에 마태복음 13장에 연속적인 비유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천사가 추수꾼은 천사라. 좋은 알곡과 나쁜 것을 가려내서 심판을 한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 우리는 뿌리부터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구약적인 ‘나’가 또는 우리가, 구약적인 ‘나’가 신약의 우리로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들은 기껏 들어간 것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지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여기 우리의 뿌리가 먼저 생기고 난 뒤에 그 뿌리가 솟아나서 신약의 우리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하는 이런 것도 다 구약적이죠.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런 게 없어요. 예수님이 친히 뿌리가 되셔가지고 예수님의 친히 포도나무가 되셔 가지고 예수님이 친히 열매를 맺으면 그거 자체가 천국백성인데 천국백성이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나의 뿌리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나의 뿌리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나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이에요. 신약에서는 내 뿌리는 내 담당이 아닙니다. 내가 뭐 뿌리까지 걱정. 뿌리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주님이 나는 너의 뿌리다 이렇게 해놓고 나중에 몸체로 자라나고 보니까 그게 성도가 된 거에요. 게임 끝났어요.
이건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이게 신약적입니다. 신약적. ‘적’ 자 하나 붙이는걸 주의해야 돼요. 신약에 와도 늘 삶은 구약적이니까. 구약만 구약적이 아니고 신약에 와도 구약적이에요. 신약의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많은 사람이 다 구약적이고 신약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이지만 신약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21절에 “이에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여기 새로운 집단이 생깁니다. 집단이 생기니까 23절에 반발이 나오죠. 반발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너는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셉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굉장히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사적이고 개인적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우선 사적으로 오셨죠. 맞아요. 요셉의 아들. 요셉의 아들로 오셨어요. 사적으로 오셨는데 사적으로 오셔가지고 어디를 가셨냐? 사적으로 들어오셨다가 집단적으로 나오셨습니다. 나오셨는데 이 집단적이라는 게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새로운 집단의 유일한 개인이 돼요. 첫 번째 사람 돼요. 따라서 성도라는 것은 개인적인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성도에요. 성도라면 집단에 속해 있어요. 개인은 예수님에게만 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그래서 이걸 들어갔다 나왔다. 예수님 들어갈 때는 육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성령을 받아서 나왔잖아요.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지요. 그 다음에 성령을 힘입어서 광야에서 누구한테 시험 당했습니까? 악마한테 시험 당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집단의 대표자 자격이죠. 대표자 자격. 집단의 대표자 자격이란 말은 집단은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대표자가 알아서 다 하기 때문에. 대표자가.
요즘 드라마 보면 부잣집 재벌집 아들 말썽꾸러기 마약하고 있을 때에 그 아버지 회장님이 그 망나니 아들 때문에 골치 아파도 아들보고 전화해서 “걱정하지마. 우리 담당 변호사 보낼게.” 그냥 변호사 보내서 돈 주고 해결 다 해버리죠. 회장님이 대표자 자격이죠. 아들은 망나니짓만 하면 되는 거에요.
우리라는 것의 유일한 대표자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셨던 그 코스. 들어갔다 나갔다. 그 코스대로 하면 예수님 들어올 때는 육으로 들어왔지요. 사적인 육으로 들어왔습니다. 나올 때는 집단을 대표하는 성령 오셨지요. 그러면 우리가 육으로 태어날 때는 사적이죠. 사적으로 해가지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 세례를 받게 되게 되면.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2가 아니고 1이 되는 거에요. 하나가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성령세례의 하나의 표현은 뭐냐 하면은 ‘사랑’이죠. 사랑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거거든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례’라고 해도 되고 ‘연합’. 하나의 축에 톱니바퀴가 같이 물려 있어가지고 하나 돌면 같이 따라 도는 이게 연합의 상태. 연합된 상태에요.
주님께서 뭐 우리한테 잔소리할려고 오신 게 아니고 아예 우리 인생 속에 들어와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끝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끝나고 집단의 일원이 돼요. 집단의 일원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또 우리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계속해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할 것은.
개인 + 개인 해서 이래서 집단을 이룰 것 같으면 이 집단은 육으로 들어가서 나올 데가 없어요. 아까 이걸 무슨 적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적. 구약적은 우르르 모였다가 애굽에 모였다가 약속의 가나안 땅에 사는 것, 정착하는 것이 목적이죠. 그러나 신약은 뭐라고 합니까? 아무도 이 땅에 어디에 정착해도 그것은 멸망의 땅에 정착하는 거에요.
멸망의 땅에 정착하기 때문에 정착에서 새로운 뿌리가 등장해요. 새로운 뿌리가. 정착에서 뿌리가 되게 되면 뿌리는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싹이 나와요. 싹이. 여기서 싹이 나와서 나중에 열매가 맺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작은 씨 뿌려가지고 큰 나무 생기지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우리도 역시 사적으로 들어왔다가 사적으로 나오면 안돼요. 육에서 육으로 나오면 안 되고 사적으로 나왔다가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게 우리가 하나의 예수님이 대표자가 되는 집단을 구성하게 됩니다. ‘집단’.
집단이라는 것은 뭐가 벌써 날라가버렸다? 사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소유라는 것은 다 날라가 버린 거에요. 기분 되게 좋지요. 기분 좋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내 걱정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내 걱정이. 내가 있어야 내 걱정이 되는데 집단이 되는데 걱정할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또 다시 둘을 이야기해 봅시다. 1번 먼저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하나님께서는 뭔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주시는 분이다. 사도행전 17장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 맞지요? 이 말 맞아요. 틀림없이 성경에 나오니까요.
사도행전 17장을 보게 되면 17장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그 다음에 뭡니까?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 이시죠.
이걸 만약에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진짜 썩어가는 이빨까지 하얗게 되는 머리까지 전부 다 주님께서 주시는 거죠.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은 받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돼요. 받기만 하는 존재. 그러면 여기서 받기만 하는 거니까 줄 필요도 없으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가 나오겠지요.
자, 이런 신앙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게 틀린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주시는 이유는 도로 받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제 유명한 욥기 1장에 나오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2번 주시는 이유는 도로 받으시기 위함이다. 대표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걸 받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액션.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액션은 챙기는 겁니까? 자기의 목숨, 살과 피까지 아버지께 드리는 거에요? 도로 드리는 거죠. 우리 1번은 받기만 해도 좋으니까 감사가 되죠. 그러나 주님의 감사는 뭐냐? 현재 자기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드릴 때 드리는 방식이 1번 자살이었다. 2번 살해당함이다. 몇 번입니까? 살해당할 때는 여기에 협조자가 있었지요. 악마의 종들. 다시 말해서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공격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뺏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 의해서 빼앗기는데 주님은 그걸 뭐냐? “아버지여 내 모든 것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내 모든 것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여”
지금 우리는 1번에 되게 감사해요. 1번에 감사한데 예수님이 우리의 집단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할 것 없지요. 그 문장을 둘로 이렇게 이어봅시다. 사람에게 빼앗길 때 우리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두 문장을 이은 겁니다. 내가 사람한테 빼앗길 때에 우리는 걱정 염려할 게 하나도 없게 돼요. 문장이 이상하게 되지요?
자, 어떤 사람이 보이스피싱 당해서 한 1200만원 날라갔습니다. 1200만원 날라갔다 칩시다. 이 사람은 성도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라면 1200만원 할 때 이 보이스피싱은 나쁜 사람들이죠. 돈을 뺏어가니까. 1번 보이스피싱한테 1200만원 뜯겼다. 2번 1200만원 하나님께 헌금했다. 몇 번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1200만원이나 하나님께 헌금한 거에요.
왜냐하면은 그 가는 경로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우리의 집단의 대표자가 갔던 경로가 빼앗기는 식으로 드리게 되는 거에요. 그냥 내가 헌금하는 게 아니고 빼앗기는 식으로 하나님께 내 몸과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드린 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제가 분명히 여러분 때문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입니다만 아무 염려하거나 아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스피싱 당해도 아무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 하는 것 치고는 좀 과격하지요. 혼이 나가지요. 과격하지요.
바로 사람들은 뭘 놓치는가. 성경 해석할 때 2번을 놓치는 겁니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서 스탑됐어요. 여기서 스탑되어버렸어요. 뭐할라고? 정착할라고. 정착 왜 하는데? 정착은 구약적인데? 2번이 돼야 돼요. 왜? 우리의 정착은 위에 있으니까. 주님 따라가면 돼요. 주님이 바쳤다면 우리도 같이 바치는데 알아서 바치면 안돼요.
헌금하고 이런 짓하면 안됩니다. 뜯겨야 돼요. 사기당하고 몸 아파서 치료비 2000만원 날라가고. 왜? 건강 이런 것도 뜯기는 거니까. 왜 드린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우리는 왜? 주님은 분명히 드렸는데 어디까지 드렸습니까? 내 살과 내 피 목숨까지 드렸는데 우리는 주님한테 다오 다오 달라고만 하고 있어요. 그거 받아서 뭐할라고? 뭐 할라고 달라고 하는 겁니까?
1번에서 2번으로 내려가야 됩니다. 1번에서 2번. 아무리 이론상 모든 것은 주의 것입니다 신나게 외쳤지만 막상 1번에서 2번의 지경으로 나가버리면 갑자기 사적인 분노가 일어나지요. 이러고는 못 산다. 나 이러고는 못 산다. 하나님 믿는 보람 없이 나 이러고는 못산다. 갑자기 여기서 집단이 나오는게 아니고 개인이 나와 버리는 겁니다. 나 이래서는 못산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 맞춰 보면요 얼마나 어설픈지요. 뭔가 앞뒤도 안 맞고 어설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여기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케함을” 이걸 받을 수 있는 위인은 신약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한명도 없고 단 한명이 있는데 한명이라는 게 이게 사적이에요.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입니다. 이 개인적으로 오신 분, 그게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 맞아요. 요셉의 아들입니다. 어?! 저 요셉의 아들이잖아. 사적이에요. 요셉 집안의 아들이에요. 다른 집안 말고 요셉집안이라는 하나의 사적인 집안의 아들이에요. 맞아요.
사적인 집안의 아들이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아무도 예수님만 바로 희년의 복을 누려야 될 분 바로 예수님 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들어갔다가 개인적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집단으로 나와요. 집단으로. “너희에게 임하니라” 갑자기 ‘너희’라는 없는 새로운 집단이 발생된 거에요. 이사야 61장에 의해서.
너희가 누구냐는 그것은 이미 있는 자가 정착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없는데 문제는 뿌리가 있으니까 뿌리에서 열매가 맺을 거에요. 너희라는 그러한 종자들이 마구 올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 대표자가 돼서 나올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적들은 뭡니까? 이렇게 했지요. 요셉의 아들이잖아요. 그래 요셉의 아들이잖아.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들은 짤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르는 거에요. 자기들이 속해 있는 그 집단과 예수님이 속한 집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개인에서 어디로 나간다? 집단으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는데 이걸 좀 어렵게 표현하겠습니다. 어렵게 표현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 집단도 이 세상에 눈에 띄니까. 세상의 집단하고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집단하고 구분이 안 되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개인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말씀으로. 개인에서 말씀으로 되는 거에요. 그럼 중간에서 개인은 여기서 없어집니다. 주님께 바친 게 돼요. 개인이 없어지고 말씀과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쓰레기 버릴 때 어디에 버립니까? 봉지에 담아 버리지요. 개인은 봉지에 담아 버려야 돼요. 이 봉지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라는 말씀 완성의 상태에다가 개인이 담겨져서 하나님께 바치던지 드리던지 천국가던지 뭐든지 이 봉지가 있어야 돼요. 개인적으로 못갑니다. 개인의 자격으로 갈수 없어요.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니까.
사적으로 육으로 들어갔다가 뭐로 나와야 된다? 성령으로 나와야 된다는 말은 그 성령이 봉지에요. 봉지에 담겨서 하늘나라 가야 하늘나라는 받아줍니다. 봉지 없이 사적인 자격으로 하늘나라 못가요.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개인은 말씀화 돼요. ‘말씀화’. 말씀화 돼야 돼요. 교회에서 김집사님 이집사님 전부 다 개인화 되거든요. 김말씀 이말씀하면 이건 개인화 아니고 말씀화 되는 거에요. 그런데 발음이 좀 이상해. 안 어울려. 어울리지 않아요.
전부 다 말씀이에요. 말씀이란 말은 말씀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검은 봉지에 담겼다. 전부 다. 개인적인 말씀과 결합이 돼서 말씀 안에 담겨버린 거에요. 그러면 말씀은 유동적이고 늘 움직이면서 말씀은 말씀끼리 결합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김집사 박집사 사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김말씀 박말씀 말씀이 말씀과 만나버리면 그의 끈끈한 연대, 본드. 말씀만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겁니다. 말씀만. 목사님하고 제가 만났다. 목사님하고 저와 만난 것이 아니고 말씀이 목사님을 데려왔고 저는 말씀이 데려왔고 그래서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중재가 되어서 만났다면 그 현장에서 뭐만 드러나요? 너와 나의 대표자 말씀만 드러나는 식으로 신약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이 말입니다.
들어보면 별로 어려운건 아닌데 이상하게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왜 개인은 안 됩니까? 왜 개인은 안 되고 개인이 뭐로 바뀌어야 한다? 이게 말씀으로 바뀌지는 이유가 뭐냐? 영적화 예수님의 집단화 같은 말입니다. 왜 개인이 말씀화 되야 되느냐 하면은 이 개인은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 개인이 따로 그들이 집단화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욕망은 주어를 만들지 않는다. 욕망은 주어를 만들지 않아요. 욕망은 다른 말로 하면 단일한 주체, 단일한 객체를 욕망은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 자체가 통하기 때문에 그래요. 욕망 자체가. 쉽게 말씀드리면 독가스 안에 들어있는 김신애 이신애 박신애에서 나중에 독가스 먹고 다 죽었을 때에 김신애니까 죽었네. 박신애니까 죽었네 그런 거 없어요. 전부 다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독가스 때문에 죽은 걸로 되어 있어요. 독가스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사적으로 이 사람은 나이가 40이네 50이네 이렇게 따지는게 아니고 왜 하나님 보시기에 왜 죽었느냐하면 독가스 때문에 죽은 거에요.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사적인 것에 비교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사적인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사적인 것을 능가하는 그들의 욕망 때문에 죽은 거에요. 욕망.
실제로도 이 욕망에 대해서 많은 세상적으로 정신분석학이고 이 욕망에 대해서 굉장히 연구가 많이 되어 있어요. 이 욕망에 대해서. 욕망, 욕구, 요구, 욕심 뭐 이런걸 대표해서 욕망이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전부 다. 여기서 desire, 갈망, 기대 전부 다 이 욕망에 해당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실생활 살면서 이런걸 많이 느꼈을 거에요. 노동시장에 두 사람이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이 새벽 4시반에 일어나가지고 오늘도 취직되기를 어슬렁거리면서 담배피면서 앉아있단 말이죠. 가로등 밑에서. 노동시장에서.
둘이 뭐 너는 좌파니 우파니 하고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봉고차 하나가 와가지고 여기 회 뜰 사람하고 다른 양식할 사람 하면 둘이 그렇게 좌파 우파 싸우다가 차 하나에 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들은 하나의 그날 일과는 협조가 잘 돼야 돼요. 안 그러면 일이 안돼요.
종로에 보면 세운상가 있지요. 세운상가에 보면 인력시장 같은 거 있어요. 새벽에. 그러면 여기는 오후에요. 오후 한 4시나 5시에 와가지고 봉고 하나 와가지고 여기 드럼과 기타 칠 사람?! 세션 뽑는 거에요. 여기 드럼 하나 기타 하나 베이스하면 우르르 그날 밤에 룸살롱 가서 기타치는 거에요. 밴드가. 인력시장되는 거에요. 그러면 저희들끼리 밴드니까 마음이 잘 맞아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나의 사적인 개념보다도 무엇이 우선이다? 욕망. 이 욕망이 나를 길들입니다. 순화시키고 통제시키죠. 회사가 그거 아닙니까 회사가. company. 오늘 영어 막 나온다. 회사가 뭡니까? 사적인 이런 자존심 이런 거 봐줍니까? 안 봐줍니까? 오직 회사를 위해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그것뿐이잖아요. 집단 욕망 아닙니까?
사표내면 끝나지만. 사표내기 전까지는 이게 욕망이 뭘 이긴다? 사적인 나를 주어 역할 못하게 만들고 단일주체 인정 안 하고 단일객체도 인정 안 해요. 나는 나입니다도 인정하지 않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이라고 내가 지목할 권한도 없어요. 객체는 회사가 정하고 욕망이 정합니다. 심지어 방금은 회사라고 했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 욕망, 욕구, 희망, 갈망 이 세상은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많이 연구가 되어 있어요. 인간의 욕망. 다시 말해서 자아, ‘나’가 어떻게 타인을 만났느냐. 내가 어떻게 타인을 만나느냐? 여러분들이 교도소에 가봤어요. 교도소에 봉사도 가보고 면회하는 것도 가봤는데 교도소 면회하러 가면 여기 앞에 투명한 유리막이 있지요. 구멍 뿅뿅 뚫린 것. 영화 보면 많이 나오잖아요.
죄수복 입고 앉아 있고 대화하는 거 있지요. 나 나가면 너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투명한 유리벽이 나와 너 사이에 가로막혀 있어요. 개인으로 자아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할 때 그때는 그냥 쉽게 나는 나인 것처럼 너는 요셉의 아들이라 할 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이게 성립 되냐? 안 되냐 하는 거에요.
제가 처음부터 욕망에서는 단일주체와 단일객체는 성립이 안 된다고 했지요. 누가 나보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돼요. 내가 보기에 너는 이런 사람이야. 내가 딱 보니까 인생 경험상 인생 한 80 살았는데 너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본인도 욕망에 휩싸였는데 뭘 또 정당한 근거가 내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없어요.
투명한 유리 안에 딱 들어있습니다. 들어있으면 타인이 나에 대해서 들어오지요. 자기 욕망과 소속될 수 있는가를 점검 차원에서 들어오지요. 내가 소속된 내 욕망의 집단에 저 사람을 넣어줄까 말까 우리 동지로 해줄까 적으로 간주할까 나오지요.
나올 때 자아는 그냥 하지 않고 이 투명한 유리 안에 있다면 여기서 뭘 날리느냐 하면은 가짜 정보를 날려요. 가짜 정보를. 나는 기도도 못하고요 헌금하는 것도 내가 아까워 죽겠어요. 우리 애는요 공부도 되게 못하고 우리집은 맨날 싸워요 라는 것을 처음 간 교회에다가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촌에서 한 20년 신앙생활 했습니다.” “아이고 집사님이네.” “집사님은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공부도 못하고 헌금도 집안이 가난해서 못해요. 그리고 맨날 남편하고 싸워요.” 하고 가짜 정보를 날려버려요. 가짜 정보를 날려버리면 왜 날리느냐 하면은 그래야 타인이 나를 장악하는데 혼선을 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은 가짜뉴스에요. 가짜뉴스라고요.
그러면 자기들끼리 씹어 돌리겠지요. 자기들끼리. 새로운 사람 집사 있잖아. 내가 딱 보니까 자기 집도 엉망이고 우리가 어려울 때 좀 도와주자하고 상대적 우월감을 주는 거에요. 이 가짜뉴스가 퍼집니다. 가짜뉴스 퍼질 때 나는 뭐냐 하면 나를 감추는 전략을 성공한 거에요.
인간은 철저하게 잡을려면 잡아라 이런 식이거든요. 철저하게. 계속 가짜 정보를 날리면서 투명한 유리벽을 딱 깐다고요. 까면 저 사람의 눈빛과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잖아요.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점점 더 조금씩 조금씩 헨델과 그레텔 동화책에 식빵 던지듯이 계속 내가 던진 가짜뉴스에 혼선을 야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네가 감히 나를 알아? 어디까지 속아 넘어가는지 한번 보자.
그 가짜 뉴스 할 때 반드시 앞에 뭐를 하나 붙여야 돼요.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걸 붙여야 돼요. 같은 우리 신자끼리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계속 던져주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교회 오래 다니면 의도적으로 던지지만 교회 처음 다닌 자아 있잖아요.
처음 올 때는 본인도 의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항상 뭐가 되느냐 하면은 본인도 모르게 가짜뉴스, 조작된 자아에 관한 정보를 계속 바깥에서 날리는데 뭐 보통 두시간 세시간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가 날린 정보 가지고 백날 자료 가지고 백날 주워 모아봤자 너는 나를 몰라. 왜 그러느냐 하면은 욕망 속에서 그나마도 주체가 주체답게 숨 좀 쉴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입에 마스크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것 투명한 유리벽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정신분석학 학자들은 발견한 거에요. 그래서 가짜 뉴스를 남발하다 보니까 정작 본인이 누군지 본인도 설명을 못해. 왜? 나오는 것은 전부다 뭐냐 하면은 거짓말이 아니고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속임수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지금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한 거에요. 인간은 자기를 속이는 그 외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같이 밥 사먹자 이게 속임수에요. 우리 같이 시장갈까? 전부 다 속임수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형제를 위해서. 전부 다 속임수에요.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어요. 거짓말은 누가 하느냐?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지요. 기생 라합이 속임수 이것은 본인도 본성이 속임수에요. 본성이. 거짓말이 아니고 속임수라니까요. 성경공부 이 정도 했으니까 이 정도는 알아아죠. 이 정도는 기본 베이스로 깔아놓으시기 바랍니다.
교인이 두 사람이 있다면 교인 두 사람에다가 목사까지 있다면 교인 세 명은 주일날 서로 속이다가 시간 다 갔어. 하루 주일 다 보냈어. 찬송하며 속고 기도하며 속고 설교 들으며 속고 하며 속고.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다. 왜? 정신분석학에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다만 타인이 왔을 때 그 타인을 속일려는 그 의도 뒤에 미지의 X로서.
미지의 X라고 하지 않고 이걸 또 A라고 하는데. 라캉이라는 사람은 A라고 하는데 어려우니까 그냥 미지의 X.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X에요. 미지의 X가 타인만 만나면 나오는 천성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게 뭐냐? 나를 속일 수 있는 속임수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거기에 번지듯이 나오는 거에요.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진짜 너를 보여줘 이럴 거 아닙니까. 진짜 나를 알아야 보여주지.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는데 무슨 진짜 내가 있어요. 진짜 내가 없는데. 모르죠. 몰라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니까. 환경 따라 다 달라지니까.
인간의 이 말을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나’라는 것은 정확하게 규정된 ‘나’는 없고 타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남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그 현장에 빨리 조립한 그것이 ‘나’라는 겁니다. 그 인간 떠나버리면 나도 같이 소멸되는 거에요.
그래서 죄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 나타나야 알아요. 예수님 나타나기 전까지는 서로 속고 속이거든요. 디모데전서 몇장 입니까? 디모데전서 4장인가? 속고 속이는. 디모데후서 3장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성경은 다 알잖아요. 속고 속인다는 것을. 성령이 없는 인간들은 속고 속는 거에요.
그래서 남한테 비양심적으로 했다고 양심 운운하지 마세요. 양심대로 할 재주가 없어요 우리가. 왜? 양심적으로 했는데 그게 나중에 상대 바뀌니까 또 다른 ‘나’가 나왔으니까.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치고 그댈 보내준 사람. 그 사람이 나에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백지영이 불렀던.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치고 그댈 보내준 그 다음에 올라가요. 사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 사람이 나에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규정이 안 되는 겁니다. 그 규정이 안 되는 나를 가지고 주여 제가 기도했습니다. 거기에 왜 ‘제’라는 말을 왜 붙입니까? 내가 규정이 안 되는데 무슨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자체가 모호한데.
지금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적인 예수님의 적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 적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그 적들이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사야 61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이제부터 그 설명을 예수님의 적들, 사적인 가치 자기가 뭔가 안다고 여기는 사실은 속임수 밖에 없으면서.
그때부터 카멜레온처럼 변심하면서 그게 나라고 혹시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이 ‘나’라고 하는데 이사야 61장 나오지요. 성경에 의하면 여러분 아까 보셨지만 다시 보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오지요? 이것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이게 목표입니까?
목적과 목표를 영어로 하면 달라요. 목표가 goal, 목적이 aim이에요. 목적과 목표 차이점을 쉽게 하면 골이에요!! 이게 목표에요. 아~ 골이에요. 뒤에다 붙여버리면 굉장히 목표물. 어떤 추구하는 대상을 목표라고 하고 그 의도, 그 과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목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목적을 싫어해요. 목표가 중요한 겁니다.
이 목표를 노린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게 토끼에요. 그리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거북이입니다. 왜냐하면은 토끼는 휙 뛰어보니까 상대가 안 되잖아요. 목표가 목표물 깃대가 바로 저기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것은 벌써 내거야. 깃대 있잖아요 깃대. 교회 관련해서 하면 이걸 천국이라고 합시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좀 옛날에 고생 많이 했잖아. 교회 봉사하느라. 좀 한숨 쉬었다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토끼는 목표를 하기 때문에 거북이 정도는 이겼다고 보고 그냥 한숨 잤지요. 그런데 거북이는 목표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이 목표가 되는 거에요. 그 과정이 중요한 거에요. 그 과정이. 과정이.
과정이 중요하니까 목표는 그 사람한테는 없지요. 그리고 토끼한테는 결과가 중요하니까 본인은 뭐냐 하면은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흐름이 돼요.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예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할 때 여러분 딱 보면 이걸 목표로 삼고 싶어요? 목적으로 삼고 싶습니까?
이게 목표물이 되는 거에요. 이게 사적인 견해에요. 사적인 견해. 집단적 견해 아닙니다. 성도는 집단이라고 했지요. 우리를 대표하는 사적 개인은 누구입니까? 오직 누구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이걸 이루는데 우리는 예수님이고 뭐고 내가 탐이나. 자유하고 싶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부자 되는 거잖아. 부자 되고 싶고 토끼처럼 목표가 되는 거에요.
이 목표를 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겁니다. 뭐 충성, 봉사, 헌금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목표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결국 이거는 뭐냐? 이거는 다른 사람이 쟁취하는 것을 내가 질투심에 의해서 어떻게 됩니까? 용납 못하죠. 밟아버리죠.
olny 나. 오직 나만 최후의 승자가 돼야 돼요. 최후의 승리자는 둘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둘되면 한번 더 결승전 치러야 돼. 그게 우리의 심보에요. 둘이 있을 수 없어요. 에서 야곱 둘 다? 아니야 아니야. 마지막 최종 결승전 해가지고 야곱은 이기고 에서는 져야 돼요. 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격상. 우리 악마의 본성상.
그래서 이 본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천주교 정의사제구현단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이들은 뭐냐 하면은 여기 이 말씀을 그대로 구체화 현실화되기를 그들은 말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더 좋은 말로 하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해가지고 이 본문을 그대로 우리가 실행에 옮겨서 이 땅에서 구현하자. 그게 천주교 정의사제구현단 이고 맨날 북한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말씀 그대로 이 땅에서 자기가 나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할 것은 뭐냐 하면은 데모할 것밖에 없지요. 기존의 정권에 대항해서. 왜? 가난한 자는 정치적으로 가난하다고 보기 때문에.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가 누굽니까? 군사독재에 눌린 자들.
그러니까 성경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사람들 말에 혹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 해방신학에 빠진 교단이 뭐냐 하면은 성공회 그리고 기독교 장로회, 감리교, 대한예수교 장로회 가로열고 통합 가로닫고. 그런 단체.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아무리 우리 코앞에 있더라도 시작부터가 주체, 객체, 나, 사적인 나, 내가 납득이 되는 나, 이걸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백날 얻어봤자 아까 투명한 유리벽 앞에서 투명하니까 사람들이 격이 없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죠. 뭐 있어? 없잖아? 없으니까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해요.
통하고 싶지만 욕망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미 입에서 뭐 나와도 속임수고 입 다물어도 표정 자체가 속임수에요. 내가 나를 누군지를 모르니까. 그래서 두 번째 시간 들어가기 전에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구약적인, 정착이죠. 말과 뿌리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습니다. 죽어버립니다.
죽어버리면 예수님 죽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령이 되지요. 유령. 유령을 제가 이야기 했던 것. 개인과 말씀이 만난다고 했지요. 두 번째 시간은 이것부터 합니다. 유령을 뭐로 하느냐? 포장을 뭐로 하느냐? 말씀으로 포장을 해버리면 이것이 바로 성도가 됩니다.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말씀이 사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4장 26절 (정착과 뿌리) 201117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계속 욕망이 우리 자아를 통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 내 뿜을 때 무엇을 사용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사용한다는 거에요.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에요. 말을 사용하는 거에요. 말을 사용하니까 계속 뭐냐 하면 교체를 시키는 거에요. 상대에 따라서 언어를 계속 바꾸는 겁니다. 물론 상대는 그 제한된 자료 가지고 그 사람의 분석에 들어가는데 그건 항상 실패해요.
그러면 성경은 어떠냐 하면은 성경은 유령의 힘을 이미 유령의 죽은 세계에서 빠져나오신 그 부활의 힘으로 여기서 완전히 그걸 포장을 해버립니다. 포장을 해버려요. 그러면 유령의 장점이 뭐냐 하면은 유령은 이미 선악윤리체제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벗어나있어요. 선악체제에서. 벗어나고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게 뭐냐 하면은 배역이 되고 이게 역할이 되는 겁니다.
어떤 역할과 어떤 배역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 욥의 친구 같은 경우에는 네가 잘못해서 벌 받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체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유령이 되었거든요. 유령이면서도 유령이 아닌 이유가 지시를 받아요. 누구의 통제를 받는다고요. 그리고 유령이기 때문에 지시 통제를 받을 때 여기서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은 중요한 것은 현장성입니다.
현장에 지금 이 순간 here 여기에 now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너는 말씀을 증거하는 너의 지금 이 순간 필요한 너는 뭐냐? 나의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체는 그때 그때 달라요. 그때 그때 그 현장에서 말씀의 일원으로써 말씀세계의 일원으로써 대표자 역할을 그 현장에 수여하는 겁니다.
유령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뭐가 또 없느냐 하면은 과거의 역사, 나의 이야기가 없어요. 과거의 것이 원인이 되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그 선을 끊어버립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 헌금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 이걸 끊어버려요. 그리고 지금 있는 것이 잘됐기 때문에 복이고 못 되었기 때문에 저주라는 이것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말씀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말씀이 같이 있다면 이게 복이에요. 말씀과 결합된 것이 복이에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여기서는 되는데 저기서는 안되고 이런 게 없고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시각에 주께서 지시가 있고 그 지시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님이 드러나는데 하등의 하자가 없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내게 ‘나’라는 하나의 ‘나’라는 여기에 능력을 주시는 자.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말씀 능력 주시게 되면 나는 말씀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죠. 주님은 빈 무덤이고 주님은 보이지 않은 채로 지금 굉장히 심하게 활동 중이니까. 보이지 않은 채로 활동 중인데 막상 사람들이 보라고 하면 성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죠. 성도의 모습으로.
그러면 다른 사람이 베드로 요한 네가 했지? 하면 내가 안했다. 이건 살아계신 주님이 했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원활하지 않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진도 나가보면 유령의 힘을 말씀의 힘으로 이겼다. 왜? 유령은 죽음의 힘인데 죽음에서 탈출한 힘이 유령의 힘을 해서 이 안에서 계속 생명, 영생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령의 힘 또는 말씀의 힘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바로 아픔으로 본다는 거에요. 아픔으로. 세상에 대해서 미련 없음. 이 세상이 나를 아프게 했다라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가 뿌리가 되어서 거기서 열매를 맺은 자는 주님의 아픔을 고스란히 열매로 승화시키기 때문에 진정한 가난한 자에게는 무엇이 복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 겁니다.
가난한 자에게 왜? 주님이 가난하니까. 정의실천구현단과 아무 상관없는 거에요. 그들은 정치적 집단입니다. 전혀 정치적 집단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이 유령의 힘인데 말씀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복잡해요. 이 말씀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을 보는 아픔이라고 했지요. 세상에서 추방당하신 분의 힘이기 때문에 아파요. 예수님은 피해자가 되고 세상은 가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완결체는 그런데 말씀의 과정 속에 흐름 속에 우리 유령같은 우리 성도가 죽은 자로서 이렇게 가게 되잖아요. 그럼 뭘 보느냐 하면은 너와 짝이 되어서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을 버렸다 또는 이 세상을 폭파한다. 이 세상을 공격한다 징벌한다 이렇게 결론을 짓는 게 아니고 이 결론이 계속 반복될려면 여기에 과정이 필요해요. 과정.
과정이 필요하게 되면 예수님이 아파야 될 이유를 누가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 주님과 말씀과 짝인데 유령인 우리가 이 과정을 보여줘야 돼요. 그러면 말씀 안에 보게 되면 뭐가 하면은 말씀 안에 주님께서 억울하게 당하시고 나중에 기어이 승리하셨다는 그 과정이 이 안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우리 자신이 수시로 가해자 역할을 우리 몸인이상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가해자 역할을.
우리가 구원받은 우리가 가해자가 있어줘야 주님만이 피해자가 드러날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의 배역을 생각해야 돼요. 배역.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하면 돼요. 무대. 무대라고 생각해가지고 우리가 예수 믿고 주여 걱정 없어 라고 하는 순간 이미 어느새 우리는 가해자 노릇을 또다시 되풀이할 스타트할 준비단계에 들어간 거에요.
왜냐 하면은 도로 사적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제는 구원받았다는 자체가 사적이 될 공산이 크거든요.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잘 설명이 안 되니까 성경에 나오는대로 해볼게요. 시편 51편. 시편 51편에 보면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한 심령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51편 14절인가 나오지요. 다윗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어떤 심령? 상한 심령이에요. ‘상한 심령’. 상했다는 말은 이것은 더럽다는 말이잖아요. 더럽다. 더러운 심령을 누가 받는다? 하나님이 받는 거에요. 만약에 상한심령이 아니고 깨끗한 심령 같으면 깨끗한 심령도 없지만 깨끗한 심령 같으면 주께서는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를 않는 거에요. 상한 심령을 받는 거에요.
상한 심령을 신학적으로 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가해자의 심령이 상한 심령이에요. 가해자 심령이. 이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렵게 설명하면 우리와 함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언어, 천국 말씀으로 날마다 우리를 뭐하느냐 하면은 지우신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천국의 언어로 맨날 우리를 지우는 거에요.
지운다는 말은 온갖 고민과 근심 속에 다 있는데 어느날 보니까 내 자신이 고민과 걱정할 가치조차 없어요. 그냥 지우개로 그냥 지워버리는 거에요.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아니고 아예 없애버린다니까요 그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께 영광 돌리고 돌아서면 또다시 어느새 헤헤. 내가 또다시 등장하고. 그게 천국의 말씀으로 천국의 언어로 완성된 말씀으로 우리를 또 지워버리는 거에요. 또 지우고 아 주님께서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서고 또 이게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내게 기름을 붓고 자유가 되었다할 때 나는 이제 자유다. 뭘 해도 윤리적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필요 없고 뭘 해도 된다라는 순간 내가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상한 심령에서 벌써 벗어나버렸어요. 그러면 상한 심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또 다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굴리게 되지요.
유령인데 주의 말씀으로 하고 나면 도로 내가 사적 인간이 되었어요. 사적 인간인데 천국 말씀으로 지워버리니까 이게 또 유령이 되고요. 이걸 계속 되풀이하고 반복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좀 특이한데 이러한 예를 민수기 20장에서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여러분들을 꼭 찾을 필요는 없고 제가 대신 읽어보면 돼요.
20장에 보면 2절에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이게 사는 거냐 죽는게 더 낫다 뭐 그런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에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광야에 이끌어냈느냐 라고 하면서 5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노예 시절이 더 좋았다는 겁니다. 노예 시절이.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새로움이 감당이 안 된다는 거에요. 새로움이. 그걸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노예가 더 좋았다는 말은 애굽 광야에서 노예가 좋았다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간단하게 복음이 기쁘냐 복음 믿는 나 자신이 기쁘냐 이 질문하고 똑같은 거에요. 복음이 기쁘냐 복음 믿는 나 자신이 기쁘냐 이걸 묻는데 구약의 광야 사람들은 복음 + 자존감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복음과 상극인데. 복음하고 자존감이 상극이거든요.
내가 유령 나는 죽어 마땅하고 나는 가해자 죽어 마땅함을 딛고 복음이 나왔단 말이죠. 복음은 자존감하고 손을 안 잡아요. 그런데 인간의 그 육신이라는 것이 육신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육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있어줄 때 나는 여기서 자존감에서 나온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자존감이고 자존감에서 나오는 기쁨의 보람으로만 인생을 살겠다는 거에요. 내 자존감을 개 취급하고 나는 용납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를 들면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 왔는데 복음을 자기는 잘 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나 다른 분들이 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이거 할 줄 압니까?” 오자마자 봉사한다고 막 닦고 막 하는 거에요. “그럼 식사당번도?” “뭐하면 됩니까?” 하는 거에요. 그런데 목사가 얄궂게도 못 하는 것만 이야기합니다. 해낼 수 없는 것만 이야기해버려요.
화가 이만큼 납니다. 어디를 건드린 겁니까? 그 사람의. 그 사람은 복음을 알아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산다 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뭐는 안 죽었어요? 자존감을 들러붙어 있는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자존감의 원칙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내가 기뻐한다 했잖아요. 보람이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부끄러워서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서 내가 했다할 때 그 현장에 뭐가 계속 살아서 움직인다? 자존감이 살아있는 거에요. 자존감이.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 떼어놓는 게 뭐냐 하면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구원의 복음과 뭘 떼어내는 거에요? 자존감을 떼어내는 거에요. 이거 떼어내는 사람이 누구냐? 갈렙과 여호수아에요. 갈렙에 의해서 어떻게 떼어졌느냐 하면은 그 약속의 땅의 그 아주 키 큰 건장한 그 민족은 우리의 힘으로 잘 들으세요. 우리의 힘으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남들 보면 완전히 패배자라고 할 거에요.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죠. 이걸 신약적으로 바꿀께요. 천국에 어떻게 가느냐? 절대로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마태복음 20장 14절인가 나오는 이야기인데 주일날 설교했는데 그 대목이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여러분 20장 기억나도록 다 같이 해봅시다.
마태복음 20장 15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따라하니까 또 성경공부하는 것 같다. 자존감은 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 뜻은. 자존감은 내가 대표적 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 자존감이 너희에게 퍼진 것 뿐이지 내 자존감만 있으면 된다.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는데 네가 왜 말이 많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옥 간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 그럼 제 자존감은요? 내 자존감은.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떨어지는지 안 떨어지는지는 마태복음 같이 봤던 20장 15절로 아주 멋지게. 멋집니다 이 말씀이. 내 것 가지고 내가 하는데 네가 왜? 그러면 여기서 우리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천국은 다 솎아내요.
우리가 성도의 한평생은 뭐냐? 내가 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내가 했던 것을 족집게 가지고 전부 다 다 집어냅니다. 안 집힐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후딱 등기 등본을 주님 하신 걸로 후딱 바꾸세요. 지금도 안 늦었어요. 모든 등기 등본을 주님 것으로 다 바꾸시기 바랍니다. 동사무소 안 가도 마음속으로 하면 끝나는 거니까. 성령이 오면 되는 거에요.
썩은 이빨 하나 머리카락 하나 전부 다 주의 것입니다. 내 것 아니에요. 그것을 사실은 바꾸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천국의 언어로 날마다 우리를 걱정하지 마 내가 지워줄게 내가 바꿔줄게 주께서는 매일 삶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존감 드러내게 하고 없애는 그 과정 그 흐름을 통해서 영광 받는 거에요. 미리 다 없애 놓고 영광받을 거 없다하지 마시고 날마다 어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내 것은? 내 자존심은요?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이렇게 되거든요.
자아가 생겨버리면 덩달아 같이 생기는 것이 윤리 도덕 같이 생겨버리지요. 이 윤리 도덕을 엎어버리는 그 일은 내가 차마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까? 내가 못하지요. 내가 할 수 없는 거에요. 베드로보고 먹어라. 안 먹습니다. 먹어라 세 번해도 안 먹는다고 하는 거에요. 자존감이 생겨서 할 수 없는 거에요.
베드로가 또 분명히 복음을 아는 베드로가 헬라인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함께 오니까 식사하다가 뛰어나갔지요. 나 그때 돈 누가 냈는지 궁금해. 뛰어나갔지요. 아 내가 누군데. 내가 사도인데. 수제자인데. 어떻게 율법을 위반하면서 저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느냐. 안돼. 안돼. 이건 말이 안돼. 뭐가 남아 있었습니까? 유령이 덜 된 거죠. 덜 죽은 거죠.
내 자존감이 살아있으면 그건 살아있는 겁니다. 자존감.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육신이 있는 한 자존감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요양병원에 가면 101호 202호 가면 할머니들 한 6분 있고 맞은 편에서 할아버지 한 7명 있으면 자존감 6명 자존감 7명. 나이 들면 남는 건 자존감 밖에 안 남았어요. 자존감. 그게 우리 모습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하는 말이 자존감이 있으니까 광야에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때 노예가 차라리 나았다. 왜냐하면 노예 시절 때 그들은 자기들이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러나 약속의 땅 광야는 아무리 힘을 용을 써도 자기 힘으로 버티지를 못합니다. 버티지 못해야 자를 수가 있잖아요. 원망을 해야 자를 수가 있다고요. 그래 너는 안돼.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내쫓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뭐다? 상한 심령이다. 상한 심령=자존감이 아니죠. 자존감의 붕괴지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자존감의 붕괴’. 자, 자존감이 붕괴되었다는 말은 나의 과거는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나의 과거는.
과거가 대수냐 이런 뜻이에요. 과거. 어제 일이 대수냐. now 지금 here 여기, 여기 이 현장성에서 주님이 또 나에게 어떤 역할 배역을 맡겼느냐가 중요하지 내일도 안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에요 순간. 지금이 중요한 거에요. 내일은 살지 안 살지 보장이 안 되니까.
자, 21절 전에도 봤습니다만 21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그 다음에 오늘, 오늘날이죠. “오늘날 너희 귀에 응했다”. 너희는 없다했지요. 너희는 없지만 너희가 발생되는 그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매일같이 뭐가 되느냐. 오늘날 그 다음에 뭐가 등장하느냐. 이사야 61장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유령같은 우리에게 포장지로 성취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끼리 만나면 뭘 만나느냐 하면은 우리는 가난한 자인데 복음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말씀을 주고받으면서 만나는 거에요. 말씀을 주고받으니까 굳이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아 맞춰봐.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게임을 할 필요가 없지요. 네가 어디까지 내가 준 정보 가지고 알아먹는가 내가 보자. 싱긋이 웃으면서. 그런 쓸데없는 게임은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진도 나가서 그러면 무신론자는 이 세상의 권한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무신론자. 그거는 제가 지금까지 쭉 이야기했습니다. 무신론자는 그들에게 과거가 있고 과거가 생기면 자존감이 있고 그 자존감의 우열을 논하겠지요. 물리학에서는요 그것도 특히 최신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물리학에서 이런 용어 있어요. 양자붕괴라는 붕괴라는 말을 씁니다. ‘붕괴’. 붕괴란 말은 그 원자에서 전자가 빠져나가면서 이게 무너져요. 우르르 무너진다고요.
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을 때 여러분들은 들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쉽게 이런 논리를 누구 앞에서도 이야기할 거에요. 세상이 있다 할 때 세상이 있는 세상 그대로냐 아니라 내가 보는 관점으로 그 세상이 있어요. 사람이 살아온 자존감이 들어오면 자존감에 준해서 전부 다 세상 보는 관점이 다 달라요. 자존감에 준해서 과거역사에 준해서.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은 예수님을 공격했던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양자붕괴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너진 거에요. 이미 무너진 거에요. 무너져서 재개발 지역이 된 겁니다. 완전히 불도저가지고 무너졌어요. 재개발 지역을 하나의 출동요원처럼 등장해가지고 그 무너진 기와장 지붕 땅에 떨어진 기와장 있지요. 그걸 밟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이 세상의 종말을 전파해야 될 출동요원들, 성도죠. 성도로 하여금 이미 세상을 다 끝나고 세상이 다 끝났다고 치고 그것을 다시 다녀가는 요원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에요. 예수님이 떠난 세상은 있으나 없으나 종말이에요. 떠나보내는데 제자들은 떠나지 않고 그냥 남겨두는 겁니다. 이 세상이 왜 무너져야만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성도같으면 느긋하지요. 느긋할려면 무엇이 날라가야 되느냐 하면은 본인의 자존감이 날라가야 돼요. 본인의 자존감이 붕괴되야 돼요. 자존감이 붕괴될 때 예수님이 보는 관점과 동일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세상 도끼 들고 찍지 말고 그냥 자존감만 무너지게 되면 그것이 주님의 세상 보기와 동일한 세상 보기에요. 자존감이 없어요.
만약에 반대로 자존감이 있어버리면 어떻게 이 세상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든 꼼수를 다 부리게 되어있어요. 모든 꼼수를. 내 자존감을 살리기 위해서. 왜? 이게 관점이니까. 그래서 여러분께 다시 당부합니다만 어떤 사람에게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하면 인간의 자기 자존감에 준해서 본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아이고! 뭐 소리 안 들어도 상관없지만. 내 자존감에 준해서 세상을 보는 거에요. 세상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누가 먼저 살아 있느냐 하면은 내 자존감이 먼저 살아있고 그 다음에 세상이다 이 말이죠.
어떤 가장이 평소에 100만원 정도 벌어주다가 갑자기 200만원 벌어주면서 갑자기 뭐 목소리가 높아져서 오늘 저녁 해놨어? 200만원 벌어줬다고.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배짱이 세졌나. 오늘 돈 따블로 벌었다. 그러면 여자는 꼴랑 이것도 돈이라고. 남자가 멀쩡해서 200만원 못 버는 사람이 어딨어. 이래가지고 그 때 뭐합니까. 자기는 세상에 너무 좋은 거에요. 100원 벌다가 200만원 버니까 세상에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왜? 자존감에 준해서 100만원에 준해서 세상을 보니까 200만원 세상이 천국같은 거에요. 그러나 400만원 벌어줘야 겨우 밥 먹고 산다고 여기는 자기 부인의 입장에서는 영 자존감에 못 미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식구가 네 식구 다섯 식구 되든 간에 자존감이 다 달라요. 자존감이. 동일한 세상인데 자존감이 다르니까 세상 보는 관점이 다 다른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존감은 상한 심령이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이미 우리 자존감 붕괴되어있기 때문에 뭘 해도 범사에 감사하죠.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주님의 완성된 것을 구하라 이 말이죠. 자, 여기까지는 쉬운 편이고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제 어려워요.
23절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까 우리가 공부했던 대로 우리가 실습을 해봅시다.
구약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착입니다. 정착이니까 뭐는 아니다? 붕괴는 아닌 거에요. 구약적이니까. 신약적에는 아예 없음입니다. 아예 없고 뭐만 여기 땅 밑에 뿌리가 사악 올라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는 뿌리가. 아예 없음이죠. 정착은 있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 있는 이 자존감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는 아예 없으니까 뭐냐? 이미 붕괴된 거에요. 모든 것이 종말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정착할 수 있는 정착지는 있다? 없다? 예수님 당시에 가나안 땅에 정착지는 예수님이 가나안 땅 살려고 나사렛 동네 와서 살려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나그네죠. 자기 땅이 없지요. 정착 자체가 성립이 안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공격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의사다울려면 먼저 너를 인정하는 정착지에서 저 사람 의사답다라는 그런 증명서류를 가져오라는 거에요. 증명서류.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남들이 인정해줘야 네가 그 사람이다 이 말이에요. 그 원리가 통하는 세계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겁니다. 아까 노래 한번 더 불러야 돼요? 혹시 알고 있나요. 타인이 와야 타인이 있어줄 때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규정이 되는 원리를 백성들은 그 당시 사람들은 계속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나는 의사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저 사람은 의사답다라는 것을 네가 고향에 가서 바탕이죠 바탕. 원래 바탕에 가서 그걸 증명해 보라. 모든 의사들은 이렇게 증명해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하도 떠돌이가 많으니까 그렇겠죠. 돌팔이들 많으니까. 침 잘 놓는 돌팔이들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돌팔이보고 돌팔이라고 하면 돌팔이 기분 나쁘겠지만. 우리가 여기 살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된 하나님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기는 없음을 강조합니다. 없음. 없음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떠돌이죠. 없는 거에요. 없음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합니다. 여기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없지요. 이 땅에는 없는 세계에요. 예수님이 하는 일은 이 땅에 인간들이 아무리 행하고자 해도 자존감 걸고 행하고자 해도 행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는 뿌리로서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행해서 된 것은 여기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야 이게 천국이 돼요. 천국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한다는 것이 천국이거든요. 거기 내 뜻이 가미되면 안돼요. 내 자존감 내 실력 이런 게 나오면 안돼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남는 것은 뭐냐? 제비뽑기입니다. 자 골라골라골라 제비뽑기에요.
그 뒤에 나오지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년 육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벌써 많다를 전제로 딱 하지요.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다시 말해서 오라 하는데 안 갔다 이 말입니다. 오라 하는데.
너희들 자존감하고 나하고 흥정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너 자존감 키워줄려고 내가 이 땅에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붕괴에요. 자존감을 무너지게 하는 거에요. 내 예상대로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에요. 진도만 나갈게 아니고 복습해봅시다.
인간의 자존감이 있으면 세상이 뭐냐 하면은 세상이 자존감에 준해서 보이지요. 자존감 관점에 준해서 보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누굴 위한 세상이여야 좋은 세상입니까? 내 자존감을 up 시켜줄 때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세상이라고 제가 너무 넓게 했잖아요. 세상 아니고 그냥 가족, 교회, 직장 이 모두가 나의 자존감을 높여줄 때 나는 그 직장 가정을 살만한 맛을 느끼는 거에요.
사람이 사는 맛이 뭐냐 하면은 내 자존감 느끼는 맛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존감이 무너져 버리면 사람들 죽여버릴려고 해요. 그 사람을. 오늘 방송에도 신문 뉴스에도 나오지만 아내를 죽였다는 거에요. 왜 죽였느냐? 바가지 긁어서 죽였다. 왜? 돈 못 번다고 바가지 긁어서 죽였다는 거에요. 돈 못 벌어줬다고 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왜 죽입니까?
물론 그 아내의 자존감이 몇백만원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걸 보면 진짜 혼자 사는 게 최고다 그런 생각 들고. 내 자존감으로 사는데 세상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죽인다든지 폭력을 한다든지 우리 회사에서 나가라든지 왜 나를 왜 자꾸 흔드냐 이 말이죠. 왜. 그것은 우리는 한 배 탔잖아. 한 배. 욕망의 한 배를 탄 거에요. 욕망의. 우리들 욕망에 네가 협조 안 할려면 나가라 이 말이거든요.
나는 너를 자식으로 둔 적 없다 이러잖아요. 우리 집안 다 불교인데 너 혼자 교회 다니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집안 다 교회 다니는데 너 혼자 복음 듣고. 이런 비슷하게. 왜 협조가 안 되느냐 하면은 협조는 정착이에요. 자존감을 높이 자존감에서 세상 보기에요. 자존감이 없는 관점은 이거는 이 세상에 추방되는 분의 관점일 뿐이에요.
예수님의 관점이 그 관점이고 성령으로 오는 것은 예수님의 관점이 우리 마음에 쑥 들어오는 거에요. 그걸 주일 설교에서 이런 용어를 했습니다만은 더 정확인 용어는 이겁니다. 박힌다. 주님께서 힘의 축을 혈루병 그 여자에게 그냥 박아버린 거에요. 그 축을. 일방적으로 축을 박아버리니까 여인은 예수님 올 때까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내가 어느 정도 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가 그걸 점검하는 시간이 몇 년이었느냐 하면은 12년간이었어요.
온갖 것 다 해봤거든 온갖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병 나을 수 있는 것. 내가 내 손으로 내 몸을 만질 수 있는 기간 12년이었어요. 그런데 그 손 가지고 이제 누굴 만집니까? 나를 만져야지. 내 자존감인데. 그런데 그 여인은 무슨 대단한 믿음이에요? 나의 원천은 이쪽이 아니고 주님이 집어넣었잖아요. 주님이 집어넣은 박아놓은 혈류병이잖아요. 나를 12년간 만졌던 그 손 가지고 주님을 만졌다고요.
그러면 주님도 거기에서 호응해가지고 내가 십자가 지는 능력이 내 쪽에서 어느 쪽으로 빠졌다? 저 여자 쪽으로 빠져가지고 저 여자의 피의 근원이 말랐다. 생명이 주어졌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나의 희생으로 생명을 주려하심이라. 그 사이에서 그 여인의 자존감 빼는데 12년 걸렸지요. 어떻게 만졌습니까? 대놓고 만졌습니까? 몰래 만졌지요.
이게 완전히 뭡니까? 나는 안 고쳐도 되는데 혹시나. 혹시 알고 있나요. 혹시나. 새로운 타임이 등장. 그분이 나의 원천. 그분 때문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이것은 자존감에서 자기 자존감을 누구한테 반납한 거에요?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되고 이 자존감을 가질 분은 주님만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자기 자존감을 반납해버리죠.
그 자존감은 내가 만졌으니까 낫다 해버리면 뭐가 깨져요? 제비뽑기가 날라가버려요. 내가 원인이 된다고요. 내가 병 고치고 싶어서 예수님 만지게 돼요.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의 복음과 자존감은 상극이라서 이게 십자가 없으면 돼요. 십자가 없고 부활이 어떻고 천국이 어떨거 같으면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예수 믿을게 이렇게 되는데 십자가 끼여 버리면 십자가는 주님이 피해자거든요.
그럼 가해자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예수님 이용해가지고 내가 잘되겠다. 내 자존감을 높여주는 이 세상이 이제는 내 식으로는 안 되니까 예수님 동원해가지고 내가 기대한 내가 목표로 잡은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겠다고 예수님을 집어넣었던 그 예수님. 그 12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가버렸습니다. 다 가버렸어요. 제자들의 뭐냐 하면은 자존감이죠. 주께서 거래 안합니다. 인간의 자존감은 거래 안 해요.
내가 가만히 만졌기 때문에 요란스럽게 만졌으면 병 안 나을건데 가만히 만진 이건 뭐냐 하면은 여전히 세상 보기에 내 중심으로 내 자존감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그 세상은 주님께서는 십자가하고는 영 동떨어진 지금 다른 소리하고 있는 거에요. 다른 식으로 그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해석은 항상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에서 해야지 이루어간다 이건 안돼요. 다 이루었다부터 십자가부터 다시 시작해줘야 우리가 주님의 열매로써 구원받는 거에요.
내 뜻대로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한다는 그 말이 그게 천국이거든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나온 말. 그 말씀은 항상 자존감 붕괴를 동반시킵니다. 자존감 붕괴를 동반시키는데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하면은 제비뽑기에요. 제비뽑기. 제비뽑기란 말을 쉽게 하면 ‘선택’입니다.
창세전에 선택한 주님의 자존심으로 살기 위해서 그 현장에서 주께서 그 현장 now, here 그 시점의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시가 주어지는데 그 지시는 네가 제비 뽑혔다는 주님의 행운권 추첨, 기쁜 소식과 더불어서 그 일을 시키는 거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 신났어요. 왜? 제비 뽑혔으니까. 로또 당첨됐으니까. 내가 받아챙기는 게 복이 아니라 시켰다는 것. 그런 관계라는 것.
주님은 일 시키고 나는 그 배역을 맡은 관계가 이것은 제비뽑기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4장 26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참 과부들은 또 신경질난다. 좀 성경에서 번역할 때 과부하지 말고 돌아온 돌싱이라든지. 그런 거 하면 안돼요. 그것 또한 자존감이에요. 장님이라고 하지 말고 시각장애자라고 하고. 아이 왜 이래요. 온 매사에 자존감.
나로 인하여 내가 사는 보람과 즐거움을 끝까지 챙길려고 악을 써요 악을 써. 그냥 과부에요. 과부가 있었는데 보내심을 받지 않고. 선택은 결국 제비뽑기. 제비뽑기란 말을 제가 반복하는 이유는 이번 겨울수련회에 할 사무엘상 교재에 제비뽑기가 나와요. 사무엘상에서 제비뽑기와 나중에 사무엘이 뭐 됐어요? 유령됐지요. 이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유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바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유령은. 너는 있어도 산 자가 아니고 뭐다? 진작에 유령된 자. 유령의 입장에서 너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네가 세상을 똑바로 본다. 이걸 오늘날 말로 하면 네가 자존심이 붕괴된 상태에서야 세상이 주님의 세상이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닌 것이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왜 사는가? 유령에 뭐가 씌였다? 말씀 증거하라고 말씀에 포장돼서 사는 거에요. 유령의 힘은 유령을 이겨서 천국 백성 만든 그 힘이 나를 이렇게 둘러싸서 배추에 돼기고기 싸는 것. 쌈밥집. 제목을 갑자기 쌈밥집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쌈밥을 싸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내보내는 거에요.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약올리기입니다. 내가 왜 나는 뭐가 모자라서 저한테 안 오십니까. 그 발언이 여기저기서 막 터져나오게 만들어요. 여기저기서. 아버지여. 왜? 거짓말해서 사기 친 야곱. 아버지에게 사기쳤는데 야곱에게 왜 복이 돌아가게 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삭은 내 마음이냐? 주님 마음인데. 이 고백을 우리는 왜 못하느냐 말이죠.
집사님 이번 한 달 수입이 2500을 찍었다면서요?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습니까? 하면 집사님이 내 마음입니까? 주님 마음이죠. 남 약올리기 좋을만한 성질 돋우지요. 집사님 지난번에 수입이 250인데 왜 이번엔 50만원밖에 안줍니까? 집사님 웃으면서 내 마음입니까? 주님 마음이지요. 왜 똑같은 소리를 왜 못하느냐 말이죠. 똑같은 소리를 할 수 있어야될 거 아닙니까.
선택은 결국 선택이 예수님의 죽음을 촉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선택으로 인하여 주님의 밉상의 도는 점점 더 확산되는 겁니다. 들끓지요. 겉잡을 수 없이 분노를 유발하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약오르게 만드는 선택의 그 후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존감 챙기지 않는 성령 받은 사람이죠. 주위 사람을 화나게 만듭니다.
또 있지요. 오직, 오직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사렙다는 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땅이에요. 그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다. 그러면 과부만 있으면 되지 않고 탈락된 과부들이 보조로 쫙 깔려야 됩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안돼요. 반드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게 복음전파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신났지요. 신났어요.
또 한번 봅시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온 응용문제. 그 다음 문제. 자, 엘리사와 엘리야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있다. 이거 뭐 딱 나오잖아요. 딱 나온다고요. 예상문제 딱 보니까 딱 나오지요?
바로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은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라. 세상 약올리기. 일방적 선택. 내 것 가지고 내가 구원하는데 왜 말이 많느냐? 자존심? 나 자존심 인정 안한다. 전부 다 equal equal 같은 말이에요. 전부 다 같은 말이에요. 내가 죽은 것처럼 너희도 죽어. 전부 다 같은 말을 나열하고 있는 거에요.
그 같은 말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존감 살아있는 우리에게 뭐로 나타난다? 이게 말씀으로 둘러쳐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늘 주님의 말씀에 시달려야 돼요. 성령의 책망을 받아줘야 됩니다. 자동적으로 우리가 말씀 버리고 따로 나와가지고 우리가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말씀의 능력이거든요.
우리의 육신, 배설물밖에 안 되는 우리의 욕망밖에 없는 그러한 육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여기에 하나의 주님의 말씀이 엔진 가동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매일같이. 언제? 바로 오늘. 어디서? 바로 여기서. 여기서 매일같이 우리는 이 말씀으로 자존감 없이 세상을 볼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성도한테는 감사와 고마움밖에 없지요.
왜? 당첨되었으니까. 이유도 없이 당첨되었으니까. 내가 행해서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야 그게 천국의 본질이거든요. 주님이 행했지 내가 행한 건 없어야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그런 기쁨과 감사가 좀 오래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제가 전에 강의할 때 여러번 3초 간다 했거든요. 이 3초가 과학적 근거에서 나왔어요.
3초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 다음 의식과 연결될 때 유지되는 시간이 3초에요. 3초는 간다. 사람마다 좀 다르지만 3초라고 했는데 이제는 말을 좀 바꾸겠습니다. 3초가는 것이 아니고 역사자체가 3초도 하나의 시간이니까 시간 자체가 이미 묵시적 시간, 시간을 초월한 시간.
항상 그냥 그대로 있어버리면 우리, 내가 그렇다. 나는 이렇다가 아니라 나는 그냥 흐름이다. 그리고 나 자리는 주님이 유발하는 흐름 속에 우리가 맡기면 됩니다. 하나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얼마 가겠어요? 한 달 가겠습니까? 주님이 이 과정과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태를 또 준비해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존감 없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만 뽑아내면 그게 선택하고 제비뽑은 예수님의 자기 자율성이 마음껏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장소 어디 있던 간에 주님께 감사해야 되고요 오후 때 기도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할 권한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뭐냐? 이 순간 저를 통해서 주님께 감사할 거리가 나오게 하옵소서 그 기도, 다른 기도 필요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그 관점이 우리의 관점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