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28절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절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무슨 situation이냐 하는 겁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고. 붙들 땐 예수님이 붙잡혔지요. 사람들이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갑니다. 그 의도가 그냥 협박이나 할려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지요. 산 낭떠러지니까 거기서 이렇게 밀게 되면 죽게 되지요. 밀쳤습니다.
붙잡고 밀쳤는데 그 다음의 상황이 예수께서 저들 가운데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이 기체인가요? 분명히 붙잡아서 떠밀었는데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해가지고. 나 지나갈래 한다고 지나가세요 할 것 같으면 끌고 올 이유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냥 지나가세요”가 안 되고 그냥 끌고 가는 거에요. 이 대목을 이제 우리가 한번 알아봅시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거에요.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그 다음에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과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 그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게 이 파악이 서로 달라요. 한쪽이 신체를 세워놓고 하게 되면 이 신체는 뭐냐 하면은 고정이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신체가 아니고 영혼 또는 정신, 이것을 측정할려고 하는 겁니다. 신체를 고정시켜 놓고 정신과 영혼을 뽑아내서 당신은 누구라고 설명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이것을 그대로 해 봅시다. 예수님을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예수님은 누구신가 파악할 때 여기서 뭘 꺼내느냐? 예수님의 영혼과 예수님의 정신을 측정할려고 하겠지요. 똑같으니까. 신체니까. 예수님은 신체를 가지고 오셨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뭐만 뽑아내요? 예수님의 신체는 놔두고 이것만 뽑아내지요.
그러나 이걸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예수님의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할 때 이것은 열두제자가 실패한 겁니다. 열두제자가 실패했어 이거는. 따라갈려면 어디까지 따라가느냐 하면은 십자가 지기까지 따라가야 되거든요. 그거는 겁나는 일이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신체라는 것을 배제하고 정신과 영혼을 따로 뽑아내는 이 자체가 그분에 대해서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사고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 말고, 오늘 본문, 밀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밉니다. 고정되어 있는 신체를 떠밀어요. 붙잡아서.
그러면 예수님이 움직입니까? 본인이 움직여요? 본인이 움직이는 거에요. 떠미니까. 본인이 움직이고 예수님보고 우리 움직임 따라서 너는 강제로 우리한테 붙잡혀 가지고 우리 이끄는 대로 가야돼 라고 낭떠러지로 가게 한거에요. 그런데 그 마지막 낭떠러지 마지막에 서서 그들의 신체들이 있는 사이에 예수님의 신체가 그냥 스윽 지나가서 반대 방향으로 나 집에 갈래 해가지고 그냥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체가 떠미는대로 떠밀린다라고 생각했던 그 신체, 그 신체관 자체는 본인의 평소에 본인을 생각하는 신체관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성립할 수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를 제가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다음에 31절에 한번 봅시다.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말씀에 권세 있음이라” 그 다음에 33절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귀신 들린 자가 있는데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귀신 들린 자가 있어서 소리 지르며 나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시는게 아니고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라” 잠잠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잠잠하라’.
그래서 지금 30절과 33절 이걸 한꺼번에 제가 해석해 보겠습니다. 이 해석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걸 다 지우겠어요. 다 지우고 이걸 한번 문장을 한번 써볼게요. 수술 칼로 살점을 자른다. 수술 칼로 살점을 자른다라는 이 문장이 있다면 수술 칼 눈에 보이지요. 살점 눈에 보이지요. 그러면 뭐는 눈에 안보입니까? 자른다는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요.
수술 칼, 이걸 명사라고 하고 자른다는 이걸 동사로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들은 명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동사가 겉에 붙어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동사 자른다는 것은 여기 살점이 여기 이렇게 있으면 이걸 가지고 실존한다 이렇게 하고 동사 있는 이것은 지속한다. 또는 존속한다. 지속한다, 존속한다 이렇게 됩니다.
이 자른다 할 때 이걸 동사라고 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표현. 수술 칼이 있고 살점이 있고 이것은 존재가 됩니다. 존재로써 예수님을 설명해버리면 예수님 말씀 특히 귀신이 나가고 하는 이런 말씀들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로 하게 되면.
그럼 뭐냐 하면은 사건으로 표현하는 거에요. ‘주님의 사건’. 주님의 사건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은 키가 몇센치고 얼굴은 어떻게 생기고 거기에 주목해야 됩니까? 아니면 아까 신체를 세워놓고 봐야 돼요? 따라가며 봐야 됩니까?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움직임이고 그 자체가 늘 이렇게 전부 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움직일 때마다 사건이 되는 거에요.
사건이 되어버리면 여기 사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이게 첫 번째 중요한 겁니다. 사건에서 뭐가 생기느냐?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사건이 될 때 의미가 생기는 거에요. 수술 칼 있다 여기 살점 있다. 이거 의미 없어요. 자른다 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자른다’. 자르는 것은 칼이라는 존재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고 살점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자른다는 그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 물체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내 존재로 보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 수 있고 멀어지면 멀어졌다고 생각을 하지 내가 여기 존재하는 여기 있음 자체도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이 벌린 사건을 위해서 내가 동원됐다는 생각을 우리가 잘 안하게 돼요. 평소의 모든 습성들이 동사 위주가 아니고 명사 위주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실체 위주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또 한가지 ‘나’ 이거는 물체지요. ‘물체’. 명사지요. 그러면 쉽게 말해서 ‘늙는다’ 이건 뭡니까? 늙는다 이것은 움직이는 거에요. 형태를 보여주는 동사잖아요. 늙는다.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단풍’. 단풍은 명사지요. 단풍이 물든다. 든다를 본적 있습니까? 없어요.
늙는다 본적 있습니까? 늙어 가는 여러 가지의 변화된 어떤 물질 그런 모습만 볼뿐이에요. 늙는다는 그 과정은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걸로 세상을 설명하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 자체로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활동 하나도 이해 못합니다. 잘못된 거에요.
다시 할게요. 칼과 살점 사이에 여기에 의미가 부여가 됩니다. 의미가 부여가 되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사건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건을 부여하는 예수님이 중간에 들어가버립니다. 그러면 들어가버리면 인간에게 뭐가 나오느냐? 악마가 나오지요. 귀신이 나오는 겁니다.
그냥 아무리 분석하고 엑스레이 찍어봐야 악마 안 나와요. 악마가 인간 속에 있다라는 그 눈은 그 관점은 사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만 비로소 그걸 밝혀낼 수 있어요. 자, 그렇다면 좀 더 생각을 수술 칼로 자른다라고 되어있는데 자른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 상처지요. ‘상처’.
수술 칼과 살점을 자르는데 나중에 수술의 경과가 지나서 뭐가 남지요? 상처가 남지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7절 내 몸의 십자가의,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안보이죠. 십자가의 뭐다? 흔적이 있다.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살갗에 뭔가 상처가 있다가 아니라 성도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는 겁니다. 성도 자체가. 성도 자체가 주님 주신 상처가 돼요. 이 존재를 포기하라는 시그널이 되는 거에요. 존재로 세상을 보지 말고 사건으로 보라는 시그널이 되는 겁니다. 이 상처로 사건을 집어넣어서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게 이해돼요.
자, 기도란 무엇인가? 이걸 그대로 응용하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라는 것은 결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기 위한 모든 일을 벌리는 것.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어떤 결과가 나에게 도착되지 않는. 기도하는 이유는 모든 것도 내게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게 기도에요. 기도에요. 사건이 사건으로만 계속 이어지라고 하는 게 기도에요.
왜? 나는 사건의 효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건의 효과. 사건의 효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 천국 갔을 때 누가 너 천국 오라고 했어?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사건의 흔적으로서 천국 왔습니다 이렇게 답변을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 답변을 기도라는 것으로 지금부터 하란 말이죠. 기도를 통해서.
어떤 경우도 내 존재로 유리하게 돌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이 신체, 존재로만 예수님을 생각하는 인간들이 낭떠러지에 밀어서 떨어뜨릴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중간에 스윽 통과해버린 거에요. 네 눈에 내가 존재로 보이냐? 나는 사건이다. 어떤 사건? 존재가 붙잡을 수 없음을 내가 보여줄게. 존재가 붙잡아서 낭떠러지까지 강제로 끌고 가는 그것이 사건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보여줄게. 무용지물. 그게 다 헛된 짓인 것을 보여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불도가 심한 집에 시집가니까 약속과 달라.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교회 못 가게 했습니다. 그다음에 교회 못 가게 해도 교회 가니까 머리 자르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온갖 수단으로 교회 못 가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머리 막 잘랐는데 아무데나 막 잘라가지고 숭덩숭덩 잘랐다. 영구처럼 이렇게 막 자른 거에요.
그리고 모자도 못 쓰게 만들고. 옷도 집에 몸빼 밖에 없어서 몸빼 입고 돌아다니고. 설마 내가 저렇게 해도 부끄러워서 교회 사람 많은데 못 가겠지 했는데 그 새댁이 머리 다 잘리고 모자도 안 쓰고 몸빼 입고 교회 갔다 온 거에요. 시어머니가 네가 안 부끄럽더냐? 어머니 저를 존재로 보십니까? 어머니 보기에 내가 지금 존재로 보여요? 어머니가 본인 스스로 이해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이해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착각이십니다. 주께서 가게 하셨습니다.
그걸 제가 오후 설교 때 ‘얇은 그림자’. 우리는 폭이 없는 그림자, 얇은 그림자. 존재의 가벼움.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신체를 세워놓고 보는 방법과 신체를 따라가며 신체를 보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은 선악과 따먹어서 자기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자기 절대화, 내 존재의 절대화를 포기를 못합니다.
그걸 주께서 아시고 주님께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왔거든요.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를 세워놓고 파악을 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예수님도 그렇게 파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가능하다고 오해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 붙들고 낭떠러지에 떨어뜨릴려고 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세워놓고 보면 안 되고 주님을 따라가며 봐야 되지요.
따라가며 봐야 열두제자가 왜 십자가 길에서 되돌아갔는지. 아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뽑아낼 재주가 없구나. 이 의미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의미라는 것은. 의미라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야 의미가 있어요. 부부가 주말에 할 일 없어서 그냥 텔레비전만 보고 그냥 가만히 있고 리모콘은 보통 여자가 갖고 있으니까 남편이 옆에 앉아 있습니다. 아침 먹고 티비 보고 점심 먹고 티비 보고 저녁 먹고 티비 보고 잤어요.
그럴 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라고 하는 것은 둘이 티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지붕이 무너져야 의미가 있어요. 갑자기 태풍 불어서 유리창이 깨질 때 그동안 움직이는 태풍을 따라가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건너갈 수 있는 길은 있다? 없다? 없어요.
우리가 남하고 잘 사귈 수 있다? 없습니다.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됨과 사람이 주님과 하나 될 때는 여기에 사건이 개입 되어야 돼요. 사건이 개입 되어야 이게 하나 되는 겁니다. 사건 없이는 그냥 거래고 흥정이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고 이용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나 좋아라고 그냥 아는 척하는 것 뿐이에요. 하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건으로 딱 다가올 때 여러분 다 아는 것이니까 여러분 이 점은 쉬울 거에요. 예수님께서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입을 벌리고 뭘 하느냐? 복음을 이야기해요. 피 복음을 이야기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언약은 다 이루어졌다는 피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사건입니까? 존재입니까? 복음은 사건이죠. 복음은 사건이고 주님의 의미죠. 갑니다. 쭉쭉 가요.
그러면 이쪽의 사람들은 전부 다 존재입니다. ‘존재’. 사람을 존재로 만드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절대 존재가 된 거에요. ‘절대 존재’. 최후의 마지막 목적은 내 존재가 절대적인 존재로 굳어지는 그것이 악마의 목적이고 본인의 목적이 된 거에요. 모든 인간에게.
기도를 해도 나 잘되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 점 어렵지 않아요. 기도해도 모든 기도의 열매가 누구한테로 온다? 나한테 택배로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에요. 나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오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간절히 그것도. 그 정도란 말이죠. 그럼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쪽은 사건인데 받아들이는 인간은 존재지요.
주님은 피 복음을 이야기하면 주께서 정상적으로 이야기하면 피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성도에게 성도의 피가 피는 피끼리 통하니까 그걸 아까 존속이라고 했지요. ‘존속’. 이어지는 것 지속. 같은 사건에서 같은 사건으로 주님이라는 사건이 성도에게 일어나게 되면 성도에게 뭡니까? 사건이 중심을 잡고 있지요. 그럼 피 복음이 왔을 때 거칠게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자기는 신자고 성도고 누구 앞에서 나는 피 복음 안다 막 피 복음 막 설교하고 강의하고 돌아다니면서 강의하고 나는 복음 안다고 해놓고 피 복음을 쭉 이야기하니까 중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암반층 나와요. ‘암반층’. 이거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잖아요. 복음을 뿌렸는데 안에 뭐가 있다고? 바윗돌 암반층이 나와요. 암반층이 나와 가지고 팅~~ 복음이 튕겨 나가버립니다.
마중을 나올 필요 없어요. 복음 전해보니까 복음이 없다는 것이 들통이 나버린 겁니다. 내 절대적 악마가 들어있는 악마가 만들어낸 작품. 내 존재 건드리지 마라. 내 존재는 절대적이라는 것이 이게 암반층이 되어서 툭 튀어나와버리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 그 복음 안다. 고마해라 많이 먹었따 이렇게 되는 거에요. 튕겨져 나오는 거에요.
쑤욱 들어오는 게 아니고 사건이니까 존재가 아니니까 끝까지 피가 있는 곳으로 두 손가락이 만나듯이 ET에서 만나듯이 피를 이야기하면 피라고 답변 나와야 돼요. 다시 말해서 피 이야기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야 되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나와요. 갑자기 암반층이 나오는 거에요. 가짜였습니다. 이게 바로 존재라고 하면 왜 꾸미지 않겠어요.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까 어떤 여자 가수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거에요. 혹시 압니까? 설정인지 모르겠어요. 이찬원이 코로나 걸린 건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이찬원 누군지 모르지? 어떤 여자 가수가 코로나 걸렸단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가수는 TV 나올 때 항상 화장 떡칠하고 나오거든요. 반들반들 뭐 뿌려가지고 촉촉하게 나오잖아요.
그럼 여자가 화장을 한다는 것은 극한 고상함과 깨끗함과 순결함을 얼굴에 담았잖아요. 그러면 이 더러운 코로나에 걸릴 수 있다? 없다? 순결 그 자체 고상함 그 자체가 설마 저렇게 깨끗하고 순결하고 고상하고 촉촉한데 그 코로나, 더러운 사람이나 노숙자가 걸리는 그 코로나 걸릴 리가 없겠어 라고 했는데 걸렸어요. 한번 찾아봐요. 나는 모르겠는데 유명한 여자 가수래요. 청하. 얼굴은 깨끗하다니까.
깨끗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은 건강의 표상이에요. 코로나하고는 정반대거든요. 코로나 걸렸다고요. 그러면 화장빨은 뭐냐? 은폐지요. 감추는 거에요. 자기의 더러움을 감추는 거에요. 메이크업은. 더러운 사건이 없다고 존재로서 커버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복음 들어오면 피 마중을 해나갈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죄인은 내 것을 가질 권한이 있다 없다? 없지요. 없으면 고집 부릴 이유가 없잖아요. 내 것이 있어야 저항하지. 내 것이 없는데 왜 저항을 해요? 내 것이 없는데. 나만의 고유한 것이 없는데 왜 저항을 하느냐 이 말이죠. 앞뒤가 맞아야죠. 앞뒤가. “건드리지 마세요.” “실례지만 본인 것이 있습니까?” “없는데.” 없으면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왜 나와요? 본인 것이 있기 때문에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죠.
33절에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그냥 귀신이 아니고 더러운 귀신이에요. 인간 속에 더러운 게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절대 존재화했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 그것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사건의 특징은 사건, 다른 말로 의미의 특징은 이게 구조화된 거에요. ‘구조화’. 다른 말로 ‘계열화’. 같은 말이에요. 모든 것이 전부다 계열화, 구조화된 겁니다.
이 말은 하나의 구조에 들어가면 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거기에 그 사건, 사건 유발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빠져도 괜찮아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관계없어요.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신 거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내 것이라고 따로 챙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면 존재에서 사건 들어갈려면 망가져야 되지요. 망가져야 되지요. 귀신 빼내줄 때 아이고 더러운 귀신 있었구나 하고 후회하지 마시고 고마운 줄 알란 말이죠. 고마운 줄.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꿔주게 되면 “나 죄인입니다” 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면서 나와야 돼요.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돼요. 존재의 특징은 수리하고 개선하는 겁니다. 존재의 특징은 뭐냐? 인테리어 하는 거에요. 집 다시 뜯어고치는 거에요.
그러나 사건은 창조입니다. 네 것 뭐 있었어? 없었잖아. 너는 이제 네 것을 만드는 게 아니고 두 번 다시 너의 것이라는 게 없게 만들어줄게. 내 것으로 만들어줄게. 주님은 자기 것 창조해 나가시는 거에요. 무슨 내 것이 왜 있어요. 저 사람은 왜 키가 큽니까? 키 크게 창조했고 나는 왜 키가 작습니까? 작게 창조하신 거에요. 왜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이러지 마세요.
실망한다는 것은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구강의에서 했거든요. 상상계는 이상자아고 상징계 현실계에서는 자아이상이라고.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잘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부 상상에서 하는 거에요. 어릴 때부터 상상하는 거고 막상 현실에서 하니까 이거 뭐 나를 인간취급 안하거든요. 인간취급 안하니까 나름대로 거기서 한번 두고 보자. 내가 여기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리라. 이게 자아이상입니다.
현실에 맞춘 새로운 나를 내가 만들어 나가겠다고 시도하는 게 자아이상이에요. 이상자아나 자아이상이나 둘 다 귀신들린 거나 마찬가지에요. 둘 다 귀신들린 거에요. 자기 것도 없는데 왜 자기 인생 자기가 신경 씁니까? 사건이 주어지는데. 의미가 주어지면 되거든요.
그러면 의미가 주어진다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걸 어렵게 설명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여기 또 제가 동원되는 게 있잖아요.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은 여러분 잘 아는 노래 가사 가지고 설명해보고 이걸 가지고 여러분한테 사건과 존재의 차이를 잘 아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가사를 그냥 읽어볼게요. 그날의 황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았죠. 당신을 알았죠. 그 다음에 늦어도 그날 밤의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새벽이 되면 떠나야 될 사람을 보면서 자기는 뭘 하느냐 하면은 너무 그리워서 창문에 흐르는 빗방울 하나둘씩 헤아리고 있었는데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을 보면서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나는 감출 수가 없어요.
이런 가사를 조립해 보면 이게 무슨 노래냐 하면은 꼬마인형이에요. 꼬마인형 알아요? 그날의 황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라는 그 노래. 꼬마인형 노래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여기에 명사들이 계속 나와요. 명사들이. 꼬마인형이 뭐냐 하면은 모래성을 쌓고 쌓아도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최진희가 부른 노래인데.
모래성을 계속 쌓고 쌓아도 모래성이니까 허물어지잖아요. 허물어져도 계속 쌓는 거에요. 왜냐하면은 약속 때문에. 그러니까 의미가 뭐냐 하면은 약속이에요. 의미할려고 꼬마인형까지 동원했는데. 자, 꼬마인형을 가슴에 품고 계속 그 좋았던 밤에 떠났던 그 사람을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뭐 때문에? 약속 때문에.
약속은 뭐냐 하면 이건 보이지 않아요. 이건 뭐다? 사건이고 이건 뭐다? 의미입니다. 의미인데 그 사람은 그 모래성을 쌓고 보고싶어서 뭘 꼭 쥐느냐 하면은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그리고 허전함을 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세는 거에요. 언제 그 사람이 다시 오는가. 그 때 그 사람 잊지 못해서.
여기 빗방울, 그 다음에 밤, 새벽, 모래성, 꼬마인형. 전부 다 명사에요 명사. 존재라고요. 이런 존재 이런 행위를 계속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나 언제 다시 돌아올게라는 거기에 뭐 때문에? 약속 때문에. 아 이거 은혜롭지 않습니까? 안 은혜로와요?
모든 것이 나의 일상은 무슨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분이 남긴 약속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도저히 못 참겠다. 나중에 10분 쉬는 시간에 꼬마인형 가사 한번 들어보세요. 명사와 그리고 동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러니까 물론 이 꼬마인형 안고 있는 걸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자기 존재를 세워놓고 보기 때문에.
따라가지 왜 안 따라갔어. 나라는 존재를 따라가야 되는데 나 있는 곳에 꼬마인형 안고 있는 나에게 돌아오라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떠나보낸 님을 그리워하는 그 여자라면 그 여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은 자기가 그 남자의 약속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명사가 아니고 동사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지식으로 해가지고 오실 예수님 기다리는 게 성도가 아니에요. 그 주께서 활동함에 있어서 성도 자체가 본인도 모르게 지금 명사에서 동사화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본인도 그걸 몰랐지요. 주께서 나를 어떻게 변신시킨다 되는데 아까대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창조하는지를 어떻게 모르는 거에요. 그럼 정답은 뭐냐? 나를 허물어트리는 거에요.
인테리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를 죽게 함으로서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창조하는 작업을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시행사한테 맡겨가지고 성령한테 맡겨가지고 일방적으로 지금 내 것은 허물고 나의 과거는 허물고 주님의 미래, 주님의 약속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는 작업을 다시 하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귀신아 나가라 한 거에요.
그런데 귀신은 창조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입 다물어 너는 입 다물라. 입 다물라. 마귀도 알아요.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하는 존재, 구축된 존재의 세계에 왜 이렇게 공격하십니까? 주님은 너 말고 내 사람 창조하기 위해서. 그러면 주님의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주께서 귀신과 그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드디어 존재에 속한 인간을 주님의 사건에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람은 예수님 존재를 예수님의 존재의 확장으로서의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거에요. 이 점을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아까 꼬마인형을 가지고 내용을 대체로 알았으니까 다시 하게 되면 그 여자라면 그 님을 기다리는 여자라면 자아는 어디서 규정하느냐 하면은 자아는 과거가 규정해요. 과거가.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규정을 한다고요. 나 왕년에 잘나갔어. 이 규정을 이렇게 해요. 현재 나는 받쳐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과거의 기억이 나를 받쳐주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 와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리움이 되는 거에요. 그리움. 그래서 현재에 사는 사람이 뭐로 사느냐? 뭐로 사느냐? 보통 사람은 미래의 꿈으로 산다고 하는데 미래의 꿈은 그냥 올 수 없고 과거를 돌아서서 미래로 가거든요. 내가 그리운 사람,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을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가 나의 미래가 돼요.
사람은 체험하는 것 외에는 바라지를 않아요. 체험하는 것 외에는. 엉뚱한 것 나는 하늘을 날고 싶다. 나는 싫어요. 군에 가서도 공수훈련 안 받았습니다. 그 짓 왜 하느냐. 하늘 나는 것을 왜 하느냐. 사람은 걸어다니는 것도 감사하지 하늘을 왜 날아요. 그런데 과거에 공수훈련 받았던 날아 본 사람은 군에 제대해도 뭐가 그리워요? 헹글라이더 해볼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과거의 본인이 체험한 것 중에 나온다고요.
그러면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중간의 현재 미래 과거를 관통하는 자아는 무엇으로 규정된다? 과거가 현재의 자아를 규정을 하는 겁니다. 과거의. 어떤 사람이 만약에 20살 때 결혼을 했다. 어떤 남자하고 결혼을 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만족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20살 때 말고 18살 때 19살 때 자기가 결혼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나는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이렇게 행복하겠다 이런 꿈을 꾸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18세 19세 때는 미래지요. 미래. 그러면 어떤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그거는 1살 때부터 18세까지 봤던 남자, 어떤 남자? 백마 탔는데 왕자인 남자. 이건 미쳤지요. 백마 탔는데 돈 되고 성격되고 키 되고 집안 되고 건강하고. 키는 꼭 커야 돼. 머리되고 성격되고 집안 잘 살고 마음 좋고 나만 사랑하고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걸 사랑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그거 어디서 체험했습니까? 동화책에서. 자기는 뭐에요? 늘 연약해. 사과 먹고 엎어져 있고. 자기는 연약해. 자기는 언니한테 구박을 받아서 누구 나한테 신발 주는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항상 어릴 때 그 동화. 동화의 특징은 동화의 내용이 망하는 쪽이에요 성공하는 쪽입니까? 주로 동화 마지막에 지지리궁상으로 저주 받는 내용이에요? 복 받는 내용입니까?
복 받는 내용이지요. 누가? 남이요? 아니 내가 복 받지요. 그게 바로 마귀가 우리한테 심어준 인생의 엔진 아닙니까 엔진.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인간아” 이렇게 되거든요.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해요?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그것도 사는 거야? 때려쳐.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너 나이 그만큼 먹도록 그것밖에 안돼?”
누가 누구보고 질책하고 있는 겁니까? 나보고 질책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또 누가 위로해줘요? 내가 위로해주죠. 그래서 여러분 참 이야기 들으셔야 돼요. 죄란 뭐냐? 죄란 지금 잘 듣고 있는데 또 강요합니다. 잘 들으세요. 지금 잘 듣고 있는데. 죄란 나를 동정하는 것. 이게 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것. 이게 지옥이죠.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
어릴 때 과거가 규정된 나. 그 ‘나’가 그리운 거에요. 그 ‘나’가 그리운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1세부터 18세까지에요. 그래서 뭐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충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20살 때 결혼했어요. 20살 때 결혼했는데 아 결혼하고 난 뒤에는 무를 수도 없고 결혼한 지 1년도 안돼서 무를 수도 없고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과거 속에 자아가 지워졌습니까? 안 지워졌습니까? 오히려 과거가 반격을 나타내지요. 뭐 괜찮은 남자 없나? 괜찮은 남자 이렇게 나오지요. 요새 드라마 이런 제목 있어요. 바람 피면 죽인다. 드라마. 조여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바람 피면 죽인다.
과거에 이런 생활을 기대하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내 자아가. 내 자아가. 따라서 이 자아는 과거가 규정했기 때문에 이 자아를 대충 양보하고 대충 그냥 어물쩍 넘어가버리면 무엇이 나를 공격하느냐 하면은 이 과거, 과거를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움’.
그리움 내용은 뭐냐 하면은 내가 보고 싶고 내가 살고 싶은 사람은 계속해서 꿈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거에요 이게. 이게 귀신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마귀가 아니고 뭐에요. 너는 이런 고생할 사람이 아니였었었어. 계속해서 나에게 닦달내고 나를 힘들게 합니다. 친구만 그런게 아니고 친구는 내 좋은대로 눈치 봐서 나 격려한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죄란 뭐라고요?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것. 격려하는 것.
이 모든 잘못이 존재에서 나옵니다. 존재에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존재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놀이동산에 가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묶여져 있고 이렇게 달려가지고 빙빙 도는 것. 그네지요. 회전그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인간을 회전그네처럼 달고 다니는 거에요.
휘휘~~ 아무리 미국 가서 살아도 독일 가서 살아도. 미국 가서 살아도 맨날 보는 게 뭐냐 하면은 7080이고, 왜? 그리움 때문에. 미국 간 교포들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아이고 내가 죽을 때는 한국에 가야되는데. 맨날 이 생각하면서 벌써 나이 80, 90 넘었어요. 어떻게 자아 자체가 과거인데 어떻게 과거를 잊어버립니까. 어떻게 과거를 잊어버려요.
심지어 나를 버리고 나를 차고 간 그 남자도 그리울 때가 많아요. 노래에 그런 게 있어요. 혼자서 상상하는 거에요. 상상계. 너는 나를 찼지만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내가 받아줄게. 자기가 자기 보고. 올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내가 다시 오면 내가 옆자리에 받아줄게. 그 가사가 노래는 모르겠는데.
아가서 나온 책 있지요. 거기에 보면 그 가사가 나와요. 아이고 되게 배려심이 많아요. 누구 위한 배려심입니까? 자기의 그리움이 주는 그 칼날, 살점 베이는 그리움. 이 그리움은 아무리 집안이 잘 살고 아무리 자식들이 잘 되고 아무리 남편이 잘해줘도 소용없습니다. 너의 과거는 너의 과거고 나의 과거는 나의 과거에요. 어떻게 두 과거가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돈 때문에 그냥 사는 거지. 어떻게 말이 통할 수가 있어요. 안되지.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참 안 되는걸 주께서 되게 하시니까 참 감사하지요. 11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무엇이 보며? 무엇이 봅니까? 소경이죠. 그 다음에 무엇이 걷습니까? 앉은뱅이죠. 그 다음에 무엇이 깨끗함을 얻습니까? 여러분 짜증나지만 조금 참으세요. 그 다음에 무엇이 듣습니까? 귀머거리. 그 다음에 뭐가 살아납니까? 죽은 자.
여기에 보이고 듣고 살아나는 것 전부 다 동사에요. 그러나 앞에 뭡니까? 전부 다 존재라니까요. 존재를 주께서 어떻게 한다? 사건으로 만드는 거에요. 나 소경인데 눈 뜬 소경이라고 하면 안돼요. 나는 소경인데 눈 떴다가 돼야 돼요. 눈 뜬 정상인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럴려면 이거는 예수님의 증인 아니고 나의 증인되어버려요.
그러면 주님께서 도로 소경되게 할 수가 있어요. 왜? 주님을 따라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로 소경되면 주님을 위해서 소경 되라면 소경 되야지요. 어차피 더 이상 이거는 인테리어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날 위한 피조물은 없어요. 주님을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시면 도로 소경 되야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존재는 주님이 차지하시고 우리는 그 존재를 보여주는 사건, 움직임만 되면 되는 거에요. 하나의 주님의 그림자만 되면 되죠. 그러니까 아까 처음에 악마가 우리의 존재를 했지요. 이제는 주님이 그 존재의 자리에서 우리를 사건으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귀신보고 나가라고 할 때에 그 귀신 자리에 누가 들어오죠? 주님이 들어와서 주님이 새롭게 만드는 그 작업을 주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과정을 통해서 지금부터 계시한다는 뜻이에요. 말씀이. 이 말씀이. 주님 그렇게 귀신 잘 쫓아내는데 내 귀신도 쫓아내세요 이러지 마세요. 결국 그것은 내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이용하는 거에요.
나를 이런 인간 만들어 주세요라고 할 때 그건 뭐냐? 자기가 과거 때 내가 과거에 체험한 내 자아이상, 이상자아. 내가 그리워하던 어릴 때는 이상자아고 클 때는 자아이상 되겠지요. 현실 속에 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으로 바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나 그 기도는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기도. 육에서 육으로 가는 기도죠. 육에서 영이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고체에서 고체로 가는 기도지 고체가 기체가 되는 기도는 아니지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면 하나의 연기처럼 사라져도 상관없어요. 왜? 전에 귀신을 붙잡고 있던 그 자리에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b-이근호 목사
인간에게 그리움이 하나의 고문처럼 작용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내가 옛날에 그리워했던 그 사람인지를 이렇게 대조하면서 만나게 되지요. 38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기존의 사건을 기존에 주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구조고 배열이기 때문에 기존의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어요. 뭉쳐져 있지요. 기존의 사건. 이것을 어려운 말로 어제의 사건을 오늘의 사건으로 덮어버립니다. 이 사건이라는 말 대신 뭐를 집어넣느냐. 복음이라고 봅시다. 어제 알았던 복음을 오늘의 복음이 그걸 콘크리트 쳐버리죠. 덮어버려요.
그래야 십자가 복음을 아는 내가 어제 알았던 내가 오늘까지 이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되면 내 존재가 그냥 존재로 해버리면 그 중에 나는 누구 증인되느냐 하면은 내 존재의 증인이 되어 버려요.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 사이에 여기서 뭐가 수립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 사이에 이게 죽음이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예수님의 피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나의 피를 집어넣어야 이게 복음이 되거든요. 이게 현실적 복음이 돼요. 이게 이제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구약을 보면 쉽게 설명돼요. 구약의 사람들이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구약 사람들은 기분 좋았던 거에요.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 이것은 무슨 효과냐? 아 우리에게만 여호와 계시는 효과다.
그럼 여호와 어디 계시냐?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계시다. 그럼 제단에 계시는 방법은 뭐냐? 주님의 율법대로 시키는 대로 제사 드려서 어린양 바치면 된다. 그러면 이 말은 다시 하면 제사 정기적으로 드려서 어린양 바쳐버리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 주님이 함께 있는 이상 우리가 어느 나라하고 전쟁해도 우리는 승리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들의 그것이 치명적인 오류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왜? 자기 존재의 혜택을 입으면 그게 끝이기 때문에. 보통 복음 모르고 성경 몰랐을 때 절에 가다 교회 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렇게 하나님 모르다 하나님 믿으면 나한테 뭐가 온다? 하나님의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기대하지요.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혜택. 그게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오류를 이스라엘이 그대로 그 짓을 한 거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을 때 나는 멀쩡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양 또는 제사는 희생이 있잖아요. ‘희생’.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과 고난 가운데 집어넣어버려요. 너희들이 어린양 죽으니까 어린양 혼자서 굉장히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어린양이 있는 그 취지를 이스라엘 전체로 확장시켜 버립니다.
확장시켜 버리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멸망의 길로 가요. 망하지요. 그 망하는 모습이 평소에 그들이 무심코 드렸던 흠 없는 어린양의 망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잖아요. 또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게 되면 나를 따라오는 것은 전에는 곧잘 외웠는데 지금은 곧잘 외울 수가 없어요.
여기에 보면 베드로전서 2장에 21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고난을 지신 것은 예수 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
어린양을 죽은 어린양의 혜택만 볼 생각하지 말고 그 어린양의 운명 속에 그들이 함께 파급되어서 확장되어서 놓이게 하는 거에요. 그 아까 첫째시간 마쳤을 때에 제가 중요한 이야기한게 지금의 나라는 존재 또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체험이 누적된 거에요. 과거의 체험, 기억이 누적된 겁니다.
저는 주일날 설교하고 몰랐는데 제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당신은 설교하면서 뭐 틀렸는지 모르지? 모르는데. 대장금이라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자꾸 대장간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분석을 해봤어요. 녹취는 대장금으로 되어 있어요. 오목사님이 친절해가지고 고쳐놨는데. 왜 대장금인데 왜 대장간으로 했는가.
보니까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굉장히 내가 싫어했던 것이 생각나요. 사극이기 때문에 사극은 절대로 미화되면 안돼요. 왜냐하면 모든 봉건주의 사회는 양아치 사회에요. 깡패가 왕이 되는 세계거든요. 이번 수련회할 때 할 거에요. 깡패가 힘 있는 깡패가 대장질하는 세계에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는 50%이상이 노비에요. 인구의 반 이상이 노비라니까요.
그들에게는 뭘 안 가르쳐 주느냐? 절대로 문자를 가르쳐주면 안돼요. 무식해야 돼요. 미국에 남북전쟁할 때 남부 쪽에서 흑인이 40%인데 40%를 개 다루듯이 살육이 가능했던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글을 이야기 안 했기 때문에 그래요. 무식해야 다룰 수 있어요. 여자에게 글 가르치면 안돼요. 여자에게. 기어올라서 안돼요. 추미애처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 똑똑하면 안 된다니까. 조선시대는 그랬거든요.
그 세계를 미화한다는 게 아 굉장히 거부반응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그렇게 학대했던 조선시대 때 그 드라마가 이란에서는 무려 90%의 시청률을 보였거든요. 이란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런 데서는. 평소에 대장금을 안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안 좋아해서 대장금이 안 나오고 대장간이 나왔나 봐요.
이처럼 인간의 모든 언어와 언어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가 껄끄러울 때는 개들이 물 먹기 싫을 때 억지로 안 가듯이 본능적으로 자꾸 거부하고 거역하는게 생겨요. 거부하고 거역하는 것. 도덕과 윤리를 나누는데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게 도덕이에요. 윤리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윤리에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것은 도덕입니다. 윤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요. 그러면 윤리의 입장에서 도덕은 뭐냐 하면은 이것은 허황된 거죠. 허황된 것. 그런데 허황된 것이 있어야 윤리가 빛이 나요. 왜?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고상하게 지향하니까. 그걸 추구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자기를 굉장히 으스대게 만드는 거에요.
지금은 비록 지금은 내가 이렇게 변변치 못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훌륭한 사람 되고야 말리라 그런 선한 목적이 있다는 자체를 자기는 아주 대견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대견하게. 그게 이제 기도로서 나오지요. 기도내용 들어보세요. 본인이 할 수 있는 겁니까? 하고 싶은 거에요. 어느 쪽이에요? 하고 싶은 걸 해야 내가 못한 것을 누가 채워줘야 된다? 하나님이 채워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이 윤리와 도덕은 다 어디서 나오는가? 이게 바로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선악논리에서 나왔지요. 인간은 이렇게 선악논리 자체가 죄잖아요. 인간은 죄의 출신들이에요. 죄의 출신들. 죄의 출신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복음을 이야기해도 올라오는 사이에 뭐가 개입되겠어요? 뭐가 개입되겠습니까? 선악요소가 개입되겠지요.
내가 선하고 악하고 아는 것. 아는 존재, 아는 나가 되어 버리면 내가 이걸 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뭐가 된다? 절대화돼요. 나 그거 아는데. 건들지 마. 나 그거 알아.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을 안 내가 중요하다니까 내가.
사회에서 인정 못 받고 사회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허접하다고 욕 얻어먹는 인간들 교회와서 열심히 함으로써 사회에서 대접 못 받는 것을 교회에서 대접받는 방법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자기를 감추는 방법이에요. 자기 암반층을 감추는 방법이 성경공부에 열심히 매진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고시원. 고시원 저는 안 가봤는데요. 고시원에 보면 좁아요. 문을 이렇게 여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미닫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여는 것을 여닫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시원에 어떤 사람이 여기 이제 밥솥해가지고 이 사람들 밥 먹으라고 해 놓으면 배고파서 막 달려갑니다. 막 달려가거든요. 그런데 방마다 여닫이가 되어 가지고 한참 가는데 면상에 문을 제껴버리죠. 얻어터지죠.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은혜 주께 가자 하더라도 여닫이가 좁은 골목에 여닫이가 왜 그리 많은지 주춤할 수 있고 얻어터지고 자빠지고 이렇게 돼요. 미닫이로 바꾸든지 해야 되는데. 이것은 세상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이렇게 여닫이가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나도 착해질 수가 있는데 나도 의로울 수가 있는데 나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은 그 정도는 내가 알고 있는데 내가 도덕성을 지향하고 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남한테 욕 얻어먹을 거기까지는 아직 막나가지는 않았다는 거에요. 내가 나를 돌아볼 때에. 측정을 뭘로 합니까? 복음으로 측정 안 하고 윤리와 도덕으로 측정합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그 도덕 윤리로 측정해서 뭘 얻고자 합니까? 나는 나의 증인이 되고 싶은 거에요. 나 잘난 맛에 내가 살고 싶은 거에요. 이것이 바로 어린양과 그 다음 텀, 오늘 어린양 내일 어린양 사이에 계속되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매뉴얼화 되게 되면 작년에 했던 십일조 올해까지 계속 써먹고 있어요. 작년에 십일조 했는데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리고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저는 이방민족이 들어와도 누가 지켜준다? 우리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에요. 지금 하나님 어린양 되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는 멀쩡한 것만 챙기는데 급급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새로운 창조자를 어떻게 하느냐. 성령 받은 성도를 주님의 어린양 그 십자가에 동참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의 자기 피가 사건이 되어 버리면 우리의 존재를 찾아와요.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세요.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어떤 꼴이 나느냐 하면은 이런 꼴이 나지요.
제가 지난 주일날 주일학교 설교를 하는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동화책이 있어요. 그림책이 있는데 그림책이 너무나 제게 인상적이고 좋았어요. 나지막한 집들이 있는데 그 그림에 보면 지붕은 좀 작게 그리고 대문을 커다랗게 그려놨어요. 어두워요. 밤이에요. 이렇게 있는데 그림을 어떻게 과장되게 그렸느냐 하면 지붕이 이렇게 있고 그냥 단층집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그림을 그려놨어요. 이건 여러분들이 동영상을 봐야 돼요.
이게 뭐겠습니까? 이게. 어떤 고깃덩어리 그려놓은 것처럼 고깃덩어리는 아닌데 이게 뭐냐 하면 피 발라놓은 거에요. 밤중에 집집마다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 사는 집단촌 같애. 집집마다 전부다 피 발라놓은 삽화를 동화책에 그려 있었어요.
애들한테 설교를 하면서 그림을 딱 보는데요 와~~~ 나의 윤리 도덕으로 나를 증명할게 아니고 성도라면 우리 집 입구에 피 발라놨다 그걸 지붕은 작게 그리고 사람은 안보이고 그냥 피 바른 대문짝만 계속 연이어서 그림을 그려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게 없다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삽화에요. 내가 보기에는. 그림 그린 사람은 그걸 모르겠지만.
신약에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한지 모르겠지만 그걸 강조 안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강조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피만 자랑하는 거에요. 피만. 인간은 쑥 들어가 버렸어요. 거리에 사람도 없어요. 죽음의 사자가 돌아다니는데 걸리면 큰일 나지요. 다 집구석에 다 앉아있고 그냥 피만 이렇게 집집마다 피만 빨간 컬러로 그림을 그려놨다 이 말이죠.
참 그게 지난 주일이니까 벌써 한 이틀 지났지요. 저의 과거 체험 속에 하나에 벌써 들어갔어요. 과거 체험 속에 들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가 망하라고 만든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어린양을 잡을 때 어린양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어요. 미안하다 네 덕분에 우리 살자 이런 생각이었지요.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의도를 묵살해 버립니다.
감사가 나는 멀쩡하고 주님은 고생했으니까 감사가 아니라 주님 고생에 같이 참여한 그것을 감사해야 이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에요. 주님의 고난에 들어가는 것. 그러면 주님의 고난에 들어갔다 안 들어갔다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주님의 고난에 들어갔다 안 들어갔다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모든 생활 가운데서 모든 대화 가운데서 전부 다 그 어린양을 드러낼 수 복음을 드러낼 수 있어요. 사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대화해 볼게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묻습니다. 이 개는 참 예쁘네요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럼 집주인이 하는 말이 개 주인이 하는 말이 저 개는 주인 닮아서 성질이 지랄 같아요 할 때 이게 뭡니까?
갑자기 존재는 존재인데 이 존재를 예수님의 죽으심에 집어넣은 존재로 했을 때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뭘 부르러 왔어요? 죄인을 부르러왔던 죄인의 사건을 무심코 내뱉는 보통 인간의 대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표출이 가능합니다. 주인 닮아서 성질이 엉망입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뭐 피, 피 해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안 걸린다 한다고 믿는 거 아니에요. 평소에 예수님의 피가 있다면 피가 있는걸 어떻게 아는가? 바깥에서 인간이 누구한테 이야기 건다는 것은 이것은 쇠꼬챙이 가지고 나를 찌르는 그런 형국이거든요. 누가 나한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저기서 찌르러 오는 거에요. 마치 고구마 익었는지 찌르러 오듯이. 찌르러 오는 거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요? 이 고구마는 그냥 통과하면 된다고 했지요. 마구 찌를 때 그냥 고구마 다 익으면 그냥 통과해요. 예수님의 피는 뭐냐 하면은 죄인이며 이 죄를 위해서 죄인 아니지만 죄인 되게 하신 그 결과가 피 아닙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 피라는 것은 명사죠. 물질이죠. 물질은 뭐라고 했습니까? 흔적이잖아요. ‘흔적’.
중요한 것은 이 흔적을 남기는 사건이 중요하죠.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이 피 말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이건 새삼스럽게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미 저주 아래 있는 거에요. 저주 아래. 다 같은 공동묘지인데 피가 와서 똑똑똑 두드리는 거에요. 너 이스라엘이야. 내 어린양의 피로 너 구원 받았어 라고 깨우는 거에요.
뜰채 가지고 건지는 것도 되고. 깨우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짝대기가 쑤셔보니까 통과해야 되는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통과하니까 뭐가 걸려. 암반층 온 거죠. 고만 찔러라 나 마이 묵었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아프다는 거에요. 아파요? 왜 아프지? 왜 아픈가 보니까 이 안에 피의 반대의 것이 있어요. 이게 세 자인데 피의 반대.
주님께서 이미 결과로 피의 반대로 복음을 하는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자기 의가 있었던 겁니다. 그 자기 의를 이렇게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는 복음을 알고 있다. 이게 자기 의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거죠. 어떻게? 이게 시간이 하루만 지나도. 하루만 지나도 이렇게 암반층 생기는 거에요. 하루만 지나도.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어제의 복음을 못 써먹잖아요.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는 거에요. 새로운 사태를.
이제는 개 말고 고양이 기르든지 이제 다른 사태를. 또 시어머니 와가지고 냉장고 보면서 집꼬라지 보니 내 아들 불쌍하다 이런 식으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 아들 참 불쌍해요. 이러면 되는 거에요. 제가 뭐 어때서요?! 제가 일하고 밤에 살림하고 두가지 다 됩니까? 어머니는 직업도 없이 한평생 다 보냈는데 나는 지금 애 키운다고 하고 있는데 남편도 같이 해야죠!
이렇게 구질구질 자기 의 이야기하지 말고 자기 의 하기 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도덕과 윤리에서 도덕은 뭐다? 우리가 뭔가 해야 된다. 윤리는 뭐다?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에서 뭘 지향한다? 도덕 윤리에서 뭘 지향해요? 도덕을 지향해요. 왜? 도덕은 허황된 거니까. 허황된 것이 있어야 이 허황된 것이 뭘 대변하느냐?
‘나’라는 이상적인 그걸 이상자아. 착하디 착한 나를 늘 허황되게 상정을 해 줘야 내가 지금 사는 이유와 보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늘 변하지만 주님은 불변하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쑤시는 작대기는 다른 작대기는 이제 생각하지 말라는 거에요. 나는 피 가지고만 쑤셔대는 거에요.
그러면 고구마 뚫었을 때 나오는 이 마지막 장면이 뭐냐? 오직 나는 뭐만 자랑한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피만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 정도 아시고 응용문제 해 봅시다. 자, 38절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지요.
제가 묻습니다. 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까? 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베드로 장모 집에 가봤거든요. 갈릴리 그 근처. 집이 있어요. 베드로 집이 있다고요. 가버나움 그 동네가 처갓집이에요. 베드로가 처가살이 했는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있어요 흔적이. 그러면 왜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까? 소용없다니까요. 사건이죠.
사건은 뭐와 만난다? 사건과 만나겠죠. 왜 열병에 걸렸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 있는데 ‘열병에 걸리지 않는 나’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베드로 장모가 태어날 때부터 열병 걸린 건 아니잖아요. 때가 되매 열병 걸렸지요. 그 때가 되매 누가 왔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거에요.
주께서 피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피를 내면 되는데 피를 이야기할 때 제 존재 괜찮아요? 이렇게 나오면 이게 대화가 돼요? 안돼요? 연결이 돼요? 안돼요? 연결이 안 되는 거에요. 이쪽은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이 아니고 나 잘났다가 마중이 나와버리면 복음으로 교제가 안 되면 참 이것은 엽전꾸러미가 안돼요. 엽전꾸러미.
대전강의 때 했지요. 구멍 뚫려야 되는데 성도는 구멍이 뚫려야 되는데 그 구멍 뚫린 터널 속에 주님이 통과해야 되는데 다른 데는 다 구멍이 뚫렸는데 그 사람은 구멍이 안 뚫려서 튕겨 나와 버리죠. 주로 교회에서 튕겨 나온 사람들이 장로들이에요. 장로들. 아이고 얼마나 고집 센지. 더는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만 튕겨 나와요. 자존심 상한 것을 목사가 자존심 굉장히 상하거든요. 굉장히 고집이 세요. 제가 목사니까 편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존심 자리에 주님의 피 갖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게 참 어려워요 그게. 그럴려면 나를 근원적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지 말고 그냥 사건으로 내가 태어난게 아니고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내가 어린애가 되었다 이렇게 좀 동사를 앞장세우고 명사를 뒤로 좀 돌리세요. 태어남을 위해서 내가 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들이 보면 이상한 소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리지 말아야 돼요? 꼭 걸렸어야 돼요? 열병 나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39절에 보면 병을 어떻게 합니까? 병을 꾸짖는다고 되어 있지요. 꾸짖는다는 말은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다른 존재가 있는 거에요. 존재니까 꾸짖지요. 바다와 바람을 꾸짖고 마치 사람 나무래듯이 나무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가 되지 않고 뭐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존재가 되지 않고 우리는 늘 우리를 성령 오게 되면 우리는 사건화. 오늘 하루 오늘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오늘 그냥 산 거에요. 살았다는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주께서 살려주는 증거물로 흔적으로 우리가 앉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존재가 사건 되기 때문에 존재를 버려야 되기 때문에 버리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자기연민이라고 하는데 자기동정하면 안돼요. 자꾸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미련을 갖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딱딱한 존재가 되어버리면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공격하게 되느냐 반대로 타인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거에요. 그리고 나의 의는 뭐로 구성되었다고 했습니까. 선악이죠. 선악으로 구성되어 있죠. 선악을 보통 이 사회에서 뭐라고 합니까? 도덕과 윤리.
윤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내다보는 것. 내가 언젠가 저 목표에 도달하겠어라는 그런 희망 있는 나를 좀 대견해해 달라. 나를 칭찬해 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나를 격려해 달라 식이에요. 모든 것이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거에요. 인간들이. 우리는 변하고 있는데.
그러면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 때 그럼 불쌍히 여기는 몫은 누구 몫입니까?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요. 주님이. 만약에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겼는데 주님이 불쌍히 여겨버리면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누가 가로막는 셈이 되느냐 하면 내가 선제조치, 내가 한 선제조치가 주님의 피를 완전히 개무시한 게 되어버려요.
불쌍히 여김을 받을려고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면서 40일동안 굶어가면서 이래도 내가 안 불쌍해요? 이런 식으로 시위지. 이것은 반항하는 거에요. 이거는 반항하는 거라고요. 옛날에 아버지들이 그런 거 했잖아요. 자식을 때리지 않고 아버지가 자기 종아리에 놓고 나쁜 짓 한 자식보고 회초리 넘겨주면서 네가 나를 때려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시나리오는 어떤 시나리오가 적합할까요? 이건 초등학교 1학년 도덕시간에 나올법하죠. 아이가 매우 모질게 아버지를 때린다 1번. 2번 회초리를 던지면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2번.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요새 같으면 1번이 맞다고 해요. 어디 쇼를 벌리십니까? 당신의 쇼는 나를 모욕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주님께서 베드로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떤 인간도 주님 외에 존재라고 할 사람 없다 이 말이죠. 끝까지 존재를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가룟 유다가 되지요. 가룟 유다의 그 비장한 각오로서 자살할 때에 목매여 자살할 때, 목 매달아서 자살할 때 그 자살하는 심령은 뭡니까? 주께서 지시했습니까?
성경에 예레미야 5장에 목 매어 자살하라는 대목이 나옵니까? 성경의 지시대로 했습니까 아니면 성경의 지시 없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한 거에요? 마지막 남은 최후의 그 가치, 의미를 나를 위한 의미만큼은 안 다치고 싶은 거에요 그걸. 이거 다치면 나 살 이유 없다는 거에요. 처음부터 그것은 암반층이었어요. 오늘 제목을 이게 좋다. ‘암반층’.
그 암반층을 내가 몰라요. 모르는데 계속해서 복음으로 복음으로 이야기해보면 드디어 딱딱한게 나오죠. 암반층이 나오는 거에요. 복음으로. 그 복음 나오면 그 현장에 십자가 현장이죠. 십자가 원수가 되겠지요. 41절 봅시다. 존재와 사건의 연속입니다. 41절 보기 전에 아까 첫째 강의한 것 다시 복습차원에서 보겠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복습해야 이해가 돼요.
수술 칼 명사지요 살점, 근육 명사지요. 물체지요. 여기 자른다 나오지요. 자른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이게 의미에요. 이게 의미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위해서 두 개의 물체가 동원되는 겁니다. 동원된 거에요. 자,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예수님 계시지요. 나 있지요. 주께서 나를 구원한다 할 때에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았다가 되지요. 성령 안 온 사람은. 성령이 온 사람은 존재에서 떠나지요.
구원이 구원을 위해서 나를 사용한 게 돼요. 주님이. 구원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평소에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뭐가 되지요? 한 자로 뭐가 됩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은 뭐가 됩니까? 죄에서 벗어나야 될 원형, 죄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동정하는 것은 이게 죄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부모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배웠던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안 다치는 거죠. 내가 위대하게 되는 최후에 최고자가 되는 거죠. 이게 과거가 되는 거에요. 과거가 무엇을 규정한다고 했습니까? 오늘날 ‘나’라는 자아를 규정하는 과거다. 과거가 오늘 나를 규정한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날마다 성령이 필요해요? 필요 안 해요? 날마다 필요한 거에요.
과거라고 하지만 어제의 나. 어제는 분명히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구원됐는데 오늘 되니까 뭐가 됩니까? 나는 어제부로 나는 구원되었다 되지요. 그럼 이 존재는 어떻게 돼요? 오늘의 복음이 와서 덮쳐버린 거에요. 콘크리트 한 데 다가 콘크리트 한 번 더 쳐버리는 거에요. 주님의 일하심을 위해 있는 것이지 너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기도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대로 된 성령의 기도는 그 기도의 내용이 절대로 나에게 오지 마세요. 나에게 돌아오지 마세요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제발. please. 이걸 한국말로 하면 쫌. 쫌. 쫌 나한테 그 기도 결과가 나한테 쫌 안 돌아오게 하옵소서. 누구한테 돌아간다?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까 누구한테 돌아가야 돼요? 주님한테만 돌아가게 하옵소서.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서.
그 작업을 위해서 여기 41절에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할 때 그 다음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병 고치고 나가는 사람보고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는 귀신보고 꾸짖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뭐로 보이겠어요? 병 고침 받은 사람보고 어떻게 합니까? 꾸짖는 거에요. 너는 병 고치고도 존재로 환원되어 버리죠. 병 고침 받고. 그런 경우 있었습니다.
문둥병자 10명이 왔는데 다 문둥병이죠. 소경도 있고 문둥병도 있는데 문둥병으로 봅시다. 10명 왔는데 전부 다 고침을 받았잖아요. 헤헤 거리며 다 돌아갔지요. 돌아온 사람은 몇 명밖에 없습니까? 딱 한사람 밖에 없어요. 돌아온 사람 한사람 밖에 없어요. 소경이 눈을 떴다. 소경이 눈 뜬 것이 그것이 구원받은 거에요? 요한복음 9장 이야기입니다.
9장 이야기에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진흙 발라서 눈 떴지요. 눈 감았을 때 존재고 눈 떴을 때도 존재지요. 사건은 없어요. 그럼 뭐가 돼요? 누가 네 병을 낫게 했느냐 할 때에 소경이 주저합니다.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가장 위험은 뭡니까? 내 존재가 목숨 끊어진 게 제일 무섭잖아요. 기존의 그 세력 때문에. 그래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몰래 불러가지고 주께서 믿음 주니까 비로소 그 사람은 눈 뜬 것이 결코 눈 뜬 상태가 아닌 것을 알았어요. 그냥 육신에서 육신이지 육신에서 영으로 간 게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눈 뜬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눈 뜨게 하신 동사, 눈 뜨게 하신 주님의 그 사건 그게 더 중요한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요한복음 9장에서 하는 말씀이 눈 떴다 하니까 네가 보지 못하고 네가 감겼다고 하니까 네가 바로 눈 뜬 사람이다.
결국 이것은 무슨 소리냐? 떴다 감겼다 소경이다 아니다 그 사이에서 뭘 끄집어내요? 그 사이에서. 수술 칼, 잘랐다는 그 사이에서 뭘 끄집어내요? 의미를 끄집어내요. 그 의미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관통되는 계열화되는 의미입니다. 의미는 구조화되어 있어요. 의미는 구조화되어 있다 이걸 설명해 보겠습니다.
의미가 구조화됐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장터에 열악한 도넛가게. 나쁜 기름 써서 파는데 있잖아요. 거기에 뭐가 있다 했어요? 뜰채가 있죠. 뜰채. 뜰채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뜰채가 있지요. 뜰채 이렇게 손잡이 보게 되면요. 테두리는 굵지만 여기에 이렇게 철망 되어 있으면 틀망에 구조 틀만 있지 안에 내용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 안에 내용이 있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여기 도넛만 건지고 뭐는 빠져야 돼요? 기름은 빠져야 되거든요. 따라서 철망만 있어야지 본인이 뭐 여기 나는 서울대학 나오고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이거. 사건의 계열만 있어야 돼요. 사건의 계열. 사건의 계열만 있어야 돼요. 계열만. 내가 이만큼 축적했습니다. 돈 이만큼 모았습니다. 이만큼 공부 잘한다 필요 없어요. 사건의 계열. ‘사건의 계열’.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너 뭐야?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베드로에게도 이야기했지요. 베드로에게 너 뭐야? 할 때 하는 말이 우리가 예전에 변화산에 올라갈 때 갑자기 해 같이 빛나서 그 이야기하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이것은 자기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존재잖아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의 그 사건 계열에 속해 버렸으면 그 사람은 더는 다른 소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기쁨을 새삼스럽게 기쁨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걸로 게임오버에요. 그 인생은 게임오버되었어요. 죽던지 살던지 상관없어요. 죽음이 나를 슬프게하지 않습니다. 그걸로 게임오버된 거에요.
왜? 자기는 사건의 계열 속에 이미 성령을 통해서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즐겁게 살면 돼요. 즐겁게. 골프치던지 아니면 해외 놀러가서 코로나 걸리든지 관계없어요. 뭐든지 즐거워요. 난 이 크루즈 여행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주님께서 사건으로 나를 건졌다는 것을 감사해서 크루즈여행 한 오천만원 들여가지고 돌아 다니는 거에요.
그게 무슨 흠이 됩니까? 증거하는게 십자가인데 그게 뭐가 흠이 돼요. 돈 못 써서 환장 했구나 욕을 하든지 말던지 나는 돈 때문에 기뻐하는게 아니고 크루즈 여행 때문에 기뻐하는게 아니고 이미 나는 완료됐다는 거에요. 이 사건 속에. 그러니까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가 뼈만 앙상한 존재가 된 거죠. 귀신이 떠난 자리는 메우지 마세요. 그냥 귀신이 떠난 자리는 비워두세요. 귀신 떠난 자리에 귀신 모시지 말고.
돈 떠난 자리, 돈을 떠난 자리에 돈으로 보상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한 800만원 보이스피싱 걸려가지고 날라갈 때 어떻게든 기도해가지고 빨리 800만원 후딱 들어오기를 기대하지 말고 비워두세요. 오년 전에 안 날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또 내일 한 오천만원 날릴 수도 있을 문제지만 어쨌든 간에 그것은 존재에 속한 내 관할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내게 속한 문제 아니에요. 그래서 사건이 있으면 뭐가 날라가 버립니까? 윤리 없지요. 도덕 없지요.
윤리 도덕 없으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세상적인 죄에 대한 책임감 없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감 없어요. 세상에 대한.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주께서 우리 이 성도의 육신을 가지고 어린양의 취지를 반복하기 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죄를 더 계속해서 생산해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더 살게 하는 겁니다.
주님 중심으로 주님으로 만족하다가 하루만 살짝 지나가버리면 온갖 동네 쓰레기는 다 모였어요. 머릿속에 다 들어옵니다. 애가 운전 배운다고 나갔는데 사고는 안 일으키는지 그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온갖 걱정 근심은 다 들어와요. 내일 윤석열 체포한다는데 남 체포하는 것까지 걱정 다 하고 있어. 온갖 걱정 근심은 다 들어오지요.
누가 들어오게 하게 하십니까? 온갖 열병은 다 들어와요. 온갖 열병. 누가 그렇게 하셔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왜? 새로운 복음으로 그걸 콘크리트 하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 천국까지 가지 못하도록 방지를 해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열병은 나았지만 치과는 가야돼요 나중에. 그리고 귀신은 갔지만 그 귀신 있는 집은 또 다른 게 또 들어와요.
42절 보겠습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야 이거 진짜 오늘 결론 부분 나옵니다. 예수님을 소유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분 써먹을 데가 많다는 뜻이겠지요. 써먹을 데가 많은 거에요. 그래서 주일 낮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거주할 수는 있지만 정주해서는 안된다. 흐름이죠. 인간은 흐르는게 아니고 스탑. 어떤 정지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고 세상과 연결중심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흐름이죠 흐름. 왜?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신체를 고정시켜놓은 것으로 보지 마시고 어떻게 하느냐? 따라가면서 신체를 따라가면서 파악을 해야 돼요.
제자들도 일부러 제자들에게 자꾸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닌 거에요. 갈릴리에서 유다로. 주님의 신체와 더불어서 우르르 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걸 뭐라고 했냐 하면은 cloud. 크라우드라는 개별자 개체가 아니고 이것을 영어로 하면 구름이죠. 컴퓨터 용어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정보를 집어넣어놓고 뽑아내는 것 크라우드라고 하잖아요.
이걸 쉬운 말로 하면 이게 뭐냐? 덩어리에요. 덩어리. 어떤 덩어리? 구름 덩어리. 기체덩어리. 이 세상은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이 속해있는 덩어리의 대표자로서 싸우는 거에요. 우리의 씨름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영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세상신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 나오라 하지 마세요. 세상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니까. 구름 덩어리니까. 그 영향을 다 받고 있으니까. 누구 하나 똑바로 회개한다고 해서 그 사람 회개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리는 없습니다. 그냥 두 구름사이에 충돌이죠.
그 충돌 사이에 번개 치듯이 충돌하면 충돌할수록 십자가 사건만 점점 더 반복해서 일어날 뿐입니다. 지지직 지지직 음극 양극 충돌하듯이. 그게 우리 살아 있으면서 십자가 증인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가 속한 구름과 저쪽 구름이 서로 충돌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개별자가 충돌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럼 나 잘난 게 돼요.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웠고 내 책임 아니고 주께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그냥 십자가만 증거되게 되면 우리의 할 일은 다 끝나지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이렇게 병고치고 하니까 사람들이 한적한 곳에 오니까 자꾸 떠나지 못하게 하니라.
그 다음에 43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됐습니다. 다른 동네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복음 전달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어떤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지를 않아요. 이 말은 예수님만 그런 게 아니고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자신의 장기나 주특기를 드러낸다면 여러분들은 개별적 의미가 있지만 내가 장기와 주특기를 드러낸 게 아니고 복음의 십자가를 드러내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미국 가서 사나 독일 가서 사나 어딜 가서 살아도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내가 누굴 만나고 헤어지고 내가 결혼한 사람과 어떻게 되고 또는 우연히 첫사랑을 만났다. 개별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첫사랑을 만나든 두 번째 사랑을 만나든 세 번째 사랑을 만나는 뭐 몇 번째 사랑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만나도 중요한 것은 주께서 그렇게 만나게 하셨기 때문에 너라는 죄인이 나같은 죄인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면 되지 달리 생각하면 안돼요.
이제 와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혼자서 울고 진작 내가 붙들 때 유학 간다고 도망가지 말고 그때 같이 결혼하지. 너는 다 말아먹고 나 잘 되니까 찾아왔구나 자꾸 뭐 드라마 생각해가지고 저거 어떻게 처치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만나나 헤어지나 관계없이 내가 전할 것은 나는 내 성질은 지랄같다. 나는 한결같이 엉망이다. 첫사랑 두 번째 사랑 만나도 관계 없어요.
그것만 증거하면 되는 거에요. “네가 달라졌구나.” “그래 내가 달라졌다.” “누구 때문이냐?” “복음 듣고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는데.” 둘 다 달라졌다고 삐지는 영화가 밀양이라는 영화에요. 전도연이 달라졌다고 교도소에 가가지고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이 나도 달라졌는데 그걸 듣고 삐져가지고 나 예수 안 믿는다 이렇게.
전부 다 암반층이 나온 거에요. 복음은 지식이고 젓가락이 통과를 못하네. 십자가만 자랑하면 되는데 십자가 믿는 나를 자랑한다고 그렇게 한 거에요. 그것은 바로 복음 아는 것이 선이라고 여겼던 새로운 윤리와 도덕에 그 귀신에서 못 빠져나와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다시 다른 주님의 시선으로 보게 하옵소서.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사건으로 죄 사함을 위해서 살아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감사하면서 더는 걱정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