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3장 21절 (임플란트 구원) 2009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3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 18절.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세례 요한이 헤롯에 대해서 책망을 했다고 되어 있어요. 배다른 그 자기 남동생의 아내가 헤로디아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적을 했어요. 지적한 이유는 이것 때문에 지적한 거에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거든요 인간은. 그런데 이게 빠져버리면 그냥 흙입니다.
흙+형상 할 때에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거에요. 이 점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형상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 인간이 그 형상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서 형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신약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신 인간의 형상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긍정적이죠. 긍정적, 옳은 거죠. 그런데 인간은 뭐를 긍정으로 보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긍정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형상은 이것부터 시작점이에요.
출발점으로 하니까 인간의 형상에 있는 것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존엄성을 고수하지요. 존엄성을.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사형이라면 그러면 인간을 코로나로 죽이는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 입장에서 완전 사형감이죠. 사형감이 되는 거에요.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든 거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드셨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형상에서 뭐로 변하시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게 긍정적이니까 이건 부정적이니까, 부정적인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하는 이 작업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작업을.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 모델이 있어야 되겠지요. 모델이 누구냐 하면은 골로새서에 1장 15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거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났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형식으로.
그러니까 하나님 보고 일 안한다 하지 마세요. 하나님 일하시고 계십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부정하는 일을 해요. 부정하는 일을. 자, 헤롯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기 누가복음 3장에서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께서는 부정하지요.
부정하기 위해서는 지적질해야 된다 이 말이죠. 선지자로 오신 세례 요한이 누굴 지적했느냐 하면은 헤롯보고 지적한 거에요. 그건 악하다고. 지적질을 했는데 헤롯이 도로 누굴 옥에 가두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버렸지요. 그래서 여기 본문에서는 한가지 악을 더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체가 품고 있는 그 자질, 품고 있는 그 자질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인간이 인간을 고집한다 이 정도가 아니고 그 인간이 인간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인하여 필히 누구를 부정으로 보느냐 하면은 이쪽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성향을 지녔다 라는 사실을 견주기 위해서 세례 요한과 헤롯을 맞닥뜨리게 한겁니다. 세례 요한과 헤롯을 맞닥뜨려요.
일반 백성들은 둘 사이를 머뭇거리면 안돼요. 선지자 쪽이면 선지자 쪽을 하든지 아니면 헤롯이 갖고 있는 그 힘의 권세 무서우면 그쪽을 하든지 이렇게 둘 중의 하나를 골라라 이 말이죠. 너희들이 한번 선택해보라 이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 다치는게 싫어가지고 둘 다 같이 갖고 있으면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한쪽은 부정이고 한쪽은 긍정이기 때문에 화합할 수 타협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요.
여러분들이 알아야할 것은 인간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 같이 들어와요 같이. 우리 내부에. 같이 들어와 버린 사람이 뭐냐 하면은 성도입니다. 같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뭐되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되게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마중 나올 때 뭐로 마중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피로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피 안에서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환됩니다. 바뀌어집니다. 피 안에서. 바뀌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형상 자체가 이게 죽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흙이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형상 이 자리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이 자리에 올라와요. 이 자리에 올라와요.
이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인간의 형상 가운데 아무나 이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뭐냐 하면은 언약대로, 언약의 공식대로 수학정석 있지요. 정석대로 언약에 의해서 흙으로 뽑힌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형상과 결합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항상 자기 자신을 뭐로 봅니까? 자기 자신을 긍정으로 보죠. 긍정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긍정으로 보고 신약적으로 본다 했지요.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인간의 형상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이 긍정으로 보는 여러가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인간 긍정의 예.
성령받고 싶어요. 두 번째 구원받고 싶어요. 세 번째 죄 씻음받고 싶어요. 전부다 받는 거에요. 받고 싶어요. 이게 바로 인간 긍정이죠. 아까 혹시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는 뭐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흙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 되지요?
현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다가 플러스 뭘 시키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성령받고 싶어요. 구원받고 싶어요. 죄 용서, 죄 씻음받고 싶어요를 자기의 뒷부분에다가 이렇게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 위주로 곡해하는 방식이에요. 곡해하는 방식.
성령 받으면 영적 사람이 되서 천국갈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인간의 형상이 듣게 되니까 탐이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구원받으면 천국간다. 이것도 탐이 나는 거에요. 죄 씻음받으면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는다 이게 탐이 나는 거에요. 탐이 나니까 가만있을 수가 없잖아요.
인간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에 이걸 달라고 하는 거에요. 기도가 됐든 간구가 됐든 하나님이여 이것 세 가지 주시옵소서. 성령 주세요, 구원 주세요, 죄 씻음 주세요. 이걸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긍정 하나님의 형상을 시작점으로 하는게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적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긍정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다가 플러스 뭘 하고? 인간을 흙으로 하게 되면 이게 뭐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이 되지요. 그렇지요? 왜냐? 하나님의 형상이 긍정이고 인간의 형상은 부정적인 거에요. 이거는 창세기 5장 아담의 죽었다 죽었다를 반복입니다. 부정적인 거에요.
그런데 인간의 시작은 뭐냐? 항상 시작은 뭐냐?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됐는데 왜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되야 될 인간이 왜 내가 여기 인간이라는 것을 왜 긍정합니까? 긍정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 내부에 뭐가 있다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형상 온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도발하고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지요. 강력하게. 내가 일을 벌리는데 끼어들지 말라는 거에요. 내가 나 긍정해서 일 한번 꾸며볼까 시작하는데 내가 시작점이 되는 거 말고 다른 쪽에서 시작점이 되는 그 노선은 내가 용납을 못하겠다는 거에요.
기도를 해도 내가 기도하고 전도를 해도 내가 하고 헌금도 내가 하지 다른 사람이 해서 결과를 낳는 것은 나는 추호도 내 존엄성에 입각해서 나는 도저히 그걸 용납 못하겠다. 그런데 성경은 약속이라고 이해하니까 그 약속이라고 이해한 게 누가 이해합니까?
인간의 형상을 긍정으로 보는 나부터 그걸 성경을 긍정으로 보는 거에요. 나부터 출발한다는 조건하에 성경을 보는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주어진다니까 그 약속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버리면 마치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 거기에 21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만약에 우리 식대로 하게 되면 하늘이 열리는게 아니고 땅이 열려서 이게 마치 부스처럼 성령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야 이 말이 맞아요. 이 논리가 맞는다고요.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하나님의 형상+흙’이죠. 인간 아닙니다. 흙이에요. 흙이 될려면 인간의 형상은 여기서 뭐로 포함돼요? 살아있다는 인간이 뭐로 변해야 돼요? 죽은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과 엮어져야 백성 되는 겁니다. 참된 인간 되는 거에요. 이게 진짜 유월절 어린양의 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피+죽음’이 생명이 되는 거에요. 죽는다는 게 필수적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천당갈려면 뒤에 여기 플러스 뒤에다가 뭘 하는 겁니까? 인간의 형상 플러스 여기에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해서 이게 천국 백성으로 되고 싶은 거에요. 왜? 긍정적에다가 플러스 긍정적을 보태면 하나님의 앞에 긍정적 존재로 부각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방법이에요.
그러면 이 약속 준 것을 추스려보는 겁니다. 노아 언약은 방주이지요. 방주는 만들면 되고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 믿으면 되고. 그 다음에 또 모세 언약은 율법 지키면 되고 다윗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면 되고 예레미야의 새언약은 성령을 받으면 되고 그래서 신약에 와서 성령 받아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하니까 성령 주세요, 구원 주세요, 죄씻음 주세요.
하여튼 좋은 거는 자기한테 다 땡기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죄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설교 시간에 여러분 성령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성령은 반드시 뭐를 집어넣어야 됩니까? 성령 받고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이걸 집어넣어야 돼요. 이걸 집어넣어야 돼요. 내 쪽에서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자, 헤롯이.. 지금 누가복음 3장 18절하고 있지요.
자, 헤롯의 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적질을 한 이유가 헤롯 그쪽 노선은 헤롯 식으로 유대 나라를 구성하는 그 식은 하늘나라 보시기에 부정적이다?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라는 것을 지적하는 거에요. 부정적이다. 그러면 긍정적인 것은 뭐냐? 그 뒤에 나오는 26절부터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나오죠. 예수님이 나오십니다.
예수님과 그 다음에 누구와의 만남입니까? 지금 세례 받을 때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도 세례 받았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세례 받았잖아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무엇이 왔습니까? 성령이 왔지요. 성령 오셨다 이 말이죠.
성령이라 하는 것은 진리가 한 곳에 모이는 것, 이게 성령이에요. 진리가 한 곳에. 진리의 영이니까. 모든 진리는 한 곳에 다 몰려 있어요. 집결되어 있어요. 한 곳에 모인다는 말은 다른 곳에는 진리가 있다? 없다? 진리가 없는 거에요. 진리가 없어요.
자, 그 한 곳이 하늘이 열리고 바늘구멍처럼 뚫린 그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거기서 왔지요. 왔는데 땅에 있는 누굴 노리고 수직하강합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진리가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는 진리가 있다? 없다? 없지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형상 플러스 이 작업이 언약이거든요. 언약. 이 작업이 언약이란 말이죠. 결과적으로 참된 인간이 나오지만. 이 언약, 이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의 어떤 방법도 다 거부하고 배제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 자신이 육신, 육신과 해서 언약을 이루었고 그 언약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제가 지난번에 제주도 갔을 때 제주도 섬이 중간에 화산이 터졌단 말이죠. 화산. 그럼 제주도의 모든 토지와 땅을 형성케 하는 그 모든 재료가 오직 한 지점에서 나왔어요. 백록담. 한 지점에서 나와서 이게 퍼져버린 거에요. 폭발해서 퍼졌지요 마그마가.
그렇다면 모든 진리,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성령 받은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해서 이게 퍼져 나오면서 이 세상을 잠식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챙기는 겁니다. 자, 여기에 성령이 올 때 어떻게 왔다 했습니까? 비둘기같이 왔다는 거죠.
비둘기같이 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여기에 16절에 보면 그가 오게 되면 성령과 불로써 오는 거죠. 불로써 오는 것과 대비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둘기라는 것은 온화하게 평화롭게 오신 거에요. 초장부터 아주 작살내시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초장부터.
초장부터 불로 오는 것은 오순절날 오는 거고요 지금 여기서는 부드럽게 온화하게 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도끼들고 이렇게 싸그리 다 치는게 아니고 오히려 도와주는 방식으로 굉장히 약한 모습으로 깃털처럼 이렇게 같이 있어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식사도 가능하고 잠자리도 가능한 모습으로.
심지어 예수님의 귀싸대기를 때리고 옷을 뺏어도 주께서 성내지 아니하고 화내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온화한 모습으로 예수님 자신이 마치 우리들 속에 있는 인간의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는 비둘기같은 그러한 존재로써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예수님을 유화하게 부드럽게 만들었다 해서 비둘기처럼 오셨다. 나중에 비둘기 끝나면 불같은 성질로. 한 성질하시죠. 아주 작살을. 여기 비둘기처럼 오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초장부터 작살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건드려도 약한 모습으로 보이면서, 약한 모습으로.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어쨌든 우리가 알 것은 바로 모든 진리가 한곳으로 확정되었다는 거에요. 이말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진리가 한곳으로 모았다는 것은 예수님 오시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다는 말이에요. 일체 진리는 없는 겁니다.
자, 예수님께서 진리로 오실 때 성령으로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강의 다시 한번 되풀이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 긍정적이다. 인간의 형상이 없고 뭐가 있다? 인간 또는 아담의 형상 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의 형상에서 그냥 인간의 형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든지 긍정적으로 하는 거에요. 인간의 형상 그리고 ‘나’라는 형상, ‘나’라는 인간.
인간은 부정하지 않고 할 때 뒤에 자꾸 뭐가 오느냐? 긍정 붙이고 꼬리처럼 또 긍정 붙이고 또 긍정 붙이고 긍정 붙이고 자꾸 붙이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헤롯의 다스리는 유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기 나라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부정으로 보지 않고 긍정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에게 진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네들의 소망입니다. 인간에게 그냥 소망이 아니고 간절한 소망보다 더 진실다운게 없어요. 왜 그게 진리냐 물으면 내가 원하니까. 내가 원하니까. 어떻게 원하면 되는데? 시큰둥하게 원해? 아니. 간절하게 원해. 내가 원하니까.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확인 해 볼까요? 아까 인간이 뭘 원한다고 했습니까? 세가지. 3종 세트 뭘 원한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원하고 두 번째는 구원받기를 원하고 세 번째는 죄 씻음 받기를 원하죠. 이게 바로 인간에게 진리라는 거에요. 진리. 이게 진리에요. 이래야 교회 장사가 되니까. 교회는 이걸 상품화해야 장사가 돼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소망이니까 그게 어떤 소망이냐 하면은 간절함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거에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뭐였다? 그 근거가 뭡니까? 자기긍정이에요. 자기긍정에서 긍정의 긍정을 붙이면 나중에는 천국이라는 긍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본인이 기대한다, 바란다, 원한다 이 전부 한마디로 뭐냐 하면은 그냥 자기들의 소망입니다. ‘소망’, ‘희망’. 전부 그런 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복음 3장 본문에 보면 이 간절함과의 대척이 되는 대척 관계되는게 뭐냐 하면은 어떻게 대척하느냐 하면은 오직 한 곳. 오직 한 곳이에요. 예수님에게 성령 옴으로서 구원문제 성령문제 이 모든 문제는 네가 관여하지 말라는 거에요. 왜냐하면은 네 간절함과의 정반대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란 말이죠.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러면 주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그러면 안되는겁니까?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떡해요? 라고 묻지요. 그 어떻게 해요라고 묻는 그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오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마그마가 덮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희망이 없는 거에요. 다른 희망이.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희망대로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맘껏 펼치소서가 안되잖아요 그게. 이미 내 소망 말고 다른 소망, 내 사랑, 내 믿음 말고 주님의 소망과 믿음이 나한테 와버리면 나는 그냥 주님이 한 곳밖에는 진리가 하나로 모든 것에 집중, 집중된 것이 나를 진리답게 쓰시겠다는데.
한 마리의 노새가 되어도 좋고 나는 당신을 위한 하나의 참새라도 좋아요. 가지가 붙어도 괜찮습니다 이럴 정도로 자기가 자기 주체가 아니고 주체를 이미 넘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쓰시겠다 내가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소망인 동시에 나의 기쁨이 되는 거에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안 오시면 내 인생 지옥 가잖아. 어떡해요 하는 것은 여전히 뭐에 긍정합니까?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겁니다.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면 왜 안 된다고 했습니까? 이 안에 어떤 마음이 품고 있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형상을 공격하는 마음이 들어있어요.
그냥 내 일 내가 알아서 해 그게 아니에요.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헤롯이 그걸 대표로 보여주는 겁니다. 네가 선지자면 선지자지 어딜 나한테 지적질이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지적질하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세례 요한이 너무 정치적인가? 왜 광화문 나가서 태극기 흔들고 왜 자꾸 사회적으로 헤롯이 정치하든 말든 복음 전하면 되지 자기가 왜. 헤롯왕이 자기 배다른 형제의 부인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걸 왜 지적질을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세례 요한이 지적질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침투돼 있는 것을 색출할 지적질할 의무가 있어요. 색출할 의무.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라고 지적하는 거에요. 헤롯이 이거 말고 정상적인 결혼 했으면 다른 거 또 지적해요. 반드시 이거는 주님의 지적은요 이거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요. 이거 아니면 다른거 지적해요. 다른거 지적한다고요. 기어이 하늘나라에 침투하는 것을 색출할 의무를 가진 거에요. 저거는 우리 편 아닙니다. 저런 것은 하늘나라의 속성에 위배됩니다 라는 것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는 거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지적하는 그 지적이 일반 대중들한테는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처럼 느껴지고 어떤 자기가 뽑아나올 권세처럼 본인도 거기 권세에 속해져가지고 발을 빼기에는 완전히 이건 콘크리트를 잘못해가지고 자기 발 빼고 콘크리트해야 되는데 자기 발 집어넣고 콘크리트해서 자기 발을 못 빼요. 발 빼면 자기 발만 아파. 깁스해야 돼요.
권세라는 것이 이미 인간의 몸에서는 굳어졌어요. 왜 굳어졌는가? 인간은 자기를 뭐하기 때문에? 부정하는게 아니고 자기를 긍정하기 때문에. 나도 나 긍정, 너도 나 긍정 그럼 우리는 한편이네. 이 세상에는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모두 한편이이에요. 인간긍정을 이걸 성경으로 정당화시킨 학문이 있어요.
그 학문을 가지고 여러분 들어봤나 모르겠는데 그 학문 이름이 바로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신학이에요. 그 신학 교육받은 사람을 목사라고 하지요. 신학교육을 마친 사람을 목사라고 하고 중간쯤에 있는 사람을 전도사라고 해요. 이 사람들은 오직 인간긍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긍정에다가 성경적인 개념들을 플러스시키게 되면 긍정적인 ‘나’가 나중에 천국 가는 긍정적인 존재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을 상품으로 제공해서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지금 누가복음 3장에서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는 없어요. 교회라는게 없어요. 교회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 될 때 그 때 시작되는 거에요. 교회는 없어요. 교회 없다는 말은 기존의 이스라엘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유대나라는 자기를 뭘로 봅니까? 이스라엘로 보는 거에요. 유대나라가 이스라엘 마지막 맥을 잇는 남은 자, Remnant, 하나님의 남은 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가 남은 자 될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 창으로 찔려 죽일려고 남은 자 들이에요. 인간의 악마의 본성을 궁극적으로 집약해서 하나의 모아서 힘을 모아모아 모아서 하나님에게 돌격하라고 남은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제가 그 대구강의 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안 믿고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어요.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없어도 살 거 다 살아요. 하나님보다 다급하지가 않아요.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너희 아비가 악마다. 악마하고 직통이다. 악마하고 직통 계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들은 자기 역할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속성을 모아 모아서 모든 기를 다 모아서 힘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을 찔러줘야 돼요.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까지 한패 먹어가지고 팔아먹으면서 가룟 유다한테 돈 30냥 주면서 그걸 해야 돼요.
인간 긍정이 남긴 마지막 모습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진작에 다 보여준 거에요. 아 내가 나를 긍정하는 나의 긍정의 마지막 모습 저 모습이구나. 진리를 향하여 공격하는 모습. 이미 세례 요한도 침투하는 그것을 침투하는 적들을 침투할 때 세례 요한이 그냥 옥에만 갇혔습니까? 자기 목이 잘렸어요? 어떻게 됐어요? 목이 잘렸지요. 목이 잘렸을 때 비참하게 잘렸지요.
그 목 자르라고 김여정이 이야기했다고요. 김정은 여동생. 김정은 여동생이 세례 요한 목 자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여자 말 듣고 김정은이 목 자른 거에요. 세례 요한 목 자른 거에요. 그럴 때 백성들이 데모했습니까? 왜 죽이냐고 데모한거 없어요. 왜냐하면 전부 다 자기 긍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아직도 뒤에 달려 있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 있잖아요. 나 성경100독했다 1000독했다 달라붙은 것. 인간의 형상 뒤에 있는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다 신학교 때 이거. 급하면 다 떨어집니다. 급하면. 어머나 어머나 떨어진다고요. 나라도 살아야지. 내 가족이라도 살아야지. 이것만 달랑 남아요. 객차는 떨어져도 기관차는 달린다. 꼬리는 떼버려라. 몸통 살아있으면 산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형상을 뭐로 바꾼다? 이 노선. 하나님 형상+흙, 노선에 인간의 형상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에요.
죄인을 부르러 오실 때 이 긍정을 뭐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됩니까? 부정으로, 절대적 부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말씀과 기적으로 계속 베푸시는 겁니다. 베풀어 주는 거에요. 네가 시작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이미 따로 한 지점으로 확정되었다. 성령이 임한 성령이 급직하해서 꽂아서 만나게 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외에는 이 땅에 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주시든 진리를 주든 죄사함을 주시든 천국을 구원을 받게 하든 그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기의 활동 소관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소관. 누가복음 4장 한번 봅시다. 4장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뿐이고. 뿐이고. 뿐이에요.
그 다음에 한번 보세요.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고”. 나아만 장군 뿐이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병 고치러 온 게 아니란 뜻이죠. 이초석 그 교회처럼. 병 고치러 온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러 온 게 아니에요. 인간의 자기 긍정을 주께서 긍정을 마중나온 게 아닙니다. 주께서 긍정함으로써 오히려 긍정을 뭐로 바꿉니까? 부정으로 바꾸는 거에요. 내가 너한테 병고쳐주는 것은 네가 나에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네 요구와 전혀 상관없어 라는 거에요. 문둥병환자가 10명 있었지만 고침 받고 난 뒤에 한사람도 오지 않고 단 한사람 이방인 사마리아인만 주님께 왔잖아요. 주님께 오셨다고요.
중풍병자가 내려올 때 병 고치려 지붕 뚫고 왔잖아요.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네 믿음이 좋구나 이게 아니에요. “네가 바로 죄인이다. 네가 죄인이다. 너 하는 모습이 죄의 절정이다. 병 고치겠다고 발악하는 모습이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 병 고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사함을 하러 왔다.” 죄사함을 하는데 적절한 대상자가 드디어 주님 앞에 걸려든 거에요. 병 고치겠다는 것, 그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 병 안 고쳐주면 “나는 예수님 미워할꺼야!!!!! 미워 할거야.” “미워해 그래. 미워해.” 그게 네 죄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진리냐?” “아닙니다.” “진리도 아닌게 왜 말이 많냐? 네가 길이야?” “아닙니다.” “길이 아닌 게 왜 길을 언급해? 네가 생명이야?” “아닙니다.” “그럼 뭐야?” “죽음입니다.”
그럼 끽소리 말고 가만있어. 죽었으면 죽은 티를 내야지. 죽은 놈이 팔딱 살아가지고 망둥이 같이 살아가지고 왜 그러고 있냐 말이죠. 죽었으면 입에 거품 물고 있어야지. 마스크를 하든지. 인간이 주님의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이건 기적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여러분들의 고깔있잖아요. 고깔. 깔대기를 거꾸로 해보세요. 깔대기를 거꾸로 해놓고 여기에다가 쌀알을 여기에다가 부어보세요. 여기에 쌀알 몇 개 남아 있습니까? 인간 자체가 긍정인데 복음을 전하고 뭘 전해도 벌써 돌아서면 싹 다 실려나가는 거에요. 이게 뾰족해가지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인간 마음속까지 말씀이 들어온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조건에 부합되야 돼요. 언약 조건.
예레미야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 들어온다고 했습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하나님 말씀이 또는 예레미야에 나오지요. 여러분 아시는데 한번 보고 지나갈까요? 10장 16절에 언약의 절차가 나와 있어요. 언약의 절차가.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어디에 둡니까? 마음에 두지요. 신명기에서 그렇게 마음해도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 긍정이 된 이상은 언약의 원칙이 아니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언약의 원칙은 뭐냐 하면은 이 언약에 내 것을 제거하고 내 것을 치워버리고 거기 주의 것을 거기에 담기는 거에요. 십자가의 피가 뭐냐 하면은 내 것을 죽이고 확인한 다음에 그 다음에 주의 것이 들어오는 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이빨 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임플란트’.
임플란트 원칙에서 기존 이빨 뽑아야 이게 들어가요. 이빨 뽑아야. 내일 아침에 할거에요. 지금 한 개 남았는데. 내 것에다가 받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뺀치로 뽑듯이 뽑아버려야 돼요. 뽑는데 그게 안 아플 수가 있어요? 그동안 자기 긍정으로 평생을 살아 왔는데. 대표적인 자기긍정의 표어가 그거 잖아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MBC를 봐라.
입을 크게 열라 이런 거 있잖아요. 입을 크게 열라. 채워줄게. 어떻게 우리가 농협 포대기입니까? 입을 적게 열려서 안 들어갔다. 크게 열어야 들어간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자기 긍정이에요. 이 긍정 자체를 뿌리 채 뽑아버려야 돼요. 뿌리 채.
날마다 나는 주 예수의 죽음에 나를 넘기운다. 나를 넘기운다. 고린도후서 4장에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으심에 우리를 넘기운다 했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 내 몸을 넘겨버리는 거에요.
우리는 넘길 때 어떤 모습으로 넘기느냐 하면은 우리 혼자 간절함으로 철야기도해서 넘기는게 아니에요. 옛날에 제가 젊을 때 20대인가 30대 때 봤던 영화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표를 너무 많이 팔았어.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서 본 영화가 있어요. 영화제목이 Ghost.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랑과 영혼. 데미 무어하고 그리고 몇 년 전에 죽었던 남자. 패트릭 스웨이지 그 사람하고 둘이 나오잖아요.
자, 앞에 있는 이걸 할 때 어떻게 하느냐? 뒤에서 합니다. 뒤에서. 뒤에서 하는데 도자기가 물레 돌다가 부서져요. 부셔져도 관계없어요. 뒤에서 만든다고요. 뒤에서. 주님께서 우리 힘으로 내가 나를 뽑아내는 이것은 불교에서 도 닦을 때 그때 하는 거에요. 내가 나 뽑는다고 방문 닫아 놓고 온 겨울에 혼자서 불 때놓고 앉아가지고 점 하나 찍어놓고 쳐다보는 것처럼. 도 닦겠다고. 그 도 닦는 것이나 성령 받겠다고 기도원에 가는 것이나 차이점이 뭡니까?
주님께서 뽑을 때 우리는 어떤 착하면 착할수록 잘 뽑힐까요? 잘 안 뽑힐까요? 착하면 착할수록. 미리 남아가지고 자꾸 해서 안돼요. 주님께서 뽑을 때는 우리로 하여금 신경 다 죽이고 뽑아요. 우리의 신경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줄, 가족, 자식, 남편, 아내 전부 다. 목사 집사 모든 것 다 뽑아내고 그냥 시커먼 죄 덩어리 그 자체를 “내가 이제 뽑아도 너 이제 미련 없지?” “미련 없습니다.” “확 뽑아 버린다.” “뽑으세요.”
아까 진리라고 하는 것을 다시 보자. 진리란 우리 인간 세계의 진리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진리란 자기 간절한 자기 소망이 진리죠. 그것만이 인간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을 때는 결국 간절한 소원보다 더 진리다운 게 없기 때문에 뽑을 때 우리에게 뭐가 없어요? 소망 차체가 없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우리를 뽑아버려요.
네 자체로서는 뭘 아무리 헌금, 기도, 전도 집사 되고 목사 되도 너는 소망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뽑아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빨을 죽여놓고 뽑아내겠죠. 냉동하든지 얼얼하게 만들어서 뽑아내지요. 미련 없지? 확 뽑는다! 또 딴소리 하지 말고. 의사가 잘못 뽑았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말고. 뽑는다. 의료보험 안 되는데 뽑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확 뽑아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뽑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게 아니고 ‘뿐이고~’ 이거에요. 왜 하나님이여 왜 저 사람 놔두고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거에요. 본인도 의아해. 이 순서가 내 순서 맞나? 왜 내 차례가 됐지? 주여 왜 제가 구원되야 됩니까 라는 이러한 의아함. 감당이 안돼요 이 기적에 대해서. 왜? 내가 내 구원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가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천국 간 이유를 아시겠지요? 강도가. 살인강도. 사람 죽인 살인강도가 왜 구원받는지 아시겠지요? 그야말로 본인도 어이벙벙해요. 지은 죄가 분명하고 이건 나도 그걸 충분히 인정하는데 내가 지옥 갈 사람이란 건 충분히 인정하는데 바로 그 인정하는 그것이 인정하는 그 마음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그 마음의 전개로써 마그마가 터지듯이.
주님의 성령의 부드러운 마음이 비둘기 같은 마음이 퍼졌기 때문에 부드럽게 확 뽑아버리는 겁니다. 참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나의 구원을 삭제시키고 구원하신다 이렇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소원과 열망을 하나님께서는 그걸 거절하시면서 구원하신다. 나의 구원은 나의 긍정에서 나왔지요.
그럼 나의 구원을 구원 됐냐 안됐냐를 누가 측정하느냐 하면은 나의 긍정적 마인드가 이걸 측정해요. 조금 모자라다 싶으면 착한 일 더 해. 이웃 배려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구색을 갖춘다 하지요 구색. 가게 구색이 있어야 단골이 모이죠. 왔는데 물건 없으면 따지고.
온갖 주께서 원하는 구색을 다해. 십일조 했어? 네 했습니다. 구색 갖췄구나. 전도는? 일년에 두 번씩 합니다. 이렇게 구색을 갖춰서 계속 긍정적인 것만 남깁니다. 나의 구원, 나의 착한 일 , 나의 모든 구원이 이 자체가 나를 깎아내시면서 구원합니다. 그걸 제거하시면서.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가 아니라 주께서는 네가 남긴 결과가 어떠냐? 결과를 봐라. 내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구원을 달성하겠습니까 묻지 말고 내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묻지 말고 지금 주께서 손댄 그 작품을 보라 이 말이에요. 너 하는 모습을 보라 이 말이죠. 그 자체가 주님의 섬세한 손길이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회사 다니다가 잘렸다. 불평하지요. 그러나 잘리면서 밤에 참 슬퍼하면서 보세요. 거기에 달이 떠있지요. 그러면 시편 136편 “달 지으신 분께 감사하라. 그 너그러움이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넘친다.” 이렇게 할 때 그 동안 취직, 취직만 생각하다가 달보다도 더 못해. 달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 덩어리로 존재하잖아요.
그럼 우리는 뭐에요? 그 달 보고 난 뒤에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에 들풀을 밟았다. 그 들풀을 보라 이 말이죠. 그 들풀을 누가 키우십니까? 주께서 키우시지요. 들풀 치워보니까 참새 한 마리가 우다닥 뛴다 이 말이죠. 그 참새는 누가 키우는데? 주님이 키우죠.
이 모든 만물이 부지런한 주님의 손길의 작품으로 있는데 도대체 나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못 만나서 그런지 혼자 도자기 굽겠다고 내 도자기. 남이 가져가면 안돼. 내가 구원 받아야 돼. 내가 도자기 구워야 돼. 내 작품이여야 돼. 나는 내가 내 작품이여야 돼.
그런 고집을 하니까 바로 주님께서 참새 키우시다 오신 주님을 우리가 창을 들고 찔러버린 거에요. 그런 메시아 필요 없어. 나 하는 일을 긍정하는 그런 예수를 원해. 성경공부해서 천당 가는 그런 예수를 원해. 다른 예수를 갖고 원할 때 그게 바로 악마의 쏟아져 나오는 악마의 본성입니다. 이게 악마의 본성이에요.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믿는 것은 본인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신감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다고요.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믿는 것도 혼자 살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약간만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예수 믿는 거에요. 아직 자기한테 소망이 있습니다. 본인이 진리인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3장 21절 (임플란트 구원) 200922b-이근호 목사
진리가 한꺼번에 모아진 것이 그게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고요. 그럼 성령 세례 받았다는 말은 진리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을 의미하지요. 진리가. 그러면 예수님이 찾아오신걸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이 남아있는 진리 없이 몽땅 다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시죠.
그러면 주님께서 일거에 한꺼번에 진리로 오셨다는 것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나를 명백하게 하는 겁니다. 나 자신을 아주 명확하게 해요. 명확하게. 나를 명확하게 또는 명백하게 하는 방법은 나를 나의 최종적인 모습으로 비취게 한다. 나를 비취게 해요. 나의 최종. 나를 나의 최종적인 모습으로.
두 개를 합쳐 버리면 명백하다. 요지부동. 더는 내 모습이 더는 없는 꼭 그것으로 확정된 내 모습. 그걸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 십자가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으로 들어와요. 그걸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지난 낮 설교에 의하면 십자가가 그냥 쉽게 욕조라고 하면 되지요. 욕조. 내가 목욕탕 욕조 안에 앉아있는데 뒤에 문을 안 닫았는 모양이라. 실제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택배 왔습니다 하고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내 모습의 어떤 모습을 보이겠어요? 욕조 안에 들어 있는 내 모습을 보이겠죠. 안에 들어 있는 나.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십자가 안=성령 안, 이걸 ‘주 안’, ‘그리스도 안’ 계속 이걸 번갈아가면서 사용합니다.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내가 혼자 있지 않고 어떤 욕조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계속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욕조 안에 있는 십자가 안에 있는 나는 이미 죽은 나로 만들지요.
죽은 내가 죽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내가 죽었다는 그 조건하에 살아나는 거에요. 감사가 나오고 온유가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헌금이 나오고 전도가 나오고 기도가 나오고 전부 다. 단 조건이 뭡니까? 내가 죽었다는 조건하에 나와 버리면 이 모든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누구 것이냐 하면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죠. 주님의 것.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전도도 주의 이름으로 한다. 전부 다 주의 것이 되는 거에요. 조건이. 내가 죽는다는 조건하에. 그렇게 되면 제가 이렇게 하면 이런 사람은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라고 여러분들이 질문하고 싶어질 거에요.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심사가 주님이 또는 진리가 당신을 통해서 살아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손가락을 나한테 하지 말고 주님이 저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주님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라고 해서 그걸 가지고 예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여기 욕조 이것만 해도 성경 전체가 다 풀려버리죠. 욕조 이것만 해도.
이거는 구약에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전쟁할 때 혼자 나가면 안돼요.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나가야 전쟁에 이기는 겁니다. 함께 해야. 함께 할려면 본인은 죽어줘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교인들은 뭐하느냐 하면은 금식하는 거에요.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금식하는 겁니다.
에스더에서 에스더가 뭐라고 했습니까? 금식하면서 뭐라고 했어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니까 에스더가 금식하기 전에 이미 누가 금식했어요?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다 금식했잖아요. 그 금식의 결정체, 금식의 핵심은 에스더가 금식해야 돼요. 에스더가 금식하면서 하는 소리가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
이것이 에스더 외에 다른 모든 유대인에게 공통적인 사상으로써 전부 다 퍼져나가야 되는 겁니다. 주님은 유대인을 해방하면서 유대인이 해방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극구 저지해버립니다.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주님은 네가 구원에 개입하는 것을 주님께서 극구 저지해버리죠.
왜냐하면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주님의 공로로만. 그래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했잖아요. 예수님 그런 비유했지요? 임금이 빚 갚으라고 하니까 빚을 많이 진 신하는 갚겠습니다 해놓고는 자기 종한테는 땡전 10원까지 다 받아내는 것. 그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했지요.
그전에 그 이야기하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예수님 제가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7번 용서해야 됩니까? 했지요. 본인이 남을 용서할 자격이 되는 냥 생각한 거에요. 7번 용서하면 인간으로서는 얼추 진짜 최고의 용서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너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권한도 없다. 권한도 없어.
진리는 한곳에 모아지고 예수님께 모아지고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뿐이고, 뿐이고 된 사람들 어디로 끌고 오느냐 하면은 전부 다 예수님 쪽으로 몰려가야 돼요. 왜냐하면 진리는 여기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예수님께만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길도 예수님께만 있고 생명도 예수님께만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리를 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자석처럼 끌려와서 끌려온 동시에 나방처럼 다 죽어야 되지요. 죽을 때 예수님은 그 안에 살아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에 대비해서 이러한 일을 할 때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렇게 예수님 쪽으로 오게 하느냐 하면은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많은 사람이 있는데 파란 것도 있고 검은 것도 있고 성도라고 합시다. 이렇게 알곡과 가라지가 섞였다 합시다.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에 이 파란 것들의 해야 될 중요한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들이 이 사람들 핍박을 해줘야 돼요. 공격을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파란 것들 지옥 갈 사람이죠. 지옥 갈 자들은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감독 하에 희극이 아니고 비극을 연출해야 돼요. 지옥을 연출해야 돼요. 각자 자기 역할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비극적 사건을 위해서 심지어 로마 본디오 빌라도부터 해가지고 이방인들까지 아리마데 요셉까지 동원된 그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라는 결정적 비극 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다 적재적소에 이 땅에 태어났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끝나고 난 뒤에 십자가 사건은 그 다음 시대에 사도행전에서 동일하게 반복하는 거죠. 베드로 고난 받고 사도 바울 고난 받는 것은 전부 다 십자가 사건의 연장선에서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고 보지 마세요. 그냥 십자가나무 크로스 한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현장으로 본인을 보자. 현장으로.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될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들이 핍박을 해야 되겠지요. 그럼 이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특징들이 전부 다 지식가 입니다. 지식가. 지식이라는 것은 판단되기 전에 관찰하고 측정하는 것. 관찰, 측정, 판단 그 다음에 마지막에 소유. 뭐로? 지식으로 또는 정보로 소유하는 사람.
관찰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소유하고 이걸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기 긍정을 계속 긍정으로 갖고 가자 하는 이들이 계속 핍박하는 겁니다. 이거는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 기적이란 눈에 보이는 기적. 기적을 원하나 우리에게는 지혜도 아닌 것이 기적도 아닌 그 무엇. 기적도 아닌 그 무엇.
옛날에 윤선도의 나무도 아닌 것이 하는 거 있지요? 풀도 아닌 것이. 대나무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것도 아닌 것이 저것도 아닌 것이. 그 무엇도 아닌 것이 핍박을 해줘야 예수님의 사건은 재현되고 반복이 가능해요. 예수님의 사건. 그러니까 천국도 조직적입니다. 천국도 조직적이에요. 절대 조직적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똑같은 사항들이 이루어져야 돼요. 그게 언약의 원칙이거든요. 동일한 언약의 원칙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관찰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그걸 지식으로 소유한 자들이 잘난 사람 합리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핍박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 있음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관찰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소유하고 할 때 관찰, 측정의 여러가지 예가 드는데 그중의 예가 뭐냐 하면은 바로 교회의 현장이지요. 현장. 기도했는데 응답 주시옵소서 이런 거요. 기도했는데 응답을 측정하는 거에요. 내가 기도를 40일 했는데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자기 사안의 변화를 추이를 보는 거에요. 추이를.
아 저것은 내가 기도 안했으면 안 생길 일이구나. 좀 기도해서 생긴 일이구나. 그걸 측정하고 그걸 판단하고 그 정보를 소유하는 거에요.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유적지에 과거 역사 해설하는 사람 문화 해설가죠. 유적지. 예를 들면 이제 경주에 첨성대 문화 해설가. 그러면 물어봅니다. 첨성대 해설가는 자기 집주소가 첨성대입니까? 거기서 살아요? 그 사람의 관람객 관광객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안 살지요.
그러나 주님은 가족을 원해요. 같이 사는 사람을 원하지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문화해설가는 그거 해가지고 한 50만원 받아요. 아르바이트용으로 받는다고요. 주로 퇴직교사들이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자기 집 아니지만 역사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성경전체는 66권으로 되어 있고 뭐 스데반 집사 이렇게 돌아가시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임신 못해가지고 뭐 이렇게 잘해요. 문화해설가들입니다. 주님하고 안 살아요. 소개하지요. 그래야 돈이 나오니까. 신학 이야기하고 성경 이야기 한다고 핍박받아요? 와 이거 참 많이 아는구나. 너도 죽고 나서 천당 계획이 다 있었구나. 어떻게 하면 기도에 응답받고 그런 아는 그런 것.
이게 뭐냐 하면은 이걸 역사라고 하는 거에요. 역사. 어떤 스위스 물리학자가 최근에 발명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진동을 일으켜서 원자구조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 진동에 의해서 보통 배가 이렇게 물 위에 가는게 정상인데 물 위에 떠가잖아요. 배가 거꾸로 가는 그것을 실제로 실험에 성공했어요.
역사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사람들은 관찰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지식을 정보로 소유해서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에 역사에 나오는 이 현상들을 보지요. 역사의 밑에 거꾸로 숨어 있는 역사. 그러니까 마치 보이지 않지만 바다 물속을 돌파하고 있는 어뢰 같은 것. 어뢰 같은 역사가 있는 거에요. 그 역사가 바로 뭐냐? 거꾸로 올라가는 역사에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3장 몇 절부터지요? 3장 23절. 누가복음 3장 23절에 나오지요. 족보. 보기도 싫지요? 은혜가 하나도 안돼. Q.T할 때 얼마나 고민됐을까? 다른 귀절은 Q.T할 때 은혜를 짜내는데 이건 어느 대목에서 짜내야 돼요? 23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어느 대목에서 오늘 해야 될 일과를 뽑아낼 수 있어요. 여기서 Q.T해가지고.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발음도 안돼. 아나운서 동원 해야 돼 이거. 문제는 왜 이 족보가 마태복음의 1장 족보하고 맞지를 않느냐하는 부분입니다. 맞지를 왜 않느냐. 그래서 제가 수고롭게 복사를 해왔어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써 놨지만 중요한 것은 일부 학자들이 할 때 누가는 마리아 가계에 근거해서 족보를 썼다. 이게 정답이에요. 마리아 가계. 마리아는 여자 쪽이잖아요. 남자 쪽이 아니고. 가정을 하나의 족보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고 마리아 쪽에서. 어뢰가 물속에 있으니까 물 위에 있는 사람은 안 보이는 거에요. 안 보이는데 어뢰가 터지니까 보이는 거에요. 어뢰가 터지니까.
예수님은 요셉이 낳은게 아니고 누가 낳았다? 마리가가 낳았다. 맞지요? 다른 말로 하면 마리아는 남편 가계가 아니라 남편의 족보가 아니라 숨어 있는 남편 족보에 가리워진 마리아의 족보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그 여기 프린터 4번에 보면 다윗 다음으로 나단으로 이어지는 이렇게 되어있지요. 다윗 다음 나단으로.
그러니까 이것은 나단이 다윗의 밧세바가 난 아들이 하나가 아니에요. 13명쯤 되는데 그 중에서 세 번째 아들 이름이 나단이에요. 그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역대상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지금 이 시간에 추석날 집안 족보 보는 거 짜증 나. 성경 족보에 대해서는 도대체 그 의미가 뭔지 우리가 다 할 수 없지만 역대상에 보게 되면 밧세바 아들 쭉 나와있어요.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쭉 나와 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다윗 위에는 똑같이 다윗 위에는. 다윗은 똑같이 되어 있고 여기에 20번 보세요. 두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 까지는 일치해요. 다윗부터 요셉까지는 모두 일치하지 않거든요. 여기서 누가복음의 족보와 그 다음 마태복음의 족보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은 다윗 계열이라는 거에요. 다윗 계열.
지금 여기서 누가복음은 거꾸로 차고 올라오잖아요.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이삭부터 시작하고 여기서는 거꾸로 지상에서 차고 올라와서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은 마지막은 셋이요 아담이요 그다음은 하나님 이렇게 올라가지요. 족보가 올라간다고요. 인간의 족보가 하나님까지 이어졌어요. 이게 뭐냐? 역사 말고 숨어 있는 이미 그 당시에 마태복음 1장에서는 다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은 남성중심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어요.
있는데 남성중심 말고 거기에 섞여 있는 다른 어뢰같이 숨어 있으면서 어디서 수면에서 만나느냐 하면은 다윗에서 만나요. 다윗에게. 다윗에게 두 족보가 공통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아까 천국은 조직이라 했잖아요. 언젠가 그런 강의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늘에서 다윗까지 쭉 내려와서 여기 마리아까지 온다. 마리아.
지금 누가복음은 이걸 거꾸로 썼지요. 마리아에서 다윗으로 가서 하나님께로 이렇게 되는 거에요. 되거든요.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유대민족을 만들었다 OK. 모두 동의해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었는데 너 왜 예수 안 믿는데?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 왜 예수를 몰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윗을 안다 생각하지 말고 시작점을 인간에게 버림받았던 고난 받았던 예수님부터 출발하자. 예수님부터. 예수님부터 출발할 때 마리아 계통, 마리아에게 남편이 있더라도 요셉이 있더라도 마리아부터 한번 시작해보자. 마리아부터. 마리아 남편 요셉이기 때문에 요셉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마리아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마리아부터 시작할 때에 다윗이 이것이 천국은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은 조직적이죠. 여기서는 마태하고 동일합니다. 천국은 조직적이다 이 말이죠. 조직적인데 조직적이라는 이 말을 유대인들은 뭘로 하느냐 하면은 역사적 조직으로 본거에요. 역사적 조직으로 본거에요. 이거는 인간이 흉내가 가능해요. 모방이 가능하다고요.
왜? 성경 족보 있겠다. 우리는 지킬 것과 안 지킬 것을 본인이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어떤 틀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국가적인 틀을. 그런데 조직인데 역사적 조직인데 비역사적 조직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누구 솜씨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비교하면서 무엇을 의식하면서? 인간의 조직을 비켜가면서 이루어지는 일. 이것이 하나님의 비조직적으면서도 천국은 조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이 족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태어난 족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예측한 사람이 있다? 없다? 없다.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나고 거꾸로 족보를 추적해 나가니까 이런 족보에 의해서 예수님은 육적인 삶인 것을 증명했다. 하나님은 과연 약속대로 다윗의 혈통대로 오신 것 맞다. 하지만 그 오시는 그 방법과 노선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은 이거는 알아요. 하나님부터 다윗까지는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럼 제가 여기서 여러분하고 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다윗 할 때 이렇게 그리겠습니다. 하나님부터 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할 때는 어디가 정점이었느냐 하면은 다윗시대가 정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약이 구약의 언약이 어디서 끝나느냐 하면은 다윗 언약으로 끝나요. 언약이 끝나요.
하나님께서 하는 일이 역사에 나타날 때는 항상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언약 사건으로. 노아 방주가 그렇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모세가 혼자 시내산 올라가서 만난 것도 그거죠. 이렇게 언약적으로 만나게 될 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스라엘 백성 같으면 충분히 굉장히 감동적으로 그걸 인정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언약 있어 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묻는 것은 그렇게 해서 다윗을 줬다는 거에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OK. 우리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왕국 조직을 유지할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문제는 다윗왕국을 유지하면서 그 다음부터 추락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추락.
그래서 올라갔다가 여기서부터 추락하는 거에요. 바벨론에 포로잡힐 때까지 추락하는 거에요. 흐지부지. 마지막엔 어떻습니까? 이건 전부 다 가짜지요. 가짜다. 이건 안양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알거에요. 제사장이 있는데 근근히 제사장이 이어졌는데 그 제사장이 무슨 제사장이냐. 뭐하는 제사장이냐. 가야바 제사장. 예수님을 고소하는 기능을 하는 가짜 제사장.
분명히 제사장까지 이어졌는데 그 이어짐이 맞은편에 있는 거에요. 부산 해운대 가면 지하철이 있거든요. 해운대역이 있고 지하철 출입구가 이렇게 있는데 찾아가봤자 여기를 목표로 나온다고 나왔는데 가만 보니까 여기로 나와있어요. 반대편으로 나온 거에요. 대제사장 족보. 그리고 이 유다 나라가 얼마나 다윗 왕국을 그리워했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그래 약속, 약속, 약속 막 하는 거에요. 다윗이 오신다. 다윗이 오게 되면 이방나라는 너의 종이 되고 한다고 해서 다윗혈통, 마치 족보 DNA 조사해가지고 다윗혈통만 찾아내가지고 무조건 사독 계열, 다윗 계열, 혈통 중심 무조건 왕으로 삼고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가 어디냐? 베들레헴. 베들레헴까지 다 생각하면서 했는데 지하철 반대편으로 나와버렸어. 지하철 역 반대편에. 저기다. 건너갈 수가 없어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했는데 철저함의 철저함을 했는데 메시아를 죽이는 그러한 지식과 그러한 정보의 집결이었단 말입니다. 교회 다니고 목사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있는 거에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들이, 기독교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있습니다.
자, 하나 물어봅시다. 어디서 문제가 있어요?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붕괴된 거에요? 어디서 역사로 나타났다가 어디서부터 역사 속으로 꺼져버린 거에요? 어디부터? 밑으로 숨어버린 거에요? 어떻게 된 거에요?
바로 역사부정 다윗 안에 다윗이 마지막 언약이죠. 마지막 언약이죠. 그럼 메시아는 어떻게 옵니까? 다윗의 언약대로 오실 왕이죠. 이 왕은 역사로부터 핍박받는 왕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게 다윗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 내용이.
그래서 에스겔 예레미야 한 모든 이야기는 현재 기존에 있는 다윗 왕국은 필히 망하는 것이 사는 길이 되는 거에요. 저는 이걸 악마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라고 이야기하는데 악마 오거든 피하지 말고 악마 목구멍 안에 천국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안에 쏙 들어가는 거에요. 악마 목구멍 안에.
예수님의 족보의 이 의미는 그리고 성령세례가 오면 성령께서 유도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세상 권력자들을 유대권력자들을 피하지 말고 그들의 목구멍 목젖이 보이는 그곳으로 그냥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거기에다가 집어넣는 거에요. 마치 오늘날 우리들처럼.
예수 믿는다 기도원 가서 기도하자 이러지 마시고 예수 믿는다 안 믿는 사람하고 나 말 안 해 이러지 마시고. 나 취직도 안 할거야. 난 정통 유대인처럼 나는 이스라엘 전통 유대인처럼 군대도 안가고 아무것도 안 할거야. 이러지 마시고. 그것도 너무 나대서 태극기 흔들지 마시고.
그건 너무 나대는 거고. 마치 남한테 지기 싫어. 나는 예수 믿으니까 지기 싫어. 자존심 상해. 그 짓 밖에 안 되거든요. 자존심 문제 지기 싫은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삼키도록 하라. 그들이 삼켜줘야 지혜와 관찰과 측정과 정보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을 규명하는 그 세계에 그냥 삼켜버려라 이 말이죠. 그 가짜에.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의 속임수, 거짓말, 위장, 사기, 위선, 가식, 조작, 합리화, 가짜, 날조, 기만, 물타기, 그 다음에 과장, 왜곡, 호도, 반칙, 매도, 모방, 사칭, 억지, 궤변, 억척, 선동, 적반하장, 허풍, 모함 적어봤는데 십자가 현상에 전부 28가지.
주께서 일부러 뒤집어주는 거에요. 자기 백성 성도를 보내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진리자가 되셔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그럼 십자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인간은 뭡니까? 비극이죠. 인간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신 십자가를 위해서 비극을 유발하기 위해서 연출되기 위해서 집결된 사람들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 죽은 뒤 부활함으로 이미 진리가 됐잖아요. 그럼 그들은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비진리가 돼야 되죠. 그 비진리가 되게 하시는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그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라는 하나님의 고유 목적이 이루어진 거에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가지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무능해요.
무능하기 때문에 무능하니까 넌 죽어도 상관없잖아 그렇지? 내가 너를 구원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없지? “예.” “그럼 군에 가. 그럼 고생해. 복음으로 욕 얻어먹어.” “복음 아는데 왜 고생...” “네가 상관없다며.” 원래 죽은 자는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상관없으면 예수님의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네가 갈 수 있잖아.
자, 죽었다는 말을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아까 소망이 죽었다는 말도 되고 그 다음에 자존심이 죽었다는 말도 되겠지요. 자존심이 없으면 뭐냐 하면은 기어이 이겨야 말리라고 이것도 소용없지요. 이런 거 없지요. 지기 싫다 이런 것도 성립이 안 되잖아요. 류현진 이겨야 되고 손흥민 4골 넣어야 되고 성도한테는 그런 거 필요치 않아요.
손흥민이 4골 넣었다고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그게 십자가에요? 승리지. 이미 승리 다 이루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는 말은 다 이겼다 이 말입니다. 다 이겼던 작품이기 때문에 네가 구원받았으니까 쉬어라가 아니라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어디서 구원이 나왔는가를 너를 통해서 계속 그 사건을 되풀이시키겠다는 거에요. 그게 피조물이지.
피조물이 자기 구원받으면 뭡니까? 달랑 자기가 원했던 바죠. 그게 아니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괴롭혔던 이 세상의 한 목젖, 악마의 목젖이 보이는 곳으로 주께서는 성령으로 몰아넣습니다. 몰아넣어가지고 왜 내가 무능한지 내 구원에. 내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그것이 바로 헬라인은 지혜를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소유하기를 원했지만 우리는 이딴 거 필요 없고 저딴 거 필요 없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되고 싶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된 사람으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구원됐다는 그 진리를 우리를 통해서 알려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라는 뜻이 아니고 진리는 한곳에 집중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진리가 있는 거에요.
성령 받았으니까 내가 진리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 받으면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그리스도에게 역시 모든 진리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 22절 한번 봅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노라.” ‘기뻐하노라’.
자, 뒷부분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요 성경 누가복음 끝까지 우리는 모른다 치고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기만 보게 되면 만약에 여러분에게 주께서 어떤 음성이 들려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서 나는 너를 기뻐하노라 하고 목사님한테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은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아 팔자 피었다. 나는 이제 고생 끝났어. 고생 안 할 줄 알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진리가 진리답기 위해서는 어떤 용액에 담겨야 돼요. 그 용액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그 더럽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를 긍정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율법에 대한 지식, 신학 지식 그리고 자기 윤리, 도덕 그런 것들을 주워 와서 천국을 가겠다는 그 부질없는 짓거리가 얼마나 십자가 자체를 욕되게 하는지를 그 현장에다가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교회 내 말 안 먹힌다고 그냥 나오고 이러지 마세요. 제주도 가니까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주도에 어느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무조건 반갑다고 인사를 했지요. 아이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 보던 교인이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디 사십니까? 어디 사시고. 이 동네 그냥 이사 오셨습니까? 관광 오셨습니까?
그런 뜻으로 묻겠지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었는데 성도님이 상당히 예민한 성도님이었는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목사뿐만 아니라 그 교인들이 이상하게 보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십자가 복음하고 다르단 말이지? 다르지요. 다르단 말인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게 잘했어요. 이야기한 성도님은 이렇게 기대한 거에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하면 아이고 반가워라 우리도 십자가 복음만 전했었어요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요. 생전 처음 들은 거에요. 보니까 십자가 복음 처음 들었어요. 앞뒤 문맥을 보니까. 참 선덕여왕이라. 진짜 여왕이에요.
물론 일부러 도발적으로 해서 신경 거슬리게 나올 필요는 없지만 거기서 말 한마디 하더라도 복음이 깔린 채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게 그것도 하나의 요령이라 생각 들지요. 저보고 어떻게 왔습니까? 하면 놀러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거에요.
우리는 물론 그분처럼 노골적으로 십자가 복음 전하러 왔습니다 말 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든 교회의 행동 이런 것은 충분히 우리가 보여주거든요. 예를 들어서 세상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기도합시다 하면 쓸데없는 짓. 왜 그리 조직적이야. 역사적 조직적 있잖아요. 다 봤지요.
이 세상에서 왜 예수님 핍박을 받았습니까? 역사적으로 그들은 조직화시키는 거에요. 이 모든 말씀을 가지고. 눈에 보여야 관찰이 되어야 그 다음에 측정을 하고 판단을 하고 그걸 소지함으로써 이 유대 나라의 성전을 소유함으로써 구원받은 이스라엘 맞다 이렇게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지금도 어떤 교파에서 미국이나 어떤 교파는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한국에도 많아요. 제 3성전이 세워지기를 간곡히 기다려요. 7년 전반, 후반 그거 계산해가면서. 그 계산을 왜 해요 계산을. 계산을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구원받을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긍정이잖아요 이거는.
제3성전 세워지기를 지금 살피는 거에요. 뭐할라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천당 보낼라고. 적은 사람 있으면 천국 못갑니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으쌰으쌰 해가지고 하게 되면 이건 성경에 맞다라고 생각하고 숫자가 적으면 이건 성경에 틀리다고 보는 거에요. 그건 힘입니다.
여기 프린트 5번에 보면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다 마리아 이름까지. 물론 족보이기 때문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지요. 남자지만 이 남자의 족보는 그 당시의 알려지지 않은 족보.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족보. 그러나 톡 튀어나온 것은 다윗까지만 튀어나온다.
이 말은 다윗 왕국을 기대했지만 그 다윗 왕국이 갖고 있는 그 품어있는 내용은 바로 망하는 다윗 왕국이 망함으로서 그리스도가 나온다 튀어나온다 그 점을 기존의 유대민족들은 몰랐던 거에요. 물론 잠수해서 수면 위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그리고 잠수해서 튀어 나와버리면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에요. 핍박받는 메시아에요. 그 점을 유념해 두시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 합시다.
자, 우리 자신을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골치 아프지만 시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해봅시다. 우리 자신을 관찰해 봅시다. 관찰하면 안 되는데 육신이기 때문에 관찰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어떤 면에서 관찰하느냐 하면은 내가 과연 신자냐? 성도냐? 또는 같은 말이죠 내가 구원되었느냐를 내가 내 쪽에 관찰하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준비한 나는 뭐냐 하면은 인간의 관찰 대상이 안돼요. 인간의 관찰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거는 신자가 아니에요. 믿음은 없어요. 믿음은 없어. 아무것도 안 믿어. 그냥 고대하는 희망만 있어요. 천당 갈 희망만 있을 뿐이지 믿음이란 게 전혀 없는 거에요. 자, 내가 믿음 없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어서 믿음 없다고 판정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럼 내가 믿음 없다고 한다면 믿음 있는 것이 뭐 있을 거 아닙니까? 믿음 있는 것과 믿음 없음을 비교해서 믿음 없다고 판단내리는 거에요. 그럼 믿음 있다는 것은 뭐냐? 이거는 우리가 성경을 보고 본인이 관찰하고 측정해서 판단해가지고 상상한 거에요.
예를 들어서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뭐라고 했습니까?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데 우리는 기뻐한 적이 벌써 일주일째. 기쁨이 뭔지 몰라요. 일주일째 마스크 쓰고 있어서 마스크 쓴 것을 기뻐할까요? 항상 기뻐하라는데 뭘 보고 기뻐해요 뭐.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됩니까? 어느 대목에서 기뻐해야 돼요?
따라서 우리는 결론입니다. 내가 상상한 기쁨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믿음 없다. 믿음 없으면 지옥가야 되잖아요. 지옥가는데 여기서 우리가 트릭을 써요. 믿음 없기 때문에 믿음 없으면 신자라 하더라. 누가? 이근호 목사가. 믿음 없으면 신자라 하더라. 본인이 스스로 트릭을 쓰고 있어요 트릭을. 그런데 주님의 신자됨이라는 것은 잘 들으세요.
우리가 이렇게 충분히 상상을 해요. 비록 나 신자 아니기 때문에 신자가 맞다 이것조차도 상상의 범주에 포함이 됩니다. 상상의 범주에. 이게 무의미하다는 거에요. 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우리가 뭐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이긴 하지만 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성령이 와서 이걸 깨우쳐주십니다.
성령은 또 어떻게 보입니까? 키가 몇센치입니까 묻지 마시고 내가 하는 이런 고민 상상 그 외에는 내놓을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주님께서는 네가 그 무의미 한 것을 또 무의미 한 그것으로 또 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그거는 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고 내가 우리 집에 돈 벌어서 모아놓은 그 가구 있잖아요. 전부다 길바닥에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내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다시 그 집에 들어가라. 그 집은 누구 집입니까? 주께서 주신 집이죠. 주께서 주신 집.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고민을 하세요. 걱정도 하시고. 믿음 그거 다 바깥에 끄집어 던져야 될 가전도구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 그런 것은 주께서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걸 걱정하든 안하든 간에 주께서는 그것을 보지도 않아요. 우리가 얼마나 내 믿음을 고민하는지를 곁눈질하지도 않아요.
그냥 막 살아. 마스크 쓰고 그냥 막 살아. 그냥 사세요 그냥. 어떻게 살더라도 잡초요. 어떻게 살더라도 한 마리의 새요. 어떻게 살더라도 공중에 떠 있는 별이고 달이고 해고 그런 입장이죠. 어떻게 살더라도. 왜?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뭐 믿고 그렇게 구원받았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
그 때는 우리가 사도 바울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죠. 십자가.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의 그 기능을 반복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거에요. 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그건 주께서 문제도 안 삼아요. 아예 보지도 않아요. 뭐가 나오느냐? 뭐가? 툭 치면 알라뷰 알라뷰 나오는 것처럼. 툭 치면 뭐가 나오느냔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상상하고 측정한다고 바쁘고 밤새도록 나는 믿음 없어요. 주여. 뭐 믿음 없는 걸 자랑하나. 믿음 없으면 가만 있으면 되지 믿음 없다고 몸부림치는 건 뭐에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다 부질없는 일을 계속하게 만들어요. 부질없는 일을.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세상 욕조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계속해서 영향을 받아서 그래요. 세상에서. 세상적 일에 자꾸 영향을 받고 또 타인들이 와서 자꾸 나를 건드려주니까 너는 믿음 없지? 나는 믿음이 없어. 없어야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난 믿음 없어.
이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믿음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자꾸 여기서 난처한 입장을 하는데 이 자체를 주님께서 무의미하게 보는 거에요. 이 자체가.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는데 왜 혼자 고민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누가복음을 썼던 성령 받은 누가는 뭡니까? 지금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제자들이 배신한 일 그걸 꼼꼼하게 적는 이유가 뭡니까?
다 이루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다 적을 수가 있는 거에요. 느긋한 마음으로. 얼마든지 제자들 베드로 도망치는 거 그걸 아무런 문제가 안돼요. 베드로 대신 우리를 집어넣어야 돼요. 예수님 배신하고 도망치는 거 괜찮아요. 그건 우리를 아예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의미 없기 때문에.
사람이 건드리면 뭐가 나오느냐? 자존심 나오고 건드리면 자아가 곤고해져요.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누가 건드려보세요. 왜 때리느냐 이렇게 되죠. 인간은 주님께서 가만 놔두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무의미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자꾸 우리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있는 이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건드려줘야 우리가 죄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평소에는 우리는 죄인 아닌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의인인데 그걸 건드려줘버리면 죄인의 본성이 여지없이 튀어나오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너무 자연스럽게 돼야 십자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을 좋은 짓으로 바꿀 생각하지 마세요. 아주 이빨을 냉동을 해서 뽑아버리든지 해야지. 이미 죽은 이빨은 죽은 티를 내줘야 돼요. 죽은 티를. 아무 상관없어요. 칼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조차 주님은 관심두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미 수면적으로 다 언약을 예수님을 통해서 족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이 말입니다. 네가 하지 못한 것 주님이 족보를 통해서 끝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또 박세리가 양말 벗고 한번 쳐야 되겠습니까? 끝내 이루리가 아니라 끝내 이루었다. 족보 봐라. 예수님 나왔잖아. 그럼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연결되었잖아.
바로 이 사건을 다 이루어진 사건을 바로 못난 너를 통해서 왜 네가 무의미한가를 통해서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성령을 가지고 진리로 이끄시는 겁니다. 진리에 집중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족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안했는데 주께서 혼자 다 이루신 것을 우리 눈앞에 코앞에 들이대시니 감사합니다. 족보를 보면서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도리어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