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죄의회수

아빠와 함께 2020. 8. 11. 07:03

강남-누가복음 3장 10절 (죄의 회수) 20072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3장 10절에 보면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그 대목부터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보통 이방 민족에서는 시작이 ‘내가 있다’ 라는 것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고 ‘율법이 있다’가 우선입니다. ‘내가 있다’ 보다도 ‘율법이 있다’가 우선이에요. ‘율법이 있다’가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방인들은 이해가 안되는 거에요.


법이라 하는 것은 내가 먼저 있고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한테 이익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 하는게 이게 일반적인 상식인데 이게 그래서 이방 민족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은 율법이 먼저 있어요. 율법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율법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의 요소로서 구성원으로서 내가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구성원으로서. 그래서 보통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이거는 뭐 흔히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고 나에게 국가가 있다 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나에게는 율법이 있다. 나에게는 법이 있다 이렇게 돼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이스라엘 만들었고 그리고 너희들이 거기에 속했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 점을 먼저 이런 구조를 먼저 마음의 구조를 설정해주셔야 돼요. 지금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있다’가 아닙니다. ‘내가 있다’ 아니에요. ‘율법이 있다’가 ‘나 있다’ 보다 먼저 선행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이 먼저 있기 때문에 율법대로 누가 등장해야 하느냐 하면은 선지자들이 오게 되어 있고 선지자 그 다음에 누가 오느냐 하면은 바로 메시아가 오게 되어 있어요. 메시아 또는 구원자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자는 어디 오느냐? 이스라엘에게만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가 오는 이유가 이스라엘에게만 먼저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지금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하면 ‘율법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있다’ 이렇게 돼요. 언약이 없는 이방 민족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들은 ‘이제는 죽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이제 저주 받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의 신약이나 구약의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특히 구약 같은 경우에 신약 초반에도 그렇지만 모든 핵심은 누구하고 이렇게 연결지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 유다 민족과 주고받고 주고받고. 예수님도 죽으신 것은 이방 민족보다도 그 당시의 체포당한 것도 이스라엘 지도자한테 체포당하지요. 이러한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런데 이 구조가 이제 바뀌게 돼요.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먼저 염두해둘 것은 이겁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구조의 차이점은 이거 하나 딱 아셔야 돼요.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의 세상을 보는 차이점은?


세례 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율법에 그대로 기초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율법의 마지막 주자라고 합니다. 율법의 마지막 주자. 율법의 끝 사람. 율법의 끝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세례 요한을 안 거치고 바로 사랑을 알면 안돼요. 세례 요한을 거쳐야 우리가 아는 이 사랑과 세례 요한을 거치고 나온 사랑이 확연하게 틀립니다. 완전하게 다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보니까 세례 요한이 등장해야 될 분명한 그 이유는 명확해졌지요. 세례 요한이 등장할 이유는 바로 율법에 의해서 선지자가 이렇게 오는데 그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율법대로 선지자 기다리고 메시아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집단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선지자하고 세례 요한하고 생각이 같아야 된다. 이 이론대로라면 같아야 되겠지요. 같지 않습니다. 여기 7절에 보게 되게 되면 “독사의 자식들아” 욕을 하지요.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율법에서는 두가지의 목표점이 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복이죠.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지는 겁니다. 율법에는 칼이 두 개가 있는데 두가지가 뻗어 나오는데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저주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하셨다면 우리는 복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제 강의를 헛들은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가 없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내가 있고 율법이 있는 것 같으면 내가 있고 나 복 받을거야. 나 복 받고 싶어. 어! 율법이 있네?! 순서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먼저 있다면 여기 나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기능 또는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 문제가 아니고 율법의 실체가 역사 속에서 완성이 될 때는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구현하는 그 자리가 이스라엘 자리에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었지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제성, 실제로 있다. ‘실제성’. 어려운 말인데 실제성. 실제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있는 이것이 가상이고 허상이고 진짜 실제를 있게 한 다른 그 보이지 않는 진짜 현실이 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재, 실재성이라고 합니다. ‘실재’ 또는 ‘실재성’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없는게 아니고 분명히 있는데 눈에 안 보이더라 이 말이죠. ‘ㅓㅣ’에서 ‘ㅏㅣ’를 지향하는 겁니다. 바라보는 겁니다.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스라엘이 실제로 있다 이 말이죠. 있다면 그럼 실재는 뭐냐? 율법이죠. ‘율법’. 율법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있다고 먼저 생각하고 율법 있어버리면 실재는 뭐냐 하면 율법이 실재되는게 아니고 내가 최종적인 실재에요. 내가 최종적인 실재. 그래서 성경에서 시험 들었다 하잖아요. 시험 들었다 또는 죄 지었다 악하다. 이 공통점이 뭐냐 하면 시험 들었다 죄 지었다 악하다 할 때 이걸 물으신 분들이 여러 분 돼요.


도대체 목사님, 시험 든다는 말이 어떤 상태를 시험 들었다 합니까? 물으시는데 이참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시험 들었다 하는 것은 나의 목적성을 내가 갖고 있을 때 이게 시험 든 거에요. 내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내가 도달해야 될 내가 추구해야 될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건 시험 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최종점이기 때문에.


거북이와 토끼의 그 마지막 깃대는 거북이가 뽑잖아요. 경주를 하지요. 결국 이겼다고 환호성을 보냅니다. 토끼가 먼저 갔지만 잠을 잤기 때문에 거북이가 이겼지요. 물론 그 다음에 한번 붙었다면 절대로 잠자지 않는 토끼 보냈을 거에요. 어쨌든 사람들은 어떤 도달점에 목표할 때 그때 본인은 사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의미가 뭐냐 하면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기대하는 그 지점에 내가 가 있는 것. 이게 바로 죄고 악이고 시험 든 거에요. 물론 악마는 이 점을 부추기고 악마는 그걸 설득했지요. 그런데 방금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시험 안 든게 뭐냐? 뭐가 죄가 아니고 뭐가 악이 아니야?


율법이 율법대로 최종점은 스스로 자체적으로 율법의 스스로 완성이 되는 그 상태. 그것은 바로 시험 든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닌 거에요. 율법이 스스로 율법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에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그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는 있다가 선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이 말씀대로 완성한다면 우리는 박수칠 일이 된다는 말이죠. 누구십니까? 말씀대로 이루신 분이 누구십니까? 관심사나 모든 생각이 그쪽에 가 있어야 돼요. 주께서는 말씀을 줬는데 이 땅에서는 깜깜 무소식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헛수고한 거죠. 하나님이 헛수고한 거죠. 그러나 하나님이 진짜 실재하시는 분이고 진짜 계시다면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모든 프로젝트 계획이 율법을 통해서 다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이루었다면 그거는 우리가 피조물 입장에서 같이 좋아해줘야 우리가 주와 한 편이다 같은 쪽에 있다고 이렇게 확인이 될 수가 있지요. 논리상 제가 이게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현실상은 정말 이거는 억수로 어려운 이야기죠.


거북이 같은 우리하고 토끼 같은 주님이 경주하면서 야 너 나하고 경주하자. 그러나 1등은 토끼 내가 하는 거다. 알겠냐? 아이고 뭐 알아 모시겠습니다. 자, 시작! 우리는 느림보 거북이, 토끼는 앞에 가서 깃대 뽑아버렸어요. 일등 했다고요. 우리 기분 좋아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가 수습해야 되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말을 달리 해보겠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는 다 이루었다. 그럴 때 베드로부터 해가지고 12제자들이 좋아해야 됩니까? 아니면 도망칠 일입니까? 거기에 다 이루었다 할 때 거기에 아무도 없었어요. 다 도망가 버렸어요. 뭐 비아냥댈 수 있죠. “좋겠네 주님은 혼자 승리해서”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세례 요한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되지를 않는 일을 그 시대에 세례 요한 혼자서 바로 이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보고 뭐냐? 너희는 저주받는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을 율법의 기능에 의해서 저주 쪽에다가 이스라엘을 딱 세워버린 거에요. 그러면 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을 전체를 저주 쪽에다가 세웠죠.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 하느냐 이 말은 너희들 배는 침몰중이다 뭐 이런 거죠. 비행기 같으면 추락중인 비행기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자, 그러면 세례요한은 그런 말하면서 자기는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검역소 있지요. 검역소. 사람들이 왕래하는 동대구역이나 이런 거 있을 때 체온 체크할 때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폭을 줄여버려요. 사람들이 오더라도 이렇게 줄을 쳐가지고 이곳으로 한곳으로 모이게 해요.


모이게 하고 여기에 모니터 있고 들어가자마자 내 이마에 체온 원격으로 다 재는 거 있고 손 소독제 있고 여기 봉사하는 사람들 있고 이렇게 하잖아요. 이 지점에 세례 요한이 있어요. 세례 요한. 쭉 오다가 다른데 새면 안돼요. 세례 요한은 온 인류를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 이스라엘에게만 진노가 있는게 아니야”. 온 인류에게 이스라엘 진노 받는다는 것은 율법이 없는 이방 민족은 말할 것도 없지요. 율법이 있는 쪽도 진노 받는다면 아예 처음부터 율법이 없는 민족이니까 이거는 지옥가야 될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이 사실을 폭을 좁히자 이 말이죠. 세례 요한이. 한 줄로 오라고 한 줄로. 자기 맘대로 나가지 말고 내 쪽으로 오라 이 말이죠. 이렇게 되면 세례 요한 없이는 뭐도 없다? 구원이 없는 거에요. 세례 요한 없이는 구원도 없는 거에요.


세례 요한을 거친다는 말은 세례요한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하면 이 추락하는 세계에서 네가 구원받을려고 설치느냐. 같이 추락하지. 추락하는 인간들이 뭘 구원받겠다고 나와. 너 주제파악이나 해 라는 그러한 격한 잔소리를 들을 각오하시고 오시라 이 말이죠. 아이고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이거 없어요. 한소리 들어야 됩니다. 한소리 들어야 돼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욕해도. 세례 요한한테 삿대질 “너는 뭐냐!!”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없이 메시아 오는 그런 원칙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그러니까. 율법 자체에 선지자 오도록 되어 있으니까 순서가 선지자 오고 그다음에 메시아 오는 겁니다. 검열한다니까요. 한 줄로 쭉 체온 재듯이 한 줄로 딱 오라하는 거에요. 모든 인류 향해서.


그럼 이렇게 될 경우에 임박한 진노가 너희에게 임했다. 나한테 오라. 물론 물세례죠. 세례받기 위해서 오는구나 라고 할 때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인간의 기원은 인간 속에 없다. 자아의 그 원천은 내 안에 없어요. 이걸 오늘날 20세기 21세기 사람들은 몰라요. 이 사실을. 뭐 20세기 아니라도 사람들은 몰라요.


나의 뿌리가 내속에 없어요. 이거는 이스라엘만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뿌리는 율법이지 나를 분석해서 내가 어디서 왔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모른다. 율법이 우리의 뿌리라면 이 말은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기원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voice. 목소리다 이렇게 봐야 돼요.


그리고 선지자가 우리의 기원에 관해서 뿌리에 대해서 원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선지자 뒤에 오시는 메시아야 말로 우리의 존재의 시작점이고 뿌리인거에요. 뿌리. 그러니까 이거는 구원 받는게 아니고 원래 우리의 원천과 합성하는 거죠. 연결 짓는 거에요. 뭐로? 율법으로. 율법으로 땜질하는 겁니다. 끊어진 것을 율법으로 잇는 거에요.


그래서 율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매개라고 합니다. 매개라고 하는 것은 두 선이 나와 타자 또는 어떤 두 개의 물건이 떨어져있을 때에 접촉하기 위해서 그냥 하면 붙지를 않으니까 이쪽도 붙고 저쪽도 붙고 다 붙는 것 그걸 매개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매개 물질이 뭐냐 하면은 비누에요. 소수성 침수성 물과 친한 것과 기름에 친한 것이 두 가지 성분이 비누 안에 있어서 비누 안에 들어가게 되면 기름이 붙고 물에 붙어서 때라는 이름으로 벗겨내가지고 갖다 부으면 다 날라가잖아요. 깨끗하게 씻어지죠.


그러니까 이 매개, 율법이 매개라면 이것은 무슨 역할? 방금 이야기한 비누처럼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씻는 기능이 있어요. 이걸 구약에서는 이걸 정화라고 하죠. ‘정화’. 대구에 가면 정화여고 있어요. 깨끗하게 씻는 것 깨끗하게. 성스럽게 하는 것. 정화시키는 것.


정화가 될려면 매개의 강조성을 위해서 내 율법의 매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 다음에 있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아까.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바로 오염되고 더러운 인간 속의 더러움을 바깥으로 표면화시키는 그러한 역할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만든 겁니다.


호세아가 그런 대표적이죠. 북이스라엘로 하여금 일부러 너희들은 호세아 부인은 일부러 그 바람난 여자하고 호세아가 결혼을 해요. 해서 필히 뭐냐? 자식을 낳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 보기에는 우리의 실제성이 여러번 나오는데 참 중요해서 실제성은 사람으로 보이지요. 아니에요. 그 자녀들은 뭐냐 하면은 음란한 여인이 낳았던 율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나온 아이들이에요.


그러면 뭐가 실재성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움직인다는 것. 하나님께서 율법이란 언약, 모세 율법대로 움직이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진정한 실재지요. 사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설치고 다니는게 이게 실재가 아니라 그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기능을 하도록 배후에서 하신 그게 바로 실재가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매개에요. 매개거든요. 또는 매개라고 하는 것은 매개 없이는 연결도 없다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우리의 원래 뿌리를 주님이 자기 뿌리라고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주님 소유로 가져가는 거에요. 좀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여러분들이 만약에 쥐를 잡았다 합시다. 이렇게 내가 쥐를 잡았다. 그러면 치워야 하잖아요. 쥐의 머리 부분을 잡을까요? 꼬리 부분을 잡을까요? 꼬리부분을 잡지요.


주님께서는 피 묻은 장갑 끼고 이 더러운 우리를 가지고 오는 거에요. 꼬리를 잡아서. “너 원래부터 너는 내 사람이었어 가자 이놈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세계 천국 가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나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아예 없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역할하는 자기 것을 도로 회수하는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오지요. 내 백성을 건져라. 왜? 그 백성은 나를 섬겨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야 내 백성 건져라. 주님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애굽 나라에 갇히게 해서 충분하게 못 빠져나온다를 충분하게 거기서 다 드러내요. 넉넉하게 충분하게.


빠져나오고 싶어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계속 주는 겁니다. 열 가지 재앙이 그거에요. 열 개의 층으로 굳어져있다고 보면 돼요. 바로 왕의 생각이 완악하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완악한 바로 왕에 갇혀 있는 그 히브리인들과 애굽인들도 그 바로 왕 못지않게 완악해요.


나일강 물 없이는 못 삽니다. 메뚜기 지배해서 농사하면 못 삽니다. 개구리가 왜 식탁에 이렇게 올라옵니까. 그래서는 못 삽니다. 파리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기 좋은 깨끗한 환경으로 우리는 이 세계가 좋습니다.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는 생각지 않습니다라는 생각이 바로 생각이 아니고 애굽의 모든 사람 히브리인 생각이지 전부 똑같은 생각이에요. 그 생각 말고 그 외의 여분의 생각은 인간들에게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세에게는 나오지요.


모세는 그전에 이미 한번 봤거든요. 떨기나무 불붙을 때 한번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세계 바깥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태어나서 겪고 살아오면서 울고불고 TV 보고 신문 보고 온 정보의 홍수 속에 들어온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날 버리면 나는 죽는다에요.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이 무슨 뭘 구원을 받아요.


물론 다른 세계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없는데. 그래서 나는 누구냐? 그딴 거 돈도 안 되는 거 그걸 왜 묻냐? 내 기원이 뭐냐? 나의 원천이 뭐냐? 묻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주님까지 오셔가지고 너는 원래 이 동네 이 세상 동네에 같이 지옥 갈 사람과 살 사람 아니다. 쥐꼬리 잡듯이 잡아가지고 질질 끌고 우리는 빼내주는 겁니다.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끊어진게 아니고 찾아왔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 율법대로 그렇게 찾아오는 거에요. 율법 안에 우리의 기원이 있는 겁니다. 그 율법대로 오신 분이 누구다? 선지자. 선지자고 그 선지자 뒤에는 누가 있다? 메시아가 있다고 누가 주장하느냐? 세례 요한이 주장한 거에요. 나는 오실 분의 선지자다.


그러면 그 당시에 현실적으로 사람들 눈에는 누구만 있습니까? 세례 요한만 있지요. 세례 요한만 눈에 보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구원자 부재입니다. 구원자 부재에요. 메시아가 없어요. 실제적으로. 왜? 눈에 안보이니까. 메시아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만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꾸 이야기하기를 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 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16절에 보게 되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러니까 물세례는 폼이라는 거에요. 폼이고 일종의 스포일러? 예고편 이 정도고 본격적으로는 시작도 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의 말만 들리지 이렇게 세례 요한을 보는 것처럼 성령과 불로서 오시는 그 메시아가 ‘부재’, 없다는 사실이에요.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세례 요한 본인도 마태복음 17장에서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이렇게 하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보고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믿음을 감추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못 믿게 하는 방식이 돼요. 눈에 본다는 것은.


목사님 어디 아픈데 없어요? 어디 등짝에 무리한다든지 피아노에 받쳐서 아프다든지 뭐 그런거 없어요? 아프다 하면 제가 안수를 하지요. 안수를 하게 되면 어?! 다리를 안수를 하니까 어?! 일어섰다. 예 믿음 없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그 순간이 드디어 사람에게는 시험 드는 순간인데 어떤 목표점이 갑자기 생기게 돼. 목표점이. 나도 암 걸리면 돈만 드니까 골치 아프니까 안수하겠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병 고쳐준다는 목사가 한두 명이 아니에요. 굉장히 많아요. 지금도 용하다는 권사들 기도원이 많이 있잖아요. 신종 코로나 뭐합니까? 그 사람들. 아 나는 이해가 안돼. 지금 가장 필요할 때 아니에요? 온 국민이 필요할 때라고요.


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 아예 인천공항에 출근해가지고 입국하는 절차에다가 그냥 안수하면 돼요 안수하면. 이러면 되잖아요. 검역이 필요 없어 안수하면 다 낫는데. 그 용한 도사들 다 어디 갔어요? 여러분 마술하는 것이 진짜 아니지요. 가짜지요. 가짜지만 진짜처럼 보이잖아요.


왜냐? 다 짜고 치거든요. 짜고. 마술은 다 짜고 해요. 조수들하고 다 짜고. 하여튼 이러한 상자 안에다가 여자 조수 넣어가지고 톱으로 썰잖아요. 왜 남자 조수는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남자 조수 들어가는 거 봤습니까? 왜 안 되느냐하면 남자 조수는 덩치가 커서 그래요. 구부리는 것이 잘 안돼서. 덜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세상에 이런 것은 매개자가 없으면 전부다 속임수에요. 매개자가. 인간 대 인간은 절대로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죽고 못 살아도 하나가 안 됩니다. 부부도 물론이고 자식도 형제도 절대로 연결이 안돼요. 할 수가 없어요. 율법과 이스라엘 사이에 여기에 진노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동안 율법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결이 안됐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지켰는데 이게 준비하신 매개자보다 영 이게 시원찮아. 엉터리에요. 율법대로 못 사니까 못 살면 뭐한다? 진노. 지키면 복. 이중에서 이스라엘은 진노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선지자가 왔을 때 야 선지자는 어떻게 되겠지. 아니야 나는 아니냐. 나는 메시아가 아니야. 나는 그냥 선지자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를 그냥 외치라고 보냈을 뿐이지 나는 그 분과 쨉도 안돼. 아무것도 안돼. 상대가 안돼. 그렇게 이야기한 거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이 이야기는 뭡니까? 구원자 있다? 없다? 보이는 세례 요한이 있다는 사실은 현재는 그런 식으로서는 메시아는 구원자는 부재해요.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올 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눈으로 보이는 세례 요한을 분석하기 위해서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아와 관련성이 있는가를 조사단을 파견한 거에요.


그거 보고 세례 요한이 마태복음에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자식들아 욕한 겁니다. 니들이 구원받으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 이런 식으로 하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세례 요한이 뒤에 오시는 메시아의 지시에 의해서 보이는 것으로 분석해서 세례 요한 말을 들을 수 있는 방편은 그런 것은 주께서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다리를 차버린 거에요. 건너올 사다리를 차버린 겁니다.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독사의 자식들아 진노가 너희들에게 임한다라고 할 때에 그걸 9절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짤린다. 심판하러 온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걸 어디 바리새인만 들었겠습니까? 여기에 허다한 무리가 다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에게 오는 사람들도 겁이 난 거에요. 물은 거에요. 이런 시국에서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면 되겠습니까? 물은 겁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위치가 어디냐 하면 황무지에요. 광야지요. ‘광야’. 세례 요한이 황무지에 있는 이유는 뒤에 오실 분 그 한분 때문에 자기가 지금 황무지에 와있는 겁니다.


무슨 좋은 낙을 보기 위해서 와있는 거 아니에요. 자기 나름대로 어떤 의도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그분 때문에 자기는 황무지에서 외치고 있는 거에요. 그분 때문에. 나 때문이 아니고 세례 요한 본인 때문이 아니고.


여러분 어떻게 살아가요? 살아가는 것이 나 때문에 삽니까? 오실 그 주님 때문에 삽니까? 의미가 나로 종결됩니까? 아니면 주님까지 의미가 이어집니까? 주님이 일하라 했잖아요 이렇게 돼요? 아니면 내가 하고 싶어서 이걸로 마감되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기가 이게 취미라서 그런거 아니에요. 땡볕에 모피옷은 왜 입습니까. 땀띠 나게. 엘리야 흉내내는 거에요. 엘리야 흉내내라고 말라기 율법대로 하라고 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 황무지에 있는 세례 요한 입장에서 이렇게 돼요. 나는 아무것도 없다가 돼요. 나는 아무것도 없다. I’m nothing.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서 있어야 될 이유는 나한테 찾지 마라. 내 뒤에 오실 분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그분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여야 한다. 왜? 그분이 everything이니까. 그분이 ‘everything’, 모든 것이 되거든. 모든 것. 영어 막 나오지요. 태양의 후예 드라마 보면 everything 나와요.


그분이 모든 것이 되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쁘다 뭐 이런 식으로 광야에 서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너희들도 나처럼 아무것도 아니여라. 아무것도 아니여야 한다 이걸 제시하는 거에요.


그동안 나의 나됨, 나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을 그냥 던져버려라. 그냥 던져버려. 던졌는데 그냥 던지면 쓰레기 차 필요하기 때문에 옷 두벌 있는 사람은 하나 줘버려라. 누구한테 주라는 말은 없어요. 왜냐하면 누구한테 이웃 사랑이 목적이 아니고 그건 율법이 되어버리니까.


지금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대로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누구한테 줬습니다가 아니라 나에게는 이것들이 전에는 나와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이것들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왜? 나는 없음이라는 위치에서 세례 요한처럼 메시아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에요.


장재남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가수인데 한 30년 된 가수인데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 나는 의자라는 노래가 있어요.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한명이라도 좋고 두명이라도 좋고 여럿이 와도 좋소. 당신이 앉는 편안한 의자가 되어 드리리다라는 노래에요. 노래가 가사가 상당히 너무 직설적이죠.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여러분들은 기억나지요?


이게 바로 세례 요한하고 사도 바울 차이점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에서 멈춰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나는 쓰레기통. 모든 쓰레기는 나한테 가져오세요. 나한테 가져오세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세례 요한도 세례 요한의 한계가 그랬어요. 세례 요한은 율법시대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와서 약속대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은 나에게 과연 구원받을 권한과 자격이 나한테 있느냐를 세례 요한 수준에서는 물을 수 있는 건덕지가 없어요. 세례 요한 수준에서는. 그분이 오시면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지 그분이 오셔도 우리를 찬다 하는 그 대목까지는 아직까지 이르지 못한 겁니다.


나의 뿌리는 주님과 관련되어 있다라는 것까지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는데 율법이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나의 뿌리가 주님의 원수가 된다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어요.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맞이한 것처럼 세례 요한이 사라지고 난 뒤에 주님이 올 때 주님을 맞이하면 구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쉽게 말해서 친하게 지내면. 주님과 각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주님 앞에 맛있는 거 사드리면 주께서는 호감 있게 나를 보는 줄 그렇게 알았지요. 12제자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우리 쪽에서 주님을 차버리는 그러한 속성이 내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나는 저 사람 저주합니다 이런 소리가 차마 내 입에서 나올 줄을 생각도 못했지요.


그 원인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부재’.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으면 자꾸 뭐하냐 하면 상상을 해버려요. 상상의 출발은 나의 건재함, 나의 기대와 희망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의 상상과 연결된 메시아는 이게 가짜입니다. 자기 부정이 안 되니까. 자기 부인이 안 되거든요.


자꾸 뭔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꾸 살리는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고 아예 끊어졌다는 거에요. 완전히 끊어져서 구원받을 가능성 자체가 없어요. “저는 아니지요?” 하는 사람도 거기 포함된다니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입장은 세례 요한 말고 사도 바울의 입장은 뭐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요. 경건치 않는 자에게 주님께서 그냥 받아주는게 아니고 주의 매개가 있어요. 그 매개가 뭐냐 하면은 피입니다. 그 피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우리 죄가 들어있어요. 우리 죄로 인하여 야기된 결과가 피거든요.


우리 죄로 인하여 안 죽어야 될 분이 죽었다는 그 피가 그걸 앞장 세워서 ‘우리 때문에 죽었습니다’가 우리 안에 삽입이 되면 그걸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거에요. 기가 차지요.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정말로. 아무리 그런 내용을 이야기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이걸 믿고 받아줄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기초가 내가 떠밀은 저쪽에 내가 싫어한 저쪽에 저 쓰레기통 안에 나의 뿌리가 저기 있기 때문에. 뿌리로부터 나왔던 내가 내 뿌리를 내가 차버리는 거에요. 이 도중에 우리는 변질된 겁니다. 나도 모르는 채 벌써 변질된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태중에서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피가 ‘아! 그 피가 그 피구나. 내 죄로부터 나왔던 피구나’를 아는 사람 같으면 나를 문밖으로 배웅해가지고 다시는 산자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나’가 갑자기 피로 인하여 두 개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하나는 예수님을 ‘안 믿는 나’, 또 하나는 예수님에 의해서 선물로 ‘믿게 된 나’. ‘나’가 이렇게 두 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느 ‘나’를 안 받아줘야 되느냐 하면은 당연히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은 누구를 믿는다는 것? 나를 믿는다. 내가 나의 모든 행함과 나의 모든걸 믿는 나로 하여금 나한테 작별인사를 해야 돼요. 나한테 작별인사를 해야 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렇게 안면 있는 사람 같으면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잖아요. 그 뒤에 뭐가 달려야 돼요. 그냥 “안녕하세요 곧 죽을 인간아”. 그 말은 너무 입밖에 내지 마시고요 그때는 마스크 써가지고.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가만히 있지. 곧 죽는데”. 그 인사를 매일같이 나한테 하는 거에요.


내가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거에요. “잘 있었나? 내일 살지 안 살지 모르는 인간아”. 이런 거요. 이제는 작별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주께서 쥐꼬리 잡아 받아줬기 때문에. 두 개가 됐기 때문에 하나는 아낌없이 날려도 괜찮아요. 하나는 날려도 괜찮아요.


비슷한 커트라인에 있는 학교를 두 과를 합격했다. 다시 말해서 경찰대학도 합격되고 서울법대도 합격했다. 보면 경찰대학은 공짜로 4년이거든. 둘 다 날릴 수 없으니까 하나 날리잖아요. 날릴 때 아깝고 그런거 없어요. 이미 넉넉하기 때문에 날릴 수 있단 말이죠. 사실 또 날려보내야 되고.


바로 사도 바울이 소원이 뭐였습니까?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사도 바울이 소원이 뭐였지요? 나를 날려버리는 거에요. 빨리 속히 죽고자하는 거에요. 그만큼 배부르다 이 말이죠. 히딩크처럼 배고픈게 아니고 배불러요. 넉넉해요.


내가 스스로 나를 살리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것은 날려보내도 괜찮습니다. 날려보내고 그 다음에는 놉니까? 하나의 ‘나’가 주님 혼자 있는게 아니고 주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에 나한테 지시와 명령이 있어요. 그리스도가 나를 살렸다라는 사실.


이미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써 피로써 자기의 피로써 우리가 잘못함으로 생긴 그 피로써 우리 죄를 씻어줬기 때문에 그 피가 있는 한 더 이상 우리 죄는 없어요. 우리 죄는 없다고요. 만약에 목사님 그 옷 입고 천국가면은 천사가 검역반에서 안 받아줍니다. 그 옷 가지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뭐냐 하면은 검역관이 이렇게 온도 재듯이 조사를 해요. 그러면 그 옷에 피로 희어졌는지를 봐요. 어린양의 피로 희어졌다는 것. 이게 또 하나의 자아를 갖고 있어야 이해가 돼요. 성령으로 ‘주와 함께 있는 나’가 있어줘야 이게 납득이 된다고요.


그러면 나는 다시 봅시다. 지금 세례 요한까지는 인간들이 용납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아무리 큰소리쳐도 안 보이니까 부재하겠지요. 부재한다는 말은 안 보인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들 보기에는 주님 보시기에 이 구원받을 인간은 없어져야 될 인간이에요. 이 인간이 부재한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자아상,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인간만 있고 창세전의 예정한 인간만 있고 야곱 아브라함 이런 것만 있는 거죠. 이쪽 인간은 없는 거에요. 여러분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영원토록 살았습니까?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오래 살았지만 아주 천년동안 산 건 아니지요. 없잖아요.


없는데 아브라함 어디 가있습니까? 그러면? 아브라함 죽을 때 아브라함 어디 가있어요? 성경에 나오지요. 하나님과 함께 있잖아요. 엘리야 죽을 때 엘리야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잖아요. 모세 죽을 때 모세 시체 못 찾았지만 모세는 주님과 함께 있지요. 신약에서는 뭐냐? 지금 내가 너희 속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이미 성령 안에 있다고 확정 지었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고.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나만 아침마다 거울 보면서 보이는 나만 이것만 자꾸 신경 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누구를 무엇의 가치를 완전히 하락시키느냐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하락시키게 되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내가 부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부재하다고,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 안에 너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속 살려고 하는 나를 힘들게 만들어버려요. 이래도 살래? 뭐 좋다고 살래? 이 지옥같은 세상에. 네가 오늘도 인사 안했구나. 안녕 죽어라 인간아. 죽어도 상관없어요. 계속 주 안에서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3장 10절 (죄의 회수) 200720b-이근호 목사



첫 시간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눈에 보이니까 그 말을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말하니까 믿을려고 애를 쓰지요. 그건 매개는 아닙니다. 온전한 매개는 아니고 세례 요한도 헛갈리는 거에요. 그러나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할 일은 다하지요.


그러면 세례 요한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면 그러면 그다음에 메시아를 믿으면 되지 않느냐.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예수님도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어떻게 믿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도 예수님을 못 믿어요. 세례 요한 보는 믿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본인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음을 줘야 믿게 되는 분으로서 메시아가 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세례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했잖아요. 참 이게 이상하지요.


분명히 자기가 하나님께 계시 받고 다 하고 예수님 세례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일어날 성령과 불로서 세례 준다하는 그것을 세례 요한이 생각해보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든요. 아무 일도. 뭐 하늘에서 불도 안 떨어지고. 그럼 자기가 하는 말이 전부다 거짓말 되버리는 거에요. 꼭 요나 선지자 비슷하게. 이래가지고 의견 안 맞아서 일 못하겠습니다. 정말. 저만 쪼다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할만하단 말이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믿는 방식으로서는 메시아는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믿게끔 해줄 때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내가 믿는 예수가 아니고 ‘예수님께 소속된 나’라는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내가 믿는 나의 신앙이 안되고 그러면 내가 믿는 나의 신앙이 되어 버리면 이게 소속이 내 신앙 소속이 내게 속하거든요. 이것은 바로 버릴 카드에요. 주님이 믿게 하는 신앙, 주님이 믿게 하는 신앙은 내가 믿는 신앙을 가차 없이 버려도 상관없는 신앙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가 되느냐 하면은 이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세례 요한이죠. 모든 성도는 세례 요한을 능가하는 선지자가 돼요. 그래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아이가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이 말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믿는 성도죠.


이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부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거에요. 안 계시기 때문에 믿는 거에요. 안 계시기 때문에. 왜냐하면 계신다면 기존의 나로 인하여 얼마든지 믿을 수 있거든요. 그때 병 고쳐줬었잖아요. 어떻게 사랑을 베풀고 이렇게 되는데 그거 없이 나보다 주님 먼저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그것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이 저를 사랑했잖아요. 아시면서 자꾸 부끄럽게 만들려고 하십니까 이러는데 원래 주님 주시는 신앙이 가동될 때마다 우리가 굉장히 미안해요. 여러분 미안하다는 말은 믿음이 있다는 뜻이에요.


악을 쓰고 복 달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거고 살면 살수록 이런 짓까지 해도 된단 말인가. 되게 미안한 거 있죠. 되게 미안한 거 있죠. 서울 사투리. 진짜 너무하다 할 정도로 미안한 거 있죠. 너무하다. 아 이렇게까지 안하셔도 되잖아요 주님이여 이런 거.


이번에 책 나온 이름이 ‘역사검열’. 역사검열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어떤 사람이 주님한테 주님, 임금이시여 나에게 귤을 주옵소서. 하니까 임금이 이놈! 무엄하도다. 여봐라! 당장 이놈에게 과자를 주고 사과 열 개를 더하라! 그게 벌이다.


귤 달라고 하는데 우리 달라는 것을 일체 안주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엄청난 것을 주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 죄 용서거든요. 심적 부담을 덜어주는. 우리 죄 용서를 해버리니까 아 이런 것 까지는 염치없어 안 받을려고 했는데 안 받고싶은걸 더 주시는 거에요.


그게 바로 이 땅에서 주님 때문에 목 베인 영혼들이 목 베여놓고 뭐 좋다고 합니까 목 베였는데. 목 베어놓고 좋다고 주님한테 나오는 요한계시록의 그 장면입니다. 자기는 목 베였는데 귀한 목숨 잃어도 상관없다는 거에요. 주께서 내 목숨보다 더 엄청난 것을 주었기 때문에 이미 받아놓고 내 목 치는 것 이거는 남는 장사지요. 손해 보는게 아니지요. 남는 장사지요.


그래서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게 했습니다. 아무도 없게 했어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영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정말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주님의 멋진 전략이라는 사실. 아 진짜 주님의 오묘한 지혜를 이 세상 어떤 피조물이 이걸 눈치 챘을까. 아무도 몰랐지요.


그게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 오묘한 이야기.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간다”.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 뭐 다른 사람한테 설명을 해도 설명 할 길이 없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요. 이거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우 맛이 한우 맛이 맛있다는 것을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요.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설명할 길이 없네. 평생을 두고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설명 안하고 그냥 선포할 뿐이죠. 선포할 뿐.


네가 믿는 것은 네가 스스로 조작해서 네가 네 구원받고 싶어 환장해서 네 정신 상태를 조작했잖아. 이렇게 나오면 그래! 나 그랬어. 그런데 너와 나의 차이점은 너는 모든 신앙은 인간이 조작한 그것밖에 모르지? 나는 조작한 것도 알고 조작이 아닌 것도 알아. 너는 그 차이를 몰라.



로마서 11장 33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아무도 그 지혜를 훔쳐서 미리 사전에 빼내심을 받겠느냐”. 아무도 없는 거에요. 인간의 그 지혜가 인간의 자기 구원을 막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내가 훼방해요 내가. 나를 향한 주님의 그 열심과 사랑을 내가 짜증을 내고 내가 발악을 한다고요. 내가 원한 것을 달라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지마시고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 성도에게 있어서의 메시아는 없습니다. 구원자는 없어요. 다만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 천당 갈라고 하는 그런 예수밖에 없어요. 나에게 죄로 물든 나에게 없는 분이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그분이 찾아온 순간 이제부터는 주님이 생겨버리고 내가 없어져버린 거에요. 내가 없어져요.


그래서 ‘있는’ 내가 발견하는 메시아는 없고, ‘없는’ 내가 믿는 메시아는 있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세요. 오늘 본문에 나온 세례 요한 이 사람에게 구원받을려고 나온 사람들 백날 세례 요한한테 나와 봐야 그들은 세례 요한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됩니다. 세례 요한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돼요. 그것이 구약의 끝이에요. 구약은 거기까지,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더 이상 못나가요.


세례 요한 비켜봐라. 뒤에 누군데? 누군데? 한번 보자. 어떻게 생긴 분인데? 세례 요한도 글쎄 저분이 맞는지 나도 모르겠어. 세례 요한도 본인도 본인이 확신이 없어.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한테 의문점이 발생한 이유는 세례 요한이 갖고 있던 율법의 연속성 실선 점선 연속성이 세례 요한에게는 율법의 단절이 없었어요.


아 이거는 수련회 때 해야하는건데 또 아껴 놓을라고 했는데. 세례 요한과 메시아 사이는 매끄럽게 연결됐다고 생각했지요. 이게 중간에 끊어졌다는 것을 생각을 못한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보내시면서 세례 요한의 사고방식의 점선으로 연결됐다는 이 대목을 반대로 바꿉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귀머거리가 듣게 되면 소경을 눈을 뜨면 절름발이가 걷게 되면 충격적인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겠지요. 그러면 이 죽은 자, 귀머거리 다 공통점이 저주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면 죽은 자, 죽은 자에게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 믿음 소망 사랑은 가치 있습니까? 가치 없습니까?


죽은 자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고 죽은 자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죽은 자의 사랑은 죽은 사랑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죽은 자가 그냥 죽어 있잖아요. 죽어 있는데 배시시 한 눈 뜨고 주님이 지금 나 구원하러 오는 거 아닌가? 배시시 볼 수 있는 실눈을 뜰수 있습니까? 못 뜹니까? 실눈을 못 뜨지요. 그래야 죽은 자니까. 반 죽은게 아니에요.


좀비는 이렇게 대들기나 하지. 좀비가 아니고 좀비도 완전 죽었어요. 그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주님은 어떻게 한다? 그 사람에게 “죽은 자여 일어나라”고 언급을 하면서 “네가 어둠가운데 빛 가운데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 말씀처럼 일으켜 세운단 말이죠.


그러니까 살아난 사람은 첫 소감이 얼떨떨한 거에요. 오늘 제목은 ‘얼떨떨’이다. 제목 ‘얼떨떨’ 너무 심한 부사인데. 어떨떨한 거에요. 세례 요한은 마스터 키를 안 갖고 있습니다. 마스터 키는 주님이 쥐고 있어요. 마스터 키는 모든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살려낼 자와 살려내지 않을 자를 가려내는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한테 새치가 있다면 자기 새치와 똑닮은 새치가 있는 자만 뽑아내는 거에요. 모발모발. 예수님과 동일한 DNA. 예수님이 자기와 똑닮은 사람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데려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의 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니면 천국에 못갑니다.


아들의 원형은 아들의 모델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아들이라고 할 수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난 낮설교 때 했잖아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제는 종이 아니고 내 성령을 받음으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물론 양자입니다. ‘양자’에요.


그래서 이런 모든 이렇게 이미 죽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건지심으로써 구원받고자하는 모든 인간은 그 구원이 좌절되고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요. 만들고 그 가운데서 주께서 너!너!너!너! 하고 찝은 사람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뽑혀 나오는데 뽑혀 나온 사람은 얼떨떨한 거에요. 자꾸 제목이 이쪽으로 가요. 얼떨떨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뭘 하느냐?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에요.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죽어도 그거 신경도 쓰지 않아요. 그 돌 맞아도 괜찮아요. 주님으로부터 구원됐기 때문에. 자, 아까 제가 모든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 어디서 멈춘다고 했습니까? 세례 요한에서 멈추지요. 그럼 여기 단절, 간격이 있어요. 메시아하고 예수님하고 세례 요한하고 간격이 딱 있어가지고 여기서 stop 이 돼야 됩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이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니까.


구약 율법대로 그냥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율법을 없애버립니다. 왜 없애냐? 이미 건너올 사람한테는 율법이 필요하지만 건너온 사람한테는 다리를 차버려. 발길로 차가지고 이미 건너왔기 때문에 율법을, 필요로 한 게 없어요. 필요치가 않는 거에요. 율법을.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10장에 보면 뭡니까? 옛것과 새것을 이야기하고 옛것을 치워버리죠. 율법을 치운다는 말을 법조항을 치운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치운다는 것이에요. 나를. 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 이 말이죠. 세상과 친했던 나를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고요.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세상 사람에게 보여지는 성도는 뭐냐 하면은 버려지는 겁니다. 버려지는 나. 내가 버려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이 그들에게 보이지요. 그러니까 상당히 이상하게 보이지요. 사실은 세상을 초월했지만.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이는데 예수님은 어떻게든 죽을려고 애를 썼어요. 예수님의 생애가. 어떻게 하든 죽을려고.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서는 뭡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한다는 말은 죽을 타이밍에서 제가 그냥 아버지에 의한 죽음을 죽게 하옵소서. 그게 율법을 이루는 유일한 방식. 다른 길은 없으니까.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은 없다 이 한마디에 여러분 목숨 걸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실제적으로 이게 바로 실재이기 때문에. 다른 길은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이 설교할 때 한번 들어보세요. 딱 이 이야기해요. 다른 소리 안해요.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게 역사 속에 있는 유일한 다른 길은 없다의 실제적인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실제적인 증거. 죽어도 부활한다. 죽었다. 율법대로 죽었다 율법대로 산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 죽을 때 그걸 뭐냐 하면은 율법대로 했다는 말. 율법 또는 실재. 이 세상 인간이 우선이 아니라 율법이 우선이에요. 모든 것은 말씀대로 되어가는 겁니다. 오늘 하루하루 모든 일이.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말 하지마세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갔던 사도행전이 나오는 사도 바울이 갔던 그 길을 한번 보세요. 전부다 그 길이 뭐냐? 자꾸 사태가 일어나요. 자꾸 무슨 사태가 일어나요. 그 사태가 일어날 때에 번번히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당신이 했지? 사도 당신이 했지! 사도는 실재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안했어. 너희들 보기에는 실제는 내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이거는 보이지 않는 주께서 그 사람에게 믿음 줘서 한 거야. 저 사람 구원받는 거 내가 설교해서 구원받는 거 아니야.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저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이 말씀과 화합이 된 거다. 연결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어누 누구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외치고 외쳤다고 다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인간의 힘으로 했겠어요? 성령으로 했겠어요? 성령으로 했는데 구원받은 꼬라지하고는. 별로 되지도 않아요. 몇명이 뭡니까 도망가기 바빴지요.


목사가 교회에서 성령으로 좀 설교하고 있지요? 성령으로? 교인 수 많이 늘어났어요? 어떻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분노만 유발, 공분만 증가된 거 아니겠어요? 자꾸 뭔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보고 뭔가 추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플러스가 아니고 빼라는 겁니다. 빼도 괜찮다는 거에요. 지금 죽어도 인간아 욕심쟁이야 챙길 거 다 챙겼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자, 이 작업을 위해서 세례 요한도 이미 일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작업을 사실은 해왔습니다. 누가복음 3장 봅시다. 3장 4절부터 보게 되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여기 평탄, 평탄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평탄케 하라 나오지요? 이 말은 인간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높낮이 누가 출세했나 성공했나 누가 돈 벌었나 돈 안 벌었나 하는 것은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 실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속지말라는 겁니다. 속지마라.


주님께서는 돈 많다고 “어머나~~” 하고 죄 많다고 너는 안 되겠다 이런 거 없어요. 똑같애. 평탄케 하라.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선한 자나 착한 일이나 나쁜 일도 피 앞에서는 다 날라가 버린다고요. 주께서는 피로 자기 백성을 사지, 착한 일 했다고 그런 거 없어요.


구원받아놓고 착한 일하겠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그 사람은 지금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것을 티내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의 의미는 자기한테 왔기 때문에 내 착한 일하는 나를 본인이 못 버리고 있어요. 착한 일하는 나니까 나는 착한 일을 했으니까 나를 구원할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율법의 흠이 없다 이 사람한테 걸리면 아주 따귀를 받지요. 네가 그것도 착한 일에 속하냐? 이래가지고 혼쭐납니다. 혼쭐나요. 구원자가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 구원자가 찾아와서 나를 찾아와서 성령을 주지 않고 구원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이 세상 가면서 믿을 것은 자기 몸뚱아리 밖에 없어요. 자기 몸 밖에 없지요. 자기 몸 밖에.


모든 투자와 모든 사활을 자기의 몸의 가치에다가 다 퍼부어놓습니다. 조금 흠집이 있다. 흠집이 났다. 상식적인 선택사항은 뭐냐? 자살이죠. 자살.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자살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은 항시 자살할 몸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도. 엄마가 뭐라고 하면 자기 방에 들어가가지고 자살하지요. 문 닫아놓고 안 열어주고. 나는 내 몸밖에 없다. 엄마가 뭐라하고 나무라면 문 닫고 잠그지 말고 자기만의 세계 그걸 고수하지 말고 문 열고 나와 쇼파에서 심포지움을 여는 거에요.


어머니의 의견과 자기 의견을 조율하고. 이렇게 하면 애가 아니지요.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때 성령을 받았다. 엄마가 만약에 나무랜다. 그러면 어머님, 그때는 어머님 해야 돼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어머님, 어머니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는 다 사소한 일인 것을 어머님 모르십니까?


어머니 인생을 오래 안 살아봐서 그런가본데 오래 살아보게 되게 되면 이 땅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뭐 별거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이는 제가 못 봤어요. 어머님 아들 하나 없다고 치세요.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입니다 어머님. 나긋나긋하게 이렇게.


그 상황 속에서도 일어난 사태 속에서도 누구만 증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증거하는. 그런 애를 두면요 엄마가 겁나서 제가 뭐 다 아는 것 같애. 여보 여보 말조심해. 제가 우리 하는 거 다 아는 것 같애. 이렇게 되겠지요.


세례 요한부터 평탄케 함으로써 이걸로 완전히 세상을 평탄케 하는 것은 그 자체의 모든 의미의 높낮이를 무의미로 의미 없음으로 다 바꿔놨어요. 어떻게 살던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던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서 뭘 어떻게 하든지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인기를 얻든 없든 관계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고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만들어 놨다는 것은 오실 예수님도 세례 요한 거기에다가 더더구나 모든 것을 평탄케 한 거죠. 세례 요한은 평탄케 했지요. 예수님은 모두 다 죄인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동일하게 죄인 만들었어요. 세례 요한은 아직 거기까지 못나가고 그냥 평탄케 하는 겁니다.


다만 나처럼 네 것을 모든 것을 비우고 네 몸으로 메시아를 맞아라 이 정도였는데 그 빈 몸조차 예수님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거에요. 그래야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 넘어가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1장에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나,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옥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죄인 되고 평탄케 했을 때 그러면 여기서 그 다음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겁니다. 이 죄밖에 없는 여기에서 천국이 찾아오는데요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찾아오는데 천국은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은 죄가 천국을 갉아 먹는 그 범위 내에서만 천국이 보이도록 되어있어요.


천국은 없어요. 메시아가 없는 천국은 없는데 내 죄가 주님 오신 천국을 건드릴 때 상처 낼 때 갉아먹었을 때에 그만큼의 양만 천국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주님이 세운 이 천국을 몽땅 다 알 수는 없다 이 말이죠.


다만 아는 방법은 천국을 연구한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가 주님의 하신 일과 관련성 있게 연결될 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한번 드러내면서 아 내 죄로 인하여 천국의 진면목이 나타났구나. 그래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죄가 더한 곳에 비로소 죄가 있는 그곳에서만 은혜가 넘치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죄를 노출시키는게 아니고 반대로 죄를 자꾸 은폐하고 감출려고 하는 거에요.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손대면 안 터져요. 손대면 아지트에 벙커에 더 숨는다니까요. 손대면 더 깊숙한 곳에 도피를 해요. 도망을 친다고요. 도망치다 도망치다 안되면 산에 가서 자살하지요. 핀란드 대사관 이쪽에 가서 죽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드러내는게 아니고 더 숨어서 자체폭발, 자기파괴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 사탄이 들어가서 사탄이 결국은 하나밖에 없는 너니까 네가 마지막의 하나밖에 없는 그거 못 지키면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상당히 합리성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사탄이.


평생 동안 나에게만 투자를 한 거에요. 그런데 내가 웃음거리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폭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폭발시켜버리면 폭발시킨 나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니까 그게 참 좋은 수가 되잖아요. 나를 찾는 사람에게 내가 없어져버리는 거에요. 그럼 그 말은 뭐냐? 평소에 누굴 의식했다? 나를 찾는 사람을 의식한 거에요. 수많은 서울 시민들.


박원순 그 사람이 7급 공무원, 9급 공무원 같으면 자살했겠어요? 하나 죽어도 뭐 누가 죽었나 모르지요.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나는 있으나마나 한 거에요 나는. 자살 안하니까 참 좋지요. 나는 있으나마나 한 거에요. 김성수 목사가 교인수가 한 열댓명 같으면 죽었겠어요? 설교하면 조회수가 수만명이에요. 수만명. 얼마나 그 사람들이 실망스러웠겠어요.


본인이 본인 걱정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남한테 실망시키면 안된다. 내가 나한테 지시를 내리는데 그게 내 지시가 아니고 마귀지시입니다.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I’m something. 자꾸 뭐라도 된냥 여기는 거에요. 뭐라도 된냥.


보통 조그마한 교회 같으면 말을 편하게 하고 설교할 때도 이렇게 하면 되는데 만약에 이명직 목사님이 700명 교회에 갔다. 거기서 한번 설교하는 것은 그냥 하지만 만약에 10년간 삼선에 도전해 가지고 세 번 됐다 해보세요. 목소리가 달라져요. 목소리가 위엄 있고 이래요.


교인들 기싸움에서 안 질려는 목소리가 개발해서 나온다니까요. 그런 교육기관도 있어요. “믿습니까~~~할렐루야~~~.” 이런게 있거든요. “그러므로!!! 그러므로”, 이거는 조용기 목사가 하는건데 조용기 목사가 “그러므로 그러므로”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설교할 때 다음 대목이 생각이 안 나잖아요. “그러므로” 하면서 생각하는 거에요.


“아~~~또~~~” 뭐 이런 거란 말이죠. 그것도 생각 안 나면 “믿습니까!!” 해가지고 쉬어가고 부흥사들처럼 “믿습니까!!!” 그것도 생각 안 나면 “믿습니까~~!!!” 하고 자꾸 딴 생각하는 거에요. ‘다음에 무슨 말하지’ 그거 한다고 하는 거에요.


인간은 그럴 수 있어요. 그것이 십자가, 천국과 관련성 있어야 돼요. 네가 나를 핍박했다. 너한테 투자하는 것이 너 타고난 본성인데 좋아! 그 본성 좋아. 모든 인간은 그랬으니까. 다 평탄케 되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니까.


그러나 그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성이 있고 연결될 때 우리는 바로 내 죄로 인하여 죄가 있는 곳에 비로소 주님의 의가 나타나요. 의가 나타나요. 배설물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배설물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어요. 복음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의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변의 요건은 필수 요건은 뭐냐?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올 때에는 이미 나는 지독하게 나만 사랑했음이 주님의 사랑 십자가 피를 통해서 이미 그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나는 철저히 나만 사랑한다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이 주님의 사랑이 등장했기 때문에 나올 이야기에요. 주님의 사랑이 등장하면 그런 소리가 안 나와요. 물론 그건 흉내 낼 수 있지만 그건 흉내일 뿐이고요. 그 다음에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할 것은 이겁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마주하고 있습니까? 누구와 대화합니까? 누구와 마주하고 누구와 대화하느냐?


메시아하고는 대화가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밀기 때문에 대화 상대로 보지 않고 밀어내기 때문에 대화가 안돼요. 그러나 인간들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거에요. 전에 제가 어느 설교나 강의 때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지금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왜 사람들이 인생에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사람하고 상대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하고 상대 안하고 자꾸 사람하고 상대해서. 어느 강의에서 제가 한 기억이 나요. 사람하고 상대하니까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에요. 탓은 하나님께 돌리고. 자기가 사람하고 상대하고. 여러분 지금 누구하고 마주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여기서는 사람들하고 상대를 하지요.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비교가 돼요. 비교. 자꾸 비교하고 경쟁을 하게 되고 질투를 하게 되고 이렇게 돼요. 질투라고 하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네가 왜 갖고 있느냐? 이게 질투 아닙니까? 모차르트가 음악의 천재지요. 그런데 그 옆에 살리에르 그 사람은 화가 나는 거에요. 신이시여 왜 내게 없는 것을 쟤가 왜 갖고 있습니까?


이거는 모든 의미가 평소에 자기 의미로 모든 것이 최종성을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시험이라고 했지요? 죄라고 했지요. 모든 목적은 무조건 내 만족이 되야 된다는 게 최종 의미가 되는데 최종 의미는. 그런데 그것이 모차르트가 나타남으로서 그게 좌절됐잖아요. 그렇게 미워하는 거에요.


만약에 초등학교 나온 남편이 대학 나온 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런 사람 더러 있어요. 있을 때 돈을 벌어도 여자가 더 잘 벌어 똑똑해도 여자가 더 똑똑해. 그렇다고 여자가 남편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잘해줘. 잘해주기 때문에 아내가 더 싫은 거에요. 열등의식 있어가지고.


너 지금 내 심리에 대해서 다 파악하고 있지? 되도 않는 시비 걸어가지고 가정파탄을 일으키고 가정 분란을 일으킬 때에 처음에 인물보고 잘생겼다 했는데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인물이 아니고 갖고 있는 과거가 나 잘나기 위해서 끌어 모았던 그 자료들의 분량 문제에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끌어 모은 그 자료와 네가 너 잘나기 위해서 끌어 모은 그 자료와 현격히 차이가 나니까 여기서 열등의식을 느끼는 겁니다. 자,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죄라는 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은 남과의 만남에서 죄가 생겨요. 타인과의 만남에서.


남과 비교하고 이런 것에서 죄가 생긴다 이 말이죠. 흔히 말하는 자존심이라는 게 여기서 생기지요. 그러면 성도끼리 만났다면 성도끼리 만나면 그럼 성도끼리 만났다. 그럼 성도 이렇게 현실적으로 두 몸이 만났잖아요. 할 때에 성도끼리니까 여기에 유령기사 주님이 이렇게 있거든요.


그러면 먼저 1번 내가 상대방에서 이야기하지 말고 주님과만 이야기해야 돼요.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천국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아까 공식에 의하면 뭐가 도입되어야 한다? 피로만 맺은 사이기 때문에 뭐가 도입되어야 한다? 나의 죄가 드러나겠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A라는 사람에게 B를 주신 것은 내가 그동안 잠잠해 있던 나의 자존심을 자극시키는 나의 분통과 질투심을 자극시킵니다. 자극시킬 때 그 죄하고 나하고 먼저 만나지 말고 주님하고 먼저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면 주님 이건 뭐냐 하면은 너 그 자존심이 바로 죄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자존심을 꺾느냐? 꺾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몸은 죄 지으라고 있는 몸이에요. 죄 지으라고 있는 몸을 충분히 대우를 해줘야지. 죄 지으라고 있는 몸을 죄 안 지으려고 하면 안돼요. 자존심과 질투와 미움과 시기를 그대로 상대방에게 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죄입니다. 이게 나의 부족한 정도가 아니고 이게 나의 뿌리고 나의 기원이고 나의 죄입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고 난 뒤에 나한테는 이런 죄들이 마구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이런 죄 이야기하라고 나보고 시켰습니다.


그러면 이 상대방이 그러니까 내 앞에 꿇어! 이러면 안 되고 그럼 그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고 그 사람이 누구한테 묻느냐 하면은 자기 갖고 있는 주님한테 또 묻는 거에요. 주님에게 물으면 너는 이렇게 해라. 당신의 죄 못지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난 뒤에는 헤어질 때는 밥값 누가 내느냐? 각자 냅시다. 죄인끼리 네 밥값 내가 낸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도의 만남, 목사와 교인들의 만남, 집사들 만남, 모든 성도의 만남은 죄로부터 시작해서 죄로 끝나야 돼요. 죄로 끝나서 하하하 죄 이렇게 끝내야 돼요. 죄로 끝나야 돼요.


바로 이 점에서 대해서 세례 요한이 사도 바울에게 아직까지 미치지 못한 겁니다. 세례 요한은 뭐냐 하면은 어떤 사태를 우리가 기다리면 된다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기다릴만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세례 요한은 계속 구약적 인식을 가지고 다가서는 겁니다.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박살낸다는 생각은 세례 요한에게는 없었어요.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박살내버리면 구원받을 자가 없잖아요. 우리 가운데 몇 명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온 사람은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괜찮은 사람 없어요.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 16절 봅시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렇게 했는데 여기 세례 요한이 능력이 많다는 말은 맞는 말인데 능력이 많다는 점이 어떤 점에서 능력이 많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잘 모르고 있어요. 세례 요한이 받은 계시는 알곡은 모으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 했는데 여기서 세례 요한 알곡은 들어있을 줄 알았지요.


예수님 때의 알곡은 예수님 혼자 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알곡은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스스로 믿는 자를 발생시키고 생산해야 돼요. 창조해야 된다고요. 알곡을 주는 방법은 그 사람의 양심이나 마음에 호소하는 게 아니에요. 기존의 양심이나 마음은 전부다 아담 노선이거든요. 예수님 노선이 없는 거에요.


예수님 노선이 뭐냐?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서 예수님 마음을 그 사람에게 심어주게 되면 그게 바로 모발모발, 예수님의 모발과 동일한 모발, 예수님의 몸과 동일한 몸의 요건이 갖춰지는 겁니다. 동일한 요건.


그래서 요한복음 8장 10절에 보면 제가 자주 언급하지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영이 너한테 안 거하면 네가 아무리 착하고 어질고 순해도 그 영이 없으면 너는 끝난 거야.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거에요.


반대로 네가 아무리 악하고 모질고 고집 세고 자존심 세고 남과 비교하기 좋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너는 마땅히 죽어야 되겠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영이 네가 오게 되면 역시 너도 그 절차를 그대로 따라서 일단 죽여 놓고 살리는 거에요.


죽여 놓고 살린다는 말은 죽은 채로 욕하고 죽은 채로 돈 챙기고 죽은 채로 욕심 챙기는 거에요. 그럼 성도는 뭡니까? 그런 짓하면서 나 죽었어. 나 다 죽었어. 나 지금 죽으니까 이런 짓 까지 나오네 해서 자기 죄와 예수님의 훌륭하심이 아니에요. 자기 죄와 예수님의 피와 연결시켜야 되는 거에요. 피에요. 예수님의 훌륭하신 인격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라니까요. ‘피’.


피로 말미암아 씻겨져요. 예수님의 인격이 아니고 훌륭함이 아니라 피에요. ‘피’. 왜? 피 앞에서는 뭐밖에 없으니까? 훌륭한 인격이 아니라 뭐밖에 없으니까? 죄밖에 없으니까. 그 죄는 무슨 죄다? 혼자 짓는 죄 아니에요. 누구를 겨냥한 죄죠. 누구를 겨냥했습니까?


예수님 자신을 겨냥했잖아요. 자기를 죽인 자를 자기가 살리는 거에요. 요한1서에 보면 이점에 대해서 굉장히 물과 피와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실제다. 예수님의 실제다. 증거하는 이는 셋인데 뭐냐? 물과 피와 성령이다. 이 모두는 하나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 삼위일체.


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럼 왜 성령과 불로서 이렇게 타작마당을 하게 하시느냐?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이 죽어버리면 무엇이 날라가요? 구약전체가 날라가요.


구약 전체가 날라가버리면 율법으로 해서 율법이 낳은 나라가 무슨 나라 입니까? 이스라엘이죠. 율법이 이스라엘이 되고 이스라엘이 망해버리면 역사는 그걸로 끝이에요. 끝났어요. 그래서 요엘서 같은데 보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을 가지고 이걸 종말 또는 말세라고 합니다. 상당히 일방적 주장이죠?


이스라엘 망하면 말세에요. 하나님의 언약 망해버리면 끝나는 거에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는 남은 자를 뽑는데 남은 자는 성령이 와야 돼요. 그 성령이 온다는 것을 송민선 집사님 글에 댓글을 해놨지요. 예언하는 것, 젊은이들은 꿈을 꾸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예언하지요.


이게 뭐냐? 현실에서 볼 때에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게 이게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시게 되게 되면 성령이 오면 율법의 완성으로 오죠. 성령은 이미 다 이루었다에서 오는 거에요.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안에 뭐가 있다? 다 이루었다에요. 이제는 강의제목을 얼떨떨에서 바꿔야 될 거 같은데. ‘다 이루었다’가 우리 안에 있어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더 짓는 게 아니고 죄를 더 많이 알게 되는 거에요.


많이 아파. 우리 많이 아파요. 다른 사람보다 더 예민해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것,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예민하고 철저하게 잘 사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죄를 아주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짓는다는 사실을 남은 몰라도 본인은 알아요. 얼마나 교묘하게 죄 짓는지.


말을 해도 모든 의미가 나에게 최종 의미가 주어지는 그러한 전략을 세우면서 한다고요. 전략을 세우면서. 뭐 하나 도와줘놓고는 주여, 저는 겸손해서 주께서 하셨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하면서 또 기분 되게 좋아지고 이런 간파하는 꾐, 요령.


그러나 우리가 요령이나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구원에는 지장이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은 이미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내 간교한 죄가 배설물로 계속 나오는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즐거워요. 내가 이렇게 못됐구나. 그렇다면 이번에 서울시에서 받은 재해기금 이게 왠 횡재 이렇게 되지요. 이렇게 못됐음에도 불구하고 70만원 받았으니까 아이고 이거 횡재다 싶죠.


재해기금만 공돈입니까? 우리 목숨은 공돈 아니에요? 이렇게 나쁜 놈 밟아죽여도 되는데 안 죽이고 계속 살려내는 것은 죽을 때까지 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살려두게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거기까지 몰랐는데 사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의 한도와 그리고 거기서 간격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사도바울의 전한 복음, 이 복음의 안목에서 성경을 다시 볼 수 있는 그러한 눈을 성령을 통해서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남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플란트 구원  (0) 2020.10.09
멈춤  (0) 2020.09.22
구원시스템  (0) 2020.07.14
노선변경  (0) 2020.07.04
시체 재활용  (0)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