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The Trace of Jesus 예수님의 흔적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4:4-7
date : September 20, 2020
4.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5.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The Lord is near. 6.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SUMMARY
The apostle Paul commands the brethren in the Lord to always rejoice and not to worry about anything. These recommendations feel like too labored demand for ordinary people. No human being can always rejoice and be grateful for everything because unexplained fear and knowledge of good and evil are active within humans. In addition, emotions are always one step ahead of reason. The sinner can never always rejoice and be grateful about anything. There is nothing but self-manipulation and self-consolation in the sinner. 사도바울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런 권면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내부에는 영문 모를 공포와 선악지식이 활동하고 있기에 그 어떤 인간도 항상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감정은 이성보다 늘 한발 앞선다. 죄인은 절대로 항상 기뻐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죄인에게는 그런 척 하는 자기 조작과 자기 위로만 있을 뿐이다.
Therefore the apostle is not now appealing to human possibilities. He excludes all human possibilities and presents the position of 'in the Lord' and the truth that Lord who comes to judge is at hand. Jesus, who comes with the eternal fire of judgment, is the constant source of eternal joy for the apostle in Him. However, this joy of the apostle is unfamiliar to the world and disgusting, and something the world wants to get rid of it with one heart. 그러므로 사도는 지금 인간의 가능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주 안’이라고 하는 위치와 심판하시러 오시는 ‘주님이 가깝다’라는 진리를 제시한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심판의 불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이 그분 안에 있는 사도에게는 영원한 ‘기쁨’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그러나 사도의 이 기쁨은 세상에게는 더 없이 낯선 것이며 혐오스런 것이며 한 마음으로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It is Jesus Christ, the Lord of the apostle Paul and the Lord of the saints, who was treated as something to deserve hateful, despised, rejected, and removed by the world. The world could hardly stand Jesus, who treats all the proud and precious good things that they have accumulated as garbage that must be extinguished by the fire of eternal judgment. They were angry that they themselves were denied before Jesus. They could not accept that they were hopeless people who had already perished. They avoided facing the fear of the cursed. In the world that recognizes and respects each other, Jesus was the absolute stranger to them. 세상으로부터 미운 물건 취급받고 멸시받고 배척당하시고 세상에 의해 제거되신 분이 바로 사도 바울의 주님이며 성도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은 자신들이 축적한 자랑스럽고 귀한 모든 선한 것들을 영원한 심판의 불에 의해 소멸되어야 할 쓰레기로 취급하는 예수님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그들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망해버린 소망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주받은 자의 공포를 마주하는 것을 회피했다.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존중해주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타인이었던 것이다.
However, the saints know that he who was cursed and rejected by the Father on their behalf, in a appalling appearance that was so disfigured beyond that of any man and his form marred beyond human likeness is their Lord Jesus. 그러나 성도들은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 기막힌 모습의 그분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저주받고 버림받으신 그들의 주 예수님이심을 안다.
Also, they know that this Jesus is the God who appeared with the curse between the world of God and the human world wrapped around his body, and that their sins and they themselves have soaked in the pool of His blood that was under His cross. Those who found themselves in Jesus' blood come to regard themselves as something empty because their unclean lives had melted away into the Lord's blood. When the Lord fills that something empty with Jesus Himself, they come to exist as a sort of “function” of the Lord. Thus, for these people, because everything that happens to them is the work of the Lord, they can always rejoice and worry about nothing. 또한 그들은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그 저주를 자신의 몸에 감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의 십자가 아래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그분의 피 웅덩이 속에 성도 자신들의 죄와 그들 자신이 배여 있음을 안다. 예수님의 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부정한 생명이 주님의 피 속으로 빠져나가버렸기에 자신들을 공백의 존재로 여기게 된다. 주님이 그 공백의 자리를 주님 자신으로 채우실 때, 그들은 주님의 ‘기능’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기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In addition, these people are not afraid of their perishing. Rather, they rejoice in their perishing in the Lord. They are the joy of the Lord as sons who were dead and are alive again; they were lost and are found(Luke 15:32). To such people, they themselves and the world, which were familiar to them, become strangers to themselves and to the world. These are those who exist as a trace of Jesus left in the world, like a teddy bear left by a missing child, like a rack that remains after the plaque has disappeared. 뿐만 아니라 이런 자들은 자신들의 망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 떨지 않는다. 오히려 주 안에서 자신들이 망하는 것을 기뻐한다. 그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주님이 잃었다가 얻은(눅15:32)’ 아들로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친숙했던 자기 자신과 세상이 그들에게는 낯선 자들, 낯선 세상이 된다. 이들은 실종된 아이가 남긴 곰 인형처럼, 상패가 사라지고 남아있는 거치대처럼 세상에 남겨진 예수님의 흔적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다.
In order to show that all these phenomena are not derived from themselves and are not anything they can possess, God repeats the process of killing and saving them throughout their lives. The reason why God repeatedly causes worrisome, resentful and anxious things in his people's lives is to confirm to them that they are already living within the completion of the covenant that Jesus had accomplished. The order to say, "Don't worry about anything, but only with prayer and plea in everything, and with gratitude for your salvation," was given to this effect. 이 모든 현상들이 그들 자신에게서 파생된 것도 아니며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란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죽였다가 살려내시는 과정을 그들의 일평생을 통하여 반복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삶에 염려스럽고 원망스럽고 초조해 할 만한 일들을 반복해서 발생시키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예수님이 성취하신 언약의 완성 안에 거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확인시키시기 위함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는 명령은 이런 취지에서 주어진 것이다.
The will of the Lord is clear as follows. “Perish like a perishing world. Don't endure trying not to be ruined. When you are perishing, know that the Lord has perished you, and enter into that perishing horror. Face yourself without turning a blind eye to your horribly ruined self. Accept that it is what you really are. That's my will and the way I treat you." 주님의 뜻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다. “망하는 세상과 같이 망해라. 망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말라. 네가 망할 때는 주께서 너를 망하게 하신 줄 알고 망하는 그 공포 속으로 들어가라. 처참하게 망해버린 네 모습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하라. 그게 너의 참 모습인 것을 받아들이라. 그게 나의 뜻이고 내가 너를 다루는 방식이다.”
This was the message of God that the prophets of the Old Testament, such as Jeremiah, Ezekiel, Hoshea and Amos, had cried out. Israel had to accept to be destroyed by Babylon, Daniel's three friends had to go into the raging fire, and Daniel had to go into the lion's den. The apostles had to go into prison and Paul had to head for Jerusalem, even knowing that death was waiting for him. Because the Lord was calling them there. 이것이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와 같은 구약 선지자들이 부르짖었던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맹렬한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다니엘은 사자 굴로 들어가야 했다. 사도들은 감옥으로 들어가야 했고 사도 바울은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거기서 그들을 부르고 계셨기 때문이다.
Abraham had to crawl into the terror of having to kill his "strange" son, Isaac. The prostitute Rahab also had to go into the horror of bringing Israel's spies into his home to destroy his country. But that fear is a fear that accompanies the joy that follows after a while. These are all those who are willing to accept that they deserve to perish and thus join the Lord, the perfector of the Covenant. These are those who look only at the blood of the Lord who had completed the Covenant, and are those who rejoice and rejoice in the blood of the Lord.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낯선’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공포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기생 라합도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자기 집으로 들이는 공포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공포는 잠시 후에 뒤따라오는 기쁨을 수반하는 공포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망해야 함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언약의 완성자이신 주님에게 합류하게 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오직 언약을 완성하신 주님의 피만 바라보는 자들이며 그 피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근호
사방으로 물로 둘러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주 방주교회, 이 교회처럼 예수님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 그 한가운데 계시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에게는 어림도 없다. "너의 것은 이미 없어졌느니라"라는 말씀이 반갑게 들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