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The Temptation of Being Content 자족의 유혹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4:10-12
date : October 4, 2020
10. I rejoice greatly in the Lord that at last you have renewed your concern for me. Indeed, you have been concerned, but you had no opportunity to show it. 11.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12.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SUMMARY
In today's text, the Apostle Paul says that he has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ile deliberately avoiding the concept of satisfaction that humans desire. You should not ask the apostle Paul, "I will try to live like you, so can you tell me your own secret?" Because he has already confessed that he is dead and that it is Christ who lives in him. This is not a matter for which human conduct can be involved.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인간이 욕망하는 만족의 개념을 의도적으로 피해나가면서 자신은 일체의 모든 상황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 “나도 당신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하겠으니 나에게도 당신의 그 비결 좀 알려주실래요?”라고 요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은 죽었고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이미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Therefore, the secret of his being content means the secret of the gospel he has preached, not his own. The words "I will try my best to live such a life" cannot be tolerated in the gospel. Humans are already something troublesome by themselves.. Because the saying of the devil, who tempted Adam and Eve to eat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was the resistless strength in itself, and humans who ate the fruit of good and evil by being controlled by this strength have now became temptations to themselves. 따라서 그의 자족의 비결은 그가 전파해온 복음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지 그 자신의 비결이 아니다. ‘나도 그런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겠다.’는 것은 복음 앞에서 용납될 수가 없는 말이다. 인간은 이미 그 자체로서 문제꺼리가 되어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악마의 말은 그 자체로써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고 이 힘에 지배당하여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이제 그들 자체가 자신들에게 유혹꺼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The reason why God causes such unexpected things in the lives of the saints is to let them know that they are the very ones whom they should refuse and push away. Each person is loyal to his or her own expectations, wills, and desires. People stealthily talk to others in fact to meet their needs by using others. But the Word of God, the Law, or the Covenant of God exposes the idol, the "self" at the base of human language and defines it as "the thing to deserve to die."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에 이러저러한 예기치 못한 일들을 발생시키시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바로 그들이 거절해야하고 밀어내야만 하는 유혹대상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의 기대와 뜻과 욕구에 충성을 다한다. 사람들이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사실은 타인을 이용해서 은근히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율법, 혹은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언어의 저변에 있는 ‘자아’라는 우상을 노출시키고 그것을 ‘죽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해버린다.
In the Law of Moses given to the Israelites, there are a number of provisions to execute those who do not do as directed by the Law. For example, the Law commanded the killing of those who cut wood on the Sabbath, curse their parents and rebel against their parents' saying, or kill people on purpose(Deut. 21:18). This means that the “Law”, or the “Word of God,” takes precedence over humans, and the “Law” or the “Word of God” is superior to humans. It also means that only the Law is being and the human is not there.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에는 율법이 지시한 대로 행하지 않는 자를 죽이라는 규정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율법은 안식일에 나무를 한다든지 부모를 욕하고 부모의 말을 거역한다든지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죽일 것을 명한다(신 21:18). 이것은 인간보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며 인간보다 ‘율법’ 곧 ‘말씀’이 우위에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것은 율법만이 ‘있음’이며 인간은 거기에 없다는 말이다.
The Law puts those who are idol to themselves, that is, those whom they are tempted by themselves, to the place of 'nothing'. Israel is a nation formed by God to reveal the purpose of the law. All the nations must know themselves through Israel. Humans need to properly aware about themselves. 율법은 자기가 자기에게 우상이 되어있는 자들, 즉 자기가 자기에게 유혹꺼리인 자들을 ‘없음’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민족이다. 열방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자신을 알아야한다. 인간은 주제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3.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without him nothing was made that has been made(John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However, since humans are all immersed in themselves, they think that it is okay for them to ignore God's Words, the Law, and God's Covenant and live without it. So what God, who came to this earth, left to this world when he left was his "empty grave." The empty tomb of Jesus confirms to them that the place of human habitation itself is a tomb and that they stay dead in the tomb. But those who do not have the Holy Spirit realize this only when their lives are finished. 그런데 인간들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몰입해 있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 하나님이 언약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고 그런 것은 없이 살아도 괜찮은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 세상에 남긴 것이 자신의 ‘빈 무덤’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인간 삶의 터전 자체가 무덤이며 그들은 그 무덤 안에 있는 죽은 자들임을 그들에게 확인시킨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인생이 마감이 되고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Not knowing that there is “death” in them, a large number of Jerusalem women who followed Jesus mourned and wailed for him. Then, Jesus turned and said to them, “Do not weep for me, but for you and your children(Luke 23:27-28)” 자기들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은 모른 채 예수님을 뒤따르던 큰 무리의 예루살렘 여자들이 예수님을 동정하며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7-28)”
Every behavior of man is to please himself and indirectly reveals that he is an idol to himself. It is also in such a context that humans sympathize with others or feel sorry for others. Therefore, the saints should not be sorry for anyone, including themselves.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자기가 자기에게 우상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인간이 타인을 동정하거나 타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So is Peter's case in Matthew 14:28-30. : Peter replied, “Lord, if it's you”, Peter replied, “tell me to come to you on the water.” “Come,” he said. Then Peter got down out of the boat, walked on the water and came toward Jesus. But when he saw the wind, he was afraid and, beginning to sink, cried out, “Lord, save me!” 마태복음 14:28-30의 베드로의 사례도 그러하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Peter wanted to test whether he himself really believed in Jesus. He also wanted to let his colleagues know that he trusted the power of Jesus enough to make such a bold request. Behind his actions was a subtle intention to please himself. For Peter, he himself was his temptation. Thankfully, on our behalf, Peter fully exposed the innate nature in all of us. 베드로는 자신이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그처럼 과감한 요청을 할 정도로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음을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 이면에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은근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베드로에게는 자기 자신이 그의 유혹꺼리였던 것이다. 고맙게도 베드로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모든 사람 속에 있는 내재되어 있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었다.
Heaven is the place where those who are tempted to themselves cannot enter. This is because, for the heavenly people, only the “work of the Lord” remain with them, not their works. 천국은 자기가 자기에게 유혹거리인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천국백성에게는 자신들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만이 그들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The power from the cross is the ability to overcome the temptation of “self” and the ability to give up “self”. And that strength is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Those who walk in this strength do not judge their circumstances in one way or another and do not try to find in themselves the reasons and meanings of such circumstances.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은 ‘나’라고 하는 유혹을 이기는 능력이며 ‘나’을 포기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게 하는 비결이다. 이 능력 안에서 행하는 자는 자신의 형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지 않으며 그런 형편에 처하게 된 이유와 의미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They regard themselves as nothing more than a fog that appears and disappears from the world for a while to show that God's Word, the Law, and God's Covenant take precedence over themselves. Therefore they accept the circumstances without complaining given to them at present and thank the Lord for everything. This is the sweetness and lightness of the saints who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의 존재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형편을 묵묵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 이것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성도의 넉넉함이다.
The state of being content that the apostle Paul speaks of is a state in which there is nothing of his own at all, and it is all filled only with the Lord his own, Lord's plans, and Lord's grace.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의 상태는 자기 자신의 것은 전혀 없고 모두 주님의 것, 주님의 계획, 주님의 은혜로만 채워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근호 “베드로에게는 자기 자신이 그의 유혹꺼리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자신이 유혹꺼리가 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유혹꺼리가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