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11강-묵시적 보좌13010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3. 11:08

2013-01-04 01:39:08 조회 : 293         
묵시적 보좌 130103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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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a -이 근호 목사

제 11강a

다니엘 7장 9절 할 차례입니다. 7장에 보면 역시 다니엘이 환상을 보죠.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데 이 환상은 개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앞으로 세상 스케줄을, 계획을, 세상은 이렇게 설계돼서 진행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좋다고 할 게 아니고, 다니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의 지도처럼, 네비게이터처럼 사용한다는 이건 너무나 황공스럽기도 하고 뭐 단적으로 말해서 두렵죠. 천지를 만드신 분이 내가 뭔데, 날 가지고 세상을 드러내는데 날 앞장세운다는 그러한 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황송스럽고 영광스러운 동시에 본인은 두렵습니다. 왜 두렵냐. 혹시나 내가, 내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튜브 하면서 저는 생각을 했는데 언젠가는 이야기할 거예요. 우리 구원의 방해자는 우리자신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강의를 할 겁니다. 내 구원받는데 가장 방해되는 게 뭐냐, 우리 자신 이예요. 세상을 향한 그 집착, 세상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그 욕망이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도 우리는 자꾸 하나님 손을 떨치면서 나는 그쪽으로 안갈 거야, 나는 이쪽에서 성공할 거야, 하는 고집이 있잖아요. 남 핑계 댈 필요 없어요.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모독하죠.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 대해서 불만 있다는 것은 곧 누구한테 불만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불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불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 불만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십자가 졌는데 ‘흥, 그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십자가 자체를 모독하는 사람이 바로 매일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모독하는 당사자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 간단히 보는 방법이 이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딱 이겁니다. ‘도망쳐라’ 이게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랬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와서 롯에게 지시한 게 뭡니까? ‘도망쳐라’ 그것도 ‘무조건 도망쳐라’ 뭘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그리고 내가 칠 테니까 무조건 빠져라 이 말이죠. 이게 딴 게 아니고 이게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묵시적으로 계시를 설명할 때 그 취지는 이겁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내빼라.

그러면 이 묵시문학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하나님의 묵시적인 계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나올 겁니다. ‘내빼서 어디로 가는데?’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기서 각종 교단들이 생기죠. ‘우리 거룩한 공동체 쪽으로 내빼세요.’ 라든지, 기도원에 가시면 된다든지, 아니면 노아방주를 만들어서 미리 종말에 대비하는 준비물 있잖아요. 손전등, 비상구급약, 1년 치 식량비축, 음용수, 먹을 수 있는 물 준비, 현재 미국에서 유행입니다. 거기다 혹시 이웃이 달라고 쳐들어오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자동기관단총, 여러 사람을 빠른 시간에 죽일 수 있는 단발용이 아니고 자동소총 준비해서 ‘어디 내가 준비한 거 빼앗으려 하면’ 쏠 수 있는 그거, 무전기 등을 가지고 버티면 분명히 마지막 종말에는 핵폭탄이 터질 텐데 핵폭탄이 터지고 난 뒤에 전 세계가 멸망하고 난 뒤에 방사능이 없어지는 기간을 최소한 3년 잡고 3년간 땅굴 속에서 버티면 그때는 부동산 등기할 필요 없어요. 다 죽었으니까. 뉴욕의 건물 있잖아요. 그거 전부 다, 자연에서 새 소리 다시 들릴 것이고, 계곡의 물은 흐를 것이고, 로키산맥의 눈은 녹아서 먹을 수 있는 물이 될 것이고, 완전히 인디안 세계처럼 되니까 전 세상이 누구 것이 돼요.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그렇게 피할 것이냐, 그렇게 되면 하나의 종교단체가 되죠.

기도원으로 갈 것이냐, 어떤 사람은 감람산, 그쪽에 메시아가 재림한다고 하는데, 그쪽은 비좁아요. 왜냐 하면 코란에 보면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 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 이슬람 거거든요. 그게 황금 돔으로 입혀져서 지금 유대인이 못 들어가고 기독교인이 못 들어가요. 이슬람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요. 코란에 의하면 거기에 메시아가 온다고 이슬람 경전에는 메시아가 와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메시아가 오죠. 유대인들은 거룩한 곳 감람산에 선다 하죠. 지금 비좁다니까요.

점점 더 사회가 악화되고 흉흉해지면 너도 나도 보따리 싸서 예루살렘으로 다 기어들어올 거예요. 그러면 땅 값도 오르고 거기 장사하는 사람, 비둘기파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디로 피합니까? 피할 데가 없어요. 분명히 도망치라 했는데 피할 데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선 피할 데가 있었죠. 왜냐, 그곳은 한정적이니까. 불 심판이 그 지역만 치니까.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불 심판이 그 지역만 치는 게 아니고 노아 홍수 물이 잠긴 범위만큼 불이 내려요. 그러면 어딥니까? 다들 피해야 돼요. 옛날에는 물로써 세상을 몽땅 심판했죠. 노아 홍수 할 때 어디로 피했습니까? 피할 자리는 없었고 피할 자리는 하나님 쪽에서 언약으로 만들어 준 그곳에만 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언약으로 구원입니다.

언약을 한국교회는 모르잖아요. 기도원에 가야 되는 줄 알잖아요. 그게 아니고 언약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심판을 내릴 때는 피할 곳 주시고, 심판을 내려버리거든요. 그래야 심판받을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이 차이가 분명히 뚜렷하게 되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방주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방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

마지막 때는 뭐냐, 마지막 때 현상이 불로 왔을 때는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누구든지 누구 이름을 불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0장 13절인데, 그 뒤의 말씀을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voice, 음성을 내서 ‘주여, jesus christ, 예수,’ 이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그 뒷부분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주 예수 이름을 부르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놓고는 그걸 부를 수 있는 믿음은 하늘에서 줘야 된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물 홍수 나기 전에 피할 곳은 방주라는 그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제공해줘야 돼요. 도망쳐라, 피하라. 하는 그 장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다 작살을 내는데, 마지막 때는 공간적으로 도망쳐라 해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대로 옛날 노아 홍수가 노아언약이라면 지금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 새 언약으로 빠지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은 어떻게 빠지느냐 말이죠. 그건 간단해요. ‘도망쳐라’ 해놓고는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고 방주도 없고 예배당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없죠. 바로 ‘도망쳐라’ 해놓고 ‘갈 데 없네!’라는 그런 마음을 품어야 새 언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어디 가봐도 대책이 없고, 여기 요한계시록 8장 마지막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독수리가 썩은 고기를 보잖아요. 모여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게 썩은 고기예요. ‘우리 교회다. 이제 마지막 때는 오신단다. 모이자.’하면 그건 썩은 고기가 모인 거예요. 독수리가 임해서 뜯어 먹혀도 당연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때만 뭐가 귀하다? 십자가, 비로소 십자가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돼요. 이걸 평소에 해야 되는 거예요.

평소에 하려면 우리를 뭐로 보라는 말 이예요? 그냥 고기가 아니고 썩은 고기예요. 어디 도망칠 데 없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 고기, 고망치나 안치나 소용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더 이상 피해 갈 곳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위엣 것을 바라보라, 그 뒤의 말씀이 뭐냐,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기대하지 마.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겠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사실 땅엣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땅에서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가 그것과 결부해서 생각하잖아요. 자, 땅이다. ‘나 무시하지 마. 땅에서 이만큼 잘 나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나를 생각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3장 2절에 보면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만 이야기한다면 교회 오는 교인들 다 봐요. ‘하나님,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위를 보고 있습니다.’라 하는데 그 뒤의 말씀, 뭘 생각하지 말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건 미친다니까요. 오늘 유튜브 강의를 했는데 교회 일도 땅의 일 이예요. 주님 생각하러 온 게 아니고, 주님 생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교회를 어떻게 하면 키워보고 유지해 볼까 하는 쪽으로 결국 돌아서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목사 입장에서는 큰 교회 당회장 할 때 나는 이 땅에서 내가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역시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야, 나 없이는 목회가 안 돼.’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그거 중에 하나가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그것도 하늘 위를 보는 게 아니고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서 제가 강의에서 했죠. 목사는 목회하면서 망하고, 백수는 백수하면서 망하고, 의사는 의사 짓하면서 망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어떤 직업을 준 것은 주부는 주부로 망하고 그걸 통해서 우리는 결국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사실, 그럴 때 비로소 묵시라는 이 계시가 우리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설교를 할 때 설교내용이 나오거든요. 스데반이 설교할 때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설교내용이 나와요. 이렇게 나옵니다. 간단해요. 어두움에서 죽었다가 부활(십자가)하셨다. 이 이야기예요. 이 세상 전부를 뭐로 봅니까? 어두움으로 봐요.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세상을 작심하고 어두움으로 봐요. 그리고 어느 정도로 어두움이냐, 본인은 몰라요. 그런데 빛이 왔는데 빛을 빛으로 못 알아보니까 어두움이다 이 말입니다. 어두움이 빛으로 왔으매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니 어두움 맞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전부 다 어두움이다 말이죠. 여러분, 장독이 있으면 눈 올 때 장독에 눈이 소복이 쌓이잖아요. 제가 우리 옥상에 올라가서 장독에 보니까 눈이 와서 오랜만에 사진 찍으러 올라가 가보니까 장독이 4개 있는데 눈이 소복이 쌓였어요. 그러고 보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전부 다 죽음이 소복이 쌓인 것처럼 느꼈어요. 어두움이, 하아, 직업이나 남녀노소 나이와 상관없는 거구나, 모든 인간은 어둠이 소복이 쌓여서 죽음의 무게에 눌려서 사는구나. 눌리면 짜브러지죠. 뭐 그냥. 짜브러지면 나중에 나이 들면 허리 아프다, 관절이 아프다, 쑤신다 하잖아요. 내려앉는 이 중력을 뼈의 분자 구조가 당해내질 못해서 이게 함몰되는 겁니다. 칼슘 때문에 구멍 생긴다 하잖아요. 인간의 뼈는 중력을 지탱하게 돼 있는 거거든요. 그걸 감당 못하니까 짜브러지고 주저앉아버리죠. 촌에 일 많이 한 할머니 보세요. 완전히 허리가 구부러져 있죠. 아침부터 눈 떠서 앉아서 일 하다 보니.

그래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을 누구보다도 우리 사정을 더 잘 아셔서 그 다음에 묵시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제 묵시가 별로 어렵지 않죠? 묵시라 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눈앞에 코앞에 보이는 걸 가지고 설득하는 게 묵시가 아니고 ‘아예 너는 몰라, 내가 알아, 딴 소리 하지 마, 이거야.‘ 하고 묵시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전체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해결책, 새 언약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우리가 혼자서 자기 일 한다는 것이 이게 무의미 하다는 것, 그래서 개인적인 일보다도 눈을 전체를 보여줄 때는 전체를 따라가라는, 전체를 같이 보는 게 좋은 거예요.

그 전체 중에 하나가 다니엘 7장 9절 오늘 본문 합시다. “내가 보았는데” 내가 보았는데,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잊어버리니까, 역사가 역사계시가 아니고 묵시 계시일 때는 ‘도망쳐라“ 위로 도망쳐라, 어떻게? 네가 도망칠 수 없는 죄인이라 할 때 비로소 그동안 안 보이던 위가 보일 것이다. ’난 역시 잘났어. 난 훌륭해, 난 가능성 있어.‘ 하면 절대로 위를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잘난 자기 자신을 보기도 바쁜데 뭘 위를 봐요?
 
그런데 망가져도 너무 망가졌어. 완전히 이제는 자기도 꼴 보기 싫어. 예수님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정도 수준 돼 버리면 뭡니까? 아버지의 그 다음 준비된 약속을 보죠.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산다는 그 약속을, 주님을 믿게 되죠. 우리가 이 땅에서 죽었지만, 오늘 강의에서 우리는 죽으면 하나의 씨앗처럼, 종자처럼 사용해서 우리를 부활을 이루는 종자로 우리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그것이 부활의 씨가 되는 쪽으로 사는 거예요. 부활이라는 놀라운 드라마에 우리가 죽음이라는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죽음은 사실은 무가치한 게 아니에요.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겁니다. ‘아, 세상은 어두움이고 나는 죽음밖에 없어.’라는 대사를 해줘야 부활의 효과, 부활의 능력은 그걸 종자로 삼아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 부활을 만방에 증거 하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너 뭐 믿어?’ 하면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 믿어.’ 되잖아요. ‘너 뭐 믿어?’ 하면 ‘돈 벌어야 되니까 돈 믿어야지 뭘 믿겠노.’ 이러면 돈은 부활이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일을 안 하시는 게 아니고 일을 하셔요. 하시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실망과 좌절을 항상 있게 만들어서 위를 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데 그게 성도에게만 해당되고요. 성도 아닌 사람은 도저히 하나님의 그러한 일에 동참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화가 나서 뿔따구가 나서 동참을 하지 못합니다. ‘에이 씨, 예수 믿는 거 이제 그만 믿으련다. 이제 교회 믿을래, 역시 나는 교회 하는 게 갑이야.’ 자기 교회가 자기를 대신하고 대체하고 대체물로 자기영광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날 안 믿는 것은 네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예수란 모습으로 등장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돼 있다. 그럼 예수 영광 보려면 우리 영광은 완전히 짜부러지고 박살나야죠. 그걸 우리가 할 수 없고 묵시의 말씀에 의해서 묵시적으로 그걸 진행시킵니다.

그 진행시키는 시작이 9절에 나오는데 봅시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라고 돼 있죠. 그 다음에 “그 보좌는” 뭐 같고? 불꽃같고,  이건 어디서 많이 나왔던 멘트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성전이 불로 구성된 거예요. 재료가 불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앉아있다? 불 속에 앉아있어요. 그걸 제가 수요일 날 뭐라 했느냐 하면 포항제철 용광로가 했는데 불 속에 아래쪽은 불꽃이고 위쪽은 불에 벌겋게 단 쇠같이 계시다.

그리고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평소에 늘 왔다 갔다 했던 그 장소예요. 늘 성전에 왔던 이사야가 갑자기 어떤 순간에, 이런 걸 설명해야 되는데, 성전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사야가 평소에 왔다 갔다 해요. 안에 당직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공간은 공간 속에 자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그냥 무심히 흐릅니다. 역사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역사고 시간은 흐름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역사가 이렇게 가는데 사건이 중심을 떼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카이로스, 어떤 때, 어떤 결정적인 지점 하나가 됩니다. 탁 치면 뭐가 끊어지느냐 하면 요 흐르던 시간과 이 시간이 끊어져 버립니다. 단절돼 버리죠. 단절돼서 이렇게 흐르다가 질이 달라요.

여기서부터 다른 노선으로 시간이 흐르게 되죠. 이건 그대로 이대로 가고. 그러니까 이사야 같은 경우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뭘 봤습니까? 늘 평소에 왔다 갔다 했잖아요. 이 사무실 같은 경우에 늘 사무실에 왔다 갔어요. 왔는데 어느 시점에 갑자기 여기에 웬 천사가 와서 난동을 부린다 말이죠. 날개가 6개 가진 천사가 와서 천사가 와서 뭔가 보여주는데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 보좌에 찬송하는 모습이라 할 때, 도대체 이곳이 사무실입니까? 천국입니까? 천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천국을 보여주는 그 밑바탕 된 공간은 여전한 사무실, 그러니까 역사를 버리는 게 아니고 역사를 그대로 사용하시되 역사에서 점선으로 숨어있던 하나님의 진짜 나라가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바탕 위에 사건을 통해서 이걸 발현 된다,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그 경험을 했다 합시다. 그 다음날 아침에 와서 그 천사를 기다립니까? 없어졌죠. 변화 산에 올라가 봐야 지리산이나 설악산이나 차이가 없어요. 똑같이 흙으로 돼 있다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거기서 예수님이 변화되고 엘리야 모세 있다면 그래서 진짜 베드로가 감격해서 뭐라 합니까? 묵시를 역사로 공간으로 붙들려 했습니다.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자, 초막 셋을 지었다 칩시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초막 셋을 짓게 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서 변화 산에 올라가면 그 초막 셋이 앉아서 예수님하고 베드로하고 전부 다 고스톱치고 있습니까? 그래요?

진정한 교회라는 게 뭘까요? 예배당입니까? 아니죠. 사건의 사슬, 사건의 고리가 교회가 되죠. 진짜 숨겨놓은 사건의 고리! 아내가 밥 해주는 것이 주의 손길일 수도 있고, 언제 경우에? 사건화 될 때, 애가 아침에 학교에 가는 것도, 학원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임하면 그것도 감사거리가 돼요. 이렇게 눈 오고 겨울이 뜨뜻해지는 것도 은혜를 아는 사람한테는 이것도 범사에 감사거리가 돼요. 모든 경우에.

그러니까 현장이라는 거, 이것을 사도바울은 어려운 말로 이걸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안(in)이라 할 때 이걸 철학에서 2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범주론으로 이야기하겠고 실존으로 이야기하는데, 범주라 하는 것은 요 지우개하고 요 매직 사이의 안, 이렇게 두  개가 놓여있다 할 때, 공간으로 이렇게 할 때 범주예요. ~와 ~ 사이에 들어있다. 이럴 때 범주를 말하는데 그건 의미가 없는 거죠. 우리 집은 어느 아파트 몇 동과 몇 동 사이에 있다. 이건 늘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실존이라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부부간의 사랑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너를 바라볼 때마다 아름다워.’ 그런 어떤 때가 있죠. 그런데 진짜 바라볼 때마다 늘 아름답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전에 아름다운 것은 실수였는가? 착각이었는가? 잘못이었는가? 그럼 안 아름다운 건가? 부부 이야기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해봅시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 때 미스 바사 돼서 오디션 봐서 됐잖아요. 왕이 에스더가 처음에 예뻤잖아요. 늘 예쁘겠어요? 늘 예쁘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 앞에 나가니까 예뻐도 너~무 예뻐! ‘야, 네 미모 살아있네.’ 홀을 내밀면서 ‘네가 이렇게 예쁜 줄을 미처 몰라보다니 이 나라 반 가져라.’ 그 당시 나라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요거 반 준다하니까 어느 땅 하렵니까?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나라의 반을 줄게.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느냐.’

그걸 제가 수련회 가서 설교하면서 에스더 설명하면서 인간의 힘보다 하늘이 주신 아름다움이 인간의 힘을 지배 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선악과 있잖아요? 이건 아담이 그날 안 따먹어도 그 다음날 따먹게 돼 있어요.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이것은 ‘탐내지 말라.’ 하는 것이 지금 탐을 안 내도 ‘탐내지 말라’하는 이것이 울렁울렁 하는 이상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가서 타이밍이 맞으면 탐내게 돼 있어요. 지금은 탐 낼 것도 없고 이래 봐도 가져갈 것도 없고 하지만 여기 보니 금송아지 있다 하면 내가 훔쳐가야지, 하는 계기가 아다리가 되게 되면 인간의 잠자고 있던 탐심이 작동해서 우리는 율법을 위반해야 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그건 국민교육헌장에 들어간 거고, 우리는 이 땅에 죄 짓는 존재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지금은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하고 탐내지도 않고 하지만 딱 아다리가 올 때가 있어요.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죄라 하지만 안 미워한다 싶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미운 걸, 그런 사람 만날 날이 올 겁니다. 손꼽아 기다리세요.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거는 사람이 내가 나라는 것을,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주체를 액체라 했어요. 흐른다 이 말이죠. 어디로 흐를지 몰라요. 액체의 특징은 그릇 따라 모양새가 변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는 그 상황을 이기지를 못해요. 그 상황에 적응하려고 여기 만나면 여기 부딪히고 하는데, 한 목사님은 몰라, 북한 가면 북한에서 순교하실지, 북한 가서 김일성, 김정일 찬양하라 하면 안하실 것 같아, 하여튼 모든 인간은 시대가 요구하게 되면 북한 가면 김정일 찬양하기 마련이고, 다시 또 한국에 오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렇게 하기 마련이고, 상대를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 처신하고 싶어 하는 우리, 역사적 존재,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신약은 다 묵시로 보면 돼요) 이걸 한 자로 ‘육’이라고 한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 육을 언급을 안 해요. 왜냐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육과 영, 영과 육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초반기에 오면 ‘어둠과 빛’ 이러잖아요. 어둠과 빛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지, 개인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면 개인을 육이냐, 영이냐, 둘 중에 하나만 해라, 육적이면 육에 포함되고 육이냐, 영이냐, 육을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직업이 뭐냐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지금 직업이 의미가 없고 내가 육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영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둘 코스 중에 한 코스밖에 없어요. 마치 다이하드3나 다이하드4에 형사가 폭탄 자를 때 ‘어이, 빨간색 끊을까? 파란색 끊을까?’ 이거 잘못 끊으면 큰일 나거든요. 뉴욕 시민 다 들어갑니다. ‘형님, 빨간색이랍니다. 그래’ 파란색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묵시적으로 몰아세워버려요. 우리는 항상 육이기 때문에 육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찬란한 우리 행함을 모아서 내 위주의 역사를 만듭니다. 그걸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 또는 역사의 주체이고 싶은데, 하나님은 신약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를 묵시로 몰아넣어버려요. ‘묵시 세계에서는 너는 뭐야?’ 이렇게 묻는다니까요. ‘네가 만든 네가 구상한 세계에서 너는 어떤 존재야?’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네가 구상하고 상상한 세계는 아예 어두움으로 아예 끝나버렸어요. 그런 환경은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육이야? 영이야? 어두움이야? 빛이야? 이렇게 묻는다 이 말이죠.

그전에 그러한 신약이 오기 전에 오늘 본문에서는 뭐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보좌로 나타난다. 보좌인데 이건 뭐로 돼 있다? 불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불로 만들었는데 보좌에서 불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것이 지상에 역사 속에 올 때는 뭐냐 하면 성전 제단의 밑에서 맹렬한 불이 붙는 걸로 묘사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성전 제단에 불이 붙으면 뭔가 태워야 되는 게 있죠. 태우는 게 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흠 없는 게 태워져요. 흠 없는 것이 이 무서운 불에 의해서 태워지는데 이사야 6장에 보면 이 불이 제단의 불이라고 하면서 다른 말로 하면 진노의 불이예요. 이 진노의 불이 분명히 너희가 바친 흠 없는 제물, 내가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진노의 불 위에 너희 제물을 태웠잖아,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왜 이 언약 적 의미 모르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가정에 정원이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아침저녁마다 이상한 짓을 해요. 어떤 이상한 짓이냐 하면 제단을 만들어 놓고 불피워놓고 ‘아휴, 불쌍해라.’ 혼자 울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고양이, 불쌍한 내 강아지.’ 맨날 아침마다 뭘 태워서 냄새가 지독해서 온 동네 빌라 냄새 다 퍼지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저 할아버지가 미쳤나, 저 반복되는 행위의 의미가 뭐지? 할아버지 왜 자꾸 제단을 쌓아놓고 그것도 아주 깨끗하고 고양이가 6마리인데 그 중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고양이를 얹어 놓고 제단에서 불을 싸질러서 냄새 온 동네 퍼지게 해서 119 신고하게 만들고 하는 그러한 행위를 그러한 퍼포먼스죠. 행위예술. 행위예술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이건 하나님의 행위예술입니다.

이건 뭘까요? 너희는 진작 죽었어야 되는데, 바로 하나님이 노아 방주 같은 역할을 이렇게 제사로, 노아 언약에서는 노아 방주가 언약이잖아요. 모세 언약에서는 이 제사가 노아 방주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 언약궤, 이 같이 있는 언약궤가 다른 민족과 너희와 차별화 시키고 너희는 거룩한, 그냥 백성이 아니고 언약으로만, 약속으로만 구원돼야 될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언약이 말이냐? No, voice, 음성이냐? No, 몸짓이냐? No, 뭐냐? 요 기능!! 흠 없는 양을 태워 죽이는, 불이 있고 흠 없는 양이 있고, 그걸 불이 홀라당 다 태워버리고, 물론 기름과 피는 뺍니다. 빼서 지성소를 다 발라 나갑니다. 이미 죽은 자의 기름과 피, 흠 없는 것들의 기름과 피는 여기 발리고, 어쨌든 몸체는 홀라당 다 태웁니다. 이게 번제예요. 속죄제도 마찬가지고 번제예요. 나중에 여기서 끝나고 난 뒤에 한 세트로 해서 화목제 드리면 그건 제사장이 먹을 수 있고,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보기도 싫은 레위기, 골치 아픈 그 지독한 그게 왜 있느냐 하면, 그게 그 시대의 방주, 노아방주였습니다. 그걸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을, 인간이 버려놓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인간이 자기가 어떻게 처치할 수 없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인간이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언약적인 조치였습니다. 그 당시에!

참, 그걸 보면 정말 하나님 참 신기하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간단한 거예요. 우리가 아는 어진 할아버지 같은 분, 치킨 집(KFC) 보면 할아버지 있잖아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같은 분이 있어서 가인의 제사처럼 우리의 정성을 받아 챙겨놓고 복주는, 우리도 납득이 되는 그런 하나님인데, 이건 뭡니까? 너무 참혹하잖아요? 누가 믿겠어요? 사실 이스라엘 본인도 안 믿었어요. 너무나 이상스러워, 아무도 못 믿게 만들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못 믿게 만들고 이 의미를 우리가 이 제물처럼 죽어야 하듯이 ‘제물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됩니다.‘ 라고 깨닫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깨달아지는 그런 식의 방주의 역할, 기능. 방주는 문 열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것도 어렵긴 어려워요. 비도 안 오는데 방주 들어가라 하면 미친 인간이지, 비가 안 오는데. 비가 오고 나서 떴을 때는 다 기어들어가죠. 그런데 맨 땅인데, 비도 안 오는데, 맨 땅에 배를 만들어놨으니, 현대중공업도 아니고, 울산에 가면 현대중공업에 맨 땅에 만들어놨어요. 물이 차면 뜨게 돼 있거든요. 그건 계약서에 그렇게 돼서 수주 받아서 하는 것이고, 이건 그것도 없는데, 방주를 만들 때 참 인기 없었어요. 아~무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납득을 피해 가버립니다. 인간이 납득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손에 죄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천국에는 죄가 섞이면 안 되거든요. ’아,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그렇게 되면 천국 가서 누구 자랑하겠어요? ‘나 눈치 챘지, 눈치 챘지.’ 그건 소꿉놀이할 때 하는 거고, 천국에서 술래놀이 할 장소입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찬양하는 게 지겨워서 자기 뜻대로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지금 요 제단을 합쳐서 이걸 성전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하늘 성전이 있고 지상의 성전이 깨진 이상 성전이 없어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거기는 뭐냐, 불이 나오죠. 성전에서 불이 확~ 쏟아집니다. 불이 쏟아지면 세상 끝납니다. 그 불꽃은 누굴 향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찌른 자도 볼 터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던 사람들한테 다 속합니다. 그럼 예수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없었죠. 백부장은 자기 힘으로 믿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능력, 성령이 임한 사람만 예수님이 왜 언약으로 죽어야 되고,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가, 그 둘 사이를 엮을 수가 있어요. 양을 잡아서 드리라 하니까 유대인들이 열심히 양을 잡았어요. 할례를 하라 하니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의미가 뭔지 모르고 ‘하라’ 하면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그게 형식이 되었고 반복적인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인간의 행함이나 역사가 돼 버렸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때, 역사를 끝장내는 다시 말하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행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오니까 그 행한 것이 말짱 소용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수십 년 믿었습니다. 나 목사입니다. 신학 했습니다. 강의하러 다녔습니다.’라는 그 모든 것이 구원에 전혀 상관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게 뭐냐 한해를 살아도 쓸데없는 짓으로 한해를 다 보냈다.

십자가마을에 제가 글을 썼잖아요.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 쓸데없이 한해를 보냈는데 왜 이유도 없이 사는지 모르겠다. 왜 내가 그 떠오르는 해를 봐야 됩니까? 뭐 좋다고, 어떤 사람은 찾아가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떠오르는 해를 왜 올해 또 봐야 되느냐 말이죠. 안 볼 수는 없을까….

성전에서 불이 나와서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7장 13절 봅시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서” 그러니까 이거는 UFO, 비행접시에서 주어지는 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공중에 뭐가 떠 있느냐, UFO가 떠 있는 거예요. SF영화에 보면 UFO가 떠 있는 게 있어요. 그리고 인디펜던스라는 영화에 봐도 외계인, 뉴욕시 백악관 위에 떠 있는 게 있어요. 비행접시가 떠 있는 거예요. 이건 지구인데 비행접시가 떠 있어서 위에서 문이 열리면서 누가 온다? 인자 같은 이인데 유사 인자, 인자를 닮았잖아요. 인자와 같은 이름이니까 이 같음에 대한 모델이 따로 있어야 되겠죠? 여기 인자가 누굽니까? 다니엘, 다니엘 같은 분이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UFO를 가지고 항상 계시는 분이 계신 곳.

 노아 홍수 때는 간단했습니다. ‘노아야’ ‘예’ ‘방주 만들어라’ ‘예’ ‘방주 만들고 다 만들었으면 내가 들어가라 할 때 들어가라’ ‘예’ 딱 일주일 전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 전에 들어갔으니까 우리 같으면 한 10분 전에 들어가면 되는데, 일주일 전에 들어갔으니까 일주일 동안 얼마나 갈등이겠어요? 문 닫고 있으면서. 진짜, 카운트다운 해보세요. 9, 8, 7...해서 비 안 오면 어떡합니까? 아~ 그 웃사, 아구, 아버지의 위신이고 뭐고 다 깨지면‘ ’에이, 아버지 이단한테 속았다. 카운트해도 온다더니 아무소리 없네. 진짜 그런 일 있으면 다음부터 방주 만들라 하면 안만들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무슨 계시나 뜻을 받았다고 하는데 ‘야, 세상에 꿈을 꿨는데 돼지 일곱 마리가 돼지 옆구리에 변을 묻히고 들어오는데 12, 23, 35, 8, 16, 14, 이게 확 지나가는데 이거 뭐 사겠어요? 로또 살 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 계시나 은혜로 기도 가운데 돼지를 봤는데 비몽사몽간에 돼지가 나왔다면 번호가 있으면 로또를 사든지 비밀금고 번호든지, 은행 번호라 할 거다 말이죠. 왜 요새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왜 간주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아까 이야기했는데, 그런 것들은 뭣을 크게 함이라?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땅엣 것에서 기존의 삶을 영위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이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땅엣 것과 함께 죽으라.’의 원칙에 위반되는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묵시 계시가 아니고 마귀 계시죠. ‘아무개야, 어느 땅을 파라, 믿음도 파라, 어린애 같은 믿음으로 해라, 안 믿는다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야 영광 돌린다, 파 보면 뭐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파보니까 툭 소리가 나더라, 그래서 보니까 보물 상자가 있더라, 열어보니까 위조지폐가 있더라. 이미 그런 것을 평소에 기도하면서 얼마나 상상했겠어요? 하나님, 기도 끝나고 난 뒤에 갑자기 취직이 된다든지, 갑자기 총각, 처녀 같은 경우 재벌 3세가 나타난다든지, 아니면 감독이 길을 가다가 ‘아유, 배우 안 해보시렵니까? 하든지, 모델 안 해보려는지, 갑자기 공부 못하던 애가 ’엄마, 1등이야‘ 하고 온다든지, 아니면 남편이 비자금이 있는데 당신한테 이제야 알려준다 하고 비자금이 50억 있는데 이제야 말한다고 나오든지, 아니면 모르는 어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너를 양자로 삼았다고 유신 받으라고 200억 부동산 2개 주든지, 안 그러면 옆에 있는 교회가 깨져서 교인 200명 들어오던지, 뭔가 나로 하여금 계속 땅을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누가 만들어낸다? 내가 매일같이 생산해 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UFO를 바라볼 경우에는 뭡니까? 다니엘 같은 지점에 와야 이게 보여요. 다니엘은 지금 뭐가 있습니까?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어디 통장 잔고도 아무것도 없어요. 다니엘은 뭐만 황송하고 뭐만 지금 신기하고 놀라우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을 누가 쓰신다? 하나님이 묵시 전달 매체로 쓴다는 이 자체에 놀라버린 거예요. 여기 인자, 인자 같은 이가 나중에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고, 예수님이 뭐 있습니까? 예수님이 숨겨놓은 부동산이 있습니까? 뭐 있습니까?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따라가면 뭘 해주는데? 뭐 물고기 아가리 열면 성전 세 나온다. 그것도 성전 세 줄 때나 했지, 매일같이 ‘돈 없지?’ ‘예’ 하면 매일같이 물고기 아가리 열어서 돈이 나오면 따라다닐 만하지, 매일같이 물고기 아가리 벌려서 돈 나오면 우리는 왜 안 따라다니겠어요? 장사 치우고 주님 따라다니면서 물고기 아가리만 조사하면 되지. 물위를 걷는 것도 재주가 있지, 2번 3번 물만 보면 자꾸 물위를 걸으면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물위 걷는 쇼 하면 돈 법니다.

항상 사건은 단회 적입니다. 한번 이예요. 사도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기적 베풀면 이 손수건 대량생산해서 죽으면 손수건으로 살리면 장례식장 장사 안 되도록 만들고…. 하나님이 하는 것은 항상 역사를 집착하고 있는 우리에게 뭐로 오신다? 이걸 잘라버리는 묵시로 오셔서 구원하는 게 오늘날 노아의 방주입니다. 사실 노아한테도 방주는 묵시였어요.

묵시는 뭐냐? 무조건 네 자, “도망쳐라” “노아야, 무조건 도망쳐라” “롯아, 모조건 도망쳐라” 뭘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오늘날 이 시대에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이 믿음을 보겠느냐, 사람들 보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 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십자가 이후에 주님은 위로 가버렸잖아요. 위로 간 이상은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완전히 무슨 층이 된다? 묵시가 다루는 묵시의 층이 되고 말았다 이 말이죠. “도망쳐라“ 도망치라 하면 우리는 방주 만들고 기어들어갈까요? 그게 아니고 ‘내가 아무데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하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졌는가를 비로소 남한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이죠.

의사는 의사하다 망하고 목사는 목사하다 망하고 망하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겨요. 주부는 주부로서 망하고, 왜, 세상 것만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러니 사업 하시면서 항상 뭔가 맘에 안 들고 뜻대로 안 되죠. 항상 맘에 안 들고 ‘허 참, 진짜 때려치울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때 ’아하, 또 세상적인 나의 가치를 또 집착을 했구나.‘를 지적하시는 UFO에서 나오는 축복의 능력입니다. 효과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2.222) 13-03-25 17:24 
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b -이 근호 목사

제 11강b

7장 10절에 보면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돼 있죠. 보좌라 하는 것은, 어느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 보좌? 그럼 가만히 있겠네.’ 가만히 있는 보좌 없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바퀴가 있거든요. 천사들도 있고, 스가랴 같은 경우는 네 천사가 나와서 네 방향, 동, 서, 남, 북, 구석까지 다 가버려요. 완전히 세상을 천사가 와서 미리 선점해서 말뚝 박아버립니다. ‘하나님, 여기까지 맞죠?’ 네 천사가 네 모퉁이를 점령한다니까요.

세상이 모퉁이다. 천사 1, 천사 2, 천사 3, 천사 4, 해서 ‘하나님, 여기 말뚝 치면 되죠?’ 말뚝을 쳐놓으면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모든 진노와 심판을 요 범위 내에서 다 조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예수님의 영광에서 피할 자가 없게 이미 천사가 자리를 먼저 잡아버린다니까요. 그리고 이 자리에는 바다에 있는 것까지 초청을 해요. 바다의 누구를 초청하는가, 짐승, 짐승 따라 누가 오느냐, 마지막 숨겨 놓은 옛 뱀, 마귀, 악마도 뒤따라와서 여기에 오게 되면 여기에 주어지겠죠. 천사가 쳐놓은 요 범주 안에서 완전히 작살내 버립니다.

그것이 이미 축소 모형이 옛날 모세 언약의 성소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 거예요. 그냥 이건 하나의 마술제고 아, 피 뿌리면 용서받는다 하더라. 피 뿌리면 용서한다. ‘그거 쉽네, 피 뿌리지 뭐.’ 이런 짓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이 계속 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까 자기들은 피 뿌리고 제사 드리니까 이건 잘한 짓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모세 율법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 잘 하고 있죠?‘ 하니까 예수님이 “날 믿어라” 했거든요. ’그럼 이거는?‘ “그건 소용없고 날 믿어라. 이건 그림자고 이 그림자의 실체는 나다” 했거든요.

성전에 이게 만약 성소라면 성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다리 발자국이 있는 거예요. 이걸 뒤따라가게 되면 점선부분이 되기 때문에 뒤따라가지 못하고 저들은 여기서 양만 잡고 염소 잡고 소 잡고 난리 났어. 그런데 뒤따라 가보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요. 이걸 누가 알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처음엔 몰랐었잖아요. 나중에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옛날 구약까지 소급해서 보니까 ‘아! 우리가 하는 짓은 육에서 와서 육으로 하는 짓거리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육에서 나온 건 육이예요. 교회 다니고 해봐야 그건 교회 다니는 거죠. 천국 가는 게 아닌데, 천국은 육에서 영으로 가려면 ‘육이 육이다.‘라고 깨닫는 어떤 순간이 와야 돼요.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애 키우고 정으로 해도 이건 육에서 나온 육일뿐이다. 영은 아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돼요. 영이 있는 사람만 육이라고 할 수 있지, 육에 속한 사람은 이걸 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정신적으로 고상한 거다.

육이란 한계가 뭐냐 하면 육에서 기껏해야 정신, 정신에서 숭고로 나가요.(육☞ 정신☞ 숭고) 숭고는 누가 주장했느냐 하면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가 한 겁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 이성비판, 그러니까 여기 정신은 윤리 도덕 이예요. 이게 TV에 나오는 유명한 강사들, 정신병에서 이야기하는 의사라든지, 유명한 심리학박사들, 여기까지 나와요. 인간은 고귀함이다. 서로서로 상생하면서 서로 소통하면서 삽시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이런 거. 요기까지 나가요. 여기에 법정스님이라든지, 요새 혜민스님이라든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숭고에 이릅니다. 숭고는 무소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비워내는, 비워내는 노자의 사상에 의해서 비워지면 더욱 더 그 빈 만큼 더욱 충만한 행복이 주어집니다. 하는 이론. 이걸 근거로 해서 육을 근거로 해서 발전된 거예요. 너무 세속에 물들지 말고 돈 찾지 말고 이웃을 돌아봐서 착한 일해서 더 거기서 나아가면 돌봤다는 그 사랑마저 부인하고 그거마저 비워내면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해탈의 경지에 도달된다. 그런데 이건 육에서부터 출발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출발은? 영은 예수님이 육이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육인데, 이건 뭐냐 하면 ‘저주받았습니다.’가 출발한, ‘나는 저주받았습니다.‘ 왜, ’나는 죄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그냥 우리가 보는 죄가 아니고, 십자가 언약 때문에 주어진 죄로부터 해서 그 죄를 씻어줌으로서 이룬 나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천국 이예요.

이거(육에서 출발)는 유사 천국, 천국을 흉내 내는 겁니다. 이렇게 육에서 생각하는 천국은 특징이 뭐냐 하면 특정 인간을 섬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여기서는 모든 인간이 동등합니다. 모두가 부처니까, 모두가 신이고 모두가 예수니까, 교회에서 요새 장사가 안 되니까 이거 시도합니다.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12단계 밟으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마저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떤 경우를 당해도 여러분들은 행복의 극치를 맛볼 수 있습니다. 부인을 통한 긍정의 극치를 맛보세요. 이렇게 나와요. 에카르트의 신비주의입니다. 부정 속에서 긍정을 바라보는. 훅스라는 신학자의 주장대로.

요새 천주교회나 기독교에서 저런 거 많이 합니다. 뭔가 유식해 보이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고 도트인 것처럼 보이면서 사람들로 그렇게 자유경지에 높아지려 하는, 십자가만이 아니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내가 신이 되는 걸 시도하는 거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인 게 되죠. 내 일이요? 아니, 내 일은 없고 오직 우리에게는 주의 이름만 필요하지 내 이름은 필요치 않죠.

그런데 이런 동네에 가면 주의 이름도 없애버리려 해요. ‘예수 믿게 되면 종속되니까 그럼 너는 자유를 누릴 수 없어.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네가 믿은 예수도 버려버려라, 그러면 비로소 너는 신이 될 것이다.’ 오늘 좋은 거 많이 배웁니다. 그쪽에서 몇 년 배우는 거 여러분은 1~2일만에 다 배워요. 그쪽 수법을.

그러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보면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하늘에 누가 분명히 있고 그분께서 보좌가 가만히 있는 보좌가 아니고 거기서 뭐가 나온다? 불이 강처럼 흘러나와서 다 조져버린다 말이죠. 11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이런 이야기, 이런 스토리, 이런 스케줄, 이런 달력에 2013년 한글날은 이미 공휴일이다. 이미 나왔잖아요. 이처럼 이미 결정 된 거예요. 이런 절차로 시행된다. 이건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니까, 내가 그냥 해치울 테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진행되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킨 거예요.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서 냉장고나 차가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란 말이 아니고 우리가 그 떠내려가는 냉장고고, 그 말씀 속에 떠내려가는 자동차가 되라 이 말이죠. 왜, 우리 힘으로 말씀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위에서 떠져야 되지, 밑에서 받혀줘야 되지,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말씀은 우리의 대상화가 되지를 못합니다. 대상이라 하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말씀 지켰습니다. 내가 지킵니다. 하나님 저게 말씀이죠? 이제부터 제가 지킬게요.’ 이게 ‘대상화’라는 거예요. 인간의 실존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떤 대상을 내가 만들어 놓고 그 간격을 띄움으로써 요거까지는 당신영역, 요까지는 내 영역, 하면서 인간은 주체를 확립하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객체를 먼저 만들어놓고 객체와 차이 남을 통해서 ‘나는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고상한 철학이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어린애를 생각해 보세요. 어린애가 어릴 때는 엄마 품에 있다가 언제부턴가 친구 만난다고 가더니만 그다음부터는 ‘엄마,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문 걸어 잠그고, 좀 컸다고 상담할 것은 친구한테 하고, 저 혼자 컴퓨터 게임하고 스마트 폰 있어서 이제는 아빠, 엄마하고 대화도 안 하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고 왜 그럽니까? 여기까지는 엄마가 하고, 그 다음은 엄마가 끼어들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나만의 영역을 구상하는 그것이 자아 성, identity, 자기 정체성을 그런 식으로 확립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재밌는 현상을 보았는데 아침에 대구에서 나오면서 우리 집에서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직해버스를 탔는데 차 속이 되게 시끄러워요. 등산객 둘이 나이가 70쯤 넘은 두 분이 한사람은 앞에 앉고 한 사람은 뒤에 떨어져 앉아서 뒤 보면서 이야기하니까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아저씨, 시끄러우니까 옆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세요.’ 하니까 ‘예’ 하고 말 잘 들어요. 그래서 같이 앉더니만 이야기를 안 해요. 가만히 있고 이야기할 게 없는 거예요. 대상화 되다가 너무 가까워.ㅎ 너무 가까워서 쑥스러워서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멀찍이 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붙어있으니까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를 안 해요. 언제 이야기하나 해도 계속 이야기를 안 해요.

아! 저게 뭐냐, 인간은 이야기할 때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외치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떼어놓고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친구를 사귀는구나, 친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자기 말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사귀는구나. 부부도 마찬가지 아닌가, 혼자 이야기할 사람 없으니까 외로워서 부부가 있어야 되는가 생각이 들어요. 아, 인간은 희한한 인간이야.

10절에 봅시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심판 할 때 뭐가 펴졌습니까? 책들이 펴졌습니다. 왜 심판에 책이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왜 심판에 책이 필요하냐? 아, 이거 아는데 참 무수한 세월 걸렸습니다. 몰라서 계속해서 머릿속에 답답한 채로 남아있었어요. 왜 생명책이 필요하고 왜 행위 책이 필요하냐? 뻔히 다 아는데,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는 분이 ‘아이쿠, 너 누구더라? 가만 있어봐, 내가 책 찾아보고.’ 이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닌데, 왜 행위 책이 필요하고 생명책의 명단 리스트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나중에 알았어요.

그것은 바로 이 생명책과 이 행위 책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고, 심판하는 용도도 아니고, 심판주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심판 주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고, 심판 주가 심판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게끔 책에 이미 결정돼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 이건, 에서 위주도 아니고 야곱 위주도 아니고 누구위주다? 예수님을 위하여 너는 미움 받아야 돼, 너는 사랑 받아야 돼, 너 위해서가 아니고 싫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 이야깁니다.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나도 내가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노라, 아버지 생각하지 마라, 내가 본 전부가 네가 그렇게 보고 싶은 그 아버지 뜻이 바로 내가 지금 말로 행동으로 보이고 있잖아, 예수님 십자가 기능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이죠. 다른 하나님을 왜 찾느냐.

그러니까 거기서 그 책을 펴놓고 이 책을 누가 줬습니까? 하니까 13절에 인자 같은 분이 보좌에서 나온 거예요. 이 보좌가 UFO같아, 다 나와. 꼭 흥부전 보면 박 켜면 다 나오잖아요. 박 자르면 거기서 휴대폰 나오고 TV나오고 온갖 보물이 다 나오듯이, 아니면 놀부한테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나오듯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것은 결국 어디로 소급된다? 모든 것을 이끌어서 회오리바람 쳐서 어디로 전부 다 모은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의 취지와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22장, 생명수의 물이 흐른다. 어디서 흐른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물이 흘러서 온 천지를 적신다. 주일 낮에 에스겔 인용하면서 했잖아요. 모든 걸 적신다.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한 것은 제가 에덴동산에는 방향성이 있다 했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데 왜 인간들은 밑에서 위로 갖다 바치려고 하느냐, 자꾸 들이대고 바치고 정성 바치고, 그건 자기를 죽이는 것 이예요. 그냥 위에서 내려오는 대로 옴팍 뒤집어쓰면 구원받는데, 온천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층에 행인은 어떻습니까? 이건 옴팍 젖잖아요. 그 식으로 구원받는데, 왜 자기가 밑에서 경건의 티를 내고 왜 그러느냐 말이죠. 그건 부여받는 게 없어서 그래요. 뒤집어 쓴 게 없어서 그래요. ‘죄 용서 받으라.’고 물을 엎었는데 그게 안 오니까 자기가 뭔가 없으니까 자기가 뭔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자 같은 분이 오는데 여기서 진도 나가봅시다. 인자 같은 분이니까, 인자 같은 분을 알려면 뭐부터 알아야 돼요? 인자부터 알아야 인자 같은 분으로 되죠. 인자가 인자 같은 분의 모델이 되느냐, 그렇게 보이는데 실은 인자 같은 분이 모델이 돼서 미리 앞당겨서 인자가 온 거죠. 다니엘이 미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 겁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데 “그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UFO입니다. 비행접시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데 여기서는 번쩍번쩍하고 번개치고 불꽃이 떨어지고 책들은 펴있고 심판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안 나오고 어디서 구름타고 인자 같은 분한테 허가 맡아서 이렇게 오시더라 말이죠. 모습은 인자 같아요. 다니엘 같아요. 사람 같다 이 말이죠. 에스겔에 보면 사실 보좌 안에 인자 같은 모습이 들어있어요. 에스겔의 보좌가 이중으로 돼 있거든요. 바퀴가 이중으로 돼 있습니다. 안 쪽 바퀴 하나 있고 바깥 바퀴 있고 시계의 태엽처럼 분침 돌아가는 거 있고 시침 돌아가는 거 있고 시계는 초침까지 삼중이잖아요. 이건 이중이 돼서 있는데, 그 바퀴는 리모콘으로 안에서 지시를 해줘야 돼요. 동쪽 하면 쭉~ 가고, 서쪽 하면 서쪽으로 쭉~ 가도록 돼 있다 말이죠.

그 이야기는 그건 에스겔 이야기고, 이건 성전이 깨졌잖아요. 성전이 깨지면 와장창 다 불타고 다 깨져야 되는데 뭔가 깨지는데 구사일생으로 뭔가 홀연히 빠져나가는 그 무엇이 있어요. 그것도 동쪽으로. 뭔가 성전이 깨졌다 하는데 진짜 알맹이 성전의 비밀정보가 쏙 빠져나가서 이 파괴됨에서 면제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성신입니다. 성신이 가서 어디를 가느냐? 그발 강가에 가서 지도가 여기가 지중해고 여기가 이란이고 이라크고 여기가 터키고 시리아고 예루살렘이 여기 있거든요. 그발 강가는 현재 이라크 만 여기에 그발 강이 있어요. 성전에서 성신이 빠져나와서 어디를 가느냐 하면 여기에 들어와요.

 여기 뭐가 있다고 들어오느냐 하면 여기는 포로 잡힌 자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포로 잡힌 자들에게는 어떤 개성은 인정하지 않고 공동점이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옛날에 이곳에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다는 차원에서 참여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망한다.’는 걸 증거 하는 용도로서 구차 없이 포로 잡혀서 이쪽에 와 있는 자이거든요. 이들에게는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의 집합 이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 뜻이 아닙니다.’를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둘레에 홍해를 만들어라. 그리고 사람들보고 교회 오라 했는데 홍해가 있어서 못 오잖아요. ‘에이 씨’ 하고 돌아가더라 말이죠. 그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돌아가다 황당한 게 우리는 못 들어갔는데 저 인간들은 무슨 수로 들어갔지? 하는데 여기서 찬송소리가 들이죠. ‘우리가 건너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구나, 일부러 홍해 만들어 놓은 이유가 ‘우리는 못 합니다. 그런데 합격은 됐습니다. 우리는 실력은 없는데 이상하게 합격은 됐는데 그것은 누구 실력이다? ’주님의 어린양의 십자가 피 때문에만 여기 들어왔습니다.’ 고백할 때 이 천국은 영원히 찬송소리가 들리는 진짜배기 천국이 되는 거예요. 이건 교회가 아니고 천국이죠.

이걸 그대로 앞당겨서 왜 합니까? 이 동네가 아니고 포로 잡힌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나라에 뭐가 있다? 성전은 깨져도 성전은 영원하리라, 해서 계속 날아가서 여기 임하면서 바로 ‘이것이 거룩한 나의 성소가 된다.’고 에스겔 36장에 나오죠. 그러면 이 성신은 있지만 그 성신을 보내주는 분은 나타나지 않죠. 그건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죠. 예수님이 나타나면 예수님이 내 몸 속에서 성신을 주실 때, 예배 하는 곳은 건물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배드린다는 사실, 사마리아 여인은 알게 됩니다. 아!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그때가 이때다. 지금 예수님하고 이야기할 때 언제 우리가 제대로 예배드립니까? ‘그때가 이때다.’ 그 아줌마가 물동이 버려두고 ‘신 봤다’ 하고 갔죠. 그러니까 오실 메시아가 ‘아! 이런 식으로 오시다니.’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은 주일날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의 마지막 남은 진리를 한꺼번에 안 거예요. 이제는 남은 게 없어요. 앞부분도 없고 뒷부분도 없이 완전히 다 알아버렸어요.

예수님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세상 모든 걸 결정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과 성전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들이 그동안 회오리바람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회오리바람, 바람들이 불어왔던 거예요.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해서 존재했던 악마들이었고 귀신들이었고 이단들이었고 다 배치가 그런 식으로 된 겁니다. 그걸 미리 보여준 거죠. 여기 14절에 보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권세와 영광과 나라 하니까 여러분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어디 나오는 이야깁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슨 기도 나오죠? 주기도문 나오죠. 주기도문 마지막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말은 뭐냐, 이 땅에는 나라도 없고 영광도 없고 권세도 권세 값도 못한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이 이 세상의 권세도 아니고 영광도 영원하지도 않고 나라도 멸망될 나라인데 왜 거기에 대해서 애착을 갖고 있고 거기서 인생의 승부를 거기다 거느냐 이 말이죠. 그것이 옳다, 그르다. 실패했다, 성공했다, 라는 것조차, 논의하는 것조차 그게 참 육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홍 라희가 여자 쪽에서 제일 돈이 많고 하죠. 그런데 정 주영씨가 한 유명한 명언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돈이 많아도 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김치찌개 먹는다고, 오늘 아침에 저도 김치찌개 먹었어요. 나 재벌입니까? 정주영이는 김치찌개는 먹었는데 잠은 못 잤잖아요. 북한에 소 갖다 주려고 잠을 못 잤지만 나는 김치찌개 먹어도 된장찌개 먹어도 잠은 잘 잤거든요. 그럼 누가 갑 이예요? 이건 뭐냐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홍라희고 뭐고 이건희도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하는 거예요.

남은 연애해도 아무 소리 없는데 연애 인 돼서 연애한다고 휴가를 많이 썼다고 말이 많은데,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불쌍하죠. 붉은 안경 끼고 나오고, 우리는 안경을 쓰나 안 쓰나 터치하는 사람도 없는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소속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묻는 것은 ‘너 어느 정도 대단 하느냐, 를 묻는 게 아니고 ’소속이 어디냐‘ 이걸 묻는 거예요. 주께서 아십니다. ’소속은 주님 소속이잖아요.‘라는 말을 한다는 게 이게 보통 기적이 아니고는 못해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지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 고백 안 나옵니다. 산을 던져서 바다에 빠뜨리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 고백 안 나와요.

그야말로 아는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다 할지라도 ‘저는 예수님 것입니다.‘ 고백은 이건 어떤 희한한 재주보다 더 희한한 재주고 놀라운 기적 이예요. 이걸 가르친다고 될 일입니까? 이건 권총 가지고 협박한다고 될 일입니까? 성령 가지고 쑤셔 넣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성신이 와서 이 집단 속에 ’이 자리가 내 자리다.‘ 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집단 속에서 자기 자리를 삼기 위해서 성신부터 먼저 왔어요. 성신이 오고 난 뒤에 성신에 관련된 그 실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그런 대상화가 아니에요.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죠.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런 노래 잘 모르지만 저는 한번 들은 적 있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나요. 현빈이 나왔던 씨크릿가든이란 드라마에서. 항상 나를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너무 내 영역에 너무 침범하면 안 돼요. 그러면 뭐도 없어집니까? 내 것이 남지 않아요. 그게 싫어요. 사랑도 나를 빛내고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는 내가 있는 이상은 내 나라와 내 권세와 영광을 우리는 포기를 못합니다. 사랑, 믿음, 소망, 다 나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빛내는 사랑, 나를 빛내는 소망, 나를 빛내는 믿음, 그래서 인간은 자기 믿음을 포기 못하잖아요. 자기 믿음을 포기 못하니까 이게 불신자 아닙니까? 나 예수 믿는다고 우기잖아요. 이게 전부 자기 영광으로 돼 있다고요.

그런데 사랑은 뭐냐, 사랑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날라 와 버렸어요. 꼭 피터 팬 같아. 피터 팬이나 슈퍼맨들, 슈퍼맨 영화 보면 노는 게 이게 도로를 안 걷죠. 바지 위에 팬츠 입고 날라 다니잖아요. 이건 교통위반도 필요 없고 날라 다니니까 그냥 침범하죠. 꼭 성령 같아, 바람 같아요. 그래서 어느 가사에 보면 ‘이 거지같은 사랑, 이 바람 같은 사랑’ 그런 노래가 있어요. 잡을 수가 없어요. 내 손에 안 잡히는데 그게 사랑입니까? 그건 고문이죠. 내 손에 잡아줘야 내가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건 유명한 단편소설에 보면 왔다가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또 기다리고 한참 기다리다 이제는 안 오겠지 하면 또 찾아오고, 10년 뒤에 오고 15년 뒤에 오고.

 옛날에 우리 클 때에 그런 남자들 참 많았습니다. ‘여보 돈 벌어올게.’ 하고는 돈 버는 게 1~2개월이 아니고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몰라, 어디 가서 5년 있다가 오고, 와서는 아내가 열심히 돈 벌어놓으면 그거 가지고 가서 10년 뒤에 오고 이런 사람 많았어요. 그래도 남편구실 다 하고 남편이라 우기고 그래요. 자식 아프면 보상금 타려고 기어들어오고 그래요. 진짜 바람 같은 사랑 이예요. 우리는 그럴 때 그 여인은 한이 맺힙니다. 한이 맺히면 어떻게 하느냐, 그 남자를 잡아야 되겠죠. 인간극장 보면 어부가 있는데 어부가 울릉도로 가니까 아줌마가 울릉도까지 따라가잖아요. 따라가다 비가 와서 배가 끊어져서 못 갔지만. 보세요.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지 않고 남자한테 딱 붙어있는 겁니다. 항상 남자는 자꾸 떼려고 하는데 여자는 딱 붙어있어요. 내가 밥해주고 다 한다는 거예요. 그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이미 삼켜버렸어요. 자기 안경 안에서만 놀아야 돼요. 자기 눈동자 안에서만 놀아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아이고, 귀신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편 죽으면 왕이 죽으면 에라, 아내고 후궁이고 다 집어넣었어요. 순장 제라 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해서 보름치 음식 줘서 이집트고 중국고전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집어넣었어요. 지금도 인도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대상화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침범해서 날 완전히 잡아버렸어요. 잡아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이건 누구 제안입니까? 전혀 우리 아이디어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게 나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교인이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너희끼리만 신자 해라. 하나님도 오지도 않고 예수도 오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예수님 믿는다 해서 크리스마스트리 만들어 놓고 찬송 부르면서 예수 안에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매사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요. 왜, 덩치 큰 분이 엉덩이 가지고 깔고 앉으니 내 인생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완전히 삼킴을 당해버렸습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미쳤어? 오래 참게. 이게 인간적으로서는 그 말씀을 못 지킨다니까요. 온유하고 오래참고, 이것은 저쪽 희망 사항이지, 내 쪽 희망사항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은 돈 주고 또 돈 주고 내일도 돈 주고 모래도 돈 주고.’ 맨 날 돈! 돈! 돈! 돈만 주면 사랑 이예요. 빈 손 들고 안 오고 또 주고, 또 주고 이게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니까요. 그게 우리의 이 땅에서 통용되는 영광이요, 나라요, 그게 놀랍게도 권세 아닙니까? 주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하고 이 세 가지와 맞닥뜨렸잖아요? ‘줄게, 나한테 절만 하면 다 줄게, 사람들 다 넘어갔어. 네가 마지막이야, 너 밖에 없어, 마지막이야, 다 넘어갔어, 다윗도 넘어가서 죽었어.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다 죽은 거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만 찾고 돈만 찾는 이들에게 허락도 없이 노크도 없이 그냥 들어와서 이 거지같은 사랑, 바람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와버리면 웬 꽃 거지가 서 있다니까요. 누구십니까? 궁금해요? 이걸 이 땅에서 미리 다니엘에게 당겨서 주는 이유가 그걸 받아야 될 사람의 이름이 인자, 바로 내가 오기 전에 앞당겨서 내 것을 담아있는 모습이 인자! 그리고 오실 분은 인자 같은 이! 그래서 모델과 실체와 주인공이 항상 묵시에서는 반대가 됩니다. 역사에서는 과거가 먼저 있고 이렇게 되지만, 묵시에서는 과거란 미래를 위하여 과거가 먼저 밑에 펼쳐져야 돼요.

양탄자를 깔 때 보세요. 대종상 시상식 또는 아시아 영화제 할 때 깔잖아요. 여기 본부가 있고 계단이 있으면 빨간 양탄자를 위에서부터 깔지 않습니까? 그냥 리무진을 타고 가면 자기 집을 가는지 모르는데 양탄자를 깔고 걸어올 때 비로소 본부에 도달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 나를 유지하지만, 양탄자에 접어드는 순간 여기서부터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 허락도 없이 결국 진짜 나라는 분에게 이끌려서 나는 없어지면서 진짜 나의 나됨은 예수님 안에서의 나거든요. 이걸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소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人(인), 人(인)을 떼버리면 이건 사람이 아니무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와 붙을 때만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겁니다.

양탄자를 내리게 되면 여기서부터 시작돼서 그리스도에게 오게 되면 이미 우리가 왔던 것은 우리에게 떨어져 나가버리죠. 나의 이상, 나의 꿈, 내가 좋아하는 사랑, 내 영광과 나라 권세, 이런 것은 다 떨어져 나가죠. 떨어져 나가면서 뭐가 보이느냐, 내 속에 꿈이 있었다는 것을 떨어져 나가면서 우리는 구경이 되는 겁니다. 아! 내일쯤 돼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신문을 보면서 누가 입각하고 누가 준비위원이 됐다 하면 ‘아, 내가 그 자리인데. 내가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은 주께서 떨어내는 먼지 중에 그게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노래가 유명한 ‘먼지가 되어‘ 떼 내는 먼지, 지금 뭐가 떼 낼지 몰라요. 평생 살면서 계속 나올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맘껏 우리가 하는 욕망대로 꿈을 꾸세요. 꿈을 꾸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어요. 잠만 자도 꿈에 로또 되고 난리 났어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미 우리 내장돼 있던 겁니다. 이걸 뜯어서 보게 하므로 말미암아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 현대판 노아방주로서, 십자가 새 언약으로서 죽었다. 이런 것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그 둘을 연관을 시키는 거죠.

자 14절 보게 되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이 말은 뭣에 기준? 육의 기준이 여기서 소용이 없습니다. 너는 필리핀 사람, 나는 일본 사람, 너는 러시아 사람, 이런 육의 기준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바람 같은 사랑 와 버리면, 성령이 와 버리면 공통점이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맞습니다.‘라는 공통점. 그것만 남고 모든 나라들과 방언하는 자를 섬기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니까 결코 나는 나의 섬길 대상이 된다?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아까 그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없고 인간의 몸이 있는데 인간이 몸이 있을 때 나는 나고 저쪽은 내가 아니다. 저 사람은 내가 아닌 무엇이고, 나는 나다. 내가 아닌 무엇을 발견함으로서 나는 나다 할 때 이 간격이 생길 때 이건 대상이 됩니다. 객체가 아니고 비로소 여기서 주체가 발생합니다. 그 예를 들면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2반 동창인데 길에서 오랜만에 만났어요. 그런데 1개월 지난 뒤에 그 인간이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해서 잡지 1년 치 공짜로 보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볼 때에  ‘나는 그 잡지를 구독 안 해.‘ 라고 끊음으로서 나는 2학년 2반 동창생 맞지만 잡지를 좋아하지 않는 2학년 2반 동창으로서 새롭게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드니까 쉽죠. 어렵지 않죠. 그러면 그 동창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잡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만나고 난 뒤에는 그게 분명해 지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사람으로 주체가 형성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이끄십니다. 철학도 다 쓸데가 있죠? 철학도 이걸 알아냈어요. 철학자들이 이걸 알아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이렇게 하니까 너무 개인주의가 되잖아요. 개인주의가 되니까 윤리가, 이웃사랑이 안 되잖아요. 이걸 또 어떻게 이웃사랑으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써요. 단 방법이 뭐냐 하면 주체라 하는 것은 객체가 되는 건 맞지만 그 객체가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헐벗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또 레비나스가 걸어서 이야기해서 ‘주체를 너에게서 찾지 말고 헐벗은 사람,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하자.‘ 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여기다 갖다 대면서 해요. 해봐야 결국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남는 것은 나의 영광과 이거만 남죠. 여기 예수님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어요. 십자가를 이웃사랑이라고 이렇게 변질시켜서 적용했기 때문에 진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라는, 뭐가 죕니까? 죄라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14절을 가지고서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죄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게 돼 있어요. 그냥 이런 나라가 생긴다는 그것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15절 봅시다.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또 여기 뇌 속에 이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보니까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이건 지난 시간에 했죠?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요점을 이야기하고 강의 마치겠습니다. 네 짐승은 네 왕이라, 그 다음에 세상에 일어날 것이라.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있고 왕이 생긴 겁니까? 아니면 이 말씀이 먼저 있고 세상이 나중에 만들어진 겁니까? 말씀이 먼저 있고 세상이 그대로 만들어지게 돼 있어요. 그걸 내가 설명해드릴게요.

왜 그렇게 되는가? 그건 우리의 상식과 다른데 왜 그런가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나의 과거가 먼저 있을 때 비로소 역사가 의미 있게 나에게 구성되게 돼 있어요. 여기 역사라 하는 것은 나의 역사도 될 수 있지만, 여기서 역사는 집단의 역사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란 우리 아는 사람끼리, 우리 가족끼리, 우리 민족끼리. 민족과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에 있던 기억이 역사를 다시 구성하게 돼요. 역사 재구성이라 하고 어떤 철학자는 역사 재생산이라 하는데, 이걸 영향을 준다 해서 영향사라 해서 가다모란 사람이 이야기를 했어요. 가다모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체는 인간의 주체를 주관하는 진리는 없고 역사가 우리에게 영향을 입힌 것이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나는 내 것이라고는 아예 없고 전부 다 이리저리 내 앞에 짜깁기 하고 모든 주위 들은 풍월, 또 울고불고 하는 것도 다 씨스타가 노래 부는 것이고 먼지가 되어도 김광석이 노래 부른 것이고, 한 발짝 다가서면도 드라마 ost고  전부 다 들었던 것이 여기 들어있다 이 말이죠.

역사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의 동의하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의미라고 본 거예요. 동의하는 게 역사다. 그런데 이게 왜 새삼스러우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분명히 실체가 있고, 우리는 역사를 따라 간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여기 실체 있어요? 없어요? 실체는 없고 내가 역사라고 그냥 인정하면 그게 역사가 되고 인정 안 하면 나의 역사가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 미국 이민 간다. 나는 미국이 좋아, 이러면 자연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독도는 누구 땅이든 관심 없어요. 미국 알래스카가 일본 땅 안 되면 괜찮아요. 하와이가 일본 땅 안 되면 괜찮아요. 인간은 자기 역사라 하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은 이야기했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 있고 우리는 따라가는 게 아니고. 역사는 내가 만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세상 일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말라 이 말이거든요. 네가 만들어놓고 네가 왜 우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슬프다, 그러면 좋은 쪽으로 새로 역사를 만들면 슬픈 것도 뭐할 수 있다? 웃을 수 있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가다모의 주장에 따르면 포도주가 병에 반병 담겨 있으면 ‘오, 포도주가 없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반병이나 남았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이건 역사에 대해서 기피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대해서 좌절해서 자살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지 말고 그걸 포용하면, 거기서 새로운 질의 성전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것이 위대한 인간의 실존적인 능력이라는 거예요. 돌멩이 의자 이런 건 못하고 실존적으로 자기가 자기의 의미가 돼 주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의 창조력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거 기업 경영의 산교육에 멋지지 않습니까? 과거는 잊어버려라. 잊고 지금 내가 있다면 내가 스스로 새로 만들면 되잖아. 오늘 아침에 내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면 되지, 아휴, 과거에 계약을 못 따서 실수했어.‘ 자꾸 지나간 과거 들먹여서 무슨 도움이 됩니까? 항상 오늘은 오늘의 역사를 새로 쓰고, 그 주인공은 바로 내가 오늘 새로 시작하면 되니까. 오늘의 해는 오늘 뜨고 내일의 해는 또 내일 뜨고, 날마다 전~진, 전~진 해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새로 하는 거야~‘ 해서 매일 새로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진정한 실존적인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돼지나 소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가다모의 주장입니다.

어떻게 비슷하죠? 짐승이 있다. 짐승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짐승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내시는 분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쥐고 있는 분이예요. 인자 같은 분을 위하여 필히 짐승은 짐승의 역사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보면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네 마리 짐승을 이렇게 벤허에 나오는 마차처럼 고리를 만들어요. ‘물어, 물어’ 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네 짐승을 연단해서 쟁기로 밭 갈 듯이 ‘갈아, 갈아’ 물어, 물어‘ 해서 죽~ 갈아서 결국은 역사를 끝내버린다 이 말이죠. 그중에 우리도 포함돼서 이러고 있지만.

 다니엘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봤다는 것은, 그걸 자기가 본 게 아니고 자기 꿈에, 자기가 본 것 같으면 ‘나 이렇게 살련다.’ 영웅이겠지만 이게 자기가 본 게 아니고 자기에게 보여 진 거죠. 다니엘이 좋은 점은 우리보다 미리 봤다는 것 뿐 이예요. 다니엘이 봤다고 해서 그 역사가 취소되는 것도, 안 봤다고 해서 취소되는 건 아니고, 그냥 애초부터 예수님 나타날 것을 생각해 보면 반드시 이런 코스를 밟게 돼 있는데 다니엘은 꿈속에서 그걸 잠간 커닝했다. 잠시 그걸 미리 보고 우리는 책으로 지금 다 보고 있고, 그걸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네 짐승은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제일 먼저 바벨론이었고 그 다음에 메대 바사(페르샤)였고 그 다음에 헬라-마케도니아 헬라였고, 그 다음에 네 번째가 로마였고, 그거로서 짐승을 가지고 세상을 한다. 하필 로마로 끝나느냐, 로마가 되면 세상이 종말이 돼 버립니다. ‘에이, 아직도 로마 끝나도 종말은 아니잖아.’ 천만의 말씀, 질적으로 더 이상 새로운 구원의 방주는 없습니다. 새로운 질의 역사는 없어요.

예수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 끝!! 그거로 끝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종말인데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모르느냐, 그걸로 우리 운명이 결정되니, 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서 깨닫게 해 주신 은혜인줄 압니다. 땅엣 것을 늘 쳐다보며  살아가는 이 가련한 우리,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니 이 축복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