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8장(70이레 논문서론)130117-12강b -이 근호 목사
제 11강b
다니엘 7장 8장 9장을 하면서 여기 나오는 대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나라와 그리고 그 나라에 어떤 소속이 되는 것과 병행해서 세상의 나라, 이 나라를 나라라 하지 않고 그냥 짐승, 또는 염소, 양이라 할 때, 그러면 짐승이니까 사람도 아니죠. 지극히 높으신 나라를 도전하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 그건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않습니다. 자기 딴아 는 멋있는 나라죠. 헬라가 어떻고 로마가 어떻고 하는데, 여기 7장 20절부터 보면 열 뿔 나오잖아요. 열 뿔은 지난 시간에 했죠? 로마의 열 족속 했잖아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냥 짐승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를 어떤 집단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개인으로 보는 게 아니고, 어떤 집단, 그냥 집단이 아니고 성도를 공격하는 집단, 성도도 개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성도는 지극히 높으신 인자한테 소속된 이쪽 하나 한 덩어리, 그리고 그 덩어리를 공격하는 저쪽은 나라가 아무리 뒤바뀌어도 그쪽도 한 덩어리, 아시겠어요?
이런 성경적인 안목은 우리 현대인이 개인을 생각하는 그런 안목은 용납을 안 합니다. 한 아담이 죄 지어서 죽었고 죄가 온 세상에 퍼졌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의인이 되어서 그 예수님에 속한 사람은 사적인, 개인적인 행동과 관계없이 전혀 관계없이 의인돼 버리고, 믿으면 너무 고마운데 이게 안 믿어지면 이건 미치는 거예요. 왜, 대책이 없는 거예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항상 ‘그럼 나는 어떻게 행동해?’ 맨날 자기 이야기와 자기 행동 이야기예요. 성경은 너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떤 집단, 양쪽 집단인데 ‘목사님, 저는 어떻게 신앙생활, 헌금생활 어떻게, 교회 어떻게?’ 맨날 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 말이죠. 다니엘부터 이미 인자가 등장하면 그러한 식의 논리구조는 이미 물 건너 간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쓸데없는 거 끄집어 내지 마세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책(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에 대해서 시작하는 거예요. 이 7장 8장 9장까지 다 커버합니다. 커버하면서 이 책에 [한글초록]부터 하겠습니다. 이게 언제까지 끝날지 모르겠어요. 이걸 언젠가 해야 되겠다 해서 하는데 여기 보세요.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말씀에 오류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정통 신학과 해석방법은 그렇다 이 말이죠. 이게 엉터리다 이 말이죠. 다시 할게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정통신학이 한 게 아니고 성경도 물론 오류가 없지만 그 오류 없는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에게도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고 신앙을 전개하는 게 내가 보기에는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뭐를 건드리겠다? 이 주체를 건드리겠다는 말 이예요. 이 주체에서 오류가 없는 게 아니고, 오류만 나와요. 이걸 시작하지 않으면 70이레 해석이 안 돼요. 이게 만약에 해결이 안 되면 70이레를 490년으로 해석해 버려요. 7X70=490, 70이레를 볼 줄 몰라서 490일로 계산해서 맨날 시간계산해요. 자, 이스라엘이 언제 망했다? 490년 뒤에 메시아가 오신다. 예수님 오시면 안 맞네. 늘일까, 줄이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세대주의자들, 세대주의에서 발생된 여호와증인, 모든 개혁주의 신학부터 모든 이단들은 날짜 계산하는 거예요. 기껏 그러한 안목이고 그러한 오류가 있더라고요. 그거 자체가 오류인데, 왜, 인간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 행함으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십자가 죽는 자기 행함으로 우리를 건져내잖아요. 그 말은 우리한테 오류가 있다는 뜻 이예요. 그런데 정통신학은 오류가 없다고 여기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 넘어갑시다.
그래서 중간에 보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한 거죠. 그 위에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게 어떻게 진리가 나오겠나? 자기는 바르다고 생각한 이상은 절대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없다는 거죠. 항상 나는 오류가 있고 오류 정도가 아니고 반대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라는 이야기가 한글초록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교수들이 기분 나쁘고 인상 찌푸릴 수밖에 없죠.
서론 부분 봅시다.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이게 뭐냐, 역사적 해석이 나왔어요. 역사적 해석의 특징은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연속된다는 것,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연속된다는 말은 지난 것도 버릴 게 없다는 거, 다 차곡차곡 모아놔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요번 수련회 때 에스라, 느헤미야를 냉동동결 시킨다 했죠? 동태 있잖아요. 동태처럼 만들어버려요. 역사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려요. 얼음으로 만들면 400년 동안 얼은 채 있다가 누가 녹여주는가? 요단강에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와서 역사의 실체를 녹여주십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걸 모르죠. 인수인계 받아서 그걸로 주물럭거리면서 오는 메시야를 왕으로 모시겠다는 시도를 했는데, 그게 돈 주고, 권력 주고 이런 식으로 정치판으로 나라를 악마의 나라로 변하죠. 그러면서도 그들은 악마인 줄 모르죠. 왜, 여호와와 율법을 사수한다고 순교까지 해온 나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부심이 대~단 합니다. 지금도 메시아 예루살렘에 온다고 예루살렘 가꾸기 바쁘고 언젠가는 예루살렘을 우리 손으로 잡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원자폭탄이 예루살렘에 10개도 넘는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회복하기 위해서 무슨 수를 다 쓰는 거예요. 회복해 줘야 메시야가 오니까, 다윗 자손이 그 위에 서니까. 감람산에 온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성전이 예루살렘 구역이 피자처럼 4개로 나눠져 있어요. 한 파트가 유대인 파트예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올라가는 그 길에는 이스라엘 파트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파트에 상인들이 십자가를 파는 거예요. 장사 되니까. 예수님은 비둘기파는 사람과 동전 바꾸는 장사들을 다 쫓아버렸을 거예요. 종교고 뭐고 없어요. 돈이 최곱니다. 요번 수련회 때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역사적 해석을 고집한다 할 때 역사적 해석을 하게 된 이유가 역사적 해석을 하게 되면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시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왜, 차라리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지면 되니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가잖아요. 현재 지금은 어떠냐 하는 것은 과거 일어난 일 가지고 이렇게 누적을 시키면 현재가 되니까. 여기 뭐 회개할 필요도 없고 여기 뭐 따질 필요도 없고 그런 거죠. 제가 유대나라 이야기, 예수님 십자가 못 박아 죽인 유대나라 이야기한 이유가 그들이 역사적 해석을 계속해서 고집을 한 겁니다. 그래서 고집한 그들이 예수님께 뭐라 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했죠.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었다.’
이건 뭐를 의미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현재 인간은 결코 과거에 없었다.’가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역사적 실존이면서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멀리 본 조상 있기 전에 누가 있었다? 예수님이 내가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이걸 지금 그 당시 유대인 보고도 믿으라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보고도 이걸 믿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너 죽어도 내 안에서 죽는 게 아니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행복이고 그게 합격이라면, 죽는 것부터 안 무섭다면 이 세상에 우리한테 뭐가 없어야 돼요? 공포, 불안, 없어야 마땅하지 아니옵나이까? 그렇죠? ‘이순신 장군보다 먼저 박근혜가 있었다.‘ 이렇게 나와 보세요. 박 근혜 믿는 사람들은 불안감이 없어요.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답게 누가 개입해요? 예수님이 개입해서 할 때 그 개입하는 방법이 뭐냐, 돈 벌어주고 이런 게 아니고 말씀으로 해주는 거예요. ‘너보다 내가 먼저 있었다.’ 나다나엘이 기도하고 있으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나다나엘아 니가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벗어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주님한테 들키기만 하면서 사는 행복만 있으면 돼요. 들키는 행복! 사람은 숨기면 불안해요. 누구한테 들킬까봐. 우리는 탁 털어놓고 삽시다. 사람한테 할 필요 없고 기도,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주님 저 이런 인간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가 될 자격 없습니다. 나는 기존의 눈에 보이는 역사적 여기에 몰 빵 했습니다. 이런 인간을 주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구원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특이해요. 불의한 청지기, 탕자, 세리, 창녀, 이 뭐예요? 강도, 놀아도 왜 그렇게, 막달라 마리아, 소문 나쁜 여자, 백부장.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중이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이 구원하는 의중이 도대체 뭡니까? 네가 내 옆에 있는 자리에 있으려면 너는 내 앞에서 꼬라지 하고는 내놓을 게 없는 꼬라지 자리에 나는 개입해서 네 아무것도 아닌 꼬라지라도 너를 데리고 오겠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시간적 세상인 이 세상이 좋을 것 같으면 우리 꼬라지는 숨기는 게 땡 이예요. 숨겨야 돼요. 드러내면 사람 취급 안 해줍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는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우리 뜻은 항상 멋있고 잘난 존재로서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주 수그리, 그냥 너는 꿇어야지, 너는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잘난 체 하지만 너는 내 옆에서는 그냥 죄인일 뿐 이예요. 고마운 것을 온 몸으로 우리가 인지하도록 하는 그 축복,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 축복, 그럴 때 마귀는 언제 떠나는지 빠져나가고 있어요. 귀신이 열댓 명 있다가 딴 데 가고 없어요. 마귀가 우리의 불안을 조장합니다. 자꾸 쓸데없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런 일이 많은데 끝장내는 분이 안 와도 괜히 한번 시비 걸다가 주께서 십자가 진 것 알고 보면 벌써 지가 알아서 가버렸어요. 저만치 가서 또 들어오려고 포진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나라 주변 나라가 언젠가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해석, 이거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걸(70이레 비역사적 해석) 개혁주의 신학 학회에서 내가 발표했습니다. 역사적 해석 이거 강의하고 있는데 여기 어떤 김 영한 아저씨가 ‘성경은 역사적 해석을 하는 거야.’ 내가 이야기하니까 고함치고 있어요. 만약에 첫 번째이니까 가만히 있었지, 두 번째 같으면 ‘아저씨, 내 이야기 할 차례야. 내 이야기 할 시간이야.’ 첫 번째니까 시간이 아까워서 가만히 있었죠.
[전통적으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사람은 유대 공동체를 남은 자로 인정해 줘요.] 이게 남은 자가 아니고 이게 마귀집단입니다. 그러면 남은 자가 없느냐? 있어요. 있는데 역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등장하지 않는가. 이번 수련회 때 했어요. 여기 역사 속에 뭐를 심어놨어요? 두자인데, 거울! 노래 불렀잖아요. ‘거울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얄미운 사람’ 거울만 심어놓고 떠나간 사람, 거울만 심어놓다 보니까 인간들은 역사를 만들 때 뭘 비춥니까? 자기 얼굴을 투영해놓고 그걸 되비춰서 역사를 만들어버렸어요. 막상 거울을 심어놓은 그분은 역사 뒤에 사라져버렸어요. 역사를 아무리 해석을 해도 역사를 만드신 분의 동기가 뭡니까? 안 들키게 돼 있습니다. 숨어있게 돼 있어요.
14대, 14대, 14대에서 마태복음 마지막 14대는 점선 이예요. 어느 역사책에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불쑥 청춘남녀 연애하는 게 튀어나와요. 남자 이름은 요셉이고, 여자 이름은 구미공단 여공 마리아고, 그냥 보통 특별하지 않는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 이예요. 일반적 인물이 둘이 만나는데 둘이 만나서 사랑을 나누려고 한 순간 누가 개입이 되죠? 하나님이 개입을 하죠. 인자, 성령이 개입을 해서 둘을 떼놔 버립니다. 떼놓고 그 절단면에다 아기 예수님을 여기다 집어넣어버립니다. 역사가 14대, 14대, 14대로 역사가 땡! 끝났습니다. 더 이상 역사는 없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질 때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요한은 말합니다. ‘이미 하늘나라가 와버렸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와버렸다. 바리새인들이 오니까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무슨 표현을 쓰느냐 하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도 구원받으려고 왔느냐” 졸지에 조사하러 왔다가 마귀새끼 돼 버렸죠. “너희들이 임박할 진노를 피하러 왔느냐” 피할 수 있느냐, 이런 뜻이죠.
자, 이때 세례요한의 역사관은 뭡니까?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역사의 진척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걸 세례요한은 확신했기 때문에 옥에 갇혔을 때에 예수님께 ‘당신이 오실 자 맞습니까?“ 라고 질문한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 시대에 역사가 끝날 줄 알았어요. 끝났는데 예수님께서 또 아직도 낌새를 보이니까 더 남은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메시아 맞아요?’ 라고 물은 겁니다. 세례요한은 아직도 순차적인 그것이 남아서 아직도 역사가 흘러가서 유지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지적하는 분이라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역사가 2012, 2013 바뀌어도 전부 다 하루 안에 들어있고, 천년 안에 들어 있다는 그러한 새로운 질의 역사는 그 안에 그 역사는 사람의 힘에 지탱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이미 주님 손에서 놀아난다면 그 역사는 의미 없습니다. 주님의 묵시만 의미 있고, 없고의 보조역할로의 시간 지연이죠. 그래서 그걸 숫자로 표시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숫자도 1 집어넣어도 괜찮고 1000 집어넣어도 30을 집어넣어도 50을 집어넣어도 괜찮고 아무 내용에서는 달라질 게 없는 거예요. 숫자를 뭘 집어넣어도 되는 그러한 시기, 그만큼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은 이제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왜, 성령은 하늘이 찢어져서 위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두 자로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를 아는 거죠. 역사라는 게 이제는 이거는 하나의 종이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애가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립니다. 초가집 그리고 나무 그리고 산 그리고 해 그렸습니다. 자, 해가 어디 있습니까? 요 사각형 도화지 밖을 벗어납니까? 안 벗어나죠. 미술시간 딩딩딩~ 끝났습니다. 애가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종이를 구겨버렸습니다. 자, 해 어디 있습니까? 초가집 어디 있어요? 종이 안에 그려져 있죠. 요게 바로 역사입니다. 여기 하나 2013년도 여기 들어있어요. 구겨진 역사! 이해되시죠? 요건 이해 되는데 요 초가집 옆에 개집에 개가 있어요. 여기 주인 양반도 있는데, 주인 양반이 61살, 요거 역사 구겨질 때 같이 구겨집니다. 의미 없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 67세, 여기서 당구 치고 있는데 이거 구겨버리면 인간은 안개예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손을 펴놓으면 길어 보이죠? 생명선이 어떻고, 아이고, 이거 이혼하겠네. 요 손을 접으면 있기 없기,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마치 없는 것 같사오니, 아 참, 성경에서요 인간은 분명히 있다고 여기고 오늘도 고생을 얼마나 합니까? 그러나 있는 것 같지만 없사오니. 시39: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그걸 보면 수원에서 중국인에게 살해당한 여자, 그 사람 부모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사람들은 벌준다고 무기징역 했는데 저들 가족은 뭘 원합니까? 사형을 원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살아보면 살아있다는 점에서 니나 내나 죄 진 놈이나 똑같이 됐으니까, 이게 분통이 터지는 거죠.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공개적으로 죄를 져서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가면서 교도소에서 따뜻한 밥 먹어가면서 이렇게 무기징역 사는 그거하고 어느 춘천의 수련회에 자기애를 수련회 보냈는데 수련장이 불이 나서 2층에서 화재 나서 죽었을 때 그 애는 무슨 죄로 죽은 겁니까?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죄예요. 그 죽은 애 중에 부모 하나가 우리나라 핸드볼 여자 대표 팀인데 그 여자는 미국 이민 갔어요. 한국 훈장 반납하고 이민 갔잖아요. 그러면 수원에 있던 아가씨 부모는 돈이 없어 안 가지 이 꼴 보기 싫은 나라, 갈 거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그동안 한국을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조건하에 그렇습니까? 나는 없었을 때가 없다는 것, 나는 항상 있었고 앞으로 항상 있을 것이라는 이 오류, 이 착각, 그 착각 속에 뭔가 얻을 게 있다 싶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없을 때가 없고 앞으로도 내가 없을 경우가 없다고 여기는 그 착각, 독사의 새끼들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쓰시기 나름입니다. 쓰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피조물 자체를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소리 교회 가서 하면 교인들 다 떠나가 버립니다.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어떤 교회는 복음을 전했더니만 70명 나가버렸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위험한 공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여, 저 모릅니까?’ 이런 식으로 물어야지, 내가 이거 배워서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성경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서론 부분에 역사적 해석이라는 게 얼마나 마귀 단을 옹호해주는 해석이라는 거예요. 210페이지 중간에 보면(하도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뜁니다. 안 뛰려 하다가 도저히 ) [이러한 안목은 아예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하신 예수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한다.] 공동체 죽음, 아까 했죠. 개인을 보지 않고 공동체. ‘저 사람보다 너는 괜찮다. 나쁘다.’ 이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죽음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자손 가지고 주께서 시비거십니다. ‘니들에게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니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너희들은 어디서 쫓겨난다 했습니까? 천국에서 쫓겨난다. 야~ 이거요. 서럽습니다. 아예 안 가보고 못 가는 것은 덜 섭섭한데, 천국 간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안 넣어준다는데요. 집사님, 계에서 다 된다 해놓고 안 된다 할 때 섭섭하죠? 자기는 누가 뭐래도 된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파혼 당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감히 예수가 뭔데 우리를 이렇게 내치느냐 이 말이죠. 주님께서 ‘너희들 살아있을 때 많이 그렇게 마귀 짓 많이 해라. 다음에는 너는 끝이야.’ 그래서 복음 외친다고 핍박하거든 그렇게 하면 돼요. ‘네가 아직까지 어디가 살지는 모르지만 살아있을 때 많이 핍박해라. 죽으면 너는 지옥 간다.’ 안 믿는 남편이 구박해도 할 수 없어요. 거기 가야 될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를 뭐라 하시느냐,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라. 그럼 말만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라 하면 안 되겠죠? 이유가 있어야 돼요. 요따위 식으로 했기 때문에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그들에게만 적용시키지 말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시켜 봅시다. 아하, 포도원에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아침 10시에 온 사람은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까? 세상에 1시간 전에 온 5시에 온 사람을 얼마나 놀렸겠어요? ‘에이, 한 것도 없이 1시간만 일하고. 에이, 염치 좀 있어라. 그렇죠? 주님.’ 하고 자기는 10시에 왔다고 자랑하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뒤집어버리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반전! 천국에 반전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주는 반전이 있습니다. 강도가 세상에 천국 가고 착하디 착한 최고의 착한 바리새인이 지옥 가는 이 반전! 이거만 알면 이렇게 기도해야 돼요. 주님께서 네 오른 눈을 빼버린다. 오른 팔을 자른다 할 때 우리 이렇게 해야 됩니다. ‘주여, 오른 눈 빼버리세요. 오른 팔 잘라버리세요. 주님만 좋다면 저도 좋아요.’ 이 기도, 해야 됩니다.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주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주님이 자른다면 그것도 하나의 주께서 해주는 맛사지로 여기잖아요. 맛사지치고는 아프겠지만. 주님께서는 액세서리, 주님께서 다듬어주시는 장식품 ‘너 눈 하나 빼니까 왜 그리 예쁜지.’ ‘주께서 예쁘다면 눈 하나 빼주세요.‘ 하는 거. 얼마나 사랑했으면, 주님의 손에서 주님의 품안에서 놀아나는 게 얼마나 행복했으면 그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런 기도 하는 사람 있어요. 우리 교회 녹음시설 설치한 그 선교사님, 아직 살아계십니다. 벌써 6년째예요. 죽는다 해놓고 아직도 6년째 살아계십니다.
성경을 우리가 안 믿고 보니까 편하죠? 진짜 믿고 보면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살면 이 세상에 눈이 와도 축복이고 눈 와서 미끄러져서 정형외과 가서 깁스해도 전부 다 복 이예요. 우리는 그 귀한 복을 우리의 군화발로 지금 짓이기고 살았어요. 내 원, 내 뜻을 안 달성해준다고, 주신 은혜를 완전히 짓밟고 그냥 밟은 것이 아니고 꽝꽝 밟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고. 진작 지옥가야 될 사람은 우리 자신들 이예요. 바로 그런 인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해요. 십자가만 달랑, 달랑 십자가예요. 십자가만 보여줘요. ‘우리 뜻 해결해 줄게.’ 이런 건 안 나타나요. 그냥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빛 앞에서 우리가 눈 봉사돼도 괜찮아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가 봉사돼도 괜찮고 팔 하나 잘라져도 괜찮다고 보인다면 고 십자가 보는 밝은 빛을 본 눈으로 그대로 주변에 있는 나를 봅시다. 두자로 뭐로 보입니까? 짐승으로 보이죠. 비로소 짐승으로 보입니다. 비로소 다니엘이 보이는 거예요. 아! 다니엘이 이런 안목으로 당시에 세상을 짐승으로 바라봤구나. 자기한테 공무원 취직시켜 주고 보너스까지 주는 그 나라를 무슨 나라? 짐승으로 본 거예요.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봉사하겠다고 서약한 그 사람이 짐승을 본 거예요.
이렇게 십자가를 똑바로 보고 사니까, 세상에 겁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누굴 만나도 겁나지 않아요. 왜, 짐승이니까. 자기하고 똑같은 죄인이니까. 똑같이 장독대에 이만큼 죄라는 눈을 뒤집어쓰고 나타났으니까. ‘오~ 반갑다. 친구야, 어, 64센티미터.’ ‘너 방금 뭐 봤니?’ ‘죄가 64센티미터 쌓였다고. 나도 이만큼 쌓였고.’ 저주의 죄를 뒤집어쓰고 보면서 악수를 나눌 수 있으면, 그 상대방에게 겁을 낼 이유가 없죠.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겁을 안 낸 이유가 그가 짐승이기 때문에 그렇고, 다니엘 세 친구가 겁 안 냈던 이유가 짐승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짐승이 가라 하는 것은 짐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라 하기 때문에 가면 누구 만나겠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그냥 가는 거죠.
그 다음에 또 넘어 갑시다. 역사적 해석법 이야기했고, 공동체 죽음 이야기했고, 또 짐승 이야기했죠. 암흑에 그렇게 잡혀갑니다. 그 다음에 211페이지 보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땅인데, 역사적 해석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땅은 뭣을 생산하느냐, 역사를 생산한다고 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땅은 묵시를 생산한다고 보는 거예요. 또 의미가 또 다릅니다. 땅에는 성령께서 나중에 임하실 땅으로 보고, 세상 사람들은 성령이고 나발이고 없고, 오랜 우리의 역사, 우리의 선배들이 일궈낸 문명이 거기에 먼저 자리 잡고, 후손들에게 찬란한 유산을 남겨주는 거죠. 유홍준이죠. 찬란한 문화유산 답사기. 그런 안목.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그걸 내가 인간의 한계라 하지 않고 인간의 지평이라 했죠. 지평선 너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왜 다가가면 지평선이 물러가니까. 마치 밤하늘에 달을 잡는 것처럼, 달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 역사에 극한을 보여주는 게 뭐냐 천문학입니다.
천문학, 빅뱅이 되면서 수소 분자는 불타오르면서 무거운 산소, 탄소, 철이라는 무거운 분자로 다시 뭉쳐지고 태초에 중력이 있었느니라. 중력에 의해서 피자 판처럼 납작하게 총체적 별이 되면서 그 별이 폭파하게 되면 다시 별들이 흩어지고 초신성이 되고 초신성이 돌다가 뭉치면 은하가 되고, 은하가 뭉치면 성단이 되고 그 성단 속에 또 태양이 있고 또 지구가 있고 나중에 태양계 거기서 적색 거성이 되고 폭발해 버리면 백색 외성이 되고 나중에 그게 소멸돼 버리면 블랙홀이 되고, 그 블랙홀에서 다시 흩어지면 주변에 있는 중력에 의해서, 중력 중에 중력이 블랙홀이거든요. 또 당겨버리면 나중에 그것이 은하가 또 되고, 또 초신성이 되고, 그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역사의 첨단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뭐냐, 147억 광년, 빅뱅이 일어난 지 147억 광년, 지구가 탄생한 것은 45억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달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처음에는 지구도 없었고 달도 없었는데 어떤 두 개가 서로 우연히 마주쳐서 크게 되면서 튕겨져 나간 것은 달이고, 큰 뭉치는 지구고, 그래서 달은 이상하게 지구에서 떠나지 않고 지금도 조석간만의 차를 유발하면서 같이 간다. 설명을 역사적으로.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제가 방금 한 역사는 인류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죠. 크로마뇽인, 그 전부터 계속 더 가는 거예요. 시생대, 고생대, 더, 더, 더, 더 가면 결국은 천문학으로, 물리학으로 끝맺죠.
그러면 거기서 인생이란 뭡니까? 우연의 산물이죠. 우연의 산물이니까 뭐해도 괜찮아요? 자살해도 괜찮아요. 왜, 물질로 된 인간이 자살하면 도로 어디로 갑니까? 그냥 물질로 윤회하잖아요. 이게 윤회설이 불교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과학도 무슨 설입니까? 윤회설 이예요.
바로 여기에 오류 있는 인간의 극한점 이예요. 이런 오류가 있기에 이런 인간들 앞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아무 의미 없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죠. 인간의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역사를 길게 잡아당기면 그게 다 해체돼 버립니다. 무슨 별나라에 윤리 도덕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윤리 도덕은 요 코앞에 있는 공동체를 위한 윤리 도덕일 뿐이지, 공동체 깨져 버리면 또 다른 동네에 가면 다른 동네에 또 관습과 윤리 도덕이 있어요. 아직도 인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답니다.
그러니 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땅을 왜 만드셨나, 땅은 그냥 무의미하게 해 뜨고 지고 이게 아니고, 장차 이 땅에 누가 서신다? 메시아가 서실 땅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그냥 선 게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으로 서기 때문에 땅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일만한 그러한 죄의 영향력이 숙성됨으로 무르익어야 돼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인간이 먼저입니까? 죄가 먼저입니까? 죄가 먼저죠. 죄를 짓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기침한다고 제가 거짓말 하는 게 아닙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어야 했어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선악과를 아~주 먹음직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아니 독약 같으면 해골 마크해서 한곳에 치워놓고 철조망으로 칭칭 감아놔야 사랑의 하나님이지, 이건 먹지 마라 하는데 약 오르는 것이 세상에 먹음직도 보암직도 탐스럽게 만들어 놓고 그것도 철조망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고, 천사가 지키려면 생명나무 지키지 말고 처음부터 선악과를 지켜야 하지, 생각해 보세요. 따먹고 난 뒤에 뒤늦게 생명나무 지키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천사들을 선악과, 원인을 제공하는 그거부터 칭칭 감아야 될 게 아닙니까?
왜 죄를 지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위주로 역사는 재편성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위주로. 그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몸만 가지고 있다고 다 이룬 게 아니고 십자가 죽으셔야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죄가 우리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가를 평생 살아가면서 만끽해 보는 겁니다. 재래시장 가 보세요. 여름에 가게 되면 재래시장 식당 있잖아요. 냄새가 있어요. 이집 냄새, 이집 냄새, 그 냄새를 죽 맡아보는 겁니다. 대형마트에 가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요런 냄새, 조런 냄새, 죄 지은 냄새, 자기는 못 지었는데 능력이 못 돼서 못 지었는데 남이 지은 죄 같은 거, 비자금 챙긴 거, 우리 서민들은 기회도 안 되고 대신해서 져주니까 보면 되고, 사람 죽이는 것도 우린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성폭행 하고….
제가 수련회 때 마지막 강의 했잖아요. 성경 고린도전서 보니까 “술에 취한 자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 했거든요. 그걸 인용하면서 제가 이랬잖아요. 저는 예수 믿고 나서 술 먹은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에이, 술 취한 놈 다 지옥 가거라. 왜, 나는 안 먹었으니까. 요게 바로 내가 술 취한 인간이라. 지 정신, 우리 중에서 술 안 먹은 채로 간다는 것을 주께서는 밀어내기 위해서 그 말씀 한 거예요. 어떤 인간도 자기 행함으로 하늘나라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살인도 마찬가지고 도둑질도 마찬가지고 간음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남이 해도 내가 한 게 돼요. 왜, 그 인간도 아담 안에서, 나도 같은 조상 밑에 태어났기 때문에 똑같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저주지 아니하면,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을 정도로 너는 딴 데를 쳐다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게 네 본래의 성질이다 이 말입니다. 딴 데 보는 인간의 고개를 휙 모가지 꺾어서 복음 듣게 하는 것은 이게 바로 성령의 역사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돌아서면 또 모가지 돌아갑니다. 희한해요. 우리는 돌아서면 십자가 잊어버리고 또 세상으로 모가지 돌아갑니다. 거기서 잘 나 보이려고, 완전히 오멘, 엑소시스트 영화에서 침대 위에서 소녀가 목이 돌아간 것처럼, 마귀로. 그걸 볼 때 무서웠거든요. 지금은 그 엑소시스트 영화 하나도 안 무서워요. 난 박OO가 더 무서워. 그건 마귀가 마귀를 감추기 위해서 대체 마귀로 내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감독이 더 무서운 거예요.
누가 나를 잘났다 하고, 훌륭하다 할 때 그게 마귀예요. 이제 마귀 감별법 됐습니다. 여러분. ‘당신은 그리스도 앞에 죄인 아니고 저렇게 훌륭하기 때문에 당신은 구원받아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그게 마귀의 속삭임이고, ‘니는 인간도 아니고 니는 지저분해.’라고 잔소리해주는 마누라가 얼마나 고마운 천사인지 몰라요.
땅은 역사적 산물로 그냥 유구하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해석이지만 땅은 원래 누가 오신다? 메시아가 오신다. 오셔서 그냥 오시는 게 아니고 십자가 죽으시기 위해서 준비돼야 될 피조세계, 그런데 누가 오죠? 땅에 오시는 분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잡아먹죠. 그 타이밍이 예수님 오신 당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유대나라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돼야 돼요. 역사는 동결! 동태가 돼야 돼요. 스톱 되고 올라와야 됩니다. 빨리 올라 와, 올라 와. 기어 올라온다고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으로 인자! 인자가 뭐냐, 왜 사람의 아들이냐, 사람일 수가 없는 분인데 사람이 되었다는 뜻 이예요. 사람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데 사람의 아들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뭡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이 못 알아보는 사람, 분명히 사람 이예요. 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떠벌이지만 그 뜻은 결코 나는 너희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외치는 분, 이것을 저는 수련회 할 때, 보통 거울에는 자기 얼굴을 되비치거든요. 아까 강의한 것처럼 역사는 뭐가 담겨있습니까? 역사는 거울만 있다 했죠. 거울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했죠? 거울만 남겨 놓고, 인간들은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기 잘난 척하면서 역사를 만들다 이 말이죠. 자기 잘난 척하는 역사, 죄 밖에 없는 역사 속에 이 겨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얼굴이 비춰지는 분이 오신다면, 그분이 바로 사람이 아니면서도 사람으로 와야 될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와야 될 인자입니다.
예수님 얼굴 사진 찍어놨다가 그 찾아본다고 인자가 아닙니다. 어릴 때 예수님께서 부모님과 유월절 행사에 갔어요. 갔는데 애가 보이질 않아요. 사흘 동안 찾았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던지 못 찾았어요. 어디 가 있었습니까? 성전에 가서 어른들하고 논쟁하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때 ‘내 아들아, 왜 여기 있느냐?’ 했어요. 예수님 생각은 뭐냐 낳았다고 자식이 아니고 아들, 인자로서의 기능을 해줘야 그게 아들 이예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아버지여.’ 말이 안 되잖아요.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말을 두 개를 사용하면서도 왜 이게 일치될 수 없는가를 부모로서도 그걸 눈치 채야 된다 이 말이죠.
인자이면서도, 사람이면서도 사람 아닌 사람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결국 우리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라는 뜻이예요. 니는 쓰레기야, 우리는 짐승에 속하지, 그냥 육신이지, 니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건 사람이 아니고 너희처럼 사람이라고 안 보이는 내가 진정한 하나님 앞에 낳아주신 진짜 아들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죽는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잊어버리고 삽니다. 잘 나야 되고 이왕 사는 거 멋있어야 되는데 우리 하나님 보시기는 십자가 보기에는 어떤지를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되비쳐보면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