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룻기 강해 : 아버지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엘리멜렉과 그리고 말론과 기론 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죽이시는 이유는 인간 떼놓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인간을 배제하고 가겠다. 그러면 가정에 남자는 다 죽고 여자만 남았을 때 그동안 여자들은 남자가 살아 있을 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남자는 그 가정의 기둥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이 있어줄 때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 가정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된다. 딸이 아니고 아들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시형제결혼법 자체가 필히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줘야 돼요. 그 원천을 어디서 나오느냐? 유월절에 이스라엘의 맏이, 맏아들이죠. 맏아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애굽에 있는 모든 집안의 맏이는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아들이 대신해서 제사 드리고,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보통 혈육에 속한 아들이거든요. 부모 입장에 아들은 내 아들이란 말이죠. 나의 아들에다 어린양의 피의 모양으로 주님의 언약이 개입해버리면 이 아들은 나의 아들로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돼버립니다. 어린양의 피 바름으로 개입하는 그 의도가 추구하는 방향이 도로 나의 아들, 괜찮은 아들로 달라지는 게 아니고 소속이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인들 입장에서는 맞아죽으나 살아있으나 어차피 아들 빼앗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13장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계속 원맨쇼하고 있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내 것”이라고 주님께서 못 박은 한 주님의 것 외에 다른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아들을 천사한테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한테 아들을 빼앗긴 동시에 나의 아들로서는 죽임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내부에 반복적으로 어린양의 제사를 매일같이 아침저녁마다 드립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거죠. 나의 아들은, 나의 자식은 없다. 나의 자식은 없다, 흑흑흑. 이게 아니고, ㅋㅋㅋ 아니고, ㅎㅎㅎ이에요. 하하하, 웃는 거예요.
내 자식은 이래봬도 하나님의 자식이야, 라고 함으로써 아들이 아버지를 구원하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구원하듯이 후대의 유일한 자식이, 하나님의 아들이 연계돼있는 관련돼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진행하는지를 인간들 75억 인구들 모여서 백날 해봐야 코로나나 걸리지 이런 결론이 안 나옵니다. 인간의 모든 학문, 과학, 철학, 의학, 생물학, 어떤 학문을 해도 이러한 진리가 도출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이걸로 끝나버리지 제발 내 인생 좀 누가 데려가든지 죽이든지 해주세요. 이런 결론이 안 나온다고요. “살려주세요.”가 나오지 “죽여주옵소서.”가 안 나온다니까요. 우리교회는 안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금요 철야할 때 기도제목이 뭡니까? 제발 죽여주옵소서. 교회 방전되어 불나게 하옵소서, 라고 그런 기도제목 겁니까? 주여 도와주소서. 살려주소서. 그 기도한다고 커피 석 잔 먹어가면서 옛날에는 밤새도록 했지만 요새는 저녁 아홉 시면 끝나지요. 그렇게 금요 철야 기도하잖아요. 수요기도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기도하니까 침 튀기니 정세균이는 모이지 말라고 해서.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 반응은 간단하지요. “목사님, 기도할 것 뭡니까? 기도할 게 없네요.” 기도할 게 없으면 안 하면 돼요. “제발 안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기도를 안 하면 벌 받는다는 의식, 말씀과 기도란 두 바퀴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그걸 그대로 나오미처럼 자기한테 접목시키는 그 노림수, “주여 그런 노림수를 가진 나를 주님의 기도로 죽여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고 구원된다고 하는 그런 노림수에 내가 혹해서 그걸 나의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차용하는 못 돼먹은 나의 시도를 주여 죽여주옵소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죽는 거였으니까, 죽여주옵소서. 그렇게 해대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들의 마귀의 시험에 안 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오만 원짜리 뷔페에 갔다. 식사 기도할 때 “주여 여기 있는 것 골고루 먹고 배 터져 죽게 하여 주옵소서.” 죽으라고 뷔페 먹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그만 먹어, 하면 아직까지 죽을 때가 안 됐어. “스테이크 너무 많이 먹었잖아. 너 벌써 세 번 갖다 먹었어. 조심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우리가 죽고 싶다는 의도에 대해서 주께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방식으로 주와 접선을 해야 되고 교류를 해야 돼요. 우리는 죽고 싶은데 주님께서 말려줘야 돼요. 나오미는 그 반대였고 룻은 주님과 같은 방향을 가졌던 거예요. 그 두 사람 이야기가 바로 룻기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의 남자가 다 죽음으로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전체 남자들은 다 죽은 남자로 규정받습니다. 여기 교재 봅시다. 2페이지에 보면 큰 사번에 <전체에서 개인으로>란 제목에서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태어난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지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름을 아버지가 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름을 아버지가 짓느냐? 아버지의 반복성이에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혈통, 핏줄이 자식과 연결될 때 아직도 아버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대상으로서 지속되고 있음을 아들의 출생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단 말이에요. 아까 유월절, 그 점을 다시 할게요.
나의 아들에서 관계가 끊어지고 이 관계 속에서 주님의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게 되면 이 아들은 출애굽기 13장 2절의 말씀처럼 이거는 하나님 소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이 집합체를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냥 태어났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 뭔가 중간에 개입이 돼야 돼요. 하나님의 유월절 양이라든지 희생이라든지 뭔가 개입이 돼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계속 아들로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려면 중요한 것은 레위기 말씀대로 출애굽기 말씀대로 제사장의 지배체제가 원활하게 정상적으로 유지가 돼야 됩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들어오게 되면 제사장의 지배체제가 유명무실해요. 아무짝도 소용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율법 스스로 재편해서 제사장 지배체제를 뭐로 바뀌느냐 하면, 왕 지배체제로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에요. 그렇게 되면 다윗이 갖고 있던 왕이라는 그 위상은 어떤 뿌리가 있는데 룻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이 시원적 또는 원초적이고 원천적인 시원점이 되어서 다윗이 등장하게 된 거죠. 마태복음 1장 족보에도 나와 있지요. 이것은 무엇과 싸워야 되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란 뭐냐? 시원, 시작점. 내가 모든 의미의 시작점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은. 그 모델을 어디서 찾는가? 아버지에서 찾는 거예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아버지를 라이벌로 생각한단 말이죠. 전지전능하신 힘. 특히 여러분들이 어릴 때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집은 아빠보다 엄마가 더 센데요.” 그 엄마가 아버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욕구적 나에서 욕망적 나로 되려면, 욕구는 짐승적 본성이 있다면 욕마은 사회에서 순화된 나. “너, 내 말 들으면 네가 원하는 쾌락을 보상으로 해줄게. 그러니까 다른 직장 생각 말고 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 네가 원하는 걸 제공할 수 있어.” 그렇게 하면 완화된 또는 순치된 자아. 그래서 세상은 나를 교화시킵니다. 세상을 나를 교육시켜요.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짐승적인 요소가 깎여져 나가서 순화되고 순치되지 않으면 그 조직에 있을 수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은 그 인간은 그 조직을 우상화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조직이 나의 우상물이고 대체물이니까. 그 회사, 내 직장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그 회사를 사수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뉴스에 그런 것들 많이 나오잖아요. 간부급들이 시켜서 밑에 부하직원들이 사기에 가담해서 장부조작 열심히 하지요. 그러면서 위에 상사가 하는 말이, “책임은 내가 질게.” 이런다고요. 잡히는 것은 했던 사람이 잡히지만. 그러면 우리 상사가 나빠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챙기기 위해서 그 순간 상사의 말을 자기는 수용한 거예요. 상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직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쾌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타율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고 헤헤거리면서 자기 챙길 것은 챙겨 왔잖아요. 그게 바로 봉급 아닙니까. 월급이 바로 그거거든요.
교회를 나라에 등록시키게 되면 나라에서는 교인들이 낸 헌금에 대해서 기부금 처리해서 세금 혜택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은 교회는, 그런 조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에 세무서에서 혜택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서 되돌려 받는 세금환급금을 생각하면서 헌금하는 교인들의 늘어나니까 그 교회에 대해서 정세균 총리가 QR코드를 8월 15일까지 작성하라는 이야기가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교회가 그 교회를 우상시했기 때문에 나랏말을 듣는 거예요. 마스크 하라 할 때 마스크 하고 띄우라 하면 다 띄우고. 그렇게 순치되고 교화되는 거예요. 그렇게 말 잘 들어요. 이제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하는 게 아니고 북한의 김정은이 내려와도 말 자알 들을 거예요. 교회가 있어야 예배 되고 예배가 있어야 내가 천당 간다.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남이 시켜서 했다고 하지만 남이 아무리 시켜도 본인이 뭔가 얻고자 한 게 있을 게 아닙니까. 그 얻고자 한 것을 잃기 싫어서 거기에 대해서 고개 숙이면서 순화돼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봅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도행전4:19), 라고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왜? 지옥에서 군대 생활하는 것도 한두 해지 여기서 제대 좀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뭐라고 복음 전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나는 빨리 데려가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교도소 가서도 잠을 그렇게 잘 잤어요. 천사가 깨우지 않았으면 푹 잘 뻔했어요. 실라와 바울인지 베드로인지, 베드로가 그렇게 했구나. 천사가 옆구리를 발로 차서 깨웠어요. 너희 집인 줄 아나 호텔인 줄 아나, 하고 깨웠던 거예요.
<태양을 피하는 방법> 노래 제목인데 교회가 아버지를 피하는 방법은 본인이 아버지 되는 것을 포기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 목사는 우리 교회의 아버지다, 우리 교회는 내 마음의 아버지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접어야 되죠. 그걸 포기해야 돼요. 내가 생각한 아버지에 내가 등록되지 않아야 돼요. 진짜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냐? 나를 죽여주는 아버지가 아니고 나를 죽이는 아버지에요. 못 죽여서 환장하신 아버지, 찬양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아침 드셨지요. 물론 아침에 빵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침 먹은 것, 죽으라고 먹은 거예요. 호텔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 msg 팍팍 쳐서 정말 맛있어요. 오래 먹으면 진짜 죽을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감사합니다. 그런 음식을 먹게 해주셔서 감사.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란 말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자기를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인간을 육체적으로 분석해도 인간은 남의 시선에 정신부터 흔들리면 육체도 히스테리나 강박증상을 드러내는 거예요. 벌벌 떠는 거예요. 분해서 벌벌 떠는 것 있잖아요. 옆에서 잡아줘도 벌벌 떨어요. “너, 누구한테 한 소리 들었구나.” “그래.”
과학적으로 따지면 누구한테 한 소리 듣는 것은 초속 340m 내려가면 공기의 매질로 한 파가 내 귀의 달팽이관 고막을 두드려서 남긴 생리적 현상에 불과한 거예요. 과학적으로 하게 되면. 그런데 그런 것으로 설명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 존재기 때문에. 여기서 아버지로부터 태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뭐냐? 이 아버지에 매여 있는 인간을 아버지를 죽이는 겁니다.
정말 룻기 1장으로 진도 더 나갈 것도 없는 같아. 1장 3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5절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남자라는 이유로 다 죽어 버려요. 남자 없다. 남자 없어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대들게 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출생의 의미가 아니라 선재된 아버지의 존재와 그 정신적 성격 안에서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통일된 체계를 자신의 출생을 통해 알리는 것이다.”(2페이지) ‘통일된 체계’ 태어나면서 공급받는 어떤 체계가 있어요. 마치 붕어빵 구을 때 밀가루 부어넣고 동일한 앙꼬를 공급받듯이 한 사람은 돌리고 한 사람은 붓고 하는 것처럼 태어난 모든 인간은 통일된 체계를 집어넣고 출생이 되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왕 노릇한다. 이미 왕이 있어요. 죄, 악마지요. 불손한 정신. 그 본질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대드는 참된 하나님께 대적하는 파워, 힘을 품은 채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겁니다. 그 증상이 우리는 최고가 될 수 있고 내가 모든 의미의 시작점이 되고 싶은 거예요. 아들이지만 아버지고 싶고 엄마이지만 아버지이고 싶고 내가 아버지지만 더욱 절대적인 아버지고 싶고.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의미의 시작점, 최고의 자리를 한 결 같이 모든 정신을 거기다 통일시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단체와 몇몇 단체에서는 아직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안 줘요. 그것은 성경에 의해서 여자는 집에서 입 다물라 해서 마스크나 쓰라 해서 배우려하면 네 아버지 있잖아. 남편이란 아버지한테 배워야지. 어딜 감히 여자가 공공예배에서 가르치고자 하느냐. 간증하는 건 좋은데 말씀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은 남자 몫으로 하나님께서 돌렸기 때문에 여자는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된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세금 혜택이 없으면 교인들의 헌금 안 하게 되고, 그래서 세금 혜택주는 등록된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면 그 교회 숫자가 준다는 것, 이것은 곧 교회 문 닫는 걸 의미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시대가 남녀 평등한 시대인데 남자만 목사하고 여자는 목사하지 말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희한한 구절 동원합니다. 3장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절) 그런 구절 대면서 안수 줘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다 위선적인 해석이고 가식적인 해석이고 노골적인 해석은 뭐냐 하면, 전도사보다 목사가 월급이 많아요. 여자가 혼자 살면서 스스로 생계비 대려면 여자가 전도사보다 목사가 돼야 돼요. 돈 보고 하는 거예요. 왜? 돈은 모든 욕망을 교환할 수 있는 힘을 쓰기 때문에. 그래서 데모를 해도 목사 되게 해달라고 데모하지 말고 여자도 사찰집사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데모는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아버지 자리거든요. 교회에서 그동안 유일한 단 하나의 자리가 남자가 독차지한 것을 꼴도 보기 싫단 말이죠. 왜냐하면 만약에 그 남자가 잘못하게 되면 엉터리 설교가 교인들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교인들 무슨 죄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해서 여자도 그렇게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그것 여성 아닙니다. 남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버지를 추구하는 이상 육체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나도 사실은 남성화된 거예요.
그 대표자가 바로 여기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를 여자로 보지 마세요. 그냥 남성화된 사회의 표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남성화된 사회기 때문에 나오미 입장에서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필요 없어요. 이미 율법의 장소에서 나왔으면 자기도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이유는 나오미에게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율법의 효력이 실려 있습니다. 율법을 가득 담은 열차, 기관차가 드디어 이스라엘로 진격합니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나오미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망했다. 내 남편 죽고 두 아들 죽었다. 기둥뿌리가 다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증거물이 다 사라진 거예요. 아들이 있어줘야 대를 이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는 그 토대자체가 다 무너진 겁니다. 나는 망했다. 이게 일종에 폭탄이죠. “나는 망했다”가 이스라엘 속에 던져집니다. 사사 시대에.
그 다음에 2페이지 봅시다. “따라서 절대적 존재로서 ‘개인상’은 살아가면서 거꾸로 찾아나서야 가능하다. 이미 바깥세상은 나를 교화시키는데 치중한다. 곧 ‘아버지의 이름’의 재현, 혹은 반복 작용이 한참이다.” 내가 아버지이고 싶은데 나보다 더 센 사람, 나보다 더 돈 많은 사람, 우리 사장님은 내가 선망하는 아버지로서 자리 잡고 있어요. 내가 빨리 충실하게 열심히 성실하게 해서 이 회사에 임원 되고 저 사장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싶은 그 욕망이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 보람을 주는 거예요. 사람이 목적이 없고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오 목사님 보고, “골프 잘 치고 싶은 소망 있습니까, 없습니까?” 묻습니다. 없지요. 그건 뭐냐 하면, 보편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건 다른 사람 소망이잖아요. 내가 추구하는 소망은, 아버지는 따로 있어요. 그 아버지를 찾아서 우리는 그 자리에 합류하게 돼있어요.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십자가마을 사람들처럼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일본 요코하마의 뒷골목을 갔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오래된 선술집이 보인다. 거기서 잔잔한 일본의 옛날 가락이 흘러나오고 뎀뿌라 굽는 냄새 맡게 되면 뎀뿌라에 일본소주 뭐죠? 술을 안 먹으니 알 수가 있나. 사케 한 잔 하고 비까지 촉촉이 내리는데 얼마나 좋겠느냐, 라는 생각, 그건 십자가마을 사람들에겐 전혀 소망이 아니에요.
골목이 어둡다. 빨리 호텔에 가서 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 괜히 호텔에서 자다가 일어나서 선술집 찾아가는 그런 것은 고독한 미식가나 할 짓이지 그건 아무나 할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내가 선망하지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선술집에서 술 먹는 게 내 소망이 아니니까. 내 이끌림이 아니니까. 그런 소망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었는데 어린양의 피와 함께 죽었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아버지가 되셔서 다룬다는 말은, 나는 이미 아버지 자리를 넘볼 수 없는 그런 죽은 자로써 살아야 돼요. 우리 자신이. 내가 살아 있으면서 아버지께서 다루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본인이 소망을 계속 발산하기 때문에 계속 또 딴 것 아버지 뜻 말고 내 뜻을 챙기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2페이지 끝에, “반복 작용이 한참이다. 자립적인 ‘어른’이 된다는 말은 세상과의 대결에서 고된 시달림의 결과이다.” 3페이지 넘어가 봅시다. 이 이야기가 룻과 무관한 게 아니에요. 룻기의 나오미를 이해하자는 거예요. 아버지 없고 남편 죽고 아들 죽은 아줌마의 심정을 이해하자는 겁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쥐게 되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삶이다. 예견된 희열과 나만의 자유는 세상에 눌려 현저하게 자신감이 상실된 상태다. 그럴수록 더 챙기고 싶은 것은 ‘자기’다. 자기애는 상상의 결과다. 자기를 사모하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 것, 내가 되고 싶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그 모습과 내가 동일하다고 자꾸 자기가 우기는 겁니다. 성경에서 천국백성 나오면 천국백성과 나라는 사실이 일치된다고 동일하다고 자꾸 우기게 되는 거예요. 이건 자기를 사모하는 것이고, 살아남는 게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 살고 싶어요.
그러나 자아를 유일하게 받혀주는 신체는 덧없이 망가지지요. 망가지니까 나오미는 더욱 더 자식 욕심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룻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중에 룻기 4장에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안게 돼요. 그 아기가 누구 아기냐 하면, 룻이 낳은 아기인데 나오미는 누구 아기로 보냐 하면, 드디어 내가 목적한 바가 성과가 달성되었다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있어요. 동네 사람들도 거기에 맞장구쳐주고. 드디어 나오미가 아기를 얻었구나.
왜냐하면 자기 신체는 망가지고 자기 자식은 없고, 이걸 가지고 허물어진다. “마지막 기댈 자연물은 소실되고 흩어지는 것은 ‘기억의 편린’뿐.” 남는 것은 기억밖에 없어요. 과거에 나는 이 정도였다는 기억밖에 없으니까. “자연의 쇠퇴함이 자아의 일관성을 이긴다. 나의 욕구가 맥을 추지 못한다. 끝까지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인이나 전체나 죽음이 대신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고집스럽게 살고 싶어도 죽이지요. 죽일 때 그 근거가 뭐냐? 근거를 알고 죽으면 돼요. 그 근거가 율법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죽으라고 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어요. 죽어라, 인간아.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려라.
오번 봅시다. “인생이 증발하면 죽음이 된다.” 이건 뭐냐 하면, 어떤 냄비에 국을 끓이든지 물을 담아놓고 가스불로 계속 달이고, 달이고, 달이면 모든 물기는 다 증발되잖아요. 다 없어지지요. 그처럼 인생도 냄비에 집어넣고 시간이란 가스불로 하면 구십이고 백이고 살아보지요. 남는 것은 뭡니까? 없어요. 없지요. 조금 전까지 요양병원에 있었는데 가보면 없어요. 돌아가셨습니다. 없어요.
결국 살아 있는 것은 뭐만 살아 있는가? 죽음만이 살아 있는 것, 우리 안에 진정 우리 아버지는 뭐냐? 죽음이 아버지였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죽었던 그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합니다. 그러면 룻기에서 이 죽음의 역할을 해야 될 인물이 등장해야 됩니다. 이제 이것만 참으시면 됩니다. 거의 다 왔어요. 이게 좀 어려울 건데.
아버지가 죽었고 아들이 죽었다. 이건 남편이 죽은 거예요. 아들 죽으면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내도 같이, 아내는 아들이 내 아버지를 대체하기 때문에 같은 한 통속이 되는 거예요. 아들 죽으면 아내 죽는 거고 아버지 죽으면 엄마도 같이 죽는 거예요. 사실 이 집안은 죽은 집안이에요.
사실상 죽은 집안이라는 것을 나오미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나오미는 여전히 나가 들어가요. 나는 망했다는 식으로 우리 집안 죽었다는 걸 표현한다면 여기 룻은 뭐냐 하면, 룻은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집어넣어, 나를 새롭게 살렸다는 어떤 결과, 성과물로서 자기 집안의 죽음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시아버지와 자기 남편의 죽음으로서 룻은 그모스라는 모압의 신으로부터 경계를 넘어올 수 있었던 거예요. 우상을 섬기면 지옥이잖아요. 지옥 삶에서 새로이 여호와의 실감나는 활동, 실감나는 간섭, 개입을 맛보고 넘어온 거예요. 넘어온, 하나님이 계속 이 가정을 죽였다는 결과물이 뭐냐? 내가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다는 기쁨으로 룻은 표현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한 조가 되어 다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때에 율법이 개입한 그 결과의 양면성을 다 보여줘요. 하나는 평소에 율법으로 잘 보려는 사람은 망했다고 이야기하고, 율법이 정말 고대하고 목적으로 삼는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이 부분은 누가 담당하느냐 하면, 바로 룻이 담당하는 거예요. 그럼 룻은 뭐가 되느냐? 생명이 되겠지요.
자, 생명이 이스라엘 속에서 어떻게 언약적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살릴 것인가, 이어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룻기 2장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룻기 2장부터 시작될 때 그동안 이스라엘에 있었던 형식적인 율법의 절기가 대표적인 것은 유월절, 그 다음에 맥추절, 그 다음에 수장절, 출애굽기에 보면 이 세 가지로 구분돼있어요. 나머지 절기도 있지만 이 세 가지에서 나오미와 룻이 한 조가 되어 들이닥친 시절이 유월절 이 시기에요.
이스라엘은 겨울에 씨를 뿌려서 봄에 거두는 데 제일 먼저 등장한 게 보리 추수를 하고 난 뒤에 약 오십 일 뒤에는 밀 추수가 일어납니다. 맥추절은 밀 추수를 말해요. 보리 추수할 때에 보리 이삭으로 제단에서 흔드는 그 축제를 초실절이라 합니다. 초실절이란 유월절 지나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 해야 되는 무교절 가운데서 안식일 그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복잡하지요. 초실절이란 실과가 처음 나왔다는 말이죠. 처음 나온 실과는 하나님께 바쳐야 된다고 돼있어요.
레위기 23장 10절부터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장 중심체제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은 눈에 보이는 제사장 중심체제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 제사장은 전문직업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서 계속 죽음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율법으로 죽음을 반복시킵니다. 그러면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뭐가 산출되겠어요? 아까 룻처럼 죽음에서 뭐가 나옵니까? 새로운 생명이 계속 나오겠지요. 율법의 모습이 우리에게 죽음으로 다가와서 지나가면 우리가 생명이 되는 이 방식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죽음으로 다가온다는 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죽음이란 그 힘은 우리 행함에서 생겨나지 않아요. 인간은 율법을 지키면 죽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지켰다는 자아가 생생하게 기억나게 돼있어요. 인간은 기억의 편린이니까. 기억이 집대성하고 있으니까. 자기 몸은 늙어도 기억은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그 안에서 자아가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하는 무연고성 자아가 아니에요. 계속 내가 이 정도로 율법 지킨 사람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이 정도로 해박한 사람입니다를 계속 지키면서 그것이 바로 납니다. 그게 나에요. 주여 그게 괜찮은 나니까 제발 나를 죽이지 마옵소서. 백인 경찰이 흑인 절도범의 모가지를 밟듯이 하나님은 나를 밟아 죽이지 마옵소서. 이 정도로 쓸모 있는 인간이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본인이 본인에게 아버지니까. 반항하는 거죠. 아주 강렬하게 저항하는 겁니다. 율법 이용해서 본인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겠다는 시도지요. 심보지요. 나오미가 그런 사람이죠. 룻기에서 악의 역할은 나오미가 하고, 주님 역할은 룻이 하는 겁니다.
그럼 보아스는 뭐냐? 남자는 죽었어요. 우리는 남자의 후손되면 안 되고 여자의 후손돼야 돼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 돼야 돼요.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남자는 시다바리지요, 그냥. 아까 제가 했잖아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게 아니고 없음으로 태어났다. 왜냐하면 여성 자체가 이 땅의 없음의 표징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남성에 기대있고 남성이란 아버지에 기대있기 때문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없음의 존재에요. 남자가 없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 없음이 주님한테 그렇게 필요했던 거예요. 없음을 위해서 언약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주입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킴으로써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없게 만들고 그다음에 그 없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 내 쪽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서 그냥 죽음 자와 다를 바 없었는데 이게 바로 생명이구나. 이게 바로 생명의 재료가 되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레위기에 보면 흔드는 거죠. 이 대목을 조금만 설명하고 식사하러 갑시다. 약속의 땅에서 곡식이 자란다. 약속의 땅에서 모든 곡식에는 약속이 포함돼있어요. 물질적으론 포함될 게 없지만 여기 약속의 땅에는 땅과 무엇의 만남? 약속의 만남은 곡식을 산출합니다. 이 곡식이 인간의 신체까지 들어오게 되면 이 인간은 약속의 백성이 될 수 있어요.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그러한 음식,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땅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자.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이런 것 있잖아요.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그것을 먹었을 때 나는 결코 나로 돌아올 수 없고 약속에 소속이 되고 포함이 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로 뭘 벌이느냐 하면, 아까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서 축제를 벌이는 겁니다. 축제에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잡수실 양식이 필요해요. 이 양식이 누구냐 하면, 백성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제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소고기 잡숫고 싶어서 소고기 바치고, 염소고기 바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친히 만든 백성이 여기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겐 굉장히 즐겁고 기쁜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솜씨가 나오니까. 따라서 그것을 반영해주는 게 축제고 절기인 거예요. 모든 절기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곧 죽음이죠. 의미 있는 죽음이 들어갑니다.
죽을 때에 백성들 잡는 게 아니고 백성들을 대신 한 약속된 희생제물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희생제물이 백성 되게 하는 매개물이 돼요. 이 반복적인 희생제물이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에 보면, 단 한 번으로 끝났다고 돼있지요. 예수님이 마지막 제물이에요. 다른 제물은 없습니다. 우리의 헌금이 제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제물은 예수님으로 끝난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을 냈잖아요. 헌금. 그래서 주께서 교회에서 너 같은 인간 필요 없어, 하고 죽여 버렸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본인이 돈을 내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본인 자체가 이미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하는 일에 개입할 필욘 없단 말이죠. 이미 하나님이 네가 가진 그 돈은 내 것이라고 했는데 새삼스럽게 돈이 아까워서 갑자기 지가 끼어들어서 하나님 이건 남겨둬서 제 용돈으로 쓰겠습니다, 하고 끼어들게 되면 이거는 성령을 속임이라고 돼있어요.
사도행전 5장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게 되면 참 재미있는 것은 처음부터 헌금을 안 했으면 아무 일 없었어요. 둘이 행복하게 잘 다녔고 지금도 해외여행 갔을 거예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 가겠구나. 괜히 헌금해서 죽었어. 그것도 한 날 한 시에. 제사 드리기엔 좋겠다만. 괜히 헌금했어.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도 그래요. 기도를 굳이 기도 안 되는데 할 필요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교회 오전에 집사님들 돌아가면서 기도하는데 기도 이렇게 해도 우리교회 교인들 아멘합니다. “주님, 오늘 기도할 게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래도 교인들 아멘해요. 안 되는 기도 억지로 짜내고, 오늘은 끝났고 다음 순서는 언제고? 힘들어 죽겠다.
남녀평등인데 여자도 좀 하면 안 되겠느냐? 여자들이 기도하면 죽어요. 남자라서 그만큼 견디지 여자들이 하게 되면 죽어요. 기도순서 일주일 전부터 밥을 못 먹는다니까요. 힘들어서. 얼마나 믿음 없다고 씹어대겠어요. 기도하고 난 뒤에. 그것도 생중계되는 데요. 그 아픔을 제가 목사 입장에서 상쇄해 준 거예요. 연약하니까. 견뎌도 남자만 견뎌라. 기도란 주께서 하게 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이 개입해야 돼요. 내가 개입하면 나의 축제가 되고 주님의 축제가 아닙니다. 주께서 개입할 때 헌금할 때 왼손이 모르게 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일이니까 성경말씀과 합치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합치할 수 없습니다. 괜히 남한테 시선 의식해서 나 믿음 유지하고 있다고 폼 내지 마시고.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주님 계신 게 아니고 타인의 욕망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한테 요구하는 타인의 요구가 들어온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는 그것 들어줄 필요 없습니다. 구애받지 마시고 점심식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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