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제1강 경계

아빠와 함께 2020. 8. 1. 11:52

2020 여름수련회, 룻기강해(쳔국의 틈) 제 1강 : 경계 - 이 근호목사

지금부터 십자가마을 수련회 시작하겠습니다. 기도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겨냥한 그 말씀을 주셨사오니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보는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그 관점을 우리도 같이 공유하게 해주셔서 주님처럼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룻기 시작하겠습니다. 룻기1장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그렇게 되어 있지요. 첫 번째 강의 제목은 ‘경계’입니다. 이쪽과 이쪽을 구분하는 경계선, 이 경계에 대해서 룻기 1장 1절에 보면 두 종류의 경계가 나오지요.

하나는, 이스라엘 땅에서 모압 땅으로 경계선을 넘어가 버렸어요. 엘리멜렉가문이. 두 번째 경계는 뭐냐 하면, 왜 넘어갔느냐 하는 겁니다. 흉년이 들어서 넘어갔다. 첫 번째 경계를 넘어간 이것은 위반이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방 땅으로 간다는 이것이 위반인데 흉년이라는 자연재해, 자연조건이 위반을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땅에 왔는데 율법이지요, 율법에 의해서 위반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고 뭐고 간에 내가 굶게 생겼는데, 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되었는데 그까짓 거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래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어떤 법도 위반할 수 있는 권한이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내가 굶어죽는 판에 하나님이 어떤 법을 정했든, 어디에 살든 간에 그것은 뒷전이고 나부터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모압에 좀 살았다. 어쩌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흉년이라는 이 조건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지요.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 우선이냐, 생존 생계가 우선이냐?’ 그러한 딜레마가 1장1절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냐, 아니면 내 목숨 부지하는 그것이 우선이냐?’ 이렇게 될 때에 여기서 엘리멜렉가정은 뭘 했느냐 하면, 여기서 법이 있는 나에서부터 법이 없는 나로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땅의 경계선을 넘은 이것이 율법의 경계를 보여준다면 이것은 기본적인 나의 경계를 보여주지요.

경계라는 것은 룻기 1장 1절부터 두 종류가 시작이 됩니다. “고 3인데 교회 갑니까?” 뭐 그런 거지요. 고3인데 시험 준비해야지 교회가면 안되지. 시험 준비 안하고 교회 갔다가 나중에 성적 나빠지면 누가 책임질 건데? 부모님이 책임질 거예요, 목사님이 책임질 거예요? 목사님이 대신 수능시험 칩니까? 쳐봐야 몇 점 나오지 않는데 소용없지요. 누가 책임질 건데요? 내 문제 누가 책임지지요.

따라서 이러한 쳐놓은 율법의 경계선을 나는 견딜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나1’이라면 ‘나2’로 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런데 ‘나1’보다 ‘나2’가 내 생존에 유리하다, 할 때는 ‘나2’로 언제든지 옮길 수 있다. 따라서 경계 ‘나1’과 ‘나2’사이의 경계 이것이 더 근원적이고 기본적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이러한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지상에 쳐놓은, 지상에 격자처럼 쳐놓은 하나님이 깔아놓은 법이라는 것 법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이것은 이스라엘 땅에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땅에만 해당되는 이 법이라는 것 이딴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법보다 내가 더 중요하니까. ‘나는 법이 있다는 그 점을 무시하지 않지만 내 생계가 더 우선이기 때문에 나는 얼마든지 법 없는 곳으로, 모압이지요, 사해 너머 법 없는 곳으로,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몇 킬로 되지도 않아요, 지금의 이스라엘에서 요르단 이 나라로 이렇게 건너 와버렸다. 이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다.’

물론 법이 있으면 좋지요. 하지만 내가 살기 힘들 때는 살기 힘든 나와 그보다 여유 있는 나 사이에 항상 경계를 타넘을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내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을 1장 1절 말씀이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이스라엘에서 모압 땅으로 이것이 율법의 경계인데 왜 모압 땅으로 가면 안 되는가? 왜 율법에 위배가 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 그릴 때는 여기 갈릴리바다, 그리고 사해, 죽음의 바다 이렇게 그리면 되고요. 그 사이에 강이 있는데 요단강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눌 수 있어요.

지중해가 서쪽에 여기 있고요. 처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때 시나이 반도를 지나 이리로 들어오게 되는데 들어올 때 이 땅에 원주민들이 있었어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여러 족속이 나와요. 히위족속, 옆에 시돈, 그 밑으로 헷족속, 이 민족들이 한곳에 모여도 살지만 흩어져 사는 경우도 많아요.

이쪽 해변가에 가나안 족속, 서쪽방향으로 그 옆에 브리스 족속, 갈릴리바다 옆에 기르가스 족속, 그 밑에 여기도 다시 가나안 족속,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지요. 여길 서안지구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벽을 세웠지요. 가나안 밑에 여기에 히위족속, 위에도 있지만 여기도 있어요. 그 밑에 여부스족속, 예루살렘 그 근처가 여부스지요. 그 밑에 겐족속, 사해동편으로 아모리족속, 그리고 해변가의 가나안족속 밑으로 여기가 블레셋, 아래쪽으로 죽 내려와서 여기는 그 유명한 악명높은 아말렉, 그리고 사해동편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에돔, 모압, 암몬, 이렇게 있다는 말이지요.

이 땅이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 뒤에 여러 가지 족속들이 많이 나왔는데 창세기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19-21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전부다 열 족속이 있는데 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어요. 그 땅에 이 족속들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두 족속으로 여기서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까만색으로 표시된 원주민 족속 이름들 그 위에 빨간색으로 겹쳐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표기해보겠습니다.

요단강 동쪽에 동므낫세, 그 밑에 갓, 다시 그 밑에 르우벤, 갈릴리에서 내려오는 요단강 서편으로 잇사갈, 해변가에 아셀, 그 동편 옆으로 납달리, 아셀과 납달리 밑으로 스불론, 요단강 중심으로 서쪽에서 다시 므낫세, 그 밑에 에브라임, 단, 나중에 저 위쪽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아직은 여기에 단, 제일 작은 지역인 베냐민, 그리고 유다지파, 제일 밑에 시므온. 이렇게 해서 열 두지 파가 차지했습니다.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열 두 지파가 그냥 쳐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해서 제비뽑아서 죽죽 그어서 일방적으로 경계를 정해버렸어요. 요단강 건너편에 갔다가 책망은 좀 들었지만 어쨌든 차지했습니다. 여기 까만 글자로 되어 있는 원주민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잘살아오던 동네인데 “여기서 나가세요.” “왜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시므온 지파가 여기 사는데 원래 살던 겐족속이 그 땅을 개척하고 개간한 거예요. 인테리어 다 해놓고 입주도 다 했는데 “나가. 우리가게야.” 이게 말이 돼요? 그래서 누가 정당하냐 하면 이 원주민들이 정당해요. 오랫동안 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이 땅은 우리가 개척하고 개간했기 때문에 공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이 들어 있는 우리 땅이야. 그런데 애굽에 살다가 우르르 몰려오더니 깡패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살려고 하느냐?” 라고 할 때 그들은 방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보고 여기서 살라고 했다. 나가라. 싫으면 맞고 나갈래, 그냥 나갈래?”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이 되겠어요? 그럴 때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좀 미안스럽기도 하고 이게 이상하게 말이 안 된다고요. 누구 말이 설득력이 있느냐 하면, 원래 살던 이 사람들이 되게 안 되어 보이고 설득력이 있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전쟁해서 이겼다. 그래서 이미 살고 있는데 쫓아내고 들어간다. 그렇게 될 때 대체 그 차이점, 이 빨간 것과 까만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의 율법대로 언약대로 아브라함언약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땅을 차지한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명심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땅이 원래 본인 땅이 아니잖아요. 본인 땅이 아닌데 하나님의 언약,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또는 율법에 의해서 땅을 차지했다면 이 땅에 사는 본인들은 자신의 생계나 생존문제보다 무엇을 우선해야 되느냐 하면, 이 율법을 우선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생존과 생계가 우선이 된다면 여기 있던 본래 원주민하고 본인의 어떤 정당성이나 차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원주민들이 더 정당하지요. 들어갈 수 없는데 들어갔다는 말은 다른 구실이 있어야 돼요. “나도 좀 밥 먹고 삽시다.” 이것 말고 “우리 가정도 어렵습니다.” 이것 말고 “나도 애 키우는데 봐주세요.” 이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요.

그 다른 이유가 있어야 되고, 그 다른 이유가 “원주민 당신들이 밥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침입자, 정복자가 그 뜻에 일치되어야 돼요.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요. 원주민이 보기에는 억지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보기에도 억지인줄 알아요. 억지인줄 알지만 여기는 우리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인데 하나님의 소원은 땅을 차지해서 네 땅 하라는 말이 아니고, 땅이 네 땅이 아니고 누구 땅이냐 하면,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의 땅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악이 관영했다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원주민들 악이 관영했다 싹쓸이하고 네가 들어가라.”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악이 관영해서 이 원주민들, 이 땅에 원래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추방된다면 그 다음에 이 땅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을 영원히 점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디에 달렸느냐?

이 땅 원주민을 추방했던 원리원칙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시켜 보는 거예요. “원주민들은 악하기 때문에 쫓겨났다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너도 마찬가지야. 원주민들이 왜 쫓겨났어요?” “예,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고 그저 자기 혈통 대대로 자기가 개척해서 내 자식 내 후손들에게 대대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이 땅을 차지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생명보다 딴 것이 있어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단순히 우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이름으로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계속 이 자리에 모실 수 있고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놓고 지금 그들은 실습 받고 있습니다. 테스트 받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래서 여기서 일단은 어렵지만 중요한 공식을 세운다면 이렇습니다. 기업은 땅, 아니지요. “기업 ≠ 땅” 기업은 땅이 아니라 백성입니다. “기업 = 백성” 어떤 백성?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지닌 백성이 기업이 되는 겁니다. “기업 = 백성(하나님의 언약, 율법)” 땅이 아니고 기업이에요.

룻기에서 나오미네 가족이 이 땅에 흉년이 들어서 율법이 없는 나라, 모압, 요르단이지요, 모압 나라로 갔을 때 이 땅의 원리를 버리고 쫓겨난 이방민족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갔기 때문에 이들은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어요. 망한다는 것이 뭐냐? 전에 이방민족이 대대로 우리의 혈통과 혈족을 종족을 유지하려면 아빠 엄마가 결혼해서 아기를 놓고 또 아기를 계속해서 낳으면 그렇게 종족이 유지되거든요.

그런데 룻기에서는 아버지란 아버지는 다 죽어요. 아버지 없이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 못 낳잖아요. 그러면 집안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집안이 무너지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땅이 있고 거기에 가족이 사는 것이 기업, 기업이란 상속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상속분이 아니라 여기에 백성이 있어야 되는데, 백성은 율법대로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상속분이라고 이야기했지요.

바로 이들의 무너짐 자체가 이것이 율법의 실현상태라면, 율법이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라면, 분명히 외형적으로 무너졌는데, 형식적으로 남자가 다 죽어서 무너졌는데 그 무너짐이 도리어 율법의 소생의 모습, 율법 완성의 모습으로 이것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룻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망했는데 하나님은 잘되었어요. 가정의 뿌리가 죽었는데 잘되었어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잘 된 거예요. 잘 될 거야, 하잖아요. 남자는 다 죽었는데 그 집안 너무 잘되었어요. 나오미가족이요. 모압에 갔다가 견디다 못해 다시 돌아오는데 돌아올 때 돌아온 나오미가정이 율법적이냐,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이 이스라엘 가정이 율법적이냐를 하나님께서는 비교시키는 겁니다.

망한 쪽이 율법의 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전혀 희망이 되지 않지요. 기쁨이 되십니까? 이게 바로 함부로 경계를 옮기면 안 된다는 것. 경계라 하는 것은 신명기 27장 17절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이웃의 지계표. “네가 공로로 이 땅하나 얻은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하기 위해서 땅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열매를 줬다고 생각해라. 따라서 너희는 이방인처럼 ‘오, 땅이다. 야, 우리 집 부동산 얻었다.’ 이렇게 좋아하지 말고 그 부동산이 오기까지 무엇이 거기에 담겨 있는가? 그걸 보라.”는 겁니다.

쉽게 생각한다면 “야, 나 천국 갔다.” 좋아하지 마세요. 나 천국 간다, 나 천국의 백성 되었다, 좋아하지 말고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나를 보라는 겁니다. 올 수 없는 자리를 오게 했다는 그 올 수 없는 자 나에게 플러스(+), 무슨 요소가 여기에 같이 결합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가? 그 사실을 미리 이 땅에서 알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요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항상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네가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그 점이, 성공적으로 그 하나님의 요소가 살아 있느냐? 너로 하여금 무능자라는 것을 티내는 요소가 네 안에 계속 살아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신명기 8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12-14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나중에 너희가 이 땅에 와서 집을 짓고 농사가 잘될 때 네가 갑자기 자기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율법 것인데, 하나님의 것인데 내 것이라고 하는 순간 너는 이 이방민족이 쫓겨난 것 같이 여기서 너도 추방된다.’ 그렇게 약속했어요. 그리고 이방민족이 멀리 가지도 않았어요. 셰퍼드 개처럼 경계선 주변에서 딱 노리고 있어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물어, 물어! 쉭!” 하면 이 셰퍼드는 평소에 많이 굶겨놨는지 확 물어버립니다. 개한테 물리게 되면 또 물렸다고 “주여 어찌 이럴 수가……”하고 빌면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서 “됐다 그만! 많이 먹었잖아. 빨리 네 자리로 가야지.” 다시 보내버립니다. 다시 또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면 “물어” 하고, 이렇게 유동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의한 경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경계를 중요시 여기지요. 그렇다면 이 가나안 땅, 율법경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켜주는데 지켜줄 때 하나님께서 율법과 함께 지켜준다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가 여섯 군데 있어요.

동므낫세에 한군데 ,갓지파에 두 군데, 르우벤 지파에 세군데, 여기까지는 요단강 동편이고요, 요단강 서편으로 납달리에 네 군데, 그 다음에 므낫세에 다섯군데, 유다 여섯군데 1-6까지 이게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는 누가 거기에 살고 있느냐? 제사장이 살고 있어요. 도피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피난처쯤 되지요.

도피성은 뭐냐? 쉘터라 하는데 보호하는 거예요. 죄 없이 죄지은 자를 보호합니다. 참 특이해요. 죄를 지었으면 죄가 있어야 되는데 죄도 없는데 죄가 나온 사람을 보호하는 거예요. 앞뒤가 잘 안 맞지요. 죄가 있어야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죄 없는데 죄가 나왔어요. 이건 뭐냐 하면, 죄 없는 자를 의도적으로 죄짓게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하나님의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없이 사는 사람도 죄짓게 만들었어요. 죄 짓게 만든 이유가 여기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보지 말고, 인간대 인간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누가 개입했느냐? 하나님이 개입했는가의 여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방법은, 무심코 도끼질 하면서 나무를 찍는데 갑자기 도끼날이 빠지면서 세 바퀴 반 돌아서 저 건너편에서 고추심고 있는 아줌마 뒤통수를 쳐서 죽여 버렸을 때 이것은 본인이 그 아줌마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죽게 된 거예요.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온 사람에 대해서는 도피성에서는 추방시켜 버립니다. 죄지은 주제에 왜 복을 받아요? “이건 이기주의 아니야? 이것은 죄 없는 사람이 죄지었을 경우에 들어오는 거야.” 왜냐하면 죄 없이 죄를 지어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개입을 언급할 수 있는 계기를 본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보니까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다 그런 것 같아요. 전혀 죄인이 아닌데 죄져 있어요. 사는 게 그렇게 복잡해요. 이렇게 죄도 없는데 망가졌어요. 이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스스로 위로한다고 정당화한다고 “나 죄 없는데 죄졌다” 하지 말고 여기 누가 개입했느냐를 드러내기 위함인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느냐? 제사장이 개입하거든요.

이 제사장그룹이 뭐했나?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에 여기에 무슨 강이 있느냐 하면, 요단강이 있거든요. 요단강이 범람하는 그 때를 기다려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범람한 요단강 중간에 길을 낸 것은 누구 때문이냐 하면, 대제사장과 플러스(+) 그들이 짊어졌던 언약궤 때문입니다.

언약궤 때문에 자연현상이 홍해처럼 갈라져서 길을 내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도피성에서 있던 사람이 죄 없다, 하고 마구 돌아다니는 그것이 아니고 언제 다시 도피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 하면, 대제사장이 사망했을 때는 자유를 얻어서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도피성의 죄인은 대제사장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종속된 존재에요. 죄 없이 죄지었다 할 때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죄로 인하여 누구에게 종속되었는가? 바로 대제사장의 사죄, 용서하는 것, 속량하는 그 속량기능에 전적으로 종속된 사람이 1-6까지의 여섯 개의 도피성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이스라엘 땅의 운명은 처음 요단강에 들어올 때 대제사장 덕분으로 들어왔다는 그 시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살고 있어도 여전히 대제사장의 활동에 따라서 이스라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피성을 통해서 잊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대제사장은 여러분이 아시지요? 신약의 누군지?

우리에게 대장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지요.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른다. 기존의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하늘의 혈통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가치와 그 존재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들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 더 이상 그가 지은 모든 죄, 죄 없는데 지은 죄기 때문에 다른 가정이 파탄 났잖아요.

죄로 인한 그 불행한 사태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면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든 뭘 했든 그 사람 책임이 아니다. 혹시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면 이것은 대제사장이 이미 대신해서 다 처리했다. 그런 사실이 계속해서 모아지고 저축이 되는 그 상태가 바로 약속의 땅 천국입니다.

“너는 어떻게 들어왔어?” “대제사장 예수님 덕분에.” “너는?” “우리도 마찬가지야.” 각자 사는 동네 다르고, 사는 환경 다르고, 시간 다르고, 다 달라도 공통적인 것은 단 하나에요. 대제사장의 죽으심의 효과를 본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율법의 경계에요. 왜 율법이라는 것이 경계선을 갖고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되는가를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은 생존이 우선이지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율법의 성취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면 룻기를 볼게요.

1장 2절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자기 아내하고 아들 말론과 기룐 둘 데리고 모압지방에 거했다고 되어 있지요.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왜 율법을 버리고 왜 모압으로 갔느냐? 하나님께서 자기 생존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법이 우선인데 왜 모압으로 들어갔느냐? 바로 그것을 룻기는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라고 되어 있어요. 사사들이 치리했다는데 사사라는 것은 있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 있어도 충분해야 될 상황에 사사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제멋대로 살고 있었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룻기 앞에 사사기가 있잖아요. 사사기에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형식문이 있어요. 그것은 룻기 바로 직전에 나오는 사사기 21장 25절 사사기 제일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자기들 성질대로 살았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자기 성질대로 살았어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고정적인 왕이 없으니 제 맘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기 맘대로 산거예요. 적어봅시다. 내 맘대로 산다. ‘내 맘대로 산다’에서 뭐가 나오는가? 아까는 율법의 경계를 했지요.

두 번째는 나의 경계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나의 경계. 율법은 이스라엘과 모압사이에서 경계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경계는 뭐냐 하면, 욕구적인 나와 욕망적인 나의 경계, 평생을 육신을 가진 인간들이 이 둘 사이에 갈등하고 있다. 이게 나의 경계에요.

욕구적인 나라는 이것은 뭐냐? 모든 짐승이나 모든 자연물과 인간을 같이 봤을 때 인간의 신체 60조의 세포로 되어 있는 이 인간은 뭐로 사는가? 즐거움이냐 불쾌함이냐? 쾌(快), 쾌락, 쾌락이라는 것은 그냥 육체의 즐거움이에요. 짜릿함, 그런 거지요. 육체의 쾌에 의해서 인간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짐승이고 동물이니까, 욕구적이니까.

‘쾌’라는 이것은 어디서 발견하느냐? 갓난아이, 막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삽니까? 혹시 아기가 있으면 물어보세요. 애들이 어떻게 살아요? 배고프면 밥 달라고 하지요. 잠 오면 칭얼댑니다. 엄마 없으면 엄마 찾아 울지요. 젤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참, 아프면 아프다고, 음악회 한다든지 교회예배니, 그런 것과 관계없어요. 본인이 아픈 것이 우선이에요.

장소가 지금 참아야 될 장소인지 그런 것은 관계없어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배설물도 기저귀에 자기 맘대로 싸버려요. 방귀도 함부로 뀌고. 그거야 애뿐이 아니고 노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점점 나이 들면 애로 변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본능이지요. 그냥 본능대로 사는 거예요.

인간은 욕구대로 본능대로 살면서 점점 크면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 인간은 자아실현에 목적이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에 있다. 개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 고상하게 한다고 해서 이게 이거요, 다 개코입니다! 흠흠, 알지요, 개코. 인간은 원초적인 쾌락의 작용에 의해서 살아요. 뭐 어른 되었다고 해서 애들 때부터 갖고 있던 원초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육신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육체 이것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육신적으로, 욕구적으로 사는 애가 점점 크면서, 예를 들어서 자기가 먹고 싶은 젤리 달라 떼를 쓴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애들이 알아요. 손님 왔을 때 떼를 쓰면 잘 들어준다는 그것을 간파해서 손님 왔을 때 일부러 막 떼를 써서 엄마에게 반드시 내 의사가 관철될 수 있도록 머리를 쓴다는 말이지요.

그 때 엄마가 나무래도 안 되고 할 때는 “그 대신 뽀로로를 봐라.” 뽀로로라는 만화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대체입니다. 욕구가 욕망으로 대체되는 거예요. 욕구에서 욕망으로. “너 혼자 장난감 가지고 놀아. 엄마 시장 갔다가 올 테니까.” 하면 애가 하는 말이 “그러면 엄마 시장 갔다 올 때 뭐 사줄 건데? 내가 원하는 것 사다줘.”

인간이 욕구를 발산할 때 옆에 가만 놔두면 돼요. 젖 달라고 할 때 젖 안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애는 태어나서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하직하게 되지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문제는 아기가 젖 달라고 보챌 때 엄마가 젖을 주는 게 문제에요. 젖을 주게 되면 그 애는 자꾸 이 땅에 사는 자기 욕구를 펼칠 시간이 자꾸 늘어나요.

그게 늘어서 12개월이 되면 돌 되었다고 난리지요. 돌잔치를 해주지요. 자꾸 늘어나는 거예요. 늘어나게 될 때 그 애는 ‘나’라는 이 욕구를 누가 채워주느냐? 가장 가까이 근거리에 있는 타인이 나의 욕구를 들어준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타인, 엄마지요, 엄마가 늘 자기를 챙겨주지 못할 때 여기서 뭘 느끼느냐?

중요한 건데 인간의 욕구는 여기서 결핍을 느끼고 결핍이 남아있으면 뭘 원하느냐? 보상을 원하는 거예요. 이 보상을 원할 때 “네가 조금만 참으면 이거 해줄게.” 라고 타자, 타인, 엄마 아빠가 어떤 제안을 할 때 그 엄마 아빠가 사는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나보다 더 넓은 세계, 이게 바로 공동체, 인간사회공동체의 현실세계입니다.

거기서부터 아이는 하나의 사회인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에서는 결국 무엇을 얻느냐 하면, 원초적인 쾌락을 제때 만족하지 못한 결핍에 대해서 보상하는 것을 이 사회에서 찾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교회고 뭐 어떤 친구도 될 수 있고 취미활동 조기축구회 뭐라도 좋아요. 사우나 이런 것, 뭐라도 관계없어요.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릴 수 없는 육신이 쾌를 보충해줄 수 있는, 그걸 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을 찾는 것, 그래서 그 인간은 욕구적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참을 때 참아야 되겠지요. 억눌러야 된다는 말이지요. ‘아, 이럴 때는 좀 점잖은 체를 해야 나에게 돈이 들어와.’ 이럴 때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욕망으로서의 나에요. 욕구는 터뜨리는 거지만 욕망은 무엇을 갈구하느냐 하면, 내 결핍에 대해서 내 보상을 갈구하는 겁니다. 간절히 구하는 거예요.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간구를 할 때 내가 욕망으로서의 나가 사회인으로서 인정받으려면 이것을 억압을 해줘야 돼요. 콱 발로 밟듯이. “여기서 이러는 것 아니야.” 이렇게 억압을 시켜줘야 된다고요.

나중에 한 일곱 살 쯤 되어서 “손님 오셨을 때는 조용히 해야지. 이러는 게 아니야. 손님이 널 얼마나 나쁜 아이라고 하겠어? 네가 조용하게 있으면 적당하게 보상해줄게. 이번에 손님 오셨을 때 조용하게 있으면 휴대폰 바꿔줄게.” 그러면 걔는 그 손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자신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원수가 되면서 또하나는 뭐냐 하면, 저 원수를 이용해서 잘만 하면 내가 원하는 휴대폰을 조기에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계를 갖고 있는데, 이중인격인데 하나는 참을 수 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짐승적인 본능, 그리고 이걸 억누를 때 이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나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어떤 희망, 기대, 소망, 그런 것을 바라는 욕망적인 나, 이 두개의 나 사이에 항상 경계선이 쳐져 있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아주 심하게 나무랄 때가 있어요. 그것은 상사가 그 전날에 부부싸움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남한테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잔소리를 하거든요. 자기의 즐거움을 배우자가 침해를 했기 때문에 내 앞에서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면 공격받은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그걸 또 풀어야 된다고요.

풀어야 되는데 상사가 직장생활에서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크게 나무랬다. 그 부하직원은 짜증이 나서 ‘오늘 저녁에 참 이슬 한 병 마셔야겠다. 소맥이든 뭐든 술 한 잔 해야 되겠다.’ 하지요. ‘닭똥집에 가야겠다. 이거 안하면 안 되겠다.’라고 속으로 푸는 겁니다. 안 그러면 억압될 수가 없기 때문에.

술집에서 술 먹으면서 뭘 하느냐 하면, 욕을 해요. 평소에 안 나오던 욕을 안볼 때 합니다. 상사에게 욕설을 하게 돼요. 욕설을 할 때는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억압이 사라져요. 말을 할 때는 뭔가 약간의 억압을 해줘서 해야 되는데 그 사람에게 나갈 의미와 그 표현이 너무 밀착되었어요. 직설적입니다. 보통은 우회로 해서 이야기하는데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너무 밀착되어버리는 것, 밀착되어 버리면 뭐가 없어지느냐? 이게 없어져요. 결여. 모자람이 없어져 버리면 이 사람은 오늘 살고 끝날 사람이에요. 술 먹으면서 상사를 욕하고 있는데 상사가 뒤늦게 들어오다 그걸 들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날 조용히 부르지요. “내가 심했습니다. 좀 참을 걸.”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면에 있어서 억압하는 거예요. 억압하기. 억누르는 겁니다. 눌러주고 눌러주면서 그들에게 보상을 바라는데 그게 놀라운 거예요. 그게 희한한 거예요. 억압하면서 “네가 잘되는 것이 있을 거야.” 잘되는 것이 전부 다 뭐냐 하면 공통적인 거예요. 공통적인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이 뭡니까? “네가 참으면 승진시켜줄게. 승진하면 월급 많아진다.” 돈이지요. 모든 것은 이상하게 모든 인간이 다 다른 집에서 태어났는데 모이는 것은 어디에 모이느냐 하면, 돈에 모여요. 돈에 모인다고요. 돈은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내가 육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 쾌락의 공통적인 대체물이 돈이 되는 겁니다.

모든 문제, 교회, 진리문제로 하다가 나중에 가면 목사보고 “당신 이제 나가세요.” 하면 결국은 뭡니까? “그래 나갈게”가 아니라 “얼마 줄래?” 모든 문제, 이혼하는 문제, 전부 다 무슨 문제나면, 이혼뿐만 아니라 결혼도 돈 문제에요. 왜 돈이 나의 대체물이 되느냐? 왜 돈이 나의 대체물이냐?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나는 나에게 매여 있지만 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공통요소로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하고 대화할 때 ‘아 대화가 안 통하네.’ 하는 것은 각자 자기주장을 하기 때문에 대화가 안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화가 통하는 경우가 있어요. 돈 이야기 나오게 되면 ‘차타고 와서 피곤하다.’ 이러다가 돈 이야기 나오면 “어디 돈 벌데 있습니다.” 이러면 정신 바짝 차리지요.

공통적인 그 대체물, 그 돈, 그 돈의 정체는 뭐냐? 돈의 정체는 바로 일자(一者)라고 하는데 절대, 최후의 일인자를 통해서 인간은 그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나의 즐거움을 원할 때마다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그것은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겁니다. 십분 쉴 타이밍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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