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제3강 율법에서 생명

아빠와 함께 2020. 8. 1. 11:56

2020 여름수련회 룻기강해(천국의 틈) 제 3강 : 율법에서 생명 - 이 근호목사

세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1장 3절을 봅시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5절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죽음에 대해서 강의가 시작되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죽느냐 하는 겁니다. 죽이려면 나오미까지 다 죽여버리지 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살려두느냐? 이것은 이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이 뭔가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지난 두 번째 시간에 약간 쉽게 넘어간 것이 있어요.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못했는데 인간은 왜 쾌락을 추구하느냐?

인간은 왜 날 때부터 왜 쾌락을 추구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아니면 어디에도 이에대한 해답이 나올 수가 없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선악과자체가 인간에게 유인책이 된다는 것, 따먹기 싫고, 보기도 싫고, 탐스럽지도 않는다면 따먹을 이유가 없지요.

인간자체 내에서 인간의 쾌락이 발산되는 것을 의도하고 선악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자체가 불순한 존재다,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불순한 존재라는 것은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 봐야, 불순한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불순하게 파고 들어가 봐야 이 불순함이, 그 기운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왜 쾌락을 추구하지?’라고 파악하는 그 과정, 그 의도 자체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쾌락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뭔가 진리를 알고 싶다.’도 인간이 갖고 있는 쾌락의 일종입니다. 진리가 뭐냐, 선이 뭐냐, 악이 뭐냐, 에 대해서 “그거 왜 알려고 하는데? 그걸 알고자 하는 이유가 뭔데?” 이렇게 하나님이 물으면 답변이 궁색해요.

어제 강의에서 시간관계상 자세히 못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 있는데 계속해서 이야기 되어야 될 것이 뭐냐? 이 증상이라는 것, 인간은, 분명히 과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밥 먹고 살고 누가 건드리지 않는 한 자기가 다치는 법이 없어요.

누가 내 신체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때린다든지 그렇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신체에 다가오는 물리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데、 혼자 여론을 생각하고 혼자 다른 사람들의 평가, 평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심각하게 여깁니다. 남이 나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욕을 하는 거잖아요.

욕을 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언어적 폭력이라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부인이 자살한다든지 가출한다든지 하는데 누가 떠밀었어요? 본인이 알아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누가 떠밀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화가 난다는 거예요. 화가 난다는 이 이야기는 굉장히 분석하기 쉬워요. ‘네가 뭔데 나의 쾌락을 방해하느냐?’ 이것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이, 화를 돋우는 사람이 “네가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되잖아.”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네가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런데 글쎄 내가 왜 쾌락을 추구하게 되지, 왜 그런지 모르는 거예요. 진리를 알겠다는 것, 진리를 아는 것을 철학이라 합니다. 철학의 원뜻이 진리의 추구에요. 진리를 사랑하는 것, 진리를 알겠다는 것도 쾌락의 일종이고 바르게 사는 것도 쾌락을 일종이거든요.

인간이 뭔가 한다는 것은 이미 뭔가 쾌락 쪽에 신경을 쓰고 있고, 신경 쓴다는 것의 그 이유, 왜 나는 쾌락을, 정신적인 쾌락이든 육체적인 쾌락이든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 절대적인 그것을 어려운 말로 ‘법열(法悅)’이라 하는데요, 자기희열이지요, 그 자기희열조차도 쾌락으로 이해될 정도의 그것이 성경에 보면, 이게 불순한 존재가 되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제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이상스럽게 여기던 것을 다시 보게 되면 인간의 육체가 무엇을 만나느냐하면, 언어를 만나요. 언어라 하는 것은 명령이거든요. 누구의 지시, 누구의 지배, 언어가 인간의 육체를 만나서 방금 이 공식대로 하면 쾌락을 추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육체 + 언어(명령) =쾌락추구”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이 육체가 율법을 만나서 인간이 재편된다, “육체 + 율법 → 인간이 재편됨”, 이런 식이 될 것이라고, 나라는 육체가 하나님의 법을 만나며 나라는 인간은 괜찮은 인간으로 개선된다, 라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그걸 노리고 있어요.

룻기를 본다, 성경을 본다, 왜 보는가? 내가 지금보다 다른 사람 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 다른 사람 되고 싶은 그것이 뭐냐 하면, 쾌락추구의 하나의 방편이 돼요. 하나의 방식이 된다고요. 이 공식 이야기하면 사실은 룻기가 끝난 것인데 이거 알려줄까 말까……?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육체, 육체라 하는 것은 이 언어를 포함합니다. 욕만 해도 화가 나는 그 이상하고 불순한 존재, 인간자체가 율법을 만나서 인간자기의 재편, 내가 다른 사람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재편되는가? 율법이 재편돼요. 악이라는 것을 누가 제공하는 하면, 인간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자체가, 하나님 쪽에서 악을, 악의 실제성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어떤 점에서 불순하고 옳지 않은지, 그게 악인지를 본인이 분석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쾌락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뒤집어썼기 때문에 거기서 못 빠져 나와요. 구원되는 그것도 쾌락을 일종이거든요. 천당 가는 것도 쾌락의 일종이고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요.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왜 인간들이 이렇게 자기가 불순한 존재라는 것을 몰랐느냐하면, 모든 목적이 나의 즐거움에, 거기에 완전히 휩싸여 있기에 어떤 순수하고 순결하고 괜찮은 모든 노력도 전부 다 나의 즐거움을 위한 방편으로 끝이에요.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부터 해서 전도, 선교, 전부 다 마찬가지, 헌금하는 것부터 해서 신에게 찬양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나의 즐거움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나오는 나의 행위를 통해서 지금의 나를 보다 발전된 나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는 거지요. 어제 마지막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인간들의 세계에서의 추구하는 것이 결국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이 이상하다. 동일하게 접근한다는 그것이 뭐냐? 그 보편성이 돈이거든요. 왜 돈을 좋아하느냐 하면, 돈은 모든 욕망을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욕망 막히면 저 욕망으로 갈 수 있을 때는 수단이 뭐냐? 돈밖에 없는 거예요. 돈만 끌어 모으게 되면 이 욕망이 시들해지고 재미없으면 다른 욕망으로 갈아탈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돈이 없을 때도 욕망은 강렬하지요.

오히려 돈이 없을 때 돈만 있으면, 예를 들어 ‘아버지가 나이 50도 안되어서 벌써 혈액암이 걸렸구나. 참, 하나님도 너무하십니다. 우리 집에 돈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서 전에 건강했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산하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갈 수 있는데 사회가 더러운 사회가 되어서, 돈이 없어서, 다만 돈만 있으면 아버지를 살려서 다시 건강한 가정이 회복될 수 있다. 기도할 때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했지.’

“하나님이여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병을 위해서 돈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빠른 쾌유를 위해서 돈을 주시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묻지요. “아버지 쾌유해서 뭐하려고? 뭐하려고?” “아버지 쾌유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잖아요.” “행복해서 뭐하려고? 소고기 사먹나? 네가 행복해서 뭐할 건데? 행복하게 살려고 기도하는데 행복해서 뭐하는데?”

“행복하게 되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네가 나에게 찬양해서 뭘 얻겠다는 건데?” 네가 찬양할 때 비말, 침이나 튀기고 그렇게 애쓰면서 그렇게 해서 얻겠다는 게 뭐예요 도대체? “네가 찬양해서 얻겠다는게 뭐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지요.” “그래.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네가 나에게 얻겠다는 것이 뭐야? 이 불순한 인간아.”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영광 돌리겠다는 그 걸 우회로로 해서, 그걸 과정으로 해서 결국은 네 쾌감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이잖아요. 나오미가 아주 속물이에요. 나오미 욕하면 안 되지만. 나오미라는 여자는 그 가문의 이름자체가 엘리멜렉이거든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나의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 이름은 거창하게 지었어요. 집구석 꼬라지하고는.

제가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욕망은 어떤 일정한 방향이 있는데 그 방향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버지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 아버지라는 표상은 그냥 남자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전부 다 가능하게 하는 표상으로서의 아버지에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창세기 3장 떠오르지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이 쾌락, 과일을 따먹는 날에는, 그 쾌락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네가 신처럼 된다는 거예요. 신처럼 된다. 인간에게,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다니는 사람이나 인간에게 최고의 아버지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에요.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즐겁게 쾌락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 일치되는 속성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나의 삶의 동기로 쾌락을 추구하는 동기로 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아버지하고 아는 사이가 된다면 나는 얼마나 즐거울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얼마나 즐거울까, 최고의 경지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율법을 주신 하나님 쪽에서의 대처는 뭐냐?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것. 그래서 율법의 혜택을 입은 사람의 최고의 행운은 뭐냐? 율법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내가 살해당하는 겁니다. “네가 율법 맛 한번 볼래?” 내가 죽는 겁니다.

룻기 1장 3절에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5절에 보면 말론과 기룐, 말론의 뜻은 보잘 것 없다, 기룐의 뜻은 소멸한다, 둘 다 이름지은 것이 이상해요. 허접스럽게 이름을 지어놨어요. 말론, 기룐, 보잘 것 없다, 소멸한다고 이름을 지었다 이 말이지요.

“어이, 보잘 것 없는 애야! 물 한 그릇 떠오렴.” 애 부를 때마다 보잘 것 없다는 거예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부를 때 “어이, 농담아! 여기 앉아라.” 이런 식으로 같잖아서 웃었다는 말이지요. “이 같잖은 존재야!” 그런 뜻이지요. 에서 같은 경우에 “몸체가 붉은 인간아! 몸체가 딱딱하고 붉은 인간아! 피부병이 있어? 왜 이렇게 딱딱하지?”

야곱은 “이 사기꾼아!” 이런 것. “너 날 때부터 네 성질 알아봤어. 형에게 안 지려고 몸부림치는 것 봐라. 성깔 봐라 성깔.” 그러니까 이런 모든 이름들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죽어 마땅한 이름이거든요. 흙에서 났으니 흙인 거예요. 흙이라는 공통성을 두고 거기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인종들이 퍼져봐야 전부다 흙으로 귀환, 귀속됩니다.

인간들이 모르는 것은, 내가 날 때부터 죽어줘야 된다는 사실을 자꾸 그걸 놓치고 인생을 살아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는 일관되지요. 양보 없습니다. 확고해요. “죽을 인간아, 죽어라.” 이렇게 나오지요. 뭘 로 죽일 것인가? 그냥 인간을 죽여 버리지 않아요. 살려두고 죽이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인간자체를 지배하는 불순한 존재 마귀지요, 뭐 악마, 불순한 존재와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율법이 인간과 마주치면서 율법이 자기 챙길 것은 다 챙기는 거예요.

인간이 율법을 가지고 어떻게 시도를 하는 것, 룻기1장 11절부터12절에 나오지요. 성경 신명기 25장 6절에서 9절, 하나마나 한 소리 또 하는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제가 읽습니다.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 형수하고 결혼하기를 싫어하는 시동생의 존재자체의 쾌락을 율법이 모독하고 거기에 침을 뱉어버려요. 율법위주가 아니고 너의 쾌락위주로 살았던 너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너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9절 끝에서부터 10절에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 신 벗기운 자. 뭡니까? 신발 던짐을 당한 자. 갑자기 정치적인 발언이 될까 싶은데 조심해야 됩니다. 각자 정치적 취향이 다르니까요.

“너는 신발로 얻어맞을 존재야.” 하고 집어던지는 그런 대상, 이것은 뭐냐? “죽어라 인간아!” 하고 똑같은 거예요. “너는 살 가치도 없어. 너는 율법만나기 전까지는, ‘시형제결혼법’을 만나기 전까지는 네가 스스로 ‘나는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지금 너는 쾌락이고 뭐고 죽음이다.”

그리고 쾌락과 함께 죽으면 쾌락이 노리는 것, 내가 전능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도 포기해야 돼요. 그래서 룻기에서 주인공이 나오미나 룻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이름도 룻기니까, 사실은 죽은 남자들이 가장 율법의 율법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 이런 발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 가지고 내가 재편되고, 내가 괜찮은 존재되고, 천당 가는 존재 되려고 하는 이런 것이 자기 개인구원론인데 나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사람한테는 이런 것이 눈에 안 들어와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어제지요. 낮 설교에서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붙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서 내가 달려간다,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12절에 보니까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뭔가 구원에 대해서 아직 미진한 것이 있고 모자람이 있고 결핍이 있고 남은 것이 있다?’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 때부터 잘나간다는 소위 신학자들이 뭘 했느냐 하면 ‘Aleady, not yet.’ 이걸 거론하는 거예요 ‘이미 아직’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그림까지 그려요. 파루시아1, 파루시아2,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이미 아직’이라는 중첩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구원되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 말 자기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이미 아직’이라는 이론은 네덜란드 계통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했는데 그것은 이미 네비나스라는 철학자가 알려준 거예요. 네비나스라는 유대인 철학자가, 신학자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아직’이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적인 시간관에서 이미 나왔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이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나왔던 이야기에요. 신학이라는 자체가 전부 다 철학의 잡동사니들이에요.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가, 성경가지고 구원을 요구하는 것, 그 구원론이 서양철학이에요. 인간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 번도 인간은 내가 구원되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본인이 따져본 적이 없어요.

구원자체가 쾌락이잖아요. 천당 가면 좋겠다. 천당 가면 좋지요. 불교적으로 하면 생로병사, 누구나 어렵게 살기 때문에 욕망의 결핍이 생기고, 그 결핍은 어떤 보상으로 주어져야 되는데 그 보상이 뭐냐? 예수 믿고 천당 가는게 보상이에요. 그러면 누구 좋으라고? ‘지금은 내가 하찮은 존재지만 나중에는 내가 괜찮은 존재로 전환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천 독 만 독 봐도 자기 좋으라고 성경 보는 거예요.

성경 볼 때만 그렇습니까? 놀러갈 때도 자기 좋으라고 하지 않겠어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옆에 있던 부모, 아빠, 엄마, 형제, 동생, 교회, 학교, 국가, 전부 다 이것은 자기 좋으라고 그런 것들에 자기 욕망을, 어떤 경우에는 억지로 누르고, 어떤 때는 좀 힘들다 싶으면 그들에게 대들기도 하면서 인간들은 자기서술, 자기내러티브, 자기역사를 써가는 거예요. 자기만의 일기장을 써가는 겁니다.

결국은 히스토리,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my story, 마이 웨이,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마이웨이, 결국 인생은 자기 일기장을 써가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는 아무 소용없어요. 주께서는 너의 일기장이 아니고 율법의 일기장, 언약의 일기장, 하나님의 일기장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구원받겠다는 그것이, 구원받겠다는 의도자체가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악마의 수작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이걸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지옥 가잖아요.’ 하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지옥 간다고 그걸 걱정하는 그 의도가 이상해. 하나님께서 배치하면 배치되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 군에 갔을 때 “너는 103보, 너는 101보 가라. 너는 전방으로 너는 후방으로 빠져라.” 그것은 국방부에서 다 내려오는 거지요. 그런데, 전방 가는데 인상 찌그러져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 원통 갔다고 그런 식으로 가고 후방에 있는 마산의 통합병원에 간다고, 휴가 자주 나온다고 좋다고 하고, “너는 무슨 빽으로 거기 갔느냐?” 그렇게 하는데 모든 인간의 자리와 설정에서 좋아하는 것도 문제 있고요, 그걸 슬퍼하는 것도 문제 있고,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평가하고 평을 내린다는 그 자체가 내가 마치 나 말고 내 안에 아버지가 또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내 인생을 평가한다고 치고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평가의 도중에 우리가 새치기해서 끼어드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평가하지 말라고. 남 평가하지 말라는 말은, 나 평가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내 안에는 남들의 요구조건, 그것만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남 있다. 내 안에 너 있다는 식으로.

내 안에 네가 들어 있는데, 너 하는 그것이 좋아서 내 안에 집어넣었는데 네가 갑자기 욕으로 나오니까 나는 너에게 복수하는 식으로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거예요. “봐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너, 너 보는 앞에서 죽을게. 이것은 너에 대한 충분한 복수야.”

누가 떠밀었습니까? 자기가 알아서 뛰어내리고 말이지요. 주부가 식사준비 하다가 남편이 잔소리하니까 열불난다고 “너는 소금이나 먹어라.” 하고 안 보는데서 음식에다 막 뿌리는 거예요.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 네가 뭔데? ‘나의 쾌락의 추구를 네가 뭔데 방해하느냐, 네가 뭔데 방해하느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나의 쾌락추구를, 바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그거예요. 율법과 인간의 만남에서, 아까 공식 중요한 것 있었는데요. 다시 쓸게요. 율법과 인간의 만남, 현재 이스라엘의 나오미 이 만남에서 율법이 아니면 인간 속에 있는 악을 끄집어낼 방법이 없어요. “인간 + 율법(이스라엘, 나오미) = 악.”

만남을 통해서 뱀의 후손들, 뱀의 자녀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마스크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을 막아버렸어요. 신종코로나 나오고 난 뒤에 좋은 점이, 장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첫째, 기차간이나 버스간이 조용해요. 이야기를 안 하니까. 두 번째 좋은 점은, 지하철에 노인들이 없어요. 노인들이 없으면 지하철이 조용해져요.

노인들은 귀가 어둡기 때문에 휴대폰 받을 때 “그래, 뭐!” 시끄러워서 안돼요. 노인들이 쓸데없이 안 돌아다녀서 좋아요. 세 번째, 코로나가 좋은 점은 마스크를 해서 개성들이 없어졌어요. 그 나물에 그 밥, 똑같아요. 인물이 좋은 사람들도 얼굴의 아래를 전부 가려서 2분의 1, 윗부분 얼굴의 나타난 부분과 가려진 부분이 조화가 되는지 평가가 안돼요.

합력해서 선을 이룹시다. 이 코로나도 합력해서 선을 이룬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이 세상에 왜 율법은 주어졌는가? 왜 이스라엘은 대표로 율법과 만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왜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약속의 땅에 사는가? 그들이 율법과 접함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 이미 태어나면서 죽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다시 한 번 공식화시키면 “죽음이 인간을 새 창조한다.” 죽음이 인간을 새 창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죽음의 자리에 들어갈 때는 우리의 쾌락추구도 허망한 일이 돼요. 죽음의 자리에 들어갈 때 룻기에서는 율법이 이 일을 도와줍니다.

율법으로 하여금 특히 나오미 가정, 엘리멜렉 가정을 율법으로 마주침으로서 평소 나오미가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곡해하고 있었나를 보여주고, 그 곡해가 나오미의 사적인 개인견해가 아니라 그 당시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모든 일반적인 견해가 나오미를 통해서 대변해서 율법과 만나는 겁니다.

따라서 나오미 가정의 남자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땅의 남자들은 다 죽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다. 처음부터 모든 남자는 다 죽어야 됩니다. 왜? 모든 인간은 아버지를 추구하기 때문에. 여자든 남자든 다 아버지를 추구해요. 프로이트는 그 아버지를 ‘초자아(超自我, superego)’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몸은 검사해보면 아픈 데가 없는데 자꾸 이상한 증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까지의, 프로이트도 마찬가지고 모든 학자들이나 의사들, 과학자들도 고민이 되는 겁니다. 왜 초과적인 것들이 왜 나타나는가?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의 몸에다가 뭔가 물리적으로 손가락으로 찌른다든지 주먹으로 치면 아픈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왜 멀리서 째려만 봐도 내 가슴은 왜 아픈가, 그 말이지요. 도대체 인간은 무슨 구조로 되어있기에 손도 안 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째려보기만 해도 아파, 많이 아파.

심지어 댓글을 안 좋게 다니까 그 맛있는 비빔밥도 맛이 없고 잠을 이룰 수가 없고요. 약을 먹어야 잠을 자고. 도대체 What happen? 도대체 무슨 일이? 도대체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무슨 일을 일으키십니까? 무슨 일을 발생시키십니까? 내가 몰랐던 나, 내가 아무리 찾아도 모르는 나,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도 모르고 그냥 곱게 요양병원 갔다가 코로나 걸려서 곱게 합병증으로 죽어버려요. 도대체 평생 나는 내가 누군지,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님을 따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왜 초과적이고 왜 증상이 나타나는지, 그것.

이상하게 인간은 언어에 놀아나는 것, 주위의 시선과 말, 왜 거기에 하염없이 놀아나는가? 그리고 반대로 누가 좀 칭찬하고 잘했다는 이야기 들으면 갑자기 엔돌핀이 확 도는데 왜 그놈의 엔돌핀은 왜 언어에 춤추는가? 말 한마디에 가만있던 엔돌핀이, 그놈의 엔돌핀이. 과학적으로 따져도 어떻게 분석이 안돼요.

언어라는 추상적인 관념과 이 몸체라는 물질적인 것이 매치가 안 되네요. 연결이 안돼요. 누가 설명을 해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왜 쾌락에 정신없이 놀아나는가? 쾌락이라는 것이 왜 유인책이 되는가? 그것은 나오미라는 이 여성을 망가지게 해서 망가지면서 나오미에서 발견되는 것은 뭐냐? 바로 반발심이에요. 원초적인 반발심.

아, 인간 속에는 내가 아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아는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초과적인 것에 극렬하게 반발하는 심보를 발산시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 다시 말해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 같은 뜻이지요, 엘리멜렉이거든요. 여기서 하나님은 왕, 이게 언어지요.

이런 개념들, 언어를 동원시켜서 나의 육체에 이 언어를 플러스 시키는 거예요. 내 육신에다 하나님을 플러스 시킬 수 있다고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해요. ‘나 하나님 믿어. 이게 뭐 불편해? 이거 이상하지 않아. 당연한 거 아니야? 하나님은 나를 창조했고 나는 피조물이니까 나는 믿어.’

그러면 묻지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뭡니까? 다른 사람은 안 믿는데 믿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나에게 좋으니까.” “누가 좋다고요?” “내가 좋으니까.”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이네요. 당신이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에게서 온 율법은 나를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나를 죽이지요.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delete,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없애는데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네가 없어져야 될 이유가, “이 율법에 대적하고 반대하는 요소가 네 안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게 율법으로 없앴다.”라는 이야기를 율법 쪽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룻기는 뭐냐 하면, 율법이 인간을, 이스라엘을 만나서 뭐로 재편되는가? 왕제도로 재편돼요. 율법 스스로가 어떤 인물을 생산해요. 쉽게 말해서, 이게 쉬운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율법이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자아를 끄집어내요. 인간의 자아를 대체하는 자아를 끄집어냅니다.

이 자아는 뭐냐? ‘무연고적자아’에요. 아무 연고 없는 자아, ‘초과적자아’지요. 그 누구한테도 얽힘이 없는 자아. 조용하니 알아듣는지를 모르겠어요. 지금 저와 여러분 이야기에요. 이게 우리 이야기라니까요, 우리 이야기. 나오미가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율법, 아까 신명기 25장을 언급했지요. 율법을 안다 그 말이거든요. 알아서 화근이지요.

율법을 알아서 그 율법가지고 잃어버린 우리 집안을 일으켜보려는 거예요.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남편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남편만 죽이지 않고 아들까지 죽인 이유가 ‘시형제결혼법’이 인간의 능력으로, 이 집안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자식을 못 낳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식을 못 낳으면 그것은 저주지요.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하나님의 상속분, 기업분이기 때문에 자식이 없다는 말은 그것으로 끊어지는 겁니다. 엘리제사장가문이 그래서 저주받은 것 아닙니까. 사무엘 만났던 그 엘리제사장. 그것도 마찬가지지요. 사무엘은 하나님 쪽이고 율법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 어린 사무엘. 그에 비해서 엘리는 율법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에요. 엘리에게는 아들이 있었잖아요.

오늘 본문 룻기에서는 아들이고 뭐고 다 죽었어요. 아들 죽었으나 있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있어도 그것은 죽은 아들이지요. 왜? 율법에 대적하니까. 제사에 바쳐진 제일 맛있는 사태살 갈고리로 건져서 자기가 먹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 되는 엘리보고 책임을 묻지요. “네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기를 하나님과 아들 가운데서 아들을 존중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기 때문에 그 집안은 끝났다.”

참, 이 말씀이 엘리제사장한테 해준 말씀인 동시에 유일하게 사무엘과 만났던 그 인간이 우리를 대표해서 사무엘을 만난 거예요. 엘리 안에 우리 있다. 오늘 ‘있다’가 너무 많이 나오는데 제목을 ‘있다’로 할까요? 엘리제사장 안에 우리 있다. 우리가 있는 거예요. 내 집안만 건사하면 오케이. 왜? 율법이 아들 못 낳는 것, 대가 끊기는 것은 저주받는 것이라 하니까, 율법에 기록된 대로 아들이 있다면 우리 집안은 괜찮은 집안이다,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도 누가 생각했느냐 하면 한나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나 아시지요. 사무엘의 엄마. 한나하고 대적자가 있었는데 브닌나. 한쪽은 ‘나에게 아들 있다. 믿음 좋으니 뭐하냐? 난 아들이 있는데. 실리를 챙겼잖아 하나님이 살아 있는 축복의 증거를 줬잖아. 아들이 있다.’

여러분, 이게 참 어디서 끌어온 유세인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이러대요. “손자 있어요?” “예, 딸이 있어요.” “그러면 또 있어요?” “이번에 아들 낳았어요.” “야, 히트 쳤네. 아들을 낳았으니 그 집안은 됐다, 고마.” 아들 낳았으면 되었다는 거예요.

브닌나가 율법을 보면서 아들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옆에 딱 보니까 한나가 아들이 없거든요. ‘그러면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잖아. 너는 저주 상대적으로 나는 축복.’ 악에 받쳤던 한나는 ‘분명히 저건 신앙적으로 적이 맞는데 왜 하나님이 저쪽에 아들을 줬는지?’

그래서 한나가 악바리로 기도합니다. 얼마나 기도를 했던지 “아줌마! 술 잡쉈어요?” 기도하면서도 그 말을 알아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한이 맺혀서 기도합니다.” 여기서 적을 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율법에 의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서 창조된 그 아들은 한나에, 한나 집안에 소속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바치운 자 사무엘이 되는 거예요.

이게 원리에요. 이 원리는 어떤 것도 나라는 것으로 귀환되거나 귀속되지 않아야 돼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어떤 것도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어떤 것도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아야 돼요. 주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요, 나를 선제심판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율법으로 엘리멜렉 가정의 남자들 다 죽이듯이 주님이 주시는 믿음, 소망, 사랑이 나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손 떼라, 나를 주의 일에서 배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에게 어떤 짓도 의미가 없는 것, 이런 사람만 천국 갑니다. 그래서 주일 낮에 했지요. 천국은 의미 없는 행위자만 간다고요. 자기에게 의미를 가진 사람은 모조리 지옥 갑니다. 천국은 의미 없는 행위만 한 사람만 천국가요.

식사할 때 어떤 분이 좋은 질문 했어요. 강도가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강도는 알아요. 자기는 평생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 세리도 마찬가지고, 창기도 마찬가지고, 강도도 마찬가지고, 모두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내 쪽에서 “이것은 나의 것입니다.”라고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혹시 또 어떤 사람이 오해하기를 “돌아온 탕자가 그래도 의미 있는 행동을 했잖아요. 돌아왔잖아요. come back home, 돌아왔잖아요.”

또 그렇게 따질까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돌아올 때 아버지의 아들로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분명히 아들이었다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저를 아들 말고 종으로 사용해 주옵소서.” 돌아오는 것조차도 나의 아들 됨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행위입니다. 의미는 율법의 완성자가 주는 것이지 우리가 용 써서 열심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안 되는가?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평생 지금껏 살면서 나를 독려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해줬던 나의 신이 있어요. 그 나의 신을 다른 말로 두자로 우상이지요.

나의 신은, 나의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가장 좋은 것들을 내 것으로 돌려주는 신이에요. 여기에 율법이 개입되면 내가 율법을 해석하고, 복음을 해석하고, 십자가를 해석하고, 그 모든 것을 해석하면서 해석하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했기에 나에게 이런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 나의 결핍을 마저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단단한 신, 우상입니다. 이 단단한 신이 율법마저도 다 왜곡해서 해석하고요. 복음도 왜곡해서 해석해서, 이 가짜 신이 나와 한통속이 되어서, 우리는 나의 쾌락을 중지시키지 못하고 계속 살려서 키우고 바벨탑처럼 천국까지 이끌기 위해서 자기 혼자 짝을 이루지요.

그래서 ‘나+신’ 이 신이기 때문에 이 신은 나의 모든 의도와 기대와 목적과 모든 것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기대란 다른 말로 하면 기도지요. 기도에 헌신과 헌금과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 예배참석 이 모든 것을 전부 이 신이라는 창고에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이 신은 나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이 신에 대해서 누군가 공격을 한다면 내가 이 신의 하수인인 내가 공격하는 이 인간을 향하여 공격합니다. 신을 먼저 공격했고 그래서 되받아서 공격한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하면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무슨 사건인지? 바로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를 믿는 민족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여호와를 믿는, 그것도 전통적으로 믿는 민족에게 죽었어요. 어느 땅에서? 그 약속의 땅에서 죽었어요. 약속을 구현하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약속을 구현하는 다른 방식이 있는데 일단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방식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절대적으로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에 대해서 공격을 할 때에 이 신이 인간에게 지시를 내리지요.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여기에 대표적으로 간택되고 선별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탄을 집어넣어 버려요.

“사탄아, 가룟유다야, 네 할 일 해야지.” 사탄보고 가룟유다가 할 일 해야지, 하는 것은 가룟유다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 말고 예수님을 겨냥해서 하는 그 행위, 그 행위가 시발점이 되어서 십자가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 완료가 돼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 인간들은 몰랐는데 인간속의 신은 알고 있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데가볼리의 무덤에 있던 귀신들린 두 사람이 예수를 만나자마자 상당히 인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초과적인 이야기가 나와요. 뭐냐 하면 “예수여 우리를 왜 멸하려 왔지요?”

여기서 ‘우리’라는 말을 써요. “우리를 멸하려 왔지요?” 그 안에 2명 정도가 아니에요. 다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군대귀신 들린 청년 알지요. 군대귀신 들린 청년 이야기를 할 때 사람 속에 군대 귀신 들렸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이 이미지를 성경에 맞춰서 제가 그려보겠습니다.

보통은 사람 속에 귀신이 들렸다, 이렇게 하는데 일단은 사람의 피부를 얇고 투명한 습자지로 만들어 봅시다. 요리도 그런 게 있지요. 만두인데 피가 아주 얇아서 그 속이 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만두.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귀신들린 몸을 하나의 투명한 유리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윤곽은 이렇게 있고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은 그냥 유리니까 통과해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없다고 치고, 하나의 점선으로 치고 그 안에 귀신이 바글바글 들어 있는 거예요. 군대귀신이 천명인지 2천명인지 만 명인지 모르겠다만 하여튼 수많은 군대귀신이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전부 다 하나같이 시선을 모아서, 딱 이렇게 일제히 한곳을 보면서 ‘하나 둘 셋!’ “우리를 멸하러 왔지요” 합창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이 비슷한 이미지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느냐 하면 <반도>라는 영화가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여러분이 걱정을 하는데 반도라는 영화에 보면 지하철역에서 내려오는 거기에 벽이 있어서 안 보이는데 딱 보니까 좀비가 너무 많아서 서로 엉켜 있는 거예요.

그 엉켜 있는 그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마치 남자 목욕탕의 사우나실에 남자가 한 백 명이 들어가 보세요. 그 투명유리 안에서 막 싸우고 그런 모습이 다 보이듯이 이 얼마나 흉측한 모습입니까? 흉측한 모습인데 문제는 데가볼리에 있는 돼지 키우는, 축산업을 하는 이 아저씨 아줌마한테는 이 두 사람이 뭘로 보이느냐 하면, 그냥 두 명의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귀신들이 나가서 돼지 떼에 올라타서 바다에 다 빠졌는데 갈릴리 바다에 빠져서 몰사했을 때에 데가볼리 주민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축협에서 받은 대출금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와서 돼지 다 죽어버리면 우리는 대출금 어디에도 갚을 길이 없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발 싹싹 비노니 우리 마을에서 제발 떠나주옵소서.”

귀신 쪽은 보니까, 자기보다 좀 못하니까 상대적으로 자기는 괜찮아 보이잖아요. 귀신은 반기기까지는 안하지만 좀 멀리 떨어지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밀어내고.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지요. 십자가사건으로 다시 인간들의 성경해석법 신학을 재조명해야 돼요. 십자가해석가지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학하고, 무엇 때문에 신학교수하고, 목사하고, 무엇 때문에 교회 나왔는지를 다시 재조명해서 이 얄팍한 습자지같은 우리의 몸 안에 도대체 귀신이 몇 명 들었는지를.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십분 쉽시다. 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귀신의 영향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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