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5강-룻기 강해 : 예외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룻기 1장 22절에,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절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양식은 곧 그 백성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식 사러 보냈고 제자들은 예수님 양식도 계산하면서 사러 갔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돌아보니까 예수님 식사하셨냐고 물어보니까 나는 이미 양식을 먹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빵을 우리보다 선제해서 드린 사람이 누구냐 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은 자기가 먹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보아라.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자가 추수에 들어갔을 때에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본인의 업적이 되고 양식이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 자체가 예수님은 추수하시는 분이고 그렇게 추수된 결과물로서의 성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말씀드린 것은 신약의 이야기고 신약이란 정답이 왔을 때 구약은 이 정답을 향하여 어떻게 질주하고 있느냐, 어떻게 관련돼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추수할 때 누가 모이느냐 하면, 추수현장에 추수의 하이라이트는 거지 떼 출현이에요. 거지 떼의 출몰입니다. 거지 떼의 특징은 땅이 없는 자에요. 주인이 자기 밭이니까 추수를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율법을 보게 되면 추수할 때 매정하게 탈탈 긁어서 가져가지 마라. 보통 나누기 셈법에서 딱 떨어지지 않고 나머지가 있잖아요. 그 나머지에 대해서 마저 너의 것을 거두지 마라. 이게 하나님의 추수에 이들이 바로 초과분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여러분, 추수할 때 냉정하게 자기 밭에 떨어진 이삭까지 말끔하게 가져가지 말라는 그러한 율법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유지합니까, 아니면 제사장이 성막에서 제의 또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을 유지시켜줍니까? 둘 중에 어느 거예요?
다 같은 율법인데 제사장은 율법대로 드려야 되고 일반 농사짓는 사람은 떨어진 미진한 부분을 초과분을 줍지 말아야 되는 이 율법 사이에 제사 똑바로 드려. 안식일마다 제사 드리라는 이 지시와 농사하는 사람이 이삭을 다 긁어서 몽땅 가져오지 말고 여유분을 남기라는 그 말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이 점을 물을 때 답변은 여러분들이 아시겠지요.
제의 또는 제사가 이스라엘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보수적으로 바꿉니다. 보수적이란 뭐가 없느냐 하면, 초과분이 나타날 수 없어요. 보수적이란 것은 항상 안정권을 추구하는 겁니다. 어떤 집단이나 단체가 있을 때 그 집단, 단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늘 안정권을 원하는 이유가 반드시 일단은 본인이 결핍된 것을 그 안정권 된 사회 또는 조직에 대해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 마음을 많이 낮춘 거죠.
대기업에 원서 내다가 주위에서 하도 실력도 안 되는데 왜 내느냐 해서 지방 중소기업에 원서를 냈더니만 덜컥 합격이 되었다. 그럴 때 젊은 사람이 대기업에 원서 내는 행위를 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예상하겠습니까. 양복 입고 에어컨 팡팡 나오는 그런 회사에 들락거리면서 토요일에 선 자리가 가면서 내 레벨에 맞는 아가씨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친구들에게 나는 이 정도 여자와 지금 교제 중이라 할 때 남들은 얼마나 기죽을 것이며 나는 성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게 여러분들의 교만이라고 생각 드십니까? 교만이 아니고 자기 딴에 많이 겸손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대기업으로 만족하렵니다. 이 정도로 마음 많이 낮췄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달래고 추스른다 하죠. 그래서 욕구의 나와 욕망의 나에서 욕망의 나가 하는 일은 늘 그때그때마다 추스르는 일을 해요. 추스른다는 말은 오므라든다. 봉합을 하는 거예요.
봉합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보수적 체제가 되고 거기서 자기가 안정권을 원하는 겁니다. 마음 추스르는 건 알지요. 안정시킨다. 이게 자기의 보상이 충분하다고 보지요. 이게 우상이죠. 거기서 억지로라도 만족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게 우상입니다. 전혀 새롭지 않지요.
그런데 중소기업에 합격된 사람은 막상 가니까 에어컨이고 뭐고 거의 사무실에 없어요. 현상근무해요. 현장은 실내온도가 45도내지 여름 되면 50도까지 올라가요. 진짜 아침에 눈 떠서 직장 가면 오늘도 지옥에 가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일이 어떻게 편한가, 악하냐가 아니라 일을 하는 환경조차도 투자가 되지 않아서 대기업 환경과 중소기업 환경과 완전히 질이 다릅니다. 도대체 이게 사람 일하란 말인지, 죽으란 말인지 분간이 안 돼요.
그러나 그 중소기업보다 더 못한 현장이 얼마든지 극한직업들이 많아요. 그리고 같은 회사에서도 부서별로 작업환경이 차이가 너무 나는 거예요.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속으로, 나 같으면 때려치운다 하지만 그 현장에 있는 사람은 때려치우지 못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이 있어요. 이거라도 감사해야 될 요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감사가 되면서 세월이 지나면 안정권에 속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됐지. 남들 보기엔 겸손하다 하는데 그것은 이미 자기 제사 된 거예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율법이 사람들이 처음에 율법대로 주신다는 게 뭐로 전환되느냐 하면, 율법대로 지켜서 얻어낸 나의 성과로 이해하게 돼요. 하나님이 분명히 값없이 줬는데 그 다음부터 자기 처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내가 교회 와서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이만한 것도 건졌다고 본인이 해석을 한다고요.
왜냐하면 이러한 보수적이고 안정권인 체제에서 의미가 발생될 때 이 의미는 나에게 최고를 원하는 아버지 자리라 했지요. 최고의 자리를 원하는 내가 이만한 의미라도 자족하기 위해서 내 의미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 의미 받아들이려면 결과의 의미에 있어서 나의 의미가 유지되려면 계속해서 살아 있으려면 내가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성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내가 최고가 되는 것과 가장 가까운 이해 방법이에요.
사는 보람,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주변에 있는 것으로 증명이 됨으로써 자기가 고귀한 존재가 되고 소중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소중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 교만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나마도 마음을 많이 낮추고 추스른 겁니다.
“너희 교회 몇 명이고?” “요새 젊은 애들 코로나 때문에 많이 안 나왔어. 몰라. 칠백오십 명 되는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너는 얼마 되나?” “우리 교인 일곱 명인가.” “거기 다니지 말고 칠백오십 명 다니는 교회 나오지.” 서로가 교만한 게 아니고 서로가 안정권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교회에서 내가 좋은 선택을 했다는 결과로서 인생을 이만큼이라도 건사했다. 그걸 전에 강의하면서 용어를 뭐라고 했던가요? 기억나십니까, 이런 삶을 뭐라 했습니까? (선방) 그렇지요. 선방했다. 이 정도라도 내 인생 선방했다는 생각이 억지로라도 유지가 돼줘야 우리는 겨우겨우 버틸 수가 있어요. 이 땅에서. 우리가 대한민국에 있어서 버티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이 있어서 버틴다고. 내 것이 없으면 정말 아무리 대한민국 좋아도 내가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내 것이라는 그 봉지 뜯어보면 내가 노력해서 힘들게 해서 모아놨던 그런 것들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중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고 빠지지 않고 출석했고 하나님께 열심히 말씀 순종했고 교회 충성하고 교회 봉사하고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헌금한 그것을 그 날짜에 빠뜨리지 않은 그 대가로 이만큼 했으니까 선방했다가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을 은혜로 주었지요. 이 은혜를 누가 훼손하고 있고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받았다는 내가 누굴 방해해요, 누굴 망칩니까? 주님의 은혜를 모독 주는 거예요. 현재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상태에요. 제사장 중심의 제의중심은 이미 보수적입니다. 율법대로 굉장히 안정화된 것 같은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 나라가 지금 중도에 있다는 거예요. 온전한 완성단계가 아니란 겁니다.
그걸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되풀이 반복되는 형식문 나오지요. 그들에게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대로 했다. 지 마음대로 했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문장을 이렇게 이해해선 안 된단 말이죠. 그들이 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각자가 알아서 율법대로 잘 살았다. 그러니까 그만큼이라도 이스라엘은 유지된다, 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새로움을 봉쇄시키고 그저 안정권에 보수적으로 이만하면 됐다고 유지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 가운데는 내가 잘나서 이만큼이라도 유지됐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선 이걸 깨야 되겠지요. 왜냐?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거거든요. 은혜가 도중에 행함으로 전환되었으니까 이것을 좌절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 좌절시켜야 될 이유가, 이번 강의에서 상당히 중요한 표제 하나 제가 적습니다.
율법은 스스로 움직인다. 율법은 스스로 꿈틀거린다.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은 본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겁니다. 스스로 꿈틀거려요. 누구한테 포장당하고 누구한테 명령당해서 그 자리에 가만있질 않아요. 율법은 그 목적을 향하여 멈칫거림이 없었고 저항 받은 적도 없고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율법의 목적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의 언약이 목적이 다할 때까지 멈추는 법이 없어요. 인간들이 괜히 율법을 지킨다 해서 자기 처지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을 낮추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율법의 나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만족에 빠졌을 때에 제의, 제사를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복은 섭섭지 않게 주겠지, 이런 사고방식으로 있을 때에 여기서 보수적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구멍을 뚫어야지요. 구멍을 뚫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 보세요. 교회 이야기하다가 멈췄지만 교회에 국가가 공격하니까 수용하면서 물러갑니다. 또 공격하니까 물러갑니다. 왜 교인이 교회 지키는 겁니까? 성경에 교회 믿어서 구원받는 대목은 제가 알기론 없어요. 제가 잘못 아는지 모르지만 제가 알기에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습니까? 내가 알기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서 구원받는 것. 예수의 피 자리에 교회가 들어설 수 있다, 없다? 어떤 교단이 들어설 수 있기, 없기? 행복한 가정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지요.
2장 1절 봅시다. 여러분들이 2장 1절에 속아 넘어가선 안 돼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여러분 여기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보아스란 사람이 훌륭하고 지혜롭고 가난한 사람 배려할 줄 알고,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다른 체제로 바뀔 수 있겠어요, 못 바뀌겠어요? 훌륭한 사람이 있어도 안 바뀌는 겁니다. 바뀔 수가 없어요. 룻으로 인하여 바뀌지 보아스로 인하여 바뀌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존경하고 선망하면서 그 사람을 보수적 체계에 핵심인물로 우상시하고 그냥 박아놓으면 끝이에요. 당신 덕분에 우리가 잘 됐으니까 고맙다 하겠습니다. 끝. 무슨 체제가 바뀔 리 있습니까. 율법은 스스로 움직이는 데요.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인생을 살면서 이 점을 발견해야 돼요.
선행은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이에요. 착한 일은. 동의 안 하는…… 내가 선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여, 더 이상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나 선행하면서 이대로 쭉 갈래요. 착한 일 하던 대로 살 테니까 나를 집적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에요.
남녀 사이에서 총각, 처녀가 사귀면서 여자가 남자한테 복수하는 방법이 남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게 하나에요. 착한 일하는 게.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이 아니고 배틀하는 거예요. 누가 상대에게 더 잘해주는지 배틀하는 겁니다. 그렇게 선행하는 이유는, 너는 선행이나 받아먹어라. 그 대신 너는 내 영역에 손톱만큼도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상대방을 선행으로 우위에 서는 겁니다.
이러한 속성이 인간들에겐 다 있어요. 하나님은 나쁜 사람이나 죄 용서하세요. 이 정도 되는데 하나님도 그다지 하나님도 생각해도 따져볼 게 별로 없지요, 이런 식으로 그런 마음자세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거예요. 내 선행을 내가 지키는 가운데서 사는 즐거움을 쾌락을 누리겠다는 거죠.
그러나 율법에는 제사만 드리라는 게 아니고 율법은 뭐가 있느냐 하면, 농사짓는 가운데서도 율법은 깊숙이 개입합니다. 추수할 때 냉정하게 다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라. 이것이 레위기 19장 9절, 신명기 24장 19절에 있는데 같이 볼까요. 보는 것은 기억에 좋으니까. 레위기 19장 9절에, 먼저 찾은 사람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일 먼저 찾았거든요.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을 그렇게 지켜주신다면서 가난한 자가 왜 발생하는지 하나님께선 방치하십니까? 처음부터 가난한 자를 근절하면 안 되겠어요?
자꾸 교회 이야기 끄집어내는데 교회가 보수적이 되고 자길 지키기 위해서 정부에 밀리지 말고 아예 교회를 등록 안 하면 어떻습니까? 그럼 교회는 이 한국 땅에서는 없는 단체가 되지요. 그게 바로 교회 개방 아닙니까. 너 어느 교회 다니느냐? 교회 없~다. 영구 없다와 같은 레벨입니다. 그럼 교회 없으면 지옥 갑니까? 교회 있음의 부작용과 없음의 부작용, 있다고 여기는 것과 없다고 여기는 부작용을 생각해보세요.
교회가 있다, 교회가 없다 둘 다 교회가 있어요. 없다고 해도 교회가 있거든요. 성령께서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교회가 없을 리 없지요. 공산당이 쳐들어와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아요. 왜냐? 주님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주님께서 만든 것을 누구도 없다고 할 수 없어요.
문제는 주님이 움직여서 스스로 교회를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들고 강대상 한 이백 만원 주고 들여놓고 신학교 나온 목사 데려다가 교회라고 하는 순간 기존의 교회가 뭐가 돼버려요? 지금까지 교회가 없이 됐습니까? 아니거든요. 형식을 갖췄다고 없는 교회가 새롭게 생기는 건 아니에요. 이 말은 형식이 사라져도 교회가 사라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 만든 교회가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린아이부터 당회까지 전부 다 그놈의 교회 지키는 데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어요. 설교도 이렇게 해야 우리 교회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전부 다 설교가 그쪽으로 다 가요. 1대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어야지 세상에 눈에 보이는 걸 믿지 마세요. 2대지, 하나님의 뜻이 살아 있습니다. 뜻이 뭐냐? 이웃을 서로 사랑하고 이웃이 멀면 교인들끼리 서로 사랑해서 화목해서 이 땅에 교회가 빛과 소금이 돼야 됩니다.
설교 뭐 별로 틀린 것 없네. 3대지, 그러니까 교회가 땅 끝까지 사탄을 이기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돈 내세요. 결국 마지막에 결론은 돈 내라.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 누가 지킵니까? 교회를 만드신 분이 지켜요. 문을 열어준 사람이 문을 닫을 수 있어요. 어떤 교인이 오고 어떤 교인이 나가고 할 때 그것은 누가 할 몫이냐 하면 목사나 교인들이 할 몫이 아니에요. 처음 교회를 만드신 분이 들어오고 나가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신경 써주는 것은 그 다음에 정이 있어서 걱정 돼서 하는 건 좋은데 그걸로 인하여 교회가 좌절하거나 낙담하거나 이 땅에 교회 없다고 주제넘게 성급하게 굴어선 안 돼요. 마치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우기다가 칠천 명 있다고 할 때 머쓱한 것처럼.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돈이 나오고 그 돈을 노리면서 떼새들이 모이는 겁니다. 그거는 교회 자체가 스스로 보수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 이스라엘은 개방돼있어요. 이게 벌어져있는 거예요. 율법은 인간이 율법을 지켰다고 나타나는 그 결과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공식을 내세울 거예요. 자꾸 공식이 만들어지는데 보수적인 것은 억압이 작용하고, 율법·주님·말씀은 이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어제의 믿음을 오늘이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나는 어제의 믿음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만 오늘 닥쳐온 주님의 움직임은 어제의 믿음도 하나의 우상인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어제 그렇게 믿음 좋다고 했는데 믿음 좋은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믿음 좋은 것도 오늘 되면 하나의 우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간증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험한 겁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위에서 보자기 내려오지요.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먹어라. 베드로가 못 먹습니다. 보니까 율법에 어긋나는 거예요. 먹어라. 아예 안 됩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무슨 이런 고집이 있어요. 왜 못 먹는 데요? 주님이 까라 하면 까는 거지 못 먹는다는 말을 왜 하는 거예요, 결국?
모든 의미가 자기 쪽의 의미로 스톱이 되니까 하나님 말씀이 스스로 일하려는 주님의 개방성에 베드로가 따라가질 못하는 거예요. 베드로만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의 문제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추 개방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개방에 영 못 미치는 겁니다. 미칠 수가 없어요.
제 말은 뭐냐 하면, 나 자신을 우상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믿음 좋은 나 자신을(믿음 좋지도 않은데) 우상시하지 마라. 그럼 반대로 나는 믿음 없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우상시하지 마세요. 믿음 없는 것도 자랑이라고, 대놓고 믿음 없는 것을 자랑질하고 있어요. 누가 믿음 없으라 했어요?
판은 주님이 벌입니다. 멍석은 주님이 깔아놔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너희에겐 생명이 없다 했잖아요. 마태복음 16장. 자기를 부인하라. 그럼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가 속한 교회도 마찬가지로 부정해야 되죠. 그럼 내 믿음도 부정해야 되죠. 교회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믿음 없다는 거예요. 내가 믿음 없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고백이에요. 내가 굳이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선물 준다는데 내가 제대로 간수를 못했어. 그럼 난 탈락입니까? 잘 들으세요. 주님의 선물은 도중에 배달사고 나지 않습니다. 배달사고 날 선물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간수를 못했다? 이런 일은 없어요. 한 번 준 성령은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준 성령은 자기화 시킨 거예요. 자기 소유화시키고 나는 믿습니다, 라고 돼버리면 그 사람은 요양병원에 가서 치매 걸릴 때 그동안 믿고 믿었던 그 예수 다 날아갔어요. 치매 걸리니까 예수라는 것이 자기 기억 속에서 사라졌어요. 믿음도 사라지지요.
다시 한 번 쓰겠습니다. 선행은 하나님에 대한 내심 복수심이다. 너무 내 일에 주님이여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 부담됩니다. 내가 할 몫은 어느 정도 남겨두고 그 다음에 내가 도와 달라 할 때 하나님이 그때 도와주세요. 내가 가장 나다운 것까지 마구 초인종도 안 누르고 쳐들어오면 나는 인생 무슨 재미로 삽니까?
거기에 대한 율법의 답변은 뭐냐? 거지가 되어라. 사람 같으면 깔끔하게 긁어서 절대로 주지 않는 사람 같으면 내 것이라 여기고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 남아있는 그 사회에서 하나님은 강제로 인간의 본성의 한계를 준 거예요. 그 땅에 떨어진 것은 줍지 마, 라고 할 때 땅 없는 거지들이 주인에게 감사할까요, 하나님께 감사할까요? 어느 쪽에 감사할까요?
여기 보아스가 유력한 땅 부자가 땅이 넓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데 여기 줍는 사람이 보아스를 쳐다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쳐다볼까요? 객관식인데 둘 중에 하나인데 아무거나 찍으면 되는데. 보아스를 쳐다봅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은 남성세계였고 현재 보수적 입장을 갖고 있어요.
2장 1절 다시 보겠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힘을 가진 자가 있었으니 이름은 보아스라. 이 보아스에게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3절에 보면 여기에 룻이 등장하는 겁니다. 초과분이죠. 그동안 보아스 땅에 와서 이삭을 줍던 사람, 그러니까 마트에서 빵 같은 것, 식품 팔다 남은 것으로 미국의 대형마트에서 자선을 베풀면 그걸 단골처럼 와서 받아가는 그런 사람들 속에 누가 오느냐 하면, 이방여인이 와요.
이방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방여인의 이름은 룻인데 이방여인은 뭐가 없느냐 하면, 율법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으로부터 혜택 받지 못한 제외된 대상이거든요.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외존재에요. 젖혀놨단 말이죠. 그러니까 율법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선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통하는 연결선이 없다는 말은, 연결선 바깥에 있기 때문에 연결선 없으니까 이거는 저주받은 민족이에요. 저주받은 민족의 여인이기 때문에 예외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예외존재가 율법의 혜택을 주는 일종의 파티, 거지 떼들에 땅 없는 굶주린 인민들에게 제공되는 현장에 이방여인이 등장했을 때에 자기들끼리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말이에요. “뭐야 너. 율법도 없는 것이 왜 여기에 끼어드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가뜩이나 일자리 없는데 필리핀, 네팔, 스리랑카 이런 사람들이 와서 일자리 빼앗아 갈 때 같은 힘든 일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순서가 우리부터지 너한테 돌아갈 게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예외존재가 율법이 스스로 움직이는 하나의 구체적 인물이에요. 지난 시간에 율법에서 자아가 등장한다 했지요. 이 자아를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무연고적 자아라 했지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무연고적 자아에요. 예외상태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들 신앙에 항상 예외상태가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이게 뭐냐? 새로움이고 새로움은 하나님 말씀의 창조력의 증거입니다.
새로움이 없으면 주님이 주신 초과분, 새로움 이걸 우린 매일 겪어야 돼요. 봉쇄되면 안 돼요. 봉쇄되면 우상 되는 겁니다. 교회가 됐던 자기 자신이 됐던 뭐든지 우상이 돼요. 신학교 갓 졸업한 목사님이 개척교회해서 새벽기도부터 열심히 한다고 설교단에 섰을 때 그전에 부교역자도 아니고 가끔 설교하는 게 아니고 새벽기도부터 주일 낮 설교, 수요설교, 구역예배 등 혼자 한다고 했을 때 교회 홀 하나 2층 빌려서 해보세요.
여러분들은 목사가 아니니까 그런 경험 없겠지만 해보게 되면, 신학교 3년 간 배웠는데 곰탕 우려먹듯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요. 3개월도 안 돼서 밑천 다 떨어졌어요. 그중에 제일 밉상 교인이 누구냐 하면, 가끔 나와 주면 밑천 떨어진 걸 파악을 못할 텐데 이건 뭐 집회 있을 때마다 참석하니까 나중에 그 교인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전에 목사님 써먹었던 건데. 6개월도 안 돼 밑천 다 떨어져버려요. 없어요.
왜냐하면 목사 본인이 예외자가 돼야 되는데 날마다 새로움이 나타나는 예외자가 돼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날마다 나는 지옥 가도 괜찮습니다, 할라치면 넌 아직도 들어와야 돼. 아닙니다. 저는 지옥 가야 됩니다. 하나님 저는 율법이 없습니다. 저는 제외됐습니다, 할라치면 주께서 다시 너는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일을 해야 돼.
뭐 이렇게 돼야 되는데 자기는 아예 보수적이라. 나는 다 안다. 신앙인이다. 이렇게 하니까 본인 스스로가 깨어지는 경우가 본인 스스로 봉쇄해버리는 거예요. 이만하면 삼위일체 이야기하고 정통신학 했으니까 이단 소리 안 하겠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정당화시켜버린 거예요. 새로움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새로움은 사회적인 직장이나 조직에서 주는 게 아니에요. 교회에서 주는 게 아닙니다. 새로움은 주님과 연결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에요. 날마다 깨어지는 그 복, 날마다 내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 즐거움, 내가 뭔가 보수적이다 싶으면 오셔서 와장창 사태가 일어나서 박살나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럴 때 우리는 과거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 이야기해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 나는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많이 얻어먹은 것으로 버팁니다가 아니라 항상 우리는 예외존재가 되는 겁니다.
추수할 때 당연한 게 아니에요. 땅주인이 보아스 같이 어느 정도 배려를 해주니까 그렇지 인간의 본성이면 밭을 닫아버립니다. 봉쇄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해주는 평소에 아는 단골 거지한텐 좀 주지만 나머진 다 닫아버려요. 이 말은 보아스가 주목하는 것은 자기 소유된(하나님의 기업, 자기가 상속받은) 부동산의 관리자니까 이 한계를 지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는가를 요새 같으면 명단체크해서 다 알고 있어요.
그럴 때 여기에 낯선 이방여인이 들어왔어요. 보아스가 이 여자를 추방할 것이냐, 아니면 이 여자를 받아들이느냐? 만약에 받아들인다면 이방여인이 오는 이 경계선은 뚫려버리게 되고 여기서 율법의 새로움이 등장하면서 이 율법의 새로움은 새로운 자아, 율법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이 인물은 어떤 인물이냐 하면, 율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기존의 율법해석을 엎어버리고 움직이는 율법 그 자체가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거예요. 율법의 의인화, 율법의 인물화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와서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러한 식으로 사사시대에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 인물이 룻이에요.
그러면 룻이라는 낯선 새로운 여인에 대해서 곡해하고 오해하는 인물이 같이 하나의 짝이 되어서 등장해줘야 돼요. 그래야 새로움의 가치가 등장하니까. 그 짝이 되는 인물이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누구겠습니까? 나오미죠. 나오미는 남성형 세계입니다. 없음을 결핍으로 여기고 마저 채우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할 수 있는 여자입니다. 속물이죠. 세속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속물이지만 그 사람은 속물이 아니고 자기의 책무라고 여겨요. 이건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대로 한다면 우리 가문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구멍 나있는 남성의 자리, 자식 낳는 그 자리를 어떻게 하든 내가 채우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율법에 순종하는 그러한 태도라고 생각하지요.
나오미도 있고 룻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룻처럼 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안 돼요. 왜냐하면 나오미(룻?)는 아주 예외상태니까. 예외존재기 때문에 특이성을 갖고 있어요. 우린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나오미부터 출발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망쳐진 것은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말 자체도 내가 좀 잘했으면 남편을 잃지 않고 아들도 잃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미련 같은 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 미련이 있다는 말은 주도권을 율법에 주지 않고 주도권을 내가 쥐는 거예요. 그런데 룻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시집와서 내 남편 죽는 것도 시아버지 죽는 것도 이것은 내가 살아 있음에 신경 쓸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 망한 것은 생각 안 하고 좋다는 거예요.
차라리 그모스라는 우상,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 안 되는 인간 손으로 만든 그 신에서부터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신이 작용하는 그 현장으로 내가 들어왔다는 이것만 해도 나는 생명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다 뜻이 있어서 뭔가 의도가 있어서 내 남편 죽이고 우리 시아버지 죽였겠지. 그거는 하나님의 옳은 일이다. 율법에 준해서 바른 일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룻에 대해서 제가 만나보지는 못했어요.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 룻의 표정은 생기발랄. 생기발랄하지 않겠는가. 쭈그리가 아니고 인생 한탄하는 자가 아니라 생글생글 웃지 않았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들이닥친 모든 환경은, 내가 율법을 지키는 환경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이 자기 세계로 나를 끄집어들이는 율법의 세계로, 율법이 있는 그 체계 속으로 강제로 집어넣는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손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율법 속에 집어넣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일도 감격스럽기 짝이 없을 거고 내 것을 따로 챙기진 않을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룻은 항상 기어들어간다. 보아스한테 기어들어갔지만 율법 속에 기어들어갔다. 룻의 주특기는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맨날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멈칫하는 게 없어요. 인생에 멈칫하는 게 없어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웃는지 안 웃는지 이건 생각이니까 무시하시고요.
생기발랄하게 찡그리거나 불평하거나 시어머니에게 자기 신세 한탄하거나 이런 게 없이 그냥 생글생글 웃으면서 모름지기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을 이렇게 하세요. 현재가 미래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현재가 미래의 완성이죠. 주께서 준비한 미래 속으로 미래가 여호와 손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집어넣어서 여기 들어가게 만들어요. 그 대단한 사랑의 세계로.
율법의 사랑의 세계를 잠시 성경에서 봅시다. 진짜 이번엔 누가 읽어줘야 되는데, 출애굽기 22장 21절에서 24절까지.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아멘.
고아와 과부를 하나님이 없애는 것이 아니고 복지정책 써서 없애는 게 아니고 남겨두게 만들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버리는 작용을 하게 해요. 꼬리가 안정성 있게 우상화돼있는 몸통 전체를 흔들어버립니다. 만약에 꼬리에 대해서 네가 잘라내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등장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은 너희들 주변에 있는 고아와 과부가 가장 근접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본성은 안정권을 추구합니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 이걸 추구하거든요. 그런데 땅이 있어야 땅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사람이 의지하고 믿을 데는 하나님의 율법밖에 없지요. 믿을 것이 하나님의 율법밖에 없을 때 그 사람 속에는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인간도 율법을 못 지킵니다. 율법이 그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가진 자는 너무나 쉽게 고아와 과부를 내칠 수가 있어요. “어딜 거지가, 너 때문에 안 그래도 어딜 내 행복을 망쳐.” 잘라낼 수가 있거든요. 쉽게 잘라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진 그것을 오히려 저주가 되게 하십니다. 쉽게 잘라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가 깨어지는 내게 이 은혜가 어디서 왔는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만 거기서 스톱을 시키고 보수적이 되거든요.
그러면 주변에 고아와 과부가 있다면 그 사람과 동질성, 동일하게 봐야지요. 일치시켜야 되지요. 그럼 우리 십자가마을 기금 모아서 고아원에 갖다 줄까요? 그런 방법도 있지만 그런 방법은 반복해야 되니까 반복 안 하고 한꺼번에 하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주변에 고아와 과부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 십자가 피 흘리면 됩니다.
십자가 피 믿으면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예외 된 존재가 없어요. 십자가 진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항상 뭘 우리에게 부담되는 귀찮은 존재로 고아와 과부처럼 쉽게 끊어져나간 그분입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비춰봐야 돼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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