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6강-룻기 강해 : 후견인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 이어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말소하지 않고 그 사회에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아와 과부를 만들어냅니다. 만들어낼 때 하나님 내 편이라고 알리기 위해서 자진해서 고아와 과부된 사람 없고요. 누구나 전쟁에 나가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가장을 전사시킨다든지 아버지 없고 남편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만들어버려요.
그걸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했지요. 죄 없이 죄 지은 자라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죄 없이 죄 지은 자는 하나님이 개입한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한 것은 율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을 우상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계속 그 한계의 강둑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터뜨려버려요. 갇히지 않도록 현 이스라엘에 자족하지 않도록 강둑을 터뜨려버립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고아와 과부들의 없애도 나타나고 없애도 나타나고. 잠언서에 그런 말씀 있지요. 이 땅에 가난한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난이란 절대적 가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상위 몇 퍼센트 그게 아니고 상대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 구원받은 강도처럼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현실적으로 땅이 없는 거죠.
땅이 없다는 말, 땅이 없는 자는 아무 생산성이 없지요. 땅이 없는 자=율법이 제시하는 인물. 율법은 하나님 뜻이거든요. 하나님 뜻이 나타내고자 하는 인물, 하나님 형상 되겠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인물을 제시하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후견인이라고 해요. ‘고엘’이라고 하는데 후견인은 모든 것을 도와줄 준비가 돼있는 사람.
어떤 불상사에 대해서 불행한 일에 대해서 도와줄 준비가 돼있는 분을 이스라엘 현장에 투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나타나야 되느냐? 불상사를 감수해야 될 인물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 없이 어떤 불행한 결과가 도출되는 그런 일군의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고 생산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룻기 1장 3절과 5절을 보니까 엘리멜렉과 그 가정의 남자가 다 죽지요. 그야말로 과부가 돼버린 거예요. 과부 세 사람 남은 거예요. 한 사람은 가고 과부 둘이 한 조가 되어 남은 겁니다. 그럴 때 그 사태는 충족된 상황이 아니죠. 비-충족된, 하나님에 의해서 모자란 상황이 주어지고, 그 모자란 자리에 무엇이 부각이 되고 등장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하나님, 내가 너를 도와준다 이 말이야, 라고 되는 거예요.
네가 만약에 자충이 되면, 스스로 충족이 돼버리면 무슨 자리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줄 고엘이 나타날 여분의 자리가 사라져요. 없어져요. 그렇게 되지요. 이런 사태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고엘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고엘이 되시고 고엘의 대빵이죠. 이 땅에 고엘 같은 기능을 해야 될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있어요. 네 가지가 있는데 적어보겠습니다. 고엘, 후견자, 영어로 하면 godfather, 뒤에 도와주는 사람.
(1)고엘에게는 돈을 주고 자기 친족을 노예 상태에서 풀어줄 의무가 있다.
(2)고엘은 친족의 상속분(기업, 율법으로 받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친족의 땅을 되살 의무가 있다.
친족이 하도 가난하니까 돈이 아쉬워서 돈이 궁해서 팔아먹었어요. 그런데 돈 받고 팔아먹었지만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에요. 레위기 25장 마지막에. 부동산등기 떼면 전부 하나님 이름으로 돼있어요. 원주인이 하나님이라니까.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품꾼이죠. 레위기 25장 5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든 땅은 하나님 땅입니다. 하나님이 왕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요. 원래 주인이 율법을 통해서 어느 날 등장하는 그날이 바로 이 땅에 천국이 되는 그 시점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품꾼이라는 위상을 얻게 될 때 그게 천국백성으로 마지막 갖게 되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지요.
나는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하나님 덕분으로 하나님의 소유성의 혜택을 입은 우리들, 이것이 천국백성이 내놓을 고백이에요. 이 말은 뭐냐? 따로 내 소유라는 것이 있을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거기 대해서 신경 써도 안 되고.
(3)친족 중에 자식이 없을 경우에, 구체적으로 아들이죠. 왜냐하면 옛날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들이 없으면 친족이 그 여인과 결혼해서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된다.
1번은 뭐냐 하면, 땅에 관한 것이고, 3번은 씨에 관한, 핏줄에 관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한 게 있어요. 아브라함을 축복하기를 내가 약속의 땅을 줄 테니 네 씨가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세 가지 약속이 있어요.
하나는 땅 줄게. 현재 룻기에서는 땅은 얻었잖아요. 약속의 땅, 열 족속 몰아내고, 원주민 몰아내고 완전히 차지한. 땅 줄게, 씨 줄게, 그 다음에 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관계, 그걸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너와 너 사이에 하나님의 의를 줄게.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다 종합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게 뭐냐, 약속한 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요. 예수님의 세계에요. 여기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완전한 의, 인간의 행함이 추가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의. 새 하늘과 새 땅, 천국. 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여기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 같으면 멋지다. 소설 참 잘 썼다, 잘 썼어. 완벽한 소설이다. 또는 하나의 전설이라면 이 전설 같으면 희망 갖겠다.
전설이고 소설 같으면 이걸 픽션이라고 하거든요. 허구지요. 허구인데 위로가 되고 뭔가 소망을 갖게 되는 픽션이라면 우리는 참 고맙다, 감사하다고 하면 끝나는데 이게 픽션이 아니라면 실제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실이 오늘날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여기에 침투한다면 우리는 황공스럽게도 룻 같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나를 지키는 거예요. 말씀이 나를 친히 다루시고 몰고 다니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들어요. 말씀이.
(4)네 번째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을 침범 받는다면, 복수혈전, 대신 복수를 해주는 겁니다. 누가? 후견인이 복수를 해주는 거예요. 제가 출애굽기 22장에서 후견인이 누구라 했습니까?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후견인이죠. 그 22장 이야기 보면서 네 번째가 언급됐잖아요. 만약에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함부로 하게 되면 누가 분노합니까? 고엘이니까 하나님이 분노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내 사람을 왜 네가 치느냐? 네가 저 사람과 내가 연결된 걸 몰라? 그런데 네가 얕봐서 저 사람을 쳤다면 너희는 끝난 거야. 그렇다면 예수님의 후견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사도의 후견자는 예수님이 되고요.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이 세상에 누굴 건드린 거예요?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건드림으로써 이 세상은 전체가 단일 애굽 나라가 되는 겁니다. 바벨론이 되고 짐승의 나라가 되고.
우리는 이 세상이 좋다고 자기구역 정해서 이번에 아파트 또 당첨되었어, 이러고 있는데 그게 자기 안정성이죠. 자기 보수성이죠. 이만하면 내가 마음 추슬러서 겸손하게 감사히 받겠습니다. 끝. 그러니까 본인이 말씀에 의해서 움직인 게 아니고 제발 나를 그냥 놔두란 이야기에요. 말씀이 와서 성령이 와서 건들지 말란 이야기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도록 놔두란 거예요.
이러한 최종 고엘이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죠. 이런 최종 고엘에 가는데 있어서, 결국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의 후견자 됨, 이게 최종 완성이거든요. 이걸 구원자라 하지 않습니까. 욥기에 보면 구원자여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견자를 뜻합니다. 나의 구원자라는 여기서 어떤 일관된 길목이 마련됩니다. 다른 길은 없어요.
하나의 길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후견자로 가는 길이에요. 1, 2, 3, 4 네 가지의 원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쪽 길만이 하나님의 천국에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슨 기능을 하고 계신다는 걸 믿는다? 예수님께서 후견자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믿는 거죠. 그렇지요.
예수님의 후견자 됨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 있는 자체가 우리한테는 불상사가 되는 겁니다. 파멸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 살아 있는 자체가. 조용하게 가야산 산 속에 와서 아무도 터치하는 사람 없이 그냥 점잖게 살고 그냥 겸손하게 텃밭 몇 평 고추나 심고해서 그냥 쭉 살다 평생 이렇게 끝내야겠다는 마음을 혹시 가졌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불상사에 빠진, 지금 어떤 불행한 사태에 빠진 거예요.
왜냐? 무엇이 막혔기 때문에? 후견자의 할 일을 후견자가 필요 없는 식으로 자기가 배제하는 식으로 자기만 즐겁고 자기만 행복하면 끝. 이것을 여러분은 도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택부금 왜 부었습니까? 펀드 왜 넣었어요? 요샌 정기예금 이자 얼마 되지 않으니까. 그걸 빼서 부동산, 강남에 집은 왜 샀습니까? 여긴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다. 강남에 집은 왜 세 채를 사놨습니까?
뭘 도모하기 위해서 합니까? 후견자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살지 내가 정성 드려 이만큼 살아온 게 있기 때문에 후견자 필요 없다. 그럼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말해도 예수님의 후견자 기능을 본인이 거부한 게 돼요. 주께서 후견자하는 길을 내 쪽에서 그걸 적극적으로 저지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정도까지 오셨어요. 점점 율법이 윤곽이 보이지요. 나만 보이는가. 네 가지로 후견자하는 거예요. 도와주고 복수해주고 아쉬운 것, 네가 살아가면서 온갖 후견자가 필요한 사태는 매일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후견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게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움직이고 있고 나는 그 움직임에 다뤄지고 있다는 걸 믿는 게 예수 믿는 거거든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했잖아요. 명사가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명사 아니고 동사지요.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 이 율법체제에서 이 길, 후견자가 보이는 길까지 어떻게 가겠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찾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 찾아가기 진짜 난감해요.
왜 난감하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가 자기가 살아온 과거의 기억의 범주 바깥으론 못 벗어나거든요. 기억의 범주에 입각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안 만나고 저 사람은 친구하지 말아야 될 사람, 이 사람은 친구할 사람이고 이 사람은 거래할 사람이고 상종할 사람, 안 할 사람. 전부 다 지나온 과거의 기억의 범주 내에서 나름대로 여기서 촉수 같은 게 나오지요. 신종 코로나 같다. 이걸 맥락이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스토리, 맥락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걸 알 수 없잖아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맥락 구축에 나섭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만나면 신종 코로나 같이 자기만의 맥락이 있단 말이죠. 그냥 생뚱맞게 만나는 게 아닙니다. 만남을 통해서 맥락 구축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 내 사람 되라.” “니가 내 사람 되라.” 이렇게 하지요.
두 맥락이 과거가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로 하나로 안 되지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맥락이 다르니까요. 맥락이란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이런 자기 선이 있다면 이 선 말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복잡한 교차로에서 고가도로가 여러 개 있다고 보시면 돼요. 맥락이. 겹쳐지지 않는 맥락, 수많은 맥락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많은 맥락이 있어요.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지는데 결국 이 고가도로는 만나지 않으니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틈이 발생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번 수련회 제목을 뭐라고 정했던가요? [천국의 틈]이죠. 천국이 고정돼버리면 우상 돼버려요. 하늘나라도. 천국을 고정적으로 보는 것은 본인이 맥락 내에서 자기는 고정됐다고 여기니까 죽으면 천당 가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인생 말고 남의 인생까지 고려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세상을 다 전지적으로 다 할 수 있는 거다. 전지적 참견이라 하지 말고 진짜 제대로 전지적으로 보라 이 말이죠.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남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 유튜브나 미디어매체를 사용하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모자라요. 결국은 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중층결정’이란 말을 했어요. 알튀세르란 철학자가 이야기했는데 중층결정이란 현실은 한 가지 맥락이 아니고 여러 가지 첩첩이 중층 돼있기 때문에 현재상황은 하나의 이념으로 윽박지를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중층에서 나오는 틈, 틈이 잠시 우세가 되어 많은 중산층들이 모이게 되면 그것이 그 시대에 하나의 이념이 된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간다고 보장 못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헤게모니라 하는데 그 시대에 유행하는 이슈 되는 이념. 이 말은 뭐냐? 사회란 것은 늘 움직이는 것이라는 뜻이죠.
이 사회만 그럴까요? 이 사회가 헤게모니가 있다면 젊은 층들은 이 헤게모니의 영향을 많이 입을 것이고 보수를 지향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 헤게모니와 간격을 두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이 맥락 사이에 뭐가 생기겠어요? 틈이 생기는 겁니다. 이 틈은 어떻게 처리가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4페이지 교재 봅시다.
“같은 편이라고 여겼는데 언약의 추가로 인해 여지없이 차이가 또 발생한다.” 교회 처음 와서 진짜 성령 받았네요. 진짜 신자네요.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분을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너무나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좋다고 했는데 일 년도 안 되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차이가 발생되지요.
그래서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사랑마저 보수적이 되죠. 아까 예외상태, 하나님께서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을 흔들어버려요. 그러면 내가 우상처럼 여기는 것이 우상이 아니고 해체돼버릴 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 위주로 못 살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령의 작업입니다. 고엘을 주목하게 만들어요. 니 스스로 자립 못하겠지 그지, 라고 묻는 거예요, 자꾸.
우리는 자리 잡을 때 아버지 자리의 안정성, 최고의 자리에 앉는 것을 삶의 최고의 보람으로 여기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걸 성령으로 흔들어버리니까 난 또다시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한 게 뭐가 있지? 아무것도 손에 쥘 게 없네. 내 믿음도 믿음이 아니고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을 이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제가 읽어볼 테니까 뭔 뜻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뭔가 준다 하더라도 주지 않는 이가됨으로써 사랑할 수 있고, 설령 무언가 받는다 할지라고 받지 않는 이가됨으로써만 사랑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진짜 이상한 소리입니까. “사랑은 단지 어떤 것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그 다음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 무슨 자리? “빈자리” 사랑은 내 것도 아니고 너도 네 것이 아닌 새로움의 출몰이죠.
빈자리, 내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사랑했다고 본전 뽑을 생각하지 말란 이 말이죠. 내가 너한테 한 가락지, 금반지 다 내놔라, 이러면 안 돼요. 사랑은, 사랑은 사랑을 쉽게 해주고 그 안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게 사랑이에요. 해줬는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것은 사랑이란 하나 되는 겁니다. 하나 되기에 이 틈이란 거리는 너무나 멀고 깊어요. 하나 됨을 하나로 그 틈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이 어떤 인간에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이 생각나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온다? 저주지요. 주와 하나가 돼야 될 텐데 되는 방법이 그런 수가 없어요. 믿씁니다, 백날해도 소용없지요. 사랑한다 해도 소용없어요. 그것은 맥락뿐인데 맥락과 맥락 사이는 틈이 벌어지기 때문에 하나로 되질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녀가 한적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계산하고 나갔어요. 그러면 그 창 넓은 카페 그 자리에는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빈자리 되지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빈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사랑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빈자리, 공백, 또는 조용필이 이야기한 허공, 허공 속에 하잖아요. 남진이 말하는 둥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둥지는 없어요. 내 품에 둥지를 품어봐야 튀어나갑니다. 남의 까마귀 온 거예요. 지는 둥지라고 마련했는데 가보니까 완전히 날아온 돌이 다 가져가버렸어.
틈 자체를 생산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우상숭배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계속 틈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그래야 틈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 틈은 결국 허공으로 어딜 쳐다보게 됩니까? 바로 고엘을 쳐다보게 돼있지요. 그래서 룻은 고엘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고엘이에요.
룻은 침투요원이었습니다. 나오미 같은 사고방식으로 무장된 이스라엘에 룻이 침투한 겁니다. 그들의 보수성과 안정성 추구에 대해서 틈을 만들어버려요. 애초부터 내 것이란 건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랑은 뭐냐? 서로가 그 틈을 보고 좋아지는 거예요. 오랜만에 좋은 말 했는데. 사랑이란 둘 사이의 틈을 보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녀가 식사로 팔보채를 시켰다 말이죠. 일단 사진 찍어야 되죠. 사랑이란 뭐냐? 그것을 먹지 않고 그냥 쳐다보는 거예요. 만약에 한쪽이 먹었다 하면 다른 쪽이 화를 내게 돼있어요. 그냥 쳐다보고 그냥 나오는 거예요. 참 팔보채 맛있게 생겼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어떤 것도 자기 소유화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거기는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은 빈자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주님 하신 말씀이, 내 몸을 너희가 만지지 말라. 너희가 만질 몸이 아니다. 내가 부활로 나타난 것은 너와 나 사이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고엘의 자리, 제3의 모습으로 주께서는 죽은 자의 흔적을 가진 분으로 우리에게 열한 제자에게 개입한 거예요.
맥락과 맥락을 이어주는 것은 없음이 메워주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우리 소유의 대상으로선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가 없음에 대해서 소유 당해야 된다. 그러한 영이 바로 성령이고 그들이 사도였던 겁니다. 그런 증거는 사도행전에 굉장히 많이 나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반 했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너는 나를 속임이 아니라 너는 눈에 보이는 나를 속인다고 생각하지 마라. 바로 성령을 속임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요한과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우와, 이야. 저 사람이 앉은뱅이를 경건과 능력으로 낫게 했구나, 할 때 제 말대로 하면, 너희들은 나와 주님 사이의 빈자리를 보지 못한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주님의 능력이다. 사람들은 주님 어디 있는데, 하겠지요.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것으로 독식하는 인생을 살다보니까 빈자리 있는 것을 답답해하고 그것을 마치 허하다고 여기는데 빈자리의 여백과 공백의 자리가 갈수록 점점 더 많아져야 돼요.
여러분들이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시내 한복판에 있는 탑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불안하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지진이 나서 광야에 있는 잡풀들이 흔들리는 것을 신경 씁니까? 안 쓰지요. 그런데 바로 보아스는 그걸 신경 쓰는 거예요. 그러니 보아스가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방여인이 내 밭에 와서 겁도 없이 남정네들만 있는 남정네들 땀 냄새 맡으면서 같이 이삭을 줍는 노동을 하고 있으니까, 룻기 다시 봅시다.
원래 염려해야 될 룻은 염려합니까, 염려 안 합니까? 염려 안 한다니까. 전혀 염려하지 않아요. 읽어봤지요, 한 번씩은. 오기 전에 양심상 한 번 읽어봤잖아요. 읽어볼 때 룻이, 내가 남성들과 섞여서 노동하는 것에 대해서 뭔가 겁나고 두려워했던가요? 그런 점에 생기발랄하다 이 말입니다. 오히려 보아스와 나오미가 염려해요. 특히 보아스가 염려해요. 남자들의 찝쩍거림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여기서 보호해줍니다. 벌써 고엘의 기능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여러분 물어봅시다. 룻이 보아스 밭에서 줍는 노동을 할 때 보아스가 룻에게 이렇게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뭐냐? ➀예뻤다. ➁참했다. ➂아름다웠다. (1번) 아직 다 안 끝났어요. (4번, 4번) 하여튼 참한 것에는 다… ④비워있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비워있는 거예요. 아무도 보호자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강의 뭐 들었어요? 아무도 보호자가 없는 거예요. 지켜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본인은 아무것도 천지도 모르고 생글생글하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줍는데 줍는 이유가 뭐냐? 보아스가 보니까 마음이 어디 가있느냐? 내 힘으로 이걸 주워야 시어머니가 산다는, 왜? 시어머니에게 율법이 작열하고 있거든요. 시어머니를 위해서 내가 뭐라도 해야 된다는 이 마음 때문에 그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어떤 행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빈자리가 너무 넓어 보여요. 그 빈틈이.
이런 이야기 들었다고 또 써먹지 마세요. 보아스 만큼 괜찮은 남자 지나가면 일부러 엎어지게 되면 드라마에 보면 그 다음 순서에 밴드를 준비해놨다가 붙여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자는 상처 나면 안 돼요.” 그런 멘트하면서 붙여주면 그 다음부터 진전이 있는 이런 것, 그렇게 안 된다 했지요. 왜? 갑자기 틈이 메워지면 안 되죠. 그 남자가 주님이 아니잖아요. 아이고, 바른 소리했다.
그 남자가,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덧붙여서 여러분 예쁜 외손자, 외손녀가 주님이십니까? 아니지요. 그들과 그들 사이에 누가 개입해야 돼요? 빈틈이 개입돼야 돼요. 틈이 있어야 돼요. 너무 가까이 되게 되면 내 소유가 돼버려요. 소유가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랑으로 오인하게 되고, 사랑으로 오인하게 되면 반드시 여기서 복수가 나오게 돼있습니다.
왜 복수가 나오느냐 하면, 내 위주로 하나기 때문에 나의 하나는 항상 이 땅에서 욕망의 존재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고, 결핍이 생기면서 세상에서 뭐냐? 결핍을 메울 욕망의 대상체를 내가 갖게 됩니다. 갖게 되면 이 욕망의 대상체에 내가 하나라고 하는 상대자가 강제로 여기서 따라줘야 돼요.
그런데 맥락이 다른 존재가 이렇게 따라주게 되면 여기서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힘에 부치게 되면 자기가 준 사랑에 대해서 본전을 못 뽑는다는 생각에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 복수가 감행됩니다. 여기 점 하나 찍고 딴 여자 돼서 복수를 감행한다니까요. 내가 준 사랑 다 내놔,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게 돼요.
잘해주는 것 주의해야 됩니다. 뒤에 복수의 칼날이 밑에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쟁반에 쇳가루가 있잖아요. 그런데 쇳가루가 신기하게 움직인다 말이죠. 왜 움직이는가? 뒤에 자석이 붙어서 움직이죠. 이 자석이 복수심이라면 잘해주는 것은 복수심도 같이 움직인다고 보시면 돼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랑은 틈이기 때문에 누구 소유가 안 된다는 거예요. 누구 소유가 안 되면 복수할 수 있는 그러한 근거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사랑이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어요. 왜? 틈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틈을 만들어서 그 틈 속에 고엘이 되시고 후견자 되는 이 분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는 율법적으로 작용하죠.
율법적인 작용의 완성을 로마서 13장 6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모든 율법의 완성은 어디 있습니까? 사랑에 있는 거예요. 누구 소유가 아닌 사랑. 따라서 이 두 사람 사이도 사랑이 오게 되면 이 사랑을 보고, 아까 제가 팔보채라 했지요. 사랑을 보면서 이 사랑에 의해서 둘은 같이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하면 고엘 또는 후견자. 후견자 앞에서 우리는 전부 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으로서 충분하게 사랑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자리를 룻기에서는 왕의 자리, 엘리멜렉의 자리, 왕의 자리로 보는 겁니다. 다윗의 자리로 보는 겁니다. 율법은 그 완성을 향하여 자진해서 달려가고 있고 움직이고 있어요. 친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그런 구절 있습니다(마18:21~22).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웃을 용서하는데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헤아림이죠. 틈이 없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틈이 없이 촘촘히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틈으로, 율법을 완성하려 할 때 주님께서 틈으로 반격했죠. 일흔 번의 일곱 번 용서하라고 나왔지요. 자기 딴에 이만하면 용서라고 생각했는데 그 인식 자체가 틀려먹었기 때문에 틈이 없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반격하기를 틈이 없는 것으로 반격한 거예요.
남을 구제할 때 어떻게 하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도 틈이 없는 거예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오른손을 찍어버려라.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그리고 처음부터 네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겠다는 것을 따로 빼돌리고 내 몸은 내 몸대로 건사하고 율법은 율법대로 지키겠다는 그 꼼수, 모든 의미가 자기한테 종결되는 꼼수 있잖아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우상 숭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 주신 것은 네가 바로 우상이야, 그걸 부각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네가 바로 예수, 네가 바로 삼위일체, 전부 다 우상이야. 너희는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4페이지 다시 봅시다. “사랑은 ‘만남’에 의해서만 창설된다. ‘만남’을 대외적으로 입증하게 할 수 없게 하는 ‘만남’이다.” 우리가 은근히 기대한 만남이 아니고 우발성이죠. 이걸 사건이라 합니다. “해석이 불가하게 만드는 흔적” 흔적이란 실체는 날아가 버리고 흔적만 남아요.
제가 수요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흔적을 설명하면서 골프 치는 사람들 이야기했지요. 골프공 가져가고 동전 하나 그 자리에 있고. 그것이 바로 이 땅에 남겨진 실제적인 역사,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아무리 봐도 거기에 실체적인 예수님 안 보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그대로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예상 못할 결과를 성도된 자만이 귀하게 여긴다.”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자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고엘만 의지하니까, 구원자만 의지하니까. “그래서 모든 기존의 해석과 규범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처럼 주님과의 만남은 파괴를 미리 본다.” 나의 파괴, 내가 파괴되었음을 미리 본다, 또는 확인한다. 파괴되는 즐거움, 생글생글, 생기발랄함.
룻은 자기 것이 없으니까 주어진 환경이, 내 처지가 왜 이러냐고 자기 환경에 대해서 비방하지 않습니다. 비방할 수 있는 비교대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사람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과거라는 게 있어서 과거가 자꾸 현재를 비교하게 돼요. 과거에는 내가 잘 나갔는데, 과거에는 이런 희망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 희망이 다 사라졌는가? 난 과거가 좋았어, 라고 자꾸 과거 지향적으로 집착하면서 현재 주신 은혜를 어색한 것은 겂어치 없는 것으로 차버리는 그런 경향들이 있어요.
4페이지를 다시 한 번 봅니다. “같은 편이라고 여겼는데 언약의 추가로 인해 여지없이 차이가 또 발생한다.” 사람의 만남에서 누구나 본성상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들고 싶지요. 하지만 여기가 누가 등장한다? 성령이 등장하고 틈이 등장하게 되면 둘 다 주님의 고엘, 후견자 되신 주님 앞에서 둘 다 고아와 과부가 되는 거예요.
내 것으로 상대에게 줄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상대에게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헤아림 속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눅7:47). 이 말을 적용시키면,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고집불통과 죄밖에 없습니다, 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바로 빈틈을 우리 사이의 주님의 후견자를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뭐 이런 수고를 저한테 합니까? 아닙니다. 제가 지금 수고한 건 맞지만 이 수고한 것도 죄입니다. 자칫 수고한 것을 기억해버리면 내가 나한테 수고한 것이 기억이 되면 그것이 나의 새로운 우상이 되고 우상중심이 그 우상이 나의 대체물이 되니까 나는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괜찮게 살게 된 나 자신을 믿는 사람이 돼버리죠. 자기 부인이 안 되잖아요. 다시 부인되다가 해체되다가 다시 고정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맥락이 새로운 어떤 교차로와 만날지 모르니까 늘 새로운 맥락과 새로운 맥락이 만나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내일 되면 누굴 만나고 모레 되면 누굴 만나고 무슨 사태를 만나는지 계속 이어져요. 그 맥락과 맥락에서 우리가 볼 것은 차이와 그 다음에 뭘 본다 했습니까? 틈을 발견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차이와 틈을 통해서, 맥락과 맥락으로 엮여지는 가위에서 이 차이에 고엘이 공백이 후원자가 찾아오는 자리가 되겠죠. 차이가 많이 벌어지면 그만큼 주님의 후견자의 기능이 우리 눈에 많이 보이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에서 땅이 없고 돈이 없는 것은 지당한 겁니다. 마땅한 겁니다. 제가 뭐했다고 땅을 원하고 뭐했다고 집을 원하겠습니까, 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후견자를 많이 느끼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강남에 집 세 채 있고 세종시에 집이 또 두 채 있다 합시다. 대구에 십오 만평 정도 집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평소에 이 모든 것은 제 소유가 아닙니다, 할 때는 이 사람에게 이 터는 빈틈이 되는 거예요. 주식으로 한 25억 갖고 있고 펀드에 10억, 미국주식해서 5억, 달러 10억 사놨다. 석유에다 한 천 만원 넣어 놨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뭘 믿는 사람입니까? 예수 잘 믿는 사람이죠.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왜? 자기 소유를 보는 게 아니고 소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움에 눈이 가있으니까. 이게 누구냐? 보아스에요. 꽉 찬 룻과 생기발랄한 룻과 빈틈투성이의 보아스의 만남, 그것이 바로 율법이 지향하는 바에요. 룻에서 4대 후손에 다윗이 등장해요. 그래서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에요. 새로운 맥락을 설정해요. 기존의 맥락 말고 인간에 소유될 수 없는 새로운 맥락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인간을 이용해서 그 언약을 스스로 움직여서 인물 하나 창조하는 거예요.
율법의 의인화, 말씀의 의인되는 그런 분을 목적을 향하여 지금 룻은 그 중간과정에 미리 뛰어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족보에 보면, “룻에게서” 해놓고 그 족보에 다윗이 나게 돼있어요. 마지막에 누가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나시니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인생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갑자기 생기발랄하지 않습니까. 있는 재산 팔아 교회 갖다 바치고 십일조 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고 고아와 과부 도와주고. 그 고아와 과부 도와주면 인간성 다 버려놓습니다. 주님 바라볼 사람은 돈 바라보게 만들어요. 도와준다는 그 좋은 선의가.
그래놓고 오른손이 한 일을 어떻게 왼손이 알았는지 이건 오른손이 한 것이 자기한테 우상으로 되돌아온 거예요. 틈이 없어.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내가 뭐 죄인이고? 평생토록 주님만 쳐다봤는데 내가 뭐 죄인이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새로움이 없어요, 새로움이. 나오미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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