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여름수련회 룻기강해(천국의 틈) 제 2강 : 초과적인 것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몸은 몸이고 명령은 명령이다. 이렇게 따로 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인간의 몸은 명령에 따라서 자기 몸에 수정이나 교정, 조정이 일어나게 돼요. 나중에 보면 언어가 그 사람의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때리지도 않았는데, 그냥 말만 하고 욕만 했는데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간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 인간은 전적으로 몸의 존재가 아니고 언어의 존재, 말에 의해서 슬퍼하고, 울고, 웃고,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자기가 억압된 것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기존의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욕망을 찾아서 가게 돼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맘의 안정성을 그런 식으로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발작이 일어나는데 그걸 증상이라고 합니다.
증상인데 두 가지에요. 하나는 몸의 경계입니다. ‘몸1’에서 ‘몸2’로 자꾸 옮길 때 여기에 증상이 나타나요. 첫째는 더 심하게 억압당하기. 이것은 인간이 하나의 사회인이 되는 겁니다. 직장에 모인다든지 하는 것, 사회인이지요. 자기 할 말 다 못해요. 사회는 전부다 개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성을 원하기 때문에 똑같이 되기를 원해요. 튀면 안 됩니다. 무조건 그 말 들어야 돼요. 안 그러면 사회에서 추방당합니다. 첫째는 억압당하는 것.
또 하나는 뭐냐 억압당하니까 여기서 반발이 나오지요. 그걸 히스테리하고 합니다. 반발이지요. 반발 또는 발작. 억압하다가 도저히 못 참겠으면 반발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발작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이게 뭐냐 하면 아버지에게 예예 하다가 더 심하게 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그런 것이 있잖아요. 아버지에게 뭘 집어던지고 하는 것. 나 가출한다, 그렇게 나오는 것.
이게 뭐냐? 중요한데 이게 초과적인 행동입니다. 본인도 예상 못한 초과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더 이상 지금에 있는 이 보편성에서 나는 못 견디겠다. 다른 보편성으로 옮겨 타야 되겠다.’ 할 때 초과적인 것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절절매다가 사표 낼 때 되어서 과장한테 반말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뛰쳐나오는 그런 것.
이러한 초과적인 증상, 히스테리가 심하게 되면 이것이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자살로 이어지지요. 남을 못 죽이니까 자기를 죽여 버리는 자살로 이어지는 겁니다. 누가 때리지도 않았어요. 본인이 본인을 때려요. 그동안 자신의, 인간의 몸에서 쾌락이 나오는데 문제는 몸에서 쾌락이 나온다 하면 이것은 너무 과학적인 인식이고요.
인간의 몸은 이상하게 초과적인 것, 영적이지요, 초과적인 것이 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초과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어요. 나보다 더 위에 계신 어떤 분이 나의 쾌락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은 행동에 옮기는데 만약 그 사람이 내가 기대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절대자로 옮겨 탈 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럴 때 기존의 것에 대해서 반항하고 반발하지요. 이게 초과적인 행위입니다. 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성경에서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이거든요. 지금 사사기가 왕이 없는 시대에요. 그런데 이 가족은 이름에 왕의 이름을 집어넣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 그 말이 아닙니까?
왕으로서 섬기는데 현실적으로 어떠냐 하면, 왕으로 섬겼으면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풍족하게 살도록 놔두면 되는데 룻기 1장 1절에 흉년이 들었지요. 흉년이 들었으니 왕이고 율법이고 간에 배고프다는 것은 내 몸이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자기 몸의 즐거움입니다.
즐거움, 쾌락이니까 몸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는 흉년 말고 농사 잘된다는 소문 듣고 모압땅으로 이사를 해버린 겁니다. 몸의 자연스러움이지요. 자연적으로 그렇게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실때요, 하나님의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법률, 언어라 할 때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내가 이 땅에서 잃어버린 것, 결핍된 것 현재 지금 내가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대로 지키면 여기서 그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지만 실상은 율법이 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감추고 있는 원초적인 것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율법은 결합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우리의 몸이 제대로 일치가 돼요, 안 돼요? 실천될 수 있습니까, 못 됩니까? 실천이 안 되는 거예요. 실천이 될 수가 없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엄마가 주겠다, 하는 것과 절대로 실천이 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맛있다. 먹어라” 하는데 보니 김치라. 애들은 어릴 때 김치 안 좋아하잖아요. 막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기어이 엄마가 숟가락에 밥에 얹은 김치를 입속까지 골인할 수 있도록 애를 따라다닙니다. 누가 질긴가 보자 해서 아침부터 싸움이 벌어지지요. 결국 애가 힘에 밀리니까 엄마가 승리하지요.
그런데 그게 승리일까요? 다른 보복으로 나중에 오는 것이 뭐냐 하면, 몸의 증상입니다. 갑자기 토한다든지, 갑자기 막 벌벌 떤다든지. ‘왜 얘가 발작을 일으키지?’ 육적인 존재인지 알았더니만 애가 갑자기 영적인 존재에요. 언어적 존재에 휘말려 있었던 겁니다. 명령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기 이전에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냥 과학적으로 세포수가 얼마고 뼈의 숫자가 얼마인가, 그게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룻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영적요소에 놀아나고 있고 이미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율법으로 잔소리를 해봐야 먹히지도 않아요. 다른 영에 길들여져 있으니까. 인간이 육체의 본능과 본성으로 가도록 부추기는 다른 영이 있어요. 기존의 사사시대에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했다. 소견에 옳은대로 했는데 이것이 이유가 뭐냐? 그 당시에 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왕이라 하는 것은 일자, 최고의 절대자, 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맘대로 움직였다고 했는데 그러면 왕이 있으면 그들은 왕 따라 하겠는가? 그렇지 않지요. 보이지 않는 왕이 있어서 그 최고자가 이스라엘 인간자체를 움직였던 겁니다. 그러면 룻기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뭐냐?
노선이 두 노선이에요. 율법이 율법대로 알아서 노선이 완성이 되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엘리멜렉 ‘참으로 하나님은 왕이시다’ 진정한 왕, 찐 왕, 진짜 왕이 율법의 완성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고 거기에 비해서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기존이 보이지 않는 다른 영적인 지도자 앞에서 자기 맘대로 사는, 자기 본성대로 사는 그것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 따로 인간 따로에요. 그러면 율법 따로, 그리고 인간 따로면 율법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없지요. 없는데 여기서 잇고자 하는 겁니다. 연결시키고자, 접목을 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접목시키는 그 중에 뽑힌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나오미가정이에요. 나오미가정이 여기에 뽑힙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거기에 합당한 인간의 백성은 여기에 나오미 가정이 들어오는데 나오미 가정은 모압에 가서 완전히 박살나지요. 박살나는데 박살난 나오미 가정이 다시 하나님의 율법대로 왕가가 되려면 이 왕가는 없는 왕이에요. 율법이 완성되어야 나오는 왕가지요. 기존의 인간은 왕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왕을 내다보고 있고,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자리에 누가 들어갔느냐? 놀랍게도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이방여자 룻이 여기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1장, 여러분이 교회 나오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마태복음 1장이지요.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그 다음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에게서’가 붙는데 그 앞에 등장하는 여인은 전부 다 이방여자입니다.
율법이 없는 거예요. 율법이 없는, 내놓은, 저주받는 족보에요. 저주받는 족보가, 축복받는 족보와 끊어진 지점에 저주받는 족보에 해당되는 노선이 끼어들어서 끊어져 있는 하나님의 복의 계통을 짜깁기를 해서 이어버리는 겁니다. 저주가 들어가지 않고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복의 노선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1장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이 이방여자에요. 5절에 “라합에게서” 5절의 기생라합도 이방여자입니다. 여리고성의 그 라합.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우리아가 이방남자에요. 이방남자의 아내가 다윗과 결혼해서 솔로몬을 낳는 겁니다. 저주받을 요소가 복을 이루는 거예요. 저주 속에서 새로운 복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벌써 처음 시간하고 두 번째 시간만 해도 여러분에게 점점 더 룻기의 윤곽이 드러날 거예요.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경계’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계는 두 종류가 있다 했어요. 하나는 뭐냐? 율법의 경계. 또 하는 뭡니까? 나의 경계. 나의 경계는 욕구적인 나와 욕망적인 나, 끊임없이 목말라서 사마리아여인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신 중심으로 신에게 기도하면서 채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저거 달라, 다음은 이거 달라,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하면서 자기 목마름을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욕망적인 것. 그 욕망적인 이유는 욕구적인 자기쾌락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속의 경계선, 이 둘을 결합시킵니다.
이 나의 경계선에 의하면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경계선인까, 육신이니까 이 육이라는 것은 늘여보면 혈통이 되겠지요. 룻기 1장 3절을 봅시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이어서 5절에 보면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그 다음에 뭡니까? “죽고”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되게 간편하게 처리해버립니다. 누구는 죽고 그 다음에 그의 두 아들도 죽고. 하나님한테는 인권이라든지 그런 것이 없는 모양이에요. 하나님 앞에 차별 금지법, 이런 것도 안 통하는 모양입니다. 그냥 죽고, 죽고, 이것은 혈통의 단절입니다. 아버지의 혈통, 아버지가 있고 여기에 어머니가 있다면 아버지가 죽고 이 둘 사이에서 아들 둘이 있는데 이 남자 둘이 죽고 남는 것은, 남자들은 다 죽고 누구만 남았어요? 여자만 남지요.
따라서 율법의 경계는 남자의 후손은 죽이고 여자의 후손으로 율법을 완성시키는 겁니다. 남자는 죽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님은 없음의 후손이에요. 이 땅의 혈통없음의 후손이에요.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에게 임신케 했다는 말은 마리아는 이 땅에 없음을 대표하면서 없는 자가 임신이 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 모든 혈통은 믿을게 못된다. 이 땅 모든 남자는 믿을게 못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 남자든 여자든 어떤 인간도 율법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볍게 죽이는 거예요. 가볍게 죽입니다.
아들 둘 죽고 이제는 나오미만 남았다는 말이지요. 나오미가 뭘 도입하느냐 하면, 율법을 도입해요. 어떤 율법이냐 하면, 형수가 아들이 없을 때는 시동생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서 이 혈통을 유지해야 된다는 법이 있어요. 유다와 다말사이에도 그런 결탁이 있지요. 시형제 결혼법. 시집식구와 계속해서 혼인해서 아기를 낳아서 그 시집의 대를 이어야 한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그 혈통이라는 증거물이 계속 이 땅에서 지속이 된다. 그 율법이 되는 겁니다. 그 율법을 나오미가 알고 있어요.
11절에 봅시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이 들었던 나오미가 새롭게 시집가서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나오게 되면 그 아들과 여기에 남아 있는 며느리들 오르바와 룻, 이 둘은 동서지간이지요, 말룐과 기룐 이미 죽어버린 두 아들들의 아내들과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그것은 죽은 엘리멜렉 남자의 가문을 이을 수 있다.
“그 법이 있는데 그 법대로 기다려 볼 의사가 있느냐?” 이러고 있는 거예요. 나이가 많이 든 아주머니께서 다시 남자 만나서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나오미가 한 60쯤 되었다고 치고 나오미가 새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나님이 주신 기업, 상속된 백성을 잇게 되면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우리에게 영영토록 복을 주신다.
그게 증명이 되는데 어떻게 그런 일 한 번 해 볼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나오미도 알아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사실,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그걸 아니까 “그럴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 집에 돌아가 그냥. 가! 결혼 잘못했다 그런 셈치고 나이 젊으니까 새로 시집갈 생각하고 너희 동네로 돌아가서 남편감 찾아서 팔자 고쳐라. 나는 인생 망했다 하고 이스라엘로 다시 간다.” 이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그런 제안을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나오미가 적용을 시킵니다. 여기서 룻이 뭐라고 하느냐? 동서되는 형님 오르바는 그냥 갔어요. 처음에는 안 떠나려고 하다가 나오미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까 “알겠습니다. 내 남편이 죽었으니 딴 남자 만나지요.” 하고 갔는데 룻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같이 죽겠습니다.” 시어머니하고 같이 죽겠다는 거예요.
시어머니 죽는데 내가 같이 합장하겠다,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떠난 이 가정을 율법이 없는 이 모압 땅에서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이니까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것을 지금 시어머니가정을 통해서 유일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참으로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어머니의 남자들이 다 죽음으로서 깔끔하게 다 보여줬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에 의해 다뤄지는 시어머니와 내가 같이 죽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17절에 보면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이 무슨 이런 배짱이 있습니까? 시집갈 때 살러가지 죽으려고 가는 사람 봤습니까? 결혼식 해서 그 둘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것이 결혼식이지 시어머니를 보고 반해서 “어머니 죽을 때 같이 죽겠습니다.” 어머니하고 같이 죽어서 합장하려고 시집을 갔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요, 룻이 자기가 시집와서 가정의 내력을 잘 봤어요. 무엇이 문제냐 하면 율법이, 율법체계가 엄연히 작동하고 살아 있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나의 경계선이지요, 이방인들처럼 나 자신의 생존에 우선하다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이 작동해서 그 집안의 모든 남자를 작살내버린 거예요. 혈통을 끊었다 그 말이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어떤 논리가 있느냐 하면, 혈통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솜씨에요. 이스라엘 모든 혈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거든요. 혈통이 단절되었다. 끊어졌다는 말은, 끊어지게 하신 분에 의해서 혈통은 다시 되살릴 수가 있는 거예요.
보통 문을 누가 닫아요? 문 열어준 사람이 문을 닫지요. 그렇지요? “어서 오세요. 이랏샤이마세, 어서 오세요.” 하면서 문 열어준 그 사람이 문도 닫잖아요. 주님이 우리의 구원의 문을 열어줬지요. 그러면 구원의 문을 누가 닫습니까? 주님이 꽉 닫아버려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계 3:7)
이것이 무슨 차원이냐 하면, 나라는 몸뚱이가 천국 가서 쾌락을 즐길 것인가, 이런 나의 육신적인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이 뒤집어 쓰인 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본인의, 여러분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에게 뒤집어 씌워버린 거예요. 뒤집어씌울 때에 이미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종이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존재가 아주 불길한 질이 좋지 않은 악한 영에 지배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나와 악마의 싸움이거나 나와 율법의 싸움이 아니에요.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이 싸움에서. 뭔가 태어날 때부터 있는 성질 있잖아요. 성깔. 그 성깔 그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왕이시니까 율법이 와서 뒤집어씌워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목격하고 목도해야 되느냐 하면, 안 되는 것을 기어이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을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언약을 가지고 어떻게 실행에 옮기시는가? 거기에 우리는 눈독을 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 인생을 통해서 체감해야 됩니다. ‘아,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시는구나.’ 충분하게 우리의 육적인 본성은 본성대로 다 까발리시면서 그것으로 “네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 우리의 본성은 생존과 생계문제 그게 우선적이지요. 온 가족이 밥 먹고 사는 그것이 우선적이고. 내 가족이 무탈한 것 그것이 우선적이지요. 율법은 뒷전이에요. 하나님의법은 뒷전이라고요.
그러면 뒷전 안 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킬까요? 지키는 것이 어설픈 제안이에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이 나이에, 이 할머니 된 나이에 다시 어떤 남자 만나서 애 낳을 때까지 네가 기다려줄래 내가 생각해도 네가 들어봐도 말도 안 되지?” 결국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이 몸 가지고 용을 쓰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손에서 성취될 리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율법은 우리 손에서 성취될 수가 없어요. 왜 성취가 안 되는지? 그것은 율법이 성취되면서 누굴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안 되는데 나대신 억지로 희생되게 하시는 분을 우리 눈앞에 딱 갖다 댑니다. 나오미 앞에 누가 등장하는가? 룻이 등장해요. 그러면 나오미에게 룻이 뭐가 되느냐 하면, 초과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 제목은 초과적. 예상 못한 초과적인 것, 예상 못한 답변이 나왔어요. “얘, 네 형님도 모압으로 돌아갔잖아. 너도 모압으로 돌아가.” 오히려 나오미가 젊은 여자의 장래를 생각해서 걱정해줘서 잘되라고 해주거든요. 그런데 룻이 너무 과격해. “어머니 죽는 곳에 같이 죽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가까운 사람이 너무 과도한 충성심을 보일 때 여러분은 편하던가요, 부담되던가요? (부담이요) 그런 분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네요. “왜 이래? 좀 적당하니 해. 나는 너 책임 못 져.” 이러니까 또 “책임 안 져도 괜찮아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왜 자꾸 나를 미안케 만들어. 나는 너만 보면 자꾸 미안해서 어떻게 감당도 안 되고 손을 못 쓰겠어.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는데 네 앞에서는 큰 소리를 못 치겠어. 너는 왜 자꾸 나로 하여금 미안함을 유발시켜? 너 찐드기야. 나 있으면 너 이익 없어. 고생이야. 좀 떨어지자. 여기서 갈라서자. 찢어져서 너도 네 갈길 가고 나도 내 갈길 가자.”
자, 방금 제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너무 부담되어서 갈라서고 뗄 때 다음 중 그렇게 하는 행동은 1) 의리 2) 상대방의 장래를 걱정해서 3) 상대방에게 정을 베풀어서 4) 내가 편하기 위해서. 몇 번 입니까? 첫째 시간 강의했듯이 인간의 욕구는 마지막에 자기 편한 거예요. 자기편의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거리를 떼야 돼요. 너무 가까이 오게 되면 사랑이 아니고 공포입니다. 감당 못해요. 적당한 거리. 나의 나 됨과 너의 너 됨 사이에 항상 결핍이 생산돼야 내 욕망이 춤을 춥니다. 살 보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룻기에서 철저하게 나오미는 육적인 나오미로 극단까지 몰아붙입니다.
나오미라는 여자가 악랄하다는 것은 아닌데 얼마나 계산적이냐? 좀 돈 되고, 인간 되고, 성격 좋고, 인물 되고 그런 남자에 대해서 자기 며느리를 슬며시 뒤에서 밉니다. 꽃뱀도 아니고. 슬쩍 밀어요. 젊은 네 덕에 내가 이익을 보자는 거예요. 룻을 통해서 나오미는 철저하게 나의 결핍된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한 아줌마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룻은 어떠냐? 정결하고, 순결하고, 희생적인 여자? 노! 아니에요. 룻기에 나오는 룻의 특징은 뭐냐? 무지몽매에요. 순진무구,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자기가 아는 것은 뭐냐? 내가 시집오고 난 뒤에 나오미에게, 우리 시어머니에게 뒤집어씌운 그 율법의 생생함이, 내가 시어머니에게 붙어 있는 한 그 생생함이 나에게도 그대로 주어질 것이라는 그것을 믿는 거예요.
우리 시어머니, 그 나오미가 기쁨이거든요. 옛날 내가 아는 어느 가수인가, 그런 이름이 있었어요. 기쁨이라는 그것이 마라, 출애굽기에서 어떤 지명 이름이 마라에요. 쓴물의 그 마라, 기쁨의 여인이 완전히 슬픔의 여인으로 바뀌는 그 정황을 룻은 굉장히 초과적으로 본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나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여인지만 정말 율법, 이스라엘은 율법, 율법, 전설은 아니지만 내려오는 역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벌여서 그 가나안 열 족속을 내쫓았다는 그 전설 같은 이야기, 그것이 율법에 의해서 또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을 자기는 귀담아 듣고 이것을 그냥 농담으로 제켜버릴 수 없는 거예요.
현실에 없는 초과적인 현실, 생생한, 생경한 현실, 살아 있는 생경한 현실, 그걸 믿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룻은 일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습니다. 바보지요. 바보인 거예요. 내가 내 이익을 어떻게 챙길 것인가? 내 자존심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서 내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룻은 율법으로 인하여 뭐가되느냐 하면, 비자립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까라면 까라. 시키는 대로 사는 겁니다. 내 인생이 없어요. 그냥 이끄는 대로, 미는 대로 갈 뿐입니다. 우리 같으면, 아침 드라마 같으면 룻이 자기 남편죽고 난 뒤에 아이고 ‘이 집안이 이런 집안인줄 몰랐다’ 해서 시어머니한테 재산이나 좀 달라고 해서 독립한다, 이렇게 나오겠지만 룻은 그런 것이 없어요.
‘자기 남편이 죽은 것, 그리고 자기 시아버지 죽은 것 까지 이것은 우연이 아니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땅에, 율법 없는 땅에 왔을 때 진짜 하나님이 없을 것 같으면 조용할 것인데 참으로 이스라엘에 역사하는 율법에 의한 약속의 땅이라면 이렇게 약속의 땅을 생계에 필요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따로 떨어져 나갔을 때 감히 하나님이 엘리멜렉집안을 작살을 내는 것을 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바로 이 모습이 아닌가?’
자기는 이런 하나님 앞에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 “내가 시어머니와 합장해서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점을 보게 되면 16절에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냐 하면 완전히 하나님 앞에 크게 당했던 어머니에요. 그래서 20절에 보면 나오미가 여호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가 나를 괴롭게 했다. 이게 엘리멜렉, 여호와가 나의 왕이라 하는 이름이 집안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지요. 여호와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철저하게 ‘율법이 나 때문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있잖아.’라는 그 생각을 그냥 평소에는 이야기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어려울 때, 진짜 자신이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자신의 욕망의 결핍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여기서 발작을 일으킵니다. 이 발작이 뭐냐? 그 당시 사사시대에 모든 이스라엘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향성이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나오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사람들 전체가 자기보기에 마음대로 소견대로 행했던 그 중 하나 일부가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이거 율법대로 회복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룻을 딱 준비해놨어요. 피해자입니다. 남편이 죽어버렸으니까.
여자가 남편이 죽으면 자기 인생이 끝나잖아요. 자기는 피해자에요. 자기는 이방여인이지요. 남편은 이스라엘 사람이지요. 이스라엘 남자로 인하여 자기 인생에 손해가 되고 피해자가 됨에도 불구하고 없음의 남자와 계속 해서 자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그 집안, 남편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의 집안의 일부로 나를 간주해달라는 겁니다.
룻기 1장 12절부터 보게 되면, 나오미가 참 엄청난 이야기를 했지요. 12, 13절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하나님에게 자기가 얻어맞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 죽은 자가 아픕니까, 살아남은 자가 아파요? 살아남은 자가 아프지요. 죽은 자는 좋은지 안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죽은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된 사람은 그냥 죽은 거예요. 살아남은 자가 골치 아픈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는 없음이 되고 그 없음과 얽혀버린 있음의 가족에서 여호와의 손이 여기서 일을 하게 돼요.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있음의 사람은 뭘 기억하느냐 하면, 전에 내가 남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요. 남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데 지금은 없으니까 여기서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결핍을 느끼면 나오미는 이 결핍에 대해서 가만있지를 않지요. 인간은 이미 욕구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경계를 넘어오기 때문에 결핍에 대해서는 보상을 요구하게 되겠지요. 자기 욕망이 결핍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보상에 대한 기대, 소망 그런 것이 있어서 결핍을 감내할 수가 있는 겁니다. 보상을 요구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손을 침으로서 여기에 두 가지가 있어요. 혈통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나오미와 또는 이 혈통적인 보상과 관계없이 율법을 이루시는 룻의 계보, 그리고 나오미의 계보, 이 두 개의 계보로서 율법이 서로 두 개의 노선을 만들면서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쪽은 철저하게 육적인 욕망을 추구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룻의 계보는 이 육적인 욕망 때문에 피해를 입게 돼요.
피해자와 그리고 자기육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가해자, 이것이 하나의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율법은 서서히 완성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자, 지금까지 설명했는데요. 이제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해봐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안 것이 실제로 확 다가오거든요.
지금 나오미에게 율법이 있다는 말이지요. 신약이니까 율법대신에 이걸 복음이라고 해봅시다. 복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대로 응용하면 쉽지요. 복음이 나에게 왔다는 것, 뒤집어 씌었다는 것은 나와 또 하나의 나, 두 개의 나로 쪼가리 나는 거예요.
탁, 치게 되면 둘로 갈라지듯이 내가 둘로 갈라지겠지요. 한쪽의 나는 하나님 덕분에 내가 세상적인 욕구를 충족하게 되었다는 그 노선이 가는 겁니다. 또 하나는 이것 때문에 어떤 분이 피해자의 모습으로서 초과적으로 나를 다스린다는, 즉 나 때문에 어떤 분이 피해 입었다는 것을 초과적으로 내가 알게 됩니다.
내 본성은 율법을 복음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나의 즐거움과 쾌락과 편함이 우선돼요. 이것은 육신이 있는 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초과적인 요소가 자꾸 느껴진다는 겁니다.
만약에 취직이 안됐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취직 좀 시켜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취직시켜 주세요.”라고 할 때는 ‘내 욕망의 노선을 계속 이어가게 하옵소서. 취직 안되어서 내가 망했다는 소리 듣기 싫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빨리 취직시켜줘서 역시 나는 잘났음을 유지시켜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지요. 여기 무슨 초과적인 것이 있습니까? 자기욕망의 순환구조지요. 계속해서 자기욕망을 달성하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다른 욕망, 취직되고 나면 승진시켜주세요, 그것 되고 나면 더 넓은 아파트 사 주세요, 아파트 사주면 세종시 아파트 말고 강남구 아파트 사주세요, 현명한 처사로 해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마다, 이런 욕구가 나올 때마다 항시 따라붙는 초과적인 요소가 느껴지는 겁니다. 뭐냐 하면 피해자 되시는 어떤 분이 나와 더불어, 함께 복음이라는 것으로 구성하는 요건으로 계속 삽입되어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을 위해서 희생자가 되겠습니다.” 이런 망발은 하지 마세요. 내가 희생자가 되는 이것도 쾌락입니다. 이것도 뭔가 자기자존심을 만회하는 짓거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희생자가 되겠습니다. 순교자가 되겠습니다.”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냥 여러분이 평소에 하던 대로 잘하는 것 있잖아요. 하던 대로 가는 겁니다. 가는데 초과적인 것이 같이 따라오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내가 길을 갈 때 보름달이 떠 있으면 내가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면 달이 따라오잖아요. 떨어지지 않고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그럴 때 피해자 또는 희생자가 있음으로서 하나님께서 내가 죄인이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시는구나.’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복음 같은 경우에는 이미 완성이지요. 복음의 내용이 룻기 1장에서는 ‘하나님은 왕이시다.’
왕의 의미가 뭐냐? 그것 설명하고 오늘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왕이 뭐냐? 시원, 근원, 원천이에요. 사사기에서 왕이 없다는 말은, 사실은 왕이 있는데 왕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왕이 되시면 인간들은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시원과 동일한 원천에서 동일한 성질이 골고루 내려와서 이것들끼리 보편성을 형성해야 돼요. 너나 할 것 없이 동일한 것을 쳐다보는, 그럴 때 왕이 되는 겁니다. 자 다시 설명합니다. 왕이라 하는 것은 ‘내가 왕이다’ 그게 아니라 다수의 다양성, 많은 사람의 숫자 안에 초과적인 것으로 하나로 통일이 될 때 거기에 그 집단의 왕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니라, 했지요. 지체는 다양성을 의미하고 머리라는 것은 둘이 아니에요. 하나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룻기에서 이 하나님의 왕의 왕다움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보편성 있는 혈통을 어떻게 이 땅에서 죄인들을 통해서 만들어내는가? 그 작업이 사사시대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이미 작업을 개시했다는 이야기가 사사기 초반부터 전개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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