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과거공유

아빠와 함께 2020. 7. 12. 10:33

광주강의20200626a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16절입니다.

16절,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라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절,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고
19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절,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이런 복음서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이나 또는 그러한 진리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냥 부담 없이 현재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듣지만, 이렇게 뭐 지명이 나오고 그때에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갑자기 현재에서, 말씀의 현재성이 뚝 떨어져버리죠. 말씀의 현재성이. ‘아, 이거는 옛날이야기구나. 우리하고 해당이 되지 않는구나.’ 그렇게 돼버립니다. 이스라엘에 가 본 사람들은 주로 다니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 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가신 흔적 같은 것을 기본적으로 다 돕니다.

돌면서, 만약에 한국에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에 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을 비로소 봐야 한국과 역사를 뛰어넘어서 그때 그 당시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또 잠시 느끼게 되겠죠. 또 다시 한국에 오면 그만이겠지만. 지역은 이렇게 예루살렘이 언덕이 되어 있고요. 약간의 골짜기가 있고 또 약간의 높은 언덕이 있어요. 언덕이 있는데 기드론 골짜기라고 되어 있어요.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기드론 골짜기 이런 것은 제가 사진으로 다 올려놨으니까 보시고요. 여기 성전산이 있어요. 천문대 비슷하게 동그란 황금돔처럼, 천문대처럼 이렇게 되어 있고. 여기 감람산이라고 있는데 감람산 꼭대기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있어요. 스가랴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감람산에서 재림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감람산에 다시 재림한다고 되어 있어요.

스가랴에서는 그때 재림한다고 되어 있는데, 메시야가 그때 온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승천하는 곳이 되고 맙니다. 메시아가 오는 그곳이 예수님은 승천하는 곳이 되죠. 그러면 구약에서의 계시의 한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까지만 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 스케줄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보다 상세하게 스케줄이 펼쳐지게 되는 거예요. 스가랴에서 감람산에 오신다. 감람산에 오신다는 이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동네에 오신다로 완성이 돼버린 겁니다. 십자가로 완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승천하고, 겟세마네에서의 유명한 기도하시는, 올리브나무들이 쭉 있어요. 이천년이 됐다는데. 있고, 올라가면 여기 성전이 있고 그 다음에 밑에는 전부 다 집들이 있어요.

지명은 이렇게 되어 있고요. 이걸 평면으로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 이 동네에서 기도하시고 여기서 체포가 돼요. 체포되는 순서를 1번이라고 합시다. 1번. 아까 골짜기 건넌다 했죠. 기드론 골짜기라고 해서 이 골짜기는 어떤 골짜기냐 하면은 다윗과 압살롬하고 싸웠던 골짜기에요. 겟세마네기도 건너서, 아까 봤던, 평면이니까 성전이 있어요. 성전은 동쪽으로 이렇게 되어 있고요. 성전 제단이 있고 동쪽으로 성전 문이 되어 있어요. 문이 되어 있고, 성전 이쪽에 보면 첫 번째 구역은 이스라엘 남자들 구역, 두 번째 구역은 여성구역 이렇게 되어 있어요. 헤롯 성전은 이것을 다시 이렇게 큰 규격으로 정비를 해놨어요. 크게 대지를 잡아서 이쪽에 남쪽으로 되어 있고 북쪽에 요새가 있어요.

제가 너무 크게 그렸으니까 이걸 작게 그려보겠습니다. 기드론 골짜기 지나서 성으로 되어 있고 성 안에 성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남쪽, 북쪽, 동쪽 요새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여기 안나스 제사장의,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전직 제사장 안나스에게 가요. 이게 두 번째 체포되어 있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18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어 이리로 가는 것, 안나스에게 가는 것을 첫 번째로 봅시다. 가야바가 현직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늙은 전직 안나스 제사장의 사위입니다. 여기에, 가야바에게 가요. 이게 요한복음 18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또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아까 읽은 16절에 브라이도라온, 이걸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관정이라고 해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관가라고 하고. 헤롯 관정이라고 하는데, 이게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가야바에 갔을 때는 산헤드리온, 요새 말로 하면 70명의 국회의원들, 이걸 공회라고 하는데, 공회에 와서 예수님의 체포에 대해서 사람들이 동의를 다 했어요. 이거 뭐 다수당이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통과하는 겁니다. 여기서 심문받는 대목이 요한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관정에 가요. 관정에 가고,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의 역할을 하는 그 지역에 관정이 있어요. 있고, 여기서 다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여기 중간에 보면 총독 말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있어요. 헤롯왕 또는 헤롯 안디바, 또는 안디바스 궁전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네 번째에 가요. 여기에 갔던 것이 누가복음 23장 7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갔다가 다시 본디오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와요. 이게 다섯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서 전직 안디바 제사장, 흥선 대원군과 같은 거예요. 가야바는 고종. 흥선대원군이나 고종쯤 되고. 일제 앞잡이 이완용으로 보고 본디오 빌라도는 일본 총독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기끼리 다 해먹어요. 쭉 갔다가 다시 본디오 빌라도가 있는 곳, 관정으로 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난번에 봤던 바라바를 풀어줄까, 말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제사장들이 바라바를 풀어주면 당신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겁먹어서 바라바를 안 풀어주고 예수님을 체포해서, 이게 성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 안이에요. 근데 이제 성 밖으로 가요. 채석장이었던 곳, 채석을 그만둔 곳,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지금은 전부 다 이슬람족속의 하나의 시장으로 되어 있어요. 시장으로 덮여있어요. 이쪽 겟세마네 동산 빼놓고 저쪽은 전부 다 시장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 힌놈 골짜기, 여기는 기드론 골짜기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 성전이 있고 다윗성은 이쪽에 있고.

자,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그 당시에 예수님이 체포가 one, two, three, four, five, six라는 절차를 거쳐서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여기에서 했던 모든 절차에 관여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 하면은 나름대로 전부 다 전문직업인들이었습니다. 전문직업인. 전문직업인들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전문직업인이 되면은 사람이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백수가 돋보입니까? 직장 가진 사람이 돋보입니까? 당신 뭐해요? 라고 하면 자신만만하게 나는 어디서 뭐합니다, 라고 하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돋보인다는 말은 자아성은 자기가 하는 일과 결부가 되어 있어요. 조금 더 설명하게 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를 물어주는 타인을 전제로 해서 내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어린애가 태어나서 아주머니가 있으면 “아주머니 누구세요?”라고 묻는 애는 없죠. 그냥 엄마! 라고 하죠. 애들이 엄마의 의미를 물으면 애들은 의미가 없이 그냥 엄마에요. 엄마. 다시 말해서 엄마라는 자체에 엄마라는 개념, 그 개념은 의미가 없고 어떤 실체가, 누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있음으로서, 그쪽이 나보다 먼저 있음으로서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겁니다. 엄마가 있으면 내가 있잖아요. 애들은 그걸 몸속으로 안다고요. 나다운 것은, 나다움을 위해 계시는 그분에 의해서 그 다음에 내가 생기는 거예요. 그걸 엄마관계 또는 아빠관계, 가족관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만 있다는 뜻이 아니고 나를 늘 응시하고, 늘 지켜보는 자들 속에서 나라는 것이 의미 있게 형성되는 겁니다. 돈 많겠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 그러면 인간은 뭐 자기가 돋보일 것도 없겠죠. 그냥 돈 쓰고 살면 되는데. 만약에 누가 와서 “야! 요즘 너 뭐해? 요새 너 뭐하고 지내는 거야?” 이렇게 물으면 뭔가 답변해야 될 게 있어야 하거든요.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은 다 수준들이 있으니까. 내가 질문을 해댈 수 있는 자가 바로 뭐가 되느냐, 이웃이 되는 겁니다. 이웃. 옆집에 산다고 해서 이웃이 아니에요. 내가 물을 수 있는 어떤 대상자가 이웃이 되고 그게 바로 타자가 돼요.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123456순서로 체포해서 돌아가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지금 성경 마가복음을 하고 있거든요. 이게 마가복음에 이게 쭉 나온다 이 말이죠. 나올 때에,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이야기가 되려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고 살해한 거죠. 그것도 이구동성으로 다 의견을 모아서 죽였던 그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는 거예요. 그걸 조사해봐야 해요. 그 사람들이 전문직업인들이에요. 전문직. 그럼 전문직업인들이 체포하는 사람 따로 있고, 각자 그 당시의 고위 지도층이잖아요. 지도층. 검찰청에 있는 사람 있고 판사 있고 그 다음에 국회의원들, 산헤드린 공회원들한테 예수님을 죽일까요, 말까요? 했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전문직에 있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그만큼 자부심이 생기는 거예요. 돋보인다는 말 아시죠? 돋보인다? 전문적인 직업이 있는, 자기가 지금 현직에 있으면서 그 직장에서 나올 때에 자기는 돋보이지, 얼마 전에 퇴직해서 한 구석에 있는 사람이 걱정해봐야 그거는 한물 간 사람이라서 말빨이 안 섭니다. “아이고, 뭐 집에 계시지, 집에서 돼지나 키우지 여기에 왜 나오셨습니까?” 이래 된다고요. 그래서 보통 미국 영화에 이런 게 있어요. 이미 퇴직해서 한 물 간 군인이라든지, 특수요원이라든지, 보안관이나 경찰, 경찰인데 현직 경찰들이 하도 비리가 심해가지고 이거는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때에 몰래 특수경찰이나 군인들한테 맡기면, 그건 람보가 잘해요. 웃통 벗고. 총 쏴서 문제해결 하거든요. 아무 거리낄 게 없기 때문에. 돼지 키우다가 보안관하고 경찰하고 이러거든요.

전문직에 있다는 것이 자부심을 준다는 말은, 왜 이게 자부심을 주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반드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타자들 속에 나에요. 타자들 속에.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요. 왜?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 남이 뭐냐,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그 남이라는 것이 뭐냐, 내가 질문을 해댈 수 있는 자, 내가 묻고 싶을 때 물을 수 있는 자, 그게 뭐냐 나에게 타자가 돼요. 옆에 누가 있다고 해서 나의 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와 연관되어 있는 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질문을 할 때에요. 질문을 한다는 말은 아쉽다 이 말이죠. “돈 좀 있어요?” 이런 거죠. 뭔가 질문을 한다는 것이, 있음 속에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평소의 시선과 응시와 관심을 내가 감당하고 용납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하고 용납하겠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게 되면 먼저 그 사람한테 전화하죠. “어이, 친구 나 이빨 뽑았다.” 이게 뭐냐 하면, 왜 그 사람한테 하는가 하면은 그 사람이 늘 나를 평소에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나다웠기 때문에. 나는 나답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법률상담 하는 프로가 있었어요. 법률상담. 법률상담 하는데, 신혼 초에 남자가 바람을 피웠어요. 바람피운 것을 들켜가지고 여자한테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래서 끝난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 상처 때문에 무려 3개월 동안 불면증에 걸려서 정신과 의사한테 치료받는 상담 프로에요. 남자 입장에서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3개월 동안 내가 용서 빌 것은 다 빌었으니까 더 이상 안 빌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도 오케이 했는데 그런데 왜 잠이 안 오죠? 잠이 왜 안 오는 거예요? 잠이. 다른 남자, 미국 사람이 바람 피웠으면 이 여자 잠이 잘 와요.

그런데 남편이 바람 피워서 3개월 동안 잠이 안 와서 우울증에 빠져있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왜 그래요? 그거는 여자가 본인이 누군지를, 그동안 내가 누군지를 본인이 정립을 할 때 누구와 관련해서 정립을 했습니까? 나는 나라고 생각했죠. 나는 나가 아닙니다.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남편과 관련해서 나를 정립한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한 거예요. 긴긴 시간동안. 긴 시간동안 그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왕 어렵게 간 거 어렵게 갑시다. 이걸 가지고 의미의 체계, 의미의 시스템, 앞에 뭘 붙이면 (나), ‘나의 의미의 시스템’입니다. 나의 의미의 시스템. 의미의 시스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세상 또는 현실세계.

현실세계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의미의 체계가 있어요. 의미의 체계. 의미의 체계인데, 그 의미의 전체 체계 속에 나라는 것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이 되는 거죠. 가정이라는 것은 남편과 아내로 가정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소에 집에 가면 가정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가정이. 집에 가면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이죠. 집에 가면 가정이라고 써놨습니까? 없잖아요. 집에 가면 가정이 없고 내 몸뚱아리에요. 집에 가면 애들 있고 남편 있고 자기 몸뚱아리 있는 거예요. 따로 각자 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잠을 못 자요?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온다? 본인은 주무시면 되잖아요. 남편 몸은 따로고 내 몸은 따로인데, 집구석에 들어오던 말든 자기는 주무시면 되잖아요. 왜 잠을 못자요? 이건 정말 신기한 이야기에요.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전혀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그냥 휩싸여서 같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 의미의 세계, 현실 세계에 같이 돌아간다 이 말이죠. 자, 이 의미의 세계가 이렇게 돌아간다. 내 몸이 있으면, 육신이 있고 육체가 있으면 이거는 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의미 닫힘이라고 해요. 의미는 전부 다 완료된 채로 닫힘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치고 들어오죠. 이게 사과라면 사과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사과에 쑥 들어온 게 있죠. 사과 한 입 베어 먹은 거 있잖아요. 이거 무슨 로고입니까? 무슨 회사죠? 애플 아닙니까? 애플.

이게 선악과에서 나온 겁니다. 선악에 대해서 우리 회사가 꽉 쥐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지식 체계는 우리가 다 선도하고 있다는 게 애플 회사의 모토입니다. 컴퓨터하고 여러 가지 전자기기 만들었으니까. 쑥 들어온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내가 몸이 있어서 여기 있다고 여겼는데 이게 팍 들어오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푹 들어온 그걸로 인하여 내 의미 체계가 흔들려 버렸죠. 그러면 주도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있다고 여겼던 것에 여기 뭔가 집안에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이쪽에 주도권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나의 주도권은, 평소에는 내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훅 들어오니까, 사건이죠. 훅 들어오는 이것 때문에 내가 잠을 3개월 동안 불면증에 걸려서 잠을 못 잔다는 이 말은 내가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의미 체계가 닫혔다고 생각했는데 닫힌 게 아니고 이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거예요. 허술하기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전부 다 엮여져 있었는데 엮여진 게 눈에 보이지를 않으니까, 나는 나 혼자,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나는 맛있는 거 사먹겠다. 예를 들어서 친구하고 같이 밥 시켜 먹으려고 하는데, 뭐 떡볶이에다가 피자하고 해서 먹었다 이 말이죠. 해가지고 서로 서로 먼저 누가 먹느냐 해서 싸우더라 이 말이죠. 그때 싸울 때는 뭐냐 나는 다음에 맛있는 거 피자 나 혼자 먹어야지, 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친구가 죽고 난 뒤에, 또 그 친구가 나중에 어디에 가서 혼자 있을 때에 피자 한 판 사보세요. 그게 맛이 있는가? 맛이 없죠.

다시 말해서 타인이라고 하는 것은 나 되기 위해서 반드시 주위 배경에 뭐가 깔려야 해요? 나와 관련된 남이라는 것이 주위에 배치가 돼줄 때 비로소 내가 나 되는 거예요. 내가 나. 내가 나 된다 이 말이죠. 그 이야기하고 오늘 성경 말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할 때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에 이구동성으로 다 동의했죠. 그러니까 이 의미체계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여야 되는,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이 아니에요.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에요. 죽여야 할 대상이라 이 말이죠. 그래야 자기들의 의미 체계가 완전히 봉합되는 거예요. 봉합.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완성된다 이 말이죠. 사모님 직장에 예수님이 없으면 학교가 안 돌아가고 이렇습니까? “교장선생님 오늘 하루 학교 쉽시다. 제가 새벽기도에 빠져서 못하겠습니다.” 뭐 이런 게 있어요? 없죠.

학교는 뭘 빼도 관계가 없어요? 예수님 빼고도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죠. 그 자체가 의미체계로 봉합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학교에 바바리 맨이 들어왔다. 이러면 깨지는 겁니다. 학교 선생님들끼리는 봉합체계가 되어 있는 거예요. 또 학교에 깡패가 와가지고 선생님 패면 난리가 나지만. 어쨌든 간에 이게 봉합체제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조직 내에서 자기가 한패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을 죽일 때에 아까 1번부터 6번까지 몰고 다니잖아요. 소 몰듯이 몰고 갔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들의 의미체계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죽이지 않아야 된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더라. 심지어 이방인인 본디오 빌라도 마저, 이름도 어려워. 브라이도라온 관가.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하는 재판장에서조차도 자기가 발을 빼려고 했잖아요. 꿈자리가 사납다고. 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빼버리면 우리의 의미체계에서 당신은 배신당할 수 있다. 우리가 로마황제한테 당신을 고발할 수가 있다고 하니까, 겁먹어서 당신들 좋을 대로 뭐하라고 합니까? 그래, 예수 죽여라. 나는 책임 없다고 해서 세숫대야에 손을 씻었죠.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이 과정, 절차 하나가 전부 다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의미가 없다.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거부한다. 거절한다. 그 세계가 인간들의 의미의 체계, 의미의 시스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 또는 이 세상.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 세상입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없어도, 오히려 예수 없는 것이 속편한 세계. 그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근데 그 세계 의미 체계가 그렇게 돌아가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각자 뭐다? 전문직업인들이에요. 전문직업은 자기를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돋보이죠. 돋보이게 만들어요. 이 사람들이 할 때에 그냥 한 게 아니고, 이 분야에, 재판하는 것, 경찰에 체포하는 것, 안나스에 가는 것은 전부 다 전문분야에요. 전직제사장 그리고 현직 제사장 가야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뭐로 보느냐 하면은 그냥 예수님이 옳고 그름이 아니고 내가 지금 현재 돋보이게 하는 직업이 뭐예요? 재판하는 거죠. 평가하는 거죠. 거기에 참여한 국회의원 70인들. 자기들이 판결하는 거죠. 판결하는 일을 통해서 자긍심이 어떻게 돼요? 높아지겠죠. 이 때를 위해서. 자긍심이.

우리 한국의 질병본부장을 하시는 분을 코로나19 이전에는 그분이 누군지를 모르죠? 그러나 코로나19 터지니까 커트머리해가지고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 분이 나타났죠. 알게 되었죠.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분이 서울의대 나왔답니다. 그분이 그 일을 하면서 자기 존재의 그 의미 체계에서의 나의 의미는 뭐냐를 부각시킬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맞이한 거예요. 위에서 나오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뭐가 옳고 그른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내 직업인으로서, 전문직업인으로서 과연 어느 정도 이 의미세계에서 강력한 의미를 호소하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가가, 그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걸 오늘날 적용시켜보면, 목사 선배들이 뭐라고 합니까? 목사는 뭐해야 된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 이게 뭐냐 하면은 너의 전문직업이 너의 존재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 전체가 의미체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죽으셨죠. 죽으셨다 이 말이죠. 인간의 전문직업 의식, 이거는 자긍심이죠. 자긍심 또는 자의식. 자의식에서 예수님께서는 추방된 거죠. 의미체계에서 바깥에 추방된 겁니다. 근데 자의식에서 추방하면서 여기에 추방하는 의미가 새롭게 생성되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왜 죽였는가? 죽일만한 죄인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추방시켰죠. 이쪽은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죽어있으면, 예수님이 죽어계시면 이쪽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죽었던 예수님이 만약에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면 이제는 이쪽 인간세상은 죽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재판할 때 그걸 감안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고소하기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것이 재판할 때, 그때 나왔다 이 말이죠. 뭐 성전도 짓고. 당신이 누구냐? 나 구름타고 온다. 구름타고 온다는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가능하지 죽은 사람이 구름타고 오겠어요? 예수님께서 언질을 줬거든요. 너희가 죽여도 너희가 밟아도 나는 다시 산다. 언질을 했는데, 그들은 “아, 내가 아는 전문직에서는 그걸 몰랐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 이래 나온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떤 조언을 해도 자기가 아는 자기 자긍심, 인간의 전문직이 이게 전부라면, 개인 같으면 개인의 자기 의미가 있잖아요. 자기 의미를 깨는, 그것을 인간은 용납하겠어요? 튕길까요? 튕기죠. 이게 뭐냐 하면은 면역체계가 아닙니까? 면역체계.

나의 나다운 것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그걸 용납하면 이게 무너진다고요. 구겨진다고요. 공에 구멍을 뚫으면 쭈그러지잖아요. 자기 침몰인데, 자기가 스스로 침몰되려고 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자기 침몰은, 내가 침몰하고 싶어도, 내가 자살하고 싶어도 왜 자살을 못하는가? 이 의미체계에서 나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 나를 지켜보는 타인이 나의 나다움을 계속 요청하는 이상은 내가 내 목숨도 내 마음대로 못 죽는다 이 말이죠. 내 목숨도. 아까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나가면 다 잊어버린다는 소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다시 할게요. 몸뚱아리 있으면 내 몸인데 왜 남편이 바깥에서 자고 나오면 왜 내가 잠을 못 자느냐 이 말이죠? 왜? 니는 니 몸이고 나는 내 몸이고, 몸이 따로인데. 그리고 두 몸 세워봐야 연결된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에너지도 안 보이고 엑스레이 찍어봐야 연결된 것도 없어요. 따로 논다고요. 따로 노는데 왜 그 인간이 집에 안 들어오면 내가 잠을 못 자느냐 이 말이죠.

도대체 평소에 육체하고 자아하고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육체는 몸뚱아리에서 그 의미가 종결되지만, 자아는 남이 나에게 계속해서 구성해온 겁니다. 타인이. 구성되어 온 것이고 그 구성된 타인에게 걸핏하면 전화 걸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질하고 또 도움요청하고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교류가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 몸은 내 몸으로서 굳혀졌지만 자아의 영역은 내 의미가 미치는, 내 의미가 확장되는 그 범위까지, 그게 세력권인데요. 세력장을 형성하는 거예요. 나라는 세력장. 자식이 애 먹이면 어떡해합니까? “니가 그렇게 할 거면 니 호적에서 뺀다. 니 내 자식 아니다.” 자식들은 알죠? 그거 부모가 그냥 헛소리한다는 것을. 헛소리한다는 것을 다 알아요. 백날 해봐야 그게 일주일도 안 간다는 것을 알아요.

세상은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몸이 그게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목욕할 때, 사우나 할 때 나의 벗은 몸, 그게 내가 아니에요. 자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주체, 주체라는 말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스물 네 시간 우리는 의식하면서 형성되는 것이 나에요. 스물 네 시간. 뭐 말로는 나를 잊어라, 나는 너와 상관없다고 백날 큰소리 쳐도 큰소리에 지나지 않죠. 이러한 의미체계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살아있을 때 예수가 뭔가 허풍을 떨더라.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더라. 여러분, 이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허풍이잖아. 당신 말이 안 먹히잖아. 이 의미 체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아 먹혀. 나가 죽어! 하고서 추방되었다 이 말이죠. 추방되었거든요.

그러면 여기 추방된 죄라는 다리를 건너서, 저주라는 다리를 건너서 주님께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 죽고, 죽은 데서 살아났다면 이 다리가 있는 한 어느 쪽이 죄가 되겠어요? 이쪽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살아났다면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죽여서는 안 될 자를 죽였다는 것이 판정이 났다면, 확정이 났다면, 이제는 예수님 쪽에서 볼 때 이 건너편은, 다리 건너 건너편에 있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곧 바로 죽음의 세계,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노렸죠. 나를 죽여라! 그래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 현실이라는 이 자체가 모두 다 한통속으로 저주받아야 될, 지옥 같은 세계에서 너희들은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내 눈으로 봐야.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베드로도 있거든요. 열두 제자 다 있다고요. 가룟 유다는 벌써 자살해버렸고 나머지기 열한 제자가 벌벌 떨면서 있는 거예요.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찾아오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줬거든요. 성령을 보내줘 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 관계, 사람들에게 밀려서 돌아가신 이 죽음의 세계, 이 죽음의 세계는, 근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세계는 여기 따로 있죠. 예수님의 죽음의 세계는 죽었다가 부활한 세계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면서 이거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셨지, 물론 음부에도 가셨지만, 예수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게요.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새로 채워진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새로 채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이것이 예수님의 개인적인 과거죠. 과거잖아요. 과거인데, 이 과거가 성도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이 과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공유하게 됩니다. 오늘 제목이 과거공유에요. 과거를 다시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다시해요. 새로 다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기 전에 엄마가 먼저 있죠. 이걸 바꿔버리는 거예요. 엄마가 있기 전에, 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있기 전에, 아빠의 아빠, 아빠의 아빠가 있기 전에 누가 먼저 계셨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는 의미체계로 바꿔버린다 이 말이죠. 바꿔버리죠.

근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것이 뭐냐, 피를 남겼잖아요. 피를 남겼으면 그 다음에 이 과거공유에 첫 번째 계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물에 빠진 사람은 알죠. 분명히 얕은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까, 자기는 발을 디딜 줄 알았죠. 근데 발이 안 디뎌지죠. 그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두렵고. 이게 땅인데 발은 여기까지고 허공을 허우적대죠. 허우적.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는 발을 어디다 꽂느냐 하면은 여기다가, 예수님의 피에다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피의 삼투압작용에 의해서 피가 부르르 올라오죠. 삼투압 작용을 알아요? 줄기 같은 것을 꽂아버리면 물이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처럼. 빨대같은 것도 그렇고. 또 술 먹는 사람은 술 먹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올라오고. 삼투압작용에 의해 티가 나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존재를 통해서 벌겋게 올라오면 예수님의 과거가 우리에게 공유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뭡니까? 성령께서 기초를, 그라운드를 피에서 새롭게 주거든요. 이게 뭐냐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뭐가 없다? 생명이, 삼투압작용이 올라오지를 않는 거예요. 영생이 올라오지를 않는 거예요. 영생이. 영생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러는 뭐냐, 우리의 두 발을 예수님의 피에다가 담그는 거예요. 갈대를 빨간 잉크에 담으면 갈대에 빨간 잉크가 올라오고 파란 잉크에 담기면 파란 잉크가 올라오겠죠. 갈대를 통해서 올라오듯이 성도는 어디에 꽂혔다 이 말입니까? 성령에 의해서 예수의 피에 담긴 거예요. 그러면 일반사람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아의 뿌리가 예수님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타인이에요. 자기가 알던 친구, 친척. 우리 다 보석 같은 친구 아니가. 이런 거예요.

전부 다 이러는데, 이 모습이, 이게 진정 뿌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냥 두려운 거예요. 세상사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친구 하나 배반하면 다른 친구하고. 친구 배반하면 뒤늦게 아버지 찾아가서 이번 한번만 도와달라고 하고. 뭐 이렇게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대죠.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허공, 조용필의 허공이라는 노래라고 하지는 않겠지마는. 허공. 그냥 허공을 헤매는 거예요. 평생 동안 허공을 헤매는. 여기에 해당되는 이재룡이, 전두환이, 모든 인간, 국회의원 전부 다 헛방인생을 사는 거예요. 헛방인생. 조국, 윤석열, 전부 다 헛방을, 허우적대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없어요? 그라운드가 없어요. 그라운드가. 그러면서 큰소리친다고요. 평소에. 니는 니고 나는 나다. 이래 봐도 내가 어! 같이 사우나가고. 벌써 큰소리쳤다고요. 큰소리쳤는데 막상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동안 나는 나가 아니었던 거예요. 나의 나다움은 누가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해준 그들을 위해 포위되어 살았던 거예요. 그들의 눈치를 본 거예요. 

요즘 참 신기한 게 있죠. 한화이글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한화이글스. 재벌독수리. 이게 뭡니까? 대전을 근거지로 한 프로야구팀이죠. 관중들 하나도 없어요. 없으니까 이건 연습게임처럼 18연패로 기록을 갈아치웠어요. 한국 타이기록 18번을 연방으로 졌어요. 뭐 욕하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관중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전문적인 NC나 이런 데 보면 관중이 없어도 날리고 치고 살고, 이건 난리도 아니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팬들이 있고 프로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거 코로나19 끝나면 다시 모인다. 그걸 생각해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그들과 과거를 공유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응원했잖아. 옛날에. 옛날 우리 팬 했고 막 프로야구 할 때 관중들 수만 명 왔잖아. 오징어 구워서 먹어가면서 응원했잖아. 그때를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때를.

아니, 내가 술 먹고 싶어서 술 먹었다. 그래서 운전대 잡고 운전하고 싶어서 운전했다. 내가 술 먹고 싶어서 술 먹었고 운전하고 싶어서 운전했는데 뭐가 잘못이냐? 음전운전해서 걸렸거든요. 또 걸려서 두 번 걸렸어요. 세 번 걸렸어요. 미국에서. 누가? 강정호가. 그러면 세 번 걸린 그 생각으로 네 번 해먹고 다섯 번 해먹어야 하는데, 왜 울면서 기자회견하면서 살려 주이소! 제발 살려달라고. 나는 4년 동안 술을 끊겠대요. 이 말이 거짓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정호 선수가. 우리나라 유명한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선수가 왜 기자회견하면서 살려달라고 합니까? 누구한테 합니까? 누구한테 하죠? 타인하게 합니다. 왜? 남이 나의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팬들이 없으면 나는 프로야구 어느 구단에서도 안 받아주고 나는 그럼 굶어죽기 때문에. 이 강정호 선수, 이 구단 전체가 무슨 체계에요? 의미체계. 이걸 두자로 지옥, 이게 바로 지옥이에요.

자기 발이 디뎌집니까? 안 디뎌지죠. 그라운드가 없어요. 바탕이 없어요.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인간의 뿌리가 없어요. 없고,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만 있다고요. 눈에 보이는 것들만. 어떤 건설회사에서 집을 똑같이 서구식 북유럽식 전원주택을 쫙 지었다고 칩시다. 쫙 지었는데, 여기 입주할 수 있는 100호를 지었다 칩시다. 100호 다 찼어요. 딱 한 집이 자기 밑을 파봤어요. 이건 예를 든 겁니다. 모래가 나와요. 이걸 반석으로 딱 바꿔놨어요. 반석으로. 근데 홍수가 났다. 어떻게 됩니까? 옆집 abcd..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멋있다, 잘났다, 우리는 멋진 동네에 산다, 정말 행복하다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홍수가 나면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지되 반석위에 지은 집은 이 백 집에서 한 집만 나온다 이 말이 아닙니까? 이 반석이 누구죠?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 사건이죠. 사건.

왜 예수님이 안 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상관해서 그래요. 자아가 자꾸 하나님마냥 예수를 자꾸 상관을 해요. 실제적인 사건은 십자가사건인데, 십자가사건하고 과거가 성령에 의해서 공유가 안 돼버리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자기가 그리는 거예요. 몽타주를 그려요. 인물은 이렇게 잘생겼을 것이다. 수염은 났을 것이다. 키는 한 180이 넘었을 것이다. 자기의 이상형이 있을 거잖아요. 어떤 모델을 생각해서. 그래놓고 거기다가 비는 거예요. 자기가 타자에게 있던 괜찮은 이미지를, 성스럽고 경건한 이미지를 자기가 스스로 조합해서, 자기가 수사반장도 아닌데 몽타주를 만들어서 해놓고, 내가 구상한 나의 예수를 하니까, 그 예수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뿌리가 없는, 나에서 나온 또 하나의 타자가 돼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돼버린 거예요. 맥도날드 할아버지 있잖아요. 금복주 할아버지 비슷하게. 그런 인자한 모습을 그려놓고,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그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과거공유에요.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예수는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를 흘렸다는 그 죽음에다가 기초를 하고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하시는지는 10분 쉬고 합시다.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이 근호 목사


성령이 찾아왔다, 라고 했을 때 나라는 것이, 인간의 몸이야 거울 보면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 중요해요. 이게 허구거든요. 거울에 비친 몸은 허구가 아니지만 나라는 것이 눈이 보이는 것이 나가 아니고 걸쳐 있는 관계가 나를 만들어요. 그럴 때 나가 항상 자체적으로 완결 지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여기까진 나, 완결 지을 때 나답다고 하는 겁니다.

나답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결정권을 발휘하고 싶어 해요. 자기결정권 발휘를 수시로 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선택이죠. 자기선택을 왜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 해요. 교회 나온 사람들 다 이렇잖아요. 내가 죽어서 천국 갈 것이냐, 아니면 지옥 갈 것이냐를 어떻게 결정하느냐? 나의 결정권을 발휘해서 나는 옳은 선택을 한 사람으로써 천국 가고 싶어 해요.

그러면 방금 논리를 따라가 보면 나라는 것은 항상 나답다는 것은 완결 형으로 돼있을 때, 아까 봉합이라 했지요. 자체적으로 나로 꽉 찼다.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나는 내 소유로 꽉 찼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남편이 있는데 아내가 집을 나갔다면, 그건 아내가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 화가 나는 이유가, “너는 내 소유가 돼야 돼. 내 결정권이 발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 말도 안 하고 집을 나가느냐.”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너, 결혼한 지 몇 년 됐어?” “3년 됐어.” “그러면 집 사람은 집에 있겠네?” “아니.” “어디 갔노?” “집을 나갔어. 어디 있는지 몰라.” 이러면 얼마나 남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 사람 앞에 뭘 느끼느냐 하면,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 나로 꽉 차있을 때 으스대고 자랑하고 싶은데 지 마누라 하나 간수 못하는,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되게 수치스런 거예요. 남들은 꽉 찼는데 나는 덜 찼다. 수치스럽지요.

그래서 인간은 의미체계가 항상 닫힌 채, 닫혀있음, 꽉 차서 빈틈이 없기를 바라요. 이런 지위를 구약에서는 이래요. 오랜만에 한자 썼는데 좀 어려운 한자인데, 王이죠. 왕이란 항상 모든 인간은 본인의 방 안에서 본인이 왕이에요. 따라서 아이들도 내 방 달라는 게 뭔 뜻이냐 하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왕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자기결정권의 자기완결성이에요. 방 안에 있는 물건 하나, 책꽂이의 책 하나에 내가 결정한 결과물들이 있기를 원해요. 그리고 누가 들어오려면 반드시 노크를 해야 되고.

아이들 사춘기라 하는데 사춘기란 뜻은 이거에요. 아빠, 엄마와 같이 사는 건 사춘기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는 엄마, 아빠는 왜 있느냐를 다시 따져보는 관계가 사춘기에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나대. 엄마, 좀 조용히 해.” 이게 사춘기에요. 전에는 엄마, 아빠는 고마운 분. 그분들 없이는 내가 안 돼. 따라서 엄마, 아빠 말 듣고 순종해야 돼.

이게 사춘기 전이라면 사춘기 후는 뭐냐 하면, 나의 행복권(나의 결정권)을 위해서 엄마, 아빠나 동생이 방해가 안 됐으면 좋겠다. 방해된다? 처음에는 말로 하다가 성질 낼 때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해요. 너는 너 안에서는 왕이 된다.

모든 내 안에서 완결돼야 되는데 완결돼 있질 않아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세기 2장에 보면, 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지 말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따먹지 말라는 것의 벌칙은 어디 있습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는 그전에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요.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데 정녕 죽으리라 한 것은 사실은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벌칙이란 것은 그 벌칙이 두려워서 행동을 안 할 때 벌칙이 유효한 거예요. 그런데 죽어보지도 않았는데 따먹으면 죽는다, 이러면 겁나겠어요? 안 나지요. 만약에 자기 딸에게,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미스코리아 된다.” 그러면 얘는 미스코리아가 뭔지 찾아본다고요. 찾아보니까 되게 좋은 거거든요. 그리고 공부 안 해도 되겠구나, 이렇게 되지요.

이미 벌칙에 대해서 알게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뭐와 결부되느냐 하면, 자기결정권과 결부가 됩니다. 그런데 벌칙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선악에 대해서는 자기결정권이 개입될 수 없지요. 이건 몸은 있지만 자아성이 없는 거예요.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벌칙은 뭐냐? 아담이 안 벌칙은 이거였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벌칙이 되고, 그 결과는 뭐냐? 선악을 아는 자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벌칙으로 주님께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악을 안다는 것은 자아가 의미체계가 닫히질 않아요. 추운데 문을 닫아야 되지 않습니까. 꼭 성질 급한 아들 같으면 문을 열 때 꽝하고 튕겨 나온다고요. 문을 열어 놔버려요. 그러면 다리 아픈 어머니가 문 좀 잘 닫으라고 가서 다시 닫고 오잖아요. 두 번 걸음하게 만든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닫히질 않은 거예요. 왜 닫히지 않느냐 하면, 선과 악이 통합될 성격이 아니고 대립이 되고 대체가 되기 때문에 악은 항상 아무리 선해도 이미 선악을 알았으니까 악이 입을 벌리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것과 이것의 차이를 보세요. 2=2+0, 2와 2+0의 차이는? ‘=’로 돼있으니까 차이가 없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차이가 나지요. 2+0에는 0이 있지요. 이게 excess‘여분의 것’ 나머지, 여분의 것이에요. 평소에는 이게 안 나타나나다가 사건이 오게 되면, 그러니까 내 자아를 다시 정립하게 되는 사건이 오게 되면 내가 붙잡지 못하고 놓친 게 있단 말이죠. 놓친 게 제로가 되는 거예요.

사랑이 있는 거예요. 사랑은 사랑할 때 사랑을 몰라요. 그런데 언제 사랑을 아느냐 하면, 이별할 때 사랑을 알아요. 뭐 쿨하게 헤어진다. 사랑할 때나 그런 소리하지요. 헤어져 보세요. 쿨하게 못 헤어져요. 이런 남자를 만났으니, 하면서 참견하는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남자가 이런 메시지 남겼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됩니까? 이런 남자와 계속 사귀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요. 그러면 키 큰 농구선수와 김숙 등 네 명 다 결혼 안 하거나 이혼한 사람들 앉아서 조언을 해줘야 돼요. 절대 이런 남자와 헤어져야 된다며. 지들도 결혼 안 해놓고 웃긴다고.

이 +알파, 제로는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나를 몰라요. 나한테 이런 요소가 여분의 요소가 있는 줄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령이 안 온 사람은 2=2고, 3=3이고, 4=4에요. 왜? 이걸 전혀 모르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2+0가 있어요. 이 제로 부분이 빈 공간, 공백, 빈자리가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의 자리에요. 예수님의 자리가 나로 하여금 2되게 하고 3되게 하고 4되게 하는 이런 사건을 유발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요. 나한테 보이지 않는 분, 지금 예수님 안 보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나를 데려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지 않으면 제로가 없지요. 제로가 없을 때는 2을 내가 상상해서 천국을 상상하고 예수님을 상상해서 내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전하든지 기어이 여기다 나를 집어넣어야 돼요. 집어넣는 방법은 봉합되지 않은 선+악 지식을 동원해서 천국에 집어넣어야 되는 거예요.

기도하면 선이고 기도 안 하면 악이고, 헌금하면 선이고 헌금 안 하면 악이고, 나쁜 짓하면 악이고 착한 짓하면 선이고. 그것을 자신의 과거로 싸잡아서 그것으로 천국에 넣어달라고 가져오는 거예요. 교회에.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선악 자체를 없음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선악 지식 안의 2을 죽음으로 보지요. 죽음은 뭐와 결합된다? 0은 예수님이니까 생명. 생명이 죽음을 이김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평생을 살면서 왜 죽어야 하는 이유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입장에서는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은 자가 되지요. 나쁜 자가 되면 자꾸 선한 것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내가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다녀야지. 자꾸 뭔가 선한 쪽으로 생각하는데 이 자체가 이 순환구조는 뭐냐 하면, 이미 죽음을 유발하는 순환구조에요. 그러나 내가 죽은 자로 아는 것은 생명이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죽은 자가 되고 죽음은 어디서 생산되는가? 나쁜 것, 좋은 것을 따지는 것이 바로 죽음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아까처럼 하면, 처음에 선악과에 있는 사람은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진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지옥 갈 사람들이 하는 사고방식에서 기껏 종교를 교회 다녀보자 이래 돼요. 내 인생을 누가 책임지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책임진다. 이 정도까지 나간다고요. 이래도 이건 지옥 가는 거죠. 진짜 증언은 뭐냐? 나는 책임질 가치도 없는 거예요. 내 인생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내 인생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여러분? 예수님? 자꾸 예수님 보고 책임지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만약에 치매 걸렸다. 그러면 그 사람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이고 뭐고 몰라요.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자기 믿음이 도대체 몇 살까지 가야 믿음이에요. 나중에 정신없이 믿음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려요. 처음부터 없었어요. 처음부터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여기에 개입됐거든요.

개입된 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격침.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격침된 거예요. 내 이름이 자아인데 자아 있으니까 내 이름이 있잖아요. 내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격침된 거예요. 격침됐다는 말은 그냥 침몰하고 무너진다는 것과 달라요. 격침됐다는 말은 어떤 요소가 강하냐 하면, 공격당했다는 요소가 강하지요.

공격당하기 전에 나는 그냥 멀찍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싸웠다. 나 방어에 나섰다. 격침당하지 않도록 애썼다. 왜? 내가 속한 것은 세상이 인정해준 타인이 인정해준 전체가 총괄적으로 의미체계 속에 나는 일부로 사는 것은 내 자아가 그걸 편안하게 받아들였거든요. 예수님 빠져도 내 직업이 있고 또는 직업생활하다 은퇴를 했으면 과거를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옛날에 내가 그만큼 사는데 내가 수고와 희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살 권한이 있다.

이만하면 연금 오백 받고 아파트에 살아도 남들이여, 날 욕하지 마라. 왜? 난 그만큼 고생했기 그만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건 격침되기 전의 군함이지요, 뭐. 이건 나의 의미에요. 내 안에는 내 의미로 꽉꽉 차있어요. 내 안에는 나다운 것은 꽉 차있어요.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 기억인데 기억은 나의 과거지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어요? 과거를 공유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를 받아들이지 말고 내가 나답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정당하다는 그게 살아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문가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재판받고 처형됐잖아요. 그 전문가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의식과 그들의 예리한 법의식과 그리고 예수님이 있음으로서 이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까지 정치적 고려까지 다해내는 그 정도로 뭔가 포괄적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그런 뛰어난 천재들, 정치적 행정적 천재들에 의해서 결정된 사항, 그 속에 우리는 일부로서 요소로서 들어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내쫓아야 된다,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나중에 그들이 허공에 발길질하는지 모르고 그들의 그라운드, 뿌리가 없다는 것을 애써 감추면서 그냥 밑은 안 보고 이 세상은 서로를 보면서 뭘 하느냐 하면,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위로해달라는 분위기가 코로나블루거든요. 이 코로나우울증은 누가 위로해줘요?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줘야 되는 거예요. 바가지 밟아 깨가면서, 스트레스 풀어가면서 서로가 위로해주는 거예요.

그 위로를 영어로 여러분 아시죠. 위로, 치료, Healing. 도대체……. 힐링 하려거든 김여정한테나 힐링 해라. 전부 다 힐링 해 달래. 피에다 뿌리를 꽂아야 되는데 꽂질 못하고 힐링만 찾고 있어요. 그래서 상담치료가 그렇게 위험한 거예요. 상담가가 나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온 사람들의 의도 간파해서 의도대로 해주는 게 상담이에요. 나한테 이런 결핍이 있습니다, 라고 상담가가 알아내는 게 아니고 손님 보고 해내래.

당신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그걸 왜 상담가가 찾아내야지 손님에게 이야기하라 합니까. 그럼 손님은 이렇게 어려움이 있다고 하지요. 이야기할 때 자아체계에서 닫히지 못하고 뭔가 뚫렸잖아요. 이게 자식문제, 남편문제, 아내문제 뭔가 뚫려있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고 찾아온 사람이 오해하느냐 하면, 이것만 메우면 나는 예전처럼 온전한 내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때려죽어도 나라는 것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쉽게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옥 생활 편하게 해줄 수 없겠어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물론 지옥은 모르니까 지옥은 빼버리고 그냥 생활하는 데 편하게 생활하면 어떻습니까? 사실은 그게 지옥인데. 주님께서 제기하는 것은 힐링이 아니고 상담이 아니고 우리의 근본 뿌리를 우리의 발과 결합시키는 거예요. 피에다 붉은 잉크에다 우리의 발을 꽂아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바람이 불든 태풍이 오든 코로나가 오든 뭐가 오든 상관없어요.

꽂을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죽음의 의미 안에 생명이 개입했다는 것, 그럴 때 죽음이 선악을 아는 여기에 선과 악은 결코 봉합이 안 돼. 닫히지 않아요. 항상 미흡함으로 남아요. 선과 악이라 할 때 선이 이만큼 5센티미터 더 가잖아요. 악을 제치고. 악과 달리기 하다가 나는 선으로 이기고 싶어. 그러면 내가 악보다 속도 빨라서 앞장섰단 말이죠.

그리고 뒤돌아보고 악에게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려고 그렇게 했지만 나는 유혹을 이기고 선을 하고 있다, 하는 그 순간 이미 마중된 악이 옆에 동반하고 있어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악이 왜 거기서 나오지? 내가 악을 이기기 전까지는 그 악보다 더 악이 있을 줄 몰랐는데 내가 악을 이기고 선을 행했다는 그 순간에 기다렸던 악이 동반자로써 동행자로 다시 붙는 거예요. 선과 악은 항상 같이 동반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뭐냐? 예수님이 했던 행적으로 바꿔치기해버리는 거예요. 선악체계에다 예수님의 행적을 바꿔치기해버려요. 바꿔치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이 그림이 중요한데요. 인간이 자기 의미체계가 있으면 이건 자기 몸이 아니고 신체가 아니고 자아라 했어요. 일단은.

이 전체가 많은 부분을 선이라 보고 악은 거의 쪼금, 경상도 말로 쪼매인데 신경 거슬리는 게 있어요. 장미에 찔렸다. 장미 가시에 조금 찔리지 온 몸에 박히는 그렇게는 안 찔리지요. 그러나 이걸 빼면 온전하게 되는 그 미흡함, 악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볼 때 항상 이렇게 좋게 봐요.
“내가 천사가, 하나님이가. 살다보면 먼지 묻게 마련이지. 하지만 퍼센트를 따져봐라. 이게 99%가 선이고 1%가 악인데 그걸 티 잡나, 타인들아.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아, 응시자들아. 내가 이렇게 잘해보려고 아내 떠나서 울릉도에서 일하는 것,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니고 우리 가족 잘 살려고 사업 세 번 실패했는데 네 번째 여기서 이명나무 키우면서 고생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잖아. 잘해보려고 하는데 네가 좀 이해해줘.”

그러면 아내 쪽에서, “취미생활하면서 어딜 핑계대로 있어.” 이렇게 하지요. 아녀자가 됐으면 남편이 하는 일을 팍팍 밀어줘야, 남편이 안 그래도 험한 세상에서 기죽고 사는데 가정에서나마 기가 팍팍 살아야 플러스알파에너지가 나와서 일에 성과가 있을 것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힘들 때 자꾸 위로받으면서 자기 이름을 외친다고요. “아무개야, 파이팅!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지 혼자 산 위로 올라가서 이 짓하고 있다고. 허공 속에 발질하고 있어요.

그 힘내라 할 때 목표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지요. 목표, 목적에 대한 리스트, 이것 어디서 구합니까? 바로 타인의 의미에서 구하는 거예요. 타인의 의미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나, 쟤처럼 돼, 나 이처럼 돼.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에게, “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박보검. 난 박보검이 칼인 줄 알았어. 왜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박보검이 리스트에. 그게 하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박보검을 원하려면 적어도 손예진 만큼 인물이 돼야지 지는 손예진 아니면서.

그래서 인간은 항상 모든 목적과 의미가 기존에 있는 것 중에서 추립니다. 추려서 덕지덕지 고르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걸 우상, 아이돌이지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우상이죠.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업무, 주님께서 찾아온 사람의 업무는 뭐냐? 딴 것 아니에요. 착하라가 아닙니다.

너의 우상성과 어떻게 네가 싸울 것인가? 이 문제에요. 매일같이 정립이 된 나만 쳐다보는 이 우상성을 어떻게 감당할래? 감당할 수 있겠어, 라고 하는 거죠. 그 우상성은 반드시 자기 의, 나는 선하다, 99.99% 선하다는 이 우상성과 네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래서 주님께선 사건을 일으켜요. 항상 우리는 이걸 닫아 놔버려요. 거의 100% 나는 착하다는 여기에 주께서는 돌발 사건을 일으켜버립니다. 갑자기 이가 아프다든지. 저도 임플란트 이주 후에 할 거예요.

이렇게 점잖고 착하고 남 대할 때 말도 곱게 하고 하다가 사건 하나 터져버리면 지금껏 내가 남들에게 착하고 바르게 산 게 다 무슨 소용 있느냐, 라고 그동안 자기 과거에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 안 먹고 몸조리면서 착하게 살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됐다는 그 허탈감, 허무감에 의해서 자기가 자책하게 만들어요. 이 사건이. 그럼 이 사건을 악마로부터 하게 만들어요.

이 사건으로 내가 99% 착하다는 이 의미 자체가 99+1=100, 이런 식으로 주께서 구원해주는 게 아니고 이건 선악적인 방식이거든요. 이 방식 말고 그냥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뿌리를 보게 해요. 네 두 발이 네 존재가 어디에 담겨있고 잠겨있고 박혀있는지 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것은 우상성과 싸우는 게 아니고 사건을 통해서 이미 우상이었구나, 라고 나를 주님의 과거로 만들어버려요.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죠. 내가 고칠 수 없는 운명, 인간이 스스로 바꿀 수 없어요.

인간은 잔소리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상담의 문제가 그거에요. 멀쩡하게 서있는 나, 우상이죠. 우상과 그리고 내가 담고 있는 발, 적시고 있는 발, 위에는 강도고 밑에는 피, 이러면 어디 가요? 천국 가지요. 이 피의 원칙과 위의 원칙이 다릅니다. 이 원칙은 선과 악의 갈등이에요. 항상 악을 뿌리치고 선한 쪽으로 나를 몰아세우려는 분투노력을 하게 해요.

결국 윤리도덕이 왜 악이냐 하면, 나를 지키는 거예요. 선과 악이 봉합이 안 되는데 마치 나는 악을 떼어내는데 성공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자기가 착각하고 싶어 하는 것, 그게 바로 우상이고 그게 윤리도덕이 거기에 작용되는 거예요. 나에게 기대 걸고 나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오늘 괜찮은 성적이라고 자기 자신의 성적표를 그 사람에게 제시함으로써 그 사람이 나한테 계속해서 인정함, 참 훌륭하구나, 잘하는구나, 라는 그 점수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없지요, 뭐. 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늙어 죽어가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착각만 남아요. 나라는 이름의 환상만 남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연예인들은 팬들 떠나면 자살하잖아요. 이유가 뭡니까? 팬이 없는데 내가 살면 뭐하나. 이 몸으로 살면 뭐하느냐.

팬이 없으면 떨어진다는 이 말을 장사, 상업에다 적용하게 되면 도꾸이 없으면 장사가 안 돼요. 도꾸이(とくい)란 말은 단골. 교회도 도꾸이고, 모든 장사도 도꾸이고. 보세요. 이 세상에 이 몸은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무조건 불행은 남들한테 가고 나에겐 와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예를 들면 피자가게를 냈다. 세상에 싸가지 없이 분명히 피자가게를 냈으면 적어도 500미터, 1킬로미터 내에는 다른 피자가게가 없어야 되는데 보란 듯이 피자가게 내고 인테리어 더 잘했어요. 나한테 왔던 도꾸이 어디 갔습니까? 반 토막 났고 저쪽 갔어요. 온 도꾸이도 다 날아갈 판이라. 너는 장사윤리도 없나, 하고 윤리가 등장해요. 이게 스트레스지요.

스트레스는 왜 오느냐? 딱 한 가지에요. 경쟁 때문에 생겨요. 독일의 교육에서는 경쟁이 없대, 시험이 없대.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데요. 우리 외손자한테 너 유치원에서 뭐 배웠나, 하면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요. 그냥 놀았대. 그래서 한국 오면 너는 완전히 바보 된다. 애들이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경쟁이 없으니 행복하지요. 전부 다 도꾸이가 오는데 행복 안 할 수 있어요? 경쟁자가 없는데 행복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경쟁 없으면 바보 되지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떤 방법으로 압니까? 도로에 자기 차 한 대밖에 없으면 세월아 내월아, 하고 그냥 가면 돼요. 그러나 앞차가 가게 되면 심리적으로 따라가게 돼있어요. 필히 그래요. 더 앞에 가면, 요것 봐라. 더 따라가게 돼있어요.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모방해서 움직이게 돼있어요. 따라서 항상 내가 갈 길은 남들이 가는 곳만 찾아가요. 심지어 그게 지옥이라도 좋아. 하여튼 멸망 길이라도 많은 사람이 가게 되면 진리라고 여기는 거예요. 큰 교회,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몰라. 무조건 남들 하니까 다 따라가는 거예요.

경쟁을 이 세상에 집어넣었어요. 부질없는 목적을 향하여 부질없는 헛짓하다가 나중에 경쟁자 물리치게 되면 본인은 나는 내가 최고라고 하는 순간, 경쟁자 없는 순간 그 사람은 살 의미가 날아가 버렸어요. 왜? 평생 동안 경쟁하는 재미로 살았거든요. 공부하는 재미로 살았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붙여줘야 하지 않습니까. 평등이라 해서 그 학교 다 없애버리면 얘들은 뭐하고 놀란 말이에요? 공부가 제일 재미있는데.

그래서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마지막에 형뻘들 축구하고 있는데 동생들은 장래 희망이 그거에요. 축구 잘해서 저렇게 환호 받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형들 다 떠나고 휑한 운동장에서 지 혼자 공 툭툭 차봐야, 분명히 공차는 게 재미있는데 왜 공을 혼자 차면 재미가 없지요? 환호성, 보는 타인들의 시선이 없잖아요. 나를 나라고 규정해줄 자가 없잖아요.

이게 바로 2+0인데 이 0이 악마가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우리는 원래 악마의 지배였으니까. 이 0의 자리를 주님의 자리로 바꾸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악마나 주님이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없는 존재고 숫자로 하면 0이 되는 거예요. 없는 동네에서 일어난 전쟁이에요. 우리의 운명이 확정된 것.

그러면 자기의 우상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우상 되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셔요. 2+0에서 주님은 분명히 2+0인데 이 세상은 이 0을 안 쳐주고 자꾸 나 보고 2이라고 이야기해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유행가 생각나네. 설악산 근처에 고갯길이 있어요. 한계령. 나 보고 내려오라고 하네. 나 보고 가라 하네.

이게 타인의 시선이 나의 욕망으로써 지휘체제, 지시를 하게 되지요. 이것이 몸에 배긴 정신적인 관행이 되고 관습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뉴턴의 제2법칙에 의해서 멈추지 않는 한 인간은 같은 속도로 가게 돼있어요. 관성의 법칙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던 대로 살게 돼있어요. 따라서 인간은 개조되지 않습니다. 교회 백날 다녀도 개조 안 돼요. 예수 믿어도 개조 안 됩니다.

다만 주께선 하던 대로 하되 레일이 있잖아요. 레일 스위치를 바꿔버려요. 같은 죄인인데 가는 곳이 전에는 지옥으로 가다가 스위치를 바꾸니까 부산으로 가다가 광주로 오게 만들어요. 대전에서 레일을 바꿔버려요. 레일을 바꾸면서 천국 가면서 여기는 +0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전에 알던 나와 주님이 누군가를 주님의 과거사를 공유하면서 주님이 누구신지가 내가 누군가보다 더 중요한 기쁨의 요소가 돼버리지요. 그리고 자기 발을 본다. 나는 도대체 두 다리가 어디 있는가? 누가 요한복음 6장 65절 읽어보세요.

“또 가라사대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원리가 우리의 두 발을 담갔던 피의 원리입니다. 이 피의 원리에서는 네가 천국 가거라, 이렇게 하면 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네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제로에 주도권이 있고 이 제로는 아버지와 직결되신 분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되는가? 내가 아니라고 아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죽은 자답게 만드는 지옥 가되 마땅한 자로 만드는 그런 모습으로 나는 선의 경쟁에 뛰어들고 있음을 자기 자신을 이 뿌리의 안목에서 다시 자기 몸통을 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우상인지를.

그런데 우상인 내가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절대로 안 바뀌어요.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해도 이건 2초 내지 3초 지나면 그 다음에 누가 딴 소리하게 되면 정신없어. 너한테 경쟁에서 안 진다는 이런 소리 나온다고요. 자기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같은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하는데 아들이 와서, “엄마, 또 오늘 수학 망쳤다.” 하면, 집 나가. 너 내 자식 아니다. 방금 은혜 받았다며. 갑자기 집안에 쑥 사건이.

은혜 받았는데 갑자기 닫히는 거죠.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잖아요. 닫혔는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터져버렸단 말이죠. 터지니까 나는 우상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사건을 봉합하려고 이걸 메우기 위해서 갑자기 너는 앞으로 기도해라. 기도해야 되지, 기도 안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자기 괜찮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본성이 발작을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를 격침해야 되는데 주님의 새로운 나가, 그러니까 2+0가 지옥에다 죽으라고 격침시켜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알면서도 다시 가게 되면 헤헤하면서 이가 수면 위로 내밀어서 너는 3이냐 너 1이지 나는 2야, 하고 경쟁에서 안 지려고 하는 이유가 몸이 있기 전 관행과 관습입니다.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이 관행과 관습은 몸 인박혔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집에 아파트 문 닫고 돼지고기 구워 먹어봤습니까? 그 냄새 되게 오래 가지요. 그처럼 우리를 이어준 이 몸은 수상한 몸이에요. 선악에 의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가 포기해야 될 몸이에요. 오래 산다고 해서 자랑할 게 아닙니다.

강의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보람은 자기 하는 일에 있다. 지금은 일이 없더라도 과거에 이 정도 일을 했으니까 사람 값한다, 나 마구 안 놀았어, 사기 처먹고 사는 게 아니야. 나는 가장으로서 책임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고 죽을 등 살 등 해서 이만큼 이뤘으니까 강의에 의하면 자아 안에는 자기의 소유성으로 충만하지요. 이 아파트와 부동산은 내가 가질 만해서 가진다.

그걸 누굴 보고 이야기합니까? 지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여러분 가끔 친구들 만나자 하거든 자랑하라고 만날 줄 아시고. 친구 만난다는 것은 첫 번째, 술 먹으려고 만나는 것과 또 술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 지 자랑, 자식 손자 잘 키운 것, 손자 유학시킨 것, 전부 다 자랑하려고 모인 거예요. 결국 그 자랑은 화기애애하게 헤어진다, 싸우면서 헤어진다? 싸우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경쟁이니까. 적어도 착한 내가 나보다 못한 저보다는 매사에 복을 받아도 더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 복 받는 경쟁에서 지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목사들의 심방을 가고 누굴 만나도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망했다고 생각한 사람 집에는 못 찾아가요. 자신감이 팍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남 앞에 내세우기 전까지는 오지 마라. 내가 남에게 이 정도면 내세울 만하다고 되기 전까진 오지 마라.

사랑이란 그 사람의 과거를 공유하는 게 사랑이에요.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했는데 적어놓으세요. 사랑이란 숨겨놓은 과거를 공유하는 게 사랑이에요. 예를 들어서 “여보, 내가 소를 시장에 가서 썩은 사과와 바꿨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잘했군, 잘했어.” 이러지요. 또는 충청도 말로 “괜찮아유, 뭐. 살다보면 그런 수가 있지.” “실은 내가 당신 몰래 저지레했어.” 남편이 그걸 들었잖아요. “괜찮아유, 뭐. 살다보면 그렇지.” 이게 하춘화 노래에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 는 서로의 과거를 공유해도 이게 하나로 서로 소통이 되는 것, 그게 얼마나 희망사항이겠습니까. 문제는 그 과거가 우리의 미래라는 거예요. 현재 주님과 함께 되면 현재에서 과거, 미래가 계속 새롭게 생산돼요. 없던 과거가 만들어지고 없던 미래가 만들어져요. 없던 과거가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한 일이죠.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닙니까? 지나간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져요.

왜냐하면 우리가 가질 것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주님의 과거를 공유하게 되면 주님의 과거로 나의 과거가 교체가 되고 채워져야 돼요. 그래야 주님 안의 새로운 자아가 주님의 소유성으로 주님의 하신 일로 업적으로 꽉꽉 차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보시기에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이에요. 주님 앞에서 전방후방 좌우 그리고 과거와 미래, 전부 다 주님의 것으로 채워나가는 겁니다. 2+0로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채워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의 증인이에요. 보이지 않는 분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럼 왜 우리는 보이느냐? 보이지 않는 분 때문에 보이는 거죠. 이 원칙은 뭐냐?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공격했잖아요. 왜 예수님을 공격합니까? 예수님은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 명령 따라갑니까? 아버지죠.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일을 못하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 땅에 보내듯이 이와 똑같은 과거 똑같은 예수님의 경험을 똑같이 적용시킨 사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끝. 아무도 올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는 지금 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우상이고 남한테 안 지려하고 우리 자신을 개조 못하고 그런데 우리가 딛고 있는 뿌리는 주께서는 주님의 과거를 거쳐서 주님의 현재에 이르도록 우리를 계속 매일같이 방향을 틉니다.

사건을 보내서 우리가 선악에 빠져있고 선악으로 미친 짓하고 있다. 죽은 벌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음을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는 겁니다. 내 선으로 악을 가리는 이 미친 짓 때문에 본인이 고민이 되고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하니까 잠이 오질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어도 살찐 사람은 어떤가, 잠 잘 오는 사람? 그건 많이 먹어서 그래요. 그건 야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고.

평소에 사람들은 얼추 됐다 싶으면 또다시 여기서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완전히 강호의 고수들의 판이거든요. 이 판에서 내가 칼을 제일 잘 쓴다 하면 다른 고수가 또 등장해요. 이건 설교, 목사세계도 마찬가지에요. 얼추 설교 잘한다하니까 다른 고수가 등장하면 엄매 기 죽어. 엄매 기 살아. 이러고 있다고요.

이 자체가 진짜 뻘쭘한 인생입니다. 아무도 봐줄 필요도 봐줘도 아무것도 아닌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거기에 대해서 평생 동안 마귀에 노예 생활하는 우리의 모습, 주께서는 일체 묻지 아니하시고 그 발을 피에 적셔서 얼굴이 술 먹은 것처럼 예수의 피로 벌건 그런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서 왜 사람들에게 일부러 죽으셨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뿌리 없는 우리가 생명에 우리의 발을 잠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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