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생겨난 죄

아빠와 함께 2020. 10. 2. 09:22

광주강의20200925a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24절부터 하기로 그렇게 되어 있죠. 근데 21절부터 보게 되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는 대목에서 십자가가 부각됩니다. 근데 십자가를 지는데 어떻게 지느냐 하면은, 십자가와 시몬이 부각되는데, 이게 억지로 해요. 억지로. 십자가가 부각이 되면서, 마가복음 15장 21절부터는 십자가가 연이어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에게서도 갈라디아서 3장에도 그렇고 6장에도 그렇고 십자가를 증거 한다. 십자가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의미를 포함시킨다. 이래 보시면 되죠.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오는가, 십자가에서 나온다. 말이 굉장히 쉬운데, 어떻게 해서 모든 의미가 십자가로 이게 모아지고, 그리고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서 펼쳐지고 그렇게 되는가, 그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억지로 졌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은 앞에다가 “억지로”를 붙이는 겁니다. 억지로 죄를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이 땅에 죄라는 것을 억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억지로 드러내는 이 상황이 모든 것이 십자가로 거기서 모아진다. 여기서 종합이 되고 집중이 되고 응집이 된다. 응집이라는 말이 적당하겠네요. 모든 것이 다, 이 세상의 것이 다 십자가로 응집이 된다. 이 말은 죄를 드러내는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죄라는 것을, 인간은 죄라는 것을 모르는데, 모른다. 그런데 죄라는 것을 생각하면 죄가 돼요. 죄라는 것이 없는데, 중요합니다. 인간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죄가 돼요. 모든 길에 지뢰를 깔아놨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면 지뢰를 밟을 일이 없죠. 근데 길로 나서버리면서부터 팍팍 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죄가 되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죄책감이 들고, 죄책감이 드는 순간 그 죄를 억지로라도 지워야 내 마음이 편해져요. 내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그러니까 죄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선한 행동, 바른 행동, 이런 것으로 죄에 대해서 회수를 시키려고 하는 그것조차도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죽은 시체가 되어서 관속에 가만히 있으면 죄를 모를 텐데,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는 돌멩이가 아니잖아요. 뭔가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거나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서, ‘아이고, 이거 잘못했다. 드럼세탁기에 넣지 말아야 될 것을 넣었구나.’ 만약에 소금을 너무 넣어서 반찬이 짜게 되고. 이럴 때, 우리는 뭔가 잘못 되었다. 일이 뭔가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순간,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 죄가.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시몬+십자가, 시몬은 촌에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으니까 억지로 지게 했죠. 시몬이라는 보통사람, 우리같이 그냥 보통사람이 억지로 뭘 졌습니까? 십자가를 진 거예요. 근데 시몬은 죄라는 것을 모르는데, 뭘 알게 되었느냐 하면은 죄의 원천을 알게 된 겁니다. 결합이 된 거예요. 죄의 원천과 결합이 된 거예요. 이럴 때, 시몬은 무엇의 원형이 되느냐 하면은 성도의 원형이 돼요. 성도의 원형이.

성도는 뭐냐 하면은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원형과 닿게 되는 것. 원형과 이어지는 것. 그게 성도고 그게 이스라엘이고 그게 하나님 백성입니다. 인간의 인간적인 모든 해결책이 왜 소용이 없느냐 하면은, 인간인 내가 해결책을 하는 것은 원형과 닿지를 않아요. 십자가와 닿는 것이 아니고 뭐와 닿느냐 하면은, 나와 닿아져요. 나. 나와 닿아진다고요. ‘에휴, 이건 분명히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그러면 내가 앞으로 기도를 더하든지 아니면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지.’라고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그건 십자가와 닿는 것이 아니고 나와 닿아서, 죄의 원천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내가 잘못해서 죄를 지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내가 잘못해서.

들어보면 굉장히 겸손한 것 같지만,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바로 오만함이죠. 인간은 죄를 짓는 최초의 인물이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 이전에 죄가 먼저 있으니까. 죄가 왕 노릇하고 있으니까. 여러분 이건 상식인데 옛날 동양역사에 보면 그런 게 있죠. 나라가 있는데 홍건족이 등장했다. 북방의 마적 떼가 등장한다든지, 적군이 쳐들어온다든지 할 때, 왕이 하는 말이 “각 가정마다 남자장정을 내보내어 군대로 모집해서 이 적들을 쳐부수자.” 이렇게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가정에서는 남자가 다리가 아파서 병들었을 때, 딸이 나서서 아버지가 나설 수 없는 그것을 대신해서 갑옷입고 칼 들고 홍건족인지 북방 왜적을 물리칩니다. 물리칠 때,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은 황제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해야 된다. 지금 하고 있는 뮬란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게 나와요.

황제를 위해서, 황제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정은 마지막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면은 황제의 말을 듣는 거예요. 황제를 위하여. 이문열 소설에도 이런 게 있죠. ‘황제를 위하여’ 황제의 명, 황제가 있어야 나라가 되니까, 황제가 나라의 대표니까. 나라가 있어야 우리 가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황제를 위해서 하면 나의 의미는 황제로서 마감이 돼요. 마감이 되는데,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난데없이 십자가와 이렇게 엮여져버린 거예요. 십자가와.

자, 그러면 물어볼게요.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기까지, 그 당시 유대나라의 제일 통치자가 누굽니까? 로마가 권세를 가지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유대지도자가 권세를 갖고 있죠. 그러니까 로마 군인이 억지로 지게 하니까, 시몬이 반항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억지로 진 거예요. 억지로. 명령은 따랐는데 본의 아니게 십자가와 엮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전에는 뭐냐 하면은 황제를 위해서, 동양으로 말하면 황제를 위해서, 지금은 로마의 권세자를 위해서, 그 권세자를 위해서 사는 것이 자기 존재의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뭐와 닿게 됐느냐 하면은, 원형, 모든 의미의 원형. 이 원형과 이렇게 닿게 되면 죄라는 것은 나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돼요. 죄라는 게.

사람은 이 십자가와 만나고 죄의 원형과 만났을 때에 무엇이 구멍이 나느냐 하면은, 내가 있는 곳, 내가 있는 세계, 나의 이 모든 것에 구멍이 나버리는 겁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들 구레네 사람” 이래 되어 있죠. 구레네 사람이라고 되어 있죠. 자, 이 시몬은 고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향이 있죠. 자기의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이 있다 이 말이죠. 고향, 그 고향, 돌아갈 고향, 그것이 구멍이, 빵꾸가 나버린 거예요. 왜?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나의 살던 고향, 내 눈에 보이는 이 나라, 황제, 지도자, 사람 사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 이게 당연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뭐 그렇게 사는 것. 그런데 거기에 빵꾸가, 구멍이 나버린 거예요. 그것도 억지로.

왜냐 하면은 십자가 지신 분은 이 땅에 고향이 없어요. 이 땅에 고향이 없습니다. 고향이 없고, 이 땅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형편만 주어졌어요. 형편.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형편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성질이나 성격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로부터 “니는 여자면서 성격이 왜 이렇게 와일드해? 이래가지고 시집이나 가겠어? 너에게 장가올 사람이 있겠어? 성격 고쳐. 니는 성질이 문제야.” 이래잖아요. 어느 부모가 “니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형편이 그렇고 환경이 그래서 그런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니 성격을 고치면 이 형편에 맞춰서 잘 살 수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한번 봅시다. 형편과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질 또는 성격. 성질, 성격이 현재 주어진 형편의 반대말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성질, 성격은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형편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손을 못대잖아요. 그래서 주어진 형편 가운데 내가 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성질과 성격을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질과 성격을 어떻게 고치느냐 하면은 죄가 많이 끼어있는, 죄 지을 수 있는 성격, 성질을 선하게 바꾸면 이 형편에 맞춰서 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이 형편 속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또 우리는 뭘 의식하느냐 하면은 이 죄라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죄라고 의식하는 순간 그게 없던 죄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죄라는 것을 의식 안 하려면 성격이나 성질 이거는 문제가 아니고, 주어진 형편이 어디서 왔는가가 이게 우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되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냥 길을 갔는데 억지로, 뭐와 만납니까? 억지로 뭘 지게 되죠? 십자가를 지게 되죠.

십자가는 누구 형편이냐 하면은 십자가는 예수님의 형편이다. 예수님의 형편. 근데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 고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향이 없어요. take me home country roads, 고향으로 날 보내달라는 그게 안돼요. 그게. 존 덴버 노래. 날 웨스트버지니아로 데려갈 일이 없어요. 십자가 지신 분이 있는데 그분은 이 땅에 고향이 없어요. 이 땅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이 땅에 자기의 자리가 없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땅은 자신의 원형이 아닙니다. 원형은 따로 있다 이 말이에요. 따로 있는 그분의 형편과 이 땅의 고향에 적을 두고 있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구레네 시몬과 이게 억지로, 강제로 만난 겁니다.

이렇게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자체에 원형이 되지 못하고 이 세상 형편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뚫려버리면 이게 출입구가 되죠. 하늘나라 출입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긴 이야기가 처음에 시초를 뭐로 뒀습니까? 이 땅에는 죄가 없다. 이 땅에는 죄를 알지 못한다. 이 땅이 죄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의 성질이나 성격을 고쳐서 내가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동원된 의식이거든요. 그런데 이 죄의식은 원형을 찾지 못하고, 원형이 아니에요. 원형은 뭐냐, 내가 보다 더 훌륭한 사람, 이것이 원형이고. 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병행되는, 연동되는, 같이 생겨난 개념, 필요한 개념 정도. 필요한 개념정도로 보는 거죠. 근원적으로 죄라는 것은 나하기 나름이다. 내가 착하게 살면 죄가 없어지고 내가 마음을 놓게 되면 죄가 들어온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는 죄라는 것은 없는데, 우리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보다 죄가 더 적어지고 죄가 많아지는 나를 생각하는 게 되고, 그 순간 이미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가 돼요. 그러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가 없죠. 왜냐하면 자기는 억지로, 죄가 없는데,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 사건이 죄의 원형이거든요. 원형을 딱 보는 순간 자기는 그 안에서 죄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죄짓는 원자, 원형이 아니거든요. 내가 죄짓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죄는 십자가라는 사건 안에서 죄가 시작이 되기 때문에, 나부터 죄가 시작된 것이 아닌 차원에서 나에게는 죄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그 뒤에 여기 24절에,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고 하는 그 대목이 나오죠. 이 사람들의 죄는 뭐냐 하면은 십자가도 모르는 체,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그 의도, 그 의도가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왜? 자기 세력에 위반이 되니까 죄잖아요. “자기가 저거는 죄인이야. 사형시켜도 마땅해.”라는 순간, 그들은 이미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지금 20분이 지났는데 이쯤해서 이해를 해야 돼요. 이쯤해서 진짜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인간이 자기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내 성격상, 내 성질상 할 수 있는 일을 조치를 할 때, 그게 바로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그리고 지금 나오는 로마군인들과 거기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30절에 나오죠. 이 사람들이 지금 뭘 빨리 치워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치우기 위해서 분주하죠. 왜 분주하냐면 자기들 보기에 그게 죄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지우려고 하잖아요.

예수님을 지우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없었던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누구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죄냐, 아니면 죄의 원형은 따로 있는가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추궁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로마군인들과 제사장들이 자기 단도리, 자기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이러한 시도, 시도가 그때만의 일이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들이 평소에 하는 모든 생각들이 바로 이 제사장들이 하는 짓을 지금 그대로 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러니까 성경이죠. 성경은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 해당이 되잖아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게가 지금 코로나 때문에 폐업을 할 지경인데, 폐업을 해야 되는데, 전에 아홉시에 출근했던 직원이 새벽 여섯시에 와가지고 청소하고 번쩍번쩍하게 광이 나도록 청소하고 그러면 주인 입장에서는 이게 부담이 됩니까? 고맙습니까? 부담되죠. 끝났는데. 되게 미안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식당가게하고 애 키우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돼요? 안돼요? 부담되죠.

왜? 너무 오버하는 희생을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내가 죄지을 것 안 짓고 착한일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유난떠느냐 이 말이죠. 우리 주님이. 왜 유난을 떨어요? 너무 희생해요. 우리는 그런 희생을 요구한 적도 없는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정도로 희생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런 거 전혀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내 성질, 내 성격을 바꾸는 데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거든요. 게으름 피우지 않고 아침 일찍 나와서 성경보고 기도하면 되는데. 이러면 되는데 너무 예수님이 유난을 떠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고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누가 하라고 했어요? 내가 요구했습니까? “주여, 나는 내 힘으로는 죄용서 못 받으니 주께서 뭐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렇게 요청한적 있어요? 우리는 요청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은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집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가 책임지잖아요. 내가. 내가 책임지기 때문에 극도로 누구에게도 짐 지우기 싫은 거예요. 우리의 본성상. 모든 인간이 그런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깨끗하고 건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이것이 죄일까? 이것은 착한일일까? 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자신이에요.

그게 바로 죄인이에요. 그게. 그게 예수님 십자가에 죽인 죄인이라고요. 그게. 구레네 시몬을 보세요. 이거는 난데없이 걸려들었잖아요. 난데없이. ‘저 십자가를 져줄까? 말까? 힘든데.’ 이거 아니라니까요. 억지로, 억지로 짊어진 거예요.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다고요. 죄의 원형을 직접 만났어요. 죄냐, 아니냐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결정한다? 주님이 결정하거든요. 주님이 결정한 죄를 직접 만나보니까, ‘내가 어떤 짓은 나쁜 짓인데, 아이고, 길거리에 침을 한번 뱉으면 그건 죄가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조차,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 지는 순간 그런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조차가 없어요.

‘이거는 죄일까? 아닐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야지. 남한테 배려해야지. 내가 하는 행동이 남한테 죄가 되고 이웃사랑 아닌데.’ 이러한 생각을 십자가 짊어지는 순간, 그런 것은 다 부질없는 생각이에요. 다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죄라는 것은 이 땅에 인간들이 찾아낼 수 없었다. 이 땅에 없어요. 죄라는 것은 이 형편에, 이 환경에 자리가 없는, 고향이 없는, 그분이 여기에 알려줘야, 그분이 십자가 져야, 그게 바로 죄의 원천, 죄의 원형이에요. 죄의 원형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위해서 노력해도 그것은 원형과 닿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원형과 닿지 않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제가 강남강의 두 번째 강의에서, 자꾸 강남강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때 강의하면서 뭔가 정리가 안 된 것 같아가지고 제가 찝찝해서 그러는데. 강남강의 두 번째 강의하면서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자꾸 생각하고 사색하고 검토하고 그걸 측정하려고 하는데, 내가 죄인일까, 아니면 의인일까,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성령 받았나, 안 받았나, 죄 씻음 받았나, 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가 동그라미를 쳤죠. 동그라미 친 걸 바로 뭐라고 했죠? 이게 바로 무의미하다. 이게 무의미한 거예요.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를 억지로 한번 져봐야, 이런 나에 대한 사색, 나에 대한 관찰이 해도 소용이 없고 안 해도 소용이 없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 돼요.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에요. 내가 그때 나쁜 짓을 해서 내 딸에게 나쁜 일이 생겼구나, 라는 거라든지. 내가 말을 잘못해서 멀리 계신 분이 기분 나빠서 악플은 아닌데 이상한 문자를 보내왔구나. 다 내 탓이요, 해봤자 자기 가슴만 아플 뿐이죠. 내 탓이요, 해가지고 다음에 말할 때는 조금 조심해서 말해야지. 주여,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이게 다 의미 없는 짓이에요. 바로 그렇게 행동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뭔가 죄를 의식하게 돼 있잖아요. 그 의식하게 된 게 바로 몰라도 될 죄를, 죄를 알게 된 거예요.

누구 생각할 때? 내 생각할 때. 내가 뭔가 고치면 이 환경에 맞출 수 있다. 내 쪽에서 내가 수정하면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뭐 자기가 성화된다고 우기는데 성화되는 게 아니죠.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사자성어가 있어요. 자기연민이에요. 자기연민. 자기를 굉장히 불쌍하게 여기는 거예요. 자기를. 그래서 가게를 폐업하고자 하는데, 내보내야 될 직원이 뭔가 눈치를 챘는지 열심히 하고, “사장님! 또 뭘 해드려야 할까요?”라고 할 때에, 그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미안하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 안 하면 내가 지옥가면 그만인데.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럼 저주받으면 그만인데, 자꾸 예수님이 십자가 지니까 그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져봤자 내가 믿을 위인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열심히 해봐야 내가 믿어줄 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가게가 어떻게 잘 되느냐 그것만 관심이 있지, 우리 집 직원이 뭐 어떻게 열심히 하고, 이거는 이차적인 관심이고. 일차적인 관심은 내가 우선 살고 보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인데.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을 써야 됩니까? 예수님의 사정까지 왜 고려해야 돼요? 내 사정도 급한데. 우리는 내 사정이 급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보기에 괜찮다 싶으면 그냥 만족하고 싶어요. 근데 괜찮고 싶은데, 내가 보기에도 참 얼굴 들기에 곤란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하고 나쁜 생각을 갖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고민이다 이 말이죠.

근데 나쁜 짓, 나쁜 생각이라고 고민하는 그 순간, 그게 바로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여기엔 억지가 없거든요. 자연스럽지 억지가 없다 이 말이죠. 억지스러운 사태가 안 벌어지고 있고, 나는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그것이 나의 희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억지가 됐거든요. 그 사람도 자기연민이 있죠. 있는데, 여기에 억지가 개입이 돼버리니까 십자가가 쑥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니까 자기 연민을 해도 죄가 아니고, 안 해도 죄가 아니고. 이래도 죄 아니고 저래도 죄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시몬은 십자가가 죄의 원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자기 존재의의는 끝난 거예요.

십자가진 내가 어떠냐가 아니라 자기가 진 십자가가 무슨 의미냐에, 거기에 자기가 종속되고 마는 겁니다. 십자가 쉽습니까? 나는 무지무지 쉬워 보이는데. 이런 인생이. 얼마나 쉬워요. 여러분, 밤에 잘 때 온갖 꿈을 꾸잖아요. 또 잠을 깨기도 하고. 갱년기가 돼서 잠이 안 온다고 새벽 세시에도 TV틀고 하잖아요. 온갖 생각을 다하죠. 그런데 바퀴벌레가 여러분 팔위에 올라온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올라오게 된다면 뭔가 느낌상 이상하게 되죠. 이만한 자벌레가 올라왔다고 한다면, 그때 그래도 TV를 보십니까? 급선무가 뭡니까?

내가 예상 못한 억지환경, 자벌레가 올라오는, 바퀴벌레가 올라오는 이 환경에 대해서 나는 어떤 조치를 하겠죠. 그 순간 나의 꿈 이야기, 오늘밤 내가 어떻게 했다는 이런 이야기가 싹 달아나는 거예요. 뭔가 이질적인 것이 덮어씌우면.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찾아오신 거예요. 온종일 나만 생각하다가 나를 놓쳐버리는 순간, 이것이 바로 내가 예상 못한 다른 형편이 나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무슨 관계냐 하면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새로운 형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침투한 거예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관계를 사람 대 사람의 관계 또는 나와 나의 관계로 이게 전부 다 굳어져 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망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 지금보다 더 내가 좀 더 좋은 인간성을 갖자.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그 의미가, 원형이 항상 나에게서 종결되고, 그게 자기 연민이거든요.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뒤집어써야 되니까, 이거는 본인이 예상한 형편이 아니에요. 근데 그 십자가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이거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근데 여기서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가지고, 그 뒤에 한번 봅시다. 24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자, 이런 짓을 왜 하는 겁니까? 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옷을 나누고, 왜 그렇게 합니까? 방금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사람들의 모든 관계는 모든 것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이 환경이라는 것이, 삶의 환경이라는 것이 조성된다. 거기에 완전히 굳어져버린 거예요. 모든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다.

그 사람들이 언제 예수님한테 원한관계에 있었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위에서 지시한대로, 지시하니까 하는 거예요. “어? 바닷가에 사람이 있네. 여봐라! 총 쏴라!” 두두두두두~~ “불태워라!” 확 불 지르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하고 남쪽 공무원하고 북한 공무원하고 언제 아는 사이였어요? 아는 사이였습니까? 모르는 사이였죠. 근데 그거 누가 지시했어요? 윗사람이 지시하죠. 그럼 윗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입니까? 그게 바로 사람 대 사람의 관계잖아요.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지시하신 분이 주님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죠.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사람에게 묶여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람한테 왜 묶여 있느냐 하면은 내가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 저 말을 다 끌어 모아버리면 누구한테 묶여있다? 내가 나한테 묶여있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묶여있으면서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사람 대 사람으로 형성되는 이 사회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살 수 있다. 이런 것 때문에 노력하다보니까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이게 지금 나쁜 짓 일거야. 아니, 이거는 선한 일이니까 하고 나쁜 짓은 안 해야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소속이 결정되어 버린 거예요.

소속이 어딥니까? 이 땅이 고향이라. 이 세계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죽여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왜? 예수님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의 사람이 아니고 인간에게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왜 마가복음, 복음서 이후에 왜 사도의 편지에서 전부 다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왜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지금 우리가 원형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도 모르고 있으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돈독하게 되고 그 사람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게 되면, 아마 하나님도 착하게 살았다고 좋은 점수를 줄 거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제가 한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에 대한 사명감밖에 없다. 뭐 안 하는 짓 해볼까요? 다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인간은 자기에 대한 사명감밖에 없다.” 자기 사명감에 투철합니다. 끝이에요. 없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사명감밖에 없어요.

복음십자가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됩니까? 복음이야기하면, 그거 나한테 도움이 됩니까? 물음 자체가 이미 글러먹었어요. 억지로 나 안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계산기 튕겨보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왜? 나는 어디에 투철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지키는 사명감에 투철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 그 일꾼들과 지시하는 로마군인들, 그걸 지켜보는 제사장들,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투철한 사람들입니까? 내가 평생 일궈놓은 나에게 투철한 거예요. 제사장으로서 이 예수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내 자리, 제사장이라는 이 직분에 대해서, 이 권세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때문에, 의심이 가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잖아요. 미쳤다고 내가 손해 보는 짓을 합니까?

그래서 저 예수는 누군지 모르겠고, 내가 찾는 것은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내가 아는 것은 나는 나만 지키면 그만이에요. 나는 나만 지키면. “당신은 남편이 돼가지고 왜 자꾸 복음 전하러 돌아다니느냐, 복음 전한다고 왜 자꾸 돌아다니느냐, 그러면 나는 당신한테 뭐고? 뭐야?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쓰는 거, 10분의 1만큼이라도 나한테 신경 써봐라.” 이런 소리 들어본 적 없어요?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 소리를 누르고 눌렀다가, 누른다고 스프링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에이, 터트려가지고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당신이 복음을 찾는 것은 당신 본인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그렇게 복음을 찾잖아. 그렇다면 나도 내 이익에 대해서 충실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협상해서 당신 복음 전하는데 쫓아다니는 거 10분의 1만이라도 나한테 양보해서 우리 산이라도 함께 놀러가자. 나는 내 행복을 찾고 싶어. 내 행복을. 당신을 복음한테 뺏겼고, 도대체 나는 뭐고?” 보통 고함을 지를 때는 순수한 상황이 있을 때 고함지르거든요. “당신한테 나는 뭐고?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했는데, 나 좋을 대로 할 때는 당신은 왜 안 도와 주냐? 부부가 돼가지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나 지금 억지인데. 나도 당신처럼 나 개인을 위해서 할 것 같으면 나도 복음은 대충 듣고 또 놀러가겠는데. 이게 나도 내 맘대로 안 돼. 나도 구레네 사람 시몬이야.” 주께서 강제로, 억지로 뒤집어씌워버렸어요. 그렇지 않고, “아이고,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복음 전한다고 따라다니느라 부부로서 당신에 대한 의무감을 좀 소홀히 했네. 그래, 당신 말대로 당신이 좋아하는 거 내가 많이 들어줄게.” 이러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부인이나 그 남편의 말 그대로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복음 쫓아다닌 거예요.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취미생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머리가 좋으신지, 하나님께서 머리 좋다는 말은 어폐지만. 여차하면 이거 욕 얻어먹을 일이에요. 하나님 까불지 말라고 해서 욕 얻어먹은 사람 있잖아요. 하나님이 바로 가짜, 진짜를 구분하기 위해서 주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박이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기존에 있는 형편에다가 마구 쏟아지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국궁표적지. 계속 쏘아버리는 거예요. 뒤에서. “니는 니 복음 듣는 게 재미있지? 나는 재미 하나도 없어. 니만 재미대로 살 거면 결혼은 왜 했는데? 나도 나 재미있는 것으로 돌아다녀 도!” 이런 식으로 계속 화살을 쏘아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마귀를 보내가지고 일부러 하는 거예요. “에휴, 그래, 나 즐거움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 이러면 그건 가짜죠. 가짜인데, “아닌데, 나 즐거움 때문이 아닌데, 니 형편하고 내 형편이 달라. 니 형편은 눈에 보이는 고향, 이 세상, 이것이 종착점이잖아. 근데 내 고향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멍이 뚫린 저쪽 세계야.”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또 내가 못 알아듣는 괴상한 논리를 억지고 갖다 붙인다고. 니하고 이야기한 내가 바보라고 삐져가지고 돌아서버리고. 거기에다가 뒤에서 한마디 해주세요.

“당신이 당신 행복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그 모든 취미활동 이런 것들은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왜? 당신은 진짜 우주의 원형과 닿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해답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한번 찾아보려고 꾸준히 내세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라고. 그리고 “내가 복음을 볼 때 프로야구 봤잖아. 새벽 두시고 세시고 손흥민이 뛰는 유럽축구 생중계로 봤잖아.”라고. 인간은 아까도 봤지만 사명이 있잖아요. 누구한테 사명이 있습니까? 본인 자신을 본인이 지킨다는 사명이 아주 투철해요.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바로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그 내용을 알려줬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학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권세다. 너희들이 모르는 권세. 알 수 없는 권세. 악의 권세. 너희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죄 지으면 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사건이 터져야, 악의 원형은 바로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악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거야.” 내가 불행하고 비극이라고 하는 그것과 관련되어서 나오는 악은 그건 악이 아니거든요. 내가 불행해진다. 내가 슬퍼진다. 내가 아프다. 이것은 악이 아니에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악이에요.

그 악의 원형과 결합이 되어야, 우리는 애초부터 악에 대해서 몰라도 돼요. 왜? 알아봤자 해결책이 없으니까. 악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누구만으로도 충분합니까? 예수님만으로 충분해요. 악을 유일하게 아셔야 악의 해결책도 원형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원형.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게 죄 씻음이 된다는, 악의 해결책은 예수님만 알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나중에 우리가 통지를 받게 되죠.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죠.

이 말은 니가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해서 니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니 성격과 노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니 성질, 성격고치는 것하고는 아무상관이 없고, 니가 니 삶의 형편을 바꾸는 것하고도 아무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주님께 누(累)가 됩니다. 염려하는 것도 누가 돼요. 왜?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염려하고 걱정합니까? 일은 주님이 벌여놨는데. 우리한테 일이라는 것은 일도 아니에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 첫째시간 끝내면서 복습을 합시다. 자, 모든 의미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결정된다? 안 된다? 결정되지 않죠.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주님 사이에 모든 것의 의미와 개념이 거기에 전부 다 담겨 있잖아요. 그럼 우리가 ‘이번 일은 안 돼. 이번 일은 실패야. 왜 하는 일이 안 되지. 왜 몸은 아프지. 염려되네.’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 사람들에게서 기껏 얻은 정보에 불과해요. 정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요. “니가 그렇게 복음 좋아하면, 이러려면 헤어져.” 그럼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주께서 이야기 하신 거야.” 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주께서 이야기했거든요. 본인은 본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모든 의미는 어디에 닿았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에게서는 모르고. 하나님과 아들,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 아버지와 그 아들, 모든 개념은 그것과 닿아져서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거예요.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흘러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이고, 이거 죄구나!’라고 할 때는, ‘아, 내가 내 생각하고 있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주께서 오늘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살게 했는데, 우리는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를 또 은연중에, 본연 중에 자기 연민,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다는, 사명감이 있다는 생각, 이 생각이 도진 거예요. 이게 바로 마귀생각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00925b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자기연민,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사람은 자기에 대한 헌신, 사람들은 이걸 유혹이라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나에 대한 헌신이. 평생을 살면서 죽어가고 있는 자기에게 매달려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교주가 되고 거기에 대해서 충실하고 유일한 신자가 되어 살아가는, 이게 인생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럼 왜 자기에 대해서 헌신하고 유혹하느냐, 인간들이 자기에 대해서, 마귀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성을 추구하다보니까 뭐에 쫓기느냐 하면은, 절대적 절망인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도망치려고 하는 겁니다.

절대적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절망이라는 말과 반대적인 것은 자기에 대한 헌신, 항상 자기에 대한 희망, 낙관적인 희망을 추구합니다. 희망의 반대말이 뭡니까? 절망이죠. 이미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희망을 걸기 때문에, 무엇이 공포스러운가 하면은 희망이 좌절될까봐 노심초사 늘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걱정거리를 자기가 만들었어요. 제가 요 근래 통계를 보면서 적잖이 놀란 게 있어요. 한국에서 하루 자살하는 사람이 38명이에요. 통계에 60대 있고 20대 있고 30대도 있는데. 38명이나 해요. 자살한다는 말은 내가 우선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나보다 더 우선된다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겁니다.

희망이 끊어졌으니까, 그걸 절망으로 여기고 절망을 피하는 방법은 자살이 최고죠. 절망을.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해서 그 희망을 유지하는 방법은 이참에 내가 내 목숨을 끊는 거예요. 그러면 절망한테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마귀가 준 유혹인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고 하고, 이 땅에서 모든 얻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 땅에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이 땅에 뭐도 없느냐, 뿌리가 없어요. 예수님은.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께 유일한 아들이에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칭찬받은 유일한 분은 바로 이 땅에 뿌리도 없고,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분이에요.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어디서 나한테 가족을 들이대 밀어? 주님은 이 땅에 가족이 없어요. 이제 가족을 만들 거예요. 주님이. 성령을 보내서 만드실 거예요. 누구 운명처럼? 자기운명처럼. 이 땅에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뿌리도 없고. 이게 없으니까 뭐도 없습니까? 이 땅에 어떤 희망도 없는 거예요. 희망이 없으면 뭐도 없어요? 이 땅에 유혹거리가 없어지는 겁니다.

류현진 이번에 한번 또 올라가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김광현이는 우에 그리 잘 던져가지고. 자꾸 뭔가 일이 잘 되면 잘 되는 쪽으로 희망을 변경시켜요. 희망을 변경시킨다고요. 한화야구팀 내가 응원하는데 했다 하면 지고, 했다 하면 지고, 지금 9등이라 이 말이죠. 응원한 팀을 한번 바꿔봐. 희망을 바꾸는 거예요. 내가 첫째 애한테 바짝 기대를 걸었는데, 이 첫째 애가 사춘기에 들어가지고 이거 뭐 공부도 안 하고, 안 되겠다. 둘째 애한테 희망을 걸어야 되겠다. 희망 거는 겁니다. 뭐 항상 이렇게 희망을 바꾼다는 것은 자기가 한 그 유혹거리에 자진해서 자기가 노예가 되는 거예요. 종이 되는 거예요.

그 희망과 유혹은 어디서 온 겁니까? 이 땅에서 왔잖아요. 이 땅에서.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을 알자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희망이 없어지면, 절망에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뭐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면은 자살할 준비가 돼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자살대기자에요. 뭐 순번을 뽑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 방법은 뭐냐, 이거는 특별히 여러분에게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내 일을 남의 일로 여겨라!” 이겁니다. 내 일을 남의 일로. “그 집 애 요새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며요?” “그 집 애요? 누구 집 애요?” “남의 부인 잘 있어요?” “그 집 빌라 방 나갔어요?” “나갔나 봐요.” 나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겁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내가 나를 내 것이라고 덤벼들기 전에 밀어내는 겁니다. 이미 내 몸은 누가 접수했어요. 주님의 몸인데 내가 내 것이라고 덤벼드는 거예요. 평소에 자기 자신이 이렇게 되면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그냥 자기가 왕이거든요. 왕 수준이에요. 왕의 반대말이 의외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배지에요.

우리는 이 땅에 왕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유배당한 겁니다. 귀양살이 한 거죠. 밧모섬에 귀양 살이 한 사도요한처럼. 그리 되는 겁니다. 제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는 것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밧모섬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서. 이미 죽은 자로서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살아있으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서 보는 거예요. 그게 첫째 부활이에요. 이미 부활된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이 땅에 우리는 유배지에 있기 때문에, 감옥이죠. 풀려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절대적 절망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 기피하려고 하는데, 아까 구레네 사람 시몬, 이 사람은 구레네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고향이 있죠. 자기 고향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어요. 그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싫다는 거죠.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너무 절망적이니까. 내가 갖고 있는 모든 희망을 아주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되니까.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욕으로 들리니까. 그런 부정적인 존재가 싫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절대적 절망이 예수님이에요. 그 당시에.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이니까, 하나님께서 이 절대적 절망을 억지로 자기백성과 결합을 시키는 겁니다. 절대적 절망. 그러면 절대적 절망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보니까,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들어있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유일하게 기뻐하는 관계,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워하는 관계가 절대적 절망 안에만 들어있어요. 절대적 절망 안에만.

이번에 제주여행을 하면서, 바라기는 십자가마을 모든 사람이 제주도 한번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가지고 모든 사람이 제주도에 방주교회를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방주교회 보게 되면 물로 포위가 돼 있다 이 말이죠. 한쪽 면은 아니지만 나머지기는 물로 포위됐다 이 말이에요. 이 방주교회에 물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절대적 절망으로 휘감겨져있기 때문에, 이 절대적 절망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절대적 절망 속에서 보면 이미 우리 자신은 없어진 거예요. 자꾸 내가 있으면, 내가 다시 유혹이 되니까, 이미 너는 사라졌기 때문에, 희망거리조차도 사라졌기 때문에, 절대적 절망이 오히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둥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원형이에요. 원형. 진즉에 우리가 이 원형에, 둥지에 모여 있어야 돼요. 둥지하면 생각나죠. 남진의 노래, 둥지. 둥지를 틀어봐, 라고 안 합니까? 둥지를. 주께서는 둥지로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갑자기 둥지 냉면이 생각나네. 이 땅에 둥지로서 왔다고요. 이 땅에 고향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데 그냥 둥지로서 왔다 이 말이죠.

왔는데, 사람들은 보니까,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사람들 속에 어떤 철침을 박듯이 박아버리니까, 사람들한테는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절대적 절망이거든요. 내가 당신을 믿어서 얻을 이익이 뭐냐를 챙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익이냐, 손해냐를 누가 결정하는데요? 평소에 세상 유혹에 빠져있는 내가 판단하는데, 그 판단기준을 동원시켜보니까 예수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좋게 하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쓸데없고 필요가 없는 예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에 대한 유혹을 돌파하라. 뚫어버려라. 방주교회를 그려볼게요. 왔는데, 방주교회 싫어서 그런 곳에 안 간다고 삐친 사람도 있어요. 이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삐져가지고 구경도 안 하고. 물로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방주 같으면 이게 물이다 이 말이죠. 물로 들어가서 방주로 가겠다고 하지만, 사실 실제로는 다 죽죠. 실제로는 물이 얕아서 안 죽지만. 방주가 떠있으면, 이쪽에서 방주를 보면 방주는 도저히 불가능한 장소에요. 성경에 방주는. 불가능한 거예요. 육지에 있을 때 방주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홍수로 심판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방주를 한번 찾아보세요. 인간의 힘으로 건너갈 수 있는지. 안 되죠.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주를 하나님께서 영원으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영원토록 이 취지를 지속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무지개에요. 무지개로. 그럼 방주가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늘로 올라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지개의 특징은 아름답다는 거죠. 에스겔에서 하나님의 보좌,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면, 천사의 네 그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무지개가 떠있어요.

무지개가 떠있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뭐가 아름다우냐, 심판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에스겔은 이걸 가지고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속이 시원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래하면 돼요. 위청수. 하나님께서 심판해놓고 위청수 잡수신 거예요. 부채표 활명수 잡수신 거예요. “아이고, 내가 심판해놓고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이 심정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전달받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벌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단도리 한다고 신경 쓰면서 예민에 예민을 극도로 다하면서, ‘나쁜 짓 안 해야지. 나쁜 짓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안 드러나잖아.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는데..’

이렇게 온 신경을 쓸 때는 이게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죠. 서해안에 있는 한국공무원을 휘발유 뿌려서 죽여 놓고 누가 속이 시원한가 하면, 김정은이가 속이 시원하죠. “아이고, 코로나 방역한다고 잘했다. 이제 내가 어느 정도 대단한 정도인지 알아먹겠지. 내가 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야. 이정도로 존엄한 거야.” 완전히 하나님처럼 사그리 죽이잖아요. 자기보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거예요. 그런데 네 명의 천사들, 스랍들이라고 하는데, 그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에요. 이 세상을 사그리 심판하는 거예요.

근데 그것이,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니가 세상 보는 것하고 내가 세상 보는 것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기뻐하려면 기쁨덩어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피자 좋아하는 사람은 피자 한 조각만 맛봐도, 전체 피자를 다 안 먹어봐도, 그 피자 맛이 살아있어요. “아, 이 맛이었어! 피자가 이 맛이야!” 살아있는 것처럼, 정말 하루하루 살면서, 정말 한순간이라도, 주님의 심판 맛을 보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가 터지는지 몰라요. 작은 심판 맛이라도 불구하고 그날 하루 종일 감사가 폭발해버립니다.

내가 죽은 존재인데 아직도 이렇게 사는 것은 주의 은혜다. 그동안 이 심판을 안 받았으면 또 내가 죄 안 지으려고, 내가 바르게 살아서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가정에 우환이 없도록, 내가 얼마나 벌벌 떨면서 인생을 살았을까? 이 바보! 바보! 등신 같은 인간아!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내가 나에 대한 사명 충실하면 내가 할 일 다 한 것처럼. 그렇게 마귀한테 속아 넘어왔잖아요. 내가 유혹거리인지 모르고. 주님은 내가 한 것 가지고 구원을 시키고 안 시키고 그게 아닌데. 의미가 없는데. 자꾸 의미 없는 것에다가 의미를 두라고, 그만큼 속아온 거예요.

따라서 그것이 힘들다, 힘들다, 정도가 아닙니다. 결국 자살로 이어져요. 자살로. 그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충동을 굉장히 많이 느낍니다. 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근데 갑자기 인기가 없어져버리면, 남들에게 내 인생이야기를 할 때 부끄러운 인생이 돼버리면 자살충동을 받죠. 왜? 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살 의미.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니가 있기 때문이야. 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김종환이가. 존재의 이유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도대체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뭣 때문에 이렇게... 조금만 기다려봐. 희망이잖아요. 세상에, 대중가요가 복음이라.

희망!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너에게 달려갈 테니. 지금 내가 짜장면 배달이 힘들지만 내가 언젠가는 성공해서 너하고 결혼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잘 때도 니 사진을 손에 쥐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정도로. 히트 쳤어요. 그 노래 히트 쳐서 확 일어났거든요. 희망이 있고 뭔가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우상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 외에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진화론이고 뭐고, 과학과 철학과 모든 국가의 운영자체가.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의 세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전부라는 겁니다. 다른 생각하지 마라. 종교는 아편이고 마약이고 거기에 물들지 말고 오직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다. 이렇게 살아왔던 그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드디어 예수님에게, 15장을 보면 예수님을 죽입니다.

15장 22절을 봅시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고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 하시니라” 24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이제 여러분들이 그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하게 이해하겠죠.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는 군인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하겠죠. 왜? 내가 나에게 충실해야 월급 받잖아요. 지시대로 움직여줘야, 그 상사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가 사는 의미와 목적이 오직 나한테만 꽂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고. 뭐 이거는 우리도 같은 한패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입니까? 지금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보고 “니가 나를 알아? 언제 봤다고 나를 믿어?” 실컷 모르는 사람을 니가 믿나? 이 말이죠. 아느냐 이 말이죠. 모르면서 왜 자꾸 믿는다고 구라를 떠느냐 이 말이죠. 나를 모르면서. 니가 천당 가는데 내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내 피가? 나를 알아야지. 나를 모르고 그냥 저분은 피를 흘렸다. 그 피 찍어먹으면 죄 씻고 천당 간다고. 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누굴 이용한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했습니까? 포기 안 했습니까? 자기를 포기를 안 하고 자기한테 충실한 거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방주 들어가려면 이미 나를 잊어버렸다고.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질 그러한 운반체에요. 운반체. 십자가를. 그것도 억지로 주님께서 지워준 그런 운반체로서의 우리의 기능을 할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돼요.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25절을 한번 봅시다.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절,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제 삼시니까 아침 아홉시쯤 됐겠죠.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어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돼버리면, 왕이 보는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어요. 유대인1, 유대인2가 있다면, 유대인1은 유대인이 있으므로 왕이 되는 방향이 돼요. 유대인이 있고 그 유대인들의 왕이 되는. 그럼 이 왕은 누가 원하는 왕입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구미에 맞아서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 거죠. 그럼 유대인2는? 존재하지 않아요. 없는데, 유대인2에서 왕이 된다면, 여기에는 새롭게,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할 자격자로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1과 유대2가 겹치지 않는 이유는, 유대인1이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이미 깔끔하게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인1 속에 예수님이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포함이 안 되고 상관이 없고 관계성이 없어요. 유대인1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로 여기고 갖다 버린 거예요. 건축자들의 그냥 돌이 되면 안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야 해요. 성전1, 성전2가 있다면, 성전1을 짓는 건축자들이 이 돌은 필요 있다? 없다? 전혀 필요 없다고 갖다 버린 돌에서 성전2가 된다면, 성전1에서 성전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인간들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래서 이것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새로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야 된다고요. 성전1에서 성전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유대인1에서 유대인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함의 의미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내가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이스라엘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아직도 우리 속에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게, 좋고 선한 것,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십자가는 뭘 부정해버리는 겁니까? 일말의 모든 가능성 자체가 인간 속에는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의 귀한 마지막 목숨을 담보로 내놨잖아요. 내놨는데 주님께서 그걸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를 않아요. 니가 목숨을 바쳤다 할지라도 내가 있는 곳에 니가 올 수 없다고 단정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천국의 백성을 결정하고, 백성 되고 구원되기는, 베드로 너의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누구의 결정이냐 하면은 일방적인 예수님의 결정이에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원칙을 주님께서는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어떤 내용들이 있어야 해요? 이 내용이 담겨야 돼요? 안 담겨야 돼요? 마땅히 담겨야 되죠. 이 내용이. 인간의 어떤 종교적 노력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력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구원받기는커녕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그런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헌금하든, 기도하든, 전도하든, 철야하든, 그 모든 것이 주님을 버리는 계기예요. 버리는 하나의 작업이 되는 거예요. 참, 이 교회라는 것을 보게 되면 일반 회사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기도회라는 것은 그냥 단합대회고. 헌금하는 것은 종자돈으로 자가주 구매하는 거예요. 주식에서 자가주. 목사가정은 오너가족. 오너가(家). 오너식구들입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행할 수 있는 행함을 교회에서 그대로 행해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여러분들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천국가지 못합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들 같으면 그 말을 어떤 사람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되겠죠. 그렇습니다.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데,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분명히 그 사람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 이건 그 사람의 자기의 노력과 성과가 아니라는 사실. 저 사람은 자기를 우상시하는 그런 결과로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목격하는, 아마 신기로운,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어떤 즐거움이랄까? 교회 다니는 행복이랄까? 바로 그거는 뭐냐, 그런 신비로운 일을 접할 때 그동안 모든 고생은 전부 다 녹아져요. 한순간에 그걸 느낄 때, 내가 그동안 노력하고 고생하고 설움 받은 그런 것들은 우리의 기쁨을 갉아먹지 않습니다. 충분히 보상함으로 넉넉해요. 기쁨으로 흘러넘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피구나! 예수님의 피지 내 피가 아니구나!” 그게 한순간에 섬광처럼 확 다가올 때, 진짜 거기서 비타민c가 나옵니다. “아이씨, 정말 내가 무의미하게 살았구나. 해도 해도 소용없는 짓을 가지고 걱정하고 고민했구나. 애들아 나가 죽어라. 나도 죽을게.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우리는 괜찮다고.” “엄마, 왜 괜찮은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무조건 괜찮아. 지금 그만 살아도 괜찮아. 애들아, 우리 그만 살자. 그래도 괜찮아. 이제는.”

살아온 내 역사가, 어느 글에도 나오지만 김밥 옆구리 터져버린 거예요. 어! 그렇게 구멍이 날 게 아닌데 터져버린 겁니다. 구성된 김밥 형틀이 다 깨졌어요. 깨져도, 깨져서 감사해요. 깨져서 고마워요. 그동안 내 형틀을 유지한다고 얼마나 노심초사, 고민걱정하고, 애교부리고 아양 떨고 굽신굽신 거렸습니까? 부질없는 짓들을. 지금 오늘 본문을 보고 있잖아요.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뭘 알면 되는가, 도대체 그때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철저하게 인간들이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예수님을 버렸는데, 버릴만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그 심정을 우리가 충분하게 이해를 해야 돼요. 그들이 예수를 버릴만해서 버린 거예요. 정말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구멍 난 헌신 발, 짚신보다도 못한 존재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이리재보고 저리재보고해서,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숙고하고 탐색하고 해봤는데, 결론은 돌아이다. 버리자. 미친 자다. 버리자. 우리의 희망에 보탬이 안 된다.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예수 다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들도 예수 다 버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 버렸듯이 다 버리는 거예요.

아무 쓸모없는 예수를 아직도 신봉한다는 것은, 진짜 의아해하죠. 저 사람은 도대체 아무리 봐도 쓸모없는 것을, 왜 예수님한테 매여 사는가, 하고 오히려 염려하고 걱정이 될 정도로 되죠. 그래서 우리는 다가가 봐야 됩니다. 진짜 예수님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이용할만한 게 나와서 그런지를 분간해야죠. 두 개가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나한테 필요한 게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지. 아니면, “나 같은 것은 버려도 괜찮아요. 주님만 좋으면 좋아요. 됐습니다. 주님의 존재가 내 존재를 대신하는 그걸로 저는 족합니다.”라고, 예수 믿는지를 한번 살펴보면 돼요. 알 수 있어요.

유대인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버리면서 뭐냐, 유대인의 왕인데, 앞에 뭘 하나 더 붙이고 싶어 했겠습니까? 자칭 유대인의 왕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입니다. 주님께서 이걸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걸 의도적으로 유도했습니다. 그래야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못 받기 때문에.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못 받아야, 온전히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언약이지 인간의 선행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심히 아니에요. 언약이에요.

근데 그 언약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언약을 지키는 방법도 아무도 못 지키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아시고, 홀로 혼자서만 완수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시키는 겁니다. 베드로를 밀어버리죠. “가있어. 가있어. 내가 다시 와서 부를게.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제자들은 이랬을 거예요. “안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안 오시면. 온다고 해놓고 안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이래 할 수 있겠죠. 그럼 믿든지 말든지, 원래 인간의 한도가 그거밖에 안 되니까, 나무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한계가 그거니까. 걱정하는 게 인간의 한계거든요. 자기만 생각하는 게 인간의 한계잖아요.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찾아오시면, 김밥 옆구리 터져버리면 그런 거 묻지도 않아요. “니가 전에 나 의심했지?” 이런 거 묻지도 않아요. 빤히 알기 때문에 묻지도 않는다고요. “니가 한 거 내가 가만둘지 알아.” 이러지 않아요. 빤히 아시기 때문에 그냥 일방적으로 주께서 퍼부어버립니다. “니 죄를 내가 사했다.” 끝난 문제에요. “니 죄를 내가 사했다. 니는 죄짓는 거밖에 안 했는데 내가 그 죄를 다 사했다. 나는 너에게 문제 삼지 않으마.” 그런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없는 데서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예요.

이게 원래 처음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그 원칙을 그대로 준수한 거예요. 새삼스런 원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없었잖아요. 없었는데,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삭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자, 이삭의 언약을 아시지만, 제가 여기서 적어보겠습니다. 이삭의 언약은 1번, 일단 죽자. 2번, 죽었냐? 그럼 대신 살려줄게. 이게 이삭의 언약이거든요. 모리아 산에서. 일단 좀 맞자. 일단 좀 죽자. 살아있는데요? 걱정하지 마! 내가 니가 살아있어도 죽은 자로 인정해줄 테니까. 죽은 자가 죽은 자 행세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일체 문제 삼지 않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일체 이의를 걸지 않아. 원래, 니 하는 행세가 죽게 하는 행세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토를 달아서 똑바로 하라고 그걸 말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니는 죽었어.

이게 첫째 사망이죠. 니는 죽었고.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제 내 솜씨를 보라!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내는지. 이게 이삭언약이에요. 이삭이 죽었는데 수풀에 대신 양이 있어서 살려내잖아요. 여기에 모든 초점을 두라는 말이죠. 너한테 두지 말고, 니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두지 말고. 너 빼고. 너는 죽은 인간으로 빼고. 죽었다가 살아난 그 예수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거기에 주목을 하라 이 말이죠. 니는 안 중요해. 니 자신은 니한테 하등 중요하지가 않아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고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강남강의 첫 번째 강의에서 박구윤씨가 불렀던 “뿐이고”하는 노래 있죠. (뿐이고~ 뿐이고~뿐이고)

그 많은 문둥병 가운데서 나아만 장군뿐이고. 그렇게 문둥병이 많은데 왜 그한테 갑니까? 인간은 문둥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성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이게 나의 본성이에요. 하나님한테 나를 구원해달라는 그 본성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 본성에 대해서 전혀 하나님께서는 고려하는 바가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좋은 설교, 복음적인 설교 다 듣고. 이거는 뭐 식후 30분 후에 먹으라고 해도 밥 먹으면서 듣고. 신약구약을 듣고. 약을 먹어도, 아무리 먹어도 나중에 결국 뭐냐 하면은, 자기 부인이나 자기 남편이, “여보 나한테도 좀 충성해 도!”하면, 알았다고 해버리고. 다시 그 말에 납득을, 수긍을 해버려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 믿는 것이 주님께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내가 악바리처럼, 손톱이 닳아서 피가 나도록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한 250미터쯤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벽을 한번 올라가보세요. 주님께서는 250미터가 아니라 2400미터로 옮겨졌어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지, 라고 하는데, 일곱 번 딱 용서하고 난 뒤에 목 싹 내놓고 까꿍하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기준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사백 구십 번으로 올려놨어요. 또 손톱이 다 깨졌네. 다 닳았어요. 어느 세월에 다 올라갑니까? 복음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거 세상에서 옷깃만 살짝 땡겨 버리면, 알았어, 알았어, 하고 다시 갈 사람들이에요.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유혹거리기 때문에. 자신의 무게가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질량이 무거워져요. 주님한테 가면 갈수록, 그동안 내가 갖고 있는 의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돼있습니다. “하나님! 천국가기 위해서, 빛과 소금되기 위해서 이만큼 의롭게 살았는데, 아직도 저에게 부족한 게 있습니까?” 주님께서 딱 보고, “너에게 아직도 못 버린 게 있구나. 니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니가 고맙소 빌라 팔고 나를 따르라.” “그건 어떻게 알았지? 주여, 이거만큼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니는 도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쪽에서 완성된 것이 오는 거예요. 완성된 것이. 99퍼센트 오고 내가 1퍼센트 마저 채우는 것이 아니고 100퍼센트 오는 겁니다. 100퍼센트. 100퍼센트 오면 100퍼센트를 그대로 훼손시키지 말고 100퍼센트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면 돼요. 100퍼센트를 벗기고 자꾸 흠집 내지마시고요. 자,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옆에 강도 둘을 구색 맞춰서 달리게 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한쪽에 달아놓은 게 아니고 중앙에 딱 달아놓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당신이 아무리 유대인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왔다고 우겨도 그 평가는, 그 결정은 내가 내린다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지시고 여러분들의 죄를 씻어줬습니다. 아무리 니가 나한테 복음을 전해도 결정은 내가 내리는 거야. 내가. 복음을 받아들일 건지, 말건지는 내가 하는 거야. 이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십자가에서 함축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얼마나 성경이 고맙습니까?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 모욕한다고 해요. 모욕하는 사람들. 29절에,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아휴, 참 사람 괜찮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가나. 안됐다. 머리를 흔든다, 모욕한다는 말은 부정적이다 이 말이죠. 그만큼 우리는 긍정적인데, 예수 당신은 사는 게 참 가련하고 안됐다. 불쌍하다. 참 좋게 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막 가냐. 너무 극단적이었다. 조금 양보하지. 강도와 같이 간다는 것은, 니가 주장하는 것은 살인강도와 같이 험악한 같은 레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살인강도와 구색을 맞춤으로서 우리의 사형집행은 정당하다. 합당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모든 인간들의 이구동성이에요. 합치된 의견입니다. 이 합치된 의견 속에 우리의 의견도 포함이 될까요? 안 될까요? 마땅히 포함이 되죠. 마땅히 포함이 되어야 해요. 합리적으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존재가 예수님이에요. 합리적으로 따져서. 우리는 매일같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것이 계속 가동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걸 수 있는 자가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이 다 도망갔잖아요.

로마당국에서 걱정한 것은 이쪽에 또 와가지고, 집회한다고 와가지고 광화문에 모일까봐,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겁나서 다 가버렸어요.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감히 우리가 예수를 죽이겠다고. 저희들이 뭔데. 아무것도 없으면서, 별것도 없으면서 까불고 있어. 승자죠. 승리자예요. 승리를 구가한 겁니다. 그들의 아이디어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아이디어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들의 아이디어 속에는. 그럼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기쁨이 없다는 점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나 북한사람들이나 세계에 어떤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아요. 똑같아.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잘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지 아니한다. 그 이야기.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죽지 아니한다. 이거 하나 전한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묻죠. 왜? 왜? 예수님이 죽었는데 살아났기에.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죽어도 괜찮아. 이런 뜻이에요. 죽어도 괜찮아. 만약에 집사람이 파리채를 들고 있다. 근데 파리가 한 열 마리가 더 있는데, 그중에 한 파리가 말하기를, 성령 받은 파리예요. 원래 아파트에 파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파리채로 쳤는데, 근데 그 파리가 죽으면서 우리는 죽지 아니해! 죽지 아니해! 이 파리부터 파리채로 치면서 이래도? 죽었잖아. 봐!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십자가사건 당시에 그들이 한 행동이 옳았다고 증명한 이유는 3일의 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묶인 것을 풀고 나오면 안 돼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왜? 완전히 예수를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시간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좀비가 아니다 이 말이죠. 죽을 때는 확실하게 죽어버려야 해요. 심지어 제자들도 못 믿고 도망가도록. 그래야 성령이 주신 믿음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믿음은 절대 섞이면 안 돼요.

그래서 이 십자가사건의 기록은요, 멋져요. 이 기록이. 모욕하는 자가 우리고. 그 다음에 옆에 있는 강도도 같이 욕해요. 강도도. 강도도 같이 욕하고 제사장들도 희롱하고. 3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2절,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누굽니까? 못 박힌 자가 아니고 못 박힌 자들, 두 명이거든요. 이 강도들도 예수님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원래 땅의 일을 주께서 십자가에서 객관적으로 보여줬는데, 보여주는 그것이 너희가 믿음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땅의 일을 만든 거예요. 믿지 아니하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이? 모세가 놋뱀을 든 것같이. 놋뱀. 모세가 놋뱀을 들었잖아요. 놋뱀은 뭡니까? 이건 악이죠. 죄 그 자체죠. 죄 덩치 그 자체죠. 악마 그 자체, 뱀이니까. 뱀을 들었다는 말은, 너희들이 뱀에 물린 상태에 있을 때 뱀을 들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뱀에 물린 악마와 한패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낸 뱀에 물려도 마땅하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놋뱀을 든 것은.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린 것이 뭐와 관련되어 있다. 놋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에요. 다시 말해서 놋뱀이 들릴 때, 우리는 물릴 만하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렸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말은, 십자가에 들렸다, 십자가 죽으심 자체가 부활됐거든요. 그러니까 부활은 뭐냐, 십자가의 이동이죠. 십자가의 확산이죠. 확대. 증강. 십자가의 증강이 부활이에요. 죽어 마땅함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 땅에서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로서 놋뱀을 든 거예요.

그러니까 기어 다니는 뱀을, 이걸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기어 다니는 뱀을 바로 곧추 세운 거예요. 기어 다니는 것을 곧추 세운 거예요. 십자가 죄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를 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봐라.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니 혼자 왕이지. 혼자 왕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거죠. 주님이 메시야를 버렸다는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증명하는 겁니다. 부활은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의미를 증명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게 될 때, 모세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은 “쳐다보는 자는 다 산다.” 쳐다보는 자. 이 말은 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겁니다. 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말이죠. 왜냐 하면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거울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거울 말고 놋뱀을 보고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그거 왜 봐야 돼? 이렇게 되겠죠. 왜 봐야 돼? 거울을 보면서 내 꼬라지가 이렇구나! 알 수가 있는데, 꼭 내가 백령도 헤엄치다가 불에 타서 시체 된 그 모습이 내가 되어야 내가 압니까? 아니죠. 우리는 기피하죠. 바로 진짜 내 모습을 기피하고 싶은 우리의 원형과 닿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리게 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를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마태마가누가가 있기 때문에, 그걸 함축해서 놋뱀이라고 했지만,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에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What happened then?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일이 있었는가? 보니까, 그들 인간은 인간다운 일을 하셨네요. 그들이. 인간다운 일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을 만했네요. 심지어 같이 달린 강도도 예수님을 부정했으면, 예수님을 긍정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 예수는 내가 만든 가짜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주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그 한패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일깨워진다면, 그 사람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될 운명을 새롭게 부여받게 된, 십자가 자체를 운반하는 운반체,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내 일이 없고, 내 일조차 남의 일로 여기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여기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일을 증거 하는 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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