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424a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 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절,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절,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천국이야기를 하시는데 있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죠.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고소할 때 뭔가 자기들 생각하고 다른 생각이 있기 때문에 고소하는 거죠. 자기들 생각과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점에서 예수님과 공통점이 없었다 이 말이죠. 모든 점에 있어서.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하나님 나라니까, 이것은 무슨 나라는 아니냐 하면은 인간나라는 아니겠죠.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에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천지라고 하는 것은 지구로 말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지구 바깥에, 대자연바깥에 어딘가 하나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사람들 보기에 이 대자연은 곧 눈에 보임, 눈에 보이거든요. 해와 달과 별이 지금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만 누구는 안 보입니까?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것은 이 대자연 보다 더 위에, 하나님나라를 지상에 있는 장소개념으로 따지면 하늘나라가 되겠죠. 하나님나라, 하늘나라, 천국, 전부다 이 대자연 말고 따로 계시는 곳에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딴 데 있다면, 이 대자연에는 자연도 있고, 산에는 사슴도 있고, 풀도 있고, 그런 게 있겠죠. 인간도 있고. 인간+자연, 이게 하나의 공간이 되고, 하나님나라는 하늘나라니까, 이 공간 바깥에 다른 공간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따로 있는 게 되죠. 이게 유대인들의 생각이고. 이걸 제가 유대인들의 생각이라고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유대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에는 같은 게 없었다. 공통점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되죠. 그러면 제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뭐냐, 라고 운을 떼면서 이렇게 설명한 겁니다. 지금 이 생각을 그냥 우리가 고수하고 있으면 누구하고의 생각과 공통점이 없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가 공통점이 형성이 되지를 않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 생각이 잘못됐고, 이거는 엉터리고, 이거는 가짜다, 라고 한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생각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규정을 한다면, 그 잘못됐다는 규정을 받고 난 뒤에 그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나,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죠. 이 사람들이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이 있는 이 공간에서 고쳐야 될 게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보겠죠. 여기서 고쳐야 될 게. 하늘나라는 눈에 안 보인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따로 존재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인간도 보이고 자연도 보이고 사슴, 코끼리, 뭐 바다에 있는 고기도 보인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여기 따로 있다.
자, 여기서 뭐를 고쳐야 예수님과 의사가 통하겠는가? 한번 틀린 그림 찾아보는 식으로 고쳐보세요.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있는 이 공간과 그리고 하늘나라는 다른 공간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생각에서 어디를 고쳐야 하는가, 그 고치기 작업을 위해서 마가복음 15장이 있는 겁니다. 이걸 인간은 못 고쳐요. 그러나 주님은 고칩니다. 자, 뭐부터 고쳐야 되느냐, 이것만 고치면 됩니다.
“공간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리란?” 공간이란 무엇이냐, 공간이란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만든 것이 공간이다, 자리라고,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를 못했던 겁니다.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과 우리가 그냥 있다고 생각했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 대 인간이 만나서 자기들의 편리, 자기들이 이해가 되는 식으로 만든 공간이고 자리라는 생각. 이건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 천국, 예수님이 생각하는 공간은 뭐냐, 인간 대 인간이 만나서 공간이라는 자리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자리에 누가 왔다가 누가 배척받았죠. 누가 배척받았습니까? 바로 주님이, 예수님이 배척받은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이 어떤 합의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걸 보통 이성적 합의라고 하는데, 합리적 합의라고. 인간의 이성적으로 합의를 해가지고 옳지! 오케이! 오케이! 해서, 그렇게 생각해서 만든 이 자리에 주님이 끼지를 못하고 거부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유대인들,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거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의 만남으로 인한 그 의식이 무슨 거리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의견이 합치가 되지 못하니까, “너는 옳지 않아. 너는 고소감이야”라고 인간들은 고소했고. 바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게끔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본인의 뜻은 결코 인간 대 인간으로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거기에 주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것은 전무하다. 하나도 없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요, 진짜 영어로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한번 예를 들겠습니다.
씨름판이 있는데, 씨름대회가 있다고 합시다. 씨름대회의 운영위원회에 대회에 필요한 돈이 한 오십 만원이 들어왔어요. 들어왔을 때에 운영위원회에서 어디에다가 사용하는지를 여러분들이 한번 맞춰보세요. 1번, 새로운 모래를 사와가지고, 40만원 모래를 사고 10만원 일꾼 들 여서 고운 모래로 깨끗하게 판을 정비하는데 50만원을 썼다. 2번, 씨름선수 생계비지원용으로 씨름 선수 한 사람당 10만원씩 다섯 명에게 지불했다. 자, 운영위원회에서 어느 쪽을 하겠어요? 1번 하겠어요? 2번 하겠어요? 운영위원회에서. 1번을 해야죠. 2번은 “10만원 받고 나는 수입이 안 돼서 씨름선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은퇴하겠다고 이럴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50만원만 씨름판을 깔아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씨름대회를 계속하겠다는 것이거든요. 씨름대회라는 것, 씨름게임이라는 것을 계속 하겠다는 의지인 반면에, 2번째 씨름선수에게 10만원씩 주겠다고 하는 이것은 뭐냐 하면은, 그냥 용돈이나 쓰라고. 은퇴하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그냥 돈을 날리는 셈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예가 왜 들어가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에서의 만남에서 의논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무슨 판을 지속시키려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세상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강렬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한 거예요. 이 판을 깨기 싫다는 거예요. 아까 인간이 여기 있고 인간의 눈에는 뭐가 보이고? 대자연이 보이고.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다? 우리가 죽으면 가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따로 가는,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그곳에 합류하게 되면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그 판, 그 게임판, 그 공간, 그게 납득이 되니까. 그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거든요. 그렇게 하나님이 따로 그 공간에 계셔버리면 인간들이 어디에 주눅 들지 않느냐 하면은 이러한 틀을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짠 우리에게는 어떤 하자 같은 것이 노출되지 않겠죠. 내 잘못이 지적받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의논하는 이 모든 생각의 기저, 바탕에는 뭐냐 하면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적받거나 정죄당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되죠. 하나님을 충실하게 복종하고 섬길 테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는 의식이 이게 전제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공식화시키면 이래 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악마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다. 악마는 인간을 꼭 쥐고 있어요. 앞잡이니까. 자기의 아바타니까. 가면이니까. 악마는 인간이 자기 잘난 체를 해야 악마가 신이 나요. 악마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요. 인간이 자기가 정당성이 될 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원칙은, 이건 무시가 되는 겁니다. 그거는 희석이 되겠죠. 그거는 실제화되지 못하고 그냥 무효화돼버리겠죠.
악마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걸 다른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악마의 일은 필히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경유한다. 살리면서 경유한다. 악마의 일은 반드시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인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게 인간에게 어떤 실익이 있느냐, 라고 하는 그 내용을 같이 합세하면서 모든 일이 굴러가도록 그렇게 악마는 일을 해요. 만약에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어떻겠느냐? 라고 했을 때, 그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아내가 남편에게 그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있는데? 이렇게 되겠죠.
또 복음을 아는 어떤 친구가 안 믿는 친구한테 복음을 전할 때, 안 믿는 친구가 하는 말이 “니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라는 말을 흔히 많이들 들었죠. “니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 “니 이상한 기독교 믿네.”라고 할 때에, 왜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고 죄인이라는 그 이야기를 했는데, 왜 그쪽에서의 반응이 “니 왜 기존의 교회에 안 다니고 이상한 교회에 가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라는 말을, 왜 그런 말을 할까요? 그들에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화내게 하는 요소가 될까요? 바로 뭐든지 좋은 것은 나에게 일단 오라 이 말이죠. 나에게.
나에게 와서 내가 검사를 하겠다. 이것이 나한테 이익이 될 거냐, 손해가 될 거냐, 검사하겠다 이 말이죠. 검사해서 나한테 손해가 되면 그거는 거부하고, 옳다 싶으면 그거는 받아들이겠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오케이. 그거는 믿을게.” 그런데 도중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죄인이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이 소리가 딱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니 어느 교회 다녀?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라고 거부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맹탕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은 뭐가 있어요. 인간은 뭐가 있다고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아주 의미 있는 대사가. 종교영화인데요. 귀신영화인데. 거기에 종교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하니까, 거기에 의식이 깨어있는 젊은 종교인이 소위 종교지도자급이 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장사 냄새 많이 난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진리만을 외쳐야 될 건데, 진리를 안 외치고 진리를 빙자하면서 뭔가 얻을 것을 얻는 거예요. 뭐를 경유하죠? 이렇게 진리를 전하면 우리 교회, 우리 절간, 우리 성당에 뭔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있을 때에, 이게 영화니까, 순수를 추구하는 그 젊은 성직자가 하는 말이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조심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장사 냄새라고 하는 것은 영업이거든요. 영업. 영업 냄새 난다는 거예요. 손님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거예요. 호객행위.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아까 씨름판을 이야기하면 뭐 어떤 진리, 성경의 어떤 복음이라도 무슨 판을 유지하고 싶다? 이 교회라는 장사판은 그냥 지속시키고 싶은 거예요.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계속 끌고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순수하지 않고, 맹탕이 아니고, 빈 게 아니고 뭔가 있어요. 뭔가 있는데, 인간들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뭔가 자기는 순수한 만남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만나는 거예요. 왜? 둘 다 똑같은 인간들이니까. 서로 잘 통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본디오 빌라도, 막힌 게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바는, 이 로마 원로원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이 유다지방이 평화롭게 계속해서 세금을 갖다 바치기를 원하고 있죠. 지속하기를 원한다. 지금 로마의 통치가 지속되기를 원해요.
AD70년에 유다나라가 망하죠. 열심당원 3000명인가 도망을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마사다라는 요새로 도망을 가요. 유다 예루살렘이 있고 여기 사해가 있고 여기 마사다라는 뾰족 솟아오른, 옛날 헤롯의 별장이었습니다. 높이가 한 300미터인가, 여기에 물탱크에 물도 저장까지 하고 비둘기 사육까지 해서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AD70년에 공격했는데 여기서 무려 3년을 버팁니다. 나중에는 애들 빼놓고 다 자결했죠. 다 자살해서 망하죠. 아주 유대인들이 고집이 셉니다. 자, 이걸 제가 방금 고집이라고 했죠.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지키고 싶은, 지탱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난과 곤고와 어려움이 있을 때 지탱하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거예요. 제가 수요설교 때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치유나 치료가 아니고, 그리고 얽히고설킨 그러한 관계를 그냥 핀셋으로, 족집게로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거예요. 안에 뭐 있나 함 보자~ 뭐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구원을 요구 하는지 함 보자~ 도대체 누가 무슨 목소리를 내어가지고 감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아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억지를 쓰고 우겨대는 이 웬수, 웬수덩어리 어디에 있나 함 보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 꽃이 피어라. 내가 찾아낼게.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거예요. 하나하나.
내가 구원받아야 의미가 있다는, 뭔가 의미가 있어요. 뭔가 가치 있는 것을 꿈치고 있었다고요. 이걸 안 들키려고 포장을 했지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늘나라는 좋아요. 주님만 있으면 좋아요. 그런 헛소리를 하지 말고. 그런 찬양,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도대체 니가 처음부터 뭘 얻고자 하느냐, 어떤 본성에서 그런 위장술이 나왔는가를 한번 보자는 말입니다.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 발언 속에서. 너의 진원지, 너의 원천이, 니가 아는 것, 니가 알고 있는 원천, 그러나 그거는 니 원천을 니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 말이죠.
성령께서 성경을 쓰실 때는 어느 정도로인지, 첫째 이 성경은 아무도 모른다. 내용을.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도 안 읽는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극한의 깊이를 담아서 성경을 쓴 거예요. 아무도 안 보고 아예 안 읽기 때문에 성경에 모든 내용의 깊이를 거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겁니다. 애들이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애들이 혼자 중얼중얼 거리죠. 뭔가 할 말이 많아요. 그런데 엄마가 다가와서 “얘야! 방금 무슨 이야기했지?”라고 물으면 입을 다물어요. 왜? 듣는 사람이 있을 때는 내 쪽에서 편집이 시작되는 겁니다. 편집이. 다가오는 타자의 응시에 의해서 그 타자 앞에서 내가 손해를 볼 것이냐 이익을 볼 것이냐를 계산을 하면서 그 엄마한테 전달할 내용은 자체적으로 조정을 하고 편집을 해가지고 자기한테 손해가 안 될 것만 해서 주죠. 그런데 엄마가 떠나고 난 뒤에는 혼자 또 중얼중얼 거려요. 뭘 잘하다가도 자리 펴면 안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 성경말씀은 아무도 몰라요. 내용에 대해서. 인간은. 그리고 인간이 읽어도 모를뿐더러 읽지도 안 해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읽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갖 말을, 창세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계시를 성경에다가 담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보게 되면 성경의 내용을 한꺼번에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현재 인간이 처해있는 그 분량만큼 성경을 압니다. 그리고 다시 또 봐요. 보면, 전에 봤는데 새로운 것이 또 나와요. 그 다음에 봐도 또 나와요. 왜? 극한의 깊이의 내용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극한의 깊이가.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 성경을 볼 때 선입견이 뭐냐 하면은, 나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뜻이 어디에 있지? 아, 성경에 있구나. 그러면서 뜻을 따르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나 구원이 된다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뜻이 다겠습니까? 점점 깊이 들어가면 내가 구원받아야지, 라는 것 자체를 누가 지적하고 누가 공격하느냐 하면은 성경이 공격해요. 성경이.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이것이 무슨 생각이냐 하면은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누구 생각입니까? 사람의 일= 누구의 일입니까? 악마의 일이죠.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악마적이다.
악마적인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볼 때 그 뜻을 가지고 보니까 나중에 나오는 것도 뭡니까? 이래서 나는 구원받았구나, 라는 것이 나오는 거예요. 터무니없죠. 그래서 제가 아까 인간+인간의 생각, 그래서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정리한 것은 뭐다? 눈에 보인은 세계 말고 하나님나라, 하늘나라라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세계에 있어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간다? 하늘나라에 간다. 이분설,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 또는 워치만니처럼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올라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원어를 분석해가지고, 감히 원어가 없는데, 원어를 분석해가지고 지 생각이 옳다고 정리하는 거예요. 히브리인들하고 한국 사람하고 누가 원어를 잘 알아요?
원어를 안다는 것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그 민족 단위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거기에 다 녹아져있어요. 민족단위의.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원어를 아느냐? 히브리인들 본인들도 몰라요. 마치 한국 사람이 한국에 대해서 알아요? 모르잖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한국 민족이라는 단어까지 계산해서 다 알겠습니까? 모르죠. 다만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 온지 3년 정도인데 한국말을 잘하면, “아! 저 사람 정말 한국말 잘합니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한국 사람처럼 잘한다는 뜻이 아니고 예상 밖에 잘한다는 뜻이지. 진짜 한국말 잘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근데 그 외국사람이 연세대에 가가지고 한국어 공부를 한다면 진짜 한국 사람보다 어휘력이 더 많아질 수가 있죠.
봉준호 감독의 통역사 샤론 최(성재), 샤론의 백합, 샤론 최가 영어를 한번 쓰는 것을 보세요. 영어. 그리고 우리나라 가수 중에 박정현. 박정현의 영어 구사력.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어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에요. 박정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죠. 여기 십자가마을에 함00 집사님이 계시지만. 일반인들이 쓰는 단어를 넘어서죠. 아무리 넘어서도 성경에 있는 내용은 인간이 히브리어를 하던, 뭘 해도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 주님은 인간하고 안 노니까. 놀지를 않으니까. 이 생각 자체가 뭐냐, 주님과의 단절이에요. 단절. 어떻게 아느냐, 고소하니까. 고소.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그 당시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말 한마디만 하면 그 단어 전부 다 분석합니다.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느니라. 예수님하고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요. 고소할 때 좀 더 알아서 내뿜으려고 고소한 게 아니거든요. 이미 결정을 내린 거예요. 우리 편 아니다. 근데 우리 편 아니다, 라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까 했죠. 인간은 지속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전통, 이 역사, 이 질서, 이 체제, 거기에 예수님은 반대된다는 것을 이미 결론으로 내린 겁니다. 이제 남은 것은 구실만 뽑아내면 돼요. 이리저리. 구실 뽑는 것이 여기에 나오죠. 3절에 보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여러 가지로 고소한다. 또 4절에 보면 얼마나 많은 것으로 고소한다. 많은 것. 여러 가지.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님에 대해서 고소하고 고발할 때는 뭐 한두 가지 제목이 아니고 모든 게 다 다르다. 모든 게. 모든 게 다 달라요. 틀린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점을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왜 의도하느냐, 하늘나라는 여기에 있고 인간은 지상에 있다는 이러한 모든 공간, 다른 말로 하면 자리, 이 공간과 자리는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나오는, 유발된 결과라고 이래 보는 거예요. 인간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걸 호의적으로, 내 다리를 여기에 끼고 싶지 않다. 발을 빼는 겁니다. 발을 뺄 때 그냥 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전체 다를 부정하면서 발을 빼겠다는 의도로 주께서는 기꺼이 십자가 재판에 참여하신 겁니다.
너희들의 자리에는 천국은 없다. 너희들의 자리에는 천국이 왜 없는가? 하나님인 나, 예수님을 밀었으니까. 예수님을 밀면서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늘나라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가 그게 하나님 나라겠습니까? 그게 천국이겠어요? 아니죠. 애초부터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그들이 아무리 천국과 지옥을 논해도 하나님을 논해도 전부 다 헛것이 되는 겁니다. 그 공간 자체가. 그러면 왜 인간들은 예수님을 밀치면서도 그들은 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가,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인간의 형상은 죽음의 형상이라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음을 생각 안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은~’이라고 나온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이니까 뒤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든, 하나님의 영광,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거룩, 아무리 해도 기본적으로 무슨 요소가 계속 여기에 박혀있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있을 만하다. 인간에게는 의미 있다, 가치 있다가 계속 살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은 이 자체를 보여 주는, 살아있는 생명이나 목숨,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줘서 인간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오늘날 이천년 교회 역사 신학에서 인간의 형상을 뭐로 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죠.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입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입니까? 살아있는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체인,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생각이에요.
그 어느 누구도, 제가 알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칼바르트, 칼빈이라든지, 루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저는 아무도 본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뭐라고요? 죽음이죠. 왜? 예수님이 곧 인간이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얼마나 간단해요. 성경내용이. 근본적으로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을 고집을 부리니까, 신앙이고 진리고 다 엉망진창이 돼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못 빠져나와요. 내가 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게 불교고 천주교고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계속 도를 닦아. 계속 도만 닦고, 자기를 믿으며 순수를 믿으며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순수를 믿으며 정의를 찾고.
이게 뭐예요? 순수 밑에 깔리는 게 뭡니까? ‘어쨌거나 저랬거나 나는 죽으면 안 돼.’ 이게 깔려있다고요. “살아있는 것은 손대지 마세요. 주님. 살아있을 때 제대로 제 값어치하고 살아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는 말아주세요.” 이러한 게, 뭔가 맹탕이 아니고 깔려있어요. “인간을 죽이는 것은 주님의 실수입니다.”라는 게 깔려있다고요. “주님은 인간의 솜씨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게 깔려있다 이 말이죠. 노아의 홍수나 장차 불심판이나 그런 거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살아있는 거나 주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재롱을.”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해봅시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 그 앞에 하나 붙인다면, (산)인간+(산)인간+산낙지, 뭐 이런 거. 산인간과 산인간의 만남. 살아있네~! 하잖아요.“오, 형님 살아있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나오죠. “어~ 너그 사장하고 우리 형님하고 사우나 가고. 어~”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 거기다가 살아있는 하나님과 같이 동업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장사냄새 많이 나요. 영업냄새 굉장히 많이 나요. 살아있는 우리가 살아있는 하나님께 기도하자. 기도는 뭐다? 숨 쉬는 거다. 살아있어. 기도는 숨 쉬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바퀴가 두 개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하나는 기도다. 디모데전서를 봐라.” 뭐 이렇게 나오죠. 바퀴 둘 다 확 빼줘야....,
예수님을 추방시킨 그 세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누구의 소망이냐 하면은 악마의 소망입니다. 악마가 계속해서 그것을 뒤에서 부추겨준 거예요. 그래서 이렇기 때문에 산 인간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은 나가 여기서 나올 수 있는 논리는 다 끊어집니다. 한때는 죽지만 다시 부활해서 살아있는 나. 이걸로 가요.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하면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나이 한 90이 넘으면 나는 죽는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잖아, 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죠. 죽는다면서요? 예. 죽죠.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이십니까? 심술궂게 제가 묻죠. 누가 죽이십니까? 아이고, 하나님이 죽이시죠. 하나님이 죽일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건데 왜 죽이십니까? 아휴, 우리가 죄인이라 죽죠. 그러면 일부 선이고 일부 죄가 있는데, 일부 있는 죄 때문에 죽이십니까? 아니면 몽땅 죄기 때문에 죽이십니까? 몽땅 죄 때문에 죽이시죠. 그러면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도 죄에 속할까요? 이게 선에 속할까요? 라고 한다면, 실례지만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이상한 교회에 다닌다고 나오죠. 논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을, 내가 죽어도 주님이 부활하셨으니까 죽어도 내가 다시 산다는 이 생각을 할 때, 나라는 인간이 엄연히 죽어서는 안 돼, 라는 어떤 잘못된 선입관에 박혀 있는 인간관을 가지고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유대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다니엘서 12장을 아는 이상 부활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뭐 사두개인들은 안 믿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잖아요. 다니엘서 12장에 나오죠. 죽은 자가 부활된다고. 시편에 나온다 이 말이죠. 부활시키는 메시야를 믿는 거예요. 근데 그들이 말하는 부활의 메시야는 뭐냐, 살아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서 부활시키는, 인간의 운명이니까 인간은 운명에 살다 죽는다. 이래 보는 것이지. 누가 죽이는가? 뭣 때문에 죽이는가? 이걸 몰라요. 단지 하나님이 죽이고 살린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이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살다가 죽고 다시 부활되어 천당에 가야돼.’라는 생각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 바로 죽이고 살리고 하시는 그분의 소관이시잖아요. 그분 소관.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지 몰라요. 차라리 신학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아요. 아는 게 문제라. 아는 게. 하나의 예를 들면 독일군하고 연합군하고 전쟁하는 2차 대전 배경 영화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영화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독수리요새라든지 나바론요새라든지. 그 영화 진짜 재밌다니까요. 그때 보면 독일군들은 싸움을 하나도 못해. 총만 쏘면 다 죽어.
그 영화 할 때 시나리오가 어떤 시나리오냐 하면은 교도소에 있는 말썽꾸러기 사형수나 강도 경력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뽑아요. 인생 막장인 사람들을 뽑아가지고 아주 훌륭한 지략이 있는 소령이나 장교가 진짜 헌신적으로 훈련을 잘 시켜요. 시켜놓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번 작전에 투입되어 성공만 한다면 너의 모든 죄는 다 면제가 된다. 이참에 조국을 위해서, 너의 형기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워라! 해서 싸우는데, 자기 개인적으로도 성질이 더럽지만 국가이름으로 나가서 독일군 쳐부수는데 이렇게 용맹스러울 수가 없어요. 자,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애국자입니까? 특수훈련 받은 죄수들이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죄수입니까? 죄수가 아닙니까? 니가 이런 법을 지키면 너의 모든 형기를 면제해주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해주겠다는 조건이죠.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나갑니다. 법이 살아나야 죄가 살아난다. 법은 바로 인간들이 감추고 있고 모르고 있는 죄를 살려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 8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네, 말을 바꾸겠습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다. 잠잠히 있다 이 말입니다. 죄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법이 나타나게 되면 죄가 살아나겠죠. 그런데 법이 나타났을 때 인간의 태도가 뭡니까? 야, 법 지키면 천국에 가겠죠?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법을 지키면 나는 구원받겠죠? 라는 태도죠. 그 전체가 뭐가 되는가 하면은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법이 없으면 죄가 죽지만 법이 나타나면 죄가 살아나죠.
그러면 법의 완성은, 법의 최종상태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게 죄라는 것이 같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자리에서 구상했던 천국과 지옥 이 모든 것은 바로 가짜입니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상은 모든 게, 그게 거짓이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인간이 짐작하고 있는 모든 짐작은 그저 인간 대 인간, 자기들끼리 모여서 입 맞추고 생각 맞추어서 일방적으로 그게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옳다고 여기는 결론이 오늘날 신약입니다. 인간 구원 못 시켜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사람들 구원 못 시켜가지고. 교회부흥 못 시켜서 환장을 했어요.
분명히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는데,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교회에 오려고 하니까 얼마나 이게 장사 냄새가 많이 나는지. 그러니까 성령이 와야 된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뭘 가지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이 오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오라고. 성령이 시다바리인가? 뭐예요? 성령이 보기에 같잖지도 않죠.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노래도 있죠. 성령이여 강림하사~~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부르죠. 인간은 폭파시점으로 향하고 있는 폭탄을 장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빵하고 터지면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다 날아가요. 신발 하이힐만 두 짝만 남아있고 나머지기는 없어요.
인간 자체가 없어요. 왜? 인간 자체가 폭탄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죽음의 형상이니까. 인간이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죽음이에요. 인간이 죽음의 형상이고, 죽음이라는 것이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의 모양으로 나타난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 창세기 5장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어야 될 인간끼리 의논해봐야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가지고 카페에 모이는 거죠. 커피 한잔하고. “니 뭐할래?” “아메리카노” “니 뭐할래?” “라떼” 라떼를 하든 뭘 하든 죽은 자들이 이렇게 모인 겁니다. 죽은 자들이. 수술해서 죽으나 원산 돌아다니나, 김정은이는 이미 죽었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위해서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직업으로 표현해요. “니 하는 일이 뭐냐?” 자,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직업이 뭐죠? 예수님의 직업이 뭡니까? 혁명가는 직업이 아니에요. 이거는 만약에 어떤 약사가 일제시대 때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가마니에 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다든지, 안 그러면 약사가 총을 들고 테러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직업은 약사가 아니고 혁명가죠. 그렇죠. 그러면 정작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약을 팔면서 목적이 뭡니까? 우리 조선민족을 일제에서 해방하려는 혁명가 역할을 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성도에게는 직업은 의미가 없어요. 직업 없습니다. 애들 밥해주는 거 직업 아니에요. 혁명가죠. 혁명가. 근데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몸에서는 인간들 세계에 기여를 해야 돼요. 보탬이 되어야 된다고요. 보탬이 되려면 백수는 안 돼요. 백수는 미워해야 돼요. 무슨 일을 해야 돼요. 무슨 일을 해서 인간세계 문명발전에 도모가 돼야 돼요. 혁명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세례요한한테 바리새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묻는 게 뭐였습니까? “니 직업이 뭐니? 선지자냐?” 라고 물었잖아요. 제사장이야? 뭐야? 예수님보고는 니 어느 학교, 신학교 어디 나왔냐고 묻고. 모든 것은 직업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는 주체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직업+자기이름, 인간 대 인간에게 있어서는, 홉스가 이야기했죠. 이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인간 대 인간의 싸움으로 적자생존, 될 놈은 되고 도태될 놈은 도태되는 것이 진화의 원리다. 원칙이다. 이렇게 봤거든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인간의 이름(직업) 대 무엇의 싸움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 사실은 인간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악마하고 싸우죠. 악마는 실체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싸움. 그 싸움을 주님께서는 쭉 계시해서 오셨고 끝까지 그 싸움을 진행시켜 오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0-05-03 14:02:32 | 조회 : 5 | 광주강의20200424b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 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 | 광주강의20200424b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혁명가 입장에서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는 직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혁명된, 재정리된 공간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이미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 입장에서 이 세상을 볼 때에 이 땅의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혁명이전에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살고자 하는 데에 있어서 도입된 직업이기 때문에 그거는 무모한 직업이에요. 주님께서는 지금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 추방되었어요.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인간 세계 따로 주님세계 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세계는 그냥 나오면서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법을 내세우시면서 인간세계를 규정하시는 거예요. 이 법을 내세우시면서. 법이 살아남으로서 인간이 구상한 전체가 가짜였다. 법이 있음으로서 인간은 죄인들이었다. 죄의 값은 뭐가 되느냐, 그들은 사망이었다. 사망이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간들을 이 세상에 번식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는 모든 게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되어 있죠.
그러나 안 죽은 사람이 있었어요. 에녹. 노아. 그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있었어요. 동행이라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동행, 동행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죠. 그리고 이거는 공간, 인간+인간, 이게 오늘 제목입니다. 인간+인간의 공간인 반면에, 여기에 보면 인간에게 추방된 주님의 공간, 주님의 자리가 있겠죠. 주님의 공간, 주님의 자리. 근데 인간 세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서 인간세계를 계속 더 바람직한 세계로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들 보기에, 여기서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리고 여기 본디오 빌라도까지 포함해서 인간. 그러면 인간들이 추방하고자 인간은, 여기에 누가 뛰어들었어요? 인간에게 공격받는 인간, 예수님 본인이죠. 그 투쟁에서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죽은 예수님이 법을 완성시켜버린 거예요. 법이 살아남으로서,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서, 같은 말이에요. 법이 살아남으로서, 법이 완성이 됨으로서 모든 인간들의 투쟁의지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죄가 되고 사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그 모든 천국, 지옥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거짓이고 가짜였습니다.
이점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고요. 인간에게는 사망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데, 미리 법이, 율법이, 십자가가 와버리면 성도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살고자 하는 나인데, 성령께서 미리 법의 완성 십자가와, 율법의 완성 십자가죠. 복음이, 예수님이 찾아와버리면 이 성도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의 연기, 수증기 같은 연기가 돼버리죠. 미리 앞당겨서 시한폭탄이 미리 터져버렸어요. 죽기 전에 미리 죽어버렸어요. 죽기 전에. 그걸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성령으로 연합되게 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미 죽은 걸로 하죠. 죽으니까 어떻게 돼요? 죽어 없어진 거죠.
없어졌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거죠.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인간이 소멸된다고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굉장히 반대해요. 그 반대하는 이유를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신학이 이걸 다 반대하고 있는데. 심지어 여호와증인도 이걸 주장하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소멸하지 말고 몸은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다고 해달라는 거예요. 기어이 이렇게, 완전 차단, 완전 단절되지 말고 가느다랗게 라도 뭔가 연결되는 고리 같은 것이 있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희망이 있으니까. 이게 무슨 수작이이에요? 그런 수작이.
주님을 밀 때는 완전히 결별하자고 밀었잖아요. 그러면 앗싸리, 깨끗하게 관계를 끝내야지. 아니, 이혼해놓고 전남편이 찾아와가지고 집적대고. ‘맛 좀 보실래요’라는 아침드라마이야기가 왜 나오지. 끝나버렸잖아요. 끝났는데 왜 자꾸 집적대요. 끝났는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인간하고 결별했다는 말은 인간세계의 어떤 요소도 다 끊어진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못 가잖아? 그럼 우리 구원 못 받잖아? 죽은 놈이 왜 그걸 걱정합니까? 죽었다면 앗씨리하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지. 이걸 왜 미련을 갖고 있어요.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싫어하면서 자기는 살리고자 하는 심보가, 이런 더러운 심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육, 영, 혼, 하는 이 이론이 얼마나 이게 지저분해요. 참 인간은 지저분해. 그냥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려고.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살려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끝났다는 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문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문이다. 문. 나는 게이트gate다. 근데 게이트, 문이 뭐냐, 이게 죽음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가 문이 된다면,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몰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하고 자기하고 빠이빠이 결별한 거예요. 관계가 끝난 거예요.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저 십자가지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한 것을, 이건 제자들도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도 안 믿었어요. 아무도 이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해도 그걸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이걸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마리아도 예수님 시신 찾으러 갔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을 확인하러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부터 해가지고 예수님 어머니까지. 부활을 확인하러 온 게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랐다고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에 깜짝 놀랐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아이고, 시미야!” 시미야, 라는 말은 시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아이고, 시어머니야!”라는 것을 “아이고, 시미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자기를 놀라게 하고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시어머니를 왜 찾습니까? 얼마나 이 트라우마가, 나이 80이니까 얼마나 시집살이를 오래했겠어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이 있더라도 시어머니가 다가온다고 하면 이거는 나를 공포스럽게 하고 놀라게 만들고 나를 거북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시어머니가 되는 거예요. 그만큼 자기 안에 그게 이질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게 그래요. 법이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인간은 잘난 체 하는데, 율법이 왔다는 것은 “아이고, 시미야!” 하고 똑같은 거예요. 법이 오게 되면 거기에 책임감을 주기 때문에 인간은 여기에 놀라버리는 겁니다. 그 법의 완성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요즘도 십자가 들이대면 “어머나, 시미야!” 하고 놀라는 교인들이 많아요. 그거 말고 부활이야기하세요. 날 놀라 키지 말고. 예수님의 모든 관계,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도 했지만, 그들이 온 것은, 그들 속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이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습니다. 아예 없는 거예요. 이게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이 관계, 또는 이 과정, 이 절차는 누구만 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성령님만 아는 겁니다. 딴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다가 중도 포기했잖아요. 못 따라가겠다고. 못 따라가죠. 따라갈 수가 없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죠. “니는 나를 못 따라온다. 나 있는 곳에 니가 올 수가 없다.”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따라가겠다는 적극적인, 그러한 좋은 의도로 이야기했지만, 그 좋은 의도조차 주님한테는 차단이 되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면 나는 문이다, 라고 할 때 무슨 문입니까? 양의 문이죠. 이 양은 내가 양이라고 여겼다고 해서 이 양과 양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양의 개념은 인간 대 인간의 공간 개념에서 형성된 양이기 때문에, 이거는 깔끔하게 법이 살아남으로서 죄로 규정받아야 해요.
죄는 천국에 못 갑니다. 따라서 이거는 주님이 계시하는 양과 연결점이 없습니다. 완전히 단절된 거예요. 양의 문이라는 것, 양이라는 이 개념 규정은 누가 하느냐,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었잖아요. 모든 말씀,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그 말씀 안에서, 주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관계가 시간을 거슬러서 양이 아닌 자를 양 되게 함으로서 주님은 그의 문이 되는 겁니다. 양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되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문은 없어요. 양의 문은 없습니다. 구원의 문 근처에 가면 구원 못 받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못 들어가서. 구원의 문에는 왔는데 문이 없어요. 구원받고 싶은 열망은 있는데 문이 없어요. 양이 플랜카드 걸고, “나는 광주에서 온 양” “나는 대구에서 온 양”이라는 플랜카드는 있는데 아무도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 양이 그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는 양은 주께서 받아주신 양이 아닙니다.
오늘 새벽에 꿈을 꿨는데, 꿈도 희한한 꿈을 꿨어요. 천국에서 어린양의 명단에 합격자 발표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야, 이름을 부르는데 꿈이지만 그 느낌이 정말로 쭈뼛쭈뼛했어요.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 꿈을 깼어요. 만약에 내 이름을 불렀으면 나는 교주가 되었을 것 같아요. 얼마나 다행인지. 명단을 부르는데, 아무리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해도 다 소용이 없어요. 명단 부르는 사람의 명단에서 빠져버리면 이 땅에서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도, 뭐 영어로 번역을 하고, 녹취를 해도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명단을 불러버리면. 비로소 쭈뼛쭈뼛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뭔가 했던 선행을 모아서, “주님, 저 알지요? 저 넣어주시는 것 맞지요?” 이렇게 내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내가 구원을 받았다, 안 받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뭐라고 확정됩니까? 라는, 그게 또 궁금증으로 생겨버리는 겁니다. 끝까지 인간은 자기 구원을 포기를 못하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언급을 해드렸어요. 어떻게 언급을 했느냐 하면은, “나는 죄인이다.”라고 할 때에 “당신은 왜 죄인이야?”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이거는 땡입니다. 이거는 지옥가야 돼요. “언약에 의해 죄인이다.” 언약에 의해. 언약의 완성은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에 의해 나는 죄인이다.”
이 규정은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된 죄인이에요. 그러면 이 죄인과, 전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맹탕이 아니고 뭔가 있죠? 뭡니까? 선악의식을 가진, 거기서 파생된 죄 개념이 있겠죠. 죄 개념. 선악적인 죄 개념. 그래서 이 선악적인 이 죄 개념의 이 씨름판에서, 이 판에서 무슨 판으로 이미 이동을 해야 되느냐 하면은 언약에 의해서 죄인 된 규정으로. 근데 같은 죄라는 개념을 갖고 서로 차이 나는 두 개의 개념이 다 같이 있어야 돼요. 그 차이점, 차이성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성령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적으로 알고 있는 이 죄도 알고, 그리고 이 죄(선악적 죄)와 이 죄(언약규정에 의한 죄)가 섞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로 있어요. 따로.
언약에 의한 죄라는 것은, 이거는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언약에 의해서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여기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부담감이 없어요. 부담감이 없기 때문에 이거는 뭐냐, 죄인이면서도 기뻐요. 그런데 반면에 여기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은 이거는 본인이 선하게 살지 않으면, 악하게 살면 이거는 죄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몸부림쳐야 되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돼요. 책임을 지면서 악은 떼놓고 선 쪽으로 항상 달려가야 된다는 것을, 인간의 본능성이 계속 나한테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늘 뭐냐 하면 결핍이에요. 결핍. 모자람이에요. 엄마가 자식을 낳았으면 자식을 낳지만 말고 잘 키워야 된다. 보통 사회에서나 남자들이 그렇게 하죠. 그러면 여자는 뭐라고 합니까? 잘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니는 나보고 잘 키우라고 하지 말고 돈이나 벌어오라고 이래 하겠죠. 니는 돈이나 벌어 도! 지금 이 대화가운데 뭐가 빠졌습니까? 지금 선악적인 죄 개념을 가지고 부부가 대화를 하고 있죠. 뭐는 빠졌어요? 아무 책임지지 않는, 태어난 것 자체가, 내가 자식을 둘 낳았지만 다 죽으라고 폭탄 안고 있는 자식이에요. 완전히 폭탄의 재료가 되죠. 그 자체가 폭탄으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이 기쁨이 소멸되어 버린 거예요.
자, 선악적인 죄 개념에 책임을 지려면 책임자가 필요하겠죠. 그게 영어로 뭐냐 하면, 어려운 영어는 아닌데, 영어로 아이‘I’에요. ‘I’ ‘나’ 한국말이 더 어렵죠. ‘자아’ ‘나’는 여러 가지의 단어로 번역하면 ‘자아’가 되고 또는 주체,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복잡해져요. 어쨌든 간에 ‘나’ 악마로부터 선악적인 책임을 지도록 책임추궁을 당하니까, 그 책임자로서 악마에 의해서 등장된 게 뭐냐 하면은 나에요. 나. 그래서 아까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성경말씀을 봐도 그 모든 의미와 가치는 누구한테 쏠리고 누구한테 경유한다? 나를 필히 경유해서 생각하기 마련이라니까요.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조종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시달리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냥 맨숭맨숭 그냥 노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 뭐예요?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잖아요. 그 바리새인이라고 자랑질 하는 사람이 누구죠? 사도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잖아요. 빌립보서 3장에서.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얼마나. 루터가 십자가 알기 전 루터의 모습. 철저하려고. 철저하려면, 오늘 제목처럼 인간+인간에서 철저해야 되는데, 그 철저함은 뭐로 되느냐 하면은 이게 수치화가 돼요. 수치화. 수량화된다고요. 철저함은. 수량은 숫자가 측정이 돼요.
일기를 쓰면서 오늘 하루는 76점. 근데 일기를 쓰고 난 뒤에 착한 일을 했어. 85점으로 갑자기 인상이 돼버리죠. 자기 하루하루의 일기장도 수치화된다면, 일생을 다 보태면 뭐가 됩니까? 수치화되죠. 한평생 다 살았는데, 아빠는 몇 점짜리 아빠? 자식부터가 죽어 마땅해야 돼. 그런 거 묻는 거 보면. 엄마는 몇 점짜리 엄마? 백점 만점에 얼마? 이런 식으로 해서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수량화된다는 것은, 이게 나라는 개념을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나로 보태야 된다는 식으로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었던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걸 했죠. 그리고 그들은 이것만이 내 세상,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이고 다른 현실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나타나니까 바리새인이 또 지적하는 거예요. 니는 몇 점짜리? 니는 귀신의 대장. 이런 식으로 점수를 또 매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밀어내버렸잖아요. 밀어내고 난 뒤에 주님께서 마련한 자리는 뭐냐, 이거는 인간의 이름이 아니고, ‘I' ‘나’, ‘자아’는 나의이름이지만 이거는 인간의 공간의 이름이 아니고 무슨 이름? 주의 이름의 공간.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양의 문이라고 할 때에 그 양은 누구의 이름의 양입니까? 누구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주의 이름, 주님을 빛내기 위한 양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구원받은 양이 되고 싶어서 내가 나서게 되면 이거는 뭐냐, 선악체제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가짜현실, 가짜 공간이 주의 공간을 침해하고 방해하고 훼방하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이게 둘 다가 있어요. 둘 다. 실전적으로, 경험적으로 둘 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도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 로마서 7장에서 나는 선을 원하지만 악을 행하는 이유가,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 이게 뭡니까? 여전히 무엇의 책임자가 되어 버렸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나는 예수 믿는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다가 되잖아요. 악마가 내세운 나를 여전히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었다고 했는데,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본인은 안 죽었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본인은 안 죽고 나에 대해서 자꾸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어디를 공격하겠습니까? 전에는 인간 대 인간의 투쟁이었지만,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투쟁을 하겠죠. 바로 내 몸에다가, 내 몸에 있는 여기에다가 주의이름이 공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차이가 나죠. 주의 이름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이 자체가, 이걸 인식하고 있다는 자체로 이미 이 사람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되죠.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모른다 치고 다시 복습에 들어갑니다. 첫째 강의에서 했듯이 인간들+인간들, 이게 주인공이고. 인간은 주인공으로 생각해요. 창세기 1장에서 나오잖아요.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을 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것도 명령했지만, 또 한 가지 명령은 뭐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키고 충만 하라는 그 명령했다 이 말이죠. 이것을 문화명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칼빈주의에서. 전에 개혁주의와 칼빈주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죠. 그런 것은 몰라도 돼요. 하여튼 간에 인간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 개혁주의는 도 닦자는 이야기고. 칼빈주의는 기독교 이름으로 세상을 정복하자고 하는 것이 칼빈주의죠. 세상을 바꿔보자고 하는 이것이 칼빈주의에요.
인간들+인간들에서 자연세계 전체를 다룬다. 이게 주께서 주신 명령이다. 문화명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20대 애들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안 그래도 취직해서 자기 전공과목은 하기 싫고 취직할 생각도 없는데. 이거 가르침 받으면 어디 선교사로나 나가볼까하는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선교단체에서 이거 많이 하고 있죠.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자연세계에서 좋은 이야기는 다 끄집어내요. 조화롭게 자연과 화목해야 되고. 자연과 융합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려야 된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자. 이웃의 범위를 넓히자. 이웃에는 인간만이 아니고 곰이나 고양이나 개까지 포함시키고, 심지어 이거는 동성애까지 포함시키고, 호모, 페미니즘까지 이웃이라고 하자. 이렇게 쭉쭉 나가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 만인구원설까지 막 나가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조화, 화목, 융합, 또 여기에 빼면 안 될 게 정의로움이죠. 정의로움 이런 것까지 포함해서 하자. 이렇게 할 때에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뭐는 건드리지 마라? 이걸 잘 할 테니까 나를 안 건드렸으면 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자리를 만들 때 그냥 주님께서 광야에서 도 닦으면서 안 했죠.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나는 날아다닌다. 허경영이처럼. 혁명당 표시가 공중부양 하는 거거든요. 앞으로 모든 국민한테 150만원 준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런 것(인간과 자연세계의 조화, 화목, 융합, 정의)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 자체에서 거부당하는 쪽을 일을 벌여버려요. 인간자체에서. 인간과 인간을 만나가지고. 좋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역겨운 대상으로 스스로 그렇게 삼아버리는 겁니다. 역겨운 대상. 주님을 10년 따라다니고 20년 따라다녔다가, 복음을 한 20년 믿어오다가, ‘도저히 이제는 지겹다. 나 복음 안 할래. 기존교회 다닐래.’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언제까지 내가 복음, 복음 해야 되느냐?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기어이 니가 나를 꼴보기 싫어할 때까지. 니가 죽나, 내가 죽나, 니 본색이 뭐냐 하면은 나는 살고 싶다. 따라서 니가 죽어라! 하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주님께서는 관여하십니다. 이러한 자연세계는 다 뒷전이에요. 뒷전. 인간한테 다가가서 인간 속에 있는 괴물과 접선을 시도하는 것이 주님이 만든 새로운 공간. 새 공간=천국,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 있다. 제가 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앞으로 내가 예수님 몸, 예수님 죽인다고 욕해야지.’ 이런 식으로 조작을 해서 결별의 순간을 성질이 급해서 내 손으로 빨리 앞당기려고 하는데, 그런 시도를 하지 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은 인간 속에 악귀가 살아있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이미 죽었지만 이걸 애써 부인하고 자기를 산자로 여기는 겁니다. 계속 산자로.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하고 나는 존재 대 존재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사건으로 다가오면서 내가 존재가 아니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보조사건으로 내가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사울이죠. 나중에 사도바울이 되죠.
사도바울 본인이 나중에 디모데전서에서 하는 말이 창세전에 예정되었기에 나는 마땅히 그때 죄를 지어야 되고, 책임이 하나도 없어요. 나는 마땅히 예수님을 죽여야 하고. 나는 포행자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를 창세전부터 그렇게 유도했다는 거예요. 그걸 ‘길트임’이라고 해요. 길트임. 길트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도랑을 파게 되면 위에서 물만 주면 그 물은 도랑을 따라서 알아서 흘러가게 되어 있죠. 주님께서 언약 완성자이기 때문에 누가 내 양인지, 누가 내 양이 아닌지를 아시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도랑을 파시는 거예요.
도랑만 파면 주님의 성령은 무엇을 따라 흐르겠어요? 주의 뜻은 도랑 따라 도달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도달하면서, 이것이 흐름이기 때문에, 성령의 흐름인데, 흐름은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존재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주님의 살아계심, 존재는 주님한테만 있어요.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걸 전환시켜버립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사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 근래에 제가 강의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들어보신 분 같으면 이제 정리가 되죠. 길트임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길이 없는데 길이 생긴 거예요. 생겼는데, 그게 누구를 위한 길입니까? 나를 위한 길이 아니에요.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길트임이고. 나는 그 길트임을 통해서 성령이 들어올 때는 나는 뭐가 되느냐, 주님의 일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되겠죠.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 사건이, 내가 생존한다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도랑을 팔 때 이 도랑이 어디에 파이겠어요? 인간 대 인간의 세계 안에서 도랑이 파져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했던 십자가 사건이 똑같이 재현되고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정리가 안 되는 것 같기도 한 이런 표정인데. 예수님 기다린다고 산 위에 가서 혼자 도 닦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미리 예수님한테 욕하고 죽이라고 일부러 연출을 부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나로 사는 것 자체가 이 예수님을 욕보이는 사건임을, 주님이 찾아오니까 비로소 이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성령이 오니까 아는 거예요. 내가 주님 욕하고 욕설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주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밥 먹고 살아도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내가 주님보다 내가 우선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순간이 된다 이 말입니다. 구태여 나쁜 짓 더해서 예수님 만나려고, “이래도 안 찾아오십니까?”라는 이런 연출을 하지 마세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법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래야 내가 뭡니까? 죄가 살아나고. 법이 살아나서 죄가 살아난다는 이걸 사건으로 알게 된 사람이,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이걸 알 수가 없죠. 법은 지키는 용도지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을 증명해서 법이 죽었다는 생각은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발상이에요. 법이 오면 ‘아, 지키라는 모양이구나.’ 이거는 뭡니까? 선악만 아는, 선과 악에서 내 구원은 누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오직 그것밖에 모르는 인간들. 그 자체가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그 요건인 것을 본인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한다는 말은 굳이 우리가 나쁜 짓 한다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그냥 우리를 놔둬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섭니까? 내 잘난 맛에, 내 존재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잖아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가치가 있는지, 그것을 따지고 보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이웃집 어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뭐, 돌아가셨겠지. 아이고, 건강한데 돌아가셨네. 자식들이 유산문제로 좀 싸움하겠네.’ 뭐 이정도가 되지. 옆집, 옆집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애통하거나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죠. 그런데 김정은 사망! 이거는 만세!! 왜 그렇게 김정은 사망이 이슈가 되고 왜 그렇게 전 세계에 유명합니까? 왜 그런 거예요? 어느새 우리는 뭐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나의 자리, 나의 공간이 다시 한 번 각인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주님의 법, 주님의 십자가는 어떤 기능을 한다? 언약적 기능을 해요. 언약의 길트임이죠. 제가 보니까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인데, 이 길트임을 설명하면 이해가 될 겁니다. 제가 두 가지 그림을 그릴 테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자, 여기에 평지가 있습니다. 평지에 돌이 있고 나무도 하나 있고. 그렇게 말고 평지를 위에서 봅시다. 위에서 보면 그냥 매끈한 평지에요. 매끈해요. 매끈한 평지. 매끈한 평지니까 그냥 매끈하다. 이의 없지요? 맞지요? 그런데 한 달 뒤에 가보니까 여기가 온통 파였어요. 비가 왔는지 물이 흘러요. 그러면 뭡니까? 길트임이죠. 도랑물이 흘렀죠. 이 매끈함을 아는 사람한테는 뭘 압니까? 길트임을 아는 거예요. 매끈하지 않고 뭔가 찾아와서 이걸 균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근데 매끈함을 모르고 미국 이민 갔다가 여기에 처음 온 사람 같으면, ‘뭔데? 원래 비 오면 갈라지잖아.’ 이래 되잖아요. 길트임이라는 말은, 내 위주로 이렇게 산다는 이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말고 이렇게 법에 의해서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여기서 뭐가 발생됩니까? 차이가 발생되죠.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다른 학원 강사 같았으면 분필 던져버렸어요. 수학강사 같으면. 이 차이를 알아야 돼요. 이 차이를 안다면 이 길트임에 의해서 기쁘고 감사하죠. 지가 팠습니까? 지가 나쁜 짓해서, 배에다가 문신 그리고, 그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방문해서 나로 하여금, 이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건 엉망진창이 아니고 뭔가 분열을 다 시켜놨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니가 나를 버렸잖아.” 하는 그 도랑물. “니가 나를 버렸어. 니는 너밖에 몰라. 너밖에 모른다.”라는 것이 기쁨으로 온다니까요. 이게.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고 이걸 모르고 자기가 매끈하다고 우기는 사람한테는 “너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다.”라고 하면, 이 매끈한 사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순종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래 나온다니까요. 왜? 성경에 그렇게 있으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주께서 십자가 지셨으니까 우리는 죽은 자다.” 라고 하면, “주여, 죽은 자로 살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연출을 한다니까요. 연출을. 왜 그런 연출을 해요? 흉내를 내도 성경 말씀을 가지고 흉내를 내는 수준이 이거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차이 같은 것은 어느 쪽에서 지웁니까? 내가 차이를, 이건 못된 차이, 나쁜 차이, 본인이 차이를 없애버리려고 애를 써요. 그래야 계속해서 영광 돌린다고 생각하고. 이미 성령이 와버린 이쪽 사람은 오히려 차이 나는 것에 대해서 주께 감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십자가가 지금도 현재형입니다.”(be동사+ing) 십자가가 지금도, 오직 십자가로만 반복시켜서 이 차이만 계속 벌려놓는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시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양의 문이라는 말은, 나는 문이다, 라는 말은 이 땅에 문은 없다. 아무도 천국 갈 수 있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 기쁜 거예요. 갈 수 없는데 갔잖아요. 왔잖아요. 갈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게 무슨 문이다? 양의 문이다. 양만이 올 수 있어요. 양. 그래서 이쪽 매끈한 쪽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고자 하더라도 전부 다, 우리는 서울에서 온 양, 안양에서 온 양, 뭐 온 양인데, 뭐 피켓은 들었는데 아무도 못 들어가요. 말씀대로, 말씀대로만 했다고, 주여, 우리는 양이오니 문을 열어주옵소서, 라고 해도 안 열어줘요. 문은 우리 쪽에서 열 수가 없어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의도가 강렬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고자 한다면 무슨 요소가 빠져버리는 겁니까? 오늘 마가복음 15장 3절, 4절의 요소가 빠져버리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고소당했다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이건 빠져버린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없어요. 반드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요소가 있어야 되고, 그 자리는 비어버린 공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찾아와서 우리 자신 안에서 이 십자가를 반복시키는 하늘나라를 형성시키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예가 사도바울의 편지 같은데 많이 나와 있어요.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 왔잖아요. 천국을 보고 왔죠. 만약에 천국을 갔다가 온 사도바울이 있다면, 우리는 사도바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기에 코끼리가 있던가요? 없던가요? 혹시 천국 가니까 이근호 목사가 있던가요? 없던가요? 그렇게 남이 사도바울에게 묻는 것이 바로 본인이 본인에게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궁금하다는 말은, 왜 궁금하냐 하면은 본인이 본인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책임자는 주님인데, 여전히 책임자는 나이고 싶어 해요. 주님이고 싶은 것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본디오 빌라도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유대인들은 안 되잖아요. 그럼 우리가 지금 가면 지옥 가잖아요, 라고 하는데, 유지된다는 말은, 구원은 뭐냐 하면은 그 유지되는 것이 정체를 드러내는 거죠. 한 꺼풀, 두 꺼풀 뭐로? 말씀으로. 왜? 이것도 법이니까. 법이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버림받은 것이 주어지게 되면 이 법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뭐로 드러납니까? 비로소, 아, 이 본디오 빌라도나 이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욕할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욕해야 되겠구나!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던 사람들입니까?
한번 물어봅시다. 여기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직업이 있어요? 없어요? 직업이 있어요. 인간 대 인간 세계에서는 각자 남한테 인정받는 어떤 할 일이 있고. 빌라도의 직업이 뭡니까? 총독이죠. 총독이 일이 있다고요. 그런데 여기 1절에서 빌라도가 묻되 뭐라고 묻습니까? 니가 유대인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왕이냐, 라고 묻죠. 그러니까 구약성경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구약성경에서 왕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세계에서, 범죄 한 인간세계에서 왕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있느냐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 9장.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또 한 사람은 요담이 등장해요. 이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9장 8절에 보면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9절,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그러니까 감람나무를 보고 나무들이 가서 왕이 되라고 하니까, 감람나무가 하는 말이 나는 왕이 되지 않고 나는 감람나무로서 그게 족하다. 이래 이야기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감람나무라는 하나의 직업이 되고, 이 감람나무가 직업이 된다는 말은 왕도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직업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직업이 있어요? 없어요? 혁명가는 직업이 없어요. 왜? 다른 세계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쪽 기존세계의 왕이 아니고 다른 세계기 때문에, 기존세계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재판은 그 재판이었어요. 사람들이 왕을 얻고자 하는 것은 왕을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왕 당신을 왕으로 인정해줄 테니까, 그 다음에 나온 말이에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나를 하나의 직업이 있는,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 인정해주는 조건하에 내가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줄게.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세계에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기 나름이죠. 여룹바알이라는 아비멜렉, 기드온의 아들이죠. 사사기 9장 1절에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2절,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몇 명이 왔느냐, 칠십 명이죠. 5절에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죽였는데 하나를 놓쳤어요. 누구냐 하면은 요담, 요담을 놓친 거예요. 그 요담이 아비멜렉 보고 아주 왕이 되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형제들을 다 죽인 이 나쁜 놈아!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에게 저주가 임하게 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한 예가 나무들의 이야기에요. 감람나무보고 왕이 되라고 하는데 감람나무는 거부했죠.
10절에,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1절에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왕이 되지 않겠다. 그 다음에 뭡니까? 12절, 13절에 포도나무보고 하니까 포도나무도 거절했죠. 14절, 15절에 거절하고 거절하니까, 결국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가시나무에게 하니까 좋다고 왕이 돼서, 가시나무가 설쳐대면 다른 나무들에게 찔리잖아요. 피해를 주죠. 그게 누구냐? 바로 아비멜렉 너다! 이 말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말은 남에게 뭘 준다? 피해를 준다. 이게 뭐냐 하면은 왕이 없는 사사시대의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번 수련회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야 하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은 말이 좋아서 우리 지도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지도자가 누가 지도자에요? 인간은 지도자를 만들지 않고 이미 누가 확정되었어요? 나의 지도자는. 나에요. 그 나가 문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나가. 인간세계에서.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마음이 내가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 어린아이부터 당회장까지 전부 다 내가 주인공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주인공이다. 뭐 예수님 욕하고 예수님 십자가 유리창 깨고 필요 없어요.
그냥 살면 그게 죄예요. 왜? 그냥 맹탕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집구석에서 내가 왕이다. 물론 부인이 있으면 왕이 못되잖아요. 근데 부인은 성경공부 하러 갔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만끽하는 거예요. 내가 왕이라는 것을 만끽하는 거예요.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제 코로나 때문에 직장 못가서 아내가 이렇게 오게 되면 남편들은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죽습니다. 왕노릇을 제대로 못하게 되니까.
사사기 9장, 제일 마지막에 봅시다. 9장 57절,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이게 세겜사람들이 왜냐하면 세겜 사람들이 요담을 꼬질른 거예요. 여룹바알 아비멜렉이 그런 짓해도 한패 먹고서 요담이 당신을 배신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요담이 저주를 한 겁니다. 사사기에서 하는 말은 인간세계에서는 왕이 필요 있다, 없다? 왕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어차피 전부 다 개개인이 왕 짓을 하고 있는데 무슨 왕이 또 필요하냐는 식으로, 나무의 왕 뽑기라는 비유를 요담이 사용한 겁니다. 얼마나 요담이 인간에 대해서, 물론 하나님이 계시겠지만,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명확하게 알았습니까?
인간이 왕을 섬기지만 절대로 섬지기 않습니다. 섬기는 척을 하지만 섬기지 않아요. 이미 인간은 자기를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자, 내 이름이냐 아니면 주의 이름이냐는 그 전투가 내 안에서 이미 시작이 됐고 또 주님께서 그걸 의도했어요. 내가 빌라도가 총독으로 천하를 다스려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빌라도가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이 답변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가지를 해도 답변을 안 하죠. 답변을 할 필요가 없어요. 지는 지금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데 뭐라고 답변을 하겠습니까? 니는 나를 그냥 죽이면 돼. 죽이면 된다고. 그게 니가 스스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하는 그 모든 시도와 행함의 끝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이었다. 니가 죄를 지으려고 노력하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그냥 조용하게 도 닦고 살든, 어떤 식이든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에 의해서 죽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차이를 발견하는 거예요. 아, 우리는 주님을 죽이는데 그 어떤 책임을 내가 스스로에게 질 필요가 없다. 왜? 그게 주님의 길트임이니까. 갑자기 제목을 길트임이라고 하고 싶어요. 이렇게 도랑을 내거든요. 없는데 도랑을 내어가지고 성령께서 그 도랑을 따라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놀랍게도 창세전부터 미리 의도된 것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 알게 되었으니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만 찾아오는 길만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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