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522a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6절입니다.
6절,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7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절,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9절,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 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거기까지 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살인사건이죠. 살인사건이 있어서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어요. 이상한 살인사건이에요. 죽은 분은 있거든요. 예수님이. 그런데 죽인 자가 없어요. 죽인 자를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는데,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인 사람이 없어요. 아이히만(유대인 대학살 전범), 본인은 내가 안 죽였다는 거예요. 자기는 가스냄새도 못 맡으니까. 가스실 근처도 안 갔다는 거죠. 자기는 앉아서 결재했기 때문에. 측정할 수가 없어요.
그럴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연루’되었다. 연루됐다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분위기상, 우~~ 하는 식으로 그냥 한 사람을 죽였다, 라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살인사건이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죽인 자를 이렇게 딱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없게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기 때문에. 죄! 인간이 아니고. 죄가 예수님을 죽여야 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은 죄가 죄 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죽음을 유발했다. 스스로 자기 죽음을 유발하신 거예요.
그러면 죽인 것이 죄가 된다면, 죽임을 유발한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의가 돼버려요. 의가 되고, 이게 생명이 돼버립니다. 죽음을 유발한 것 또는 죄를 유발한 것은 의가 되는 거예요. 의의 역할은 죄를 유발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실증에 대해서, 실상에 대해서 필히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은 죽음이 개입돼야 돼요. 죽음이 개입되게 되면, 죽음이 개입됐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우물에다가, 이런 우물이 있는데 두 사람을 깊은 우물에 집어넣었다고 합시다. 집어넣었을 때, 둘 다 우물바닥에 떨어지면 죽게 되죠. 죽게 되는데, 떨어진 지점이 A지점이 있고 B지점을 따로 구분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죽음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내가 A지점에 떨어질지 B지점에 떨어질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예가 바로 다니엘 때에 있었죠. 바사나라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습니다. 사자굴이니까 그게 죽음의 굴이죠. 죽음의 굴에 떨어졌는데 다니엘은 멀쩡하게 살았잖아요. 그리고 그 지점에 다니엘을 모함했던 자들을 집어넣으니까 사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흔적도 없이 뼈까지 다 발라먹었잖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고.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사람의 그 진위, 사람의 그 본질은 뭘 해봐야 안다 이 말입니까? 일단은 죽음을 경유케 해서 A지점인지 B지점인지, 같은 죽음이라도 질이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되게 하나님께서는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예수님만 죽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차이점은 예수님이 죽어서 떨어진 곳은 천국이 되고 부활이 되지만,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이 죽는 그것은 바로 죄가 되고 지옥이 되는 거예요. 죄가 되고 저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처음에 말씀드린 연루라는 이 말이 맞죠? 살인사건에 모든 인간을 여기다 연루를 시킵니다. 주의 방법은. 살인사건, 십자가사건에 연루를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사건을 가지고 점점 더 확대하고 전 영역에, 전 인류사에다가 확대를 시키는 거죠.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느낌은 “나 안 죽였어. 내가 안 죽였어.” 이러죠. “내가 안 죽였어요. 나는 그냥 숨어만 있었지, 나는 안 죽였어요. 나는 착실하게 그냥 농사만 지었지, 예수님 죽인 사건에 가담 안 했습니다.” 이래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마가복음 15장에 그 당시의 빌라도 나오고 유대인 대제사장 나오고 그 다음에 바라바 나오고 예수님 죽이라고 한 그 민중들 나오고 하는데, 이 사람들하고 자기하고는 별개의 속성과 성질을 갖고 있다고 그렇게 오해들을 하는 거예요. 교회 나왔다. 예수님 십자가이야기 들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 ‘아이고, 다행이다. 나는 다행이다. 가담을 안 해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의 의미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살인사건을 모든 인류에게 다 연루시키는 방식이 십자가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루시키는 방법이 뭐냐, 미리 말씀드릴게요. 논리를 말하면 어렵고 복잡하니까. 살인사건, 십자가사건에 연루되는 방법은, 뭐로 하느냐 하면은 말씀으로 연루를 시킵니다. 말씀으로. 말씀으로 연루를 시키죠.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이고, 예수님 참 안 됐어. 그 당시 사람들이 참 못됐어. 그 착한 예수를 왜 죽였어?”라고, 이 말을 한다는 말은 나는 빼 달라, 나는 그 살인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세계 전체가, 어려운 단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인류전체가 단일신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일신체.
이왕 어려운 거, 뭐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산과 들을 보죠. 여러분들이 산과 들을 볼 때에 일방적으로 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산과 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죠. 거의 없을 거예요.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내가 산과 들을 본다는 것은, 산과 들이 저기 있음을 나의 신체가 느끼는 세계관에 편입시키는 계기가 돼요. 산과 들을. “가만히 있어봐라. 저 산은 내가 어디서 많이 본 산이야. 맞아! 맞아! 작년에 어디에 가서 저 비슷한 산을 봤어.” 봤다면, 작년에 경상도 어디에 가서 봤다는 그 산을 보면, 산은 그대로 있고 내 몸에, 사실은 보는 순간 내 현실관에 내가 봤던 경상도 그 산은 이미 포함이 되어 있어요. 세상이 나의 세계, 나의 현실이 되는 거예요. 나의 현실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고향이 있다가 서울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명절이 돼서 고향집에 왔는데 고향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그리고 자기 방 여전히 그대로 있고,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썼던 책상, 고물라디오까지, 베개까지 그대로 있다면, 그 방에서 한 이틀 밤이나 한 일주일을 자게 된다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과거의 일상이 새록새록 생각이 날 겁니다. 왜? 자기가 어릴 때 봤던 그 배치들이 그대로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만약에 금상첨화처럼 친구를 만났다. 그러면 친구 만났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옛날이야기를 하겠죠.
그러면 그 세팅이 다 되는 거예요. 그리고 고향에 와서 그동안 못 봤던 외삼촌을 보게 되면, 외삼촌을 보는 순간 자기의 현실과 인생관은 과거와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다시 아는 겁니다. “아이고, 야야! 너 많이 컸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래요. 외삼촌 저 기억나요. 외삼촌이 저한테 용돈 오 만원 준 거 기억나요. 서울서 성공하라고 준 거 기억나요.” 이렇게 하면서, 어느새 과거와 지금의 현재사이가 전부 다, 현재상태가 하나의 영역을,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하나의 지각적 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상상의 공간을 형성하는 거예요.
공간을 형성하게 되면, 그 공간 전부가 뭐냐 하면은 이게 자기세계에요. 자기세계. 신체는 아니지만, 자기 신체성이 적용되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외삼촌을 봤지만, 그럼 나만 일방적으로 봅니까? 외삼촌은? 외삼촌도 또 나를 본 거예요. “아이고, 서울에서 온 조카를 만났는데...” 하고서 자기 집에 가서 또 내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아담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서로 통하는 것. 이게 만남인데요. 만나는 순간, 만났던 그 모든 기억들이 취소가 안 돼요. 만났으면 그건 또 하나의 내 신체성 확장, 내 영역의 확장, 여기에 다 해당이 되고 하나의 거기에 자료가 되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은 듣기는 참 쉽지만 이야기하기는 참 어려워요. 왜냐 하면은, 내 손을 볼 때 우리는 내 손이라고 보잖아요. 내 손을 보는데 똑같은 비슷한 손이 있다면 이것이 내 손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죠? 참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뒷짐 지고 이래 있는데, 보니까 내 손하고 똑같은 손이 있다면 이게 내 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죠. 이 근처에 있으면 이게 내 손일 것이라는 생각을 확장하는데, 이게 확장이라고 하는데, 나의 신체성의 확장. 그리고 학생들이 바지를 입다가 치마를 입고 앉아있는데 어떤 어른이 지나가다가 밟고 지나가면 마치 뭘 밟은 것 같으냐 하면은 내 몸의 일부를 밟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왜냐, 치마를 입은 그 면적자체가 내 신체성의 확장이에요. 내 몸의 연장이에요. 내 몸의 연장. 그것은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어디에 이용하느냐 하면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족족 나라는 것을 확장시키는 용도로 전부 다 이걸 집결시키고 모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아는 친척을 친구가 욕하면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그 친척을 알기 때문에 또 내 몸이 확장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사실을 평소에 무심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서로 통하는 사이 같으면 같은 신체라고 하죠. 같은 신체. 같은 영역, 공간. 신체 공간. 인류전체가 단일신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인류전체가.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나는 구경도 못했어요.”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아담이.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나는 십자가에 안 죽였어요.”라고 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죽인 그 사람의 심정과, 계속 그 현장에 있다면 같은 심정이고 같이 대대로 통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바라바이야기 나오고, 죽여야 될 바라바를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죽임에 넘기는 사건은 결국은 모든 인간은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말씀으로 연루된 게 아니고, 인간이 살아있는 그 신체가 개인적 신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누굴 통해서? 예수님 한분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이 되는 거예요. 이 예수에 대해서, 이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이 질문을 통해서 결국 너희들은, 너희들 따로 논다는 사실. 그것도 한통속이 되어서 따로 논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 놓고, 다른 사람 놓고 “너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이래 묻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면 질문이 이렇게 바뀝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너희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새로운 질문지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새로운 질문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죽이시거든요. 하나님은 죽은 아들만 만나요. 아들이 안 죽으면 안 만납니다. 만약에 이런 경우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아이고, 죽을 뻔했는데 왔습니다. 아버지!” 그러면 문 닫아놓고 “나는 그런 아들 둔 적 없다.” 그렇게 될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셔야 아들다워요. 죽으셔야 아들답다고요.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라는 그 신체와 그 외의 모든 신체가 서로 대표신체로서 대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개인적인, 자립적인 어떤 신체를, 유기체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생각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같은 신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살인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살인사건에 연루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신체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대한 계시, 십자가에 대한 적용, 이걸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를 적용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적용하는 거예요. 죽음을 적용.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은 인자다, 인자라는 내용 속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모르니까, 살아있는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게 아니고 이 죽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묻죠.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가 1년만인가, 반대 글을 접했습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설교 유튜브에 댓글이 달렸는데, 하비루 라는 사람이 단 댓글인데, “교회오빠라는 영화의 평을 쓴 걸 보고 참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사람을 죄인이라고 구분할 수가 있느냐, 죄냐, 의냐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당신이 뭔데 저 사람은 죄다, 아니다, 이건 선이다, 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만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은 죄인이다, 아니다, 라는 판정을 내리지 말라.”라는 식으로 글을 써놨어요.
그래서 아이고, 참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해가지고 아주 길게 댓글을 달아줬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 사람이 죄라고 한 게 아니고, 죄가 이것이라고 한 것이다. 죄가 이것이다. 그 사람을 찍어서 죄라고 한 게 아니고 죄가 이런 경우들을, 이런 현상들을 남긴다. 죄가. 그리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입 다물라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십자가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만 그게 복음이다. 하나님만이 그것을 아시고 인간은 겸손하게 푹 죽고 아무소리하지 말자. 되게 겸손해보이지만 이런 것은 이슬람교나 유대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신론 철학에서 하는 것이고 신학에서 그런 소리하는 것이지, 그래서 끝에 신학 하는 것이 이단이다.” 그렇게 해놨는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십자가 죽음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다음에 모든 복음적인 말씀을 던지는 겁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가 사건에 모든 인간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영을 안 받은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은, 나의 지금 신앙은 제대로인가? 옳은가? 그걸 살피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살피다가 교회오빠 평을 보면서, 제가 교회오빠 평을 다시 봤어요.
영화 내용 그대로 썼고, 평을 달기를 인간은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죽어가면서도 자기 잘난 체를 한다. 그런 식으로 썼는데. 그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가 지금 암 4기 걸려서 죽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지적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뜻인 것 같아요. 제가 속으로 부아가 나서, 죽음이 유세라. 죽음이 유세야. 암 4기가 아주 유세를 떨어요. 유세를. 뭐 죽는 게 자랑거리입니까? 뭐 죽으면 동정해야 돼요? 참 얼마나 이 세상이...,
그 이야기가 지금 이 대목하고 적합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바라바라는 죄인이 있다 칩시다. 바라바가 죄인이에요. 군중들, 대제사장들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도 계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계신데, 전부 다 이 바라바, 빌라도, 군중들, 대제사장들, 전부 다 한통속이잖아요. 한통속. 한통속인데, 그들이 비겁하게 뭐라고 호응하느냐 하면은 바라바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바라바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면 자동적으로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의인이 되죠. 그러니까 나보고, “당신은 교회오빠 그 병든 사람보고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판정하는 당신은 잘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죄인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니는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지적하는 그 사람이 평소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존재냐? 그거 확인차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거 확인하려고. 내가 과연 신자가 맞는가? 누가 내 사상하고 같은가? 그거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관심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 당시에 빌라도나 이 사람들이 성질 더러워서, 나빠서 죽였지. 나는, 나 같으면 안 죽인다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은,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에요.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라. 모든 인간은 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걸 모르게 되면.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연루되어 있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은 바라바를 죄인으로 조치해서, 바라바 조치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바라바를 죽이겠다고 빌라도가 이야기를 했죠. 죽음이잖아요. 죽음. 죽음이죠. 근데 인간들은 이 바라바를 죽임으로서 자기들은 안 죽을 권한이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죽음에 뛰어들게 했죠. 이 죽음에 뛰어들게 했습니다. 물론 본디오 빌라도는 빼줄라고 했지만, 대제사장들이 거기에 반대를 해서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이 죽음의 사형장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을 A라는 죽음이라고 합시다. 이 사람의 죽음을 B라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A라는 죽음이 들어옴으로서 이 B라는 죽음은 어떤 죽음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그 죽음과 같지 않는 죽음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되살아남으로서 이게 나중에 증명이 될 거예요. 바라바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아니죠.
죽음에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이 대제사장이나 빌라도나 민중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다시 말해서 이 바라바의 죽음에 하나님께서는 이 민중들과 바라바를 죽이고 살리는 이 결정권에 그들이 다 연루되게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이 바라바라는 사형식에서 연루되게 한 겁니다. 빌라도는 “바라바가 죽어야 될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짜 살인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어야 될 사람이다. 거기에 대해서 너희가 동의하지?” 그러한 죄의식과 죄에 대한 죽음, 사형이라는 의식에 대해서 전부 다 이점에 대해서는 의의가 없어요. 사람을 살인했으니까. 사람을 죽였으니까. 어떤 명분이든 관계가 없이 죽였으니까, 법에 의해서 죽는 것은 마땅하다. 그 인간들의 마땅함에다가 예수님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이들이 이런 자는 죄인이며,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 의식을 그대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들어옴으로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으로서 도리어 여기에 연루된 인류 전체를 심판해버린 거예요. “너희들의 죄인식과 그리고 죄에 대한 처벌인식이 과연 옳은가를 내가 보여줄게.” 들어와 버린 겁니다. 들어올 때 말로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어떤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은 이 예수님 사형 당하심 이 자리가 ‘예수님+모든 인간들’ 합쳐서 이게 무슨 자리가 되느냐 하면은 ‘죽음의 실재화’, 죽음의 자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라고 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고 죽을 이유가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루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삼일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생명이죠. 사흘 만에 살아나셨으니까. 이거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생명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이 된다면 이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 생명이 아니고 그 자체가 생명이 될 수 없는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사형장에다가 아버지께서 의도적으로 성령으로 예수님을 집어넣으시는 이유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온다는 것은, 이건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끊어져있어요.
그러면 인간들이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죽음의 자기 확대죠. 확산. 죽음의 자기확산. 자기번식. 죽음이 번식이에요. 죽음이 죽음을 낳고 죽음이 죽음을 낳고 계속 죽는 거예요. 계속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생명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끊어져 있는 겁니다. 생명과는 끊어져있어요. 그 이유가, 사람들은 이렇게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태어나 늙어 죽고 하는데, 왜 죽는지를 모르죠.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가담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왜 죽느냐, 왜 죽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생명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필히 죽어야 된다는 그 내막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내막이.
제가 옛날에 알던 우리 외가 쪽에 아는 친척 형님이 있는데 마음씨가 그렇게 고와요. 정말 마음씨가 너무 착하고 성질부리지 않고 온화하고 온순하고. 뭐든지 이렇게 마음씨가 순하고 악하지가 않아요. 얼굴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그런데 그 형님이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우리 친척 동생들한테는 그렇게 인기가 좋고 참 훌륭하신 그런 형님이지만 자기 집안에서는 그렇게 욕을 얻어먹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변변한 돈벌이를 못하는 거예요. 옛날이야기니까, 스물 몇이 돼서 돈벌이를 해야 되는데 돈벌이를 할 줄 모르고 그저 착하기만 한 거예요. 착하기만. 꼭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돈벌이를 할 줄 모르는데 되게 착해. 그런데 그 형님 집안에서는 속이 터지는 거예요. “누가 착하라고 하더냐? 돈을 벌어와! 돈을 벌어와! 그 나이가 돼가지고. 니 밥벌이는 니가 알아서 해야 될 게 아니냐.”
인간들이 나름대로 굉장히 정의롭고 법인식이 강렬하고 사회의 나쁜 죄인을 대번에 뽑아낼 정도로 굉장히 냉철한 그런 정의감과 질서의식이 있어요. 그런데 그래봤자 지옥에 가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봤자 지옥에 가는데. 냉철하고 법적으로 따져가지고 저 사람은 징역 5년이고 4년이라고 낼 줄 아는데, 그래봤자 생명이 아닌데. 그래봤자 생명이 아닌 거예요. 똑같은 선악적인 의식이 다 같이 통하고 있어요. 죽어가는 바라바도 별로 억울하지 않아요. 죽을 각오하고 사람을 죽였으니까. “옳소이다. 판사님. 여기에 동의합니다.” 뭐 이래 되겠죠. 뭐 한통속이니까. 사형당하는 쪽이나 사형시키는 쪽이나 다 한통속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사형시켜놓으니까, 예수님께서는 며칠 만에 부활했다? 3일 만에 부활해버린 거예요. 부활이.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들 세계에서 어떤 윤리도덕이나 관념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아무리 지혜를 끄집어내도, 인간은 죽을 놈이 죽을 판결을 내렸고 죽을 인간이 과학을 만들었고 죽을 인간이 뭐 백신 만든다고 애쓰고 죽을 인간이 뭐 아들 교육한다고 난리고. 교육시켜서 지옥 보내고, 교육해봐야 뭐 전부 다. 그 모든 인간이 한 것이 결국은 본인이 예수님 생명 앞에서 생명이 아님을 폭로시키는 그러한 사항뿐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고 할까요? 대안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십자가사건을 말씀으로 확장, 확대시켜나가는 그 근거가 있어야 되죠. 그 근거가 뭐냐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했습니다. 임신시켰죠. 임신시키고 해산날에 해산했습니다. 자 봅시다. 이 마리아가 있는데 배가 불룩해요. 배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있죠. 자, 예수님이 언제까지 배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배 안에 있다가 배 안에서 알아서 십자가지시고 이러려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역이 이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예수님을 받아야 될 새로운 예수님의 환경이 조성됩니다. 여전히 어려운데요. 여전히 어렵다는 말은 인간세계에 예수님이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한분으로, 하나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고유의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예수님이 활동하면 활동할수록 점점 더 여기서 새롭게 발생이 돼요. 그 대표적인 게 열두 제자들이죠. 어부 된 베드로를 찾아가고. 예수님께서 활동하고 말씀 전하시고, 이게 계시의 확장이고 말씀의 확장인데, 연루시키는 건데, 계속 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자기 신체성의 확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베드로서에 보면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죠. 그러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지만 몸에 함께 있죠. 예수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예수님 본인이 알아서 만드시는 거예요. 만들 때 뭐로 만드는가?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업적과 성과로 일로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나가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점을 안다면, 나 개인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나는 현재 이 세상에, 단일신체죠. 이 세상 자체가 단일신체죠. 해와 달과 별 다 포함해서. 단일신체에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일부. 접두어, plan. 이거는 뭐냐 하면은 사과를 칼로 잘라버리면 단면이 나오잖아요.
나라는 것은 이 전 세계의 일부의 조각이에요. 하나의 피자조각처럼 조각에 불과해요.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은 내거다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알고 지내면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내 일이 아니라도 내 일의 일부로 이게 들어와 있어요.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다면 그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내가 만약에 삼성 라이온스의 야구팀을 응원하다면, 그러면 스포츠를 볼 때 SK나 두산이나 관심이 없어요. 삼성 야구 또 졌나? 또 졌지. 에이, 끄자. 이게 왜 그래요? 벌써 내가 응원하는, 내가 뭔가 관심이 있다는 말은 그게 나의 일부가 되어 있어요. 일부가.
나는 SK팀 별로 안 좋아하고 삼성 좋아한다고 이래 하다가, 만약에 그 SK복장을 한 사람을 미국에 가서 만나보세요. 어! 대한민국 사람. 같이 또 만나죠. 그게 원호에요. 원호. 내가 여기에 있으면 나라는 것이 어디까지 확장이 되느냐 하면은 내가 어릴 때 보는 눈의 한계가 있잖아요. 어릴 때 보는 것. 엄마, 아빠, 동생, 이 정도. 이건 장난감. 그런데 크면, 두 살이 되면 그만큼 원호가 사방으로 커지겠죠. 여섯 살 되면 더 커지겠죠. 일곱 살 되면 스마트 폰 사달라고 더 커지겠죠. 아홉 살 되면 방탄소년단 좋아한다고 맨날 그거만 보고 있겠죠. 열두 살 되면 나는 공부 안 하고 춤 배워달라고 하겠죠. 자꾸 커지다보면 어디까지 커지겠어요? 자기의 역량이 되는 한, 자기가 알 수 있는 것까지 자꾸 커지겠죠.
그런데 이 자식이 어디 딴 데 가서 북한 스파이한테 납치가 되어서 러시아 벌목꾼으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남한 사람인데 러시아에 가서 벌목꾼으로 일하게 되면, 걔가 만약에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걔는 무슨 이야기하겠어요? 남한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은 러시아 아가씨에 대해서, 러시아 풍경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본인의 본 한계만큼의 원호, 그만큼 점점 더 넓어지는 거예요. 이거는 계속해서 확대가 된, 그 확대의 끝을 미리 생각해보게 되면 그 끝은 뭐냐, 이건 공간적으로 그 시대상의 끝만 되겠지만. “내가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의 종교에 대해서 알았다.” 이러면 러시아의 과거 역사까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죠.
그러면 이거는 온 인류가 단일신체라는 것을 본인이 이렇게 증명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증명하면서. 심지어 이런 여행을 안 좋아해도 지금 코앞에 있는 것 그것만 좋아하는 거예요. 재난지원금 얼마 줬나? 나는 60만원. 나는 80만원. 다 썼나? 다 썼어. 뭐에다가? 기름 넣는 것으로 다 썼어. 이 화젯거리는 싱가포르나 일본사람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같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대한민국 사람들하고나 통하는,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한통속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따로 있다? 없다? 내가 따로 없어요. 그냥 우연히 만나면 친구가 되던 원수가 되던 전부 다 우리는 한통속이라는 것을, 같은 아담에 속한 인간이라는 것을 평생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은 연속성이 있으면 분절, 단절 된 적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죽을 때만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배제당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도 새로운 신체공간을 확장시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신체공간을 확장시켜요. 확장시킴으로써 이 예수님의 새로운 이것만이 생명이고 다른 사람은, 본인도 모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살아도 소용이 없고 전부 다 죽음인데, 그냥 숨 끊어져 죽는 게 아니고, 이거는 바로 저주 받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담자, 연루자, 십자가와 연루된, 살인사건과 연루된 범죄인으로 간주되어서 그들은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죠. 이 바라바라는 자는 살인한 사람이죠. 살인했기 때문에 살인의 대가로서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것, 누굴 죽임으로서 이거는 죽어야 마땅하고 죽이는 우리는 살아야 마땅하다는 그들의 이 의식 속에, 주님이 여기에 끼어들게 됩니다. 딱 끼어들죠.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걸 들어보면 아는데 생각하기가 쉽지 않아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먼저 벌여놓아야 개입된다. 이거는 성경 보면 뻔하잖아요. 인간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그게 아니다 하는 식으로 뛰어드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따로 없어요. 인간이 먼저 저질러놓아야 해요. 그걸 하라고 악마로 하여금 일을 벌이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게 하시고. 전부 다 악마하고 짝짝꿍 해가지고 마음대로 하라는 거예요. 해놓고 그 인간이 벌인 일에 뛰어들어요. 뛰어들어서 곡해를 받고 오해를 받는 식으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이걸 뭐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다.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어요.
그래서 유튜브에서 저를 공격한 사람이 죄, 죄 하지 말고 은혜와 사랑을 언급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래 이야기하기로, 저주를 발라놓지 않으면 거기서는, 저주가 발라진 장소가 아니면 은혜도 긍휼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거기에 제가 댓글을 달아놨어요. 저주가 먼저 기정사실이 되어야 돼요.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은 십자가를 알아요. 근데 본인이 죄인이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인이 죄인이 아니에요. 본인이 죄인이 아니고 자꾸 하나님의 일을 받으려고 해요. 자기 쪽에서. 그러나 주님의 일이 들어오게 되게 되면 바로 주님의 일은 나의 일과 연속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걸 우리가.
그걸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는 바라바를 죽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뭘 바랍니까? 바라바 말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죠. 그런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일부러 그런 상황을 조성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좋은가, 안 그러면 재해기금 백만 원이 좋은가? 그냥 재해기금 없이 예수님이 좋은가, 싫은가? 할 때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런데 재해기금 백만 원이 좋은가? 예수님이 좋은가? 이래 나온다고요. 어떤 노래에는 돈보다 친구가 더 좋다는 말도 안 되는 노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일을 만들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만들게 해놓고, 거기에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살인사건이 나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래야 우리가 십자가에 연루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점잖은 우리가 점잖은 주님을 섬기는 것, 이게 얼마나 쉬워요. 문제는 내 쪽에서 예수님을 차버렸다는 그러한 계기가 일어나줘야 그게 제대로 주님이 방문하신 거예요. ‘아이고, 내가 주님 사랑한다고 해놓고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딴 게 있었구나.’ 나는 이 대표신체, 이 세상을, 나를 포함해서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 모든 것, 러시아 역사, 러시아에서 벌목했던 것까지, 나의 고생 많았던 그것을 예수님이야기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그것을 까발려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이거 하는데 우리 한평생이 다 소모가 됩니다. 다 소모돼요.
기어이 모든 인간은, 그 당시 사람들 욕하지 말아야 돼요. 지금이라도 바라바냐, 예수님이냐, 할 때는 너라도 예수님을 차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왜? 타고난 본성이 그렇고, 바라바를 죽여야 자기가 의롭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 아닙니까? 죽을 자를 죽이는 것은 나는 절대로 죽을 자가 아닙니다, 라는 것이 티가 날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거든요. 교회에서 어떤 법을 정하든지. 모든 법이 다 그런 법이에요. 자기의 정당성을,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꼭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이러한 심보.
그러한 심보는 예수님의 생명과 연관 없어요. 관계없습니다. 끊어져있어요. 우리는 아예 생명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끊어져있습니다. 우리는 한통속이에요. 전부 다 아담하고 같은 편이에요. 같은 편이에요. 생각이 다 같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생명을 확장시켰느냐? 그건 뭐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확장시키는 방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살인사건, 죽음사건을 가지고 나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의 차이점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이 있지만 너의 죽음은 부활되지 못하고 죽음이 그냥 죽음이죠. 다니엘이 죽는 것과 다른 사람을 집어넣어 죽는 것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모든 게 차이가 나요.
이렇게 십자가로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머물 곳을 마련하는, 예수님이 새로운 머물 곳 마련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우린 여기서 뭐냐 하면은, 이것도 어려운데요. 보통 십자가 다음에 뭐가 있어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부활부터 먼저 주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 인도하죠. 이 부활을 가지고 부활의 영, 성령을 먼저 받고 난 뒤에 십자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바로 십자가로 가지를 못해요. 왜? 단절되어 있으니까. 단절된 것을 이미 완료된 것을 가지고 우회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생명을 공유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내려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00522b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여기 투명한 유리가 있다고 합시다. 투명한 유리. 투명한 유리가 있고 유리 바깥쪽 여기에 사람들이 여러 명이 서 있다. ABCD.. 여러 명 서있고. 유리 안쪽, 여기 예수님이 계시다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예수님은 따로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따로 자기이야기를 하겠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원숭이하고 인간하고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서로 통하는 사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께 유리막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른다 칩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경만 하죠.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십자가지셨단다. 사흘 만에 부활했단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사흘 만에 부활했다. 승천하셨대. 구름타고 오신대. 그래서? 그걸로 끝나요. 그런데 우리끼리는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유리 바깥 여기에 있는 A가 유리 안 여기에 이렇게 가있어요. 그러면 유리 바깥에 있는 A는 없어지겠죠. 분명히 못 가는데 예수님이 계신 저쪽 세계에 가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에 있는 BCD라는 사람들이 몸짓 발짓으로 물어보게 되죠. 니 어떻게 갔느냐? 이 말이죠. “니 어떻게 갔어?” 혹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나 봐도, 막혀있어서 이게 없어요. 없는데 거기에 가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이런 마술도 없고. 카퍼필드도 아니고. 이거 만리장성 통과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떻게 이게 만리장성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갈 데가 없는데 여기에 가있는 거예요. 이 A가 누구냐 하면은 사도바울입니다. 본인이 전에는 사울이었을 때는 유리 바깥쪽 여기에 있었어요. 있었는데, 아니 유리 안쪽 여기에 가있다니까요. 우째 이런 일이!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가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이쪽으로 건너가는데 실패한다면? 벌써 지옥불이 활활 타들어오고 있어요.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어요. 이거는 지옥이라. 지옥. 지옥이 막 밀려들고 있다면. 근데 뭐 어떤 갈 방법이 있어야죠.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건너갈 수가 있어요? 참 이거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건너갈 수 있는 연속적이 아니고 불연속적이죠. 연속되지 않고 불연속적이죠. 그럼 우리 인간들끼리는 서로 통하니까 연속적이죠. 인간들끼리.
인간들끼리 서로 통한다는 것을 오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전부 다 세 명, 네 명, 열 명이 되도 이거는 뭐냐 하면은 같은 몸이 돼요. 한 몸이에요. 같은 몸으로 엮여져있어요. 인간은 따로따로 되어있지만 따로 된 게 아니고 같은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 할 때 어떻게 죽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었죠. 그때 다윗이 인구조사해가지고 많이 죽었어요. 사무엘하 24장 15절에, 역대상 21장 14절에 보면 칠만 명이 죽었어요. 많이 죽었어요. 많이 죽었거든요. 많이 죽을 때, 이 사람들이 성질이 나빠서 죽었습니까? 아니면 성질 나쁜 사람들만 골라죽였습니까? 아니에요. 한 몸으로 간주해요. 누구의 몸? 다윗과 같은 몸으로, 한 몸으로 간주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따로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따로가 아니고 같은 몸이 돼요. 같은 몸. 남이 한 일도 누가 한 일이다? 내가 한 일로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왜? 어차피 천국에 갈 수 없는 입장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남이 뭐 죄지었다고, 윤리도덕으로 나쁘다고 욕하지 말라고 했죠. 어차피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어차피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잖아요. “그래도 뭐 교회는 안 나가도 자식들한테는 얼마나 잘하는데.” 잘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고. 쇼윈도. 쇼윈도. 가는 길이 없다니까요. 가는 길이 없어요. 믿음으로 못 들어가면 끝나는 거죠. 믿음으로도 안 돼요. 우리 서로 믿자! 믿어봤자 그거는 어디서 나오는가, 내 몸에서 나온 믿음이거든요. 내 몸에서. 행함이거든요. 내 몸에서 나온 행함, 육체의 행함은 절대로 이거는 연속적이지 불연속적인 것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은 반성적이다. 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행동해놓고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반성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반성을 하게 되면 이게 정반합인데, 정반합. 반성을 하게 되면 누구한테 실망을 하더라도 누구한테 다시 기댈 겁니까? 실망한 내가 나에게 다시 기대를 걸어서 다시는 그런 실망스런 행동을 안 하면 될 게 아니냐? 안 해야지. 결국 어디로 소환이 되고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 자신에게 돌아와요. 하늘에다가 침 뱉기에요. 그 침을 뱉어봐야 자기 얼굴에 떨어져서 신종코로나 걸리게 되죠. 이걸 반성적 태도, 행위라고 합니다. 반성적행위.
새벽기도 설교 듣고 뭐 교회 다니고, 전부 다 뭘 하기 위함이다? 반성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관리하기 위해서. 관리해봤자 이 유리벽 이쪽인데. 못 들어가요. 이 유리벽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초월적이라고 합니다. 초월적. 영어로 트랜스trans에 접두어를 붙여서 transcendtal, 뛰어넘는 거예요. 점프하는 것. 어떤 아무런 다리도 없고 사다리도 없고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없는데 그냥 저쪽에 와버린 상태.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런 쪽으로 예수님이 구분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같은 몸을 가지고 열심히 같이 그 사람의 심정에 호소하고, 양심에 호소하고, 연속성이죠. 우리 인간이 반성적으로 해서 바르게 점점 더 나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한 그 결과가 뭐예요? 결과가 주님한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로 자기한테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형시켜도 자기들은 여전히 천국 못 가고 지옥에 간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고 난 뒤에 반성적이 아니고 초월적이 됐잖아요. 예수님이 죽을 때 ‘내가 참 잘못해서 죽었구나.’ “아버지! 다음에는 안 죽게 일 잘하겠습니다.” 이래가지고 부활되었습니까? 성도가 구원받을 때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각오를 하고 반성을 잘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그거는 지옥 갈 사람들이나 그런 짓하지, 천국 가는 사람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벌써 이쪽에 와있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이 와서, 그냥 성령이 오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니까 이래 된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을. 그래서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이랬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십자가 다음에 부활로 보이는데,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실제로 주님이 일할 때는 부활의 영,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바울을 만나듯이, 부활의 영-성령이 와가지고 그 다음에 우리는 어디로 간다?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왜 십자가냐 하면은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구원 같으면 부활이 마감이 돼버려요. 부활되면 다 된 거예요. 얻을 것 다 얻은 거예요. 그러나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개인구원을 위한 성도가 아니라 십자가 주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십자가로 가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유리벽 저쪽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그런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그 방향성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 쪽으로 가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십자가 이거 뒷전이고 어디에 참여하려고 합니까? 멋진 새 생명, 부활의 새 생명에 소유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애를 쓰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아까 배웠으니까 또 써먹으면, 이런 방법은 이게 무슨 적이다? 반성적이다. 반성적. 반성적 인간. 반성적 행위. 제목을 반성적 행위로 할까? 반성적 행위로 나와요. ‘그래, 이거는 믿음이 아니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야지.’ 맨날 똑바로 한대. 똑바로 해도 자기 자신의 점검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채점하고 본인이 점검하고 본인이 시험치고 모의고사 치고 본인이 다 해요. 이거 안 되죠.
이미 구원된 사람은 도대체 내가 이렇게 생뚱맞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몰라요. 보니까, 아, 나의 행함 말고 주님의 행하심이 있다. 그걸 감 잡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예가 사무엘하 21장을 한번 찾아봅시다. 사무엘하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아, 사울의 집에, 다윗은 잘못이 아니에요. 다윗의 전임 왕 사울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삼년 동안 현재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억울한 죽음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광주 5.18이 생각이 나네. 기브온 사람을 죽였습니다.
2절,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히 있으므로 저희 죽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3절,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속죄라는 말이 나오죠. 내가 한 게 아니고 사울 왕이 오버해서 그렇게 한 일인데 어떻게 속죄하겠느냐? 하니까, 4절,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그래서 사울 사람들 가운데서 몇 명을 죽이자고 6절에 나오죠. 사울의 자손 일곱을 죽이니까 가뭄이 그치고, 10절에 보면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졌다. 그리되어 있어요.
자, 이 이야기하고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하고 여러분들이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세요. 어떤 나라에 세자가 있는데 그 세자가 자꾸 시름시름 아픈 거예요. 그래서 나라에서 몰래 유명한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이 딱 하는 말이 “지금 세자한테 원귀가 많이 달라붙었는데, 그 원귀가 억울함을 풀겠다고 세자의 꿈에 자꾸 나타나니까, 세자가 그 원귀 때문에 잠을 못자고 지금 시름시름한데, 그 원귀들을 달래주고, 그 자손들을 달래주고 묘 자리를 옮기시면 다시 세자는 건강해질 겁니다.” “아이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서 그렇게 했더니만 과연 원귀가 없어지고 세자가 건강해졌다. 자, 이 차이점이 뭐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서 부활은 누구의 코스냐 하면은 주님의 코스, 주님이 가신 길이죠. 주님이 죽고 부활하고.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십자가부활이 없는 이유가 인간의 죽음은 지옥으로 가는 죽음이지 십자가로 가는 죽음이 아니에요. 그들은 율법의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이 코스, 언약의 완성코스로 접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유리벽 앞에서 백날 호소하고, “예수님! 저 보이죠? 손들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구원 못해줍니다. 죽어야 될 자가 죽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될 자가 죽기 때문에 못해줘요.
그리고 그 유리벽 앞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을 줘도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면은 그 말씀을 반성적 행위로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 율법을 지키면 더 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 나라에 넣어주겠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초월적이 안 되는 거예요. 초월이라는, 단절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혜택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한 몸이니까. 그러면 이 한 몸에, 인간들은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대표로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죠. 들어왔으면 예수님 육신도 죄 있는 육신과 동일한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언약대로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왜 인간이 천국에 갈 수 없고, 그들은 왜 구원될 자격이 없는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확실하게 보여줬죠. 이게 단절입니다.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있다, 없다? 구원은 없는 거예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했거든요. “분명히 너는 끊어졌다. 끊어진 상태다. 아담이 끊어졌으니까 너도 끊어졌고, 에덴동산에 못 가는 것처럼 너희도 마찬가지야.”라고,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이래 이야기하면 “그럼 에녹은 왜 갔고 엘리야는 왜 갔습니까?” 뭐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것은 말씀의 연루 때문에 그런 것인데. 십자가에서 그 다음에 부활로, 아버지께서 부활로 일으켰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어떤 코스냐 하면은 유리벽 저 안쪽,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 이쪽 자체에서만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리벽 바깥쪽, 이쪽에서는 나도 넣어주세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유리벽 때문에 말도 안 통하지만. 뭐 수화로 할까요? 한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을 손바닥으로 받친 것이 주라는 뜻의 수화예요. 그 받친 손바닥에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을 원 그리듯 돌리면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쪽, 유리벽 안쪽에서는 이쪽 나름대로의 코스가 있는 거예요. 이쪽 나름대로의 코스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모두 한통속인 것처럼, 여기 예수님과 천국에 있는 모든 자도 예수님의 몸의 한통속이다. 몸의 같은 신체가 되는 거예요. 같은 몸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처럼,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볼 것은 이 엘리야와 모세 사이의 예수님과 뭐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면 되죠. 뭐로 연결되어 있는가, 이것은 제가 아까 말씀이라고 했고,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는 언약이 있는데, 이 언약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의권, 자기 스스로 선택한 사람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돼요.
아버지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뜻이거든요. 아버지께서 심판권을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 심판하셔도 돼요. 되지만, 예수님께서 택한 자, 원하는 자를 따로 뽑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인물을 보고 뽑느냐, 인물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이미 예수님과 관련된 자들이 있어요. 예수님과 관련된 자.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이야기하는 다윗입니다. 이미 다윗이 통치하고 있는 통치성을 발휘해요. 뭐냐 하면은 사울 때, 다윗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사울이 한 짓이거든요. 그래서 사울에게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사울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라고요.
이미 사울은 죽었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들게 하느냐? “기브온 사람들아! 과거는 과거다. 니가 죽든 말든 한때 억울했다.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잊어라!” 이러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3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 식으로 다윗에게 어떤 행위, 행동으로 나서기를 촉구하는 그 이유가 뭐냐, 다윗이 그만한 권한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거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긍휼로 “너! 우리 천국에 와!” 하고 불러내는 것처럼.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권한이 있을 때, 기브온 사람이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은을 요구했어요? 금을 요구했어요? 뭐 소녀상 세워달라고 했어요? 뭘 해달라고 했어요? 죽음이죠. 죽음. 사울의 자손들 일곱 명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죽음이라는 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장차 올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복수성, 보복성이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해서 그 택함의 취지를 모르고 함부로 굴었던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윗은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기어이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살인사건에 연루된 자를 그냥 묵과하지 않겠다. 그냥 못 본 체로 쉬쉬하고 넘어가지 않겠다. 반드시 보복하고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주되심이에요. 그게 만군의 하나님이고.
그러면 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결국 뭐냐 하면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정신이 어디에 팔렸습니까? 같은 동질들, 같은 패들, 같은 한통속인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단합하고,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고, 통하는 게 많다고, 그 일 하기에 지금 바쁘잖아요. 바쁘죠. 어떤 남녀가 결혼식 할 때, “우리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 연구하세.” 이래가지고 결혼식 하는 것 봤습니까? 어떤 주례선생님이 주례하기를 “이제 너희들은 십자가연구하면 된다. 딴 거 할 거 없어.” 이래가지고 주례 끝. 이렇게 하는 주례 봤습니까? 그렇게 하면 주례보고서 뷔페권도 못 얻어요.
적을게요.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나왔는데, 뭐냐 하면은 ‘인간은 인간의, 본인이 하는 그 일로 망한다.’ 본인이 열심히 하는 그 일이 결국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복수당하는 짓거리를 계속 축적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찾고 있는 겁니다. “나는 교회에 관심이 없어. 나는 교회 다녀도 왔다갔다만 하지 말씀에 관심이 없어.”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지만, 사실은 본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계속해서, 축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로마서 1장에서는 그게 뭐냐 저주를 쌓는다. 애들이 레고 쌓고, 쌓고 쌓으면서 놀죠. 계속 쌓아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나이가 80이 됐는데도, 80가지고 싸우고 어떤 사람은 90을 자랑하네. 무게가 더 나가. 자기 망하는 지옥 가는 짓을 더하기에다 더 곱하기 더 제곱으로 계속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n제곱방? n제곱방이 아니고 그걸 비난하고 판결내리는 판사 니도 마찬가지다. 전부 다. 다 마찬가지에요. 자꾸 인간이 단합하려고 하고 하나가 되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 가정은 화목하기. 화목해서 뭐하는데? 뭐 할 건데? 어차피 화목해봐야 유리벽 바깥에서 노는데요. 아니 누가 누굴 가두는 거예요? 인간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갇혀있다고 보지만 예수님이 보기에는 본인들이 갇혀있어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에 들어갔죠. 불에 들어갔는데, 그 다니엘 세 친구를 불에 집어넣은 느부갓네살 왕은 굉장히 세 친구에 대해서 측은하게 생각해요. 이런 바보 같은 생각. 입장이 누가 누구를 처단할 입장입니까? 누가 누구 걱정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는 불에 가서 안 타 죽었잖아요. 자, 불에 들어가도 안 타 죽는 게 낫습니까? 불 겁내는 게 낫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아니, 군에 갔다 군 제대한 사람이 낫습니까? 군에 안 가고 벌벌 떠는 사람이 낫습니까? 이미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 낫잖아요. 반성적 행위에서 이미 제대를 한 사람이 최고 아닙니까? 그게. 최고거든요.
반성적 행위에서 초월적으로 벗어난 거예요. 누구 덕입니까? 다윗 같은 주님,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거든요.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되풀이 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걸 완성시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다윗에게 일어난 그 자의적, 자발적인 그리고 본인이 그 의사에 의해서 일어난 그 결정처럼, 예수님께서도 자기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다 건져냅니다. 오죽했으면 어린양이라고 자기 이름부터 새겨놓고, 그 이름에 맞춰서 우리를 끄집어내시거든요.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주님한테 선택받고 싶어요! 하는데, 선택받고 싶다고 하지 말고 니가 지금 달리는 길이 어디냐는 거예요.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보이는 쪽으로. 뭐 인간은 누굴 판정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 판정한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오냐, 니 겸손하다는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아보니까 어떤 인간도 대단한 인간이 없다. 그게 복음이에요? 아니잖아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면 되는데.
원귀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묘 자리를 옮겨라. 자, 여기서 차이점은? 원귀들이 나타났으니까 묘 자리를 옮기라는 이 이야기하고 아까 사무엘하 21장에서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것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다윗의 이야기에는 뭐가 개입이 되었느냐 하면은 죽음이 개입되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묘 자리 옮기는 것이고. 이거는 위로받게 해주는 거예요. 위로받게. 달래주는 거예요. 이거는 달래주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실제로 가뭄이 들었다 이 말이죠.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도 뭐 원귀가 많아서 비가 안 온다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속성을, 백성과 왕이 한 몸이 되겠다는 연속성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거는 철저하게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적이에요. 기브온 사람이 그렇게 나선 것도, 다윗도 억울한 사람을 그렇게 찾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시그널을 보내줬잖아요.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했고, 기도를 해보니까 “니가 나서서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정당한 죽음으로 심판을 해버려라.” “왜요?” “니가 그만한 권한이 있다.” 다윗의 자리가 그러한 자리거든요.
다윗의 자리가 그런 자리라면 우리 주님의 자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됩니까? 다윗의 자리에, 이 유리벽 저쪽의 사이의 연속성가지고 설명을 해야 돼요. 언약적 연속성. 다윗의 자리가 죽음을 명령할 권한이 있다면, 그 다윗의 자리를 이어받은 예수님도 지옥 보낼 자와 천국 보낼 자를 임의로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얼마든지 그럴 권한이 있고, 오직 그런 권한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고 구원이 안 되고 결정되는 겁니다.
결국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이 유리벽 바깥쪽에 있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구원을 요청할 권한이 있다, 없다? 구원을 요청할 권한이 없는 거예요. 아니, 성경을 볼 자유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보든 교회를 다니든 그건 니 맘대로 하세요. 해봐야 그거는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죠. 왜 갑자기 이게 제목으로 하고 싶지. 뭐, 몸부림치고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기도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려고 해서 듣는 게 아니고 고함지르니까 들리죠. 들어보게 되면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구원해달라는 거. 아이고, 참 기가차서. 심지어 꼬마 애까지. “코로나바이러스 악한 마귀가 돌아다녀요.” 그거 이창섭 목사님이 올려놨죠. 십자가마을에. “악한 마귀가 돌아다녀요. 빨리 교회에 가서 모이게 해주세요.” 막 이래요.
그렇게 기도해놓고 막상 바라바는 살리고. 막상 현장에서 예수님이 오니까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라고 했죠.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유리벽 앞쪽에 있는 그 성질이 어디에 갑니까? 그대로 유감없이 발휘해요. 유감없이. 앞쪽에.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쪽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천당에 가고 싶어도 막상 하나님께서 조치한 것은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을 딱 들이밀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제키고 내 귀한 것이 손상되지 않으려고, 내 귀한 것이 뭐냐, 나의 의로움. 나의 의로움과 나의 정당성, 나의 옳음, 여기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우리는 버티고 있다. 이 나의 의로움과 나의 옳음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숱한 친구를 사귀고 있으며, 그들과 헤어질 마음은 조금도 없는 거예요.
부부로 둘이 결혼을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의 의로움이죠. 이쪽 신랑도 나의 의로움이죠. 자,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됐다. 둘이 합쳐서 하는 짓거리가 뭡니까? 나에서 어디로 바뀝니까? 우리의 의로움이에요. 거기다가 자식을 낳았다. 우리 새끼 의로움이죠. 딴 자식은 다 죽어도 내 자식만큼은 안 된다. 딴 자식은 스쿨존에 깔려죽어도 내 자식이 스쿨존에 깔려죽으면 나는 법까지 만들 거야. 민식이법. 법도 만들고 7억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누가 압력 넣을지. 보상보험금도 7억 요구하고.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게 뭐냐 하면은, 왜 그래야 되는지 물으면 “나는 정당하니까. 나는 의롭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는 이 말이 결국 나에서 뭐로 뭉치게 해요? 나에서 우리게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부부싸움은 전부 다 우리 내부에 있는 나의 의로움 때문에 하는 거고. 이 부부싸움에 남들이 개입하면 갑자기 나에서 하나가 되죠. 다섯 개로 있었던 그 분체가 갑자기 지구에 적이 오게 되면 크로스해가지고 독수리오형제가 하나로 뭉치잖아요. 자기들끼리 싸웠다가 갑자기 적들이 오면 같이 온 식구가 하나가 되어가지고. 자신의 정당성이에요. 자기정당성뿐입니다. 이건.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인간이 사는 것은 남 깔보기 위해서라고. 깔보기 위해서 사는 이 원칙은, 진짜 육이 있는 한 영원합니다. 우리 애국가 가사를 바꿔야 돼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을 깔보기 위한 쾌감은 영원하리라. 영원한 거예요. 왜,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돼요? 왜, 우리나라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나라만 정당하기 때문에. 그걸 확장하게 되면 아시아인은 정당하기 때문에. 모든 게 이미 단일신체에요. 단일신체. 신체가 나 하나가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체에요.
하나의 신체가 바라바를 살린 겁니다. 바라바를 살린 거예요. 단일신체가. 바라바야! 너는 내편이지만 누구는 내편이 아니다? 저 예수는 우리 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잘했다. 그렇지! 그렇지!” 이렇게 완벽하게 인간과 주님이 단절돼줘야, 주님의 구원이요, 온전히 주님의 자의에 의한 구원으로만 이게 귀결되게 부합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가 악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음이,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라고 한 그 말도 주께서는 그걸 믿겠습니까? 베드로의 말, 그 객기를 안 믿죠. 믿을 리가 있습니까? 안 믿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만,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이죠. 시몬의 티를 다 냈잖아요. 결국은. “나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한다고.” 역시 유리벽 바깥쪽 사람이에요. 열두 제자조차도 이쪽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어떻게 감히 따라가요? 아무도 못 따라가요. 주께서 따라온다고 해도 오지마라고 했어요. 십자가는 나 혼자 가는 길이지, 너희들이 우르르 따라올 길이 아니라 이 말이죠. 니가 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따라오기는 어딜 따라와요? 못 따라와요.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이, 예수님의 몸은 죄인의 몸으로 왔지만 이 몸이 인간 몸에 섞이지 않은 다른 초월적인 몸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부활한 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언약의 완성된 몸은 우리가 만지지 못해요. 같은 몸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만지지 못해요. 부활의 몸은. 그래서 우리의 육체 이거는 우리가 일찌감치 포기를 하셔야 해요. 이 몸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몸이 아픈 것도 뭐라고 했습니까? 아픈 것도 사명이에요. 몸이 아픈 게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픈 것도 사명이고 건강한 것도 사명이고.
베드로의 이런 몸은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쌍꺼풀수술해도 좋습니다만. 자기 몸에 대해서, 몸이 아프다고 해서 저주받았다니, 주께서 나를 내치는구나,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주님의 십자가지신 그 몸, 그 몸을 바라보면서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몸이라도, 심지어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 죄악 된 몸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으면 그 몸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중의 몸인 거예요. 사명을. be동사+ing, 사명 감당하는 몸이 바로 내가 죄짓고 있는 몸이에요. 어떤 경우의 몸만? 바로 말씀으로 연루된 몸만. 십자가와 연루된 몸이라면 어떤 몸이라도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지금 현 상황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사도들이 다 건강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아픈 데 없었어요? 뭐 위장도 안 좋고, 뭐 사탄이 준 가시가 있어가지고 세 번이나 빼달라고 요청했고. 그런 대목이 나오죠. 위장이 안 좋아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그 대목도 있고. 아, 그거는 디모데네! 제 몸이 갈수록 이상해져요. 이상하다고 반성하지 마세요. 디모데한테 위장이 안 좋으면 포도주를 마시라 했고. 디모데가 말씀의 사도인 것은 맞지만, 그 몸이 늘 튼튼하고 건강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몸은 건강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몸 자체가 누구와 연루되어 있느냐, 주님과 연루되어 있죠. 그런데 이 세상의 몸 가지고는 이거는 반대로 단절되어 있어요.
아까 유리벽에서 A라는 사람이 엉뚱하게 예수님하고 엘리야, 모세하고 있는 쪽에 있다 이 말이죠. 같이 여기에 있을 때, 유리벽 바깥쪽에 있는 BCD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특히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이에요. BCD, 이쪽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도상에서 잠시 눈 깜빡거리다가 눈뜨고 보니까, 다메섹 가서, 가는 목적지에서 다른 사람이 돼서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다고 증거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많이 다르죠.
그리고 십자가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한통속이며, 우리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루된 범인이라는 사실이 주님에 의해서 폭로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뭐만 이야기해야 돼요? 부활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려 하셨던 말씀이 뭐였던가? 거기에 모든 계시와 모든 복음이 십자가라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뒤따라 그 안에 다 쏠려있는 거예요.
십자가는 바로 단절성이죠. 단절성. 완전히 인간은 끊어져있다 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럼 단절되어 있는 그 세계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얼마나 회개할까요? 이렇게 또 반성적으로 나오지 마시고,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에 봅시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이래 되어 있거든요. 지금 빌라도의 모든 행동이 어떤 행동입니까? 9절에,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절에,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라고 되어 있죠.
빌라도와 그 부인은 꿈자리도 사나웠지만,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한때 예수에 대해 뭐 그렇게 악한 감정이 빌라도한테는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빌라도가, 비록 자기가 그 당시의 총독이면서도 가만히 보면 총독 밑에 있는 일반민중들한테 지금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요렇게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를 문장화시키면 이해가 됩니다. 인간들은 왕을 원한다. 왕. 왕 또는 다른 말로 지도자. 지도자를 원한다. 어떤 지도자? 어떤 왕? 어떤 지도자 어떤 왕을 원하느냐? 우리가 군림할 수 있는 왕. 백성이 오히려 왕보다 더 위에 있는 왕을 인간들은 구하고 있어요. 이게 사사기에 나오는 왕들이죠.
인간들은 왕을 구해요.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 이 말은 왕도 뭐도 우리가 선택하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히려 부려먹을 수 있는 심부름하는 왕을, 지도자를 원하는 거예요. 이거는 모든 인간의 신체, 신체성이 이구동성으로 통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의 신으로 최고의 권한을 누리자. 그래서 빌라도가 있지만 허수아비처럼 큰소리만 꽥꽥 쳤지,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잘하십니다.” 가만히 보니까 벌써 민중들에게 놀아났어. 놀아났어요. 자기는 발 빼려고 꿈에 뭐 이렇게 저렇고 해도 백날해도 뭐 소용이 없어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데 동의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 그들이 놓여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이야기해요. 내가 스스로 죽는다. 다시 말해서 이 단절성, 십자가라는 단절성. 생명은 나의 생명만 생명이지 너희는 죽어도 생명이 아니야, 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 업무에 대해서 내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주께서는 야무지게 일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기어이 너희들이 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죽임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반대자가 없도록, 서로 통하고 한통속이 되니까.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내 죽음과 연관성이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자, 그렇게 되어 있어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올 때 뭘 앞장세웁니까?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것이 말이 되는 거예요. “니 내 죽였잖아.” 그래야 이게 말이 되고 구원이 되고 구원의 내용이 된다고요. 살인자인데 어떻게 구원됐습니까? 라는 말이 서로 통용이 되어야 돼요. 이 유리벽 안에서는. “저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라는 자격으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죠. 우리가 뭘 행합니까? “나는 나의 정당성을 보장하기위해서 예수님도 나는 거절했습니다.”라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이 유리벽 안에서는 자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지옥가도 마땅합니다.”라는 게, 이게 돼야 돼요.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죄인이 바로 접니다.”라고 해야 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한 말이 뭐였습니까? “동업합시다.” 이렇게 한 거예요? 뭐 어떻게 된 거예요? “주여,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떠나소서.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하죠.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이미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은 뭐를 쳐다본다? 십자가를 보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분이 저기 못 박혔고, 그로 인하여, 저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무한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아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모르게 되면 자기가 다소나마 의인인양 여깁니다. 의인이라고 여기니까, 사람은 거기서 짜증지대로가 되죠. 더우면 덥다고 마스크 때문에 짜증나고. 여름에 날씨 덥다고 짜증내고. 습기 찬다고 짜증내고.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사는데 불편하게 되면, 그 불편에 어느 누구라도 탓을 돌려야 속이 시원하잖아요. 누구 탓을 돌려야죠. 그래서 기도라는 방식으로, 교회충성이라는 형식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뭐냐 짜증부리고 있는 거예요.
욥처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래 되어야 하는데, 짜증낼 것 다 짜증부리고 성질낼 것 다 성질부리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자신이 저주받아야만 마땅한 죄인인 것을 깊이 느끼지 못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이렇게 짜증이 나오고. 짜증만 나옵니까? 장래가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고. 망하면 어떻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망하면 어떡하지? 무슨, 망했는데, 벌써 망했는데 망함이 또 있습니까? 이미 망해버렸는데, 뭘 망하면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지? 맨날 어떡하지래. 뭘 어떡해. 예수님 죽여 놓고 뭘 혼자 자기 착한 척하고, 거룩한 척하고, 의로운 척하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연루시키고,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함과 연루된 사람은, 성령을 받아 제대로 죄인 된 사람한테는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자,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여기 바라바는 어떤 입장에 있을까요? 바라바는. 바라바가 구원받았다는 쪽에 있어요. 천주교 쪽에서. 하여튼 그런 것을 잘 지어내요. 바라바는 예수님께 감동받아서 은혜 받고 구원받았다고. 세상에! 감동받아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은 반성적이기 때문에. 초월적이 아니고.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없어야 돼요.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있을 뿐이지, 내 쪽에서 어떤 것 때문에,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이 안돼요. 인간은 반성만 할뿐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반성에서 반성으로, 그걸 정반합이라고 하는데. 옳았다. 아닌 구석이 있었구나. 그걸 개선하게 되면 더 옳겠지. 이렇게 자꾸 정반이 합이 되고, 정1+반=정2가 되는 거예요. 또 그렇게 계속 나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체적인 반성과 자체적인 자기검토와 점검을 위해서 보다 더 진리에 어프로치, 접근하는 것. 이거 외에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바라바의 위상은 뭐냐 하면은, 바라바가 이게 죄인이거든요. 분명히 사람 죽인 죄인이죠. 그러나 이 바라바 역할은 뭐냐, 인간의 죄의 끝은, 인간에게 남을 지적하고 자기가 죄라고 반성하는 것은 결국 반성함으로써 반성하는 본인이 의롭고 제대로 바라바를 처리, 처분했습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전부 다 자기 의로움으로 소환되게 하기 위한, 그러한 빌미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게 바라바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할 때는 반드시 뭘 하느냐, 적을 찾아요. 적을 찾아서 저게 적이라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반대급부로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얻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정치고 정당이에요.
어떤 표를 얻으려면 누구 하나 잡든지, 윤미향을 잡든지 누구 하나 잡아야 돼요. 정의기억연대를 잡든지 누구하나 잡아서 그걸 조져놔야 상대적으로 자기가 의로워지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인간은 자기의 어떤 적을 통해서 반대로 그만큼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뭘 찾게 됩니까? 계속 나쁜 놈들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나쁜 놈들을. 우리 집안은 남편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남편. 이건 내 자식 때문에 그렇고. 전부 다 남 때문에 내 인생 꼬였다는 거예요. 니 때문이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태클을 걸지 마! 진성이 부른 노래. 모든 게 이게 남 탓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교체해서 들어간 바라바. 바라바가 그렇게 인간의 정당성을 위해서 희생물이 됐다면, 그 바라바 자리에 들어갔던 예수님을 인간들이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국 뭐냐, 역시 나는 옳다. 자기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시늉들을 하는 용도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나 잘났죠. 바라바 대용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참 이게, 제가 방금 정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은 정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요. 여기 빌라도나 대제사장들도 모든 처리가 정치적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이렇게 언급하면서 모든 처리를 자기정당성과 자기 잘남으로 귀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인간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역할은 못하더라도 바라바 역할을, 본인이 스스로 바라바라 생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한테 돌을 쳐라. 내가 맞아줄 용의가 있다. 너희들이 얼마든지 잘난 척하고 싶다면 내가 거기에 희생물이 되어주마.” 이거는 뭐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도를 이런 바라바 위치로 이렇게 해줘야 뭐가 드러나는가 하면은 십자가가, 이론의 십자가가 아니라 실제적십자가가. 나 같은 못난 바라바와 예수님이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매일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바가 되게 함으로서, 주님이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그 현장에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쓸데없는 짓거리,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는 옛날이야기고 남의 이야기로 여겼는데, 지금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사오니, 우리가 이 십자가현장에 바라바로 사용되어짐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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