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과 영생
2013년 6월 2일 본문 말씀: 로마서 6:19-23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란 말씀에 위배했을 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말씀이 성취했을 때 주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망이나 영생이나 모두 ‘주어진다’는 방식으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사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 결코 영생얻는 방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어진다’는 것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조치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망과 영생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나 체제에 인간이 함부로 관여하거나 수정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망이나 영생에 있어 이미 정해진 코스가 확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정해진 코스에서 인간은 ‘육신의 연약’이라는 모습으로 관여되게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들 끼리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고, 너는 나와 다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다름에서 오는 개성으로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사회에서의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있어, 복음 앞에서는 인간 앞에 붙는 그 어떤 형용사도 소용없습니다. 즉 ‘재빠른 나’ 혹은 ‘인품좋은 나’ 혹은 ‘성실한 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나’ 같은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서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냥 ‘육신’으로 불리워집니다. 그냥 육신이 아닙니다. ‘연약한 육신’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원래 육신이 약하면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육신은 그냥 육신 자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 )에 약하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악마에 약한 겁니다. 이는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악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됩니다.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도. 기어이 살아남고야 말리라!”라고 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인간들이 결정하거나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게 됩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진짜 하나님의 의와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연약한 육신이 빚어내는 체제 안에서 일방적으로 죽음과 삶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 자체가 악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고 싶은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육신과 영생 사이에 인위적으로 것으로 연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 시도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인류는 죽은 자, 곧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자신의 육신과 연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무당입니다. 무당은 언어를 만든 전문가집단입니다. 이들은 신의 계시를 새겨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므로서 영적 세계까지 언어에 묶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죽은 조상과 산 사람과의 소통은 자기네들 선에서 성사된다고 주장합니다. 죽은 조상신을 뒤집어씌쓰게 되면 죽은 사람의 의지와 뜻을 산 사람에게 전달하고, 산 사람들이 바치는 값진 예물과 제물과 성의는 죽은 세계로 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신도 포획하는 언어는 그 후에 정치적 왕이나 귀족들이 국가 체제를 형성하면서 이 무당의 집무를 그들이 맡게 됩니다.
이로서 무당의 언어는 왕의 신의 아들, 천자의 아들로 간주하는 법으로 전환합니다. 즉 왕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그 법에 백성들이 준수하게 되면 그 나라는 신으로부터 계속해서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되어 번영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서 영생쪽으로 자아를 이동하시는 방식은 ‘보관’의 방식을 동원합니다. 보관이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작물이나 기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보관할 것 속에서 ‘정신’도 담겨 있게 됩니다. 쉽게 깨어지는 그릇에 물고기나 작물이나 사냥 고기 같은 것은 그릇과 더불어 쉽게 해체됩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인간들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보다 딱딱한 그릇이나 단단한 그릇이 발달되면서 정신마저 오래 보관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즉 정신은 법의 정신으로 보관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는 법령과 관습의 후대로의 전달은 곧 정신의 전달과 같은 겁니다.
이것이 국가의 발달성입니다. 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의 성립은 그 안에서 왕으로 정점이 보아지는 세밀하고 치밀한 법체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음을 잠시 잊고 삶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마치 지금의 영생의 세계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바로 이런 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그들은 나라가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 위주의 체제 속에서 신으로부터 뜻과 계시를 왕으로부터 부여받으면서 나랏 살림을 꾸려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친절한 함정’에 빠진 겁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그들이 필히 망해야만 하는 이유를 미리 주신 것입니다.
말씀성취는 결코 그들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생을 갖고 오실 메시아는 그들의 율법 준수 정신으로 말미암아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의로부터의 자유란’ 진짜 의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 그들은 의가 뭔지를 전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의를 모르게 되니 정작 참된 의가 나타나셔도 그들은 그분은 귀신들인 악인이라고 여기고 사형으로서 뒤처리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참 메시아가 오실 때만 고대했습니다. 열차가 오지 않는 대합실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움집해있어도 몽땅 소용없는 짓입니다. 말씀을 성취하기에 필히 영생을 일방적으로 제공해주실 메시아는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영생은 오직 영생받기도 작정한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명받으므로 얻게 됩니다. 이 때 언약완성으로 나타난 영생은 성도의 육신에다 ‘사망에서 영생’이라는 작업을 구현하시면서 바느질하듯이 말씀으로 꿰매게 됩니다. 즉 보관이 아니라 피묻은 바느질을 당하는 자가 곧 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잘남을 보관한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로 누벼져서 모든 것이 말씀이 바늘자국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