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롬7장 1-6(율법과 혼인관계)13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7:1-6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방금 읽은 로마서를 보게 되면 세상에서 보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사람 있고 나무와 꽃들이 있고 동물들만 있으면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하늘의 별이 있고 달이 있고, 그 정도만 하면 그 밖의 다른 세상이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있을 곳은 어디지요? 땅 위에 사람이 있고 하늘에 새가 날고,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있을 곳이 없네요. 하나님을 빼놓고 현실로 간주하는 습성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교인들 모이면 몇 명이 왔느냐, 교회에 의자가 놓여 있고 강대상이 있고 마이크가 놓여 있고 거기에 몇 명이 왔다, 이렇게 되면 거기에 뭔가가 빠져버렸어요. 하나님이 모이게 하셨다는 것, 모이게 하신 분이 그 자리에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왜 빼고 현실로 간주하는지,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가, 7장 1절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 인간이 있고 꽃이 피고 새는 짹짹거리면서 울고 자동차는 씽씽 달리고 있는 이 가운데서 주관하는 것이 없다고 여기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내가 안하고 싶으면 안하면 그만이지 하라 말라, 위에서 주관하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아는 사람한테는 우리가 21세기의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조성한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현실관, 현실성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곳에 만드신 분도 함께 있다는 거예요. 만들어진 곳에 만드신 분이 함께 끼어있으며 “내가 너를 만들었다.”하고 뒤에 그냥 죽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쏘아대는 겁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용변 보고 있다, 거기에 화장실변기가 있고 화장지가 걸려있고 물 내리는 레버가 달려 있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화장실의 현실이 아니고 그 화장실에도 하나님이 계시면서 율법을 가지고 추궁해 들어가는 겁니다. “변 똑바로 봐! 똑바로 싸란 말이야, 응? 바짝 붙어서 오줌을 눠야지 청소하는 사람이 애먹잖아.”이런 식으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만이 아니다.” 이런 문구를 화장실에서 자주 볼 수 있거든요. 사적인 공간이라 여겨지는 곳에도 주님이 함께 있다는 이것이 구약 때부터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현실감이었습니다. 혼자 살든 둘이 살든 항상 이곳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현실을 생각한 겁니다.
해가 진다, 해가 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해가 뜨고 그 해가 진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을 빼놓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서 해가 뜨고 진다는 식으로 생각을 안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7장의 내용을 알려면 1절부터 이 내용을 믿고 수용을 하느냐, 즉 율법이 개입해 있는 이것을 현실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율법이라는 것을 뺀 채 법이라는 것은 없고 이것은 그냥 인간들끼리 협의한 것이고 이것이 현실의 전부고 그 외에는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것부터 언급을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특히 1절에서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여기서 주관한다, 다스린다, 지배한다, 간섭한다, 잔소리한다, 마지막까지 심판으로 결판낸다, 이런 뜻인데 ‘우리가 우리를 주관할 때 어떤 법을 의식해서 그 법을 따라서 행동해야 돼. 왜, 법이 주관하기 때문에.’라는 요소를 집어넣어서 그것을 현실로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이 세상에는 누군가 나를 추궁한다거나 지배하는 요소는 없다, 라는 것을 현실로 볼 것인가부터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하나님은 누가 본 사람이 있나? 아무도 없지. 사람끼리 모인 그것이 현실의 전부야.’ 이렇게 되면 이미 1절부터 들어가지를 못하기에 나머지 2절과 3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성경은 그냥 덮어버려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기 나름이다, 라는 거지요. 학교에서 역사를 안 배워도 이미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율법의 세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셔서 그 법을 줬다는 것이 그 세계거든요. ‘나의 역사는 내가 만들었다. 하나님? 법? 그런 것은 개입한 적이 없어. 내가 알아서 내가 이만큼 내 인생의 찬란한 역사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한다면 하나님이 만든 그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비현실로 간주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2절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법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남편이니 여인이니 남편이 죽으면 다른데 시집가느니, 그런 이야기도 다 짜증스런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1절을 다시 보면 법이 사람을 주관한다는 이것은 어떤 역사에 해당되느냐,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시고 거주하시고 만들었다는 그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진짜 하나님으로 수용하면 우리는 1절의 문턱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은 신을 섬기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만 신이 아니고 다른 민족의 신도 신으로 인정해주자.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는 글로벌화 시대이니 특정신만 신이라 하지 말고 다른 민족의 신도 신으로 간주하자.’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요. 이스라엘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고 다른 민족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돌 판으로 언약으로 계시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계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민족에게 있는 그 신은 뭐냐, 조작된 신이지요.
그들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방인들이라 해서 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을 믿고 있어요. 하지만 그 신은 이스라엘에 나타난 그 신과 대조하고 점검받아야 될 신입니다.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우상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면 그것은 참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치고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이방인이기에. 이미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이방인을 이방인답게 처리했기에 이방인들은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참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를 못합니다.
철학자들의 신을 보게 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고,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풍성하시고, 모든 일을 도와주시고, 어느 곳이든 다 계시는 하나님이 철학자들의 하나님이지요. 그런 것은 보통 민족들에 다 있는 하나님이에요. 세상을 주관하사 가뭄과 비와 번개와 태풍도 주관하셔서 뭔가 비가 안 온다 하면 왕이나 세자가 나서서 기우제를 드려야 돼요. 값비싼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릴 때에 그것을 구경하던 아주 가난한 농부가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신에게 그렇게 바친다고 비가 오나?” 나무라니까 세자가 탁 보더니 “그렇다! 이 음식을 신에게 바치지 말고 저 애에게 주는 것이 신의 뜻이다.” 해서 굶어죽기 직전에 있는 애와 가족들에게 제사음식을 나눠주니 갑자기 비가 막 쏟아졌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 천심이 곧 민심이고 인내천(人乃天)이라, 인간이 곧 신이구나.’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사상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그런 환경 속에서 ‘아마 신은 이럴 것이다.’라고 짐작해서 믿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언약의 하나님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 보면 혼인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22장 13절에서 29절의 내용이 상당히 긴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고 난 뒤에는 같이 살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쫒아내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그 여자가 처녀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가서 보니 처녀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율법적으로 합당하게 저 여자와 이혼해야 되겠다.” 이렇게 나올 때 누명을 쓴 여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친정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그 여자의 친정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인 재판관들에게 가서 내 딸이 결혼할 즈음에 처녀가 맞다는 표식을 가지고 남편에게 가게 되면 장로는 율법에 의해서 “그것은 누명이다.”라고 해서 벌금 백 세겔을 그 남자에게 가하고 그 남자는 일생토록 그 여자를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현대인들이 들으면 기가 찰 이야기입니다. “누가 살고 싶대?” 여러분, 그런 남자하고 살고 싶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비추어보면, 특히 결혼해서 행복할 권리를 가진 여성의 존엄성과 그 인격성에 입각해서 그 남자와 산다는 것 자체가 곤욕이고 형벌 같은 거예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지 자기를 모함한 그 남자와 평생 갈라서지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친정아버지는 뭐예요? 친정아버지는 신혼여행지까지 따라가야 돼요. 따라서 첫날밤 치른 그 이불홑청을 친정에서 보관하고 있어야 해요. 언제 또 남자가 “처녀 아니었다.” 이런 소리 나오면 증거물을 법원에 제출해야 되거든요.
무슨 이런 번거로운 일이 다 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겁니다. 남자가 같이 살기 싫어서 처녀가 아니라고 모함을 하고 누명을 씌웠다고 봤는데 그 처녀가 처녀라고 증명할 증거, 처녀의 표적이 없을 때는 그 마을의 어른들이 그 처녀를 아비 집에서 끄집어내서 돌을 던져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왜, 그 여인이 처녀도 아닌 상태에서 결혼했기에 돌로 쳐서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신명기 22장을 없는 것으로 해 달라고 하고 싶지요. 그냥 잊고 싶지요.
그 뒤 대목도 참 가당치도 않은 대목이 나옵니다. 신명기 22장 22절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성 안에서 어떤 남자가 약혼한 여자를 통간했을 경우에 돌로 쳐 죽이는데 그 이유가 뭐냐? 그 처녀가 남자한테 겁탈 당할 때 소리 지르지 않아다는 것, 소리 지르지 않고서 강간당했기에 그 여자가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자가 벙어리라면? 그냥 으으, 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는 거지요?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또다시 말합니다. 신명기 2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약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했다면 그 여자는 죽이지 말고 남자만 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들에서 당했기 때문에 고함을 질러도 “살려주세요!” 아무리 외쳐도 사람 있는 곳에서 너무 멀어서 안 들릴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거든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처녀에게는 아무 것도 행치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 죽인 것과 일반이라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 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신 22:25-27)
이것도 이상해요. 소리를 질러도 안 들릴 경우와 애초부터 소리를 안 질렀을 경우가 있는데 똑같은 여자가 소리를 안 질렀는데도 성 안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죽이고 들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소리를 안 지르고 싶어서 안 질렀을 경우, 자기가 그냥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경우조차 사는 경우가 되니 이것은 제대로 판결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관계하고 싶은 남녀는 둘이 같이 들로 나가면 되겠네요.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거든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로 아내를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신22:28,29)
이것은 또 뭡니까? 야수 같은 남자가 미인을 보고 강제로 겁탈하면 그 처자는 꼼짝 못하고 평소에 자기가 원하는 남자 다 버리고 마음에도 들지 않는 바보온달 같은 남자한테 가서 이혼도 못하고 평생 자식새끼 낳고 같이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22장입니다. 외우기도 쉬워요. 세상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성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상호타협해서 만든다면 절대로 신명기 22장의 이런 법이 나올라야 나올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방적인 남자의 폭력을 옹호하고 남자의 권위만 높여주는 법이 될 뿐이잖아요. 결혼이 뭡니까? 도대체 법 지키자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행복을 위해서 결혼 하는데, 나는 갑돌이와 결혼하고 싶은데 깡패 같은 것이 와서 겁탈을 해도 “법에 의해서 너는 이미 확정된 내 여자다.” 하게 되면 여자의 선택권은 어디 가서 찾습니까? 이게 자비로운 하나님인가요? 여자가 돌에 맞아 죽기 전에 그 하나님이 사람이라면 먼저 돌에 맞아 죽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지요. 율법에 의하면 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살 권리, 행복을 추구하는 행복권을 보장하고 그 나머지를 악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뭐냐, 결혼이라 하는 것은 왜 인간이 왜 죽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율법이 밑에서 받쳐주는 식으로 하나님은 계시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나라는 여자를 겁탈해도 그 나를 강간한 남자와 빼도 박도 못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거예요. 학력이나 인품이나 종교나 성격, 일체 이런 것을 묻지 않고 무조건 겁탈 당했다는 이유로 같이 살아야 된다는 이것은 인간은 왜 죽어야 되는가, 왜 인간은 행복할 권리나 마땅히 살 권리가 왜 없는지, 인간이 왜 마땅히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 그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살 권리라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밑에 깔아놓은 거예요. 이 율법은 어디와 연관되어 있느냐하면 예수님은 왜 죽어야 되는가,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형제들아, 해놓고 형제를 양쪽에 끼워 넣어요. 형제와 율법과 관계성이 성립되고 또 형제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과 관계를 엮습니다. 형제라는 것은 구원받을 백성 곧 성도를 말하지요.
형제라는 것은 율법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율법과 관련성을 가지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 관련성 중에 하나로써 혼인이라는 것을 했고 재수 없게 남편이 내가 결혼할 당시에 처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겠다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뭔가를, 율법 속에서 나는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 남자와 혼인시킨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과의 관계가 뭐냐, 우리는 그 율법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제대로 숨 쉬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구나, 이렇게 이야기하실 것인데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있을 때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혼인이 되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신랑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 신랑의 신부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경험을 해야 돼요. 그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뭐냐, 율법과 관련되는 겁니다. 못된 남편과 살다가 죽어버려라, 그 말입니다. 신명기 22장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삼자 관계지요. 인간 있고 율법 있고 예수님 있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 관계고 영생이고 축복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율법과의 우리 관계가 얼마나 지독하고 혹독하고 살만한 곳이 못되고 예수님 없이 산다는 그것은 곧 지옥에 사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율법과의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겁니다. 설교 처음부터 굉장히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요새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데 지묘동에 수변공원을 만들어 놓았어요. 한 바퀴 돌면 40분 걸립니다. 하루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졌어요.
어떤 아줌마가 달리는데 개도 같이 막 풀어놓아서 달리게 한 거예요. 그러면 개가 맘대로 오줌 누고 똥 눠서 이 깨끗한 수변공원이 엉망이 되잖아요.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에요. 그래서 “아줌마! 왜 이렇게 합니까? 벌금 7만원입니다. 개를 묶어서 다녀야 합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다가 개가 변을 봤을 경우 처리할 수 있는 비닐봉투 준비해서 다녀야 합니다.” 아줌마가 막 뛰면서 귀찮다는 듯이 “알았어요, 알았어!” 하면서 막 가는 거예요. 그랬는데 그 다음날 되니까 또 개를 풀어놓고 달리는데 또 그 아줌마에요.
그래서 “이 개 확 차버릴까? 어디서 개를 풀어놓습니까?” 또 제가 그랬지요. 그 때 옆에 있는 할머니들이 “저 아줌마가 맨 날 개를 풀어놓고 달리는데 …….” 가만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니까 그 때서야 다 편을 드는 거예요. “한 번만 더 걸리면 내가 그 개 차버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 다음날 되니 또 개를 풀어놓았기에 카메라를 들고 갔어요. 제가 운동 나가는데 아내가 “당신이 운동 나가면서 웬 카메라를 들고 갑니까?”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요.”하고 이야기 안했어요.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찍어야 돼요. 수변공원이라 개 사진이 잘 나오거든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아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는 그 아줌마와 개가 보이지 않았어요. 개를 차버릴 수가 없어요. 개가 개인 재산이기 때문에 그거 차면 물어주는데 벌금보다 더 많이 나올지 싶어서 방법을 찾다가 카메라를 생각한 거예요. 사진을 찍어서 개념 없는 아줌마, 해서 지묘동사무소에 올리든지 경찰서에 이 사진으로 신고하면 되겠다 싶어서 들고 갔는데 마침 그 때 그 아줌마가 없었고 오늘도 보니까 안 나왔어요. 다른 데로 갔든지 아니면 정신을 차렸든지 했겠지요. “왜 개를 풀어놓고 달립니까?” 하니까 “개를 데리고 어떻게 뜁니까?”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걸 보면서 생각해 봤어요. 그 개를 묶어서 데리고 다녀야 하는 그 법을 위반 안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개를 안 키우면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예 개를 안 키우면 그 사람은 율법을 성취한 사람입니까? 이런 사적인 법은 그 개를 아예 안 키우면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이 되지만 성경에 나오는 율법은 우리가 어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아예 율법이 우리 속에 하나의 현실로, 인간만 사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이 율법이 하나의 현실로 삽입되어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보는 거예요.
신명기 16장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 그 차원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여기서 모든 율법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우선이 아니고 내 행복감과 내 존엄성과 내 자존심과 내 인격을 위해서 법을 거론하는 것은 전부 다 우상숭배의 법을 위반하는 겁니다. 율법이 있으면 내가 착해지겠다, 선해지겠다, 이렇게 율법 중에서 골라잡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허락받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 풀어놓고 운동하는 그 아줌마를 찍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가지만 그런 나는 뭐냐, 나는 다른 법은 어겼는지 모르나 개를 풀어놓고 공원에서 달리는 법은 안어긴 것이 되지요. 왜, 저는 개를 안 좋아해요. 개 키울 맘이 난 없거든요.
그 법을 위반 안했으니 그 법에 대해서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처녀표식이 어쩌고 약혼한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아예 결혼 안 해버리면 아예 신명기 22장을 위반 안 한 사람, 곧 착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율법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우상숭배 적 요소를 겨냥해서 우리가 떼어낼 수 없도록 진드기같이 딱 붙어 있는 거예요. 진드기도 그냥 진드기도 아니고 살인 진드기라. 그래서 이 관계를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혼인관계라고 봅니다.
요새 같으면 혼인해도 4주 조정 기간 지나서 이혼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율법은 그런 것이 없어요. 율법은 어느 한쪽이 죽지 않는 한 그 율법관계성은 살아 있어요. 이게 율법이에요. 빼도 박도 못해요. 율법이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잖아.”라고 지적하게 되면 그 율법의 잔소리 앞에서 우리는 영원한 그 남편의 아내로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늘 잔소리를 들어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하나님도 동원시키고 예수도 믿고 교회도 다니고 헌금도 하고, 모든 것을 내 자신을 위해서 다 집어넣는 겁니다.
주님 좋아서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나 좋으라고 예수 믿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성경말씀 가지고 한 번 탁 치면 “너 나하고 결혼 한지 10년 되었지만 너는 처녀가 아니었어.”라고 탁 치면 여자 쪽에서 “우리 갈라서.”라고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장로나 목사라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데 당신이 돈을 사랑하잖아.” 하면 “우리 갈라섭시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아무리 해도 자기를 건드리면 참지를 못해요. 이미 우리가 우상인 것을 알고 율법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에 그런 거예요.
그것을 율법으로 포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몇 년을 믿었느니, 교회 장로니 목사니 신학박사니, 백날 걸치고 또 걸쳐 봐도 다 위선자입니다. 한 예를 들면 서울의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조 용기 목사님인데 그 교회교인들이 “조 용기 목사님은 그냥 복음도 아니고 순 복음을 전해서 우리를 천국 보내는 참 좋으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헌금하고 재산을 바치는 것은 조 용기 목사의 인물이 어떠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 말씀이 좋아서 아낌없이 바친다.”해서 세운 교회가 순복음 교회고 재산 가치로도 수천억이 넘고 조 용기 목사가 그 아들에게 수백억 재산을 물려주든 그 재산을 횡령을 했든 뭘 하든 간섭하지 말아야 돼요.
왜, 말씀이 좋아서 그렇다면. 그런데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조 용기 목사가 백억 여원 해 먹었다고 입건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것도 교회가 찔러서. 그렇다면 순 복음교회 교인들은 말씀을 위해서 교회 간 것이 아니고 순 복음교회 자체를 위해서 조 용기 목사를 이용한 것이 되고 그 순 복음교회는 자기가 헌금해서 만들어진 교회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자존심과 연관되어 있는 교회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 현실이라는 것이 사람 대 사람이 만난 것이 현실이고 하늘에 별이 있고 밭에 채소 있고 하늘에 새가 짹짹거리고 돌아다니는 짐승들이 있는 이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할 때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에요.
“내 자존심은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뜻이에요. 그것의 다른 표현이에요. 이것을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나님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말씀대로 바르게 살 테니 제발 내 인생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라는 뜻이에요. 적당히 타협하기 위해서 교회를 나와 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성의를 보였으니 하나님 쪽에서도 성의를 보이셔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발 나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하나님!” 기도할 때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한 번 따지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너는 나 자신을 몰라. 내가 안다, 내가!” 하고 율법을 주게 되면 너는 자기 잘난 맛, 평소에 내가 보고 싶고 원했던 그 자기 잘난 척을 뒤집어쓰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순 복음만이 아니라 어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은혜 안 되니 나가주세요.” 하면 목사들이 항상 내세우는 것이 뭐냐, “내가 여기 처음 올 때 교인 몇 명인데 지금 교인이 이만큼 불어났고 내가 올 때 이 교회 무너져가던 것 내가 와서 주차장 넓히고 교육관 짓고 예배당도 새로 지어놨는데 당신들이 날 이렇게 섭섭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따로 나가서 개척할 테니 자금 대 다오.” 꼭 이렇게 나와요.
노골적으로 하는 사람도 많지만 점잖은 체 하는 사람은 노골적으로는 못하고 빙빙 돌려서 말하든지 아니면 자기 아는 장로들 통해서 당회에 압력 행사하든지 해요. 그게 뭐냐, 그동안 애쓰고 하나님 믿고 성경 이야기한 그 것이 전부 다 자기자존심 챙기는 자기역사, 아주 멋있어 보이는 자기역사를 만든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귀찮다. 돈 좀 줘서 보내자.” 해서 퇴직금에 돈 몇 푼 더 얹어서 “꼴 보기 싫은 것은 내 쫓으면 그만이다.” 하지요. 결국은 은혜로운 목자니 뭐니 그동안은 다 헛소리 한 것이고 최종 남는 것은 돈 먹고 떨어지고 돈 주고 쫒아내고 다 돈으로 끝나는 거예요. 인생 모든 것이 그래요.
여러분은 “인생이 다 그런 건데 새삼 왜 그런 것을 신경 써야 합니까?” 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처녀도 아닌 여자를 데려다가 결혼해 놓고 살기 싫다고 “네가 처음 시집올 때 처녀가 아니었잖아.”라는 것이 모함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나는 합법적으로 다른 젊은 여자를 만나서 다시 결혼하겠다.”고 신명기 22장대로 해서 억울하게 이혼당하고 남편과 자식까지 다 빼앗겨서 한 맺히고 억울한 여인의 심정일 때 “무슨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다 있느냐.” 할 때 하나님이 하는 이야기에요. “네가 애초부터 뭔가 네 현실 속에서 율법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결혼할 때 신명기 22장을 고려해서 결혼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2장처럼 새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기존 여자를 쫒아내려는 그런 남자가 아닌 사람만 고르는 식으로 법을 해석했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결국 뭐냐, 내 행복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자세가 그 여자에게는 안 갖춰졌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처음 결혼할 때 바람피우기로 맘먹고 결혼하는 남자는 없어요. 전부 다 나는 너만 바라보겠다고 결혼하지요. “나는 네 앞에서 깨갱, 할거야. 경제권도 다 너에게 넘기고 옆에만 있으면 감사하고 퇴근시간 땡 치면 술이고 친구고 다 버리고 너에게 달려올게.” 연애할 때는 다 그런 마음으로 해요. 그 마음이 한 6개월이나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그런 마음으로 결혼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자기 아내가 싫어지는 마음을 주셨다면 어떻게 할래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 마디로 하면 “이 세상에 믿을 놈 없다.”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을 믿는다는 그것을 여러분 현실에다 집어넣지 마시고 세상은 율법대로 되어 지고 세상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 뜻대로만 이루어집니다. 이런 식이든 저런 식이든 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씀, 전에는 내가 율법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었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지금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신부가 되어서 영생을 누리는 관계가 되었다, 라는 식으로 로마서 7장이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 그대로인 것을 여러분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여러분 가정에 개입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킴으로써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지키나 안지키나 우리가 싫든 좋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속에 말씀이 거기 같이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네! 말씀이 살아 있어요. 로마서 7장은 살아 있는 겁니다. 세상에 믿을 놈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어요?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은 너 자신의 결심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심으로 이런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께서 우리를 영생 얻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 온 겁니다. 결혼도 하게하고 이혼도 하게하고 이혼했다가 또 결혼하게 하고 결혼했다가 또 이혼하게 하고, ‘차라리 결혼 안하고 말겠다.’ 그런 생각도 들게 하기도 하고.
세상 모든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분만이 진짜 살아계신 분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이미 율법이 우리하고 결혼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죽은 자에서 살아나신 분이 우리가 원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신부로 결정지었기에 우리로 하여금 율법 가지고 실망케 하는 현상들을 우리 주변에서 일으키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킨다고 신명기 22장의 말씀을 이미 알았기에 다짐에 다짐을 하고 조심에 조심을 하면서 선보는 자리에서 “당신은 혹시 신명기 22장을 아십니까?” 이렇게 물어가면서 했건만,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온갖 것 다 했건만 그 남자가 6개월 만에 날 차버릴 줄이야!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가 노 저어서 항해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내가 말씀대로 변해감으로써 율법이 없는, 말씀이 없는 현실, 곧 가상을 현실로 보고 있는 우리를 진짜 율법이 있고 말씀이 살아 있는 이 현실로 바꾸는 이 작업에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이 현실만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은 없어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내 남편을 안 믿게 해주시고 오늘도 내 아내를 안 믿게 해주시고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의 결심과 착함을 안 믿게 해주신 하나님, 이미 신부되었기에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나를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은 자요, 우리 주변에 대해서도 죽은 자고 다만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아 있는 자로서 이미 산채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 작업을 위해서 매일같이 환상이 환상으로 드러나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여러분은 노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주님 만나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은 믿으면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거든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처럼 자부했는데 막상 말씀의 뚜껑을 열어보니 그 자체가 내 위주의 망각이었습니다. 이제는 망각 속으로 예수님을 끌어당기지 말고 주님이 만든 이 현실 속에서 내가 망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짜 주님 신부로서 살아가는 현실적 존재로서 예수님을 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