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부모에게 순종(엡6;1-4) 2001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1. 6. 17:10
2020-01-05 13:10:31조회 : 61         
   부모에게 순종200105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부모에게 순종(에베소서 6:1-4)

음성         동영상 .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mB4_m_yO9k, Hit:7

 이근호 20-01-05 13:38 
부모에게 순종

2020년 1월 5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1-4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에게 순종하려면”이 목표가 될까요 아니면 “내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것”이 목표가 될까요? 만약에 ‘부모에게 순종’이 성사되려면 몇 차례 순종이 필요할까요? 일곱 번 순종하면 순종이라고 쳐줍니까 아니면 일흔 번의 일흔 번을 해야 순종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욕망의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욕망은 내가 나를 욕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다움을 목표로 해서 움직이기에 괜찮아 보이는 대상을 소유하므로서 본래 ‘내가 원하는 나다움’이 이룰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것이 유혹이 되고 미끼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육은 영과 섞이거나 엮일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약속이 육을 통해서 달성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약속에 의해 새로운 육이 필요합니다. 마치 수액의 유입으로 인해 포도넝쿨이 비로소 계속 확장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액이 끊어지면 포도줄기는 말라 죽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의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편 1:5-6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즉 목숨의 용도가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의 목표에 부합되지는 여부를 밝히시겠다는 겁니다.

약속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욕망의 대상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자율권을 발휘하십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그런데 하나님께서 뭔가 약속을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자율권 속에 스스로 확정짓는 요소로 모든 자율권을 마감짓고 중지를 내리는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이 약속 안에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마저 군소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약속이 바로 ‘주 안에서’입니다.
즉 ‘주 안에’ 있는 것이 약속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서 ‘부모 공경’이 주입된 것은, 약속의 때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 혈육을 통해서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릴레이 육상 경기에는 바턴을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약속이 있음으로 발생되는 주변 환경과 약속이 없이 생각되는 주변 환경이 확연하게 다른 것임을 말씀하는 겁니다.

만약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주 안에서’ 빼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나 안에서 나로 마감되려는’ 시도를 벌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의 동기부여가 될만한 약속들을 본인들이 주변에서 끌어 모으고 정해버리게 됩니다. 자신만의 삶을 지키고 버티기 위해 나름대로 원칙들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을 전혀 모르는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현실공간의 판은 하루하루가 새판이 새롭게 짜여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둑에서 돌 하나가 놓일 때마다 전에 돌이 놓여졌을 대의 가졌던 지난 때의 인식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집스럽게 자신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것은 마지막 돌이 놓여지는 시점. 즉 심판날에 그동안 전혀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음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끝까지 유지하시는 외부 환경에 참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러내십니다. 즉 진정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이 아니라면 ‘아들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인수하시고 상속하시는 방식으로 완성을 시키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약속된 첫 계명’을 보면서 자기 이익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신명기 5:16에 나오는 ‘땅’이 이 세상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땅은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을 말하고 신약에서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아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저주받을 땅에 있어서도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의 하나뿐인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신 겁니다. 우리 죄인의 죄악된 손에 맡기신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자들은 자신이 전혀 천국갈 입장도 처지도 아님을 압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로 대립되는 두 아들을 소개합니다. 맏이라고 여기면 살아가는 자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도 않고 세상적으로 효심을 다합니다. 하지만 전혀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내지를 못합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라는 자들이 모두 자기가 자기에게 최종적 관심사인 겁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은 떠나므로 서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 앞에서 전혀 아들답지 못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시 돌아올 때 감히 자신을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으로만 써주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들의 선/악이라는 대립개념에서 제 세 번째 항을 그 틈에서 뽑아내시기 위함입니다.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요 오직 생명에 속한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내십니다. 자신이 악한 죄인인 것을 아는 자가 하늘나라에 잔치할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참 자식이요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순종’이라는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운명 속에다 집어넣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목숨의 용도입니다. 마치 어음같은 것으로 현찰이 오면 바꾸어야 할 것을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약속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전해야 합니다. 이를 아는 자를 이 땅의 모든 것, 즉 민족, 국가, 가족을 배신합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배신하는 것으로도 이것이 자기 부인(否認)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나의 원칙을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20-01-06 14:29 
57강-엡 6장 1-4(부모에게 순종)200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4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 부모라는 단어 나오고 자녀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부모나 자녀라는 이 단어가 성립되려면 먼저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그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됩니다. 생명이 모양을 가졌는데 아버지모양, 엄마모양, 딸모양, 아들모양,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금을 가지고 흉측한 것을 만들거나 혹은 예쁜 것을 만들어도 순금은 여전히 순금이에요.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하기 전에 네 육신과 신체를 형성할 수 있는 그것도 주님이 주신 생명의 힘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잘될 것이냐?’라는데 신경 쓰기보다도 주님이 주신 생명 안에 어떤 원리가 있고 어떤 원칙이 있느냐는 그게 우리의 주된 관심사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줄 때 목숨을 그냥 준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 뭔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생명 이야기했습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약속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이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힘든 일을 겪었는데 그 약속의 완성되시는 분이 이 땅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뭐냐?

“너희들은 생명이 아니다. 너희들은 생명이 빠져 있다. 생명이 없다. 그러나 나 예수는 생명이다. 왜? 아버지를 제대로 아버지답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식이라는 것이 어때야 자식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이 제대로 보여줄 때 이것이 바로 영생하는 생명의 부합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생하는 생명에 부합된다는 그 말이 너무 길다면, 그래서 그것을 짧게 줄여버리면 “내가 바로 약속의 성취니라.”

그렇습니다. 생명 안에는 약속이 들어있고 약속 안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원리와 원칙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명이 있다, 목숨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지만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통해서 나타난 바는 뭐냐? 네가 지금 생명이라 하는 그것이 생명이 아니고 목숨이라고 여기는 그것도 죽은 목숨이에요.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구조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대립구조가 형성된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진짜 생명이 무엇이고 약속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그것이 바로 부모고 그 말씀을 전달받는 자 입장을 가지고 자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없고 복음이 없으면 그 집안은 엉망인 집안이에요. 그 집안은 도대체 제대로 된 집안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그냥 시체가 모집된 겁니다. 오늘 본문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 이렇게 들어가는데 보통 사람들이 이 본문 읽을 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렇게 급작스럽게 좍좍 읽어나가시는데 방금 제가 읽었던 거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렇게 읽었을 때 여러분이 눈치 채야 돼요. “목사님, 뭐 중요한 것 빠트렸네요.” 하고 눈치를 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눈치 못채고 성경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니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된 선물을 주는데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한다.’ 이렇게 연결되어 버리는 거예요.

지금 뭘 빠트린 것을 모릅니다. 그래가지고 좋다 싶어서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순종해서, ‘내가 땅에서 사업을 하든, 농사를 짓든, 어떤 투자를 하든, 하는 족족 범사가 대박 터지고, 잘되고 그것도 건강하게 이 땅에서 오래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구나.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부모에게 순종하면 네 소원이 이뤄지리라. 너 잘되고 싶지?” “응.” “너 오래살고 싶지?” “응.” “부모한테 순종하면 다 이루어져.” “탱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방금 뭘 빠트렸는지를 모르고 여기에 훅 하고 유혹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보고 싶어하고 평소에 욕망하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노출이 된 셈이지요. 보통 욕망을 가지고 정신병하고 신경증세, 곧 노이로제와 구분을 짓는데요.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이라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대상을 추구하는 것을 정신병이라 합니다.

도착증세라고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뭐냐? 이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라는 약속이 있다면 그것은 내 부모에게 순종할 때 이러한 결과가 주어진다. 그러면 부모한테 순종하려고 애를 쓸 때 그게 정신병이 되는 거예요. 부모에게 순종할 때 정신병이 된다고요.

그 다음에 노이로제, 신경증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한 욕망이냐 하면, 대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에요. 내가 잘되기 위해서 누구를 이용하는 겁니다. 욕망이니까 다 비슷하게 본다면, 합쳐본다면 결국은 나 잘되기 위해서 누구를 수단으로 삼는 것, 그것이 정신병자들의 특징이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전부 다 이런 정신병자로서 태어나는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하고 육은 곧 죽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제대로 본 사람은 참 이상한 것이 있어요. 어떻게 육과 하나님의 영적 요소인 약속이 서로 만날 수가 있고 서로 얽힐 수가 있는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상당히 낯설어질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성도라 하는 것은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추구한다는데 갑자기 훅 하고 사도바울이 땅의 것에 대해서 뭔가 보상을 준다고 나오니까 갑자기 관심사를 하늘에만 두지 말고 땅에서도 잘되는 수도 있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수도 있는데 이걸 내가 놓쳤나? 이걸 내가 까먹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수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뭐로 들통 나느냐 하면, 내가 여전히 육이라는 거예요. 내가 하늘의 것을 사모해도 영적인 존재가 아니고 육적인 존재에요. 정신병자가 하늘에 좋은 것 있다니까 그것을 차지하려고, 그것을 얻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나는 죽어서 천국가야지.’ 이게 정신병자에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거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나는 나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이라는 것이 딴게 아니고, 육체가 있어서 육이 아니라 최종 나의 마감재가 나로 마감되는 것이 육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부모는 이렇게 하고 자식은 이렇게 하라고 할 때에 사실은 부모한테는 자식이 없어요. 그리고 자식한테도 부모가 없고.

최종마감재가 뭐냐 하면, 본인이 마감재에요. ‘나는 있다. 자식 있다. 하지만 그 자식이 있을 수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자식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또 자식은, ‘우리한테는 고마운 부모가 있다. 참 고맙다. 미안하니까 한 번 더 붙이자. 너무너무 고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부모라도 함부로 내 경계선을 넘어오는 것은 차단시켜야 된다.’


이게 자식 키워준 보람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은근히 뭔가 부모에게 잘해주기를 바라는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도 최종마감재는 본인이에요. 진정으로 자식을 위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자식이야 물론 뻔하지요.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내집마련. 끝났잖아요. 못들었어요? 다시 이야기해 줄까요?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내집마련하고, 죽는 것.

나의 소망은, 젊은 사람의 소망은 그것 외에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지요!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다, 그 말입니다.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다, 그 말이지요. 특별히 에베소서 5장 31절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할 때 이 대목이 있다는 것이 부모입장에서는 굉장히 기쁘고 감사할 일이에요.

‘자식이 결혼했으면 부모를 떠나야지.’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잖아요. 결혼했으면 이제 더는 기어 붙지 말라는 말이지요. 결혼하고 나면 끝인 줄 알았더니 또 손자 키워달라고. 돈도 안주고. ‘돈도 안주고’가 중요한 겁니다. 돈도 안주고 애 키워달라고 해요. 고관절 다 나가는데?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좋지요. 그러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딸 떼지를 않았어요. 결혼했어도 다 거둬주지요.

아들만 가진 사람은 아들 결혼시키면 자기들은 놀러 다니지만 딸 가진 사람들은 손자 손녀까지 다 키워줘야 돼요. 돈도 못받고. 이게 중요해요. 밑줄 좍 그어놔야 돼요. ‘돈도 못받고.’ 잔소리는 잔소리대로 다 듣고요. 외손녀하고 한 번 놀아줘 봤어요. 퍼즐놀이를 외손녀와 했거든요. 처음에 한 30분까지는 저도 인내심이 있었어요. 한 시간 넘어가니까 퍼즐 집어던지고 싶어요. 내가 이러려고 세상에 태어났다 싶어요.

무의미한 이 퍼즐 하려고 태어났습니까? 인간의 마감재는 본인이에요, 본인. 본인 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남을 이용할 뿐이에요. 자식들은 부모한테 순종해서 하나님한테 빼먹으려고 하는 것이 뭐냐?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땅에서 잘되고 오래 사는 것을 빼먹으려고 하는데 문제는 순종이라는 것을 한 번 해야 돼요, 두 번 해야 돼요? 세 번할까요, 네 번할까요? 순종 일곱 번 해서 잘되었다. 그러면 여덟 번째 순종 못하면 다 날라 가는데요?

도대체 죽을 때까지 순종해야 되는데 그 순종이라는 것이 뭐예요? 결국은 인간이 여기서 ‘자녀들아 부모한테 순종하면 복 받는다. 그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니까 반드시 주어진다.’ 할 때 자신도 모르고 훅 지나가면서 빠진 것이 있어요. 그게 ‘주안에서’ 자칫하면 이 본문이 5월 8일 어버이날 설교본문 된다고요.

윤리도덕이 막 나와요. 부모순종해서 잘된 자식들 예화 들면서 한다고요. 교회에서 설교 한다는 것이 그냥 유교설교를 한다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자식이 뭐고, 부모가 뭔지 그런 것은 하나도 모르고 최종마감재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만 잘되면 내가 좋은 하나님이라고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본문 이야기하는 약속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려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생명을 줬는데 이 생명 안을 열어보니까 그 안에 약속이 들어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의 진짜 존재의미는 약속의 매개체 약속의 전달체에요. 약속을 전달, 전달하는 거예요. 마치 육상경기에서 릴레이 하듯이 부모는 바통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자식은 바통을 받아서 그 다음 자기자식에게 또 넘겨주고.

중요한 것은 엎어지고 좌절하면 안되는 이유는, 땅에서 잘되고 오래 살아야 될 이유는, 그 약속이 내내 발현되기 위해서, 약속이라는 것이 계속 우리의 목숨의 원천이 된다는 것, 그라운드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주신 거예요. 그 바통을 놓치면 안되지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한테 원리원칙을 이야기하려면 부모 본인부터 하나님한테 자식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아버지라고 말만 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어떤 약속의 관계로 연결되는가를 부모부터 먼저 알고 있어야 돼요.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 세상에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자식한테 이야기해야지요. 자식한테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네가 태어났다고 자식이 아니야. 네가 바통을 받지 아니하면 내 자식이 아니야.” 내 자식 아닌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이, 부모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다 자식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냐가 중요하고 그 부모가 자식 있을 때 그 부모와 자식사이에 육으로 연결했느냐, 아니면 약속으로 연결했는가를 주께서는 보시겠다는 겁니다. 약속 있는 첫계명이라 했는데 약속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한 성경본문을 읽어드릴 테니 약속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사무엘상 2장 6절에서 8절을 보게 되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율권입니다.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사, 자율성.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뭘 원하는지 묻지도 않고 하나님 맘대로 높이고, 낮추고, 부자 되게 하고, 지옥보내기도 하고, 천국 보내기도 하고,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시는데 인간은 여기에 개입할 어떤 여지도 없지요. 그런데 그걸 약속이 고정시켜 놓은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율권 안에다가, 내 자율권을 잠시 멈추고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변동 없는 고정적인 것을 내가 보장해줄게.’라고 딱 고정점을 주는 그것이 약속이 되는 겁니다. 그 약속이 뭐냐? ‘주안에서’ 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할 때는 감히 하나님보고 인간이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 일방적인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하지만 약속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조차도 나중에 딴소리 못하게 만드는 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 만나자. 주 안에서 만나게 되면 육적인 아버지 이전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아버지는 어떠해야 되고 자식은 어떠해야 되는 것이 주 안에 들어와야 규정이 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읽었지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이렇게 할 때 빨리 읽었으니까 빠진 것이 있지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 말은 네가 생각했던 네 목숨을 뭘로 바꾸는 용도냐 하면, 네 목숨을 운명,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고정된 약속과 바꾸기 위해서 네 목숨을 포기하고 약속 속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게 주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얼굴들 보니까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인데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만약에 ‘주 안에서’가 빠졌다고 본다면 인간은 백프로 본인이 약속을 만들어내요. ‘주 안에서’가 없으면 내 안에서가 되기 때문에 내가 최종마감재거든요. 나는 날 위해서 산다는 말이지요. 내가 내 삶에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들을 약속이라는 것을 가지고 미리 예상을 한다는 말이지요. ‘내가 잘되었으면 좋겠다. 오래 살면 좋겠다. 건강하면 좋겠다. 교회는 부흥되면 좋겠다. 헌금은 빵꾸 안났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

 뭔가 내 자존심을 걸고 내가 여기에 멋있는 존재라는 것을 남에게 까발리기 위해서라도 그 어떤 내용물을 내가 미리 예상하고 싶어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살 된 애를 앞에 놓고 테이블 위에 마이크 놓고, 실 놓고, 돈 놓고, 집으라는 거예요. 돌잔치 할 때지요. 애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엄마가 막 강제로 집어줘요. 돈 집으라고. 이것은 엄마의 욕망이지요. 부모의 욕망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주 안에서’가 아니에요. ‘우리 집 안에서, 너는 내 안에서 너는 내 맘에 맞는 내 자식이 되어야 해.’ 라고 강요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애는 따라가지요. 나중에 애가 크면 본인 나름대로 본인이 마감재니까 부모를 또 이용하겠지요. 자기가 최종의미니까. 그렇게 동기부여가 되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한평생 열심히 살고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살아보려고 한평생 애쓰는 그것이 뭐가 나쁘냐? 그렇게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내 집 마련하고,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그게 왜 나쁘냐 하면,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판을 바꾼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내 것만 고집하다 보니까 세상이 내 뜻대로만 되어야 된다고 하는데 하루가 지나면 판이 다 바뀌어요. 판이 다 바뀌어버리면 나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그동안 나를 버티게 만들었던 원리원칙이 무용지물이 되는 새로운 판이 짜인 채로 세상은 움직이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바둑의 예를 들면 바둑 첫수 둘 때는 바둑판이 넓어요. 둘 데가 많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두 번째 돌을 두게 되면 두 번째 돌이 없을 때와 두 번째 돌이 있음으로서 판에 대한 의미와 판도가 달라져요. 세 번째 돌, 네 번째 돌, 두면 둘수록 돌 하나 놓을 때마다 과거에 두었던 그 돌들의 의미가 다 수정에 들어가야 돼요.

집에 딸이 하나 있고 아빠와 엄마 세 식구가 산다는 말이지요. 세 식구 살기에 애 방을 예쁘게 치장한 거예요. 친구 초대해서 맛있는 것 먹으면서 논다고 계획을 다 했어요. 이게 자기가 생각했던 그 순간의 판입니다. 세상을 보는 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아빠 엄마가 아들을 하나 떡 데리고 온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부터 얘가 네 동생이다.”

이렇게 되면 그게 네 번째 돌, 그 다음에 남동생하고 살다가 남동생이 밀어서 다쳤다. 그게 다섯 번째 돌. 하루하루 살면서 과거에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나는 내가 이렇게 예상한 대로 살아야지, 했던 그 모든 계획한 것이 하루하루 오면서 판이 계속 바뀌니까 그게 다 소용없는 논리에요. 그런데 부모들은 자식한테 자기가 살아왔던 그 논리를 가지고 자식한테 강요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석봉 이야기입니다. 한석봉 이야기를 제가 어릴 때 책에서 봤거든요. “불을 꺼라. 석봉아.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라.” 불을 끄고 글씨를 쓰고 난 뒤에 불을 켜보니까 엄마는 떡을 가지런히 썰었는데 석봉이는 글을 삐뚤삐뚤 쓴 거예요. 엄마가 호되게 뭐라고 합니다. “이게 글씨냐?” 어릴 때 그 글을 읽으면서 ‘뭐야 이게?’ 엄마가 지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엄마는 칠성시장에서 떡 장사 하는 가운데 40년 노하우가 있는 떡썰기고 얘는 얼마 안배웠잖아요. 불공평한 배틀이에요. 공평하지 못한 경기를 왜 하느냐? 그 억지스러운 대결 이야기를 왜 아직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요새 유-튜브 보는 애들 같으면 “엄마가 글씨 써라. 내가 떡을 썰게.” 왜? 떡썰기는 쉽거든요.

떡이야 좀 썰어보면 할 수 있지만 글씨쓰기는 한 두 해 배워서는 안되니까. 불공평한 게임입니다. 이것은 엄마의 강요에요. 엄마의 교육지침이 자식한테 강요한 겁니다. “너는 나를 닮은 인생을 살아라. 내 인생의 원리원칙을 너는 그대로 답습해야 돼.” 그걸 요구한 것 밖에 안돼요. 이것은 바로 주 안에서가 없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야기할 것은 자식을 껍데기로 봐야 돼요. ‘내 안에는 네가 말하는 목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야. 생명이 들어 있어. 생명이 생명으로 유지되려면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져도 한결같은, 하나님 쪽에서 보증을 한,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바뀌지 않음을 운반하는 운반책으로서 부모가 있다. 왜? 부모는 하나님 앞에 자식이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그대로, 자기집안에 목숨 주셔서 만들어낸 자기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할 책임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순종이라는 것, 그것도 몇 번을 할까, 일곱 번할까, 7개월 동안 할까, 7년 동안 할까, 의 그것은 의미 없어요. 순종자체가 내 목숨과 주어진 약속의 운명과 바꿔버린 거예요. 순종한다는 것은 주 안에 들어오는 것이 순종이에요.

부모 말 잠시 듣고 헤헤, 하면서 순종한 척 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고 부모가 전달해준 그 운명 앞에, 그 약속의 완성 앞에 자기 몸을 던져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한 번 순종으로 끝난 거예요. 두 번 세 번 순종해서 헤헤, 할 것도 없어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것은 신명기 5장 16절에 나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땅이지만 원래 신명기 5장 16절에서는 ‘주님이 주신 땅’이에요. 주님이 주신 땅은 이 땅에는 없어요. 지금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주님이 주신 땅이 아니고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한다.’ 하는 것은 지금 유인책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와 주 밖에 있는 자를 구분짓기 위한 유인책이에요.

“네 본색을 드러내라. 네가 순종을 하는데 순종하는 그 목적과 의도가 뭐냐? 의도 있지? 노림수가 있잖아. 너 잘되려고 순종하잖아 지금. 내 말 믿고.” ‘주 안에서’는 빼버리고 ‘엄마한테 잘해주면 내가 잘 될거야.’ 자기 잘될 것이 욕망의 대상이 된 거예요. 내가 잘되는 것이 최종적이에요. 부모는 뒷전이라니까요. 부모는 그냥 이용의 대상이 될 뿐이고요.

그것은 ‘주 안에서’가 아니고 ‘내 안에서’에요. 사람이 한두 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원리원칙 다 깨버려요. 거제도에 보리밭 코다리집이 있는 모양입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제대로 좀 하라고, 그러면 맛난다고 이야기를 그렇게 했건만 비밀리에 제대로 하는지 가보니까 엉망진창 원칙이 다 깨졌어요. 백종원 셰프가 가르쳐 준대로 안해요.

돈이 탐이 나서. 비빔밥집도 마찬가지고 도시락 집도 마찬가지고. 순진한 마음으로 하라고 백날 가르쳐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 몸 편한게 최고기 때문에. “왜 원리원칙대로 안합니까?” 사도바울이 우리한테 이야기하고 싶지만 우리는 원리원칙대로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 몸 편한게 최고에요.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마감재지만 주님 빠져버리면 내가 마감재라서 내가 잘되고 내 몸 편하면 그만이에요.

이 목숨은 시효가 있지요. 약속이 빠져 있는 목숨은 이것은 지옥으로 골인중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서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하라고 하는데 그 명이 나중에 시편에는 이렇게 돼요. 시편 1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반편성하기 위함입니다. 주밖에 있는 자와 주 안에 있는 자를 예리하게 구분짓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이라는 것을 준 것이고 약속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약속을 운반하는 운반체로 살아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만큼은 하나님아버지와 제대로 된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천국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지옥간다는 그것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서 이 말씀을 내린 겁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집어넣은 거예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은 “자녀들아 네가 신자 맞아?” 하고 같은 말이에요. “네가 신자 맞아?”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자녀라고 해요. 여기 빛의 자녀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 안에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빛 안에서 새로 자녀 되었잖아.” 빛의 자녀라는 겁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가 아니면 어떻게 되는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빛의 자녀가 아닌 자를 뭐라고 하느냐?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하고 그것은 음란한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이스라엘이 없고 이스라엘에 법이 없고, 성경이 없으면 둘로 나눠져요. 좋은 사람 그리고 나쁜 사람으로 나뉠 거예요. 하지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사이에는 벽이 없어요.

나쁜 사람도 개과천선하면, 나중에 착한 일 많이 하면 좋은 사람 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할 수 있는 유도리가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는 지옥가고 싶어도 못가요. 그리고 지옥가야 될 악마의 자식들, 이 어둠의 자식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빛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천국 못갑니다.

그러니 “자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평생 까발리면서 살아라.” 그 말이에요. 남 구원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남 천당 보내려고 애쓰지 마세요. 믿지도 않는 자식 교회 오라고 애쓰지 마세요. 인간은 모두 자기가 마감재라서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 때문에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고분고분한 척 해서 용돈이나 더 타내려고 하는 겁니다. 자식한테 속아 넘어가면 안되고 자식이 부모한테 효도한다고 그 자식이 예수 믿는게 아니에요.

평생을 고집대로 살아왔는데 그 고집 꺾이지 않습니다. 어떤 노래가사에 이런게 있다는 거예요. 노사연이라는 가수의 노래에.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다. <바램>이라는 노래의 가사라는데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니 늙었다고 폄하하지 말고 사람은 익어간다고, 성숙해가는 것이라고 하라고. 익어가는 것이 아니고요. 요양병원에 가요.

파괴되어 가는 겁니다. 본색 드러나는 거예요. 내 안에 귀신들었다고 그거 노출하는 것뿐이에요. 사람이 잘해준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변화되고 안되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대해서 이미 정해진 거예요. 그 점을 좀 구체적으로 해놓은 것이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에 천대가 나와요. 아까 릴레이게임이라고 했지요.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또 자식으로 천대까지 내려온다는 거예요.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내가 준 땅에서.’ 약속의 땅입니다. 그 당시는 가나안 땅이에요. 가나안 땅과 다른 땅과 구분합시다. 제가 구분하자고 한다고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는 두 종류의 땅이 있는 거예요. 약속이 있는 땅과 약속이 없는 땅 두 종류가 있고, 약속이 있는 땅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전환되어서 들어갈 수가 있지요.

그냥 막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만든 자식으로 생산되어야 천국가는 거예요. 뻔한 이야기인데! 뻔한 이야기거든요. “목사님, 약속은 뭡니까?” 약속은 주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약속이에요. 약속은 주 안에서 만나요. 내 안에서가 아니고, 내가 최종 마감재가 아니고 주 안에서, 주 안이 최종적인 마감재에요.

목숨이라는 것은 간직하라는 것이 용도가 있어요. 목숨은 마치 어음 같아서, 수표 같아서 그냥 종이쪼가리에요. 운명이 왔을 때, 약속이 왔을 때 후딱 바꿔치기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영원한 약속과, 주님과 바꿔치기 하라고 우리에게 목숨 준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에 한해서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원리를 주셨는가? 그것은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와요.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준 거예요. 이게 아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그냥 아버지하고 그냥 사셔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들보고 특수한 임무를 준 거예요. ‘지금 이 세상에 장차 천국에 올 내 아들들이 있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자력으로 이 천국까지 오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다리를 놓자.’

내 아들, 이 독생자를 그냥 주는 거예요. 죄인에게 내어주는 거예요. 아들을 받고 난 뒤에 내가 하나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 그게 제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바탕이 마련 된 거예요. 이 세상 어느 종교가 있더라도 하나님아들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은 복음밖에 없어요. 복음이 독생자가 나타남으로서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된 겁니다.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거예요.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그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는 그것은 전부 다 상상의 우상이야. 거짓이야. 마귀가 만든 하나님이야.” 진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아는 거예요. 아들을 보게 되면 ‘예수님만 아들이고 나는 아들이 아니었구나.’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이 아니면 뭐냐? 우리는 마귀의 종이었지요. 율법의 종이고 저주의 종이 된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그 전까지는 네가 육에 속해서 마귀의 종, 육의 종, 저주의 종이 되었지만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이제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8장 14, 15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어째서 그렇게 성령이 옵니까? 그것은 먼저 아버지가 너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들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내어줬다는 말은 이 땅에 아들 같은 아들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서로를 봐도 아들은 없어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두 종류의 아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탕자, 하나는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착실하고, 가출한번 해본 적 없는,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수발들면서 평생을 아버지한테, 남들 보기에는 효도, 또 효도를 했던 그 맏이가 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아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마감재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 편한 것, 자기 행복한 것, 자기밖에 몰라요.

인간은 다 누구누구의 아들이었잖아요. 전부 다 자식이라고 여겼던 그 자식을 누가복음 15장을 통해서 두 종류로 쪼갭니다. 둘 다 문제 있는 것은 맞아요. 둘 다 문제 있는 것은 맞는데 그 문제 있는 것 중에서 제대로 독소조항, 독소라는 요소를 탕자라는 이름으로 빼돌리는 겁니다. 주목하라는 말이지요.

진짜 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고,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을 제 3항으로 여기고, 그리고 1항, 2항, 세상 사람들이 선악구조 안에서 맏이는 착한 사람, 탕자는 나쁜 아이, 이 선과 악의 대립구조에서 파악하지 못한 그 제 3의 틈 속에서 예수님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신 거예요. 제 3항으로.

그래서 둘로 쪼갭니다. 탕자는 그야말로 밥 빌어먹고, 돈 다 날리고, 거렁뱅이 되어서 뒤늦게 뻔뻔스럽게 자기 주제파악을 했는지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빌어먹겠다고, ‘그냥 종으로나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오는 거예요. 그 모습이요, 그 탕자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인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자기주제파악이 된 인간이 있느냐? 전부 다 자기잘난맛에 살아가는데.” 그야말로 인간은 최선을 다하여 자기를 빛내기 위해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나는 아버지 앞에 자식도 아닙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주께서는 현재 인간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 그 생생한 원인과 이유를 보여주는 자만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내어버림당한 예수님 십자가 지신 그 취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취지를 담은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성도도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둬줄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그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성령받은 양자입니다. 그래서 양자잖아요. 친아들이 아니고 양자에요. 친아들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양자의 영을 받은 거예요. 그냥 특혜 받은 거예요.

갈 수 없는 나라에 가게 된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끔찍한 이야긴데, 지난 시간에도 끔찍한 이야기를 했는데 끔찍하게 느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번에는 진짜 끔찍할 거예요. 예수님이 설교하니까 뒤에서 제자들이 웅성웅성 거립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제자중 하나가 소직을 전합니다. “예수님 형제하고 모친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는 것 같지요. ‘아, 예수님의 형제와 모친도 예수님 설교 들으려고 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지요. “내 동생들은 여기 앞자리에 앉아라. 어머니도 오셨습니까?” 이랬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 48절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시비조로 나와 버렸어요. 내 동생, 내 모친은 하나님 아버지가 생산해내야 되지 너희들이라는 육으로 약속은 엮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육으로서는, 육과 영은, 약속은 엮이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 배신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배신, 자기민족에 대한 배신, 국가에 대한 배신을 해야 돼요. 지금 태극기부대집회를 주도하는 전광훈목사 있잖아요. 목사라고 보지도 않지만.

그 사람에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기조국에 대해서 배신해야 돼요. 대한민국 그 나라가 이 나라가 아니에요. 지금 엉뚱한 데모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뿌리에 대한 배신입니다. 부모가 날 낳아준 것이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을 볼 때 내가 낳은 자식으로 보면 안돼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배신해야 돼요.

‘나는 효도한다. 나는 잘난 맏이다.’ 아닙니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배신해야 됩니다. ‘나는 탕자일 것이다. 나는 인간도 아닐 것이다. 나는 신자가 아닐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 바탕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아브라함 자손이라 해요. “아브라함 자손 아니야. 너희는 음란한데서 나온 자손이고 사생자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요.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배신 안하려는 것이 문제에요. 그놈의 계획을 세워서 문제고 호미곶에 해가 떠서 문제에요. 우리 동네에도 산이 있어요. 거기 다 올라가요. 비는 거예요. 왜 빕니까? 자기한테 충실하기 위해서, 배신 안하기 위해서.

에베소서 5장 14절입니다. 지난시간에 했는데 또 해야 되고 자주 해야 돼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 말씀을 왜 했겠어요? 잠자는 자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깨어나라.

심청이가 왕후가 되고 난 뒤에 자기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잔치를 벌였어요. 온 동네 소경들 다 모아놨는데 그 나라에 소경이 왜 그리 많은지요. 다 모아놓으니 찾을 수 있었지요. 자기의 늙은 아버지에게 가서 손을 만지면서 “죽었던 청이가 여기 왔습니다.” 할 때 심봉사, 심학규의 눈이 감겼었거든요. 손을 만지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눈을 뜨면서 하는 말이 “청아!” 그렇게 되었어요.

왜? 죽은 줄로만 알았거든요. 예수님은 죽은 분이에요. 죽은 분이 자신의 영을 가지고 우리의 손을 만지니까 “주여!” 하고 눈을 뜨는 거예요. 이게 잠자는 자가 깨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주여, 라고. 우리는 주님의 운반체에요. 약속의 운반체에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산다.’는 이것은 세상에 대한 유인책이었습니다. “이 가짜들아. 네가 욕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전부였잖아. 그래놓고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빌었잖아. 하나님 이용하려고. 최종적인 마감재인 너 자신을 욕망하면서.”

그러니까 이 약속이 없는 인간들, 약속이 없는 인간인지, 약속이 있는 인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에베소서 5장을 먼저 설정한 거예요. ‘주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자 안에서 너는, 부모는 그런 관점에서 자식에게 약속을 이야기하고 자식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가 전해준 그 귀한 복음, 그것은 내 목숨과 바꿔치기 하라고 지금껏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고정된 천국이 있는데, 변동하지 않는 축복이 있는데 우리는 주제파악이 되지 못해서 나만 최종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심학규가 눈을 뜬 것처럼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용도를 알게 해주시고 나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닌 것을 기쁨으로, 눈을 뜬 채 다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