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엡 5장 25-27(남편들이여)191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25-27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내와 달리 남편은 뭐가 없느냐? 복종하는 대상이 없어요. 여자에게는 복종하는 대상이 있지만 남편에게는 복종 없이 살아가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들이 먼저 시도해야 될, 아내가 하기 전에 남편이 먼저 시작해야 될 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 “아내 사랑하기를……”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사랑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그 뒤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죽이셨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남편은 탈탈 털어야 되는 거지요.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그 살 이유가 있지만 남자라는 것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죽어야 되는데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남자의 사명은 죽는 것이 사명이에요. 사는 것이 아니고. 반면에 ‘여자의 이름은 하와라, 생명이라.’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자는 이 땅에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왜 남자와 여자를 구분을 지었는가? 옛날에 교육수준이 높지 않을 때는 ‘그냥 여자는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다. 공부해도 소용없다. 여자는 그저 고등학교만 마치고 시집갈 준비해서 남자 하나 잘 만나면 된다.’고 우리 클 때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런데 요새는 그런 것이 통하지를 않지요. 좋은 여자 만나려면 좋은 남자가 되어야 되고, 질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저부터 질좋은 여자가 되어야 돼요.
자기는 수준도 안갖춰놓고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기업 계약직으로 들어간 그 첫날에 계단 올라가다가 회장 아들과 마주치면서 커피잔 쏟았는데 한 눈에 반하는 그런 경우가 드라마처럼 생기면 모르겠지만 신데렐라같은 그런 경우는 없고요. 좋은 남자 만나려면 좋은 여자가 되어야 되는데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좋은 여자 되고 보니까, 여자들이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까 ‘구태여 남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 남자나 여자의 그 구별 자체가 내게 의미 없다. 그냥 나는 절대적 나다. 이제는 남자 여자 그런 것 없이 나는 절대적인 나로 있는 그것이 목표고 그러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남자, 여자, 이것을 꾸준히 고집스럽게 구분하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합니다. 여자의 존재가 뭐냐 하면,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사람의 대표자인, 그 때는 사람이 아담밖에 없었으니까요, 사람의 대표자인 아담과의 대화의 창구로 배필자가 등장했어요.
그러면 여자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과 사람의 대표자인 남자와의 대화의 창구역할을 하라고 여자를 만드신 거예요. 남자는 흙으로 돌아가고 죽는 것이 남자의 할 일이지만, 남자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셨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여자라는 겁니다. 지금 안 믿긴다는 눈치를 하고 계시는데요.
하나님과의 대화의 창구가 여자가 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그 주고받음이 여성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해서 죽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어디서 준비했느냐 하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아를 준비해 놓은 겁니다.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창구. 그게 여성이에요.
여성은 이름이 죽음이 아닙니다. 남자하고 달라요. 아담은 이름이 흙, 죽음이지만 여자는 생명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아담의 입장에서 인간을 대표하고 항상 전체만을 생각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면, 생명을 얻으려고 하면, 여자를 붙들어야 되지요. 여자를 붙들어야 그 여자쪽에서 메시아가 오니까, 뱀을 이길 수 있는 메시아가 나타나니까, 여자 이름이 생명이니까 여자쪽을 붙들어야 되는 겁니다.
여자쪽을 붙들어야 되는데 남자는 모든 것, 항상 전체를 생각하다 보니까 여자보고 복종을 강요해요. “너는 내 밑으로 들어오라. 너는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너는 나에게 무조건 내 말 들어야 돼.”라는 식으로 남자들이 계속해서 나가는 겁니다. 보통 남자들이 입이 무겁다고 하지요. 다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말하기 전까지는 말로 취급을 안하니까 입이 무거운 거예요.
별로 웃지도 않네요. 남자가 입을 뗄 때 제대로 의미있는 말을 시작한다고 남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여자들이 나불거려 봐야 그것은 이야기로 취급도 안해요. 그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고 “가만 있어봐라. 내가 이야기한다.” 이러면 그 집안의 가장이, 어른이 이렇게 하면 다들 “잠잠할지어다”가 되는 거예요.
“시끄럽다! 이제는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이게 남자의 권위 아닙니까? 남자의 권위가 있어야, 영이 서야 집안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집의 어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어요. 경상도 사람들은 알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은 잘 몰라요. ‘덩더꿍이’라고 했거든요. 사전에 안나오는데 ‘덩더꿍이’가 뭐냐? ‘덩더꿍이’라는 것은 가볍다, 촐랑댄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성급하게 다음 일을 한다, 차분하지 못하다, 그런 뜻이라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신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데 성경에 보니 덩더꿍이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값을 다 지불하고 구원에 나서기 때문에 덩더꿍이든 아니든, 키가 작고 못났든, 배웠든 못배웠든, 직업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주님께서는 자신이 값을 치르고 구원에 나서신다는 그 말이지요.
값을 치르고 구원에 나서요. 이미 값을 치르고서입니다. 내가 지금 덩더꿍이냐 아니냐는 그것은 문제꺼리도 아니에요. 그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입니다.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인물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관계없어요. 내쪽에서 뭘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값을 치렀다니까요. 극장 안에 들어왔는데 누가 대신 입장료를 다 냈어요. 천국에 프리패스, 그냥 들어가면 된다는 그 말이지요.
물론 들어갈 사람들을 주께서 뽑지요. 그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값을 이미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공짜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분이 굉장히 좋거든요. 가볍지요. 인생의 모든 근심 걱정이 한꺼번에 다 날라갔으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갑자기 우리보고 “이미 값을 치렀기에 너는 구원받는다.”라고 하지 않고 “너 남자야, 여자야?”를 묻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만 받으면 얻을 것 다 챙겼다고 시시덕거리면서 좋아할 것인데 갑자기 성경에서 “너 여자야? 아니면 남자야?”라고 묻는 거예요. “너 여자야? 그러면 남편에게 복종하라.” 또 “네가 남자야? 그러면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성령을 받아서.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것을, 아까 말했듯이 구원이 사랑이지요, 그 사랑이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인간을 의도적으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남자, 그리고 여자로 구분한 그 취지를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된 자를 통해서 살려내겠다는 겁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어요. 덩더꿍이가 되든 그것은 관계없어요. 촐랑대든 차분하든 그것은 관계없어요.
이미 주께서 찾아내시면 그 사람은 값을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적인 값을 치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 다음부터 묻는 것이 “너는 남자야” 하면 남자의 역할을 해야 되고 “너는 여자야” 하면 여자의 역할을 하라는 거예요. 여자의 역할은 이미 누구의 생명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여자의 이름 생명입니다. 하와에요.
자발적으로 기쁘게 주님께 복종하는 사람 그게 여성이 할 일이고 이 지상에서도 구원받은, 아니 구원받지 않은 여자는 관계없어요, 구원받은 여자의 태도는 뭐냐하면, 여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해내는 것, 이게 여성으로서 해야 될 일입니다. 물론 교회가 다 해야 될 일이지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 것을 굉장히 감사히 여깁니다. 그게 자유지요.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준 특징은 비독립적이에요. 여성 홀로 설 필요가 없어요. 자기를 구원하신 남편 되신 예수님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거요. 그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로마서 14장 8절에 보게 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들으면 끔찍한 이야기지만 어쨌든간에 사도바울은 예수님의계시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용납이 안되는 겁니다. ‘나’가 되려면 사람이 되고 인간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남자냐, 여자냐?’로 보는 거예요. ‘여자는 여자역할을 하고 남자는 남자역할을 해라. 이미 값을 치르고 거저 구원받은 자들아.’ 그 역할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 역할을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그 구조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라는 관계 또는 뼈대가 드러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관계, 뼈대가 드러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거겠지요. 식판 같은데 홈이 나 있잖아요. 재떨이도 마찬가지고요. 안에 내용물이 꽉 차더라도 탈탈 털어내면 식판의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그 구조가 다 드러나지요. 주님께서는 사랑의 구조, 우리가 한평생 어떻게 착실하게 살았느냐는 그런 것은 묻지 않고 우리를 값없이 구원한 사랑의 구조 그 뼈대만 드러나면 그게 주께 영광이고 주께서는 만족하는 겁니다.
어제 누굴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면 그만입니다.”라는 이야기. 얼마나 반갑던지요. 하나님께 영광, 주님께 영광돌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면 돼요. 그 사랑을 드러내는데 이 식판에 내가 한평생 살아온 내 공로나 내 잘난 것이 너무 많이 덮여 있어요.
많이 덮여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남들 보기에 내가 근사해보이고, 침착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예수 믿고 난 뒤에 복받은 자처럼 보이고, 몸도 건강하고, 자랑거리가 넘쳐나는데 주님께서는 식판채로 그걸 툴툴 털어내 버리는 거예요. “이 쓸데없는 이것 때문에 사랑의 구조가 안보이잖아.” 다 털어내 버리는 겁니다.
그 뼈대가 뭐냐? 바로 남편 되시는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거예요. 그것만 남아요. 주님의 사명이 죽는 것이라면, 주님이 남자라면 “남자들아! 예수님처럼 죽으라.” 그 말입니다. 죽는 것이 사명이라는 겁니다. 값없이 구원받을 때, 이미 값을 치르고 구원받을 때 기분 잠시 좋았지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살 생각하지 말고 죽을 생각해라.” 그렇게 나온다면 갑자기 여기서 약간은 고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안죽으면 지옥갑니까?’ 이런 자기생각이 바짝 잠깐 동안 떠오르기 마련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 오게 되면 남자의 역할은 흙이 되어서 흙으로 가는 죽는 역할이에요. ‘내가 뭐해서 살까?’ 그 ‘살까?’라는 말을 붙이지 마세요. ‘이왕 죽는 것 뭐하다 죽을까? 누구에게 목숨 바칠까?’ 라는 그 생각하는 그 일이 바로남자의 일이에요. 남자는 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여자는 뭐냐? 그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타난 뒤에 인간이,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나타나는 것, 그게 영생이거든요. 그러면 남자가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되고 주께서 모든 일을 마무리지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그 무엇,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죽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없었는데 새롭게 생긴 그 무엇, 그걸 오늘 본문에서 교회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곧 사랑이지요, 사랑. 바로 “그 사랑을 위해서 남성들이여 남편들이여. 죽으라. 예수님처럼 죽으라.” 지금 그걸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보고 죽으라고 하면 기분 되게 나쁘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만 해도 기분 나빠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그냥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습니다. 소중한 내가 죽어요. 그냥 내가 아니고.
소중한 내가 죽는다. 소중한 내가 죽어버리면 지금껏 살면서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이 다 허사가 되어버립니다. 죽는 순간에. 지금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은 누가 소중하냐? 내가 소중하거든요. 인간의 본심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목숨걸만한 것을 통해서 확인되기 마련이에요. 인간이 진짜 소중한 것은 뭐냐? 그 말은 ‘이것 같으면 내가 목숨하고 바꿀거야.’ 하고 목숨하고 바꿀 그것이 그 사람의 본심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다면 ‘차라리 내가 얼마 살날이 남지 않은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 하지만 자식을 살리는데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내 목숨 줄게.’라고 한다면 그 분의 본심은 지금 어디에 쏠려 있느냐 하면, 오로지 그 자식한테 다 쏠려 있는 거예요. 제가 교인들에게 “교회를 위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주님을 생각해야지 교회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이야기는요, 깊이 있게 잘 들으셔야 돼요.
“교회 신경 쓰지 말고 주님 신경 쓰세요. 교회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구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구원하지 교인들의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교회에 돈이 있든 없든 신경쓰지 말고 교회가 개판이 되어도 놔두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이 교회를 신경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교회보다 다른 것이 신경쓸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신경쓰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내 집구석’입니다. 이게 목회 30년 이상의 노하우에요. 교인들은 절대로 교회사랑 안할뿐더러 주님도 사랑 안해요. 목숨하고 바꿀 것이 따로 그동안 오랫동안 구축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내 집구석입니다. 내가정이에요. “목사님, 교회 헌금이고 뭐고 신경 하나도 안쓸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챙길것이 따로 있거든요. 하고 따로 뭐가 있어요. 그게 자기집이에요. 자기패밀리고 가족입니다. 소중한 비둘기같은 내 집이에요. 내 자식.
그래서 교회 신경쓰지 말고 주님 신경쓰라는 거기에 한 가지가 빠졌어요. “교회 신경쓰지 말고 여러분 집구석도 신경쓰지 말고 주님 신경쓰세요.” 그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신경쓰는 것은 교회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교회 잘해주면 우리 집이 복받겠지. 내가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내 집구석이 잘되겠지. 내 인생이 잘 풀리겠지.’ 하는 거기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신경써서 마치 하나님께 일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조작해 내는 겁니다. 뭐라해도 소중한 것은 나에요. 그런데 내가 없어진다면? “남자들이여, 남편들이여 여러분 없애세요. 여러분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없애버리세요.” 하는 그 말이 아, 과연 이것이 인간으로, 남자로서 성립되느냐? 인간의 힘으로서는 성립이 안돼요.
그러면 성립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왜 이 말씀을 주셨느냐? 히브리서 1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다시 읽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 말은, 세상의 모든 부스럭거리는 소리, 모든 풀잎 움직이는 소리, 비바람소리, 모든 계절이 가는 소리, 이 모든 사소하고 작은 것 하나 전부 다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 어느 것 하나 말씀이 없는데가 없고, 말씀이 꽉 차 있고, 말씀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척될 뿐인 것을 아는 거예요. 거기에 나는 없어요. 내 집구석도 없어요. 내 가족도 없고 내 자식도 없어요. 전부 다 말씀으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만큼 우리가 살아온 겁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남자가 그냥 자진해서 ‘나는 남편이다. 이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봤으니까 내가 아내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야지.’ 해봤자 그것은 안통합니다.
그것은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절대적 나를 자력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마지막 소중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에요.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안되거든요. 안되는 것을 말씀이 되게 하십니다. 어떻게? 여자가 남자로 하여금 죽도록 유도합니다. 여자가 남자로 하여금 죽도로 유도해요. 생전 처음 듣지요.
부산항에 도선사라는 직업이 있어요. 도선사가 뭐냐? 부산항에 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다의 큰 배 선장들이 항해할 때 늘 넓은 바다에서 항해를 할 때는 바다가 넓으니까 걱정이 별로 없지만 항구에 들어올 때는 부딪히기 쉽거든요. 그 때는 통통통통, 작은 배가 안내를 해줘야 돼요. 그 일을 하는 아주 연봉이 높다는 도선사가 있어요. 인도해주는 사람이에요.
여자가, 영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쪽에서 그 남자를, 죽어야 될 사명을 가진 남자를 살살 유인해서 기어이 죽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런 여성을 만났으면 여러분들은 땡 잡은 거예요. 여자가 남자를 유인해서 남자로 하여금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말씀에 입각해서 죽도록 만듭니다.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남자 중의 남자, man of man,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름을 두 가지 갖고 있어요. 아브람과 아브라함. 아브람 때는 사라를 그야말로 자기 시다바리로 여겼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잘 들으셔야 돼요. 하나님은 여자한테 계시를 준 것이 아니고 남자인 나에게, 이 가장인 아브라함에게 계시를 주신 겁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것이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그 계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아브라함, 남자가 완전히 배제가 돼요. 계시는 본인이 받아놓고 실제로 계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는 주인공인 남자는 빠지고 남자가 시시하게 본 사라가 그 계시의 한복판 중심 주인공으로 들어가 버려요. 아담이 할 일은, 남자의 할 일은 흙이 되어서 죽는 거예요. 죽는 것이지만 하와의 이름이 생명이라서 생명을 죽음가운데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하와중심으로 아담이 움직이도록 주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역량 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법칙을 인간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잘 모를 것이니까 제가 사사기 4장 9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 4장 9절에 여사사 드보라가 나옵니다. 드보라 시대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전쟁의 사령관이 바락이라는 사람이에요. 바락이 자기가 전쟁에 나서야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8절에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여기서 제가 의도적으로 ‘바락은 남자고 드보라는 여자다.’ 제가 인위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이렇게 매치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자체가, 하나님이 매치시켜요. 말씀이! 남자가 남자역할을 안하고 여자 치마폭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9절에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여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겁쟁이 남자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하니까 용감한 여자 드보라가 하는 말이 9절에,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전쟁에서 직급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남자라면 이 전쟁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그런데 네 목숨이 아까워서 벌벌 떨면서 지금 여자 뒤에 숨어 있구나. 이번전쟁의 최종승자는 남자를 대표하는 바락이 아니고 여자가 최종승리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사사기 4장 21절에 보면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아, 독한 여자에요. 이번 수련회에서 <에스더> 하는데요. 그 시작은 예쁜 여자로 시작해요. 에스더가 예쁜 여자로 시작해요. 미스 바사에 나와서 1등 했거든요. 그래서 왕비가 되었는데 예쁜 여자부터 시작해서 금식하고 난 뒤에 아주 독한 여자가 되었어요. 하만이라는 적을 그냥 죽이지 않고 그 식구를 말뚝에다 오댕꽂이 하듯이 다 꽂아서 죽여버리라고 한 거예요.
그 여자를 가지고 잔인한 여자라고 해요. 소찬휘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도 있는 아주 “좐인한 녀자라……” 예쁜 여자는 필요 없어요. 성경에서 필요한 여자는 잔인한 여자입니다. 전사. 배우 ‘졸라’같은 무서운 여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오늘 제목을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여자라고 할까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여자.
이것이 오늘날 영적싸움을 해야 될, 악마와 싸움을 해야 될 교회의 여성성입니다. 에스더가 그것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해서 남자의 질서의 판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해놓고 그것이 왜 흙이냐, 왜 죽음의 판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생명되는 여자가 개입해서 뒤차로 들어와서 남자의 질서판을 다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성경내용입니다.
연약한 여자가 와서, 강하다고 우기는 남자의 세계의 질서를 연약한 여자가 와서 뒤집어 엎어버려요. ‘그것은 생명이 아니고 목숨 연장책이다. 절대로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지만 남자의 것이 부러워서 ‘나도 남자처럼 세상 것을 얻어야지.’라고 나서신다면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음녀라고 해요. 그게 바로 음녀입니다.
남성의 힘과 권력이 부러워서 ‘나도 공부 많이 해서 저거 차지해야지.’ 하는 것은 음녀고 여성의 역할은 그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약한자로 오셨어요. 약한자가 승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라는 것은 강하고, 배우고, 가진자가 아니고 없는 자, 모자란 자, 약한 자를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과정자체를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21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설교를 다시 할게요. 덩더꿍이가 되었든 못난자가 되었든 주님께서는 이미 값을 치르고 구원해요. 값을 치르고. 그러면 이미 생명을 얻은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권력같은 것이 하찮아요. 정치권력이라든지 재벌 이런 것이 별로 중요치 않아요. 이미 값을 치렀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어떻습니까?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되고, 침착해야 되고,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해야 돼. 끊임없이 어떻게 해서 살고자 하는 그 집착, 집념이 남자에게 강합니다. 남자는 이 세상 전부를 다 자기가 대표하는 대표자로 자부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사무엘하 17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아히도벨하고 라이벌이 후새인데요. 압살롬이라는 다윗의 셋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스라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도망가는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책사, 제갈량같은 인물이 압살롬에게 붙어서, 이렇게 하시면 현재 이스라엘의 마음을 끌어서, 이를테면 여론조사하면 50퍼센트 이상 잡을 수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확 잡을 수 있습니다, 한 거예요.
그런데 다윗편에서 후새라는 책사가 마치 귀순하는 것처럼, 압살롬의 반란군에 붙은 것처럼 위장해서 들어갑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란군대장이 두 사람의 책사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해요. 아히도벨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약할 때 지금 바로 치면 완전히 이길 수 있으니 지금 치세요.” “좋다, 좋아. 그러면 후새의 말도 들어보자.” 후새가 하는 말이 “다윗은 전쟁의 용사고 도사입니다. 지금 쳐들어갔다가 그가 마지막 힘을 다해서 싸우면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먼저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먼저 얻고 난 뒤에 공격해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라고 다윗에게 시간 벌어주기의 용도로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어느 것이 더 멋있어 보이고 어느 것이 더 대범한 왕처럼 보이냐 하면, 위장귀순한 후새라는 책사의 말이 압살롬 자신을 더 멋있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을 알고 압살롬이 “다음에 치자”하고 후새의 책략을 선택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견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서러워하면서 아히도벨은 자기 집에 가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매어 죽습니다.
아히도벨의 이 모습이 오늘날 불신자들, 모든 남자들이 가는 길이에요. 자살입니다. 그들은 자기뜻, 자기질서, 자기성과대로 안되면 항상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자기자존심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남자다.’ 에 모든 자존심을 걸었기 때문에 남자의 체면이 구겨져 버리면 남자로 살 이유가 없기에 자살해버려요. 불신남자들은 매일같이 자살합니다.
어차피 흙이기 때문에. 어차피 흙이거든요. 남자는 흙이에요 그냥. 죽는데 이왕 죽는 것 무뿌리라도 뽑고 죽겠다고 하는데 무뿌리는 뽑히지도 않고 엉뚱한 것 뽑다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는 두 가지 남성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고 또 하나는 아히도벨같은 사람이 있어요. 아히도벨은 모든 불신자의 남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아히도벨같이 자살하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가룟유다에요.
남자는 모 아니면 도입니다. 참, ‘이거 안되면 칵 죽는다.’ 그게 뭐 남자의 가오, 오기, 위신? 남자는 위신에 죽고 위신에 살거든요. 이 남자들이 얼마나 바보인지, 굉장히 바보거든요. 저도 남자지만. 이 남자는 세상의 모든 것, 전체, all, 전체의 주인공이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한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남자의 그런 헛된 시도를 노골적으로 생중계해서 보여준 남자가 있었어요.
이세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이에요. 바둑을 보게 되면 이런 좋은 점이 있어요. 한수를 두게 되면 그 한수로 인하여 전체 판도가 다시 재조정되어야 됩니다. 남자는, 나는 옳은 결정을 내린다고 한수를 두게 되면 그 수로 인하여 경우의 수가 갑자기 수백 가지가 더 늘어나는 거예요. 나는 옳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보니까 그게 패착이 될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세돌이라는 기사가 바둑을 하면서 어떤 수를 두니까 인공지능이 “그것은 허수입니다. 이유는 이렇게 두고, 이렇게 두고……, 그렇게 결국 그 수는 허수였습니다.” 하거든요. 그 허수를 안두기 위해서 다른 수를 두게 되면 지금까지 둔 24까지는 착수를 잘했다고 봤는데 경우의 수를 245가지를 다 따져보니까 “그것은 허수였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남자들은 인생을 살면서 뭘 알아요? 세상에 대해서? 자기딴에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고 내린 그것이 그 누구누구에게 파생된 영향을 줘서 결국 그것이 내 발등을 찍는 경우로 돌아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몇 수 앞은 봤지요. 그러나 수백 수 앞을 못 보는 것이 인간인데요. 그러면서도 남자는 이 세상 전부를 먹겠다는 그 야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일본소설 <대망>인가, 큰 소망을 가진다는 그 대망, 그래서 크게 망해버렸잖아요. 남자가 하는 모든 결정은 다 본인이 자살하는 수순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나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내가 나를 죽이는 패착을 놓았다는 그 이야기, 되돌아보면 그런 경우들만 죽 이어져요.
인간은 왜 그런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는 선하다고 여기는 그 착수, 시도가 자기에게 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말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남자가 그럴진대 하물며 거듭나지 못한, 성령 받지 못한 여자는 모델이 누구냐 하면, 남자가 모델이거든요.
그래서 그 남자 따라 나도 그렇게 해보겠다고 하다가 그 남자, 그 여자 전부 다 자살골, 전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착수, 그러한 행위와 선택들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어요. 지금도 반복해요. 진즉에 주를 위해서 살라고 그렇게 해도,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돼.”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그것이 패착이에요.
남자는 “우리 가정은 내가 지킨다.” 가정을 내가 지키는 그것이 가정 말아먹는 짓이에요. 가정 지키겠다고 마누라나 패면서 “다 이게 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 살리겠다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해서 전부 다 패착을 둔다고요. 주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얼마나 간단해요, 진리가. 이게 인공지능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것이 살길이다.”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습니다.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들어요. 마이웨이라고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그 <마이웨이> 자기 딴에 뭐 후회 없이 살았다고요? 천만에 말씀. 살고자 하는 그 자체가 자살골입니다. 그게 자기를 죽게 만드는 거예요. 지옥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 여자가 필요해요. 여자 자체가 생명이기에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여자가 필요한데 그 여자가 어떻게 인도하는가? 창세기 12장에 보니까 그 사라가 예뻤어요. 애굽에 내려갔는데 애굽의 바로왕이 예쁜 여자 가만 안두지요. 껄떡거리지요. 작업 걸지요. 권력으로 사라를 자기 아내 삼으려고 합니다.
애굽왕이 “네 옆에 예쁜 그 여자는 누구냐?” “내 누이동생입니다.” “거 참 잘됐다. 너와 내가 사돈 맺으면 좋겠구나.” 해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바로왕이 가지고자 했어요.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왜? 절대적인간을 대표하니까, 모든 질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니까. 예쁜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써는 오기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날 밤에 갑자기 하나님이 개입해 버렸습니다. 그 남자중의 남자라는 바로왕이 완전히 죽을 뻔 했어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큰 재앙을 내리고 난 뒤에 혼쭐나서 물었습니다. “다시 말한다. 저 여자 누구야? 진짜 너의 누이동생이야, 아내야?” “아내입니다.” “진즉에 이야기하지.” 아주 혼쭐이 나서 아브라함을 내보냈습니다. 물론 그 때 많은 재물을 얻고 애굽에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오지요.
대체 이런 사단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아내 사라로 인하여 일어났어요.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갔는데 거기에 아비멜렉이라는 유력한 족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또 묻습니다. 하여튼 어딜 가도 예쁜 여자를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그 묻는 의도자체가 ‘내 아내 삼아도 되나?’ 그런 뜻이겠지요.
“내 누이동생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남자거든요. 남자라는 것은 어쨌든 살아야 되니까. 죽기 싫다, 그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한테 이런 섭섭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살면 되잖아.” 요새 같으면 부부싸움 한바탕 할 이야기인데요.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살자.” (창 12;13)
왜? 내가 복 받았으니까. 내가 계시 받았고 당신은 계시 안받았으니까 당신 덕분에 내가 살자. 당신은 하나의 소모품이니까 당신은 있으나마나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다. “다 이게 우리 가정 살리는 거야.” 흔히 남자들이 하는 소리로 “이게 다 우리 가정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그 짓이 결국은 아비멜렉 족장한테 걸려서 또 동침을 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창 20:3)
그러면 이 사라라는 이 여자의 존재는 뭐냐? 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는 이 여자가 나대지 아니하면, 여자쪽에서 하나님이 작용하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진 계시는 헛방이라는 것을 깨닫는 남자로서 달라지고 있어요. ‘내가 무시한 여자쪽에서 실질적인 일,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진행이 되고 나는 그 콩고물이나 얻어먹는 주제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알았어요.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미 태가 죽은 여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람’이 아는 식이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다.”라는 순간에, 그런 계시를 주시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네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그 점이 새롭게 부각이 되는 겁니다.
아내가 죽은 것은 뭐가 죽은 것이냐? 곧 이 아브람이라는 이 남자, 나라는 이 남자가 그 아내의 죽음에 참여해야 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게 됩니다. 그냥 아기를 못낳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만큼 자기자손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면서 현실적으로서는 아기를 못낳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
여기서 말씀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함이 새롭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천국에 갈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아내의 불임사실을 통해서 새롭게 자기 위치를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내의 불임을 통해서. 그 전에도 알았지만.
애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도 그만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마당에서 그 하나님의 계시, 천국이 있는 마당에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인 것을 아내의 불임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겁니다. 이 아내의 무능 속에, 곧 아브라함의 무능성, 죽음이 새롭게 여기서 펼쳐지는 겁니다.
이것은 아히도벨과의 차이점이에요. 아히도벨은 독립적이에요. 모든 일을 내가 해야 돼요. 그 일 아니면 내가 자살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 오기가 있어요. 아브라함도 역시 남자입니다. 하지만 여자쪽에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통해서, 남자가 오기를 일으켜서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벌이는 자가 아니라, 생명쪽에서 움직이는 일에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야 될 그런 남성, 그게 남자의 할 일인 것을 알아요.
메시아는 여자쪽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사라에게 어떤 변화가 있기를 원하지요. 사라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내년 이맘때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미 분명하게 불임여성이라는 것이 확실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남자는, 아브라함은 그 때부터는 약속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거지요.
여자를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그 약속, 그 약속에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겁니다. 그 사라는 그냥 사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에 사라는 태가 죽은 여자, 아기 못낳는 여자지만 죽음 그 너머에 있는, 그 죽음 너머의 하나님께서 계획한 어떤 여인, 그게 바로 교회지요. 오늘 본문의.
여인, 하나님이 생각한 여인.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색시.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그것. 그러면 남자들이여. 이 세상 말고, 이 세상에서 되도 않는 가오 세우지 말고, 골목식당이니 그런 짓이나 하지 말고, 죽음 너머에 있는 것, 죽음 너머에 있는 그것을 향하여 남편들아,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야 되지요. 아주 자발적으로, 기쁘게! 덩더꿍이가 되어도 괜찮아요. 이미 값을 치렀으니까.
로마서 14장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진정한 우리 남편이 모델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주의 것이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신부가 되고요. 어차피 우리는,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렇다면 죽을 때 따로 내 독자적인 자존심과 위신을 만들기 위해서 패착을 놓지 마시고, 자살하지 마시고, 이미 주의 약속된 그 생명에 대해서 아낌없이 바쳐야지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없기 때문에.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하지요. 변화산에서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는 딴생각할 필요 없어.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어라.” 다시 약속에다 네 목숨을 바쳐라. 어차피 가만있어도 너는 죽게 되어 있고, 살려고 해도 죽고 죽으려고 해도 죽는데 이제는 성령에 의해서 주님으로부터 이끌림을 받아서 마중 나온 주님에 의해서 인도하는대로, 도선사가 인도하는대로 이제는 제대로 영생으로 가는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성령을 받아야 제대로 죽음 너머에 있는 주를 위해서, 또는 천국을 위해서 합류할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교회라는 것, 성령 받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 하나님의 교회, 성령, 눈에 보이는 교회 말고 성령 받은 사람이 있거든 그분들과 복음을 위해서 서로서로 죽겠다는 모습으로 마주하고 교제를 나누신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주신 생명을 보람 있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살 아니면 영생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적자기자존심 때문에 뭘 해도 자살로 반복되는 생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주님도 모르는 인간, 하지만 성령 주셔서 이미 값을 치렀다는 그 영생의 날을 위해서 아낌없이 기쁨으로 우리의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