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강-엡 6장 10-11절(전신갑주)200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0-11절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사도바울이 뜬금없이 전신갑주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하면, 전신갑주를 입을 일에 쓸모가 있다는 거예요. 전신갑주라 하는 것은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그리고 이것은 공격용이 아니고 방어용입니다. 갑옷을 입는 겁니다. 통으로 전체가 하나로 된 갑옷, 전신갑주, 그것을 입으라고 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고 편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으면서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도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만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이 들리지요.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라.’ 이러면 이해하기 쉬운데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면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전신갑주가 이 세상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인가요? 시장에서 아주 인기 있는 상품이 전신갑주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본문의 사도바울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또 주님께서 인간을 둘로 나눠보신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의 느낌에 전신갑주 입은 것이 느껴지는 사람과 전신갑주라는 것이 생뚱맞고 ‘나는 그런 것은 못 느낍니다. 그게 왜 필요한데요? 필요 없는 것 같은데요? 괜히 입어봐야 활동하는데 무겁기만 하고 그게 왜 필요합니까?’라고 의아해하는 쪽과, 두 종류로 인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 있으라, 할 때 주안에 있다는 그것은, 인간은 모두 다 캡슐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규정이 되는데요. 주안이라는 캡슐 안에 들어 있는 사람과, 주 밖에서는 아무것에도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이 되거든요. 주 안에 있는 사람은 공간자체가 주 안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사람이고, 나머지기는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인데 과연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이 그냥 홀로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이겠느냐, 라고 지금 사도바울은 묻습니다.
그들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 주 안에 있듯이 그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세력권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것을 장담할 수 있느냐?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으로, 방어용 갑옷을 입으라는 것으로 판정이 되는 겁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그냥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밖에 있는 쪽이 자꾸 주 안에 있는 쪽을 공격하는 것이 너희들 안느껴지느냐, 이렇게 되묻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주안에 있어 보니까 전신갑주만큼 좋은 것 없지? 그게 최고지 그지? 그 전신갑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이제 알았어?”라고 우리한테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사람마다 직업이 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공직에 있고, 어떤 사람은 교사하고, 어떤 사람은 농사짓고, 어떤 사람은 목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음악을 하고, 운전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면 어느 동굴에 기어 들어가느냐 하면, 마지막에는 자기전문직업으로 기어들어가요.
‘그래. 나는 말을 잘 못한다. 하지만 난 기계만지는 것이 전공이잖아.’ 하고 기계만지는 그 주특기 그 속에 쏙 기어들어가요. 손님이 왔는데 강아지가 겁이 나면 자기집에 들어가서 멍멍, 짓듯이. 버티는 겁니다. ‘나는 노래는 잘 못해. 하지만 나는 농사 하는 잘 짓는다. 농사꾼이 농사 하나 잘 지으면 되지 노래까지 잘 해야 돼?’ 하고 농사짓는다는 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그 말이지요.
그것으로 자기의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이 인간의 시선의 마지막은 자기주특기, 직업, 거기에 가 있지 말고 전신갑주에 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 나 못났어. 그래 나 무능해. 하지만 나에게는 전신갑주가 있잖아.’라는 쪽으로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들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설교할 때마다, 에베소서 볼 때마다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낯선 이야기가 나와요. 얼추 영생 얻고 내빼려고 하는데 내빼지를 못해요. 계속 추가적으로 우리의 신상에 대해서 내가 나를 규모 있게 변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너 이러냐고 자꾸 추궁하고 묻습니다. “너 이것도 있어? 너 전신갑주 있어? 주 안에 있어?”
내가 시도하는, ‘나는 이 정도하면 나답다’는 그것으로 우리는 버티려고 하는데, 내 자존감으로 버티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자존감을 깨부수는 식이에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내가 인간임을 보여줄 요건이나 조건을 꾸역꾸역 자꾸 자기에게 끌어 모아요.
그걸 어려운 말로 나의 권역, 나의 권리와 힘이 작용하는 영역, 나의 권역이라고 해요. 그 바운더리 안에는 내가 가능한 것들만 거기에 옹기종기 다 모아져 있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냐? 내가 가능한 그 권역 안에, 그래서 나는 나답고 나는 이 보람에 산다고 우기는데, 마치 손님이 오면 개가 개집에 들어가서, 여기는 내 권역이고 나는 이 안에서 제대로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은데 거기다가 “네가 전신갑주가 있어?” 하고 푹 쑤시고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내 능력바깥의 일이에요. 나의 가능성, 나의 유능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전신갑주 안에 있어? 너 주안에 있어?”라고 묻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능자로 다시 드러나게 노출시키는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됨과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대화할 때 그 대화 속에 전신갑주가 나오면 그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전신갑주가 안나오면 주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도발적입니까? 예의고 그런 것 없어요. 사도바울에게는 예의라는 것이 없어요. 예의 차려서 그 사람을 구원시킬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게 능력이지 다른 것은 주의 능력이 아니야.”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를 그냥 툭 쳐보는 거예요. 우리를 툭 치면서, 툭 건드리면서, 너의 논리가 선악논리에 의해서 반응이 나오는지 아니면 복음 안에 있는 자기 때문에 복음으로 나오는지 주께서 건드려 보는 겁니다. 툭 쳐보는 거예요.
선악 논리 안에 있는 사람은 격식이 나오고, 예의가 나오고, 나름대로 평생을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다는 그런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내 인생 개판이야.’ 이게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교회 다녀도 개판, 성경공부해도 개판, 수련회참석해도 개판.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무능하다는 거예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은 “무능한 자야.” 네가 전신갑주를 입으면 유능한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이 무능한 자야. 그 무능을 유지하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서 이제는 주의 사람으로 살아라.” 그 말입니다. 너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전신갑주가 있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신갑주가 악마로부터 오는 공격을, 주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바운더리 쳐준 거거든요. 따라서 전신갑주가 우리한테 온다는 것은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기 이 전에 전신갑주가 우리를 공격해요.
왜? 우리는 자꾸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개집 안에 들어가서 멍멍 짓는 식으로 ‘나 뭐가 문제인데? 나는 그만큼 잘살았는데.’ 하고 반항하듯이 버티는 식으로 멍멍 짓는 식으로 평생 보내거든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사람답다. 이러니까 내가 인간이잖아.’ 하는 그 요건과 조건을 다 뜯어내요. 전신갑주가. 무능한 인간이 자기가 무능하다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남 앞에 나설 때 ‘나 이정도로 유능해, 잘났어.’라는 요건들로 더덕더덕 누더기를 붙여놨다는 말이지요.
그걸 전신갑주가 와서 하나하나 뜯어내는 거예요. 전신갑주라는 것이 뭐냐 하면 14절부터 보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전신갑주가 죽 나오거든요. 우리는, 나는 안건드리고 외부 건드린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이 전신갑주가 먼저 나를 건드려줘요. 내가 유능하고 남 앞에 그럴싸하게 나선다는 그 조건자체를 다 뜯어냅니다. 뜯어내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알사탕이에요. 여러분, 어릴 때 알사탕 먹어봤지요. 아, 안깨져요. 얼마나 단단한지요. 알사탕을 세자로 하면 자존감이에요. 또는 자존심이에요. 사도는 계속 묻습니다. 그 알사탕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네가 스스로 너에게 물어봤나?
여기서 인간은 답변을 못합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감이거든요. 알사탕인데 그 알사탕이 깨지는 그 날이 자기가 죽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사는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남은 알사탕만큼은 깨어지지 않아야 되는데 그것이 있음으로 자기는 유능한 자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아느냐? 전신갑주 바깥에서 공격해대는 그 악마가 네 알사탕을 노리고 공격하고 있다.
선악과 이야기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인간이 건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건드릴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와가 먹음직하게 보인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고 배후에 누가 있었다는 겁니다. 악마가 있었어요. 악마의 뜻은 이거예요. 모든 영생은 하나님이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아버지죠. 요새 말로 아버지, 댓방이에요. 창조주요, 오야붕이고, 모든 것을 가진 분이고, 절대자고, 그 분에게만 영생이 있고.
따라서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아버지의 자리, 영생의 자리, 최고의 자리, 그 자리를 네가 빼앗아버려라, 그 말입니다. 일단은 아버지의 자리가 최고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최고입니다. 악마도 인정해줘요. 최고라고 인정은 해주되 그 최고의 자리를 하나님이 독차지 하게 하지 않고 피조물이 그걸 차지하도록 아버지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아버지를 죽이는데 누굴 앞장세우느냐? 인간을 앞장세워서 그 일을 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십자가사건이 벌어진 것과 통합니다. 아버지의 자리가 좋은 것을 알고 그게 영생의 자리인 것을 알아서 그게 좋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좋다는 자리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여야 돼요.
그래야 악마가 자기본색을 드러냅니다. 악마가 자기본색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죽는 자리까지 내려오신 거예요. 죽이라고. 이게 알사탕의 내용입니다. ‘내가 가장 좋은 것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야.’ 이게 악마의 내면의 소리에요. 예수님 오시기전까지는 자기가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인간은 홀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고.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툭 건드리면 전신갑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툭 건드리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게 나와요.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주부들이 늘 마음속으로 갖는 것은, ‘내가 못났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내 형편대로 자식은 키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게 나온다니까요.
그게 뭐냐? 알사탕이고, 그게 자존감이고, 자존심이에요. 그런데 알사탕 속에 뭐가 포함이 안되어 있느냐 하면, 희생이 포함되지 않았어요. 희생이 그 안에는 없어요. 끝까지 내 것 지키기로 일관하지요. 희생이 없어요. 그 악마의 유혹을 받은 아담의 후손과 아담 사이에는 아담의 피가 흐릅니다. 계속해서 아담의 피만 흘러가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말합니다. ‘네 속에 네 피만 흐르지 그지? 타인의 피는 없지? 네 속에 예수의 피는 없잖아. 희생의 피는 없잖아.’ 네 자존감, 자존심 지키는 피만 계속해서 두뇌로부터 심장으로 해서 온 몸에 흐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전신갑주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전신갑주라는 말을 함으로서 인간은 누구한테 속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
내 피, 조상에게 받은 혈육적인 이 피는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피는요, 용서의 피도 아니고 생명의 피도 아니에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노리개감만 되는 피만 계속 흐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줌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주안에 들어오기 어렵고, 악마를 이기기 어렵고, 이게 전부 다 무능함이라는 사실의 그 원인이 바로 너에게 있는 거예요.
전신갑주가 나와야 되는데, 자기의 무능함이 나와야 되는데, 툭 치면 ‘저 사람보다 낫잖아요. 저 사람보다 내가 훌륭하잖아요.’ 상대적으로 자기자신이 이기려고 하는 겁니다. 알사탕이라는 표현을 제가 쓰는 이유가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요. 수련회 첫시간에 추락이라는 말을 했지요. 수련회 첫 시간 제목이 추락이에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에 의하면 가속도가 더하면 중량이 더 무거워지기 마련이에요. 추락하면 할수록 자기버티기는 더 무게가 나가는 겁니다. 쇳덩이처럼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사생활이에요. 인간은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자기 바운더리 안에 하나님이 강제로 끼어들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내가 관리합니다. 자기가 포석을 해요. 자기가 배치를 한다고요.
그래야 자기가 유능해지니까요. 그런데 전신갑주가 훅 들어오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수련회 참석 안한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더 6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왕이, 그 당시 최고의 왕이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몸짱, 몸 키우는 사람들이 옷 입을 때 단추가 잘 안잠기지요. 근육질 몸 때문에 단추가 잘 안 잠긴다고요. 억지로 끼우면 단추가 막 떨어져나가요. 그것처럼 왕이 최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잠을 자야 내일이 되는데 오늘에서 내일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마저 채우지를 못해요. 오늘의 시간을 자신의 능력으로 마저 채우지를 못합니다.
잠이라는 것을 거쳐야 내일로 넘어가는데 이게 오늘과 내일이 연결되어 버렸어요. 오늘을 마저 채우지를 못해요.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미흡함이에요. 왕이 잠이 오지를 않아서 할 것이 없는가 싶었는데 궁중일기, 그 당시 왕들의 일기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 일기에 보니까 자기가 이미 옛날에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모의해서 왕을 치려고 한 사실을 사전에 발각해서 구사일생으로 왕을 살린 그 과거의 일이 궁중일기에 적혀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제야 왕이 정신을 번쩍 차려서 과거에 내 목숨을 살린자가 누구냐 보니 모르드개, 바로 유대인에 속한 모르드개가 왕을 살렸어요. 유대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민족 유대인들이에요.
그 유대인의 후손인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은 바사나라 최고권력자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살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잠이 오지 않는 타이밍을 줘가지고 이 세상은 누가 살리고 누가 죽이느냐는, 내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받은 언약이 있는, 유일하게 약속이 있는 유대나라 그 민족이 있음으로 인하여 이방나라인 바사나라가 아직도 유지할 수 있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단추가 마저 채워진다고요. 임금님이 너무 좋아서 마치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부르듯이 모르드개를 말 태워서 성을 돌게 합니다. 마치 나처럼 대우하라는 말이지요. 진정한 왕처럼 대우하라. 이 말 탄 사람 모르드개를. 모르드개는 말을 타고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왕이 받을 영광을 본인이 받습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볼품없는 나귀를 타면서도 아이들에게는 “호산나,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라는 호칭을 받는 모습을 한 몸에 모르드개가 미리 받은 거예요. 자,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 세상은 전부 다 사적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자기일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그리고 강력하게 알사탕들이 모여 있어서 극구 남을 밀치고 있습니다. 자기 알사탕 흠집 날까 싶어서.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섬에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아가씨가 밭을 매고 있는데 지나가는 남자를 만났어요. 둘이 순간적으로 반해서 사랑을 깊이 나눴습니다. 그 사람은 무어인이라 해서 스페인계통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시칠리섬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으니까 종교도 안 맞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안되잖아요.
깊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 사귀었어요. 나중에 무어인이 자기는 고향에 아내가 있다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밤이 지나면 그 남자는 떠나야 하는 입장에 있어요. 시칠리 섬의 그 여자는 그 무어인 남자를 너무나 사랑해서 잠든 사이에 그 무어인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얼굴을 그대로 보존해서 다음날 그걸로 햇볕 따스한 창가에 화분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꽃을 키우는데 꽃이 왜 그리 잘 자라는지요? 퇴비가 넉넉했던 모양인지 아주 잘 자랐어요.
그걸 보고 그 주변 마을 사람들이 ‘아, 저렇게 남자 얼굴로 화분을 하게 되면 꽃이 저렇게 자 자라는구나.’ 해서 온 동네가 남자얼굴화분을 놓는 것이 시칠리섬의 유행이 되어버렸어요. 지금도 시칠리 섬에 가면 남자 얼굴, 무어인의얼굴을 한 화분이 그렇게도 많은 거예요. 그러면 그 아가씨는 왜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그었느냐? 늘 그 얼굴을 창가에 두고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거예요. 늘 내가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사적인 욕망의 극한이지요. 잔인하다고 너무 폭력적이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는 그런 폭력성이 다 잠복되어 있습니다. 왜? 나밖에 모른다는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도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린다는 거예요. 이 악마성,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마귀병이지요. 마귀병에 걸린 대표적인 사례가 뭐냐? 남편에게 매일같이 폭력에 시달리는 그 아내가 그렇게 당하면서도 참고 살아가는 그것이 악마성입니다.
그렇게 매일 얻어맞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참고 사는 여자. 그게 바로 마귀병이에요. 왜냐하면 자기자신의 가치를 얻어맞는데서 계속 키워나가는 겁니다. 남편이 때리면 때릴수록 자기는 천사가 되니까요. 성녀가 되어가니까요. 자기밖에 몰라요. 전신갑주같은 것은 없어요. 자기는 철저하게 무능한자가 아니고 유능한 자에요.
거기에 비해서 신약의 성령 받은, 주께서 성도라고, 천국 가는 백성이라고 분류시킨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철저하게 자기를 혐오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37절에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영생을 얻게 된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물 마시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생생한 자기혐오가 있을까요? 자기미움이 있을까요? 자기가 주를 위해서 해놓고도 자기가 주를 위해서 한 것을 몰라요. 왜? 자기는 무능하니까. 뭘 해도 무능하니까. 그 무능함이 전신갑주의 가치를 더 높여주는 거예요.
내가 행한 것이 알사탕을 굳히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뭘 해도 무능하고 끌어 모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만 모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35, 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히려 반문하는 것은 누가 하느냐? 성도가 반문합니다. “주여, 언제 제가 그렇게 했습니까?” 사람이 자기 피만 흐를 때 그걸 죽은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신갑주의 그 의미와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산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허상이 계속 나옵니다. 전신갑주라 하는 것은 어떤 경계선인데요. 전신갑주가 올 때까지 어떤 허상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그게 실상인줄 알고, 이 현실이 진짜배기 현실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전신갑주가 이해가 되느냐고 할 때 ‘전신갑주가 왜 필요한데?’ 하는 순간 전신갑주의 필요성을 모르는 이 모든 나의 공간은 허상이에요.
여러분, 허상과 허위를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허상이라 하는 것은 의미도 없으면서 의미가 있다고 우기는 것이 허상이고 허위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허위거든요. 분명히 여기에 손이 있고 마이크도 있고 다 있어요. 이것이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만 여기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 몸뚱이가 여기에 있고, 이빨이 아프면 아픈 것이 맞고, 아프면 병원 가는 것이 맞아요. 여기에 이렇게 있어요.
있지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게 전신갑주와 연결이 안된다고요. 하늘나라와 연결이 안되는 거예요. 전신갑주가 없으면.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벌이는 사기입니다. 가봤자 논다는 것을 본인들이 알아요. 놀러간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요. 그래도 가요. 신천지에도 가고 기독교에도 가고. 놀러가는 겁니다.
여전도회 회장하고 성가대 하고, 실컷 하고 월요일 되면 뻗어요. 교역자들은 월요일에 쉬지만 평신도는 자기직장에 또 나가요. 그러면 힘드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합니까? 알사탕, 알사탕 때문에! 미친 여자에요. 알사탕에 미친 남자들이에요. ‘나 이정도로 주를 위해서 희생했으면 주께서 구원해주겠지.’ 그 얼마나 그게……, 오직 자기속에 자기피만, 자존심의 자기피만 열차처럼 계속해서 아래위로 순환되고 있습니다.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마라. 나는 열심히 살았노라.’ 툭 치면 그게 튀어나와요. 예수님께서 전신갑주를 줌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어떤 존재인데 주께서 구원했다는, 주님의 희생의 피가 흐르게 했다는 것을 전신갑주를 통해서 우리에게 되비쳐 줍니다. 전신갑주는 제 2의 신체라고 보면 돼요. 제 1의 신체가 아담의 속한다면 제 2의 신체는 전신갑주라 할 수 있어요.
복음을 이야기하면, “나 그거 압니다. 들어서 이미 과거에 알고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아는 것은 알사탕 속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알사탕을 깨야 되잖아요. 내가 인간답고 성도답다는 그 요건과 조건을 날마다 깨야 되는데 깨는 것이 아니고 주워 모으기에 급급해요. 나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아니까 나는 성도가 맞다고.
그거 해봐야 자기가 지킬 자기무게는 점점 늘어나는데요? 쓰레기는 점점 늘어나는데요? 무능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를 위해서 이거 했지 않습니까? 목마를 때 제가 물 드렸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온다고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러면 전신갑주를 통해서 안쪽에 있는 우리를 친다고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뭐냐? 전신갑주는 바깥쪽을 칩니다. 전신갑주가 양쪽을 다 쳐요.
전신갑주 안쪽에 있는 자기 백성이 얼마나 무능하고 허무하고 자기가 자기를 날마다 속여온 죄인인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는 전신갑주, 그것도 알게 해주고 전신갑주 바깥에 보면 악마가 있거든요. 그 악마를 공격해요.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전신갑주는 통째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전신갑주는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이 가상현실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 9절에 보게 되면,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물인데, h2o, 물인데 이게 피가 돼요. 모세가 애굽의 강에 지팡이를 대니까, 하나님과 연결되니까 이게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고 못먹는 피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이 땅에서 먹을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이 예수님과 연결돼야 비로소 드러나는 거예요. 그동안 네가 먹고 사는 것은 네 허상을 키우기 위해서 먹고 산 거예요. 하루 세끼. 다음 주 되면 명절이라고 또 얼마나 잘 먹을까? 설이라고 해서 떡국에다가. 출애굽기 7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피가 된다는 이것이 실상입니다. 이게 실상이고 진짜 현실이고. 그렇지 않고 이 우물과 연못, 호수, 저수지가 물이다. 이것은 가상현실이에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가상현실이고 나라는 인간도 가짜에요. 진짜는 우리는 잊어버렸어요. 내 속에 악마의 유혹, 너는 하나님을 죽이고 네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라는 악마의 유혹이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싫어하고 죽이도록 뒤에서 끝까지 밀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 맘대로 이게 스톱이 안된다니까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악마가 지정한 그 자리까지. 이 가상현실이 이렇게 된 이유가 있어요.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니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거든요. 계시를 보니까 왜 이세상이 가짜일 수밖에 없는가? 진짜 창조는 완전히 없어졌고 가짜가 설치는가? 그것은 인간의 배후가 바다 안에 숨어 있다가, 은폐되어 있다가 드디어 마지막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화로 해서 바깥에서 안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여야 되니까요. 악마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을 죽이는 거거든요. 그 하나님의아들을 죽이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죽이기 위해서는 악마가 친히 바다에 머물지 말고 육지로 기어 나와야 되는 겁니다. 나올 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4절에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그 다음에 “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5절에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6절에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이게 뭐냐 하면, 혼합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이브리드죠. 혼합체, 누더기처럼 일관되지 못하고 얼기설기 강하고 능력 있다고 소문난 것, 대단하다고 소문난 것, 이것 가지면 큰 성공한자라고 하는 조각조각들이 누더기처럼 넝마처럼 더덕더덕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은 전부 다 잡종으로 이루어져요.
누가 기타 치면 기타 잘치고 싶고, 노래하면 노래 잘하고 싶고, 상받고 싶고, 미스트롯 나가서 대상타고 싶고, 뭐뭐하고 싶고, 강한 것, 좋은 것, 넉넉한 것, 내가 유명한 것 그런 것들이 내 생각 속에 얼기설기 누더기로 조립되어 있어요. 그래놓고 그걸 들고 교회 오니까 목사들은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사기를 치는데 목사가 사기꾼이 아니고 내가 나의 사기꾼이에요.
내가 그런 사기를 듣기를 원하고 교회 다닌 거예요. 내가 신천지라. 누구 욕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전신갑주라는 것은 주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죠, 성령의 능력은 무슨 뜻이냐? 인간은 해골이거든요. 인간은 해골구조, 해골인데 해골이 살아 있다는 것은 두 종류의 영이 개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는 악령이 개입해서 해골이 움직여요.
<터미네이터>에 나오지요. 폭탄 맞고 완전히 해골구조만 남더라도 다시 어느새 사람모양이 돼요. 그 모습 보면서 내가 놀랐어요.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들하고 똑같아요. 안에는 해골이 삐그덕 삐그덕 하면서도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걸친 모양새가 뭐냐 하면, 대단한 것, 출세한 것, 머리 좋은 것, 유명한 것, 전부 다 거죽대기들 있잖아요. 가상현실에서 소문난 가짜들, 그런 것들만 더덕더덕 붙여서 나를 최고의 자리로 계속해서 부추김을 받는 거예요.
참새가 무슨 덕으로 살겠어요? 길가의 들풀이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참새는 아무 계획이 없어요. 들풀도 아무 계획이 없습니다. 계획이 있다는 것이 사달난 거예요. 뭔가 계획이 있다는 이것이 문제가 일어난 겁니다. 악마는 그 계획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전신갑주에 계획이 막혀야 되는데 안막혔어요. 전신갑주가 없으니까 매일같이 소원 들어주옵소서, 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철야하고 있어요.
악마의 종이 덜 되어서 환장했어요. 내가 어디까지 속일 수 있는지를 본인도 감이 안잡히는 모양이에요.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들을 보면 전부 다 혼합체입니다. 일관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거적때기 붙여놓은 거예요.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 또 다른 사람들 인생을 보세요. 보게 되면 인생의 길이 없어요. 길이 없고 우왕좌왕 하면서 평생을 삽니다.
60대, 70되고, 80되고, 90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우왕좌왕 하면서 줏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줏대 있다 해도 어떤 기관에서 왕, 하면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전신갑주를 설명하면서 왜 우리를 악마의 세계에 놔두느냐 하면, 악의 개입이 없으면 정답이 나타나지 않아요. 악마에 후달리지 않으면 우리는 정답을 몰라요. 얼마나 감사한지.
짐승의 특징은 한마디로 흉측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인생도 내부를 깨보면, 해부해보면 흉측해요. 온갖 것 다 들어 있어요. 점심 때 되어가는데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위를 깨보면 빵부스러기에 라면 찌꺼기에…… 아이고 이런 이야기는 안되는데 어쨌든 온갖 인생의 지저분한 쓰레기는 다 들어 있어요. 일관된 것이 없어요.
악마는 그 때 그 때 우리에게 유혹을 주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악마가 준 유혹의 조각들로만 얼기설기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단추가 잠기지를 않아요. 늘 불안불안해요. 다시 말해서 그 단추의 이음새는요, 우리가 진즉에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추만이 우리로 하여금 전신갑주 바깥에서 주 안으로 넣어주는 주의 능력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가 진즉에 죽은자라는 것.
하나님은 죽은자를 가지고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저승사자를 만들었어요. 저승사자의 특징은 자유롭다는 거예요. 더 이상 유혹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돈 줄 테니까 나한테 잘해달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우리 주님이 하실 일만 전할 뿐입니다. 끝.” 이러고 가버려요. 저승사자는 고급포도주를 뇌물로 준다든지 골프를 칠까요, 사과상자에 돈을 넣어줄까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이 저승사자입니다.
성도로 이미 죽어버린 자, 예수님의 피가 흐르지요. 예수의 피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계속 두뇌부터 발끝까지 계속 반복해서 순환시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말이지요. ‘내가 먼저 죽을게 너는 나 따라 죽으라’는 그런 뜻이에요. 내가 먼저 이 땅에서 죽었으니까, 이 가상현실에서.
저승사자로 살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오는 결과는 뭐냐? 선과 악이 아니고 다 좋다가 돼요. 이게 창세기 1장 끝에 나옵니다.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 다 좋더라. 안좋은 것이 하나도 없더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더라. 모든 것이 예스가 되고 ‘아니오’는 하나도 없더라.
이것이 인간의 유능함이 아니고, 나의 잘남이 아니라, 무능한 우리에게 심어준 주님의 유능함이고 주님의 솜씨, 주님의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에 저승사자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안좋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좋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만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알사탕만 있는 사람을 동정하거나 호의를 베풀지 마세요.
저승사자는 외로움이 없어요. 이미 외로움을 감수하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다만 ‘나는 외로워도 마땅해’ 하다가 저승사자의 말을 듣고 전신갑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지요, 십자가 이야기에 대해서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이 있거든 갑자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는데.’ 그게 바로 사도행전속의 인물들이에요.
사도행전 속의 인물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을 깔아놓고요, 가상현실이니까, 그 상황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하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놀래서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 이렇게 야기해버려요.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 또는 하나님이 믿음을 준 자. 그렇게 돼버려요. 사도행전 3장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내 신분에 대해서 내가 화들짝 놀랄 준비를 하셔야 돼요. 그것이 자유자입니다. 저승사자에요. 그렇지 않고 저승사자가 보는 눈은 뭐냐? 최시체, 김시체, 이세체, 권시체, 모든 인간은 가상현실 속에 시체밖에 없는데 시체라는 말을 알아듣는 시체, 성령과 함께 있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신갑주 왜 필요한지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불쑥 들어온 전신갑주라는 이 의미가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보게 해주시고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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