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부부사랑(엡5.28-33) 1912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30. 16:41
2019-12-29 12:39:56조회 : 59         
   부부 사랑 1912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부부 사랑(에베소서 5:28-33)

음성 .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2g5riqhNRQ, Hit:4
 이근호19-12-29 13:33 
부부 사랑

2019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28-33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사도에게 있는 부부란 한시적 역할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더 이상 시집이나 장가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남자/여자의 성별 구분을 갖게 했을까요? 그것은 첫 번째 아담이 지니고 있는 육적인 속성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결혼해서 자식을 갖게하므로서 그 와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잃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만족과 그 만족의 극치를 예상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그 행복의 출처를 가정, 혹은 가정화목에다 둡니다. 쉽게 말해서 가정 화목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논리의 비약’입니다. 사도바울의 말투는, 말씀의 세계란 인간의 논리에 잡힐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야고보서 1:18에 보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듭남’도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렇다면 부부가 한 몸이 되는 매개인 ‘사랑’도 첫 번째 아담 계열에 속한 육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육의 사랑은 참된 사랑에 의해서 쉬지 않고 제거당할 대상이 됩니다.

아담→남/여→새 아담(예수님)의 절차는 숨겨놓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인간계에 드러난 겁니다. 이 절차의 더 깊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쏟아놓습니다. ‘아담→하와→자식’. 즉 아담의 모든 것이 없었던 아내, 하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와를 통해서 자식이 낳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담이 기존의 첫 번째 아담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아담, 참된 아담의 등장은 이 옛 아담 계열의 반대로 진행됩니다. ‘자식 →하와 →아담’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먼저 나서 그로 인하여 왜 교회가 주님의 영원한 신부(新婦)인지가 알려지고 그 다음에 완성된 주님이 참된 남편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천상 계열의 등장은 치열한 옛 아담의 행복 욕망만 치열하게 전쟁을 벌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어떻게 하면 꾸려갈 수 있느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기대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대상인 것을 감안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배우자를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누구를 위해서 말입니까? 본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다음의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6-37)

사람들이 사람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자기 내부의 불편함을 타인을 상대로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무당들이 한 맺히고 억울한 사람의 귀신을 빙자해서 누구를 만나도 복수하듯이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타인은 먹잇감입니다. 남들에게 참으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자신이 공들여 놓은 먹잇감이 놓칠까봐 노심초사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일관성 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 작업’이란 계획성 있게 자기 의지를 통해서 결정과 선택에 나서면서 주변에 있는 변화나 있는 것들은 자기 중심으로 체계를 잡고 조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예상합니다.

그러나 그 예상으로 인해 늘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에 말씀에 의해 진행되는 ‘교회 만들기=아내 만들기’ 작업은 사랑에 의해 등떠밀리는 식입니다. 어디까지 등떠밀까요? 즉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판단될까요? 아가 8:6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가 같음을 알아야 하는 자리까지 인도됩니다. 사랑이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속 시원하게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의도나 예상과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찾아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

이 아담 계열과 천상의 계열이 같이 만나는 현상이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감을 고르는 대목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세기 24장-25장에 걸쳐서 보면, 아브라함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 예상은 합니다. 아들 이삭의 며느리감은 고향에서 얻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며느리가 되는지는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든 약속에 준해서 실시되는 것을 압니다.

‘순적히’라는 단어(창 24:12)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리브가는 단순한 며느리가 아닙니다. ‘천만 인의 어미가 되고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할 자식을 낳아야 할 여인입니다.(창 24:60) 이 두 가지 예언은, 리브가가 불임여성인 것으로 증명되고(창 25:21), 또한 태 중에서부터 원천적으로 갈 길이 달라야 한 두 운명의 아들을 한꺼번에 출산하므로서 증명됩니다.(25:23)

이러한 약속을 근거로 해서 마태복음 1장의 등장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부부 관계의 성립이 우선이 아니라 난데없이 성령으로 임신하고 출산되는 그 자식이 마리아와 요셉으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성도로 만들어줍니다. 마치 이삭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으로 인해 야곱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순간, 자식으로 인해 전에 있던 자아가 아니라 다른 자아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과거완료로 봐야 합니다. 이미 옛 아담에 속한 몸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몸체를 죽음에 넘기고, 약속에 준한 죽음 안에서만 약속에 의해서 부활되게 합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잘잘못을 묻지 않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일 4: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유익에 매달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2-30 12:48 
56강-엡 5장 28-32(부부사랑)1912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28-32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28-32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바울이 부부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약적인 논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갑자기 논리를 비약적으로 끌어당기는 이것은 마치 일반인들이 다 알고 있는 행복한 부부생활, 그런 쪽으로 안다면 그것은 지금 사도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지금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음 이후에 생길 그 교회, 그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 관심사는 행복한 자기생활에 관심을 두다보니 사도바울의 이런 말씀들이 자꾸 오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상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같으면 아예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내질러 버려요. 그들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그냥 내질러버려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생각과 같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이 결국은 사도바울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을 에베소서 2장에서 할 때부터 ‘갈 사람은 가거라.’ 하는 자신감같은 것이 사도바울에게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 다른 성경구절과 대비를 해보면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결혼에 대해서 ‘마지막 때에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자 같이 하라.’고 해서 그냥 한시적인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부라 하는 것이 한시적인 제도에요. 마태복음 22장 29. 30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한 뒤에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간다면, 그렇다면 왜 이 땅에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하셨느냐, 라는 질문부터 시작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범죄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을 하나님께서 먼저 만드시고 아담을 처음 만들 때는 남자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아담이 있을 뿐인데 여자가 생기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 그리고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한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그것도 무의미하고요.

그렇다면 아담에서 남녀로 갈라졌다가 다시 남녀라는 그 구분자체가 통째로 날라 가고 그 때는 천사와 같이 되어버리는 수순속에서 남녀를 왜 집어넣었겠느냐 하는 그것과, 주님의 교회만들기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그냥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지금 사도의 말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그러면 출발은 아담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아담부터 출발할 때 인간들은 결혼자체에서 어떤 행복감을 느끼는데, 그래서 나는 남편이고 당신은 아내라고 했을 때 ‘남편된 자들아 아내에게 목숨을 바쳐라.’ 목숨 바치려고 결혼했습니까? 이게 가당치도 않은 거지요. 이런 복잡한 내용을 야고보서 1장 18절과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부터 먼저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해서 ‘우리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우리 부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이 특수한 존재의 성도라는 것을 말씀이 잉태했다.’ 그렇게 봐요.

어느 자식이요, 부모보다 앞설 수 있는 자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부모역할을 하고 말씀이 우리를 낳은 것과 그리고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낳은 그것과 좀 구분하자는 거예요. 이 성경자체가. 우리 힘으로 이게 구분이 될 수가 없지요. 마태복음 10장 36절에 보게 되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저 같으면 여기에 더 보탤 거예요. “아들이나 딸이나 ‘외손녀나 외손자’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이렇게 집어넣을 거예요. 예수님의 이 말씀,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라 하는 그 대목과 여기 사도바울이 ‘남편들아’ 그리고 ‘아내들아’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어디서 통합되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너희가 거듭났다는 겁니다.

‘네가 아담이라는 인간의 굴레에서 못벗어나는 것을 내가 뻔히 아는데 예수님께서 아무리 너희 원수가 집안식구라고 아무리 해도 안먹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아들이나 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을 백날 해봐야 그거 지킬사람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거기서 거듭나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부탁을 하고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말씀 자체 속에, 될 수 없는 인간을, 성도될 수 없는 인간을 성도되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 나온다.’는 거예요. 말씀자체에서.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서 아담, 썩어질 아담, 죄지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왜 남녀로 갈라서게 했느냐를 이제는 이해하실 거예요. 갈라서게 함으로서 기존의 아담의 본성에서 나오는 부부생활에 대한 어떤 기대나 희망, 이거 접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하나의 애착이니까. 사람은, 아담의 육으로 난 것은 결코 자기를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이 모든 세상에 있는 행동과 제도에 대해서 전부다 심판해버리고 저주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방송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해요. “지금 다시 결혼한다면 누구와 결혼하겠습니까?” “지금의 남편과 또 결혼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요, 자기자신을 몰라서 그래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것은 그동안 잘 길들여진 먹잇감을 놓치기 싫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남을 뜯어먹는 재미로 살거든요. 아내가 남편보고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수정해서 하는 거예요. 남편이 아내보고 “당신 사랑해.” 라는 것은 ‘나는 나만 사랑해.’ 그것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마치 아동들이 자기학용품을 못버리는 것처럼, 아주 그것을 아끼는 것처럼, 자기정성과 애정을 깃들이면 그것이 자기소유물이 되어버려요. 소유물이 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면 내가 그동안 쏟은 정성과 애씀이 아까워서도 그것에 미련을 갖기 마련입니다.

장례식에 보면 배우자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껴안고 “형님, 힘내세요.” 또는 “그동안 간암 병수발 든다고 애썼으니까 이제 그만 보내주시고 형님은 살아야지요.” 하고 껴안고 있는 모습들 장례식장에서 많이 보셨지요. 그것은 살아 있는 좀비가 놓친 좀비를 아까워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소유물, 그동안 잘 길들여진 소유물을 놓친 거예요.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거든요. 먼저 배우자가 죽어버리면 괴롭힐 상대를 놓친 것이 된다고요. 무당들, 이순신장군 무당이나 그런 무당들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데 무당들이 인간의 본심을 이야기해 줍니다. 무당들은 복수의화신이에요. 남에게 보복하고 싶은 겁니다.

부부가 둘이 만나는 것은 서로가 한맺힌 것을 서로 복수하는 대상자로 삼기 위해서 만난 거예요. 진짜 결혼한다면 우리 같이 살자고 결혼하면 안돼요. “나랑 같이 결혼할 사람 누구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찾아야 돼요. “나랑 같이 죽을 사람?” 미쳤습니까? 네가 뭔데?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서, 자기 속에 있는 복수심을 털어놓기 위해서, 또는 먹잇감으로 삼기 위해서, 식인종 가족이니까, 그냥 자기속풀이하는 식량이에요. 상대를 매일같이 뜯어먹는 재미로 살아요.

그게 없으면 개 키우든지, 다른 동물 키우든지 하는 거예요. 그만큼 공을 들였는데 그 먹잇감을 놓쳤으니까 아깝지요. “아이고, 영감, 영감!” 우는 겁니다. 그래놓고 에베소서 오늘 본문 보면서 ‘그래. 하나님은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보장했어.’ 미쳤어요? 무슨 행복한 가정을 보장해요. 자기원수가 집안 식구라는데요. 무슨 앞뒤 안 맞는 이야기를 합니까?

성경에서 이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 5장 26절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제가 말씀 이야기를 언급해 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데 이 말씀은 기존의 아담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제거해 버립니다. 그래서 중간결론을 내린다면 인간은 왜 결혼했는가? 네가 하나님 앞에 제거대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결혼하게 하시는 거예요.

너는 천국 갈 사람이 못된다는 것. “네가 혼자 있을 때는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 누구 하나 만나봐라.” 본색 다 드러납니다. “부부에 대한 참된 교훈을 주세요.”라고 한다면 저는 이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서로 엮이지 말자. 그냥 죽자.” 이게 부부에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강의시간에 한 것 같은데요. 사람이 이혼안하고 그냥 사는 이유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사는 거예요. 아무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내의 마음은 노루 같아서 남편 너머 다른 것을 봐요. 일단 콜, 받고, 일단 받아 챙기고 그 너머를 본다고요. 그 너머를 보면서 부부가 서로를 만났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평소에 상대를 향하여 괴롭히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자기가 괴롭힐 상대가 없으니까 그걸 ‘외롭다. 못살겠다. 또 나에게 괴롭힘을 당할 불쌍한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는 복종하라’는 그 내용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 이것이 진짜 아담의 세계입니다.

멸망당해야 될 아담의 세계를 확실하게 주님께서는 남자 여자로 구분지어서 “너희 조상 아담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남자가 되어서, 혹은 여자가 되어서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되어서 실컷 원없이 경험해봐라. 무당이 따로 없다. 네가 바로 무당이다.” 흔히 말들 하지요. 화목한 가정이 있다고요. 화목한 가정은 그동안 협상과 타협이 기름칠 한 것처럼 잘 돌아가는 가정일 뿐이에요.

그냥 한계, 임계점에 이르지 않고 서로 봐주기를, 서로 누르고 누르면서, 참고 참으면서 가정 하나를 위해서 꾹 참는 거예요. 그저 참는 것, 참고 지내는 거예요.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항상 터질 가능성이 있지요. 백두산 화산 터지듯이. 그래놓고 남들에게는 내가 참 정을 많이 줬다는 겁니다. 정을 많이 준 그만큼 하나의 소유물이 된 것 뿐이에요.

“내가 정을 줬기에 네가 나를 배신한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복수할거야.” 하고 달려들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등 떠미는 거예요. 말씀 자체의 완성이 사랑이고요. 그 사랑이 등을 떠밀어요. 어디까지 등을 떠미느냐 하면, ‘네가 죽어도 좋으냐?’ 까지 등을 떠미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아가, 아가의 주제가, ‘사랑은, 등 떠밀려서 당신을 만났고 당신도 등 떠밀려서 나를 만났다.’ 인데 우리 둘이 만나서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사랑은 죽음만큼 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아가서 8장 6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가 같기 때문에 네가 사랑을 안다고 한다면 네가 죽어도 괜찮은 것을 만나는 경우에나 그런 소리를 하라는 그 말이지요.

“목숨 근처도 안갔으면서 죽는다고 하면 천리만리 도망치면서 주님의 사랑을 언급해?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내 목숨 챙기기 바쁜데 무슨 주의 사랑을 논합니까? 정말 사랑하거든 죽어버리라는 거예요. 약속에 의해서 죽어야 약속에 의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주님의 약속, 십자가를 간보지 마세요. 십자가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에요. 목에다 차고 돌아다니는 그것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부부라 하는 것은 결혼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주께 감사하세요. ‘저 인간 껴안고 물에 빠져 죽으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더러워서 못살겠다. 같이 죽자.’ 죽음의 파트너를 구하는 그것이 결혼이에요. 죽음의 파트너!

왜냐하면 이미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까짓 거 죽는 이 아담에 속한 인생은 갖다 버리자.’ 그 말이지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쓰레기만이 웃을 수 있다고요. 사람이 쓰레기가 안되면 긴장돼서 못살아요. 그걸 공포라고 해요. 내가 뭔가 무서워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쓰레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사설이 너무 많은데요.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왜 천국에는 시집 장가가는 것이 없는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체계 자체가 나 중심의 일관성으로 체계를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자기중심이 딱 드러나게 되면 거기서 일방적으로 뭔가 조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비일관성이에요. 그걸 우연이라고 하는데요. 난데없이 터져버려요. 전도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타이밍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사랑이라는 것은 범죄한 인간이 노리고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 그 타이밍은, 거듭난 것도 말씀으로 거듭나고, 태어난 것도 말씀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장차 왜 천국에서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는가, 왜 남녀라는 구별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아담족속이 예상하고, 기대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 자체가 이게 죄, 악마의 형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인간이 선택하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일관성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 일관성이라는 것은 내 중심을 굳건히 하면서 거기서 일관성이 퍼지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결혼했다. 나는 이 나이에 결혼해야 된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나는 어떤 여자를 선택했다. 왜? 내 인생을 결혼으로 체계있게 다지기 위해서 나는 일관성 있는 나만의 인생계획을 포기 못하겠다.’

이게 바로 아담에 속한 모든 악마의 형상이에요. 악마의 형상이 모인 곳이 지옥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우리의 일관성에 포함되지 않는, 내가 예상 못한, 기대하지 못한, 내 선택의 대상조차 안되는 다른 것으로 인하여 등 떠밀 듯이 찾아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 안에서는 주님이 주신 그 말씀에서 나온 그 비일관성, 그 사랑이라는 것과, 내가 행복하기위해서 뭔가 선택하고 예상하고 기대한 내 사랑과, 그것이 인간의 일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투쟁의 장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으로서 나를 박살내고 나는 그 거룩을 맞춰주려고 애를 쓰는데,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그 이유는 뭐냐? 하나님의 영광? 아니에요. 내가 내 맘속에 품고 있던 나의 구축된 나만의 괜찮은 내 세계를 펼치기 위해서 에베소서 5장대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서 지옥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말씀대로 살아서 지옥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누구를 위한 겁니까? 에베소서 5장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래, 사랑해야지.’ 벌써 계획 잡았잖아요. 기대하고 있지요? 목적이 뭐예요? 목적이 뭐지요? 누구 좋으라고? 나 행복하려고?

그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 5절 들이대면 기절할거예요. 물론 우리는 여러 번 들어서 기절할 사람도 없지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김세환이 부른 노래도 있잖아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

많이 나오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덮게 만들고, 하나님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성내지 아니한다. 사람이 성을 왜 내느냐? 그것은 자기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다는 티를 낸 거예요. 그러면 성 안내면 될 것이 아닌가? 인간은 없고 인간 속에는 욕망만 있을 뿐이에요. 그 스프링을 누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놓으면 튕겨버려요.

자,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이 어떻게 오늘날 교회를 놓고 진짜 부부, 그야말로 예수님이 신랑이고 주님의 색시가 되는 교회를, 주께서, 말씀은 어떻게, 인간은 못하지만 주께서는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창세기 2장에 이미 모형이 나와 있습니다. 아담이 여자를 만들고 여자는 자식을 만들어요.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다는 것은 아담의 모든 것, 아담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하고 가장 아담다움이 여성으로 빠져나오고 그 여성에 속한 아담, 또는 가장 여성다움이 자식을 통해서 빠져나와서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재규정하게 하는 방법, 재규정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를 만들고 참된 아들, 참된 신부를 만드는 방식이에요.

갈빗대라는 것은 아담다움이 가장 응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아담은 누굴 사랑하느냐? 아담은 아담 본인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여자를 보면서.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는 거예요. 그 머리의 머리됨을 위해서 여자는 보조인데 보조라는 말은 그냥 시다바리라는 뜻이 아니고 이 남자는 여자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진짜 남자다움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 곧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는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인간 같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예수님 자신이 주가 될 수가 없어요.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남편답다는 말을 입에서 끄집어내면 안돼요. ‘나는 너 하나 만들고 나는 네 안에 죽음의 존재로 들어가서 너 하나 생산한다면 더 이상 나는 여한이 없다. 내 할 일 다 끝났다.’ 손 털어버려요.

예수님의 주되심은 자기 색시 만들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어요. 이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말씀의 원칙에 준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남편이 아내를 만들고 아내가 자식을 만드는데 이 방식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거꾸로 들어가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고 그 아들에 의해서 여자와 아들의 요소가 여자 속에, 교회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의 색시가 되고 그것이 확인되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주가 되는 겁니다.

생각하면 뻔하지만 실제로 역사 속에 나타난 현상은 정말 기겁할 일이지요. 전혀 여러분은 기겁 안하고 저 혼자 기겁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1장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요셉이 약혼을 했고 동침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동침을 하지 않았는데 뭐부터 먼저 나오느냐 하면, 자식부터 먼저 나왔어요. 주위 사람들은 다 오해했습니다. “임신했으니 솔직하게 어떤 남자하고 잤다고 해라. 내가 용서해준다. 내가 그 정도로 쿨한 남자다. 하지만 나는 널 떠나줄게. 참견적시선이니 그런 것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떠나줄게. 나 진짜 쿨하게 너 사랑한다.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해서 임신을 했다면 내가 그 정도도 용납할 정도로 나는 의로운 사람이야.”

그래서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끊고자 했다는 겁니다. 와, 머슴아 멋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머슴아가 아담에 속했다는 거예요. 지금 난감하네, 하듯이 누가 난감한가 하면 지금 자기 남자친구 요셉의 그런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이런 환란을 주십니까?” 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드는 거예요. “아담의 요소에다가 왜 하늘의 아담의 요소가 끼어들어옵니까?” 하는 식이에요. “내가 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왜 말씀이 지금의 나 말고 다른 나를 잉태하고, 지금의 나 말고 다른 나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하는데 그 증거가 뭐냐? 아기예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자식부터 먼저 낳아요. 그 순서가. 그 자식은 지상에 속한 아담의 혈육에 속한 자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나 자식이나 딸이나 아들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의 나라에 합당치 않지요. 구원 못받는다, 그 말입니다. 천국 못간다, 그 말이에요. 천국에는 기존의 아담의 형상은 못가요. 천국은 예수님의 형상이 있어야 됩니다.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요.

하지만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려면 남자 여자로 갈라져서 부부가 되어가지고 인간의 육의 한계를 결혼을 통해서 다 까발려져야 돼요. 배우자를 사랑한다고요? 웃기는 소리, 사랑하기는 뭘 사랑해요? 그걸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실습하라고요. 평생을 부부생활 하면서. “아이고 영감, 영감! 먼저 죽다니.” 그러면서 그걸 실습하라는 말이지요. “당신 없으면 내가 잔소리할 대상이 없어서 나는 우째 살라꼬!” 이런 식으로 나는 끝까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충분히 실습을 하라고 결혼하게 한 거예요.

지금 이 마리아 이야기를 하려면 창세기 24장 이야기부터 되어야 하는데 정말 이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서 종을 고향에 보냅니다. 하란에 보내면서, ‘네가 이 가나안 땅 족속중에서 여인을 취하지 말고 이삭을 위해서 며느리감을 고향에서 취하라’고 보낼 때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고, 예정이 있고, 선택이 있고, 기대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놓치지 않는 것이 있어요. 나는 분명 아담에 속했고, 육에 속했기 때문에 어떤 며느리감을 구해야 된다는 계획이 있지만 하나님이여, 나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침투된 상태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이 침투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등 떠미는 사랑이, 사랑은 말씀의 완성이니까, 그 사랑이 내 며느리감 구할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저희들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보냅니다.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서 며느리감이 정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창세기 24장이 아브라함언약의 일부입니다. 아브라함언약을 이루는 과정속에서 며느리감을 구하는 것도 과정속에 속해요. 내 아들 이삭을 위해서, 아들이 아담이라면 며느리감은 하와가 되는 거예요. 갈빗대로 만든 하와지요. 처음에는 갈빗대로 만들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내용대로 이삭의 아내를 구하게 됩니다.

아내를 구할 때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한다. 네가 낳은 자식은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를 까발리고 노골화시키는 전쟁에 투입되는 자식이 될 것이라고 예언해버립니다. 시집가는 누이동생에게 혼수나 해주면서 좋은 말은 안해주고 비정한 예언과 약속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해버려요.

마치 아브라함이 고향 떠날 때,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이 생뚱맞은 이야기. 어떤 남자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잖아요. 자기예상과, 기대와, 선택과, 예정하심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따로 있어요.

아담에서 흘러내려오는 육의 혈통과 그것을 마중 나오는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진짜 하나님의 계획과 둘이 마주쳐서 계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이고 전개되는 그 모습이 아브라함에게 있었고,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 찾는 과정에서도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리브가를 만납니다. 만났는데 여기에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그 다음에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한다.’ 할 때에 그 아들을 통해서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첫째는, 리브가에서 나온 자식들은 아담에 속하지 않고 약속에 속한 자식들만 생산 될 것이라는, 천국의 백성들이 리브가를 통해서 나온다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어야 되고요.

두 번째, 리브가로 인하여 그동안 숨겨놓았던 악마, 하나님의 원수가 어떠한 모습으로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통제해왔던가, 의 그 정체를 노출시키는 두 가지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 두 가지 일은 창세기 25장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불임여성입니다. 아기 못낳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남자와 동침하기 전에 임신한 것처럼, 남자와 동침하기 전에는 임신을 할 수가 없음, 임신 안 됨, 임신 할 수가 없다. 이게 아담에 속한 인간들의 계획이고 일관성이고 예상한 바고 기대한 바에요. 아담에 속한 나는 천국에 못간다. 이게 성도가 이미 성도된 입장에서 성도되기 전의 내 모습이에요. 나는 천국갈 수 없다.

‘내가 천국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그것은 그냥 내 기대치고 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지 이것은 절대로 안 돼.’라는 생각은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성령 받고 난 뒤에나 알 수 있는 사항이에요. 그래서 논리의 비약이 되는 겁니다. 이게 부부이야기가 아니고 교회 이야기라는 것이 그 때서야 알게 되는 겁니다. 잉태하지 못합니다. 잉태하지 못함으로 첫 번째가 이루어졌습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는 말은 육의 인간들은 해당사항 없음, 이것이 결정되었어요.

두 번째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어미에서 하나의 자식이 나오면 그 자식은 분명히 천국가는 자식이라고 정리가 가능한데 갑자기 쌍둥이가 생겼어요. 쌍둥이가 생겼으면 ‘아 둘 다 천국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한데 그것이 아니고 둘이 싸웁니다. 마치 가는 길이 다른 것처럼. ‘우리는 서로 운명이 달라. 갈 길이 달라.’라는 것을 태 안에서, 태중에서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로마서 9장에서는 이 에서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에서가 태어나기 이 전에 먼저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말씀이다. 뭐냐? 에서는 하나님께 미움받기 위해서 태어나야 하는 존재에요. 그리고 반대로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천국을 채우기 위해서 만든 내 백성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대와 예상과 선택을 능가합니다. 인간이 사랑받기를 원한다든지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다 육에 속한 것이고 인간의 헛소리입니다. 인간의 헛된 희망이에요. ‘나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돼.’ 이것은 사기입니다. ‘예수 피 믿고 나 구원받는다.’ 이거 백프로 사기입니다. 교회는 이거 사기 쳐서 십일조 빨아먹은 거예요. 그래서 운영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구원되는 방법은 아예 없습니다. 한국교회전체가 구원파에요. 구원파는 그것을 약간 더 이슈화한 것뿐이고요. 한국교회전체가 신천지에요. 신천지는 거기서 약간 빠져나온 것뿐이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전부 다 한결같은 것은 뭐냐? 자신의 기대와, 목표와, 자기의 욕망입니다. 나 죽어서 천당가겠다는 겁니다.

누구 맘대로 가요? 그런 사기를 얼마동안 당해야 보이스 피싱을 또 안당하겠어요?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고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인간 속에 아담의 형상이 있는 한 구원이 안돼요.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니이다. 천국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요. 정말 여러분이 구원받으려면, 내가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된 것은 한시적인 조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임시방편이다. 이것을 떼버리라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라 하는 것은, 정말 말씀이 원하는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없던 아내가 새로 생기는 것이고 없던 하와가 새로 생기는 그것이 남편의 역할이에요. 그리고 자식이라는 것도 이 땅에서 부모가 애를 낳았다고 해서 자식이 아닙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아들이나 딸이나 외손녀나 외손자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는 그 말은, 천국에 갈 자식은 사랑으로 등 떠밀려져야 돼요.

사랑은, 진짜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디서 테스트 하느냐 하면, 죽음과 마주하면서 테스트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사랑하니까 주님께서 어디를 테스트했습니까? “좋아? 네 자식 사랑해?” “사랑합니다.” “그 아들 죽여라, 인간아! 모리아산에서. 죽일 수 있나?” 아브라함이 알았던 것은 그겁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벽을 만나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내 실력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와야 돼요. 벽을 만날 때 약속이 드러나요. 벽을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오락입니다. 그것은 교회 와서 노닥거리는 것이고 교회라는 친목단체 만든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 다시 보겠습니다. 4절부터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이쯤 읽었으면 우리 맘속에 아담의 본질이 “그만, 그만!” 하면서 막 귀를 막고 흔들어야 돼요. 이런 사랑이 없으면 구원 못받는다는 이야기거든요. 이 말은 성경말씀 자체가 아담을 거룩으로 공격해서 이 심판, 말씀이 주는 심판을 누가 견딜 수 있을까, 누가 자기 힘으로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 성경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저주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정말 성령 받으면 즐거워야 됩니다. 정말 사랑을 받았으면 오히려 나의 과거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내가 저런 식으로 구원받으려고, 천당 가려고 설치다 보니까 맨 날 목사에게 속아넘어갔지.‘라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해야 된다고요.

그걸 어떻게 감지합니까? 공포, 공포심, 알 수 없는 공포심. ‘이러다가 내가 지옥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내가 구원 못받는 것이 아닌가?’ 그 공포심이 남아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그 사람은 벽 앞에서 되돌아가야 될 사람이에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랑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를, 고맙게도 우리를 죽은 좀비로 여기기 때문에 죽은 놈한테 뭘 물어요? 묻지 않는다는 이 자유함, 율법으로 어떤 것도 묻지 않아요. 율법이 쏘는 것이 뭐냐? ‘율법이 쏘는 것이 네게 있느냐?’ ‘없나이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매일같이 주님은 율법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쏘게 합니다. ‘네가 남을 온유하게 했나? 네가 사랑했나? 네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했나?’ 물어요. ‘못하나이다. 못하나이다.’ ‘네가 이웃을 사랑했나?’ ‘못하나이다.’ ‘네가 구원받은 자다.’

못하나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볼 때 과거동사를 써서 보기 때문에, 과거완료로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이런 자였습니다.’ 하고 현재 살고 있는 자기를 과거에 지나간 시체 보듯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다시 자기시체를 만지는 그런 관점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해라.” “못합니다.” 이게 아내 사랑하는 방법이에요. 사랑의 반대말은 교만이에요. 사랑의 반대는 우쭐댐이고 자만입니다. “아니오.” 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아니오.” 라는 말은 또 하나의 나의 기대와, 어떤 예정과,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계획이란 것이 다 있구나.”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그 계획이 있으면 안돼요. 우리는 맨 날 비일관적인 사건, 사건.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헤어지고 난 뒤에 헤어지는 시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헤어져봐야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지요. 헤어졌다가 사랑할 때가 또 있는 거예요. 그 때에 대해서는, 말씀의 비일관성, 비일관성이라는 말이 어려운데 그게 뭐냐?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나의 셈하기의 집합으로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만큼 모았지만 다른 많은 경우의 수가 남아 있는 거예요. 사실은 말씀에 의해서 야곱처럼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우리는 사랑은 엉뚱하게 모르고 그저 나하나 구축하고 잘되기 위해서, 대충 나를 잘난 존재로 증명하기 위해서 몇몇 끌어 모았잖아요.

그 끌어모은 데서는 이미 거기서 배제된 더 많은 것들이 오히려 진리로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거기서 성경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성경을 지키시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 창세기 24장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이 항상 기대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준비해 놓으신 분이 계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종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안수를 합니다. “네가 혼자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서 하나님께서 ‘저 여자다.’라고 지적하거든 그 때 네가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데려오너라. 그게 바로 내 아들의 며느리다.”

그래서 자식을 낳았잖아요. 그 자식은 두가지 요소를 다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신인종의 출현, 또 하나는 그 인종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육에 속한 하나님의 원수들의 집합, 좀비들, 악마의 형상, 그걸로 구분했다는 말이지요.

그걸로 구분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는 그 자식의 잉태를 통해서 비로소 그 리브가가, 내가 어떤 존재이며 이삭이, 자기가 망가지고 난 뒤에, 자기가 아들한테 속임을 당한 순간, ‘나의 아버지 됨’이라는 것이 이렇게 속아야 되는, 내가 예상한 큰아들에게 복을 못주고 둘째 아들 야곱에게 복을 줌으로서 나는 뭘 넘었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나는 이삭이라는 그 자체를 넘어서버린 거예요. 이삭 자체를.

‘나는 내 자식을 낳은 적이 없어.’ 이 자식은 약속이 나를 통해서 낳은 자식이지 내가 내 자식 따로 생각했는데 그 자식은 애초부터 가위표(×) 없는 존재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나의 일관성 있는 나의 체제는 주께서 이 땅에 살게 하면서 제거해나가신다는 그러한 것을 나중에 소급해서 차후적으로 돌아보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령을 받은 공통적인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야, 참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이 먼저 움직였고, 나는 그 말씀대로 가는데 내가 한고집 하기 때문에 얼마나 반항하고, 반발하고, ‘나 잘나고 싶어요. 나는 행복하고 싶어요. 나 남들에게 신앙좋다는 소리 듣고 싶어요.’ 이러한 악마의 음성을 어떻게 내식으로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답니다. 제가 북한에 안가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드라마에 나와요. 다섯 번 만나서 약혼을 했으면 그 다음절차는 결혼을 해야 되거든요. 우리 평양에서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현빈 보고 하는 소리가 “우리 뭐 빠진 것 없어?” 했거든요. 그 빠진 것이 뭐냐 하면, 약혼에서 결혼으로 가려면 중간에 사랑이 빠졌다는 거예요. 어제 나온 드라마 내용이에요.

그 동네는 남편을 세대주라고 하는데 아주 멋진 표현이지요. 약혼에서 결혼으로 가려면, 혼인잔치로 가려면 중간에 뭐가 있어야 되는가? 사랑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 1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천당가려고 몸부림 맘부림쳐 봤습니다. 목사가 시키는대로 다 했고, 성경말씀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속임수 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한걸음, 한걸음, 하루하루의 삶이 주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지연된, 연장된 삶인 것을 늘 감사하면서 보너스로 주어진 인생을 통해서 그냥 사랑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