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두개의 시선 1912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16. 17:50
2019-12-03 23:47:33조회 : 206         
두 개의 시선 19120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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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122.247)19-12-16 17:29 
강남-요한복음 총정리(7)-요한복음 17장 (두개의 시선)191203a-이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기도 내용인데요. 그 기도 내용 1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로서는 잘 납득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버지 그 자체로 영화롭지를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경우에만 아버지도 영화롭게 된다. 우리들의 생각은 우리는 순서를 아버지부터 시작하죠. 아버지가 영화로우면 그 아버지 덕분에 아들도 영화롭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종속되느냐 하는 그런 우리 입장에서는 참 낯선 이야기인데 이러한 아버지가 도리어 아들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성경에 보면 전에 수련회 할 때 아가에 그 아가 여러분 기억나지 않지요? 무슨 이야기했는지.


대전 수련회 때 아가 했거든요. 그때 반찬같은 건 기억나도 강의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실 거에요. 누구하고 누구하고 싸운 이야기는 기억해도 강의 내용은 기억 안날 수 있거든요. 그 아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가 이야기에서 핵심은 ‘나의 누이’에요. 그 솔로몬의 술람미 여인보고 나의 누이라고 했거든요. 누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식구일 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가족일 때.


나의 누이 있다는 말은 이거는 오빠란 뜻이죠. 오빠이다. 술람미 여인에게 오빠가 두 종류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아가에서. 하나는 뭐냐 하면 친오빠죠. 혈육적 오빠. 혈육적 오빠가 있어요. 아가 1장부터 그리고 마지막장까지 계속 혈육적 오빠가 걸리적거려요. 계속 걸리적 거립니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혈육의 특징은 뭐냐 하면 가족의 특징은 내가 선택하기 이전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친구하고 사귈 때는 내가 그만두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혈육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어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분불가능성이다. 내 쪽에서 처분이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아가 1장에 오빠가 1장 1절에 보면 오빠가 포도원에서 자기 누이동생을 일하러 보냅니다. 1장 7절에 보면. 그리고 8장 보게 되면 그 8장 7절, 8절 쭉 뒤에 보게 되면 9절 같은 경우에 “그가 성벽일진데 우리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다시 말해서 술람미 여인이 연애를 하는데 있어서 그 네 남자친구가 그냥 너하고 우리 허락도 없이 사귀는 모양인데 우리 오빠들이 너 연애하는걸 가만 두지 않겠다. 그들이 쳐들오게 되면 아예 문밖에 못 나가도록 판자를 덧대겠단 말이죠.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가족이 연애를 하든 남자를 사귀든 항상 우선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혈육이라는 혈육, 가족이라는 것이 우선되는 겁니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 너는 시집가야 되고 네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결혼해야 된다는 그것이 아가 구조에서의 갈등구조가 되는 겁니다.


갈등구조가 되는데 그 오빠가 혈육적 오빠가 강력하게 자기 누이동생을 단속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또 하나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미지의 인물이에요. 솔로몬 왕이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사랑하는 여자보고 나의 누이라고 합니다. “나의 누이여. 나의 누이여”.


이것은 혈육적인 나의 누이여 솔로몬이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솔로몬은 자기 여자 친구 자기 애인을 보고 나의 누이라고 해가지고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혈육적인 관계 이전부터 나는 네 식구였다. 원형적으로. 네 식구였다는 것, 네 하나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이게 알려줍니다. 가족이기에 나는 너를 데려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가서는 갈등구조죠. 하나는 혈육이 버티고 있고 혈육을 뚫고 혈육보다 더 우선되는게 있다는 겁니다. 혈육보다 우선 되는 것.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오빠 누이동생은 본인이 선택해서 가지게 된 게 아니잖아요. 그게 처분불가능성이죠.


그런데 새로운 오빠도 나의 누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너를 보고 누이라고 내 가족이라고 하는 것도 네가 처분가능한게 아니라는 거에요. 혈육적인 오빠 누이의 그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는거에요. 솔로몬이 자기 술람미 여인에게.


그러면 그 혈육적 오빠 입장에서 그냥 단순히 내 누이동생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완전히 혈육적인 모든 것을 발라버리고 그걸 부정해버리는 더 원형적인 가족관계가 드디어 출몰했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자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사적으로 이 오빠는 누이동생하고 연애 못하도록 막습니다. 1장에서 막고 8장에서도 막고 끝까지 막아요. 만약에 네가 우리 말 안 들으면 너는 우리 집안에서 쫓겨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은 혈육적 육의 관계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육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 죽음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죽어라. 왜? 죽음보다 더 센게 있기 때문에.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사랑은.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혈육에서 끊어지는 것이 네가 스스로 처분, 나는 이제 집에 오빠하고 안 놀아 이런다고 해서 사랑을 얻는게 아니고 먼저 사랑이 다가오게 되게 되면 혈육이 그 사랑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천하 자식이나 남편,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왜? 더 원형적이니까. 더 원초적인 거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육의 관계는 영의 관계를 영적 숨어 있는 영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하나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유에 해당되는 겁니다.


은유에 해당되고 은유에 해당되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언어라는 것이 그 기능이죠. 숨어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의 연결. 그러나 그 문자나 언어를 아무리 파헤쳐도 숨어 있는 것은 나타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이 오게 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은 그냥 언어에 갇혀 있는 허구와 허상에 불과하다. 껍데기에 불구한 거에요.


진정한 관계, 다시 말해서 “나의 누이여”라고 하면서 찾아올 때에 그냥 찾아 오는게 아니고 일단은 그 술람미 여인이 육에 갇혀 있는 상황을 일부러 허락해주시고 그 인간이 끊을 수 없는 육,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 그걸 끊어내고 그 육에 갇힌 인간을 사랑 쪽에서 무사히 구원해내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아가가.


여기서 아가에서 육과 영이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이 뭐가 됐다 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거죠. 이 말은 육신은 말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영은 육신이 될 수 있어도 육신은 영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어디까지나 모형이기 때문에. 그림자기 때문에.


영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육이 있는 것이지 육 그 자체를 육이 파헤친다고 영이 나타나는게 아니에요. 이 처분불가능성 중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자식과 아버지, 자식과 부모 관계입니다. 자, 육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은유의 세계, 허구의 세계에서는 부모가 먼저 있고 자식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관계는 혈육적 관계이기 때문에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처분불가능성이죠. 친구는 사귀다가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이미 낳은 자식에 대해서는 이거는 갖다버릴 수도 없고 젖 달라하는데 젖 안주고 네가 돈 벌어서 분유 사라 뭐 이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적.


따라서 이 혈육관계에서는 세상에서는 부모가 먼저 있고 자식이 있지만 이게 영적세계에서는 뭐냐 하면은 자식이 먼저 있고 부모가 있는 거에요.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는 자기가 처분불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식 때문에 나는 자아 찾기 못해요. 자아 찾기 해서 헬스하고 있으면 아기가 기어가가지고 젖 달라고 울 때 이거는 내 인생의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끼어든거에요. 자식이 3명이나 돼. 어쩔 수 없잖아. 4명이 되는걸 가까스로 막았다마는.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가 뭐다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겁니다. 자식이 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한 셈이 되지요. 왜? 내가 자식을 선택을 안했으니까. 내가 자식을 선택을 안했으니까요. 태어난 후에 태어난 그 존재가 나라는 존재로 하여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입장인가를 더 세밀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처분불가능성인데 결국 인간은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가 뭘 하느냐? 내 위주로 살수 없다는 것 나는 뭔가 엮여 있다는 사실을 자식의 출생과 더불어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1절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구조를 지상에 모습으로 구조를 밝혀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제가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나는 그 누구로부터 선택 당했다 라는 언급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종속 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육의 세계에서 악마의 사주를 받았던 인간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철저하게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인간은 뭐가 되었어요? 자기가 신이 되지요. 신이 된다는 말은 자기가 절대적이 되는 겁니다.


자, 선악과 따먹은 취지가 뭐냐 하면 선악지식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하여금 분명히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처분불가능성이죠. 내가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처분불가능성이거든요. 그리고 나라는 것은 홀로 나 가 아니고 내가 처분 불가능한 다른 타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타인의 운명에 엮여져가지고 오히려 그 쪽이 나를 처분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성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인간은 본인을 뭐로 봅니까? 신으로 보지요. 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처분가능이에요. 처분가능. 그래야 신이 신다우니까. 절대권한이 있어야 신이니까요. 선택을 누가 한다? 남으로부터 선택 당하는게 아니고 누가 선택한다? 내가 선택하는 거에요. 내가 선택.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내가 선택할 때 내가 모든걸 선택한다 할 때에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거부하는 거에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최고가 되어야 신다우니까. 내가 선택할 때 여기 ‘나’가 나오지요. ‘나’. 그런데 나라는 것이 이게 허망하고 허구적인 거에요. 왜냐하면 나라는게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은 몸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말씀에 종속되어 있지요. 예수님 맘대로 사는게 아니지요. 아버지 뜻대로만 살지요. 아버지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고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런데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선악체계, 악마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인간의 몸은 여기에다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그냥 나 가 아니고 절대적 나 가 되는 겁니다. ‘절대적 나’. 왜? 내가 신이 되야 되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과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몸이라 하는 것은 종속되는 건데 처분불가능이거든요 몸이 스스로.


그런데 여기서 몸을 버리고 뭐만 나왔어요? 몸을 버리고 나로 나왔으니까 나는 자칭 뭐가 되요? 자칭 신이 되는 겁니다. 자칭 신. 몸인데 뭐로 추정한다? 몸인데 이건 몸입니다 이렇게 해야될 걸 나는 나 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몸이라고 하면 이 몸은 어디서 왔느냐가 문제가 되지만 내가 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 만들었어요? 나는 내가 만든 거에요. 나는 내가. 이 몸을 가지고 나 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내 몸을 내가 처분가능한 거에요. 내 몸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이러잖아요. 내 몸이니까 내 몸이라고.


몸은 처분불가능한데 나라고 해가지고 어디서 뚝 떨어진 나 가 있어가지고 몸을 이걸 자기화 자기 걸로 만든 거에요. 그러면 나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절대적이죠. 그런데 몸은 절대적입니까? 몸은 변해요? 안 변해요? 점점 변하지요. 감정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변하잖아요. 내가 왜 이럴까? 맨날 내가 왜 이럴까.


이가 아프다. 그럼 치과에 가야되겠지요. 이가 아픈데 치과에 가기 전에 먼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왜 내 이가 왜 아플까?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인간 속에 나라는 그 개념 속에는 내 이가 아파야 돼요? 안 아파야 돼요? 안 아파야 되죠. 신이기 때문에 안 아파야 돼요. 그런데 이가 아프니까 여기서 짜증이 나는 거죠.


짜증은 뭐냐 하면 개입이에요. 간격. 벌어진거에요. 이 몸과 ‘나’가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치과에 가서 몸 관리해야지. 누가? 내가. 지이잉~할 때 참아야지. 치과에 가서 참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 몸살 되지요. 몸살 될래? 치과 갈래? 치과 가서 일어나는데 몸은 몸인데 몸살이야. 너무 용을 써가지고.


참으세요. 참으니까 몸살된 거에요. 참다보니까. 인플란트 한 두개 하면 한달 동안 몸살 걸려요. 참는다고. 모든 치과는 다 아파요. 짜증이 나는 겁니다. 짜증이 난다는 것은 뭐냐? 개입이 있다는 것. 벌어졌다는 거에요. 벌어졌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치과에서 내 몸 관리 잘했어 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 하겠지요.


나는 아픈 것도 참아낼 수 있는 장한 나라는 거에요. 장한 나. 그러면 ‘나’가 뭘 따로 붙이냐. 몸이 안 아픈 몸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빨이 아픈 몸2가 됐지요. 나는 변화하는 몸을 따라 잡아서 ‘나’가 곧 갑자기 몸2와 합의를 하고 일치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 몸이 또 몸3로 또 변해요. 변한다고요. 계속해서 따로 붙여야 되는 거에요. 계속해서 개입이 생기는 겁니다.


돈 한 10억하고 그만 벌려고 하는데 10억하고 더 벌고 싶어요. 계속 사업 벌리고 백종원 처럼. 계속 사업 벌리고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계속 일 벌리지요. 아직도 목마르다. 4강하면 되는데 4강 말고 결승전까지 올라가야 돼.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히딩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몸을 정하고 싶은데 반대로 몸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몸 따라 변하는 나 말고 몸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나는 한결같이 나이고 싶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체라고 하는 거에요. 그걸 주체라고 하는 거에요.


주체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한결같은 나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이 주체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내가 나는 절대자거든요. 절대자이기 때문에 내 몸에 대해서 절대자이기 때문에 나의 절대가 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나는 뭐를 무슨 일을 해서 한결같은 몸 따라 변하는 이러한 불쌍한 나 가 아니라 몸이 어떻게 망가져도 불멸의 존재, 한결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선악지식을 여기에다가 활용합니다.


이게 무슨 기능이냐 하면은 바로 심판기능이에요. 최고의 심판자리에 앉아요. 최고의 심판자리. 내려다보면서 지적질하는 것. 지적질하는 거에요. 저 사람보다 내가 나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저 사람보다 내가 잘 사니까 나는 행복하다. 나를 절대화시킬 수 있는 구실과 빌미거리를 계속해서 모집하는 거에요. 이게 인간의 한평생입니다. 평생이에요.


나의 절대성, 한결같은 주체의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만만한 것들이 다 와요. 만만한 사람들 없잖아요. 전부다 나름대로 신이기 때문에. 내 구미대로 전부다 심판해도 안 먹히잖아요. 그럴 때 뭐가 동원하느냐 하면 개가 동원돼요. 고양이나 강아지 개. 만만하거든.


자기 사랑을 주고 네가 내 사랑을 아는구나 하고 흐뭇해하고. 나는 이렇게 나 말고 다른 몸을 사랑할 줄 아는 절대적인 존재. 사랑을 할 줄 아는 그런 괜찮은 불멸적인 사랑으로 사랑을 하는 존재. 그걸 강아지 옆에 끼고 그걸 확인하는 거에요. 처음부터 강아지 안 키우죠. 남편이나 아내 가지고 한번 해보겠다 하는게 전부다 사단날 때.


내가 결혼하고 불행 끝 행복 시작하는게 다 사단 나고 다 깨져 버렸어. 남이 만만하지 않아서. 내 주체에 호응을 안 해줘. 내 주체에. 차라리 네 자리에 나를 호응하지 않을거 같으면 꺼져버려라. 그 자리에 개나 키우자. 그래야 외롭지 않으니까.


자, 외롭지 않다는 말은 상대를 위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 평가에 대해서 고분고분 수용할 수 있는 어떤 타인과 대상자를 뽑는거죠. 만만한게 개, 고양이고 안 그러면 그 개 고양이 보다 좀 더 인간답다 하는 것은 자식이죠. 자식.


수능 끝났으니까 이제는 대입특강하기 위해서 밤샘 해가지고 줄서가지고 이제 너는 무조건 SKY대학 가야된다고 엄마가 새벽까지 와가지고 줄서가지고 강의 티켓 끊고 난 뒤에 엄마가 이정도로 너를 위해서 헌신했으니까 무조건 너는 좋은 대학 가야돼 라고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 이게 무슨 작용입니까? 엄마 자신의 절대적 주체를 위해서 아이를 자기의 심판대상, 평가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평가대상. 네가 잘하면 엄마가 기분 좋다는 거에요.


자, 선악지식의 절대성은 인간에게 무슨 기능을 보여준다? 심판기능을 보여줌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처분불가능이 아니고 나는 처분가능한 곧 내가 곧 신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몸은 아파도 자기 주체는 절대적이니까. 자기의 주체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만만한 누가 필요하다? 타인. 남이 필요한 거에요. 타인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도 없고 주체라는 것도 없는데 있기는 뭐가 있어요? 몸이 있지요. 그 몸.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나는 몸이 있다 나는 신체가 있다 이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게 나야 라고 그게 내 주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바로 타인이라는 것은 내가 처분하니까 쉽게 말해서 내 입맛에 맞는 나를 호응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내곁에 두는 거에요. 내곁에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잘남을 증명해야 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왜? 명령자가 갑이 되고 피명령자는 을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주변에 있는 것보다 우뚝 솟아오르잖아요. 그게 자기만의 소우주 가운데서 거기서 신이 되는 거에요. 소우주 가운데서.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계속 처분 가능한 것만 찾아다니죠. 처분 가능한 것만. 처분불가능이 없어요. 그런데 원래 몸은 처분불가능이거든요. 몸이 스스로 몸을 처분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몸을 누가 접수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을 접수했거든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육신을 접수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심판은 누가 내립니까? 말씀이 내려야지요. 아까 아가 이야기 다시 한번 드릴까요? 그 술람미 여인에게 혈육적인 오빠가 계속 뭘 방해하고 있어요? 이 오빠하고 누이동생은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자기만의 패밀리 육의 가족이잖아요.


그런데 그 누이동생이 어떤 남자친구하고 사귀니까 이걸 뭘로 보냐 하면 우리 가족의 절대성, 불변성, 처분가능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보는 거에요. 그 자기 누이동생의 남자친구를. 끝까지 방해하지요. 만나지 못하도록. 포도원에 집어넣어서 온종일 일하게 만들고 외출 못하도록 아예 덧대가지고 판자를 덧대가지고 집에 못 가게 만들고 바깥에 출입을 못하게 만들고.


그래놓고 우리끼리 저희들끼리 그게 사랑이래. 이게 가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어디로 부터 탈출해요? 바로 바깥에서부터 온 그 솔로몬의 사랑이 뭐를 강제로 찢어버리고 떼어냅니까? 선악체계에서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 이 말이죠. 육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야. 육은 영을 묘사한 것밖에 안되거든요.


원형적인 그 육이 육 되게 했던 원형적인 그분이 그 육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사랑을 데려오는 것.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에요 사랑. 그게 사랑이에요. 육을 끊는게 사랑이에요. 육을 끊어버리는 것. 처분을 누가해요? 여자가 합니까? 남자가 합니까? 솔로몬이 사랑을 줌으로써 여자는 자기가 누구의 누이동생이고 누구 집안이고가 없어요. 이제는 그분의 처분에 맡기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을 처분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생애가 말씀대로 움직이죠. 말씀대로. 인간의 몸이 있는데 인간의 몸을 자아라고 했죠. 자아라고 했는데 몸이 자꾸 변하잖아요. 몸이 자꾸 변하니까 몸1, 몸2, 자꾸 변하니까 자아가 몸 말고 따로 영원불멸의 자아로 만드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주체라고 했지요? 계속 이 주체는 몸이 어떻게 변하던간에 계속 이 주체가 다 내가 해당된다 내가 처분가능하다고 본거에요.


심지어 뭐로 보느냐 하면 내 몸이 죽어도 내 영혼은 살아서 어디 간다? 천국 간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 주체가. 이 주체가 결국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n+n+1. n다음에 n+1. 수 에서 순서적 서술에서 1,2,3,4,5. 2는 뭡니까? 1+1이고 3는 뭡니까? 2+1이죠. 4는 뭡니까? 3+1이죠. n+(n+1)로 계속 나가지요. 점점점.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수학에서 무한인거에요. 무한. 결국 인간의 주체는 늘 배고프지만 어디에서 놉니까? 무한에서 갇혀서 무한에서 노는 거에요. 무한에서. 그래서 신이 된 인간은 뭘 추구한다? 영원한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거에요. 수학적 집합론으로 증명이 되는 겁니다.


계속 변하니까 지금 오늘 나와 내일 나가 다르니까 자꾸 따라갈려니까 짜증나잖아요. 에이 이걸 하나로 묶어 버리자. 이걸 수학에서 뭐냐 하면은 집합론이라고 합니다. 집합론. 쉽게 말해서 내가 나 하나라도 셈 할 수 있다면 나는 무한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이게 수학자들의 현재 수학자들의 결론이에요. 내가 셈하면 내가 하나 둘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곧 무한 속에서 무한까지 파악한 진리임을 증명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걸 묻고 따지지 마라. 이거는 왜냐하면 공리니까. 공리. 묻고 따지는게 아니에요. 일단 그렇게 정하자 에요. 정해버리자. 수학에서 나온게 물리고 다 나오지요. 한번 볼까요. 셈하기가 가능하면 셈하기가 가능하다. 하나 둘 셋 넷. 집에 강아지가 4마리 있으면 하나, 둘, 셋, 넷 하지요. 그럼 그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셈했던 내가 주인 됩니다. 내가. 내가 주인되는 거에요. 왜? 내가 판정관이고 내가 가치를 결정하고 내가 나에게 소환되는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세계에서의 추구하는 것은 무한 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하나의 놀이고 게임이 되겠죠. 게임이. 인간은 평생 게임하다가 볼 일 보는 거에요. 무엇에서? 무한 안에서. 무한은 무한이기 때문에 다 마지막 정복이 안되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선악 지식은 계속해서 개발이 가능하고 발전과 모험을 결의하고자 하는 거에요. 인간의 사는 이유는 게임 속에 판돈 들고 미지의 무한을 향하여 도박을 벌리는 겁니다. 왜 무한을 향해 도박을 벌릴까요? 미흡하니까. 주체는 영원한데 실제로 주어지는 이 모든 것은 내 욕망에 부족하니까. 어지간히 사업 벌리고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니야 더 벌어야 돼. 이유를 묻지 마라. 내 주체가 그래. 나는 그러고 싶어.


"여보 처가집 집 얼마나 하지?" 이런 거 묻지요. "그거 좀 잡혀서 사업 한번 벌려보자. 사업 불려 보자. 당신 돈 얼마 끌어 모을 수 있어? 친구한테 얼마 끌어 모을 수 있느냐?" "왜 그런데?" "나 아직 배고프다." 계속 배고파요. 계속 배고파. 종속되지 않았어요.


자, 이러한 이 사실을 인간들은 무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신이기 때문에 무한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무한을 지향하고 무한을 바라보며 산다는 걸로 해서 신과 자기를 같은 동네에 있는 레벨이 같은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은 신을 뭐로 봅니까? 무한으로 보지요. 이게 여호와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관계 없어요. 하여튼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냥 무한하면 또 약간 빈약하니까 뭘 붙여요.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시고 거룩이 무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고 뒤에 뭐가 붙습니까? 무한이 붙어있다는 말은 그걸 아는 나는 무한과 나와 서로 알고 지낸 사이 아니냔 말입니다. 내가 무한을 추구하니까.


그게 바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이 벌렸던 종교오락이었고 종교게임이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믿어서 영화롭게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뭡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대단하십니다” 이게 영화롭게 하는게 아니고 뭘 해야 돼요?


아들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어요. 아들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왜냐하면 아들은 영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래서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면 이 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이미 배타적으로 예수님 빼놓고 다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영화롭게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로마서 3정 23절 찾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여기에서는 도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그리고 로마서 3장에 2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같은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입을 막고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음이라”.


인간 존재가 무한한 신을 열망하고 신에게 질주하고 달려간다는 것은 그들은 지금 자기가 무한한 존재로 착각해 가지고 지금 게임을 하나님하고 판돈가지고 게임을 하는 거에요. 사람만 개발하고 모험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두고 자기가 자신에게 모험에 나서는 거에요.


이정도 금식하면 영광되겠습니까? 이정도 기도하면 영광되겠습니까? 이정도 헌금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정도 하나님께 모든 걸 다 몰입하면 하나님 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하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낮에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 현장에 본인만 있다고. 본인만 있다고.


거짓말쟁이들. 세상에 교회 다니는 거짓말쟁이들. 전부다 사기입니다. 전부다 사기에요. 하나님께 열심을 내면 열심을 낼수록 거기에 미흡함이 남고 거기에 모자람이 있고 그걸 남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애써 내가 무한을 향하니까 나 괜찮다고 본인이 본인보고 불멸의 존재라고 영원한 영생을 받은 존재라고 인정하는데 도대체 그 몸은 원래 어디서 온 몸인지를 그거는 알 도리가 없지요.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모르지요. 이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몸은 우리가 처분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처분불가능이에요. 그거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해요. 말씀대로 처분되어야 됩니다.


몸이 처분대로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 있어서 나 하고 예수님의 주체라는 것은 조건이 붙어요. 뭐냐 하면 말씀대로 될 때만 예수님의 주체가 주체답고 나 가 나 다운 거에요. 왜냐하면 이 몸은 말씀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거에요.


자, 아까 제가 한 공식 봅시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어떤 기능이 있다? 심판 기능이 있지요. 심판 기능. 두개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만 영화롭게 하지요. 예수님의 몸과 그 외의 모든 몸. 그런데 몸인데 여기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몸인데 그들이 자아를 통해서 심판 기능을 하지요. 예수님도 뭐합니까? 심판 기능을 하지요.


자, 두개의 심판 기능 가운데 어느 것이 실효성이 있고 실제적으로 심판이 효과가 있는 심판이냐 하는 겁니다. 먼저 인간은 자기가 신으로 군림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는 심판 기능 속에 예수님에게 자기 몸을 맡겨 버립니다. 인간들은 자기 절대화를 위해서 필히 누굴 죽여야 돼요? 자기 절대화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그것을 제거하는 기능이죠. 그 제거할 때 뭐냐?


그걸 악이라고 하고 이단이라고 하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제거해버려요. 그게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18장 19장에 보면 요한복음 한번 볼까요. 18장 39절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지요.


빌라도가 요한복음에서 빌라도가 계속해서 뭐냐. 예수님은 죄 없다고 이야기해요. 죄 없는 사람 죄 없는 사람 한두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죄 없다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죄가 없으면 당신한테 안 맡겼습니다. 죄인으로 처분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계속해서. 심판 기능을 그들은 그들의 주체가 심판기능을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거에요.


아까 그 몸이 절대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처분가능하지요? 처분가능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느냐? 여기에 심판기능을 하면서 자기 절대성을 옹호하는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배제합니다. 자, 타인이 어떤 타인이라고 했어요? 내 입맛에 맞는 타인을 골라서 두지요. 그러면 나머지는 뭡니까? 제거 대상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제거 당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의 심판이 곧 뭐다? 너희들의 심판받을 이유를 근거를 말하란 말이에요. 예수님한테는 예수님 어떤 자료가 있고 근거가 있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재료와 증거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다 모으신 거에요. 성령께서는 그걸 지적했고 성령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희를 심판하리라”.


그러니까 인간과 예수님ㅊ사이에 뭐만 주고받아요? 내가 너를 심판하는게 옳으냐? 아니면 네가 너를 심판하는게 옳으냐?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심판하겠어요. 저는 예수님 앞에 심판 안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모든 인간은 자기 절대화를 포기 못하게 되어 있고 그 포기 못함이 어디를 제거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화시키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차후적으로 제2의 순서로 밀어버려요 인간은.


내가 중요하지 예수님이 안 중요하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죄고 예수 안믿는 것도 의미 없고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에 심판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빼놓고 all 모두가 주님의 심판대상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끊임없이 임의대로 자기를 처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말이 뭐냐? 내가 내 기능으로 내가 심판기능으로 봐서 당신은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했다는 그런 심판 또는 평가, 그런 평가를 내가 당신한테 제공합니다. 그러니 우리 둘이 손잡고 잘 해봅시다라고 했을 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공동체를 깨려고 했지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빼놓고 다 도망,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흩어지지요. 누가 감히 누가 함부로 예수님을 평할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어요. 영이 육이 된거지 육이 영이 될 수 없어요. 영을 모르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요. 그냥 사탄의 본능대로 악마의 본능대로 선악적인 지식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 빼놓고 전부다 모든 것을 처분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은 예수님을 인간은 육은 뭐냐? 처분 가능이니까 선택을 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 죄인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8장 19장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여서 또는 사람들이 모여서 누굴 결정했어요? 저 예수는 죄인이라고 결정을 한겁니다. 죄인이라고 그들은 예수님을 선택한 거에요. 예수님을 죄인에다가 집어넣은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뭡니까? 제자들이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죄인으로 선택 당하지요. 제자들은 의인이 아니에요. 내가 내 선택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넣었습니다라는 것을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알게 된 죄인인데 이 죄인은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선택에 의해서 비로소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음을 아는 죄인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 안 믿는다가 의미 없고 나는 그냥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서 처분된 거에요. 이미 일은 모든게 마감되었어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현실은 바닥까지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영화롭게 할 존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 인간의 종교게임 오락 교회놀이 끝났어요.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신앙을 하든 교회를 하든 뭘 해도 이게 내가 죄인인 것을 들추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선택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 우선해서 내 자아와 주체 때문에 주체의 불멸성 때문에 주님께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의 영이 오니까 비로소 십자가 의미를 되돌아와서 비로소 파악이 되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 죄인이 되었다라는 말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TV가 있잖아요. TV가 이렇게 있는데 TV가 보기 싫다 할 때는 우리가 그냥 TV를 끄면 그만이죠. 주님께서는 TV를 끄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 안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TV는 그냥 꺼놓고 거적대기를 거기에 덮어버려요.


결국 우리는 안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계속 죄짓고 있지요. 죄짓고 있으면서 거적대기를 그 옆에다가 얼기설기 그걸 덮어 놓으니까 그 틈새에 뭐가 나옵니까? 죄가 계속 나오지요. 죄가 계속 나오는데 이 자체가 감사거리고 고맙고 은혜롭지요. 은혜로운 이야기.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심으로 주님만 영화롭게 하고 주님만 영화롭게 한다면 누구한테 영광이 된다?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는 그러한 자로 간택이 되었다는 택정, 선택받았다는 것. 이게 새로운 영적 패밀리 영적 가족이고 이게 사랑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59.♡.122.247)19-12-16 17:30 
강남-요한복음 총정리(7)-요한복음 17장 (두개의 시선)191203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예수 믿는다, 예수님 안 믿겠다 그런 말도 다 불필요하지요. 왜냐하면 ‘내가’ 집어넣으면 여기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안 믿는다 하면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서술이라고 하면 이 서술적 내용과 나를 억지를 부리면서 일치시키려고 애를 써요. 일치가 안됩니다.


일어나는 상황과 내가 일치시킨다고 해도 그 나는 자꾸 변해요. 그 '나'가 어떤 나인지 내가 어떤 인간이지 몰라요. 따라서 그 나를 모르니까 이걸 고정시키려고 뭐를 하느냐 하면 무한 또는 불멸적 존재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무한 불멸적 존재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심지어 어린 애라도 자기를 불멸적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왜 엄마 차 몰고 110km 달려가지고 운전 못 하는게 운전 왜 했느냐 하면 애 답변은 "하고 싶어서요." 끝나는 거에요. 누가? 내가 하고 싶어. 내가. 내가 하고 싶대.


몸은 자기 것이 아닌데 거기서 끄집어낸 거기서 유출된 나는 이 벌써 불멸적 존재가 되어 있어요. 절대적 존재로 행세하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왜 어른들이 나섭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참 자식 키우기 참 힘들다 하는데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자식 키우기 어려우면 갖다 내버리면 되거든요. 왜 못 버립니까?


이게 처분불가능성하고 엮여서 그래요. 처분불가능성하고 엮여서. 나는 자의로 '나'이고 싶은데 자식이 애를 먹이는 거에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돌아가는 거에요. 주체는 절대적인데 실제로 나하고 엮인 관계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간격이 생기죠. 간격이 생기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간격을 없애기 위해 간격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간격을 못 없애니까 그냥 뭐하냐 하면 정죄하고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나가 죽어라 인간아!” 이렇게. 그러면 자식이 “엄마나 나가 죽으세요”. “이게 어디서 키워준 것도 모르고”. 그래서 신과 신의 싸움이 벌어지는 거에요. 강호의 무림처럼. 서로 싸우는 거에요.


주님 보기에 둘 다 아니요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모든 것이 예수님 빼놓고 전부다 아니요를 유도하는 식으로 주님 자신만 돋보이기 위해서 주님 빼놓고 모든 것을 아니요라 하는거에요. 네가 믿던 믿음도 아니고 안 믿고 네가 안 믿는 것도 아니요. 그것도 안 믿는 것도 네가 뭘 알고 난 안 믿습니다를 무슨 자신 있게 하느냐.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왜 네가 결정하고 네가 판단하고 네가 왜 평가하는데? 자책하지 말란 말이죠. 너는 자책하고 자해할 권한도 없는 거에요. 유도하시는 분, 주님이 유도하신 거에요.


자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게 되면 자본적인 사회에서 '나'가 있다는 것은 자본이죠. 돈. 부동산, 현찰. '나'가 있을 때 '나'가 되는 거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게 없으면 '나'가 없습니다. 왜 이유가 뭐냐 하면 나 여기 돈 없는 나 여기 있잖아 하지만 타인이 나를 나로 인정하지를 않아요.


그때는 뭐냐 하면 나는 있지만 뭐가 없다? 주체가 없는 거에요. 남이 알아주는 그런 '나' 가 없을 때는 주체가 없는 겁니다. 돈 없으면 가족한테도 추방당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게 곧 '나'가 돼요. 가진 게.


그러나 성경에서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몸이 있다고 해서 나가 되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처분에 의해서 '나'가 발생되는데 이 예수님의 나 또는 예수님의 주체는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돼요. 예수님에게서. 그때 뭐냐 하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선택받을 때 어떻게 선택받습니까? 죄인으로 선택받으면 이 죄인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나'가 되는 거에요. 죄인으로. 이게 아주 신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평가를 내 쪽에서 하는 모든 평가를 중지시키니까. 예수 믿어도 죄고 안 믿어도 죄고. 나는 예수 믿어도 죄고 안 믿어도 죄인 것을 안 한다는 그것도 죄가 되고. 네가 스스로 너를 처분하지 말라 말이에요. 네가 너를 평가하거나 심판하거나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왜? 심판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몸은 누가 가져갑니까? 이미 자아가 주체가 주님으로부터 지정을 받게 되면 덩달아 뭐도 지적을 받게 되냐 하면 우리의 몸도 내 것이 아닌게 되고 주님의 몸으로 지정이 돼요.


요한복음 17장을 한번 볼까요. 17장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한다”고 되어 있어요. 누가 보전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보존하지요 주님이.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본래의 몸이 있어야 될 제 기능을 주님에 의해서 제대로 기능이 드디어 가동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21절에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 말은 우리보고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이미 그렇게 해줬다는 이야기에요? 앞으로 할 것이라는 말은 주님한테는 미래는 없어요. 주님이 주님께서 십자가 질 때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 되게 해줄게가 아니라 이미 하나인거에요. 이미 하나라면 거기서 우리는 뭘 철수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됩니까라는 나의 판정 나의 평가를 우리가 그 현장에서 찢어버려야 되지요. 찢어버려야 돼요. 이거 골로새서 2장입니다. 2장 16절. 내게 대해서 묻는 모든 서류를 찢어버려. 주께서 찢어버리는 거에요. 앞으로 잘할께 내가 반성할께 그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거에요.


주께서 했으면 한거지 토달지 말란 말이죠. 앞으로 시키는대로 잘 할께요 라는 말 하지마. 그게 바로 또 주님의 몸을 내 몸이라고 인수인계해서 인수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 밖에 안돼요. 매였으면 매인 값을 해야지. 마치 독자적으로 주의 말씀대로 이제부터 내가 잘 지키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지 말란 말이죠.


그러면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뭘까요? 아까 악마가 노리는 것이 우리가 독자적인 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뭐가 되겠다? 신이 되겠다 하면 이 몸에 대한 자아와 주체를 내가 또 가져와야 돼요. 마귀는 또 나한테 있다고 또 우기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내 몸이 하는 것과 이 자아가 요구하는 것과의 이게 합체가 안되니까 또 헐떡거리면서 맞춰나가려고 또 애를 쓰게 되는 거에요.


"주여 이렇게 하면 말씀대로 지킨거 맞아요? 이러면 실천에 옮긴거 맞습니까?" 또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주께서 이미 다 손에서 끝났는데. 잡채 할 때 엄마가 이렇게 먹어보고 맛이 됐다 하면 끝난거 아닙니까. 어린 딸이 뭐한다고 자기가 싱겁다고 소금 쳤다가 너무 짜다고 물 부었다가.


하여튼 요리 못하는 사람들은 하여튼 뭐 레시피 인터넷 봐가지고 뭐 하는데 엉망진창이라 엉망진창. TV보니까 하승진 누나가 그렇게 요리 못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런거 그냥 들으세요. 농구선수 하승진 누나인데 옛날에 국가대표인데 우리나라에서 요리 제일 못해. 아버지의 소원이 제발 요리하지 말라. 그래도 요리해요. 그럼 아버지가 뭐냐? 그거 들고 아버지가 싹 들고 다 갖다 던집니다.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요리해야 됩니까? 이미 다 차려줬는데 손 댈 거 없는데 악마는 자꾸 흔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그거 뭐냐 하면 "남 구원받아야 소용없잖아. 네가 구원 받아야지. 네가 천당 가야지." 하는데 요한복음에는 ‘나’가 없습니다. 우리입니다. ‘우리’.


그 우리는 내가 손대서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이미 굳어놓은 확정지어 놓은 우리에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그 우리에요. 그 교회가 우리교회에요. 갑자기 또 간접 광고 하는거 같은데. 우리 그런 교회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복음 17장에서 이미 기도로서 응답이 되어 버렸는데 그럼 18장 19장은 왜 있느냐? 아 예수님이 고생 많이 했다 뭐 십자가 고난 받았다 그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아니에요. 자, 우리가 뭘 해도 죄다. 우리가 복음 이야기 알고 난 뒤에 편하게 이야기하잖아요. 뭘 해도 죄가 되는게 아니에요.


주께 우리는 뭐 아무렇게나 해도 죄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죄라는 것도 예수님께서 정해진 코스가 있어요. 죄가 되는 코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반발하고 반항하고 저항하는가를 그 코스를 예수님께서 몸소 체험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 코스를 밟았습니다. 경로를 만들었어요.


만들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예수님이 당했던 예수님한테 핍박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우리한테 반복 재생시킵니다. 우리가 아직도 몸이 여기 있고 죽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맡은 역할은 예수님의 그 당시에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들의 짓거리를 모든 상황을 통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재방송을 시키는 거에요. 재생시키는 겁니다.


그 수사 드라마 같은 것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이 범인하고 도망갈 때에 경찰들이 어떻게 잡습니까? 그 시점에 요새는 차를 많이 타고 다니니까 그 시점에 차를 그 근처 반경 100km내에 CCTV 다 조사를 해가지고 이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 차가 왔느냐? 그 코스만 알면 그걸 찾아가게 하지요.


오성시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면 오성시 이건 가상의 도시입니다. 모두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오성시. 오성시에서 살인사건 일어났을 때 그 살인사건을 서울에서 어떻게 왔는지 이런 코스를 밟아나가지요.


주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죄라고 하는 이미 이게 서울이라면 우리가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고 오성시라는 가상의 도시라면 이 도시에서 그 코스를 전부다 들추어보는거에요. 주어진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상생활 평범한 삶 속에서 어떻게 그것이 십자가로 연결되는 죄가 되느냐를 밝히는 그 작업을 요한복음 18장, 19장을 통해서 낱낱이 우리에게 반복을 시킵니다.


반복을 시키게 되면 우리는 그 반복 안할 때는 모든 것이 얼렁뚱땅 죄가 되지. 압니다 하는데 내가 아는 것도 죄에요. 안다고 하지마세요. 이렇게 하는데 그 막상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제자들의 행동을 보게 되면 우리가 그 상황에 똑같이 있더라도 그들과 똑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한번 예를 들면 18장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리 앞에서 그런 소리한다면 미쳤다고 할 거에요. 왜 이런 미쳤다는 평가를 내리느냐 하느냐면 우리는 두개의 나라를 볼 줄을 몰라요. 두개의 나라를. 이 몸이. 이 병든 몸이. 사탄의 지배를 받는 몸이. TV가 안 껐거든요. TV가 계속 나온다고요. TV 계속 틀어있는 이상은 악마의 죄가 계속 거적대기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요. 간간히.


지금 성도는요 완전히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두개의 시선을 가진 사람이에요. 성도는. 성도 아닌 사람은 뭡니까? 하나의 시선만 있어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그동안 길들여졌고 그 세계가 우리를 발목잡고 그 세계는 아무 문제없는 세계에요.


왜냐하면 나를 그동안 신 되게 만들었던 나를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놀이마당이었으니까 게임이었으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목표와 기대하는 것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꿈을 꾸어라. 모든 꿈과 이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는 것이 우리의 참조거리가 되요. 참조. 나는 저 사람처럼 될래.


음대 소프라노하는 사람은 누굴 보느냐?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 황수미 또는 이렇게 그런 사람들 목표로 잡고 어우 세상에 언제 나도 퀸 엘리자베스 우승하느냐 뭐 이렇게. 뭐 그걸 목표로 하겠지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조성진, 김선우 이런 사람들 야 진짜 천재다.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에 거기도 이미 도사들이 있어요. 바둑 두는 사람한테는 세상에 우리 바둑을 인공지능만큼 잘 둔다. 어떻게 저렇게 두지? 바둑 잘 두면 세계대회 몽땅 전부다 다 차지하거든요. 오청원배 여자바둑대회에서 최정이 우승했다. 오늘 오후에 뉴스가 있다고요.


바둑 두는 사람한테는 여자 바둑 두는 사람한테는 최정이라는 선수가 야구 선수 아닙니다 여자 바둑 그 사람이 우상이라 우상. 그 나이 때에 그 22살인가? 22살밖에 안된 아가씨가 하여튼 대회는 세계 대회 다 우승해버리니까 목표가 되겠지요.


그럼 내가 목표가 되는 나라는 어느 나라? 이 나라에요. 눈에 보이는 이 나라가 내게 참조가 된다고요. 그리고 부모가 교육시킬 때 저 사람 본받아라 저 사람처럼 되라 할 때 저 사람이라는 모델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망했던 예수님 십자가 들이댑니까? 거봐라 예수님 죽었잖아. 너도 죽어 이럽니까? 봐라 강도는 강도짓하고도 천당 갔잖아. 너도 강도되라 그렇게 교육합니까? 엄마가? 엄마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주님께서는 버려질 이 몸을 가지고 버려질 이 쓰레기를 가지고 계속  활용하는 거에요. 이 쓰레기들. 그런 모임이 있답니다. 쓰레기들. 등산모임. 계속해서 이 쓰레기가 구원받는 거에요. 이 쓰레기.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 하지 말고 쓰레기다워야 되지요.


두개의 시선을 갖되 첫째 시선은 뭐냐. 내가 주를 바라보는 시선. 이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나를 처분하는 거에요. "이렇게 지키면 지키는 겁니까? 주여 이렇게 믿으면 믿는겁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건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보는 시선이에요.


또 다른 하나의 시선은 뭡니까? 누가 본다? 주님이 나를 이미 죄인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지요. 따라서 내가 죽지요. 내가 죽고 우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만 있는 우리 중에 하나가 되지요. 나는 없어지고 우리 중에 하나가 되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돼요. 나에서 우리가 되려면 ‘나’가 죽어야 가능해요.


인간은 개별자를 죽지 아니하면 그런 집단의식은 없어요. ‘나’가 죽지 않았는데 집단의식이 되어 버리면 그 집단은 나를 현재 안 죽은 나를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는 것을 강하게 거기에다 어필을 하게 되어 있고 강요하게 되어 있어요.


케네디 대통령이 하는 말이 있지요. 나라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까 묻지 말고 너희가 나라를 위해서 해라. 하지만 나라 자체가 없는데 뭘 해요. 그 나라가 누구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일본입니까? 아니지요. 미국이지요. 자기가 어느 국가에 있어요? 미국이잖아요.


내 나라라는 말은 앞에 '나'가 붙어요. 내 나라이기 때문에 내가 충성하는 거지 결국은 나한테 충성하는 것이지. ‘나’ 없는 나라는 없어요. 그래서 '나'라는 그 자체가 짐승, 악마가 되는 이유가 그게 '나' 가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내 나라는 따로 있다고 했지요. 그럼 제자들은 왜 도망갑니까? 예수님의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믿을 수가 없어요. 소속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빌라도하고 똑같아요. 빌라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니라.


갑자기 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두 가지 시선이 나왔지요? 빌라도가 보는 왕과 유대인의 왕과 예수님이 보는 유대인의 왕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왕이라고 할 때에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의 기능은 뭐냐 하면은 유일하게 그 나라에서 유일하게 처분가능한 존재가 왕이죠. 그래서 빌라도가 자기의 역할을 뽐내죠. 내가 풀어줄 수도 있고 옥에 갈수도 있는데 나한테 굴복해라.


자, 이 빌라도의 생각과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다를까요? 똑같지요.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권세자가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하고 벌벌 떨어요. 그 권위에 벌벌 떨고 있다는 말은 두 분의 왕이 없고 나는 내가 벌벌 떠는 그 분보다 그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 되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몸은 그 몸을 그 몸에서 자아를 만드는 이 세력 어두운 세력에 대해서 절대로 인간은 이 몸은 하나님 것이지만 이 몸을 간수하고 관리하는데 있어서는 이 세상의 권세자가 몸을 이미 거기에다가 넘긴 거에요. 넘겨놓고 그것을 자력으로 빼올 수가 없어요. 빼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개의 시선이라는 것은 나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에 거기에 철저해야 한다. 나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왜? 나는 죄인이니까. 내 죄에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철저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죄로 드러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 죄에서 의가 된 것은 절대로 내 행위나 행함이나 내 능력이 아님을 감사하지요. 아님을 감사하는 거에요. 아까 제가 첫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하나 되게 했지요. 이건 내가 구상하거나 내가 기대한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는 그 일이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내가 거기에 기여한 바나 보태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요. 나를 자유케하고 가볍게 만듭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결과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이 땅에서 욕을 얻어먹거나 수모를 당해도 그거는 그렇다고 내 신분이 달라진 건 아니니까 느긋함이 성립되는 겁니다. 자유지요. 처분 가능이 주님만 나를 처분하는 거에요. 처분이라는 말 여러번 나오는데요.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가 원치 않는다. 원치 않는 곳으로 간다는 말은 결국 처분은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하시게 된다는 거에요. 주님이.


그리고 저 사도 요한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그런 것은 네가 신경쓰지 마라. 네 개인과 저쪽 개인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자아는 이미 없어요. 우리가 성도가 성도를 만날 때에 그냥 만나면 안돼요. 그냥 만나지 말고 주님의 처분에 의해서 당신과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요 뭐든지. 뭐든지 우연이에요. 필연이 아니고 뭐든지 우연이라니까요. 필연은 알 수 없어요.


주께서 만나게 했기 때문에 그 만날 때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만나게 됩니까? 두개의 시선을 가졌지요. 첫째는 뭐냐 하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날 때에 먼저 몸에서 작동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잘 보일까.


자, 배운거 복습해봅시다. 얼마나 잘 기억나는가 복습해봅시다. 몸에서 몸이 만나는데 갑자기 뭐가 앞장세워지죠? 자아가 앞장세워지죠. 자아는 무슨 기능이 있다? 심판기능이 있지요. 심판기능은 뭐냐 하면 나는 우수하고 저 사람은 내 우수함을 찬양해야 된다는 나의 절대함을 포기를 못하지요.


나한테 칭찬해야 되고 나를 이쁘다 해야 되고 나를 위로해줘야 되고 내가 외로울 때 달래줘야 되고 마땅히 그래야 된다는 거에요. 이유도 없어요. 나는 절대자고 절대자이기 때문에. 만약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그거는 10분도 안돼서 일어서겠지요. 선 볼 때 맘에 딱 안 들면 뭐합니까? 남자가 여자가 맘에 안들 때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갈까요? 파토난거죠 그거는.


여자들이 짜장면 먹는 것이 가장 공포스럽기 때문에. 얼굴에 시커먼거 다 묻고 화장해놨는데 짜장 다 묻히고 옷 다 버리니까. 우아하게 써는거 말고 이거는 잘 안 묻잖아요. 63빌딩 꼭대기 올라가 뷔페 말고 짜장면 먹으러 갈까요 하는 것은 짜장면보다 심한게 짬뽕 먹을까요?


몸이 나올 때 자아를 통해서 이렇게 나가겠죠. 그런데 그 시선만 말고 다른 시선은 뭡니까? 주께서 만나게 하셨다를 만났을 때 이거는 내가 처분해서 일어난 상황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관계없이 나는 바로 1번을 생각했어 1번. 1번을 생각해서 나는 죄인 맞습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복음 전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로 내가 구원받는게 아니고 나는 구원 안된다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저 타인과 만나면서 새삼 확인이 가능한 거에요. 아 나는 누굴 만나도 나만 챙기지 나 위주지 절대로 나는 주님 위주가 아님을 깨닫는 데서 오는 그 감사, 고마움.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내 처분을 어떤 순간도 포기하거나 그걸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타인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뭐만 있어요? 이 두개의 시선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죠. 최선을 다하여 자기를 감추는 겁니다.


1번 짓을 불신자가 하는 거에요. 다만 신자는 뭐냐? 1번만 있는게 아니고 2번이 있는 거에요. 왜? 성령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쳐들어왔기 때문에. 1번인 그 자체를 2번을 통해서 지적을 해주니까 그게 성령이잖아요. 제가 지난 주일 낮설교에 이야기 했지요. 성령이 오신것은 이 땅에 하나님이 있다는 걸 증거하는게 아니고 이 땅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해요. 십자가 나오면 굉장히 그걸 껄끄럽게 여기죠. 두개의 시선이 있는게 아니고 1번만 붙들고 있는 거에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실수를 줄여서 주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시와 찬미로 화답하겠습니다.


시와 찬미로 할라 하려면 음정 맞아야 되고 가사, 박자 틀리면 안되고. 화음 맞아야 되고. 중세 때는요 중세 때는 처음에 중세 처음에 교회할 때는요 그냥 가락도 없었어요. 가락도 없었어요. 가락을 넣으면 너무 까불이, 너무 까부는게 되가지고 그것도 여성이 아니고 남성들에 의해서 합창단을 만들어서 음음음~~마치 구약의 성가대가 그 당시에 다윗 때 성가대가 있었거든요. 역대상에 보면 나옵니다.


성가대 레위지파가 성가대 했을 때 그때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읊는다는 식으로만 했고 그 다음에 고전주의 해가지고 BACH가 드디어 화음을 집어넣고 대입법이 등장해가지고 아름답게 했지요. 교회에서 난리 났죠. 인간의 그 청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불경스럽다 해가지고 반대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대중들한테 인기를 얻었지요. 고전주의죠.


모든 다수의 신이 들어가더라도 일단은 누구를 기쁘게 한다? 청중들을 기쁘게 한다. 그런 그 중에서 이제 바하가 나오고 헨델이 나오고 헨델의 메시아 나올 때 벌떡 일어섰지요. 할렐루야 할 때는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는지 남자가 떨어지는지 모르겠지만 할렐루야 하면 다 일어서잖아요. 메시아 할 때.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겁니다.


고전주의 지나고 그다음에 19세기 이제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은 모짜르트 같은 시대고 그 다음에 베토벤 뭐 이렇게 쭉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이제 그 다음부터는 화려한 기교가 등장해가지고 서로 배틀하지요. 귀족들 불러가지고 이 빈에서 베토벤보다 잘 치는 사람 나와보라 해가지고 베토벤 일등했거든. 네가 어디서 나하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음악이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서 돈 벌수 있는 직업으로서 한 거에요. 기능인으로서. 자본주의 세상이 되서 그런 거죠. 그처럼 도대체 화답과 치유와 찬미가 뭐 어떤 기준도 없어요. 기준을 만드는 거에요. 왜 만드느냐? 시선이 두 가지가 아니고 하나의 헨델의 메시아를 하게 되면 하나님 기뻐하실 것이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시선이 없어서 그래요. 두 번째 시선이 없어가지고.


그거 내가 죄 짓기 위해서 메시아 지었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 미켈란젤로는 나중에 그걸 이야기했어요. 내가 하는 모든 조각과 그림은 죄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안 했어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선악은 반드시 발전과 반성과 개발이 있기 마련이에요. 시도가 있기 마련이고. 잘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거에요.


왜? 무한이니까. 그 무한을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체가 즐겁거든요. 아 내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나. 야 내가 이 정도까지 높은 음을 낼 수 있나? 주여 진정 내가 작곡한 겁니까? 이런거 있잖아요. 자아도취에 빠지는 거에요 자아도취에. 그게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참조하는 거에요.


이 세계 속에서 선과 악을 자기가 처분하고 자기가 판정하고 심판해버려요. 건전해 보이는 것은 끌어모으고 불경한 것은 내보냄으로 말미암아 건전한 것만 모아놓으면 그것이 내가 점점 괜찮은 사람으로 개선됐다고 여기고 개선된 그 자아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최종 나의 작품으로서 들이미는 거에요. 그게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있는 한 그 짓을 우리가 멈추겠어요? 계속하겠어요? 계속하라고 주께서는 상황을 만들어가지요. 계속하라고. 주여 십일조 하는데 또 여기서 펀드가 내려갑니까?  이런 식으로요. 십일조를 했는데 왜 내 펀드가 자꾸 내려갑니까. 브라질 펀드가 독일 펀드가 왜 자꾸 내려갑니까. 포트폴리오 해가지고 사전에 방치했는데 포트폴리오 다 내려가.


주님은 묻습니다. 네 관심사가 어디 있지? 네 지금 주체, 자아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지? 네가 나를 빙자해서 네가 부자되려고 하잖아. 그런데 그 너가 결국은 너를 영화롭게 하는 너 위주로 너를 영화롭게 하는게 그게 1순위에요. 0순위에요 0순위. 예수님은 하나의 이용물이고요.


내가 내 만족에 주체의 만족되는 결핍이 간격이 줄어들어서 내가 내 스스로 주체에 만족하는 내가 절대적인 자부심을 갖는 거기에다가 예수님을 조종한거죠. 바로 그들이 누구냐? 예수님 당시의 이들이에요 ‘이들’.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걸 그 당시 예수님 십자가 당시에 욕할거 아니에요.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해서 십자가의 그 현장을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남 욕할거 없어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내 나라는 이곳에 없다. 내 나라는 이곳에 없다.


그 다음에 19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뭐라고 합니까? “없었으리라”. ‘하늘 아버지가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너는 나를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라고 하지요. 그러면 빌라도는 누구의 대표입니까? 1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몸이 갖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의 대변자로서 빌라도가 여기 등장하는 거에요. 빌라도가 우리 자신으로 보면 딱 맞아요. 오늘날 우리 자신.


갖고 있는 힘을 과시하려고 하고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죄인 안 만들기 위해서 우리 나름대로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라는 그러한 심보가 오늘 우리도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주님 아시지요. “내가 주님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한지 주님께서 아시지요?” 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는 내가 찢어버렸잖아요. 찢어버렸는데 왜 자꾸 찢은 것을 자꾸 아이고 아까워라 아까워라. 아침에 눈 뜨면 또 이게 이어져있어 이게.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기쁜 날이 있기를. 오늘은 좋은 날이 있기를. 수능 낼 발표 나는 날. 제발 만점 맞기를. 이렇게 또 이어지고 있다고 자꾸만. 다음 주 되면 새로운 교회 오기를 이런거. 있는 교회 나가지 말기를.


그래서 12절에 보면 “나를 넘겨준 자의 죄는 더욱 크니라”. 또 죄 이야기를 또 끄집어내요.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계속 뭐를 꼬리에 계속 남기는게 뭐냐? 너희들이 뭔가 나에게 하면 할수록 생산되는 것은 죄만 자꾸 생산되는 거에요. 죄만. 14절에 보면 19장 14절에 이날은 무슨 날이라고 합니까? ‘유월절’.


제가 지난 수요일 날입니까? 지난 지난 수요일날 했지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사이렌 불면서 마지막 공습 올 때 우리가 뭘 준비해야 됩니까? 빨리 유월절날 피 발라라. 그게 얼마나 쌩뚱 맞는 모션이에요 그게. 그 말은 뭐냐? 피 바른다는 말은 우리의 평소의 모든 관심사가 우리의 그라운드 존재의 바탕이 뭐 위에 있다? 피 위에 있는 거에요.


피 위에 있다는 말은 내가 어떤 증인이 되더라도 이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라는 거에요. 내가 손 댈 필요 없이. 그 잡채가 내가 간 안 맞춰도 이 자체로 내가 몸이 아프고 이빨 아프고 뭘 해도 이 자체가 완성된 거에요. 자꾸 악마는 거기에다가 뭐 조금 손대고 뭐 해야 되고 뭐 해야 되고 하는데 이 자체가 완성된 거에요.


왜냐하면 피의 바탕에 있기 때문에. 2번의 바탕위에 1번이 있는 거에요. 1번에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2번 보고 그렇게 놀라거나 슬퍼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1번은 2번을 위해 있기 때문에. 십자가 피 위에서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들 영화롭게 하면서 아버지가 영화롭다는 그 공식을 누구한테 양보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예수님답기 위해서는 너희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웠고 그 몰아세운 것에 대해서 아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몰아넣었다면 네가 죄인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해야지요. 내가 죄로 드러나는 것을.


그럼 그 죄는 뭐든지 죄다가 아니라 기다려봐 자꾸 말로 앞에 개뿔도 모르면서 모든게 죄라고 하지 말고 기다려봐. 매일같이 내가 알려줄테니까. 배신은 뭐 엿 먹듯이 배신하고요 매일같이 배신하고. 맨날 술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맨날 배신해. 맨날 배신. 맨날 술이야 처럼 맨날 배신해요.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가 배신을 해줘야 또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에 내 의로움을 안 끄집어낼게 아니겠습니까. 여기 15절 19장 15절에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조국 외에는 우리에게는 대선주자가 없습니다와 똑같아요.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태극기 흔들면서 반대하고 찬성하고 촛불집회 하면서 그런 거에요. 그러면 이걸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어디서 보기는요 교회에서 보이지요. 우리는 지금의 당회장 외에는 우리에게 당회장 없습니다. 똑같은 거에요.


우리를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맘에 드는 목사다 이 말입니다. 그 당회장이. 나를 지적하지 않는 목사. 우리를 긍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어디 주의 종을 건드려? 이렇게 하거든요. 도대체 누가 누굴 건드렸습니까. 그 인간들이 예수님을 건드려놓고 자기는 당회장 목사 안 건드렸다고 벌 안 받을까 싶어 생각하는 거에요.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일상은 전부다 맨날 배신이야. 맨날 죄 짓고 배신하는 거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즐거워야 되요. 왜? 성령을 통해서 피를 피답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미 완료됐다는 것이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이죠. 거기는 새로이 어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이유나 근거가 없어요. 기쁨은 그냥 반복된다는 것. 십자가의 기쁨 외에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반복된 죄를 통해서 계속 그 기쁨을 확인하는 거에요.


여기서 요한복음 18장 한번 되돌아가 봅시다. 18장 16절에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웠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이 사람 중에서 베드로를 고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베드로가 감정적으로 말고란 사람의 귀를 베었잖아요. 그 사람과 친척 관계가 여기에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를 지적하는데 베드로한테 자기 친척이 귀를 잘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여기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여기에 그게 10절에 나옵니다.


10절에 말고 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이렇게 할 때에 우리가 뭘 발견했느냐 하면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을 하고 결정을 할 때에 우리가 처분을 할 때 세상 모든 것이 선을 따라 CCTV를 따라가면 전부다 십자가를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 안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는 거에요. 그 변명들이 소용이 없어요.


십자가를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들로 서로 얼키고 설켜 있는 거에요. 이 말은 따로이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는 의롭다는 말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그런 변명들을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아직도 자기 의를 따로 건지려고 하는데 주님이 다 우리와 네가 하나가 됐다 했으면 하나가 된거지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군말하지 마세요. 갑자기 군말하니까 군밤이 먹고 싶은데. 군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몸의 자아로서는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안되기 때문에 또다시 우리로 하여금 배신 때리고 범죄함을 통해서 죄성을 통해서 감춰진 2번이 주님의 시선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도록 그렇게 주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몰아넣고 구제해 내시는 겁니다.


여기에 요한복음 18장 2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5절, 26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아멘.


베드로는 자기 아는 사람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 베드로가 자기 처분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처분할 수 있도록 주께서 용납하지 않고 허락하지 않는다는 그 점에서 예수님의 기도, 17장에 나오는 기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보라 이 말이죠.


완성을 완성답게 하기 위해서 인간 나름대로의 어떤 완성을 추구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수고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로 하여금 이런 소리 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구원받을 때 베드로가 보태준 것은 자기 구원에 일말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보면 전도할 때 오직 예수의 피로만 거룩함을 입었다는 그 말 속에 그게 다 함축되어 있어요. 예수의 피. 유월절 양, 그 피.


피 빼놓고 전부다 날라가고 없어지게 만드는 거에요. 모든 것이. TV를 끄는게 아니에요. 우리의 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TV 켜놓고 예수의 피로 가려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이 구약과 구약에 나오는 유월절 양이 괜히 등장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런 사건 하나가 예수님의 새 언약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을 하게 되고 그 완성을 했다는 말은 그 뒤에 있는 우리들에게 모든 일어난 이 세상의 상황이 이미 완성된 십자가에서 흘러나왔고 예수님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그 사실을 우리의 변변치 않은 쓰레기같은 우리를 통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렇게 일을 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는 뭐해도 죄라고 하지 말고 죄도 죄답게 하기 위해서 다 규칙들이 있어요. 원칙들이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와 상관없이 나 죄야 하면 자칫하면 겸손 돼요. 십자가를 드러냈고 십자가를 감사할 때 비로소 그때 죄라는 말을 하세요. 그 외에는 죄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괜히 뭐라고 모여서 들은건 있어가지고 죄라고 해가지고 주접 떨지 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32절에 보면 18장 32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그 다음에 뭡니까?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예수님이 기도했으면 이미 끝난 거에요. 그 다음부터 남아 있는 일은 뭐냐? 왜 십자가로 유월절 피로서 심판이 넘어가느냐? 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일들이 이 세상에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뭐냐 하면 모든 권세를 세상을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세상의 되어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취지에서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끝으로 요한복음 19장 28절 이후에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렇게 하시고” 그 다음에 예수께서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그 다음에 뭡니까? “다 이루었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죠.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고 그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그 대화 내용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안에서 왕왕왕 동굴 속에서 울리지요. 다 이루었다.


그걸 지난 낮설교 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을 여자의 자궁 안에 들어있는 아기처럼 이 안에는 뭐냐?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가 음이 서로서로 교환되지요. 다 이루었다~~다~~다~~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어떻게요?


네가 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하던 십자가에서 안 믿는 자들이 하던 행세를 통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 예수님만 영화롭게 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이 몸은 주님이 처분하지 우리가 처분하는게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어떤 일을 해도 주님 앞에서는 아니요가 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아니요를 평생 하더라고 예스가 되고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은 주님에서 일방적으로 완성했사오니 우리가 그것만 쳐다보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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