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총정리(7)-요한복음 17장 (두개의 시선)191203a-이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기도 내용인데요. 그 기도 내용 1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로서는 잘 납득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버지 그 자체로 영화롭지를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경우에만 아버지도 영화롭게 된다. 우리들의 생각은 우리는 순서를 아버지부터 시작하죠. 아버지가 영화로우면 그 아버지 덕분에 아들도 영화롭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종속되느냐 하는 그런 우리 입장에서는 참 낯선 이야기인데 이러한 아버지가 도리어 아들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성경에 보면 전에 수련회 할 때 아가에 그 아가 여러분 기억나지 않지요? 무슨 이야기했는지.
대전 수련회 때 아가 했거든요. 그때 반찬같은 건 기억나도 강의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실 거에요. 누구하고 누구하고 싸운 이야기는 기억해도 강의 내용은 기억 안날 수 있거든요. 그 아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가 이야기에서 핵심은 ‘나의 누이’에요. 그 솔로몬의 술람미 여인보고 나의 누이라고 했거든요. 누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식구일 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가족일 때.
나의 누이 있다는 말은 이거는 오빠란 뜻이죠. 오빠이다. 술람미 여인에게 오빠가 두 종류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아가에서. 하나는 뭐냐 하면 친오빠죠. 혈육적 오빠. 혈육적 오빠가 있어요. 아가 1장부터 그리고 마지막장까지 계속 혈육적 오빠가 걸리적거려요. 계속 걸리적 거립니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혈육의 특징은 뭐냐 하면 가족의 특징은 내가 선택하기 이전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친구하고 사귈 때는 내가 그만두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혈육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어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분불가능성이다. 내 쪽에서 처분이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아가 1장에 오빠가 1장 1절에 보면 오빠가 포도원에서 자기 누이동생을 일하러 보냅니다. 1장 7절에 보면. 그리고 8장 보게 되면 그 8장 7절, 8절 쭉 뒤에 보게 되면 9절 같은 경우에 “그가 성벽일진데 우리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다시 말해서 술람미 여인이 연애를 하는데 있어서 그 네 남자친구가 그냥 너하고 우리 허락도 없이 사귀는 모양인데 우리 오빠들이 너 연애하는걸 가만 두지 않겠다. 그들이 쳐들오게 되면 아예 문밖에 못 나가도록 판자를 덧대겠단 말이죠.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가족이 연애를 하든 남자를 사귀든 항상 우선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혈육이라는 혈육, 가족이라는 것이 우선되는 겁니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 너는 시집가야 되고 네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결혼해야 된다는 그것이 아가 구조에서의 갈등구조가 되는 겁니다.
갈등구조가 되는데 그 오빠가 혈육적 오빠가 강력하게 자기 누이동생을 단속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또 하나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미지의 인물이에요. 솔로몬 왕이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사랑하는 여자보고 나의 누이라고 합니다. “나의 누이여. 나의 누이여”.
이것은 혈육적인 나의 누이여 솔로몬이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솔로몬은 자기 여자 친구 자기 애인을 보고 나의 누이라고 해가지고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혈육적인 관계 이전부터 나는 네 식구였다. 원형적으로. 네 식구였다는 것, 네 하나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이게 알려줍니다. 가족이기에 나는 너를 데려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가서는 갈등구조죠. 하나는 혈육이 버티고 있고 혈육을 뚫고 혈육보다 더 우선되는게 있다는 겁니다. 혈육보다 우선 되는 것.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오빠 누이동생은 본인이 선택해서 가지게 된 게 아니잖아요. 그게 처분불가능성이죠.
그런데 새로운 오빠도 나의 누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너를 보고 누이라고 내 가족이라고 하는 것도 네가 처분가능한게 아니라는 거에요. 혈육적인 오빠 누이의 그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는거에요. 솔로몬이 자기 술람미 여인에게.
그러면 그 혈육적 오빠 입장에서 그냥 단순히 내 누이동생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완전히 혈육적인 모든 것을 발라버리고 그걸 부정해버리는 더 원형적인 가족관계가 드디어 출몰했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자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사적으로 이 오빠는 누이동생하고 연애 못하도록 막습니다. 1장에서 막고 8장에서도 막고 끝까지 막아요. 만약에 네가 우리 말 안 들으면 너는 우리 집안에서 쫓겨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은 혈육적 육의 관계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육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 죽음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죽어라. 왜? 죽음보다 더 센게 있기 때문에.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사랑은.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혈육에서 끊어지는 것이 네가 스스로 처분, 나는 이제 집에 오빠하고 안 놀아 이런다고 해서 사랑을 얻는게 아니고 먼저 사랑이 다가오게 되게 되면 혈육이 그 사랑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천하 자식이나 남편,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왜? 더 원형적이니까. 더 원초적인 거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육의 관계는 영의 관계를 영적 숨어 있는 영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하나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유에 해당되는 겁니다.
은유에 해당되고 은유에 해당되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언어라는 것이 그 기능이죠. 숨어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의 연결. 그러나 그 문자나 언어를 아무리 파헤쳐도 숨어 있는 것은 나타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이 오게 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은 그냥 언어에 갇혀 있는 허구와 허상에 불과하다. 껍데기에 불구한 거에요.
진정한 관계, 다시 말해서 “나의 누이여”라고 하면서 찾아올 때에 그냥 찾아 오는게 아니고 일단은 그 술람미 여인이 육에 갇혀 있는 상황을 일부러 허락해주시고 그 인간이 끊을 수 없는 육,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 그걸 끊어내고 그 육에 갇힌 인간을 사랑 쪽에서 무사히 구원해내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아가가.
여기서 아가에서 육과 영이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이 뭐가 됐다 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거죠. 이 말은 육신은 말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영은 육신이 될 수 있어도 육신은 영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어디까지나 모형이기 때문에. 그림자기 때문에.
영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육이 있는 것이지 육 그 자체를 육이 파헤친다고 영이 나타나는게 아니에요. 이 처분불가능성 중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자식과 아버지, 자식과 부모 관계입니다. 자, 육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은유의 세계, 허구의 세계에서는 부모가 먼저 있고 자식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관계는 혈육적 관계이기 때문에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처분불가능성이죠. 친구는 사귀다가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이미 낳은 자식에 대해서는 이거는 갖다버릴 수도 없고 젖 달라하는데 젖 안주고 네가 돈 벌어서 분유 사라 뭐 이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적.
따라서 이 혈육관계에서는 세상에서는 부모가 먼저 있고 자식이 있지만 이게 영적세계에서는 뭐냐 하면은 자식이 먼저 있고 부모가 있는 거에요.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는 자기가 처분불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식 때문에 나는 자아 찾기 못해요. 자아 찾기 해서 헬스하고 있으면 아기가 기어가가지고 젖 달라고 울 때 이거는 내 인생의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끼어든거에요. 자식이 3명이나 돼. 어쩔 수 없잖아. 4명이 되는걸 가까스로 막았다마는.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가 뭐다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겁니다. 자식이 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한 셈이 되지요. 왜? 내가 자식을 선택을 안했으니까. 내가 자식을 선택을 안했으니까요. 태어난 후에 태어난 그 존재가 나라는 존재로 하여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입장인가를 더 세밀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처분불가능성인데 결국 인간은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가 뭘 하느냐? 내 위주로 살수 없다는 것 나는 뭔가 엮여 있다는 사실을 자식의 출생과 더불어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1절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구조를 지상에 모습으로 구조를 밝혀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제가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나는 그 누구로부터 선택 당했다 라는 언급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종속 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육의 세계에서 악마의 사주를 받았던 인간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철저하게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인간은 뭐가 되었어요? 자기가 신이 되지요. 신이 된다는 말은 자기가 절대적이 되는 겁니다.
자, 선악과 따먹은 취지가 뭐냐 하면 선악지식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하여금 분명히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처분불가능성이죠. 내가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처분불가능성이거든요. 그리고 나라는 것은 홀로 나 가 아니고 내가 처분 불가능한 다른 타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타인의 운명에 엮여져가지고 오히려 그 쪽이 나를 처분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성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인간은 본인을 뭐로 봅니까? 신으로 보지요. 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처분가능이에요. 처분가능. 그래야 신이 신다우니까. 절대권한이 있어야 신이니까요. 선택을 누가 한다? 남으로부터 선택 당하는게 아니고 누가 선택한다? 내가 선택하는 거에요. 내가 선택.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내가 선택할 때 내가 모든걸 선택한다 할 때에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거부하는 거에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최고가 되어야 신다우니까. 내가 선택할 때 여기 ‘나’가 나오지요. ‘나’. 그런데 나라는 것이 이게 허망하고 허구적인 거에요. 왜냐하면 나라는게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은 몸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말씀에 종속되어 있지요. 예수님 맘대로 사는게 아니지요. 아버지 뜻대로만 살지요. 아버지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고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런데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선악체계, 악마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인간의 몸은 여기에다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그냥 나 가 아니고 절대적 나 가 되는 겁니다. ‘절대적 나’. 왜? 내가 신이 되야 되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과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몸이라 하는 것은 종속되는 건데 처분불가능이거든요 몸이 스스로.
그런데 여기서 몸을 버리고 뭐만 나왔어요? 몸을 버리고 나로 나왔으니까 나는 자칭 뭐가 되요? 자칭 신이 되는 겁니다. 자칭 신. 몸인데 뭐로 추정한다? 몸인데 이건 몸입니다 이렇게 해야될 걸 나는 나 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몸이라고 하면 이 몸은 어디서 왔느냐가 문제가 되지만 내가 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 만들었어요? 나는 내가 만든 거에요. 나는 내가. 이 몸을 가지고 나 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내 몸을 내가 처분가능한 거에요. 내 몸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이러잖아요. 내 몸이니까 내 몸이라고.
몸은 처분불가능한데 나라고 해가지고 어디서 뚝 떨어진 나 가 있어가지고 몸을 이걸 자기화 자기 걸로 만든 거에요. 그러면 나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절대적이죠. 그런데 몸은 절대적입니까? 몸은 변해요? 안 변해요? 점점 변하지요. 감정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변하잖아요. 내가 왜 이럴까? 맨날 내가 왜 이럴까.
이가 아프다. 그럼 치과에 가야되겠지요. 이가 아픈데 치과에 가기 전에 먼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왜 내 이가 왜 아플까?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인간 속에 나라는 그 개념 속에는 내 이가 아파야 돼요? 안 아파야 돼요? 안 아파야 되죠. 신이기 때문에 안 아파야 돼요. 그런데 이가 아프니까 여기서 짜증이 나는 거죠.
짜증은 뭐냐 하면 개입이에요. 간격. 벌어진거에요. 이 몸과 ‘나’가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치과에 가서 몸 관리해야지. 누가? 내가. 지이잉~할 때 참아야지. 치과에 가서 참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 몸살 되지요. 몸살 될래? 치과 갈래? 치과 가서 일어나는데 몸은 몸인데 몸살이야. 너무 용을 써가지고.
참으세요. 참으니까 몸살된 거에요. 참다보니까. 인플란트 한 두개 하면 한달 동안 몸살 걸려요. 참는다고. 모든 치과는 다 아파요. 짜증이 나는 겁니다. 짜증이 난다는 것은 뭐냐? 개입이 있다는 것. 벌어졌다는 거에요. 벌어졌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치과에서 내 몸 관리 잘했어 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 하겠지요.
나는 아픈 것도 참아낼 수 있는 장한 나라는 거에요. 장한 나. 그러면 ‘나’가 뭘 따로 붙이냐. 몸이 안 아픈 몸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빨이 아픈 몸2가 됐지요. 나는 변화하는 몸을 따라 잡아서 ‘나’가 곧 갑자기 몸2와 합의를 하고 일치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 몸이 또 몸3로 또 변해요. 변한다고요. 계속해서 따로 붙여야 되는 거에요. 계속해서 개입이 생기는 겁니다.
돈 한 10억하고 그만 벌려고 하는데 10억하고 더 벌고 싶어요. 계속 사업 벌리고 백종원 처럼. 계속 사업 벌리고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계속 일 벌리지요. 아직도 목마르다. 4강하면 되는데 4강 말고 결승전까지 올라가야 돼.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히딩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몸을 정하고 싶은데 반대로 몸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몸 따라 변하는 나 말고 몸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나는 한결같이 나이고 싶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체라고 하는 거에요. 그걸 주체라고 하는 거에요.
주체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한결같은 나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이 주체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내가 나는 절대자거든요. 절대자이기 때문에 내 몸에 대해서 절대자이기 때문에 나의 절대가 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나는 뭐를 무슨 일을 해서 한결같은 몸 따라 변하는 이러한 불쌍한 나 가 아니라 몸이 어떻게 망가져도 불멸의 존재, 한결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선악지식을 여기에다가 활용합니다.
이게 무슨 기능이냐 하면은 바로 심판기능이에요. 최고의 심판자리에 앉아요. 최고의 심판자리. 내려다보면서 지적질하는 것. 지적질하는 거에요. 저 사람보다 내가 나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저 사람보다 내가 잘 사니까 나는 행복하다. 나를 절대화시킬 수 있는 구실과 빌미거리를 계속해서 모집하는 거에요. 이게 인간의 한평생입니다. 평생이에요.
나의 절대성, 한결같은 주체의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만만한 것들이 다 와요. 만만한 사람들 없잖아요. 전부다 나름대로 신이기 때문에. 내 구미대로 전부다 심판해도 안 먹히잖아요. 그럴 때 뭐가 동원하느냐 하면 개가 동원돼요. 고양이나 강아지 개. 만만하거든.
자기 사랑을 주고 네가 내 사랑을 아는구나 하고 흐뭇해하고. 나는 이렇게 나 말고 다른 몸을 사랑할 줄 아는 절대적인 존재. 사랑을 할 줄 아는 그런 괜찮은 불멸적인 사랑으로 사랑을 하는 존재. 그걸 강아지 옆에 끼고 그걸 확인하는 거에요. 처음부터 강아지 안 키우죠. 남편이나 아내 가지고 한번 해보겠다 하는게 전부다 사단날 때.
내가 결혼하고 불행 끝 행복 시작하는게 다 사단 나고 다 깨져 버렸어. 남이 만만하지 않아서. 내 주체에 호응을 안 해줘. 내 주체에. 차라리 네 자리에 나를 호응하지 않을거 같으면 꺼져버려라. 그 자리에 개나 키우자. 그래야 외롭지 않으니까.
자, 외롭지 않다는 말은 상대를 위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 평가에 대해서 고분고분 수용할 수 있는 어떤 타인과 대상자를 뽑는거죠. 만만한게 개, 고양이고 안 그러면 그 개 고양이 보다 좀 더 인간답다 하는 것은 자식이죠. 자식.
수능 끝났으니까 이제는 대입특강하기 위해서 밤샘 해가지고 줄서가지고 이제 너는 무조건 SKY대학 가야된다고 엄마가 새벽까지 와가지고 줄서가지고 강의 티켓 끊고 난 뒤에 엄마가 이정도로 너를 위해서 헌신했으니까 무조건 너는 좋은 대학 가야돼 라고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 이게 무슨 작용입니까? 엄마 자신의 절대적 주체를 위해서 아이를 자기의 심판대상, 평가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평가대상. 네가 잘하면 엄마가 기분 좋다는 거에요.
자, 선악지식의 절대성은 인간에게 무슨 기능을 보여준다? 심판기능을 보여줌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처분불가능이 아니고 나는 처분가능한 곧 내가 곧 신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몸은 아파도 자기 주체는 절대적이니까. 자기의 주체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만만한 누가 필요하다? 타인. 남이 필요한 거에요. 타인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도 없고 주체라는 것도 없는데 있기는 뭐가 있어요? 몸이 있지요. 그 몸.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나는 몸이 있다 나는 신체가 있다 이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게 나야 라고 그게 내 주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바로 타인이라는 것은 내가 처분하니까 쉽게 말해서 내 입맛에 맞는 나를 호응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내곁에 두는 거에요. 내곁에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잘남을 증명해야 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왜? 명령자가 갑이 되고 피명령자는 을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주변에 있는 것보다 우뚝 솟아오르잖아요. 그게 자기만의 소우주 가운데서 거기서 신이 되는 거에요. 소우주 가운데서.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계속 처분 가능한 것만 찾아다니죠. 처분 가능한 것만. 처분불가능이 없어요. 그런데 원래 몸은 처분불가능이거든요. 몸이 스스로 몸을 처분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몸을 누가 접수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을 접수했거든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육신을 접수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심판은 누가 내립니까? 말씀이 내려야지요. 아까 아가 이야기 다시 한번 드릴까요? 그 술람미 여인에게 혈육적인 오빠가 계속 뭘 방해하고 있어요? 이 오빠하고 누이동생은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자기만의 패밀리 육의 가족이잖아요.
그런데 그 누이동생이 어떤 남자친구하고 사귀니까 이걸 뭘로 보냐 하면 우리 가족의 절대성, 불변성, 처분가능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보는 거에요. 그 자기 누이동생의 남자친구를. 끝까지 방해하지요. 만나지 못하도록. 포도원에 집어넣어서 온종일 일하게 만들고 외출 못하도록 아예 덧대가지고 판자를 덧대가지고 집에 못 가게 만들고 바깥에 출입을 못하게 만들고.
그래놓고 우리끼리 저희들끼리 그게 사랑이래. 이게 가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어디로 부터 탈출해요? 바로 바깥에서부터 온 그 솔로몬의 사랑이 뭐를 강제로 찢어버리고 떼어냅니까? 선악체계에서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 이 말이죠. 육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야. 육은 영을 묘사한 것밖에 안되거든요.
원형적인 그 육이 육 되게 했던 원형적인 그분이 그 육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사랑을 데려오는 것.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에요 사랑. 그게 사랑이에요. 육을 끊는게 사랑이에요. 육을 끊어버리는 것. 처분을 누가해요? 여자가 합니까? 남자가 합니까? 솔로몬이 사랑을 줌으로써 여자는 자기가 누구의 누이동생이고 누구 집안이고가 없어요. 이제는 그분의 처분에 맡기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을 처분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생애가 말씀대로 움직이죠. 말씀대로. 인간의 몸이 있는데 인간의 몸을 자아라고 했죠. 자아라고 했는데 몸이 자꾸 변하잖아요. 몸이 자꾸 변하니까 몸1, 몸2, 자꾸 변하니까 자아가 몸 말고 따로 영원불멸의 자아로 만드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주체라고 했지요? 계속 이 주체는 몸이 어떻게 변하던간에 계속 이 주체가 다 내가 해당된다 내가 처분가능하다고 본거에요.
심지어 뭐로 보느냐 하면 내 몸이 죽어도 내 영혼은 살아서 어디 간다? 천국 간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 주체가. 이 주체가 결국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n+n+1. n다음에 n+1. 수 에서 순서적 서술에서 1,2,3,4,5. 2는 뭡니까? 1+1이고 3는 뭡니까? 2+1이죠. 4는 뭡니까? 3+1이죠. n+(n+1)로 계속 나가지요. 점점점.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수학에서 무한인거에요. 무한. 결국 인간의 주체는 늘 배고프지만 어디에서 놉니까? 무한에서 갇혀서 무한에서 노는 거에요. 무한에서. 그래서 신이 된 인간은 뭘 추구한다? 영원한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거에요. 수학적 집합론으로 증명이 되는 겁니다.
계속 변하니까 지금 오늘 나와 내일 나가 다르니까 자꾸 따라갈려니까 짜증나잖아요. 에이 이걸 하나로 묶어 버리자. 이걸 수학에서 뭐냐 하면은 집합론이라고 합니다. 집합론. 쉽게 말해서 내가 나 하나라도 셈 할 수 있다면 나는 무한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이게 수학자들의 현재 수학자들의 결론이에요. 내가 셈하면 내가 하나 둘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곧 무한 속에서 무한까지 파악한 진리임을 증명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걸 묻고 따지지 마라. 이거는 왜냐하면 공리니까. 공리. 묻고 따지는게 아니에요. 일단 그렇게 정하자 에요. 정해버리자. 수학에서 나온게 물리고 다 나오지요. 한번 볼까요. 셈하기가 가능하면 셈하기가 가능하다. 하나 둘 셋 넷. 집에 강아지가 4마리 있으면 하나, 둘, 셋, 넷 하지요. 그럼 그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셈했던 내가 주인 됩니다. 내가. 내가 주인되는 거에요. 왜? 내가 판정관이고 내가 가치를 결정하고 내가 나에게 소환되는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세계에서의 추구하는 것은 무한 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하나의 놀이고 게임이 되겠죠. 게임이. 인간은 평생 게임하다가 볼 일 보는 거에요. 무엇에서? 무한 안에서. 무한은 무한이기 때문에 다 마지막 정복이 안되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선악 지식은 계속해서 개발이 가능하고 발전과 모험을 결의하고자 하는 거에요. 인간의 사는 이유는 게임 속에 판돈 들고 미지의 무한을 향하여 도박을 벌리는 겁니다. 왜 무한을 향해 도박을 벌릴까요? 미흡하니까. 주체는 영원한데 실제로 주어지는 이 모든 것은 내 욕망에 부족하니까. 어지간히 사업 벌리고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니야 더 벌어야 돼. 이유를 묻지 마라. 내 주체가 그래. 나는 그러고 싶어.
"여보 처가집 집 얼마나 하지?" 이런 거 묻지요. "그거 좀 잡혀서 사업 한번 벌려보자. 사업 불려 보자. 당신 돈 얼마 끌어 모을 수 있어? 친구한테 얼마 끌어 모을 수 있느냐?" "왜 그런데?" "나 아직 배고프다." 계속 배고파요. 계속 배고파. 종속되지 않았어요.
자, 이러한 이 사실을 인간들은 무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신이기 때문에 무한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무한을 지향하고 무한을 바라보며 산다는 걸로 해서 신과 자기를 같은 동네에 있는 레벨이 같은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은 신을 뭐로 봅니까? 무한으로 보지요. 이게 여호와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관계 없어요. 하여튼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냥 무한하면 또 약간 빈약하니까 뭘 붙여요.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시고 거룩이 무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고 뒤에 뭐가 붙습니까? 무한이 붙어있다는 말은 그걸 아는 나는 무한과 나와 서로 알고 지낸 사이 아니냔 말입니다. 내가 무한을 추구하니까.
그게 바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이 벌렸던 종교오락이었고 종교게임이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믿어서 영화롭게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뭡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대단하십니다” 이게 영화롭게 하는게 아니고 뭘 해야 돼요?
아들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어요. 아들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왜냐하면 아들은 영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래서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면 이 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이미 배타적으로 예수님 빼놓고 다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영화롭게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로마서 3정 23절 찾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여기에서는 도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그리고 로마서 3장에 2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같은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입을 막고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음이라”.
인간 존재가 무한한 신을 열망하고 신에게 질주하고 달려간다는 것은 그들은 지금 자기가 무한한 존재로 착각해 가지고 지금 게임을 하나님하고 판돈가지고 게임을 하는 거에요. 사람만 개발하고 모험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두고 자기가 자신에게 모험에 나서는 거에요.
이정도 금식하면 영광되겠습니까? 이정도 기도하면 영광되겠습니까? 이정도 헌금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정도 하나님께 모든 걸 다 몰입하면 하나님 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하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낮에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 현장에 본인만 있다고. 본인만 있다고.
거짓말쟁이들. 세상에 교회 다니는 거짓말쟁이들. 전부다 사기입니다. 전부다 사기에요. 하나님께 열심을 내면 열심을 낼수록 거기에 미흡함이 남고 거기에 모자람이 있고 그걸 남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애써 내가 무한을 향하니까 나 괜찮다고 본인이 본인보고 불멸의 존재라고 영원한 영생을 받은 존재라고 인정하는데 도대체 그 몸은 원래 어디서 온 몸인지를 그거는 알 도리가 없지요.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모르지요. 이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몸은 우리가 처분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처분불가능이에요. 그거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해요. 말씀대로 처분되어야 됩니다.
몸이 처분대로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 있어서 나 하고 예수님의 주체라는 것은 조건이 붙어요. 뭐냐 하면 말씀대로 될 때만 예수님의 주체가 주체답고 나 가 나 다운 거에요. 왜냐하면 이 몸은 말씀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거에요.
자, 아까 제가 한 공식 봅시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어떤 기능이 있다? 심판 기능이 있지요. 심판 기능. 두개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만 영화롭게 하지요. 예수님의 몸과 그 외의 모든 몸. 그런데 몸인데 여기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몸인데 그들이 자아를 통해서 심판 기능을 하지요. 예수님도 뭐합니까? 심판 기능을 하지요.
자, 두개의 심판 기능 가운데 어느 것이 실효성이 있고 실제적으로 심판이 효과가 있는 심판이냐 하는 겁니다. 먼저 인간은 자기가 신으로 군림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는 심판 기능 속에 예수님에게 자기 몸을 맡겨 버립니다. 인간들은 자기 절대화를 위해서 필히 누굴 죽여야 돼요? 자기 절대화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그것을 제거하는 기능이죠. 그 제거할 때 뭐냐?
그걸 악이라고 하고 이단이라고 하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제거해버려요. 그게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18장 19장에 보면 요한복음 한번 볼까요. 18장 39절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지요.
빌라도가 요한복음에서 빌라도가 계속해서 뭐냐. 예수님은 죄 없다고 이야기해요. 죄 없는 사람 죄 없는 사람 한두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죄 없다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죄가 없으면 당신한테 안 맡겼습니다. 죄인으로 처분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계속해서. 심판 기능을 그들은 그들의 주체가 심판기능을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거에요.
아까 그 몸이 절대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처분가능하지요? 처분가능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느냐? 여기에 심판기능을 하면서 자기 절대성을 옹호하는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배제합니다. 자, 타인이 어떤 타인이라고 했어요? 내 입맛에 맞는 타인을 골라서 두지요. 그러면 나머지는 뭡니까? 제거 대상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제거 당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의 심판이 곧 뭐다? 너희들의 심판받을 이유를 근거를 말하란 말이에요. 예수님한테는 예수님 어떤 자료가 있고 근거가 있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재료와 증거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다 모으신 거에요. 성령께서는 그걸 지적했고 성령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희를 심판하리라”.
그러니까 인간과 예수님ㅊ사이에 뭐만 주고받아요? 내가 너를 심판하는게 옳으냐? 아니면 네가 너를 심판하는게 옳으냐?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심판하겠어요. 저는 예수님 앞에 심판 안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모든 인간은 자기 절대화를 포기 못하게 되어 있고 그 포기 못함이 어디를 제거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화시키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차후적으로 제2의 순서로 밀어버려요 인간은.
내가 중요하지 예수님이 안 중요하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죄고 예수 안믿는 것도 의미 없고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에 심판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빼놓고 all 모두가 주님의 심판대상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끊임없이 임의대로 자기를 처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말이 뭐냐? 내가 내 기능으로 내가 심판기능으로 봐서 당신은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했다는 그런 심판 또는 평가, 그런 평가를 내가 당신한테 제공합니다. 그러니 우리 둘이 손잡고 잘 해봅시다라고 했을 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공동체를 깨려고 했지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빼놓고 다 도망,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흩어지지요. 누가 감히 누가 함부로 예수님을 평할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어요. 영이 육이 된거지 육이 영이 될 수 없어요. 영을 모르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요. 그냥 사탄의 본능대로 악마의 본능대로 선악적인 지식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 빼놓고 전부다 모든 것을 처분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은 예수님을 인간은 육은 뭐냐? 처분 가능이니까 선택을 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 죄인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8장 19장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여서 또는 사람들이 모여서 누굴 결정했어요? 저 예수는 죄인이라고 결정을 한겁니다. 죄인이라고 그들은 예수님을 선택한 거에요. 예수님을 죄인에다가 집어넣은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뭡니까? 제자들이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죄인으로 선택 당하지요. 제자들은 의인이 아니에요. 내가 내 선택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넣었습니다라는 것을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알게 된 죄인인데 이 죄인은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선택에 의해서 비로소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음을 아는 죄인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 안 믿는다가 의미 없고 나는 그냥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서 처분된 거에요. 이미 일은 모든게 마감되었어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현실은 바닥까지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영화롭게 할 존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 인간의 종교게임 오락 교회놀이 끝났어요.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신앙을 하든 교회를 하든 뭘 해도 이게 내가 죄인인 것을 들추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선택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 우선해서 내 자아와 주체 때문에 주체의 불멸성 때문에 주님께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의 영이 오니까 비로소 십자가 의미를 되돌아와서 비로소 파악이 되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 죄인이 되었다라는 말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TV가 있잖아요. TV가 이렇게 있는데 TV가 보기 싫다 할 때는 우리가 그냥 TV를 끄면 그만이죠. 주님께서는 TV를 끄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 안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TV는 그냥 꺼놓고 거적대기를 거기에 덮어버려요.
결국 우리는 안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계속 죄짓고 있지요. 죄짓고 있으면서 거적대기를 그 옆에다가 얼기설기 그걸 덮어 놓으니까 그 틈새에 뭐가 나옵니까? 죄가 계속 나오지요. 죄가 계속 나오는데 이 자체가 감사거리고 고맙고 은혜롭지요. 은혜로운 이야기.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심으로 주님만 영화롭게 하고 주님만 영화롭게 한다면 누구한테 영광이 된다?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는 그러한 자로 간택이 되었다는 택정, 선택받았다는 것. 이게 새로운 영적 패밀리 영적 가족이고 이게 사랑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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