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총정리(6)-요한복음 15장 (피하지말라)1911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3장부터 요약해 또 들어가게 됩니다. 13장부터 21장 그 내용을 보게 되게 되면 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자기공동체를 의도적으로 본인이 깨버릴려고 해요. 13장부터 21장까지. 한 20장까지 보면 깨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공동체가 깨지길 싫어해요. 왜냐? 평생을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요즘 같으면 이렇게 할거에요. 예수님 혼자 희생해가지고 우리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올거에요. 그걸 되바라졌다 또는 싸가지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생은 예수님이 하고 우리는 덕 봅시다 이런거거든요.
예수님이 이렇게 공동체를 깨는 이유는 자진해서 떨어져 나가시려고 하는거에요. 떨어져 나가시는 것. 공동체로부터 그리고 그 당시의 권력으로부터 모든 세상으로부터 자진해서 본인이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알아서 그 세계에 합세하지 않고 그냥 다른 길로 그냥 가버리시는 거에요.
그래서 13장 끝에 보면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지요. 그리고 14장에 봐도 도마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묻는 거에요. 주님이 자기 제자하고 빠이빠이하시고 갈라서고 네가 추구하는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은 자진해서 단체에서 그 공동체에서 어떤 구성된 그 조직 속에서 자진해서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데 주님 하나 홀로 고생해서 우리 덕 봅시다 천당 갑시다라는 이러한 생각이 인간들이 말하는 희생이라는 거거든요. 희생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죠. 이 희생과 사랑에서 자진해서 빠이빠이하고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희생과 사랑하고 나는 결별한다. 나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다고 떨어져 나와버려요.
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뭐냐 하면은 새롭게 수립되는 희생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뭐냐? 항상 어려울 때 주님한테 속으로 뭐라고 했겠어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하겠지요. 살려주세요. 상당히 좋은 믿음이에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인간 자체가 욕망인데 내 욕망이 내 구원에 아무짝도 소용없었음을 드디어 나는 알게되었으니까 의지할 것 믿을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 욕망이 나를 구원한게 아니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의욕과 의지가 소용없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거기에 주님의 반응은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살려라 이 말입니다. 네가 살려. 나의 이 떨어져 나가는 이 사실과 내가 이 세상과 결별했다는 그 취지와 의의를 네가 목숨 바쳐서 살려봐라 이 말이죠. 나 이용해서 너 살려고 하지 말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너의 목숨을 바치라 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구원이냐 하면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누구의 구원이냐? 주님의 구원을 살려야 된다 이 말이죠. 살리고 살리고 이런거 있죠? 주님의 구원을 살리는 것이 그게 바로 제자로 택함받는 이유입니다. 나 구원받았다 그 소리하려고 그 사람들이 제자된 게 아니에요.
나 구원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는 안 놀겠다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사실을 살리는게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교회 와서 자꾸 이득 보려고 하고 어느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 나와서 보호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나를 보호하라고 하는데 너를 보호하지 말고 나를 보호하라고 하라는거에요.
보호라는 개념, 구원이라는 개념, 네 구원은 없어요. 주님의 구원입니다. 구원개념, 희생개념, 사랑개념, 이 모든 개념, 이 모든 단어, 이 모든 용어 13장부터 요한복음 21장 끝까지 그 모든 단어들은 지금 이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활주로를.
비행기가 뜨게 하는 거에요. 윙~해가지고 비행기가 뜨는 거에요. 그 단어가 날라가요. 날라가는 단어. 너희가 사는 단어의 개념하고 나는 결별하겠다. 단어가 공중에 떠가서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요. 제자 둘이 베드로하고 도마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날린 그 단어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주께서 내뱉은 그 단어는 그 목적을 향해 갈텐데 그 목적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그 단어에 묶여서 그 단어에 묶여서 주님 계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오지마라 너는 이 단어에 단어가 갖고 있는 형성하는 프레임이 다르다. 프레임이. 프레임 뜻이 뭐에요? 한글로 하면 틀이죠 틀.
내 삶의 프레임. 내가 평소에 주워먹은 모든 단어는 누구 프레임이냐? 나를 재구성하는 나에 의한 프레임이잖아요. 이 프레임과 주님의 프레임과 지금 주님은 결별하는 거에요.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거에요. 나는 너희들하고 안 논다. 나는 너희들하고 안 논다. 이걸 두자로 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단절’. 이게 단절이에요.
인간들은 신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모든 헌신과 경견과 거룩과 선함을 거기다 다 몰빵해요. 다 쏟아부었어요.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아니에요. 자기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죽고 난 뒤에 영원한 천국 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거기에다가 다 쏟아 붓습니다. 인간들은 나라가 잘되는 것 좋고 가정이 잘되는 것 좋지만 결국에는 내가 파멸한다면, 내가 파멸한다면 내가 모든게 무너진다면, 그런 국가나 가족이 결국 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게 잘된들 그게 나는 무슨 소용이 있어요. 궁극적으로 내가 잘 되야지요. 왜? 내가 가장 소중하니까.
파멸이란 말이 생각나니까 이 비슷한 파멸과 비슷한 프랑스 단어가 생각나요. ‘파탈’. 파탈이라는 프랑스 단어인데 여기에 두 가지 있어요. 옴므파탈이 있고 팜므파탈이 있는데 옴므파탈은 남자가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빠진 여자는 자기가 지금 파탈하는 것도 몰라. 팜므파탈 이거는 우리말로 하면은 팜므파탈은 요부라 하지요. 요부가 되서 다른 말로 꽃뱀. 파멸된다 하거든요.
지금 제자들은요 예수님 믿고 파탈되기 싫어요. 자기가 파멸되기 싫은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수상한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과 결별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예수를 초청해서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그 의도 자체가 너희들은 파탄나지 않기 위해서 파멸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데 그게 바로 파탄이라는 겁니다. 왜? 인간과 신은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역량과 예수님께 모든 잘함, 그리고 순종, 경청, 실천, 말씀에 대한 실천 이 모든 걸 총동원해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 율법을 참조합니다. 참조, 참고로 하고 참조해요. "주님 지금 이거 지시 따르는거 맞지요?" 그렇게 하지요.
지난 주일날 나는 몰랐는데 어떤 교인이 그래요. 목사님 이번 주일이 무슨 주일인지 압니까?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는거에요. 추수감사절. 농사 안 짓는데 왜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주일. 아 돈 내는 날이구나. 돈 달라하고 돈 내고. 돈은 100을 얻고 애들한테 빵 사주는 건10, 90 남는 계산이 되거든요.
교회가 항상 돈이 헌금이 안 나올 시점에 팍팍 거기에 강조점을 둬요.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불교에서는 일년 대목이 부처님 오셨다 가신 날이거든요. 크리스마스하고 연말 신정에 봉투 돌리고 몫돈 해야 얼추 교회 헌금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에는 중요한 일종의 준 대목에 해당되는 거죠.
준 대목에 해당되는데 그 지시가 뭐 당회에서 했다하면서 추수감사절 봉투 돌릴 때 그 지시를 왜 따라야 됩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지요. 자기 구원을 위해서. 시키는대로 헌금냈으니까 다지기. 보통 흙 다지듯이 다지기. 이제 내 구원의 다지기가 좀 더 여물어졌겠지요? 주여. 이게 뭐냐 하면 자아강화입니다. ‘자아강화’. 주님은 여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거에요. 이런 짓거리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매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단절 없이 단절의 반대말이 뭐냐? 여기서 단절 없이 구원, 다시 말해서 연속성으로 계속 줄곧 밀어부치면 도착해보니까 천국. 이러한 아이디어를 인간은 악마의 배후 조정을 받아서 인간은 이것만 생각해요. 딴것 없어요. 중간에 끊어지게 되면 절망이니까 내가 파탄나면 안되니까 내가 파멸되면 안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떨어져 나옴으로 말미암아 13장부터 21장까지 성령 이야기부터 쭉 이야기하는것은 뭐냐 하면 바로 그런 너로부터 내가 이 세상에서 떨어지듯 떼어내듯이 그런 너를 내가 가서 떼줄께. 내가 떼줄께. 지금 기정 생각, 기정 갖고 있는 생각 있잖아요.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는 기정사실로 부터 내가 떼줄께. 그런데 그건 뭐냐? 단절이 필요해요.
요한복음 13장 끝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오지마라. 14장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아직 오지마라. 오지마라. 올 수가 없어요. 끊어진 거에요. 이 끊어짐을 네가 목숨 바치고 앞으로 네가 증거해야 돼요. 이 하나님과 인간은 끊어졌다는 사실.
구원은 생각지도 하지 말라는 거에요. 연속성은 생각하지도 말라. 끊어진 판에 다른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끊어졌다는 내용만 증거할 뿐이지 다른 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요. 다른 소리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그러면 주께서 우리한테 어떻게 조치하십니까? 자, 여기 나왔어요. 연속성 가지고 구원받고자 하지요.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입니다. 연속성이라고 하는것은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나의 몸통이 길어도 너무 길어. 나의 몸통이. 꼭 장어 같애.
길다란 뱀장어나 꼼장어나 꼬리가 길고 몸통이 길어요. 항상 내가 생각하는 나는 길어요. 나이 70이 넘으면 너무 길고 나이 이제 40이 된 사람은 나름대로 길고. 살아온 인생이. 어떤 영재발굴단 어떤 9살 먹은 아이가 이런 이야기해요. 영재니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에 이런 동생은 처음 봤다. 9살 먹은 아이가 자기 평생에. 자기 딴에 9살이 아주 길었던 모양이죠. 내 평생에 이런 내 몸통에 이런 동생은 처음 봤다 이러거든요. 나름 인생이 좀 지루했던 모양이에요 그 아이가.
우리는 이게 몸통이 너무 길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아무리 살펴도 연속성 단절의 모든 것은 전부다 핀셋으로 다 뽑아내버렸어요. 연속의 연속이에요.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로 계속 매일같이 이걸 잇는데 모든 역량을 다 동원했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하고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과 동일할 것이다. 거짓말이거든요.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단절을 실시하시고 그 단절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연속성을 이걸 잘라버립니다. 토막을 내요.
그러니까 연속성이 뭐가 되느냐 하면 토막이 돼요. 토막. 모텔 값 4만원 안 받았다고 토막내서 한강에 버린 사람 있지요. 토막을 다 내 버려요. 엿가락처럼 긴 엿을 탁 토막을 내면 토막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진실 또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게 아니고 토막 난 자체가 그게 진실이에요. 주께서 토막냈다 절단냈다 단절했다. 나의 연속성에 토막내가지고 나를 아주 앞뒤로 다 잘라버렸다. 그럼 진실되게 살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진실이에요. 주의 손이 손댔기 때문에 내가 추후에 더 손댈게 없잖아요. 그게 주님의 솜씨가 담겨있는 진실됨이에요. 진리에요.
산낙지 잘라도 펄떡 거리죠. 우리도 펄떡 거려요. 퍼덕거리지만 그 퍼덕거리는 그 모든 양상, 그 모습 자체가 이게 진리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개입 안하면 우리는 꼼장어가 되지 절대로 토막 난 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토막 난 것을 제가 진실이라고 했지만 다른 말로 이게 바로 시체에요. ‘시체’.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보면 “나는 주안에서 담대하게 자랑하노니 단언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주님께서 날마다 앞뒤 다 잘라버린다. 어제 잘라버리고 내일 잘라버리고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 자체가 내가 증거하고 싶은 주께서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갔음을 자기의 몸체를 통해서 마음껏 지금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진실된 게 어디 있어요? 나 자체가 단절되었음의 증거가 되니까 이것보다 더 진리가 어디 있겠어요? 진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연속성을 갖게 되면 자꾸 오늘날 나의 나됨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해요. 과거에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정도 실력 갖고 있으니까 내일은 좀 더 잘해야지.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의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의 내용이 그 사람한테는 전혀 지금 도달이 안 되고있는 거에요. 주께서는 예수 공동체마저 깨버린다 이 말이죠.
제자들한테 빠이빠이 이랬단 말이죠. 나 인간하고 안 놀아. 이거란 말이죠. 이게 단절이란 말이거든요. 이 단절의 징후와 증상이 그게 나한테 없다는 말은 결국 나는 지금 따로 놀고 있다. 지금 엉뚱한 생각하고 따로 놀고 있는 거에요. 그 떨어져 나감을 추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희생’이라고 하는 거에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16절, 17절, 18절 쭉 보면 성령 이야기 나오지요? 이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떨어져 나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령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이야기. 성령 이야기 하시죠. 이거는 뭐냐 하면 오늘 제목입니다.
오늘 제목은 피하지 말라. ‘피하지 말라’. 동생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떻게 타이밍이. 오늘 제목은 내가 절단내더라도 도망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다 찾아올테니까. 너희들을 놔두고 따로 내가 떨어져 나가는데 이 떨어져 나감이 너로써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거에요.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었던 이유가 나 잘되기 위해서 믿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떨어져 나가니까 단절, 결별을 선언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들이 뭐 따로 단결대회를 하던지 뭐 이렇게 따로 모여서 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그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때에 주께서 평안하냐고 인사하시고 찾아오셨지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찾아갈테니까 피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구원을 너희들이 증거해야 되니까. 예수님의 구원의 그 하신 너희들이 생각하는 너희들의 언어의 프레임, 언어의 틀에서 지니고 있던 그 내용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 마련하셨거든요.
제가 아까 보니까 복도에서 누가 전화를 하더란 말이죠. 전화 내용을 잠깐 1층에서인가? 누가 전화를 해요. 아이 피아노 선생님을 이렇게 섭외하기 위해서 전화하는 거에요. "그럼 선생님 오후 5시가 어떻겠습니까? 애가 그 시간이면 학원 갔다가 오는 시간인데 어떻겠습니까? 오후 5시. 아! 안돼요? 6시면 어떻습니까? 아! 6시 적당하죠?"
전화대고 하는 거에요. 그 아주머니께서 애기 엄마가. "아 그럼 선생님 6시로 일단 합시다." 이야기 하더란 말이죠. 한번 적어볼게요. 빨리 적습니다. 우리 애가 5시에 학원 갔다가 6시에 온다 이게 뭐의 나열입니까? 단어의 나열이죠?
자, 단어의 나열이 뭐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형성하지요? 이 프레임은 누굴 위한 겁니까? 내 자식이니까 나의 확장, 내 프레임을 위해서 언어가 동원된 거에요. 전화기 대고. 선생님 약속되었지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내뱉는 모든 단어들 그 개념들의 프레임 연속적으로 뭡니까? 누굴 형성하는 거에요? 나를 형성하되 나를 꼼장어 만드는 거에요. 나를 몸통을 길게 한다 이 말이죠. 모든 단어가.
자, 그 아주머니가 만약에 교회가서 기도한다. 그 기도 뭐하겠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구? 나를. 주님은 헤어졌는데. 나는 너하고 안 논다고 너하고 거래 안한다고 헤어져버렸는데요. 잘라주세요 해야지. 살려주세요 하지 말고.
주여 나 사는 곰장어같은 긴 이거 뱀장어같은 나를 주께서 찾아오셔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로 앞뒤 다 팔목아지 손목아지 간에 주여 다 잘라서 통통 거리면서 뜯기는 그 하나하나가 그 자체가 진실되게 사는게 아니고 그 자체가 곧 진실이고 그게 진심이고 그게 진리임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다 잘렸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성령께서 오신 이유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할까요? 우리 집에 누가 산다. 이거거든요. 우리 집에 누가 산다는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14장 지금 중간 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 온다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집에 누가 살아요. 우리 집에. 갑자기 호러물 비슷하지요? 밤에 자는데 누가 냉장고 문 열고 이렇단 말이죠. 이상하게 내 집은 나 혼자 사는데 우리 식구만 사는데 우리 식구 외에 다른 분이 살아. 절단낼라고.
그런데 아가씨들이 남자친구한테 잘 보일려고 아주 평소에 애교 하나도 없으면서 앞으로 애교할 마음도 전혀 없으면서 연애할 때는 애교부린다고 오빠 나 귀싱 꿍꼬또. 귀신 꿈꿧다는걸 오빠 귀신 꿍꼬또 무셔어~~귀싱 꿍꼬또 하잖아요.
모든 인간이 귀신이에요 모든 인간이. 요한복음이란 귀신을 꿈 꾸는게 아니고 지금 돌아다니는 모든 인간이 5층부터 4층까지 전부 다 모든 인간이 귀신이에요 귀신. 어디 귀신을 따로 하려고 만나면 다 귀신인데. 만나면 좋은 친구 전부 다 귀신이에요. 귀신 전부 다. 인간도 아니에요. 다 악령들었다니까요. 그들은 그들 집에 악령 살고있어요.
마귀가 너 잘되야 돼. 너 확장해야 돼. 너 프레임 놓치면 안돼. 세상 모든건 너 복 줄려고 하나님이 복 줄려고 교회 오게했어.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를 곰장어 만들고 긴 몸통을 크게 키우고 목적을 키우는데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격려하고 독려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내 인생은 내것이고 이것은 내거라고요.
성령께서 이미 주님이 떠나고 난 뒤에 성령을 주거든요. 자, 주님께서 자진해서 빼내고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다가 떨어져 나가시고 제자들은 닭 쫓던 개 신세 되고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 나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뭐로 오신다고 했어요? 성령으로 오시거든요.
성령으로 오시게 되게 되면 이 제자들은 제각기 자기 잘되기 위해서 그동안 예수님의 희생이 어떻고 사랑이 자기 마음대로 오해한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단어 사랑이라든지 구원, 천국, 하나님 나라, 율법, 모든 의, 모든 단어는 어디로 응집되어 있느냐 하면 모두 나 잘 되기로 응집되어 있어요. 나 잘 되기.
나 천당 가기로 응집되어있다고요. 목사님 성경 한번 보세요. 전부 다 그거잖아요. 단어를 어떤 단어를 썼느냐 의미 없어요. 이걸 원어 헬라어 히브리어도 소용없고 한국말로 소용없어요. 그 방향성이 뭐냐? 내가 갖고 있는 이 프레임은 주님은 손대지 마세요. 이거 다치게 하지 마세요. 이거 굳건히 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주님하고 좋은 거래 관계 터 가지고 주님 앞에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이 프레임을 주께서 이미 떨어져 나간 그런 위력으로 찾아와버리면 이 프레임이 여기서 뭐가 생기겠어요? 틈이 생기겠지요. 그 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새로움이 들어와요 새로움이. 새로운 의미가 들어오는 거에요. ‘새로운 의미’.
기존의 의미는 뭐냐 하면은요 내가 뭘 해드리면 하나님 기쁘시게 되고 그래서 나는 신자임을 증명하겠습니까? 라고 내 위주로 하는데 이건 익숙해졌고 기존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욕망과 의지가 다 내 중심으로 나한테 소환 다시 돌아와서 벌려놓고 그 혜택과 결과는 나의것으로 다시 축적이 되는 것을 노리면서 그 단어를 내뱉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기존의 것이다 기존의 것. 이걸 어려운 말로 의고주의라고 해요. ‘의고주의’.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의고주의라는 말은 뭐냐 하면 성당 천주교에서 그렇게 추앙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에요.
옛날에 과거에 굉장히 클래식한 것. 라틴어라든지 오래된 어떤 제도, 풍습과 오래된 성당 건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에요. 라틴어. ~~~~~ 하는거 있거든요. 그것처럼 뭔가 과거에 있었던 그런 경향들이 굉장히 더 순수해 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는 거에요.
모짜르트의 옛날 음악은 유행가였거든요.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방탄 소년단의 DNA하는 노래하고 지금 모짜르트의 교향곡하고 비교해보세요. 어느 것이 더 클래식해보이고 품위 있게 보입니까? 춤추는게 품위 있게 보여요?
모짜르트의 그런 음악이 더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렇지요? 슈베르트나 그런 낭만주의 음악 계통, 클래식 음악 계통. 그것보다 더 나가면 아주 가락조차도 정지시키든지 고전주의까지 나오고 높낮이도 없어요. 경박스럽다고. ~~~~있거든요. 음악이.
더 엄숙하고 더 경건해보이고 옛것에 대해서 좋아하는 것 의고주의라고 하는 거에요. 옛것에 대해서. 이런 경향들이 있어요. 오래된 가구를 오래된 가구 파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넘어갑시다. 오래된 가구 돈 주고 비싼 돈 주고 사는거 있잖아요. 고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골동품 아니고.
빈티지. 빈티지 봤지요? 그런 것처럼 더 품위있어 보이는게 과거에요. 결국 그것을 선호한다는 말은 뭡니까? 단절되기 싫다는 거에요.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 기대게 되면 덩달아 나의 가치, 나의 마음의 품위도 더 고상해진다는 그런 기대를 갖게 하는 겁니다.
이게 이러한 의욕을 갖고 이러한 의지를 갖고 있다라고 하는 이 모든 것에 새로움을 주는 거에요. 새로움을. 새로움을 줘버리면 새로움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이렇게 돼요. 이게 아까 엿가락 토막토막 네모나게 조각이 되지요? 이 조각을 당했던 사람의 느낌은 뭐냐?
눈떠보니까 방금 눈떴는데 이 세계가 단절의 세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늘 눈뜨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아침에 눈떴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처음으로 없던 내가 눈을 떴으면 과거는 뭡니까? 이미 없는 거죠.
미래도 없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처음 탄생케 하는 거에요. 매일 거듭나는 거에요 매일. 매일 거듭나는 겁니다. 죽었다가 매일같이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그러니까 어떤 순간에 길에서 만약에 한티역 2번출구에서 횡단보도 건너갈 때 약 한 200보 걷는다면 200보 계속해서 주님의 떨어져 나가심의 그 위력이 내 발걸음에 계속 작용하는 거에요. 더 세밀하게 조각이 나는 거에요.
그러면 그 한순간 한순간이 그것이 뭐냐 하면 진실됨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손댈 여지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발걸음 가는데 내가 정신 차려서 걸었다는게 없고 전부다 주께서 그냥 개입하신 거에요.
그 단절이 뭐냐 하면 바로 희생의 증거 또는 희생물. 하나님의 희생하신 결과물이 되는 거에요. 희생의 결과물. 이게 바로 내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냐 하면 주님의 구원이죠.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목숨 바쳐서 예수님의 구원은 떨어져 나가심을 증거하는거에요.
내 구원 챙길 필요 없어요. 이미 우리는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 들통났기 때문에. 주님과 거래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로부터 이거는 우리가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에요. 구원되겠다는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고있는 거에요.
자, 그 다음에 그 다음 봅시다. 그렇게 될 때 ‘나’라는 것이 이 긴 몸통이었는데 이걸 조각내니까 조각내버리니까 여기서 ‘나’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그럼 뭐가 성립되느냐? 여기서 공동구원이 됩니다. ‘공동구원’.
공동구원이 이게 기쁘고 감사고 고마운 점은 사적인 나의 윤리도덕이 여기서 먹히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내가 구원받는게 없어요. 공동으로 공동의 성격을 본질을 부여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으니까.
공동을 하나로 보고 공동 전체를 통합해서 다 건져내시는 그분의 원칙이 개인마다 주께서 자기 백성 개인마다 다 집어넣어 준거에요. 마치 앙꼬 넣을 때 국화빵 앙꼬 넣을 때 동일한 앙꼬가 다 들어가는 것처럼.
나 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구원하셨기에 구원됐다는 사실을 들어오게 되게 되면 내가 이번에는 열심히 했다. 이번에는 게을렀어. 이번에는 내가 착해. 이번에는 나빴어 라는 그러한 선악적인 논리 자체는 개나 줘버려라. 참 개 줄 것도 없다. 우리가 개인데. 그런 것은 우리한테는 이제 잊어버려라. 그게 과거 의고적, 과거에 얽매인 생활이거든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공동구원보다 더 기쁜 소식 있어요? 개인구매 아니고 공동구매. 물론 구매하는건 아니지만. 공동으로 받는 것. 그동안 얼마나 우리는 나는 사적인 역량과 노력에 의해서 내 구원이 결정된다는 이 말도 안되는 선악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평생을 악마한테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 악마에 대해서 주일낮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도사견’. 물어 물어!! 물어 물어 물어!! 교회 보세요. 다 도사견들 당회장 도사견, 장로 도사견, 도사견들 쭉~~. 뒤에는 악마가 있지요.
도사견 일곱마리는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끗이 청소하고 나왔는데 귀신이 또 아 소제 잘 되었네 하고 또 찾아온거에요.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아도 갈 곳이 없는 귀신들이 좋다고 청소해놨다고 다 그 집에 들어오는 거에요. 달리 갈 데가 없어가지고.
그동안 정 들었다 이 말이지요. 정 들었지요. 우리 아담이 그동안 선악과 따먹어 놓고 얼마나 선악과 프레임이 우리가 얼마나 익숙해졌고 이게 몸에 길들여졌습니까? 나쁜 짓하면 지옥갈 거 같애. 착한 일하면 천당갈 거 같애. 이러한 프레임 이건 너무나 사적인 프레임이잖아요. 개인적인 프레임이잖아요.
주님께서 떨어져 나갈 때 그냥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닙니다.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지요. 상처를 입고. 그렇다면 이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상처가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도 주님이 떨어져 나간 상처를 그대로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창세기 32장에 나오지요. 창세기 32장. 얍복강가 나오지요. 이름이 누굽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은 복 받은 축복받은 불구자에요. 축복받은 불구자. 복을 받았는데 무능해. 내가 내 구원에 가장 무능하게 느낄 때에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순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향수 다 깼잖아요. 강도, 세리, 창기, 삭개오. 본인의 역량으로 본인의 과거에 긴 몸통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가 없음을 누가 알아요? 본인이.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그럴 때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되지요. 왜냐하면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적인 역량, 나의 윤리 도덕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이 축복받은 불구자가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야곱의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이었잖아요.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 이건 집단의 이름이에요. 공동구매가 가능해요 공동구매가 가능해. 동일한 원칙이 주어지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싸움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겁니다. 따라서 너는 너 상처받은 거 하지 말고 너 때문에 내가 상처받은 거 너 증거해라.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 갈 때에 사울이 예수님이 사울보고 하는 이야기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 나한테 핍박했다는 거에요. 핍박이 십자가만 핍박이 아니고 십자가의 원리가 계속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아까는 뭐 목사님 예수님 떨어져 나갔다고 했잖아요. 예. 떨어져 나갔지요. 그런데 떨어져 나갔는데 떨어져 나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상처를 스스로 유도해나가시는 겁니다.
자기가 상처받게 나오도록 유도했다 이 말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요한복음 13장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예수님 의도적으로 지금 상처, 자기 상처 받는 것, 떨어져 나감을 스스로 유도하고 있어요.
야곱 언약이 있기 때문에 야곱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얍복강 야곱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요. 그 야곱 언약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지요. 그 나다나엘 이야기 할 때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야곱을 야곱의 프레임에 야곱의 프레임, 그 언어의 틀, 틀에다가 예수님이 거기에다가 그것을 완성해내는 겁니다.
왜 완성해냈느냐? 예수님의 구원은 단독구원이지만 그 단독구원을 예수님의 개인적 구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줘버리면 이거는 예수님과 결별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십자가와 부활로 와버리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집단이 되는 거죠. 집단이 구원되는 거에요. ‘집단구원’.
새로운 보편성이에요. 예수님 특수한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보편성이 형성이 되는 겁니다. 구원의 원리는 내가 어떤 역량을 발휘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떨어져 나가시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자체로서 실질적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했다는 그것이 뭐냐? 주님의 구원이고 주님의 구원에 참여한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말 조금만 어렵게 해도 무슨 말인지 뭐.
로마서 5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입니다 3장. 3장 2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먼저 순서가 자기가 먼저 의로우시며 그 다음에 뭡니까? 끝났습니까? 아니지요.
의로우심이 자기를 믿는 자도 의로우신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의로우심을 우리가 또 믿어야 됩니까? 이런 질문이 또 필연적으로 나오지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게 또 아닌 것을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하여튼 인간은 입만 떼면 거짓말. 5장 21절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구원, 예수님의 구원이 되게 하심이라. 저희 안에서.
우리 구원은 없고 예수님의 구원 안에 들었다는 자체가 결과적으로 우리의 의고 우리의 구원되는데 그때 우리라 하는 것은 전에 있던 우리가 아닙니다. 그것과 단절되어 있으니까. 프레임이 달라요. 프레임이. 나를 위한 프레임은 이미 끝났어요. 그거는 물 건너갔고 그거는 잊어버리세요.
주님이 설치한 프레임 위에 우리가 그 작업에 가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합류되다 보니까 주님의 의가 우리의 되었고 주님의 구원이 우리 구원 된거에요. 나의 잘잘못, 행동, 착함, 의 그런 것 의미 없다니까. 사적인 나의 역량 그런 것 의미 없어요. 공동구매라니까 공동구매. 주께서 공동적으로 우리를 자기 백성 데려간다니까요.
저 사람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옆 사람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필요없어요. 내놓을 것은 주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지난 낮설교 하면서 낮설교 제일 마지막 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 예수 믿는다는 증거가 뭐냐? 정말 성도됐다는 증거가 뭐냐?
그 증거는 화투패라고 했지요. 화투패에서 이렇게 화투패 쥐고 있으면 새로운 거 들춰가지고 다 쥐고 있는게 아니고 숫자가 들어왔으니까 뭐 나갈게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뭐 하나 더 이상 필요없는 거 빼내잖아요.
그거 빼낼 때 그 빼낸게 뭐냐 하면 옛날 내가 나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잘난 나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을 빼버리는 거에요. 전에는 뭐냐 하면 내가 축복받았으니까 부자되야 돼 라고 딱 있었는데 예수님의 성령이 오니까 그까짓 것 부자가 뭔데 하고 부자 딱 내놓는 거에요. 필요 없다고.
부자가 나를 망치지 부자가 나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좀 그런 사람 있으면 좋겠다만은. 돈이 나를 망치게 한다고 이까짓 돈이 이러면서 내놓는다. 그걸 배설물로 똥, 오줌으로 내놓는거에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의가 뭔데 나의 의를 또 집어던져놔요. 이딴거 필요 없다는 거에요. 공동구매기 때문에. 공동의 원리로 구원받기 때문에. 사적으로 열심히 한 것, 금식기도 한 것, 선교단체해가지고 아프가니스탄 간 것 다 내려놔요. 뭐 말레이시아 가서 뭐 좀 해보려고 한 것 그것도 다 내놓고.
참 다음 시간부터 장소를 저쪽으로 옮긴답니다. 다음 시간 아닙니까? 언제부터? 아 팔릴 때까지. 눈을 떴는데 개입이니까 눈을 떴는데 또 다시 팔목하고 팔 다리 다 잘라진 채 눈을 떴다 이 말이에요. 그 자체가 주님의 힘으로서 작품이고 그 자체가 주님의 진리에요.
주님의 진리라는 말은 더 모자람이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더 이상 선행으로 보탤 필요가 없는 잘렸다라는 자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져 나갔으니까. 언제부터? 나의 프레임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니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좀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런게 나와요.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굴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직 모세는 일 시작도 안했는데 초반부터 막 죽이려고 해요. 모세가 어리둥절하지요.
일 시켜놓고 일하러 나간 사람 보고 죽일려고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누가 적이지? 애굽이 적이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왜 애굽에 가가지고 말씀 증거하는 왜 나를 적으로 삼아서 나를 공격하느냐? 어리둥절한 겁니다.
모세는 그 이유를 몰랐어요. 왜 그렇게 하는지 몰라요.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세 자.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움’이에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새로움 줬다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예상되는 새로움은 기존의 내가 알고 있는데서 뭔가 추구할 수 있는 새로움에 지나지 않거든요.
진짜 새로움이 아니고 생뚱맞는 새로움이 아니라 새로움이니까 괜찮은 뭐 이정도 자꾸 구상하게 되는 새로움이잖아요. 만약에 내가 구상한 예상한 새로움이라면 이건 뭐냐 하면 절단이라는 원칙은 날라가버리고 그냥 장어처럼 몸통의 연장이 되어버려요. 몸통의 연장.
예를 들어서 불길한 예감은 적중 안되는 법이 없어 이런 것 혼자말로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이 돼. 뭐 이런거 있잖아요. 그러면 적중이 됐다는 말은 결국은 내가 예감한 것과 결과가 같이 몸통으로 연장이 되었다 이렇게 되요.
그러면 무슨 증거가 없느냐 하면은 절단 낸 증거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것은 모세가 사전에 하나님 앞에 힌트하나 낌새하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새로움을 모세에게 집어넣으려고 해요. 모세가 안 새로움은 뭐냐?
십보라라는 자기 부인이 모세 부인이 남편이 죽었는데 마사지 할 생각은 아니고 갑자기 뭘 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할례 포피를 잘라서 피를 잘라서 그 피 묻은 포피를 모세의 발에 던지니까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이거 뭐 십보라가 허준입니까? 이거 뭐에요? 침 놓던지 뭐 이런거 처방전 놓고 식후에 하루 세번 먹고 이런게 있어야 되는데 그런게 없다니까. 식후에 세번 먹고 침 놓는 것은 뭡니까? 이거 과거에 내가 알고있는 거에요. 인간세계에서. 인간에서 통하는 모든 과학은 누굴 위함입니까? 인간 본인을 위해서 하잖아요.
모세가 죽일려고 하니까 죽일려고 할 때 우리가 모세 입장이라면 저를 왜 죽입니까? 하는 것도 이게 뭐냐? 과거에 모세가 알고 있는 프레임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이 설마 나를 죽일까? 하나님이 일하러 보람찬~~하면서 열심히 가고 있는데 그걸 뒤통수 날 죽일 수 있겠어요? 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것도 과거의 내가 형성된 나의 프레임의 연장 속에 있던 단어 중의 하나, 개념 하나에요. 주께서는 그래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요 이거는 주님의 절단된 새로움이 안 나와요. 새로움이 나오려면 주님의 절단이 모세의 절단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틈을 만들어요. 존재의 ‘틈’.
연속되는게 아니고 매순간 주님께서 은혜 주셔야 살 수 있다는 그 틈.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주님이 의도적으로 떨어져 나가신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의가 계속해서 성령의 의가 그 틈 사이에서 계속 스며나와야죠. 어떤 증기가 나오듯이.
땅이 갈라지고 거기 지진에서 무슨 지진파 일어나가지고 거기서 갈라진 땅속에서 용암이 솟듯이 몰랐던 것이 새롭게 나와요. 내가 몰랐던 것이 나왔다는 말은 곧 결국 나는 뭐다? 나는 유능하다 무능하다? 나는 나 천국 가는데 완전히 무능한 자로 몰고 가시는구나. 무능한 자로 만들어 내시는 작업을 반복시키면서 간다는 거에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것은 감사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럼 내가 죽은 자라면 내가 내놓을게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아? 그게 공동으로. 네가 안 내놓아도 공동으로 구원받아 공동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의 자기의 떨어져나감, 또는 다른 말로 자기의 희생으로써 그렇게 하신거에요.
모세에게 주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피란 말이죠 피. 할례 언약이거든요. ‘피’. 피를 발생시키는 이 피가, 피 묻은 피부조직 포피가 이게 모세를 죽은 자에서 살았다면 지금 이걸 경험하면서 알게 된 새로움을 알게 된 모세는 무엇을 품고 애굽으로 가야됩니까?
이 피. 할례 언약. 그래서 유월절날 할례 받고 그 다음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이스라엘이 형성, 만들어지는 겁니다. 공동구매의 원칙입니다. 피죠. 내 피가 아니죠. RH A형 해갖고 뭐 하려고? 누구 피? 예수님 피. 그럼 예수님의 혈액형은 뭐냐? 그 혈액형 묻는 것은 옛날 프레임이에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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