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피하지 말라 191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3. 07:58
2019-11-20 00:03:07조회 : 297         
피하지 말라 19111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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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122.247)19-12-02 23:52 
강남-요한복음 총정리(6)-요한복음 15장 (피하지말라)1911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3장부터 요약해 또 들어가게 됩니다. 13장부터 21장 그 내용을 보게 되게 되면 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자기공동체를 의도적으로 본인이 깨버릴려고 해요. 13장부터 21장까지. 한 20장까지 보면 깨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공동체가 깨지길 싫어해요. 왜냐? 평생을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요즘 같으면 이렇게 할거에요. 예수님 혼자 희생해가지고 우리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올거에요. 그걸 되바라졌다 또는 싸가지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생은 예수님이 하고 우리는 덕 봅시다 이런거거든요.


예수님이 이렇게 공동체를 깨는 이유는 자진해서 떨어져 나가시려고 하는거에요. 떨어져 나가시는 것. 공동체로부터 그리고 그 당시의 권력으로부터 모든 세상으로부터 자진해서 본인이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알아서 그 세계에 합세하지 않고 그냥 다른 길로 그냥 가버리시는 거에요.


그래서 13장 끝에 보면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지요. 그리고 14장에 봐도 도마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묻는 거에요. 주님이 자기 제자하고 빠이빠이하시고 갈라서고 네가 추구하는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은 자진해서 단체에서 그 공동체에서 어떤 구성된 그 조직 속에서 자진해서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데 주님 하나 홀로 고생해서 우리 덕 봅시다 천당 갑시다라는 이러한 생각이 인간들이 말하는 희생이라는 거거든요. 희생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죠. 이 희생과 사랑에서 자진해서 빠이빠이하고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희생과 사랑하고 나는 결별한다. 나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다고 떨어져 나와버려요.


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뭐냐 하면은 새롭게 수립되는 희생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뭐냐? 항상 어려울 때 주님한테 속으로 뭐라고 했겠어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하겠지요. 살려주세요. 상당히 좋은 믿음이에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인간 자체가 욕망인데 내 욕망이 내 구원에 아무짝도 소용없었음을 드디어 나는 알게되었으니까 의지할 것 믿을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 욕망이 나를 구원한게 아니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의욕과 의지가 소용없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거기에 주님의 반응은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살려라 이 말입니다. 네가 살려. 나의 이 떨어져 나가는 이 사실과 내가 이 세상과 결별했다는 그 취지와 의의를 네가 목숨 바쳐서 살려봐라 이 말이죠. 나 이용해서 너 살려고 하지 말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너의 목숨을 바치라 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구원이냐 하면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누구의 구원이냐? 주님의 구원을 살려야 된다 이 말이죠. 살리고 살리고 이런거 있죠? 주님의 구원을 살리는 것이 그게 바로 제자로 택함받는 이유입니다. 나 구원받았다 그 소리하려고 그 사람들이 제자된 게 아니에요.


나 구원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는 안 놀겠다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사실을 살리는게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교회 와서 자꾸 이득 보려고 하고 어느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 나와서 보호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나를 보호하라고 하는데 너를 보호하지 말고 나를 보호하라고 하라는거에요.


보호라는 개념, 구원이라는 개념, 네 구원은 없어요. 주님의 구원입니다. 구원개념, 희생개념, 사랑개념, 이 모든 개념, 이 모든 단어, 이 모든 용어 13장부터 요한복음 21장 끝까지 그 모든 단어들은 지금 이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활주로를.


비행기가 뜨게 하는 거에요. 윙~해가지고 비행기가 뜨는 거에요. 그 단어가 날라가요. 날라가는 단어. 너희가 사는 단어의 개념하고 나는 결별하겠다. 단어가 공중에 떠가서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요. 제자 둘이 베드로하고 도마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날린 그 단어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주께서 내뱉은 그 단어는 그 목적을 향해 갈텐데 그 목적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그 단어에 묶여서 그 단어에 묶여서 주님 계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오지마라 너는 이 단어에 단어가 갖고 있는 형성하는 프레임이 다르다. 프레임이. 프레임 뜻이 뭐에요? 한글로 하면 틀이죠 틀.


내 삶의 프레임. 내가 평소에 주워먹은 모든 단어는 누구 프레임이냐? 나를 재구성하는 나에 의한 프레임이잖아요. 이 프레임과 주님의 프레임과 지금 주님은 결별하는 거에요.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거에요. 나는 너희들하고 안 논다. 나는 너희들하고 안 논다. 이걸 두자로 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단절’. 이게 단절이에요.


인간들은 신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모든 헌신과 경견과 거룩과 선함을 거기다 다 몰빵해요. 다 쏟아부었어요.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아니에요. 자기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죽고 난 뒤에 영원한 천국 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거기에다가 다 쏟아 붓습니다. 인간들은 나라가 잘되는 것 좋고 가정이 잘되는 것 좋지만 결국에는 내가 파멸한다면, 내가 파멸한다면 내가 모든게 무너진다면, 그런 국가나 가족이 결국 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게 잘된들 그게 나는 무슨 소용이 있어요. 궁극적으로 내가 잘 되야지요. 왜? 내가 가장 소중하니까.


파멸이란 말이 생각나니까 이 비슷한 파멸과 비슷한 프랑스 단어가 생각나요. ‘파탈’. 파탈이라는 프랑스 단어인데 여기에 두 가지 있어요. 옴므파탈이 있고 팜므파탈이 있는데 옴므파탈은 남자가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빠진 여자는 자기가 지금 파탈하는 것도 몰라. 팜므파탈 이거는 우리말로 하면은 팜므파탈은 요부라 하지요. 요부가 되서 다른 말로 꽃뱀. 파멸된다 하거든요.


지금 제자들은요 예수님 믿고 파탈되기 싫어요. 자기가 파멸되기 싫은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수상한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과 결별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예수를 초청해서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그 의도 자체가 너희들은 파탄나지 않기 위해서 파멸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데 그게 바로 파탄이라는 겁니다. 왜? 인간과 신은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역량과 예수님께 모든 잘함, 그리고 순종, 경청, 실천, 말씀에 대한 실천 이 모든 걸 총동원해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 율법을 참조합니다. 참조, 참고로 하고 참조해요. "주님 지금 이거 지시 따르는거 맞지요?" 그렇게 하지요.


지난 주일날 나는 몰랐는데 어떤 교인이 그래요. 목사님 이번 주일이 무슨 주일인지 압니까?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는거에요. 추수감사절. 농사 안 짓는데 왜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주일. 아 돈 내는 날이구나. 돈 달라하고 돈 내고. 돈은 100을 얻고 애들한테 빵 사주는 건10, 90 남는 계산이 되거든요.


교회가 항상 돈이 헌금이 안 나올 시점에 팍팍 거기에 강조점을 둬요.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불교에서는 일년 대목이 부처님 오셨다 가신 날이거든요. 크리스마스하고 연말 신정에 봉투 돌리고 몫돈 해야 얼추 교회 헌금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에는 중요한 일종의 준 대목에 해당되는 거죠.


준 대목에 해당되는데 그 지시가 뭐 당회에서 했다하면서 추수감사절 봉투 돌릴 때 그 지시를 왜 따라야 됩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지요. 자기 구원을 위해서. 시키는대로 헌금냈으니까 다지기. 보통 흙 다지듯이 다지기. 이제 내 구원의 다지기가 좀 더 여물어졌겠지요? 주여. 이게 뭐냐 하면 자아강화입니다. ‘자아강화’. 주님은 여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거에요. 이런 짓거리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매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단절 없이 단절의 반대말이 뭐냐? 여기서 단절 없이 구원, 다시 말해서 연속성으로 계속 줄곧 밀어부치면 도착해보니까 천국. 이러한 아이디어를 인간은 악마의 배후 조정을 받아서 인간은 이것만 생각해요. 딴것 없어요. 중간에 끊어지게 되면 절망이니까 내가 파탄나면 안되니까 내가 파멸되면 안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떨어져 나옴으로 말미암아 13장부터 21장까지 성령 이야기부터 쭉 이야기하는것은 뭐냐 하면 바로 그런 너로부터 내가 이 세상에서 떨어지듯 떼어내듯이 그런 너를 내가 가서 떼줄께. 내가 떼줄께. 지금 기정 생각, 기정 갖고 있는 생각 있잖아요.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는 기정사실로 부터 내가 떼줄께. 그런데 그건 뭐냐? 단절이 필요해요.


요한복음 13장 끝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오지마라. 14장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아직 오지마라. 오지마라. 올 수가 없어요. 끊어진 거에요. 이 끊어짐을 네가 목숨 바치고 앞으로 네가 증거해야 돼요. 이 하나님과 인간은 끊어졌다는 사실.


구원은 생각지도 하지 말라는 거에요. 연속성은 생각하지도 말라. 끊어진 판에 다른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끊어졌다는 내용만 증거할 뿐이지 다른 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요. 다른 소리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그러면 주께서 우리한테 어떻게 조치하십니까? 자, 여기 나왔어요. 연속성 가지고 구원받고자 하지요.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입니다. 연속성이라고 하는것은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나의 몸통이 길어도 너무 길어. 나의 몸통이. 꼭 장어 같애.


길다란 뱀장어나 꼼장어나 꼬리가 길고 몸통이 길어요. 항상 내가 생각하는 나는 길어요. 나이 70이 넘으면 너무 길고 나이 이제 40이 된 사람은 나름대로 길고. 살아온 인생이. 어떤 영재발굴단 어떤 9살 먹은 아이가 이런 이야기해요. 영재니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에 이런 동생은 처음 봤다. 9살 먹은 아이가 자기 평생에. 자기 딴에 9살이 아주 길었던 모양이죠. 내 평생에 이런 내 몸통에 이런 동생은 처음 봤다 이러거든요. 나름 인생이 좀 지루했던 모양이에요 그 아이가.


우리는 이게 몸통이 너무 길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아무리 살펴도 연속성 단절의 모든 것은 전부다 핀셋으로 다 뽑아내버렸어요. 연속의 연속이에요.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로 계속 매일같이 이걸 잇는데 모든 역량을 다 동원했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하고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과 동일할 것이다. 거짓말이거든요.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단절을 실시하시고 그 단절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연속성을 이걸 잘라버립니다. 토막을 내요.


그러니까 연속성이 뭐가 되느냐 하면 토막이 돼요. 토막. 모텔 값 4만원 안 받았다고 토막내서 한강에 버린 사람 있지요. 토막을 다 내 버려요. 엿가락처럼 긴 엿을 탁 토막을 내면 토막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진실 또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게 아니고 토막 난 자체가 그게 진실이에요. 주께서 토막냈다 절단냈다 단절했다. 나의 연속성에 토막내가지고 나를 아주 앞뒤로 다 잘라버렸다. 그럼 진실되게 살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진실이에요. 주의 손이 손댔기 때문에 내가 추후에 더 손댈게 없잖아요. 그게 주님의 솜씨가 담겨있는 진실됨이에요. 진리에요.


산낙지 잘라도 펄떡 거리죠. 우리도 펄떡 거려요. 퍼덕거리지만 그 퍼덕거리는 그 모든 양상, 그 모습 자체가 이게 진리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개입 안하면 우리는 꼼장어가 되지 절대로 토막 난 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토막 난 것을 제가 진실이라고 했지만 다른 말로 이게 바로 시체에요. ‘시체’.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보면 “나는 주안에서 담대하게 자랑하노니 단언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주님께서 날마다 앞뒤 다 잘라버린다. 어제 잘라버리고 내일 잘라버리고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 자체가 내가 증거하고 싶은 주께서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갔음을 자기의 몸체를 통해서 마음껏 지금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진실된 게 어디 있어요? 나 자체가 단절되었음의 증거가 되니까 이것보다 더 진리가 어디 있겠어요? 진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연속성을 갖게 되면 자꾸 오늘날 나의 나됨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해요. 과거에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정도 실력 갖고 있으니까 내일은 좀 더 잘해야지.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의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의 내용이 그 사람한테는 전혀 지금 도달이 안 되고있는 거에요. 주께서는 예수 공동체마저 깨버린다 이 말이죠.


제자들한테 빠이빠이 이랬단 말이죠. 나 인간하고 안 놀아. 이거란 말이죠. 이게 단절이란 말이거든요. 이 단절의 징후와 증상이 그게 나한테 없다는 말은 결국 나는 지금 따로 놀고 있다. 지금 엉뚱한 생각하고 따로 놀고 있는 거에요. 그 떨어져 나감을 추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희생’이라고 하는 거에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16절, 17절, 18절 쭉 보면 성령 이야기 나오지요? 이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떨어져 나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령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이야기. 성령 이야기 하시죠. 이거는 뭐냐 하면 오늘 제목입니다.


오늘 제목은 피하지 말라. ‘피하지 말라’. 동생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떻게 타이밍이. 오늘 제목은 내가 절단내더라도 도망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다 찾아올테니까. 너희들을 놔두고 따로 내가 떨어져 나가는데 이 떨어져 나감이 너로써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거에요.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었던 이유가 나 잘되기 위해서 믿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떨어져 나가니까 단절, 결별을 선언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들이 뭐 따로 단결대회를 하던지 뭐 이렇게 따로 모여서 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그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때에 주께서 평안하냐고 인사하시고 찾아오셨지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찾아갈테니까 피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구원을 너희들이 증거해야 되니까. 예수님의 구원의 그 하신 너희들이 생각하는 너희들의 언어의 프레임, 언어의 틀에서 지니고 있던 그 내용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 마련하셨거든요.


제가 아까 보니까 복도에서 누가 전화를 하더란 말이죠. 전화 내용을 잠깐 1층에서인가? 누가 전화를 해요. 아이 피아노 선생님을 이렇게 섭외하기 위해서 전화하는 거에요. "그럼 선생님 오후 5시가 어떻겠습니까? 애가 그 시간이면 학원 갔다가 오는 시간인데 어떻겠습니까? 오후 5시. 아! 안돼요? 6시면 어떻습니까? 아! 6시 적당하죠?"


전화대고 하는 거에요. 그 아주머니께서 애기 엄마가. "아 그럼 선생님 6시로 일단 합시다." 이야기 하더란 말이죠. 한번 적어볼게요. 빨리 적습니다. 우리 애가 5시에 학원 갔다가 6시에 온다 이게 뭐의 나열입니까? 단어의 나열이죠?


자, 단어의 나열이 뭐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형성하지요? 이 프레임은 누굴 위한 겁니까? 내 자식이니까 나의 확장, 내 프레임을 위해서 언어가 동원된 거에요. 전화기 대고. 선생님 약속되었지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내뱉는 모든 단어들 그 개념들의 프레임 연속적으로 뭡니까? 누굴 형성하는 거에요? 나를 형성하되 나를 꼼장어 만드는 거에요. 나를 몸통을 길게 한다 이 말이죠. 모든 단어가.


자, 그 아주머니가 만약에 교회가서 기도한다. 그 기도 뭐하겠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구? 나를. 주님은 헤어졌는데. 나는 너하고 안 논다고 너하고 거래 안한다고 헤어져버렸는데요. 잘라주세요 해야지. 살려주세요 하지 말고.


주여 나 사는 곰장어같은 긴 이거 뱀장어같은 나를 주께서 찾아오셔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로 앞뒤 다 팔목아지 손목아지 간에 주여 다 잘라서 통통 거리면서 뜯기는 그 하나하나가 그 자체가 진실되게 사는게 아니고 그 자체가 곧 진실이고 그게 진심이고 그게 진리임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다 잘렸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성령께서 오신 이유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할까요? 우리 집에 누가 산다. 이거거든요. 우리 집에 누가 산다는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14장 지금 중간 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 온다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집에 누가 살아요. 우리 집에. 갑자기 호러물 비슷하지요? 밤에 자는데 누가 냉장고 문 열고 이렇단 말이죠. 이상하게 내 집은 나 혼자 사는데 우리 식구만 사는데 우리 식구 외에 다른 분이 살아. 절단낼라고.


그런데 아가씨들이 남자친구한테 잘 보일려고 아주 평소에 애교 하나도 없으면서 앞으로 애교할 마음도 전혀 없으면서 연애할 때는 애교부린다고 오빠 나 귀싱 꿍꼬또. 귀신 꿈꿧다는걸 오빠 귀신 꿍꼬또 무셔어~~귀싱 꿍꼬또 하잖아요.


모든 인간이 귀신이에요 모든 인간이. 요한복음이란 귀신을 꿈 꾸는게 아니고 지금 돌아다니는 모든 인간이 5층부터 4층까지 전부 다 모든 인간이 귀신이에요 귀신. 어디 귀신을 따로 하려고 만나면 다 귀신인데. 만나면 좋은 친구 전부 다 귀신이에요. 귀신 전부 다. 인간도 아니에요. 다 악령들었다니까요. 그들은 그들 집에 악령 살고있어요.


마귀가 너 잘되야 돼. 너 확장해야 돼. 너 프레임 놓치면 안돼. 세상 모든건 너 복 줄려고 하나님이 복 줄려고 교회 오게했어.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를 곰장어 만들고 긴 몸통을 크게 키우고 목적을 키우는데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격려하고 독려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내 인생은 내것이고 이것은 내거라고요.


성령께서 이미 주님이 떠나고 난 뒤에 성령을 주거든요. 자, 주님께서 자진해서 빼내고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다가 떨어져 나가시고 제자들은 닭 쫓던 개 신세 되고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 나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뭐로 오신다고 했어요? 성령으로 오시거든요.


성령으로 오시게 되게 되면 이 제자들은 제각기 자기 잘되기 위해서 그동안 예수님의 희생이 어떻고 사랑이 자기 마음대로 오해한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단어 사랑이라든지 구원, 천국, 하나님 나라, 율법, 모든 의, 모든 단어는 어디로 응집되어 있느냐 하면 모두 나 잘 되기로 응집되어 있어요. 나 잘 되기.


나 천당 가기로 응집되어있다고요. 목사님 성경 한번 보세요. 전부 다 그거잖아요. 단어를 어떤 단어를 썼느냐 의미 없어요. 이걸 원어 헬라어 히브리어도 소용없고 한국말로 소용없어요. 그 방향성이 뭐냐? 내가 갖고 있는 이 프레임은 주님은 손대지 마세요. 이거 다치게 하지 마세요. 이거 굳건히 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주님하고 좋은 거래 관계 터 가지고 주님 앞에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이 프레임을 주께서 이미 떨어져 나간 그런 위력으로 찾아와버리면 이 프레임이 여기서 뭐가 생기겠어요? 틈이 생기겠지요. 그 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새로움이 들어와요 새로움이. 새로운 의미가 들어오는 거에요. ‘새로운 의미’.


기존의 의미는 뭐냐 하면은요 내가 뭘 해드리면 하나님 기쁘시게 되고 그래서 나는 신자임을 증명하겠습니까? 라고 내 위주로 하는데 이건 익숙해졌고 기존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욕망과 의지가 다 내 중심으로 나한테 소환 다시 돌아와서 벌려놓고 그 혜택과 결과는 나의것으로 다시 축적이 되는 것을 노리면서 그 단어를 내뱉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기존의 것이다 기존의 것. 이걸 어려운 말로 의고주의라고 해요. ‘의고주의’.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의고주의라는 말은 뭐냐 하면 성당 천주교에서 그렇게 추앙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에요.


옛날에 과거에 굉장히 클래식한 것. 라틴어라든지 오래된 어떤 제도, 풍습과 오래된 성당 건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에요. 라틴어. ~~~~~ 하는거 있거든요. 그것처럼 뭔가 과거에 있었던 그런 경향들이 굉장히 더 순수해 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는 거에요.


모짜르트의 옛날 음악은 유행가였거든요.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방탄 소년단의 DNA하는 노래하고 지금 모짜르트의 교향곡하고 비교해보세요. 어느 것이 더 클래식해보이고 품위 있게 보입니까? 춤추는게 품위 있게 보여요?


모짜르트의 그런 음악이 더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렇지요? 슈베르트나 그런 낭만주의 음악 계통, 클래식 음악 계통. 그것보다 더 나가면 아주 가락조차도 정지시키든지 고전주의까지 나오고 높낮이도 없어요. 경박스럽다고. ~~~~있거든요. 음악이.


더 엄숙하고 더 경건해보이고 옛것에 대해서 좋아하는 것 의고주의라고 하는 거에요. 옛것에 대해서. 이런 경향들이 있어요. 오래된 가구를 오래된 가구 파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넘어갑시다. 오래된 가구 돈 주고 비싼 돈 주고 사는거 있잖아요. 고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골동품 아니고.


빈티지. 빈티지 봤지요? 그런 것처럼 더 품위있어 보이는게 과거에요. 결국 그것을 선호한다는 말은 뭡니까? 단절되기 싫다는 거에요.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 기대게 되면 덩달아 나의 가치, 나의 마음의 품위도 더 고상해진다는 그런 기대를 갖게 하는 겁니다.


이게 이러한 의욕을 갖고 이러한 의지를 갖고 있다라고 하는 이 모든 것에 새로움을 주는  거에요. 새로움을. 새로움을 줘버리면 새로움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이렇게 돼요. 이게 아까 엿가락 토막토막 네모나게 조각이 되지요? 이 조각을 당했던 사람의 느낌은 뭐냐?


눈떠보니까 방금 눈떴는데 이 세계가 단절의 세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늘 눈뜨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아침에 눈떴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처음으로 없던 내가 눈을 떴으면 과거는 뭡니까? 이미 없는 거죠.


미래도 없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처음 탄생케 하는 거에요. 매일 거듭나는 거에요 매일. 매일 거듭나는 겁니다. 죽었다가 매일같이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그러니까 어떤 순간에 길에서 만약에 한티역 2번출구에서 횡단보도 건너갈 때 약 한 200보 걷는다면 200보 계속해서 주님의 떨어져 나가심의 그 위력이 내 발걸음에 계속 작용하는 거에요. 더 세밀하게 조각이 나는 거에요.


그러면 그 한순간 한순간이 그것이 뭐냐 하면 진실됨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손댈 여지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발걸음 가는데 내가 정신 차려서 걸었다는게 없고 전부다 주께서 그냥 개입하신 거에요.


그 단절이 뭐냐 하면 바로 희생의 증거 또는 희생물. 하나님의 희생하신 결과물이 되는 거에요. 희생의 결과물. 이게 바로 내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냐 하면 주님의 구원이죠.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목숨 바쳐서 예수님의 구원은 떨어져 나가심을 증거하는거에요.


내 구원 챙길 필요 없어요. 이미 우리는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 들통났기 때문에. 주님과 거래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로부터 이거는 우리가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에요. 구원되겠다는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고있는 거에요.


자, 그 다음에 그 다음 봅시다. 그렇게 될 때 ‘나’라는 것이 이 긴 몸통이었는데 이걸 조각내니까 조각내버리니까 여기서 ‘나’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그럼 뭐가 성립되느냐? 여기서 공동구원이 됩니다. ‘공동구원’.


공동구원이 이게 기쁘고 감사고 고마운 점은 사적인 나의 윤리도덕이 여기서 먹히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내가 구원받는게 없어요. 공동으로 공동의 성격을 본질을 부여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으니까.


공동을 하나로 보고 공동 전체를 통합해서 다 건져내시는 그분의 원칙이 개인마다 주께서 자기 백성 개인마다 다 집어넣어 준거에요. 마치 앙꼬 넣을 때 국화빵 앙꼬 넣을 때 동일한 앙꼬가 다 들어가는 것처럼.


나 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구원하셨기에 구원됐다는 사실을 들어오게 되게  되면 내가 이번에는 열심히 했다. 이번에는 게을렀어. 이번에는 내가 착해. 이번에는 나빴어 라는 그러한 선악적인 논리 자체는 개나 줘버려라. 참 개 줄 것도 없다. 우리가 개인데. 그런 것은 우리한테는 이제 잊어버려라. 그게 과거 의고적, 과거에 얽매인 생활이거든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공동구원보다 더 기쁜 소식 있어요? 개인구매 아니고 공동구매. 물론 구매하는건 아니지만. 공동으로 받는 것. 그동안 얼마나 우리는 나는 사적인 역량과 노력에 의해서 내 구원이 결정된다는 이 말도 안되는 선악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평생을 악마한테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 악마에 대해서 주일낮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도사견’. 물어 물어!! 물어 물어 물어!! 교회 보세요. 다 도사견들 당회장 도사견, 장로 도사견, 도사견들 쭉~~. 뒤에는 악마가 있지요.


도사견 일곱마리는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끗이 청소하고 나왔는데 귀신이 또 아 소제 잘 되었네 하고 또 찾아온거에요.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아도 갈 곳이 없는 귀신들이 좋다고 청소해놨다고 다 그 집에 들어오는 거에요. 달리 갈 데가 없어가지고.


그동안 정 들었다 이 말이지요. 정 들었지요. 우리 아담이 그동안 선악과 따먹어 놓고 얼마나 선악과 프레임이 우리가 얼마나 익숙해졌고 이게 몸에 길들여졌습니까? 나쁜 짓하면 지옥갈 거 같애. 착한 일하면 천당갈 거 같애. 이러한 프레임 이건 너무나 사적인 프레임이잖아요. 개인적인 프레임이잖아요.


주님께서 떨어져 나갈 때 그냥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닙니다.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지요. 상처를 입고. 그렇다면 이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상처가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도 주님이 떨어져 나간 상처를 그대로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창세기 32장에 나오지요. 창세기 32장. 얍복강가 나오지요. 이름이 누굽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은 복 받은 축복받은 불구자에요. 축복받은 불구자. 복을 받았는데 무능해. 내가 내 구원에 가장 무능하게 느낄 때에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순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향수 다 깼잖아요. 강도, 세리, 창기, 삭개오. 본인의 역량으로 본인의 과거에 긴 몸통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가 없음을 누가 알아요? 본인이.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그럴 때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되지요. 왜냐하면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적인 역량, 나의 윤리 도덕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이 축복받은 불구자가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야곱의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이었잖아요.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 이건 집단의 이름이에요. 공동구매가 가능해요 공동구매가 가능해. 동일한 원칙이 주어지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싸움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겁니다. 따라서 너는 너 상처받은 거 하지 말고 너 때문에 내가 상처받은 거 너 증거해라.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 갈 때에 사울이 예수님이 사울보고 하는 이야기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 나한테 핍박했다는 거에요. 핍박이 십자가만 핍박이 아니고 십자가의 원리가 계속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아까는 뭐 목사님 예수님 떨어져 나갔다고 했잖아요. 예. 떨어져 나갔지요. 그런데 떨어져 나갔는데 떨어져 나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상처를 스스로 유도해나가시는 겁니다.


자기가 상처받게 나오도록 유도했다 이 말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요한복음 13장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예수님 의도적으로 지금 상처, 자기 상처 받는 것, 떨어져 나감을 스스로 유도하고 있어요.


야곱 언약이 있기 때문에 야곱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얍복강 야곱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요. 그 야곱 언약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지요. 그 나다나엘 이야기 할 때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야곱을 야곱의 프레임에 야곱의 프레임, 그 언어의 틀, 틀에다가 예수님이 거기에다가 그것을 완성해내는 겁니다.


왜 완성해냈느냐? 예수님의 구원은 단독구원이지만 그 단독구원을 예수님의 개인적 구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줘버리면 이거는 예수님과 결별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십자가와 부활로 와버리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집단이 되는 거죠. 집단이 구원되는 거에요. ‘집단구원’.


새로운 보편성이에요. 예수님 특수한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보편성이 형성이 되는 겁니다. 구원의 원리는 내가 어떤 역량을 발휘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떨어져 나가시고 떨어져 나갔다는 그 자체로서 실질적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했다는 그것이 뭐냐? 주님의 구원이고 주님의 구원에 참여한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말 조금만 어렵게 해도 무슨 말인지 뭐.


로마서 5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입니다 3장. 3장 2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먼저 순서가 자기가 먼저 의로우시며 그 다음에 뭡니까? 끝났습니까? 아니지요.


의로우심이 자기를 믿는 자도 의로우신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의로우심을 우리가 또 믿어야 됩니까? 이런 질문이 또 필연적으로 나오지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게 또 아닌 것을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하여튼 인간은 입만 떼면 거짓말. 5장 21절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구원, 예수님의 구원이 되게 하심이라. 저희 안에서.


우리 구원은 없고 예수님의 구원 안에 들었다는 자체가 결과적으로 우리의 의고 우리의 구원되는데 그때 우리라 하는 것은 전에 있던 우리가 아닙니다. 그것과 단절되어 있으니까. 프레임이 달라요. 프레임이. 나를 위한 프레임은 이미 끝났어요. 그거는 물 건너갔고 그거는 잊어버리세요.


주님이 설치한 프레임 위에 우리가 그 작업에 가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합류되다 보니까 주님의 의가 우리의 되었고 주님의 구원이 우리 구원 된거에요. 나의 잘잘못, 행동, 착함, 의 그런 것 의미 없다니까. 사적인 나의 역량 그런 것 의미 없어요. 공동구매라니까 공동구매. 주께서 공동적으로 우리를 자기 백성 데려간다니까요.


저 사람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옆 사람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필요없어요. 내놓을 것은 주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지난 낮설교 하면서 낮설교 제일 마지막 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 예수 믿는다는 증거가 뭐냐? 정말 성도됐다는 증거가 뭐냐?


그 증거는 화투패라고 했지요. 화투패에서 이렇게 화투패 쥐고 있으면 새로운 거 들춰가지고 다 쥐고 있는게 아니고 숫자가 들어왔으니까 뭐 나갈게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뭐 하나 더 이상 필요없는 거 빼내잖아요.


그거 빼낼 때 그 빼낸게 뭐냐 하면 옛날 내가 나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잘난 나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을 빼버리는 거에요. 전에는 뭐냐 하면 내가 축복받았으니까 부자되야 돼 라고 딱 있었는데 예수님의 성령이 오니까 그까짓 것 부자가 뭔데 하고 부자 딱 내놓는 거에요. 필요 없다고.


부자가 나를 망치지 부자가 나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좀 그런 사람 있으면 좋겠다만은. 돈이 나를 망치게 한다고 이까짓 돈이 이러면서 내놓는다. 그걸 배설물로 똥, 오줌으로 내놓는거에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의가 뭔데 나의 의를 또 집어던져놔요. 이딴거 필요 없다는 거에요. 공동구매기 때문에. 공동의 원리로 구원받기 때문에. 사적으로 열심히 한 것, 금식기도 한 것, 선교단체해가지고 아프가니스탄 간 것 다 내려놔요. 뭐 말레이시아 가서 뭐 좀 해보려고 한 것 그것도 다 내놓고.


참 다음 시간부터 장소를 저쪽으로 옮긴답니다. 다음 시간 아닙니까? 언제부터? 아 팔릴 때까지. 눈을 떴는데 개입이니까 눈을 떴는데 또 다시 팔목하고 팔 다리 다 잘라진 채 눈을 떴다 이 말이에요. 그 자체가 주님의 힘으로서 작품이고 그 자체가 주님의 진리에요.


주님의 진리라는 말은 더 모자람이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더 이상 선행으로 보탤 필요가 없는 잘렸다라는 자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져 나갔으니까. 언제부터? 나의 프레임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니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좀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런게 나와요.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굴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직 모세는 일 시작도 안했는데 초반부터 막 죽이려고 해요. 모세가 어리둥절하지요.


일 시켜놓고 일하러 나간 사람 보고 죽일려고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누가 적이지? 애굽이 적이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왜 애굽에 가가지고 말씀 증거하는 왜 나를 적으로 삼아서 나를 공격하느냐? 어리둥절한 겁니다.


모세는 그 이유를 몰랐어요. 왜 그렇게 하는지 몰라요.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세 자.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움’이에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새로움 줬다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예상되는 새로움은 기존의 내가 알고 있는데서 뭔가 추구할 수 있는 새로움에 지나지 않거든요.


진짜 새로움이 아니고 생뚱맞는 새로움이 아니라 새로움이니까 괜찮은 뭐 이정도 자꾸 구상하게 되는 새로움이잖아요. 만약에 내가 구상한 예상한 새로움이라면 이건 뭐냐 하면 절단이라는 원칙은 날라가버리고 그냥 장어처럼 몸통의 연장이 되어버려요. 몸통의 연장.


예를 들어서 불길한 예감은 적중 안되는 법이 없어 이런 것 혼자말로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이 돼. 뭐 이런거 있잖아요. 그러면 적중이 됐다는 말은 결국은 내가 예감한 것과 결과가 같이 몸통으로 연장이 되었다 이렇게 되요.


그러면 무슨 증거가 없느냐 하면은 절단 낸 증거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것은 모세가 사전에 하나님 앞에 힌트하나 낌새하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새로움을 모세에게 집어넣으려고 해요. 모세가 안 새로움은 뭐냐?


십보라라는 자기 부인이 모세 부인이 남편이 죽었는데 마사지 할 생각은 아니고 갑자기 뭘 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할례 포피를 잘라서 피를 잘라서 그 피 묻은 포피를 모세의 발에 던지니까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이거 뭐 십보라가 허준입니까? 이거 뭐에요? 침 놓던지 뭐 이런거 처방전 놓고 식후에 하루 세번 먹고 이런게 있어야 되는데 그런게 없다니까. 식후에 세번 먹고 침 놓는 것은 뭡니까? 이거 과거에 내가 알고있는 거에요. 인간세계에서. 인간에서 통하는 모든 과학은 누굴 위함입니까? 인간 본인을 위해서 하잖아요.


모세가 죽일려고 하니까 죽일려고 할 때 우리가 모세 입장이라면 저를 왜 죽입니까? 하는 것도 이게 뭐냐? 과거에 모세가 알고 있는 프레임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이 설마 나를 죽일까? 하나님이 일하러 보람찬~~하면서 열심히 가고 있는데 그걸 뒤통수 날 죽일 수 있겠어요? 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것도 과거의 내가 형성된 나의 프레임의 연장 속에 있던 단어 중의 하나, 개념 하나에요. 주께서는 그래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요 이거는 주님의 절단된 새로움이 안 나와요. 새로움이 나오려면 주님의 절단이 모세의 절단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틈을 만들어요. 존재의 ‘틈’.


연속되는게 아니고 매순간 주님께서 은혜 주셔야 살 수 있다는 그 틈.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주님이 의도적으로 떨어져 나가신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의가 계속해서 성령의 의가 그 틈 사이에서 계속 스며나와야죠. 어떤 증기가 나오듯이.


땅이 갈라지고 거기 지진에서 무슨 지진파 일어나가지고 거기서 갈라진 땅속에서 용암이 솟듯이 몰랐던 것이 새롭게 나와요. 내가 몰랐던 것이 나왔다는 말은 곧 결국 나는 뭐다? 나는 유능하다 무능하다? 나는 나 천국 가는데 완전히 무능한 자로 몰고 가시는구나. 무능한 자로 만들어 내시는 작업을 반복시키면서 간다는 거에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것은 감사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럼 내가 죽은 자라면 내가 내놓을게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아? 그게 공동으로. 네가 안 내놓아도 공동으로 구원받아 공동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의 자기의 떨어져나감, 또는 다른 말로 자기의 희생으로써 그렇게 하신거에요.


모세에게 주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피란 말이죠 피. 할례 언약이거든요. ‘피’. 피를 발생시키는 이 피가, 피 묻은 피부조직 포피가 이게 모세를 죽은 자에서 살았다면 지금 이걸 경험하면서 알게 된 새로움을 알게 된 모세는 무엇을 품고 애굽으로 가야됩니까?


이 피. 할례 언약. 그래서 유월절날 할례 받고 그 다음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이스라엘이 형성, 만들어지는 겁니다. 공동구매의 원칙입니다. 피죠. 내 피가 아니죠. RH A형 해갖고 뭐 하려고? 누구 피? 예수님 피. 그럼 예수님의 혈액형은 뭐냐? 그 혈액형 묻는 것은 옛날 프레임이에요.


10분 쉽시다.

 홍민희 (IP:59.♡.122.247)19-12-02 23:53 
강남-요한복음 총정리(6)-요한복음 15장 (피하지말라)191119b-이근호 목사



모세가 애굽에 내려갈 때 애굽에 가면서 애굽에서 그 아까 우리가 모세 이야기 창세기 4장에 했지요? 아니 출애굽기 4장에 했지요? 그렇죠? 4장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 4장에 초반에 보게 되면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적을 이런 기적을 할 것이다 했지요.


그게 주께서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기적을 감춰버려요. 감춰버리죠. 기적이라고 하면 나는 멀쩡하고 저쪽에서 내 능력이 마징가제트 하면서 내 능력으로 무너진다. 나는 멀쩡하고 했는데 그게 기적인데 진짜 기적은 따로 숨겨놨어요. 너를 쪼갤 것이다.


네 안에다가 나의 새로움으로 집어넣게 되면 모세 네가 그 이스라엘을 만드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모세를 가지고 하나님이 모세 안에서 기적을 베풀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는 그것이 장차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원칙을 미리 보여준거에요.


우리 안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14장처럼 우리 안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내가 스스로 나 구원받으려고 온갖 고상해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그런 발악같은 짓들을 다 하게 돼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님의 고통이 우리한테 와요. 주님의 고통이. 주님께서는 일부러 악마를 더 쓰시고 가룟 유다 통해서 일부러 세상을 통해서 자기 고통을 만들어요. 만드십니다.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고난을 유발한다고 했지요. 같은 뜻이에요.


자기 고통을 스스로 이렇게 만들어버립니다. 만들어버린다는 말은 그 고통, 만들어진 그 고통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나는 내 자리다가 이게 아니고 나는 주님의 머무는 주님의 자리가 되어버려요. 주님 자리,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성령의 임함입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빌려줄 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뭐가 계속 살아있느냐 하면 주님의 고통이 계속 살아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고통이 오니까 우리는 자꾸 피하고 싶지요. 그래서 피하지 말라는 거에요. 주제가. 오늘 제목도 “피하지 말라”. 주님께서 너를 통해서 이야기할 때 일할 때 네가 그걸 피하지 말라.


왜냐하면 네 구원을 지키는게 아니라 내 구원을 네가 지켜야 될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네가 진리를 지켜야 될 입장이기 때문에 피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렇게 고통이 오게 되면 우리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살려주세요 하지요 그러면 고통이 뭐냐? 고통은 곧 그게 저주에요. 그게 심판이고 그게 지옥입니다. 고통이 온다는 말은.


아까 이목사님이 이야기했지만 로마서 8장에 예수님이 오실 때에 뭐로 왔습니까? 그냥 육신으로 오신게 아니고 앞에 뭐가 붙지요? 뭐가 붙습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모습. 주님께서 일부러 인간들의 프레임, 언어적 프레임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프레임에서 죄가 먼저라는 것을 주님을 통해서 보여주셨고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그 죄라는 것을 거기에다가 우리에다가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고통이 오고 이렇게 아픔이 올 때는 살려주세요가 나오겠지요. 살려주세요가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성도가 내뱉은 성도의 고백이에요. 이거 두자로 하면 이게 뭐가 됩니까? ‘기도’가 되겠지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물론 살려달라고 해가지고 평온하게 살게 해달라 이거는 아니고요. 그렇게 되면 그거는 신앙이 아니고요. 살려주세요 하는데 살려주세요 하면서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고통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이 저주 안에 그리고 심판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천국은 바로 이 안에 들어있어요. 천국이.


살려주세요 하면서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면 살려주세요 하면서 스스로 내가 살고자하는 모든 의도는 이미 바닥났습니다. 이거는 소용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났어요. 그렇다면 뭐만 쳐다보겠어요? 살려주시는 분만 쳐다보겠지요.


쉽게 하겠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천사하고 씨름할 때에 야곱이 마지막 부탁한게 뭐냐? 살려주세요 에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할 때 야곱은 뭐냐 하면은 나를 살려주시는 분은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야곱이 너무 이기주의 아닙니까. 하나님 이용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데 야곱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나를 이렇게 허무하게 만들고 나를 무능하게 만드신 분이 당신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게 전제가 되어 있다고요.


멀쩡하게 살려고 누구한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내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이건  내 프레임이고 나의 영역이고 나의 의미의 영역이에요. 그 의미의 영역은 항상 가치를 유발해요.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그 가치를 일순간에 박살내신 분이 누구다?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당신이니까 내가 이제부터는 의지할 분은 그동안 나를 의지했는데 이제는 의지할 분이 바뀌었다 누구로? 살려주세요 뽀빠이.


완전히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라고 바뀐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를 하면서 자기는 아까 불구자가 되었지요? 그러면 야곱이 불구자 되었다는 말은 곧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이 불구자 됐다는 모든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구원받은 백성들은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상처로 인하여 그들은 전부다 개인적으로 불구자가 되어야 되지요.


불구자라는 뜻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스스로 무능한 자. 자기의 재주나 자기나 경건이나 그걸 재주 피울 그것으로 그걸 자기 구원에 적용시킬 그런 모든 것은 다 관계가 다 절단났고 끊어졌고 절단, 끊어진 거에요.


그 무능자가 느끼는 그 자유, 그리고 웃음. 살려주세요~이히히히. 살려주세요는 굉장히 심각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 이 살려주세요~가 나온다는 자체가 야곱이 옛날에 했던 고백이 나한테 재생되어서 나오는 거에요. 재생되어서.


플레이 누르면 녹음기에서 살려주세요~~야곱의 고백이 나오듯이 나는 등치 큰 야곱이 되어가지고 입만 벌리면 무조건 살려주세요~히히히. 히히히. ㅋㅋㅋ. 히히히. 너무 기분좋아가지고. 내 구원받으려고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그 의미가 내 가치를 찢고 주님의 가치와 그 고귀함을 키워주세요. 그게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저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게 하여주옵소서. 이게 바로 야곱이 느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천사님 제게 축복해주시고 가세요라는 말은 뭐냐? 천사님 저 주님과 저와 관계를 잇게 하고 가세요. 관계, 통로.


주님과 나와 관계를 이어지게 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천사여 주님을 위해서 사명을 부여받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요한복음 21장 아닙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온 성령 받으라하고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사명을 주노니.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와 이어져 있다는 관계성을 주노니. 관계를 주노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를 축복하노니.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받은 복은 상급은 뭐냐? 내가 복음 전한다는 이 자체가 복음전해서 뭘 얻는게 아니고 복음 자체가 이게 생명의 면류관이다. 이 관계가. 그게 전에는 뭘 해서 얻는데 이게 옛날 나의 프레임이고 새로운 프레임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프레임을 한번 볼까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노라. 내가 삼층 셋째하늘을 올라갔는데” 셋째하늘 이야기 하니까 요새 태극기 흔드는 그 목사님 같애요. 그 사람 셋째하늘 올라가니까 문재인 박살내라는 계시를 받았데요. 완전히 옛날 프레임입니다. 세상 프레임. 주께 떨어져 나가고 남아있는 이 세상 프레임.


“이런 사람을 내가 아노니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거니와 그가 나를 끌고 나가서 그 다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죠. 사람에게 언어라는 것을 통해서 이야기 정확하게 전달되거나 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거에요.


그러면 기존의 언어 프레임이 아니고 하늘나라만 통하는 언어 프레임 속에 자기가 놓여 있으니까 이거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통해서 말이 나를 말을 시키는 거에요.


나는 그냥 통 파이프에 불구하고. 말씀이 성경말씀이 나의 절단난 삶을 통해서 틈을 벌어진 틈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가지고 말을 하는 거에요. 나의 삶을 통해서. 뭐라고? 나는 무능하다고. 나는 무능하다. 나의 믿음도 무능하고 나의 사랑도 소망도 다 허상이고 망상이다라는 이야기에요. 나의 신앙도 가짜다라는 이야기에요.


그러한 운명을 너는 피하지 말라. 그렇게 네가 망가지게 된 것을 피하지 말라. 이게 바로 요한복음 14장에 나온 성령을 주신 취지입니다. 자, 왜 피하지 말라 했을까?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16장에 보면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진리가 오시면 예수님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뒤에 다른 보혜사 오게 되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리니 그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뭐로 말하지 않고? 자의로 말하지 않고 누구만 이야기합니까?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니 오직 장래 일을 말하시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말하리라”. 내 것을 가지고. 성령은 성령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만 자꾸 내세웁니까? 성령 자신은 빠지고 예수님의 것을 지금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공동구매 원칙으로 그냥 이렇게 나눠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 집에 예수님이 살도록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내 프레임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사랑, 소망, 믿음 그것이 주님의 믿음, 주님의 소망과 주님의 사랑이 이제는 우리 집에 살게 되는 겁니다. 같이 사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잖아요. 그때부터 나의 프레임과 주님의 프레임이 육신이 있는 한 평생 이제는 싸우는 겁니다. 싸우는데 이걸 싸운다는 말도 되고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주님이 우리를 물고 뜯는다. 거머리처럼. 딱 물고 뜯어요.


목덜미를 드라큐라처럼 목덜미를 물던지 하여튼 그냥 싸우는게 아니고 이렇게 붙는게 아니고 권투 이렇게 붙는게 아니고 레슬링을 한다 레슬링을. 우리 인생에 어떤 상황이든 다 개입해가지고 우리를 쥐어뜯는 거에요. 물고 뜯는 거에요. 네 식으로 살지 말라고. 네가 예상한대로 살지 말라고.


그래서 주님은 무엇을 공격하느냐? 오시면서 나의 목표, 나의 기대, 나의 소망을 다 물어 뜯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표, 기대, 예상 어떤 그런게 있어버리면 여기에 도사견 7마리 귀신이 다 달려들거든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죄 안 짓는 방법은 10분 후의 감정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죄 짓는 방법은 뭡니까? 10분 후의 감정을 미리 예상하는게 죄 짓는 거지요. 아 어쩌나~ 갑자기 초조해지고 안되면 어떡하지? 안되면 어떡해. 안되면 나 못살거 같애. 이런 것.


우리 애 성적 나왔는데 가채점은 괜찮은데 진짜 채점하면 어떨까? 벌벌 떠는 것. 본인이 시체가 아니라서 갑자기 시체가 안되니까 꼼장어가 살아났어요. 꼼장어가 살아나니까 과거의 자기가 노력한게 다 살아나버렸어요. 자기의 프레임, 자기 영역이 다 살아나버렸어요.


완전히 미래까지 다 갑자기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 상상해서 다 갖다 붙입니다. 이 덩치 이 갈치 제주도 은갈치 다 살려달라 이걸. 성령께서 칼 들고 예수님의 하신 일을 너한테 집어넣는다고 했지.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났어 인간아. 그런데 왜 안 따라오고 있어.


다 토막 다 내버립니다. 예수님 전기톱 토막살인사건. 다 토막내버려요. 죽은 시체를 살려 줬더니 이게 또 잘난 척 내 보따리 다 내놓으라는 거에요. 그 잘려진 그 자체가 뭐냐? 그게 진실이고 그게 진리에요. 잘려진 자체가. 그게 뭐냐? 집단적인 보편적인 이스라엘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주님의 단절, 절단 또는 단절에 의해 생긴 그 보편성과 대비가 되는 그 사상의 구조가 뭐냐? 민주주의에요. 민주주의는 뭐냐?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평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게 민주주의입니다.


국가는 바로 나의 자유를 보장하고 나의 평등을 보장하라. 홍콩시위가 그거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개인적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집단적 자유. 개인의 평등을 허락을 하지 않고 집단평등을 허락하지요. ‘집단평등’.


여러분들 피곤한데 찾지 마세요. 제가 그냥 대표로 찾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피’입니다. 새로운 거에요 이거는. 하나님의 프레임에서의 구원의 입구는 뭐냐?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요. 피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세상을 자진해서 떠나시면서 떼내시면서 남겨진 물리적인 실질적인 증거가 ‘피’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접촉점. ‘피’입니다. 유월절날 피를 바름으로써 피라는 물질을 바름으로써 죽음의 천사가 떠났다는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신기한 거에요. 그 피가 뭐길래 홍해도 갈라졌습니다. 그 피가 뭐길래 요단강도 갈라지고 그 피가 뭐길래 피 묻은 언약을 가지고 이스라엘 중앙에 서서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도니까 여리고 성이 다 무너졌습니다.


이 말은 세상은 어느 앞에 무너진다? 그 피 앞에 다 무너져요. 무너질 것 진작 무너지도록 우리에게 시체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피로 이미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에 있는 예수님이 하신 일, 그 피를 통해서 우리로 미리 시체 만들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 시체 만든 우리가 바로 이게 주님의 하신 일의 증거. 그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피 때문에 살아있는 거죠. 피의 원칙 때문에 살아있는 거에요.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이게 짐승적인가를 악마적이다 하는 것을 인식해야 돼요. 그 민주주의 쳐다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귀신이죠. 꿈꾸지 마세요. 다 귀신인데 뭘 귀신 꿈꿔. 꿈꾸긴 뭘 꿈꿔. 보이는게 다 귀신들인데요. 다 개인주의에요. 사적이에요.


요한복음 15장 봅시다. 아까 제가 물고 뜯는 것까지 이야기했지요. 물고 뜯는다는 말은 어느 정도냐하면 이래요. 여러분 에스컬레이터를 이렇게 탈 때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있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있잖아요. 그런데 휴대폰 본다고 정신없이 가다가는 내려가는데 올라가는게 가게 되면 삐 소리 나잖아요. 그렇죠?


그처럼 성령이 있는 사람은 누가 관리하느냐 하면은 성령이 관리하기 때문에 삑 하고 소리가 나요. 우리 마음속에 또 네 자랑하고 네 옛날 프레임 원리를 너한테 지금 네가 시동하고 있구나. 선악원리를 너한테 또 적용시키네. 그래서 네가 원하는게 뭐야? 네가 꼼장어되는 거야? 뭐야? 나 이만큼 잘나고 멋있게 인생 살았습니다 그거 자랑하는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오셨다하는 것은 성령은 뭐냐 하면 소유용이 아니에요. 성령을 가질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성령에 의해서 잘려진 그것은 있지만 성령을 소유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주도권이 성령한테 있으니까.


그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가 걱정이 되어가지고 아 나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시간이 계속해서 생각하는 거에요. 꼼장어 생각하는 거에요. 네가 원치 않은 길로 간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이 말은 주도권이 네가 예상하고 네가 기대하고 네가 목표로 하는 모든 그 기대와 목표와 예상은 일체 그걸 피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삐~하고 그쪽은 안돼. 그쪽은 지옥 가는 길이야 하고 삐~하는 거에요. 그러면 무엇이 방해되면 안돼요? 옛날 나의 프레임 세상적인 프레임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15장 20절 요한복음. 이 말씀 들으면 이해돼요.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한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한다는 것은 남보고 들으라는게 아니고 내가 너보고 들으란 이야기에요. 너보고. 제자들 너보고 들으란 이야기에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한다. 걱정들을 마세요. 걱정을 할 쨉도 안되는게 왜 걱정을 하느냐 말이죠. 주인이 어련히 있는데 주인이 있는데 왜 종이 걱정하고 있느냐 말이죠. 종이. 그러면 걱정을 왜하느냐? 종들이 핍박을 받기 때문에 핍박을.


그런데 핍박받는 이유도 주인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악마가 누구보고 공격하면서 핍박합니까? 나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주님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악마로부터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는 거에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공격받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를 썼지요. with. 나와 주님과 함께 있는게 아니라고 했지요. 내가 with 그 자체에요. 함께 자체에요.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게 아니고 나 자체가 with 함께 나 자체가. 중간에 누가 있고? Lord 주님이 계시고. 다른 성도는 다른 with가 있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할 필요 없어요. 주님이 이미 with 함께 라고 규정하면서 나를 그냥 붙여줘가지고 예수님의 취지만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실 뿐이란 말입니다. 이게 뭐냐?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는다 이 말은 제자들 좀 귀담아 들으란 말이죠.


왜 네가 네 인생 걱정하느냐 말이죠. 저 사도 요한은 오래 사는데 나는 어떻게 될까요? 네가 왜 사도 요한 걱정하느냐? 사도 요한은 너 죽을 때까지 살아있더라도 그거는 네가 관여하지 말란 말이죠. 그 관여하지 말라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이야기합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참 포도나무 들으니까 우리나라에 있는 포도나무 교회가 왜 그리 많은지. 교단 자체가 포도나무 교단인지. 포도나무. 신천지는 또 말하기를 포도주에서 난걸 다시는 마시지 말라 그것 가지고 기존 교회 해석해봐라 이렇게 도전하고요.


전부 다 구원파들이거든요 구원파. 주님 희생 이용해가지고 저 구원받겠다고 나선 사람들 박옥수 구원파 있잖아요. 자기로부터 못 떨어져 나가요. 내가 예상한 천국에 가야된다는 거에요. 우기는 거에요. 여호와증인 천국은 뭐냐? 골프장 만들어놨어요. 그림 보세요. 삽화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와보라. 그림에. 전부 다 뭐냐 하면 이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끝까지 사수하고 지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이익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은 계속해서 뭐냐 하면 너는 쫄따구야 종이야 주인은 나야. 세상이 미워할 때 너보고 미워하는게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보고 나를 겨냥해서 공격하는 거야.


끊임없이 뭐냐 하면 네 자리가 아니고 누구 자리다? 너 사는 인생 자리는 주님의 자리가 되는 거에요. 주님의 자리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 할 때 계속 주어가 누구입니까? “나”.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이거는 처음부터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매 우리가운데 거한다. 한번 볼까요? 말씀이 뭐가 된다? 육신이. 그 다음에 어디 가운데? 우리 가운데죠. 주께서 없는 우리를 예수님을 육신을 통해서 없는 우리를 만들어내서 그 만들어진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거에요. 이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그 핵심이 요한복음 끝까지 갑니다. 그 줄거리가.


없는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없는 우리라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에 성령이 와야 처소가 마련돼요. 비로소 아버지가 내안에 너희가 아버지 안에 이게 우리라는 것이 요한복음 17장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라는 것이 주님이 와서 만들어지지 기존의 신천지 같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드는게 아닙니다. 자기 프레임이 있고 그거 아니에요.


기존 프레임에서 떠나고, 떠나고 난 뒤에 기존 프레임을 야곱처럼 붙들고 싸워서 우리로 하여금 살려주세요라고 만들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박살낸 그 박살낸 원리 원칙이 내 몸을 통해서 살아나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야곱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되는 거에요. 야곱에서 개인적으로 있는 야곱이 예수 안에 있는 야곱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같이 야곱으로 바뀌는 겁니다. 사울은 뭐로 바뀌고? 바울로 바뀌고. 사울이 이름 지으려고 어디 점쟁이 찾아갔습니까? 누가 지어준거에요? 예수님이 지어준거에요. 사울에서 바울로.


그 바울이라는 것은 바로 주님이 그 안에 있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름 뭘로 지을까요? 천주교처럼 마리아라고 할까요? 아니요. 우리 이름은 없어집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우리를 실질적으로 예수 이름의 자격으로 남자 여자 40대 50대 이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안양이나 대구나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꼬라지가 왜 이 꼬라지냐. 멀쩡한 꼬라지가 없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바로 주님이 떠날 때도 멀쩡하게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걸 아까 뭐라고 했느냐 바로 주님 주신 상처. ‘축복받은 불구자’. 축복받은 불구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우리가 내세울 것은 ‘멀쩡한 나’가 아니라 내 안에 피 있다. 할례 언약의 피 있다. 유월절 피 있다. 그 피를 내세우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살아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니까 이렇게 판단하고 분별할 때에 교회에서 그 사람에게 피 이야기 나와야 돼요. 피 이야기가.


피 이야기 나오는데 피 이야기 함으로써 “내가 성도인데” 이게 나오면 안돼요. 그냥 피 이야기만 나와야 돼요. 뒤에 자기가 막 딸려나오면 안돼요. 피 때문에 작살난걸 이야기 나와야 된다고요. 피 소유해서 내가 살았다 하면 안되고 우리는 피를 소유할 수가 없어요. 16장 봅시다. 보혜사 이야기죠.


자, 21절 보게 되면 19절 봅시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만들어낸 단절입니다. “본다”. 본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이 세상에 있어요.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른 세계’. 다른 세계. 다른 세계 있지만 이 세상이 있는 제자들은 다른 세상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어떻게 예상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을 놔두고 떠났기 때문에. 그리고 오지 못한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오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에요.


아까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바울이 인간의 말로 지상의 인간의 언어 프레임으로 설명이 된다 안된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언어 프레임으로 언어 개념만 설명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꾸 꼼장어처럼 또 길어져요. 상상의 상상을 더해가지고 온갖 괜찮은 용어, 멋있다 화려하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이게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가 세속적인 언어를 쓰더라도 헬라어 히브리어 쓰더라도 이거는 근원적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해하지 말라고 준 글자에요. 이해하지 말라고. 이거 보고 이해 안된다고 고백하라 이 말이죠. 그리고 이거보고 예상해도 네 예상은 다 헛방이란 것을 다 인식하라 이 말이죠.


그럼 성경 해석은 뭐로 해석하느냐 반드시 십자가로 모이는 식으로 하는 거에요. 십자가 모든 성경해석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야 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식으로 하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떼어냈다. 또는 주님께서 알아서 떠나셨다. 난 너하고 안 논다고 떠나버렸다 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그분이 다시 오지 않는 한, 조금 있으면 못 보고 조금 있으면 다시 오시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한 천국은 못갑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주님께서 그때가 언제입니까 물으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기다려봐. 잠시 기다리면 성령이 올거야. 기다려봐."


제자들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기다려보라니까." 주님 구름타고 올라가니까 "아 가고싶어라." 천사가 와서 "기다려봐! 기다려봐." 약속이라는 그 단어조차도 인간의 약속은 그냥 초조하지만 주님 약속은 인간의 초조함과 관계없이 순서적으로 주님이 계획잡은대로 오게 되어있어요.


그렇게 왔던게 뭡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아닙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왔잖아요. 오시고 난 뒤에 이 사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꼭 바람같이 됐어요. 바람. 바람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그걸 액체라고 했는데 어느 환경, 어느 처지에 있던지간에 꼭 투명한 사람 되요. 투명하게. 못할게 없어요. 어느 위치에 풍랑이 일어도 핍박이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도 좋다고 뭐 좋은건 아니지만 좋다고 주님 바라보고 기뻐하고. 성령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르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의 자궁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자궁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듭남이 있어야 되겠지요. 요한복음 16장 2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보세요. 근심이 먼저 있고 기쁨이 되지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시는 거에요. 우리의 할 일은 죄 짓는 거에요. 죄 짓는 겁니다. 죄가 죄로 알게 되는 이 기쁨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에요.


사람이 왜 자꾸 주저하느냐? 자기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뭔가 행동할 때 주저주저하게 되요. 이러다가 망하는게 아닌가? 아 죄인이 망해야지 그럼 뭐 누가 망해야 되요? 죄인이 망해야지 그럼. 죄인인 주제에 안 망할려고 생각했던가요?


죄를 안다는 것은 어떤 사태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결혼하시는 분에 대해서 어떤 결혼하시는 분에 대해서 제가 그런 식으로 했거든요. 그 사람의 죄를 온전히 압니까? 라는 질문을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자 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몸이 아프다든지 어떻게 고질병이 걸린다든지 어떤 것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남자입니까? 라고 묻는 거에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남편 같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결혼한건 무를 수 없고 할 수 없고. 참 내가 참 불가능한 일을 하는데 지금. 본인이 죄인인걸 아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면서 용납이 되요.


네가 뭐 암에 걸렸든 뭐 엄마가 와서 신장 떼어달라고 해도 공효진은 지금 고민하고 있던데 그런 뜻이 아닌데 갑자기 연속극 이야기가 왜 나와. 동백이 이야기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세상에 하루치만 부여되는 이 오늘 마지막 날이 그렇게 기쁨으로 끝맺을 수 있다니 이것 자체가 기뻐요. 환희란 말이죠. ‘환희’.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지요. 주님을 자궁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주님이 자기 자궁 안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걸 그렇게 이야기해도 맞고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새로운 우리 자리에서 새로운 우리 자아를 날마다 매일같이 절단시키면서 우리를 새로운 자아로 기쁨으로 만들어내는데 그 모습이 우리는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튀어나오더라 이 말이죠.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그 기쁨은 이 이야기들을 때 제자들이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오순절날 성령 받고 난 뒤에 알아요. 야 나는 시체다. 나는 시체다 또는 나는 귀신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했지요. 제가 대구강의에 했지요. 바람보고 화살 쏴 보세요. 바람이 어어어~~이렇게 합니까? 이미 죄인인데 나의 프레임 안에서 내가 기대할 필요가 없게 된 거에요.


그 사람 이름이 뭐냐? 삭개오에요. 삭개오는 구원이 이미 그 집에 임한 이상은 집에 내 잔고 얼마 있고 내 재산 얼마 있는가 그거는 아무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안됐어요. 아 4배나 줘버려 4배나 줘버려. 그까짓 것 뭔데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요.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게 삭개오거든요.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 집이 아니고 누구 집이다? 내가 네 집을 내 집으로 내가 인수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살거야 이런 뜻이거든요. 네 집이 없어 이제 내 집이야. 주님 집인데 왜 볼품이 없습니까? 나는 너보다 더 심해 육신의 모양보다 더 망가졌어. 너도 호화주택이야. 걱정하지마.


너 밥먹고 사는 것도 죄인인 주제에 하루 세 끼 먹고 있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 북한 보세요. 전부다 빼빼. 평양 고위층 빼놓고 다 야위어있잖아요. 어버이 수령님~ 이러고 있다고요. 중국 보세요. 홍콩도 마찬가지고. 그들 왜 그렇게 데모하는 거에요? 아까 했지요. 개인적인 평등과 자유를 보장해라.


다시 말해서 나를 나 되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와 이상과 기대를 국가가 훼손하지 말라 이 말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훼손당했어요. 개 취급당한 거에요. 그런데 그게 기뻐요. 왜? 옛날 프레임을 떠났으니까. 주께서 떠나게 했으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구원받지 내가 사적인 나의 열심과 충성으로 개인적인 구원은 이미 그런 것은 악마가 그렇게 귀신들이 그렇게 가르친 거거든요. 24절에 보면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하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주님의 구원이 가리지 않도록 주님의 구원을 살려주세요. 주님의 고통을 부각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상처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함께 계신 예수님이 예수님 되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할 때 그거는 바로 지금까지 네가 기도한 차원과 다른 차원일 것이다.


뭐든지 구한다 해가지고 사도들이 돈 구했습니까? 출세 구했습니까? 어디 성전 구했습니까? 뭐 대통령 국가원수 되게 해달라고 베드로보고 로마 황제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사도들이. 안했지요. 예수님이 주이심을 드러내도록 기도했잖아요.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게 해 달라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작살나고 내가 절단되면 그런 기도가 나옵니다 절로. 그 다음에 33절하고 마치겠습니다. 33절 16장.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뭐겠습니까? 평안을 누리죠.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제가 주일날 이야기했어요.


고요함이에요 ‘고요함’. 고요함. "뭐 무슨 일 있어?" 주께서. "종아." "예 주인님." "뭐 네 집에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집 두 채 불났고 애 성적 떨어지고 딸 애 백혈병 걸리고 그 정도. 그 정도 밖에 안됩니다." "뭐 고요하네. 평안해라." 그냥 가버려요. "무슨 일 있어?"


죄인 주제에 그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감사하고 죄인 주제에. 내일은 없어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내일 되면 주께서 뜻이 있으면 내일 또 새롭게 만들어 주실거에요. 새로운 사람으로서. 내 프레임이 아니라 주님의 틀에 맞춘 새로운게 올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님 그 말이 맞는것 같은데 사는 재미가 없잖아요. 사는 재미. ‘사는 재미’. 마지막은 이겁니다. 사는 재미를 누가 주느냐 하면은 악마가 줘요. 그러니까 악마가 줄 때 받으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악마하고 주님하고 싸우는 싸움터가 되야 되기 때문에.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안 받는다 해놓고 아이고 받을걸 이러지 마시고 사는 재미. 공부 잘하고 수입 늘어나고 남편, 아내 잘 해주고 뭐든지 건강하고 올 때 감사함으로 받으세요. 누가 주는지 묻지 마시고 악마는 항상 주님께서 악마를 우리 집에 항상 보내요. 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승리함을 증거하는 집으로 만들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악마가 오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주께서 뜻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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