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공리의 구조 1912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1. 7. 07:10
2019-12-17 23:51:50조회 : 314         
공리의 구조 191217 요한복음 20: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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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122.247)20-01-07 00:30 
강남-요한복음 총정리(8)-요한복음 20장 (공리의 구조)191217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정리하는데도 정리하면서도 이제 마지막 정리, 20장 21장 오늘 마감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1장을 보면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드디어 차분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1장부터 19장까지 요란스럽게 나가다가 이제 모든 것이 조용하게 마치 무슨 일이 있었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끝나버리는 느낌이 듭니다. 요란을 떨었는데 뭐 별일 없었다 하는 식으로 마무리 지어지는데요.


이 요한복음 보면서 사람들은 뭘 궁금해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그 뒷이야기는 없느냐? 마치 소설책 보게 되면 드라마 끝나고 난 뒤에 또 그 뒤에 주인공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식으로 궁금해 하는 겁니다. 동백이하고 그 둘이 결혼했는데 그 뒤에는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치 쇠퇴기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는데 그래서 요한복음이 본격화됐다는 생각은 못하고 흐지부지가 되어버리죠. 본격화. 예수님의 이야기가 본격화가 아니고 흐지부지 되는 겁니다. 왜 성경에서 이렇게 예수님처럼 요란을 떨지 못하고 제자들 요한복음 뒷부분은 그냥 고요함으로 소멸하는 점점 점점 점점 되는 것처럼 희미하게 되어 버리는가.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모든 것을 주님께서 모든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은밀성 때문에 ‘은밀성’. 은밀성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내막을 아는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야 된다는 말은 인간의 육으로써는 또다시 설쳐봐야 육은 소용없었다가 이미 확인됐어요. 예수님께서 아무리 기적을 베풀고 오병이어 해봤자 인간의 육의 한계는 그냥 드러나버린 거에요.


그렇다면 십자가 이후에 나타난 20장 이야기 성령 이야기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는 일 안한다. 다른 색깔로 그려볼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는 일 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일 안해요. 그러면 누구하고 일하느냐 하면은 성도하고 일하신다. 인간하고 일 하지 않고 성도하고 일하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성도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도 되려면 일단 인간을 배제해야 돼요.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또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없는 성도를 새로 만들고 그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 그게 바로 은밀하게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기존의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소용없어요. 인간하고는 일 안하니까. 여기 있습니다 한다고 해서 일 안 해요. 그럼 성도하고 일하시면 그럼 인간들 보기에 성도하고 일 할 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파악이 가능합니까? 물으면 인간이 은밀하게 하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아무리 성령께서 일하시고 하나님이 성도하고 일을 해도 성도는 그걸 눈치 못 채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은밀이 은밀 되니까. 그래야 성령이 하시는 일이니까.


그러면 인간이 하는 일을 볼 때에 요한복음 20장 21장에 하는 일은 뭐냐? 한마디로 뭐냐 하면은 이게 터무니없는, 터무니없는 일이 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부활이에요. 20장 21장이 말하는 부활이에요. 그리고 주께서 나타나시고 세번씩이나 나타나시고. 그 부활을 나타나셔서 주님께서 인간을 성도 만들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아오는데 이 터무니없음을 함축하는 의미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사랑입니다. ‘사랑’.


주님께서 그렇게 예우한 사랑이 인간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성도하고 맺은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사랑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터무니없지요. 터무니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어찌 그럴 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은 받는 자만 아니까.


주님께서 그 터무니없음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터무니없다고 해서 배척해서 십자가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그 터무니없음을 복원시킵니다. 터무니없음을 복원시키죠.


인간이 천국 못가고 성도가 되야 된다는 이 변화 자체도 터무니없는 거에요. 인간은 안 넣어주고 성도만 넣어준다는 이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거에요. "천국은 내가 들어가야지." "왜?" "내가 왜 못 들어가는데?" "네가 인간이거든." 인간이기 때문에 십자가와 대립관계 있는 겁니다. 십자가 자체가 모든 인간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것은 당연하고요. 하나님의 일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눈치 채지를 못합니다.


자, 이러한 요한복음 내용을 모두 아주 세밀하게 언급한 그 책이 로마서에 보면 나와요. 로마서에 나오는데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을 제가 언급을 해서 우회적으로 요한복음 20장 터무니없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7장 8절을요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8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들으면 일반 교인들 들으면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법이 없이는 죽은 것이다. 뭐가? 죄가. 죄가 법이 없이는 죽은 것이다 했거든요. 여기서 주어가 뭐냐 하면은 죄에요. 따라서 이 문장은 뭐냐 하면은 여기서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아무 일도 안해요. 인간은 애초부터 빼는 거에요. 인간은 제끼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진거에요. 인간은 빠져라예요. 인간은 빠져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은 죄를 어떻게 현실화 시키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만약에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에요. 만약에 사람들 한 5천명 모아놓고 또는 대학교 신입생 합격생들 오리엔테이션 하고 고등학생들 모아놓고 또는 촛불집회 하는 사람들 모아놓고 강단에선 황교안이라든지 뭐 강단에 선 촛불집회 지도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 죄는 법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하면 이게 무슨 소리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가 관심사지. 우리 빼놓고 왜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 이야기를 왜? 인간이 있는데 인간보고 인간이 어떻게 잘될 것인가 못될 것인가를 그 이야기를 해야지. 우리나라 어떻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해야지. 왜 우리나라 빼놓고 이야기하십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성경 전체가 그래요. 인간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인간이 구원받고자 성경 들여다보는 자체가 성경을 전혀 십자가를 전혀 모르고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요. 죄는 법이 없이는 죽은 것이라 해서 율법, 법이 주어진 것은 뭐를 살려내기 위함입니까? 죽었던 죄를 살려내기 위함이에요. 죽었던 죄를 살려내기 위함.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성도하고 일하지요. 성도하고 일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없어요. 이 땅에 성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뒤에다 뭐냐? 자기 있음을 주장해요. 나는 있다가 돼요. 나는 있다가 되기 때문에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뭘 모르냐 하면은 그 다음부터 부활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것이 뭐로 일하느냐 하면 사랑으로 일한다는 이 사랑에 대해서 전혀 그들은 역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에요. 사랑으로 일한다는게. 이 사랑 자체가 터무니없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러면 사랑은 나를 사랑해야지 하면 이건 사랑 관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빠지게 만드는 것. 사랑할 관계는 새롭게 비어있는 사랑 관계를 성도라고 새로 만들어 내는 거에요. 새로 만들어 내는 거에요. 인간을 빼야 되니까. 그럼 인간을 뺀다는 그것을 로마서 7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로마서 7장 8절에 보면 “죄는 법이 없이는 죽은 것이다” 되어 있지요. 죄는 법이 없이는 죽은 것이다.


여기서 죽었단 이야기를 하지요. 죽은 것이다. 죽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렵습니다. 잘 오셨어요. 진짜 어려운거 시작합니다. 죽었다고 했을 때에 죽음이거든요. 죽었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죽었다고 하면 개가 죽었습니까? 소가 죽었습니까? 인간이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전부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로마서 7장 8절에서는 뭐가 죽었다 합니까? 죄가 죽은걸로 보는 거에요. 이건 관심사가 죄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죽일 것인가에 주님의 관심사가 있는 겁니다. 참 제가 이야기하면서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죠. "성경은 우리 인간 구원하려고 있는게 아닙니까? 성경이 우리 천당 가게 해줄려고 하는게 아닙니까?" 하는데 성경은 우리를 아예 배제해버려요. 우리를 완전히 제끼고 이야기한다고요 우리는 빠져라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관심 있는 것은 죄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죄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자, 이 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해보겠습니다. 사람이 먼저 있고 사람은 운명 결국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죽느냐? 사느냐? 현재 그것이 문제지요.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우리 인간의 문제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이걸 인정을 하지 않으면 뭐도? 사람이 죽는다 산다 이것도 성경에서는 이거는 관심사도 아니고 없는 거에요.


뭐냐 하면은 죽느냐 사느냐는 인간의 육신이 있고 둘로 갈라져서 죽는 인간, 사는 인간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가 먼저 있고 이것이 어디서 모아졌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진짜 죽느냐 진짜 사느냐가 결정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부활은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고. 관심사가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인간은 제껴놔버리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없는 성도가 예수님의 죽음과 삶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새롭게 나타나는 거에요. 무엇 때문에? 이 법 때문에. 이 계명 때문에. 그 계명이 뭐냐 하면 바로 계명의 완성은 사랑. 사랑 때문에.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필요 없어요. 성도가 나와야 돼요.


그럼 성도는 어디서 나옵니까? 없는데서 나와요. 없는데서 나왔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눈에 안보이잖아요. 안보이면 없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육신에서 성도가 나오는 겁니다. 육신에서.


그럼 성도가 나오면 성도가 이 존재 자체가 뭐를 결정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존재 자체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결정지었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경유해서 나오기 때문에 성도의 존재 자체가 본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천국이며 무엇이 지옥인가를 보여주는 시그니처. 표시죠 표시. 싸인이죠 싸인. 시그니처, 싸인입니다.


성도는 본인의 운명 때문에 성도가 된게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인간들이나 관심 가지라고 하세요. 인간들이나. 있음이 있음이 된다는 거에요. 그러나 성도는 기능적입니다. 자기 본인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고 성도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여기 성령이 개입해야 됩니다.


성령이 개입하게 되면 성도와 주님과 성도 사이는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 그 율법이 법이 주어짐으로서 없다고 여겼던 죄가 만천하에 실제적으로 죄의 바다라고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들추어내는데 성도의 이 임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기능이 있어요. 성도는 느긋하지요. 온 천지가 죄의 물결이니까. 그걸 볼 수 있다는 것. 아주 성도는 아주 즐겁습니다. 사도 요한이나 사도 베드로처럼. 이미 성령 받은 입장에서는 세상에 정 둘 곳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자, 지금 이것이 로마서에서 또는 요한복음 20장 21장에서 이야기했다면 그러면 여기서 인간을 배제하라고 하는데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어떻게 규정되느냐? 인간은 환경으로 규정되는 겁니다. 인간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어느 환경 속에 소속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돼요.


내가 만약에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 첫날부터 회사 합격되고 난 뒤에는 내가 회사가서 월급타는 날 자랑질해야지. 너희들 취직 안했지? 난 취직했다 자랑하고 싶은데 막상 회사 딱 첫 날부터 전체가 아는게 하나도 없고 전부다 모르는 것만 쫘악 나와요. 그 회사가 나눠준 모니터 컴퓨터에는 하루 일과가 쫙 주어진다고 했지요. 쫘악.


마치 그 영화에 무슨 영화인지? E.T나오는 영화인지 안 그러면 로봇 나오는 옛날 영화 있는데 전자 칼, 스타워즈. 스타워즈 배경 보게 되면요 웅장한 그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는 그 음악 그 바그너 음악인가 그 음악배경해서 시커먼 검은 공간에 줄이 문장이 쫘악 내려오는 것처럼 회사 들어가면 지시사항이 그 문장이 내용이 뭔지를 몰라요.


일일이 선배 다 찾아가서 물어야 돼. 하루 일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몰라요. 여자직원 같으면 나는 취직해도 커피는 안 탈거야 하는데 지금 커피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커피 타는 그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고 실제는 그 업무를 감당을 못하는데. 업무를 감당을 못해요. 뭘 알아야지요. 그러면 뭡니까. 나는 성도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그거다 버리고 거기에 맞춰야 돼요. 그 회사 직원에 딱 맞춤.


맞추어 나가는 인격이고 사고방식이고 모든 출퇴근 건강상태 누가 누구 선에 서야 되고 누구 지시가 전문가고 누가 나에게 가르칠 것이며 나는 누구 지시를 따르는게 유리하냐 그렇게 새롭게 하다보면 인간자체가 변질되어 버립니다. 인간자체가 변질 내가 아니고 다른 인간이 되고 말아버려요. 환경이 인간을 결정해 버립니다. 결정론, 환경결정론. 환경이 인간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 70% 보는 사람 있고 나머지 30%는 DNA고. DNA가 결정하죠.


낮에 일하고 있는데 엄마가 와가지고 전화해가지고 저녁에 뭐 해줄까? 하면 엄마 바로 끊으세요. 저 정신없습니다. 그럴 정신도 없어요. 뭐 막상 어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면 나 라는 자체가 있음에서 있음을 잘라버리고 환경이 요구하는 새로운 있음으로 변해야 돼요. 그전에 있음은 없음이 되야 되고. 친구도 없고 동창도 없고 지금 부모도 없어요. 여기에 맞춰야 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모방이라고 합니다. 모방을 어려운 말로 그 환경의 동일시. 동일시. 이것을 가지고 바로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 주체에 대해서 성경에서 가장 잘 나온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12년 동안 혈루병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지요. 그때는 자기의 시선밖에 없어요. 자기시선. 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 예수님이 홱 돌아봤을 때 그 여자와 예수님이 눈 마주칠 때 비로소 그때가 자아에서 주체가 되는 순간입니다.


자, 전에는 내가 결정해서 옷을 만질 때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결정을 누가했죠? 내가 했죠. 내가 결정해서 내가 행동하다가 그거는 자아고요. 주체가 눈을 마주쳐서 주체가 되어 버리면 그 나냐? 주님이냐? 둘 중에 누가 인생 주도권을 쥐느냐가 결정되어 버립니다. 나는 주님의 능력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해야 될 하나의 여종으로서 달라져 버리죠.


그게 막달라 마리아는 그게 너무 좋은 거에요. 남들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 왜 남들은 왜 터무니없는가? 너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 모방과 흉내내기 해가지고 그 환경과 비슷하게 묻어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인간이 사는 모습의 그게 전부거든요. 그런데 주인공은 내가 주인공인데 거기에 적응을 해야지. 죽은 내가 그나마 밥이나 먹고 살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미 주도권은 저쪽으로 다 넘어가버렸어요. 그게 사랑의 관계에요. 그게. 그게 사랑의 관계고 없던 내가 성도가 되는 순간입니다. "아 나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였구나. 주님 위한 존재구나." 그 관계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도 그 관계를 자를 수 없다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했어요.


악마도 못 끊어요. 환란 핍박 뭐 달려들어도 못 끊어요. 누가 너를 정죄 내가 사랑을 사랑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맺어진 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악마로도 이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이 성도될려고 하니까 이거는 관계가 없어요. 주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에요. 전혀 관계없어요. 불신자죠. 생각해보세요.


이 사회에 딱 나왔을 때 우리가 제일 서러운게 뭐냐 하면은 나는 나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내가 나를 귀한만큼 귀하게 생각해주지를 않아요 이 세상은. 얼마나 섭섭한지. 책상에 가가지고 훌쩍 훌쩍 웁니다. 왜 우느냐 하면은 묻지 마세요. 그냥 서러워서 웁니다. 왜 서러운데? 나는 꾸준히 지금까지 나를 사랑해왔는데 그만큼의 양의 사랑을 아무도 해주지를 않는 거에요. 해주지를 않아요.


여자들은 결혼할 때 울지요. 왜냐하면은 내가 나를 스스로 혼자 지킨다고 했는데 나를 평생 지켜줄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가지고 울지요. 지난 낮 설교에 의하면 그게 착각이었다는것. 무르면 되니까. 시작은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차이를 만들어내요. 이번엔 저 같은 동기생보다 빨리 진급을 해서 빨리 차이죠. 인간은 모방으로 시작해서 차이. 그게 일상의 전부입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계속해서 나는 나에요.


그 사람은 자아밖에 없는데 환경 따라서 그때그때 아부를 하든지 굴복을 해가지고 가짜 주체라고 자꾸 우기는데 진짜 주체는 바로 그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과 눈 마주칠 때에요. 그리고 베드로가 내가 저 사람을 모른다고 불 쬐면서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때 주님께서 눈 마주쳤거든요. 아 그때 내가 닭이구나. 내가 바로 닭이구나.


그래서 이 성경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아를 버리고 이걸 공격하는 책이 성경책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성. 여리고성에 있어서에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여리고성에 속해요. 아무리 해도 함락되지 않아요. 모방하고 흉내 내고 선배 따라하고 하지만 여리고성은 이중 삼중으로 점점 더 성체를 높일 뿐이지 여리고성은 함락되지를 않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중심이 있어요. 그들은 이미 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체에요. 주체 중심을 모시고 있는데 그게 뭐냐?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에 미리 함락당한 사람이 기생 라합이고 그 사람은 여리고성 무너질 때 유일하게 살아남는 가정입니다. 나머지는 여리고성에 다 무너지겠죠. 여리고성. 함락당한 거에요.


함락당하게 되면 여긴 뭐가 되느냐 하면 포로가 되지요. 포로. 이 전쟁이 바로 대리전쟁입니다. 뱀과 주님과의 대리전쟁으로서의 대리자로서 인간이 있을 뿐이지 원래 전쟁은 뱀과 주님, 악마와 주님과의 전쟁사. 이게 인류역사입니다. 인류역사에요. 이러한 일상.


다시 말해서 모방과 차이. 차이는 차이를 낳고 차이는 차이를 낳고 과장 좀 하면 됐지. 아니에요. 계속해서 계속해서 더 부장까지 계속 그 차이를 벌리면서 내가 이정도 내가 주체일까 내가 이 정도 되자. 내가 자꾸 과연 이 정도보다 더 될꺼야라고 자기 자신을 키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어떤 인도사람인데 독일에 가서 유학을 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했어요. 의학을 공부해서 독일에서 의사돼서 다시 인도로 돌아왔어요. 인도로 돌아오니까 어느 부족, 고리타분한 부족의 족장에 초청을 받았어요. 초청을 받았는데 딸이 자꾸 아프니까 진찰해달라는 거에요.


진찰해 달라고 하는데 진찰할 때 그 족장이 뭐냐 하면은 우리 족장의 전통에 의하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은 처녀딸은 남자에게 외부남자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딸이 이렇게 앉아 있으면 의사가 이렇게 있으면 여기에다가 두 건장한 시녀가 여기서 천을 이렇게 가려요. 천을 가린다고요. 천으로 가리고 여기에다가 조그마한 구멍을 내가지고 딸이 손목이 아파요 하면 이 구멍을 통해서 손목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렇게 이제 고리타분한 족장이 의사를 초청해 놓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천이니까 잘린 천이니까 부분이고 이건 뭐냐 하면은(구멍) 부분의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세상의 부분 중에 부분. king of king이 아니고 부분 of 부분. 가장 부분 중에 부분이에요. 이걸 통해서 전체 다를 보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예외거든요. 부분을 통해서 예외를 통해서 봐야 이 전체가 다 보이는 거에요. 이 족장과 딸이 이 의사를 보는 것과 의사는 족장과 딸이 보는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요. 이 구멍을 통해서 전체를 다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의사와 딸과 족장의 만남은 무엇의 가치냐 하면은 이 부분의 부분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난 거에요. 의사는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충분히 진찰이 가능한 거에요. 손목만 만져도 진맥을 하고 다 하니까 다 진찰이 가능한 거에요.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거에요. 봐야 다 한다는데. 의사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진맥을 하고 손목만 만져도 심장 뛰는 것을 통해서 작은 부분인데 전체가 다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인간은 예수님을 가릴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가릴려고 애쓰죠. 추방해버렸죠. 추방했는데 추방당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나타낼 때는 다른 것 필요 없어요. 십자가만으로 충분해요. 십자가만으로. 거기서 하나님의 이 법의 사랑의 전부가 거기서 펼쳐집니다. 펼쳐지게 되면 인간이 왜 배제되었는가 인간 배후에 죄가 있거든요.


죽었던 죄를 현실화시킵니다. 살려내지요. 아까 죄는 법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 했지요. 법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라는 말은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죽음 그 자체에서 보통 인간들은 뭐냐 햄릿처럼 자기 죽는게 제일 급선무에요. 내가 죽느냐 사느냐. 만일 교회 다닐 것 같으면 내가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 이것이 문제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거는 문젯거리도 아니고 문제도 아닙니다.


뭐냐 하면은 죄가 어떤 것이냐를 드러내는게 이게 주된 주관심이에요. 사람들에게 없다고 여겼던 죄를 진짜로 실제적으로 살아있는 죄로 만들어 버립니다. 살아있는 죄로 만들어 버리면 이 세상에는 살아있는 것은 뭐 밖에 없다? 죽음밖에 없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해 버리죠.


알록달록한 가을되면 알록달록하지요. 뭐 덕유산이나 이렇게 또는 단풍으로 유명한 전라도의 산 이름 모르겠어요. 내장산같은데 있지요. 거기에 잉크 확 부어버리세요. 새카만 잉크 부어버리면 똑같이 되지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게 현실이라고요. 그러면 이 의사가 여기서 진맥을 할 때 이들이 보는 이 모든 이 족장과 딸이 보는 이 모든 것을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허구라고 하는 겁니다. ‘허구’ 또는 ‘망상, 허상’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세상을 안 봤으니까 허망하고 허무한게 돼요. 죽으면서 죽는 이유를 몰라요. 자기 죽는 것만 알지 죄가 살아서 결과로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는 몰랐지요. 잉크병속에 내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아담의 후손으로 놓였던 자체가 이 잉크병 안에 죄 안에 죄 바닥 안에 잠겼다는 자체가 죽음인줄 모르고 관심사가 자기가 숨 끊어지면 죽는 줄로 알고 있어요.


요양병원에서 숨 끊어지면 아이고 어른 세상 버렸습니다 하고 어른 세상 버렸다하는 본인도 버렸는데 버려진건데요. 이 허구거든요. 그런데 이 허구를 인간들은 뭘로 보냐 하면은 실체로 보는 거에요. 그러면 요한복음 20장에 부활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이 실체를 뭐로 바꾸는 겁니까? 허망한 허구의 바다로 만드는 겁니다. 이걸 허구로. 허구로 만드는 거에요.


있다가도 없어질 것 허구잖아요. 지금 눈에 있는게 있다고 해서 그게 영원히 있지 않습니다. 없어지거든요. 죽음으로. 그러니까 허구고. 이게 허구라면 실체는 어디 안에 들었습니까?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지요. 자기가 이렇게 몸 만지는 손, 이런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허구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합니까? 터무니없다고 이야기하지요. 그 터무니없음을 장려하는 거에요. 사도 요한, 베드로가. 터무니없음을 장려하는 거에요. 그래 계속 터무니없다고 이해해라. 내가 터무니없는 것만 이야기할께. 성령을 통해서. 왜? 주님께서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성경의 허망과 허구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허구라는 것은 아는 것은요 그 구멍 십자가에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는데 이 허구의 구조거든요 인간세계는. 허구의 구조인데 인간은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공리의 구조로 바꿔요. 공리. 수학에서 나오는 공리. 공리는 증명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증명할 필요 없지요.


인간은 인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A=A. 이거는 맞다고 하는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에 나옵니다. A가 A'가 아닌 것은 같지 않다 이런 것. 이건 뭐 따질 필요 뭐 있어요. 딱 들어보니 토 달게 없지요. 토 달게 없지요? 인간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 아까 배웠지요?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동일시죠. 누구나 동의하는 것부터 시작하게 되면 진리는 거기서 생산된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과학과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지난 시간에 했는데 또 잊어버렸으니까 한번 해볼까요. 예수님은 인간이고 하나님이다 했지요. 그런데 이게 뭐라고? 이게 신학이죠. 이게 삼위일체 포함되어 있거든요. 이게 엉터리란 말이죠. 예수님은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이렇게 되야 맞아요. 인간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허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게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님을 논하고 인간을 논한다는 자체가 이게 반칙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만약에 여러분들 오늘 하루 어떤 분들은 두끼 먹은 분도 있고 세끼 먹은 분도 있다 칩시다. 자, 세끼 먹었을 때 밥값을 누구한테 치뤘습니까? 여러분 식당에서 라면 시켜먹고 요새 4천원인지 5천원인지 모르겠지만 4천원 낼 때 4천원을 식당주인한테 하지요. 이게 공리의 구조에요. 왜냐하면 수고한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 존로크의 철학입니다. 노동한 자에게만 재산을 부여할 가치가 있다는 거에요.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 그냥 그대로 끄덕이면서 다 하는데 그거 하나하나 전부다 뿌리를 캐보면요 인간들이 다 인간의 이성이 아주 그것도 못됐겠죠. 인간의 이성이 점점 더 발달이 누적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에요. 누적된 채. 지금 여기서 누가 한복입고 오게 되면요 촌스럽다 하지요. 처음 촌스럽다 하지만 두 번 입고 오면 이단이라고 하고.


왜냐하면 백년전만해도 우리는 한복입고 왔거든요. 환경이 만든 인간은 그 환경에 동일시라니까요. 남들이 나를 인간으로 봐줄 때만 우리는 그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비슷하냐?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진리에요. 튀냐? 그거는 무조건 해서는 안 될 이단 짓이 되는 겁니다. 튀지마라. 사람들이 너를 원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으면 그건 고용이 안되고 돈벌이 할 데가 없지요.


주위에서 맞춰주는 거에요 맞춤. 주위에서 요구하는대로 맞춰주는 거에요. 세탁소를 하든 빵집을 하든 고객이 왕이잖아요. 교회를 하든. 그런데 그 식당에 4천원 낼 때 그 식당주인이 자기가 숨 쉬는 산소를 마신 산소값은 누구한테 냈습니까? 안냈잖아요. 지금 공리의 구조가 깨지는 거에요.


결론부터 말해서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루 우리 세끼 먹으면 세끼 밥값 다 찾습니다. 밥값을 다 찾는 거에요. 왜? 하나님이 세끼 밥값을 용납, 그걸 만들어줬기 때문에. 애들이 소꿉놀이하면서 나뭇잎 따잖아요. 그 나뭇잎 해가지고 너는 아빠하고 엄마해가지고 돌 가지고 빻아가지고 오늘 아침 밥이라고 하는데 그 나뭇잎을 원주인한테 값을 쳤습니까?


나뭇잎은 엽록소로 되어 있지요. 엽록소에서 아미노산을 생산하잖아요. 그 누가 제공한 거에요? 애들이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그 잎사귀를 친히 기르시잖아요. 그 돈을 줬습니까? 애들이? 안줬잖아요. 결국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밥값 다 받아내. 은혜로 준거 밥값 다 받아내는 거에요. 어느 하나 공짜는 하나도 없어요. 밥값 다 받아내잖아요.


이게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만든 십자가 구멍으로 보게 되면 그 밥값 다 받아내는 거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허망한 인간아 반드시 밥값 다 치룬다. 그래서 성도가 성도될 때는 그냥 구원받지 못하고 값을 치루고 구원받는 거에요.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의 바다에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빼냈기 때문에 어떤 율법도 어떤 법도 어떤 양심도 우리를 질책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을 질책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감히 우리를 질책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서 주신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어느 누구도 그걸 정죄하지를 못합니다. 그게 대구강의에서 그게 하나님의 자존심이에요. 하나님이 자존심 걸고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법을 주심으로서 사랑의 법을 주심으로서 다시 말해서 이 구멍으로 계속 십자가를 집어넣는 거에요. 집어넣게 되면 이 전세상이 십자가라는 율법의 완성이 주어지면서 아까 족장과 딸이 있는 이 부분의 부분, 부분의 부분을 통해 들어온 이걸 인하여 이 전체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의 세상이 되어버려요. 죄의 세계. 죄의 세계가 되어 버리면 이거는 처벌, 악마를 처벌할 처벌이 적용 가능한 상태가 돌입될 뿐이죠. 죄는 악마이니까.


악마를 악마대로 처벌하기 위해서 이 세상 불 심판 받고 불로 죽고 모든 은혜는 다 회수가 되고 회수된 그 자리에 심판의 불이 주어지고 그 불의 연속성이 지옥불이잖아요. 성경이 맞아떨어져가잖아요. "아이고 예수 안 믿는다고 지옥불에 갑니까?" 그렇게 하는데 너하고 상대하는게 아니에요. 너 배후에 악마하고 상대하지 너하고 상대해서 너 교회 안 나와서 죽이고 뭐 그런거 없어요. 그냥 다 죽여 버려요 다 죽여. 다 악마에게 퍼붓는 저주를 해버린다고요. 이걸 통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 다 잊어버렸을 거니까.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만들고 악마가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없고 성도만 있는데 성도는 성도의 존재이유는 뭐라 했습니까? 사는 것과 죽는 것. 영원히 사는 것과 영원히 죽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되게 했다 했지요. 성도 본인이 구원받는게 목적이 아니고 이미 성도자체가 이미 구원 안에 구원이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매개체가 성도 아닙니까?


따라서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면 성도는 이 세상 어느것 하나 전부다 죄악된 것이고 모든 실체는 뭐로 빠진다? 결국 모든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한 허구적인거죠. 허구적인 것. 왜그러냐 하면 주님이 직접 상대하지 않으니까.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거니까 허구적인 거에요.


악마 인간의 세계에서는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악마를 이렇게 길들여놨어요.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이 넓은들 넓은 일을 많이 한들 그 땅을 지배해서 뭘 할건데요? 땅을 지배해서 뭘 할겁니까? 임대업자 아파트 200채 가진들 뭘 할거에요? 자기 몸하나 떼가지고 자기 아파트 다 창문너머 다 던져 놓습니까? 내거라고. 땅을 넓혀서 할게 뭐가 있습니까?


맨날 악마는 맨날 이렇게 수평적으로 뻗어. 수평적으로. 수평적으로 뻗어 나가는데 이게 안되니까 맨날 술이야. 자기가 원하는대로 다 못 뻗어가지 못해가지고 자기가 한이 맺혔어. 아마 김우중 회장은 한 맺혔을거에요. 주님의 십자가의 뜻은 하나입니다. 속죄의 대상이 아닌 것은 만들지 않는다. 속죄의 대상이 아닌 것은 만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속죄라는 것을 성립하기 위해서 다 허구로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그래야 죄를 죄 되게 살려놔야 그 다음에 사랑의 위력이 나타나는 거에요. 반드시 저주해야 되고 지옥가야 되는데 속죄라는 이 율법의 완성이 값을 하는 거에요. 값을. 빛이 나는 거에요. 따라서 성도는 뭐냐? 속죄 대상의 자격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속죄대상이라는 자격으로. 우리는 밥 세끼 먹고 밥값을 주님한테 치룬 적이 없거든요. 그것도 죄 아닙니까?


자, 그런데 아까 그 족장과 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봅시다. 족장과 딸의 입장에서. 분명히 봤다 이 말이죠. 보니까 의사가 이걸 눈으로 보고 손목을 이렇게 진찰하고 뭐 이렇게 하더라 이 말이죠. 할 때 이쪽의 딸이나 족장이 보기에는 이거는 구멍이니까 구멍은 여기 있음입니까? 없음입니까? 없는 거죠. 없는 거죠. 이게 굉장히 터무니없게도 이게 신비로운 거에요.


모든 것은 있잖아요. 실체가 있잖아요. 자기 족장 몸이 있고 딸 몸이 있고 있잖아요. 이 천도 있고 시녀들도 있고 시녀가 들고 있는 천도 있고 다 있어요. 다 있는데 이 부분만 이게 뭐냐? 이게 없음이 되는 거에요. 없음을 통해서 주께서 모든걸 들여다보고 있는 거에요. 없음을 통해서. 그러면 성도가 내가 인간이라면 이건 있음으로 꽉 차있는거죠. 그런데 터무니없는 발상이 튀어올라버리면 그 터무니없는 발상은 나의 있음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터무니없는 거죠. 참 내가 말하면서도 참 어렵다.


자,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예외와 배제를 참 이게 어려운건데요. 구분해야 돼요. 그 내가 예상된 것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깜짝 놀라면서 반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거 못한다. 이거 못하는데 됐네. 그러면 못한다가 전제가 된 상태에서 주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이거 소화에 좋다는게 있어요. 뭡니까. 엑티비아. 풀무원에서 나온 엑티비아.


그렇잖아도 속이 안 좋아가지고 소화제나 유제품 없나 하는데 어?! 내가 기대한게 있었네. 이렇게 되면 이거는 예외가 아니고요 예상이 되는 겁니다. 예상. 배제 말고 예상합시다. 예상한거잖아요. 아 나는 죄를 많이 지어서 천국 못가. 오! 십자가에서 용서 구원받았네. 이거는 예외가 아니고 예상이 되는 거에요. 예상.


구원받고 싶었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주께서 감사하게도 네 힘으로는 안된다. 주님의 십자가로 한다. 고맙습니다. 내가 이제 드디어 대학교 강사가 되가지고 청년회 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예외라고 하는 것은요 이거는 터무니없는 거에요.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나타나 버리면 여기서 뭐냐 하면은 우리는 처음에는 기쁨이 아니에요. 분노가 일어나요. 분노가.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나 제대로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화로다 그다음에는 뭐냐?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그다음의 절차는 자기 자신을 알아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밥세끼 먹은 밥값 주인한테 돌려주지도 않고 늘 내 노동의 힘으로 밥인줄 알고 라면 끓인줄 알고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분노 일어나고 그다음에 망하게 되었다 하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은 예상밖에 예외밖에 큰기쁨, 큰기쁨. 그냥 기쁨이 아니고 큰 기쁨.


이건 예측하지도 못했던 전혀 내가 꿈에도 꾸지 못했던 기쁨이 바로 주체가 바뀌었으니까. 예상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여전히 누구한테 두고 있어요? 나한테 두고 있는 거에요. 독일 유학갔다 온 의사 불러다가 천조각하고 장치 다하고 그러면 우리 전통도 살리고 내 딸도 병도 고치고 양수경작 다 되는 거에요. 이게 예상된 족장이 예상된거 아닙니까.


왜? 족장은 자기가 있음이니까 있는데서 아이디어 끄집어낸 거에요. 이거대로 독일의사가 독일에서 유학한 의사가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독일의사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이미 모든 예상은 우리가 벌써 시나리오 다 짰어. 주께서 이것만 도와주시면 되겠습니다. 고맙겠습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이번 일만 성사되면 내가 다이아몬드 해드리겠습니다. 허장강 아십니까? 허장강 알아요? 옛날 신파극에 나와요. 이것만 주시면 이것만한 보답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예상이라니까요.


그러나 예외는 그게 아니고 나를 무시하나? 이런 분노 나도 내 인생 꾸립시다 나를 완전히 쓰레기 취급하네 라고 하다가 아 이게 바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없는 구멍을 내가 앞에서 자기가 골키퍼도 아닌게 이렇게 막고 있던 거에요. 골키퍼도 아닌게 계속해서 계속해서. 내 인생 책임져야 되요 주님 이러면서도. 이것가지고 모자라요?


그럼 열심히 울면서 주여 주여 하면서 이게 전부다 울면서 기도하고 그걸 두자로 간구라고 하는데 간구를 하게 되면 응답받는다 이게 머리속에 다 동일시 자기가 다니는 교회와 흉내와 모방으로 이미 정립이 된 상태거든요. 신입사원 정도는 아니니까 벌써 교회 다닌지 한 20년 됐으니까 고참 아닙니까. 어떤 어려움도 그 조제약을 먹고 무슨 처방전을 내리면 효과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다 들었단 말이죠. 교회도 홈쇼핑이니까 응답받고 하는거 다 아니까.


세상에 거기에 얽매여서 다시 말해서 교회가 속인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속인 거에요. 나의 예상이 나를 속였다 이 말이죠. 구원되지도 못하고 혼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그걸로 자기 완전 무장해서 천국 갈려고 했던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이게 천국 갈 깜냥, 깜냥도 안되는게. 깜도 안되는게 천국 갈 깜도 안되는게 남들 간다고 하니까 저도 따라들어간다고 얼마나 그런 식으로 했습니까.


그래서 지난 오후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목사는 신자된 적도 없고 여기 계신 목사님 말고. 목사는 신자된 적도 없고 신자가 뭔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열심이 있는 교인이었거든요. 열심 있는 교인이어서 다 동일시, 자기가 성장했던 그 교회도 그런 가르침 받았기 때문에 얼추 그정도 하게 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신학까지 무장하고 신학에다가 주권사상, 칼빈주의 그거 해가지고 얼추 비슷하게 가면 천국 갈 줄 알았지요.


항상 그래서 걱정하는 거에요. 걱정은 죄입니다. 걱정이 바로 내 안에 스며든 죄의 보편성이 내 안까지 스며들 때 내 걱정, 남 걱정, 걱정 하고 있어요. 걱정은 그만큼 자기가 엉터리 주체라는 뜻이죠. 10분 쉽시다.

 홍민희 (IP:59.♡.122.247)20-01-07 00:30 
강남-요한복음 총정리(8)-요한복음 20장 (공리의 구조)19121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상당히 어려운거 했어요. 공리의 구조와 허구의 구조와 공리의 구조했지요. 그걸 좀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공리의 구조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은 "뭐 따질 거 뭐 있어. 딱 보면 그렇잖아. 토달 거 없지?!" 라는 것이 공리에요. 인간은 A=A라고 했지요? 이게 잘못이거든요. A=A.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게 틀린 줄 몰랐어요. 현대에 와서는 이게 틀린 것이 발견됐는데. A=A. 그리고 1 다음에 2, 순서니까 2 다음에 3, 3 다음에 4 계속 나가면 이거는 무한이다. 이게 맞는 줄 알았어요. 이거 무한 아니에요. 공이 있는데 지구가 있는데 지구에 숫자 집어넣어서 1,2,3,4,5 돌아보세요. 어디에 옵니까? 1에 오잖아요.


인간들은 "에이 그거 뭐 따질게 뭐 있어. 그거 딱 맞지." 하는 그 공리를 다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거는 누가 뭐래도 천명이 해도 이건 진리 맞다 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가 인간은 있다. 인간은 있다.

두 번째 인간은 그냥 있는게 아니고 살아있다. 인간은 늙으면 죽는다. 이거 다 엉터리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 자체도 없어요. 인간 자체가. 흙이지 인간이 아니에요. 죄인이지 인간이 아니거든요. 성경에서는 죄인으로 보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가지고 뭐냐? 딱 맞는 이걸 가지고 공리,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치. 그래서 공리로 구조를 딱 맺은 거에요. 그런데 이 공리는 무엇에 대결하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허구라는 것에 대한 대결 들어갑니다. 허구.


이 공리에 대해서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나타낼 때 이 공리의 세계가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죽음으로 처리했지요. 죽음으로 처리할 때 예수님의 죽음 안에 뭐가 묻어들어 가겠어요? 공리의 구조로 버티려는 구조가 묻어들어가겠지요? 그래서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버리면 이 세상에는 공리의 구조 자체가 이게 바로 뭐가 된다? 이게 죄가 되고 저주받을 이유가 된다가 증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전략, 방법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이의 걸지 말자. 맞잖아 하는 자체가 다 날라가버려요. 그래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되면 뭐냐 하면은 모든 과학과 철학은 신학은 무엇부터 출발한다? 있음부터 출발해요. 있음부터. 이 있는 것이 어떻게 있느냐부터 출발해요. 있음이 어떻게.


우주는 어떻게 있느냐? 우주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언제? 137억년 전에. 뭐가? 에너지와 양에너지의 충돌로 인해서 여분의 것이 보통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데 뭔가 일어 잘못돼가지고 여분의 것이 생겨서 그 여분의 것이 나중에 뭐냐 하면 수소가 발생되는 여분의 에너지가 되가지고 그것이 시작이 되가지고 우주는 빅뱅, 꽝하고 총 쏘듯이 우주가 됐다. 애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요. 모든 과학이 있음에서 출발해요. 있음에서.


그러나 그 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나중에는 오늘날 점점 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할까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도끼로 찍었다고 할까요. 자기가 하는 말을 전부다 다 뒤엎는 이런 시대가 오고 말았죠. 다 엎어버려요. 뭐냐 하면 인간은 나중에 신이 있느냐? 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에서 더 나가버려요. 신을 말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가 되어버려요.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이건 상식이기 때문에 하는데 태양이 이렇게 있잖아요. 태양이. 태양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하죠. 이렇게 9개나 8개 또는 10개 이론이 있지만 행성이 돌고 있죠.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돌고 있죠.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는 밖에 있는 어떤 다른 주인을 모신, 다른 주변을 모시고 뺑뺑 도는게 있겠지요? 있겠지요?


이걸 뭐냐? 외계행성이라고 해요. 외계행성. 외계행성이라고 해요. 이쪽은 태양은 태양 중심으로 돈다고 보는데 외계행성은 이쪽 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계행성은 잘 발견되기 어려워요. 여기 이 외계행성 이거 발견해서 2019년도에 노벨물리학상 받았어요.


자,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요. 왜 중요하냐면 지구 여기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할 때 여기 목성이잖아요. 뉴턴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여기에 중력이 있다는 겁니다. 중력.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이 한쪽을 당기는게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를 당기는 겁니다. 우리가 지구를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당기고 있는데 이 서로 당기다 보니까 태양이 목성을 12년마다 태양의 궤도가 이렇게 틀어지는 거에요. 그 중력.


이걸 가지고 공통중력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뭐냐 하면 하나님하고 인간하고는 인간 자체가 일 안합니다. 인간 자체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하고 일하시는가? 또는 주님은 누구하고 일하시는가? 성도하고 일하지요. 성도.


그럼 성도 안에 하나님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분이 계세요. 누구십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는 부활의 영.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이십니다. 또는 부활의 영 성령이 함께 있지요. 성령이 함께 있으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이 허구의 세상에서 실제가 틀어지는 효과가 수시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말 갑자기 뛰어넘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어떤 행성이 있을 경우에는 이 행성이 있으면 이 공통의 중력 때문에 태양의 궤도가 10년마다 좀 틀어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외계행성이 따로 도는지 어떻게 아느냐?


이 궤도가 조사를 계속해보면 뭔가 틀어지는게 있어요. 정기적으로. 틀어질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옆에 뭐 블랙홀이 있다 있는데 하도 주기적으로 틀어질 때는 안에 자기가 뺑뺑이 도는 주인공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외계행성을 발견해가지고 2019년 노벨상을 받은겁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은 이렇게 해줘야 저 지구 밖에도 지구와 똑같은 행성이 있음을 점점더 이거는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는데 일의 진보, 진척을 보기 때문에. 이론이. 그래서 중요한거에요. 그렇다면 이게 공통중력점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입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도가 그냥 물체가 아니거든요. 성도가 그냥 물건, 물체가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물건이 아니에요. 성령이 없으면 그냥 사물이죠. 이것도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이것도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자, 성경 떠나서 일반인 봅시다. 일반인이 제가 언젠가 그랬죠. 사람하고 엮이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요. 일반인이 외롭다. 외로운데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 만났다. 또는 만날 수도 있고 또는 사람은 너무 귀찮으니까 떼어내기 힘드니까 강아지 하나 키웠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도 사람이 강아지 키운다고 보지요. 그러나 이 사람의 일상에 강아지 때문에 변화가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는 거에요. 멀리 못가요. 왜? 멀리 가게되면 누구한테 맡기던지 제 때 사료 줄 사람이 없어요. 자기의 생활에 약간의 변동이 일어나야 된단 말이죠. 개를 안 키워봐서. 고양이나 개가. 막 어떤 사람은 유산 남기고 하잖아요.


처음에 개 키울 때는 무조건 내 즐거움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키웠는데 막상 키워보니까 얘가 나의 스승이 되고 나의 발목을 잡고 내 인생을 내 맘대로 못하게 막더라 훼방하는 요소가 되는 거에요. 이게 공통중력점이 되니까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때까지 중간 어느 지점이 있는 거에요. 공통으로.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은요. 그래서 이제 복음하기 전에 이건 이번에 수련회 때 할 것 같긴 한데 인간이 인간을 만날 때에 인간은 자기 주변을 출발할 때 인간은 이걸 사물로 보는 겁니다. 사물. 이걸 대상체로 보는 거에요. 대상체가 사물이에요. 사물의 특징은 이걸 숫자화 시킵니다. 내 친구 6명이다. 숫자화되는 거죠. 내 친구 6명. 우리교회 교인 20명이다. 전부다 숫자화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숫자가 되어 버리면 여성성이 빠진다고 했어요. 여성성이 빠진다. 어쨌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어떤 친구를 만나도 숫자화시켜버립니다. 왜? 숫자화돼야 내가 주는 명령만 그 안에 도달되는 대상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가 주는 명령만. 그래서 사람보다 개 강아지가 편한 거에요. 명령 시키는대로만 하는 자! 이러면 되는 거에요. 내 명령만 하면 돼요.


내 명령만 한다면 개는 저 사람은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에요. 내 명령만 따라하는 기계화 같은 사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 남편이나 그런 아내 만나면 신나지요. "밥해!!" "예 서방님 서방님." 내 명령만 온다는 말은 저쪽에서 내놓을 건 없는 거에요. 내놓을 건 없는 거에요.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시키는 대로. 딴 군소리하지 말고. 가부장적이죠.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이쪽에서 사물로 여겼던 이것이 반란을 일으키네요. 특히 2살 3살 아이 크니까 반항하는 거에요. 반항하니까 어떻게 하면 돼요? 중간쯤에다가 공통중력점을 협상할 수밖에 없어요. "너는 딸이니까 9시 이전에 다 들어와." 하다가 크면 "좋다. 10시. 좋아좋아 12시까지 봐줘. 그래 자고 오면 좋은데 전화하고 자고 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쪽이 권위를 가져가기 시작하고 이쪽의 권위는 사라지는 없어지는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걸 자기고 기싸움이라고 하고 칼구스타프융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뭐라고 하느냐 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남성성을 갖고 있느냐? 누가 여성성을 갖고 있느냐?


그러니까 남자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누가 기가 쎄냐? 누가 그 집안에 남성다우면 기가 쎄고 남자도 음메 기죽어 하면 그거는 하나의 아내가 된다 뭐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스타프융이 그렇게 했어요. 친구인데요. 나중에 서로 반대해서 삐졌지요.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사물화 될 때 명령할 때 이게 뭐냐 하면 언어가 됩니다. 언어. 언어 중에 하나가 숫자인데. 하나의 언어가 동원되는 거에요. 언어가. 그렇다면 이게 똑같이 주님과 우리 성도 사이에 양쪽 다 성령이 임하지요. 성령이 임하면서 주님은 명령하고 일반적인 명령할 때 우리는 그냥 종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여기서 삐지고 대들고 내 예상대로 안된다고 화내고 하는 그러한 육신적인 면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우리 육신이 죽기 전까지는 반항하고 반발하고. 주의 뜻을 못 지키면 또 못 지켰다고 스스로 또 좌절하고 자책하고 또 넘어지고 나 이러다가 지옥갈꺼야 혼자 그렇게 단정내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주님한테 뭐가 잘못됐냐 하면 주님은 여기서 공통적 결실을 맺어줘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은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여기서 죄가 나와야 돼요. 그래서 악마라도 버릴게 없고요 이 세상에 어떤 상황이나 불신의 상황 어떤 것도 하등 버릴게 없고 다 정확하고 딱 필요한 상황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이론상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 집어넣어버리면요 우리는 거기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뭐 난리도 아니지요. 그렇게 하면서도 주께서는 사랑을 돋보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아까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처럼 율법이 있으면 죄가 살아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생산되면 여기서 나온 결과는 뭐냐? 망하는 쪽에 가야 뭐가 보인다? 천국이 보이는 거에요. 망하는 쪽에 천국이 보인다. 자기가 안 망해 버리면 이거는 자기가 허구이면서도 허구인 줄도 모르고 실체로 버티게 되면 문제는 천국이 안보여요.


대구강의에서 아주 빠르게 지나간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천국의 길은 위험한 길이에요. 위험한길. 위험한 길인데 위험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가야될 이유가 이게 위험한 길로 가게 되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이게 유일한 길이라는 거에요. 다른 길은 이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좁은 길이 되는 거에요. 좁은 길. 좁은 길은 위험한 길이거든요.


자, 위험하다는 말을 이제 설명할게요. 위험하다는 것은 뭡니까?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한테 위험하다는 말이죠? 내 평소에 육신이 버티고 생존하는데 대단히 이게 기댈게 없고 의지할 것이 없어버려요. 사람이 다리가 아프면 짝대기를 짚어야 하는데 주께서 짝대기를 빼버리는겁니다. 부모가 어렵고 병들면 누굴 의지해야 돼요? 자식을 의지해야 되는데 자식 철썩같이 약속했지요. 결혼하게 되면 어머님 생활비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철썩같이 약속해놓고 막상 결혼하니까 "엄마 대출 2억 냈어." "아파트 사는데 대출 2억 냈어." "왜 아파트 왜 사는데?" 요새 아파트 사놔야 목돈 된다고 일부러 결혼기념이고 신혼이니까 깨끗한데 냄새부터 새집 냄새가 나야 또 살맛이 난다고. 사랑이 막 무르익는것 같애. 새집에는. 대출 2억 내서 사니까 아버지한테 자기 맞벌이해서 200만원 준다는 것은 없어요 나중에. 200만원이 어디 있습니까?


나중에 설에나 명절에 가가지고 오빠는 얼마 내는데? 그거 봐가지고 거대한 모방과 상대성, 동질성 또 시작되는 거에요. 오빠 20만원 내면 나도 20만원. 다 합해봐야 자식들 3명이면 60만원 최저생계. 집사준다고 아버지 어머니 노후대책 다 집어넣지. 대학교까지 공부하는데 3억 5천 다 했지.


다 해줘가지고 하게 되면 자식은 그냥 또 못 받고 어머니 효도해드리겠습니다. 뭔가 또 말이나 안하면 밉지나 않지 말은 다 해놓고 막상 해놓으면 자기들 밖에 모르고. 아버지는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엄마 혼자 핑퐁, 탁구 치는 거에요. 오빠 집으로 가세요. 탁구 치는 거에요. 핑퐁. 공밖에 안돼요.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 지워버립니다.


왜냐하면 의지하겠다는 자체가 내가 있음을 있음을 버틸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라 할지라도 그런 지경에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까? 안 드러납니까? 있는대로 다 드러나지요. 죄가 율법 말씀 가운데 죄가 다 드러나지요.


"야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이것밖에 안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 자신밖에 좋아하지 않았구나. 주님 안 좋아하는구나." 이게 다 드러나겠지요. 그게 다 노출시키는 것. 노출시킴으로써 여기서 뭐냐 하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있는 사람은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게 감사해요. 터무니없는게 감사해요.


십자가의 피로 너의 죄는 사해졌다 이게 머리로 아는 것하고 실제로 내가 기댈 수 있는 것 짝대기고 뭐고 자식이고 뭐고 다 없을 때 자식 의지하고 내 잔고 의지하고 하다가 집에 불 나면 모든게 의지한게 다 날라갔을 때. 내 몸마저 건강도 날라갔을 때. 정말 나는 뭐야? 하는 질문과 더불어서 정말 내가 터무니없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건 누구 솜씨입니까? 내 솜씨가 아니고 성령께서 한번 들어온 사람 망하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 뜻이죠.


그래서 아까 돈 있으면 살 수 있다. 권세 있으면 살 수 있다. 자식 잘되면 살 수 있다. 노후가 편하다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구조라고 했습니까? 이게 공리구조. 수천년동안 이미 이게 진리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반증된 사실이기 때문에 이건 뭐 따질거 없어. 맞아. 자식 잘 되면 이건 인생 성공한거야. 이게 공리구조에요. 그 반대말이 뭐죠? 반대말은 뭡니까?


허구의 구조요.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허구의 구조에 있지요.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공리의 구조에 있지요. 우리의 힘으로 공리의 구조에서 허구의 구조로 우리는 못 옮깁니다. 옮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죄가 어디 붙어 있습니까? 의존강의에서 제가 끄집어냈는 모양이에요. 답변은 안하고 문제만 던진 모양이죠.


죄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 죄는 과정에 붙어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바로 허구에서 공리의 구조에 나오면서 여기서 죄가 내속에 있는 죄가 나오기 시작하죠. 아 내가 허구란 무슨 뜻입니까? 없음이죠. 아까 시녀가 들고 있는 천조각 구멍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이게 주님의 시선인 동시에 성령의 시선인 동시에 우리 성도가 세상을 봐야될 시선이거든요. 이게 허구의 구조란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족장편에 서버렸어요. 그거는 쉬워요. 왜? 몸 온 전체가 이미 습관화 되고 관습화되고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있는 것 가지고 있는 돈 쓰는게 그게 뭐가 어려워요? 취미가 뭡니까? 쇼핑하는 것. 돈만 있으면 쇼핑은 참 재미있어요. 돈만 있으면 그거 재미없는 사람 누가 있어요? 여기 가까운데 롯데백화점 있는데 하루 왠종일 돌아다니면서 맛있는거 먹고 가방 서너개 들고 집에 가고. 그게 뭐 어려워요? 나 오늘도 고생했다. 했겠지. 오늘 다리 퉁퉁 부었어. 맛사지 받으면 되지. 돈 있으니까. 이게 뭐 어려워요.


최고 어려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실체가 있는데 나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게 이게 어렵잖아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허구에서 공리로 가면서 죄가 나오고 이 공리에서 다시 어디로 옮기면서 허구로 옮기면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를 이 땅에 잠시 태어나게 했다가 죽을 때까지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자, 죄가 어디 붙어있습니까? 죄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우리 몸을 보여주는 이 과정에 허구에서 공리로 거기에 죄가 붙어있다는 사실, 육신에 있다는 사실이 드디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됐습니까? 질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언어는 말씀은 복음의 말씀은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없어요. 없기 때문에 뭐냐? 우리는 뭐냐? 욕망의 덩어리거든요.


욕망의 덩어리를 그냥 상표 붙이듯 ‘나’라고 하거든요. 나는 없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욕망이 들어 있어요. 욕망이 언어가 나오면 이게 자극을 받아서 뭐를 뿜어냅니까? 죄를 뿜어내는 거에요. 욕망이. 이 욕망은 아무리 줘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라는게 없어요. 욕망은 한도 끝도 없어요. 주면 줄수록 점점 자극받아 가지고 더 큰 욕망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큰걸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오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주니까 사람들은 떡 가지고는 모자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아예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 싶은 거에요. 옛날 동화에 그런 동화 있지요. 계란인데 계란보니까 이게 뭐 중국에서 밀수했는지 계란이 아니고 황금이 되는거에요.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분명히 닭의 내장 속에는 황금덩어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잘라보니까 그냥 내장.


황금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욕심이다. 나는 욕심이 많다. 내 욕심있을 것이다. 아니요. 욕심 없어요. 그냥 실체만 있을 거에요. 그러나 뭐가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욕심이 나옵니까? 주의 말씀이 주의 모든 십계명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죄를 우리 현장에 완전히 이렇게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것은 말씀이 들추어내는 거에요. 이 성경말씀을 늘 복음을 이렇게 보셔야 돼요. 보셔야 거기서 내가 얼마나 큰 사랑 큰 속죄의 혜택을 입었냐를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자, 21장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이 다 끝나가서 마음이 좀 섭섭하지만 21장 보기 전에 20장 “거기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오늘 배운 것을 여기에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자, 도마의 잘못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없음이 아니고 뭐가 있다? 있음이 있고 있음을 뭘 키운다? 계속해서 공리구조를 키우죠. 보면 안 믿을래야 보면 안 믿을 이유가 있습니까? 이게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 이게 바로 헛방이고 허무다. 주님 보시기에 이게 허무인거에요.


이거는 족장과 딸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에요. 예수님을 그냥 이 세상의 하나의 부분으로 본겁니다. 전부로 보지 않고. 예수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고 우리 붙어있는 또 하나의 인간으로 본거에요. 전부로 보지않고요.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전부로 보면 우리는 제로가 되니까. 없음이 되니까 그걸 못 견디는 겁니다. 나 있고 주님 있고 이러면 주님 잘해봅시다. 1:1 잘해봅시다 되겠지만 주님 계시고 나는 제로가 되어 버리면 내 쪽에서 할 게 없잖아요.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잖아요. 터무니없는 생각은 우리의 아예 예상 속에는 없어요.


예상 속에 없지만 예외는 주께서는 예상 속에 없는 것을 비껴가잖아요. 그게 말씀이에요. 말씀 속에서는 예상이 들어있는게 아니고 예외가 들어있는 거에요. 모든 말씀 속에는. 왜냐하면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예상이 아니고 예외에요.


앉은뱅이가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 걸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베드로 요한은 자기들이 한 게 없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죄는 몽땅 죄 지었는데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대요. 이게 어떻게 자기가 방금 죄지은 것을 아는데 나는 이게 주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겁니까?


사랑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조치를 했다 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뻔뻔스러운. 족장과 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얼마나 뻔뻔스럽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은거죠. 내가 지금 힘이 약해서 잡힌게 아니고 지금이라도 천군천사가 내려온다. 예수님 이야기했지요. 이야기했다가 뺨 얻어맞았어요. 이게 어디 터무니없이. 공갈이야. 우리가 보는대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요.


아 나 지금 근질근질 합니다. 수련회 해야될 것을 미리 땡겨서 해가지고. 특별히 알려줍니다. 금식은 언어에요. 왜? 입 다물자. 이게 유일한 언어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통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나대지말자 에요. 까불이는 잡혔어요. 까불지 말자. 우리는 나대지 말자. 이게 금식이에요. 우리 없는거 하고 주께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에스더의 특징은 뭐냐? 이쁜 여자였잖아요. 이쁜 여자가 이게 독한 여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없는 여자가 되었어요. 내가 없으니까 이쁜 것도 없어요. 지금 이 문제는 지금 내가 얼마나 이쁘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타이타닉에 남자 주인공 이름이 뭐지요? 디카프리오죠. 맞지요? 그 남자가 얼마나 멋있냐가 중요한게 지금 배는 지금 빙산에 박고 있는데.


얼마나 멋있는 남자가 현빈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현빈하고 사귀는게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 자체가 현빈도 허구에요. 허현빈. 북한의 중대장도 소용없어요. 손예진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허구에요. 우리는 허구에 농락당하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허구가 출근할 때 뽀뽀뽀. 허구가 퇴근할 때 뽀뽀뽀. 아빠 엄마도 허구고, 아빠 엄마가 낳은 자식 나도 허구고.


그냥 욕망덩어리죠. 그냥 욕망덩어리에요. 구멍으로 봤을 때 우리는 죄가 나풀거리고 이렇게 옷 잘못 사면 오리털 빠지잖아요. 우리는 맨날 풀풀 거리면서 죄를 풀풀 날리는 거에요. 개 키우면 개한테 내 죄가 다 들어가고 개는 짜증난다고요. 인상 쓰고 있고 우리는 개 발로 차면서 밥이나 먹어라.


누구든지 그래요. 우리와 함께 있으면 상대는 짜증날 준비를 하셔야 돼요.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은 사람하고 엮이는 겁니다. 사람하고 엮이는 거에요. 이건 뗄 수도 없어요. 무를 수도 없고. 떼지도 못하죠. 보기 좋다고 사람하고 엮인 경우가 뭐냐 하면 자식 3명, 4명. 하나로 채우면 끝나는데 이건 뭐 3명 4명 엮였어 이거는.


그래서 도마의 입장에서는 대표적으로 공리의 구조입니다. 주님께서 허구의 구조로 반격하지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아 참 이걸 아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주께서 실습시켜야 그 순간 깨닫는거지. 이걸 어떻게 알아요.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은 모든 보고 있는 것들에 의존할 때 그 작대기가 다 치워졌을 때 나 뭐지? 나는 이미 죽은 거야? 나는 인간도 아닌 거야?


주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다는 그 언어, 그 문장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에요. 일부러 짝대기를 다 치워버렸어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에스더는 이쁜 여자였지만 독한 여자였어요. 아주 잔인한 여자. 이런 여자. 좐인한~~아주 좐인한 여자. 좐인한 여자에요. 심지어 하만을 아주 작살을 내버려요. 네가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


짝대기 그때부터 뭐 꼬치 요리 나왔어요? 짝대기에다가 하만의 가족들을 다 끼워버려. 이거는 진짜 좐인한 여자에요. 좐인한 여자.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가. 에스더입니다. 금식했더니만 눈에 뵈는게 없는 모양이지요. 이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공통중력점 때문에 공통질량점 때문에 내가 혼자 있는게 아니고 같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가지고 사랑의 위대함을 속죄의 용서의 현실화를 실제로 속죄가 이루어졌다를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어떤 징후같은 것을 궤도가 10년 목성 궤도 때문에 바뀌는 것처럼 뭔가 우리가 누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


그분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그 미세한 그 어떤 움직임. 그걸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사건이 되게 되면 사건은 무엇이 사건이 일어날 때만 뭘 붙여야 되느냐?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했어요. 이름을.


그래서 이것은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뭐냐? 금과 은이 아니고 누구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죠. 이 이름이 뭐냐 하면 사건이죠. 사건은 번뜩하고 난뒤에 그 다음에 스윽 없어져요. 현장에 다시 사라져버려요. 꼭 연예인들 인기같애. 인기 얻다 그 다음에 사라져요. 사라져버린단 말이죠.


이명직 목사님 책 냈잖아요. 뭐 대단하지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사라지든지. 책 냈나? 할 정도로 없어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나는 더 크게 있음이 더욱더 있음이고 싶어 하는 나의 이거는 내 욕망, 공리의 구조에서는 내가 계속 키우고 싶은데 허구의 구조에서는 잠시 잠깐 허구에서 실제로 드러났다 싶더니 다시 뭐로 빠져야 돼요? 허구로 빠져야 되죠.


그래야 주님의 증인이 되니까요. 사도들이 갔던 그 길이 바로 그 길이었어요. 잠시 등장했다가 사건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사건 남기고 그 다음에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면 그걸 여러분 배웠으니까 물읍시다. 그러면 허구적인 사건을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허구의 구조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하죠? 위에 뭐가 있어요?


허구의 구조 위에 뭐가 있었던가요? 공리의 구조 있었지요. 그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 기념비 세우는 거에요. 그게 공리에요. 그게 공리에요. 사건을 붙잡아서 이걸 계속해서 역사에 집어넣어서 역사 자랑하는 거에요. 우리 교회 몇년이다 몇년이다 역사 자랑 하는 겁니다. 사건은 못 붙잡으니까. 사건은 바람 바람 바람같은 것이어가지고 붙잡을 수 없어요.


그런데 기념으로 만들어 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 기억화되잖아요. 기억화해놓으면 거기서 빼먹을 수 있는 거에요. 반복해서 빼 먹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허무하다. 인간은 허무하고 허구잖아요. 허구니까 사는게 허망하니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스케줄을 자꾸 스케줄을 심을 박듯이 박아놔요.


우리 만난지 100일 됐다.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다. 계속해서 빼빼로데이, 짜장면데이, 화이트데이 또 뭐 가면쓰고 까부는거 또 뭐에요? 할로윈데이, 크리스마스이브, 연말연시 또 망년회 또 신년회. 망년회 한 20번하고 신년회 한 50번하고. 계속해서 해놔야 또는 해외여행 해놔야 지금은 의미 없이 시큰둥하더라도 그 다음 달에 여행 간다하면 갑자기 분발하죠. 갑자기 활성화되면서 계속 어떤 모임있고, 이런거요. 가끔가다가 회식!


애 5명 있으면 애 생일 하나, 애 생일 하나. 나중에 결혼하면 애 생일, 둘째 며느리 생일 하나. 아니고 나이 들어도 바빠. 되게 바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맥추절, 부활절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계속해서 허망하니까 안 허망으로 버티기 위해서 의미를 두는데 그게 바로 보고 믿겠다는 인간의 그 죄악된 것이 죄가 말씀을 통해서 자꾸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2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허구의 구조와 아까 물어보면 모를 거다. 다시 한번 쓰겠습니다. 밑에는 허구의 구조죠. 허구의 구조는 안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뭡니까? 공리의 구조, 납득이 되는 구조, 누구나 동의하는 구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공통점을 생성할 수 있는 그런 언어의 개념들의 남발.


그래야 사회에서 한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리의 구조. 참 이 김치찌개 맛있네요 하는 이 공리의 구조. 속으로는 맛있으면 뭐합니까? 이 세상 불로 멸망하는데. 이게 허구의 구조. 맛있는거 많이 먹고 지옥에나 가라. 이게 허구의 구조. 참 맛있네요. 아이고 떡을 왜 이리 맛있게 했습니까? 이게 공리의 구조.


위에는(공리의 구조) 생존. 이거는(허구의 구조) 뭐냐? 이거는 생명.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구조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선언을 했으니까 이 말씀이 21장에서 적용을 해야되거든요. 적용을 할 때 여기는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21장에 갑자기 제자들이 바닷가에 갔을 때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야 여기에 분명히 죽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공리의 세계가 공리의 구조가 형성이 되어있지요. 거기는 죽은 예수님은 끼어들 수가 없어요. 인간들의 고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한 고집하거든요. 나타나지 않는 주님이 나타나버렸어요.


성령은 주님의 고집에 따라 우리한테 온 거에요. 이쯤되서 성령와야 된다해서 성령온게 아니에요. 뭐 뜨겁게 기도한다고 성령오는게 아니고 성령은 우리 허락없이 갑자기 들어닥치는 겁니다. 갑자기 들어닥치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 앞에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에 의한 주체로 드디어 소명받는 거에요.


너의 모든 형편은 내가 임의로 조성해놓은 것이다. 화단에 맨드라미가 스스로 맨드라미 될 수가 없어요. 맨드라미 이름 조차도 내가 있는 그 자체가 사건이 되야 맨드라미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이 있어야 되지요. 자기 전에 맨드라미 잘 컸네 해봐야 내가 나 보고 할 소리가 아니에요. 누군가 나를 보고 아주 정확하게 제대로 살아왔다고 언급을 해주는 거에요.


그게 바로 무슨 관계입니까? 이게 아까 허구의 구조에서 정리된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예상 못한 겁니다. 예상 밖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한테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자기가 한 게 아니고 돌려드리죠.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일. 사랑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사랑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러면 안되고 사랑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애쓴다고 얻는게 아니고 돌려드려야 돼요.


주께서 주셨잖아요. 아 왜 이래요. 손을 두 손 이렇게 모아야 돼요. 왜 이래요 해야 돼. 한손으로 왜 이래요 이러면 안되고 다 드려야 돼요. 왜 이러십니까.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에이 뻔히 알면서 고린도전서 15장 8절 내가 안다니까. 알면 뭐합니까.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리는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환란과 핍박 온다 할지라도 이 사랑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놓고 돌아서면 그 사랑을 잊어버려요. 왜? 사랑을 어디서 잊어버립니까? 허구의 구조에서 사랑이 내가 안 망하니까 사랑이 살아나다가 갑자기 공리의 구조에서 내가 똑똑해 지니까 사랑이 날라가 버렸어요. 내가 뭐 한 거 같애. 예상대로 뭔가 Boys be Ambitious 내 꿈대로 이룬거 같애. 이렇게 되면 이제 내 계획대로 목적이 기대가 있으면 공리의 구조에 들어서 버리죠.


예수님 오셔가지고 예상 밖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체가 되는 거에요. 하나하나 명령합니다. 하나하나 명령하면서 여기서 아까 제가 이야기해드릴 거에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했습니다. 그 대목을 조금 더 설명해볼게요.


이스라엘 이름은 전쟁하는 민족이고 이름 자체가 전쟁이에요. 이스라엘. 전쟁하는 용도로 했어요. 이스라엘. 전쟁을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결실물이 나오죠. 이걸 이제 전리품이라고 합니다. 전리품. 전쟁해서 얻은 전리품. 이 전쟁의 하나님이 최초로 등장하는게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 등장했어요.


아브라함이 318명 사병가지고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 이겼잖아요.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입니까? 하나님의 승리죠. 아브라함이 전쟁 통해서 알게된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이에 전쟁하는 하나님을 보내셔가지고 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전쟁은 뭐냐 하면은 이게 하나의 전리품 결실을 내려면 이스라엘은 전쟁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할 수가 없지요.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게 요한복음 14장 잠깐 볼까요? 이게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어요. 15장이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그 뒤에 쭉 나오는 이야기 뭐냐 하면은 포도나무가 뭐를 맺어야 된다?


포도라는 과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해서 하지요. 그 과실이 뭐냐? 21장에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사랑인거에요. 사랑. 그게 사랑. 그걸 로마서에 오게 되면 속죄 또는 대속이라는 말로 할 수 있어요. 속죄 또는 대속, 화목제물. 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화목제물. 다 그런 이야기란 말이죠.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랑이라 할 때는 나와 주님하고 사랑해야지 하지 말고 사랑이란 반드시 뭐냐 하면은 사랑은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여기서 결과물 결실물만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참포도나무를 보냈더니만 이스라엘이 나중에 뭐가 됐다? 들포도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뽑아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거는 뽑힐 대상이에요. 누가 지옥 갑니까? 사랑이 없는 사랑을 모르는 자가 지옥가는 거에요. 왜? 주께서 원하는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 말고 행함이 나온다든지 자기 의가 나와 버리면 다 뽑혀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사도는 뭐냐 하면은 사랑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겠지요. 사랑의 사도가 되는 거에요. 주께서 맺은 결과물로써 움직이는 거에요. 결과물로써.


사랑이 나오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무슨 길을 가야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의 길을 가야 돼요. 자기를 부정하는 길로 가야돼요. 요한복음 11장에서 두 가지 나옵니다. 자기 부정이. 첫번째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됩니까? 물었고 두번째 질문은 뭐냐 하면은 저 사도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물었지요? 사도요한.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됩니까? 나. 저 사도요한과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 이 둘 다가 사랑의 열매에는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 뭐를 평생을 무엇을 제공하느냐 하면은 나를 제거해버리는 쪽으로 상황이 그렇게 베드로를 몰아가요. 자기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베드로가 어디서 죽었지요? 어디에 잡혀갔지요? 나중에? 베드로가. 베드로가 어떻게 죽었다 하는 것은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요. 그러나 전설에는 나와 있지요. 쿼바디스 보면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로마까지 가가지고 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시체가 로마 지금 베드로 성당 밑에 베드로 있다 해가지고 그렇게 자기가 잘난 체 어른인 척 하잖아요. 너 주먹 굵다 해가지고 너 팔뚝 굵다 해가지고. 그걸 첫째 교황은 베드로라고 보지 않습니까. 전설에 보면 그런게 많아요. 야고보는 어디까지 갔다. 스페인까지 갔다. 온 천지 12제자가 다 퍼졌어요. 온 천지에. 인도까지 간 사람도 있고. 도마는 인도까지 가고. 있는데 믿을게 못 되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승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거에요. 자, 요한복음 21장 24절 봅시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은 요한복음 자체가 끝이 아니고 이게 하나의 교본이 되는 거에요. 교본. 뭐냐 하면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지상의 뭐를 남긴다? 결실물. 하나의 포도나무를 양산, 포도농사를 짓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포도농사.


이 포도가 이 말씀을 담을 때 다른 포도가 있고 다른 포도로 이어지는 거에요. 이게 공통질량점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하거든요. "아 나는 죄가 많아서 주님 못 믿겠어요." "걱정하지마 베드로가 나는 세번씩이나 부인했어. 됐냐?! 나는 수제자인데 세번씩이나 부인했어. 됐냐!!"


뭐가 이겼다? 인간이 죄를 뭐가 이겼다? 사랑이 이겼다. 이래도 되고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닭 우는 타이밍 맞춰서 세번씩이나 부정했다. 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니까. 의인은 소용없어요. 속죄의 대상을 끄집어내야 사랑이 극대화가 되니까요.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는 허구적인 우리가 이 땅에서 허구적인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에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베드로야 저 사람처럼 살아 있느냐? 누가 오래 사느냐?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내 마음대로 합니까? 묻지 말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너는 너의 주체는 주님이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은밀하게 사용하시니까. 왜 은밀하냐? 주님이 계시는 자체, 성도 자체, 베드로 자체가 이 세상이 무슨 세계냐? 죄가 범람하는 죄의 천지, 죄의 넘실거리는 그러한 거대한 죄의 대항이기 때문에. 대항. 큰 바다거든요.


이 말씀은 늘 우리의 인생 가운데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끝까지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의 뜻대로 가장 합당하게 꼭 있어야 될 자리를 정확하게 이끌고 가신다는 거에요. 위험한줄 알아요. 하지만 그 위험한 길이 주님 가신 십자가 그 위험한 길이 유일한 길이에요.


그 위험하다는 것은 가난하다 어렵다 못산다가 아니라 내가 꿈꾸고 예상한 것이 전부다 좌절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스스로 설 수 갈 수 없는 눈을 맞춘, 주님에 의해서 나를 눈 맞추면서 매일같이 눈 주면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우리 죄를 드러내게 하시는 그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그러한 이스라엘 주의 이스라엘 참포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포도가 얼마나 귀한데 우리는 나만의 어떤 성과를 얻고자 그러한 공리구조에서 몸담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작용하셔서 그 자체가 죄고 허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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