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총정리(8)-요한복음 20장 (공리의 구조)19121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상당히 어려운거 했어요. 공리의 구조와 허구의 구조와 공리의 구조했지요. 그걸 좀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공리의 구조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은 "뭐 따질 거 뭐 있어. 딱 보면 그렇잖아. 토달 거 없지?!" 라는 것이 공리에요. 인간은 A=A라고 했지요? 이게 잘못이거든요. A=A.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게 틀린 줄 몰랐어요. 현대에 와서는 이게 틀린 것이 발견됐는데. A=A. 그리고 1 다음에 2, 순서니까 2 다음에 3, 3 다음에 4 계속 나가면 이거는 무한이다. 이게 맞는 줄 알았어요. 이거 무한 아니에요. 공이 있는데 지구가 있는데 지구에 숫자 집어넣어서 1,2,3,4,5 돌아보세요. 어디에 옵니까? 1에 오잖아요.
인간들은 "에이 그거 뭐 따질게 뭐 있어. 그거 딱 맞지." 하는 그 공리를 다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거는 누가 뭐래도 천명이 해도 이건 진리 맞다 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가 인간은 있다. 인간은 있다.
두 번째 인간은 그냥 있는게 아니고 살아있다. 인간은 늙으면 죽는다. 이거 다 엉터리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 자체도 없어요. 인간 자체가. 흙이지 인간이 아니에요. 죄인이지 인간이 아니거든요. 성경에서는 죄인으로 보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가지고 뭐냐? 딱 맞는 이걸 가지고 공리,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치. 그래서 공리로 구조를 딱 맺은 거에요. 그런데 이 공리는 무엇에 대결하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허구라는 것에 대한 대결 들어갑니다. 허구.
이 공리에 대해서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나타낼 때 이 공리의 세계가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죽음으로 처리했지요. 죽음으로 처리할 때 예수님의 죽음 안에 뭐가 묻어들어 가겠어요? 공리의 구조로 버티려는 구조가 묻어들어가겠지요? 그래서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버리면 이 세상에는 공리의 구조 자체가 이게 바로 뭐가 된다? 이게 죄가 되고 저주받을 이유가 된다가 증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전략, 방법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이의 걸지 말자. 맞잖아 하는 자체가 다 날라가버려요. 그래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되면 뭐냐 하면은 모든 과학과 철학은 신학은 무엇부터 출발한다? 있음부터 출발해요. 있음부터. 이 있는 것이 어떻게 있느냐부터 출발해요. 있음이 어떻게.
우주는 어떻게 있느냐? 우주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언제? 137억년 전에. 뭐가? 에너지와 양에너지의 충돌로 인해서 여분의 것이 보통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데 뭔가 일어 잘못돼가지고 여분의 것이 생겨서 그 여분의 것이 나중에 뭐냐 하면 수소가 발생되는 여분의 에너지가 되가지고 그것이 시작이 되가지고 우주는 빅뱅, 꽝하고 총 쏘듯이 우주가 됐다. 애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요. 모든 과학이 있음에서 출발해요. 있음에서.
그러나 그 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나중에는 오늘날 점점 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할까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도끼로 찍었다고 할까요. 자기가 하는 말을 전부다 다 뒤엎는 이런 시대가 오고 말았죠. 다 엎어버려요. 뭐냐 하면 인간은 나중에 신이 있느냐? 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에서 더 나가버려요. 신을 말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가 되어버려요.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이건 상식이기 때문에 하는데 태양이 이렇게 있잖아요. 태양이. 태양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하죠. 이렇게 9개나 8개 또는 10개 이론이 있지만 행성이 돌고 있죠.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돌고 있죠.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는 밖에 있는 어떤 다른 주인을 모신, 다른 주변을 모시고 뺑뺑 도는게 있겠지요? 있겠지요?
이걸 뭐냐? 외계행성이라고 해요. 외계행성. 외계행성이라고 해요. 이쪽은 태양은 태양 중심으로 돈다고 보는데 외계행성은 이쪽 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계행성은 잘 발견되기 어려워요. 여기 이 외계행성 이거 발견해서 2019년도에 노벨물리학상 받았어요.
자,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요. 왜 중요하냐면 지구 여기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할 때 여기 목성이잖아요. 뉴턴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여기에 중력이 있다는 겁니다. 중력.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이 한쪽을 당기는게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를 당기는 겁니다. 우리가 지구를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당기고 있는데 이 서로 당기다 보니까 태양이 목성을 12년마다 태양의 궤도가 이렇게 틀어지는 거에요. 그 중력.
이걸 가지고 공통중력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뭐냐 하면 하나님하고 인간하고는 인간 자체가 일 안합니다. 인간 자체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하고 일하시는가? 또는 주님은 누구하고 일하시는가? 성도하고 일하지요. 성도.
그럼 성도 안에 하나님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분이 계세요. 누구십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는 부활의 영.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이십니다. 또는 부활의 영 성령이 함께 있지요. 성령이 함께 있으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이 허구의 세상에서 실제가 틀어지는 효과가 수시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말 갑자기 뛰어넘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어떤 행성이 있을 경우에는 이 행성이 있으면 이 공통의 중력 때문에 태양의 궤도가 10년마다 좀 틀어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외계행성이 따로 도는지 어떻게 아느냐?
이 궤도가 조사를 계속해보면 뭔가 틀어지는게 있어요. 정기적으로. 틀어질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옆에 뭐 블랙홀이 있다 있는데 하도 주기적으로 틀어질 때는 안에 자기가 뺑뺑이 도는 주인공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외계행성을 발견해가지고 2019년 노벨상을 받은겁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은 이렇게 해줘야 저 지구 밖에도 지구와 똑같은 행성이 있음을 점점더 이거는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는데 일의 진보, 진척을 보기 때문에. 이론이. 그래서 중요한거에요. 그렇다면 이게 공통중력점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입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도가 그냥 물체가 아니거든요. 성도가 그냥 물건, 물체가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물건이 아니에요. 성령이 없으면 그냥 사물이죠. 이것도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이것도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자, 성경 떠나서 일반인 봅시다. 일반인이 제가 언젠가 그랬죠. 사람하고 엮이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요. 일반인이 외롭다. 외로운데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 만났다. 또는 만날 수도 있고 또는 사람은 너무 귀찮으니까 떼어내기 힘드니까 강아지 하나 키웠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도 사람이 강아지 키운다고 보지요. 그러나 이 사람의 일상에 강아지 때문에 변화가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는 거에요. 멀리 못가요. 왜? 멀리 가게되면 누구한테 맡기던지 제 때 사료 줄 사람이 없어요. 자기의 생활에 약간의 변동이 일어나야 된단 말이죠. 개를 안 키워봐서. 고양이나 개가. 막 어떤 사람은 유산 남기고 하잖아요.
처음에 개 키울 때는 무조건 내 즐거움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키웠는데 막상 키워보니까 얘가 나의 스승이 되고 나의 발목을 잡고 내 인생을 내 맘대로 못하게 막더라 훼방하는 요소가 되는 거에요. 이게 공통중력점이 되니까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때까지 중간 어느 지점이 있는 거에요. 공통으로.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은요. 그래서 이제 복음하기 전에 이건 이번에 수련회 때 할 것 같긴 한데 인간이 인간을 만날 때에 인간은 자기 주변을 출발할 때 인간은 이걸 사물로 보는 겁니다. 사물. 이걸 대상체로 보는 거에요. 대상체가 사물이에요. 사물의 특징은 이걸 숫자화 시킵니다. 내 친구 6명이다. 숫자화되는 거죠. 내 친구 6명. 우리교회 교인 20명이다. 전부다 숫자화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숫자가 되어 버리면 여성성이 빠진다고 했어요. 여성성이 빠진다. 어쨌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어떤 친구를 만나도 숫자화시켜버립니다. 왜? 숫자화돼야 내가 주는 명령만 그 안에 도달되는 대상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가 주는 명령만. 그래서 사람보다 개 강아지가 편한 거에요. 명령 시키는대로만 하는 자! 이러면 되는 거에요. 내 명령만 하면 돼요.
내 명령만 한다면 개는 저 사람은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에요. 내 명령만 따라하는 기계화 같은 사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 남편이나 그런 아내 만나면 신나지요. "밥해!!" "예 서방님 서방님." 내 명령만 온다는 말은 저쪽에서 내놓을 건 없는 거에요. 내놓을 건 없는 거에요.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시키는 대로. 딴 군소리하지 말고. 가부장적이죠.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이쪽에서 사물로 여겼던 이것이 반란을 일으키네요. 특히 2살 3살 아이 크니까 반항하는 거에요. 반항하니까 어떻게 하면 돼요? 중간쯤에다가 공통중력점을 협상할 수밖에 없어요. "너는 딸이니까 9시 이전에 다 들어와." 하다가 크면 "좋다. 10시. 좋아좋아 12시까지 봐줘. 그래 자고 오면 좋은데 전화하고 자고 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쪽이 권위를 가져가기 시작하고 이쪽의 권위는 사라지는 없어지는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걸 자기고 기싸움이라고 하고 칼구스타프융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뭐라고 하느냐 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남성성을 갖고 있느냐? 누가 여성성을 갖고 있느냐?
그러니까 남자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누가 기가 쎄냐? 누가 그 집안에 남성다우면 기가 쎄고 남자도 음메 기죽어 하면 그거는 하나의 아내가 된다 뭐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스타프융이 그렇게 했어요. 친구인데요. 나중에 서로 반대해서 삐졌지요.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사물화 될 때 명령할 때 이게 뭐냐 하면 언어가 됩니다. 언어. 언어 중에 하나가 숫자인데. 하나의 언어가 동원되는 거에요. 언어가. 그렇다면 이게 똑같이 주님과 우리 성도 사이에 양쪽 다 성령이 임하지요. 성령이 임하면서 주님은 명령하고 일반적인 명령할 때 우리는 그냥 종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여기서 삐지고 대들고 내 예상대로 안된다고 화내고 하는 그러한 육신적인 면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우리 육신이 죽기 전까지는 반항하고 반발하고. 주의 뜻을 못 지키면 또 못 지켰다고 스스로 또 좌절하고 자책하고 또 넘어지고 나 이러다가 지옥갈꺼야 혼자 그렇게 단정내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주님한테 뭐가 잘못됐냐 하면 주님은 여기서 공통적 결실을 맺어줘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은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여기서 죄가 나와야 돼요. 그래서 악마라도 버릴게 없고요 이 세상에 어떤 상황이나 불신의 상황 어떤 것도 하등 버릴게 없고 다 정확하고 딱 필요한 상황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이론상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 집어넣어버리면요 우리는 거기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뭐 난리도 아니지요. 그렇게 하면서도 주께서는 사랑을 돋보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아까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처럼 율법이 있으면 죄가 살아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생산되면 여기서 나온 결과는 뭐냐? 망하는 쪽에 가야 뭐가 보인다? 천국이 보이는 거에요. 망하는 쪽에 천국이 보인다. 자기가 안 망해 버리면 이거는 자기가 허구이면서도 허구인 줄도 모르고 실체로 버티게 되면 문제는 천국이 안보여요.
대구강의에서 아주 빠르게 지나간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천국의 길은 위험한 길이에요. 위험한길. 위험한 길인데 위험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가야될 이유가 이게 위험한 길로 가게 되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이게 유일한 길이라는 거에요. 다른 길은 이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좁은 길이 되는 거에요. 좁은 길. 좁은 길은 위험한 길이거든요.
자, 위험하다는 말을 이제 설명할게요. 위험하다는 것은 뭡니까?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한테 위험하다는 말이죠? 내 평소에 육신이 버티고 생존하는데 대단히 이게 기댈게 없고 의지할 것이 없어버려요. 사람이 다리가 아프면 짝대기를 짚어야 하는데 주께서 짝대기를 빼버리는겁니다. 부모가 어렵고 병들면 누굴 의지해야 돼요? 자식을 의지해야 되는데 자식 철썩같이 약속했지요. 결혼하게 되면 어머님 생활비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철썩같이 약속해놓고 막상 결혼하니까 "엄마 대출 2억 냈어." "아파트 사는데 대출 2억 냈어." "왜 아파트 왜 사는데?" 요새 아파트 사놔야 목돈 된다고 일부러 결혼기념이고 신혼이니까 깨끗한데 냄새부터 새집 냄새가 나야 또 살맛이 난다고. 사랑이 막 무르익는것 같애. 새집에는. 대출 2억 내서 사니까 아버지한테 자기 맞벌이해서 200만원 준다는 것은 없어요 나중에. 200만원이 어디 있습니까?
나중에 설에나 명절에 가가지고 오빠는 얼마 내는데? 그거 봐가지고 거대한 모방과 상대성, 동질성 또 시작되는 거에요. 오빠 20만원 내면 나도 20만원. 다 합해봐야 자식들 3명이면 60만원 최저생계. 집사준다고 아버지 어머니 노후대책 다 집어넣지. 대학교까지 공부하는데 3억 5천 다 했지.
다 해줘가지고 하게 되면 자식은 그냥 또 못 받고 어머니 효도해드리겠습니다. 뭔가 또 말이나 안하면 밉지나 않지 말은 다 해놓고 막상 해놓으면 자기들 밖에 모르고. 아버지는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엄마 혼자 핑퐁, 탁구 치는 거에요. 오빠 집으로 가세요. 탁구 치는 거에요. 핑퐁. 공밖에 안돼요.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 지워버립니다.
왜냐하면 의지하겠다는 자체가 내가 있음을 있음을 버틸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라 할지라도 그런 지경에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까? 안 드러납니까? 있는대로 다 드러나지요. 죄가 율법 말씀 가운데 죄가 다 드러나지요.
"야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이것밖에 안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 자신밖에 좋아하지 않았구나. 주님 안 좋아하는구나." 이게 다 드러나겠지요. 그게 다 노출시키는 것. 노출시킴으로써 여기서 뭐냐 하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있는 사람은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게 감사해요. 터무니없는게 감사해요.
십자가의 피로 너의 죄는 사해졌다 이게 머리로 아는 것하고 실제로 내가 기댈 수 있는 것 짝대기고 뭐고 자식이고 뭐고 다 없을 때 자식 의지하고 내 잔고 의지하고 하다가 집에 불 나면 모든게 의지한게 다 날라갔을 때. 내 몸마저 건강도 날라갔을 때. 정말 나는 뭐야? 하는 질문과 더불어서 정말 내가 터무니없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건 누구 솜씨입니까? 내 솜씨가 아니고 성령께서 한번 들어온 사람 망하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 뜻이죠.
그래서 아까 돈 있으면 살 수 있다. 권세 있으면 살 수 있다. 자식 잘되면 살 수 있다. 노후가 편하다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구조라고 했습니까? 이게 공리구조. 수천년동안 이미 이게 진리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반증된 사실이기 때문에 이건 뭐 따질거 없어. 맞아. 자식 잘 되면 이건 인생 성공한거야. 이게 공리구조에요. 그 반대말이 뭐죠? 반대말은 뭡니까?
허구의 구조요.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허구의 구조에 있지요.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공리의 구조에 있지요. 우리의 힘으로 공리의 구조에서 허구의 구조로 우리는 못 옮깁니다. 옮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죄가 어디 붙어 있습니까? 의존강의에서 제가 끄집어냈는 모양이에요. 답변은 안하고 문제만 던진 모양이죠.
죄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 죄는 과정에 붙어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바로 허구에서 공리의 구조에 나오면서 여기서 죄가 내속에 있는 죄가 나오기 시작하죠. 아 내가 허구란 무슨 뜻입니까? 없음이죠. 아까 시녀가 들고 있는 천조각 구멍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이게 주님의 시선인 동시에 성령의 시선인 동시에 우리 성도가 세상을 봐야될 시선이거든요. 이게 허구의 구조란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족장편에 서버렸어요. 그거는 쉬워요. 왜? 몸 온 전체가 이미 습관화 되고 관습화되고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있는 것 가지고 있는 돈 쓰는게 그게 뭐가 어려워요? 취미가 뭡니까? 쇼핑하는 것. 돈만 있으면 쇼핑은 참 재미있어요. 돈만 있으면 그거 재미없는 사람 누가 있어요? 여기 가까운데 롯데백화점 있는데 하루 왠종일 돌아다니면서 맛있는거 먹고 가방 서너개 들고 집에 가고. 그게 뭐 어려워요? 나 오늘도 고생했다. 했겠지. 오늘 다리 퉁퉁 부었어. 맛사지 받으면 되지. 돈 있으니까. 이게 뭐 어려워요.
최고 어려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실체가 있는데 나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게 이게 어렵잖아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허구에서 공리로 가면서 죄가 나오고 이 공리에서 다시 어디로 옮기면서 허구로 옮기면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를 이 땅에 잠시 태어나게 했다가 죽을 때까지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자, 죄가 어디 붙어있습니까? 죄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우리 몸을 보여주는 이 과정에 허구에서 공리로 거기에 죄가 붙어있다는 사실, 육신에 있다는 사실이 드디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됐습니까? 질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언어는 말씀은 복음의 말씀은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없어요. 없기 때문에 뭐냐? 우리는 뭐냐? 욕망의 덩어리거든요.
욕망의 덩어리를 그냥 상표 붙이듯 ‘나’라고 하거든요. 나는 없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욕망이 들어 있어요. 욕망이 언어가 나오면 이게 자극을 받아서 뭐를 뿜어냅니까? 죄를 뿜어내는 거에요. 욕망이. 이 욕망은 아무리 줘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라는게 없어요. 욕망은 한도 끝도 없어요. 주면 줄수록 점점 자극받아 가지고 더 큰 욕망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큰걸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오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주니까 사람들은 떡 가지고는 모자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아예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 싶은 거에요. 옛날 동화에 그런 동화 있지요. 계란인데 계란보니까 이게 뭐 중국에서 밀수했는지 계란이 아니고 황금이 되는거에요.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분명히 닭의 내장 속에는 황금덩어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잘라보니까 그냥 내장.
황금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욕심이다. 나는 욕심이 많다. 내 욕심있을 것이다. 아니요. 욕심 없어요. 그냥 실체만 있을 거에요. 그러나 뭐가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욕심이 나옵니까? 주의 말씀이 주의 모든 십계명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죄를 우리 현장에 완전히 이렇게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것은 말씀이 들추어내는 거에요. 이 성경말씀을 늘 복음을 이렇게 보셔야 돼요. 보셔야 거기서 내가 얼마나 큰 사랑 큰 속죄의 혜택을 입었냐를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자, 21장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이 다 끝나가서 마음이 좀 섭섭하지만 21장 보기 전에 20장 “거기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오늘 배운 것을 여기에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자, 도마의 잘못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없음이 아니고 뭐가 있다? 있음이 있고 있음을 뭘 키운다? 계속해서 공리구조를 키우죠. 보면 안 믿을래야 보면 안 믿을 이유가 있습니까? 이게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 이게 바로 헛방이고 허무다. 주님 보시기에 이게 허무인거에요.
이거는 족장과 딸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에요. 예수님을 그냥 이 세상의 하나의 부분으로 본겁니다. 전부로 보지 않고. 예수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고 우리 붙어있는 또 하나의 인간으로 본거에요. 전부로 보지않고요.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전부로 보면 우리는 제로가 되니까. 없음이 되니까 그걸 못 견디는 겁니다. 나 있고 주님 있고 이러면 주님 잘해봅시다. 1:1 잘해봅시다 되겠지만 주님 계시고 나는 제로가 되어 버리면 내 쪽에서 할 게 없잖아요.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잖아요. 터무니없는 생각은 우리의 아예 예상 속에는 없어요.
예상 속에 없지만 예외는 주께서는 예상 속에 없는 것을 비껴가잖아요. 그게 말씀이에요. 말씀 속에서는 예상이 들어있는게 아니고 예외가 들어있는 거에요. 모든 말씀 속에는. 왜냐하면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예상이 아니고 예외에요.
앉은뱅이가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 걸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베드로 요한은 자기들이 한 게 없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죄는 몽땅 죄 지었는데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대요. 이게 어떻게 자기가 방금 죄지은 것을 아는데 나는 이게 주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겁니까?
사랑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조치를 했다 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뻔뻔스러운. 족장과 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얼마나 뻔뻔스럽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은거죠. 내가 지금 힘이 약해서 잡힌게 아니고 지금이라도 천군천사가 내려온다. 예수님 이야기했지요. 이야기했다가 뺨 얻어맞았어요. 이게 어디 터무니없이. 공갈이야. 우리가 보는대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요.
아 나 지금 근질근질 합니다. 수련회 해야될 것을 미리 땡겨서 해가지고. 특별히 알려줍니다. 금식은 언어에요. 왜? 입 다물자. 이게 유일한 언어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통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나대지말자 에요. 까불이는 잡혔어요. 까불지 말자. 우리는 나대지 말자. 이게 금식이에요. 우리 없는거 하고 주께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에스더의 특징은 뭐냐? 이쁜 여자였잖아요. 이쁜 여자가 이게 독한 여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없는 여자가 되었어요. 내가 없으니까 이쁜 것도 없어요. 지금 이 문제는 지금 내가 얼마나 이쁘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타이타닉에 남자 주인공 이름이 뭐지요? 디카프리오죠. 맞지요? 그 남자가 얼마나 멋있냐가 중요한게 지금 배는 지금 빙산에 박고 있는데.
얼마나 멋있는 남자가 현빈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현빈하고 사귀는게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 자체가 현빈도 허구에요. 허현빈. 북한의 중대장도 소용없어요. 손예진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허구에요. 우리는 허구에 농락당하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허구가 출근할 때 뽀뽀뽀. 허구가 퇴근할 때 뽀뽀뽀. 아빠 엄마도 허구고, 아빠 엄마가 낳은 자식 나도 허구고.
그냥 욕망덩어리죠. 그냥 욕망덩어리에요. 구멍으로 봤을 때 우리는 죄가 나풀거리고 이렇게 옷 잘못 사면 오리털 빠지잖아요. 우리는 맨날 풀풀 거리면서 죄를 풀풀 날리는 거에요. 개 키우면 개한테 내 죄가 다 들어가고 개는 짜증난다고요. 인상 쓰고 있고 우리는 개 발로 차면서 밥이나 먹어라.
누구든지 그래요. 우리와 함께 있으면 상대는 짜증날 준비를 하셔야 돼요.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은 사람하고 엮이는 겁니다. 사람하고 엮이는 거에요. 이건 뗄 수도 없어요. 무를 수도 없고. 떼지도 못하죠. 보기 좋다고 사람하고 엮인 경우가 뭐냐 하면 자식 3명, 4명. 하나로 채우면 끝나는데 이건 뭐 3명 4명 엮였어 이거는.
그래서 도마의 입장에서는 대표적으로 공리의 구조입니다. 주님께서 허구의 구조로 반격하지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아 참 이걸 아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주께서 실습시켜야 그 순간 깨닫는거지. 이걸 어떻게 알아요.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은 모든 보고 있는 것들에 의존할 때 그 작대기가 다 치워졌을 때 나 뭐지? 나는 이미 죽은 거야? 나는 인간도 아닌 거야?
주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다는 그 언어, 그 문장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에요. 일부러 짝대기를 다 치워버렸어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에스더는 이쁜 여자였지만 독한 여자였어요. 아주 잔인한 여자. 이런 여자. 좐인한~~아주 좐인한 여자. 좐인한 여자에요. 심지어 하만을 아주 작살을 내버려요. 네가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
짝대기 그때부터 뭐 꼬치 요리 나왔어요? 짝대기에다가 하만의 가족들을 다 끼워버려. 이거는 진짜 좐인한 여자에요. 좐인한 여자.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가. 에스더입니다. 금식했더니만 눈에 뵈는게 없는 모양이지요. 이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공통중력점 때문에 공통질량점 때문에 내가 혼자 있는게 아니고 같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가지고 사랑의 위대함을 속죄의 용서의 현실화를 실제로 속죄가 이루어졌다를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어떤 징후같은 것을 궤도가 10년 목성 궤도 때문에 바뀌는 것처럼 뭔가 우리가 누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
그분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그 미세한 그 어떤 움직임. 그걸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사건이 되게 되면 사건은 무엇이 사건이 일어날 때만 뭘 붙여야 되느냐?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했어요. 이름을.
그래서 이것은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뭐냐? 금과 은이 아니고 누구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죠. 이 이름이 뭐냐 하면 사건이죠. 사건은 번뜩하고 난뒤에 그 다음에 스윽 없어져요. 현장에 다시 사라져버려요. 꼭 연예인들 인기같애. 인기 얻다 그 다음에 사라져요. 사라져버린단 말이죠.
이명직 목사님 책 냈잖아요. 뭐 대단하지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사라지든지. 책 냈나? 할 정도로 없어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나는 더 크게 있음이 더욱더 있음이고 싶어 하는 나의 이거는 내 욕망, 공리의 구조에서는 내가 계속 키우고 싶은데 허구의 구조에서는 잠시 잠깐 허구에서 실제로 드러났다 싶더니 다시 뭐로 빠져야 돼요? 허구로 빠져야 되죠.
그래야 주님의 증인이 되니까요. 사도들이 갔던 그 길이 바로 그 길이었어요. 잠시 등장했다가 사건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사건 남기고 그 다음에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면 그걸 여러분 배웠으니까 물읍시다. 그러면 허구적인 사건을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허구의 구조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하죠? 위에 뭐가 있어요?
허구의 구조 위에 뭐가 있었던가요? 공리의 구조 있었지요. 그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 기념비 세우는 거에요. 그게 공리에요. 그게 공리에요. 사건을 붙잡아서 이걸 계속해서 역사에 집어넣어서 역사 자랑하는 거에요. 우리 교회 몇년이다 몇년이다 역사 자랑 하는 겁니다. 사건은 못 붙잡으니까. 사건은 바람 바람 바람같은 것이어가지고 붙잡을 수 없어요.
그런데 기념으로 만들어 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 기억화되잖아요. 기억화해놓으면 거기서 빼먹을 수 있는 거에요. 반복해서 빼 먹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허무하다. 인간은 허무하고 허구잖아요. 허구니까 사는게 허망하니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스케줄을 자꾸 스케줄을 심을 박듯이 박아놔요.
우리 만난지 100일 됐다.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다. 계속해서 빼빼로데이, 짜장면데이, 화이트데이 또 뭐 가면쓰고 까부는거 또 뭐에요? 할로윈데이, 크리스마스이브, 연말연시 또 망년회 또 신년회. 망년회 한 20번하고 신년회 한 50번하고. 계속해서 해놔야 또는 해외여행 해놔야 지금은 의미 없이 시큰둥하더라도 그 다음 달에 여행 간다하면 갑자기 분발하죠. 갑자기 활성화되면서 계속 어떤 모임있고, 이런거요. 가끔가다가 회식!
애 5명 있으면 애 생일 하나, 애 생일 하나. 나중에 결혼하면 애 생일, 둘째 며느리 생일 하나. 아니고 나이 들어도 바빠. 되게 바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맥추절, 부활절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계속해서 허망하니까 안 허망으로 버티기 위해서 의미를 두는데 그게 바로 보고 믿겠다는 인간의 그 죄악된 것이 죄가 말씀을 통해서 자꾸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2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허구의 구조와 아까 물어보면 모를 거다. 다시 한번 쓰겠습니다. 밑에는 허구의 구조죠. 허구의 구조는 안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뭡니까? 공리의 구조, 납득이 되는 구조, 누구나 동의하는 구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공통점을 생성할 수 있는 그런 언어의 개념들의 남발.
그래야 사회에서 한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리의 구조. 참 이 김치찌개 맛있네요 하는 이 공리의 구조. 속으로는 맛있으면 뭐합니까? 이 세상 불로 멸망하는데. 이게 허구의 구조. 맛있는거 많이 먹고 지옥에나 가라. 이게 허구의 구조. 참 맛있네요. 아이고 떡을 왜 이리 맛있게 했습니까? 이게 공리의 구조.
위에는(공리의 구조) 생존. 이거는(허구의 구조) 뭐냐? 이거는 생명.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구조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선언을 했으니까 이 말씀이 21장에서 적용을 해야되거든요. 적용을 할 때 여기는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21장에 갑자기 제자들이 바닷가에 갔을 때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야 여기에 분명히 죽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공리의 세계가 공리의 구조가 형성이 되어있지요. 거기는 죽은 예수님은 끼어들 수가 없어요. 인간들의 고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한 고집하거든요. 나타나지 않는 주님이 나타나버렸어요.
성령은 주님의 고집에 따라 우리한테 온 거에요. 이쯤되서 성령와야 된다해서 성령온게 아니에요. 뭐 뜨겁게 기도한다고 성령오는게 아니고 성령은 우리 허락없이 갑자기 들어닥치는 겁니다. 갑자기 들어닥치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 앞에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에 의한 주체로 드디어 소명받는 거에요.
너의 모든 형편은 내가 임의로 조성해놓은 것이다. 화단에 맨드라미가 스스로 맨드라미 될 수가 없어요. 맨드라미 이름 조차도 내가 있는 그 자체가 사건이 되야 맨드라미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이 있어야 되지요. 자기 전에 맨드라미 잘 컸네 해봐야 내가 나 보고 할 소리가 아니에요. 누군가 나를 보고 아주 정확하게 제대로 살아왔다고 언급을 해주는 거에요.
그게 바로 무슨 관계입니까? 이게 아까 허구의 구조에서 정리된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예상 못한 겁니다. 예상 밖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한테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자기가 한 게 아니고 돌려드리죠.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일. 사랑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사랑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러면 안되고 사랑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애쓴다고 얻는게 아니고 돌려드려야 돼요.
주께서 주셨잖아요. 아 왜 이래요. 손을 두 손 이렇게 모아야 돼요. 왜 이래요 해야 돼. 한손으로 왜 이래요 이러면 안되고 다 드려야 돼요. 왜 이러십니까.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에이 뻔히 알면서 고린도전서 15장 8절 내가 안다니까. 알면 뭐합니까.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리는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환란과 핍박 온다 할지라도 이 사랑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놓고 돌아서면 그 사랑을 잊어버려요. 왜? 사랑을 어디서 잊어버립니까? 허구의 구조에서 사랑이 내가 안 망하니까 사랑이 살아나다가 갑자기 공리의 구조에서 내가 똑똑해 지니까 사랑이 날라가 버렸어요. 내가 뭐 한 거 같애. 예상대로 뭔가 Boys be Ambitious 내 꿈대로 이룬거 같애. 이렇게 되면 이제 내 계획대로 목적이 기대가 있으면 공리의 구조에 들어서 버리죠.
예수님 오셔가지고 예상 밖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체가 되는 거에요. 하나하나 명령합니다. 하나하나 명령하면서 여기서 아까 제가 이야기해드릴 거에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했습니다. 그 대목을 조금 더 설명해볼게요.
이스라엘 이름은 전쟁하는 민족이고 이름 자체가 전쟁이에요. 이스라엘. 전쟁하는 용도로 했어요. 이스라엘. 전쟁을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결실물이 나오죠. 이걸 이제 전리품이라고 합니다. 전리품. 전쟁해서 얻은 전리품. 이 전쟁의 하나님이 최초로 등장하는게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 등장했어요.
아브라함이 318명 사병가지고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 이겼잖아요.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입니까? 하나님의 승리죠. 아브라함이 전쟁 통해서 알게된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이에 전쟁하는 하나님을 보내셔가지고 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전쟁은 뭐냐 하면은 이게 하나의 전리품 결실을 내려면 이스라엘은 전쟁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할 수가 없지요.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게 요한복음 14장 잠깐 볼까요? 이게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어요. 15장이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그 뒤에 쭉 나오는 이야기 뭐냐 하면은 포도나무가 뭐를 맺어야 된다?
포도라는 과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해서 하지요. 그 과실이 뭐냐? 21장에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사랑인거에요. 사랑. 그게 사랑. 그걸 로마서에 오게 되면 속죄 또는 대속이라는 말로 할 수 있어요. 속죄 또는 대속, 화목제물. 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화목제물. 다 그런 이야기란 말이죠.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랑이라 할 때는 나와 주님하고 사랑해야지 하지 말고 사랑이란 반드시 뭐냐 하면은 사랑은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여기서 결과물 결실물만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참포도나무를 보냈더니만 이스라엘이 나중에 뭐가 됐다? 들포도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뽑아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거는 뽑힐 대상이에요. 누가 지옥 갑니까? 사랑이 없는 사랑을 모르는 자가 지옥가는 거에요. 왜? 주께서 원하는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 말고 행함이 나온다든지 자기 의가 나와 버리면 다 뽑혀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사도는 뭐냐 하면은 사랑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겠지요. 사랑의 사도가 되는 거에요. 주께서 맺은 결과물로써 움직이는 거에요. 결과물로써.
사랑이 나오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무슨 길을 가야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의 길을 가야 돼요. 자기를 부정하는 길로 가야돼요. 요한복음 11장에서 두 가지 나옵니다. 자기 부정이. 첫번째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됩니까? 물었고 두번째 질문은 뭐냐 하면은 저 사도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물었지요? 사도요한.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됩니까? 나. 저 사도요한과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 이 둘 다가 사랑의 열매에는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 뭐를 평생을 무엇을 제공하느냐 하면은 나를 제거해버리는 쪽으로 상황이 그렇게 베드로를 몰아가요. 자기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베드로가 어디서 죽었지요? 어디에 잡혀갔지요? 나중에? 베드로가. 베드로가 어떻게 죽었다 하는 것은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요. 그러나 전설에는 나와 있지요. 쿼바디스 보면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로마까지 가가지고 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시체가 로마 지금 베드로 성당 밑에 베드로 있다 해가지고 그렇게 자기가 잘난 체 어른인 척 하잖아요. 너 주먹 굵다 해가지고 너 팔뚝 굵다 해가지고. 그걸 첫째 교황은 베드로라고 보지 않습니까. 전설에 보면 그런게 많아요. 야고보는 어디까지 갔다. 스페인까지 갔다. 온 천지 12제자가 다 퍼졌어요. 온 천지에. 인도까지 간 사람도 있고. 도마는 인도까지 가고. 있는데 믿을게 못 되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승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거에요. 자, 요한복음 21장 24절 봅시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은 요한복음 자체가 끝이 아니고 이게 하나의 교본이 되는 거에요. 교본. 뭐냐 하면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지상의 뭐를 남긴다? 결실물. 하나의 포도나무를 양산, 포도농사를 짓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포도농사.
이 포도가 이 말씀을 담을 때 다른 포도가 있고 다른 포도로 이어지는 거에요. 이게 공통질량점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하거든요. "아 나는 죄가 많아서 주님 못 믿겠어요." "걱정하지마 베드로가 나는 세번씩이나 부인했어. 됐냐?! 나는 수제자인데 세번씩이나 부인했어. 됐냐!!"
뭐가 이겼다? 인간이 죄를 뭐가 이겼다? 사랑이 이겼다. 이래도 되고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닭 우는 타이밍 맞춰서 세번씩이나 부정했다. 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니까. 의인은 소용없어요. 속죄의 대상을 끄집어내야 사랑이 극대화가 되니까요.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는 허구적인 우리가 이 땅에서 허구적인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에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베드로야 저 사람처럼 살아 있느냐? 누가 오래 사느냐?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내 마음대로 합니까? 묻지 말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너는 너의 주체는 주님이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은밀하게 사용하시니까. 왜 은밀하냐? 주님이 계시는 자체, 성도 자체, 베드로 자체가 이 세상이 무슨 세계냐? 죄가 범람하는 죄의 천지, 죄의 넘실거리는 그러한 거대한 죄의 대항이기 때문에. 대항. 큰 바다거든요.
이 말씀은 늘 우리의 인생 가운데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끝까지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의 뜻대로 가장 합당하게 꼭 있어야 될 자리를 정확하게 이끌고 가신다는 거에요. 위험한줄 알아요. 하지만 그 위험한 길이 주님 가신 십자가 그 위험한 길이 유일한 길이에요.
그 위험하다는 것은 가난하다 어렵다 못산다가 아니라 내가 꿈꾸고 예상한 것이 전부다 좌절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스스로 설 수 갈 수 없는 눈을 맞춘, 주님에 의해서 나를 눈 맞추면서 매일같이 눈 주면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우리 죄를 드러내게 하시는 그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그러한 이스라엘 주의 이스라엘 참포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포도가 얼마나 귀한데 우리는 나만의 어떤 성과를 얻고자 그러한 공리구조에서 몸담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작용하셔서 그 자체가 죄고 허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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