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강-YouTube강의(흐름)20191001-이 근호 목사
제289강, 제목은 ‘흐름’. 이 흐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제일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홍수나서 개울천에 벌건 진흙색의 흙탕물이 흘러가는 걸 생각하면 되겠지요. 흐름이라는 것은, 그냥 거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은 그 탁류에 의해서 전부다 휩쓸려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큰 비가 내려서 앞 개울천이 넘쳐 가지고 냉장고든 돼지든 막 떠내려 갈 때에, 그걸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존재라는 것은 흐름을 당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죠.
이 흐름이 지금 우리는 못 느끼지만 사실은 이 큰 강물, 우리가 어떻게 대처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흐름을 우리는 매일같이 당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시간이라는 겁니다. 시간이라는 홍수에 아무리 노력해도 당할 수 없어요. 어떤 분은 막 이 바닥을 치면서 이야기해요. 청춘을 돌려 달라고. 또 어떤 사람은 시계야 멈춰라. 저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는데 왜 우리 인생의 시계는 왜 안 멈추냐는 노래도 있어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제목은 ‘고장난 벽시계’ 유튜브 한 번 찾아보세요, 나옵니다.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왜 둔하냐 하면 우리 인간을 흐름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봐요. 존재인데 그냥 존재라고 하게 되면 잘 의미가 안다가오니까 흐름 안에서 흐름을 일시적으로 자기 임의로, 지 마음대로 스톱을 시켜가지고 결정체를 만들어요. 그게 바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인생이 하는 모든 것이 흐름이 대세인데 뭔가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멈추게 되면, 흐름에 반하니까, 대항하니까 존재로 산다는 것이 억지이고 참 괴로워요.
그냥 위에서 탁류가 밀려오면 밀리는 대로 그냥 휩쓸리면 되잖아요. 휩쓸리기가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내 존재감이 날라가 버리니까. 존재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이죠.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나서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라고 신에게 또는 하나님에게 물으면 ‘너라는 것은 원래 없는 거야. 너 마음대로 네가 생각하고 상정하고 결정체를 만든 거야. 너는 아담의 흐름 속에서 일부이지 너라고 따로 뽑아내지 마’ 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나 그런 말을 잘 이해 못할 거니까 전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1장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흐름이 존재한테 손에 잡히질 않죠. 자기가 자꾸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중국집에 가서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그래 결심했어. 그래서 짜장면 시켜 놓으면 남 짬뽕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고, 짬뽕을 시켜 놓으면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고.
그러니 본인의 존재를, 결정체를 만들어 놓으니까 흐름을 모르고 흐름을 억지로 만들어서 흐르는 탁류를 손으로 뭉쳐가지고 나라고 우기니까 그 ‘나’가 현실과 맞딱뜨리지 않는 거예요. 그게 헛된 거예요. 니가 널 위해서 사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 어떻게 바람을 뭉쳐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 내냐.
그래서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내 중심으로 자꾸 곧게 하려고 하는데 세상은 나를 구부려요. 내 뜻대로 안된다는 말이죠. 2장에 보면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흐름에다가 딱 이건 나라고 이렇게 규정을 해놓고 ‘내가 나를 이제부터는 행복케 해야지, 한 평생 살면서 보람있게 살아야지’ 백 날 해봤자 ‘나는 웃으면서 살아야지’ 백 날 해봤자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2장 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웃어봐도 오래 가지도 않고 심지어 슬퍼하는 것도 슬퍼해봐야 자기 눈두덩이만 붓게 될 뿐이죠.
근본적으로 인생 살면서 힘든 이유가 나는 흐름에 휩싸이고 있는데 그 흐름이 눈에 안들어오고 다른 결정체, 그걸 남이라고 하죠, 타인. 타인의 존재 그리고 내 존재, 이런 것들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왜 저 사람처럼 행복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왜 건강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웃으면서 못 사는가. 그런 열등의식이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할까 하는데 흐름에 휩싸이는 자체가 최고의 즐거움이에요. 그 속도감 있잖아요. 매일 하루가 휙휙 지나가는 속도감. 오토바이 타는 것보다 더 빨라요. 빠라바라바라밤 애들이 오토바이 타는 이유가 뭡니까? 속도감이죠. 멈출 수 없는 것. 브레이크 없이 비탈길을 그냥 질주하는 것. ‘분노의 질주’라는 영화가 있듯이 그냥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거죠, 정신없이.
멈춰야 보인다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볼 필요가 있어요? 그걸 본들 그게 허상이죠, 환상이거든요. 내가 멈춰서 ‘비로소 나구나’ 봤다고 한들 그것은 뒷통수 옆에서 흐름이 때려버리면 그것은 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와해되고 무너져야 될 모래성 같은 겁니다.
여기 2장 4-5절에 보면,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뭘 기대하겠어요? 나는 내년에 이 정도 되어야지, 두 달 뒤에는 이 정도 잘나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자기 현재의 행복이 없으니까, 지금 불행을 느끼니까 시간적으로 자꾸 지연을 시키는 거예요. 내년되면 잘되겠지, 내일이면 잘되겠지, 나이 40되면 무슨 낙이 있겠지. 무슨 40되면 낙이 있습니까? 그 낙을 내가 누린들 낙을 누린 내가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탁류에 휩쓸리면 그것도 다 와르르 무너질 건데.
10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내 중심으로 안다고 우긴 것이 전혀 하나님 앞에 동의가 안되는 내 중심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러한 허무 속에서,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의 방향을 봐야 되요. 도대체 그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를. 방향이 골로새서 1장 16절-17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니까 모든 것이 지금 한 곳으로 모이는 거예요. 블랙홀 같아. 진공청소기 같아. 지익-하면 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방향을, 어느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우리가 머리카락부터 들어가든지 빨려 들어가면 되잖아요. 왜 고집을 부립니까?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이 있어야 된다고 우기니까 본인도 힘들고 남들도 힘들고 식구들도 다 힘든 거예요. 주변 사람 다 괴로운 겁니다.
죽으면 되잖아요. 죽는 게 우리 할 일이에요. 왜? 그게 주를 위한 죽음이라면. 살 생각하지 말고 매일같이 죽음으로 끌려갈 때 “주여 누가 죽이십니까?” 주님이, “내가 죽인다.” 그러면 “죽여 주옵소서. 매일 매일 저희를 죽여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마음 편하게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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