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사물과 인간,영광과 수치 1910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17. 07:07
2019-10-15 23:45:26조회 : 25         
유튜브강의 (290강, 291강) 사물과 인간, 영광과 수치 191015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290강           음성               동영상


291강           음성               동영상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7TQrEYAezdQ"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61J0dUBarw"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이하림 (IP:61.♡.247.43)19-10-16 22:42 
290강-YouTube강의(사물과 인간)20191015-이 근호 목사


제290강, 제목은 ‘사물과 인간’. 제목을 의도적으로 ‘인간과 사물’ 이렇게 하지 않고, ‘사물과 인간’ 사물을 제가 앞장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계속 내가 누구냐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동원시키느냐 하면 괜찮아 보이는 주변에 있는 사물이나 물건 같은 것을 자꾸 수집하죠. 끌어 모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돈이죠.

돈이 많으면 나는 가치 있고 돈이 없으면 나는 가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자본주의에서는 돈이라 하고 옛날에는 좋은 집에 사는 것.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좋은 집에 살 때 나는 가치 있고, 지하 물 새는 데, 태풍 오면 물 새는 데에 살게 되면 나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겠죠.

그러면 그러한 인간들의 본성, 인간은 왜 그런가를 여러분들이 생각해봐야 돼요. 마태복음 6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솔로몬이 옷을 입었을 때 그 솔로몬 옷은 평민들의 옷이 아니고 왕이기 때문에 평민들이 입어서는 안되는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해주니까 최고급의 옷을 걸침으로써 그 옷을 보고 다른 사람보다 격차나는 차이성을 왕이 스스로 갖게 되겠죠.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왕이 평민 옷을 입고 그냥 밤중에 몰래 골목에 도회지를 다닌다고 할 때, 사람들이 그 사람을 왕으로 쳐주겠습니까? 왕의 얼굴도 모르고, 왕 같으면 왕의 격에 맞는 화려한 옷을 겸비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이 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인간이 내가 누구다 라는 것은 인간인 내가 누구라고 말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뭔가 그 격에 맞는 사물을 걸쳐야 돼요. 집이 좋다든지, 집의 평수, 자기의 대지가 넓다든지, 차가 고급차라든지, 씀씀이가 명품을 쓴다든지 그런 것이 있을 때 사물이 자신의, 인간의 본질을 대변해준다. 그게 인간 사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도 충분히 인간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거든요 (마태복음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유대사회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왕이에요. 천군천사를 대동해서 오신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묵시적 존재니까 하늘과 땅이 아주 요란스럽게 오시겠지 라고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그 발상은 누가 끄집어냈느냐? 인간들이 끄집어낸 겁니다. 자,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의 발상에 동조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동조를 하기는커녕 반대로 오시죠, 반대로.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비천하게 오시는 이유가 뭐냐? 비천하게 오시는 이유가.

마태복음 6장 다시 보게 되면 6장 28절,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자, 의복을 위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위를 덮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게 아니고, 그 의복이, 그냥 추위 같으면 거리에 있는 양 잡아서 양털 그냥 입으면 되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를 격상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그러한 의도가 담긴 옷을 찾는 겁니다, 그런 옷을.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 네 맨 몸에 옷 걸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산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그 의식이 네가 걸친 옷을 충분하게 대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라면 해야 될 일이 이제 생겼죠?

겉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태여 뭐 옷 입은건 갖다 벗고 남 줘라 이 말이 아니에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명품을 걸쳐도 상관없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 중심을 본다는 것이 항상 유지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의 모양새나 그 사람의 갖춘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대우를 받겠지만 그 기준은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하나님 생각에 동감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죠. 솔로몬의 모든 입은 것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여기서 꽃 자체는 옷이 필요치 않는 존재가 꽃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꽃과 솔로몬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 꽃에는 무엇이 생생하게 살아 있느냐 하면 염려하는 것도 없고 살려고 애쓰지도 않고. 왜냐하면 꽃은 다음에 아궁이에 들어가니까. 내일되면 끝나니까. 그게 꽃이거든요.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내일이 있어요, 없어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지는 한 송이의 국화꽃이라도 좋소’ 이렇게 되어야지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저녁에 지는 한 송이 국화더라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할 때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남 탓을 할 이유가 없죠. 너 때문에 내 목숨 끝났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완전히 고통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꾸 남 탓을 한다는 것은 꼭 바보같아.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 왜 사람하고 비교합니까? 주님은 꽃하고 비교하라는데. 우리는 뭐 잘났다고 남들과 비교해요? 남들과 비교하니까 남 탓 돌리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겁니다.

들에 있는 들풀하고 비교해보지 왜? 그래놓고 성경 안다고요? 성경 보세요. 우리 누구하고 비교하라는 겁니까? ‘너는 꽃보다 못해’ 라는 것을 지적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린 지적받아 마땅합니다. 쓸데없는 비교나 쓸데없는 경쟁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물로 우리 자신을 감추기 위한 시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사물을 걸쳐도 새삼스럽게 그걸 비천하게 거지꼴한다 그런 위장하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것을 주시더라도 이건 거저주시는 거라는 생각을 유지하라 이 말입니다, 거저주시는 걸로. 하나님께서 옷을 거저줬다는 말은 그 옷을 입고 있는 이 몸뚱아리도 주께서 거저주신 거예요. 남자가 되든 여자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거저주시는 거예요. 뭐 수술해서 아프더라도 거저주시는 거고, 안하는 것도 뭐 거저주시는 거고. 

항상 비교대상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꽃 그리고 아무것도 걱정 안하는 참새, 차라리 그들을 보고 우리가 많이 배워야 된다는 것.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스승들이 이 대자연에 찾아보면 다 깔려있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고 남 탓하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산 것도 ‘고맙습니다’ 할 수 있어야 돼요.

 이하림 (IP:61.♡.247.43)19-10-16 22:43 
291강-YouTube강의(영광과 수치)20191015-이 근호 목사


제291강, 제목은 ‘영광과 수치’. 하나님의 영광. 아, 사람들은 그걸 목표로 잡습니다. 천사의 영광, 가브리엘 천사의 그 자유분방함. 뭐 날개 있으니까. 세상에 그냥 수시로 들어오잖아요. 그 가브리엘 천사가 공산당을 무서워할까요? 북한의 핵을 무서워할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안무서워하겠죠.

그럼 물어봅니다. 천사가 나아요, 성도가 낫습니까? 어느 신분이 위대합니까? 성도의 신분이 위대해요. 우리가 천사보고 절하면 안돼요. 천사가 말립니다.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 왜 저한테 절합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22장) 사도요한이 천사한테 절하려고 하니까 천사가 기겁하죠. 저한테 절하지 마세요, 당신이 저보다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천사가 부러워요, 죽는게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죽는게 있습니까? 역시 우리도 죽는게 없는데 왜 우리는 매사에 벌벌 떠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천사의 영광을 부러워하고.

사실은 성도의 영광은 천사의 영광보다 더 우수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영광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거든요. 독생자 죽으신 분이 갖고 있는 영광을 공유합니다, 우리 성도는. 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뭘 더 요구한다는 자체가 뻔뻔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받을 거 다 받고 주님께서 주실 거 다 줬는데. 세상 것 없다고, 인생 사는 게 힘들다고 더 주시옵소서 하고 있단 말이죠.

마치 광야에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는 방향이 어느 쪽이냐 하면 애굽 쪽이 아니고 반대방향이거든요. 약속의 땅에 가면 주님과 함께 산다는 조건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요. 그러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에 관심이 없고 애굽의 생활과 광야의 생활을 비교해보는 거예요. 애굽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짜증 지대로 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을 욕할 잽이 못됩니다. 똑같아요, 우리가. 장래에 뭐가 기다리는 것은 생각 안하고 당장 내놓으라는 거죠, 당장. 당장 뭘 내놓느냐? 애굽에서 희망했던 것을 제공해달라는 그런 쪽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늘 멱살을 쥐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죠. 다시 말해서 우리를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느냐는 말이죠, 우리 인생을.

모든 기도에 그게 들어 있어요. 주께서, 당신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잖아요 라는 그런 불평이 깔린 채 기도를 하게 되거든요. 인생이 내 원대로 안되는 것은 주께서 개입해서 그렇잖아요 라는 불만이 쫙 깔려 있어요. 그런 불만을 본격적으로 이야기 안하죠, 기도 응답 안될까 싶어서. 그래서 먼저 이렇게 아부를 하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여. 온갖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좋은 걸 하지만 그 내부에는 뭐냐 하면 불만이 가득한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오늘 제목대로 자기 사는 꼴이 수치스럽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영광스러운 주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수치스러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있어요? 없습니다. 수치에 대해서 주님이 우리보다 더 바닥이에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주님을 믿습니까?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단한 주님 믿습니까? 그것은 악마가 우리 앞에 전면적으로 내세운 아이돌 예수죠, 아이돌 예수. 방탄 소년단 같은 예수죠. 우리가 구미 당기는, 우리가 안믿고는 못배기는, 정말 믿고 싶은 요소들이 가득 찬, 악마가 만든 가짜 예수죠.

그러나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수치스러운 주님이에요. 우리는 양 같아서 그쪽으로 얼굴 돌리기도 싫어요. 그래서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주님한테 다가서기 무서운 이유가 주님께서 지금 내 인생을 손대가지고 더 망칠까 겁나는 거예요.

지금 이만한 인생도 내가 헉헉거리면서, 허겁지겁 이거 추스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께서 와가지고, 안그래도 망가진 인생 군화발로 깡통 밟듯이 지금도 이만큼 일어서기가 고된 인생인데 더 밟아버리면 나 어떡하라고. 여기서 더 밟히면 나 어떡하라고. 자살이 죄인 줄 알지만 정말 주님께서 나를 자살로 몰아넣으려고 아예 힘을 쓰시는게 아닌가 오해할 정도로 그렇게 당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복음이 좋다고요? 사람들은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세요. 제발 나에게 복음 그만. 그만 그만. 제발 복음은 그만 들려주세요. 지금 들은 것도 감당 안되는데, 저 감당 못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감당하라고 주는 줄 알아요? 복음을 감당하겠다는 너 자체가 허상이에요. 진짜 네가 아니고 네가 조작한 가짜 나라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복음 전하지 말라고 해도 또 복음 전해야 되겠어요.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6장 8절. 일부러 약올리고 애먹이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우리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되어 있죠? 그러면 먼저 우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무슨 모습이다? 징계를 받는 모습. 나쁜 일을 한두 개 한 게 아니고 진짜 화성연쇄 살인범 같아요.

너무 많은 잘못을 한 것에 부합한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도가. 실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이름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한 자 같으나” 다시 말해서 아이고, 나라면 사도바울 당신, 나는 자살한다 아이고 저래도 사나 할 정도로 나 같으면 근심거리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것 같으나 우리는 뭐다? “기뻐하고” 이게 복음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너나 부자되라 뭐 남까지 부자되게 할 필요있나 이렇게 욕 얻어먹을 정도로 남을 즐겁게 하고 남을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있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너무나 인내심이 많아서 듣고 있지만 인내심 없는 사람 같으면 그만 그만 그만. 좀 긍정적인 거 없나? 우리에게 희망스러운, 우리로 하여금 살 의욕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 없습니까? 라고 노골적으로 왜곡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영광이라는 것은 내가 분명히 정답 말씀드립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영광. 더 이상 욕심내지 마세요. 주님이 수치스럽든 주님이 꼴아 박았든 어째든 주님의 어떤 어려움이냐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런 주님이라도 좋아요’ 함께 있는 그 외에 다른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특히 여기 앞에 보면 “우리가 망하는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승리하고. 이렇거든요. 거꾸로 사는 것에 익숙해집시다. 아, 참 말은 쉽다. 정말 말은 쉬운데 우리 힘으로는 안되지만 주께서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거꾸로 살게 하실 겁니다. 영광과 수치. 반대로 생각하시면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