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강-YouTube강의(사물과 인간)20191015-이 근호 목사
제290강, 제목은 ‘사물과 인간’. 제목을 의도적으로 ‘인간과 사물’ 이렇게 하지 않고, ‘사물과 인간’ 사물을 제가 앞장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계속 내가 누구냐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동원시키느냐 하면 괜찮아 보이는 주변에 있는 사물이나 물건 같은 것을 자꾸 수집하죠. 끌어 모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돈이죠.
돈이 많으면 나는 가치 있고 돈이 없으면 나는 가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자본주의에서는 돈이라 하고 옛날에는 좋은 집에 사는 것.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좋은 집에 살 때 나는 가치 있고, 지하 물 새는 데, 태풍 오면 물 새는 데에 살게 되면 나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겠죠.
그러면 그러한 인간들의 본성, 인간은 왜 그런가를 여러분들이 생각해봐야 돼요. 마태복음 6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솔로몬이 옷을 입었을 때 그 솔로몬 옷은 평민들의 옷이 아니고 왕이기 때문에 평민들이 입어서는 안되는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해주니까 최고급의 옷을 걸침으로써 그 옷을 보고 다른 사람보다 격차나는 차이성을 왕이 스스로 갖게 되겠죠.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왕이 평민 옷을 입고 그냥 밤중에 몰래 골목에 도회지를 다닌다고 할 때, 사람들이 그 사람을 왕으로 쳐주겠습니까? 왕의 얼굴도 모르고, 왕 같으면 왕의 격에 맞는 화려한 옷을 겸비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이 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인간이 내가 누구다 라는 것은 인간인 내가 누구라고 말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뭔가 그 격에 맞는 사물을 걸쳐야 돼요. 집이 좋다든지, 집의 평수, 자기의 대지가 넓다든지, 차가 고급차라든지, 씀씀이가 명품을 쓴다든지 그런 것이 있을 때 사물이 자신의, 인간의 본질을 대변해준다. 그게 인간 사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도 충분히 인간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거든요 (마태복음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유대사회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왕이에요. 천군천사를 대동해서 오신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묵시적 존재니까 하늘과 땅이 아주 요란스럽게 오시겠지 라고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그 발상은 누가 끄집어냈느냐? 인간들이 끄집어낸 겁니다. 자,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의 발상에 동조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동조를 하기는커녕 반대로 오시죠, 반대로.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비천하게 오시는 이유가 뭐냐? 비천하게 오시는 이유가.
마태복음 6장 다시 보게 되면 6장 28절,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자, 의복을 위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위를 덮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게 아니고, 그 의복이, 그냥 추위 같으면 거리에 있는 양 잡아서 양털 그냥 입으면 되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를 격상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그러한 의도가 담긴 옷을 찾는 겁니다, 그런 옷을.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 네 맨 몸에 옷 걸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산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그 의식이 네가 걸친 옷을 충분하게 대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라면 해야 될 일이 이제 생겼죠?
겉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태여 뭐 옷 입은건 갖다 벗고 남 줘라 이 말이 아니에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명품을 걸쳐도 상관없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 중심을 본다는 것이 항상 유지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의 모양새나 그 사람의 갖춘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대우를 받겠지만 그 기준은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하나님 생각에 동감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죠. 솔로몬의 모든 입은 것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여기서 꽃 자체는 옷이 필요치 않는 존재가 꽃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꽃과 솔로몬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 꽃에는 무엇이 생생하게 살아 있느냐 하면 염려하는 것도 없고 살려고 애쓰지도 않고. 왜냐하면 꽃은 다음에 아궁이에 들어가니까. 내일되면 끝나니까. 그게 꽃이거든요.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내일이 있어요, 없어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지는 한 송이의 국화꽃이라도 좋소’ 이렇게 되어야지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저녁에 지는 한 송이 국화더라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할 때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남 탓을 할 이유가 없죠. 너 때문에 내 목숨 끝났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완전히 고통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꾸 남 탓을 한다는 것은 꼭 바보같아.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 왜 사람하고 비교합니까? 주님은 꽃하고 비교하라는데. 우리는 뭐 잘났다고 남들과 비교해요? 남들과 비교하니까 남 탓 돌리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겁니다.
들에 있는 들풀하고 비교해보지 왜? 그래놓고 성경 안다고요? 성경 보세요. 우리 누구하고 비교하라는 겁니까? ‘너는 꽃보다 못해’ 라는 것을 지적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린 지적받아 마땅합니다. 쓸데없는 비교나 쓸데없는 경쟁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물로 우리 자신을 감추기 위한 시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사물을 걸쳐도 새삼스럽게 그걸 비천하게 거지꼴한다 그런 위장하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것을 주시더라도 이건 거저주시는 거라는 생각을 유지하라 이 말입니다, 거저주시는 걸로. 하나님께서 옷을 거저줬다는 말은 그 옷을 입고 있는 이 몸뚱아리도 주께서 거저주신 거예요. 남자가 되든 여자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거저주시는 거예요. 뭐 수술해서 아프더라도 거저주시는 거고, 안하는 것도 뭐 거저주시는 거고.
항상 비교대상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꽃 그리고 아무것도 걱정 안하는 참새, 차라리 그들을 보고 우리가 많이 배워야 된다는 것.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스승들이 이 대자연에 찾아보면 다 깔려있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고 남 탓하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산 것도 ‘고맙습니다’ 할 수 있어야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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