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밭이랑 1910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16. 20:45
2019-10-11 00:46:50조회 : 189         
밭이랑 19101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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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19.♡.152.148)19-10-16 15:58 

안양20191010a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5장17절부터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자, 여기서요, 지금 이 본문에서 앞뒤가 안 맞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하고 성정이 같다. 우리하고 일반적으로 똑같다, 이 말이죠. 사는 게. 똑같은데 그 분이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가 나중에 기도하니까 비가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취미로, 재미로 “아휴, 나 삼년 육 개월 비 안 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도할 그러한 보통 사람이 있습니까? 일반화된 사람 있어요? 없지요. 그러니 여기서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평소에 하는 그 기도를 그걸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기도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일반화된 것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다 기도하잖아요. 일반인들은 답답하면 기도한다고요. 일반인들은.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의 기도가 과연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기도냐, 이 말입니다. 무슨 심술이 나가지고 삼년 육 개월 동안 비 오지 말라는 하는 그게 어디 있어요. 물론 엘리야가 요즘 같으면 북한에 태풍 불어라. 할 수 있지만 그건 사적인 원한과 보복, 복수, 분노, 이게 표출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그런 게 없어요. 엘리야의 기도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엘리야의 기도는 바로 성정이 같은 일반인의 기도하고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보통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기도거든요. 이걸 사적인 기도라 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이걸 고상한 말로 이야기하면 ‘개별 사실’이에요. 개별적인 사실이에요. 인간은. 보통 인간은 개별적인 사실이에요. 세상에 자기 이웃이 뭐하고 백 미터 뒤에 뭐하는지 몰라요. 아니 아예 알고 싶지도 않고. 개별적인 것만 집중해 살아가는 것이 일반인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엘리야가 삼년 동안 비 안 와가지고 자기한테 어디 혜택 얻는 거 있습니까, 개별적으로 이익 얻는 거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 엘리야의 기도가 개별적인 사실이 아니고 이건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개별적인 사실이 아니고, 이건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보편 명제’가 되는 겁니다. 보편 명제.

보편 명제는 흔히 말해서 뭐냐 하면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의 인간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만 아니고 그리고 엘리야가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모든 인간에게 공히 다 적용되는 보편적인 어떤 규칙, 원리, 사실, 그것을 엘리야에게 개별적으로 엘리야에게 기도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는 분명히 이건 개인적입니다. 개인입니다. 분명히 개인인데, 이 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냐 하면 그는 우리와 성정이, 우리와 모든 요소가 동일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성정이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은 밥 안 잡숴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어야 되고 잠을 자야 되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하고 성정이 똑같지요.

하지만, 그 예수님에 일어나는 것은 그 누가 예수님에 일은 사적인 문제고, 개인적인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는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견해잖아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 세상에는 4대 성자가 있다.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4대 성자라 하잖아요. 그럼 4대 성자라 하는 것은 굉장히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지 않고서는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말을 바꿔서 말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이 어떤 어린애가 고백하던 아주머니가 고백하던 노인네가 고백하던 그 고백은 남들 보기에 개별적인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주되심이라 하는 것은 개별적인 겁니까? 보편적인 겁니까? 보편명제지요. 예수님 주 맞잖아요. 천지를 창조하신 분 맞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님을 주된다고 해서 그 안 믿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식구들, 식구 구성원, 또는 일가  친척들, 안 믿는 친구들에게 기죽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기죽으면 안 되지요. 


내 안에 보편이 들어있는데 왜 감히 개별이 까불고 있어요. 왜? 개별이. 

나는 지금 보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주되심이다. 

이건 내가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서 하는 겁니까? 

성령이 임해서 되는 거예요. 일자무식이라도.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건 미친 거예요. 그러면서도 “니가 뭐 잘나서 예수님을 주라고 하느냐? 나는 안 믿는데, 나는 좋은 대학 나와서도 안 믿는데 니는 중학교 밖에 안 나온 게 예수님을 니가 어떻게 안다고 주라고 하느냐?” 라고 한다면 “나? 나, 니하고 성정이 똑같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니하고 다를 바 없어. 똑같아. 나도 니하고 그렇게 그런 인간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 하는 것을 알았다는 말은 결국은 주께서 다루신다는 뜻이잖아요. 다루신다는 뜻이에요.

신약에는 성도를 통해서 성령의 일이 나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성신에 의해서 일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서5장에서는 성령에 의해서 일한다고 하는 것도 되고, 야고보서5장에서는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우리가 성정이 같으나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얼마나 오래했는가는 묻는 게 아니지요. 엘리야가 기도할 때 꿇어 앉아 했는가, 양반다리 했는가,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개별적인 어떤 조건을 극복하고 그 조건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인 것이 그냥 나와 버린 거예요. 어떤 개별적인 상황이 몸이 아프다든지 상당히 건강할 때는 이게 “컨디션이 좋아가지고 기도가 되는데 아플 때는 기도가 안 돼.” 그 사람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안 아프다는 조건하에 기도가 잘된다 하는 것은 그것은 주께서 유발한 현상이 아니다, 말이죠. 다시 말해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에서 개별로 그냥 추락하는 거죠. “당신 취미가 뭡니까?” “기도 하는 거.” “몇 분 동안 합니까?” “몇 분이라니? 나는 한 번 하면 두 시간 반입니다.” 그 사람 취미지요. 새벽제단 쌓는 거 취미죠. 새벽에 살 빼려고 운동하는데 그게 취미지요. 살 빼는 거나, 새벽기도 가는 거나 차이점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새벽기도 가야 새벽이 깨어집니까. 내 안 가면 새벽이 안 깨어져요? 어떤 목사의 책이 있지요.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에 깨워서 뭐할 건데? 데모할 건데 또. 전부다 개별적이에요. 개별적. 보편적인 것이 나오지 않으면 전부다 아무리해도 하나의 오락이고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 활동이에요.

취미활동의 특징이 뭐냐, 그냥 즐겁고 시간 잘 보내는 그런 거죠. 그러나 이 보편적인 것은 어떤 현상이 이러나는가 적어볼게요. 물어뜯기에요. 어떤 사람이 보편적인 것을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오면 주위에서 왁! 달려들어서 물어뜯깁니다. 이건 본인이 말릴 수도 없어요. 내가 내 의도에 의해서 어디 뭐 보편적이 나올 거 같으면 내가 그걸 금지하거나 내가 중지하면 되는데 내게서 나오는 이 법은 금지할 법이 없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금지할 법이 없다 했잖아요. 말릴 수가 없어요.

그 누가 사도바울보고 미쳤다 하니까 “그래, 나 미쳤다.” 미쳤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이게 고린도후서5장에도 나와요. “그래, 나 미쳤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래, 나 미쳤다. 미쳤지만, 미쳤다 현상을 보지 말고 입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보라.” 말이죠. 그게 예수님의 살아계심이에요.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있을 때는 2가지 의미가 있지요. 살아있다. 남들이 나를 한 인간으로 대우할 때 인간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살아있네! 하잖아요. 살아있네. 남들이 나를 알아줄 때, 살아있네! 그런데 남들은 모르는데 주님이 나를 알아줄 때, 사람들은 살아있다고 봐주는 게 아니고 이건 미쳤다고 보는 거예요. 남들이.

성도는 보편적을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보편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해야지 모두다 동의 안하는데 왜 니만 고집하고 있느냐, 이 말이지요. 우리 쪽수로 시합하자. 대결하자는 거예요. 느 교회 몇 명이냐? 이리 나오는 거예요. 진짜 하늘의 진리 같으면 숫자가 많이 모여야지 무슨 진리인데, 가정이 달랑 두 가정이라. 교회가. 무슨 쪽수가 그런 쪽수가 있어요.

진리를 전했으면 전에 교회보다 더 많아야 되지요. 달랑 두 가정. 세 사람밖에 안돼요. 이게 무슨 진리일까요.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이야기했지요. 크라운 프라자 호텔 밤중에 강의한 거. 거기에 나오잖아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주께서 돔처럼 덮어 씌워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개별 쪽수를 계산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두 세 사람을. 뭐냐, 그들은 개인이 몇 명이 모이느냐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느냐, 에요. 누구를.  

주와 주님이 함께 있으면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 처음 들었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주도적으로 계시는 곳을 그런 상태를 가지고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영토는 지상의 영토에 흡수, 통합이 안돼요. 다른 영토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밑바닥이라고 표현합니다. 작용은 하는데 이 세상 영토에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 그걸 대구강의에서는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장이라고 했고, 그 현장이 뭐냐, 사건의 현장이라고 했지요. 거기가면 범인들 다 나가고 없어요. 하지만, 범인이 남기고 간 자국이 발자국이, 핏자국이 있잖아요. 그래서 경찰에서 현장보존하지요. 살인의 추억 그 영화에 송 강호 영화 있잖아요. 화성연쇄 살인범 영화. 거기에 보면 경찰이 흔적 찾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요. 뭔가 남긴 게 있을 것이라고 찾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주님이 살아있다는 흔적을 지상에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러니 인간 쪽에서 천국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단절되어있는 겁니다. 그 단절되어있다는 것. 단절되었음이 흔적으로 내려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 한 하나님 나라의 뭐라고 했습니까? 바닥이죠. 바닥 이게 기도에요. 하나님 나라 바닥의 문양, 모습. 이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무빙,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이건 일반인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고, 이건 이상하게 그런 기도가 나올 리가 없어요. 그런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이 말이죠.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엘리야가 평소에 노림수였던가요? 너그 한 번 죽어봐라. 그런 억하심정이 있어가지고 그걸 한꺼번에 모아서, “주여, 이거 조절합시다. 한 4년 때릴까요, 3년 반으로 할까요?”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둘이 상의한 적 있어요? 없지요. 다른 사람하고 엘리야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그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안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하고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어요.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먹구름이 왔을 때, 먹구름이 오고, 지면 사이에 여기 폭우가 형성되지요. 폭우가 뭐냐 하면 기도다. 이 말입니다. 폭우가. 위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말릴 수가 없지요. 말릴 수가 없어요. 하나의 계시니까.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의 만남이다. 이것을 주일 낮에 ‘경계의 미학’이라고 한 겁니다. 경계선이 갖고 있던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 철수하고 난 뒤에는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모든 통로는 다 좌절돼 있잖아요. 이건 창세기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추방되고 난 뒤에 도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갈 그런 구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없다는 말은 나는 너를 인간으로 안 봐주겠다는 겁니다. 그 만약에 다시 생명나무로 들어올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원래 그 인간다움,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 지닌 사람만 통과되고 나머지는 닫아버리지요.

그 통과하신 분이 최초로 하늘나라 통과하신 분이 누구죠?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최초 했지요. 최초. 초반부터 슬슬 어렵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겠지만. 쉽게 한다고 알아듣는 게 아니니까.

최초. 다른 말로 하면 시작이지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과거가 시작이 아니고 시작은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미래. 미래에 시작이 있어요. 미래에 시작이 있다면 현재 엘리야의 모든 것은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펼침의 반대가 뭐냐 하면 응축입니다. 응축. 모아지는 거예요. 수렴되는 거예요. 엘리야의 기도가 점점 어디에 수렴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도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은 어디에 있느냐, 시작점은 과거의 시작점이 아니고 미래에 시작점이 있는 거예요. 최후의 것. 우리의 시간적 상식은 뭐냐 하면 시작은 과거에 있었고 천지창조가 있었고 천지창조가 악어가 아가리 벌리듯이 펼쳐지게 된다, 이리 보거든요. 이걸 과학에서는 진화론이라 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 우주는 창발적으로 돌발적으로 스스로 자기 전개를 한다 이 말이에요. 자기 전개.

그래서 자기 전개해가지고 계속 무한대로 자체 내에서 어떤 혼돈과 조직을 자체적으로 구성을 하면서 퍼져나간다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방에 가스를 연결하면 연기가 처음에는 일직선으로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지 마음대로 카오스, 혼돈속에 빠지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식으로 우주는 펼쳐간다. 그 혼돈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거기서 질서가 생기는데 코스모스 질서가 생기는데 그 질서가 우주고 그게 빅뱅이 되고 그래서 지금부터 137억년전에 우주가 탄생을 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질서체중에 하나가 이 우주고 다시 이 우주 바깥에 다른 병행되는 다른 우주가 또 자연의 우발성으로서 생겨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우주와 이 우주 사이에 있는 잼처럼 있는 게 뭐냐 그게 중력이라는 겁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게 중력이라고. 중력은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샌드위치처럼 옆 동네에서 아마 올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현대 물리학에서 최첨단 이야기하는 끈이론(string theory), 무려11차원의 이야기. 수학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이라 하는 건 우연한 거고, 근본적인 원리는 뭐냐 하면 진화론이지요. 그냥 펼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뭔가 진화한다. 변화한다. 이 변화 되는 것을 보다 더 살기 좋은 쪽으로 펼쳐 나가자. 과학이란 것이 인간의 여러 가지 이성과 실험을 통해서 계속, 계속 확인해 주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고 여러분이 본의 아니게 이미 그러한 영향력을 충분히 부여받고 있어요. 영향력을 다 입고 있다고요. 그런 진화적 관점에 있어서 어떤 관점의 영향을 받느냐 하면 일단 기도를 했으면, 기도를 했다 합시다. 기도했으면 현재지만 약간만 시간 지나면 기도는 현재가 아니고 뭐가 되지요? 과거가 되지요. 시작점이 기도를 했으면 거기에 내가 원하는 내가 예견한 결과를 얻어내야 된다 하지요.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 자체가 무슨 론입니까? 이게 자체가 진화론이지요. 말은 진화론이지만 사실은 내막은 뭐냐 진보론이지요. 진보론.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더 나아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에게 나아진다는 게. 인간은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는데 나아진다. 죽을 때 예쁘게 피부 고아지면서 죽는 걸 그게 나아지는 걸까요.

도대체 기도할 때 뭐를 염두에 기도하느냐, 말은 진화지만 사실은 진보를 염두에 두고 기도하잖아요. 진보. 지금보다 향상되도록. 그 향상된다는 내용을 깨어보자 말이죠. 어떤 걸 가지고 더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 증거물은 뭐가 되느냐. 일단 숫자 늘어나기. 교회가. 그게 진보거든요.

그러면 한 가정에 애가 둘이 있는데 애 하나 더 본의 아니게 그저 하다보니까 맨날 하다보니까, 하다 보니까, 애가 더 생겼다. 뭐 하다보니까요, 수술 안 해서 그렇지. 수술 하면 하다보니까 그런 거 없는데. 하다 보니까 생겼다는 거예요. 그럼 애 넷이면 진보입니까? 이게. 골치 아픈 겁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애 지가 안 키우니까 “아이고~ 복도 많지유.” 충청도 말하면서 복도 많지유~~, 요새 전라도 같으면 가인이어라~ 뭐 이런 거. “아이고~ 복도 많지. 아이가 넷이나 되네.” 당신이 한 번 키워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애 넷 키우면 여자가 자기 구현됩니까?

여자는 50대에 바다를 봐야 되는데 바다는커녕 하꼬방 들어가 키우기 바쁜데. 무슨 바다를 봐요. 자기 취미생활, 자아실현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다 빼먹는데. 빨래를 꼽아 가지고.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 빼먹고. 나중에 노인네 돼가지고는 완전히 탁구공처럼 이집에 갔다, 저 집에 갔다, 저 집에서 튕기고, 손녀만 낳아라. 애 봐준다. 월급 받고 돌아다니는 배가 본드, 방랑자 생활하고. 뒤늦게 방랑자 신세 돼가지고. 자식 집에도 못 살고 손자 집에서 살고 이런 경우 많잖아요.

최초가 과거가 있는 게 아니고 최초가 미래에 있는 거예요. 최초가.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개별에서 뭐를 찾아가는 거다? 개별사실을 통해서 결국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보편명제로 가는 거예요. 보편명제. 개별사실로 가면서 보편명제로 가면서 개인은 죽고 집단이 등장하지요. 그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 집단. 하나님 나라 되는 거예요.

그럼 그 가정에 성도는 변신이 되는데 무슨 변신이 됩니까? 개별을 지우고, 개별이 개별의식을 가지고 지우고 집단에 예속되었다. 포함되었다. 라는 그런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소속감. 소속감의 특징은 그 자체가 뭐냐 하면 개인적이 아니고 보편적이에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군인들의 특징이 뭐냐, 머리 모양도 똑같고, 복장도 똑같고, 먹는 음식 똑같지요. 그걸 가지고 보편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군인들이.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전부 다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누구만 내세운다? 누구만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됨을 고백하는 분명히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보편적 명제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세상에서는 개별적이기 때문에 니는 한 달 수입이 얼마야? 니 그 집 애는 몇이야? 요번에 고3인데 어느 학교에 갈 거야? 전부 다 개별적인 것과 비교하고 대결하는 겁니다. 아, 그건 제가 설교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왜 경쟁하고 비교합니까?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

타인이 나를 뭐라 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타인이. 옛날 여자들 시집갈 때 새댁이 할 때 제일 먼저 의식되는 것이 뭐냐, 시집식구들, 특히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시집식구들이 나를 어떤 여자로 봐주느냐에 따라서 그 집에서 내가 행복하냐, 불행하냐 결정되는 거예요.

그럼 그 집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집의 룰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걸 관습이라 하는데. 내가 아가씨로 살 때는 우리 친정집하고 다른 룰이 있다 말이죠. 그 룰을 따라주는 분량만큼 나는 인정을 받게 되고 그 룰에 어긋나게 되면 나는 밉상 받는 고달픈 매일 아침의 눈을 뜨게 되어있어요. 고달픈 인생을 뜨게 되어있어요. 한 번 밉보이면 아무리 예쁘게 하고 아무리 아침 일찍 밥을 해줘도 밥 꼬라지하고는 너그 집에서 이렇게 배웠나? 신발 벗는 꼬라지하고는 너희 집에서 이리 하지? 우리 집에서는 양반집이라서 우리 집에서는 절대 신발 그렇게 벗어서는 안 돼! 똑바로 배워! 양반집은요, 김 상표입니다. 김. 그냥 김 부스러기에요.

그 말이 다 뭐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언어로 이루어진다 했지요. 언어. 언어로 이루어지거든요. 언어로 이루어지니까 그 시가집의 모든 단어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는 뭐로 하느냐, 안에 뭐가 담겨있다? 개념이 담겨있고, 그 개념은 의미가 담겨있고, 그 의미의 방향은 뭐냐, 시가집 충성이라는 것으로 전부 다 응축이 되어있거든요. 그러니 이것이 하나의 스크린처럼 막을 형성한다고요.

그럼 어느 아가씨가 결혼했다. 아가씨가 그냥 빈 몸으로 온 게 아닙니다. 자기가 지금껏 30살까지 살아온 시공간이 정신적 시공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이 또 나름대로 자기 언어가 있고, 개념이 있고, 의미가 있고, 그것은 누굴 위하여 그동안 평소에 날 위해 살아왔다 말이죠. 이게 둘이 시집이란 이름으로 같이 사는 거예요.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와 같이 살지 마세요. 방 한 칸 나가던지 해야지, 모신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구차한 핑계대고 자기 종자돈 모으려고 그런 쪽으로 하지 마세요.

왜 아가씨들이 애를 낳으면 시가집 안 맡기고 친정 왜 갑니까? 거기에 내가 살아온 언어 개념 틀이 거기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둘이 산다면 여기 맞혀야 되는 거예요. 자, 보자. 공통점이 몇 프로 있는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겹치는 부분만큼은 숨이 쉴 만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의 만남은 다 그래요. 이 아가씨가 처음에 남자를 만날 때 남자는 자기 집 구석에서 나온 하나의 돌출된 부분이거든요. 나는 내가 있던 살던 여자로서 돌출된 부분이 있다고요. 둘만의 공통점이 많으면 “우리 같이 살까?” 이리 되고, 공통점이 없으면요, “사람은 좋은데 안 맞는 거 같아. 당신 같은 사람은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라는 되지도 않는 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튕겨버리지요. 튕기기 전에 먼저 튕기잖아요. 자존심 때문에.

공통부분을 모으면 새로운 가정을 하겠다는 기대갖고 하는데 이 공통부분에 세상에 숨어있던 개념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살아보니까. 숨어있는 부분. 그러니까 이건 남자가 속였는지, 아니면 내가 딴 것을 이야기했음에도 못 알아들었는지. 그걸 놓쳐버렸는지. 막상 살아보니까 다른 요소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육신의 만남이 아니고 의미장의 만남이라 하는 거예요. 언어장의 만남. 그 언어장은 반드시 단어, 언어로 튀어나오거든요. 언어로. 이건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말씀으로 일을 한다고요. 그 말씀에는 하나님만 해석할 수 있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의 핵심은 과거에 있었던 게 아니고 미래에 있는 거예요. 구약 적 입장에서. 구약 적 입장에서 최초가 신약에 있습니다. 그 최초가 누구게요? 요한복음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게 태초 아닙니까? 이게 시작이거든요. 이 시작으로. 그러니까 오히려 구약이 미래가 되는 겁니다.   시작으로 보면 오히려 미래로 펼쳐진 양상이에요. 구약이.

우리의 시간관념하고 완전히 반대가 되지요.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보고 묻는 것은 “니 죽으면 어디 가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태초 어딘데? 니가 흙이 된 거.” “아니. 나의 최초는 흙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요. “그게 언제인데?” 태초에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선택된 그 자리로 가는 겁니다.

그러한 현상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개별사례를 통해서 우발적으로 주어진 게 엘리야의 오늘 본문 야고보서 5장17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도가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한 것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어요. 최초가 신약이니까 신약의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엘리야를 화살 방향을 엘리야 쪽으로 가게 되면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엘리야의 마음과 성정,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엘리야는 끌릴 수밖에 없지요. 엘리야는 본인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그 본인 안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5장을 펼쳤잖아요. 그렇다면 그 바로 옆에 있어요. 베드로전서1장에요. 들출 필요 없어요. 같이 펼쳐있으니까. 1장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절에 자기 속에 계신 그 다음에 누구의 영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는 신약에 와서 나타나는데 여기 베드로전서는 이걸 이제는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모든 게 밝혀진 비밀이 밝혀진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우리가 받은 성령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초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위에 따로 계시는 거죠. 최초가.

여러분, 서커스 천막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서커스 안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커스 천막 꼭대기는 유난히도 높이 하늘로 솟구치지요. 서커스에 온갖 깃발 달고 꽹과리 치고 이렇게 하잖아요. 천막 꼭대기가 이게 십자가라면 이것이 시초라면 이것이 뭐냐 하면 밑에는 신약 전개고 구약전개지요. 신약과 구약이 바로 시간의 마지막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월이 이게 바로 종말이 되고 이게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시간과 따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구약에 있는 성도나 신약의 성도는 이 예수님이 있는 완성된 현실이 있고, 또 밑에 땅에 미완성이 있는 현실이 있지요. 그러니까 이 현실은 무슨 현실이냐 하면 중복현실이 되는 겁니다. 중복현실 또는 중첩현실. 층으로 포개져 있는 현실이에요. 그러면 그 현실 속에서 엘리야가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엘리야의 기도나 우리의 기도나 모든 지향하는 바는 기도에 나오는 그 말, 단어, 개념, 의미는 지향하는 바는 서커스 꼭대기로 가는 거죠.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 인생은 없고 주께서 개별적인 개별사실로서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고 보편명제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서 안개 같은 이 세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왜냐하면 이 꼭대기에서 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등짝으로 고무줄을 놨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40년 살다 죽고, 어떤 사람은 90살까지 살다 죽고, 어떤 사람은 97살 살고 있더라도 어차피 몇 살 사느냐는 의미 없어요. 그 고무줄이 중요하거든요. 이 고무줄을 가지고 뭐냐 하면 관계라고 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걸 언약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관계. 하나님의 언약관계로서 노란 고무줄이 딱 있는 거예요. 그 고무줄로 줬다, 폈다, 줬다, 폈다, 하는 겁니다.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어떤 사태냐, 이 고무줄이 있다는 말은 언약이 있다는 말은 이런 그리스도에 현실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 있어요. 그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인데, 지옥을 더욱 더 지옥 되게 하기 위해서 엘리야 선지자 기도가 툭 튀어나오는 내용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말아라. 이것들아! 한 번 고생해봐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엘리야 이전 시대는 왜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고 왜 엘리야 시대에 비가 삼년 육 개월 와야 되는가, 오늘 첫 번째 강의의 핵심은 이제 시작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죄가 관영해야 할 때까지 대기해야 돼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요. 왜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되는가, 그 시대에 합당한 조치가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와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개별사실에 불과한 엘리야를 통해서 툭 튀어나온 거죠. 엘리야는 성정이 우리와 같다고 해서 이 말은 뭐냐, “우리가 그래야 될 거 같아.” “우리는 그런 생각을 주께서 가진 걸 알았어.” 하는 어떤 예언이나 예견에 대해서 엘리야는 거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성정이 같으니까. 우리가 내일을 몰라요. 내일은 모른다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엘리야나 우리하고 성정이 같은 사람이에요.

모르는데,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야에게 삼년 육 개월 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이 떨어진 것은 그걸 가지고 엘리야의 우수함, 훌륭함, 경건함, 기도함, 그걸로 돌리지 말라 이 말이에요. 기도는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밑바닥 문양이니까. 뭔가 거대한 하늘의 군함이 움직인다고 보세요. SF에 그런 영화 많잖아요. 외계인 우주선이 예상보다 그게 수키로 크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이제 건물이 많은 뉴욕 시내에 이게 덮쳤을 때, 이 UFO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기 검은 그림자부터 쫙 있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 방사능 무기해가지고 대서양에 홍수 나가지고 뉴욕이 잠기고 하는 그런 영화 많이 나왔잖아요. 옛날부터. 이것이 하늘나라의 거대한 군함이 왔다면 여기에 뿌직 뿌직 여기서 뭔가 빛이 비추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엘리야다 말이죠.

삼년 육 개월 동안 하는 것은 이쪽 인간이 죄가 어느 정도 관영되어 있다는 것은 이 UFO 본 사람 관점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북한보고 삼년 육 개월 비오지 말라고 이렇게 아무리 속상하더라도 김정은 죽으라고 기도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어? 엘리야 기도는 응답됐는데, 성정이 같은 우리의 기도 김정은 죽으라고 기도하는 것은 안 되고 갈수록 살이 찌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우리가 미리 예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의 속에 있는 분노와 한 맺힘이 이런 것들을 통해가지고 “아이고~ 내 남편 죽어버려라.” 또는 “우리 집 돈 빼먹은 도망친 놈 죽어버려라.” 이렇게. “거짓 복음 가르친 목사 가다가 사기 당해라.” 이런 식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원한과 자기 한풀이에 지나지 않지 이것은 엘리야 기도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목사님,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복음 나오면 돼요. 복음이 나오면 그 하는 일에 대해서 그 잘잘못을 따지지 마세요. 복음이 나오면. 복음은 모든 것이 예스가 되기 때문에 내 아니오, 가 예스됨을 훼방될 수 없음을 아는 게 복음적 믿음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나쁘다 하기 전까지는 나쁜 게 없었는데 내가 나쁘다 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나쁜 인간이 되는 거예요. 말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UFO세계에서는 중첩현실에서는 나쁘다, 선악적으로 선악과 따먹는 차원에서 나쁘다, 옳다가 이미 거기서 극복된 상태잖아요. 우리가 그 속에 속하는 것은 잘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이미 거기에 합류되어있는데 그럼 우리가 그 티를 내야지.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가 나와야 되는데 갑자기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아이구, 기도 벌써 1주일째 기도를 안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신부님! 1주일째 기도를 못했습니다.” 신부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처방전내리는 거예요.

“주기도문 5번 외우세요.” 이리 삐딱하게 해가지고. 왜 삐딱하냐 하면 바라보게 되면 또 다른 음욕이 생길까 싶어서 지가 지 방어한다고 삐딱이 앉아요. 아이구, 삐딱이 앉는다고 음욕 안 생기나. 삐딱이 앉아도 저기 앞에 정윤희 사진 붙인 것도 모르고. 전부 다 이미테이션, 페이퍼 로즈 가짜 장미들, 전부 다 모방에 지나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런 짓 하느냐 하면 악을 피하겠다는 거예요. 악을 피하겠다는 것은 어느 세계에 속합니까? UFO에 속하는 게 아니고 아직도 구원 못 받은 상태에요. 그건. 보편명제로 가지를 못하고 개별사실에 그저 머물러 있는 거예요. 못 빠져 나오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도둑놈 돼가지고 우리를 보쌈을 했잖아요. 보자기로 묶었잖아요. 그럼 묶고 났으면 우리는 답답해가지고 주먹질해봐야 그냥 바깥 보자기만 그냥 불쑥 불쑥 튀어나올 뿐이지 보자기 풀고 헤치고 거기서 빠져나와서 아이고, 이 동네에 있었구나! 하는 것은 그건 우리 소관 아니고, 선악과 세계에서 저주의 세계에서 생명나무, 영생의 나라로 나가려고 하면 그건 예수 그리스도 같은 형상을 받은 자만 통과할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만 통과할 수 있다고요. 그래야 숨이 트이고 산소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기껏 아는 게 선과 악이란 말이죠. 기껏 아는 선해봐야 뭐만 넓혀져요? 선악세계에 갇히기만 더욱 더 그 질곡에 그 늪에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질곡에 빠지는 거예요. 악마가 좋다고 놀립니다. “더 열심히 해야지.” “더 바르게 살아야 돼!” “헌금 천원이 뭐냐, 적어도 십만원은 해야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발버둥 치게 만들어요. “하루에 성경 두 장이 뭐고? 이게 배부르구나! 열장은 읽어야지.” “니가 성경 안 읽어서 니가 기도 안 해서 자식 성적 내려갔잖아.” 끊임없이 우리에게 완벽과 완벽에 완벽+완벽, 완벽 제곱에 완벽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무한이라 하는 거예요. 무한. 

무한의 특징은 기하학으로 하면 원이 돼요. 원. 원에는 뺑뺑이 도는 거예요. 뺑뺑이 도는 것을 이걸 무한이에요. 고정되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고정된 것을 도는 것. 고정된 것을 선으로 표시한 것. 이게 뭐냐 하면 선으로 표시하고, 이걸 함수로 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삼각함수에요. 수학에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무한을 표현한 거예요. 무한을. 사인, 코사인의 곡선을 무한대로 해요.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모든 파동이 말하는 파부터 해가지고 심지어 빛의 입자까지 이걸 하니까 우리는 무엇을 풀었다? 무한을 풀었다. 왜?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존재다. 과학이여! 승리하자. 이렇게 돼요. 과학이여! 승리하라. 인간의 음을 디지털화시켜가지고 이제는 이게 함수가 되니까 함수를 숫자로 대응해버리면 숫자로 해버리면 디지털 숫자화 되는 거예요. 0과 1로 다 모든 게 묘사가 돼요. 0과 1로.

DNA구조를 0과 1로 대입시켜 가지고 그 DNA를 똑같은 대조로 복제가 가능하지요. 인공지능에다가 맡겨가지고. 아주 양자컴퓨터까지 동원해가지고. 최신의 컴퓨터가 빅 데이터를 처리해버리면 똑같은 DNA 복제가 되면 자식은 나중에 병원에서 얻는 게 아니고 자식은 공장에서 만들지요. 내 DNA 피 좀 주고, 그 DNA와 똑같은 DNA를 다수 계속해서 필요한대로 만들고, 그 DNA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부모한테 순종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집어넣으면 되지요. 거기다가 더 집어넣을까요. 예수가 주시다. 믿음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두뇌에 흐르는 호르몬을 시냅스 사이에 흐르는 신경전달물질을 뽑아내서 그걸 공장에서 복제를 하는 거예요. 복제를 할 때, 뭘 하느냐 하면 우울증 있다, 괴롭다, 그거 다 제거해 버리고 나는 항상 하하하 웃어!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이런 것만 해가지고 다시 주사기로 해서 넣어버리면 그 애 태어날 때마다 응애 응애 우는 게 아니고 하하하 웃으면서 행복한 인간되는데요. 그런 게 예견되는데 무슨 기도가 뭐 필요하며, 그거 연구하면 되는 거잖아요.

나중에 돈 되니까. 이게 금융자본주의와 만남에서 투자를 많이 받으면 얼마든지 그런 연구할 가치가 있어가지고 자기 인생의 보람을 얻고 내 존재 가치를 거기다 걸고 히트치는 거죠. 그게 인간들이 말하는 뭡니까. 보다 더 나은 진화, 진보된 세계. 그게 오늘날 이 세계 아닙니까. 이게 지옥이거든요. 가봤자 갇혀있는 거예요. 이 지옥에다가 성도에게 성령을 해가지고 엘리야 같은 기도를 하게 하실 때, 그 기도는 뭡니까? 이 세상이 왜 지옥일 수밖에 없고 왜 불바다 받아야 되는가를 증명하는 식의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개별사실을 통해서 보편명제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가야 마땅해! 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서커스 그 꼭대기에 있는 그 선에 의해서 아래쪽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다가 자기 백성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에 의한 성도의 기도가 되는 거죠. 이 세상이 죄가 이렇도록 관영되어 있다는 것. 성숙돼 있다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망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나올 때 성도는 바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하나, 헌금하나, 전도하나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 한 증인이 되는 거예요. 시장에 물건 사러 가가지고 지 몸은 도저히 안 맞는데 뭐 요새 유행하는 동백에 나오는 공효진 옷하고 똑같이 나왔으니까, 물건 파는 사람은 속으로 지 꼬라지는 생각 안하고 이런 식으로. 지옥가려고. 그러면서도 물건은 파라 먹지요. 이 세상에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답변 뭡니까? 복음을 위해서 성도가 있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보편명제를 위해서 있기에 개별사실이 살아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내 선에서 하면 안 되고 옳고, 그르고 모든 것이 예스 패스 통과가 되는 그쪽에서 나에게 지금 이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누가 눈치 챌까요? 악마가 눈치 채지요. 이 세상 권력이 고린도후서4장4절에 보면 이 세상신이 눈치 채요. 인간은 눈치 못 채는데 악마는 눈치 채가지고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엘리야에게 또는 우리에게 뭐 합니까? 아까 했지요. 물어뜯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너는 너의 삶의 의미는 왜 내가 수용이 안 되고 해석이 안 되느냐. 니 미쳤구나! 이리 되거든요. 아까 처음에 강의했지요. 내가 사는 의미로 구성된 언어체계 속에 왜 니는 온전히 나한테 포섭되지 아니하냐. 여기서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날 어떤 분이 오셨는데요. 그 분의 역할이 뭐냐 하면 교회에서 하는 역할이 월급 받는 이유가 목사님 설교를 그대로 올리는 것. 올리는 일을 했는데 그 분이 어쩌다 보니까 복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목사님이 월급주고 올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못 올리겠다고 나온 거예요. 이건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못 올리겠다. 파업이죠. 그러면 그 주위에서 목사님하고 그쪽 장로님이 찾아와가지고 “아이고, 집사님, 사찰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이야기했을 거 아닙니까. 사찰 집사님이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할라치면 말을 막 막아요. 말 못하도록. 아이~ 교회가 이만큼 부흥된 건 다 주의 은혜고...., 죽 나온다 말이에요.

그러면 사찰집사님이 그건 아니고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설명하려하면 못하게 만들어요. 이게 물어뜯는 거예요. 10분 쉬고, 여러분 한 번 또 뭐에 뜯겼는지를 얼마나 많이 뜯겨왔는지를 모기에게만 뜯기는 거 아닙니다. 왜 시건방지게 내가 아는 의미에 니가 왜 내 안에서 빠져나가느냐 말이에요. 왜 내가 다 너를 해석 못하게 만드느냐 말이에요. 뭐가. 뭐가 건방져가지고. 니는 내 밥이 되어야 되는데 왜 밥이 안 되느냐고 화를 내는 거예요. 세상에서.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지.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19.♡.152.148)19-10-16 15:58 

안양20191010b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죄가 관영했다는 것을 그 타이밍을 그 거대한 중복된 현실, 그게 하늘나라에서는 눈치 채가지고 하늘나라 천상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엘리야를 파견시켜 버립니다. 이건 뭐냐 하면 악마의 목구멍 속에 엘리야가 지금 들어가는 거예요. 사적으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악마와 사귀어야 합니까, 멀어져야 합니까? 악마가 못 따라오는 곳으로, 악마가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되지요. 악마가 없는 곳. 현재 사람들 보기에 악마가 없는 곳은 어딥니까? 강남이지요. 환경이 깨끗하잖아요. 깨끗해서 지리상 골짜기가 아니고 터가 땅값이 비싸요. 악마가 없는 곳에.

악마가 있는 곳은 뭐냐 하면 구로동 저 후진데. 빌라 옛날 못사는 동네, 지금 말고 옛날 광명, 부평이나 부천, 소사, 요새는 많이 개발했지만. 서울로 올라가다가 튕겨가지고 경기도 변두리 촌으로 가는 사람들. 못 살고. 제일 전셋집 허름한데 사는데. 그렇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악마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 받느냐는 이건 성립이 안돼요. 이미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지 말아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후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칙에 의하면 구원 있을 수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인간들을 위하여 위로한답시고 악마가 만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종교에요. 종교. 기독교도 그런 종류에요. 악마가 만든 중에 하나가 위로해 주는 겁니다. “사는 게 힘들지? 이 땅에서 고생 많지? 죽어서는 호강해야 되지 않겠어. 고생 많이 하면 비례해서 죽어서는 니가 상급 받고 좋은데 갈 수 있어.” 끊임없이 이렇게 위로를 하는데 위로에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나라는 자기 부인이 빠져버렸지요. 자기 부인. 끝까지 내가 나를 지켜야 돼! 마지막 버티는 제일 소중한 것은 나. 어떤 수단과 목적을 해도 나는 버리면 안 돼. 이리 된다니까요. 갈수록 점점 악마가 돼는 거예요. 갈수록.

어제 수요설교 같으면 당구공이 있는데 복음으로 하니까 복음이 다 흘러내리는 거예요. 스며들지 못하고. 굳건히 지키는 거예요. 나를. 최고로 따지는 것은 뭐냐, 결국 내가 이렇게 10년 교회 다녔다. 남는 건 뭐냐 하면 ‘나한테 실익이 뭐였던가.’ 계산하는 거예요. 나에게 오는 이익은. 내가 원하는 나 되는데 신께서는 어떤 보탬을 줬느냐, 내 과거의 아픔을 보상해 줬느냐, 어쩠든 간에 내가 빛나는 존재로서 어디까지 성과를 냈느냐, 그걸 따지는 거예요.  목숨 걸고 지키는 게 있어요. 인간은. 그것은 뭐냐, 자긍심이죠. 자존심이에요. 그걸 목숨 걸고 지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예수를 이야기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신학박사, 목사가 된다 할지라도 마지막 최후에 나오는 진짜 알맹이는 뭡니까? 그러니까 나를 무시하지 마세요. 나 인정받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아까 나왔지요. 나, 인정받고 싶어요. 그것만 나오는 겁니다.

그림하나 그리겠습니다. 이런 괴물이 있다면 혀를 낼름거리는 괴물 속에 목구멍이 이렇게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속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성도가 들어갈 때는 자아를 가지고 들어가다가 들어가면 여기서 뭐냐 하면 이게 돼요. 어릴 때 많이 먹은 적 있는데. 발포성 알약 아십니까. 물에다가 딱 넣으면 신기하게도 뭔가 거품이 막 일어나면서 점점 더 그 실체는 축소되지요. 사라지지요. 마그네슘 있잖아요. 쥐날 때. 후딱 마그네슘 먹으면 약 한 3초 내지 5초 만에 풀리거든요. 이건 너무 구라 같은데. 마그네슘을 복용하게 되면 그것도 독일제 복용하게 되면 질 좋은 거 하게 되면 풀려요. 미리 먹던지. 다리 서서 강의하는 사람들 좋아요.

발포성 알약이 퍼지면서 녹아져 버리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부인인 거예요. 죄가 있어줘야 자기 부인이 되는 겁니다. 물어뜯으니까. 사방에서 물어뜯어요. 닥터피쉬 같아. 닥터피쉬 알아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몰라서 뭐요? 하는데. 온천 같은데 가면 조그만 물고기가 몰려와서 각질은 다 뜯어먹는 게 있어요. 우리 힘으로 절대로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개체가 녹아지는 거예요. 어디로? 집단 속으로. 보편명제 속으로. 개체사실이 보편명제 용도로서 발포성 알약처럼 녹아져버리지요.

그러면 그걸 다시 끌어 모아서 이게 나야! 라고 끌어 모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해봐야 그게 중량 무게만 나가니까. 그래서 죄가, 악마가 왜 필요하고. 제가 악마를 공룡으로 그림을 그렸지요. 실제로 욥기에 보면 악마를 이렇게 큰 악어로 묘사되고 있어요. 괴물이 이렇게 큰 것은 이 안에 큰 속에 악마가 성도의 구원 받는데 필수적인 환경이 되는 겁니다. 악마를 싸워서 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악마 속으로 들어가면 돼요. 악마 속으로. 그럼 악마는 무슨 세계냐 하면 선과 악으로 법을 강조하는 세계에요. 법으로서 선과 악을 강조하는 세계. 그렇다면 아까 제가 첫 번째 강의한 거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으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이해했는가, 복습 들어갑니다. 물으면서.

선과 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언어로 구성되어있지요. 남이 이야기하기 전에 퍼뜩 이야기해줘야 여러분들이 똑똑한 걸 유지가 되기 때문에. 선과 악은 언어로 되어있지요. 그럼 어떤 집안 식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아들이나 뭔가 말을 할 때는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이래서 착한데 엄마도 나처럼 착해. 라는 그런 의도가 담긴 체 말을 하게 되어있어요. 친구사이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착한데 너도 나처럼 착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거예요. 동의하면 우리 둘은 이젠 착함의 동호회. 우리 둘은 에브리바디 착한 거예요. 항상 내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의 권리가 있느냐 하면 존재할 권리가 있고, 건강하고 오래 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착하면. 만약에 안착하기 때문에 조기에 죽고 사업 망하고 다 깨지고 이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환경이 자기가 의도대로 안 되고 어렵다 할 때는 무엇을 또 투입하는 거예요. 이 악마 안에 악마의 세계에서는 착함을 투입하는 거예요. 그 착함 중의 하나가 예수 믿기, 성경공부 하기, 착실하게 나쁜 일 적게 하기, 길에서 동량하기, 이런 거 하는 거예요.

어젠가 우리교회 질문하신 분 있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길에서 동량하고 싶은데 예수 믿고는 목사님 말씀대로 동량하기가 갑자기 돈이 아까와지고 싫기도 한데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합니까? 과연 예수 믿고 난 뒤에도 구제해야 되고 동량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그런 질문을 했는데 보신 적 있어요? 우리교회에 질문답변에 나와 있어요. 그래서 내가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구제는 선행이든 동량이든 간에 불신자와 달라야 되겠지요. 이렇게 운을 떼고, 불신자의 특징은 뭐냐, 뭘 해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자의 특징은 뭐냐, 신자도 마찬가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채는데 이게 내가 숨어있던 죄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자는 주께서 친히 다루시는 서커스 꼭대기에서 다루시는 방법이에요.

내 나름대로의 행함을 통해서 선에 머물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이게 애초부터 안 되는 일이었어요. 깡길렘이라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어요. 프랑스 인식론에 계보라는 책에도 이 사람 이름이 나와 있는데. 제 글에도.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사람은 의학과 생물학에 인식론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냥 이야기했다면 유명한 사람이 아닐 텐데 이 사람은 반대로 이야기했어요. 멋진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데 뭐냐 하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가운데서 사람들은 뭐를 우선시하느냐 하면 정상적인 것을 우선해가지고 여기에 어긋나면 이건 병리적이라고 이렇게 봤다는 거예요. 병리라 하는 것은 환자다 이 말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다 이런 뜻이지요. 정상이란 말은 몸이 컨디션이 괜찮고 건강하다는 뜻이거든요.

건강을 우선으로 하고 거기서 이탈된 것을 병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깡길렘이라는 사람은 이게 틀렸다,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학이라는 것이 발생되려면 반드시 환자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언급을 해줘야 의사가 그 다음 조치에 나서게 돼있다는 거예요. “어디 아파서 병원에 오셨습니까?” 멀쩡한데 오는 것은 생수 팔러왔거나 보험 들라고 온 것밖에 더 있어요. 아프기 때문에 온 게 아니냐 말이죠. 그렇다면 정상이 이 아픔을 확대시키자 말이죠.

확대시키면 뭐가 돼요? 정상이라는 것은 기껏 그 시대에 평균에 지나지 않아요. 평균. 그 시대가 만약에 60세가 인간의 평균이라면, 이건 제가 어릴 때는 60세가 평균이었어요. 그래서 환갑 했거든요. 아이구~ 아직까지 살아있으니 복된 영감입니다. 지금 60세가 환갑 한다고 하면 니 지금 욕보이나! 이렇게 하거든요. 평균인데, 평균보다 못한 걸 병자라 했는데, 이 병리적인 것을 더욱 더 연구해 보니까 이게 60세가 환자네.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60살까지 밖에 못 살겠어요. 그러면 지금의 평균이 뭡니까? 80이다 말이죠. 전에는 60밑을 전부다 환자로 봤는데, 지금은 80밑에 75세에 죽으면 이건 당신 무슨 병에 걸려 죽었느냐? 실제로 노환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80밑에는. 80밑에는 노환이란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늘어나지요. 왜냐하면 병리를 연구하는 의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평균도 병행해서 늘어나요. 지금 90 안되면 무슨 병에 걸렸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기력이 빠진 걸 모르고 무슨 병에 걸렸어요? 따라서 뭐냐 하면 병리적인 것이 이것이 전제로 해서 정상인 것을 이건 유동적이다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픈데 건강한 것이 그 때 그때 달라요.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바로 마태복음9장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해요. 의사는 병든 자가 있기에 의사가 있지, 병들지 않으면 의사를 찾지 않는다. 이걸 오늘 본문에다가 적용시키면 뭡니까?

죄가 관영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죄라는 것을 특수한 경우로 봐요. 우리는 다 멀쩡하고, 괜찮고, 인격적인데 죄라는 것은 교도소 가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만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그걸 선지자를 통해서 엘리야를 통해서 그걸 반대로 하는 거예요. 정상적인 것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정상의 모델은 장차 최초의 인물로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만이 말씀 외에 또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분만이 정상이고 다른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그 이야기했어요.

이제 그것을 확대시켜 나갈 거예요. 확대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을 당의정으로 여겨요. 당의정. 발포성 알약으로 당의정으로 해가지고 여기 하늘나라를 만들면서 요걸 세상에다가, 죄에다가 퍼트려버려요. 퍼트려버리면 요 당의정의 혜택, 발포성 알약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있겠지요. 그 사람이 뭡니까?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볼 때에 니가 어디서 어떤 짓을 했느냐를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준 게 그 안에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제가 설교시간에 서랍 안에 공 들었다 했지요. 그게 로마서8장에 나오는데 여러 번 했지만, 세월 지나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한 번 확인에 들어갑니다. 이런 본문 같은 것은 자주 봐서 기억하는 게 좋겠지요. 로마서8장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둘로 본다고요. 우리를 보는 게 아니고 우리를 하나의 껍질로 보는 거예요. 우리를 하나의 서랍장으로 봐요. 만약에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되어있다고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서랍이고, 주님은 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은 공이 되는 거예요. 흔들어 보세요. 공이 있는가.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 아! 이 대목. 그러니까 성령이 왜 와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이 성령 없이 껍데기 가지고 아무리 착해봐야 그것은 이 율법 앞에 노출되고 이 법 앞에,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존재에요. 우리 자체로서. 중복현실이 아니고 단독현실이 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 다 유식하니까 거기에 수준 맞춰드려야지요.

실제세계를 현실로 이걸 전부로 보면 안 되고, 실재세계로 봐야 돼요. 실재세계. 이게 같이 있어야 돼요. 실제세계라 하는 것은 과학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고, 실재세계라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1장16절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전부 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재세계거든요. 이게 중복되어있다니까요. 하나님의 영은 실재세계에서 영이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영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나 혼자 있는 자체가 이미 악마의 결과물이고, 나 혼자 있다면 아무리 몸부림치고 교회 다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성경공부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나 우리 안에 누가 온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 로마서8장에 보게 되면 실재세계가 실제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 육신은 이미 우리를 뭘로 봅니까? 이미 맛이 간걸로 봐요. 실제로 우리는 조금씩 매일같이 우리는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조금씩. 아무리 화장품이 발달해도 조금씩 화장품이 감당하지 못할 세월의 무게 갑니다. 시간은 고장 난 벽시계처럼 멈출 수는 있지만, 이건 시간의 시계는 고장 나지도 않아요. 계속 우리를 없앨 때까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대단한 고집이에요.

어릴 적 놀러갈 때, 소풍갈 때 들떴지요. 집에 오면 퍼지는데요. 여행은 두 번 다시 못갈 거야. 힘들어 죽겠어. 그래가지고 또 있다 보면 한 번 바람 쐐. 갑자기 또 중독돼가지고 또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로마서8장에 우리 육신은 죽을 몸인데 이미 우리가 죽었지요. 죽었으면 죽은 자가 스스로 꼼지락 거리면서 자기를 잡아당기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건 산 게 되니까. 죽으려면 어떤 짓거리도 죽음에 이미 합류돼가지고 그 자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도 점점 더 자기를 죽음의 질곡에 더 빠트리는 죽음의 짓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도 더욱 더 나를 지옥 보내고, 선교, 전도, 성경공부 이 모든 설교 강의도 나를 더욱 지옥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어디를 주목하라는 거예요? 실제세계에서 내가 활동하는 것은 이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기도한다고 해서 엘리야가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엘리야가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아까 베드로전서1장11절 말씀처럼 영이 있어서 엘리야로 하여금 엘리야 본인이 예견하거나 예상한 일이 들어있지 않은 다른 일이 툭 튀어나온 거예요.

한 번 물어봅시다. 인간이 예상하지 않은 일이 나오면 즐겁습니까? 뭔가 바보 된 느낌이 들어요? 어느 쪽입니까? 바보 된 느낌이죠. 바보 된 느낌이 기분 좋아야 되는데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직까지 개체가 덜 발포됐어요. 바로 안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정도하면 나 인간 맞잖아. 라고 자꾸 우기고 싶은 거예요. “목사님, 저 바보 같지요?” 이건 발포성 많이 된 겁니다. 아니고 “목사님, 저 복음도 알고 똑똑하지요?” 에이, 지옥이나 가라.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왜? 왜 집단 속에 보편명제 속에 빠지지 않고 개별사실을 계속 붙잡고 있느냐 말이죠. 누구 좋아라고? 마귀만 좋아하지요.

그런데 영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사는 권한은,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는 겁니다. 어제 수요설교에 의하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3장16절에서는 여자의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다? 남자한테 있는데, 호세아에 오게 되면 남자한테 있는 게 아니고 값에 있어요. 값 치름. 값을 치름에 있어요. 그리고 여자는 모든 인간을 주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음녀 같은 인간들을 값이 와서 값이 꽂혀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컷 이 땅에서 원 없이 죄인 되어야 돼요. 원 없이. 원 없이 죄인이라는 말은 내가 따로 죄인이 아니라 죄 속에 일부가 되어야 돼요. 죄 속에 일부. 왜? 육신이 그러하고 육신에 대해서 주께서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공룡그림을 또 그리고 싶지 않아요. 그림을 하도 못 그리기 때문에. 어떤 목사님이 저보고 그런 이야기해요. 목사님의 그림은 발전이 없네. 저는 진화론 안 믿거든요. 몰락입니다. 그림에서도 몰락이에요. 그 공룡 속에 악마의 목구멍 속에 집어 들어가요. 하나의 알약 삼키듯이. 수면제 먹듯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그 안에 온 전체가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걸 발견 못해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발포를 덜했기 때문에. 내 개체가 살아있어요. 분명히 주의 종 맞는데, 말씀의 주되심을 인정하는데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나는 주님을 이용해서 내 구원받겠다는 시력을 놓치지 않고 있어요. 이게 문제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악마의 세계에 들어왔고, 어두운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위에서 뭘 가지고 자꾸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까? 우리에게 걱정 근심을 넣어줍니까? 니가 잘해야 된다고 흔들어 놓겠지요. 그럼 반응이 뭐예요.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우리가. “그래, 이 정도는 잘했어. 이 정도 기도 많이 하고, 강의 잘하고, 나는 착해. 나는 나쁜 짓 한 거 없어.” 라고 대들겠지요. 이게 그 악마의 술수에 빠진 거예요. 말로 해가지고는 잘 실감이 안 나는데요.

열왕기상17장 한 번 봅시다. 1절은 누가 읽어주셔야 돼요. 열왕기상17장1절,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렇게 되어있지요. 수 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19장 봅시다. 그걸 기억하세요. 그 정도로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왔습니다. 선지자니까 온 거예요.

19장14절 읽겠습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특심하오니 갑자기 개체지요. 개별사실에 자기가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사오며 오직 누구만 남았다고 되어있어요? 오직 나만 남았지요.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서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악마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다는 거예요. 19장 1절에 보면 이세벨이 현상수배 때려가지고 엘리야 잡아라 나오니까 겁이 나서 도망치는 거예요. 19장 2절에 보면.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이맘때에는 니가 정녕 죽으리라. 하니까 엘리야가 그 소리 듣고 브엘세바 저 남쪽까지 냅다 도망칩니다.

자, 악마의 목구멍에 들어가야 될 엘리야가 피해서 도망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개체가 있으니까. 어쨌든 나한테 실익이 있어야 하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다 좋은데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거예요. 그게 지금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인 거예요. 분명히 선지자인데. 그 기도가 응답됐잖아요. 그 정도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엘리야는 대단치 않아요. 성정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냥 된통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왔을 뿐이지. 나만 착하다는 말은 자기는 죄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 공룡, 악마의 내부를 더 깊이 내려가 봐야 저쪽이나 내 쪽이나 둘 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서 발포성이 나는데. 아직까지는 뭐냐 하면 나는 착하고 저쪽은 개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던 그가 나만 남았다고 하니까 열왕기상19장 18절에 이거 누구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아멘. 감사합니다. 참, 그 용감함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렇게 대표로 읽는 죄를 지어줘야 발포성이 또, ‘아! 그 때 목소리가 너무 깨진 목소리였지 않은가, 남들이 내 목소리 뭐라고 하는가.’ 갑자기 집에 가면 그게 2시간 반 동안 생각나요.

“제발 나보고 기도하지 마세요.” 라는 이유가 기도하게 되면 속에 들어있던 그 죄성이 다 남한테 폭로가 되니까 그동안 자기가 굳혀 온 세상의 인정에 그게 홈이 파이는 거예요. 여러분, 애플이라는 회사 로고가 뭡니까? 이미지가. 사과인데 한 입 베어 먹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선악과 사과를 베어 먹었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지혜로운 회사다 이 말입니다. 악마의 지혜, 뱀의 지혜에요. 이 지혜를 더 크게 하기 위한 회사 세웠다 이 말입니다. 조롱하는 거예요. 기독교를. 거기 조롱에 대해서 사람들이 스티브잡스가 어떠니, 청바지가 어떠니 하는데 청바지 입으면 뭐 합니까 이미 죽었는데. 그 책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그게 바로 악마의 보편성을, 악마가 이야기한 보편 명제를 스티브잡스가 대신 보여준 거예요. 한국의 살길은 저런 인재나 천재를 키워주는 것이다. 정권 잡은 자들이 전부 다 높여주는 거예요. 앞으로 인류가 밥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수 만 가지나 그 사람이 만들어줬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도 그걸 본 받아야 돼!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스티브잡스가 있으니까 세상이 얼마나 지옥스럽다는 걸 알겠지요. 그게 무슨 자기 부인입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까 스티브잡스 나왔네요. 여기에 엘리야. 로마서11장4절에 사도바울이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뒤에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그러므로 행함이 나와요. 자기 행함이라는 것은 모든 방향이 “나 잘났지요. 나를 지옥 보내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복음이 안 나오고 나 구원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행함주의자 이 말이에요. 행함주의자. 그 자체가 그것은 전혀 그냥 서랍장에 공이 안 들어있는 거예요.

아까 로마서8장에서 육신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죠. 죽은 자가 할 소리가 없어야 되지요. 이사야6장에 의하면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끝나는 문제인데, 엘리야가 아직 큰 소리 치는 거예요. 왜? 비교해보니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나만 복음을 알고 나만 제대로 사니까. 그 자체가 주께서 십자가라는 시초적인, 원형적인 인간, 유일하게 생명나무가 되시는 그 분하고 한 번 엘리야하고 비교해 보세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잖아요. 무슨 뜻에 의해? 아버지 뜻을 위하여.

그런데 엘리야는 아버지 뜻을 빙자해서 자기가 기어이 살아남고자 하는 거예요. 천국 가고자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복음에 목숨 걸지 않으면 결국 복음 다 떠나게 되어있어요. 제가 두 가지를 항목을 내세울 테니까 어느 게 맞는가 보세요. 1번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2번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의 증인이 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이 정답이에요. 2번.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을 때, 반드시 사건으로 나타나거든요. 사건으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은 언제냐 하면, 특별할 경우에요. 부활하고 난 뒤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지요. 504명에게 나타났고.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께서 사도바울에게 로마에 갈 때 풍랑일 때 그때는 예수님이지만, 성경에 보면 천사가 곁에 서서 두려워 말라. 기어이 로마에 가야 돼. 사실은 천사가 나타났다면 배후에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거죠.

그러면 사도가 그렇게 했을 때 사도가 1번 나는 구원받았다. 2번 나는 십자가의 증인이다.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이 나타날 때. 주님이 증인돼서 나타날 때는 나는 구원받았다. 헤헤헤! 가 아니라 뭡니까? 나는 할 일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여러분 왜 삽니까? 왜 살아요? 예수님 증인입니까? 십자가 증인입니까? 예수님 증인 같으면요, 쉬워요. 성경공부해가지고 예수님 이야기해서 강의하고 이러면 돼요. 그러나 십자가라 하는 것은 물어 뜯겨야 돼요. 이건 내가 아는 지식은 예수의 증인이지, 십자가 증인이 아니라고요. 십자가 증인은 가만히 있어보세요.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마구 흔들어대요. 우리를. 왜냐하면 우리가 흔들 조건을 내 쪽에서 제시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휴, 부러워라! 우리 집에는 저런 것도 없고. 우리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뭔가 세상에 미혹 받아서 가니까 거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서 “니가 이렇게 하게 되면 이거 줄게.” 라는 그러한 광야의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은 그 시험들이 마구 우리에게 쏟아지는 거예요.  아직까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개체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 나는 저거 가지면 예수의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어!” 또 개별적 사실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보편적 명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 개인을 다루는 그림에 대해서는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이런 그림을 그렸지요. 십자가 보이고 아스팔트길이 있잖아요. 그런데 수시로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수시로 대구 강의에서. 골목길이 있다 했지요. 골목에 들어가니까 기역자로 꺾어 들어가니까 뭐가 안 보입니까? 십자가가 안 보이죠. 처음 믿을 때 “예수님 십자가!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다가 골목 가니까 골목에서 자, 골라! 골라! 골라라 하니까 들어간 거예요.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골목이 있으니까 골목이 차단하니까 십자가가 안 보이지요. 여기서 누가 더 잘났고, 인정받는가, 그것만 보인다고요. 여기서 진탕으로 싸우지요. 여기서 발포성 많이 나서 많이 깨졌거든요. 깨져가지고 성령께서 강제로 이 길로 보이게 만듭니다. 십자가 보이게 끄집어냅니다.

“그렇지. 내가 이렇게 큰 은혜 받아 놓고도 아직 내 잘났다고 하는구나.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구나! 그래, 이 길로 가자.” 가면 뭐합니까. 오른 쪽 골목에서 또 기다리는데. 또 집어내가지고 니가 복음을 더 아나, 내가 복음을 더 잘 아나, 또 한바탕 싸우고 와가지고. 아무 의미 없는 항상. 갈라디아서3장1절이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느 골목에서 너를 이끌고 들어가느냐. 어느 누가 너를 꾀더냐. 그러니 이 전체가 뭐냐, 공룡 안이에요. 이 전체가 악마의 세계 안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십자가는 있는데, 악마가 약이 올라가가지고 자기는 못 들어가지만 자기 수하에 그동안 자기가 붙잡고 있던 그 사람들 중에서, 악마가 자존심이 되게 세거든요. 내가 못 들어가는데 니도 못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구원도 못하고 내가 잘린 그 세계에 니가 뭔데 이 후배가 들어가느냐, 선배가 못 들어가는데. 직장에서 많이 왕따 당할 거예요. 내가 지옥가면 너도 같이 지옥가자. 니가 뭔데 천국 가. 그렇게 된다 말이죠.

임재범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고백>이라는 노래있지요. 그 여자만 허락한다면 무슨 죄도 다 받겠다는 거예요. 저 여자만 나한테 허락하신다면 무슨 죄도 다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임재범은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사나이다운,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양 생각한 거죠. 옛날 임재범이죠. 요새 교회 잘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체가 복음 앞에서는 눈부신 광채 앞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느끼지도 않아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주의 허락에 의해서 악마가 나를 골목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분탕질하고 또 온갖 스트레스 받는다.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주님 들으면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나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다시 끄집어내게 되면 바로 이 세계. 이제부터 이 세계를 소개합니다.

이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첫 째 시간에 잠간 언급했는데요. 성도로 인해 또는 오늘 본문 엘리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죄로 관영했음을 폭로시킨다. 죄가 관영, 더 쉬운 말로 죄가 매 맞을 만큼 죄가 숙성했음을 폭로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엘리야의 예를 들었지만, 제 말을 들어보면 엘리야가 훌륭하지가 않지요. 저도 똑같아요. 똑같은데 엘리야를 발포성으로 점점 더 자기 부인시키고. 왜냐하면 니만 있는 게 아니고 칠천 명 있어. 라는 자체가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왜냐, 자기가 살펴본 자기가 아는 지식수준에서는 자기밖에 없는데 주님께서는 내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또 다시 여기서 깨지는 거예요. 엘리야가.

‘아! 내가 선지자라 하지만, 오실 분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예수님의 고생에 비할 바가 안 되고 예수님의 수모에 비할 바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께서 미처 모르는 주님이 주님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가신 길로 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굳히고 하나의 개체로서 유지한다는 자체가 갈수록 점점 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제목으로 정하겠는데, 이게 뭐냐 하면 ‘소환’ 또는 ‘소환 당함’ 주님께로부터 소환 당함. “너, 교무실로 와!” 이런 거 있잖아요. “어이! 너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와!” 교무실에 있는 담임선생님한테 학생이 소환 당하잖아요.

우리의 인생은 소환 당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은 내가 고생했습니다. 내가 힘들어죽겠습니다. 하다가 소환 당하면 당할수록 그런 소리가 나올 처지가 아니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건 일종의 성화론 아닙니까. 이건 일종에 내가 점차, 점차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렇게 대들 수 있지요. 그러면 내가 주님께 몇 년 걸려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릅니까? 갑자기 자기 개체 수준 또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개인이 커지고 위대해 지는 게 아니고 닥터피쉬 이야기했지만, 이게 주의 폭탄이 주어지는 거예요. 폭탄이. 언약의 폭격이 주어지는 거예요. 내 인생에 하나님의 약속의 폭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붙들고 싶은 가치 있는 것이 작살나고 파괴되지요. 제가 이 말하면 너무 쿨하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뭐 파괴된 거 있나?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또 이렇게 따져가지고 ‘그럼 나는 구원 못 받은 것인가.’ 또 걱정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폭파 또는 파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이게 엘리야도 이렇게 당했어요. 엘리야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매일 이렇게 끌려 다니고 수배당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거든요.  야곱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마리아는 특히 예수님 임신해가지고 예수님 낳았던 마리아 같은 경우는 팔자가 더러운 팔자잖아요. 이런 고생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이게 실재화가 되게 되면 어떻냐, 실재세계에서는 폭파당한 거 맞아요. 그러나 어에 이, 실제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밭이랑이에요. 밭이랑.

밭이랑이라 하는 것은 특징이 뭐냐, 당사자는 고요합니다. 조용해요. 땅콩을 심던지 작물을 심어놓고 두툼하게 흙 해놓고 비료를 줘가지고 식물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옆에 반드시 뭐냐, 비가 와서 물이 흐르도록 밭이랑을 만들어줘야 돼요. 비가 안 올 때는 물을 뿌려가며 물이 뿌리에게 본래 얻고자 하는 수확물에게 공급이 되겠지요. 그러면 밭이랑 덕분에 식물이 잘 자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주변에 우리가 예상도 못했는데 밭이랑을 계속 만들어준 거예요.

그 밭이랑은 우리가 예상 못했지요. 우리 뜻이 아니지요. 우리 뜻이 아닌데도 나는 그냥 옛날이나 지금이나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똑같아요. 꼭 여러분 같아요. 똑 같은데, 주변상황이 나로 하여금 복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주님 앞에 소환 당하는 무빙을 의식하게 만들어요. 감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돌아가는 내 인생 상황이.

그러니까 이 밭이랑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내가 열심내서 내가 성경공부 하러 쫒아 다니고 하면 필히 우리는 이 개체가 더욱 더 우수한 개체라고 점검에 나서기 때문에 이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의 개체와 비교에 들어갑니다. 비교에 들어가면 이 개체와 개체가 베틀이 일어나요. 니가 믿음 좋은가, 니가 복음 많이 아는가, 시합에 들어간다고요.

그것은 모든 공로가 나도 모르게 내 주변에 이랑을 만드신 주님의 공로가 어디 있습니까? 날아가 버렸지요. 여러분들이 옛날에 해변가에 여름에 해수욕장에 그것도 차도 없어가지고 버스타고 가본 적 있잖아요. 친구들끼리. 버스타고. 튜브하나 사가지고. 한 개 사는 이유가 돈이 없어가지고 열 명씩 번갈아 가면서 물에 띄우고 하는 거 있잖아요. 할 때 모래사장에서 어떤 놀이하느냐 하면 심심하니까 중국집의 자장면 시켜먹고 남은 젓가락이 있으면 여기다가 모래를 해놓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모래를 남아있게 하다가 마지막에 잘못 건드려서 넘어뜨리면 그 사람이 벌칙을 받는 그런 게임 있지요. 이게 바로 이랑이에요. 이랑.

구원은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구원해요. 내가 반듯이 서게 되면 옆에 서있는 다른 주어진 젓가락하고 비교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은밀하게 나를 구원시키고 있는 그 현재 움직이는 움직임을 우리가 까마득하게 모르게 되고, 자꾸 우리는 내가 이 정도로 잘났음을 가지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이건 성화론에 빠집니다. 구원론에 빠지지요. 

그 예가 뭐냐, 엘리야가 잘났어요? 남은 칠천 명이 잘났습니까? 이건 엘리야가 밭이랑으로서 남의 칠천 명 도와주는 구원되게 하는 밭이랑 가꾸는 일꾼으로서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엘리야가. 그러면 뭐냐 공부해서 남 주는 거예요. 기도해서 남이 응답받는 거예요. 이게 엘리야의 기도에요. 오늘 본문에.

그 정신이 본인이 피를 흘려서 본인의 목숨가지고 자기 백성 살리는 자기 백성으로 공급하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그 작업을 옛날에는 엘리야를 통해서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남편이 복음도 모르고 교회도 안 나가는데 이상하게 밥하라고 월급은 갖다 줘. 밭이랑입니다. 자기는 내가 밥 먹고 어디에 관심 있는 걸 몰라요. 자기처럼 이 가정을 잘 건사해서 애 교육 잘 시키라고 돈 갖다 주는데. 그건 쓸데없는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남편을 통해서 이렇게 나는 이 땅에 악마의 목안에 들어있는 그냥 발포성 알약이라는 것을 이 세상이 얼마나 악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십자가의 증인 노릇하는데 그거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거 이야기해봐야 못 알아듣습니다. 그 이야기. 하나의 개별사실이거든요.

자, 결혼한 사람이 개별사실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뭡니까? 가정입니다. 가정행복이 바로 나의 행복이에요. 가정이 요런 땅콩 밭이에요. 남의 땅콩보다 내 땅콩이 더 많이 열리기를 바라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더 잘되기를 원하고 내가 부은 연금은 나중에 반 토막 안 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태극기 흔드는 거예요. 정치적 발언이 나와서 미안합니다마는. 왜 노인들이 태극기 흔듭니까? 그리스, 스페인, 베네수엘라처럼 자기 연금 부은 게 반 토막 날까 싶어서 가는 거예요. 사회주의로 다 퍼주니까. 퍼줘야 다음에 정권할 때 표가 나오니까. 그리스가 그 짓해가지고 그 좌파로 다 날랐거든요. 갑자기 좌파 나오고. 다른 사람 또 강의 안 듣겠다. 미안합니다. 또 관리해야 돼. 복음 들으세요. 좌파라도. 좌파고 우파고 간에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좌파를 욕하고 우파를 긍정합니까. 그게 아니고 인간은 복음 모르면 좌파든 우파든 전부 다 주님 앞에 좌파에요. 전부 다.

나만 밥 먹고 살자는 거예요. 그래서 니는 내가 월급 줘서 살면 따박, 따박 그걸 잘 하고, 또 엉뚱한데 우리은행 꼬임에 6%준다고 6억 날리지 말고. 잘 봐가지고 안전한데 잘 봐가지고 또 잘못해가지고 괜히 또 독일사채해가지고 50% 반 토막 나지 말고 내 가정 잘되게 돈 맡길게. 내 신임한다. 우리 부부는 신뢰 아닌가. 따라서 돈 맡기니 잘해라. 해도 복음 아는 사람은 그게 주께서 밭이랑 이루는 거예요. 왜? 개체가 무슨 소용 있어요. 주님만이 영원한 개체가 되고 우리는 거기에 주님 덕분에 살아가는 주님이 비료 줘가지고 매일같이 내가 예상 못한 예견 못한 다른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자기 부인하게 만드는 작용으로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엘리야가 그런 겁니다. 엘리야는 지만 잘 났어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비교할 때 말도 안 되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을 못 했습니다. 왜? 시킨 대로 다 했으니까. 하자가 없어요. 시킨 대로 다 했는데 무슨 하자가 있어요. 엘리야가 욕심냈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자신의 문제점을 발각시켰지요.

결국 엘리야는 마지막 자기가 불 수레 타고 올라가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그야말로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니다. 내가 나를 살리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는 로마서8장에 의하면 죽을 육신이었고 내 안에 예수님의 영이 나한테 임하니까 그 임한 효과가 나의 70평생 80평생 90평생 그 효과가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에 부합되도록 나로 하여금 한평생 내 몸을 통해서 죄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밭이랑 작업을 하신 거예요.

갑자기 제목을 소환으로 했다가 밭이랑으로 합시다. 제목 ‘밭이랑’이에요. 주께서 다 이루어주신 거예요. 따라서 이런 밭이랑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게 내 예견대로 내 뜻대로 모든 게 박살날 때입니다. “나, 주님하고 안 살래.” 그렇게 깨달을 때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주 목구멍에 더 내려가야 돼. 악마의 목구멍에서 식도에서 더 내려가야 돼. 창자까지 내려가야 돼요. 세상이 악마라는 것을 이미 지옥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파견 근무시킨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 가는 것은 문이 따로 없어요. 그냥 살다보면 지옥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상한 게 뭐냐, 똑같은 죄인인데 천국 가는 게 이상해요. 성정이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주께서 일을 시켰다는 게 성령을 주셨다는 게 신기해요. 그 신기함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걸음, 두 걸음 살아가는 것도 우리는 미처 몰랐다고 화를 내지만, 주께서 이미 예견하신 것이고 너 개체를 붙들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는 조치, 사랑의 조치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그 사랑만 무럭 무럭 자라나는 작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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