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여름수련회 이사야 제 6강(예외와 비전체 : 이 근호목사)
여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동질성이란 동일한 운명체를 형성하고, 모든 대표성을 가진 왕은 저쪽의 대표성을 가진 개인과 정치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갑니다. 이 방식은 전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방식을 그대로 너나 할 것 없이 다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뭐가 빠졌느냐? 율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율법이 주어졌는가를 그들은 전혀 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8장 16절에 보게 되면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17, 18절도 보면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율법이라는 것을 싸매가지고 시온산에 그 율법을 두게 되면 시온은 거치는 돌이 되고 자빠지고 넘어지는 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이사야 28장 16절에도 나와 있어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자빠지고 엎어지라고 시온이 있는 겁니다. 최고의 무기는 뭐냐? 강철검이 아니고 최고의 무기는 뭐가 되겠어요? 모든 것이 자빠지고 넘어지되, 그 자빠뜨리고 넘어뜨리는 시온은 끄떡도 없는 그것보다 더 최고의 무기가 또 없겠지요. 탱크가 와도 탱크가 부서지고 비행기가 와도 비행기가 부서지고 끄떡도 없는 그런 체제라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 안에 율법이 들어 있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율법은 선한 율법이지요. 율법이 와서 부딪혀서 깨졌다는 말은 본인 자체가 나쁘다, 옳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은 어디에 부딪혀봐야 아는 거예요? 율법에 부딪혀봐야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는데 망했잖아요. 제대로 율법을 해석할 때 자신들의 선입견,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우리끼리 사는 나라다, 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채 율법 들이대다가 오히려 율법에 된통 당하는 겁니다.
이사야 8장 그 앞에 보면 ‘그 당시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왕 백성들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들 체포해라. 다 죽여 버려라. 율법도 모르면서 율법을 가르치는 그 인간들, 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을 받는 인간이나 모두다 똑같이 망해야 마땅하다.’ 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자기의 힘을 모으기에 급급해서 정치적으로 다른 민족과 교류하기 바빴지 진정 율법의 의미가 뭔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율법이 뭔지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이 어떠하다? 율법은 선하지요. 율법이 선하다는 말은 그냥 율법 자체로 선하다가 아니라 무엇을 관계 맺으면서 선하다고 하느냐 하면,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들춰내는 율법이에요. 그래서 그게 무슨 돌이냐 하면, 테스트가 가능한 돌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의 수준과 실체는 이정도 밖에 안 돼.’라는 기준점으로서의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나 오늘날 우리자신을 볼 때에 ‘내가 어느 정도로 엉망이고 개판입니까?’를 먼저 내 쪽에서 생각해서 성경 보는 예는 정말 참 귀하고 귀한, 드문 일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나고 잘났습니까?’ 그것 때문에 성경 보는 경우가 있고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아마 이번 주에 복 받을 거야.’ 이런 것은 있지만 ‘내가 이번 주 십자가마을 수련회참석조차도 죄가 되는 이유를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겠다. 내가 십일조를 했는데 십일조 이것마저 나쁜 짓이라는 것을 확인 차 성경 보겠다.’ 이런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기준중심으로 살아야 될 텐데 그 앞에서 내가 나 잘났음의 기준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꿀밤을 맞아야 되나? 이로써 ‘내 존재는 괜찮은 존재고, 우수한 존재고 복 받을 만 합니다.’ 이걸 도무지 포기할 생각이 없네요. 자기긍정에 빠져가지고.
그것은 성경전체에 관한 내용과 결부되어 있어요. 무지개,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홍수 이후에 하늘에 무지개 떴습니다. 무지개가 뭐냐 하면, 자연으로 만든 기호에요. 자연으로 만든 기호니까 이게 자연의 몸짓이다. 자연에서 나온 시그널이에요. 자연마저 어디에 종속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노아언약, 언약중심으로 자연이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율법, 언약, 이걸 놓쳐버리면 자연은 그냥 내추럴, 자연스러움으로 끝나요. ‘스스로 그러하겠지.’ 이런 식으로 동양 철학하는 것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뭘 어쩌라고. 산은 산이지 그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왜 그런 소리 하는데요? 나는 부처다. 그런 소리 하려고 그런 거죠. ‘너는 너고 나는 나다’잖아요.
자연을 최후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왜? 자연은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자연이 시그널이 되고 신호가 되어버리면 자연이 노할 때 우리는 어떻게 버텨낼 수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자연, 전쟁, 기근, 가뭄, 전염병. 자연이 왜 그렇게 혼란스러워요?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우리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모든 자연이 운행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모든 의미의 종결은 시온에서 나왔거든요.
시온에는 뭐가 있다 했습니까? 아까 시온에 뭐가 장착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율법이 장착되어 있지요. 율법의 기능이 완성이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따라 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거든요. 어릴 때 하던 놀이가 있잖아요. 1, 2, 3, 4, 5, 6, 7, 해놓고 먼저 돌을 툭 던져 놓고 하는 놀이죠. 주께서 먼저 돌을 던져놓고 그 돌을 잡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가 내놓은 맹세를 자기가 회수할 때 역사는 끝납니다. 인류역사는 종결되는 거예요. 알파로 던져놓은 그 모든 언약이 오메가로 마감되는 그 선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발자국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나타냈고 그게 뭐냐 하면, 테스트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평생 교회 다니고 평생 성경공부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 인생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살기’ 그렇게 하잖아요. 도 닦던가 공부 좀 한 사람은 ‘나는 나그네다. 바람 불면 바람 따라 가지.’ 그러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바람 세게 불면 어떻게 하는가? 허리케인이나 태풍이 불어오면 바람 따라 살다가 바다에 빠질 건데 그러면 어떻게 할래요?
바람이 잔잔하게 불면 그럴 수 있어요. 스카프 머리에 쓰고 머리카락 날리는 재미. 옛날 노래책의 삽화처럼 해가지고 “강변에 서서……” 이런 노래 부르면서 서 있으면 참 좋아요. 그런데 그 강변에 태풍 불어오면 홀딱 비 다 맞습니다. kbs에서 태풍 중계방송 하는 겁니까? “여기는 김 대기 기자입니다. 지금 태풍이 시속……, 지금 모자가 날아갑니다.”
지는 월급이라도 받지요. 지금 이건 뭐예요? 태풍 뒤집어쓰고. 인간은 자연과 벗 못해요. 왜? 자연은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율법에 종속되어 있어요. 내가 요구하는 자연이 거기에 맞춰주지를 못합니다. 무슨 대자연이 중국말로 하면 안 알아주고 한국말로 하면 들어주는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나랏말싸미> 라는 그 영화를 보세요. 주문 외우는 사람이 한자로 하니까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언문으로 하지.” 해서 언문으로 하니까 갑자기 먹구름이 와서 비가 쏟아져가지고 “한글을 만들어야 돼.”라는 식으로 시작되거든요.
백성의 대표자인 왕이 누굴 생각해서?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불쌍히 여겨서 하는 짓이잖아요. 어디에 압력을 가한다? 자연에 압력을 가해서 누구 좋으라고? 내게 속한 백성을 잘 되게 해 달라. 이것이 왕이 역할인데 이 왕을 가지고 옛날에는 ‘샤먼’이라 했어요. 대표적인 사람을 단골이라 하는데 이게 단군입니다. 우리나라는 무당의 자손들이에요.
우랄알타이 계통의 무당의 자손들입니다. 단군이 무당이에요. 이 무당제사 할 때 단군제사 지내지요. 제천의식이라 해서. 고조선시대 때. 신과 인간 사이에 왕이 제사장역할과 왕의 역할을 다 같이 해야 되는 겁니다.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바알종교의 특징이 그거예요. ‘왕이 되었으면 신에게 잘 보여서 백성들 잘 밥 먹고 살게 해주면 당신은 진짜 대단한 왕이라 해서 당신이 정권과 당신의 권세를 인정해줄게.’
그거 안 되고 가뭄이 들면 백성이 몰려와서 그 왕의 모가지를 잘라버립니다. 그 문화가 멕시코의 무슨 문화? 마야문명이지요. 피라미드 같은 그 위에서 왕 모가지 여러 명 날라 갔어요. 비 안온다고. 누가 왕 하겠어요? 왕의 운명은 자연에 달린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겁내지 마세요. 당신이 가르치는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서 ‘자연은, 신은, 우리 임금님의 말을 듣는다, 라는 그 신학, 그 이데올로기, 이념에 백성도 오케이, 그리고 당신도 오케이 했다면 당신 목숨을 걸어라.’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가 옛날 마야문명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까? 오늘날 교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새벽기도하고 성경 베끼기 하면 복 받습니다. 과연? 과연 그럴까요. 몰라, 성경 베끼기 하면 글씨는 늘지요. 치매를 지연시키는 것은 인정해줄게요. 그런데 복 받습니까? 십일조하면 30배, 60배 복 받습니까? 테스트해보라고요? 테스트 안해 본 사람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어떤 행동을 질러버리면 그냥 가만있는 바보는 없어요.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것, 이것은 안 가르쳐줘도 다 아는 거예요. 학교 가는 애들 붙들고 안수기도 하면서 “주여 내일 시험인데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주옵소서. (이게 너무 심한 가? 욕심이라면 그러면……)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해주옵소서.” 그런데 공부한 내용이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하옵소서.”
그거 응답받으면 악마의 응답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구태여 하나님 없이도 우리끼리 살 여력, 종교적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바벨론처럼 스스로 최고가 되는, 새벽별이 되는, 제일 높은 그 자리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래서 ‘1 +(플러스)’, 절대 앞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이걸 하나의 보람으로 목표로 삼고 오늘도 교회 가서 열심히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합니까? 반대로 가르치죠. 율법은 뭐한다? 발길로 차버리지요. 차일 때 무지개조차, 이 자연조차 내 손아귀에 있다면 너희들은 이 자연중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지개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복종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무지개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연보다 훨씬 질이 뒤떨어져요. 참새나 들풀보다 누가 못됐어요? 인간이 더 못됐지요. 참새는 키워주는 대로 들풀은 자라나는 대로. 우리는 뭡니까? 살 뺀다고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전립선! 전립선! 하면 된다.”
우리는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가 하나도 없고 악만 남았어요, 악만. 아주 독해. ‘하나님은 나를 버릴찌라도 나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횡포가 어디 있어요? 감사나 고마움은 하나도 없고 항상 모자라는 결핍에 대해서 우리는 불만을 쏟아내는 정신병자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다들 그러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온산을 세우되, 자, 율법을 주지요. 그러면 사람들을 내쫓습니다. 사람들을 거치게 하지요. “이스라엘은 가거라.” 그러면 율법에서 아무것도 안 나와요. 율법은 쫓아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러면 율법이 완성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완성이 되면 여기서 새로운 자식들이 분양됩니다. 막 쏟아지기 시작하지요.
어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한 개밖에 없는 벌통, 벌집을 딱 건드리니까 그 속에서 아지트로 삼고 있는 벌들이 왁 쏟아지지요. 율법의 완성을 건드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와르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동질성, 이것은 새로운 나름대로의 동질성이에요. 출처가 국가정치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하나님자체로 수용되는 동질성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직업이고 남녀노소 관계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이 벌집이 호날두라면 호날두 앞에 40만원, 80만원이고 관계없어요. 직업이 뭐고 간에, 애들이고 어른이고 간에 80만원 주고 호날두 보려고 찾아오는 거예요. 왜? 호날두가 자기이상형이니까. 그러면 메시는? 지금 이 자리에 호날두 모르고 메시 모르는 분 많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자기 직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호날두나 메시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유럽축구 중계방송을 몇 시에 합니까? 새벽 3시 4시에 해요. 잠도 안자고 봅니다. 잠도 안자고 보면서 교회 와서 졸고 그러지요. 호날두 형, 호날두 형, 그러면서. 이번에 그 호날두 형에게 된통 사기 당했지요.
율법이 완성, 이게 시온의 완성입니다. 시온이 완성이 되면 율법에서 출발한 어떤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고 이 백성은 기존의 백성들과 완전히 차이 나게 분류됩니다. 차이 나는 거예요. 이들의 출처는 뭐냐 하면, 이쪽의 이들은 세상의 육적인 것에서 나왔지만,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탐욕에서 나왔지만, 여기는 주님이 나를 잉태하고 만들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완성을 통해서 자식이 나온다면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육에서 나와요. 육에서 핍박받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새의 싹. 오죽 못났으면 싹이겠습니까? 이새의 이만큼 커다란 줄기가 아니고 그냥 싹이에요. 잘린 그루터기에서 그냥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하늘하늘한 싹이 하나 나오는 겁니다. 이게 이새의 싹이에요.
이새는 누구냐, 누구의 아버지냐 하면, 다윗의 아버지죠. 다윗의 아버지에서 다윗 나오는 그 과정을 그대로 하나님의 율법, 시온산에서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겁니다. 이새의 싹. 이새의 싹이 나오는데 이새의 싹에 대해서 이사야 11장을 봅시다. 1절이요. 여기 나오는 이새. 이 사람 이씨 집안 아닙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러면 이 시온에서 새롭게 출생된 사람들은 혼자 독자적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고 그들 머리위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종속되고 어떤 범위로서 규정받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완성에만 치중하도록 일하시는 신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완성만. 하나님의 언약 완성된 그 마지막 모습이 천국이라면 천국에 산다는 것은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미리 왔던 그 언약이라는 테스트,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천국 가는데 그 통과여부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 한해서 이 언약이 통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 사람에게는 주도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인한테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에게 있습니까? 주도권이 하나님의 신에게 있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어디에 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이새의 태에서 나오지요. 이새의 태에서 나오면 그들은 역시 우리와 같이 몸, 육체, 육신 그대로 나오지요.
그러면 몸, 육체, 육신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아담의 육체, 몸에서 나온 거고 여기서 죄악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범죄한 인간이 나오잖아요. 문제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냥 육체와 우리 몸의 이런 속성을 우리가 이겨낼 수가 없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내가 선하고 싶어도, 율법이 선한 줄을 알고 지켜야 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율법이 들어오는 순간 율법이 뭘 자극하느냐 하면,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라고 자극한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의 기능이에요. 선악과를 보고 따먹으라 했습니까,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느 쪽입니까? 따먹지 말라고 하는 순간 ‘따먹고 싶다’ 가 돼요.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잠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애한테 김치 안 먹고 밥 안 먹을 때 “먹지 마라.” 이러면 안 되고 “그러면 먹지 마. 내가 선반위에 올려놓을 테니 저거 먹지 마.” 하면 애가 사다리타고 선반위에 올라가서 먹지 말라고 한 그것을 먹는대요.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자꾸 써먹으면 부모의 계략이라는 것을 알고 눈치 다 채서 그 다음부터 안 통하지만.
뭔가 하지 말라 하면, ‘나는 모르는데 부모만 아는 무엇이 분명히 있어’라고 괜한 기대를 갖게 되어서 도전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니 해보고 싶은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는 성령 받은 사도가 두 가지 다 있다고 해요. 성령 받은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도 있잖아요. 또 뭐 있습니까? 성령을 받았기에 육신의 한계를 아는 겁니다.
“아하, 나는 육신이, 오호라 나는 곤란한 사람, 곤고한 사람, 난처한 사람이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야 된다. 나는 방향감도 없어. 나는 질곡에 빠진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에 빠진 거예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죄에 빠진 겁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사채에 빠지고 게임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죄에 빠졌어요, 죄에.
이 죄는 율법이 와서 자극했기 때문에, 내가 죄짓고 싶은 그 죄는 아니에요. 내가 짓고 싶은 죄는 절대로 안 빠져요. 왜? 내 권한 하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의 육체를 겨냥해서 벌어지는 자연의 율법의 완성적 차원에서의 조치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육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에어컨 틀어놓고 있지요. 만약에 지금 에어컨 다 고장 났다. 선풍기도 없다. “아이고 만족스러워라.” 이럴 사람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전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에 교회에 에어컨이 없었어요. 에어컨이 없으니까 선풍기 3대를 틀어놨는데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하고 내가 설교하는 소리하고 섞여서 이것은 공장인지 교회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힘든 줄도 몰랐어요. 말씀 전하는 기회를 주셨으니까 거기에 완전 감동받아가지고 지금 선풍기를 틀었는지 뭘 틀었는지 더운지도 모르고 했어요. 나중에 끝나고 샤워하면 그만이지, 했어요. 지금 에어컨 안틀어놓으면 난처할 지경이에요. 왜? 우리는 육체에 속하고 몸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은 내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몸이 그대로 가겠다는데. 내가 어쩌란 말입니까? 누굴 사랑하고 누굴 미워하겠다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자아가 나서서 수습이 되겠어요. 안되지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그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죄의 몸이라 했어요. 계속 죄가 생산되는 몸이에요. 내 몸은 그냥 몸이 아니고, 요가나 하고 단련이나 하고 그런 몸이 아니고 무슨 몸? 죄의 몸이라는 것, 앞에 죄가 붙는 죄를 위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이미 뭐 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이 관리할 문제지 누가 관리할 문제는 아니다? 몸이 몸을, 자아가 이걸 관리할 문제는 아닌 거예요. 후회하거나 실수나 실패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한테 해당이 안돼요. 내 몸이 어떻게 내 몸을 관리해요? ‘아 조금 더 잘할 것인데.’ 그러지 마세요. 조금 더 잘해봤자 그것도 하나의 교만이에요. 성령이 와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하게 되면 인간이 고쳐집니까? 안 고쳐지지요. 고쳐지면 그 다음은 성령 내쫓을 건데. 여러분이, 부엌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누굴 부릅니까? 배관공 부르던가 아니면 인테리어업자 부르겠지요. 그 사람하고 살림 삽니까? 아니지요. 공사 끝나고 난 뒤에 “고맙습니다.” 하고 박카스 줘서 보내버리지요.
우리가 우리 원대로 들어준다면 더 이상 주님이 필요 없고 성령도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빠이빠이.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알아서 착실하게 살겠습니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전에는 죄의 몸이었는데 이제는 성령 받아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내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로마서 7장, 8장을 그렇게 해석해 버려요.
누가? 정통개혁주의신학이. 아이고, 이 이단들, 이단들! 그 정통개혁주의 신학이 결국 노리는 것은 뭡니까? 돈을 내세요. 하나님일 확장을 위해서 돈을 내세요. 결국 돈 문제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개인의 존재가치가 없으니까. 교회도 돈이 있으니까 교회 같지 돈이 없는 교회는요, 교회 아니지요.
예배 중에 얼굴 딱 쳐들어가지고 교인수를 보는 거예요. ‘이 홀이 전기세 한 2만원 나오는데 교인 수 세 명이니 난 6천원 감당하겠다.’ 이런 생각을 해가지고 말씀이 안 들어온다니까요. 그런데 가보니까 교인수가 한 6천명이 되었다. 에어컨을 팡팡 틀었다. 그렇게 해봤자 6천명이 천 원씩만 내면 되겠네. 그러면 부담 없이 즐기는 거죠. 내 사유재산이 안 나가기 때문에. 내 사유재산에 흠집이 안 난다면 얼마든지 교회 다닐 용의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미친 목사가 와서 예배당 짓겠다고 하면 다 나가버려요. 몸, 육체, 이것은 우리의 관리대상이 안됩니다. 관리대상이 안되는데 왜 성령이 오느냐? 하지 말라고 오는 거예요. “내가 할게, 내가. 성령 내가 할게.” 어떻게? 너는 네가 손 댈 수 없는 육신의 몸, 너에게 책임이 없는 육신의 몸을 네가 지니고 있음을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우리 몸을 인정하면 그만이 아니냐. 인정하면 더 이상 성령이 안와도 되지 않느냐. 우리 육신이 품고 있는 아담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쪽이 아니고 개과천선을 해도 도루묵이 되는 쪽으로 계속해서 상황을 몰아넣지요.
5+3=8, 이것은 풀었는데 7600 x 4268, 이것은 풀었느냐, 하고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오지요. 이걸 몇 번 불러야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오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계속 지적해내는 겁니다. 자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신께서는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그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성신은 언약이 완성될 때 보이지 않는 왕이 있고 그 왕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왕이에요. 왕에서 성신이 오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에
기존의 왕은 대표성을 갖고 있으니까 모든 전체를 통할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모든 전체에 있지 않고 바깥에 나가는 자리에 예외의 자리에 자기자리를 잡습니다.
법이 있어도 그 법은 왕의 법이 돼요. 왕의 법이기에 그 법을 제정하는 권한은 왕에게 있기에 왕은 그 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왕은 초법이지요. 예외상태, 법을 뛰어넘는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나머지를 왕에게 복속시키기 위해서, 모든 법은 왕 자신을 위해서,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 백성들이 따라가게 되면 “왕 혼자서 다 하세요.”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다니엘에 보면 잘 나오지요.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을 두고 신하들은 어떤 처벌을 받느냐?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꿈을 꿨어요. 꿈을 꿔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용을 잊어버렸다고요. 그것은 자기책임이지. 그것은 자기책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억지를 쓰느냐 하면, “어젯밤에 내가 꾼 꿈을 알아내라.” 미친 것도 아니고.
임금님 돌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니까 “아니야. 이 꿈이 보통 꿈같으면 내가 이런 억지를 안 부리는데 이 꿈은 바벨론제국의 운명과 관계된 꿈이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내라.” 신하들이 듣고는 ‘아무리 내가 왕의 신하지만 이것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하거든요.
“임금님이여 그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지 우리는 못합니다.”라고 하니까 그 때 임금님이 제대로 화를 내면서 “그동안 너희들이 월급을 왜 받았느냐? 너희들이 월급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겁니다.’ 그걸 빌미로 그동안 월급 받아먹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딴소리 하느냐? 이제 와서 하나님밖에 모른다는 식으로 도망을 쳐? 다 죽여 버려라.”
그래서 다 죽이는데 그 죽는 자리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다니엘과 세 친구도 거기 함께 있었어요. 이제 다니엘도 죽을 판이에요. 그럴 때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해석을 해버리면 이제 묻습니다. 다니엘이 왕이에요, 느부갓네살이 왕입니까? 왕이 이제는 누구 밑에 와 있게 되었어요? 다니엘 밑으로 오게 된 거예요.
그걸 예외라 하지 않고 ‘비전체’라 해요. 아, 이 ‘비전체’라는 용어는요. 굉장히 어려운 용어에요. 예외는 이렇습니다. “너는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너는 여기 해당이 없으니 나가서 지켜보기만 해라.” 이런 예외는 쉽게 이해가 되는데 전체가 아니고 ‘비전체’라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비전체’라는 말은 전체로 하여금 이것은 전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요건을 전체 안에 집어넣는 것을 ‘비전체’라고 합니다. 이 전체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 따로 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 있을 때는 조용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모두 다” 이렇게 되는데 갑자기 여기에 난제, 풀 수 없는 난제가 들어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손들어버리지요. “그 꿈은 풀 수 없습니다. 주여!” 이렇게 되지요. “임금님!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기서 예외에 대해서 전체가 자기의 한계를 드러낼 때 전체에 대한 한계바깥에 새로운 전체를 마련하면서 등장할 때 ‘비전체’가 되어버려요. 없었던 전체인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 전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까발릴 수 있는 역량, 그러한 새로운 요건이 새롭게 발생될 때 그걸 ‘비전체’라 해요. 예외가 아니에요.
그러면 ‘비전체’ 앞에서는 이 예외라는 것도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체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비전체가 되어버리면 이 예외도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같은 한통속이 뭘 까불어?’ 그 예외를 인정하지 않지요. 그러면 예외를 인정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왕이지요. 왕인 거예요. 주로 남성이 되지요.
그런데 ‘비전체’는 뭐가 되느냐 하면, ‘비전체’는 남성인 왕 밑에 모든 인간이 복속되어 있는 그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이라면 하나님이 새로운 왕을 꽂을 때는, 새로운 시온에서 왕이 등장할 때는 그 왕의 출처, 이것은 남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왔는가? 여성에서 나온 거예요.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은 거예요. 그 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들이 되는 겁니다.
기존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전체의 전체라고 여기는 이 세상을 전부 다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부정해버리지요. ‘이것은 다 죄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비전체’는 어디에 있다? 이 안에 잠복되어 있었는데, 보이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같이 있었는데 어떤 계기에 의해서 전체의 한계가 드러날 때 여기에 속해 있는 요소가 나타나버리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한계로서의 전체는 진정한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정도가 아니고 전부 다 부정당할 거지요. 그러면 이 전체에 새로운 전체를 더하면 그것도 전체냐? 아니지요. 그것은 플러스(+)가 되니까 안 되고요, 뭐냐 하면, 이 새로운 전체를 위해서 이 전체는 부정당해야 되지요. 1-x가 되는 거예요. 1-x. 우리 속에 목수의 아들이라고 변변치 않은 인물로서의 그분이 우리 모든 인간세계를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부여됩니다.
그분의 그 노선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거지요. 이점에서 처녀라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을 복습하게 되면,
처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자인 선지자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면 선지자와 대별되는 사람은 왕이지요. 왕은 정치적이고 대표자에요. 그 현실세계의 대표자고 선지자라 하는 것은 ‘비전체’에 속하기 때문에 정치할 능력은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계시를 받으면 율법의 완성을 내다보면서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스템을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미리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계시해주게 되면 ‘기존의 이스라엘 + 새로운 다윗의 나라’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마이너스)가 되어버리지요. 이것은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 입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처녀’라는 말이지요. ‘처녀’ 보통 남자, 여자라고 했을 때 이 여자는 실상은 껍질만 여자지 사실은 내용은 남자에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남자 같아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래서 남자들이 이 점에 속아 넘어가지요. ‘여자인줄 알고 결혼해 보니 남자더라. 나보다 더 센 남자였더라.’
왜냐하면 그 여성성이라 하는 것은 사회가 강요하고 위장하라고 준 거예요. 애교부리고 “오빠-앙!”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하는 것은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재주라는 말이지요. “오빠-앙!” 해놓고 결혼하고 나서는 방구 뿡뿡 뀌고 그러거든요. 여자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남자와 남자가 결혼한 거예요.
나중에 호르몬 떨어지면 노골적으로 더 남자에요. 테스토스테론인가 남성호르몬이 늘어나면서 갱년기 지나면 이것은 완전히 남자 같아요. 여성성이 없어지니까. 왜 그런가 하면, 여성이 어디 출신입니까? 남자에서 나왔거든요. 남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끝나면 남성화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2가 되겠지요. 남자1, 남자2. 합쳐보면 남자의 세계. 이것은 곧 전체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여왕을 뽑든 남자 왕을 뽑든 이것은 남성세계를 대변하는 겁니다. 이것을 부정하려면 남성들이 끼지 않은 여성이 등장해야 되겠지요. 남성들이 끼지 않은 여성이라 하는 것은 바로 처녀가 되겠습니다.
처녀는 무엇의 흐름, 아담의 흐름을 부정하기 위해서 아담으로서의 전체상황에 비전체로서 처녀가 출몰하게 됩니다. 출몰할 때 배경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시에 의해서 출몰하지요. 계시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출몰한다는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사건입니다. 사건은 어떠한 근거가 없어요. 바람자체가 불 때만 바람이 있지 지나가면 바람이 끊어지잖아요.
이 땅에 어떤 근거나 뿌리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어떤 기초도 두지 않고 근거가 하늘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만 들어 있고 지상에서 인간이 얼굴 돌리면서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거예요. 여기 이 지상에 예수님이 계셔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본 이유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아무리 보고자 했어도 예수님을 자기와 동류로 봤지, 예수님의 진짜 본질을 모든 인간은, 심지어 제자들도 그것을 몰랐어요.
혹시 제자들이 알았다면 그것은 뭐냐?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안 사람만 아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묻지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거 뭐 이스라엘 잘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선지자중 하나고 엘리야나 예레미야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베드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 받았구나.” 이를 네가 알게 한 것은 네 무엇이 아니고? 네 무엇이 아니고? 혈육이 아니라는 거예요. 혈육. 혈육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혈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찾아볼까요? 이거 선교단체 간사들이 많이 외우는 건데요.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단서가 붙고 조건이 붙어요. 이는 뭐는 아니다? 이는 혈통으로도 아니고 육정으로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도 나지 아니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 우리가 어떤 원인으로서 기여한 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는 것은 내 쪽에서 새롭게 도움 주는 일은 일체 없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모르지요. 자기가 손들어서 교회 나온 줄 알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진짜 자녀 같으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작업에 나서겠습니까? 내 쪽에서 뭘 해서 자녀 된다는 요소를 평생 죽을 때까지, 95세까지 전부 잘라버리는 거예요. 계속 잘라버려요. ‘나 같은 것이 자녀? 이것은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갈수록 그걸 잘라내는 그 긴긴 여정의 기한이 바로 인생이라는 거예요.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삭제의 대상, 제거의 대상이지요. 아무 필요 없는 육신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이 인생이다. 뭐 인생은 나그네길? 나그네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생은 하숙생. 인생은 고장 난 시계. 왜 고장 난 시계는 멈추지도 않는지, 그런 것. 청춘은 왜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지도 않는지, 그런 거요. 이런 탄식.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그거, 버릴 카드를 왜 자꾸 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버릴 것은 버리라고, 이미 버려졌다는 것을, 너는 이미 죽은 육체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교체작업, 수정작업, 인식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내 쪽에 일체 원인이 없었습니다.” 하는 고백을 계속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말로는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특히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슬슬 걷어붙입니다. ‘알아? 아는가 한번 보자.’ 하고 슬슬 알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던져 놓은 땅값이 갑자기 10배가 오르면 “주여, 웬 복입니까?” “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위험한 거다.” “위험해도 기분 좋습니다.”
주식 사서 열 배가 올랐는데 그 다음해에 일본이 수출규제 들어가서 백분의 일로 줄게 되면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 줄 때 마음 다르고 빼앗아가는 마음 달라버리고 도대체 그동안 우리가 사는 기준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거지요. 우리의모든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남들처럼 살려고 하는 그것이 시험이었고 유혹이었습니다.
그 남들에 누가 빠져 있겠어요?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 받은 스데반집사처럼, 또는 사도바울처럼. 그런 것은 어떻게 족집게처럼 쏙쏙 완전히 뽑아내는지. 쏙, 쏙, 쏙, 완전히 잡 털 뽑듯이 다 뽑아내요. 밥 안에 돌멩이 들어간 것처럼 다 제키고 남들처럼 한다는 그 남들에 누가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까? 나를 넘어뜨리는 요소를 다 뺐어요.
그러면 내 안에서 시온성도 없고, 율법의 완성도 없고, 그냥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결국 이사야는 누구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소돔과 고모라성 너희들 망한다. 백날 이야기해도 우리는 끄떡도 하지 않아요. ‘망할 때 되어봐야 망하는 거지.’ 하는 것처럼. 이사야를 보면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일 주의할 것은 이것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는 거예요.
“역사로 보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한다면 역사로 보게 되면 이것이 과거, 지나간, 한물 간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나를 공격하기를, “이 근호 목사는 역사를 빼더라.” 그 말이지요. “역사를 무시하더라.” 그렇게 이야기해요. 아, 역사를 쥐고 역사 속에서 어떤 미래를 보겠다는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이미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까 잊어버리고 새 역사를 이루세.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하잖아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걸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사기꾼이라는 거예요, 사기꾼. 사기꾼들이에요. 사기꾼이 사기꾼 모방하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사기꾼으로 살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기꾼 성향을 우리 육신으로 버릴 재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저는 이사야를 믿습니다. 임마누엘 되고 싶어요.” 이것은 우리의 말이지요. 왜? 괜찮은 것 날라 다니는 것을 잡아당겼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레벨이 말이에요. 그러나 말씀은 말 차원을 부정해버리고 성령께서 말씀차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내뱉은 괜찮은 말, 함부로 말 던지기 이것, 성령께서는 안 속아 넘어갑니다.
“내가 네 수법에 안 넘어간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자연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자체가 하나님의 시그널이잖아요. 무지개. 세상의 모든 폭풍도, 바람도, 무지개도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펼쳐놓은 것들이고, 하늘에 박혀 있는 별이나 달 이모든 것이 징조고, 징후거든요. 해가 있는 이유는 해를 보고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있는 것이고, 달을 만든 것은 달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개코도 볼 것 뭐 있다고요? 옥토끼라도 달에 있으면 감상하면서 감사하겠는데 옥토끼가 없다는 것을 다 알잖아요. 옥토끼 없는 것은 아는데 주님께서 그걸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는 다 잊어버렸어요.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비전체’, 다시 말해서 시온에서 나오는 시온의 백성으로서 여기에 박아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박아놓으면 박아놓은 것으로 끝이 아니고 시온과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겠지요. 그 연결성이 뭐냐 하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설명하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야곱언약의 특징은 뭐냐? 사다리가 나오지요. 사다리가 조용합니까? 아니면 뭔가 왔다 갔다 해요.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하지요.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은 천사들이 다해요.
그러면 다윗언약에 있어서의 사다리가 있다면 무엇이 왔다 갔다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영, 성령께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성령께서 일을 다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면목을 깨우치고 눈을 떠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감사와 고마움, 은혜의 조치로 깨닫게 하는 것으로 다윗언약이 진행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6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 한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서는 기쁜 소식입니다. 저녁 먹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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