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제3강 보편적 정신병

아빠와 함께 2019. 8. 3. 13:16
2019-08-03 10:06:03조회 : 9         
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이사야 강해: 보편적 정신병이름 : 한윤범 (IP:119.192.174.248)
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이사야 강해: 보편적 정신병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이사야를 지난 시간에 문서선지자라 했지요. 문서선지자와 기적선지자의 차이점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기적선지자는 아직 가능성이 있어요. 배 열두 척이 아직 있는 거예요. 문서선지자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문서선지자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외부세력, 먹구름이죠. 외부세력에 의해서 포획 당했다. 

포획 당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나타내고 있는 현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악한 외부세력에 의해서 실제로 포획 당하고 통치 받을만한 그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가능성이란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눌리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제국에 압제를 받는 입장에 있는데 이름도 어려워요. 

살만에셀3세-디글랏빌레셀-사르곤-산헤립, 이런 앗수르의 연이은 왕에게 철저하게 사로잡힌 입장에 있어요. 앗수르가 주인이 되고 유다, 이스라엘은 둘 다 종노릇하는 처지에 있어요. 계속해서 시달림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찾지요. 여호와를 찾는 응답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갇혀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가장 네 처지에 부합되고 합당하다는 식으로 해답을 내린 거예요.

문서선지자의 말씀 자체가 해답이에요. 네가 압제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된다는 겁니다. 네 처지는 괴롭지만.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일에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제대로 잘 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유다 이 사람들은 힘들지만 사는 게 괴롭지만 하나님 보시기는 적절한 조치를 내리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계속 말씀을 전하면서 살만에셀, 디글랏빌레셀, 사르곤, 산헤립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역사가 영(적)이다. 영적인 것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영적이어야 제대로 된 영적이잖아요. 역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항상 의문점이 뭐냐 하면, 성경이야기가 오늘날도 실제적이냐, 내가 믿는 것이 실제로 그러하냐? 계속 의구심을 본인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냥 역사라고 하면 안 돼요.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로 날아가 버려요. 그때는 그랬지, 끝. 지금은 뭐냐 말이죠. 역사라는 것은 계속해서 없어지기 때문에 그때는 맞았어. 지금은 내가 믿는 게 망상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스스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를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역사를 믿으면 허무하지요. 왜냐하면 역사는 자꾸 삭제되기 때문에 없어지기 때문에. 

그때 믿은 것이 지금도 유효하냐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그때는 참 잘 믿었는데. 오년 전에 예수 잘 믿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뭔가 시원찮다는 느낌이 들지요. 그럴 때 현재 내 믿음은 제대로 된 믿음일까? 이런 믿음으로 나중에 지옥 가는 게 아닐까? 지옥 가는데 부합이 되는 게 아닐지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 말고 영적인 걸 찾자. 부들부들 떠는 것, 뜨거운 것 있잖아요. 영적인 것 찾자는데. 

이사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영은 반드시 역사라는 그러한 모습, 현상으로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역사가 어떻게 영적이 되느냐 하면, 이걸 풀이하면,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땅과 인간 사이에서 땅이 우세한 거예요. 인간은 땅의 저주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게 창세기 3장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땅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햇빛과 공기를 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못 산다. 자연에 너무 의존적이다. 이게 창세기 3장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기후가 나쁘거나 하면 못 사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산지, 밑에는 지중해고. 산 위에서, 예루살렘도 이 동네에 있어요. 높은 산에서 농사짓다가 인구가 많아지면서 바깥에 평지에다 농사짓기 시작했어요. 

농사지으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왕의 입장에서 국력을 신장하기 위해서는 외화를 많이 벌어 와야 되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때 자급자족에서 벗어나서 다른 나라에서 요구하는 특화작물을 계획적으로 정책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문제는 특화작물을 실시할 때 자연이 잘 받쳐준다는 요건 하에 대박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가뭄이 들었다. 가뭄이 들면 자급자족도 다 날아갈 판이에요. 그러면 가뭄이 들 때는 이 사람들이 다음에 심을 씨앗도 못 건질 경우에는 장사해도 이득을 본 권력층에 땅을 팔아먹어야 돼요. 그러면 여기에 살지 않는 땅주인들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세금 많이 때리겠지요. 60%. 지금도 주인이 살지 않는 땅이 우리나라에도 많잖아요.

이 사람들이 일하지도 않고 세금으로 떼어가니까 결국 농민들이 지주한테 땅을 팔아먹어야 되고 지주는 갈수록 점점 더 부유층이 되고 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나중에 떠돌아다니고 나그네가 되고 전쟁하다보면 죽기도 하고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가 하는 말이, 나라꼴이 평등으로 시작했다가 완전히 계급 차, 빈부차가 심하게 되었느냐? 너희가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다는 이야기가 이사야서에 쭉 나오는 겁니다. 

원인이 뭐냐 하면, 왕이 제대로 정치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유다 왕, 이스라엘 왕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만큼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던 결과가 나라를 망친 거예요. 나라를 망칠 때 선지자는 이걸 영적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에 망쳤다, 라고 이야기하고, 왕은 일단은 우리나라 이스라엘이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다급한 문제, 절박한 문제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선지자에게, 선지자가 하나님 대리인이니까 변명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라가 어려우니까 큰 나라에 조공 바치기 위해서 솔로몬의 금이고 모든 걸 다 바쳐서 제발 우리나라를 떠나주세요. 제발 우리나라 침범하지 마세요, 라고 살살 빌어서 다 갖다 바친 것은 우리의 형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권력층에서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는 말하기를 침략자가 찾아오는 그 역사가 곧 영적으로 해석이 돼야 된다는 것이 바로 문서선지자의 주장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파멸이죠. 보이는 역사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해석하는 겁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적은 없어요. 역사 자체가 영적이에요. 인간이 땅에 의존적이고 땅이 우세인데 이 땅을 바다에서 올라온 것들이 그냥 바다에 살면 되는데 바다의 괴물이 땅을 접수를 한 거예요. 점령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땅에 의존하던 인간들이, 백성들이 바다에서 올라온 제국에 복종할 때 바다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이다. 그 짐승 중에 첫 번째 짐승의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포로 잡아갔을 때 누가 봐도 이건 역사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잡아갔다. 역사지요. 짐승이 이스라엘을 잡아갔다. 할 때는 역사적이 아니고 영적이 되는 겁니다. 영적이라 말은 뭐냐 하면, 배후에 짐승을 짐승이라고 지칭하는 영적인 분의 의도에 의해서 짐승 같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접수했다고 해석하는 거예요. 선지자에서는. 그러면 이스라엘은 짐승한테 삼킴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짐승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진정한 구원으로 보는 겁니다. 

짐승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야기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하지요. 이런 이유로 교재를 봅시다. <말씀의 움직임>에 나오는 서론에 보면, ‘정신치료와 현실치료’ 있지요.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이사야서 하면서 개인적인 정신치료가 왜 튀어나오느냐? 여러분들이 납득을 잘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약간은 이해가 되실 거예요.

정신병이 무엇이냐는 것과 이사야의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냐? 그 관계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 전하면서 일을 하실 때 귀신 쫓아내는 일을 하셨지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들린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귀신들린 사람이 보편적인 사람을 대신했는데 시범자에 불과하거든요.

귀신 쫓겨나가면 귀신과 몸이 분리됩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은 뭐냐? 귀신이 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을 특별한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귀신과 함께 동거하고 있음을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 귀신 쫓아내는 일이에요. 아이고, 안 됐다. 저들은 귀신들려서 게거품 무느냐, 라고 측은해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 문제란 말이죠.

이미 유다 자체가 짐승이라는 영적인 의미를 지닌 바벨론에, 바벨론이 짐승₁이거든요. 짐승₂가 메대-바사고, 짐승₃가 헬라마케도니아, 짐승₄가 로마거든요. 지금 유다는 마지막 짐승₄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₄가 끝이에요. 여기서 오징어 다리 갈라지듯이 열 개로 갈라지면서 세상은 끝장나게 돼있어요.

역사적으로 짐승₁, 짐승₂, 짐승₃, 짐승₄ 완전히 포맨. 1234라는 것은 누가 봐도 짐승이 아니에요. 이건 사람들이고 제국들인데 그 제국 안에 누가 관통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영적 존재, 어떤 언약적 공동체가 통과하면 주변의 제국이 갑자기 짐승으로 바뀌는 겁니다.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네가 멋도 모르고 건드렸다는 겁니다. 건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심판에서 전 우주의 심판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된 거예요. 네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은 건드렸다.

그러면 통과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이사야서에서 남은 자에요. 이사야에서 남은 자는 그들이 바벨론으로 갔다가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포로 잡혔다가 칠십 년 만에 돌아온 자들이 남은 자에요. 이 남은 자 어디 가느냐? 지옥 갑니다. 놀랍게도. 이사야가 보여주는 반전이에요. 우리가 아는 남은 자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포로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천국 갈 것이라고 하는데, 이사야 마지막에 나오는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남은 자에요. 

남은 자들이 왜냐하면 역사에서 영적으로 튀질 못하고 역사에서 다시 옛날로 역사주의로 돌아갔다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는 충분히 칠십 년 동안 짐승한테 포로 잡혔기 때문에 받을 벌을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가 포로 잡혀간 것도 전부 다 우리 책임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책임자,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나님께 잘못을 돌리는 거예요.

그렇게 잘못을 돌리면서 나오는 게 뭐냐?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귀한 것도 만들고 천한 것도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면 하나님 자체가 나쁜 것을 만든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남은 자들의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 겁니다. 자기들은 역사주의를 주장하면서. 이사야가 보여주는 우리 예상과 빗나가는 반전이에요.

돌아온 사람 가운데 권력을 쥐겠다는 두 사람이 있어서 박혀봐야 썩은 못이 돼서 뚝 떨어진다는 대목도 이사야에 나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이 과거의 비참했던 역사기 때문에 이제 후손들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옛날에 우리가 너무나 치욕스러운 역사를 생각해서 이제는 다시 죽창 들고 다시는 일제한테 억매여선 안 된다고 역사주의로 되돌아갈 때 그 수평적인 역사주의에서 못 벗어날 때 그들의 바로 마지막 하나님의 지옥 갈 자는 이렇게 지옥 간다는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 모델케이스의 연속성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민족의 신학이었어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구원한다. 세 번째 성전 세워지고 황금 돔 성이 세워지는 날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온다. 그래서 그때를 준비해서 우리는 삼차대전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블레셋과 이란, 엘람, 시편에 나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변 나라를 항상 선제공격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원자폭탄 200개를 만들어놓고. 때가 되면 선제공격해서 메시아 오는 날을 앞당겨보자.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고 나머지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기독교신자는 팔목에 666만 안 맞으면 된다. 역사주의 해석으로 나간 거예요. 그 역사주의 해석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다른 것 필요 없어요. 역시 돈이에요. 돈으로 벙커작업에 나서야 되는 겁니다. 생수 1년 치 분, 비상식량, 비상용 구급약, 그리고 남들이 그걸 노리고 올지 모르니까 기관단총과 총알 이천 발, 이런 것. 

그렇게 마지막 때에 깨어있는 자는 살아보자. 지금은 깨어있을 때다. 아침 밥 먹고 졸지 마시고 깨세요. 언제 올지 모르니까. 여러분, 깨고자 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주님이 도둑이기 때문에 도둑답게 오시도록 우리는 자고 있어야 돼요. 그런 느긋함이 있어야 돼요. 잠 푹 주무시다가 데려갈 자는 데려가고 못 데려갈 자는 안 데려가고. 그리 살아야지 맨날 성냥개비 쪼개서 눈 벌려서 깨어라, 깨어라. 무슨 이벤트가 그런 이벤트가 다 있습니까.

이러한 짐승의 영적 요소가 인간을 다 지배하게 될 때 짐승과 관련된 악마적인 요소가 유다에 범람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볼 때에 역사적으로 메시아 온다고 그들에 동의한 것이 아니고 스톱시켜요. 하늘나라는 지금, 내가 말할 때 내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임할 때 지금 이 순간,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분리될 때 내가 누구와 함께 동고동락했는지 그 정체가 탄로 날 때 그게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온 순간이란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그동안 어떻게 해서 역사주의가 역사성을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실상을 감추고 진리를 감추고 복음을 감추면서 성공할 수 있었는가? 성공했다지만 성공 못하지요. 인간에게는 미흡함을 자꾸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란 것은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심히 힘들어하는 현상, 내가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편해하고 참을 수 없어하는 증세, 이게 정신병입니다. 내가 온전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미쳤어요. 그럼 누가 정신병자입니까? 에브리바디,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에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온전함을 위하여 전력투구하는 거예요. 모자람이 없이.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용서가 안 돼. 내가 참을 수가 없어요. 내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내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요. 경상도 말로 미친갱이(미치광이)라 하는데 모두 다 미친 사람이에요. 

자기가 몰입하는 일을 통해서 절대성에 접근하려하고 자기 하는 일이 완벽에 완벽을 하는 어떤 직업이라도 상관없어요. 치킨 집을 하든지 편의점을 하든지 커피전문점을 하든지 직장생활하든지 목회하든지 자기 하는 일이 계속해서 미흡함이 남고 그 미흡함에 대해서 마저 채우지 못해서 환장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은 직업과 상관없이, 집에서 노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더 완벽하게 놀아보자. 내가 게으름뱅이란 소릴 안 들으면서도 철저하게 스케줄 잡아서 놀아보자는 놂의 진수를 보여주겠다, 노는 것의 달인 되기, 이러한 시도에요.

특히 주부들의 애 키울 때 이런 현상 많이 일어나지요. 내 애가 남들 보기에 참 잘 키웠다. 엄마가 똑 소리 나게 키웠네, 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나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다는 거예요. 정신병입니다. 아이들은 신났어요. 엄마의 약점을 부여잡고 평생 엄마, 아빠의 등골을 따 빼먹고 있습니다. 싱글벙글거리면서. 나는 엄마의 약점을 알고 있어. 내가 어떨 때 엄마가 환장하는지 너무 잘 알아. 애들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 발달했어.

그렇게 하다보니까 마지막에 도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로서는 왜 내가 완전치 못하고 온전히 못하는가에 대해서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정신병의 증세가 뭐냐? 말문이 막히는 거예요. 그럼 정신병 치료는 간단하지요. 말문이 터지는 거예요. 헉헉. 헉헉거리지 말고 말 좀 해라. 몰라. 무슨 말인지 말을 할 수 없어요.

어떤 표현을 해야 되는데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도는 거예요. 자기감정을 표현해야 되는데. 예를 들어서 좋아한다. 아니야, 아니야. 좋아한다는 것으로 모자라. 그럼 사랑한다?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오빠야. 아니야, 오빠야 이것도 아니야. 뭐야, 그래. 이건데 어떻게 말이 안 되네. 그 말할 언어와 내 감정이 일치가 될 수 없을 때 그 불완전함이 가슴앓이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누적이 되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도 아니고 오빠야, 이것도 아니고. 오빠야 하다가 자기야, 그것도 아니야. 그러면 고유명사로 시작하다가 그 다음에 자기야로 거쳐서 동작을 표현하는 겁니다. 사랑해. 사랑해도 아니야. 그럼 뭐냐 하면, 홍석천처럼 미워 죽겠어. 이제는 반어법으로 나가요. 미워주겠어. 꼬집어줄까. 이러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고유명사로 불완전할 때는 자기가 자기를 지칭하는 표현을 동원하다 그것도 안 되면 동작을 표현한다. 동작을 표현한 걸 동사라 합니다. 동사의 특징은 사라져버리는 사건을 냉동 동결시키는 방법이에요. 이 사랑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계속 시간을 끌어보려는 시도, 이게 바로 동사에요. 

그런데 동사가 되면 반칙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건은 표현될 수가 없어요.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걸 비유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에 있는 모든 동사는 비유입니다. 비유할 때 또는 상징이라 해도 되고, 비유할 때는 순서가 있어요. 은유로 시작해서 환유로 나가는 겁니다. 은유와 환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전부 다 물질성과 관련돼있는데…

언어란 물질에다가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던 몇 개 되지도 않는 단어 가운데서 접근이 가장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하는 겁니다. 물질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하고 말로 할 때 이게 일치될까요. 일치 안 될까요? 일치될 수 없지요. 그러면 또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게 언어돌려막기에요. 카드를 계속 돌려막듯이. 

오빠야, 이것도 아니고. 빨갛다, 발그스레하다, 입술에 바를 때는 빨갛잖아요. 벌겋게 또는 빨갛게. 볼 빨간 사춘기, 이런 것. 몰라도 됩니다. 하여튼 표현을 하고 싶은데 내가 아는 언어가 제한돼있어요. 제한되어 있으면 미흡함이 되고 미흡함은 나의 초조감을 유발시키고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내 마음을 전달해야 되는데 전달할 길이 없네.

모든 것이 비유가 되는데 비유는 은유에서 환유로 갑니다. 은유는 물질화시키는데 간접적으로 물질화시키는 게 은유고, 직접적으로 물질화시키는 건 환유라 하는데 이렇게 말해선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쉬운 예를 합시다. 

티비나 영화에서 신혼여행 가서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할 때에 은유로 표현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물방울 두 개를 만들어놓고 이게 하나로 합쳐질 때 이게 은유라는 겁니다. 간접적인 물질화. 그런데 직접적인 물질화 표현은 뭐냐? 침대 곁에 옷가지들이 흩어져있을 때 이걸 환유라 해요. 무슨 뜻인지 조금 이해되십니까? 인간은 어떤 정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왜? 귀신들렸기 때문에. 말문이 막히는 거예요.

교재 2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18번째 줄에, [새로운 자기 설명을 성사시키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치료하는 것이 뭐냐? 말문이 막혀있었는데 술술 말문이 열릴 때 그게 정신병 치료된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정신과에 올 필요 없어요. 사람이 한이 맺히고 억울한 일 당할 때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요. 꽉 닫혀있어요. 그러면 정신과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표현하는데 적절한 단어를 본인이 구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치료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병원 올 필요 없습니다.

교재 1페이지. 그러면 왜 단어를 구사하지 못해 속앓이하고 있고 힘들게 하느냐? 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신화가 몰락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했던 세계관이 엉터리고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자기가 지금껏 구성해놓은 모든 세계관을 가차 없이 버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새로운 마음 문이 열리는 겁니다. 

나는 저 남편과 반드시 살아야 돼. 남편이 있고 나 있을 때 남들이 얼마나 행복한 가정으로 생각하겠느냐는 그 기존의 나의 세계관이 현실에 있는 부부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고 점점 더 문제를 발생시킬 때 이거는 놓으면 되는데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신화, 세계관을 어쨌든 간에 과거 것을 보상받으려고 애쓸 때에 그 의사가 하는 말이, “환자분, 우리 새로 시작합시다. 마치 결혼하기 전처럼.” 그 한 마디에 맞아. 내가 지금 되지도 않는 것을 쥐고 있었구나. 놓는 순간 그동안 배제되었던 단어들이 나로 하여금 재구성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치료가 된 거예요. 

이혼하고 안 하고는 그건 상관없어요. 내가 해선 안 된다가 나를 힘들게 했지 이혼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혼하고 안 하고는 시답지 않은 시시한 문제였던 거예요. 다만 나는 이혼녀가 되선 안 된다는 그것이 나를 억압했고 그 탓을 전부 다 아내 탓, 남편 탓으로 돌리는, 그래서 보다 완벽을 추구하겠다는 내 마음 심보 자체가 내 중심에 내가 이미 하나의 짐승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괴물이 된 거예요.

원래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지금 떠돌아다니는 유영하는 세계관 하나 내 것 만들어서 그것이 내 몸과 어울린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몸과 기존에 남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과 타협을 하고 억지로 그것을 구성하려고 하다보니까 나중에는 한계에 이르러 폭발해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 살면 되는데, 내 인생 산다는 것은, 결혼하고 이혼하느냐, 마냐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던 세계관이지만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선 그냥 신화라 해요. 일시적이고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란 말입니다. 자기는 세계관이라 하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그 신화가 붕괴되고 다른 신화로 교체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럴 때 현상적으로 뭐가 바뀌느냐 하면, 언어나 단어 같은 게 바뀌는 겁니다. 이걸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의 표현은 날아다니는 단어 같은 것을 조립해서 나만의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이 단어들이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날아다니는 거예요. 현재 통용되는 세계관 속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자기 세계관을 구성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게 역사적이 되지요. 그런데 이 역사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역사 속에 있으면서도 역사로 해명되지 않는 식으로 등장한다 했지요.

역사들이 표현하는 날아다니는 단어들에서 필요한 단어를 뽑았단 말이죠. 뽑으니까 너는 내 세계관에 필요치 않아, 하고 내쫓고 갖다버리고 배제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 단어들 속에 누가 쫓겨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인간들이 자기 세계관 하겠다는 고집 때문에 추방이 되는 거예요.

입사시험에 십자가 이야기 안 하지요. 십자가란 단어가 입사시험엔 필요치 않은 겁니다. 입사를 하고 월급 받아야 내가 사니까 내가 사는데 있어서 십자가란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십자가 믿으면 삼성에 취직 잘 되겠다고 십자가를 도입하는 거예요. 도입해봤자 내 몸과 십자가는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세계관과 같이 돌아다니는 단어란 말이죠. 이 단어를 내가 나만을 위해서 있는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입사한지 3개월도 안 돼서 기독교신자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 몰라요. 주님 누군지도 몰라요. 이 십자가를 내쫓아야 승진이 돼요, 승진이. 나는 기독교신자기 때문에 술 안 먹습니다하다가 승진에 누락되니까 술 먹습니다, 잘 먹습니다. 시집가기 전에는 성가대, 주일학교하고 교회 아가씨 참 훌륭하다 했는데 시집가고 난 뒤에는 교회 아가씨 어디 갔어요? 교회도 안 다니는데.

어제 공식에서 1+x, 1-x에서 지금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요 ‘1’이 안 보여요. 왜냐하면 절대적이기 때문에 항상 중앙에 빙빙 돌아요. 이 단어로 쑤셔보고, 저 단어로 쑤셔보고 아무리 해도 여기에 접근이 안 됩니다. 그럼 나타난 건 뭐냐 하면, +x냐, -x냐, 이게 바로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뭔가 절대를 향하여 시도할 때 이건 인간의 역사가 돼요. 그러나 역사에서 추방될 때 이건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x, -x 이걸 모아서 이사야서가 되는 거예요. 나타날 때는 단어와 언어로 나타나거든요. 이것도 단어와 언에요. 인간들은 그걸 말이라 하고 예수님은, 이사야는 그걸 말씀으로 이야기해요. 그러면 인간은 말로부터 시작해서 말로 가서 말로 나가지요. 여기에 같이 언어도 기호도 붙지만. 말로부터해서 말로 가서 말로 가지만 이사야는 뭐냐 하면,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을 거쳐서 말씀으로 가는 거예요. 이 두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은 말에 의해서 핍박받게 돼있어요. 배제 당한다고요. 왜? 인간은 인간 주위에 현재 돌아다니는 기호, 내가 사는데 필요한 기호, 내가 절대자가 되는데 필요한 단어들만 수집해서 나만의 세계관을 형성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말, 말, 말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역사라고 이야기해요.

세 번째 강의 다시 합니다. 역사가 뭐라고요? 영이죠. 역사가 영이에요. 사람들이 이 말과 말 역사 속에서 구원을 받고 싶으니까 역사+, 역사에서 초월하는 초월세계를 구상한 겁니다. 그러면 역사+잖아요. 역사에서 구성된 내 몸이 죽어선 어디 간다? 천당 간다고 결합이 +하는데 +를 주께선 –로 바꾸는 거예요. 가기는 어딜 가, 지옥 가야지.

자기 몸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도중에 교체가 일어나야 되는데 교체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겐 없어요. 왜? 천국 가도 내 세계여야 되니까. 말씀이 세계가 아니고 나를 위한 말의 세계기 때문에 그 말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사람을 친구 삼아 이야기한다고. 왜 친구하느냐? 말이 통하거든. 통한다고 착각하지요.

그런데 아까 복습해봅시다. 인간의 말과 말이라 할 때 여기 중앙에 접근하지 못한다 했지요. 그걸 공백 또는 비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교재에서. 지금 이 교재 설명 못합니다. 시간 관계상. 그러나 설명을 듣고 읽어보시면 도대체 말이야 하다가 이런 측면에서 글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3페이지 봅시다. 거기에 인류문명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됐느냐 하면, 인류문명에 남겨진 게 있지요. 그게 어두운 동굴벽화입니다. 그냥 동굴벽화가 아니라 어두운 동굴벽화에요. 어둡다는데 여러분들이 악센트를 두세요. 어두운 동굴벽화입니다. 선사시대, 인류역사 이전에 문자발명 이전에 그림이 먼저 있지요. 그림도 기호고, 언어고, 말이에요. 그 당시의 말.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선사시대의 흔적이 어디 있느냐? 그냥 동굴이 아니고 어두운 동굴에 있다고. 그 동굴의 의미가 뭐냐? 3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텅 빈 공백의 심연] 인간의 모든 보편적 심리현상을 동굴로 표현한 거예요.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거주자, 거주민, 4페이지 위에서 아홉 번째 줄에.

동굴천정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신을 표현할 때 뭐냐? 보이지 않는데 같이 동거하는 거주민으로 보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에 접근해야 되는데 접근할 재주가 없어요.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신이라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다고 하다가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바꿔야 돼. 돌려막기 하는 거예요. 신은 참 사랑스럽다. 만족해. 조금 있다가 아니야, 아니야. 그걸로 모자라. 부족해.

동그라미 블랙홀 같아. 뭔가 자꾸 설명해대는데 그 미흡함. 미흡하면 미흡한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고 미흡한데 그걸 마저 채우지 않으면 속이 풀리질 않아요. 그래서 자꾸 단어와 언어의 위력에다 호소하는 겁니다. 

60대 남자가 산책하면서 오르막 오를 때 그냥 오르지 않습니다. 힘드니까 그때는 언어에다 호소하지요. 전립선, 전립선, 전립선. 이렇게 해야 빨리 올라갈 수 있어요. 오줌발, 오줌발, 오줌발. 어떤 소명과 용기가 거기서 부여되는 겁니다. <청춘팔팔 쏘팔메토+> 콸콸, 콸콸 이럴 때 벌써 자기 운동의 목표는 이뤄지는 거예요. 여자한테는 <관절팔팔 씨스팜> 이런 것. 단어에 호소하는 겁니다. <실로암> 부를 때 왼발, 왼발 하는 것처럼.

여러분, 뎀뿌라와 튀김의 차이점이 뭡니까? 일본 사람이 먹을 땐 뎀뿌라고, 한국 사람이 먹을 때는 튀김이고, 뎀뿌라와 튀김은 차이가 없어요. 어떤 물질에 고유명사 붙인 것이, 오징어에 노란 것 입혀서 기름에 튀겨낼 때 사람들은 이름을 붙여요. 일본 사람은 뎀뿌라, 우리는 튀김이라고 붙이지요.

그러면 튀김이 그 튀김이냐? 튀김은 튀김이 아니에요. 물질은 따로 있고 적당한 단어가 나오기 전에 임시로 튀김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미흡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들뢰즈란 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언어가 물질을 죽인다고 했어요. 단어가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어를 구사할 때 누구 중심이냐 하면, 나 중심이거든요. 

나는 뭡니까? 나는 물질이잖아요. 물질이 물질을 보면서 이쪽 물질 개무시하고 이름으로 호칭하는 내 물질만 돋보이기 위해서 저쪽을 밟아버린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뭘 붙이라 했습니까? 이름을 붙이라 했지요. 이름을 붙이되 그 이름은 그냥 명사에요. 인간들은 명사에서 머물지 못하고 어디까지 나갔느냐 하면, 동사까지 나갔다는 것은 이건 벌써 반칙이죠. 

동사는 이미 사건을 붙잡기 위함이에요. 명사는 존재지요. 있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 있음을 표현하는 거고 사건을 표현할 때는 동사가 되는 거예요. 동사는 은유성이에요. 그냥 상징, 비유에 불과한 겁니다. 헛바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자기변명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동사는. 

사랑한다, 좋아한다. 얼마큼? 하늘만큼 땅만큼. 하늘이 화내겠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질로 대체할 수밖에 없어요. “너, 나 사랑해?” “사랑해.” “저것 사줘.” 사주면 그 다음에, “저 가방 사줘.” 사주는 거야. 아예 뽕을 뽑아. 속으론 부글부글하지만 참지요. 사랑한다고 말을 해놨지. 그러면 또, “저것 사줘.” “너무 심한 것 아니야?” 이렇게 나오지요. 

갑자기 사랑한다는 동사에서 그 사랑에 접근이 불가능하지요. 이제는 화를 내지요. “그것 봐. 나 사랑하지 않잖아.”라는 결론을 내릴 때 이미 사건은 사랑하지 않는 걸로 종결됐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강의도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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