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여름수련회 이사야 제 5강(거푸집 : 이 근호목사)
다섯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이사야 전체를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성경전체에 대한 그 공식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1+x⁄1-x’ 이렇게 분자 분모로 나눠서 설명을 했고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께 버림받음으로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렇게 해서 역사바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메시아고, 그렇지 않고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께서 거부한다.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전체에서 그러한 원리가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사야가 문서선지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체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이겁니다.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거지요. ‘하나님과 함께 할래? 아니면 너희들끼리 살래?’ 어느 쪽을 원하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겁니다. “부부끼리 살래, 시어머니하고 살래?” 하고 같은 뜻이거든요.
아, 이거 참. 인간끼리 살면 편해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이것은 굉장히 큰 부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2번을 먼저 봅시다. “너희들끼리 살래?” 우리 인간끼리 살 때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여기에 동질성으로 결합되기에 그렇습니다. 동질성. 끼리끼리 논다, 그 말이지요. 끼리끼리 하기 때문에 사는데 굉장히 편하고 부담 없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면 여기는 동질성이 아니고 이질성이 개입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끼리 살게 되면 줄곧 우리끼리 살겠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역사라고 이야기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끼리 한 덩어리 된 채 계속해서 뭔가 우리의 사정을 미래까지 이어가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무슨 요소가 있느냐 하면, 시간요소가 배경으로 되어 있어요. 시간요소가 필수배경이지요. 역사라는 자체가 시간이 요소가 되니까. 시간요소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집단적의미의 지연, 무한한, 끝없는 지연이지요. 이것은 강의를 했으니까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보다 정확하고 완벽하게 진리에 부합되는 의미 찾기가 안 될 때는 계속 돌려막기를 하지요.
계속 미래에 더 정확한 어떤 진리 값이 하나님의 언어와 결합될 것이다. ‘아니야, 내년에는 더 잘 될 거야. 아니야, 그 다음해에는 더 잘 될 거야.’ 계속 지연되니까 역사의 진전, 앞으로 나감에 대해서 뭘 로 이어주느냐 하면, 우리의 희망으로 삼는 겁니다. 역사에서는 항상 역사를 이끄는 동력이 뭐냐 하면, 바로희망이에요. 희망이다.
희망이 동력이 되는데 그 희망사항이 뭐냐 하면, ‘언어 = 진리 값’ 이렇게 언어와 진리 값이 일치되는 것이 희망이에요. 내가 내뱉는 것이 정확한 정답이 되는 그 때를 위하여. 내가 말한 것이 정확한 진리, 백점이 되는 상태. 백점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자가 없는 완벽한 절대자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언어는,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이 언어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우리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이미 선행되어 있는 체계에서 그냥 내게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래서 세 살 아이의 의지력이 만약 백 개라면, 네 살이 되면 그게 오백 개가 될 것이고, 다섯 살이 되면 천개로 늘어날 것이고, 다양함을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다양함을 보이는 것은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그 말이지요. 점점 더 폭을 넓이는 거예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더 필요한 어휘력을 수입하는 거예요. 계속 채우는 겁니다. 그 단어들을, 그 의미를 채우는 이유가 내가 정확하게 오류가 없고, 모자람이 없고, 결핍이 없는 완벽에 완벽을, 철저에 철저를 더한 체제를 갖출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용어들 그 자체가 이 진리가 일치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진리는 뭐냐? 우리에게 둘러쳐진 진리는 곧 자연이죠. 이 자연의 모든 움직임과 그리고 개체, 개체는 고유명사, 그리고 움직임은 사건, 변화. 변화는 동사로 때우고 그 모든 물체는 고유명사를 붙여서, 이름을 붙여서 이것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사건에 명칭을 붙여버리면, 제가 이야기했지요, 사건을 가지고 명칭, 어떤 이름을 붙인다는 이것은 동결체제, 딱 붙잡아 매는 거지요. 붙잡아 매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명칭을 반복해서 부를 때마다 동일한 사건이 재현되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은 주술적 의미가 되는 거지요. 기도하고 난 뒤에 뭘 부릅니까? 마지막 끝에 뭘 붙여야 대표기도가 끝난 줄 압니까? 예수 이름으로.
뭐가 어쩌고저쩌고……, 예수 이름으로 아멘. 예수 이름으로 아멘.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되면 주술적 효험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거예요. 주술적 효험을 기대할 수 있고 그 효험은 실증적으로 응답이 될 때 내 기도는 진리 값에 합치된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 나는 그 기도만큼은 자신감 있고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내 기도 빨은 괜찮다. 이게 주술이지요. 사건을 내 손아귀에 주무르는 거예요. 손에 쥐는 겁니다. 오늘날 정치판에서 이러한 주술적 사자성어가 있거든요. 그 사자성어가 ‘촛불집회’에요. 뭐든지 촛불집회 하면 다 돼. 촛불집회. 앞에 명칭이 뭐든지 촛불집회에요. 초가 많이 팔리는지 그것은 모르겠어요. 일본타도촛불집회. 불매운동촛불집회.
촛불집회의 어떤 실증적인 효과가 있다고 지난 정치판에서 이미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촛불집회에 모여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할 때 그들은 바로 동질성을 느끼는 겁니다. 촛불집회. 네 자입니까? 그러면 다섯 자로 다른 것으로 바꾸겠어요. “아!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꿈은 , 이렇게 뭐 하나 있고, 이루어진다. 이런 것.
이게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요. “꿈은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갑자기 동질성이 확보되면서 마음이 하나로 뭉쳐지지요. 우리끼리 산다는 것은 바로 이걸 의미하는 겁니다. 바로 우리끼리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그 역사의 주동력은 정치세력이에요. 정치세력이 있으면서 개인은 뭘 로 바뀌느냐 하면, 개인은 개인이 아니고 백성으로 바뀌어요.
백성과 개인의 차이점은, 개인은 홀로 있지만 백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백성이라고 불러주는 다른 정치적 주력세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같은 동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명도 어떻게 된다? 운명도 한통속으로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
이사야 37장 36절. 제가 지금까지 이질성은 이야기 안했어요. 동질성만 이야기했습니다. 동질성만 이야기하니까 상당히 현실감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 이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빼고 우리끼리 삽시다.” 그 정신으로 한통속이 된 겁니다. 하나님 빼고 우리끼리 삽시다. 교회에서 하나님 빼고, 예수님 빼고 우리끼리, 교인들끼리 교회 합시다.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아침에 일어나서 본즉 무엇뿐이라? “시체뿐이라.” 전부 시체로 변했지요. 18만 5천명 줄 세워가지고 전부 다 면접해보세요. 전부 다 개성이 있고 다 달라요. 다 다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께서 18만 5천명을 동질의 운명체로 봐서 다 죽여 버렸어요. 천사가 그들 죽일 때 ‘예쁘구나.’ 하고 살려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들은 동질체로 한 덩어리, 그러니까 18만 5천명이라도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보는 것이 아니고 질을 봐요. 너희들은 같은 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하나님께서 다 죽여 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시온, 거기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곳이에요. 아직 성전이 있으니까. 아직 망하기 전이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거든요. 하나님이 계실 때 그들은 뭘 로 공격했느냐 하면, 우리끼리, 여호와가 빠진, 하나님의 약속이 빠진 ‘우리끼리’가 하나님께 대들 때 과연 어떤 사달이 나는지, 어떤 엄청난 파멸의 결과가 오는지 하나님은 예루살렘, 또는 시온을 가지고 버텨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못한다. 뭘 못합니까? 인간끼리 동질성과 하나님과의 이질성의 그 갭을 줄이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러면 천국은 뭐냐?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천국이지요. 인간끼리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몸으로, 그런 성질로 출생한 인간을 이질성을 갖고 있는, 차이성이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것도 한해 두해 사는 것이 아닌 영원히 살 수 있는 백성 만들기에 하나님께서 나섭니다. 어떻게 그걸 성사시키는가?
새로운 출생지, 새로운 출처, 새로운 출생원천을 새롭게 집어넣습니다. 이 새로운 출생을 집어넣는 이걸 가지고 마태복음 1장이나 이사야 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자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이야기는 공격용입니다. 이것은 심판용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싫어하는 너희는 각오해라.” 그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렇다면 함께 있는 임마누엘은 그냥 함께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고 여기서 필히 뭐가 벌어지는가? 필히 여기서 전쟁이 벌어지겠지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에서 출생하는 사람들은 무엇과 다르냐 하면, 바로 현재 인간들의 동질성으로 역사를 이끌고 주동세력으로, 정치세력화 시켜서 다른 민족과 협상에 나서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모든 것을 공격하는 의미가 이 임마누엘의 출생 안에 담겨 있는 새로운 차이 나는 질이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그 출생이 세상백성과 동일성이냐? 아니면 이질성이냐? 그것부터 우리가 생각해 봐야 돼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느냐? 흔하고 흔한 인간이라는 요소 때문에 뭉쳤느냐? 아니면 다른 요소를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나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어디서 찾아보느냐 하면, 이사야 43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사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특히 교도소나 군대나 요양병원에 가 있거나, 안 그러면 사업에 실패했을 때, 부도났을 때, 그 때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이 있어요. 이사야 43장 1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에 처음 나와도 이 말씀을 잊을 수가 없지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부도나고 난 뒤에, 가정파탄 나고 난 뒤에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래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거야. 다시 일어서는 거야. 다시 희망을 품는 거야. 그렇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 그렇게 또 잘못 생각하거든요. 왜 이게 잘못이냐 하면, 내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동원하는 셈이 돼요.
그것은 이사야 43장의 뜻과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있고, 내게 필요하다고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라는 자리, 이 자리는 원래부터 언약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 자체를 너희가 박차고 나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시스템, 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없는 우리들끼리 잘살면 된다고 하는 바알 신, 그런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원래 네 자리에서 이미 벗어난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께 찾아올 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이 체제를 가지고 이방 쪽에 있는 정치화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그것이 최종목표가 되고, 그러면 공격하기 위해서는 공격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처지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지금 이사야 전체의 내용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하나 다 하면 몇 년 걸릴지 모르니까. 앗수르라는 단단한 호두껍질 안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 그 다음에 앗수르 말고 바벨론이라는 호두껍질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달리 취급해요. 대부분은 뭐냐 하면, 앗수르 이야기가 많아요. 역사적으로 앗수르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공격하는 앗수르와 공격받는 이스라엘이 같은 성질, 동질성을 지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근거로서 이스라엘을 앗수르가 공격할 때 정치적으로 해결점을 얻으려고 해요.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려고 한 거예요. “앗수르왕이여 모든 선물을 드릴 테니까, 조공 바칠 때니 좀 도와주세요.” 앗수르가 만만하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 가서 도움을 청하느냐 하면, 애굽에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애굽나라여 좀 도와주세요.”
자, 이스라엘이 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애굽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는가? 이것은,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끼리 살려니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힘과 권세와 무기가 필요한 거예요. 든든한 지원군이 필요한 겁니다. 이사야 7장을 볼까요? 이사야 7장을 보게 되면, 유다 북쪽에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아람나라와 협잡을 해서 아하스 왕을 쳐들어왔어요. 그 때가 유다나라는 아하스 왕 때거든요
그러면 이 베가의 나라와 연합해서 아람나라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그 시리아가 유다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무슨 의미를 우습게 보느냐? 지금 유다나라에 누가 있어요? 선지자가 있지요. 또 누가 있어요? 아직까지 하나님의 예루살렘이 있지요. 그 존재의 가치를 아주 개무시를 한 거예요.
그리고 랍사게라고 하는, 산헤립이 보낸 군대장관도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이젠 손 털지, 그만. 너희가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는데 모든 종족이 다 신이 있어. 하지만 어떤 신도 우리 앗수르의 군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어.” 이렇게 포위할 때 “그만 항복을 하면 봐줄게. 여호와 믿지 말고 대충 손들고 나오지?”라고 그것도 히브리말로 공격을 해댄 겁니다.
앗수르가 이렇게 만만하게 보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에게는 철기문화가 있어서 그 전에 있는 병기체제와 달라요. 철로 무장된 고깔 콘 같은 투구부터 최초로 군화가 지급된 것이 앗수르군대에요. 그리고 전차도 전부 다 철갑으로 무장되어 있고요. 앗수르가 그렇게 철갑으로 무장된 것은, 히타이트라 해서 bc 1700년경인가, 그 때 터키 제국에서 최초로 철기문화가 발달해서 무역로를 따라서 그들의 철기문화가 많이 수입된 거예요.
수입되다 보니 그걸로 많은 민족들이 보다 더 발달된 철기로서 군사력을 증강시킨 겁니다. 청동기보다 철기가 더 좋은 것은 다루기가 쉽고요. 또 숯을 가미하면 거기서 강철검이 나와요. 강철검은 청동기검과 붙으면 이것은 엿가락하고 쇠막대하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해봐야 다 부러지니까. 강철검이 그만큼 승리한 겁니다. 거칠 것이 없어요. 무기가 대단히 발달했어요. 마차가 달리지요. 보병은 완전히 중무장 되어 있지요. 모든 민족들은 그 앞에서 그 힘에 의해서 밀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야 돼요. 어떤 점에서 달라야 되느냐 하면, 그들이 광야에 나갔을 때 약속의 땅에 정탐꾼을 열두 명 보냈잖아요. 그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차지한다.” 이런 모순을 이야기했다고요.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땅에 갈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일체 우리부터 모든 것이 전부 다 개털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있다면 따로 우리가 무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이질성,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없는 민족과의 이질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전쟁에 앞장서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이기려고 나름대로 준비하는 그것은, 오히려 있는 것이 방해가 된다는 그러한 인식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의 인식. 두 명이지요.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은 뭡니까? “딱 보면 모르겠나? 안 된다.” 그거거든요. 5대 1입니다. 저쪽은 열 명. 이 쪽은 두 명. 이쪽은 지지율이 확 떨어져요. 여기는 20퍼센트, 저쪽은 80퍼센트. 안되지요. 백성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끼리 살았던 그 육적인 것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산다는 것이, 가서 살수는 있지만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런 발상이 안 떠오른 거예요.
우리도 천당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재롱잔치 벌이고, 찬미하고, 율동하면서 기뻐할 생각을 하지 천국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방식으로 들어간다는, 교체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라요. 우리가 세상에 대한 친근감으로 그 이질성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얼마나 강렬했으면 주께서 우리한테 밉상 받고 퇴출당해서 쫓겨났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 나가! 꺼져!” 해서 인간세상에서 주님께서 쫓겨났잖아요. 그러니까 성도가 뭡니까? “그러니까 너도 나랑 같이 쫓겨날래?” 이것이 성도가 된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세상친화적인 우리의 동질성,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없이는 살지만 눈에 가까이 있는,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힘이 있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배신하랴? 이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강력한 끌림이지요.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을 새로운 원천, 출생, 그 원천을 새롭게 시작할 뿐이에요. 시작하면서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이 모든 역사성, 동질성을 모조리 다 끄집어냅니다. 자, 이스라엘이 있고 앗수르가 있을 때 앗수르는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요. 힘들어 죽어요. 예루살렘만 남고 나머지는 다 가져갔습니다.
므낫세라는 그 악한 왕, 히스기야 왕의 그 아들도 나중에 포로 잡혀 가요. 그런데 히스기야 왕 때에 이 바벨론은, 자기들도 그 앗수르를 공격하고 싶은데 힘이 모자라니까 유다나라의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우리 같이 협력해서 앗수르 치자고 사신을 보냈어요. 왜 사신을 보냈느냐 하면, 그 당시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아까 몇 명? 18만 5천명을 죽였으니까 ‘야 여기 뭐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바벨론에서.
‘야, 이거 전략 괜찮네. 손 잡을 만 하다.’ 그래서 “손잡고 앗수르를 칩시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때까지는 아직 바벨론이 앗수르를 접수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기가 살았어. “뭘 로 앗수르를 쳤는지 아십니까? 잠시 한번 볼래요?” 해서 자기의 창고, 무기 넣어놓은 창고를 다 보여줬어요. 잠수함 15척, F-16, 곡사포, 탱크, 이것 가지고 이겼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 대해서 어떤 징후도 안보여주는 겁니다. 히스기야 때. 그렇게 자기는 이사야에게 매달려서 “어떤 수가 없겠습니까?” 하나님에게 편지를 보여주면서 그렇게 할 때는 마치 신앙인 것처럼 보였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너도 정치꾼에 불과한 거예요. 힘 있는 사람, 자기를 우대하는 사람에게 동지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임마누엘이 되지 못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면 제일먼저 누구에게 물어야 돼요? “하나님, 이일은 무슨 연유로 발생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 뿐이지 독자적이 내 인생계획같은 것은 저는 아예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요. 지금 여러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저는 아무 염려 없어요. 저는 주님 한 분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제 소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기도하게 되면 말문이 트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끙끙 앓다가 기도를 시키면 말문이 턱 막혀 버려요. 기도 뭐할꼬.
다른 교회 있을 때는 그렇게 유창하게 기도 두 시간씩 해놓고는 우리교회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말문부터 막혀요. 갈수록 기도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요. 처음에는 한 2분 하다가, 1분 하다가, 그 다음에 30초로 점점 줄어들어요. 그래서 ‘신기록 누가 세우나 보자.’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아멘.” 단거리 선수 같아요.
기도가 안 된다는 것은 평소에 ‘주님만으로 족합니다.’ 하는 것이 없고 ‘교회 가서 봅시다.’ 하는 거예요. 교회당 자체가 주술적인 단체가 되고 말았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다고 또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서 좋게 보면 안 됩니다.
앗수르에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그냥 당하기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 모든 것을 역사에 파묻힐 수가 있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갈 때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면서 거기서 이런 이스라엘이 아니고 영적인 이스라엘, 새로운 이스라엘, 이사야 43장의 말씀처럼 “야곱아, 여수룬아, 너는 내 것이라.” 하는 그 영적이스라엘은 바로 이 바벨론이라는 이 틀에 있어야 이게 발생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물공장에서 틀을 만드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금형이라고 하고 또 세자로 하면 ‘거푸집’이지요. 거푸집 노릇을 바벨론이 하는 겁니다. 바벨론은 나중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영적인 내막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는지 성경 찾아봅시다. 이사야 14장 12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아침의 아들 계명성, 이건 새벽별이니까 계명성 맞지요. 계명대학교, 계명고등학교, 대구에 그런 학교가 있어요.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게 바벨론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이야기에 들어가 버리면 하나님이 수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바벨론의 의미가 앗수르하고 달라요. 앗수르는 역사적 의미로만 있지만 바벨론은 역사를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특별한 기능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로 끄집어내는 거푸집 노릇을 하기 위해서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역할이전이 이사야에서는 진행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바벨론 다음의 나라, 현재의 이란인데요. 이사야 45장을 봅시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 왕의 허리를 풀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레스가 기름 받은 고레스, 메시아에요. 이방민족 페르사 나라의 메시아라니까요.
그러면 이 페르사는 무엇을 인수인계 받느냐 하면, 바벨론제국을 인수받은 제국이에요. 성경에서는 바사라고 되어 있지요. 바벨론나라의 최후의 왕이 벨사살 왕인데 그 벨사살왕을 물리친 자가 바로 고레스라는 사람이에요. 보통 세상 역사에서는 키루스라고 하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 벨사살왕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다니엘 5장에 보면 나옵니다.
벨사살왕은 무엇으로 무너졌느냐 하면, 말씀으로 무너졌어요. 다니엘 5장에 벨사살왕이 솔로몬성전에서 가져온 기구들을 가지고 술 퍼먹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뭘 썼습니까? 글자, 글자를 썼어요. 말씀,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메네메네데겔. 저울 달았다. 저울 달았다. 데겔. 모자랐다. 우바르신. 그리고 페르사.
이것을 왜 그 사람들은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 해석을 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인 전제와 선입감이 개입된 채 모든 해석은 이루어져요. 해석을 할 때 만약에 문재인 대통령이 꿈을 꿨는데 뭔가 해석이 나왔다. 그걸 자랑스러운 조국수석이 해석한다.
“조수석, 어제 꿈에 이런 것이 나왔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이렇게 썼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은 임금님이 앞으로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단 그 꿈을 꾼 집권자나 해석하는 신하나 같은 동질성, 뭐든지 잘 풀려야 된다는 동질성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해석하기를 “망했습니다.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권좌에서 내릴 겁니다.” 이렇게 하면 “여봐라. 이놈의 목을 당장 쳐라.”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해석 잘못해서 모가지가 날아갈 판인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누가 하겠어요? 비룡그룹의 직원들이 회장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딸랑딸랑딸랑, “그럴 턱이 있습니까?” 하잖아요. 잘 모르시는구나.
전부 다 한통속이 되어 있어서 절대로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해석하는 법이 없어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복음을 가지고 섰다면 그 교회는 이제 망했습니다. 왜? 모든 것이 교회 망하라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동질성이에요. 자기의 목돈과 목돈이 연계된 동질성이거든요. 헌금 안낸 사람은 쉽게 그 교회에서 빠질 수가 있어요. 뭘 낸 것이 있어야지요. 점심만 얻어먹었는데요.
그런데 부흥사에게 속아서 수천만 원 낸 사람들은 아무리 그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교회를 끝까지 사수해요. 주식을 그만큼 많이 샀기 때문에. 그걸 붙들고 데모하면서라도 “목사님이 나가세요.” 그러고 있다고요. 보면 분명히 목돈 낸 사람들이에요. “명성교회는 회개하라! 세습화 하지 말라!” 뭐예요? 목돈 냈다, 그 말이에요.
괜히 목돈 내놓고 이제 와서 부동산 지킨다고 난리에요. 만약에 복음을 한 20년 동안 전했는데 그 다음 주일에 복음 안 나오면 그 목사 내보내야 되거든요. 복음이 안 나오면 교회 아니니까. 그러면 내보내놓고 오실 목사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간단한 문제에요. 교회 동산 부동산 다 정리해서 갈라먹고 헤어지면 그만이에요.
참 일 쉬워요. 쉬운 것은 아니구나. 갈라먹기 할 때 싸움이 일어날 수 있어요. 어쨌든 갈라먹기 하면 되는 겁니다. 대구 우리교회 모임에서 돈 내서 점심을 먹어왔는데 돈이 좀 남았어요. 종강 축하 의미로 여분의 돈을 가지고 어딜 갔느냐 하면, 복어코스 요리 집으로 갔다고요. 그러면 그 비용에는 그 자리에 안 나온 사람들의 돈도 있어요. 가기로 한 그 날에 참석 안한 사람들이 있어요. 권사님들 계시거든요.
그 날 참석 안하면 국물도 없어요. 돈 이제 없어. 혼자 돈 내고 복어 먹든지, 그날 다 끝났어요. 그날 있을 때 와야지요. 바벨론을 인수하는 바사나라의 첫 번째 왕을 메시아로 봤다고요. 메시아는 구름타고 온다. 분명히 다니엘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과정 속에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메시아적인 요소들이 왔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이 강의를 잘 들었으면 메시아는 뭐다? 하나님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시스템을 이 땅에 가지고 오신 분, 메시아입니다. 인간끼리 사는 것이 아니고. 저희들끼리 좋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이질적인분과 인간이 같이 사는 것이 가능한 시스템. 그 가능한 시스템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전에 메시아라는 고레스한테 인수한 바벨론 제국은 뭐냐? 거푸집이지요.
철저하게 영적으로 계명성, 악마는, 왜 바벨론은 망했는가? 자칭 높은 곳에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그러면 왜 바벨론은 높은 곳에 있다고 그렇게 자부를 했는가? 높으니까. 왜? 힘이 많으니까. 돈이 많으니까. 권세가 있으니까. 남들이 우샤우샤, 밀어붙이니까 자동 높을 수밖에 없지요. 아, 그러니까 사람이 잘되는 것이 이게 고난이에요. 보니까 잘된 사람도 별로 없다마는. 우린 빼놓고. 잘된 것이 고난이에요.
분명히 잘되면 어질어질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잘나가지?’ 잘나가는 그것을 가지고 일부러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마시고요. 그런 것은 톨스토이보고 하라고 하고. 지주지만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는 자기는 구원받지도 못하는데요 뭐. 그것은 그렇게 톨스토이보고 하라고 하고, ‘야, 이거 위험한 건데, 위험한 건데.’ 하고 자꾸 끌어 모으세요.
‘위험한데. 이렇게 잘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 LA에 부동산도 사고 ‘이러면 안 되는데. 위험한데. 이게 바로 바벨론인데.’ 하면서 마음껏 바벨론을 즐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까 즐기세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천사가 와서 “네가 잘 먹고 잘사는 이것이 왜 안 되는데?” “잘 먹고 잘사는 이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돈이라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뤠? 그러면 더 부자 되어라.” 일단 가상적 시나리오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그럴 필요 없다는 그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것은 주님 몫이지 내가 의도적으로, 메시아도 아닌 내가 할 의무는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사야에서 바벨론, 교만덩어리, 건방지게 굴다가 훅 떨어지지요. 훅 떨어지게 될 때에 그동안 바벨론을 믿었고 앗수르를 믿었던 이스라엘은 뭐가 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버리시는 가짜가 되는 겁니다.
가짜 중에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면 가짜에서 나온 남은 자는 뭐가 됩니까? 이것은 가짜지요.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그렇게 좋아하고 부러워했던가? 앙꼬부분을 뽑아내가지고 너희들을 내가 다시 보겠다. 이게 과연 이스라엘다우냐가 문제에요. 보게 되면 그 바벨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전 짓겠다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에 나오는 성전 짓는 사람들 있지요.
일 잘 되었습니까? 저희끼리 싸우다가 볼일 다 봤어요. 싸우다 볼일 다 봤습니다. 역시 인간은 남은 자도 안되는구나. 남은 자도 별 볼일 없구나. 그렇다면 일체 모든 인간의 정치적 게임에서는 줄 점수는 제로입니다. 영점처리 됩니다. 어떤 인간적인 책략이나 계략도 하늘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들이 정치적인 일을 하는 것은 대중들을, 국민들을 자기왕의 뜻과 일치되기 위해서 동일한 의지체제로 뭉쳤고, 그것을 시간적으로 지연시켜서 역사를 만들고, 희망을 갖고자 사람들에게 계속 독려해 왔지요. 이 의미체계, 이 의미체계가 뭘 낳는다 했습니까? 동질성으로 되지요.
그러면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 개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개인은 없어요.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몸이 있다면 그 몸은 뭘 로 칭칭 감기느냐 하면, 그 당시 시대상으로, 그 당시 역사적인 안목으로 우리는 칭칭 감고, 다른 이웃과 동일한 안목으로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교제를 나누기 때문에 독보적인 개인구원이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사야에서 개인은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처녀가 낳은 아들, 그 개인입니다. 다른 개인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집단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일 뿐이지 단독의미의 개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대표개념이거든요. 어떤 개인이 등장할 때 그 개인은 나하고 동등한 차원에서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한다는 차원, 대표차원에서의 개인, 이걸 가지고 한글자로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표차원이기 때문에 왕이 잘못하면 덩달아 모든 백성이 같이 고생하는 거예요. 이게 동질성이기 때문에 이게 뭐냐? 운명공동체, 나라 망하면 백성도 같이 망한다. 그래서 왕이 잘못되니까 백성들도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서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지요. 그래서 개인이라는 의식자체가 근대주체사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원래는 이것이 경제적으로 차후에 조작된 개념이에요. 개인 또는 주체개념은.
개인이나 주체개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 나오고 난 뒤에 형성된 개념이 주체사상이고 개인사상이에요. 이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은행에서 결정하는 겁니다. “당신 통장에 얼마 있어?” 꼭 이런 질문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사유재산이 있어줘야 대화가 돼요. 경제에서는.
은행에 가서 “혹시 얼마 대출받으려고요?” “저는 믿음이 좋습니다. oo교회장로입니다.” “그건 됐고요. 돈을 얼마를 저축했고 지금 얼마를 대출받겠다는 것입니까?” “저 믿음 좋아요.” ‘미친 거 아니야?’ “본인 소유의 재산이 얼마입니까? 본인소유의 재산이.” “이 집은 공동소유입니다.” “공동소유 말고 개인소유의 재산이 얼마입니까?” 그거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 사회에서는.
그래서 이사회에서는 정치는 나중이고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서, 치안의 목적과 세금의 목적으로 후발주자로 경제를 보호하는 것이 정치의 의무입니다. 대통령은 반드시 경제를 살려야 돼요. 경제를 살려야 지지율이 높아지지 백날 남북통일이고 뭐고 경제 죽어버리면 추방됩니다.
근대사회에서는 왜 그렇게 되는가? 근대사회는 전지구적입니다. 개인의 나라는 없고 모든 나라가 노동과 자본으로 형성되어 있어가지고 전 우주가 오직 하나의 나라, 다시 말해서 큰 성 바벨론이에요. 큰 성 바벨론은 어떻게 망했다?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너는 나와함께 할 수 없다. 무게를 다는데 이것은 영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내려버리면 그 세계는 말씀에 의해서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그냥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꿀 때 바꾸는 기준이 어디인가? 그것은 임마누엘입니다. “과연 나랑 함께 있고 싶어? 아니면 말거야? 너희들끼리 살래? 아니면 나와 함께 살래?” 시어머니와 함께 살래, 너희끼리 살래,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안 되지만 주께서 새로운 출생지를 만들어서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아, 여수룬아, 너는 내 것’이라고 새로운 관점의 메시아가 와서 우리에게 함께 사는 터전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드는가? 십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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