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7강-이사야 강해: 과정속의 메시아
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22장 한번 봅시다. 이사야가 계시 받은 겁니다. 이 계시는 요한계시록과 비슷하게 지상의 일과 장차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되어 있는 그러한 신기한 일과 병행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에 일과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획하신 일과 대조를 이루면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22장은 뭐냐 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 땅에서 일어난 일의 언급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은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일. 과정이라는 것은 A라는 일에서 B라는 것으로 나갈 때, 이게 과정이죠. 과정. 지상에서 어떤 변화를 제공하고,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하는 겁니다. 근데 이 변화라는 것은 이렇게 지상에서 수평으로 되어있지만, 이 변화를 바로 세워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수직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장차 하나님이 약속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리라는 그 약속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이게 수직이 되잖아요. 그 수직이 담겨있는 내용을 미리 지상에서 수평으로 펴버리면 이런 과정, 또한 변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의 일과 수직이 하나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22장에 보면, 이것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 나중에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난 뒤에, 거기에 15절을 봅시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여기에 셉나라는 사람이 등장하죠. 특정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사야에서 특정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거예요. 이사야의 66장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있어도 그 중에서 대부분의 내용들이 전부다 추상적이에요. 특정사람이 이렇게 됐다, 라는 그런 내용이 되는, 호명이 되는 그런 구체적인 인물은 별로 나오지 않아요.
그냥 말씀이 이런 일을 하신다. 누구한테 한다는 말입니까? 그거는 나타나지 않죠.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 그 처녀가 누굽니까? 모르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요. 그러면 이 이사야의 변화의 추이에 대해서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에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일은 구체적인 인물에게서 나타날 것인데,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일과 연결시켜 볼 때, “맞아! 저 사람이 맞아!”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어떤 힌트 같은 것이 제공되게 되면, 저분이 우리의 메시야라고 딱 붙잡을 수가 있는데, 근데 구체적인 인물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 입장에서는, 땅의 입장에서는 이건 신화적 존재에요. 사람 같지도 않은 거예요. 무슨 사람이 처녀에게서 애기로 태어납니까? 부부관계에서 태어나야지. 남자도 없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다면 그거는 보통사람이 아니죠. 신화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신화적 존재라면 사람 같지도 않은 거죠. 사람 같지 않다.
그럼 변화는 뭐냐 사람에서, 사람이라고 여기는 데서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의 그 과정을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사람 같지도 않는, 신화적 존재, 신적인 존재가 나오는 그 변화과정을 우리가 미리 알게 되면 저분이 메시야라고 딱 집을 수가 있는데, 그 과정을 지상에서 어떻게 보일 수가 없을까? 그것은 바로 이사야 22장에서 그 내용이 나오고요. 또 나중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22장에는 두 사람이 나오거든요. 이걸 한 사람으로 축소해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36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라는 왕이에요. 히스기야 왕은 단독으로, 주인공도 히스기야고 연출도 히스기야고 지금 히스기야 혼자서 모노드라마 찍고 있는 겁니다. 근데 이사야 22장에는 그걸 두 사람이 찍고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나온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22장에서 방금 읽었던 셉나가 나오죠.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20절에 보면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결론부터 말해서 둘 다 망합니다. 둘 다 망해요.
근데 동시에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과정을 보여주고 망합니다. 셉나부터 먼저 망하고 두 번째 엘리아김 망합니다. 셉나, 이 사람은 뭐냐 하면은 자기 묘실, 다윗성이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자기의 이권, 자기 묘소나 이렇게 파고 그런 식으로 자기를 위해서 맡은 국고를 가지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데 거기다가 사용했어요. 그래서 17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같이 맹렬히 던지되” 18절,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망했죠.
첫 번째 네가 이 땅의 의미도 모르면서 개인적인 이득을 취했으니까 너는 죽어야 돼! 19절에 보면 “내가 너를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20절에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불러” 멸망하는 그 예루살렘성에서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아김. 그 엘리아김에게 21절에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옷을 입힌다는 것은 죄를 씻는, 새로운 정화된 옷을 입히는 것이고, 이것은 너는 깨끗한 존재라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22절,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구절입니다. 야, 그러면 이 엘리아김 같으면 이 사람은 나중에 괜찮은 메시야인가? 이 분이 바로 신화적 존재냐? 이렇게 할 수가 있겠죠. 첫 번째가 뭐냐 하면은 22장 15절에 나왔던 국고를 맡았던 사람, 셉나. 셉나에서 그 다음에 엘리아김이죠. 힐기야의 엘리아김까지 하면서 새로 추가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집니다. 너한테 모든 것을 일임했으니까,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다. 정권을 너한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둘 다 지상에 있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고, 그냥 그 당시에 멸망해야 될 유다 백성 중에 속한 사람이에요. 같은 인간인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으면 괜찮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너희 유다백성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과연 그럴까? 라고, 하나님께서 지금 시범조로 보여주는 거예요. 막중한 임무를 맡겼을 때에, 23절에 보면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이때까지만 해도 야, 일이 잘 풀렸네. 앞으로 이 유다 날에 희망이 있다.
그런데 25절에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되리니” 못이 삭아서 물건들이 와장창 내려앉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 땅 자체에 어떤 인물, 어떤 막중한 사명, 괜찮다고 보장을 해도 땅 자체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 땅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다 멸망하고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중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임마누엘의 약속에 의해서 오실 그 메시야는 그냥 달랑 메시야만 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엘리아김 같이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어떤 자격이 또 추가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신화적 인물이 내려오면서 무엇을 몰고 오느냐 하면은 새로운 신적환경도 같이 몰고 와야 되는 거예요. 신적환경을 몰고 오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 개념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낙원이미지. 이사야 11장을 한번 볼까요? 이사야 11장도 나오고 이사야 65장도 나오고 그럴 건데요.
11장 6절에 보게 되면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절,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절,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절, “나의 거룩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운 환경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타나면 인물만 나타나고 환경은 지상의 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게 되면 그 인물에 부합되는 새로운 낙원이 그와 함께 동시에 창조된다는 겁니다. 창조될 때 여기에 동원되는 모든 이미지는, 모든 개념들은 이 지상에서 땅에서 괜찮다는 그러한 상황, 그것을 전부다 사용해서 이렇게 그 무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무대에 장식된 것이 땅의 개념을 가지고 하늘을 묘사하니까, 그것을 신화적 이미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사야 65장 25절에 보게 되면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면 그건 사자가 아니고 소겠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한다. 함께 한다, 함께 한다, 왜 자꾸 함께 한다고 하냐 하면은, 이게 무엇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바로 이사야에서 안식의 개념을 끄집어내요.
안식일을 끄집어낼 때, 안식일의 마지막 최종 목표가 어디겠습니까? 안식일이니까 마지막이 뭐가 되겠어요? 뭐, 안식일 말 자체에 있잖아요. 안식일이 있다는 것은 최종에 뭐가 있다? 안식한다는 것이죠. 안식한다는 것은 쉰다는 겁니다. 쉬는 거죠. 쉰다는 것은 모든 투쟁과 갈등 이런 것이 해소가 된 상태죠. 그러면 그걸 뭐로 표현했습니까? 사자하고 소, 어린양과 이리가 함께 한다는 그런 것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56장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안식의 상태를, 나는 그걸 포기 못하겠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것이 아니죠. 안식일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은 창세기 2장에 보면 모든 창조가 마감이 될 때, 그때 안식이 나오죠. 그때 그 당시의 상태에서, 그 피조세계에서, 자연세계에서 다투고 물고 뜯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때 하나님께서 흡족해하는 것. “이야! 이만하면 내가 생각해도 잘 만들었다.” 흡족해하는 그 요소가 안식일의 완성을 통해서 새롭게 완료가 되죠. 그 환경이 설치가 되죠.
그 설치가 되는 역할은 바로 신화적 존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이 완성이 되고 하나님의 흡족한 모든 갈등의 요소가 없어지는 것. 그것이 옛날의 낙원이미지를 통해서 앞으로의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방금 봐왔던 이런 이사야 65장이나 11장을 보면서, ‘야! 참, 천국가면 좋겠네. 죽어서는 그런 나라에 가야지.’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 사자의 비밀을 조정하는 겁니다. 비밀을 태어날 때 편집을 해요. 편집을 해가지고 모든 공격성과 폭력성을 미리 제거해버리면 사자가 풀을 먹을 것입니다. 그까짓 것 성경에 나오는 것을 우리가 인공지능 동원해서, 컴퓨터 동원해서 만들어내면 안 돼요?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미지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게 미끼거든요. 미끼. 고작 동물원 수준이 천국이에요? 뭐 이런 것. 그래서 이사야를 보면서 “참, 좋은 게 있는가 보자. 좋은 게 있으면 나는 예수 믿고, 별로 좋은 게 없으면 나는 예수 안 믿을게.”하는, 그런 사람에게 성경은 어떠한 유혹거리가 될 만한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고. 아픈 거는 운동 많이 해서 건강하면 되고. 다툼이 없고 싸움도 없고 미움도 없고. 이러면 뭐하면 됩니까? 혼자 살면 되죠. 뭐가 어려워요? 천국 만들기 참 쉽죠잉~
돈 되고 좋은 집 지어서 혼자 살고 항상 1년 내내 온도는 15도 습도는 42%로 계속 맞춰가지고 인공지능이 운전해서 에너지 적게 효율적으로 하고. 집에서는 말 잘 듣는 사자까지는 못 키우지만 고양이나 개 있잖아요. 걔들 얼마나 말 잘 듣습니까? 사료만 주게 되면 서로 안 싸워요. 또 싸운다 싶으면 애견센터에 가서 주사 몇 대 맞아가지고, 프로포폴 맞든지 해가지고 순한 양으로 만들어놓으면 이거 이사야의 재현이 아닙니까? 성경을 우리가 지키는 식으로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멸망한 인간이다. 나 중심의 낙원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 중심의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보면서 은근히 어떤 목표점을 높이려고 하는 그런 시도는 하지 마세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지상이라는 그 여건 때문에 어떤 인간도 변화를 추구하고 하나님께 격려와 독려와 어떤 사명을 줬건만 이게 모조리 뭐로 끝나는가?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실패가 한사람으로 이렇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대목이 뭐냐 하면은 아까 말씀드렸죠. 이사야 36장입니다. 이사야 36장을 한번 봅시다. 1절,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자, 36장 1절만 봐서 히스기야 왕이 있을 때에, 우리가 배운 것을 복습해봅시다. 히스기야 왕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살고 있죠.
그러면 산헤립이라는 앗수르가 쳐들어왔어요. 벌써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렸지 싶어요. 유다나라,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은 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고 유다나라의 금형이라고 했죠. 거푸집이라고 했죠. 거푸집. 거푸집 역할을 한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서 어떤 형틀을 만들기 위해서 몰딩이라고 이야기해요. 여기에 앗수르가 동원되는 겁니다. 앗수르의 별명이 뭐냐 하면 몽둥이에요. 몽둥이의 역할은 뭐 간지러운 데를 긁어준다, 그런 역할인가요? 팬다. 줘 팬다. 몽둥이는 줘 패기위해서 몽둥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쥐어 패는 겁니다.
패는 역할을 해야 유다민족이 하나님의 언약이 갖고 있는 속성을 새롭게 접할 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몽둥이를 가지고 찾아올 때 유다가 왜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냐 하면은 이 앗수르와 인간 히스기야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이 발상 자체가 비실현적이에요. 지금 예루살렘은 뭐가 있습니까? 아직 성전이 불타기 전이죠. 그럼 성전이 있다면, 성전은 누가 세웠는가 하면은 성전은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솔로몬이, 다윗이 기획한 것을 솔로몬이 그냥 하청업자처럼 시키는 대로 다 했을 뿐이죠. 성전 짓기 위한 재료까지 다 마련해줬으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자기 공로라고 하지 않고 누구 공로로 돌립니까? 아버지 다윗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당연하죠. 왜냐하면 성전의 약속은 다윗에게 준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면 다윗에게 뭘 약속했느냐, 성전을 약속했거든요. 성전은 뭐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 함께 있음, 임마누엘이죠. 함께 있는 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성전을 다윗은 뭐로 생각했느냐 하면은 이것을 부동산, 건축물로 생각을 했어요. 부동산, 건축물.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영원히 모실 부동산, 건축물을 짓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이 다윗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이 땅을 소지하고 이 땅을 접수하겠습니다, 라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전만 이렇게 꽂아놓으면 이 땅도 성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영원히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성전은 뭐냐 하면은 혈통이야. 무슨 혈통이냐, 다윗의 아들이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다윗의 아들이 성전이 돼요.
누가 로마서 1장을 한 번 찾아보세요. 로마서 1장. 거기에 복음이 나오는데, 교회에서나 우리들이 자부하기를 복음에 대해서 한 복음 안다고 자부하잖아요.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뭐냐고 하면은 갑자기 답변이 궁해질 수가 있어요. 로마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받았는데, 2절에 보면 “이 복음은” 주어가 서서히 나오죠.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담긴다? 하늘에서 신화적 존재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된 아들 속에 복음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지상에는 복음이 있다, 없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는, 나타나기 전에는, 태어나기 전에는 이 땅에는 복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지상의 혈통은 무능한 혈통인 거예요. 아까 셉나와 엘리아김 이야기를 했죠. 무능함이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받을 그릇이 못되는 겁니다. 둘 다 못에 걸어봤자 못이 삭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게 뭐냐, 로마서 1장 3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육신으로는 어디에서 나셨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게 바로 성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셔서 내 아들이 성전이 되고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내가 너희들과 같이 만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만나는 장소가, 혈통이 났는데, 그 혈통은 특수한 혈통인데, 무슨 요소가 특수하냐고 이야기한다면,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무슨 요소를 거쳐야 됩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야 성전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었다가, 죽어도 살아나지 못한 사람은 성전이 못되죠. 성전이 못되면 그거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안녕히 가 계십시다.” 빠이빠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데요? 약속 그 자체가 그러니까. 다윗약속이에요. 노아약속은 뭐냐 하면은 방주를 구경했다. 방주의 설계에 참여했다. 방주에 대해서 사진 찍었다. 이거는 노아홍수 때 구원받지 못합니다.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방주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방주 안에서 셀카 찍고 백날해도 그거는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요. 방주 안에 들어가고 문이 닫혀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언약, 새 언약에 있어서는 뭐냐 하면은 산 채로 예수 믿고 하나님께 회개해도 소용이 없어요. 뭐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로를 보여야 되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고, 내가 없어진데서 새로 태어나야, 거듭나야, 다시 태어나야, 그래야 하늘나라를 보는 겁니다. 무슨 재주로? 우리에게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죽었다가 깨어나도, 죽었다가 깨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런 재주가 없죠.
그러면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 자손 예수그리스도에 국한되는 겁니다. 예수님께 국한되죠. 근데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다윗의 혈통은 어떤 혈통이냐 하면은 왕가(王家)에요. 왕. 왕으로 왔기 때문에 왕은 반드시 어떤 환경을 조성하고 내려오느냐 하면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왕만 내려오면서 거기에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자기 백성이 함께 혜택을 입는다는 조건하에 왕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것이 예수라는 이름 속에 그게 담겨있어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이름을 예수라고 해놓고 그것을 풀이하고 있어요. 예수 이름을 풀이하면 자기 백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에요.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그냥 여호수아에요. 그냥 구원자에요. 명칭 자체가 구원자인데 해설이 길어도 너무 길어요. 그러면 예수라는 명칭 이것만 계시이겠습니까? 해석하는, 여기서 끄집어낸 추가된 해석도 계시이겠습니까? 하나만 계시이겠습니까? 둘 다 계시이겠습니까? 둘 다 하나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쓰기는 ‘예수’라 쓰고 읽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읽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읽는다는 말은 이것이 실효성이 있는 주님의 활동 내용이에요. 주님이 자기 백성만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의 죄를 없이하는 것까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 그냥 예수님이 몸으로 오게 되면 멀쩡하게 왔다가 한번 구경하고 돌아가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주께서 친히 죄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주님이 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죄 있는 육신이 돼요. 로마서 8장 3절.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와가지고, 죄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이 육신은 죄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죽어야 되겠죠. 과정입니다. 과정. 아까 제가 일부러 과정이라는 말을 강조했잖아요. 과정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죄 있는 육신의 모습, 육신의 모습 자체가 예수님의 아버지하고 이미 사전에 협의한 의제에요. 의제. 회담한 의제, 언약 내용이라 이 말이죠.
언약 내용대로 죄 있는 육신이 된다면, 우리가 아는 죄는 죄가 아니고, 우리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에 참여될 때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우리에게 부활의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부활의 혜택이. 그러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에 참여하려면, 참여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죄 있는 예수님의 몸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전에 있던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서 부활과 십자가라는 그 관계성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줘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죽게 된 그 죄로 인하여 우리가 그 죽음에 참여한 바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평생 알아도 모르는 죄, 평생 안다는 그 죄 말고, 예수님이 알고 있는 죄 속에 성령이 들어가서 참여하게 돼요. 그러면 그런 죄가 어떤 죄가 있느냐 하면은 그 죄를 위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숱한 명령법들이 주어졌습니다.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것은 구약에 없던 내용이에요. 그리고 네가 형제를 미워하면 무슨 죄? 살인죄.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네 오른 눈을 빼버려라. 근데 여러분들은 지금 뭐냐,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오른 눈으로 범죄 한 적이 없는 척 앉아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지금 오른 눈을 뺄까요? 그렇게 오른 눈 빼려고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돈 드니까 가만히 있으세요. 늙으면 오른 눈, 왼눈 다 죽습니다. 다 사라지죠.
왜 죽느냐, 우리가 자살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성도라면 죽음이 여기에서, 죄 있는 육신을 주님의 뜻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죽게 하시는 겁니다. 죽는 것이 두 가지거든요. 내가 늙어죽는 것하고 주님이 주시는, 주님만 체험했던 그 죄에 참여해서 죽는 죽음, 이게 성도의 죽음이 아닙니까? 성도가 이미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가지고, 성령에 속해서, 같은 말이에요. 성령에 속해서 뭐냐 하면은 주님이 체험했던 그 죄에 참여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 노선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처럼 자살하지 마세요. 제가 뭐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김성수 목사라고 밝히지는 않겠는데, 가만히 있어도 해주는데,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성질이 급했으면 미리 알아서 죽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해줬는데. 물론 이게 비의도적일 수가 있어요. 홧김에 뭐하다보니까, 막걸리마시다가 그 안에 독약이 있더라, 이래 죽는 것은 이거는 홧김에 그래서 그렇다고 하지만, 계획적이고 의도적일 때는 안 돼요. 아주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각도를 맞춰가지고, 넥타이 각도 맞추려고 연습 한 서너 번 해보고, 이래한다는 것은 도대체 이게 뭐냐 하면은 못 믿겠다, 못 믿겠다, 못 믿겠다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죽기 기다리다가는 사람 힘들어 죽겠는데, 살기 힘드니까 내가 먼저 알아서 죽어버리자. 이런 식이거든요.
살기 힘드니까, 내가 괴로우니까, 살기 힘드니까 죽겠다고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는 나에게 이 육신의 몸에게 어떤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힘들어서는 안 되는 몸이고 싶어라! 왜? 나는 그만큼 우수하니까. 나는 괜찮은 존재니까. 나보다 더 죄진 놈은 멀쩡한데 왜 착한 나에게는 몸이 아프냐? 따라서 나는 너무 억울하다. 하나님의 행정조치가, 분명히 뭔가 서류가 잘못되었어. 내가 이렇게 괴롭고 아플 이유가 없어. 괴로워할 이유가 없어. 욥처럼 따지겠어. 빨리 죽어가지고 하나님 나보다 더 죄진 놈은 멀쩡한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듭니까? 따질 거야.
이런 식으로 나서는 것은요, 지금 뭘 무시하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우리하고 뭔가 흥정한다고 알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하고 흥정대상이 아니고 아예 죄 있는 육신으로 따로 온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에서 떠나서 어디에 참여시키느냐, 죄 있는 육신에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과 함께 죽고 성령과 함께 태어나는 겁니다. 성령과 함께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 죽고 언제 태어나느냐? 거기에는 언제라는 말이 필요가 없어요. 왜 필요가 없느냐 하면은 성령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더 이상 더 나가버리면 이거는 신약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멀리 나갈 수가 없지만. 이사야 36장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사야 36장을 보면서 아까 제가 예고해드렸죠. 셉나와 엘리아김이 하는 두 가지 역할을 히스기야는 혼자서 하는 거예요. 단독으로 내가, 이랬던 내가 이렇게 망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상에서 인간과 신화적 존재의 중간위치에 히스기야가 투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추이를 보자는 거예요.
과연 히스기야는 앗수르라는 그 몽둥이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겁니다. 벌써 히스기야는 실패하고 있죠. 이거는 히스기야를 공격하는 의도가 아니에요. 근데 중간에는 히스기야가 눈치를 챕니다. 어떻게 눈치를 채는가 하면은, 산헤립이 올라와서 모든 것을 취하고 산헤립이 가고 37장에 보면 나중에 랍사게가 와가지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죠. 랍사게가 앗수르 왕이 돌아왔다가 다시 한 걸 보고 나오고 하는데, 36장 13절을 보면 “이에 랍사게가 일어나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가로되”
자, 이렇게 할 때에, 이때 히스기야는 약간 눈치를 채요. 아, 이게 내가 담당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담당자가 아니면 누구한테 비켜야 되죠. 살짝 자기는 뒷사람에게 공을 패스하죠. 누구한테 패스합니까? 이사야 선지자에게 패스하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사야 선지자에게 패스하니까, 여기 37장 21절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 하였도다 하시고” 22절,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보세요. 이게 히스기야 본인의 문제가 아니죠. 그러면 히스기야는 그런 일이 있을 때 당황하거나 벌벌 떨게 아니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패스하면 되죠. 누구한테? 예루살렘을 지키는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패스하면 되는 거예요. 패스할 때 자기 위치는 뭐냐 하면은 그냥 헛방이고 허수아비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나는 주님이 일을 했을 때 제거대상이라는 것을 본인이 그걸 감수해야죠. 본인이 뒤늦게 알았죠. 그래서 패스한 거예요.
이거는 누가 처리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취할 때, 이 모습이 뭐냐 하면은 원래 이스라엘이 해야 될 그러한 모델에 가까운 거예요. 모델과 일치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에게 줬지만, 이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왕이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왕이기 때문에, 이 왕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고 자기가 비켜나는 이 과정을’ 중간에 왕이 해야 될 일이에요. “이거는 내 일이 아니야. 내 일 아니야.” 그걸 저와 여러분들이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실천이 잘 안돼요.
히스기야 일을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히스기야는 일단 앗수르 왕 산헤립과 군대장관 랍사게가 왔을 때에 누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히스기야 자기가 왕이니까 정치적으로 자기가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나서기 전에 히스기야가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을 알죠. 왜냐하면 예루살렘 빼놓고 다 갈라먹었으니까. 몽둥이로 다 팼으니까. 나머지기는 예루살렘 패는 거예요. 그러면 앗수르가 그렇게 했을 때에 이것은 앗수르가 왔다고 하지 말고 누가 보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냈다면,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은 누구 소유입니까? 하나님 소유죠. 그러면 인간들 다 빠지라는 겁니다. 다 빠져버리면 누구와 누구의 일이에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이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보여주는 거죠.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은 히스기야가 보여주죠. 나는 빠진다. 나는 비켜난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내 뜻을 버리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자세가 나오죠.
이것이 바로 다윗 언약에 부합되는 일입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과정을. 그러면 그 과정을 보여줬을 때에, 지금 과정이 끝나고 난 뒤에 랍사게가 물러갔고 몇 명 죽었다고 했습니까? 37장 36절에 무려 185,000명 죽어났죠. 그러면 여기서 유다나라는 계속 지상에서 버틸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죠. “아니, 히스기야 물러갔겠다. 어! 괜찮은 왕이네. 그러면 이것은 지상에 유다나라가 멸망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자, 히스기야가 이렇게 훌륭할 것 같으면 갑자기 뭐가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이것이 쓸데없는 예언으로 끝나버리죠. 지상에서 잘하고 있는데 뭐 또 하늘에서 따로 또 특공대를 투입하느냐 이 말이죠. 지상에서 잘하고 있잖아요. 괜찮은 왕 히스기야가 있잖아요. 이렇게 되겠죠. 과연 그게 끝까지 괜찮았을까요? 셉나가 하고 3대가 나쁜 짓을 할 때 그걸 대타해서 엘리아김이 들어갔잖아요. 그때 들어갈 때에 “역시 엘리아김은 셉나하고는 다를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구약을 역사로 해석할 때 역사로 해석하는 것이 안 되는 이유를 제가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구약을 역사로 해석하면 안 되느냐, 역사로 해석하면 거기서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요. 교훈. 우리는 교훈을 배우면 안 돼요. 교훈을 배우면 그 교훈을 숙지한, 교훈에 대해서 많은 이득을 얻은 나의 존재는 제거대상이 안 됩니다. 왜? 갑자기 훌륭해져버렸어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울 정도로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니까 나는 얼마나 훌륭하냐?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그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딱 적합한 일이에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가자! 교회로! 뭘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자! 도를 아십니까? 하고 똑같은 거예요. 도 닦으러 절에 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라는 인간의 품격을 더 높이기 위해서, 질을 높이기 위해서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한수 배우겠다. 한수 배워서 뭐 할 겁니까? 바둑 9단 될 거예요? 그걸 배워서 뭐 할 겁니까?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교체에요. 제거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빌미로 삼아서 안 죽으려고, 제거되지 않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육신의 몸에 오신다고 할 때에, 이미 우리는 육신의 죄 때문에 죽기로 작정된 몸이에요. 언제 교체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타이밍 맞춰서 교체되어야 해요. 성령이 올 때 우리는 교체되면서 부활되는 거예요. 왜? 성령 안에서는 시간요소가 없기 때문에. 성령 받았으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살았고 둘 다가 되는 거예요.
그게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요소의 모습으로는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성령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살아남이 함께 그 요소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걸 우리를 통해서 언약적인 요소가 반영된다고 하는 겁니다. 반영되는 거예요. 외형적으로는 키가 더 커진다든지, 뭐 배 튀어나온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실제적으로서는 뭐냐 하면은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 용서가 일어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이런 변화는 인력으로 불가능한 변화에요. 눈이 열려가지고 세상이 멸망 받아야 할 마땅한 세상으로 보이고. 이것은 학교에서 교육받는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돼버리면 교훈 같은 것만 건지고 역사를 버려버려요. 그러나 구약은 역사가 아니고 복음입니다. 늘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제공하는 거예요.
그렇게 앗수르 산헤립 왕이 돌아가고 난 뒤에, 38장을 봅시다. 드디어 중요한 대목이 시작이 됐습니다. 그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 그냥 죽지. 그냥 죽으면 되잖아요. 그냥 죽으면 된다고요. 이사야를 찾아갑니다. 큰일 치렀던, 자기는 패스했으니까, 히스기야 자기는 하수아비고 진짜 하나님은 이사야하고 상대한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문서선지자에서 선지자가 천상회의를 봤기 때문에 연결됩니다. 인간의 왕은 이미 맛이 갔다는 것을 선지자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맛이 간 인간 왕들을 세운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 성전이잖아요. 근데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은, 혈통적인 왕들은 자격이 다 미달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자격이 미달이 되면 미달될수록 제대로 된 성전에 부합된 메시아가 오기를 선지자들은 학수고대하는 겁니다. 저 인간 아니고, 저 인간 아니고, 저 인간 아닙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이렇게 앗수르 군대를 보내서, “너 별 볼 일이 없어서 하나님이 알아서 일을 처리한 거야.”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슨 말로 들립니까? “야,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살다가 죽이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죠. 쓸데없이 살아서 뭐 할 건데.
그런데 히스기야가 병드니까, 그것도 급사한 것도 아니에요. 일부러 병들어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예언합니까? 38장 1절에, “너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참, 어려운 주제 나옵니다. 성경에서 정말 어려운 주제 하나가 예언이 변경된다는 겁니다. ‘예언의 변경’ 예언이 변경된다는 말은 새로운 예언을 추가했을 때에, 기존의 과거에 그냥 존속된 배경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추가된 예언이 오게 되면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 하면은, 전에 알았던 환경을 스톱시키고, 그걸 고정시키고, 그 환경에다가 적합하게 써먹으려고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어느 지역에 갔는데 약도 없고 다급한 상태였다. 그때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가 몸에 암이 걸렸습니다. 약도 없는데 어떻게 낫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갑자기 암에서 나았어요. 암에서 나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다음에 암에 걸리거든 죽으라는 뜻이거든요.
네가 지금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그만큼 낫게 해달라는 자체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 싫다는 비성전적인, 성전을 기피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 지금 발각된 거야. 앞으로는 내가 낫게 해주는 이것이 얼마나, 내가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그것 자체가 정말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큰 죄인인 것을 새삼스럽게 알라고 병을 낫게 해줬는데, 이 사람이 병이 낫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요것 봐라! 요것 재밌다. 이제는 병 고치는 은사 한번 발휘해볼까? 이거 돈 되겠네. 그러면서 마이크 쥐고 간증 집회한다고 돌아다니죠.
제가 이렇게 했을 때에 기도해서 나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절망에 빠지지 말고 암4기, 5기, 암이 5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기도하고 믿으시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해주실 줄을 믿습니까? 믿씁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저쪽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아멘! 멘아! 아멘인지 멘아인지 아멘하고 있다고요. 목사는 갑자기 강사를 잘 불러가지고, 가만히 있어보자 완고한 장로 벌써 은혜 받았고, 그러면 앞으로 십일조 하겠고, 저쪽 부자는 돈 쩨쩨하게 냈는데 은혜 받았으니까 다음에는 많이 낼 것이고. 돈만 생각해가지고 찬찬히 보고 있는 거예요. 잘한다! 강사 이거 몇 대 몇으로 먹었고. 다음에 니 할 때 나 불러도. 이런 식으로. 그거만 생각하는 거예요. 쩨쩨한 교인들 헌금 좀 내라고.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이라면, 이걸 진짜 믿는다면, “나는 살아있는 자체가 이거는 반칙입니다.”라는 것이 되어야 해요. 이거는.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왜 삽니까? “주께서 필요하다면 죄를 끄집어내는 쪽으로 살려주옵소서.” 이래 되어야죠. “내가 만약에 더 산다면 없는 죄 더 끄집어내라고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죠. 히스기야는 본인도 모르면서 어느새 본인인생이 바로 이 원칙에 준수하는 그런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뜻에 준수해요.
그가 15년 동안 더 살았습니까? 15년 동안 살면서 나라 말아먹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나중에 아, 이거구나! 아직도 내가 모르는 죄를, 나는 내가 모르는 죄를, 메시야가 와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라고 할 때에 내가 기껏 아는 범주의 죄가 아니라, 내가 육신에 있지만 이 육신의 죄, 자아가 미처 모르는 여분의 죄까지 주께서 언약적으로 사용한 거예요.
살게 됨으로서, 왜 인간의 왕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본격적으로 다 말아먹습니다. 다 말아먹죠. 히스기야가 기도를 합니다. 참, 이 대목을 금요철야기도 할 때 얼마나 써먹었겠어요? “여러분 주께서 히스기야의 그 눈물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