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제4강 관찰자

아빠와 함께 2019. 8. 3. 13:18
2019-08-03 10:07:06조회 : 6         
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이사야 강해: 관찰자이름 : 한윤범 (IP:119.192.174.248)

2019 여름수련회 이사야 제 4강(관찰자 : 이 근호목사)

신에 대해서, 인간이 신을 묘사할 때 어떻게 묘사하는가? 차마 접근하지 못하면서도 늘 자기들의 어두운 모습으로 자기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 신이라 했어요. 신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신을 달래야 되겠지요. 동굴벽화에 온갖 상징과, 온갖 자기가 아는 기호들과 그림들로 도배를 해서 “제발 도와주는 존재가 되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초월적인 힘이 라이벌 정도가 아니고 엄청난 힘으로 쳐들어오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침투, 같이 동거할 수 없는데 동거해야만 하는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방어체제입니다, 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3페이지 제일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보면 “방어적 행위”도 되지만 그것뿐만 아니고 그 방어적 행위로서 뭔가 신성한 초월적인 것을 종교로서 섬긴다는 자체가 불안의 공백을 끌어내는 의지가 되고 표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종교를 갖겠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찾아온 신에 대해서 물리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수용할 수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부나 굴복, 협상, 타협, 그것 외에는 대책이 없는 겁니다. 게다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통해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우리한테 저주만큼은 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지요.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헌금하라면 헌금하고,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 하고, 선교하라면 선교하고, 다 할 테니까 제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 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만치에, 그리고 나는 이 곳에, 약간 거리를 두고, 띄우고 삽시다. 너무 가까이 오시면 내가 감당이 안 됩니다. 일요일에만 찾아가서 뵐 테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제가 찾지 않을 때는 찾아오지 마세요.” 

옛날 고대인들이 동굴에서 그림 그린다, 하는 것은 늘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필요한 축제기간, 가뭄이 들었다든지 비상사태 때 그런 때는 제물 들고 가서 비는 거예요. 제물 바치고. 경건한 것, 귀한 제물 바쳐서 달래는 겁니다. 그걸 누가 말립니까? 여자들이 초파일에나 절에 가서 빌면 남자들은 쳇, 하고 비웃지요. 

하지만 여자의 그 심성, 뭐라도 빌어야 되고, 뭐라도 의지해야 되는 여자들의 그 심성을 남자들이 잘 몰라요.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엄마로서 보이지 않는 힘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내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어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교회 가서 빌든지, 절에 가서 빌든지, 무당집에 가서 빌든지, 달에게 빌든지 뭔가 빌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안 말리면 점점 더 마치 헉, 헉, 하고 말문이 막히지요. 그러면 거기 가서 뭐하느냐? 막혔던 말문을 풀어내는 거예요. “주여, 주여!” 해가면서. 앞에 인도자가 있잖아요. 강대상 두드리면서 찬송 부르고 “좀 풀렸습니까? 풀렸으면 주여 삼창, 주여, 주여, 주여! (삼위일체 불러주시고, 삼위일체로 불러야 정통이니) 룰라라라라라 루라랄라라라……” 

(옆 사람 눈치 슬금슬금 보면서) 세긴 세다.’ 하면서 기도 배틀 하고, 벌써 두 시간 째. ‘와, 지독한 사람. 나도 질수 없다.’ 그리고 세 시간 째. ‘저게 금식을 해? 그럼 나는 이틀 금식’ 이런 식으로. 누가 신을 잘 달래고 응답하는지 한 번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불안감은 점점 더 늘어나지요. 

세계관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바뀌지 않고 그 안에서 성스러움을 연출하고 조작해 내는 겁니다. 내게 납득이 되는 성스러움을 조작해 내는 겁니다. 그런 성스러움, 그런 예수, 그런 삼위일체, 그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나를 안 건드리는 하나님. 이게 이사야에서 우상입니다. 나를 안 건드리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 아브라함을 건드렸지요. 건드릴 때 가장 귀한 것을 건드렸습니다. 누구냐 하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네 손으로 죽여라. 독자를 음주운전차량에 맡기지 말고, 군대 가서 죽는 것 말고, 네 손으로, 네가 네 아들을 없애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때 아버지가 그 아들 이삭 안에 푹 빠졌지요. 사랑 안에 푹 빠진 거예요.

그러니 이삭을 없앤다는 것은 곧 누구를 없애는 겁니까? 나를 없애는 겁니다. 나를 없애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호, 하나님세계관의 기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과정에서는 나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기호에 대해서 자신이 안 없어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굴 밀치겠어요? 나를 없애는 하나님, 그런 신을 밀겠지요. 밀게 되면 남는 것은 뭐가 남겠어요? 바로 우상만 남는 거예요.

우상예수, 우상복음, 우상성령, 우상삼위일체, 우상여호와만 남는 거예요. 단지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게 필요한 신.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내가 계속 살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믿을 가치가 있는 신, 그것이 바로 우상이고, 예수고, 삼위일체고, 그 기호는 뭐라고 괜찮아요. 왜냐하면 없음이니까.

신은 없음이니까 없음에 접근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모든 거룩하고, 경건하고, 괜찮은 모든 단어를 이 연안에 전부 다 집결시키는 겁니다. 철저함에 철저를 다 기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언약 등등,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복음, 십자가, 구속사, 이런 것, 바른 교회, 오직 복음으로만,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주의 은혜입니다.” 온갖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 기호들을 총 동원시켜서 “이렇게 철저한데도 날 안 지켜 줄 거예요?” 주께서 꿀밤 딱 쳐버립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나보고 닦달 낼 문제가 아니에요. 이사야 6장을 한 번 봅시다. 1절에 “웃시야 죽던 해에.” 이사야가 속해있는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영적으로 침투가 된 거예요. 그걸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으로 침투했을 때에 이사야가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이사야 6장 5절, 권사님이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장 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뵈오니 나는 말뿐인 것을, 그리고 말뿐인 것은 나로 하여금 애초부터 망해야 될 자를 규정하는 근거로서 나는 그동안 말발을 날렸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왜냐하면 말과 말을 통해서 자기표현이 나오거든요. 자기표현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도사 아니에요. 침묵해도 옆에서 한번 잡아채면 “아야!” 합니다. 침묵 오래 안갑니다. 인간의 몸이 있는 한 말로 표현하지 ‘침묵은 금이요’ 해서 뭐 묵언수행? 묵언수행 같은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런 짓으로 자기를 속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나는 망하는 자 이기에 그동안 말을 앞장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변동이 없는, 나에게 앞으로 또다시 수정될 가능성이 전무 한, 전혀 없는 노선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는, 나는 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말씀으로 볼 때 말의 세계는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어둠에 있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나만 말로 자기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백성 전부가 하나님 보시기에 망해야 될 이유를 넉넉하게 갖고 있는 그런 대상입니다. 네 번째 강의 제목을 ‘관찰자’로 합니다. 관찰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왜 지켜보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져야 될 나라기 때문에, 내 백성이기 때문에 관찰하는 겁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관찰합니다. 

관찰할 때 관찰의 시선이 이러면 누가 관찰자가 되겠어요? 내가 나를 관찰하니 관찰자가 되지요. 내가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되고 내가 나를 관찰하는 거예요. 스스로 격려하는 겁니다. “똑바로 해. 정신 바짝 차려. 네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격려하고 꼬집고 나무라고 벌세우고 그렇게 해요.

할 때 하면서 동원되는 수단이 뭐지요? 말이거든요. 말에서 시작해서, 말로 해서, 계속 말로 가는 거예요.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부적으로. ‘잘했어. 힘내.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그렇지?’ 계속 나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남이 해 줄 때 그걸 가지고 친구라고 합니다.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희한하게 남이 이야기해줄 때 우리는 동지. ‘내가 너에게 이야기해줬으니까 너도 나에게 이야기를 해줘.’ 서로 주고받을 때 그게 동지. 그런데 그 동지를 이사야 6장에서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이라고 해요. 너희끼리 똑같다 그 말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단어를 사용하려거든 이것을 위해서 단어를 사용해라.

네가 평소에 나쁜 짓을 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네가 오줌 누는 것부터 해서 모든 것이 모아져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에 집결되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 내 행동, 특별히 뭐 하나 잘못되고 뭘 하나 실수를 한 것이 아니고 전부 다가 모아 모아서 나는 망하는 자로 규정받을 수 밖에 없는 식으로 줄곧 연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에게는 어떤 실수가 어떤 과오도 일체 없다는 고백을 더불어서 내놓을 수 있겠지요.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실수나 어떤 오류도 한 적도 없고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나의 목표는 내가 망하는 자임을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두기 때문에.

망하는데 무슨 실수가 있습니까? 뭔가 성공을 노려야 ‘아, 아깝다.’ 할 이유가 있는데 망하겠다는데 뭐가 실수에요? 어떤 일을 해도 망하는데 기여하니까, 보탬이 되니까 안 망할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참, 사는 것 편하지요? 참, 사는 것이 편해요.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세요. 왜? 그것이 우리 할 도리기 때문에.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하나님, 계속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고 마땅함이고 오류가 아니에요. 본성이고 타성이고 나온 재주가 우상 섬기는 재주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찾아올 때 중요한 것은, 순간이라는 것, 순간을 찾아옵니다. 순간을 찾아올 때 자기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역사에서 도약해서 다른 차원으로 가버린 거예요.

그러면 역사의 진전이란 성립될 수 없다. 진전, 발전, 진화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역사에 진전이 없다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반복이라고 해요. 전도서 1장에 나와요.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 그 말은 뭐냐? 모든 역사는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것.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갇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갇혀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봅시다. 아, 여러분이 다 소화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일단은 가두고 보자는 거예요. 가둔다는 말은 역사의 진전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역사의 발전이 의미 없는 겁니다. 이미 통째로 그 성전이 확정되었어요. 뭐냐 하면, 무슨 일을 해도 주님보시기에, 주님관찰자 앞에서 우리는 뭐냐? 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망하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실수나 실패가 없지요. 뭘 해도 망하니까. 그러면, 실수나 실패가 없다면 정말 “나는 망하는 자 맞습니다.” 그런 고백하고 싶다고 만약 여러분이 원한다면 여러분에게서 뭐가 안 나와야 되느냐 하면, 후회가 안 나와야 돼요, 후회가.

후회라는 것은 무릎을 치면서 ‘아, 그 때 그런 짓을 안했어야 되는데’ 그게 후회거든요. 후회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의 역사적인 가능성,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전에 잘못된 선택이 지금을 만들었다. 그 때가 다시 온다고 한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자꾸 수평적인 역사에서 저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냥.

후회한다는 이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거거든요. 자기미련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자기가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통곡하고 가슴앓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정신병이에요. 깨놓고 다 개판인데 뭐. 개판인데 너는 개판이지만 나는 덜 개판. 같은 개판인데 뭘 덜 개판이 있고 더 개판이 있습니까? 개는 같은 종류의 개인데. 

나는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주님이 하신 일의 과정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망하는 과정을 겪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의 하는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망하는 자의 관찰. 관찰자가 둘이 있잖아요. 하나는 뭐냐? 하나님이 관찰하지요. 또 하나는 뭡니까? 우리자신이 우리를 관찰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판정 났어요. 결판났어요. 순간적으로.

역사가 오래 끌어봐야 소용없습니다. 판정 났습니다. 뭐로 판정 났습니까? 우리는 이미 망하는 자다. 이렇게 미련을 두게 되면 이것은 억지가 되거든요. 유 승준이 자꾸 한국에 오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유 승준이가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그 법이 뭐냐 하면, 38세 이상이 되면 들어올 수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나라에서 법을 뭐로 바꿨습니까? 38세에서 이제는 45세로 바꾸려고 해요. 그러면 유 승준이 45살 때 뭐라고 또 하겠어요? 45세가 되니까 또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56세로 바꾸겠지요.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죄를 계속 늘여가서 너희가 갇혀 있어서 망한다. 너희가 나쁜 짓을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갇혀 있어서 망하는 거예요.

갇혀 있는 것이 내 잘못입니까? 우리는 아담 때문에 갇혀 있는데 그게 내 잘못이에요? 왜 우리가 우리의 멱살을 쥐고 흔듭니까? 우리 잘못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뭐라고 했어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지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 이야기가 야고보서에도 나오지요.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그 비판할 때 기준이 뭐냐?

우리를 죄 아래 가둘 때의 그 기준으로 비판을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가두어진 기준이기 때문에 ‘너도 가두어졌다. 나도 가두어졌다’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이 주어진 것은, 다른 말로 하면, 38세, 45세, 56세, 이런 식으로 가두어진 것은 네가 한국에 못 들어온다는 뜻이에요. 유 승준은 한국에 못 들어와요. 

늙어 죽어서 시체가 되어도 못 들어와요. 국민의 정서가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면 유 승준이 무엇이 이유가 되어서 못 들어오는가? 그것은 이유 없어요. 왜 못 들어오느냐 하면, 국민들이 싫어해서 못 들어와요. 싫어해서 못 들어온다는 것은 기존의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존의 법이 없지요. 싫은 놈 국내에 못 들어온다. 이런 법이 없지요. 

그래서 유 승준 하나 못 들어오게 함으로서 법이 계속해서 개선되는 거예요. 싫은 놈은 어떤 빌미를 가지고도 못 들어온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합니다. 왜 하느냐? 싫어서 그래요. 왜 싫은가? 그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걸 법으로 묘사하는 거예요. 이게 말과 말의 세계에요.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고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다만 그걸 핑계 삼아 법이라는 것을 동원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관찰자, 율법을 지닌 관찰자는 결국 법으로 하여금,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어떠한 연결점을 주께서는 차단시킵니다. 어떤 연결점도 성경에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 오지 못하게 하느냐?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른 방식이 뭐냐? 진정한 이스라엘의 언약을 홀로 다 이루신 분이 새로운 방식으로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망하는 자였지만 주께서 우리를 망하는 자로 인식시키는 그 과정까지 포함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이지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지요.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죄가 아니고 우리가 죄 짓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그런 죄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계속 죄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그 율법의 작용으로 우리는 즐거이 기쁨으로 죄인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주께서 조치를 하십니다.

저는 그걸 당당한 죄인이라 합니다. 당당한 죄인, 거리낌 없는 죄인. 어떤 사람이 루터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성도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간단한 질문이에요. 당신도 간단하게 답해 달라. 루터한테 이야기했어요. 루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루터가 답변을 못했습니까? 루터가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요. “아담 안에서 죄인이고 예수 안에서 의인이다.” 그 말을 왜 몰랐겠어요? 알지요.

그렇게 답변을 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답변을 안 한 이유는, 질문자 자체가, 질문을 한 사람이 그렇게 이중으로 하지 말고, 그런 것은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 그 이중을 하나로 묶어서 답해달라고 하는 요청이 질문 속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이중을 하나의 단어로 바꿀 수 있는 재주는 저에게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답변한 거예요. 모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믿는 사람이야, 안 믿느냐 사람이야?” 모르지요. 답변이 안 되지요.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 관찰자1 과 관찰자2. 주님이 보실 때 나 따로 있고 내가 보는 나 따로 있거든요. 내가 보는 나는요, 이것은 그냥 나가 있으면 안 되고 나 뒤에 뭐 붙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술어라고 합니다. 주어 다음에 술어가 붙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망하는 자거든요. 망하는 자. 

술어가 붙는다는 말은, 나라는 것은 내용이 없어요. 없는데 그 비어있는 내용을 뭐로 채운다? 주께서 망하는 자로서 채우는 거예요. 망하는 자로서. 그러면 뭐냐? 망하는 자가 누구다? 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망하는 자에서, 망하는 자가 나다. 더 나아가면, 나를 망하는 자로 규정하신 분이 규정하신 결과가 나라면 원인자리는 비워놓자는 말이지요.

나는 주 앞에서 망하는 자, 버림받아도 마땅한 자, 마이너스지요. 마이너스에서 비로소 발견된 나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들어갈 수 없는 마이너스를 마이너스 하도록 이미 틀을 공식화 시킨 거예요. 누가? 주님이 계셔서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마이너스에 우리가 가입되도록 주님이 조치하신 거예요. 

마지막에 성신이 와서 이 마지막에 붙어 있는 나는 기존에 내가 나를 지키려는 나로부터 단절성, 끊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free, 자유가 되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동안 자유치 못한 것은 그 술어를 내가 채우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요. 돌아다니는 언어들 많이 수집해서 좋다는 정보들 다 모았잖아요.

십자가, 복음, 구속사, 모든 것을 다해서, ‘이런 것을 아니까 더 이상 나는 모자람이 없겠지.’라고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성경지식들을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 작업을 누가 했는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한 거예요. 그래놓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남과의 비교에 나서니까 “남을 비판하지 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또 남을 비판하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사도는 남을 비판한 사람이 아니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지요. 그러한 관찰자의 시선, 하나님이 보시는 관찰자의 관점은 어디서 얻을 수가 있는가?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에베소서 1장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계시의 정신이란 말은, 계시의 영, 그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렇게 죽 되어 있지요.

우리 눈을 밝혔다, 그 말이잖아요. 우리 눈은 성령이 오지 않으면 항상 어떠하다? 어둡다는 소리에요. 어두운 거예요. “달리다.” 어린 소녀여. “쿰” 깨어라. “달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라.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면서 소녀야 깨어라, 또는 일어나라는 말을 왜 했어요? 주님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인식을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찰과 우리 사이에 닫힌 영역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하고 비교하면서,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다. 공동묘지에 가면 우리 할아버지는 죽어 있으니 나는 살아 있는 것이 맞잖아.’ 이렇게 자꾸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한 거예요. 육에서 육으로 비교했지 언약으로 비교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죽었다’ 하니까 우리가 숨도 안 쉬고 있어야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우리가 죽어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관찰하는 것과 주님이 관찰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죽은 자의 그룹에 속하는 겁니다. 에스겔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고 우리를 아예 바짝 마른 뼈라고 하지요. 

그 말을 왜 하셨는가 하면, 네 스스로의 힘으로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은 너에게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내민 어떤 행동도 나는 받지 않는다. 네 행동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준 것으로서 네가 눈을 떠서, 내가 이미 망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일에 엮여져 있는 그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루터에게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어느 당신을 말하는 겁니까? 어느 나를 말합니까?”라고 다시 되물어야 되겠지요? “어떤 나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나입니까? 아니면 예수 밖에 있는 나입니까?”라고 물어야 되겠지요. 그렇게 물으면, 상대방이 “예수 안에서입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칩시다.

그러면 이미 주어 자체가 나가 아니고 나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예수 안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면 질문자체에서 주고받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 전파,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돼요. 일방적인 예수님의 조치에 의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는 의인이라는 말을 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내세울 필요도 없는 거예요.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라고 할 때 “어느 나를 말합니까?”라는 그 어려운 말을 쉽게 수정하고 싶을 때는 “나는 불신자입니다. 나는 믿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자인 겁니다. 참 쉽죠, 잉. 신앙이 없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신앙이 없어서. 신앙이 있는 순간 지옥 가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소경을 가지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자,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이야기지만 오늘은 이사야를 봅시다. 진도가 빠르다 싶을 때는 자꾸 복습할 수밖에 없어요. 이사야 3장, 4장의 이야기는 아까 했습니다. 권력층, 지주의 재산, 옛날에는 산업시대가 아니고 농경시대기 때문에 땅만 가지면 부자 되는 거예요. 아주 사치를 하고, 잘 먹고 잘사니까 모든 여호와 믿는 것이 형식이 되고 만 거예요.

이사야 3장에 보면 여자들이 사치에 사치를 더합니다. 22절에 보면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이만큼 그들이 사치에 사치를 더했잖아요. 그러면 오늘날 문서선지자의 이런 내용을 모르고 그냥 옆구리 치고 들어와서 구원받으려는 사람 같으면 뭘 하면 돼요?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 이런 것을 안 하는 사람을 두자로 줄이면 뭐가 됩니까? 수녀가 되지요. 수녀 되면 되지요. 수녀가 되는데 수녀들은 이런 것을 안 하지만 수녀들이 요새 뭘 하느냐 하면, 컴퓨터를 많이 해요. 어제 수녀원에 화재가 났는데 컴퓨터가 많이 탔답니다. 

세상과 소통하네. 그냥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잖아요. 컴퓨터로. 세상을 끊은 것처럼 옷은 단출하지만 그 내면에는 하도 세상이 궁금해서 은밀하게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또 ‘실수했다. 후회한다.’ 이게 무슨……. 꼭 정신병 집단 같아. 거룩 못해서 환장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기어이 안 망하는 자로 규정되기 싫다는 거예요. 누가? 내가 싫다는 거예요.

내가 망하는 자라는 서술을 나는 강력하게 거부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자들이 예수를 또 죽이는 사람들이에요. 교재 5페이지 봅시다. 5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이는 성도에게 있어 ‘자기치료’나 ‘현실치료’같은 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이다.” 치료한다는 희망을 갖는데 그런 희망도 필요 없어요. 

이사야 6장을 봅시다. 이사야 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화로다 망하게 된 것은 본인만 망하게 된 것이 아니고 어떻습니까?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 전체가 망하는 자지요. 그렇다면 대표적 망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사야가 되는 겁니다. 이사야가 망하는 자라면 망하는 자라는 것이 누가 찾아와서 그렇겠어요? 거룩한 주님이 찾아와서 졸지에 자기가 무슨 자? 졸지에 자기가 망하는 자로 규정되었지요.

이 망하는 자를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우리는 안 망했어.’ 라는 그 이스라엘 중앙을 관통하도록 주께서 보내는 겁니다. 보내는 이야기가 나와요. 8절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고기를 낚아놓고, 낚시를 해놓고 그 고기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에요.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고기를 다시 풀어서 원래 있던 고기 자리에다 방류해 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망했다는 이 규정이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 망하는 세상에 들어가야 점점 더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망했다는 것. 그리고 나만 망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다 같이 망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나만 훌륭하고 나만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고 ‘나도 망했는데 저들도 망했네’ 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저들은 망함’이라는 결론을 짓게 만든다면 내가 하는 모든 것도 망할 수밖에 없는 짓거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그 귀한사명, 거룩한 사명, 그것은 나를 망하는 자로 보여주는 그 사명, 여러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면서도 단지 그들이 모르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런 짓거리가 나를 망하게 한다는, 그래서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모를 뿐이고, 성도는 그것을 이미 알고 그 짓을 하는 거예요.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할 때 어떤 작당모의를 해야 됩니까, 하는데 여러분은 작당모의, 그런 수고를 안 해도 돼요. 

여러분이 망하는 그것을 누가 도와주느냐? 여러분들의 몸, 육체가 도와줍니다. 아까 했지요. 팔팔……, 어쩌고 하는 것 있지요. 아무리 온화하고 아무리 우아하게 살고 싶어도 관절이 아프면, 몸이 아프면, 갱년기가 오게 되면 짜증 제대로 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뒤풀이는 누가 감당해야 돼요? 가족들이 그걸 다 감당해야 돼요.

가족이 다섯 명인데 한 사람이 치매 걸렸다. 나머지 네 명도 치매 후보에 들어가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 오염이 되어서 네 명도 다 우울증과 치매에 걸리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 때문에, 몸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릴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에요.

놀라운 사실은, 이 몸을, 이 썩어질 몸, 이 죄만 나오는 몸을 주께서 훌륭하게 주의 일의 재료로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망함의 사명을 다 완수할 수가 있어요. 이사야 20장을 볼까요? 하여튼 월요일 오전강의는 힘들어요. 잠이 오기 때문에. 이게 다 무엇이 약하다? 우리육신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망하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는 그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2절에 보면,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찌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걸 어떻게 이사야가 수행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가 세상에 나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더 잘 대우해주고 그런 것 없지요. 짓밟아도 아주 처절하게 짓밟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미쳤다, 할 정도로 처참한 인생을 살게 하는 거예요. 아무리 처참한 환경을 주어도 이사야가 거기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나는 망하는 자니까. 원래 망하는 자거든요. 따라서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을 시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망하는 자에 부합되는, 합당한 하나님의 추가적조치가 되는 겁니다. 이보다 더 처참하고 더 망가진다 할지라도.

이사야 같은 경우는 이렇습니다. 이게 내가 망가진 자의 모습 다입니까? 주께서 “기다려 봐. 더 있어. 아직 그걸로 안 끝났어.” 끝까지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결국 죽을 때 뭐로 죽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죽을 때 “슬근슬근 톱질하세.” 톱으로 사지가 쪼개져서 죽은 거예요. 혹시 그 옆에 고유정이가 참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슬근슬근 톱질해서 처참하게 한 거예요.

“이래도 이 세상아! 이래도 너희들이 이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한 자가 아니야?”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마지막 있는 신체로서 마음껏 보여줄 것 다 보여주는 겁니다. 원래 돼지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한약재로 쓰이고 다 쓰잖아요. 주께서 이사야를 쓰는데 버릴 것이 없어요. 마지막 처참하게 될 때까지 다 필요한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복숭아 먹어가면서 ‘주여, 이것도 처참한 일’ “어그적!” 아이들과 같이 풀장에서 놀면서 ‘이 처참한 풀장 놀이’ 이런 거요. 항상 망하는 일에 적합하도록 주께서 일을 거기에 투입시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상황, 그 길을 주께서 가신 길이라고 해요.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자취를 따라오게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나오지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십자가 믿었다 끝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만들어요. 가게 만드는데 그 가는 길이 굉장히 신나. 즐겁고 행복해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것을 하게 하신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한테는 ‘아니오’ 혹은 ‘못한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고 모든 것이 ‘노’가 아니고 모든 것이 주님의 ‘예스’로서 “잘하셨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군요. 주님은 솜씨도 좋아.” 모든 것이 ‘노’가 아니고 ‘예스’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의 진전은 절대 기대하지 마세요. 역사의 진전은 없습니다. 항상 주님이 주어가 되고 우리는 거기에 따른 주님을 증거 하는 서술어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교재 5페이지 밑에서 7번째 줄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히 6:13)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말과 말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는 인간,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는 말, 말씀의 지배를 받는 말, 이것이 바로 말로 살지만 말씀의 증거로서 개입된 말이 되는 거예요. 

복습해 볼까요? 말이라는 것이 뭐다? 내가 나의 건전함과 우수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남을 상대로 계속해서 나 잘났다는 것을 남발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전체가 뭐냐? 내가 망하는 자로다. 무엇이 더럽다고 했습니까? 무엇이 더럽다? 다리가 더럽다? 팔뚝이 더럽다? 뭐가 더럽다? 입술이 더럽다. 입술이 더러워요.

왜냐하면 주님세계나 인간세계나 전부 다 뭘 로 포위되어 있어요. 말발로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입술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만 몸짓이나 표현 이 모든 것이 “나는 더러운 중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말씀으로 포위되었습니다.” 또는, 말씀 안에 갇혀 있다. 그 말씀이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이 갇혀있게 하시는 겁니다.

갇혀 있는 특징은 뭐냐? 반복이죠. 반복이라 하는 것은, 역사의 진전은 없습니다. 우리가 “3년 뒤에 잘할게요.” 혹은 “다음 달엔 잘할게요.” 그런 것은 하지 마세요. 항상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항상 오늘로 마지막이고, 여러분이 죽을 수도 있고 내가 죽을 수도 있고. 6페이지 중간에 보면, 중간에 “이사야는 이 노선에서 등장한 선지자다. 그래서 그의 할 일은 ‘치료’가 아니라 ‘확정된 심판’이며 ‘말씀 세계의 공격’을 예고한다.” 

거기에 이사야 40장 8절 말씀이 나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여기서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고 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가 안 되어 버려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역사가 되려면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하느냐 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현상과 동반해서 벌어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모든 육체는 허무하고 망하니까, 마땅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도는 자기육체를 가지고 평생토록 누누이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나는 아파야 되고, 이러니까 나는 죽어도 마땅하고, 이러니까 나는 망해도 싸다. 세상에 한 달 수입이 천오백만원이 뭡니까? 이게 망하는 거잖아요. 말 잘못한 것 아니에요.

우리 집 아파트가 100평이다. 이게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한 달 수입이 1500이고 부동산이, 땅이 15만평이 있다. 이걸 뭘 로 보자? 이걸 뭘 로 보자는 말입니까? 망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우리 애가 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둘째가 이미 판사인데 이번엔 셋째가 또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생겼다. 

이걸 뭘 로 보자는 거예요? 망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들 교육 잘 시키세요. 망하는 쪽으로. 영어도 잘하고, 독일어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망하는 쪽으로 교육을 시키세요. 그게 내 육체가 하고 싶은 솔직함이기 때문에. 오늘 강의 이상하게 끝나지요, 지금. 노선변경하지 마세요. 돈이 좋은 거예요. 하고 싶은 것 다하기 때문에. 돈 없으면 병도 못 고치기 때문에. 

되지도 않게 “나는 돈이 싫어요.” “뭐, 5만원이 싫어요?” “싫어요.” “그러면 5천만 원?” “싫어요.” “그러면 50억은?” “생각 좀 해봅시다.” 우리의 육신을 우리의 자아가 속일수가 없어요. 우리의 자아보다 우리 육신이 먼저고 그 육신이 망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누가 말립니까? 내가 못 말려요. 내 육신이 좋아하는 것, 내 육신이 바라는 것을 내가 이렇게 억지로 말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배고픈 것을 누가 말립니까? ‘내가 배고프다’ 가 아니라 ‘내 몸이 배고프다’ 하면 우리는 이 강의조차도 끝내야 돼요. 점심 먹고 또 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가만 보니 나만 배고픈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말씀의 세계는 이 땅을 더욱더 말의 세계로 활성화 시킵니다. 그리고 활성화시킬 때에 그래야 우리는, 너나 나나 똑같다는 거예요. 

나는 특별하고 괜찮고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살면 살수록 행함으로 구별이 안 된다는 사실, 사고방식으로 구별이 안 된다는 사실. 다만 사고방식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께서 눈을 뜨게 한 거예요. 망하는 자라고 통보를 해 준 그 통보가 우리의 생명의 연줄, 생명 줄입니다.

다음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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