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8강-이사야 강해: 한 아기
자, 시작하겠습니다. 제 8강이죠. 36장에서 앗수르가 쳐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에게 어떤 경우가 덧입혀졌느냐 하면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는 것이 덧입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거는 앗수르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내용이 없었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서 추가된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추가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추가된 내용은 신난다, 죽어도 살겠다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쪽에서 삭제되어야 될, 기존에 있는 내가 계속 유지되는 식으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존재의 연속성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안에 언약이 개입되어서 죽었다 살아나는 이 현상에 대해서 이사야가 필히 여기에 관여해야 돼요.
어떻게 관여해야 하느냐 하면은, 이사야 38장 21절에 보면 “이사야는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그렇게 했죠. 22절,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 이래 되어 있어요. 이사야가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다시 낫는 데에 관여했다는 것은 히스기야가 그냥 급사한 것이 아니고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과정, 죽음에 이르는 것을 갑자기 슬로우비디오로 보여줍니다.
슬로우비디오로 보여주면서 히스기야가 갖고 있던 살고 싶은 심정, 그 살고 싶은 심정이 그냥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나라는 동질성의 연장을 말하죠. 어쨌든 간에 남이 죽고 사는 것에 신경 쓰는 것보다도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우선시 하는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 이럴 경우에 선지자 이사야는 문서선지자기이기 때문에, 문서선지자의 특징은 뭐라고 했습니까? 고발이고 심판이라고 했죠.
이사야 1장에 나오잖아요. 이미 연결점이 끊어진 거죠. 연결점이 끊어진 것이 관여함으로서 내가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고 하면 안 되고, 내가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고 했을 경우에는 여기서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은 새로 추가되는 죄가 여기에 기다립니다. 15년 동안에 새롭게 추가되는 죄를 지을 기회가 연장된 거예요. 그러면 이 자체가 히스기야는 과연 처녀에게서 태어날, 임마누엘 아들이 오는 것을 취소시킬만한, 그만한 대단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지상에서 히스기야가 이정도 같으면, 하나님께서 아들 준다는 그것도 이미 이 정도였으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계획 취소합시다.”라는 정도일까? 그거는 아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날 때는, 내가 유지될 때는 새로운 죄가 추가되기 때문에 이거는 부적절한 거예요. 이스라엘의 영원한 다윗언약을 영원히 언약대로 복원하기에는 부적절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노선이 두 개로 갈라져야 하겠죠. 새로운 죄가 추가되지 않고 온전히 죽었다가 온전히 살아날 그런 분은 위에서부터, 처녀의 몸에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히스기야 이야기가 지나고 난 뒤에 그다음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누구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진짜 미지의 인물, 진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메시야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이 역사 속에 나타날 때 히스기야가 한 짓거리에 비교해보라고. 달라도 너무 다르죠.
42장 봅시다.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그는 반드시 무엇을 줍니까?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죠. 주의 깊은 사람은 아실 겁니다. 이사야 11장에서 이새에게서 싹이 나게 되면 그 이새의 싹에서 뭐가 주어집니까? 2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지상에 있는 모든 왕들아 이제는 너의 시온은 끝났다. 더 이상 인간의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하고는 상대 안 한다. 처녀로부터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면 그 사람이 와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과 더불어서 일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신이 없어.” 그러나 이새의 아들에게는 신이 있거든요. 이거는 바로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이 와서 이새의 아들 일곱 명 쫙 붙여놓고 왕을 삼을 때 다윗은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양 치러갔거든요. 막내기 때문에.
근데 막내에 대해서 사무엘도 몰랐어요. 누굴 점지할지. 하나님께서 쭉 세워놓은 겁니다. 잘 생긴 큰아들이 나와 가지고 “이 사람입니까?” “아니다.” “그럼 둘째입니까?” “아니다.” 끝까지 다 갔어요. 끝까지 없어요. ‘내가 하나님 계시 잘못 받았나?’ “더는 없습니까?” 이새가 하는 말이 “아이고 뭐, 막내 있기는 한데 걔는 아주 어리고 왕 될 재목이 못됩니다.” “그래도 한 번 불러보세요.” 딱 하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걔다.” 라고 정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양치는 다윗에게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해서 같이 붙여놓지 않았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신이 아닌 인간들의 생각의 한계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 한계성 있는 인간으로 다 배치를 해놓은 거예요.
그렇다면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의 신과 함께 있을 때에 주변사람들은 그 메시야에 대해서 그들이 알던, 생각한 메시야, 육적인 메시야로서는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이 오겠죠. 이사야 42장 3절,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세상에 공의를 세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42장 18절에 보면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귀머거리 소경들이 나와요.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는 작자들이 전부다 엉터리라는 거죠.
그리고 난 뒤에 이사야 44장에 보면 역시 또 하나님의 신이 나옵니다. 그다음부터는 그 하나님의 신이 초월적인 그러한 환경을 몰고 올 때에 하나님께서 우상과 더불어 대조시키고요. 그다음에 그 우상을 보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은 아무것도 아니다. 낫씽nothing,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 헛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상과 장차오실 메시야를 비교시키는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추상적이라고. 계속해서 구체적인 인물은 없어요. 뭔가, 누군가 오시기는 오시는데 딱 부러지게 누가 온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사야 50장에 보면 6절,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근데 계속 당하는 거죠. 메시야가. 그리고 유명한 말씀, 이사야 53장에 들어가면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우리가 이 말씀을 미리 알았으면 예수님을 찾는데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찾겠어요? 연한 순 같고, 몽타주를 그리는 거예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빼빼하겠죠. 고운 모양도 없고, 이거는 뭐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죠. 모양도 없이 못생기고 풍채도 없고. 이거 몽타주 그려가지고 돌아다녀보세요. 찾을 수 있습니까? 못 찾습니까? 못 찾죠. 이거는 모습이 아니고 기능을 이야기하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것을 형상화할 때는 그냥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내 입장의 기준에 맞추어서 못생겼다, 풍채 없다는 것을 설정해놓고 찾아다닌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기능 자체가 뭐냐 하면은 주님의 기능과 대조적으로 죄 있는 기능이거든요. 죄 지은 기능이 됩니다. 죄 지은 인간이 아무리 메시야의 기능을 해도 우리는 눈이 어둡기 마련이에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못 찾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못 찾으면 구원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시발점이 되고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로 또는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보니까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아는 겁니다. 그 순간 그렇게 안 풀리던 성경 전체가 다 풀리는 거예요. 모든 성경은 내 구원에 대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다 들어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그러면 그 예수님이라는 것은 ‘+x’가 아니고 ‘-x’거든요. 그런데 필히 ‘+x’를 시도하는 그 환경을 동반해서 가져오는 거예요. 지금 히스기야는 바로 ‘+x’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자로서 이사야 36장에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이사야 37장을 한번 봅시다.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죠. 병이 들고 난 뒤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예언은 죽는다고 했어요.
요나가 40일이 되면 니느웨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40일이 되면 니느웨는 망한다고 했거든요. 근데 어떻게 됩니까? 요나가 사전에 하나님께 계시 받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니느웨는 회개해서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언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동업자가 정보교환에 뭔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의사소통에. 분명히 그 대목은 없었어요.
그런데 주께서 예언을 변경시켜놨습니다. “회개하면 살려줄게.” 이거는 뒤늦게 일방적으로 계약위반이에요. 계약내용이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그거면 그 추가됨으로서 요나가 갑자기 뭐라고 하느냐, “이럴 것 같으면 더 이상 나 일 못합니다. 이런 꼴 보고는 내가 못삽니다. 차라리 콱 죽어버릴 겁니다.”라고, 죽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나의 내부에 자리 잡은 그 죄성이 북이스라엘이 잠재되어 있었던 죄성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선지자는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끼인 존재거든요. 이쪽의 뜻도 아니고 이쪽의 죄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상대함으로서 해서 이스라엘이 죄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요나에게 실려서 다시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추가되는 내용까지 실려 보내서. 요나가 삐지듯이, 바로 새로운 언약이 새롭게 추가될 때는 예언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언변경이 일어나면서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그 모든 범주, 바깥에서 추가적인 이야기가 일어나면서 히스기야는 또다시 여기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쓸모 짝이 없는 자라는 것을 또다시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를 했죠. 기도하니까, 이사야 38장 5절에, “네 눈물을 보았고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6절,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이 성을 보호하리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이럴 때 이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8절 여기에서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했죠.
이거는 노아 때 무지개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하나님의 시그널, 신호라고 했어요. 자연은 누구 말을 들어요? 히스기야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을 듣고 하나님 쪽으로 관심을 가지도록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것을 보고 히스기야는 뭘 눈치 채야 됩니까? 살고 죽는 것은 내 기도 덕분이 아니고 주님이 이미 그것을 준비한 것이라고 감 잡아야죠.
제가 언젠가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을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응답은 이미 준비된 내용을 주께서 주시는 거예요. 마치 어린애가 “오늘은 뭘 먹지? 엄마가 냉장고에 뭘 넣어놨지?”라고 하면서 열어보니까, 바나나 우유가 들어있어요. “옳지. 오늘은 나 바나나우유 먹는다.” 이러는 거예요. 기도한다는 것은 주께서 뭘 미리 준비해놓았는지를 기도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걸 다시 확인하는 거예요. ‘아, 이런 것을 준비해놨구나!’
그래서 주님의 응답은 주님이 주님 되게 하고, 우리는 기도한 나도 아무 쓸모 짝도 없다는 것을 재인식시키는데 필요한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한 내가 아무 짝도 쓸모없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져야 돼요.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아무 짝도 쓸모없으면 기도하겠습니까?” “그래, 하지 마! 그러면 하지 마! 네 가치 챙기려면 하지 마!” 하지 말아야 되는데 또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또 벌어져요. 내가 나를 모르니까. 내가 얼마나 욕심쟁이라는 것을 몰라요. 꼭 누가 욕심쟁이 우후훗! 해줘야 욕심쟁이입니까? 우리는 내가 얼마나 탐욕의 덩어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으니까, 주께서 또 건드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또 울고불고 “주여! 살려 주옵소서”하고 와가지고 나오는 거죠.
그리고 난 뒤에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은 후에 이걸 음악으로, 노래죠. 한 줄로 하죠.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생존 세계에서는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같이...,”(사38:9-20) 아슬아슬한 대목을 이렇게 쭉 해놨어요. 쭉 해놓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인줄을 알았다. 이랬으면 이 사람이 이제는 개과천선이 되었다 생각하잖아요. 개과천선 안 됩니다. 개과천선 같으면 처녀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39장에 보면 드디어 죄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에 바벨론의 왕 므로닥발라단이, 바로 바벨론을 처음 세운 사람이에요. 아직 그 사람은 앗수르를 정복하기 이전에 히스기야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러한 기적에 공유하고자 의논해서 앗수르를 치려고 온 사람이에요. 그때에 누가 개입합니까? 3절에,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라고 묻는 거예요. 물으니까, 히스기야가 하는 말이 궁전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보물을 다 보여줬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왜 인간을 아무것도 아니고 우상덩어리고 쓸모 짝이 없다고 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에게 진전된 가능성을 볼 것 같으면, 내가 하나님 같으면 이사야를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가지고, “히스기야 왕이여, 아마 이맘쯤에 바벨론에서 사신이 올 것인데, 어떤 왕이 올 건데 그때 말을 이렇게 조심해서 하세요. 안 그러면 당신 보물이 다 날아갑니다.”라고, 왜 미리 진작 그 모든 일을 통달하신 주님께서 알려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알려줘 버리면 처녀가 아들을 낳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계속해서 “너는 안 돼! 너는 안 되는 거야!”라고, 그걸 일러주는 겁니다.
지난번에 주일 낮 설교했지만 세례요한 같은 경우를 보세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다고 이야기했죠. 나보다 앞선다고. 사울 왕하고 사무엘하고 있어서 사울 왕한테 사무엘이 약속을 어겼어요. 그런데 사울은 정말 인간적으로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는데, 내가 오후 세시까지 기다렸다가 하겠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요. 진짜 이거는 제 삼자가 봐도 사울은 잘못이 없다. 잘못은 사무엘이 했다. 사울이 제사들 드렸는데 드리고 난 뒤에 사무엘이 까꿍! 하고 나타나는 거예요. 까꿍! 하고 그때 나타나가지고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신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나리오를 그렇게 가져가는 겁니다. 당신이 살았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제대로 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은 어떠한가, 이사야 9장 봅시다. 6절입니다.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한 아들이 태어났다. 구약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이에요. 한 아들이 태어났다. 뭐 어쩌라고? 이래 되겠죠. 한 아들이 태어났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만이 아들이다. 어떤 아들? 다윗의 아들이에요. 다윗 자손의 아들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약속대로 난 유일한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면 이 아들 중심으로 약속이 진척이 된다면, 세상에 있던 모든 인간세계는 이제는 다 멸망당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전부다 파괴되어야 한다. 이게 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그 안에 들어있는 함축된, 중첩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 안에 다 담겨있어요.
한 아들이 태어났다. 따라서 모든 육적인 것들은 이제는 다 사라져야 한다. 근데 이 아들이 태어남으로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주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만듭니다. 그러면 이 아들이 아들인데, 흥미로운 것은 아들이죠. 한 아들을 성경에서는 또 한 아기가 태어났죠. 한 아기가. 그러면 아기가 태어났는데 겉으로 보면 아기죠. 그러면 속을 보면 이건 누굽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아기기 되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아기가 되었다? 이거는 누구하고 대결하겠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아기와 하나님이 대결구조로 가겠다는 겁니다. 대결구조로.
이 아기 외에는 어떤 인간도 내 나라에 받아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약속이 된 아기만 약속된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할 때에, 여기 한 아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한 아들이죠. 한 아들, 한 아기. 하나죠. 일(1). 일과 하나의 아들. 그 다음에 여기서 뭘 유발합니까? 위We, 우리를 유발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태복음 1장 21절에 이름은 예수라 하고 기능은 어떻게 한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길게 쓰는 그 내용에 하나의 전조가 될 수 있어요. 한 아기가 났는데 그 아기는 새로운 많은 다수의 우리를 위해서 태어났다면, 여기 우리는 그 당시에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 않죠.
아기로 인하여, 아기가 아들로서의 기능을 하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모집되는 위We, 우리가 되는 겁니다. 새로이 모집되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 우리로 기존의 모든 이스라엘과 교체하게 되는 거죠. 교체. 바꾸어지는 거예요. 바꾸어지면서 이 아기에게서 나오는 이 동질성과 기존의 혈육적인 동질성과 대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의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따지기 좋아하죠.
그런데 이 아기의 기능이, 별명이 뭐냐 하면은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뭡니까? 기묘자라. 묘하다 이 말이죠. 이름이 기묘자라고 하는 것은 하는 기능들이 전부다 무엇과 틀어진다? 인간의 모든 예상과 기대에 부합되지 않고 그걸 비켜가는 거예요. 어, 그거 묘하네! 그거 기묘하네! 우리가 종잡을 수 없네! 우리가 미리 예측하지 못하네! 라는 방식으로 이 아기는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믿는 어리석음이죠. 이게 바로 대조잖아요. 이게 대결구조 아닙니까? 그래, 똑똑해라! 그래, 합리적해라! 우리는 뭐하겠다. 어리석다. 어리석음을 하겠다! 근데 그 어리석음은 어떤 인간도 나름 자기가 이성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은 어떤 인간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성령이 와서야 비로소 십자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기묘함이고 이 땅에서 보기에는 어리석음으로 보이죠.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어리석음을 알게 됐다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이 자랑이냐 하면은, “저 이름 바꿀게요. 김 어리석음으로!” 그걸 아주 즐겨 바꾸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어리석음으로! 평생 나는 어리석음으로 살더라도 나는 자랑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기 태어난 것부터, 그 아기가 성장해서 아들의 기능, 하나님의 기능을 마지막 다 보여줄 때까지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하나님다운 모습을. 왜 안의 내용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진짜 못하는 것이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아기가 성장하면서 마지막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낱낱이 다 보여주죠. 낱낱이 다 보여주게 되면 낱낱이 인간들은 그걸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습니까? 낱낱이 못 알아먹죠. 낱낱이.
참, 제자들도 얼추 따라가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한 수 배우려고. 그런데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제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예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왜 사랑인데 왜 아파? 니가 문제다. 니가. 사랑인데 왜 아파? 아플 수밖에 없어요. 교체되니까. 내 사랑을 포기해야 되니까. 내 쪽에서 내민 사랑카드는 안 받거든요. 사랑카드를 내밀었다는 말은 무엇을 유지하려는 요청입니까? 나의 동질성, 나의 주체성을 하나님도 인정해달라는 하나의 요청이거든요. 그 요청을 과감하게 끊어버리는 거예요. 왜? 계속 기묘해야 되니까.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이게 미친 짓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사랑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하죠. 내가 사랑에 미쳤다고 하잖아요. 사도바울이 정신이 온전하나 미치나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까?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말의 능력이나 설득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전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사람을 기쁘게 할 것 같으면 아예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사람의 특징은? 1번. 맨날 싸운 사람이다. 2번. 맨날 돈만 챙기는 목사다. 3번. 설교 준비 하나도 안 하는 목사다. 4번.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사다. 몇 번입니까? 4번이요? 아, 이거 말이 안 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그러면 복음전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봐주실 것이다. 이왕 신났는데 같이 다른 문제 해봅시다. 내가 복음 전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천당 보내준다. 그게 맞아요? 틀려요? 틀리죠. 내가 전한 복음이라도, 나라고 할지라도 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면 저주받는다고 했어요. 복음을 전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복음 전하는 조건하에 구원되는 거래를 주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30년이 지나도 그 다음 주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내가 장담 못해요.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을 생각조차도 하지마세요. 깨끗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합시다. 컴퓨터에 딜리트Delete라고 있죠. 그냥 매일같이 저녁이 되면 그걸 한번 치세요. 오늘도 삭제. 나는 매일 죽는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삭제에요. 삭제. 매일같이 오늘도 아듀! 내일 아침을 기억하지 말고 주께서 삭제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은 지금껏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요령이 아니고 기묘함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이러한 모습의 성도가 된 것도 기묘한 주님의 솜씨의 연장으로서, 나도 납득이 안 되는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난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 아기와 그 아기의 성과가 완성될 때 주어지는 성신, 요새 같으면 뭡니까? 성령이죠.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성령과 성신의 차이라는 것은 성신일 때는 그 주도권이 주의 이름에 있어요. 주의 이름에 있기 때문에 성신은 언제든지 회수가 가능해요. 다시 회수가 가능합니다. 근데 성령께서는 완료가 아니고 이미 완성상태로 주어지기 때문에 성령 받은 것은, 한번 준 것은 이게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취소가 되지 않아요.
그 취소가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증이라고 해요. 보증. 하나님께서 찜했다고 하죠. 보증 다른 말로 하면 인감도장을 확 찍어버린 거예요. 인감도장을 확 찍어가지고 항상 뭘 확인해야 하느냐 하면은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찍어준 인감도장을 늘 확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감도장을 확인하게 되면 나의 동질성은 깨지는 거예요. 나의 동질성은 주님의 동질성으로 교체가 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9장 7절에 보게 되면 뭐가 있습니까?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더 이상 종결되었으니까 계속 가는 겁니다. 그 수준을 유지하면서.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나라가 이미 등장한 이상은 기존의 나라는 나라가 아니죠. 기존의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걸 철석같이 믿은 사람이 책을 쓴 것이 있는데, 이름이 박영선 목사에요.
그 사람이 지은 책이 뭐냐, 이 대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무척 많이 팔렸어요. 많이 팔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전혀 하나님의 열심을 안 믿어요. 제목은 열심인데, 열심을 왜 안 믿느냐 하면은,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이게 빠졌어요. 기묘함이 줄곧 견지가 안 되고 있어요. 기묘함이. 처음에 믿을 때는 기묘하게 믿지만 나머지기 처리는 누가 해야 된다? 우리 합리적인 이성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주장해요.
주님의 열심이 중간에 와가지고 끝났어요. 그다음부터는 주님의 열심+무슨 열심? 나의 열심. 왜 이런 주장을 합니까? 합신 쪽에서 안 쫓겨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 교단에서. 어떻게 주님의 열심+나의 열심이 어떻게 더하기가 돼요? 주님의 열심은 기묘함이고. 나의 열심은 나의 동질성 유지가 관건인데. 나의 나다움이 변경이 안 됐어요. 나는 나의 죽음에 오히려 생각도 없어요. 나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주님의 일을 협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플러스(+)는 성립이 되지 않는 플러스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히스기야를 메시야로 삼죠.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죄의 한계를 몰라요. 자기 죄의 한계를. 그 사람은 자기가 주가 되어 있고 주님을 시다바리로 여기는 겁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성경적 근거가 없으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지옥은 왜 만들어놨습니까? 차라리 여호와증인에나 가라고 하지. 거기서 그 소리 많이 하거든요. 하나님은 자비롭다. 여호와는 자비롭다. 따라서 지옥도 없다.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봐주기지. 이러거든요. 그렇다면 니가 하나님 만들어라.
우상을 누가 만듭니까? 이사야에 보면 우상을 인간이 만들어요. 그렇다면 우상이 헛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상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그 인간이 헛되죠. 그러면 우리는 또 반박하기를 저 우상 섬기지 않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잖아요. 그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요. 무슨 뜻인지 모르죠. 요새 때리는 시어머니 아니죠. 요새 시어머니 주의해야 돼요. 비밀번호 알려고 하는 것 주의해야 됩니다. 잘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의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는 겁니다. 내 구원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용납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 안 돼요. 뭐라고 해야 하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못 놓고 내 가치를 못 놓겠다.”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를 해줘야 해야 돼요. 성도라면. 동의를 해주고, “그래서 주께서 이런 인간을 구원해줬다.” 이래야 돼요.
나는 나를 포기한 대가로 구원받았다. 자기를 부인한 대가로 구원받았다. 이거는 하나의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종의 구원의 전략이에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끝까지 가야 돼요. 주께 과연 헛되구나!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끝까지 가야 돼요. 헛되니까 헛된 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우상이니까 우상 짓을 해야 됩니다. 우상 짓을 하면서 내가 우상인 것을 계속 자각할 때에 비로소 주님의 가치가 드높여지는 겁니다. 지금 이상한 논리가 아니에요. 이상한 논리 아닙니다. 합당한 논리에요. 중간에 자기 자신이 정신 차려서 정신을 바꿔버리면, 그거는 자기가 이미 예상한 건데, 그러한 자기가 예상한 것은 하나님의 기묘하심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자, 이사야 44장을 한번 봅시다. 18절에 보게 되면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우상이죠. 그렇다면 이사야 45장 15절 말씀을 봅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구원자가 어떻다고요? 숨어있어요. 왜 숨습니까? 구원자가 왜 숨죠? 나타나가지고 뭐 잔소리 좀 해서 날 믿으라고 하면 안 됩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일하실 때 어떻게 한다고 했죠? 들리지도 않고 조용하게 일한다고 했죠. 북적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왜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사람이기를 왜 자처합니까? 왜 그래야 되죠? 이미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기능은 필히 무엇을 추구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우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우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짓이 우상이라는 그 기준점은, 그 관점은, 우리가 우상이라고 결론내리면 안 돼요. 그것조차도 우상이에요. 그것조차도. 나는 힘없고 어렵고 매 맞은 그런 메시야를 믿겠다. 그게 우상이에요. 그게 우상이라고요. 십자가 달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다. 나 믿습니다. 그게 우상이라고요. 그게. 그게 우상이에요. 우리는 이런 식은 없습니다.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성경보고 코스프레 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성경에 보니까 정말 참, 어린애같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나 이제 응애~ 응애~ 할 거야. 엄마, 젖 줘! 할 거야.” 그런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구원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어떤 성경을 참조해도 우리한테는 일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사세요. 그래서 구원이 안 되면 걱정입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게. 그렇게 답답하면 예수라는 우상을 믿든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상을 섬기세요. 그게 마음이 편하면. 이거 섬겨서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출발점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의 동질성 유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은 우선순위가 나의 동질성에 악센트가 가있지, 이거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에이, 다 왔는데...,’ 다 와도 소용이 없어요. 어차피 모르는 사람은 신천지가 가까이와도 나가는 사람은 나가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즐거우냐? 아니면 고민거리냐? 에이씨, 그럼 나 구원은 어떻게 돼? 이거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즐거우냐 하는 것은 웬 떡이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을 통해서 이게 뭐냐 하면은 나는 이제 미쳐 돌아버려도 괜찮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자유 아닙니까? 나는 미친놈이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그 미친 사람 중에 하나가 스데반집사고 사도바울이에요. 완전 미쳤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 목회를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사람 끌어 모으는데 관심도 없어요. 실컷 모아놓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이런 소리를 해가지고 있는 교인들, 아까운 교인들, 돈 되는 교인들 다 보내버리고. 그래도 뭐 나 괜찮아. 영생 받을 자만 받겠지. 배짱인지 똥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고.
왜냐하면 숨어있다는 것은 나타나도 숨어있는 식이 되어야 해요. 나타나도. 눈에 뻔히 보면서도 이거는 숨어있는 양식으로서 주께서는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끝까지 뭐냐 하면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뭐가 스르르 하고 비행기에서 트랩(배나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배의 옆이나 비행기의 출입구에 대는 사다리)나오죠. 트랩 나오듯이 주님 쪽에서 나왔을 때에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제 갈 길로 갔거늘”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을 찾으려고 애쓴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그냥 뭘 해도 제 갈 길로 갔거늘. 십자가 믿겠다고 설치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는 제 갈 길이에요. 내가 내 구원받고자 하는 몸부림에,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아요. 코스프레 하세요. 해놓고 따로 그게 우리의 한계임을 자인하면 되는 거예요. “주여, 우리가 하는 솜씨는 기껏 이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어찌 나 같은 코스프레나 하는 이런 인간을 구원했습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그러한 개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너도나도 다 안다는 이사야 53장을 한번 봅시다. 너무 알아서 탈이에요. 너도나도.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벌써부터 여기에 함정이 나오죠. 아까 배웠던 거, 여기 우리는 있다, 없다? 없는 우리에요. 없는 우리. 우리라는 것은 없어요. 지금 이사야 53장을 그 당시에 누가 알겠어요? 유대인들이 알겠죠. 아마 달달 외울 거예요. 여기에 맞춤 메시야가 온다고 그들은 학수고대했을 겁니다. 그때 우리라고 할 때 자동적으로 여기에 누가 포함이 된다? 본인들이 포함이 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를 유발시키는 주님 자체가 그들에게 버림받았는데요. 주님이 떠나버리면 뭐도 같이 없어진다? 우리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일단 떠나셔야 돼요. 일단 베드로하고 갈라서야 됩니다. 어떤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있어야 돼요. 천당지옥이 그냥 갈라섭니까? 영원히 건너갈 수 없는 계곡이잖아요. 그것을 이 지상에서 우리 자신이 체험해야 돼요. 내 쪽에서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해도 건널 갈 수 없는 계곡이 놓여있다. 자, 이 계곡을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거냐는 우리의 담당이 아니죠.
주께서 건너오면서 이런 계곡이 있었는데 너는 못 건너간 것이 분명했고 내가 건너와서 너에게 트랩을 딱 놓았다 이 말이죠. 내 쪽에서 내민 카드에요. 주님 쪽에서 사랑으로 내민 카드는 일체 안 받습니다. 협조를 요구하지 않아요. 수고로움과 애씀을 바라지를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요소도 안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규정하고 오시기 때문에. 죄인으로 규정하고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뭐 껍죽대고 들락대는 그 자체가, 그 트릭(속이는 것)앞에서는 전부다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봐라. 이거 봐라 죄 짓는 것 봐라. 십일조 하는 죄 봐라. 웃기지도 않아. 전도하는 죄 봐라.”
뭐든지 죄가 되는, 그럴 때 우리는 뭐하냐? 즐거우냐? 오늘 제목은 즐거우냐? 입니다. 내가 하는 선교와 내 노력이 죄로 드러날 때에 그게 무척이나 즐거우냐? 아니면 아, 이게 죄라면 그다음에는 완벽을 더 기할까? 이게 고민거리가 되세요? 완벽을 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왜 네가 내 공로를 가려버리느냐? 채찍에 니가 맞았느냐? 묻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맞지요, 해서 옛날 고대 채찍하나 만들어가지고 이리로도 한번 치고 저리로도 한번 치고. 지금도 인도에서 많이 하는 겁니다. 인도의 도사들은 길에 가다가 심심하면 한번씩 치고. 또 파리 몇 마리 날려 보내는, 후려치는 용도로 한번 치고. 나는 부족하다, 나는 부족하다, 부족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부족해서 지옥 가는 겁니다.
그냥 있는 자리가 주께서 허락한 자리에요. 그냥 있는 자리가. 지금 집사님 앞에 사과가 놓여있거든요. 그 자리가 주께서 허락한 자리에요. 모든 것이 주께서 허락한 자리에요. 그 자리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제 갈 길로 갔다는 말씀을 현실화시키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우리는 내 갈 길로 갔다는 것을 여과 없이, 그냥 나보고 하는 이야기라고 감사함을, 고마움을 가지고 그냥 받아들이시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을 취사선택해서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성경말씀도 거기에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좋은 역할은 아닙니다. 좋은 역할은 아니에요. 허장강, 독고성 그런 역할이에요. 사기꾼, 우상숭배자, 그런 역할이에요. 왜? 그게 제 갈 길이니까. 자기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자리니까. 나쁜 짓이라고 해가지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을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마세요. 뭐가 나쁜 일이라 하면은, 나는 나쁜 짓 한 적이 없다는 그게 가장 나쁜 짓이에요. 가장 나쁜 짓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천하에 나쁜 놈이죠. 이미 하나님이 나쁘다고 규정을 했는데, 나, 그 규정을 기분 나빠서 못 받아들이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자, 그 다음에 5절을 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없고,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새로운 자리를 성령께서 마련해주시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의 네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통보해주게 되면 우리는 고맙고 감사할 뿐이죠. “아, 내 자리가 이미 여기에 마련되어 있구나!” 말씀 안에 우리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그 마련된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은 주님께 채찍의 의미를 마음껏 보여주는 우리 자리.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채찍 맞았습니다.” 덕분에 누가 나았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죠.
이사야 40장하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6절부터 보게 되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주님이 적극적이죠. 어떤 적극적이냐, 전부다 말라비틀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나팔꽃은 언제 피고 언제 집니까?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죠. 이거는 어디 생물도감에 나온 것이 아니고, ‘립스틱 짙게 마르고’라는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나팔꽃처럼 짧은 사랑아~~ 잊어주리라~ 하잖아요. 임주리가.
그렇다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하나의 사인, 시그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를 묘사한다? 자연은 누구 편에 서서? 나팔꽃은 하나님 편에 서서 누구 칭찬하라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 자연의 일부다. 이 말이죠. 자연의 일부. 자연과 동시에 같이 피고 같이 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 때문에.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오늘도 쉬고서 푹 주무십시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