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이사야 강해: 문서선지자 (강의:이근호 목사)
늘 챙겨주시던 주님, 이제 말씀으로 우리에게 깊이 주시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말씀 외에 아무것도 이 시간에 들어오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사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1장부터 보게 되면 주님의 욕설이 난무합니다. 이사야 1장을 보시고 자기 백성을 닦달내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사야를 통해서 제공되는데 이런 내용이 하나님의 글로 돼있습니다. 글로 돼있는 이 책을 ‘문서선지자’라고 해요. 선지자 앞에 문서란 말이 붙었다는 것은 문서 없는 선지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게 시대적으로 먼저 있는데 그게 기적선지자.
기적선지자와 문서선지자의 차이는, 기적선지자는 문서를 남기지 않는 겁니다. 기적은 그냥 혜택주는 거예요. 또는 난제해결,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고, 고맙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문서선지자는 기적의 폭이, 인간들이 어려울 때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다는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시기는 주는데 이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성질의 기적을 줘놓고, 우리 보기에는 전혀 기적이 아니고요. 책망으로 이어지는데 이걸 기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1장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렇게 돼있지요. 이걸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뭘 느끼느냐 하면, 과잉 닦달하시는 느낌이 들거든요. 좀 주님의 지적이 억지스럽다는 것, 과잉 지적이 계속 이어질 때 이것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걸 지적하게 되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가 가능한데 overflow, 너무 과잉적으로 지적하게 되면, 이것은 자기 성질 푸는 것인지 뭔가 개선을 요구하는 것인지 잘 구분이 안 돼요.
밖에 나가서 엄마가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집에 와보니까 딸이 청소도 안 하고 자기 침대도 안 치우고 옷가지들이 널브러져있다. 그러면 좋게 이야기해서, “정리 좀 해라. 옷 치워라.” 이러면 될 텐데 “너, 나하고 죽자.” 이렇게 나오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엄마, 왜 이래? 정신 차려. 이건 아니잖아. 왜 오버하고 있어?” 하고 말릴 겁니다. 어떤 개선의 여지를 찾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화풀이하는 느낌이 강렬하지요.
그래서 문서선지자에서 책망을 하고 지적을 할 때는 제대로 고치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지적해버려요. 네 힘으로 네 선에서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있는 그 선을 이미 넘어버린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너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활동범주를 인간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넘어서버린 거예요.
뭐가 풍부하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내용, 그전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확장시켜버립니다. 넘어서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맞춰 살려는 그 속도가 하나님이 늘어나게 하는 범주를 못 따라와요.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지적을 하면서 그 지적과 책망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나서서 그걸 처리하겠다는 의시가 강렬합니다.
이것은, “내 시키는 대로 왜 안 했어? 침대 좀 치우고 옷 치워야지.” 이게 아니고 늦게 와서 침대 치우지 않은 애에게, “딸, 이리와 봐. 이번에 대출 5억 못 받았잖아. 너, 왜 대출 안 받아 와?” 이건 딸에게 물을 이야기가 아닌데 갑자기 사업하는데 대출 5억 못 받았다고 닦달 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엄마, 그건 내 할 일 아니잖아.” “네 할 일 아니더라도 가족이니까 똑바로 알아들어. 앞으로 돈 5억 벌고.” 이런 식으로 괜한 억지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특징이라 했습니까? 이게 문서선지자에요. 문서선지자라는 것은 기적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아는 내에서 기적을 제시해서, “아이고, 놀라워라. 주께서 이렇게 큰 사랑을!” 이런 선이 아니고 인간이 예상도 못한 일까지 먼저 앞장서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을 벌이고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책임이 너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책임으로 이걸 인수인계 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사야를 통해서 성도들이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어떻게 개입하느냐? 이게 주 주제가 돼요. 하나님은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나님은 앞으로 역사를 인간이 예측 못하는 쪽으로 이끌어나가시는가? 인간의 능력은 빠이빠이에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그러한 범위를 넘어섰어요.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 지키면 복 주고 안 지키면 어긴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문서선지자 쪽에서 와버리면 이것은, 너희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식이에요. 너희들에게 책임을 묻는 내가 나쁘지.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가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유지에 이스라엘을 견지하고 지탱하고 유지하는데 하나님 자신도 책임지지 여기에 가담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제대로 운영 못한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 책임지라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책임질 용의가 돼있는 겁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인간의 개인적 입장에서 만약에 사는 게 힘들다면(이스라엘 경우에).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해서 저주라는 징벌을 받았기 때문에 힘들다. 따라서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힘듦을 없애주겠지, 라고 기대라도 할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론 이렇게 되는데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기적선지자 쪽에 속하는 거예요.
문서선지자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가 하는 계획을 알기는 알아?” “몰라.”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장차 하나님이 계획한 이스라엘 쪽으로 가려면 너희들의 노력, 레벨, 수위를 넘어서서 직접 하나님이 개입해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앞으로 완성의 이스라엘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앞에 붙는 게 문서지요. 이 문서선지자라는 것은 무슨 내용이 포함되느냐 하면, 인간은 역시! 그 뒤에 나오는 건 뻔하지요. 인간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존재다. 그걸 확정하는 겁니다. 확정이 뭐냐 하면, 문서에요. 두고두고 확인해봐라. 글자로 돼있으니까.
역시 인간은 잠재적인 어떤 능력을 동원해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해내는 자질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겠다는 말은, 인간이 하는 모든 솜씨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은 홀로 이스라엘을 이끄는데 얼마나 성공적으로 성사시키는지 너희 두 눈으로 똑바로 보라. 그게 바로 기적이다.
자, 기적에서 어떤 요소가 빠지느냐 하면, 우리가 아쉬운 것을 주께서 채워주고 도와준다는 기적이라는 관점에서 무엇이 벗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 예상치도 못한 것 또는 꿍하고 하나님 혼자만 알고 있는 그 내용을 하나님 스스로 이뤄나가는 거죠. 이걸 기적으로 본다면, 이 기적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적과 우리가 예측한 거예요, 동떨어진 거예요? 동떨어진 거죠.
동떨어지면서 무엇도 떨어지느냐 하면, 나의 구원욕구. 이것도 같이 떨어져버려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를 천국 보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이것도 같이 떨어져버리죠. 은근히 하나님 이용해서 천당 가려는 모든 나의 계획도 그게 나의 기적이라면, 이 기적에 어울릴 수 없어서 떨어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왜 인간이 알고 있는 기적이 떨어져나가야 되는가?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간단하지, 뭐. 자기 일에 열중한다. 이것 외에 뭐 있습니까? 뭐 있어요? 이게 전부잖아요. 그래, 맞아. 너는 어디에 열중한다? 무슨 일에? 자기 일에 열중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 열중했다. 열중의 끝은 뭐였습니까? 열중의 끝은 늙어죽는 거지요. 얼마나 인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자기에게 열중했어요? 집중했습니까? 집중 또 집중, 열중, 열중. 그것은 무조건 나는 내 일에 책임져야 돼. 끝은 뭡니까? 죽음. 열중했는데 죽음이다. 누구 일에? 나의 일에 열중했는데 죽음이라면, 나의 열중했으니까 열심히 하는 에너지를 어디에 퍼부었습니까? 나의 일에 집어넣었지요.
그러면 죽음은 애초부터 어디에 있었다? 내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내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살려고 열중했지요. 살려고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한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했습니까? 죽음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죽어야 될 자가 과연 하나님의 이스라엘 건설에 보탬이 되겠느냐? 너희들이 생각해봐라.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안 되지요. 보탬이 될 리가 없지요. 죽어가는 인간이 무슨 보탬이 되겠어요. 기껏 해봐야 저지레밖에 안 되는데.
이스라엘이 뭡니까? 인간의 집합이잖아요. 모든 인간이 죽고자 시도한다면 이스라엘 자체가 뭐로 끝나요? 죽음의 나라로 죽음의 민족으로 끝나잖아요. 무슨 이스라엘을 건집니까? 이스라엘을 침몰시키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나라를 어디에 입각해서? 언약에 입각해서 또는 약속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을 견지한다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견지한다면, 인간이 여기에서 “야 좋겠다. 우린 이스라엘이다.”라고 해서 참여해보니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어떠한 위치에 있어요? 기껏해야 죽음으로 끝나고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는 요인밖에 안 된다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 앞에서 대비/대조되면서 만나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을 알건마는 왜 주인을 모르느냐, 라고 닦달 내봤자 이스라엘은 주인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지요. 자기 일에 열중하는데. 자기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 무슨 주인을 알아요. 본인이 주인인데요, 본인이.
본인이 주인 아닙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누굴 위해서 하는 겁니까? 날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잖아요. 죽는다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뭐냐? 내 일에 열중하는 거예요, 내 일에. 왜 사람들은 거기에 의미를 두는가? 내 일이기 때문에 의미를 두는 거예요.
여기까지 여러분들의 아신다 치고 다시 한 번 기적선지자 봅시다. 기적선지자에 대표적인 두 사람이 나오지요. 엘리야와 엘리사. 이 사람들은 어떤 글을 남기지 않았어요. 그때그때마다 도와줬습니다. 사르밧 과부 집에 가서 도와주고, 선지자 생도들이 물이 좋지 못하다하니까 소금 던져서 물을 고치고 도끼도 떠오르게 했다고 할 때
그게 7월 25일에 선지가 와서 쓴 물을 단물로 바꿨다고 합시다. 지금 7월 28일이라면 7월 25일은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였습니까? 7월 28일 입장에선 과거지요. 기적선지자라는 것은 아무리 혜택을 줘도 이건 과거기 때문에 소실돼요. 사라집니다. “참 좋았어, 그분. 그분의 혜택 많이 입었어.” 끝나는 거예요. 왜? 과거니까.
이중에서 혹시 이순신 장군 혜택보신 분 계십니까? 이순신 장군 혜택을 봤지요. 안 그러면 일본에 점령당했을 테니까. 지금 수출규제보다 그때 완전히 점령당했으면 같이 선진국 됐을 텐데 괜히 그때 이순신 장군 나와서 독립해서. 지금 한 나라 돼서 다 일본 천황만세 할 텐데. 친일적인 발언입니다만.
과거에 아무리 좋은 혜택을 입었지만 돌아서면 인간은 어디에 열중한다? 지금 있는 나의 일에 열중해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고맙다고 해서 당신한테 열중할 의사는 없습니다. 고맙기는 하거든요. 어머니, 이렇게 키워주시고 공부시켜서 시집 잘 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가정을 부모한테 맡기진 않겠습니다. 우리 집 살림살이를. 그냥 손자나 봐주시고 삼십 만원 받아주시고. 이런 식으로.
그것뿐이지 고마운 줄 알지만 나는 나에게 충성하기 바빠요. 나 말고 다른데 충성은 못합니다. 이게 기적선지자에요. 참 고맙지만 혜택은 입었지만 혜택이 오래 가질 않습니다. 혜택 덕문에 지금 내가 살았으니까 감사하기는 하다 이 말이죠.
하지만 문서란 것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강의했지만 문서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인간형을 떼어내는 잘라내는 거예요. 문서란 고발용이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혜택을 줬건만 나한테 고맙다 할 일은 없다, 라고 하는 게 문서선지자에요. 아니요. 고맙다고 하겠습니다.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알듯이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나선다면
문서선지자 하는 말이, “아이고 잘하겠다. 어이구, 니나 잘하세요. 네가 그럴 인간 같으면 하나님께서 계시하지도 않아. 제발 니 주제파악이나 해라. 너는 백날 줘도 절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위인들이 아니야. 주제파악도 못하고, 이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가 정신 차려서 이스라엘답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은 네 몫이 아니야 내 몫이지. 너는 저지레만 했을 뿐이고 너는 훼방질만 할 거란 말이죠.
자, 이런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어떤 식으로 차이 나는지 서서히 감오십니까? 성경을 신약에 살면서 구약 식으로 보지 맙시다. 하나님은 내 실력과 솜씨를 보시려고 말씀 줬구나. 그런 식으로 착각마세요. 이건 이미 구약의 테스트, 시험들을 다 거친 거예요. 인간에 백날 말씀 줘야 못 지킨다는 것은 구약을 통해서 이미 다 들통 난 사건인데. 들통 났거든요.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필요해서 광고를 냈더니 지원자가 있어요. 다섯 명이 왔는데 첫 번째 지원한 사람이 고유정이라면 뽑겠습니까? 애를 압박해서 죽여 버리는데, 안 뽑지요. 고유정이 왜 어린이집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느냐 하면, 고유정 이 사람이 남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느냐 하면, 나는 나의 일에 열중한다는 것에 대표자가 고유정이거든요.
나는 나의 일에, 내가 기뻐하는 일에, 내 욕망에 만족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이걸 아주 제대로 보여줬잖아요. 다른 사람은 어떤 체면 같은 게 있는데 이 사람은 용감해. 체면도 없어. 새로운 남편 만나서 사는데 옛날 남편이 방해된다고 죽였잖아요. 그것도 힘으로 안 되니까 비겁하게 약 먹여서. 얼마나 비겁해요. 힘으론 안 되거든. 어린이집의 교사 되겠어요? 안 되겠지요.
그러면 2번, 예를 들어서 김숙자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 사람은 고유정보단 낫다 하지만 이게 또 언제 술 먹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3번, 4번, 5번, 백 명이 와도 어린이집은 뭐가 안 된다? 이스라엘이 안 된다. 이스라엘이 될 수 없어요. 백 명이 와도. 천 명이 와도 안 돼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일에 손톱만큼도 기여할 리가 없습니다. 기여분이 없어요. 전혀 기여할 게 없습니다. 이게 신약의 복음이에요. 신약의 복음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죠. 철저하게 구약의 검증을 거친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내 일에 열중한 게 뭐가 문제고 그게 잘못이란 말인가? 인간이 먼저 자기부터 해야지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간섭하면 안 되잖아요. 내 일에 열심히 한 게 뭐가 나쁘냐고 하는데 인간이 자기 맡은 일에 열중하게 되면 의미가 발생된다고요. 의미가 발생되면 진짜 의미인 주님의 문서 내용이 인간이 만든 의미에 의해서 가려져요.
전라북도에 비가 많이 왔다. 무슨 의미냐? 그것은 장마철이라서 비 옵니다. 땡. 땡인 거예요. 전국에 비가 많이 왔다. 장마철이라서 온다. 이것은 뭐냐? 기껏 인간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내놓은 의미가 그거에요. 사람은 왜 사는가? 살고 싶어서 살지요.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니까. 니체. 땡. 그게 지가 아는 전부에요. 다른 사람 것 컨닝하고 들었던 것, 배운 것 모아서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돼요.
인간이 내는 행위에서 나온 어떤 의미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의 의미까지 연결이 될 수 없습니다. 연결점이 없어요.
여러분 실력 있다 치고, 의미가 뭐냐? 인간이 사는 보람 또는 가치, 의로움, 정당함, 이건 뭐냐 하면, 반드시 누가 있어요. 의미가 보람이 되려면 의미가 여기까지라고 하는 스톱의 장치가 있어요. 여기서 멈춰! 멈추는 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나’가 있어요. 모든 의미는 나한테 의미가 올 때 비로소 의미는 의미의 순환이 끝납니다. 의미의 연쇄사슬은 그걸로 끝나요. 나한테 의미가 있어요. 너 말고 나한테 의미가 있다고요.
비가 오든 뭐가 오든 나와 무슨 관련성이 있어야 그게 나한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일에 열중한다는 것은 그냥 열중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의미는 나한테 와서 뭐가 되느냐 하면, 마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이게 전부에요. 그런데 여기다가 하나님이 욕설을 해버린다. 어쩌라고?
늦게 일어나서 자기 침대를 안 치우고 옷을 더럽혔다. 그러면 엄마가 납득되도록 이야기해야지요. “네가 옷을 치워야 운신하기도 좋고 깨끗하면 너도 좋잖아.” 이것은 충분히 그 딸애가 할 수 있는 거예요. 아이씨, 하면서 일어나서 치울 수 있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침대를 안 치우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 집에 부도났어.” 이러면 그것은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거란 말이죠. 대출 5억 받는 것과 내 옷 치우는 것과 무슨 관련성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네 살 아이에게 다음 중에 화가 나는 경우는? 첫 번째, 아이스크림 먹게 해주세요. 엄마가 거절했을 때 ①번이 화가 납니까, 아니면 일본의 수출규제 때문에 화가 납니까? 아이스크림 못 먹었다고 삐져서 어제도 화내고 아이스크림 달라고 하는데. 이건 왜냐 하면, 아이가 있는 의미의 장(field)이 자기가 알고 있는 그동안 주고받고, 주고받고 순환했던 확장된 범위가 요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아이스크림 맛있다. 고 정도만 알기 때문에 일본 수출규제는 네 살 먹은 아이에겐 의미 없다는 거예요.
다섯 살 되면 더 나가겠지요. 일곱 살 돼서 영재발굴단쯤 되면 안드로메다가 어떻고, 천문학이 어떻고. 그런 애는 특수한 아이고. 도대체 여러분, 나이가 얼마나 돼야 철이 듭니까? 범위를 좁혀 보면 한 칠십, 팔십, 구십, 도대체 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하나님이 원하는 의미에 도달하겠어요? 죽어도 안 돼요. 죽어도 안 된다니까. 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어요? 전부 다 자기 위주인데 무슨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요.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한국교회가. 전부 다 자기가 기껏 아는 자기 소꿉놀이 펼쳐놓고 거기서 최선을 다했다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요? 혼자 눈물 찔찔 흘리고 주여 나의 손으로~ 이러면서, 아니면 실로암~ 왼발, 왼발, 왼발. 실로암 노래 부르고 엉엉 울면서 연무대에서. 젊은 아들 밴드로 가스펠송 부르는 것 보세요. 지 마음대로 은혜 마구 받았어요.
은혜를 받았는데 전부 다 한풀이, 자기 소원은 이런데 현실은 안 받쳐주는 한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문서선지자의 의미를 모르고 기적선지자에 매료됐어요. 설마 바르게 사는데 내 뜻대로 해주겠지. 바른 게 뭔데? 아이스크림 사주는 게 바른 겁니까? 지는 바른 거야. 참 좋은 엄마.
둘이 연애하면서 남녀가 순수해서 돈 없다고 민들레 하얀 꽃으로 반지 만들어서 꽃반지를 끼워주면 여자는 그것 하나로 감동받아서 세상에 아직도 이런 순수한 로맨티스트가 있구나. 낭만적인 인간이 있구나. 참 고맙다. 정말 참 순수하군요. 이런 남자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거기까진 좋아요. 아직 연애할 때니까. 그런데 결혼식장에서도 꽃반지로 한다면 이건 너무 이상한 거죠.
우리 아는 집사님이 아파트 사는데 위층에서 쿵쿵거린답니다. 그 집사님 평소에 얼마나 착한 집사님이십니까. 말도 함부로 안 하고 좋게 계시던 분이 2층 찾아가서, “아주머니, 애들 키우는데 그럴 수도 있지. 괜찮습니다.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선물도 받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 장난이 아닙니다. 스카이콩콩으로 쿵쿵거리고.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하니까 그 싸가지 없는 아버지가 하는 말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한껏 참고 있는 것도 모르고 괜찮다고 했다고 아버지도 같이 뛰고 난리야.
사람은 자기 자신의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우깁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문서선지자를 통해서 문서선지자는 이사야뿐만 아니고 예레미야, 에스겔, 하여튼 성경에 문서로 작성된 호세아, 아모스 다 문서선지자입니다. 문서선지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을 배제하되 왜 인간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지 그 내력이 그 안에 같이 담겨 있어요. 그 문서선지자를 경유해야 마태 나오고 마가 나오는 거예요. 누가복음 나오고 요한복음 나오는 겁니다.
주제파악도 안 된 채 마태복음 족보 너무 지겹다. 넘어가자. 그냥 마태복음, 마가복음 지키려하다 보니까 CCC 같은 경우에는 마태복음 10장에 네가 어딜 갈 때는 지팡이만 들고 가고 전대를 가지지 말고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어디 가서 네가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평화를 빌고 빌어먹고. CCC에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거지로 만들어놨어요.
심지어 옛날에 대구 위에 청통면 박사 동네에 박사교회에 있었거든요. 박사교회에 젊은 애들 한 떼거리 온 거예요. 보니까 마태복음 10장을 실천에 옮긴다는 겁니다. 민폐에요, 민폐. 그런 민폐가 어디 있어요. 복음 전할 테니까 밥 주게요. 아이고, 복음 필요 없으니까. 누가 너희를 그렇게 만들어놨느냐고 좀 나무랬지요. 이런 식으로 민폐 끼치지 말라고. 그래도 성경대로 하잖아요. 성경대로 두 벌 옷도 말고. 구약을 거쳐 나와야지. 어디 건방지게 새치기해서 신약을 뚫고 들어오지 말고 구약을 거쳐 와야지, 구약을.
사람들은 구약을 안 거쳐요. 안 거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과거사라는 겁니다. 옛날 이순신 장군이라는 거예요. 지금은 현실성이 없다는 거예요. 옛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고 지금 당장 급한 건 나의 천당이고 나의 구원이니까 목사님, 뭐 하면 천당 갑니까, 라고 단박에 내놓으라는 거예요. 한의원에 가서 무슨 약으로 내 병이 낫느냐고 들이대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무슨 약 먹으면 병이 낫습니까, 그것과 내가 무엇을 하면 천당 갑니까? 그 들이댐이 똑같아요.
사도 바울이 당부했거든요. 이방인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말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같은 인간인데 무슨 이방인이 있고 유대인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나눴잖아요. 나눌 때는 다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 것은 다 개무시 해버리고 때를 쓰는 거예요. 나, 인간입니다. 어쩌라고? 천국 내놓으세요, 이렇게. 아이고, 참. 그럼 다른 가게 가보세요. 다른 가게. 천국 준다는데 믿고 기도하면 구원 준다는 다른 가게 가면 되지 여기서 때를 쓰면 안 되지요.
구약의 문서선지자에서 우리가 구원을 요구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방해자가 되기 때문에 그럽니다. 로마서 5장 10절인가 보면, 이것을 하나님의 원수라 했어요.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고 방해자인 것을 몰라요. 왜냐하면 주님의 의미를 가로채고 중간에 막아버리기 때문에. 내 의미로 종결된 의미로 인하여 정말 주님의 의미를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주님의 의미는 어디서 종결됩니까? 모든 의미는 나에게 일조하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되고 나한테 의미가 있으면 그 의미의 모든 개념은 종결되지만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의미는 어디서 종결됩니까? 누구한테 종결되지요? 예수님에서 종결돼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 이루었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까?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알기는 얼마나 잘 아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성령께서 우리 멱살 쥐고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하면, 우리 의미를 넘어서서 십자가 앞에 가서 네가 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인간인지를 말이 좋아 멱살이지 맥아지지요. 맥아지 쥐고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 현장에서 너는 이런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을 알려줄 때 이걸 기적, 문서선지자에 근거한 기적이에요.
어떻게 내가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의미는 나의 정당성으로 마감되기 때문에 절대로 나는 죄인이 아니고 항상 누가 뭐래도 나는 의인이고 잘난 사람이에요. 그것 때문에 한 평생 버티는 겁니다. 내가 곧 힘들어도 기어이 살아야 될 이유는, 나만 정당하기 때문에 살아야 돼요. 니가 죽든 말든 나만 정당해야 돼.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면서 인간이 기여하는 것과 인간이 기여하지 못하고 방해하는 것을 문서선지자의 기적을 통해서 밝혀줍니다. 그 기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의미가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다는 그 짓거리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노력했던 그 모든 것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행위로 그것이 이어지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이스라엘과 유다나라의 최고지도자를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왕들이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마다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는 질곡으로 빠져갑니다.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꼭 설쳐요. 꼭 선거로 뽑은 지방자치 장 같아. 4년 동안 가만있으면 세금도 남고 괜찮은데 꼭 일을 저지레해. 무슨 박물관 짓는다, 홀 짓는다, 어떤 업적이나 치적을 남기기 위해서 온 국가예산을 써서 내가 군수가 되고 도지사 해서 이만한 성과를 이뤘습니다. 설치면 설칠수록 그 지방자치는 점점 더 낭패에 빠져요. 빚만 늘어나고 것과 똑같은 거죠.
그래서 퇴직하고 난 뒤에 부인들이 남편한테 당부하는 게 있습니다. 논다고 욕은 안 할 테니까 제발 가만이나 있어라. 설치지 말고 가만있어. 아니야. 내가 나이 육십 초반인데 커피점이라도 열어야지. 빵집 열어야지. 했다하면 하는 족족 다 망합니다. 괜히 남아있는 노후자금까지 다 날립니다. 가만있기만 해줘. 밥은 먹여줄게. 저녁에 국수는 먹어주겠는데 제발 나대지만 마라. 티비나 보고 가만있으면 되는데 아니야 내가 안 죽었어. 그 안 죽은 게 문제에요. 좀 죽어줘야 되는데.
이사야가 1장에서 지적하는 내용들은 다시 잘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잘해보자는 그 한계를 넘어서버린 그러한 언약의 내용이 그만큼 넘어서서 확장돼버렸어요.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나설 문제지 니들이 나설 문제는 아니라고 선지자가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 같으면, 예를 들어서 나무가 있다면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를 알기 위해서는 잘라버려라. 그루터기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넘어지게 하는 짓을 인간들이 해온 겁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그루터기 여기서부터 주님께서 일을 새로 개시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호작질했고 인간들이 전부 다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 바닥 위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것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답게 성취해내는 솜씨를 이사야가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쫙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위함이 아니죠. 그러면 인간의 위함이 아니니까 내가 혜택 받기 위한 모든 기대나 또는 욕구는 완전히 비껴가는 겁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할 때 일체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걸 거부해버려요. 해줘봐야 나 잘났다는 그걸로 끝나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무슨 선지자라 했습니까?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기적선지자는 결국 기적선지자의 결과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알아준다. 내가 나에게 열중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도 같이 인정해줬다. 이 시절이 기적선지자라면,
문서선지자는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주께서는 나를 피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계획한 그것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께서 그걸 기적이라고 우리에게 안겨주신다. 과정/공정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피해서 간다는 것이 중요한데 왜 피해서 가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속사정은 이미 다 까발려졌고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해서.
여기 1장 6절 봅시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 이야기 들으면 백성들 어리둥절할 거예요. 내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너무 과도하게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 이 말을 계속 듣게 되면 결국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오기만 남지요.
여기 10절에 보세요. 또 오버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떠냐 하면, 완전히 불바다 된 거예요.
11절에 보면, 그 이유가 뭐냐?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안 받는다고 진즉에 이야기하시지 실컷 받아놓고, 우리 보고 어쩌라고? 갑자기 화가 나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식사를 대접하니까 그 집 가장이 아무소리 안 하고 먹는 거예요. 2019년 1월 1일 평소에 미역국 좋다고 해서 해줬단 말이죠. 잘 먹어요. 그래서 언제까지? 7월 28일까지 해줬어요. 미역국을 7개월 동안 잘 먹었단 말이죠. 잘 먹더니만 그 다음 8월 4일에 엎어버리는 거예요. 네가 미역국에 배불렀고. 그럼 진즉에 그만 먹는다 하지. 아이고, 답답한 양반아. 이제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지. 나도 미역국 끊이는데 귀찮았는데. 말을 하지 왜 가만있느냐.
왜 말을 안 한줄 알아요? 지금 하나님은 인간과 거래하기 싫은 거예요. 미역국 말고 소고기국 끊여라. 이러면 거래가 유지되는 겁니다. 앞으로는 콩나물국, 이러면 거래가 유지되는데 이게 아니에요. 네가 콩나물국 하던 미역국 하던 소고기국 하던 아주 꼴도 보기 싫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네 마음이 문제라는 거예요.
13절에 보면,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를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이제 와서 이야기해요.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아니라면 어쩌라고? 하지 말까요, 그런다고.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15절에 보면,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금요기도는 처음부터 안 받는다고 하든지 기도 시켜놓고,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또 무슨 오버입니까? 손을 씻었잖아요. 무슨 피가 있어요.
죄를 씻는 방법이 다섯 가지 있어요. 옷을 벗는 것과 물로 씻는 것과 피로 뿌리는 것과 또 여러 가지 향을 뿌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을 다 사용했거든요. 그래도 손에 죄에 있다면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는 이야기란 말이죠. 지금 주님께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결별하자고.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 정도는 하지요. 복지대책이 왜 있는데. 전국에 있는 과부 아줌마들 다 모이라 해서 생활대책으로 기술 배우게 하고 취직시켜주고 월 이백만 원씩 주고. 왜 그걸 못합니까? 할 수 있어요. 고아? 고아원 많이 세우면 되잖아요.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하나님께서 하는 일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늘어놓은 게 아니에요. 뭘 해도 이미 나는 내 마음은 네게서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떠났으면 곱게 떠나지 왜 자꾸 시비 거느냐? 시비를 걸어줘야 확장된 언약 완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문서선지자 이사야는 말하는 겁니다. 인간은 손을 댈 수 없어요.
인간의 왕? 왕도 안 돼요. 왕은 가만있으면 되는데 괜히 설쳐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백성을 의식하고 백성의 인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정당지지율 있잖아요. 그걸 의식 안 할 수 없어요. 정당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심지어 가정에 아들 둘, 부모, 네 식구에서 아버지가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 빼놓고 나머지 셋이 얼마나 존경하느냐, 이걸 늘 지지율을 고려해요. 남자들은. 여자는 잔소리해서 지지율 필요 없지만.
여자는 남자가 가장이기 때문에 자꾸 달려들고 쏘고 할퀴고 이러면 돼요. 뭔가 공격의 대상이 있지만 남자는 자기가 어른이라는 하늘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어서 항상 지지율을 생각한다고요. 괜히 이따금 빵 하나 처갓집 치킨 사들고 인기몰이 해보려고 애쓰고 괜히 술 먹고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갑자기 옷 하나 맞춰라. 뭔가 켕기는 게 있어. 켕기는 게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하는 거예요.
소위 내가 아직도 이 가정의 가장으로서 너희들은 나를 쳐다보잖아. 그에 걸 맞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 되리라. 이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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