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이사야 강해: 공식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억지처럼 느껴지는 모든 내용 이사야를 보면서 신약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태, 마가, 누가 바로 치고 들어가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사야를 보면서도 기적선지자 엘리야, 엘리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갈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떠미는 그 이유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떠미는 이유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거에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연결점도 두지 않겠다. 너와 손잡고 일하지 않겠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겁니다. 연결점을 두지 않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언약을 너희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연결점을 두지 않겠다면 문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으니까 하늘과 땅이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라는 생각을 자연적으로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땅에 있는 인간들 지긋지긋해. 상대 안 하겠어. 난 너와 같이 일 안 해, 라고 연결점을 두지 않는 것은 땅을 포기한다는 그런 의미일까요, 라고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뜻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연결 끊어진 이 빈자리에 다른 방식을 투입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제대로 보는 사람은 뭐냐? 1.연결점이 끊어졌다. 끊어진 자리가 빈자리 되겠지요. 그 빈자리에 뭐가 들어가는지 주목해보면 되지요.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내 자리라고 여겼던 그 빈자리에 누가 나를 대신해서 투입되어 들어가느냐는 겁니다.
그럼 나 말고 다른 분이 하늘과 땅의 연결점에 투입된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모독이냐 하면, 나에 대한 전면적인 모독이고 모욕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답지도 않은 게 뭘 안다고 설치느냐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렇게 되거든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모욕 받을 때 아닙니까. 요새 목욕 값 얼마입니까? 오천 원, 칠천 원? 전면적인 모욕감을 주는 거예요.
그럼 사람이 이런 모욕감을 받고 가만있겠습니까, 반발하겠습니까? 자연적으로 강력한 반발이 있겠지요. 이 반발을 주께선 보고 싶은 겁니다. 이 전면적인 모욕감에 누가 나서느냐 하면, 바로 이사야 선지자. 문서선지자의 특징은 바로 고난입니다. 핍박입니다. 왜냐하면 연결점은 두지 않는다는 것은 대화가 소통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서로 생각이 사맞지 아니할새. 서로 대화가 안 통하는 거예요. 통하질 않아요.
이사야가 하는 말이 저쪽에서 거부당하고 저쪽에서 하는 것은 이사야가 거부해버리고. 그래야 연결점이 안 되니까 서로 소통되질 않아요. 니는 니 소리하고 나는 내 소리하는 거예요. 하나의 이스라엘을 두고 두 개의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이 발생되는 겁니다. 완전히 연결점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인간에 대한 모욕이란 혈통에 대한 모욕이죠. 혈통에 대한 무시.
혈통에 대한 무시에 대해서 이사야가 외친 것은 뭐냐 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리라. 이런 모욕이 없어요. 처녀가 왜 아기를 낳습니까?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많다는데 처녀가 애를 낳아요. 모든 혈통에 대한 모독 아닙니까? 애는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남자가 있어야 되고 그 남자의 배우자 아내가 있어야 아기를 낳게 돼있어요.
그런데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말은 기존의 남자를 모두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한 자로 거기서 분리해버리겠다. 그러면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모든 여자들도 그 남자와 함께 동일한 처우를 받는 거예요. 그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결혼한 여자 십오만 이천 명은 무슨 가능성이 있느냐 하면, 전부 다 아기 낳을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가능성, 잠재성 그것과 그 맞은편에 처자 하나 달랑 두었을 때 그것은 무엇과 무엇의 대결이냐 하면, 인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과의 대결입니다. 너희들의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는 뭐냐 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자식이 생긴다는 그것이 인식의 한계라는 겁니다.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미친 거예요. 남자 없이 무슨 애를 낳아. 처녀가 무슨 아기를 낳느냐. 이것은 인간 전체에 대한 고발이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들 자신에 문제가 있다는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은 너희들 한계 안에서 너희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이에요. 그걸 이사야에서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제조한 하나님이에요. 제조할 때 그냥 제조하는 게 아니죠. 우리 이스라엘 잘 되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우상이지. 이스라엘을 잘 되게 해달라는 것, 내가 속한 나라가 잘 되게 해달라는 것. 이걸 오늘날 번역하면 우리 교회 잘 되게 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 십자가마을 잘 되게 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또 한 사람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입니까? 아는 사람 아니지요. 그런데 옆에 지나가던 노숙자가, “너희들끼리 그러면 돼?” 노숙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마치 서로 아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각자각자 서 있더라도 한 통속으로 묶어버립니다. 너희들은 잘못이다. 왜? 처녀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이런 억지 고발이 어디 있어요. 이미 태어난 걸 어쩌란 말입니까. 무를 수도 없고요. 너는 태어난 걸 못 무른다. 하지만 그거는 각오해라.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 못 가는 그건 각오해야 돼. 이거는 사람을 궁지에 몰아도 이렇게 모는 법은 없어요. 복음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때는 우리가 한 마디로 이야기해야 돼요. “거짓말 좀 하지 마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백 프로 거짓말이에요. 왜? 성경에 나와 있는 문자를 억지로 자기한테 끌어당기는데 급급한 거예요. 성경에 좋은 것 있으면 자기 것인 줄 알고 끌어당기는 겁니다. 성경말씀과 우리가 관련성이 없어요. 아무리 좋은 성경말씀도 내가 끌어당길 수 있는 그런 대상적인 말씀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어요.
모든 성경 구절은 우리를 비껴갑니다. 우리와 관련 없습니다. 가만있어. 퇴직하고 가만있어. 설치지 말고. 가만있으면 돼요. 그러나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하고 뭐하게 돼있어요? 가만있고 싶어도 그렇게 못해요. 뭐 때문에?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반발이에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반발이 나옵니다. 심지어 두 살, 세 살, 네 살, 그리고 아무리 나이 많아도 성질은 다르지만 반발은 동일해요. 어릴 때는 울고 좀 크면 가출하고 나이 사십 넘으면 전화 안 하고. 이런 것.
어쨌든 형태를 다르지만 반발은 계속 우리 속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겁니다. 반발은 반발대로 끄집어내면서 그 반발은 누구에 대한 반발이냐 하면, 바로 메시아에 대한 반발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속에 포함돼있어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입니다. 너희들의 어떤 발발도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반발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신약에 와서 증명해내고 있지요.
그 증명 이전에 하나님께서 칠팔백 년 전에 이사야, 미가 등의 선지자를 통해서 그 당시 선지자를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고 선지자를 비난하는 그 반발, 거기서 우리는 뭘 아느냐? 도대체 선지자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들은 영적인 반발을 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냥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인구 수 하나 늘어날 뿐이죠. 그게 아니에요. 처녀가 낳은 아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유일한 자격자란 말입니다. 그러면 기존의 무엇을 모독하는 거예요? 기존의 이스라엘 왕 자체를 부정하거든요. 왕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기존의 왕을 왕이라고 인정했던 모든 백성에 대해 일괄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너희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엉뚱한 혼란에 빠지니까 악신에 빠지니까 왕도 아닌 걸 왕으로 취급했구나. 같이 망해라, 이놈들아. 그래서 다 같이 망해버려요. 바벨론으로 추방당함으로 다 망해버려요. 그리고 바벨론에 잡혀가기 전에 있는 재산이란 재산은 앗수르한테 다 빼앗기고.
앗수르 망하고 난 뒤에 나오는 왕이 느부갓네살이란 바벨론 왕이거든요. 처음에는 재산 다 빼앗기고 솔로몬의 부귀영화 다 빼앗기고 그 다음에 남아있는 신체포기각서, 신체까지 다 빼앗길 때 그들은 뭘 빼앗겼다고 하느냐 하면, 이걸 빼앗겼다는 거예요. 땅을 빼앗겼다. 자, 땅 없는 이스라엘이 과연 상상이 되느냐? 된다는 거예요. 땅 없는 이스라엘.
여러분, 부동산 없는 교회가 상상됩니까? 홀 없는 교회 상상됩니까? 집에서 모인다고요? 사실은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으니까. 가이오의 집에서 모였으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라 하는 것은 일단 홀 하나 빌려야 되고 2층이라든지. 돈 좀 모아서 고딕 양식의 빨간 건물 하나 있어야 그 근처 이사를 가도 그 교회에 등록이 되지요.
이사 가자마자 집에서 모이는 데 없을까? 이런 데 절대로 안 가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 갔는데 보자, 집에서 모이는 교회 어디 있을까?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알 수 있습니까. 집에서 모이는 교회는 간판을 안 거니까. 상가라면 어린이집, 피아노학원, 영어, 국어 과외 써놔서 알지만 기존의 아파트에서는 여기는 가정교회입니다, 라고 붙여놓은 것 봤으면 손들어주세요. 못 봤지요. 없어요.
가정교회는 왜 안 찾느냐 하면, 다 추방된 사람들이거든요. 문제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얼마나 목사답지 못했으면 교인들이 왔다 갔겠느냐? 얼마나 목사가 제대로 못했으면 자기 집식구만 남았겠느냐? 심지어 제가 아는 집은 자기 집식구도 안 오는 데도 있어요. 그 소리 듣고 대단한 사람이다 했는데. 아들이 삐져서 우리 아버지 가짜라고 오지도 않아요. 안산에 어느 교회 있어요.
어느 정도지 아무리 선지자지만 터무니없는 이야기해선 안 되잖아요. 그런데 터무니없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것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대로 뭘 두지 않는다, 원칙이? 연결점을 두지 않는 거예요. 그게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봅시다. 6장 9절요. 우리 김종인 권사님, 솜씨 발휘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눈 뜬 인간도 눈 감아, 이 말입니다. “염려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고침 못 받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사야가 외치고 있는 거예요. 반발하란 말이죠. 나한테 대들란 말이죠. 날 핍박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야 너희들 본색이 드러나지. 이런 식이에요. 이건 뭐. 그런데 그게 기적이래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범위 바깥에서 추가되는 기적이고, 그 기적은 네가 구원받는데 동원되는 기적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기적이라는 겁니다.
뭘 희생시켜서? 나의 더러운 본색을 드러내는 그걸 기화로 해서 그걸 기회로 계기로 삼아서 참된 이스라엘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지는 메시아가 다 이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만 나오는 게 아니고 구약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옆구리 새치기하지 마세요. 구약부터에요. 중간에 치고 들어가지 마시고 구약부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순서가. 열차 달리는데 도중에 끼어들지 마시고. 그리고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처음부터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육에 대한 고발,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 그리고 이사야는 너희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 말씀으로 하게 되면, 여기서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됐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우리는 하나님 뜻을 위반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이스라엘은 하면 안 돼요. 하게 되면 우리는 범죄 했습니다, 잘못됐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소가 그 임자를 모를 정도로 우리는 나만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마치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죄의 수준의 하나님이 아는 수준이 일치된다는 것밖에 안 돼요. 일치되면 못 알아보는 차원이 아니라 아는 차원이 돼버려요. 네가 아는구나. 난 네가 몰랐고 귀가 어둡고 눈을 감기게 했는데 알아챘어?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이러면 내가 곤란한데. 이런 경우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회개를 하고 반성해도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할게요, 라고 그렇게 참여하지 마세요. 그건 전혀 하나님 일이 아니에요. 그건 마귀 일이에요. 하나님, 말씀에 보니까 이런 나쁜 짓하지 말라 했는데 제가 죄인입니다, 주여. 이러지 말란 말이죠. 그런 소릴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가만있으라. 너희들이 지키지 못할 죄를 어느 쪽에 만들어내는가? 주님 쪽에서 죄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이게 사랑이고 이게 바로 복이에요. 내가 미처 모르는 죄까지 계속 개발해줘요. 주님은 죄 개발주식회사입니다. 없는 죄도 계속 만들어내요.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몇 개 지켰다고? 그럼 이것까지 지킬 수 있어? 삼단 고음? 턱도 없어. 6단 고음, 계속해서 올려버립니다. 그 라인을 그 레벨을 올려버려요.
최고의 레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에요. 아무도 못 따라 갑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해결할 수 없는 죄인이에요. 그것을 아는 걸 그리스도의 성령 받았다.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게 하심을 도리어 감사합니다. 내 회개도 안 받고 내 반성도 안 받고 내가 잘못됐다는 것도 밀쳐버리고 내가 내 입으로 어떤 짓거리 어떤 소릴 해도 일체 그걸 개무시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내가 행한 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그 길을 주께서 연결망을 잘라줬어요. 내가 행한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 있는 것처럼 돌아오는 그 선을 주께서 중간에 잘라준 거예요. 잘라주고 난 뒤에 거기서 생긴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모든 인간은 뭔가 했으면 한 티를 내게 돼있어요. 그것을 중간에 끊어버리니까.
이것을 제가 오늘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나에게 돌아왔을 때 우리는 거기서 그렇게 잘난 우리의 의미를 일어난 사건에 연결시킬 수가 없어요. 내가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 그것은 원인을 나에게 돌리지 않고 다른 분에게 돌릴 수 있을 그 순간 나는 그 사건에서 소외되는 겁니다. 삭제되는 거죠. 제거되는 거죠. 내가 제거되는 이것이 바로 자유 아닙니까. 내가 나로부터 해방되는 거예요. 내 무거운 짐, 여러분 어떻게 벗을 거예요?
주께서 나를 가볍게 만들고 나의 중량을 없애버릴 때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될 때 그 사람은 천국 가서 살기에 딱 적합한 성품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천국생활에 그게 딱 적합해요.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는 거예요.
어려운 대목을 다시 해볼게요. 성경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죄는 내가 회개하고 반성할 용의가 언제든지 돼있는데 그게 아니라 이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죄의 범주를 영역을 넓히니까.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 하느냐 하면, 너는 처녀에서 안 태어났어? 이 정도까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선지자 입에서 나와 버리니까.
이것은 도대체 왜 그런 발언을 우리에게 굳이 해야 될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잘못됐으면 잘못된 데를 고치라면 한단 말이죠. 방이 어질렀으면 방을 치우면 되거든요. 옷가지를 치우면 되잖아요. 제자리에. 이건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역량을 벗어난 일을 한다면 그건 우리가 어쩌라고요?
그것은 단절된 것에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게 되면 연결된 그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떤 기여도 없이 연결된다는 사실, 이걸 이사야 끝부분에 가면 기쁜 소식이라 해요. 뭐라고 돼있냐 하면, 모든 사람에게 성신이 임하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희년이 주어질 것이다.
채무를 갚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 재산이 되돌아오는 해, 이게 희년이에요. 채무를 갚은 적이 없어요. 우리 쪽에서 갚으려고 애쓴 적도 없어요. 내 것 아니라고 손 놨는데 그것이 내 것이라고 돌아오는 해가 7*7+1, 모든 완성의 완성, 완성의 종합, 이것이 희년입니다. 이렇게 희년이 되면 시간이 최종상태에 들어가게 돼요.
7*7+1=50 희년, 다시 내려와서 또 올라가고 완전히 롤러코스트 하듯이 계속 희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희년의 시간의 지평과 그러한 차원과 밑에 희년이 되기 위한 차원, 두 개의 시간이 나란히 달리게 되는 그러한 역사적인 율법 안의 시간 개념이 형성되거든요. 여기 49년 다음에 안식일,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런데 이방민족에서는 과거-현재-미래, 그냥 단선으로 가버리죠. 이건 굴곡져있어요. 이렇게 소용돌이치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칠 때 50의 내용이 뭐냐 하면, 네가 회개하거나 반성하거나 잘못됐다고 하거나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무상으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것이 돼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그들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에 너희를 넣어주겠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여러분 아시는 거니까 빨리 지나가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의 땅이 있는데 약속의 땅은 어느 소유가 아니에요. 열두 지파로 나눴다는 말은 하나의 피자 판이거든요. 이건 창세기 때 제가 이야기했어요. 피자 판을 갈라먹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생존의 여건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제사가 제대로 지내지느냐에 따라서 이들은 혜택을 입게 돼있단 말이죠.
제사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피 흘린 죽음의 의미를 계속 연결점을 유지한다면 너희들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돼있어요. 이것이 구약의 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대로 연결점을 유지하게 되면 너희들은 이 땅에 살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다 거덜 났지요. 그러면 그들은 중간에 연결점이 없는 거예요. 제사가 있어야 되는데 연결점이 없는 거예요. 그들은 형식적인 제사밖에 없어요. 아까 번제 제사 나왔잖아요. 이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면 중앙의 자리가 비어있단 말이죠. 중앙의 자리가 비어있을 때 이사야의 주제가 나옵니다.
이사야의 주제는 뭐냐? 두 번째 시간에 이사야의 주제가 나와요. 주제가 ‘시온’이 등장해요. 이사야 1장 봅시다. 27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의가 분배가 돼요. 여기서 의가 생산돼야 되고 생산된 의를…
우리 한식에 보면 신선로처럼 돼있어요. 시온이 높거든요. 신선로의 음식이 끊는 것처럼 시온의 의로 인하여 그들은 무상으로 혜택을 입으면 구원을 받는데 여기 있는 백성들은 뭐냐? 의로 인하여 혜택 받기 위해서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인이 돼줘야 돼요. 이 의의 혜택을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조리 밑에선 죄가 돼야 되는 겁니다.
죄를 죄 되기 위해서 동원된 민족이 있었으니 앗수르와 바벨론, 애굽, 모압, 암몬, 에돔, 주변나라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죄 졌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이 나라들은 전부 다 시온을 위한 시다바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노아 홍수 때 먹고 마시던 사람들이 멸망할 때 그들의 인식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부터 이야기해야 돼요. 땅이 저주하므로 인간이 사는 게 힘들다, 괴롭다고 돼있어요. 노아 홍수에 있어서 땅을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다 죽게 되었다.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땅이 인간보다 우세한 거예요. 환경이 인간을 만들어요. 인간이 잘해봤자 환경이 안 바뀌어요. 어떤 환경에 집어넣느냐에 따라서 그 환경에 맞추어서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 말은 나중에 다니엘에 들어가면 인간이 멸망해서 땅보다 뭐가 우세하냐 하면, 바다가 우세가 됩니다. 바다가 우세하게 되면 땅에 속한 인간들은 바다에 속한 것에 대해서 지배받게 돼있어요. 바다에 속한 것을 다니엘서에선 짐승이라고 해요. 짐승이라는 것은 땅이 아니고 바다의 우세에 의해서 땅의 우세에 살았던 인간이 점령당한 상태를 짐승한테 복종당합니다.
바다에 있는 짐승이 땅까지 올라와서 접수해버리면 인간은 땅에게 약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악마의 술책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게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땅 의존적이고 땅에 기대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는 땅이라 하지만 보통 환경 또는 상황, 인간은 환경과 상황의 산물이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이러고 있어요.
재레드 다이아몬드란 사람이 지은 책이 있어요. [총,균,쇠]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운명은 기후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그 이야기했다고. 그러니까 기후 앞에서 인간이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이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지만 또 많은 사람이 반발을 했습니다.
반발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창의력과 인간의 지혜를 네가 너무 무시한다고 한 거예요. 인류 역사가 기후 때문에 망한 것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어이 지 자존심을 못 놓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사야서에서 계속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그들이 모르는 죄를 자꾸 확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을 도드라지게 나타내느냐 하면, 바로 시온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1장 27절에,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그 시온이 원래 다윗 때는 땅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들이 이걸 생각해야 돼요. 땅 없는 시온을 생각해야 됩니다. 땅 없는 시온이 되게 되면, 땅 있는 시온, 땅을 가진 시온과 땅 없는 시온, 두 종류의 시온이 등장합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했거든요. 두 개의 시온이 등장하는 거예요.
땅에 있는 교회는 부동산이죠. 하늘에 있는 교회는 부동산에 구애받지 않잖아요. 오직 말씀으로 된 교회를 말합니다. 말씀으로 된 교회가 되려면 필히 부동산 교회가 있어줘야 돼요. 역사가 있어줘야 비 역사가 나오는 법이거든요. 비 역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역사를 해부하고 깨치고 파괴해야 그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된 교회라는 것은 기존 교회가 있어야 돼요. 따라서 기존 교회는 인류 역사상 절대로 멸망하지 않습니다. 큰 성 바벨론이 끝까지 가는 것처럼 세상 마지막 때까지 교회도 엉터리 교회가 계속해서 번창하고 유지돼야 돼요. 왜? 이게 있어줘야 거기서 말씀된 교회가 나오기 때문에. 이교회 버리고 달리 말씀된 교회가 없어요.
그래도 우리 교회는 복음적으로 말씀대로 한다고 하잖아요. 복음적으로 말씀으로 해봐야 땅에 있는 교회인데요? 복음적으로 말씀대로 한다고 하면 말씀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런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게 돼있어요. 결국은. 몰라. 처음 할 때는 우리는 말씀이 좋아요, 하지요. 그래서 그 교회가 처음에 교인 오십 명 모였는데 나중에 두 명 되면 진짜 말씀된 교회라고 인정해줄게요.
그런데 처음에 열 명인데 나중에 백 명 되면 그 다음부터 뭐가 아까운 거예요? 백 명 교인이 아까운 거예요. 말씀 전했는데 백 명 교인 중에서 구십 명 나가고 열 명 남았다면, 아이고 아까워라. 추구하는 것이 말씀이라며? 그런데 나간 구십 명에 대해서 그렇게 애를 씁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한계란 것은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어요.
바둑 두는 사람들은 알아요. 대마 죽이고 바둑판에서 이기는 경우가 참 많아요. 땅, 집 수 계산하는 바둑판에서 자기 말을 그만큼 죽여 버려요. 죽임으로써 바둑에서 승리하게 돼요. 죽일 게 있어야 승리할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기존 교회가 계속해서 있어줘야 돼요. 우리가 얼마나 말씀 위주로 한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의 모든 정신 상태는 말씀으로 괜찮게 된 교회를 계속해서 집착을 하고 포기를 못하는 내 심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바른 교회란 게 이 땅에는 없습니다. 전부 다 엉터리 교회인데 엉터리 교회에서 비로소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시온이라는 것은 기존에 이스라엘이 있어야 시온이 생긴다는 그 말씀을 제가 해드리는 겁니다. 슬슬 먼 데서 와서 눈 비비고 난리 났지요. 이럴 때 나가는 게 이번 강의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식, 수식 하나 들어갑니다. 수학 약한 사람들 큰 일 났다.
하나님의 원 뜻은 뭐냐? A₁→Aₙ 위에 B₁→Bₙ까지 A가 이것을 전부 다 포괄한다는 이렇게 수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 65페이지에 보면 나와 있어요. 여기서 제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A에다 (1-x)를 대입하고, B에다 (1+x)를 집어넣고자 하는 겁니다. 그럼 이 수식을 다시 고치면 이렇게 돼요.
(1-x)가 (1-x)ₙ항까지 계속 이어지고 이걸 병행해서 동조해서 (1+x)에서 (1+x)ₙ까지 연결되는데 이 전체를 누가 관할하느냐 하면, (1-x)가 관할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A 대신 (1-x)를 집어넣고 B 대신 (1+x)를 집어넣은 결과가 이렇습니다. 그러면 A는 뭐고 B는 뭐고 x는 뭐냐?
여기서 A라는 것은 메시아께서 자기 언약대로 스케줄을 짜놓고 일하시는 겁니다. A가 메시아 쪽이에요. 그럼 B는 뭐냐? 인간 쪽에서 일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병행해서 나름대로 메시아는 자기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일의 관장은 누가 하냐? 메시아가 하는 거예요. A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그냥 쓰지 않고 바꾸느냐? 1은 뭐냐? 초월자에요. 초월자, 일자 다른 말로 신. 예수님은 하나님에서 빼기를 해요. 자기를 부인하거든요. 하나님 뜻에 의해서 자기가 죽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자기를 갖다 붙여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만큼 애를 쓰고 수고했습니다. 이게 (1+x)에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세웠고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게 인간의 일이에요.
그런데 x는 몇 가지 양상이 있느냐 하면, 보통 현대학자들이 정리한 걸 보면 네 가지로 할 수 있어요. 예술, 철학(종교), 과학, 정치(경제). 이 네 가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는 모든 시도가 여긴 거예요. 예술이란 자기 초월이죠. 미적 감각에 자기를 맡기는 거예요. 미적 감각에 자기 몸을 태우는 거예요. 아름다움, 쾌락 이런 것에다가.
철학, 종교란 것은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자기를 맡기는 거고. 과학이란 것은 얼마나 실용적인 것인가에 자기의 모든 걸 걸고. 정치라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융합과 결합, 연대에 자기 몸 하나 희생하겠다는 게 정치거든요.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게 정치에요. 하나 더 오면 셋으로 만드는 게 정치고. 이렇게 한 뜻을 품고자 하는 게 정치에요.
그러니까 정치 전공하는 사람, 과학 전공, 철학 전공, 예술 전공, 모든 정치는 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절대적인 1, 모든 걸 하나로 통합하는 절대적인 신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여기서 빠져나올 사람 아무도 없어요. 못 빠져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이걸 어디서 보여주느냐? 그 당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두고 이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국심을 발휘하겠느냐? 저 왕은 왕대로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과학, 철학, 예술, 정치=경제로 보면 돼요.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이걸 추구한 거예요.
왕들이 인구가 많아지면서 북쪽 왕들은 특화작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려를 했어요. 처음에 농사지은 곳이 산지가 아니고 비탈진 곳에서 농사지을 때 작물 품종을 나라에서 지정해줬다고요. 왜냐? 수출해야 되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수출 무역로의 중간지점에 있어요. 수출하고 받은 외화로 무기를 구입한 거예요. F-35 이런 것 구입해야 나라를 지킬 게 아니겠습니까.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왕들이.
선지자들은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나라를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수작들을 부렸다. 그건 이방민족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한 겁니다. 그걸 우리는 성경에서 이사야서를 보고 있거든요. 보고 있으면서 여러분들 의아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정치하는 사람이 나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정치하는 것이 우상 짓거리가 되는지를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치가는 정치를 하고 과학자는 과학을 하고 예술가가 지혜를 모아야 나라꼴이 되지 않겠느냐, 라는 우리의 안일하고 당연해 보이는 편안한 생각,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줄 아셨습니까?
방금 제가 구약의 이스라엘 지키기 위해서 왕들이 이런 수고를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교회로 바꿔봅시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목사나 장로들 집사들이 수고하는 것들이 우상숭배가 된다. 그걸 성경이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명하고 있다면, 우리들이야 쫓겨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다른 교회 같으면 상상을 못합니다. 다 하늘나라 확장을 위한 뜻으로 이해하지요. 그걸 마귀의 확장으로 생각을 못해요.
내 전도, 선교가 마귀나라의 확장, 마귀나라를 심화시킴으로 이해를 못해요. 왜?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그래서 성경을 연구해서 뭐 하겠다? 교회를 보다 더 하나님 말씀에 교인들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겠다, 라는 이 생각이 바로 구약에 있는 엉터리 왕들이 하는 짓거리란 말이죠. 그 당시 공무원으로서 월급 받고 있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는 짓거리가 그 짓거리였어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뭘 어째요. 가만있으면 되지요. 괜히 치킨집하고 이러지 말고. 가만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해주신다니까요. 그게 어려워요? 내 일에 열중하세요, 내 일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내 일이 예술가입니까, 철학자입니까, 과학자입니까? 그것에 열중하세요.
그것이 이 공식에 맞추어서 뭐하는 짓이다? 주님의 마이너스를 유발케 하는 죄의 역사란 것을 인정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우리가 주의 일에 참여를 못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서 버림받았잖아요. 이게 –x에요. 예수님은 x거든요.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됐다? 마이너스니까 빼기를 한 거예요. 절대자로부터 버림받은 거예요.
이 버림받음이 전체적으로 뭐냐?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가장 진솔하게 나타내는 모습이에요. (1-x) 이게 무슨 사건이겠습니까? 십자가 사건. 모든 세상일은 어디에 다 모인다?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의미가 종결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너희들이. 십자가가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그럴 때 바로 인간과 대조가 되는 메시아만의 하나님에 버림받는 과정, 둘 다를 여러분이 같이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사야에 이런 공식의 근거가 있는지 따지고 싶을 거예요. 있습니다. 어디 나옵니까? 유명한 이사야 53장.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예수님께서 정치를 했습니까, 예술을 했어요, 뭐했습니까? 주님은 아버지한테 뭐했습니까?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은 거예요.
따라서 모든 인간의 괄호는 뭐냐? 주님께서 채찍 맞고 버림받는 이걸로 종결되는 겁니다. 이게 의미의 종결이에요. 따라서 이사야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해석은 뭐냐? 이 x에 성경말씀을 대입하면 끝. 모두 대입하는 거예요. (1+x)에서 시작한 그 근성과 그 성격이 세월이 아무리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모습은 달라도 변하지 않아요.
계속해서 나는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의식, 자의식 절대로 우리는 때려죽어도 포기 못합니다. 내가 회개한 것, 반성한 것, 내가 기도한 것, 내가 전도한 것, 전부 다 하나님 플러스, 더 보태는 일이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마이너스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다툰다. 다툴 때 뭐로 다투겠어요? 애가 유치원 가는데 신발 좀 챙겨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거든요. 애 신발 좀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30분도 안 지나서 시가집, 친정 이야기 나옵니다. 뭐냐 하면, 너 같은 인간 내가 인간성 좋으니까 받아줬다는 거예요. 플러스잖아요. 자기 기여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가정이 이만큼 살아온 것도 누구 덕분이다? 내가 많이 참고 할 소리 안 하고 인내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건사했다. 내가 속이 아프네요.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 아니면 벌써 파토 났어. 너도 애쓴 것 알지만 나는 너보다 더 애썼어. 애 신발 문제 어디 가버렸습니까? 없어졌어요. 끝났어요.
왜 그 가정이 소중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가정, 1이거든요. 이 가정은 1,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교회,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나라, 전부 다 1을 걸쳐놓고 그 1에 나의 기여도를 따지면서 인류역사는 그대로 계속해서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혜에 지혜를 더하고 총명에 총명을 더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 나라에 어프로치 해가자.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러나 주님께서 끝까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2010년도 십자가, 2018년도 십자가, 끝까지 십자가 괄호,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거예요.
안녕히 주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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