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엡 3장 7-9절(출생의 비밀)1905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7-9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7-9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알지만 그 안에 담긴 비밀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에 성도 중에서도 가장 작고 가장 아무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이 사울에게, 이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아마 최하지점까지 은혜를 주심으로 그 위에 있는 대단한 사람들도 충분히 은혜 속에 있음을, 있게 될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겁니다.
은혜의 풍성함이라는 것, 이 ‘풍성’ 자체가 양인데요, 은혜의 풍성 자체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풍성하지요.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고 감사뿐이지요. 그런데 그 은혜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비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비밀의 내용을 다른데서 얻을 수 없고 지극히 작은 자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그리스도가 특별히 알려준 거기에서만 진짜 창조의 원리가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사도와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먼저 생각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나의 이야기로 봐야 됩니다.
나의 이야기가 따로 있으니까, 자기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는 것이 따로 있으니까 성경 이야기가 나에게 안다가오는 거예요. 자기가 그만큼 잘났고 높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나 낮춰준다면 성경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고 기존의 내가 나의 이야기로 여겼던 것은 날라 가버려야 됩니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너무 주눅 들고 너무 조바심내면서 살아왔잖아요. 나를 대체할 것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는 너끈하게 자기를 대체해 버립니다. 뭐로 대체하느냐? 그리스도의 비밀로 대체해 버립니다. 어떤 남자가 비행기에 올라탔어요. 비행기에서 낙하훈련을 하는 거예요. 막상 낙하훈련을 위해서 비행기에 올라타니까 어떤 사람은 겁이 나서 낙하산은 던져 버리고 자기 몸은 비행기에 그냥 벌벌 떨면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바보는 낙하산을 둔 채 자기 몸을 던져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바보지요. 그것은 죽으려고 용을 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의……,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어리석음이지요. 낙하산이 있어야 살잖아요. 그런데 자기의 마지막 살 수 있는 그것마저 던져버릴 것 같으면 이것은 특이한 인간이다, 참 별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 창조 속에 있는 비밀의 경륜을 사도바울이 아는 식으로 우리가 알아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출생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침 드라마에 그런 것이 많이 나오거든요. 출생의 비밀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흔하디 흔해빠진 그런 출생 말고 특별한 출생의 스토리에 의해서 태어난 별종이야기, 그것이 출생의 비밀이거든요.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나는 너와 달라. 달리 태어났어.’라는 뜻이거든요.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모든 알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태어나셨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이 예수님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라는 사람에게는 동일하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은 곧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인간이 다르지 아니하면, 출생의 비밀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인간은 천국 갈 능력이 없습니다. 천국 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전달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인지 도대체 알아먹지를 못해요.
“공중에서 뛰어내리는데 낙하산으로서 뛰어내려야 산다. 낙하산을 알고 있으면 너는 출생의 비밀이 없는 사람이라서, 너는 변경되지 않는 존재라서 너는 뛰어내려도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야. 뛰어내리기 전의 인간이나 뛰어내린 후의 인간이나 동일한 인간이야. 그래서 그 인간은 소용없어.”라고 하면서 낙하산 떨쳐버리고 자기 몸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짓거리를 할 수 있는 사람, 이것은 다른 사람이어야 돼요.
지금 사도는 이 이야기를 하는데 “주님이 출생의 비밀을 아는 것처럼 나도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는 것은 주님 때문에 이제 알았는데 나처럼 여러분들도 창세전부터 다른 사람과 달리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사람 맞아요?”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말은, 지나 개나 다 알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알아듣지를 못하는 말을 하는 겁니다.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 출생의 비밀에 유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흔해 빠진 그런 인간들하고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비밀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왔지만 사람들은 다 요셉의 아들로나 봤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계속 터져 나오는 것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즉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었다, 라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인하여 태어난 분입니다. 다르지요. 다른 인간이에요. 성령으로 인하여 태어난 인간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성령으로 인하여 사울이 바울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요? 저와 여러분은 뭡니까? 너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내가 해 낼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미 자기의 태어난 것이 있는데 자기의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손대서 손질할 수 있는 여건이 못돼요. 육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육이고 영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영이 되는 겁니다. 다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태어난 그 시점이 아니라 자기의 과거로 소급해 볼 때 벌써부터 우리는 성령으로 태어나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미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이 비밀의 경륜 안에서, 그걸 영어로 economic이라고 해요, 비밀의 경제 안에서, 경륜 안에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신 똑같은 원칙으로 적용되고 그것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 인간에게는 천국 갈 능력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비밀을 알아먹을 수 있는 안목이나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성령을 받아서 그 비밀, 왜 갈 수 없었는데 천국가게 되었는가를 그 비밀을 자기가 우리에게 소개하겠다는 겁니다.
소개하면서 너희들도 이 말을 알아먹고 계십니까, 라고 우리 마음에 노크하는 거예요. 사람이 왜 이런 비밀의 경륜이라든지 복음을 이해 못하느냐 하면, 사람은 태어나서 자꾸 보는 것으로 결과를 예측하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소나기 같은 경우에, 소나기의 맛은 보는 맛이 아니에요. 소나기는 맞는 맛입니다.
소나기속에서, 평생토록 소나기 같은 주님의 은혜를 맞고 있을 때 자기 스토리를 쓰지 않아요. 이 자체가 내가 소나기를 보고 소나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줄곧 나는 은혜를 부여받고 살아온 거예요. 그걸 그동안 몰랐었는데, 성령의 깨우침에 의해서 나는 내가 믿을 때 은혜 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그 이전부터 줄곧 은혜 속에서 태어났고 살아왔고 줄곧 그래왔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출생의 비밀을 우리가 언급하기 전에 모세가 기록한 이 창세기부터 모세는 어떤 관점에서 창세기를 봤는가를 생각해야 되지요. 경륜이니까. 하나의 절차니까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태양이 없다고 치고요.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고 반은 낮이고 반은 밤이 된다는 이치를 어떻게 우리가 근거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없다고 치고요. 해와 달도 별도 없다고 치고 어떻게 24시간 중에 반 토막은 낮이 되고 밟고 밤은 어두운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모르지요. 알 길이 없어요. 태양이 있으니까 아 태양이 없을 때는 밤이 되고 태양이 떴을 때는 낮이 된다. 태양에 의해서 밝은 대낮이 되고 태양이 없을 때는 어두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똑같은 이치를 우리한테 적용해 봅시다. 왜 인간은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가? 저는 이 문제가지고 30년을 고민한 사람이에요. 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인물은 왜 안 태어나는가? 왜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가? 생물학을 들춰보고 공부를 해봐도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와서 거기에 대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26, 27)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남자 여자가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었거든요. 결국 남자 여자의 구분은 태양이 먼저 있어야 낮이 되고 밤이 되는 것처럼 남자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그 남자의 배필자로 여자가 생기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진짜 태양처럼 떠오르는 진짜 남자는, 영원한 남자는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비밀의 경륜, 그러니까 처음부터 왜 남자는 남자 따로 여자는 여자 따로 각자의 성을 따로 가지고 태어나느냐 하는 그 비밀의 내막은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서 그분이 바로 처음 남자라는 것, 처음 남자로 등장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여자의 원천을 알게 되는 겁니다.
30년 동안 몰랐던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이 이해하기 좀 힘든데……, 이 땅에 아버지가 부재하다는 겁니다. 이 땅에 아버지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 26절의 말씀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오직 하늘에 있다는 말은, 이 땅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니면 우리는 여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남자도 아니에요.
아담이 있고 난 뒤에 생긴 것이 여자기 때문에 아담 그 남자가 최초의 남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여자도 여자가 아닌 겁니다. 최초의 남자가 떠오를 때 그러니까 태양이 떠올라야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최초의 남자가 떠오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남자의 신부로서 남녀 구분 없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다려야 돼요. 최초의 남편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비밀을 모르면서, 개코도 모르면서 살아온 거예요. 내가 왜 여자인지, 왜 남자인지 그 원천도 따지지 않고 살아온 거예요. 출생의 비밀도 모르면서 살아온 거예요. 태어났으니 그저 살자는 식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것, 아버지가 없다는 말은 아버지가 없어져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결국 우리 자신은 없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없어지기 위해서! 출생의 비밀의 장소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미 태어난 것을 소급해서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스스로 자기를 삭감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거지요. 없어지는 거예요.
제천에 가면 철도공사에서 만든 승무사업소라는 것이 있어요. 그 승무사업소가 뭐냐? 차량들 정비하는 곳입니다. 굉장히 커요. 지하철의 객차든 뭐든 정비하는 곳인데 그곳을 지나가면서 그걸 본 적이 있어요. 그곳을 지나가면서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정비되기 위해서 또는 폐차되기 위해서 집합된 그 빈 객차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탔을 때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습니까?
만남의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헤어짐의 아픔도 있었을 것이고, 울고불고 떠들고 서로 자리 차지하려고 지하철에서 서로 부대꼈던 그 모든 객차가 담고 있는 그 사연, 그 사연이 차량정비소로 갈 때는 다 비우고 그저 정적만이 흐르지요. 그 요란하고 분주했던 그 모든 것도 쏟아버리고 그냥 빈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열차의 출생의 비밀이에요. 우리는 출생의 비밀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인 줄 알아요. 같은 인간 아니에요. 출생의 비밀이 달라요. 예수님이 다르듯이, 사도바울이 다르듯이 우리가 달라요. 인생을 얼마나 요란 떨면서 살아왔습니까? 다 부질없는 거거든요.
사도바울이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인도받고 초대받은 거예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연기자들이 분장하고 또 분장지우는 분장실로 사도바울이 초대된 겁니다. 그 연극을 벌인, 이 세상이라는, 이 창조라는 연극을 벌이신 그 내막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초대받은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그 창조세계에서 사도바울은 직접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만나가지고 ‘아, 예수님께서 이렇게 벌여 오셨구나.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 오셨구나.’ 하는 거기에 사도가 합류하신 거예요. 이제 우리차례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정적 속에, 고요 속에 합류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그 출생의 비밀 속에서 주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본인만이 알아서 일관해서 본인을 증거하고 나타내라고 우리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서서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에요. 그분이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라는 말은 지상에서 너를 태어나게 했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인적관계, 이런 모든 것은 다 일시적이고 요란 떠는 것이고 분주했던 것이고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육에서 태어나서 그냥 육으로 가는 그것은 자기 출생의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소리밖에 안돼요.
사람 자체가 다른 인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비밀로 인하여 성령으로 태어나서 그분이 육에서 태어난 사람과 섞여 살았어요. 섞여 사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을 인간들은 못 알아듣고 곡해해서 알아듣는 겁니다. 주님은 계속 주님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계속 자기 이야기로 바꾸어서 받아들이면서 “나 예수 믿습니다. 나 예수의 열두 제자입니다.” 하고 따라다닌 거예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비밀의 경륜,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걸 알고 믿으니까 신자다.’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니에요. 자기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종의 상식 같은 겁니다. 그것 가지고 신자 될 수가 없어요.
특히 오늘 9절에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거든요. 그러면 감취었던 그 비밀의 경륜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는가를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는가는 오늘날 주님이 똑같이 우리를 사도바울같이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관찰할 수 있는 자리를 이동시켜주고 변경시켜주는 겁니다. 성경을 볼 때 나 좋으라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보는 그 자리를 이동시켜 주는 거예요. 어디로 이동시켜 주느냐 하면, 출생의 비밀이 있던 자리에 데려가서 이동시켜 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실 거니까 사사기 11장 3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입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입다가 아주 객기를 부립니다. 입다의 자부심이 대단해요.
나는 성신 받았다. 따라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인데 이 승리는 나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라고 할 그 정도 믿음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믿음의 티를 내겠다. “하나님이여, 제가 승리해서 집에 돌아갔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그 무엇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라고 장담했어요.
이것은 프레임, 그 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그 틀을 자기가 만들어놓고 그 틀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내가 행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프레임,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제일 먼저 나온다는 그것을 형식으로 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형식은 입다로부터 짜게 만들고 내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이것은 충격 아닙니까? 입다로 하여금, “하나님,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의지하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낙하산 잘 활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렇게 장담했는데 그 프레임 안에, 그 곽으로 지어진 형식 안에 그렇게 까불대고 조물락대던 그 자신의 가족의 가장 귀한 것을 거기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네가 출생의 비밀도 모르고 깝죽대고 너의 잘난 맛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까불어대는데 네가 너 교체해줄게.” 교체해 주거든요. “프레임은 네가 짜라. 내용은 내가 채울게.” 고된 인생은 우리가 삽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주께서 나를 바꿔치기 하는 방식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거예요. 죽여야 출생의 비밀이 여기서 발산되기 때문에, 방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입다라는 사람을 사용해서 장차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주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지, 새롭게 출생시키는지를 입다를 통해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입다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납득이 된다면 주님께서 출생의 비밀 속에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는가를 우리가 접근해 갈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선악과라는 이것은 매혹적인 나무에요. 따라서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계속해서 그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의 매혹으로, 매력으로 다가와요. 거기에 우리는 완전히 놀아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놓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점점 이끄느냐 하면, 죽음으로 이끄는 거거든요. 악마에게 유혹받게 해놓고, 그 첫 번째 죽음 속에 예수님 자신이 뛰어듦으로 말미암아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첫 번째 죽음, 인간의 죽음 속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영원한 죽음으로 두 번째 죽음으로 확정 시켜 버립니다.
사람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의 다가 아니라는 거지요. 영원한 저주와 영원한 심판으로서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뛰어들었거든요. 쉽게 말해서 애들이 팽이를 갖고 노는데 1초에 한 다섯 바퀴 도는 팽이를 갖고 논다고 합시다. 그걸 보고 어떤 엔진이 달린 팽이를 가진 심술궂은 아저씨가……, 이 예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예가 별로 적절하지 않은 듯해서 이 예를 먼저 들고 다른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엔진팽이를 가진 그 아저씨가 팽이를 돌리는데 1초에 만 바퀴를 돌려버렸어요. “이 팽이 재미있지?” 할 때 애는 으앙, 하고 울겠지요. 우리 손녀가 독일의 놀이터에서 뱅뱅 도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었어요. 애가 재미있다고 안가는 거예요.
저 손녀를 어서 데리고 집에 가기는 해야겠는데 애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노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어요. 제가 그 애 노는 뱅뱅 도는 놀이기구에 올라탄 거예요. 올라타서는 속도를 다섯 배로 빨리 했습니다. 애가 어지럽다고 얼빠져 있는 거예요. “가자, 집으로”
인간은 죽을 똥 살 똥 죽을 똥 살 똥, 그 뱅글뱅글 도는 인생, ‘죽으면 안 돼. 살아야 해. 살아야 해. 더 살아야 돼. 살아서 딸 시집가는 것 봐야 돼.’ 아파트가 어쩌고, 뭐가 어쩌고, 온갖 것을 다 생각하는 거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어 버린 겁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확정된 지옥입니다. 확정된 지옥.
주님께서 우리가운데 뛰어들어서 완전히 뺑뺑 돌려버리는 거예요. 팽이를 1초에 만 바퀴 돌리듯이 첫 번째 죽음을 두 번째 죽음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자기가 만든 아담인 인간을 죽게 만들어놓고 그 만들어진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이 뛰어들어버린 거예요. 죽음을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로 만든 겁니다. 지옥을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로 만든 거예요.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했습니다. 신학자들은 2천년동안 그 문제를 풀 수가 없었어요.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왜 그 역은 안 되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만드는 그 이미지 작업은 왜 하나님이 거부하는지 이유를 몰라요. 지금도 몰라요.
같은 이미지 아니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으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면 인간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면 되잖아요. 한쪽은 되고 한쪽은 왜 막히느냐의 그 이유를 몰랐던 거예요. 아직도 몰라요.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은 창조의 비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비밀은 인간이 아니에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아담도 아니고 하와도 아닙니다.
창조의 비밀은 예수님이에요.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구원자가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지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줄곧 인간들은 평생토록 나의 이야기만 생각해요. 내가 애가 몇이고, 어떻게 밥 먹고 살고, 자기 이야기만 했다고요.
그러나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드라마를 보세요. 그 드라마 처음부터 끝까지 그 주인공,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주인공 이야기잖아요. 아침 드라마의 줄거리가 그렇잖아요. 25년 전에 동생하고 헤어졌다는 겁니다. 헤어졌는데 맛있게 달래 국 끓여놓으니까 그 헤어진 고통도 지금은 잊었다는 거예요. ‘수상한 장모’인가 뭐 그런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25년 동안 동생과 헤어져 있던 아픔을 아침에 나온 달래 국 한 그릇으로 다 잊어버립니까? 우리는 주님을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이야 할지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알지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알지요.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비밀, 창조가 어떤 비밀로 운용되고, 어프로치 되는 지 그것은 끊어진 겁니다.
이 끊어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요. 끊어지면 죽겠지. 죽는 것이 아니고 이게 지옥이라니까요. 사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고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이고, 시달림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첫 번째 죽음을 두 번째 죽음으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도 고생이고 죽어서도 계속 고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밀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위주가 아니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엡 1:4)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든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 출생의 비밀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장 40절부터 보면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그 다음에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이가, 그러니까 엘리사벳이 임신한 사람이 세례요한이거든요. 세례요한과 마리아가 사촌간인데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이라는 여자의 태속에 있는 아이인 세례요한이 거기서 뛰놀고 있었던 거예요. 뛰놀면서 저절로 산모인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해서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엘리사벳이나 마리아나 여기 관련된 인물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 중심이 아니고 드라마, 예수님 중심의 드라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모든 초점이 모여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초점이 모여져 있어요. 이들이 평소에 가만 있다가 마리아가 배불러서 오고, 이 쪽도 배가 불러서 오는데 갑자기 엄마는 가만히 있었는데 태중의 아이 둘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뭔가 반응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출생의 비밀이거든요. 이게 사도바울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뭐예요? 우리는 지금 누굴 임신했습니까? 출생의 비밀이 우리가 나이 먹는다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신이 오든 성령이 오든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그 알게 하는 방법은, 아까 입다에서 프레임 이야기를 했지만 그 내용을 바꿔치기 하거든요.
그 내용을 바꿔치기 하기 전에 ①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를 유발시켜요. 인생 살면서 자꾸 화가 치밀게 되는 일들을 발생시킵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만들어버려요. ②그 분노의 끝은 뭐냐? 분노의 끝은 끝장 보는 거지요. “나 이제 예수님하고 안 놀아. 나 이제 하나님하고 안 놀 거야. 나 이제는 나대로 살 거야.”라고 노골적으로 나오지요. 베드로도 그랬으니까. “나 저 사람을 저주합니다.”라고 했으니까. 오죽 화가 났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오죽 자기 입장이 난처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우리 인생은 정말로 내가 아는 그 분주함과 요란함, 지하철의 그 분주함과 들썩거림의 모든 기억과 그 모든 체험들이 결국은 다 게워내고 비워내는 거거든요. 사람이 분노해서 주님과 결별해버리면 ③남는 것은 인간이 신을 죽이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내쫓는 것이고 결국 신을 죽이는 것인데 인간이 신을 죽여 버리면 ④그 다음은 인간이 신이 하는 그 모든 프레임을 자기가 다 떠맡아야 돼요.
떠맡아서 내용은 자기 잘남과, 자기의 멋짐과, 자기의 우수함과, 자기의 영생을 위해서 그 내용을 자기 맘대로 채워 넣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인생이 고되고 힘든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아야 되니까. 누가 아무도 살려주지 않으니까. 하나님마저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내 인생은 내가 수고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가 신을 죽임으로서 자기가 신이 되었잖아요.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된 이상은 내 신처럼 살아야 되니까 신에 걸 맞는 행동들을 내가 해야 되는 거예요. 꾸준히. 그게 뭐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고 보는 겁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일어난 것을 여러분이 알지요. 그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이 놓치기 쉬운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롯의 아내가 뒤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되었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뭘 우리가 자주 놓치느냐 하면, 왜 롯은 뒤돌아보지 않았는가, 하는 겁니다. 뒤돌아보는 것이 정상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입니다. 확인해서 믿을 만 하면 믿고 아니면 안 믿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볼품없는 분으로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아무도 주님에게 관심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다 떠나버렸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우리가 이미 내 인생을 내가 떠맡았기 때문에. 내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롯이 대단하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롯의 처는 뒤돌아 본 거예요.
과연 약속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겁니다. 그런데 롯은 안 봤어요. 왜냐하면 약속이 그러하면 그러한 줄 알기 때문에. 약속에 대해서 내가 돌아보게 되면 약속 성취에 내가 방해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이유가 주님의 살아 있음에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선한 행동을 할 것이고 선한 행동이 주님의 은혜를 갉아먹을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출생의 비밀을 놓친 겁니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태어난 거예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지 나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악마가 그걸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그만이라고. 네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우리는 맨 날 돌아봐요. 내가 예수 믿고 있는지 안 믿고 있는지. 주의 뜻대로 잘 되고 있는지, 기도의 응답이 잘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맨 날 돌아봐요.
그것은 롯의 처의 반복에 불과한 겁니다. 제가 아침 7시에 지난주 우리교회 오용익 목사님 오후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 시작해서 하다가 말고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뭐지?’ 마치 팽팽하게 긴장된 창호지를 면도날로 좍 그어버린 것 같아요. ‘나 오늘 은혜 받아서 바르게 살아야지.’ 하는 그 자아의 창호지 같은 팽팽함에 오목사님이 면도날로 좍 그어버린 겁니다.
제가 알아요. 오목사님이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체력이 바닥나서 그래요. 그러나 저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싼 남자 아니다. 제 일방적 생각입니다만. 그렇다. 그동안 우리는 복음을 너무 헐하게 받아들였구나. 너무 헐하게, 흔해 빠지고,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복음인줄 알았는데, 복음은 면도칼로 스스로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팽팽한 긴장도가 있는 그 경직된 내 인생을 좍 그어버리는 겁니다.
네가 아무것도 없는 공백을 네가 지키고 있다는 거예요. 허풍스런 것들밖에 없으면서도 뭐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가장하고 가식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의 풍성함을 우리가 가로막은 거예요. 여러분, 시체가 다 되어갈 때, 죽어갈 때 손 모으고 기도하다가 나중에 죽을 때는 그냥 두 손을 늘어뜨리잖아요.
이게 비방어적 모션입니다. 두 팔을 늘어뜨려서 이제 내 몸을 가져가든지 색칠을 하든지 맘대로 하세요, 하고 늘어뜨리는 것처럼 성도라면 두 팔을 늘어뜨려야 돼요. 비방어적 모션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똑똑하면 안돼요. 멍청해야 되고, 등신이 되고, 어벙벙하게 살아야 돼요. 인생이라는 게! 성도라면! 왜냐? 출생의 비밀이 나의 모든 인생을 끝까지 관장하기 때문에.
사람 씨가 달라요. 씨가 다르다고요. 그리스도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뒤돌아보지 마세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북한이 핵을 백 개 가지든 뒤돌아보지 마세요. 내 인생 앞으로 어떻게 될 거냐고 되돌아보지 마세요. 돌아보면 주께서 심판 안합니다. 삐졌습니다. 네가 보면 난 약속대로 안 할거야. 안볼 때 후딱 해치우잖아요.
그 프레임을 주님이 채우잖아요. 뒤돌아보면 그 프레임에 내 이야기가 끼어들어요. 내 잘남이 끼어들어버려요. 내가 이렇게 수고했다는 것이 끼어들어요. 내가 내 인생이 이만큼이라도 힘들여서 이뤄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자기거처는 소유하지만 시간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내 소유의 시간은 없어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마치 징검다리 두 개가 있는데 각자 자기 돌 위에 딱 서서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자기 돌 밖에 없어요. 이쪽도 자기 돌, 저쪽도 자기 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거 말고요. 그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관계로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모든 인간들은 지옥가든 천국가든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언약관계가 있는 사람은 이야기하거나 행동할 때는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이야기가 쏟아내져야 돼요. “우리 옛날에 서로 이렇게 주고받았잖아.” 이런 이야기하지 말고 “천국과 지옥은 이런 기준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나는 고백합니다. 출생의 비밀에 의해서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로 확정되었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행동하고 내놔야 돼요.
그래야 자기행동과 말에 자기 목숨을 다 담을 수가 있어요. “나는 이 기준에 내 목숨 걸었다. 내 목숨은 거기에 바쳤다.” 그렇게 돼요. 그런데 불신자의 관계에서는 어떤 관계냐? 비 언약관계에 있어요. 너는 지옥, 나는 천당. 그 관계로 이어져 있습니다. 불신자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관계 속에서 지옥가야 될 언약이 불신자하고 우리하고는 서로 맺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웃과 친하게 지내세요. 어차피 챙길 것 챙겨야 되니까. 오목사님이 개 이야기했는데 개가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거든요. 문제는 개면서도 인간인체 하는 그것이 사달난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한테 많이 얻어먹읍시다. 그러나 꼬리는 주인한테 흔들어야 돼요. 주님한테만 흔들어야지요. 이게 출생의 비밀에 걸 맞는 행동입니다.
“들어도 그만인 그런 실없는 이야기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정해짐에 내 목숨 겁니다.”라는 그런 자세와 태도로서 성도끼리는 해야 되지요. 따라서 불신자한테는 그저 이용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마 오목사님이 우리교회 설교 태도를 보고 문제를 삼았는지 화가 났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현장에 내가 없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상남자 아니다. 우리는 상남자 맞아요. 상남자 맞는데 중요한 것은 복음이 중요하지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그 여자가 예수님께 헌신한다고, 모든 것을 바쳤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아니에요. 이건 아닙니다. 여자는 프레임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의 액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자가 평생 모은 향수를 다 뿌린 것 이상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기껏 향수 다 바치는 것, 그 식으로도 주님의 헌신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냥 향수 뿌리면서 우는 것으로, 그 비어있는 공백에서 터져 나오는 주님의 사랑과 헌신과 용서를 전부 다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출생의 비밀을 줘서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사도바울처럼 성도로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빈 액자. 남들은 비어있다고 하지만, 남들은 우리보고 주님 앞에 헌신한다고 하지만 고개 저어야 돼요. 사실은 그게 아니고 주님의 헌신이 그깟 나의 헌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겁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의 세계가 뭐냐? 바로 출생의 비밀에 부합되는 사람만 집결되는 장소, 그것이 바로 예수의 나라, 아들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이미지만 드러날 뿐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너무 자기방어자세로 살았습니다. 공격하려고 했고 덤벼들려고 했습니다. 주여,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갉아먹고, 훼방하고, 주님을 욕되게 하는 짓인지를 그동안 몰랐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함과 전혀 상관없음을 새삼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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