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예정하신 뜻(엡3;10-11) 1906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6. 4. 07:41
2019-06-02 12:44:53조회 : 99         
   예정하신 뜻19060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예정하신 뜻(에베소서 3:10-1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Ej-GIn_52o, Hit:10
 이근호19-06-02 13:40 
예정하신 뜻 

2019년 6월 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3:10-11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여기에 나오는 ‘교회’라는 개념의 조건은 바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것을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느냐의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그것은 에베소서 2장에 들어와서 줄 곧 이야기해 왔습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의 피로 뭉쳐진 결과물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와 영원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뜻과 관련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 세계에 국한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저 하늘 나라를 차지하는 천사의 영역까지 확대적용되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 세계에서 국한 하는 내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천사의 나라는 천사 그들만의 활동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오히려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부러워한다는 말도 됩니다. 자, 성도에게는 있는데 천사들에게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인간 앞에서 ‘죽음’과 관련된 조항을 두신 것은 주도면밀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경유하지 않는 한 제대로 하나님의 창세 전에 예정한 뜻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죽음’을 에베소서 1:7과 에베소서 2:13에서 ‘그리스도의 피’ 혹은 ‘그의 피’라고 언급해 놓으셨습니다. 이 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다는 말은 모두 예수님의 피에 담긴 ‘창세 전에 예정하신 뜻’을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실정은 최종적 자기에게 의미를 둡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남이 이야기해 주는 ‘나’는 나를 온전히 모르고 하는 소리이며,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일단 내가 나를 떠나 따로 떨어진 곳에서 나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매사가 ‘나’라는 말은 붙여서 말을 합니다. ‘내가 믿는다’, ‘내가 책을 본다’,‘ 내가 배가 고프다,’ ‘내가 공을 찬다’ 등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이미 ‘믿는다’, ‘본다,’ ‘배고프다’ 등등의 사태가 벌어지고 난 뒤에 딋치닫거리하는 식으로 형식화시킨 것 뿐입니다. 

정작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나’를 못 놓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 안’입니다. ‘예수 안’의 반대는 ‘나 안’입니다. 그 안에서 나는 늘 절대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나를 최종적 가치를 놓는 겁니다. 바로 이러하기에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 본래의 위상이 구약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 세워 구약 이스라엘에게 찾아갑니다. 없는 나라를 새롭게 만드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 중에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땅의 백성이 다 내게 속하였지만,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라.”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줄로 모르고 그저 시키 대로 말씀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의 끝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을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은 그 자체로 ‘근본악’입니다. 이 ‘근본악’을 감추는 것을 그들은 ‘선(善’)이라고 여기고 그 선을 돋보이기 위해 악 찾기에 나서서 나열해놓고서는 그것을 그들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성향이 인간의 ‘나’입니다. 에수님께서 이런 ‘나’를 분명히 규정하시기 위해 유대인들 손에 죽으셨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끝’입니다. 뭘해도 무의미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무의미한 인간에 하나님께서 뛰어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죄인과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그 명칭이 바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관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신 겁니다. 

왜 인간들은 ‘끝!’일 수밖에 없는 가를 모으시고 이 마지막 때에는 그것은 세상 전역으로 방출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녀와 강도를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마저도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보여줍니다. 이로서 인간 세상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누가 자진해서 죄인되려고 하겠습니까!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현 인간들의 ‘끝’적인 상황을 ‘뼈’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짝 마른뼈가 곧 인간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은 사정없이 무너져야 합니다. 추가적인 가치가 의미가 소용없습니다. 바로 이런 취지에 의해 천국백성이 규합됩니다. 

여기에 동원자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도 없고, 따라 율법이 없으니 죄도 없을뿐더러 존재 가치나 의미도 없습니다. 이들을 성령님을 보내셔서 강제로 납치를 하게 됩니다. 즉 ‘끝’에 의해 부름입니다. 이들을 일방적으로 불러서 천국백성 만드는 방식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 징조가 있었습니다. 

사사기 21:23에 보면.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된 정의관에 의해서 언약적으로 필히 유지해야 될 12지파 조건이 와해되었습니다. 이를 보정하는 방식은 이방여자들을 보쌈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참으로 천국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을 마저 채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시하는 원리는 바로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것이 ‘끝장났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 피말고 다른 가치를 여기에 더 추가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입장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이들은 자기 믿음까지 부인합니다. 그래서 그 현장이 곧 예수님이 계신 ‘예수 안’인 것으로 증거합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피 공로 이외에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을 처지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얼마나 무수하게 하나님을 속이고 왔는지를 자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6-03 12:39 
26강-엡 3장 10-11절(예정하신 뜻)1906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0-11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10-11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사도가 자기의 관심사, 자기의 영안이 어디까지 넓혀졌느냐 하면 그냥 사람 사는 동네 그저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의 영역, 하늘영역까지 확장되었다는 겁니다. 지상에서 벌어지고 터져버린 그 십자가사건의 의미가, 그 위력이 땅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천사의 세계까지 장악해서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뜻이 11절에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라고 이야기해요. 예정이 이 세상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예정이 어디까지 넓혀졌는가 하면 천사의 세계, 하늘나라까지 하나님의 예정한 뜻에 의해서 완전히 덮혔다,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정했다는 그것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는 하나님의 선택이 거기에 나오지요.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에 보면 모피어스라는 사람이 주인공에게 “빨간약 먹을래, 파란약 먹을래.”라는 대목이 나와요. 빨간약 먹으면 네가 현실로 돌아오고 파란약을 먹으면 너는 그냥 환상 속에 있다. 환상을 택할래, 지옥을 택할래, 그런 이야기죠. 

영화는 그냥 환상 속에 있게 되면 영화가 안 되니까 험난한 세상, 실제세상을 택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게 선택이지요. 영화초반부터 잘못되었어요.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내가 어느 세계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영화이야기거든요. 영화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걱정까지, 그 마지막 한계까지 다 보여주는 것이 영화입니다. 

영화자체가 우리가 선택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그 자체가 환상의 세계입니다. 사도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고 환영에 지나지 않고 꿈에 지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 사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 안에 자기가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 안에. 인간은 인간 안에 놓여 있거든요. 인간은 인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의 반대말이 뭐냐? 예수 안에 놓여 있는 거예요. 인간 안에 놓여있는 상황과 예수 안에 있는 상황이 바로 이웃동네라면 그것은 예수 안을 선택하면 그만이에요. 바로 옆 동네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 안과 인간 안은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지난 낮 설교에 한 이야기 잠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 그것 환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 그것도 환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것도 환상이에요. 그것도 가짜입니다. 예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씻음 받아서 우리가 천당 간다. 그것도 환상이고 가짜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뭘 버티고 지탱하고 있느냐 하면, 내 안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들려오는 어떤 성경적 외부정보도 들어왔다 하면 내가 환상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의 요소로 다 바뀌고 말아요. 예수 믿게 되면 나는 여기서 살다가 천국 가게 되면 나는 얼마나 좋겠나. 생명수에서 헤엄 막 치고. 자유형, 버터플라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죽으면 천당 간다는 겁니다. 그 환상이 환상인지 모르고 그것은 내가 가능성 있고 노력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노력, 행함을 버리고 믿는다는 노력만 하면, 행함을 버리고,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이제 예수 믿기만 하면 그 나라에게 가겠다는 그 자체,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누굴 위해서 합니까? 본인을 위해서 해요. 

교회라는 것이 그런 인간의 심성을 노리고 대목 보겠다고 장사하는 것이 교회거든요. 그것도 2천년 넘게 계속 해왔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단체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3개월 속성으로 배웁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성경은 지금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누군지를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남이 나를 이야기하면 그게 나입니까? ‘개코도 모르면서 어디서 네가 아는 척을 해?’ 우리 이러잖아요. 그러면 내가 알기 위해서는 내가 나 밖으로 나가서 나를 하나의 이해대상으로 봐야 되는데 내가 나 밖으로 나갈 재주가 없어요. 내가 내 밖으로 나가서 ‘너 여기 있지. 내가 보겠다.’ 할 수가 재주가 없다고요. 외부에서 남이 이야기하는 것도 내가 아니고 내가 나라고 이야기하는 그것도 나가 아니고, 나는 어디서 발견됩니까? 나는 어디서 알아요?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5장도 그렇고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죽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꾸 “말씀을 지키자. 지키면 영광이 된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데 그게 죄인 줄 모르고, 그게 환상이고 마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인지 몰랐던 거예요. 그게 죄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아브라함자손으로서 율법을 받았기에 율법대로 살면 우리가 천국백성 맞다. 그것이 하나님이 확실하게 약속한 것이다.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켜서 백성 되자, 라고 하는 것이 죄에 갇혀 있는 꼴인 것을 너희가 몰랐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들이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게 죄인줄을 몰랐는데 내가 이제 옴으로 말미암아 ‘아 그게 죄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소경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눈 떴으니까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주님께서 소경 아니라고 우기는 그 앞에 소경을 딱 갖다 댔습니다. 그리고 판정 내립니다. “네가 보이느냐?” “보입니다.” “소경이다.” “너는 봤느냐?” “주님 빼놓고 보지요.” 그동안 주님 빼놓고 봤으니까, 이제 그걸 알았으니까 너는 소경이 아닌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을 늘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자신을 늘 속이기 때문에,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아닐 것이라는 그것을 속이는 방향으로, “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뭘 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나오니까, 인간이 인간을 속이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속여 버린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속이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평소에 속여 왔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속이는 재주 말고 다른 재주는 없습니다. 내가 아닌 남이 오게 되면 갑자기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거든요. 나는 오늘 밥을 먹었다. 나는 오늘 글을 썼다. 나는 오늘 설교를 한다. 나는 오늘 예수를 믿는다. 나는 오늘 천국을 소망한다. 전부 다 이게 속임수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뒤치다꺼리 하면서, 내가 한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그렇게 서술해 가는 거예요. 모든 행동이. 

내가 밥을 먹은 것이 아니고 배고프니까 밥이 들어간 거예요. 배고프다는 현상이 내 육체에 먼저 일어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내가 방금 뭐했지? 아, 내가 밥을 먹었구나.’ 하고 나를 그 앞에서 집어넣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집어넣어요. “네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거 <다모>라는 옛날 드라마의 한 대목이잖아요. 

네가 뭘 알고 아파요? 몰라요 우리는.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아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것이 환상인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억지로 감추는 식으로 살아가요. 그걸 때우는 식으로 살아간다고요. 왜 인간이 개코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 원래 인간은 율법도 없고,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에베소서 1장에 창세전에 예정했다. 오늘도 예정이 나오지만 하나님이 예정했다.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죄도 없고, 율법도 필요 없고, 그 때에는 구원도 필요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세계로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죄 지었습니다. 회개합니다.” 회개도 필요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도 필요 없어요. 

지금 믿음, 소망, 사랑, 죄, 율법, 교회 다니기, 헌금하기, 전도하기, 이게 왜 필요하냐 하면, 내가 나를 내 안에 있다고 자꾸 여기기 때문에, 그걸 제가 환상이라고 했지요, 내가 내 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어떻게 나를 추슬러야 되고, 나를 책임져야 된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된다고. 

남이 이렇다 하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내가 내 안에 있기에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항상 가드를 올려요. 그걸 방어기제라 하는데 방어메커니즘이 자꾸 올라가 있어요. 오기만 해봐라. 주먹이 탁 나간다. 이것은 하나의 버릇이에요. 애가 6개월 전까지라도 방어기제가 없어요. 그저 주면 먹고, 불편하면 울고 하다가 1년쯤부터 1년 6개월까지 서서히 자아가 등장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이 슬슬 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거짓말이에요. 교회 와서 앉아서 목사한테 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 위로라도 좋고 뭐라도 좋으니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위로가 된다면 거짓말이라도 나는 아멘이라고 하겠어.’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하신 뜻이 뭐냐 하면, 인간 안에서 방해받던, ‘인간 안’으로 말미암아 배척받던 ‘예수 안’과 교체시켜 버립니다. 예수 안이라는 것은,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요. 이야기를 쉽게 하겠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계약한 것은 뭐냐 하면, 천사의 영역까지 확대시키겠다는 그 프로젝트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예수 안에 통일시키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이 그 이야기지요. 물론 거기서 통일교가 나왔습니다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창세전에 예정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예수의 일 말고 다른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의 일 뿐이에요. 내 일은 없어요. 그런데 교회 문만 나가면 전부 다 자기 일 되어버리죠. 

뭔가 잘못되었어요. 환상이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교회 문을 떼든지 해야지. 복음 들을 때는 전부 다 예수 일이에요. 그러나 교회 문만 열면 전부 다 내 일이에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책임져야 되고. 앞에 ‘나’가 붙으니까요. 남의 가족 내가 왜 책임집니까? 예수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천국의 영역까지 몽땅 다 확장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거기서 놀라지요. 왜 놀라느냐? 오늘 본문이 그거예요.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천사들, 하늘에 있는 권세들에게까지 이 교회에서 벌어진 일, 주께서 교회 세우신 이 일을 확대시키게 되면 그것이 마감이 돼요. 모든 창세전의 계획은 전부 다 완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그러면 세상영역의 일과 천사의 일의 차이점이 뭐냐를 알려주는데 그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천사의 나라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죽음이 있는데 죽음이 없는 것이 지혜의,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죽음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진리의 완수에요. 진리의 완료입니다. 

주님께서 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 하는 이야기를 했겠어요? 완료를 내다보고 하신 거예요. 그 죽음을 에베소서 1장 7절에서는, 그리고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는 예수님의 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피’ 천사들이 성도를 부러워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고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없다는 거예요. 

화투장에서 5, 7, 두 끗 쥔 그것이 장땡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이유가 뭐냐? 장땡보다는 광땡이죠. 사람들이 광땡에 ‘옴마, 기죽어.’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광땡이 피거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피로 마감이 돼요. 자기 아들의 피에요. 예수님의 죽음의 그 위력으로 모든 것이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실제는 그것밖에 없어요. 예수의 피의 능력이 강같이 흘러넘치는 세계,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안식하고 만족하시는, 더 이상 수정이 가미될 필요가 없는 그 세계, 예수의 피의 능력의 세계입니다. 죄사함의 세계지요.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천사는 죄 안 졌기 때문에 완성에 참여가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짓게 한 그것조차도 완성으로 향하는 하나의 노정이고 그것은 과정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아담은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주의 일에 참여한 것을, 선악과 따먹게 된 것을, 그리고 자기가 죽게 된 것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마지막 영이신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지요.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이 마지막 때 예수님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그 전에는, 그걸 구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이 예수 안이라는 프로젝트를 뭘 로 봤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언약으로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누가 주도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주도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왜 예루살렘에 성전이 두 개냐, 하는 그 질문과 예수님이 곧 여호와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그 두 가지 질문을 했어요. 다들 궁금한 질문인데 질문자가 자기를 숨기고 싶어서 비밀글로 해놓았어요. 

그 내용을 지금 공개합니다. 누군지는 밝히지 않지만. 성전이 왜 두 개인지는 간단하지요. 예루살렘에 가 봐야 하늘의 예루살렘이 보이니까. 그게 언약의 굴뚝 통을 예루살렘에 박아놓았다는 말이지요. 그걸 다윗언약이라 하는데 그렇게 박아놓았으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 봐야 이것은 가짜고 환상이고, 이것은 무너져야 되고, 무너져야 되는데 이게 안 무너지면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잖아요. 

인간이 환상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밖에 발휘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그저 믿고자 하는 거예요. 성막을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막이 깨지고, 없어지고, 예루살렘이 불타버릴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은 환상이며, 모형이며, 다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실체는 따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 통 안에서, 언약이라는 그 파이프 통 안에서 보이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있어요. 자기 안을 어떻게 조치를 못합니다. 따라서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을 창세전의 계획, 예수 안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신 민족이 있었는데, 원래 그런 민족은 없는데 없는 민족 만들어놓고 그걸 이스라엘로 이름 붙이시고 하나님이 장차 예수 안이 되는, 언약 안이라는 요건을 갖춰서 먼저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생긴 것이 이스라엘이고 유대인인 겁니다. 여호와가 예수님이 되는 이유는 여호와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거든요. 

신약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되어 있다고요. ‘이름+육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호와인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질 때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는데 만들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육체 + 어린양의 취지, 어린양의 희생이 결합이 되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먼저 찾아오신 거예요. 먼저 찾아오니까 이스라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5-6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아까 말했듯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일 외에 다른 세상은 없습니다. 인간의 환상입장에서 인간들의 세계지만 진짜 실제에 의하게 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이 세계지 그 외 다른 누구의 세계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혈육적인, 혈통적인 아브라함자손에게 이걸 함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나님이 소유된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요새 말로 하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조건이 붙는데 언약대로 살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자부하고 들으면서 무엇을 놓쳤느냐 하면, 진정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말씀을, 율법을 지키겠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러나 그 결과는 뭐냐 하면, 메시아를 죽여 버린 거예요. 메시아를 배척해 버린 겁니다. 

공식 하나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곧 뭐다? 인간의 망함, 인간은 어떤 노력으로도 예수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다. 이게 정리한 공식이에요. 그게 좀 길어요? 그러면 간단히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에게 오게 되면 인간은 끝이다. 풍년 들 때 나라에서 곡식을 수매하지요. 언제 방출하느냐 하면, 가뭄이 들어서 생산량이 떨어질 때 미리 수매했던 것을 방출해서 농산물 가격을 조정하잖아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은 끝인 증거를 다 수집한 거예요. 다 모은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죄는 죄다 다 긁어모으는 거예요. 나는 내 안에 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그것이 결과가 뭐냐? 메시아를 죽이는 쪽으로 결론 맺어진다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주의 이름으로 찾아가고 언약의 이름으로 찾아가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생각을 못하고 말씀대로, 약속대로 하나님의 유일한 소유가 되니까, 이방인은 개 같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상종할 가치도 없고 우리만이 특별하고 특수한 주의 택함, 선택을 받은 영원한 주의 백성이라고 우겼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그러면 그동안 이방인은? 이방인들은 박제되어 있지요.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그냥 방치된 거예요. 에베소서 3장까지 오면서 여러분이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사도바울의 특별한 논리전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냥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 이방인, 유대인, 유대인, 이방인,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아이디어가요, 그게 환상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게 최초가 아니고 이미 우리의 선배 되는, 직접 하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그 역사를 갖고 있던 이스라엘이 이미 시행했던 거예요. 믿음으로 하면 구원받는다. 그것을 이미 이스라엘이 시행을 했다 이 말이지요. 선배들이 시행을 했어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체로. 

시행을 해 보니까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진짜 메시아 죽이고 가짜 메시아, 가짜 여호와, 가짜 하나님, 가짜 예수, 가짜 성령 쥐고서 좋다고 오락을 즐기고 있는 것, 자기 행함의 가치, 자기 자신의 결단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미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이미 유대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실패했다. 이방인인 너는? 실패할 가치도 없어요. 이것은 내놓은 자식이니까. 그거거든요. 유대인이 끝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이 끝이면 너희들도 말할 것도 없이 끝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찾아와서 모든 실험과 실습을 다 해본 겁니다. 

성전 줬지요, 율법 줬지요, 십일조 줬지요, 헌금하라고 해서 했지요, 제사지내라고 해서 했지요,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끝은 뭐냐? “메시아 꺼지세요.” 그거예요. 자기는 열심히 했으니까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환상이에요. 

제가 농협에서 기다리는 중에 잠시 보는데 농협 tv에 명단이 올라와요. 정연아(31세), 황성자 4(9세), 이옥희(66세), 안인철(66세), 이윤석(64세), 윤나라(32세), 김용미(55세). 그 명단이 헝가리 유람선 사고 구조자 명단이에요. 헝가리에 가서 유람선 타고 부다페스트 야경 즐기겠다. 환상이지요. 주께서 준비한 크루즈 배를 통해서 한번 받고 다시 뒤로 갔다가 다시 받아서 앞에 있던 배가 뒤집어진 이것은 자기의 환상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나의 나됨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돌출적으로 치고 들어온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죽음이 늘 깔려 있었던 겁니다. 죽음이 바탕화면이에요. 환상속의 바탕화면이 죽음입니다. 너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것을 기적으로 여겨라 이것들아. 숨 쉬고 있는 것을 기적으로 여겨라. 그 구조된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기 뭐하지만, 정연아, 황성자, 이옥희, 안인철, 이윤석, 윤나라, 김용미, 이것은 일종의 합격자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이름은? 천국 갔을 때, 명단 부를 때 아무개 46세, 이런 식으로 부를 때 아……, 이근호 66세……, 만으로 하겠습니다. 한 살이라도 줄여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 명단이 호명이 되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태진아 보고 옥경이 한테나 물으라고 하세요. 아무것도 의미 없어요. 

의미 있는 것은 예수 안의 피, 그 안에서만 구조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숨겨진 계획이에요. 프로젝트에요. 인생살이 그거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인생살이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합격되고, 불합격되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성실하게 말씀 지키고, 교회 다니고 그런 것이 의미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 그거 누가 했나? 내가 했잖아요. 그거 환상인데요? 

내가 누군지 몰라서 덮기에 급급한 하나의 환상, 조작된 환상에 불과한데요. ‘나 이정도로 충성합니다. 나 이정도로 주여 믿음 생활합니다.’ 하고 스스로 자기를 조작해가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남들 다 그러니까 자기도 그런 줄 알고. 그 교회 오래 다닌 권사님이 찬송 부를 때마다 해병대 박수를 하면서 주여, 주여, 하니까 방금 교회 나온 사람도 뒤따라서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요. 전도사가 앞에 나가서 찬송 인도할 때 두드리면서 하니까 자기도 그래야 되는 줄로 알고요. 

인간은 모방의 동물 아닙니까? 교육은 모방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럴 때 그 사회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처럼. 여러분, 이런 속임수는 성령 안 받아도 뻔히 아는 거예요. 인간이 어떤 사회를 선택한다는 것, ‘나 이제 캐나다 이민갈래.’ 혹은 ‘나 이제 호주로 이민갈래’ 이렇게 어떤 사회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회가 나의 나됨을, 나의 절대적 존재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걸 선택한 거예요. 

사회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아요. 나를 위해서 사는데 사회는 나의 든든한 지탱목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그 쪽을 택하지요. 그래놓고는 자기가 따로 거기서 빠져나와서 자기 자신을 절대화 시킵니다. 절대화시키는데 그 사회가 무너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에서 물러나서 그 사회를 조망하는 쾌락, 어떤 즐거움, 나는 사회를 이렇게 본다, 나 한국정치를 이렇게 본다, 나 트럼프를 이렇게 본다, 라고 그것을 평가하는 그 즐거움, 그렇게 따로 나의 절대자리를 고수하고 있다가 그 사회가 무너지게 되면 나는 내가 같이 무너지는데요? 

제가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고 평을 우리교회와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습니다. 아침 9시에 가서 제일 먼저 보고 왔어요. 남들로 하여금 스토리를 다 알아버리도록. 아주 잔인한 짓이지요. 영화 볼 때 재미 하나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제목 자체가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같이 죽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숙주에요. 

세상이 좋은 것이 아니고 기생충인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사회성이 무너지게 만들었어요. 사회가 무너지니 그들이 무너진 거예요. 사도바울되기 전에 이름이 사울이었던 그 사람도 예수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찾아왔을 때 그동안 자기를 지탱했던, 빨간약 먹고 이 사회가 진짜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 현실이 와장창 다 무너지면서 내 안에 있던 나도 같이 무너져 버린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십자가사건, 성령 안에서 십자가사건을 함축시켜서 피라는 이름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단출하게 함축, 압축해서 사도바울에게 갖다 바른 거예요. “아나 이거다! 너의 안이, 예수 안에서 너는 사기꾼이고 속임수다.” 야곱 이름이 속임수고 사기꾼이거든요. 

“너는 사기 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네 믿음도 사기고, 네 소망도 사기고, 나에 대한 사랑도 사기고, 너에 대한 헌신도, 충성도 다 사기고, 사기뿐이에요. 너는 절대로 나를 믿지 않아. 아니 믿지 않아야 돼요. 내가 나 자신의 믿음, 소망, 사랑을 믿지 마세요. 믿지 않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 느껴야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모든 증거를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은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증거를 미리 다 주님께서 수집했잖아요. 수집해서 그것을 십자가로 되찾아왔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끝이거든요. 끝에다가 무슨 의미를 더 보탭니까? 끝인데. 시커먼 색이 무슨 노랑색을 칠해요? 시커먼데!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백날 이야기해봐야 헛소리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목사님, 나는 죄인 맞아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는데 “미용실 어디 다녀왔는지 머리 나온 모양이 별로네.” 하면 “이게 어때서요?” 갑자기 가드를 팍 올려버리는 거예요. 죄인이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건드려봐야 돼요. “나는 천하에 죄인……” 한 번 건드려보세요. 끝이 아니지요. 아직도 시답지 않은 의미를 꼬깃꼬깃 챙기고 있어요. 

80넘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돈 줄 때 온 치마 다 흘러내리고 빨간 주머니 냈다가, 파란 주머니 냈다가, 꼬깃꼬깃 숨겨놓았던 것 찾는 것처럼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 안에 있는 절대성을 포기할 능력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믿음도 헛것이고 소망도 사랑도 헛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뭡니까, 도대체? 

이런 질문이 저절로 나와야 되지요. 그게 뭐냐?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나의 회개와 헌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그 현장에 누가 있어야 돼요. 그 현장에 누가 계셔요? 지금 사도가 말하는 거예요. 사도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 나 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예수 안에 있었던 거예요. 언제부터? 처음부터? 언제부터? 창세전부터. 

이게 눈이 안 열려 가지고 남들처럼 나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성령을 받아보니 소급하는 거예요. 성령 받을 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까지 소급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이었어요. 만약에 주님이 바비큐라면 우리는 거기에 발린 소스정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달랑 소스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바비큐에 발라야 맛이 나잖아요. 아주 심오한 진리를 말씀드릴까요? 여러분, 양념통닭에서 양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게 심오한 거예요. 왜 심오하냐 하면, 양념 주제에 자기가 통닭행세하고 있다는 이것이 우리는 평생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제가 20대중반에 좋아했던 팝송이 있어요. 그 노래가 새삼스럽게 지금에 와 닿는데요. “I'd love you to want me.” 로보라는 사람이 부른 거예요.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 Now, it took time for me to know What you tried so not to show”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 말은 오늘 말씀대로 하면 뭐냐? 우리는 내가 절대고 신이고 맞는데, 예수고 하나님이고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이 맞는데 이상하게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미지의 x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내가 전부라면 나는 무조건 허허, 거려야 되고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되는데 뭔가 쫓기고, 불안하고, 어떤 목표지점을 달성하려고 할 때는 ‘야, 나는 이것만 하면 더는 소원이 없다’ 했는데 달성하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확 다가오는 것이 뭐냐 하면, 허무거든요. 

도대체 허무가 어디서 흘러들어오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뭔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가 또 찾아오고요. ‘류현진이는 8승만 하면 돼.’ 했는데 이제 8승 했거든요. 이제 9승, 10승이 남았어요. 좀 있으면 20승이 남았어요. 누가 한 유명한 말대로 자꾸 배고파요. 4강도 배고프다는 히딩크 말대로. 

내가 어떻게 다 감당 못할 뭐가 솟아나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그 내력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이방인 사마리아 여인이 배고파한 사람이에요. 남자가 다섯 번째 사귀었는데 다 치우고 이제 여섯 번째에요. 자기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아닌데 얼마나 미모가 뛰어났으면. 그런데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하지요.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다. 

구원이 유대인으로 온다는 말은, 유대인은 분명히 실패한 자에요. 유대인,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했으면 끝나야 되는데 실패한 거기에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려요. 끼어들면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한테 이르는 호칭이 뭐냐? 인자입니다. 인자. 인자는 죄인 인간과 하나님의 이름이 결합된 이름이 인자에요. 

주님이 인자로서 모든 증거는 다 끝났다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는 것이 너의 진짜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저주받고 음부에 가는, 그게 십자가뿐이에요. 그게 피 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렸지요?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납치를 하게 되어 있어요. 납치. 이게 굉장히 심오……, 심오라는 말을 자주해서 ‘심오’라는 말은 더 하지 않겠습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열 두 지파가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이 원래 약속했던 조건이 열 두 지파 유지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열 한 지파가 정의로운 행세를 하다 보니 베냐민 지파가 날라 가버렸어요. 

그 베냐민 지파가 날라 갔을 때 어떻게 그것을 보충하느냐 하면, 사사기 21장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보쌈 한 거예요. 납치해서 열 두 지파를 채웁니다. 신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인물을 납치하는 것,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 피 흘린 주님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언약을 이루신 주님이 이방인을 납치해서 영원한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버려요. 

납치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창세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율법도 필요 없고, 선과 악도 필요 없어요. 여러분이 선악을 따먹고 난 뒤에 어떤 변화가 생겼느냐 하면, 선악이라 하는 것은 근본적인 악을 감추는 용도로 자꾸 선을 거론해요. 근본적인 악은 뭐냐 하면, 이미 잘린 거예요. 모든 것이 끝인데 ‘아니야. 끝 아니야. 끝이 되면 무의미가 되니까 나는 싫어. 나는 나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거야.’라고 하면서 이미 끝난 사항 인데 그걸 억지로 끝난 사항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내세우는 합리화가 선입니다. 

그러면 악은 뭐냐? 그 선이 선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밑에 깔아놓는 것이 뭐냐? 악이에요. 그러니까 선도 엉터리고 악도 엉터리에요. 악은 저 못난 사람들 거론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잘났다, 선하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그걸 돋보이기 위해서 악이라는 것을 자꾸 찾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놈. 마누라 때리는 놈. 술 먹고 행패부리는 놈. 

이런 인간들을 자꾸 거론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의롭고 선하다는 겁니다. “세리, 창기, 강도, 그것은 지옥가도 마땅하지.” 그 짓을 누가 했습니까? 바리새인이 했잖아요. 그 바리새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알리기 위해서 바리새인 이쪽, 그리고 맞은편에 세리를 같이 붙여놨습니다. 

붙여놓고 바리새인이 먼저 나서지요. “나는 저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저는 이레의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저 어때요?” 세리는 “주여, 저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하……, 여러분, 사람들의 수치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사람들의 수치가 신체 하부에 있다고 생각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하부에 있는 신체가 결국 얼굴로 돌아와요. 얼굴에 다 모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네 오른 눈 빼버리라, 네 오른 팔 잘라버려라, 했거든요. 그러면 죄 지을 때 마다 온 몸이 날라 가요. 너덜너덜 다 떨어져 나간다고요. 떨어져도 입만 살아 있으면 돼요. 모든 수치가 다 집결되는 장소가 얼굴입니다. 

그래서 뻔뻔한 얼굴, 교만한 얼굴로 남들과 마주치는 거예요. 얼추 수치스런 것은 가려놓고. 진짜 수치는 공개하고, 그 흔해빠진 육체의 부끄러움은 슬쩍 옷으로 가려놓은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수치는 뭐냐?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자기가 조치한 수치는 뭐냐? 치마만 만들면 그 수치를 가린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던 영광은 하복부의 영광이 아닙니다. 얼굴의 영광이었어요. 

빛나는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두 번째 내려올 때는 이것을 수건으로 덮었거든요. 아, 뻔뻔한 얼굴. 글쎄요. 이슬람은 그걸 알았는지 여자들이 전부 다 뒤집어쓰고 있어요. 속임수를 역으로 더 속이는 거예요. 이걸 덮었기 때문에 나는 건전하다고 우기는 그것이 고단수 속임수 아닙니까? 우리는 끝입니다. 끝났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은 뭐냐? 끝! 끝! 끝이에요. 영어로 THE END! 의미 없어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인자 되시는 주님께서 인자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 그 왕의 그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짝 마른 뼈들, 해골 있는 곳으로 가요. 

해골이 뭐냐 하면, 그게 우리 끝의 모습의 증거물입니다. 백날 살아봤자 끝이에요. 이 세상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나무로 만든 맥주 통을 돌산 위에서 밑으로 굴리는 것과 똑같아요. 굴리게 되면 인생 살 때마다 작살나고 박살나지요.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처럼 우리는 오른손 잘라야 되고 왼손 잘라내고 입만 살고 얼굴만 살고 나머지는 다 잘라내야 돼요. 너덜너덜하게. 

그래놓고 모든 수치는 홍조처럼 여기에 피가 다 모여 있으니까, 그래도 잘났대. 수치를 모아놓고 나는 의롭다고 우기는 거예요. 결국 교회라는 데가 그런 인간들의 모임의 극치 아니겠어요? 주님이 만드신 교회는, 이것은 납치된 자들의 모임이에요. “어? 네가 여기 왔나? 웬일이야. 어? 네가 왔네? 희한하네. 너 같은 인간은 평생 술만 달고 살 건데 네가 여기 왜 왔나?” “난 이제 교회 다니고 술 먹을 거야. 소주 네 병.” 

하여튼, “네가 여기 왜 왔어?” 자기가 끝이라는 사실을 성령이 알려주니까 알지요. 창세전부터 내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소스로 발리라고, 네가 소스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알려주니까 주의 일 하기 위해서 그 일환으로 교회 나온 겁니다. 내 일 없어요. 우리는 끝인데요. 끝이 보여줄 것은 뭐냐? 주님의 십자가의 증거만 보여주면 됩니다. 

죽었기에 비로소 너는 영생 얻었다. 영생이 방출됩니다. 영생이. 내 영생이 아니고 주님의 영생.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 주님의 소망과 믿음 사랑이 우리 몸을 통해서 방출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떻게 일하는가? 성도를 통해서 자기를 보여주십니다. 

지극히 이 작은 자에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말씀을 보면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도가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예수 안’ 이것이 창세전의 비밀이라고, 창세 전부터 예정된 비밀이고 인간의 일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끝인데 끝이 무슨 일이 있어요. 모든 것은 주의 일뿐인 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원했던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나를 원해라, 라는 말이지요. 

그게 로보의 노래에 나와요. “Baby, I'd love you to want me. The way that I want you - 그대여, 나는 당신이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을 원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 다음에 중요한 가사가 “The way that it should be -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20대에는 이걸 몰랐어요. 지금 봐도 모르겠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바비큐를 드러내시고, 치킨을 드러내시고, 나는 믿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사랑도 한 적이 없고, 소망도 가진 적이 없다는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부인이라 하는데, 나의 부인을 통해서, 나의 목숨을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이 추곡 수매한 것 방출하듯이 마음껏 방출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끝인 존재에서 뭘 더 할 것이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를 위한 의미를 이제는 붙이지 말게 해주시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주의 일의 일부인 것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