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9우리교회 오전설교 마가복음 7장 24-30절(예수님의 개) -오용익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를 제가 읽겠습니다.
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26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본문은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서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이지만, 어떤 느낌으로, 어떤 분위기로 본문을 읽으시면 되냐면 미리 닥친 십자가사건, 십자가사건이 앞당겨서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이해하시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거냐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주님이 이렇게 다룰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여자가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상대를 해가지고, “이게 너다.”라고 이렇게 규정을 해줬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 25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앞에 옵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귀신 쫓아내주기를 간구하고,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할 때에 이 여자가 옳소이다! 라고 이렇게 인정 했다는 것. 옳소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마땅치 않다. 너는 은혜를 받기에 마땅치 않다. 너는 그런 의미에서 너는 개다.”라는 이 규정을 이 여자가 “옳소이다.”라고 이렇게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한 겁니까?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이냐 하면은 이런 확정이 없이 예수를 믿으면 계속해서 자기 규정하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한테 묻는 거예요. 이 여자한테. 예수님께서 너한테 와서 뭘 했느냐 라고 할 때에, 보세요. 주님이 나를 개 만들었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렇게. 다시 말하면 주님 쪽에서 자기에게 남긴 흔적이 이거다. 이렇게 주님 쪽에서 남긴 것, 주님이 하신 것, 벌써 이렇게 주어, 주체가 바뀌어서 결과물로 나오는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나를 본인이 규정을 해가지고 본인이 구원받는다는 결과를 자기가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은 각자. 각자 다 자기가 믿는 자기 믿음으로 되는 겁니다. 그걸 자기규정이라고 합니다. 자기규정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사람이 살 때 다 사람을 상대해서 사는 겁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보면서. 사람은 자기규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사람 상대하면서 자기규정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보고 “당신 좀 잘생겼습니다.”라고 그러면 그때 자기를 ‘나는 잘생긴 사람이구나!’라고 나를 규정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요, 그렇게 받아서 자기규정을 할 때에, “나는 잘생겼다.” 이것을 본인이 잡아당겨서 본인이 규정하고 나서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잘생겼다는 결과를 자기가 빼냈으니까, 그 뒤에 나오는 것을 보니까 나는 잘났다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하면은, 이 오늘 본문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아요. 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을 제가 먼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너는 죄인이니까 은혜 못 받는다. 이랬잖아요. 그럼 은혜 못 받는다고, 마땅치 않다고 규정했으면 그냥 집에 가야죠. 옳소이다, 했으면 뒤에 있는 (옳소이다)‘마는’, 이것은 따라 나오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자, 이게 뭐냐고요? 너 구원 못 받아! 구원해주세요! 이게 뭐냐고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저 이거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해 못한 표정을 짓고 계시면. 여기서 못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거가 돼야 제가 그 다음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지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이 성경 말씀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이게 무슨 말이죠? 의로워야 은혜를 주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왜 죄인에게 은혜를 주죠? 제가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다 헷갈리게 만들고 있는 건가요? 예수님의 태도도 또 그래요. 예수님이 안 된다고 해놓고, 여자가 좀 세게 나온다는 느낌을 취하니까 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태도도 일관성이 없게 보여요. 그래서 본문은 다 조각조각 해놓은 것 같아요. 귀신 들린 사람이 귀신 들렸다고 이걸 고쳐달라고 하고 나오니까,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상한 대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 라고 하는 대화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가봐라! 하고. 이렇게 전체적으로 뭔가 쭉 연결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연결이 안 되는 느낌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하면은, 바로 우리가 사람을 상대해서 서로 주고받는 그 관계가 뭐냐 하면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그 논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 논리가 빠지면 아무것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제가 제 아내 때문에 진도에 가서 하루 종일 거기에 있거든요. 오늘 본문이 예수님이 이 여자를 개라고 규정했다는 것인데, 제가 하루 종일 개처럼 아내를 기다리다가 아내가 끝나면 집에 태우고 오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창밖을 보다가 플래카드를 하나 봤습니다. 근데 그 플래카드에 뭐라고 써있냐 하면은, “방치된 개조심! 똥개조심!” 이렇게 쓰여 있어요. 거기 진도라는 곳이 개가 많이 있는 곳인가 봐요. 실제로 개도 많고 뭐 개똥도 많이 싸놓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맘 때 쯤 돼서 그런 플래카드가 붙는 것 같습니다. 겨울 지나서. 그걸 보는 사람마다 이해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하는 겁니까? 그 표어를 어떻게 이해하는 거죠? 그걸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내가 원인을 물고 들어가서 결과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아, 내가 방치된 개를 조심하는 실천을 하면, 그 다음에 내가 개에 안 물리는 결과가 되겠구나!’ 이렇게 읽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 논리구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전부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뭘 하면 어떤 결과가 나한테 오겠구나!’ 다 그렇게 이해한다는 겁니다. 좀 더 길게 해볼게요. ‘내가 방치된 개를 조심하는 선한 행위를 하면 나는 방치된 개에 물리지 않는 결과가 나한테 오고 그래서 나는 의롭다.’ 이렇게 쭉 빠지는 거예요. 이게.
그러면 전부 이런 논리를 가지고 대하면 어떤 관계든, 뭐든, 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 관계가 다 나 잘났다, 이러고 산다 이 말입니다. 이 말하는데 여기까지 이야기했어요. 전부 나 잘났다, 에요. 나 잘났다. 그 나 잘났다는 것의 그 사슬입니다. 이게 전부 다. 그런 논리로 보면 이 본문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전부.
진도초등학교 1학년 3반에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증후군)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애가 있어요. 그 애는 조금만 누가 건드리면 바로 그냥 바로 울어요. 근데, 우는데 한 시간을 운대요. 30분도 울고 1시간도 운대요. 그리고 걔가 우는 게 꼭 술 취한 것 같답니다. 울면서 하는 말이 뭐냐니까 “내가 6살 때.. 내가 6살 때..” 그 말을 계속 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죠? 내가 6살 때, 내가 6살 때, 왜 그런 말을 계속 하는 겁니까? 나는 잘났다 이 말입니다. 나는 6살 때도 잘났고, 5살 때도 잘났고, 내 기억에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해주는 규정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규정은 아무도 몰라요. 우리는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예수님이 뭘 이렇게 했다고 하면 나도 그거 될래. 예수님이 뭐 이렇게 했다고 하면 나도 그거 될래.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홀로만 상대해서, 이게 뭘 연상시키는 본문이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 계시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하고 의논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이 계시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만 온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만 상대해서 한 그 규정, 그 규정으로 말미암아 개가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까지 딱 듣고 나면, 제가 이제 묻고 싶은 거예요. 개가 되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개 되고 싶은 분 누가 있냐고요? 제가 본문을 생각하면서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까? 그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사는 게 힘든 이유는 사람행세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예수님이 이 여자를 개라고 규정한 것은 이 여자 한 명을 규정해준 게 아닙니다. 이 여자 한 명을 개라고 규정해주므로 말미암아 전부 이 세상 인간들을 개라고 그렇게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개인 줄도 모르고 계속 사람이 되려고 하니까, 착한 사람 되려고 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괜찮은 사람 되려고 하고, 하니까 살기가 힘든 겁니다. 제가 진도에 돌아다니면서 개 많이 봤다고 했잖아요. 본문 보면서 자꾸 개를 보게 돼요. 그리고 개를 보게 되면 개팔자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팔자가 어떤 의미에서 나쁘지 않느냐 하면은 걱정이나 근심이 없어요. 다니다보면 아무데서나 누워서 잡니다. 왜 걱정과 근심이 없느냐 하면은 미래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나 꿈이나 이런 게 없으니까 당연히 그게 잘못될까? 잘될까? 그런 것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이 없는 겁니다.
또 뭐가 없느냐 하면은 후회가 없어요. 후회가. 왜 후회가 없느냐면 과거가 없으니까 후회도 없는 겁니다. 과거가 있어야 뭘 후회를 하죠. 그 다음에 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자책이 없어요. 내가 잘못했는지, 잘했는지를 따질 무엇이 있어야 자책을 할 게 아닙니까? 그게 없어요. 개한테는 뭐만 있느냐 하면은요, 반응만 있어요. 반응만. 주인 보면 꼬리를 흔드는 것. 그런 것 반응이잖아요. 반응. 또 잘못할 때가 있죠. 그래서 때리면 깽깽깽깽! 하는 것. 그런 건 전부 반응이고 결과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뭘 할 것이냐 하면은 주님이 이 개를 어떻게 다루시느냐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이 개를 어떻게 다루시느냐? 답은, 정답은 주님이 개를 개같이 다루신다는 겁니다. 개같이 다루시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말로 답하면 신명기 19장 5절에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어놓고 백성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들을 이 땅에 들임은 언약을 위함이다. 너희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두 가지 입니다. 언약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뭐냐, 그걸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저는 여기만 오면 정신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출발 전부터 안경 잃어버렸죠. 자동차 키 잃어버렸죠. 안경을 맞춰가지고 가야 되나, 헌 안경을 찾고, 설교를 해야 되는데 머릿속에서 설교가 다 날아가 버렸어요. 뭘 해야 하는지.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안경을 결국 찾았을 때, 그게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입니다. 그게.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에요. 오늘 아침에는 저기서 자고 여기로 와야 되는데 여기를 지나쳐버렸어요. 그래가지고 또 다급해요. 예배시간은 다 되가는데, 또 뭐 막 하고, 제가 지금도 정신없어 보이죠.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정신이 없어요. 저는 지금도 무슨 얘기를 떠들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하나만 알고 싶어요. 니 의로움은 아니니라. 니가 뭐 해서 되는 건 아니니라. 니가 알고 있는 걸로, 그걸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라. 니가 여태 알고 있는 복음의 지식 같은 걸로 니가 의로움으로 인정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라. 그것만 주구장창 생각이 나는 거예요.
주님이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겠어요? 주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 성도를 왜 그렇게 인도하실까요? 그 말은 우리가 그만큼 우리 자신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근데 은연중에 맨날 우리는 우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맨날 제가 제 아내를 안다고 생각해요. 같이 산책을 하다보면 사라졌어요.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가 이렇게 보면 없어졌어요. 두리번두리번 보다 보면 저기서 쑥 뜯고 있어요. 니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니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2주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와가지고 제가 힘든 이야기를 했어요. 나 교회 못 가겠다. 아무것도 준비도 안 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늘 설교 준비된 것 내일 다 날아가고, 그날 또 다시 하면 또 다 날아가고. 그래서 제가 막 못가겠다고 불평을 했어요. 원망을 했더니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꼭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가는 것 같다고. 너는 이쪽이라고 막 이렇게 하는데, 개목에 걸린 줄 같은 것 보이세요? 이렇게 저쪽으로 잡아당기는 강력한 느낌, 그 느낌을 이야기해주셨어요. 그러면서 “그냥 가서 죽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동의했어요. 가서 죽겠다고. 근데 지금도 못 죽겠어요. 지금도 죽고 싶지 않아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자기규정은 늘 바뀌고 수시로 움직이는 것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자기 밑 내부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자꾸 원인 결과를 짜 맞추니까 자꾸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복음들을 때도 자기 원인결과로 잡아당겨서 들으면 자기가 자꾸 복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성경을 제일 많이 공부하는 저 같은 사람들이 제일 그런 게 함정인 것 같아요. 성도들은 밖에 나가서 계속 개처럼 굴려지면서 느낌상 알아요. 그러면서 복음 들으면 잘 금방금방 아는 것 같아요.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니가 잘난 게 아니라는 것이 쑥쑥 오는 것 같아요. 근데 목사들은 막 이렇게 하면서 자기 논리로 딱 해가지고, 그 점이 자꾸 어디로 새나가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설교하는 게 힘들 리가 있겠어요?
주님이 만약에 진짜 찾아와서 개라고 규정해줬다고 생각해보세요. 왜 주님을 소개를 못하겠습니까? 주님을 만나서 이렇게 개 만들었다고.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왜 소개를 못하겠어요? 성경에 있는 잡음 같은 소리들은 다 주님이 직접 만나줬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들입니다. 사도바울에게,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렇게 직접 와가지고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라고, 너의 의로움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규정해줬기 때문에, 그 사도바울 입에서 나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이 잡음 같은 것이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아무나 이해 못하는 소리인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거는 잡음이에요. 그냥.
LP판이라고, 디지털 말고 아날로그로 하는, 바늘을 올려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있대요. 그러면 그거는 바늘을 올려놓고 판을, 그것을 긁어야만 소리가 난대요. 그런데 그 사장님이 이래요. 사장님이 듣고 싶은 소리는 오직 그 LP판만이 낼 수 있는 그 소리를 듣고 싶다는 거예요. 그것을. 그 잡음 말이에요. 그 잡음. 거기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비슷해요. 그게 그거인 것 같아요. 안 믿는 사람도 평소에 자기가 잘나서 사는 줄 아는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희한하게, 희한하게 소위 성령 받은 사람만 정말 십자가진 주님이 피 흘리신 자기 모습을 가지고 와가지고,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해가지고 확실하게, 그 관계를 확실하게 규정해서, “너는 나를 핍박하는 것 외에는 너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너에게서는 전혀 의가 나오지 않는다. 너에게서는 뭐가 나와도 예수를 죽이는 짓만 나온다.”라고 그렇게 규정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그 잡음 말이에요. 그 잡음을 그 LP판 주인은 그렇게 듣기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 잡음을.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요? 그게 예수님 자기가 규정했기에, 예수님만 규정했기에 나오는 소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예수님의 자기 흔적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책을 읽다보니까 이런 구절이 나와요. “죽음, 두려움, 눈물은 인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그 책에 나오는 글귀에요. 저는 이렇게 십자가마을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환상 같은 것이 좀 있어요. 누군가 한 30년 뒤에, 또는 50년 뒤에, 목사님도 안 계시고, 50년 뒤에는 여기 우리 중에 누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때, 그때 누군가 그 책을 보면서 복음에 대해서 눈떠서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선지자처럼 말씀을 전하면 좋겠다, 라는 그런 환상이 가끔씩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느낌으로 말씀을 듣자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다 우리 귀신이 되어가지고 그리로 가든지, 아니면 그때 그 복음을 들었던 어떤 사람이 미래에서 슝 날아와 가지고 여기서 설교하는 것같이 그렇게 듣든지. 여러분들도 거기서 다 날아와 가지고 그렇게 듣는 것처럼 그렇게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에 복음적인 흔적이, 또는 그런 게 나오는 것은 결국은 다 그런 식으로 오는 겁니다. 완성된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제가 설교할 때 처음에 그랬듯이, 이거는 완성된 미래에서, 십자가 사건이 미리 들이닥친 겁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그런 느낌으로 하자고 했지만, 사실은 그런 느낌이 아니고, 그게 실제상황입니다. 완성된 미래에서 뭔가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이게 자꾸 내려오는 거예요. 목사님이 독일에서 오시면, 독일에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독일에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셔서 복음이 선포되면 완성된 미래에서 여기에 도착하는 그런 말씀, 그런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 완성된, 그 미래라는 십자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바로 그 일이 주님이 자기 백성을 이렇게 다루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은요, 민수기 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호르산에서 아론은 죽고 이제 광야길을 가는데, 그 사람들이 다 불평을 하게 되죠. 환경이나 이런 게 당연히 좋지 않으니까, 먹을 것을 불평, 뭐 주로 그런 것, 그런 것을 다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게 나왔어요. 아주 중요한 멘트가 나왔어요. 뭐냐 하면은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여러분, 주님이 자기백성을 개같이 다룬다는 것은 그 멘트가 튀어나온다는 상황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입니다. 밀어붙인다는 뜻이에요. 제가 아까 그랬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을 모른다고요. 자꾸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의롭다고 생각해요.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결국은 십자가는 관련성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관련성이 끊어지지 않는 방식이 뭐냐니까, 니 의로움을 실시하는 방식이 뭐냐니까,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는 그 밑바닥, 심층을 들춰내는 겁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그거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데리고 가면서 그 속에 있는,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 나오도록 백성들을 인도했다는 겁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리고는 불뱀을 보내가지고 다 죽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불뱀을 치워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 불뱀을 없애주는 게.
근데 그게 아니고 다 죽입니다. 다 죽여 놓고, 사는 방법이 뭐냐니까, 놋뱀을 들어가지고 살려주는 식으로, 그렇게 쳐다본즉 살더라, 라고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쳐다본즉 살더라. 이게 어렵습니다. 여기가 어려워요. 여기 있는 어떤 사람이 그걸 이렇게 쳐다보면 산다가 되면, 그냥 불뱀을 없애주고 아까 불평했던 것을 그냥 용서해주고 이렇게 되는 것하고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쳐다보면 내가 살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저기 예수님이 있는데, 저기 있는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삽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내가지고 끊어요.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의 주님의 실시방법은 뭐냐면, 결국 제 말은 뭐냐면 죽인다는 겁니다. 죽이는 겁니다. 죽지 않고서는 이게 안 끊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뭐하시는 거냐면 그냥 죽이는 거예요. 개를 끌고 다니면서 계속 그냥 죽이는 거예요.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애초에 죽었는데, 죽음을 확인시키는 것이죠. 너는 죽었다. 너는 산 게 아니다. 살았다고 착각하지 마! 너는 죽은 거야. 죽은 거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문제가 뭐냐니까, 살았다고 하니까 계속 살겠다는 이 사고방식 말이에요. 이 자기 규정하는 방식이 여기서 시작하는 이게 문제에요. 하나님이 여기다가 태어나게 하신 것은 살라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으라고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죽으라고. 차이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와가지고 왜 죽는지 아는 죽음이 있고, 그것도 모르고 그냥 살다가 그냥 죽는 죽음이 있고, 그냥 그것 차이에요. 죽음입니다. 죽음.
신약성경에 보면 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죽음에서 시작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시작을 보세요. 시작을. 어디서 시작하는 거예요? 죽은 자 가운데서. 무슨 예수를 믿어요? 나머지가 다 죽었는데 누가 예수를 믿느냐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다 거짓말이에요. 이거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무슨 예수를 믿느냐고요?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니까요.
근데 계속 성령을 받으면 믿는다고 해요. 성령을 받으면 믿는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죽은 줄 알죠. 성령을 받으면 내가 여태 산척을 한 것을 아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리신 주님 앞에서 그렇게 아는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찾아오시기 때문에.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래서 속에다가 엔진 하나를 넣어놓은 것처럼 십자가라는 엔진이 계속 돌면, 민수기 21장 안에 있는 내용을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삶속에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갔다가 다시 왔다고. 제가 여기 교회 알고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에 오면 제가 당연히 왔다고 생각하게 되면, 제 마음 속에 제가 제 의를 챙겼다는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알 길이 없어요. 그게 당연한 거지. 제가 무슨 제 의를 챙긴 거예요. 그게. 저기 길목 갔다가 돌아온 게 뭐 그리 대수에요? 길 잘 찾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흘러가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 꽉꽉 뭐가 쟁여지는데, 자기 의가 쟁여지는데, 그게 의라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니까요.
제가 아까 읽어드린 구절, 죽음과 눈물과 두려움은 인간을 떠난 적이 없다고요. 그게 밑에 가득가득 들어있으면서 사람은 그렇게 살아요. 그런 게 나오면 안 되는 식으로 막 누르면서 사는 거예요. 그게 본질이 아니고, 내가 사람답게 사는 것 말이에요. 개가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것. 십자가가 뭡니까?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들, 예수님 당시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네, 하면서 누가 봐도 제일 사람다운 사람 말이에요. 실수 안 하고, 완벽하게 말씀 지키고 하는 그 사람들. 그 다음에 이방인이지만 정치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흠모하고, “맞아! 저게 사람답게 사는 거야! 저렇게 개처럼 되면 안 돼! 이런 여자처럼 되면 안 돼! 이런 여자처럼.” 줄 세우면 이런 여자는 맨 뒤에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 죽인 사람들은 저 앞에 서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죽인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안에 뭐가 담긴 겁니까? 그게 개라는 것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사람들이 따라다니고 좋아했던 그 내막 속에, 그 내용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이, 그게 악마 짓이라는 것이, 그게 이렇게 소복이 담겨있는, 그게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이 뭐로 찾아오겠어요? 어떻게 찾아오겠어요?
“이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으니까 이 십자가를 믿어라!” 이렇게 찾아오겠어요? “내가 산 게 사는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알도록 찾아오겠죠. 내가 그동안 산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거기다가 이렇게 심어놓았던 모든 개념들이, 이게 진짜 하나님을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고 알겠죠. 산 게 아니었구나! 죽은 거였구나! 죽음이었구나! 더 나아가서 저주였구나!
자, 여기서 중요한데요. 여기 성경에 보면, 우리 생각에는 개가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되어야 되죠. 교회가면 다 그렇게 가르쳐요. 개차반 같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사람 된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 예수님이 너 개라고 딱 규정해준 이 개가, 개의 표상, 개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요. 처음에 예수님한테 “옳소이다”라고 해서 규정받을 때도 개잖아요. “옳소이다마는 개도”라고 해서 이게 계속 개로 이어져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게 무슨 뜻이죠? 이게. 왜 계속 개이어야 하죠?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살려주는 그런 것은 가짜라는 거예요. 개인구원이 가짜라는 거예요. 민수기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일단 다 죽여요. 불뱀이 와서 다 죽어요. 거기 쳐다보면 살더라는 것은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뻔 했는데 그것 쳐다보고 살았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냥 저 뒤에 있던 그것을 그대로 다시 끌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쳐다본즉” 안에는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은 “죽었습니다.” 그런 뜻이 들어있는 거예요. “죽었습니다.”라는 뜻이. “일단 죽었습니다.”라는 것은 거기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내 뒤에 있는 어떤 죽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살려낼 일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나를 살리는 복음은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복음은 없어요. 주님이 살리는 것은 뭐냐 하면은요, 주님이 찾아와서 알려준 그 죄인이 살아나는 거예요. 주님만 아는 죄인 말이에요. 율법이 이르매 나는 죽고 죄는 살아났다. 주님만 아는 죄가 살아나는 거예요.
주님만 아는 죄가 살아나야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도 같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게 주님 안에 있는 백성이에요. 그게 성도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주님이 개라고 규정한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계속 그 죄인의 자리에서 못 떠나게,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계속 몰아붙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구원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솜씨가 대단한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자기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기만족을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백성을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몰아붙이는 거예요. 니 의로움이 아니니라. 계속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붙여져서, 우리 속에서 나도 미처 모르는, 근데 여러분이 듣는 게 영 내 이야기가 아닌 것같이 들으셔서 제가..., 나도 미처 모르는 내 밑에 있는 악마와 대면시키는 방식. 악마. 내 속의 악마. “나, 사람 아니었습니다. 괴물이었습니다.”라고 그렇게 끄집어내는 데까지 밀어붙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나오도록, 나는 죽고 주님이 하신 일만 나오도록. 뭘 하셨는데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죽으심이 뭐예요? 하나님한테 심판받았잖아요. 하나님한테 버림받았잖아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그게 악마하고 싸워서 이겼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람들이 그 말씀도 다 이렇게 이해를 할 거예요. 내가 죽기가 무서워서 내가 힘들게 사는데, 내가 이제 예수를 믿고 나를 구원해주려 하심이니, 라고 다 이렇게 이해를 할 거예요. 그 본문을.
제가 아까 그랬죠. 죄를 아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주님밖에 없어요. 저주를 아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이 저주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주님이 죄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지가 죄를 끌고 들어가서 은혜 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죄를 끌고 들어가서 은혜 받겠대요. 가짜입니다. 주님이 직접 찾아와서 죄는 이런 거야, 라고 정말 알려준 대상이 아니면 아무도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신다는 말은 그 말입니다. 죽이러 오는 거예요. 죽어라! 죽으면서 시작해라!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잡음이 나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님이 찾아왔으니까, 주님이 찾아온 그 사람, 주님이 알고 있는 죄라고 규정해준 그 사람만, 비로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잡음이 나오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뭐가 살아나는 거예요?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살아나는 거예요. 나를 죽여서, 이게 중요하죠. 나를 죽여서 주의 은혜를 살리는 겁니다. 나를 죽여서.
민수기에 가보면 다 죽이고, 죽여 놓고 들어서 쳐다본즉 살더라. 쳐다본다는 것은 다 죽었다. 죽었다. 분명해 해놓고, 그 죽음을 의로 바꾸시는 주의 능력이 살더라. 이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아이고, 정신없이 떠드는데 이상하게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잘 설명을 못하는 거겠죠. 목사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마지막으로 예수님 만난 이 여자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요, 그 여자가 한 말을 받아가지고, “니가 이 말을 하였으니 가라. 니 딸이 나았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그냥 성경을 보면 주님이 이 여자의 간구를 들어줘가지고, 누구 귀신 쫓아내줬다, 개인사정을 들어줬다,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제가 지금까지 뭘 죽이고? 오늘은 이거 하나만 무조건 기억시켜주고 갈 거예요. 그런 너를 죽이고.
그러니까요, 십자가는 교체입니다. 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나가지고. 십자가는 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모르니까요. 주님이 죄를 퍼서, 우리가 죄를 몰라요. 우리가 이거 교체해주세요. 내 인생 교체해주세요. 제 아내가 애들 교실에서 이렇게 할 때, 그림 그리잖아요. 그러면 도화지를 자꾸 바꿔달라고, “저요! 도화지 좀 바꿔주세요.”라고 한 대요.
그러면 제 아내가 안 바꿔준답니다. “그냥 그려 이 놈들아!” 이렇게 하면서, 안 바꿔주면서 속으로만 말하는 것이 있대요. ‘바꿔서 새 도화지를 주면 뭐 하려고? 이미 망친 인간들이. 어제도 망쳤고, 오늘도 망쳤고, 내일도 망쳤고.. 그냥 그려. 그 도화지에다가. 어차피 망친 인간 안 달라져. 니들이 그런다고 개가 사람이 안 돼. 그냥 ADHD면 그냥 ADHD로 그냥 하고. 그냥 괴물 그림 그려. 니들이 괴물 그림 그리면 괴물 그림 그대로 선생님이 갖다가 붙여줄게.’
그게 멋있는 그림이 아닌가요? 왜? 그건 누구의 솜씨니까? 선생님의 솜씨. 어떤 솜씨? 괴물을 덮어주는 선생님의 사랑과 긍휼이 거기에 쏙쏙 녹아있는 선생님의 솜씨니까. 그 그림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이 어디에 있어요? 제가 그림을 보면 다 괴물이에요. 애들 그림이. 자기 얼굴을 그린 건대요. 다 괴물을 그려놨어요. 그림 정말 잘 그린 겁니다. 걔들은 어떻게 자기얼굴을, 자기모습을 잘 아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자기가 괴물인줄 알았냐고요? 다 괴물 그려요. 귀도 저기에 달리고. 삐뚤빼뚤하게 그려놨어요.
십자가는 계속 교체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내가 지금 살아있으니까 더 살자! 라고 나오는 그 모든 개념들을 주님 앞에 가져가서, 주님이 그걸 딱 끌고 와 가지고 죽음으로 처리하고, 거기다가 주님의 것을 계속해서 넣어주는 식으로, 그렇게 바꿔주는 교체하는 자리입니다.
내 의로움이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만 의롭습니다. 주님 피만 의롭습니다. 그렇게 계속 바꿔서 나올 때,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다 감사하고 다 고마운 것이죠. 그 순간은. 다 모든 것이 주어가 바꿔져서, 주께서 주셨다, 주께서 주셨다, 그 주께서 주셨다는 것은 그 교체에서 왔기 때문에 다 피가 묻어있는 겁니다. 다 피가 묻어있는 거예요. 그런 안목. 물론 돌아서면 나 잘났다고 하지만. 그런 나 잘났다는 것을 잡아당겨서 괴물을 드러내고, 그 괴물을 죽여서 거기다가 피 발라서 자꾸 내놓는 겁니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그런 예화를 잘 드시잖아요. 요리사. 저기서 재료가 들어오면 다다다다 해가지고 요리하나 딱 나온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그렇게 교체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최종 확인하는 것은 뭐냐, 이 여자가 최종 확인하는 것은, 개가 최종 확인하는 것은 내 개인사정 들어줬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다. 주의 말씀대로 된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대로 되는구나! 모든 일이 다 주의 말씀대로 되는구나! 무엇까지? 내 귀신들린 것까지. 나는 내 딸 귀신들린 내 개인사정 알아달라고 주님한테 갔는데, 주님은 그걸 잡아당겨가지고 바꿔서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주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늘 최종 확인한다는 식으로 주님은 자기백성들을 끌고 다니면서 그렇게 다루신다는 겁니다.
제가 개를 많이 봤다고 그랬잖아요. 그래가지고 훤히 아는 게 그래요. 개는 다 똑같이 그냥 개에요. 진도의 개가 명품 개라고 해서 족보 있는 개를 키우는 곳입니다. 근데 개가 족보가 있다고 그래가지고 그 개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성도나 아닌 자나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하고 다 그게 그거고 뭐 그렇게 차이가 안 나요. 근데 제가 어떤 장면을 봤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개 한 마리가 가는데 제 눈에 훅 들어온 게 뭐냐면, 굉장히 당당하고 늠름하고 뭔가 포스가 있는 모습이랄까? 처음엔 개만 봤어요. 그러다 옆엘 보니까, 주인이 따라오는데, 주인이 그냥 초라해요. 농사짓는 거기 할머니에요. 호미가지고 뭘 하고...,
그래서 제가 개한테 물었잖아요. “너는 뭔데 그렇게 당당하냐? 개 주제에? 의로움이 없는 주제에 뭘 그렇게 당당하냐? 뭐 너 볼 게 뭐 있냐? 주인도 뭐 볼 게 없고만?” 그랬더니 그 개가 딱 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건 사건입니다. 주께서 바늘을 올려놓을 때, 주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 바늘에서 긁을 때 나오는, 세상에는 없는 잡음 같은 겁니다. 사건이에요. 그 사건이 혹시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를 모릅니다. 주께서 늘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찾아오셔서 우리가 누구인지 가르쳐주시고 또 죽여주셔서, 죽은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죽은 그 피, 그 사랑, 그 고마움만, 주님의 것만 사랑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