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2우리교회 오전설교 누가복음8장 40-56절(체험과 믿음) -정석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8장 40절에서 56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105쪽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0절,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절,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43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절,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절,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절,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절,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그 내용의 말씀입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 보면 희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소유가, 원래 처음 기업을 분배할 때 그가 가졌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누가 가장 좋아하느냐, 라고 할 때는 가진 게 없는 자, 종이 된 자, 빚을 많이 진 자, 이런 자들이 희년을 가장 좋아하죠.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희년이 실시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유월절도 두 번 정도 그들이 지켰을 뿐이고. 그것도 뭐 제대로 지킨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많고, 소유한 것이 많고,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희년이 너무 싫어요.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의 성령을 받으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가진 것이 많은 자는 예수님이 싫습니다. 오늘 사월 초파일이라고 절에 많이 가잖아요. 제가 등산을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운동을 좋아하니까, 산에 가면 꼭 제가 들르는 곳이 절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절에 잘 안 가신다는데, 불날까 해서 들르셨다는데.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절에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솟아나도록 조성이 되어 있어요. 환경이. 뭐, 절간만 그렇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교회가면 뭔가 나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되는 일이 없고, 뭐 사업을 한다든지 사람을 알아가는 그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교회 가는 것을 좋아하죠. 이와 달리 복음이 전파되면 교회 오는 것을 싫어해요. 여러분이 아마 이전에 복음 안 전하는 교회에 다닐 때는 10시 반 전에 다 교회에 다 오셨을 거예요. 아마. 찬양대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잖아요.
이 희년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섰을 때에 과연 누가 예수님을 좋아하느냐,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까,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느냐 하면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이런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눌린 자가 누구냐, 포로 된 자가 누구냐, 라고 할 때에, 이 성경에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포로 된 자죠. 그 당시에 잘 사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 안 돼요. 아마 3퍼센트. 필리핀에서는 3퍼센트가 97퍼센트의 경제력을 갖고 있다고 옛날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를 모르겠어요. 이 당시에도 3퍼센트 정도의 그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지만 나머지는 다 어렵게 겨우겨우 살았죠.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문자대로 실제로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고 저는 자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니까, 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 다윗 왕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먼저 거라사인 지방에 가셨다가 돌아오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거라사인 지방은 갈릴리 북쪽이라고 할까요, 블레셋 지방, 이방민족 지역이죠. 그 지역에 갔을 때에 군대귀신을 쫓아내고 이렇게 돌아오는 이 시점에서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그러한 장면입니다. 거라사인 지방에 갔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은 군대귀신이 들린 청년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죠.
근데 그 군대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간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기도를 들어줍니다.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간구를 하니까 예수님께서 허락을 했어요.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왜 들어주느냐? 마귀가 제 역할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 들어가라!” 들어가니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거라사인 지방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하죠. 군대귀신이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왜 나를 괴롭게 하려고 왔습니까? 제발, 제발 저를 무저갱으로 넣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듯이.
그 무저갱이 어딘고 하면 재산을 잃는 곳이에요.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은 돼지 떼를 잃어버리니까, 재산을 잃는, 자기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무저갱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제발 우리 동네를 떠나세요.”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 간청한다는 말은 역으로 표현하면 쥑여버린다는 겁니다. 이방인이 죽이면 안 되죠. 아직. 유대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야하니까.
자,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셨어요. 다시 돌아오실 때 사람들이, 무리가 환영을 했습니다. 그들이 너무너무 기다렸던 거죠. 왜? 예수님께서 앞서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고, 주의 권능이 예수님과 함께 하여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환영하죠.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과 정반대입니다. 이익이 되는 쪽은 환영을 하고 손해가 되는 쪽은 거부하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죠.
회당장 야이로가 이 사람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로 와서 엎드려서 간청을 합니다. 무엇을 대표로 하느냐 하면은, 이들이 왜 예수님을 환영했는가, 그 마음속에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환영했는가, 그 내용을 지금 회당장 야이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라는 것이죠. 성경이 재미있는 게, 여러분들도 성경을 좀 읽어보시는 줄로 생각이 됩니다마는,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이 이 누가복음과 이 사건 내용이 다르게 기술되어 있어요.
학자들은 성경이 다르게 기술되어 있으니까, 저자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이 가장 원래 오리지널 스토리냐, 그걸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은 고정이 되지를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고정이 안 돼요. 달리 말하면 십자가라는 것 자체는 고정성이 아닙니다. 왜 고정이 안 되느냐 하면은 인간 자체가 고정성을 제공하면 바로 그것을 자기 소유로 삼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전에 사도행전 강의를 들을 때, 지난여름이었습니까? 거기에 보면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세 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는데, 다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다고 했죠. 똑같은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달라요. 죄를 끄집어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기도하신 분이 늘 다른 조건을 주신다고 했죠? 하루하루가 다른 조건을 주시는 이유가 있어요. 다른 조건을 주지 않으면 인간은 진리라는 것을 확보해서 그것을 갖고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구약을 연구해서 진리를 확보했어요. 확보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재단을 하는 겁니다. 이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진리체계 속으로 들어와 있는지, 들어와 있지 않는지, 한 번 보자는 것이죠.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잘라내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도 저에 대해서 저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죠. 내가 알고 있는 진리체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에 그래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의 딸이, 다른 본문에는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여기에서는 죽어간다고 표현하고 있거든요. 죽어간다고 표현해야 뒷부분이 설명이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회당장과 함께 그 집으로 가는 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를 한 거예요. 지지난주에 설교를 다했고. 옷깃을 만졌는데, 옷술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잘 안 나와 있죠.
민수기 1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5장을 보면 독특한 말씀이 나오는데, 37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8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절,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좆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절,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이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도 마찬가지죠. 지금 다 겉옷을 입고 있잖아요. 겉옷 옷 끝에 네 곳에 옷술을 답니다. 옷술. 이런 곳에는 술이 없는데, 끝에 청색실을 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보면 옷술이 다 보일 것이 아니에요? 그렇죠? 걸어다니면. 옷술을 달게 한 이유가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보이는 눈, 그러니까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 옷을 다 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절제를 가르친다, 라는 이런 표현을 말씀에서 하고 있어요.
지금 이 여자가, 혈루증이 걸린 이 여자가 만진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고 하면 바로 이 자리입니다. 청색실이 달린 이 옷술. 독특한 거거든요. 이게. 그런데 우리 성경은 지금 번역이 너무 애매하게 되어 있어요. 무엇이 애매하게 되어 있는고 하면, 39절에 보면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을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처럼 마음이 내키는 대로 눈에 드는 대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왜냐하면 지금 우리 성경은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렇게 하니까 탐심정도로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간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희한하죠. 아니 옷을 입고 다니는데, 전부 다 너희들이 간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옷술을 달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자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단 옷술을 만진 거예요.
왜 만졌습니까? 뒤에 나오죠. 이 사람이 12년 동안 병에 걸려서 많은 의원을 찾아갔지만, 맨 뒤에 나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소비하고, 이제 더 이상 의지할 게 없죠. 그런데 들리는 소문은 어떤 소문입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고 병자도 고치더라. 아, 저분의 옷술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대단한 믿음입니다. 근데 사실은 대단한 믿음도 아니죠. 우리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런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복음을 아니까 그런 믿음이 안 생긴다, 라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주님이 환경을 조성하시면 우리는 당해야 돼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몰라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해버리니까, 이 여자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은 옷술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그 확신. 아무도 모르게 만졌어요.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고 서로 밀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옷을 만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 나를 만졌느냐? 이렇게 물으니까, 베드로가 대뜸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여’는 퀴리오스가 아닙니다.
제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성경 열심히 읽으라는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주여’는 퀴리오스가 아니고요. 다른 단어에요. 뭐 발음을 해봤자 어려운 단어니까, 의미가 뭐냐 하면은 함께 동행 하면서 나를 도울 분. 앞서서 풍랑이 일었을 때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할 때에 그 ‘주여’도 퀴리오스가 아니에요. 자기를 종으로서 보는 자세로서의 주님이 아니고, “예수님! 좀 도와주세요. 지금 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도움이 필요 합니다.”라는 이런 용어를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는데 누가 건드리기는 누가 건드립니까?”
예수님도 좀 심하죠. 병이 나았으면 그냥 보내면 안 돼요? 안 보냅니다. 왜? 예수님께서 병 낫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거든요. 여기에 보면 다 아니라고 하거든요. 그 ‘다’ 속에, 우리가 놓칠 수 있는 본문인데, 8장 45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여기 다 아니라 할 때에, 여기 다 속에 누가 들어가요? 만진 그 여자도 들어가는 거예요. 이 미세한 이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자는 확신한 믿음을 갖고 병이 나았으니까, 챙길 것은 챙겼죠. 챙겼으니까 이제 가면 되잖아요. 12년 동안 내 평생소원은 이거뿐이잖아요. 이 병 낫는 거. 그러면 그거 나았으면 됐잖아요.
여자가 더 이상 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47절에,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이렇게 나와 있어요. 성경이 재미있어요. 모든 사람 앞에서 고했어요. 앞부분에 거라사인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가 정신이 말짱하니까, 그 사람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해요. “예수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고 싶습니다. 따라다니고 싶습니다.”라고 요청을 해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은 “따라오지 마라. 집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하나님이 너에게 하신 일을 샅샅이 낱낱이 고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근데 거기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는고 하면 이 사람이 돌아가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동네방네에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시켜야 해요. 군대귀신이 나갔으니까 굉장히 좋겠다. 사도바울이 군대귀신 들렸다가 군대귀신이 나갔죠. 스데반 집사님이 군대귀신 들렸다가 군대귀신이 나갔어요. 그 인생이 어떻게 됐습니까? 나를 구원하는 구원은 없어요. 나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이 여자는 무엇을 예수님 앞에 드러내었는고 하면 자신의 욕망을 표출했죠. 그 욕망이 아까 간음이라고 표현했잖아요. 이 간음이 구약에서는 남녀 간의 문제가 간음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해요. 달리 말하면, 십계명에 의하면 자기를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그 말씀에 근거하면, 자기를 위한 것은 모두 다 우상숭배에요.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간음하지 말라고 옷술을 만들어놨는데 이 여자는 그 옷술을 뭐로 봅니까? 우상숭배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불러서 자기가 어떤 연고로 그 예수님의 옷술을 만졌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떤 인생이었고,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모든 사람 앞에서 낱낱이 고합니다. 낱낱이 고했으니까 사람들이 그 여자를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요즘 한국교회 같으면 좋아하겠죠. 그런 사람들 데리고 다니면서 간증하니까. 근데 이 사람이 뭘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기 전과 물은 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묻기 전에는 자기 욕망, 우상숭배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봤다면, 예수님이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는 그 속에 십자가의 영이 들어와 버렸어요. 우리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과 그리고 자기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본문에서는 낱낱이 고했다고 표현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사도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사람들 앞에, 모든 사람들 앞에 외친 거예요.
마음속에 “너 알아. 됐어. 그럼 됐어. 너 구원받았어. 그래 됐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만든 거예요. 누가복음 쓴 사람이 사도행전 쓴 사람인줄 알죠? 이 여자는 그걸 알았죠. 뭘 알았습니까? 12년 동안 혈루증 걸리게 하신 분도 주님이다, 라는 것을 알았어요. 백부장이 앞부분에 나오거든요. 이 백부장도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 고백이 어떤 고백이냐 하면 그 말씀 속에 자기의 인생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 나를 백부장으로 주께서 만드셨어. 그래서 나에게 선한 마음을 주셔서 회당도 건립도 하게하고 유대인들 장로들에게도 인정받게 한 그러한 인생을 살게 해서, 먼저 장로들을 보내서, 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서 먼저 하인들을 낫게 하여서 나의 위신을 더 높이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영이 들어오니까, 십자가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한 자기 인생이었다는 것이 고백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여자의 믿음이 도대체 뭘까요? 이 여자의 믿음은 자신의 믿음과 주님의 믿음이 겹쳐져 있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으면 십자가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여자는 이 옷술을 만지면서 제대로 된 자기 사랑, 우상숭배를 보여준 거예요. 그 우상숭배 하는 자가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여 버리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그 당사자가 자기인 거예요. 그 용서하심을 안 겁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기의 믿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주님의 믿음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 지난주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발 믿음을 보이라고요. 믿음도 하나도 없으면서, 믿음을 안 보이어요. 여러분들이 돈 벌면서 자식 키우면서 살면서 얼마나 믿음이 많습니까?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이 여자 속에 합류당하지 않으면 그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릅니다.
자,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본문으로 넘어오겠습니다. 시간이 끌어졌죠.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죽어가게 되었는데 한시라도 다급하지 않습니까? 다급하면 마치 나사로가 죽어가게 생겼으니까 빨리 와서 고쳐달라고 하니까 머뭇머뭇 거리듯이, 이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 거예요.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자 때문에.
그러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어요.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듣기 좋은 소리 같지만, 이 사람이, 회당장 집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 겁니까? 아, 죽었으니까 죽은 자는 못 살린다고 본다, 라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이 본문에 의하면.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조롱할 때, 이 조롱하는 방식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롱해버립니다. “더 이상 괴롭게 마소서.”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만일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 부모라면.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을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릴 거다. 이래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씀해버립니다. 만일에 이 말씀이 죽은 자를 가지고 살리는 내용으로만 말씀해버리면, 늘 죽은 자를 살려야 돼요. 예수님은 죽은 조차도 그림자로 봅니다.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죽음. 그리고 살아나는 것조차도 진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림. 그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온 무리들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환영한 이유가 뭐였어요? 그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했죠.
그러니까 무리들 중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야, 믿기만 하면 살릴 수 있지 않느냐? 저 집에서 온 저 사람 진짜 믿음이 없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 다르거든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희한한 일을 벌입니다. 51절,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마태복음하고 마가복음은 좀 다르게 설명되어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은, 그 다음 52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 누구냐, 우리가 볼 때는 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피리 부는 사람들이나 훤화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애곡하는, 슬프니까 그 슬픔에 동참하는 이 사람들이 비웃었더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 누가복음에서는 어디에 이 본문을 배치했느냐 하면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아이의 부모 외에는 들어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다음에 모든 사람들이 울고 통곡하매, 라는 본문을 배치해놨어요. 독특하게 배치해놨습니다.
그러면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그의 부모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요. 누가복음에서는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렸거든요. 제자들이 그걸 목격했어요. 그리고 거라사인 지방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서 죽게 되었을 때,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을 잔잔하라고 해서 잔잔하게 되는 경험을 했거든요. 했다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믿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부모도 그럴 수 없죠.
왜냐하면, 이게 성경이 재미있는 게 그래요. 부모는, 미운 자식은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사랑하는 딸이잖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믿으라. 믿기만 하면 딸이 산다.”라고 하면, 여러분이 부모라면 그 말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부모가 안 돼봤나요? 믿는다니까요. 사람은. 아니, 목사님 그거 가짜 믿음 아닙니까? 가짜 믿음이고 진짜 믿음이고 필요 없어요. 무조건 믿는다니까요. 진심을 다해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냐 이거죠. 체험을 했다 이 말입니다. 체험을 했는데 예수님 말이 믿어지느냐, 안 믿어요. 오히려 비웃어요. 우리 같으면 그런 체험을 했으면 믿어야 될 게 아니에요? 비웃는 것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이미 죽었거든요. 죽은 그 아이를 보면서 예수님이 잔다고 하니까, 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부모들이 비웃는 거예요. “아니, 뭐 죽었는데 뭘 자고 있어?” 여러분, 장례식장에 가죠. 화장터에서 지금 태워지고 있잖아요. 그걸 보고 자고 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미쳤나! 라고 이야기하죠. 지금 그 이야기에요. 성도들은 미친 사람이죠. 지금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거예요. 경험이나 체험이 과연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주님께서 날마다 조성하시는 그 환경 속에 담기는 것을 싫어해요. 싫어하기 때문에 날마다 변하는 환경을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그 고정시키는 방식이 성을 쌓는 것이고, 안 그러면 혈통으로 연결하는 그 방식인데, 주님은 그걸 용납하지 않거든요. 주님께서 새로운 환경을 줘버리면, 과거에 내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심지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들,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왜 그런가? 주님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홀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주께서 조성하시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무너져야 돼요. 근데 인간이 선악과를 아는 지식 있죠? 지식. 이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릅니다. 지식이 있어버리면 지식이 자기 몸을 조종한다, 라고 생각해요. 착각이죠. 조종할 수 있는지 한번 해볼까요? 가시로 여러분의 몸을 한번 찔러보세요. 그 지식이 여러분을 통제할 수 있는지. 지식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지를 못해요. 주께서는 지금 새로운 환경을 조성했어요. 아니, 군대귀신 나가는 것까지 목격했거든요. 목격했어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일하시는고 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일하시는고 하면, 비웃음을 당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좀 비웃으면서 살아야 돼요.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군병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 다 조롱하잖아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니도 내려오고 한번 해보라. 그 모습을 보여 봐라.” 근데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닌가요? 환경이 계속 바뀌잖아요. 근데 인간은요, 그 바뀌는 환경을 고정시키려고 해요.
‘멋진 신세계’라는 올더스 헉슬리 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어요. 1932년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지금 현대 세계를 아주 보여주는, 기계화된 세계, AI부터 시작해서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는 그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예언서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보면 재미있는 게 나오는데 ‘소마’라는 약품이 나와요. 헬라어로 소마는 몸인데. 이 약품을 사람들한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먹이는 겁니다. 그걸 먹이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면 환상세계로 빠져들어요. 인간들은 그러한 어떤 안정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죠. 그 안정적인 것 중에 가장 안정적인 것이 뭔고 하는가 하면 이 진리에요. 진리.
구원파라든가, 다락방이라든가,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당당한고 하면, 어딥니까? 박용기 그쪽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구원을 확보해버렸어요. 진리체계를 자기가 소유해버렸어요. 소유해버렸으니까, 자기들이 무엇을 해도 죄가 아니에요. 그런 안정권으로 인간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의 부모들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그 현실을 목격하게 하죠. 그 현실 속에서는 비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이 생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반대죠.
아까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그 여자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죠. 확실한 믿음. 근데 여기에서는 정반대의 불신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다른 이야기를 성경에서 말씀하실까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확실한 믿음이 있든지, 아예 불신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성도는 어디에 위치할까요? 둘 중 하나죠. 어떤 때는 확실했다가 어떤 때는 불신했다가. 그래야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어요. 도무지 우리 인생이 뭔가 붙들어서, 확보해서 신앙생활을 유지해나갈 그러한 환경을 주님이 조성해주질 않습니다.
제자들이 당한, 풍랑이 일 때부터 시작해서 거라사인 지방에 가서 목격하는 것, 그리고 열두 해 혈루증 걸린 그러한 상황, 이 모든 것을 목격하는 것이 사실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성령 받은 사도들의 모습이에요. 근데 성령 받은 사도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아주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아무튼 희한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가 볼 때는 희한하거든요. 왜 희한한가 하면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거든요. 성령 충만을 받으면 그 다음 어떻게 살아갈까요?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말은 십자가 복음을 확실하게 알았다는 이야기에요. 맞죠? 아닙니까? 제가 잘못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 충만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영이 임했다는 거거든요. 십자가 영이 임했다는 것은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았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알았는데, 알기는 뭘 알아요? 하나도 몰라요. 어떻게 모르는가? 고넬료 사건을 한번 보세요. 고넬료 사건에서 이 더러운 음식, 레위기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이렇게 내려주니까, 갑자기 법이 튀어나와요. 법이. 그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고기잡이 어부에 불과했지만, 얼마나 율법에 충실한 사람인지 몰라요. 그게 바로 성령 충만 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왜?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거 합니다. 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 충만 받았기 때문에 완전히 어떤 때는 복음 모르는 인간으로 나와요.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올라갔을 때, 야고보에게 사람들이 오니까 이 게바가, 이름도 꼭 게바라고 표현을 해요. 시몬이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이 사람이 외식을 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앞부분을 보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어요. 지금 누가 다른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게바가 다른 복음 이야기하고 있다니까요. 이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게바를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자기의 사도권,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면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이신칭의를 이야기하거든요. 행위는 배제하고, 율법 배제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 하잖아요. 마치 그걸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요. 아니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십자가의 능력으로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걸 몰라서 외식했겠어요? 몰라서 그걸 외식합니까? 다 알아요. 아는데, 주께서 그렇게 환경을 만들어버리니까,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 하필 그때 외식을 하는 거예요. 아! 우리랑 똑같으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주께서 주신 성령을 받은 자는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게바가 축복받은 거예요. 그럼 사도바울은 그런 게 없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고백하잖아요. 물론 바나바와 다투는 장면도 나오지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나도 책망 받는 게바와 전혀 다르지 않는,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으로 살려지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도권을 누구한테 줬습니까? 제자들한테 준 게 아니고 주님이 친히 갖고 계시죠.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그 인생을 십자가 피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계속해서 몰고 가는 거예요. 몰고 가니까 어쩌겠습니까? 십자가 피만 자랑할 수밖에 없죠. 복음 설교 들었는데 잊어먹었다, 잊어먹는 게 복이에요. 안 잊어먹었다, 안 잊어먹어도 복이에요. 안 잊어먹어야 지가 안다는 것을 끄집어낼 게 아닙니까? 잊어먹으면 모른다고 끄집어낼 게 아닙니까? 그게 다 주께서 조성하신 환경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께서 십자가로 이미 다 끝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지금 제자들에게 닥친 그 환경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으로 내몰려지는 것에 대해서 저희들이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는 자체가 주님을 비웃는 인생이고, 살아가는 자체가 우상숭배 하는 인생임을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지금도 친히 살아계셔서, 피 공로만을 높이기 위해서, 주님의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