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경륜(엡3;1-4) 1904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29. 16:54
2019-04-28 12:42:56조회 : 397         
   하나님의 경륜 19042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하나님의 경륜(에베소서 3: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SfXjjNba9g, Hit:6
 이근호19-04-29 08:41 

하나님의 경륜 

2019년 4월 28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3:1-3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사람들은 지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쉴새없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의 흔적을 장엄하게 연결시키면 그것이 자신들을 구원시켜주리라 보는 겁니다. 이러한 지식적인 접근은 이미 악마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심성을 반영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악마는 선악 지식을 아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라고 부추깁니다. 

여기에서 악마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죽지 않는다’, ‘신처럼 된다’는 말로 꼬드깁니다. 악마의 본심을 인간의 마음에다 심어놓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확보한 지식으로 자기 구원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아는 것만큼 힘이 된다는 의식으로 무장된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구성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는 내가 구성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자신이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시작을 자기의 욕망으로부터 개시하려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경륜이 필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미리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서 자기 경륜을 확보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구원욕을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11-12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의 뜻’이 아닌 겁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 곧 철저하게 사람의 요구나 뜻이 배제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곧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가동되면 될수록 그 와중에서 인간의 무가치성이 함께 빠져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십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3;15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등장한 인물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입니다. 

둘 다 아담에 속한 인물들은 아닙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다 다른 존재는 악마입니다. 이 둘 사이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로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에서 그 특징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지옥은 원래 악마들이 들어가야 할 곳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악마의 세계, 지옥가는 사람도 죄를 많이 지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그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승리에 따는 부산물로서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이 천국을 가야만 하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연속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인간 구원’ 아니라 ‘말씀 구원’인 겁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늘에게 내려준 양식인 만나를 먹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항상 하루치만 제공됩니다. (안식일 바로 이전의 날에는 이틀치를 받는다) 이는 하루 단위로 말씀인 만나가 인간의 영속성을 체쓸듯이 끊어놓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말씀의 정기적인 주어짐이 하나님의 경륜 취지에 더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속에 들어오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즉 하나님께서 인간 속까지 들어오시기 위한 경륜이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이 사실을 접하기 위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이 계신 속으로 오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경륜은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인격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8-32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참으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구원된 자라면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이 출몰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고 배격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나’라는 인격은 항상 자기 구상적이라서 자기 인생을 자신이 만들어나가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발상이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악마의 심보였던 겁니다. 인생이란 자기를 위해 연출하는 연극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이런 연극을 하면서 자신을 승리자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즉 기이어 자신의 미래에서 자신을 배제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위한 경륜으로 삼고자 합니다. 인간들에 있어 세상이란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인 지를 증명해줄 게임판으로 여깁니다. 정치판이 그러하고 경제판이 그러합니다. 자신이 실패하면 아니되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항상 도박적이고 자신이 응원하는 쪽이 상대를 늘 이기는 것으로 위로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미 인간 세상은 예수님을 핍박자하는 세력으로 가득차 있고 우리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승리하는 맛으로 인생을 살고 자신은 결코 실패해서는 아니되는 자로 여깁니다. 하나님보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을 배제합니다. 사람이 잘못해서 벌받고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에서 자신의 죄를 따로 뽑지 마세요. 그 어느 누구도 죄인 아닌 자가 없습니다. 어떻게 살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의 인격이 발현됩니다. 즉 예수님을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위한 경륜을 나를 위한 경륜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4-29 14:08 

23강-엡 3장 1-4절(하나님의 경륜)190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1-4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사도바울이 계시라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장 11절부터 보면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 본문에 보게 되면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오늘 설교 제목도 ‘하나님의 경륜’인데 경륜이라는 것이 뭐냐? 경륜을 여러분이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일관된 계획 같은 것을 경륜이라고 하지요. 두루마리 화장지에 세상 모든 인류사를 다 적어봅시다. 

그 화장지를 좍 펴보세요. 사람들은 그걸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화장지의 제일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 현대인간이 되겠지요. 마지막 몇 센티 안 되는 그 부분. 그래서 이 세상은 마지막 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그게 오해인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경륜 같으면 그런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많이 했던 거예요.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역사를 두루마리 화장지에 적듯이 좍 역사를 적습니다. 적어놓고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시다. 따라서 거기에 많은 예언들이 있으니까 그 예언대로 우리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 단정 지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라는 이 대목과 흡수가 되지를 않아요. 그 정도 같으면 사도바울이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아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냐 하면,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 인류사라든지 모든 계획 같은 것은 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처럼 오해들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나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많은 일을 하셨다고 이해하는 것,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사람에게 온 경륜이에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오해한 경우에 해당되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죽 다 관통했다. 관통하는 그것을 내가 왜 아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경륜은 그런 식으로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악마가, 뱀이 인간에게 거짓말 한 대목이 뭐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너를 구원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이게 악마의 논리에요. 

선악을 아는 지식. 이 지식의 나무, 하나님께서는 그 지식의 나무를 따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라 했는데 그냥 지식의 나무라고 해도 돼요. “인간은 지식에 대해서 몰라도 된다. 그것을 알면 너는 죽어.”라고 한 거예요. 사람은 뭘 알아야 스스로 자기를 단도리 하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악마의 뜻이 되는 거예요. 악마가 우리 조상 아담에게 뭘 하느냐 하면, 창세기 3장 5절에 나오는데요, 그것을 네가 먹는 날에는 네가 눈이 밝아서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안다는 것이 지식이거든요. 

“네가 하나님한테 구애받을 필요가 없이 네가 하나님처럼 같이 동등하게 살고 싶지 않느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는데 그걸 따먹는 순간 네가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 못되도록 말렸으니까 네가 따먹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죽지도 않는다. 불멸의 존재가 된다.” 

악마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뭐든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확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책을 주니까 성경을 달달 외우듯이 다 알고 싶어 해요. 아마도 제가 보기에 거짓말인 것 같은데 어떤 섬에 있는 분들은 성경을 다 외운다고 했어요. 성경을 못 외웁니다. 너무 양이 많아서 외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 외운다는 거예요. 그거 다 외워서 뭐 할 건데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지식인데요. 나의 지식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힘이다. 베이컨이라는 사람이 르네상스 시대 때 이야기한 것이고요. 아는 것이 힘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서 신에게서 독립하면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거예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지식을 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내가 지식을 확보해서 그 확보된 지식으로 내가 구원받는 방법이 아니고 더 이상 나는 나로 남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 그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선악의 징벌에서, 선악의 유혹, 선악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사람 되는 거예요.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보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람이 되려면 여기 조치가 필요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뭐든지 시작하려면 지식을 확보하고 그 지식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그 방식을 계속해서 고집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그 시도조차도 일종의 자기연출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경륜도 결국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고 자기 경륜으로 바뀌게 돼요. 나 이런 식으로 구원되었다고.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잘남으로 귀결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극단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면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 구원은 없고 말씀 구원밖에 없어요. 

성경에 다 근거가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16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양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줬거든요. 만나를 줬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했지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과 신명기 8장을 보니까 그게 바로 반대로, 거꾸로 생각한 거예요. 

만나를 줌으로서 만나를 하루치만 줬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반드시 이어져야 된다는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라고 했던 그것을 도중에 뭐가 잘라버리느냐 하면, 만나가 잘라버려요. 하루치만 주는 거예요. 그 다음 또 하루치 만나를 준 거예요. 그 만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겁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말씀이 우선이지 너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나님의 경륜을 알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또 지식으로 나가거든요. 이미 시작을 내가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영원히 살 수 있느냐, 라는 그 질문자체가 성경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이미 악마로 인하여 그 정신, 사고방식이 변질된 그 입에서나 나올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미 악마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사고방식이 그것밖에는 안 나와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 주께서 네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를 통해서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를 위한 경륜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경륜일 뿐이에요. 그 경륜을 통해서 내가 산다, 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3장에 예수님의 경륜,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는, 그 경륜을 통해서 나타나신 분은 우리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위한 경륜이에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한편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 끊어져 있다는 근거가 뭐냐? 십자가에요.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아는 그 지식으로서는 예수님께 접근이 불가능했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고 우리는 우리끼리 따로 노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제자리에서 맴돌면서 꿈이나 꾸고 있을 뿐이에요.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소모하고 소비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어려운 말로 자기 구성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애들 뭐 구성하잖아요.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억과 경험들, 인생자체가 자기를 구성하기위한 거예요. 예수님 구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를 구성하기 위함이에요. 미술시간에 공작시간에 뭘 할 때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놓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 구경하라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것을 만드는 겁니다. 

공무원시험을 치든 전기기사시험을 치든 결혼을 하든 모든 것이 자기 구성적이에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다는 말이지요. 내가 원하는 내가되고 싶다는 이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고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사주해서 그런 엉터리, 잘못된 인간상을 자기는 옳다고 우기는 겁니다. 

아까 예배 전에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목사님, 인간이 던져진 존재라는데 던져졌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던져졌다는 말은, 인간은 어느 출신, 어느 집안, 어떤 부모, 내가 남자가 될 거냐, 여자가 될 거냐, 나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 날거냐, 안 그러면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 날거냐, 태어날 때 장애자로 태어나느냐 건강하게 태어나느냐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고 그냥 너는 그 쪽에서 살아, 하고 이미 우리 결정 이전에 이미 조치가 던져진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것밖에 안돼요. 그게 하나님의 경륜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우리는 이미 내가 나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못돼요. 그런데 도중에 뭔가 일이 잘못 꼬였어요. 악마가 와서 우리더러,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네가 네 인생 알아서 다듬어가고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어, 라는 희망을 제시하는 인간상으로 완전히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젊은 사람들 연애할 때나 어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벤치에 앉아서 나뭇잎을 뜯어요. 앞으로 내가 저 여자를 사귀고 싶은데 성공할지 어떨지를 모르겠다, 할 때, 나뭇잎을 한 장씩 뜯어내면서 사랑한다, 사랑 안한다. 사랑한다, 사랑 안한다. 다 뜯어가는 겁니다. 몇 장 안 남으면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해요. 사랑 한다, 로 끝날지 아니면 사랑 안 한다, 로 끝날지. 

나중에 끝날 때 ‘사랑 안한다.’ 이렇게 끝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다른 나뭇잎을 또 뜯어요. 사랑한다, 사랑 안한다. 사랑한다, 사랑 안한다. 그것도 또 사랑 안 한다, 로 나올 때는 또 나뭇잎을 뜯어요. 언제까지 뜯느냐 하면, 마지막에 사랑 한다, 가 나올 때까지 계속 뜯는 거예요. 이정도로 자기 구성적입니다.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그렇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 예수 믿겠다고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해준다고요? 마귀가 그런 짓을 하지요. 교회 자체가 마귀의 전당이니까 얼마든지 그런 것이 용납이 되지요.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던져진 존재, 아담이 범죄 했기에 우리가 범죄 되었기 때문에 내 죄를 따로 뽑아내지 마세요. 

보통 부모들이 자식한테 그러지요. “너 이 따위로 살 거야?” 하고 잔소리를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이 따구가 어때서?” 왜 그런 용기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그 따위로 살 거야?” “이 따위로 사는데 뭐가 어째서?”어차피 던져진 존재 아닙니까? 아담의 죄에서 따로 나의 죄를 뽑아내지 마세요. 

저 사람은 착한데 나는 악하다. 그런 논리는 성경에서 없습니다. 저 사람이 악하며 나도 악하고 내가 악하면 저 사람도 악해요. 어떤 인간도 선하고 순수한 인간은 없습니다. 순수하다 하는 것은 선악자체에서 벗어날 때 순수하다 하는 거예요. 그 순수함이 무슨 순수함이냐? 하나님의 경륜만 순수해요. 하나님의 경륜만 순수하고 그 외에는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이 가동이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배제된 잔여분이 나와요. 그걸 배설물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이 몰랐던 근원적인 죄를 생산하는 공정입니다. 몰랐던 죄가 계속해서 거기서 생산이 돼요. 그 생산된 죄가 딴 게 아니고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냥 인간도 아니고 자기를 최종적인 의미로 두는 인간들, 자기구성적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한 명만 죄인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에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죄인만을 양산하고 생산한 겁니다. 생산할 때 까지 하나님의 경륜은 계속 가동이 된 거예요. 공장에서 상품 찍어내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경륜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죄인들을 찍어내고 계속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우리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려고 이미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내 수법으로 내 지식으로 이 죄인 됨을 변개시킬 수가 없습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이 욕심 없이 살게 해달라고 하는데 욕심이 없을 수가 없어요. 욕심은 타고 났기 때문에 욕심 없는 그것이 바로 욕심이거든요. 욕심 없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게 돼요. 그게 구성적이에요. 

욕심 없고 순수한 나를 상상하게 돼요. 하여튼 나라는 생각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이게 배설물로 빠져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경륜에, 하나님이 하는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너는 빠져나와 있어야 될 부산물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계속 만들어 진 겁니다. 

인생은 연극이지요. 인생은 분명히 연극입니다. 자기연출을 하지요. 하지만 연극을 하다보면 이게 진짜인줄 알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연극인데 왜 자살을 해요? 연극이라는 것은 가짜고 망상이고 최종적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내 인생이 최종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경륜으로 봐서.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을 모른다면, 내가 전부라면 내 맘대로 안 되면 자살하지요. 

성경 구약에서 인간이 개인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유대인도 그렇고 이방인도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 은혜의 경륜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사이에 벽이 있었는데 그 벽이 철폐되고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피로 말미암아 전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이미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입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구약부터 진행되거든요.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경륜을 주시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제공하는 그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동이 되게 되면 사적인, 개인적인 사정 같은 것은 일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2장 6절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고 하나님 맘대로다 그 말이지요. 또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게 하나님이에요.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사적인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배설물이지 용납될 대상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이야기 들어보니 어떤 분은 아침에 눈 떠서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눈뜨고 기도한다는 거예요. 그 기도내용이 이거거든요. 

“하나님이여, 내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여, 제 사정 좀 들어주세요. 저에게 이런 원통절통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화가 나 있습니다. 하나님, 제 이야기, 제 히스토리, 제 역사,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라고 하소연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응답 안 합니다. 마귀가 쪼르르 와서 응답하지 응답 안 해요. 

왜냐하면 마태복음 27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대표적으로 마지막 아담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했거든요. 하나님의 응답은 침묵이었습니다. 왜 침묵이냐 하면, ‘내 사정 알아 달라.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에요.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내 이야기, 내 사정 같은 것은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끼어들지를 못해요. 

“하나님 몸이 아파요.” 혹은 “지금 너무 가난해요.” 이렇게 한다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사무엘상 2장 6절에서 8절까지.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지옥 보내시기도 하시고 천국 보내기도 하시고, 낮추시고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 맘 대로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인간자체가 악마의 정신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을 빼고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유명한 말씀이지요. 약속을 주는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두 존재가 등장해요. 

하나는 여자의 후손, 또 하나는 뱀의 후손이에요. 이 두 존재가 엮어 나가는 갈등과 투쟁,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빠져요. 악마하고 여자의 후손, 예수님하고. 예수님과 악마의 치열한 싸움과 전투. 그것이 현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만들고 하나님의 경륜내용을 채웁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런 소리들 하지요.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기 때문에 그냥 겁주기 위해서 지옥을 이야기했지만 실은 지옥은 없다. 모든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천국 간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하나같아요. 신은 자비롭기 때문에 우리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이게 마귀가 아담에게 심어준 그 내용이 입으로 그대로 다 나와요. 그런데 지옥은 뭐냐 하면, 악마가 가야될 곳이 지옥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은 빼거든요. 인간을 빼버리면 남는 분이 두 분이에요. 하나는 여자의 후손이냐 뱀의 후손이냐? 예수님이냐 악마냐 두 분만 남아요. 

그러면 나머지기는 뭐냐 하면, 너는 악마편이냐 아니면 예수님편이냐 달랑 두 부류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의 경륜은 감정이 없어요. 그냥 무감정이에요. 냉철하고 냉혹해요. 울고 불고한다고 해서 천당 보내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가 살기 힘들다, 좋다, 이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목표에서 빠져있다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고 악마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부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부해본 경험도 없지요. 기억도 없고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는 겁니다. 좀 냉철하고 냉혹해야 돼요. 악마가 가르치는 것은 뭐냐? 네가 가난한 것은 네가 성경대로 말씀대로 안 살기 때문에 가난하고 벌 받았다는 거예요. 

언제까지 그 사기에 농락당할 거예요, 언제까지! 완벽하게 살면 그만큼 복이 온다는 겁니다. 일단 완벽하게 해 봅시다. 완벽하게 하면 악마가 여러분 포기할 줄 알아요? 따라오면서 이것도 해야지, 이것도 해야지, 따라 오면서 완벽에 완벽과 완벽을 추구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여러분 쫓기려고요? 죽을 때까지 쫓겨요. 죽을 때까지. 

다시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간은 배제됩니다. 인간은 그냥 하나님의 경륜에서 벌어진 그 결과물에 일방적으로 혜택만 입을 뿐인데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냥 하나님의 경륜에서 나온 결과물속에서 둘 중 어느 한쪽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쁜 짓을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나쁜 짓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 가는 것도 우리가 유별나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는 거예요. 다만 천국 가는 사람은 이것을 알지요. 예수님이 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그 부산물로, 결과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은 아는 겁니다. 그걸 자기고 던져진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자기 일에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걸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된 거예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해 봅시다. 제가 만나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만나는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양식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실 때 이틀 치 사흘 치 나을 치를 한꺼번에 주신 것이 아니고 하루치를 줬다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밥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뜻이 아니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애굽에서 나왔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만나의 연속성, 하루치의 만나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그걸 증거 하라고 만나에 종속된 존재로서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간 거예요. 광야에 살면서 그들은 농사 지을 수 없었고 몸부림 쳐봐야 아무 대책이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40년 동안 살아온 것은 만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가지고 만나가 살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 하나님의 경륜은 그 말씀의 완성을 보는 겁니다. 그 말씀이 완성되면 새 언약을 다 이루었다, 가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구약 만나이야기를 했는데 이걸 신약 적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그냥 일방적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도권이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악마와 그리고 내 속에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신 예수님 그 둘 사이에 갈등의 현장이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고 여러 가지 생활이 어렵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악마적인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가 돼요.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취직하려고 교회 오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결혼하려고 교회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총각처녀 많다는 소문난 그 교회 가서 해보려고 하는데 결혼하기 전의 나와 결혼 한 후의 내가 연속성을 지닌다고요. 

그러나 그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곧 하나님의 경륜인데 나를 위한 경륜이 발휘되고 있어요. 악마의 속성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서 배제시킨 거예요. 배설물로, 우리 인간 자체를 하나님의 일에 일어나는 배설물로 취급해버리는 겁니다. 필요치 않은 쓰레기로 취급해 버리는 거예요. 필요치 않은 쓰레기로 취급해놓고 그 쓰레기 중에서 일방적으로 “너는 천국 가” 하면 천국 가는 것이고 “너는 지옥 가” 하면 지옥 가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이게 안 어려운데 어렵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러면 나는요?” 갑자기 나가 등장해 버려요. 나를 위한 경륜이 아닌데 갑자기 “나는요? 나를 위한 연속성은 어떻게 됩니까?” 또 자기 연속성으로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가 나오지요. 동방박사가 처음에 별을 보고 찾아왔어요. 악마에 의해서 변질된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조치가 있어야 돼요. 

그 조치는 어떤 조치냐? 하나님의 경륜을 누가 방해하고 있느냐? 나의 구원을 위한 경륜이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구속사를 다 꿰뚫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거요. 지식으로, 어떤 지식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돼요. 지식이 되어버리면 지식을 아는 나만 달랑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지식은 악마가 심어준 거거든요. 그러면 아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뭐냐? 우리가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예 쓰레기 같은 우리에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 그냥 치고 들어와서 자기 자리를 잡아버려요. 그러면 맨 날 우리가 종일 그리고 밤새워 기도한 것도 뭔가 거부당할 때 거기서 스멀스멀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라는 것 말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출몰되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출몰돼요. 

나라는 인격 제키고 주님의 인격이 나오는 겁니다. 나를 짓밟으신 분, 무정하기도 하고, 내 기도에 응답도 하지 않고 그냥 매정하게, 나를 죽일 때는 죽이고 살릴 때는 살리고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시고 아플 때, 건강할 때 마음대로 내치시는 분. 요리할 때 튀겨먹고, 삶아먹고, 구워먹고, 씹고, 뜯고, 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하시는 분, 그 분이 스멀스멀 나라는 몸을 통해서 그 인격이 돌출되어 나오는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경륜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마가 이야기한 것이고 지식이 아니고 인격이에요.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의 인물화입니다. 인격입니다. 누가복음 2장 28절부터 보면, 거기 나오는 시므온이 선지자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예수님을 안고서 하는 말이 주의 구원을 본 거예요. 나의 구원을 본 것이 아니고 주의 구원을 본 거예요. 말씀의 구원을 본 거예요 나의 구원을 본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이 나를 사용했다는 것. 저질스러운 나를 사용했다는 그것 때문에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을 증거 하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래요. 운반체거든요.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드러내는 운반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내가 성경지식 배워서, 신학공부해서 내가 구원받으려고 한 거예요. 설교에서 뭐 하나 얻어걸리면 그것가지고 나를 천당 보내려고 시도한 겁니다. 나를 놓지를 못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요리사들이 채 썰 듯이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우리를 불연속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만나의 원칙에 의해서 하루치, 또 하루치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그 연속성을 불연속성으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사용하지 않는 한 너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려줬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살아 있지, 네가 사는 그것이 우선이 아니고 주님 살아 있음을 우선으로 해야지, 나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살아 있다고 선후관계를 반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선악을 아는 그 자체가 죄고 지식을 아는 그 자체가, 그 지식을 가지고 버리지 않고 내 구원 쪽으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주님과 악마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옵니다. 나중에는 별이 동방박사를 따라가요. 

별이 끊어지고 난 뒤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본인이 결정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뭔가 쳐다보도록 만들어놓고 막상 쳐다보게 한 그 지점에 가게 되면 거기서 ……, 여러분이 마태복음 2장을 아시지요. 헤롯 왕을 만나서 사단 나는 그 대목 알지요. 무엇을 구경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별이 찾아오듯이, 우리 속에 샛별이 찾아오듯이 우리에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세상이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을 감을 잡지를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우리는 악마의 세계에서 출세하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민감한 것은 실패냐 성공이냐, 입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굉장히 민감해요. 실패하면 막 좌절하고 성공하면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우쭐대고요. 감정의 요동이 굉장히 심하거든요. 그게 바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 휘둘리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까? 무슨 성공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간은 배제되거든요. 인간은 배제되는데 주님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족하면 되지 따로 내 성공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이 세상은 전부 다 게임판이에요. 다 게임같은 거예요. 

게임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고 그 법칙에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게임화 시켜 놓은 거예요. 게임은 이기는 자는 성공한 자고 패배한 자는 인생 실패한 자다. 이런 안목을 계속 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임이 뭐냐 하면 바로 정치라는 거예요. 게임은 뭐냐 하면, 네가 어느 편 한쪽을 들라는 거지요. 

도박 같아요. 인생 자체가 도박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성공했다는 어떤 증거물을 내가 갖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는 역시 잘났고 성공할만한 가치가 있고, 나는 실패해서는 안 되고, 나는 성공할 입장에 있는 것이 마땅해, 라는 그것을 스스로 구축하는 것, 자기 구성적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구축하는 겁니다. 

목사가 교회를 해도 개척교회 성공하려고 설치고, 프로야구선수를 해도, 우리 팀이 5등 안에 들어서 가을야구 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정치를 해도 태극기를 흔들든지 좌빨을 하든지 한쪽에 속해서 편들 때 비로소 사는 재미를 느끼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나는 버스 타고 저쪽 사람은 택시를 타는데 택시와 버스가 우연히 교통사고가 나면 택시 탄 사람은 택시 편 들고 버스 탄 사람은 버스 편 들고. 

나중에 내려서 보니 사촌간인데. 사람은 왜 삽니까?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비트켄슈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렇다면 그 게임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모르겠어요. 게임은 그냥 세상자체가 게임이다. 그리고 거기서 승부 보련다. 내가 얼마나 잘나고 대단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공무원시험 치는 것도 합격하면 나는 잘난 존재고, 떨어지면 나는 인간도 아니고, 골목식당 족발장사를 해도 장사 잘되면 성공하고 못하면 실패고. 

예능프로, tv프로 전부가, 나는 성공해야 될 가치가 있어, 그거 외치는 것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악마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 찾아온 사람은 그걸 구경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왜 주님께서 십자가 질 수밖에 없었는가, 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는가? 교회 50년 다녀도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를 성공해야 되는 사람으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빡세게 기도해서 자기를 성공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예수를 몰라요. 

예수님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관심도 없고 모른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았지요. 사도행전 9장 3절에서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어떤 조치가 일어났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나는 주님의 핍박자로 그리고 주님은 핍박 받는 자로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예수를 아는 사람이고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핍박자에요. 

제가 이런 본문을 설교하니까 그분이 하는 말이, 나도 이런 멋들어진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지금 이미 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가 편들고 자기가 응원하는, 물론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원이지요, 그런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그 게임의 목적은 뭐냐? 나 이정도야, 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게임, 그게 학교교육에서부터 모든 직장, 사회, 그리고 심지어 경로당까지, 카페, 성당, 교회, 절, 어느 곳에도 이게 없는 곳이 없어요. 

심지어 부부싸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먼저 튕겨냈냐 하는 게임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주식투자하다 몽땅 날려놓고는 “많이 배웠다.” 배우긴 뭘 배워요? 밑천만 날려놓고는 등록금 치렀다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다지 망가지지 않았다는 그것을 지금 내세우는 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의 잘났음을 증명하는 경륜, 경영, 하나님이 경영을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까지 동원시켜서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배제시킵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인간아, 왜 그 따위로 사느냐”라고 할 때 “그래, 이 따위가 어때서?” 그 말을 아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너 공무원시험 여섯 번이나 떨어졌어?” “여섯 번 떨어졌으면 그게 어때서? 원래 나 인간 아니야.” 왜 그 이야기를 성경에 입각해서,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 핍박하는 자가 나인데 그걸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계시로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핍박하는 자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그게 주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원래 나는 핍박자요 죄인이고 죄인 중에 괴수인데요. 무슨 욕심을 냅니까? 몸이 아파요? 살다 그만 죽으세요. 내가 죽는다 해도 주의 경륜은 여전하십니다. 여러분, 주의 경륜을 그 때 그 때 다 알아채지를 못하지만 공식은 지금도 작동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얼마나 속고 살았는지. 점잖은 체 하지만 사실은 점잖은 것이 안 지려는 악바리고, 악마의 마음이고, 심보인 것을 우리는 애써 감추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터놓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