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화해(엡2;15-16) 1904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8. 22:16
2019-04-07 12:44:25조회 : 493         
   화해 19040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화해 (에베소서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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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ikr2C8eI8lw, Hit:7
 이근호19-04-07 13:31 
화해  

2019년 4월 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15-16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용어들은 오늘날 일상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아닙니다. 시장바닥에서 들려지는 용어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입장에 될 때만 들어본 단어들이 됩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에서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그 계시 안에 담겨 있던 개념들입니다. 따라서 따로 자기들만의 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단어들이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외치면서 이런 구약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구약 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단순히 한 민족에게만 작용하는 신이 아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구약 때부터 주어진 그설계도가 이제는 완성이 되어 모든 민족들 위해 같이 적용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용어들에 담긴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이는 벌써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존재라는 겁니다. ‘화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해란 인간대 인간끼리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화해를 이해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것으로 화해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따라서 타인과의 화해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깁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심판받기 전에 미리 화개하고 나서는 것이 자기에게 나은 미래를 보장된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런 자백과 고백이 실은 더 은밀히 감출 것을 더욱 깊이 감춰어놓기 위한 수작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질을 가치 있게 보여주기 위해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고 동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호의를 받은 자가 나에게 제대로 보답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감잡고 보복하고 복수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그다지 질이 좋은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원수’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인간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기존의 아담이요 또 다른 부류는 ‘마지막 아담’, ‘새로운 아담’입니다. 기존의 아담의 대변자는 이방인이요, 새로운 아담의 면면을 보여주는 관계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방민족들의 신은 인간들의 독자적인 열심과 성의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실제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곱게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계속 제시합니다. 그 연이어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에 준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본모습이 노출됩니다. 곧 기존 아담으로서의 본 모습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원수’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언약에 의해서만 밝혀집니다. 

이처럼 언약이 인간사회에 들어오면 되면 마치 엑스레이 사진활영 때처럼 조영제를 투입되는 양상입니다. 그래야 언약적 이미지에 의해 각자의 자리가 혼선없이 분류된 것이 나타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방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 달성을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처지에 있느냐 드러납니다. 

원수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계속 지켜내라고 격려하는 세력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본디 인간이 소지하면 안되어야 할 지식입니다. 선과 악을 줄리면 바로 그것이 정의(正義)로움입니다. 선은 가까하고 악은 멀리하면서 발생되는 결과가 곧 정의로움이라는 겁니다. 

이렇듯 자체적으로 이미 의로움을 인간이 갖추면 더 이상의 신의 의로움에 기대필요가 없다고 인간들은 당연히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인간들의 평소의 행동들을 보세요. 행동 하나하나 옮길 때마다 늘 고려되는 내용은 “이 행위로 인하여 내가 더 의로워진다”입니다. ‘내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내가 늘 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선악체계를 근거로 나를 정의롭게 살고자하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와르르 깨어집니다. 나의 정의로움보다 나의 내 사랑이 더 근원적이고 최후적인 겁니다. 즉 자기 사랑으로 무장된 인물은 애초부터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몰라야했습니다. 그러니 옛아담에 속한 자들은 자신의 거룩함과 잘남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쪽 취한 태도는 그 내재된 원수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겁니다. 마가복음 5:5 
-8에 보면, “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5: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귀신들인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새 아담이신 예수님의 동참한 바가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페밀리(가족)이 된 겁니다. 이 사람이 보여주게 되는 내용은, 인간의 몸은 악마로 인하여 결국 죽는다는 사실과 그리고  죽어가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기존의 인간은 발악하면 대드는 지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로 인하여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화해는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는 인간이 배제된 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예수님 사이에서만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된 자들만 하나님과 이미 화해된 자들입니다. 곧 에베소서 2:7의 말씀처럼 ‘이미 하늘에 앉혀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들 성도가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나의 일’이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실은 모두 ‘주님의 일’이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강제 조치를 도리어 감사하는 겁니다. 그 강제조치의 연속은 곧 죽음에로의 초청이 현실 속에서 수시로 감지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찾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 영원히 기쁨이 되는 취미생활입니다. “주님이 날마다 속히 만나자도 조금씩 이 지상의 몸을 후패하고 썩게 만들어”하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의 몸은 유통기한이 기진 후패하고 썩은 몸입니다. 미련없이 가뿐하고 포기할 수 있는 겁니다. 

‘죽음에로의 호출’이 곧 이미 하늘에 앉아있는 성도가 하게 되는 귀신(이미 죽은 자)의 역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는 홀로 살고 있지 않음을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4-08 16:19 
20강-엡 2장 15-16절(화해)1904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5-16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5-16“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방금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 내용들, 여기 나오는 단어들, 이런 용어들을 우리가 알려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의 입장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라는 긴 열차, 주의 이름이 기관차라면 거기에 딸려 있는 객차 같은 그것이 구약부터 신약의 마지막 역사까지 계속 역사 속으로 갑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터널 속으로 빠져가는 거지요. 율법을 통해서 터널 속으로. 이런 대목은 우리가 이방인,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보게 되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를 전혀 몰라요. 우리 일상생활에, 돈 버는데 전혀 필요치 않은 언어들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봤자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상태에서는 구원 못 받잖아요. 관심도 없고 취미도 없고 성경에 대해서는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처럼 그렇게 여겼는데요. 똑같은 취지입니다. 에베소서 2장 5, 6절에 보면“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 하늘에 앉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하늘에 앉혔다. 지상에서 고공 몇 미터에 앉혔는가? 굴뚝위에 올라가서 시위할 일 있습니까? 땅에 사는 우리가 왜 하늘에 갑자기 앉아 있어요? 이런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기존에 인간이라고 여겼던 것을 접어버려야 돼요. 포기하고, 언약 안에서 인간이라는 것을 언약이 어떻게 다시 신분세탁 하는가를 봐야 되는 겁니다. 

언약이 없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없이 그냥 태어나면 그것은 사람이고 인간인줄 아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뭘 놓치느냐 하면, 하늘에 앉히신 다든지, 그리스도 피로 화목 한다는 말이 전혀 상관없는, 무관한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 에베소서 이야기가 우리한테 현실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인간이라고 여기지 말고 여기에 언약으로 어떤 자리를 잡아주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신분세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신분이 그냥 나 혼자 있을 때, 거울 앞에 있을 때 내 모습하고 언약 안에 있을 때 나는 어떤 위치를 배정받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이방인이 된다는 말은 다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방인이 아닌 자가 언약 안에서 다시 또 하나님에 의해서 배정받은 자가 있어요. 

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유대인이에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담이 쳐져 있고 담이 이방인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끝까지 밀어붙이지요. 이방인의 운명의 마지막이 어떤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들은 저주받는 자가 됩니다. 시편에 나오지요. 왜 저주받는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주를 모르고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입니다. 언약을 앞장세워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에서는. 이방인의 신은 뭐냐? 나를 만드신 조물주를 신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십계명, 율법, 하나님의 약속, 아브라함 약속, 약속을 앞장세워서 자기의 본색을 새롭게 드러낸 그 분을 주님이라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여호와 하나님, 주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방인들은 단지 그들이 주님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받도록, 언약 안에, 약속 안에 그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걸 하루아침에 안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그냥 단독적으로 있고 하늘에 있는 신을 상상하고 이미지화시켜서 그냥 신을 만들면 되고 믿으면 되거든요. 

그걸 조상신, 종족의 신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신이란 인간이 조작한 것이라고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했어요. 맞아요.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겁니다. 그게 성경에도 나와요. 이방인들은 신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없는 신,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정신 차려서 신을 만들면 되느냐, 라고 질문이 나올 텐데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은 다 우상이고 하나님과 동거하게 되면 우상이 아니에요. 신약성경에서 성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같이 동거하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혼자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어 있고 성령이 오게 되면 너는 주의 증인이 된다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 원칙은 구약이스라엘의 원칙을 그대로 인수받은 겁니다. 혼자서 도 닦듯이 만들어낸 신은 다 우상이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부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극대화 된 거예요. 이 내 모습이. 그러니까 그 신과 나는 대화가 잘 통하지요. 외진 무인도에 갇혀 있던 어떤 사람이 너무 외로운 차에 둥둥 떠내려 온 배구공이 있었어요. 그 배구공에 사람얼굴모양을 그려놓고 모자를 씌워놓고 그 배구공에 계속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그 배구공을 신이라고 믿는 겁니다. 

<캐스트 어웨이>라는 옛날 영화,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에 그 배구공이 나와요. 그 배구공을 하나의 신으로 섬기고 그 신이 있음으로 자기가 살 의지가 생기는 겁니다. 요즘은 그 배구공 대신 강아지가 들어가고 고양이가 들어가요. 강아지 고양이 키움으로서 허한 자기의 마음을 메우는 겁니다. 내가 마음 줄 수 있는 대상을 내가 만드는 거예요. 

내가 마음을 주되 잔소리하지 않는 대상, 고양이와 개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인간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다짐을 하는 것은 나는 사람이라는 것, 나는 고귀한 사람이고 존엄성 있는 사람이고, 존귀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안 돼. 제발 건드리지 마. 산불이라도 나를 건드리지 마. 나는 원망하겠어.’ 산불 일어났잖아요. 

‘침몰하는 배, 세월호도 날 건드리지 말고, 무조건 나를 산불도 건드리지 말고, 대통령이든 어떤 이데올로기,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떤 것도 날 건드리지 마라.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살 거니까.’ 전세비용으로 살 것이고, 임대주택 얻어서 살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 나는 기어이 인간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배정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기존의 아담과 마지막 아담. 두 개의 아담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통한 진짜 인간, 진짜 아담을 대표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기존의 아담, 기존의 몸을 붙들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그 몸이 전부인줄 알고 그것을 가지고 붙드니까 에베소서 2장 7절, 하늘에 앉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나중에 죽으면 가겠지. 죽으면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동행하고 있으면, 동행하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에 앉은 분이라면 이미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귀신인 거예요. 이 땅에 존재할 이유도 없고 존재할 필요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도라는 겁니다. 성령이 함께 있음으로서. 

성령이 함께 있으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뭐냐? 너는 이미 죽었다. 죽은 자니까 귀신이지요. 이미 죽은 자니까. 제가 울산강의에서 분명히 하자고 하면서 공식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뭐냐? 죄 있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다. 이게 언약의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죄 있는 자는 앞으로 죽을 것이다, 가 아니라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있어야 됩니다. 자꾸 살려고 성경 보면 안돼요. 남들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을 앞장세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주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는 죽은 자지 뭐. 너는 죽은 자야.” “제가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요?” 춤추고 노래 불러도 나올 것은 죄밖에 없거든요. 

성령 받은 성도가 되고 난 뒤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취미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죽어가는 느낌을 인식한다는 취미. 내 죽는 그 과정을 촉감 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기어이 호출하겠다는 거예요. 죽음의 자리에서 주께서 우리를 호출하니까 “조금만 고생해. 네가 언젠가는 내 죽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까지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그게 바로 화해의 자리, 화목의 자리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화목을 하지 못하고 화해를 하지 못한 것은 내가 자진해서 화목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착함과, 내 종교적인 것과, 내 열심과 경건가지고 “하나님,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이 저와 친하게 지내겠습니까?”라고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화해를 시도한 거예요. 헌금이라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열심이나, 선교의지라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일종의 뇌물이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적으로, 내가 원하는 인간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은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나 스스로 인간 이상의 것을 자꾸 상상해서 만들어내요. 

그냥 인간이면 허무한 존재로 죽으면 그만인데, ‘아니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마감할 수는 없어.’라고 고집들을 부리는 겁니다. 뭔가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면 그것은 참 선하다고 여기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가치와 평가, 나중에 죽었을 때 좋은 내신 성적을 주지 않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산불이 났다든지 세월호 같은 일에 처했을 때 사랑을 베풀고 호의를 베풀려고 하고 동정을 하려고 시도하지요. 호의를 베풀고 동정하는 것, 그게 실수였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호의를 베풀면 안돼요. 왜냐하면 내가 남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것이 반드시 나의 복수로서 결과가 나옵니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네가 이렇게 나를 배신 때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아무리 착한 사람도 2분 내에 화내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유일하게 버티다가 마지막에 분노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배신입니다. 배신한다는 것은 내가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잖아,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호의를 왜 베풀어요? 결국은 가인처럼 배신 때릴 것을. 인간은 자기가 못돼 처먹었는지를 몰라요. 남에게 잘해준 이상은 그 사람에게 복수할 근거가 점점 내 안에 증가한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한다고요? 어디서 되도 않는 꼼수를 써요. 죄를 고백하고 자백하는 것, 자진해서 뭔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보여준다는 것, 이것은 더 감추고 싶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자기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입만 떼면 솔직히, 솔직히,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도대체 얼마나 감춰놓았으면 솔직히, 가 연발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솔직히 말해서 죄인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가 내뱉은 말로 너는 나하고 화해되거나 구원되지 않는다.” 솔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람이 누구한테 대화를 한다는 것은 친절을 베푸는 시발점이라고 자꾸 위장을 하는데요. 친절이 아니고 구걸입니다. 목숨 구걸해달라고 입을 떼게 되어 있어요. “오늘 비 오려고 하지?” 이게 뭐냐 하면, 제발 날 좀 살려달라는 다른 우회적 표현이에요. “오늘 차가 왜 이렇게 빨리 달리나?”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나 좀 살려줘.”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 뭔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대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 속에서 해요. 그 증거가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대화를 걸었습니다. 아버지의 답변은 없습니다. 아무 답변 없는 것. 그게 바로 ‘내어버려두사’ 로마서 1장에. 그게 심판이에요. 

“나 너하고 안 논다. 왜? 버린 자식이니까.” 그래서 이방인들은 신을 만들고 간절하게 기도하지요. 간절하게. 새벽제단 쌓아서 기도하고, 금요일에 커피 석잔 마셔가면서 철야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또 기도해요. 구걸하는 겁니다. 제발 저 인간이고 싶습니다, 라는 외침이에요. 하나님 뜻은, 언약 안에서 인간은 없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둘 중 하나에요. 인간은 없어요. 

새로운 아담에 속했느냐, 기존의 아담에 속했느냐. 그 둘 중 하나뿐입니다. 언약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죽기 전에 하늘에 앉혔다는 것이 어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옵니까? 아니 어느 교회에서 그 이야기를 해요? 교회 마치고 집에 가면 설거지도 안 해놨는데요. 하늘에 앉힌 꼬라지하고는. 청소도 안 해놨는데. 하늘에 앉힌 생활이 이렇게 구질구질한가? 영 믿음이 가지를 않지요. 

하늘에 앉힌 이 존재가 다가오는 월세 계산해야 되고, 기저귀 값 계산해야 되고, 직장에서 잘릴까 염려해야 되고. 도인처럼 여유 있게 살아야지 하늘에 앉힌 것이 맨 날 은행대출에 쫓기고. 무슨 하늘에 앉힌 생활이 이런 생활이 다 있느냐? 믿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언약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살고보자는 식으로, 인간이고 보자는 식으로 버티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까?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인간으로 오니까 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니까. 이런 복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누가 여러분보고 인간이라고 했던가요? 인간이라면 오래 살아야지 죽기는 왜 죽습니까? 아담에 속한 인간은 모든 것이 유통기한이 끝났어요. 여러분, 유통기한 한 달 지난 우유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그걸 가지고 썩었다, 후패하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 단어를, 썩었다, 후패하다를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거예요. 하나님이 먹을 수 없는 우유에요. 썩어문드러진,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상품입니다. 그것 가지고 어딜 천당 가려고 들이대요?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교회 와서 천당 간다고 하면 천당 보내줍니까? 누구 맘대로요? 교회도 장사하고 영업하는 곳인데. 즐기는 곳이에요. 나이트클럽하고 교회하고 같은 거예요. 노래방도 그렇고. 그냥 재미있게 놀자는 식이에요. 정신적으로 위로받고 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라 하는 것은 정신적 안식처라 하잖아요. 

화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내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인간에게 화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화해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화해할 뿐이에요. 인간은 배제합니다. 인간하고는 화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화해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과 화해한다면 어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말인가? 

이 땅에 사람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시는 겁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서 죽어야 될 인간이 생명 있는 새로운 아담이 새롭게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육신 되었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말은, 말씀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그 내용마저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자기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이 되신 거예요. 그것도 그냥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되신 겁니다. 우리 구원하려고 죄인 되신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냈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때 우리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받은 새로운 집단을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 속에 있지 아니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를 거예요. 언약 속에 있다는 말은 뭐냐?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모르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 입장에 잠시 서 봅시다. 

아까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존재하고 되었고 유지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든 싫든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늘에서 공급되고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서, 하나님의 설계도를 계속 부여받는 겁니다. 

그 설계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죄인 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본인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에 자기들이 어떻게 쓰였고 쓸모 있게 사용되어지는가가 이스라엘 관점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있다는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이 옛날 아브라함에게 찾아왔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 달랑 하나밖에 없는 것을 내가 아는데 네 자손은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너에서 다수의 자손이 나올 때 나오는 그 생식능력 그 기능에 하나님의 언약이 새롭게 개입되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낳는 새끼, 자식 낳는 그것은 이스라엘에 해당되지 않아요. 약속에 준해서만 없는 자식이 새롭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마엘 제쳐버리고 이삭을 새롭게 만드신 거예요. 새롭게 만드는 자식은 그냥 생존이 목적이 아니고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새롭게 된 그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이 어떻게 결합되는 모습, 모양새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 22장,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쳤고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에 우리가 쓰이는 관계, 그걸 믿음이라고 하지요. 안양강의에서는 그걸 관계망이라고 한 겁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단독이 아닙니다. 홀로 도 닦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것은 절에 가서 하세요.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자기에게 반하는 그런 것. 그런 것은 절이나 그런데서 하고 성경의 언약에서는 쓰임 받는 거예요. 아버지가 직장 그만두고 빵가게를 한다. 커피가맹점을 냈다고 한다면 아버지 혼자서 하면 안 되고 부인은 기본으로 들어갑니다. 

부인은 바리스타 자격증 따서 일하고 애들도 수시로 거기서 아버지 일에 매진합니다. 그걸 가지고 패밀리, 가족이라 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만들었거든요. 그러면 백성들은 홀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제사장하는 일에 전적으로 그것만이 살길이다, 하고 그 제사장일에 협조하고 가담되는 사람, 그럴 때 그게 제사장패밀리에요. 

복음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사장역할 했거든요. 예수님이 한 그 제사장역할에 우리가 그물망에 관여되어서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일하게 된 그게 바로 예수님의 패밀리에요. 그거 할 때 우리 힘으로 못합니다. 구약에서는 언약의 관계로 하고 신약에서는 같은 말입니다만 언약의 완성인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하는 거예요. 

굉장히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힌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화목이 무엇인가를 우리 몸을 통해서 보여주는 기능이 우리 안에서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게 하시는 것이고 살게 하시는 거예요. 

복음 실컷 듣고 난 뒤에 하는 이야기 중에 대표적인 이야기가 “목사님, 복음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는 말을 꼭 뒤에 진지하게 물어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지요. 내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주의 일로 바뀐 그 상황을 고백하면 돼요. 그걸 쉽게 말해서 까인다. 까였다. 

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주여, 제 일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내 일은 왜 하는 것마다 내 뜻대로 안됩니까?” 하다가 까여서 ‘아, 이게 원래 내 일이 아니구나. 주님의 제사장 희생, 그 작업에 우리가 관여하게 되었구나.’라고 우리가 다시 아는 그 기쁨을 우리가 토로하는 거예요. 주님 일에 우리가 스텝이 되는 겁니다. 마라톤 대회 하면 스텝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의 일에 스텝이에요. 영화작업의 스텝들, 보조작업자입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인공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전혀 어렵지 않은 거예요. 한 10년 전인가 이 동네 산불 났어요. 바람이 불어서 공중에서 불이 날라 다녔어요. 진짜 거짓말이 아니고 산불 난 것 처음 봤어요. 

그래서 우리 집이 탔다고 칩시다. 지금 영화 찍고 있는 거예요. 어떤 씬이냐 하면, 내 집 타는 씬을 찍는 거예요. 처음에는 화가 나지요. “내 집 없으면 나는 죽겠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안 되니 내가 죽겠습니다.” 하다가 성령이 임하면 까이지요. “그게 네 영화 찍었냐? 내 영화 찍었지.” ‘아, 그렇구나.’ 

그 급변하는 상황을 입으로 토해내는 겁니다. 애초부터 내 일은 없었다는 것. 그 근거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화목한 결과물, 작품이 바로 나 자신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담을 그리스도 피로 헐어버렸다 했거든요. 

한 주 지났다고 다 잊으신 것을 제가 압니다. 그래서 친절한 제가 설명해 드립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 몸에 걸치고 있는 직업, 나이, 그런 것은 다 떼버리고 그냥 하나의 몸이에요. 

몸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그 몸을 용서함으로서 이 몸, 아담의 몸을 없애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새로운 몸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난주일 낮 시간에 했어요. 그 이야기가 또 나와요.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했다는 겁니다. 

나 새사람 되었으니 구원받았다, 라고 좋아하지 마세요. 그 안에 화평이라는 요소가 장착되어 있어야 됩니다. 화평의 요소가 없으면 이것은 새사람이 아닙니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 예수 믿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천당을 낚아낸 것 밖에 안돼요. 자기공로밖에 안돼요. 화평이라는 것이 빠져버리면 이것은 새사람 아닙니다. 종교적인 성과를 얻은 것밖에 안된다고요. 

그것은 신자가 아니지요. 화평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그 요소가 들어가야 언약 앞에서 우리가 새로운 위상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제가 수면내시경을 했는데 마취제로 프로포폴이 들어가지요. 그거 할 때마다 제가 뭘 느끼냐 하면, 그 프로포폴이라는 그 마취제 앞에서는 나이도, 직업도, 남녀구분도, 성격이나 기분, 이런 것도 다 소멸된다는 거예요. 

좀 더 예를 들어보면 그런 겁니다. ct촬영을 할 때 그냥은 못해요. 조영제라 해서 촬영하면 윤곽이 나오도록 투여를 하지요. 인간이 그냥 성경 봐서는 무슨 뜻인지 몰라요. 조영제를 집어넣고 다시 언약을 마주치게 되면 언약에 담겨 있는 창세전 계획서와 모든 프로젝트가 비로소 그 안에 참여되어 있음을 알게 돼요. 

그 조영제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피 안에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이미 죄인 되어 있어요. 직업, 나이, 성별, 품위, 품격, 인격, 그런 것은 일체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언약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뭐냐? 조영제 집어넣고 심판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개척교회 열군데 했습니다, 선교했습니다, 이렇게 착하겠습니다, 하지만 ct촬영을 해서 뼈다귀만 나오고 그냥 언약적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그냥 시커먼 죄인일 뿐이지 그 시커먼 것이 좀 엷은 죄인, 더 시커먼 죄인 그런 것 없어요. 세상 사람이 있으니까 교도소가 의미가 있지요. 이 세상 자체가 교도소인데 무슨 교도소가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교도소가 아니고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는 교도소거든요. 죄가 있다는 자체가 이미 죽게 되고 죽은 자에요. 그 조영제의 위력이 어느 정도냐? 이런 겁니다. 오늘 아침에 운동을 나가는데 비가 안 왔어요. 그런데 저 밑에 비가 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후딱 집으로 돌아오는데 분명히 내가 집을 나설 그 때는 비가 안 왔어요. 

땅에 아무 흔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까 내가 집에서 나와서 여기까지 왔던 그 길이 완전히 빗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조영제와 관련해서 느낀 점이 뭐냐? 내가 경험하지도 않은 지역,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이나 동일한 언약적규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유황불 떨어진다는 그 이야기에요. 그리고 내가 살지 않았던 시절이나 내가 살던 시절이나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 수도 없는 시절이나 언약 앞에서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유황불이, 하나님의 심판불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몇 년이나 더 오래 살아서 공부를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진리를 더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는 것이 문제에요. 개뿔도 모르면서 자꾸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언약만이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일시에 알려줍니다. 이미 하늘에 앉힌 거예요. 그 앉혔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경험할 것, 우리가 체험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즐겁게 죽어주는 그것이 주의 일 속에 포함이 되었다는 그 경험이요. 주께서 주님의 거룩한 죽음으로, 거룩한 생명으로 나에게 날마다 삐삐처럼 잡아당기는 거예요. 

우리 양 집사님 딸이 고등학교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 성수 장로님이 “야야, 고등학교 들어가면 이제 고생 많대이.” 앞으로 고생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맞아요. 하지만 고생하지만, 고생을 해야 자기가 좀 더 유통기간이 지났다는, 이미 하나님께서 못 먹는다는, 갖다 버릴 쓰레기라는 것을 고생해야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오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그것보다 더 좋은 취미가 없어요. 최고의 좋은 취미입니다. 나는 나를 버려야 된다는 것. 쓰레기 분리수거도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집어던지는 쪽으로, 내가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조금씩 매일같이 집어던져 준다는 거예요. 드디어 화해의 순간이 가까이 온다는 그 보람이 있어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정말 우리에게 낙이 있습니다. 이왕 버릴 것 가볍게 버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의 행복이 뭐 달리 있어요? 그게 행복이잖아요. 어차피 여러분 안 죽어요? 안 돌아가십니까? 장례식장 왜 있는데요? 병원마다 다 있잖아요.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일 아닙니까? 어차피 죽을 인간인데 죽어가면서 신분세탁하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방인에서 참 이스라엘 되어서 신분 전환되고 난 뒤에 조금씩 주와 함께 영원히 동거한다는 것이, 이미 동거해본 사람은 영원히 동거하는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어요. 최고 기쁜 소식입니다. 고양이하고 살지 마시고. 언약 없는 것하고 살지 마세요. 아내가 복음 모릅니다, 하고 헤어지자 하거든 헤어지세요. 언약도 모르는 거 왜 삽니까? 대화도 안 되는 것. 

하나는 인간이라고 여기고, 또 하나는 쓰레기라고 여기고. 쓰레기하고 인간하고 무슨 대화가 돼요?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고요? 누구 패밀리인데? 주님 패밀리인데. 자기 가정이 왜 나옵니까? 가정 꾸릴 자격도 안되는 게. 자식들은? 자식들은 엄마 이용하는 그 기술만 늘어날 뿐이에요. 

화해상태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앉혔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5절 봅시다. “원수 된 것” 원수가 등장해요. 인간에게 하나님의 원수가 들어 있다는 것은 언약이 아니면 상상도 못했지요. 인간됨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훌륭한 존재기 문에 신이 되든, 부처가 되든, 남이 되든 자꾸 사랑해주려고 애를 써요. 

왜? 그 반대급부로 내가 더욱더 참다운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어떤 보람 같은 것을 건지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갖고 있지 않아야 될 생각이었어요. 인간은 선악을 악마에 의해서 부여받았거든요. 성경의 언약에는 악마가 나오지만 인간에게는 악마가 없습니다. 

악마가 있어야 악마를 체포하지요. 악마가 어디 있고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생각에는 인간밖에 없어요. 언약이 동원되니까,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우리에게 자기의 본뜻을 이야기해주니까 ‘아, 악마가 원래부터 있고 악마가 있고 귀신도 있는 거구나.’ 그 때서야 아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을 아는 것을 가지고 종합해서 뭐라고 하느냐? 정의로움이라고 이야기해요.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것은 정의롭게 살 때 가장 인간다움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정의를 잃어버리면 짐승 같다고요. 듣는 짐승 기분 나쁘겠다마는 그 사람들은 언약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개보다 못하다는, 버러지 같다는 시편의 이야기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자기는 버러지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버러지 같은 야곱아, 하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는 버러지나 구더기보다 자기가 우수하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선악을 합쳐서 그걸 정의롭다고 하는 거예요. 정의로움이 뭐냐?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정의라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될 때 계속 나다움이 유지된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지요. 상식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놓친 것이 있어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과 정의로움이 대 충돌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자꾸 이걸 놓쳐요. 정의로움. 멋있어 보이지요. 좋지요. 판사가 바르게 재판한다. 멋있어 보여요. 검사가 나쁜 사람 잡는다.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음주운전 했다. 갑자기 내 사랑이 개입해버리면 정의는 뒷전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내 사랑의 자리에서 정의는 없습니다. 오직 내 사랑만 남아요. 그게 바로 원수의 모습, 내 속에 있는 악마의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악마의 마음을 타고 났어요. 악마의 마음은 내 사랑밖에 몰라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이용할 대상이지 내 사랑 앞에서 내 사랑을 포기할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내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 나왔고 나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도 믿어주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천당 가겠다고 시도할 때 꼭 그런 방식이에요. 그래서 개인구원을 이야기하거든 이단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보이스 피싱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개인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참된 교회는 악마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악마를 폭로하지요. 하나님의 화해는 뭐냐? 십자가가 화해거든요. 하나님은 자기와 화해하니까. 십자가사건화 시켜서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악마가 없는, 하여튼 나쁜 것은 없다고 여기는 내 자리가 이미 거기에 악마가 극렬하게 거기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십자가가 들어오는 순간 아는 거예요. 

이 이야기 어렵지만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돼요. 내안에 악마가 있다는 그 사실을 폭로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마가복음 5장 5절부터 나옵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들린 자 이야기거든요. 거라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봤어요 그 현장을.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지금 돌무더기밖에 없는데요. 카메라가 흔들려서 동영상이 잘 안 나왔습니다만. 그 자리에 갔을 때 ‘아, 이것만 해도 5백만 원 값 된다.’ 했어요. 귀신들린 자 그 현장에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 세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현장이 생생해요. 비가 안 왔던 그 자리에도 비가 왔어요. 내가 살지 않은 지역에도 똑같이 언약이 거기에 퍼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반복해서 일관되게 그 현장에도 주어졌던 거예요. 우리의 마음의 현장이 말씀이 적용되는 현장이니까요. 귀신들린 자가 특징이 뭐냐? 몸을 상하게 했고 그리고 본색이 뭐냐 하면, 예수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한다는 거예요. 

개인구원으로 하게 되면 이 사람이 마귀 들렸다 하지만 사실은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몸을 결국 상하게 할 것이고 마귀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괴롭다는 표현을 해요. “고마케라. 마이 묵었따!” 이거 있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당신 죄인이라고 하니까, 뭘 행해도 죄인이고, 헌금을 해도 죄인이고, 교회 나가도 죄인이라 하니까, 고마케라. 많이 묵었다는 거예요. 마귀가 그런 식으로 극렬한 발작을 일으키고 반항합니다. 까인 거지요. 그 고백을 해야 돼요, 그 고백을! 

“주님, 저 괴롭게 하지 마세요. 저 착한 사람입니다. 인간답게 살려고 애 많이 썼습니다. 제 도움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요. 교회에 내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봉사한지 모릅니다.” 그게 마귀의 고백입니다. 엑스레이 앞에서, 조영제 앞에서 뼈다귀에 지나지 않고 아무 차이가 없는데 남과 나의 차이에 대해서 자기 사랑을 극대화 시키는 식으로 악마는 나를 부추겼습니다. 정의감으로. 정의로움으로. 

그 놈의 정의로움. “우리 집안은 정의로운 가정이니 남에게 욕 얻어먹으면 안 돼. 네가 우리 집안사람으로 남에게 욕 얻어먹으면 아버지가 가만 안 있는다.” 우리는 가정교육을 그런 식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렇게 교육받았습니다. “네가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남에게 욕 얻어먹을 짓 하지 말라. 너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어왔습니까? 그러나 그게 내 사랑으로 왔을 때는 그것이 깡그리 순간적으로 다 날라 가버리고 잊는다는 사실. 악마의 본성 앞에 예수님 말씀은 잔소리, 잔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나를 힘들게 마시고 나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우리의 정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라는 그 사고방식이 그대로 지옥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지옥은 벌써 시작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옥 간 부자가 한 고백이 살아있을 때 나만 챙기는 그 버릇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이거든요. 시간을 거꾸로 돌려봅시다. 지옥에서도 자기만 챙기는 그 사고방식을 살아 있으면서 계속 한다는 말은, 인간은 지옥 만드는 재주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는 거예요. 

지옥을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그 재주가지고 지금 밥 먹고 살고 있습니다. 창기가 따로 없어요. 창녀가 따로 없어요. 몸 굴려서 자기 밥 먹고 사는 것처럼. 이 세상은 분업화되어 있잖아요. 판사든 의사든 자기 몸 굴려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게 스스로 지옥 만드는 공작시간이에요. 

고마운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침묵 속에서 유황불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걸 미리 눈치 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유황불 안 받겠다고 하지 마시고 받는 것조차도 주의 패밀리로서 역할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망하고 아프고 죽어가는 것도 이것은 주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영화, 스펙타클한 영화를 찍는데 주께서 이미 하나의 가족으로 간주했기에 내 몸을 통해서 주님한테 까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나 이렇게 까불다가, 나만 챙기다가 이렇게 까였다는 그 신나는 고백, 그것이 성령이 우리 속에서 끄집어내는 주의 증인입니다. 이것이 내 속에 악마를 이기신 주님이 주님하고 화해했던 그의 걸작품, 하나의 영화지요, 실제 하는 현실이라는 영화, 그 영화 속에 우리는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을 우리가 스스로 점검 하면서 대견하게 여기는 그 선악적인 버릇, 심지어 그 버릇마저 주께서는 자신의 화해를 위해서 증거물로 사용해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죄가 죄인 것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주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