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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엡2;17-18) 1904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16. 22:09
2019-04-14 12:46:44조회 : 787         
   성령안에서 19041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성령 안에서(에베소서 2:17-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4WDfkQOjGE, Hit:14

 이근호19-04-14 13:28 

성령 안에서 

2019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17-18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사람하고만 상대합니다. 눈에 들어보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거론하거나 상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여길 겁니다. 사도의 편지는 세상으로부터 이런 이유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성령 안’이라는 표현을 동원합니다. 사람들 끼리 만들어 나가는 세상에서, 사람이 아닌 요소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일구어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현 세상에 대한 고발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인생의 짐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끝까지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책임질 그 어떤 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평생 짊어질 짐이 있다고 믿기에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삼으려고 합니다. 즉 “나는 정당하다. 고로 나는 더 살아야 가치가 있다”가 본능적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생각이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끼어든다는 말은 곧 인간이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사람의 반발을 부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4: 14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방해요소를 통해서 실감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쪽에서는 꼭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피’입니다. 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나서서 구태여 외치지 않더라도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결정한 원리대로 움직여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흐름’입니다. 마치 전류와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전류가 실제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방식은 저항체를 두는 겁니다. 전기가 흐르는 모든 것들이 곧 저항체가 됩니다. 전자제품의 부품은 대부분은 저항체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외부로 구체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신 겁니다. 

한 쪽은 이스라엘이요 다른 한쪽은 이방인입니다. 


‘예수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 안’은 예수님의 최종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성령 안’에서는 ‘둘(2)’가 강조됩니다. 

예수님과 인간들로서 둘(2)이요, 또한 

택함받은 백성(유대인)과 버림받은 자들(이방인)들로서 둘(2)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아들 관계도 둘(2)입니다. 

왜 성령을 설명하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를 근거로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근거로 과거의 일들이 미리 발생되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이에 흐름이 흐른다면 마치 전류나 자장(磁場)과 같습니다. 자석을 놓아두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주변에 자력이 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그 효과를 전하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은 ‘성령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0-12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례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물 세례는 전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메시야가 하실 일은 ‘불과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라는 겁니다. 불로서 세례주는 것은 심판이 되고 성령으로 세례주는 것은 그 심판행위 속에서는 건질자만 따로 놓치지 않고 건지는 작업을 수행하신다는 겁니다. 

문제는, 세례요한이 이 작업을 ‘동시에’ 일어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자신이 받은 계시의 내용과 틀리다고 해서 ‘과연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의심도 하였습니다. (마 11:3) 세례요한이 몰랐던 것은 메시야께서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시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성’으로 하신다는 점입니다. 

‘동시’란 같은 영역에 같이 일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동시성’이란 다른 영역이 따로 있어 이중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즉 누구를 구원하는 일이 곧 누구를 심판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곧 누구를 심판하시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일과 동반됩니다. 

요한복음 3:6-8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람같은 흐름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일이 나타나는 것은 “나는 육에 불과합니다. 구원될 수 없는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의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기쁘고 감사하게 내어놓는 바로 그 고백을 통해서입니다. 즉 “나는 하나님의 일에 반발하는 저항체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육을 구원시키는 작업을 성령님께서 담당하신 일입니다. 구원된 사람을 통해서 무한대로 영생의 흐름이 쏟아져  오게 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물 긷기 위해 온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런 혜택을 입은 겁니다. 요한복음 4:13-14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랑이란 기존의 모든 질서를 무효화시키고 벌써 이 땅에서 새로운 질서를 재편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곧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가져가시고 사랑만 남기신 겁니다. 이 사랑은 ‘성령 안에서’, 곧 사랑을 받은 자만 압니다. 옛 찬송가 449장 후렴 가사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짊어진 짐은 주님이 아니라 악마가 해결하라고 짊어준 짐인 것을 알고 우리는 육의 역할만 수행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04-16 12:15:14조회 : 21         
21강-엡 2장 17-18절(성령 안에서)1900414-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59.116)
21강-엡 2장 17-18절(성령 안에서)19004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7-18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7-18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왜 그리 복잡한지요? 그냥 하나님 존재 인정하고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겁 없이 하나님을 함부로 만나려고 하는 거예요. 이웃집 사람 만나는 것도 그 사람에게 미리 전화해서,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에 뭔가 실례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요소가 한두 가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 너무 쉽게 만나고 하나님을 너무 쉽게 섬깁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믿어요. 사람도 쉽게 믿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도 너무 쉽게 믿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이 화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으려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 규정을 따로이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는 준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믿음이 뭐라는 것을 규정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믿으라. 그래야 나는 그 믿음을 인정해주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키는 제사가 들어 있어요. 그 제사라 하는 것은 그냥 가인의 제사처럼 자기의 노동의 결실, 정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제사, 율법 안에 있는 그 제사는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자세정도가 아니고 아예 죽었다는 규정을 가지고 나와야 되지요. 십계명, 그 율법을 줘놓고, 십계명 뿐 아니고 여러 가지 많은 계명을 줘놓고……, 어떤 사람은 365가지라고 이야기하는데, 율법을 줘놓고 그 율법 앞에서 너 자신을 비춰볼 때에 그 율법을 네가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자각해야 되고요. 

그 순간, 율법을 주신 쪽이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 없는 그 간격, 그 미흡함을 죄라고 규정, 죄, 또는 더럽다, 또는 부정하다, 그런 식으로서는 하나님나라에 올 수 없다는 그 규정에 의해서 죄인으로 인정하고, 그 죄를 자각해야 되고, 자각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죄를 대체해서 가져갈 수 있는 희생물을 양이나 소, 염소를 동반해서 끌고 가는데 그것도 본인의 이름으로 바칠 자격이 못돼요. 

그걸 누구한테 인수인계하느냐 하면, 제사장한테 인수인계 합니다. 지금 제가 이정도 해도 복잡하지요. 하나님 만나는 것이 그렇게 복잡해요. 인수인계를 하게 되면 제사장이 제물에 안수를 해서 ‘당신의 일은 이걸로 끝났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일임해라.’ 해서 일임하는 거예요. 일임을 하면 제사장과 하나님과의 단독적인 사역, 일에 의해서 죄사함이 결과물로 얻어지는 거예요. 

율법을 주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가 되느냐 하면, 왕이 있는 나라도 아니고, 입헌군주제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제사장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될 때에 이스라엘에 누가 계시냐 하면, 그 모든 절차를 제공하신 그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거예요. 왕 따로 계시고 그 왕이 어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구체화시켜서 이 지상에 남겨진 제도가 있는데 그 제도가 제사장제도이고 그 제사장제도에 의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동행이 성사되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성사되는 그러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요.

그 관계망, 그 체제를 수용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잡해요. 성경이 괜히 두꺼운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쉬워. 너무 쉽게 가버려요. 믿습니다. 이래버려요. 어떤 분이 차를 같이 탔는데 저에게 질문을 해요. 질문이 아주 단도직입적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주 질문이 간결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답변도 아주 간결하게 해드렸지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 뜻이에요. 그런데 질문자가, 내가 더 살고 싶은데, 하나님 뜻을 몰라서 힘들게 사는데 뜻을 알게 되면 내가 사는데 뭔가 편하게 살고 유리하겠다 싶어서 ‘목사님,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질문자체가 수정되어야 돼요. 그 질문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나는 죽고 싶어 환장하는데 지금 주의 뜻대로 제대로 진행됩니까?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제대로 질문하신 거예요. 이 말은,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질문자체도 형성할 줄도 모르는 거예요. 질문을 만드는 그 의식 자체도 전혀 믿음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입니다. 질문한 것이 뭘 잘 못했다는 것이 아니고요.

그러면 성경자체가 해답이거든요. 오늘 본문을 보기 전에, 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면서 질문자체, 질문자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더 쉽게 기도내용자체도 제대로 구성 못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가 짐을 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짐이 없어요. 인간은 인생의 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착각하느냐 하면, 자기가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자식의 짐, 사업의 짐, 교회 부흥의 짐, 온갖 세상의 무거운 짐을 혼자 다 지고 가요. 아, 참, 마귀한테 많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네 인생 네가 책임지지 누가 알아서 하느냐?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 그래야 영광이 돼.’ 얼마나 그동안 악마로부터 이런 세뇌를 받아 왔습니까?

예수님도 그걸 일찍이 아시고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주님은 피조물에게 요만큼의 짐도 짊어지라고 준 적이 없어요. 피조물은 원래 기능이 창조자의 영광을 위해서 부림을 받게 되어 있지 본래 자기가 짐을 짊어지는 것이 피조물의 역할이 아닙니다. 괜히 선악과 따먹어가지고 말이지요. 선악과 따먹으니까 자기가 짊어진 그 짐을 의로운 짐이라고 여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 의에 농락당하는 겁니다. ‘나는 의로워야 돼. 내가 살아야 될 이유는 나는 옳기 때문이야. 나는 정당하기 때문이야.’ 이게 계속해서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에베소서가 펼쳐져 있잖아요. 방금 본문을 읽었다는 말이지요. 17절에,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그 앞에 보면,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아까 분명히 해답이라 했습니다. 이 해답과 합치되는 질문 만들기가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짐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죽 나왔을 때 스스로 인생을 짐 지우고, 책임을 지고 자기의 인생을 보람 있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에베소서의 이런 이야기가 와 닿지가 않는 거예요.

와 닿지 않을 때는 뭐라고 하느냐? 사도바울은 미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미친 녀석 아니야?’ 이런 식으로. 미쳤다. 특히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 성령 안에서라는 그 말 자체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 스스로 자기인생의 짐을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미친 짓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성령이라는 것을 요청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면 ‘성령 안에서’를 언급한다는 자체가 미친 짓이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습니다. 미쳐야 돼요. 정말 미친 사람을 보고 싶어요. 말씀에. 이게 진짜 정답이라는데 미친 그런 사람을 좀 구경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좋게 이야기해서 우리교회나 십자가마을은 빼놓고. 이런 사람 있는 것이 좀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미쳤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말이에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사도바울의 말이 그냥 맞아.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이 성경말씀이 그냥 맞아요. 따지지 말고.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세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그 말이 맞아요. 사도 바울은 사도거든요. 살아있는 주님의 종이라는 말이지요. 사도의 말이 아니에요.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그게 그냥 맞아요. 그냥 맞으려면 본인도 모르게 남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래 그만 미칩시다. 미치면 되는 거예요. 지금 현대인들이 왜 믿음이 없고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안 미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덜 미치는 방법으로, 안 미치는 방법으로 자기 짐을, 자기인생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나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보지를 않아요. ‘나한테 도움 되나? 안되나? 그러면 안 볼래.’ 그거예요.

‘내 사업이 보탬이 되나? 별 보탬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안 볼래.’ 자꾸 정상인으로 행세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나 분명히 아까 제가 이방인 말고 이스라엘에서 믿음의 본체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제사장제도 안에서 자기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면 제사장이 있을 이유도 없고 그들이 제물의 피를 낼 이유도 없고 그 피를 뿌릴 이유도 없고 번제로 다 태울 이유도 없어요.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신 죄를 짊어진 제물이 다 태워지고 피가 다 뿜어져 나와야 되고 갈라져 나와야 된다는 그 당위성,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되어 담겨있는 그 하나님의 뜻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그 기능 때문에 이스라엘은 존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존재이유가 뭡니까? 친목단체에요? 노는 겁니까?

교회 가니까 무지 재미있더라. 교회 가니 영어로 공부하는데 유익되더라. 교회 가니까 공짜로 꽃꽂이도 알려주고 공짜로 기타도 가르쳐주더라. 노인들에게는 공짜로 감주도 주고 에어컨도 틀어주고 놀기 좋더라. 교회 가니까 영어특설반이 있어서 약간의 헌금만 내면 애들 교육도 시켜 주더라. 교회가 이런 것들 하는 거예요.

왜? 교회가 먼저 애들부터 꾀어놔야 “애도 오는데 엄마도 오세요.” 이래서 엄마도 오고 그 다음에 그 남편도 오고, 그래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애들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겁니다. 거기서 무슨 자기 죄를 발견합니까? 거기에 어린양의 피가 왜 필요하지요? 즐기면 되는데. 자기 몸 편하면 그만이잖아요.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요. 여러분,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프라이드치킨이 필요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하나님이 입맛 당깁니까, 프라이드치킨이 입맛 당겨요?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도 싫어요. 역시 프라이드치킨이지요. 거기에 코카콜라 곁들이면 맛있습니다. 우리 그런 존재에요. 무슨 하나님을 찾아요. 사도는 이런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사도가, 나는 오늘날의 제사장나라를 찾는다고. 미친 것 아니에요? 현대인은 전부 다 개별자인데, 자기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인데 오늘날 왜 구닥다리원리를 찾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꼭 지키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그것, 그게 바로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것. 이렇게 하니까 꼭 박옥수 같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파 아닙니다. 자기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해요. 

교회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요.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아서 천당 간다고. 그러면 뭐가 성립되어야 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우리에게 죄사함으로 주어지게 되는 그 과정이 뭐냐를 설명을 해줘야 되거든요. 자 찬찬히 들어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어요. 에베소서 1장 7절에서는.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든 세상만사의 움직임의 그 원리가 그리스도의 피라는 거기에 응축이 되어 있습니다.

이거 하나 주께서 지키고 싶은 거예요. 문제는 그거예요. 그리스도 피가 어떻게 우리를 죄용서 해주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느냐?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걸 전달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도외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프라이드치킨이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만 다른 질문으로 하게 되면, “교회가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까?”라는 질문도 성립이 돼요. 굴을 먹을 때 알맹이를 먹으려고 하지 딱딱한 굴 껍데기, 손 베이고 이빨 상하는 그 껍데기까지 다 먹으려고 굴 먹는 것은 아니잖아요. 굴 알맹이 빼먹었으면 껍질은 버려야지요.

그리스도 피를 빼먹었으면 교회를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미친 것인가요? 말씀으로 구원받으면 말씀이 안 되는 교회는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말씀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인데 말씀이 없으면 굴 껍데기를 왜 깨물어요. 이 다 상하게, 손 다 베이게. 저는 목사님들 만나게 되면 속으로 묻고 싶어요. 목회를 하든지 구원을 받든지 둘 중 하나하라고요. 두 개 다 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성도가 목회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만 성령 안에 있습니까? 모든 사도는 다 성령 안에 있거든요. 성령 안에 있으면 개별자는 존재하지 않고 그 개별자를 한 단위로 사용하는 것처럼 동일한 다른 표현의 단위가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라는 겁니다. ‘우리’ 

개인이 아니고 우리입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개인, 개별자고 모이면 집단 ‘우리’로 표현하는데 성경에서 우리는 개인이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그걸 우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2장 13절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할 때에, 가깝다는 표현을 쓸 때 멀리 있는데 가까워졌거든요.

이런 표현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적절한 예는 뭐냐 하면, 자석이 발휘하고 있는 자기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자석은 따로 있어도 그 주변에 자석의 힘의 역선이 발생이 돼요. 그래서 그 근처에 쇳가루를 놓아두면 알아서 정렬이 딱 되어 있어요. 둥그런 곡선으로 자기장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원리에요.

그런데 이 원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이 사는 역사 속에서 바깥으로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나려면 바로 저항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전기에서는 전류와 전압과 전하와 저항이라는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어요. 전압이라는 것은 흐르는 것을 뒤에서 밀어주는 힘을 전압이라 하고 그 흐르는 것을 전류라고 해요.

흐르는 그 전자알갱이를 전하라고 하고, 그 전류를 못 흐르도록 막아서는 것을 저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옴(Ω)으로 표시하거든요. 고정되어 있는 코일에다 계속 돌아가는 것을 집어넣어서 거기서 전류를 발생시켜서 회전하게 만드는데 쉽게 말해서 모터지요. 고정되어 있는 것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모터를 만들어내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 저항이 없으면 구체화가 되지를 않아요.

그 저항하는 요소를 가지고 도체라고 합니다. 전기가 흐르는 도체인데 그 도체 안에 원자가 있고 원자가 전자의 흐름에 충돌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전자공학에 관심이 없지요. 인간에게는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저항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 인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주의 복음에 저항요소로 등장하는 겁니다.

교회냐 복음이냐. 교회가 있음으로서 주님이 얼마나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 저항을 유발시켜서 그 저항을 통해서 주님은 이 땅에 전류로서, 흐름으로서만 설명할 수 있다. 붙잡아서 구원받는 경우는 없다는 것, 그냥 하늘에서 위로 흘러가는 흐름인데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나 자신이 주님의 복음에 저항하는 저항체로서 살아가는 그 만남, 충돌에 의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복음을 알 수 있고 그 복음의 형체는 바로 저항의 극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다. 

피 튕기는, 아주 최후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피 흘림이에요. 그냥 양이나 소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 넘어가요. 사도바울이나 사도베드로나 마찬가지로 모든 신약성경이 내용들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분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끄집어내려고 애쓰고 있는 구절들이에요. 이 성경구절들이. 

주님은 보이지 않으면서 살아계신데 그 보이지 않는데서 어떻게 보이는 것을 뽑아낼 수 있는가? 여기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반복적인 저항요소를 계속 악마를 통해서 키워내는 겁니다. 자, 인간이 왜 주의 복음에 반대하느냐? 제가 아까 설명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짐이 있는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된다. 

왜냐? 나는 가치 있으니까. 어떤 가치? 이 땅에서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것이 단독적으로 있을 때는 그것이 정상인줄 알아요. 인간은 살아 있으니까 살고 싶다는 것, 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살겠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 누가 거기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시비 걸고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어느 누가 그것을 지적질 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것이 더 살겠다는데. 

갓난애 태어났어요. 태어나서 그 애가 젖을 먹는데 “네가 젖을 먹는 것이 죄야.” 이걸 황전도사님 빼놓고는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그런 분이 계셔요. 울산에. “너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야.” 그걸 네 살 때부터 이야기했거든요. 네 살 먹은 애가 그것이 납득이 됩니까? 80먹어도 납득이 안 되는데. 자기가 저항체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복음전개에 가담되었다는 것을 이제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의 효과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증거에요. 아, 나도 이 드라마의 역할을 하나 맡았는데 어떤 역할이냐? 허장강. 천하의 악인. 천하의 악독한 악인 역할을 하는 거예요. 피를 피되게, 피의 사건의 구체화입니다. 헌금해도 죄고 예배참석해도 죄고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죄가 되고.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의 저항체를 통해서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겠다, 해서 주님이 하는 일과 대치가 되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오지요. 유명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 설명하기 힘들어요. 

이게 육인데 쓸모가 있어요. 쓸모가 있는데 육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너다, 라는 그 자체가 구원받고 안 받고 상관없이 복음전개에 꼭 쓸모 있는 거예요. 너는 육이라는 이 말을 섭섭하게 듣지 마시고, 아, 육의 작용으로 쓸모 있으면 되었지, 라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내 짐을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짐이 없어요. 짐이 없고 주에게서 맡겨진 역할만 있을 뿐이에요. 육의 역할만. 이것은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이지 내가 알아서 내가 나한테 맡긴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내가 나에게 맡길 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깨 한번 만져보세요. 짐 없을 걸요?

인생이란 짐이 없어요. 자식, 부자관계, 부부관계, 그 관계 다 없어졌어요, 이미. 부자관계, 부부관계를 지키려고 했으면 사도바울도 결혼했지요. 사도바울도 결혼 안한 이유가, 그런 관계 자체가 우리가 꼭 지켜야 될 것이 아니에요. 그걸 지킨다면 그것은 윤리도덕이 되어버려요. 우리는 윤리도덕이라는 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지킬 것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왜 내가 지킬 수 있는 윤리도덕에다 신경을 씁니까? 내 가치에 왜 신경을 씁니까? 내 짐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주님이 꼭 지킬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놓쳤기 때문에 그래요.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피라고 하고 그것을 무엇으로 읽느냐? 사랑으로 읽어라. 그 말이지요.

피가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무슨 사랑인데 피로서 옵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고대신화에 보면 영생의 명약 찾는다고 진시황부터 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살아 있는 내가 더 살고 싶어서. 그러나 이 땅에 영생이 없습니다. 찬송가 499장의 후렴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인데요.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그 뒤에 보면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그 다음이 결정적입니다. “알 사람이 없도다.” 이게 미친 거예요. 주님하고 사랑한다고 미쳐버린 겁니다. 세상관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어요. 남의 평가 같은 것 안중에도 없습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논하거나 평하지 말라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점수를 매기지 마세요. 이것은 지킬 것이 내가 아니에요. 나에게 육이라고 하는 그 육이라는 요소를 지켜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육이고 이 요소 가지고는 하늘나라를 갈 수가 없다는 그 사실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내 행함으로서는. 

종교라는 것이 말과 생각과 행동, 이 세 가지 가지고 하늘나라 서기가 있어서 그걸 심사를 통해서 통과시킨다는 것이 세상 모든 종교의 내용입니다. 조로아스터교도 마찬가지고 모든 종교의 특징이 그래요. 심사를 해서 간다는 거예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가지고. 좀 더 항목을 늘이든지 그것은 관계없어요. 대충 그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 우리가 동조를 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 안에, 육안에 나를 괜찮은 나, 지키고 싶은 것이 뭐냐, 나의 잘남, 나의 의로움이라고 본 거예요. 이집트의 종교는 어떤 종교냐 하면, 심장(영혼)을 저울에 달아요. 양팔저울에 한쪽은 영혼, 한쪽은 깃털을 올려놓고 밸런스를 맞춰서 잘 된 사람은 천국가고 안 그러면 지옥 간다는 겁니다. 

옆에 개무리가 있어서 심장을 먹으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이게 선악구조에요. 성경에 나오는. 그러면 성경에서 구원의 기준은 뭐냐? 사는 기준이 뭐냐? 프라이드치킨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아시니까 편하게 생각해 봅시다. 옛날옛날 노아라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벌써 내용이 수상하지요. 노아가 미쳤지요. 미친 사람이 나와요.

“노아에게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어요. 잣나무로 배를 하나 만들라고 했습니다. 배 만들고 난 뒤에 일주일 후에 갑자기 예상 못한 폭우가 쏟아지면서 물이 차올랐는데 모든 세상 사람을 다 물로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린애가 “목사님,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다 물에 빠져죽었어요. 다 물에 빠져죽었답니다. 옛날옛날에 노아할아버지 이야기.”

그것을 성경에서는 언약이라 합니다. 노아언약. 그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노아이야기를 그냥 옛날이야기로 치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우리가 몰랐던 이 우주의 근원, 창조의 비밀을 언약 안에 함축시켜서 계속 실어 나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실어 나르게 되면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흐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흐름은 눈에 안보이지요. 그러면 노아라는 존재가 와서, 저항체가 와서 그걸 딱딱 끊어줘야 돼요. 끊어주게 되면 주님이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우리는 뭘 로 이해하느냐 하면, 노아라는 사람이 말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사실은 잘못된 거예요. 

노아가 일하든 말든 물심판은 오게 되어 있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든 말든 불심판은 오게 되어 있어요. 다만 그것이 흐름이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이 외치고 있기 때문에 몰랐는데 그걸 누가 나서서 대신 이야기해주니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진짜입니까? 혹시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견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한 수 배워야 됩니까? 내가 그 지식을 확보해야 됩니까?”라는 식으로 흐름을 깨는, 흐름을 깨는 것을 존재라 하거든요, 그 존재주의자로 나서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그 점에 대해서 굉장히 반대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나오거든요. 세례요한이 도끼 이야기했고요. 아브라함자손이라도 열매가 없으면 도끼로 찍어버린다고 했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 3장 12절에 보면,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데 이것은 하나의 폼이고 전조적인 거예요. 미리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고 진짜는 뒤에 오는 그 뒤에 성령과 불로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고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굴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그러니까 굴 껍데기는 불에 태운다는 거예요.

알곡만 쏙 빼먹고 쭉정이는 태우는 그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과 불의 세례라고 세례요한은 그렇게 이해했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 오실 때, 당신이 메시아가 맞느냐고 오해한 것은, 자기가 받은 계시에는 성령과 불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어요. 알곡 데려가는 동시에 나머지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상하게 조용하거든요.

그래서 “오실 분이 맞습니까?” 하고 마태복음 11장에서 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몰랐던 것은 뭐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동시성을 가지고 이야기한 거예요. ‘동시성’과 ‘동시’가 달라요. 동시라는 것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동시라고 하고, 동시성이라 하는 것은 두 개의 따로 구분되어 있는 영역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것을 동시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알아듣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면서 데려가는 일을 하는 그것이 곧 이 세상에 대한 심판행위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를 믿는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지 않는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 ‘이미’ 누구 하나 구원된다면 이 세상은 이미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그 말이지요.

나중에 심판이 아니고 그 자체가 심판이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믿는 미친 사람이 생기면 나머지기가 진짜 미친 사람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 작업을 이야기할 때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은 1이 아니고 2거든요. 주보 뒤에 설교요약문을 찾아보겠습니다. “‘예수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 안’은 예수님의 최종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강조라고 했어요. 

달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강조라는 것은 ‘예수 안’은 예수님을 강조하는 거예요. “‘예수 안’은 예수님의 최종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성령 안’에서는 ‘둘(2)’가 강조됩니다. 예수님과 인간들로서 둘(2)이요, 또한 택함 받은 백성(유대인)과 버림받은 자들(이방인)들로서 둘(2)입니다.” 또 빠졌습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이 또 2가 돼요.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2를 만들어놓고 그 2사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이 성령이라는 그 말이지요. 연결되려면 우리가 저항체가 되어야 돼요. 주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 뜻도 모르고 그냥 내 뜻만, 내 잘남만 고수하는, 그렇게 반대하고 반발하는 저항체로 있어야 돼요. 저항체로 있으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저항체도 하나님께 구원된다는 그것이 성령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데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사마리아여인에게 이야기할 때 옆에 있는 유대인들 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자서 사마리아여인과 만났습니다. 사마리아여인도 이방인이거든요. 그러니까 2가 돼요. 유대인 따로 있고 이방인 따로 있다는 그 구분을 유지하는 겁니다. 유지할 때 어떻게 멀리 있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예수님 빼놓고 제자들도 저항체죠. 

왜 저항체냐 하면, 저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유대사상에 물들었기에 제자들도 저항체고 이 사마리아여인도 저항체에요. 유대인들은 잘난 체해서 싫고 우리끼리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면 되잖아. 그러면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니 어느 쪽에서 드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된다고 고집하고, 양쪽 다 예수님 빼놓고는 저항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여인에게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여인이 물 길러 왔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계속해서 물이 나오는 그런 우물을 원하지 않느냐?” “그런 우물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존재에서 흐름으로 바뀌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이미 그걸 예시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만 성령으로 나야 구원받는데 그러면 성령이 뭡니까, 하고 니고데모가 잘 모른다고 하니까 8절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바람 같다는 거예요. 바람은 존재자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현재 담, 혹은 벽이 형성되어 있는 그 둘 사이를 바람이 와서 연결시켜 주는 기능을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성령으로 했을 때는 반드시 옛날에 나는 이런 자였다는 것을 분명히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돼요.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대들었고 반발했고 오해했고 오산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이어야 그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의 제목이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겁니다. 한 스물 댓 번 봤어요. 지금 또 봐도 그렇게 좋아요. 

수녀원에 있던 아가씨가 수녀 그만두고 트랩대령의 집에 오게 되는데 그 집 애가 일곱 명이에요. 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는데 마리아가 자기 실력이 뭔지도 몰랐는데 애들이 그렇게 좋아해요. 어떤 장면이 나오느냐 하면, 바람이 요란스럽게 천둥번개와 함께 부는데 애들이 자기 방에 있다가 전부 다 새로 온 선생님 마리아의 방에 다 들어와요.

마리아선생님이 애 일곱을 다 안고 밖에서 천둥번개가 치는데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라서 해줍니다. “옛날에, 옛날에 노아 할아버지가 있었거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돈 밖에 모르고, 치열하고, 싸우고, 감투하나 더 얻으려고 하고. “주식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한 45억 주식투자 한 그것이 뭐가 나빠요?” 

이런 식으로 그저 내 인생 짐은 내가 알아서 진다는 그렇게 요란스러운 대결구조와 긴장된 구조 속에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옛날에, 옛날에 노아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하나님의 방주 안에 들어가고 난 뒤에 그 나머지는 비가 와서 다 죽었대. 재미있지, 재미있지, 재미있지?” 

이게 재미있는 일입니까,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돼요. 왜? 이미 화해했기 때문에,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세상에 얽힌 모든 관계는 주께서 다 무효 시키고 지워버립니다. 나는 현 질서에 충실했다는 것, 그 질서자체가 없어져요. 주보 뒤에 “왜 성령을 설명하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를 근거로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근거로 과거의 일들이 미리 발생되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세계의 질서는 전부 다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저항이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전류, 이 흐름, 성령의 흐름을 이제는 눈에 보는 것처럼 감지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 이게 벌써 시작된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동시성이라고요. 나 하나 건져주면 이미 이 세상은, 나보고 미쳤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이미 저주아래 있고 심판을 받은 거예요.

심판의 기준이 프라이드치킨이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이 윤리도덕도 아니에요. 심판의 기준이 법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믿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그것도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이 된 인간이 자기 존재를 근사한 존재로 바꾸려는 평소의 육적인 버릇에서 나온 망상에 지나지 않아요.

보통 만화에 보면 죽은 사람 머리 위에 동그라미, 링을 그려놓잖아요. 천사도 그렇지만 사람 머리 위에 동그라미 그리면 이것은 죽은 사람이라는 표시잖아요.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숫자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그 숫자가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이에요. 언약이라는 노아 할아버지가 만든 방주,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의 숫자로 계량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한 단위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그게 바로 교회에요. 교회는 존재가 아닙니다. 흐름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교회가 흐름의 교회를 저항하지요. 반발합니다. ‘그래가지고 교회 장사 되겠느냐. 이래가지고 영업이 되겠느냐.’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흐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할 때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내가 죄인 된 모습을 보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어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할 때 육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런 육이 필요해요. 그 역할을 이스라엘 율법의 취지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역할을 맡겨 준 겁니다. 죄인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내 죄로 인하여 누가 대신 죄를 가져갔다는 그 분을 높이고, 고취시키고,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이 노아 방주 때 방주에 안탄 사람 다 죽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은 근원적이니까 근원적인 것에 우리가 합류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선교단체들이 아주 달달 외우듯이 하는 구절이 있어요. 선교단체들 보면 이 구절 굉장히 많이 외웁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까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는 그분은 안보입니다. 

왜? 이 모든 것이 흐름 속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합니다. 청문회에 나와서 “남편이 알아서 다 했는데 난 몰라요.” 이런 식으로 나올 때 눈에 보이는 국회의원들 상대해서 대화하잖아요. 그런데 청문회 나온 사람이 “주식투자요. 45억. 그거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러면 그 청문회 자체가 안돼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 있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러면 민주당이나 한국당의 국회의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미쳤도다.” 하잖아요. 미친 그것이 성령이 임한 사람이에요. 그게 복음에 대한 핍박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네가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성령이 네 머리위에 있다는 것을 알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받을 때 비로소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지금도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주께서는 일하십니다. 늘 일하십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스스로 내가 내 인생의 짐을 꾸역꾸역 꾸려나가는 그것이 바로 육이고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 그것은 주님이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선교사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에요. 그리고 이 사랑은 알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이 떠나버리면 그 때부터는 공포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내 인생을 내가 지키려고 하면 공포에 쫓기고 시달리는데 이 세상 자체가 악몽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오게 되면 그 사랑 안에는 어떤 것도 오직 사랑 안에는 원리만 흐름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지킬 것이 없어요. 그냥 그 흐름에 사워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돼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미 내 머리 위에는 죽은 자의 표식인 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 사도바울의 진심이고, 주님의 진심이고, 성령님의 진심이고, 오늘날 저희들의 진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을 껍데기인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자신을 저항체로 사용하셔서 이 못난 자를 구원했다는 그 흐름에 기뻐할 수 있는,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