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다시 듣고 보고 또보는 70 이레

아빠와 함께 2013. 3. 24. 08:14

2010-04-22 21:54:52 조회 : 719         
다시 듣고 보고 또 보는 70이레 !! 이름 : 구득영 (IP:203.223.97.185)

2009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 - 제1강
                                                           2009,08,02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

지금 제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는데(?),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는데, 먼저 다니엘 12장 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단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여기에 보면 "책에 기록된 모든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에 실패할 것이란 의미인데, 즉 책 이외에 있는 사람은 말입니다. 여기서 '책' 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생명책을 뜻하는데, 즉 이렇게 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 왜 인간의 행함은 거부를 당해야만 하는가?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우리의 행함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데, 당연히 행함은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즉 행함은 곧 저주인데, 그러니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그 어떤 이유든지 간에 "나는 이렇게 행해서 구원받고자 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도록 되어있는데, 그 어떤 이유든 간에 말입니다. 특히 이번에 우리가 공부하려는 다니엘서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간의 행함에 대한 거부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거부이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의 몸에 대한 거부인데, 이런 인간의 몸에 대한 거부는, 인간의 모든 신학, 신앙, 학문, 이성 등등, 여러 가지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모든 전체에 대한 거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 새로운 몸, 즉 '인자'의 등장 !!

그러므로 이렇게 인간의 행함이 자리잡고 있는 몸에 대한 거부라고 한다면, 그러면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거부를 당하는 몸이 아닌 새로운 몸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그런 새로운 몸을 두고서 이 다니엘서에서는 두 글자로 '인자(人子)'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수련회의 제목이 '환상 속에 그대' 인데, 즉 '그대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환상 속의 그대', 즉 그대, 오직 한 분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분' 만의 새로운 몸이 등장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이런 행함의 몸들은 고통을 받아야만 되고, 또한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 있는 이 생명책에서 새로운 구원의 한 몸이 나오게 되면, 그런 새로운 한 몸의 능력에 의해서 새롭게 구원이 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단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 아하, 티끌 가운데서 !!

여기서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라고 하는데, 즉 생명책에서 어떤 한 분이 등장하게 되고, 그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티끌 가운데 있는 자가, 즉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만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티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을 행하고 싶어도 아예 무엇을 행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티끌이라고 여긴다면, "저는 그 어떤 것도 행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라는, 바로 그와 똑같은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이 곧 티끌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즉 새로운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티끌로 넘겨줌으로 말미암아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그렇게 일소해버리는 식으로 이 다니엘서 전체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 거부, 거부, 거부 !!

그러니 이 다니엘서에서는, 기존의 몸에 대한 개념, 즉 몸에서 자아가 나오고, 인간이 나오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새로운 몸에서 나오는 개념, 즉 새로운 자아라든지, 새로운 인간상 등등, 이런 것들은 하나님 은혜로 주어지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밑에 있는 것들은 다 인간의 행함에 준해서 일어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전부가 여기 새로운 몸에서 나오는 개념에 의해서 거부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 문제는 바로, 'I' !!

여기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몸에서 나오는 이 '자아' 라는 것은, 반드시 어떻게 하는고 하면, 하나의 예를 들면, 영어에 'I' 라는 것이 있는데, 즉 영어에서 반드시 '나' 라는 것을 꼭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빨갛다' 라고 한다면, 그냥 빨간 것이 들어오면 되는데 "내가 빨갛다고 본다" 라고, 그렇게 꼭 자기를 집어넣는데, 물론 영어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비가 온다" 라고 하면 그냥 비가 오고, 또 "바람이 분다" 라고 하면 그냥 바람이 불면 되는데, 그런데 꼭 "내가 바람을 맞는다" 라고, 혹은 "내가 바람인 줄 안다" 라고, 거기에다가 꼭 '나'를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나'를 집어넣는 것이 문제가 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엇이든지 다 그러한데, 우리가 음식이 맛있을 때 "아, 음식이 달콤하다" 라고 해서, 그렇게 몸에 달콤함이 다가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표현할 때는 "내가 달콤해" 라고, 꼭 자기를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반칙인데, 왜 그렇게 자꾸만 '나'를 집어넣느냐 하면, 그것이 행함을 주장하는 이쪽 세계에서 이미 습관화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습관화가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도, "예수님이 믿어진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꼭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어서 "내가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믿습니다" 라는 것은, 그것은 전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누가 믿게 했습니까?

오늘 오전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보통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믿음 속에 '당신은' 이라는 말을 넣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야되는데, "도대체 누가 당신을 믿게 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주체자가 '너'와 '나'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빠져나가야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만 버릇이 되어서,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 믿음은 어디에 해당이 됩니까? 그 믿음은 믿음으로 가지 못하고, 여전히 행함에 소속이 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역사(歷史)를 통해서 인간의 행함을 제거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전체를 통해서 무슨 작업을 하는고 하면, 이 행함에 속한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작업에 나선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작업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번에 공부하려는 '다니엘서'이고, 또한 '스가랴서'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행함을 제거하는데 역사가 필요했고, 바로 그 역사는 행함을 죽이고 오직 책에 기록된 사람들만을 구원한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는데, 바로 그런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다는 말입니다. 

◈ 요한계시록과 김치 냉장고 !!

그렇다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구원받고,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황불에 들어간다" 라는 원칙을 가지고, 제가 방금 어떤 이론을 제시했느냐 하면, "행함에 대한 모든 것을 역사를 통해서 다 제거한다" 라고 주장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에 걸쳐서 펼쳐지는 것이 곧 성경책인데, 그 중에 하나인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도 김치 냉장고가 있고, 여러분 집에도 있지 싶은데, 이 김치 냉장고에 김치를 넣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김치를 미리 박스에 담아서, 그렇게 해서 박스를 층층이 그 안에 담는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최신형은 다를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1장에서 3장은 그 당시 실제 역사였던 일곱 교회에 대해서 나오고, 그리고 4장에서 7장까지는 일곱인, 8장에서 11장까지는 일곱 나팔, 그 다음 12장에서 14장까지는 여자의 아들, 그 다음 15장부터 17장까지는 일곱 대접, 그 다음 18장부터 19장까지 바벨론 제국, 그리고 20장에서 22장을 보면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하고 말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대충 대충 쓰는데, 사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성질이 급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 되겠지요(ㅋㅋ).

◈ 요한계시록은 동영상이 없으면 안 돼 ??

이것을 마치 김치냉장고 안에 박스를 쌓듯이, 그렇게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1장부터 3장, 그 다음에는 4장부터 7장,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김치 냉장고에 박스를 쌓듯이 쌓는데, 1장부터 3장까지 쌓을 때는 뒤에 점선이 길게 생기고, 그리고 4장부터 7장까지 더 쌓으면서 점선이 뒤에는 조금 짧아지면서 앞에서 점선이 생기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쪽의 일곱 나팔은 이쪽으로 오면서 앞의 점선은 더 길어지고 뒤쪽은 더 짧아지고, 여자의 아들인 경우에는 중간쯤 되면서 점선이 앞에서는 계속 나오고 뒤로는 실선이 길어지고, 15장에서 17장도 마찬가지 뒤로는 멀어지는데 앞에는 점선 이렇게 나오고, 또한 바벨론 제국을 이야기할 때는 점선이 이만큼 나오면서 타고 뒤에는 실선으로 차고, 그리고 20장에서 22장은 뒤에는 여기에서 여기까지 다 실선으로 차면서 점선은 또 이만큼 나오고 말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점선은 무엇인고 하면, 여기 있는 긴 막대기와 같은 것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인데, 즉 시작부터 마지막 끝 지점을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는, 즉 층층이 쌓인 박스를 어떻게 하는고 하니, 생긴 것이 레일과 같으니 레일이라고 하겠는데, 이렇게 층층이 쌓여있는 레일을 조금 조금씩 당기면, 즉 처음에 역사에 대해서 강조할 때는, 여기 뒤에 나오는 이것을 남겨 놓으면서도, 즉 전체를 이야기하면서도 뒤에 부분을 남겨놨다가 점점 잡아당기는데, 그렇게 잡아당기면 어떻게 됩니까?

◈ 뒤로 갈수록, 묵시 부분이 강조되면서 !!

지금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에 이르면 이를수록, 여기 레일의 뒤쪽 부분이 강조되면서, 초반부는 점선으로 남겨놓는다는 겁니다. 즉 점선으로 채운다는 말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의 처음에는 역사적인 것이 매우 강하지만,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초역사적이고 묵시적인 것이 굉장히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치 김치 냉장고 전체를 다 채우듯이 요한계시록 전체를 꽉 차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의 첫 장을 살펴보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즉 "나는 시작과 끝이다" 라고 하면서 시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를 보니까 "A부터 Z까지" 라는 것이 있던데, 혹시 여러분도 아세요? 물론 저도 요즘은 거의 TV를 안 보는데, 그런데 어쩌다가 얼른 봤는데(ㅋㅋ), 그런데 "A부터 Z까지"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 요한계시록의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라는 것을 패러디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무튼 요한계시록은 이 김치냉장고 하나로서 끝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왜 역사를 잡아당기는가?

다시 말해서, 같은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밑바닥에선 역사에서부터 점점 더 역사가 소멸되면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묵시로 진입하는 단계로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갈 때마다, 즉 역사에서 묵시로 하나님께서 잡아당길 때마다, 거기서 극렬한 저항이 일어나는데, 그 저항의 속성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행함, 즉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역사를 쥐고 있는 사람을 묵시에서 잡아당기니 뭐라고 하는고 하니, "왜 묵시에서 우리를 잡아당기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의 행함이 무엇이 문제인데?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왜 우리의 행함을 부정하고, 이 책에 기록된 자들만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묵시적 비밀을 가리는 것이 곧 '죄' !!

다시 말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즉 뭔가 역사를 붙잡는 어떤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들은 역사를 떠나 묵시로 모든 것을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강력한 반발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들의 저항은 가면 갈수록 극렬해지는데, 바로 이런 행위를 두고 '죄'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죄' 라는 것은 어떤 비밀을 가리우는, 즉 묵시적 비밀을 가리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에 말하는 '비밀' 이란 것은, 하늘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예정된 뜻으로서, 즉 복음인데,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감추느냐 하면, 인간의 행위로서 감추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합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자꾸만 하늘의 비밀을 희석시키려고 할 때, 그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 묵시적 악 - 군주, 짐승 !!

그런데 이 죄가 묵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강렬해지면서, 그런데 여기서 뭐가 딸려 나오느냐 하면, '묵시적 악'이 나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직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죄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즉 행위를 강조하면 할수록 뒤에 배후에 숨어있던 악한 세력이, 즉 묵시적 악마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정치적인 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곧 군주이고, 또한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어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데, 물론 그 바다의 내용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면,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데, 하지만 그만 이스라엘이 이방의 풍습을 따르고 이방의 종교를 따라감으로 말미암아서, 비밀로 간직한 그것을 그만 스스로 놓아버렸다는 겁니다.

(단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단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 묵시에 가까운 계시가 주어지면서, 악이 점점 더 !!

그렇게 이스라엘이 그만 행위로 돌아서니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적 반발이, 즉 점점 더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대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계시가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계시가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점점 더 묵시에 가까운 계시가 주어지면서, 여기에 대해서 그들의 숨겨져 있던 신에 대한 반발과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즉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발이 점점 더 힘을 얻으면서 달려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가면 갈수록 말입니다. 

◈ 성경이 너무 어려워요 !!

이런 경우는 비단 요한계시록뿐만이 아닌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 등을 보면서, 모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제일 답답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한꺼번에 모두 다 연결해서, 즉 오늘은 이 사건, 그리고 다음 사건, 그 다음 사건, 그렇게 해서, 마태, 마가, 누가가 다 다르지 않고 공히 동일한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즉 한 드라마의 한 대본처럼 깔끔하게 해주면 참으로 좋지 않겠느냐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복음서를 보면 그것이 아니고, 성전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하다가, 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이야기하고, 그렇게 마구 뒤죽박죽이 되어서, 도대체 그것을 보고 이해를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보지 말라는 것인지 헛갈린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마태, 마가,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마무리가 깔끔하지를 못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고 하면,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사실상 그런 경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만이 아니고,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등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왜 마무리를, 즉 우리가 제일로 궁금해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끝장을 내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왜 속 시원하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보다도 차라리 80년도인가 히트를 친 '휴거' 라는 소설이 더 나은데, 그 소설이 더 정리가 잘 되어있다는 겁니다. 1992년 10월 18일인지 날짜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장림 씨가 예수님께서 재림한다고 주장한 날이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돈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돈을 다 교회에 냈는데, 그런데 이장림 본인은 45억인가 따로 챙겨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직접 드리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ㅋㅋ).

◈ 바람은 그냥 불어오는 것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아무튼 사람들은 뭐든지 간에 자기 몸에 맞추려고 하는데, 하지만 바람은 우리가 만듭니까? 바람은 전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고, 바람은 그냥 분다는 겁니다. 지금 제 말이 맞지요? 바람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불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꽃도 빨간 것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다가오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굳이 자기가 정리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도,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자아상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정리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직접 정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오면, "너는 부산에서 불어온 바람이니, 그러니 거기에 서 있어라. 너는 창원에서 불어온 바람이니, 그러니 저기에 서 있어라. 그리고 너는 대구에서 불어온 바람이니, 그러니 저기 저쪽에 서 있어라" 라고, 그렇게 바람을 우리가 정리할 수가 있습니까? 바람은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즉 임의대로 부는데, 그러니 "바람은 그렇게 못해도,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라는 것은, 그런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

대전에서 강의를 할 때 그런 내용을 한 것 같은데, 소위 '바람 불어 좋은 날' 이라고 말입니다. 유지인 주연의 영화제목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교회의 마루바닥에서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태풍이 불어와서 지붕이 날아가고, 벽도 무너지고, 그렇게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바닥에 기도하는 사람만 있을 때, 과연 그것이 교회인지, 절간인지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어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갔다고 하더라도, 진짜로 신자라고 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것이 어디에 해당이 되는고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오직 책에 기록된 자만이 구원된다" 라고 하는, 그것과 관련이 되어서, 즉 태풍이 불던 말던 간에 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쳐서 교회가 모두 다 날아갔다고 해서, 그래서 "하나님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덤벼들면, 그것은 무엇을 가지고 대드는 겁니까? 그것은 "내가 기도한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한다" 라는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숨겨진 죄라는 말입니다.

◈ 죄 - 굳이 왜 '내'가 !!

다시 말해서, '죄' 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내가 이렇게 김치냉장고에 박스를 채우듯이 채워져 있는 요한계시록의 바람과 같은 하나님의 질서를, 왜 그것을 내가 구태여 정리해야만 하는가?" 라는,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자기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요한계시록의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즉 오직 그 근거는 무엇인고 하면, 다니엘 12장 1절의 말씀처럼, "책에 기록이 되었다" 라고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이 요한계시록 전체가 바람이 불어오듯이 자기 자신에게 부딪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런데 왜 거기에 '나' 라는 인간을, 즉 자아를 집어넣어서 정리를 하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정리하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정말이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도대체 정리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겁니다. 그래도 "내가 마지막 때를 알아야 되겠다"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당신이 뭔데? 당신이 왜 알아야 되는데?" 라고, 우리는 그렇게 의심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바람은, 인간의 의견을 들을 이유가 없어 !!

사실은 모든 부는 바람의 경우에도 어떠합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갈 때에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떻게 바람과 파도도 예수님에게 순종을 하는가?"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까, 믿음이 좋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게는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데, 그런데 왜 '나' 라는 몸에게는 바람과 파도가 전혀 순종하지 않는가?"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람과 파도가 우리에게 순종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는 책, 즉 생명책은 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책의 리스트를 작성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숙의해서 적어놓은 책이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우리 인간의 의견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 정낙원 - 예수님 옆에 베개를 놓고 !!

정낙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는데, "풍랑이 이는데 예수님이 주무신다. 거기에서 제자들이 할 것은,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어지면 각자 모포를 들고 예수님 옆에 베개를 놓고 같이 자면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같이 자면 어떻게 됩니까? 바람이 불어서 배를 뒤집으면, 예수님도 죽고, 제자들도 같이 죽는데, 그것이 바로 다니엘 12장 2절에 나오는 티끌로 돌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티끌이 다시 살아서 !!

그런데 그렇게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 드라마의 끝이 아닌데, 다니엘 12장 2절에 의하면, 티끌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살아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되는데, 즉 세상 모든 걱정이 다 끝나버렸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문제를, 그런데 왜 구태여 '나' 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왜 '내' 몸도 아니고 주님의 몸인데, 그러한 주님의 몸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느냐는 겁니다. 왜 자꾸만 말썽을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잡채를 만들어주면 그냥 곱게 먹으면 될 텐데, 그런데 괜히 요리도 못하는 초등학교 2학년 짜리 딸아이가, 그만 음식에 소금 더 넣고, 또 후추도 안 넣을 때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넣고, 냄새를 잡는다고 하면 소주도 자기 마음대로 부으면, 그렇게 해서 음식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 다니엘서는 '쥬라기공원' ??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즉 책에 기록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다니엘 12장 1절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꼭 자기가 나서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몸을 좌우하는 또 다른 세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미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력이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즉 "악마야. 그만 숨고 나와라. 숨바꼭질할 시간이 이제 끝났어. 세상은 끝났어. 빨리 나와라. 바다에 있는 놈아, 어서 빨리 안 나오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이 곧 짐승인데, 그래서 이 다니엘서 전체를 보면 그야말로 완전히 '쥬라기공원' 이라는 말입니다.

◈ 갈수록 묵시는 가깝고, 역사는 희미해지면서 점선으로 !!

요한계시록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그건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예수님께서 종말을 이야기할 때 전부를 다 층층이 구조로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즉 가면 갈수록 묵시는 가깝고, 역사는 희미해지면서, 즉 점선으로 남겨버린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처음에는 역사로 시작해서, 즉 "반드시 예루살렘 성은 불탈 것이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뒤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뒤로 가면 층층이 묵시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레일처럼 생긴 그 층 하나 하나가 더 보태지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 하나가 전체를 전부를 다 커버한다는 겁니다. 즉 층 하나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를 다 말입니다.

◈ I am a card !!

우리가 사람을 그릴 때 대충 선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은데, 이 사람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한 장의 카드로 보자는 겁니다. 포커를 할 때의 카드 말입니다. 그렇게 카드를 보면, "I am a card" 라고, 즉 "나는 카드이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눈, 코, 입이 이렇게 다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카드가 정면으로 넓게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들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해서 성경을 보니까, 즉 모든 성경을 일단은 자기를 거쳐서 해석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카드를 옆으로 한번 세워보면 어떻게 됩니까? 카드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필름과 같이 얇은 막(膜)이 된다는 겁니다.

◈ 카드가 옆으로 서서, 막(膜)이 되어버리면 !!

그런데 그렇게 막이 되어버리면, 이렇게 정면으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렇게 옆으로 서게 되면, 즉 하나의 막이 되어서 보이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양쪽에서 서로 노리는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이쪽에선 악마가, "너는 내 거야" 라고 하고, 반면에 저쪽에서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거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막으로 되어있으니, 서로 서로가 잡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카드는 계속해서 "나는 카드이다" 라고, 즉 자기 혼자서 카드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악마는 이런 카드의 고백을 듣지 않고 "너는 무조건 내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도, 카드가 "나는 무엇 무엇입니다" 라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러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는 값으로 샀기 때문에, 내 거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인간은, 매일같이 정면(앞)으로 서는 카드 !!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만날 이렇게 되는데, 즉 우리는 옆으로가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해석도 내가 당연히 알아야지요" 라고, 그렇게 일단은 자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답시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를 일단 거쳐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그만 이렇게 옆으로 세워버리는데, 그렇게 옆으로 세워버리니까, 이것은 미처 두께가 1미리도 안 되는데, 마치 아주 얇은 LED TV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 필름 두께가 너무나 얇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어떤 이미지를 담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면으로 봐버리면, 모든 것이 다 이미지가 되는데, 그 이미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상상이고,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매일같이 하는 것이 공상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옆으로 서게 되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런데 정면으로 보게 되니까, 여기에서 자기가 상상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걱정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카드처럼 옆이 아닌 앞으로 보게 되면, 여기에는 무엇이 작용하는고 하니, 그만 시간관이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 인간들의 시간관 - 과거, 현재, 미래 !!

이 시간관은 여러분이 지금 피곤하더라도 꼭 알아둬야 하는데, 이 시간관을 모르면 묵시개념이 풀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관이 무엇인고 하면, 먼저 쉽게 하겠는데,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으로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관은, 처음에는 과거로부터, 그리고 현재로부터, 그렇게 해서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시간관' 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에다가, 그것에 마일리지로 쌓여서 현재가 되고, 또한 현재를 통해서 미흡한 것을 채우는 식으로 미래로 나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과거가 반드시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행함을 하게 되면, 미래에 자기가 기대한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관' 이라는 말입니다.

◈ 그러나, 옆으로 서게 되면 !!

그러면 '나' 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는가? 과거의 노동한 것이 지금의 '나'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이 엠 어 카드" 라고 할 때, 그래서 이렇게 정면으로 보고 있을 때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옆으로 딱 돌려버리면, 그러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원인과 결과의 소속이 전부가 다 하나님의 소속으로 바꾸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여기 이렇게 옆으로 서게 되면, 그만 폭이 좁아서 이런 기존의 시간관을 가질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 옆으로 서게 되면 그냥 막 통과해버린다는 겁니다.

◈ 참새에게 창고가 있는가?

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의 경우에, 어디 자기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창고를 누구보고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참새들끼리 모여서 "야, 저 곡식을 많이 먹기 위해서 이쪽에 경남 지방에다 창고를 하나 짓자" 라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런 것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새가 창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참새는 분명히 창고가 없는데, 그러나 누가복음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는 어떻게 합니까? 창고를 짓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창고를 짓는다는 말은, 이 카드로 말하면, 이렇게 옆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정면으로 바로 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니까, 창고 있음에, 즉 여기 있는 창고에다가 그만 자기 미래를 담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내 영혼, 걱정하지 마라. 내 장래까지 창고의 곡식으로 넉넉하게 먹고 살 수가 있다" 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여기다 모두 담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카드를 그만 옆으로 돌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실을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폭이 좁은데 말입니다.

◈ '나'는, 악마와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거물 !!

그렇다면 여기 옆으로 서 있는 얇은 막과 같은 카드에서, 그 양쪽에서 마귀는 마귀대로, 또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서로 통과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통과하게 되면 현재 '나' 라는 입장은 무엇인고 하면, 악마가 하나님과 거래하는, 즉 "악마는 이런 놈이고, 또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로서 유지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도 사라지고 하나님도 사라지는데, 왜 그런가요? "마귀는, 자기 노동의 원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오랜만에 어려운 말을 하나 해봤는데(ㅋㅋ), 즉 하나님은 자기가 원인이 될 경우에만 포착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노동의 원인이 되지 아니하면, 그 어떤 결과도 인정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자기가 제공한 것만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 데카르트 - 하나님도, 내가 원인을 제공해주니 존재한다 !!

데카르트란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했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입니다. 즉 "내가 생각한다는 자체를 봐서 다른 것은 없애도 이것만은 없애지 못하는데, 곧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데카르트님, 그러면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당연히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없다"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원인을 주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 나는 나훈아의 '무시로'가 좋아 !!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만약에 나이가 90살에 치매에 걸렸다면, 그래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완전히 두뇌 시냅스가 망가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와서 뭐라고 해도, 목사님이 와서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해도, 그 사람은 그렇게 심방을 갔던 목사님을 보고도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다음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말입니다.

* A : 권사님이 좋아하는 찬송가를 틀어드릴게요.
* B : 찬송가 말고, 나훈아의 '무시로'를 틀어라.
* A : 이건 평소에 권사님이 제일 좋아하던 찬송가인데요?
* B : 듣기 싫다.
* A : 그러면 성경말씀을 읽어드릴까요?
* B : 나에게 예수 이야기는 하지 마라. 듣기 싫다.

◈ 예수와 하나님도, '나'의 창조물 !!

그렇다면 그 이전에 예수와 하나님이 무엇인고 하면,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과 예수라는 것이 자기에게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그런 정보가 누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누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아프든지 죽어버리면, 자기 몸과 같이 그것도 홀라당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을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떤 하나님도 나는 거부한다" 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다" 라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는 스스로 있고, 예수와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쿠 목사님, 딴 사람들은 몰라도 저희들은 안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지 안 그런지는 복음을 전해보면 안다는 겁니다. 즉 "여러분, 그 어떤 행위도 관계없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그렇게 복음을 전했을 때, 만약에 평소에 자기 행위를 염두에 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러면 내 행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네요" 라고 하는데, 당연히 아무런 소용도 없고, 사실상 그런 것은 물을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 야, 기분이 더럽게 나쁘네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지금 무척 기분이 나쁜데요" 라고 할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기분이 나쁘고 말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입니다. 즉 "내가 무엇 무엇하다" 라는 것이 성경책에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까 본 요한계시록 안에 포함되어있지 않는데, 즉 "내가 기분이 나쁘다. 혹은 기분이 좋다" 라는 것 등은, 그런 것은 성경에 전혀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오면, "야, 바람이 분다" 라고 하면 될 것을, 꼭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바람이 부는 것을 내가 안다" 라고, 꼭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즉 남은 몰라도, 기어이 자기는 안다는 식으로, 그렇게 거기에 꼭 '나'를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 똑바로 서, 똑바로 서 !!

다시 말해서, 자꾸 주님께서는 자꾸 뾰족하게(?) 세우려고 하는데, 즉 옆으로 이렇게 얇은 막이 되도록 세우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무슨 더러운 버릇이 있는지, 자꾸만 정면으로 서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자신을 향해서 "똑바로 서, 똑바로 서" 라고, 만날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옆으로 막이 되게 서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또 이렇게 정면으로 해서 펼치게 되면, "내가 과거에 이런 일을 했으니까, 내가 이런 기도를 했으니까, 이런 응답을 받는구나" 라고, 또 다시 여기에다 자기의 시간론을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묵시가 역사를 잡아당길 때는,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의 몸하고 싸워야 되는데, 물론 우리의 시간론과도 싸워야 되고 말입니다. 또한 자기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성경해석과도 싸워야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싸울 것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 70이레 - '이레'는 창조단위 !!

여기서 또 한 가지의 예를 들어보면, 다니엘서 9장에 보면, '70이레' 라는 것이 나오는데, 제가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왜냐하면 제가 그냥 강의진도를 나가면, 여러분이 몰라도 그대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제가 지금 하려는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이 70이레가 과연 여러분이 아는 경우에만 70이레가 들이닥칩니까? 아니면 몰라도 70이레가 진행됩니까?" 라는 것인데, 즉 둘 중에서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문제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은, "내가 알아야 70이레가 진행된다" 라는 것이고, 2번은, "아니다. 내가 몰라도 진행이 된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정답은 몇 번입니까? 당연히 2번인데, 그러니 여기에다 '나'를 집어넣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이레'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의 '창조단위' 인데, 그런데 이 창조단위는 누구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창조단위이니, 당연히 창조에 관여한 몸만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창조에 관여한 몸만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어릴 때 운 사람은, 노래도 잘해 !!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1살 때의 기억은 누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엄마가 기억하지요? 왜냐하면, 엄마가 창조자(?)이기 때문에 기억을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1살 때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 거기에 대한 해석을 누가 합니까? 당연히 엄마가 하는 겁니다. 물론 아빠는 옆방에서 쿨쿨 자고 말입니다. 즉 1살 먹은 아이가 해석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애가 10살이 되어서 엄마에게 듣기를, 즉 "너는 1살 때에 종종 밤새도록 울었단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엄마에게 해석을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10살 때의 몸이 10살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물론 엄마가 이야기할 때는 1살 때의 이야기를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 말고, 딴 몸이 되는 10살이 된 자기가, 그렇게 자기 몸을 가지고 그것을 다시 재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

다시 말해서, "그때 내가 울어도 늘 울었겠는가? 아마 울어도 신사답게 울었겠지" 라고 새롭게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뭐라고 합니까? "나는 1살 때 울었단다. 그런데 그렇게 어릴 때에 자주 울었던 사람은, 노래도 정말 잘하고 머리도 엄청 좋대. 그리고 나는 울어도, 그렇게 엄마 애를 먹이지 않고, 점잖게 울었을 거야" 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엄마의 경우에도 "너는 1살 때 심하게 울었다" 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말고, 사실은 엄마가 평생 혼자 지니고 있다가 돌아가실 때도 혼자 알고서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3자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봤자 입만 아프지, 전부가 다 왜곡되게, 즉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 아하, 이것이 바로 '70이레' 구나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러니 성경말씀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여기 '70이레' 라는 것도 그 해석은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사실 주님만이 해석을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해석을 못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해석할 권리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70이레에 있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고 하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아하, 이것이 바로 70이레구나. 그게 70이레에 포함이 되었구나!" 라는 식으로, 그렇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최고의 멋진 해석이라는 말입니다.

◈ 70이레 - '7이레+62이레+1이레' !!

다니엘서의 '70이레' 라는 것은 나누어보면, '7'과 '62', 그리고 '1' 라고 되는데,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7 다음에 62가 되고, 또 62 다음에는 1이 되는구나" 라고 알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레' 라는 것이 붙어있고 그 앞에 숫자가 있으면, 그것은 마치 그 전체가 김치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박스처럼, 그 전체가 '7이레'고, 그 다음에 밀려서 '62이레'가 되고, 그러면 여기는 점선으로 이만큼 남아있게 되는데, 그것이 또 밀려서 이 전체가 '1이레'가 되면서, 그렇게 해서 '1이레'가 전체를 모두 다 포함한다는 겁니다.
 
◈ 7일 창조와 70이레 !!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를 며칠만에 했지요? 창조를 7일만에 했는데, 그렇게 7일만에 창조하신 분이, '70이레' 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7일만에 창조했던 그 원리를 가지고서, '70이레'를 분명히 여기 이 세상에다 적용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창조에는 그 어떤 방향이 !!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7일 동안에 창조할 때, 그 창조에는 뭔가 방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방향이 말입니다. 점차 점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 방향이 이어지는고 하니, 처음에는 천지창조, 즉 '자연물'에서 점차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마지막 최후에 창조된 어떤 '인물'에 그 관심이 집중이 된다는 겁니다.

◈ 노아홍수 - 코로 호흡하는 놈들은 다 죽었어 !!

영 표정들이 떨드럼한데, 혹시 창세기 1장 안 읽어보셨습니까? 그렇게 어떤 인물에 관심이 있으면서, 6일째가 되면 코로 호흡을 하게 되어있는데, 즉 6일째가 되면 같은 동기생들은, 그러니 같은 짐승들은 코로 호흡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7장 22절을 보면, 노아홍수 때 그 홍수가 무엇을 죽인다고 되어있습니까? 물고기를 죽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비둘기를 죽이는 겁니까? 까마귀를 죽이는 겁니까? 아니면 꽃을 죽이고, 들풀을 모두 죽이는 겁니까? 그 말씀에 의하면, 코로 숨쉬는 놈들은 다 죽였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창 7: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창 7:22)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그러니 그만큼 이 노아홍수 자체가 이미 묵시의 세계로, 즉 창세기보다도 한 발자국 더 앞당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노아언약을 깨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레', 즉 창조의 7일이 다 담겨있는데, 그래서 이 '이레'를 두고 창조의 단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좀더 쉽게, 쉽게 !!

지금 표정들이 영 아닌데,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조금 아깝지만 제 머리카락이라도 좀 뽑아서 나눠드릴까요?(ㅋㅋ) 지금 진도를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튼 지금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제가 다시금 반복해서 쉽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람이 분다" 라고 할 때, 사실 그것은 바람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내가 바람을 맞는다" 라고, 거기에 '나'를 굳이 집어넣을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불게 되면, 그것은 "야, 창조된 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 바람은 왜 부는가?

그러니 "바람은 왜 부는가?" 라는 문제는, 이렇게 정면으로 서 있지 말고, 이렇게 옆으로 서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것들 중에 하나가 누구입니까? 마지막 6일 째에 창조할 때 누구를 창조했습니까? 사람을 창조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창조의 원리가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운대' 라는 바다가 있고,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또한 별을 주신 것은,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전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옆으로 서면, 태양이나 별이나 우리 자신이나, 모두가 다같이 하나님이 창조했던 창조작업의 하나의 대상이 되어서, 그래서 다같이 파묻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이렇게 옆으로 서 있지를 않고, 이렇게 정면으로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보는고 하면, 그만 저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이 되어서 함께 파묻히지를 못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태양야, 너는 개기일식을 왜 하는데?" 라고 하면, 태양은 말하기를, "내가 하든 말든, 그것을 니가 왜 관여하는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물을 보고, "어이 물, 이리 나와봐. 너는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라고 한다면, 물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든, 니가 왜 간섭하는데?"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도대체 왜 그렇지? 옳구나. 그것을 이용해서 전기를 만들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혜로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을 누구 마음대로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 그런데, 옆으로 서면 - 통과 또 통과 !!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옆으로 서게 되면, "야, 마치 바람이 불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었구나" 라고 하면 되는데, 그 다음에 우리는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 그 다음 조치가 무엇입니까?" 즉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할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면 된다는 겁니다. 옆으로 서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몸은 주님의 몸이니,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까지 가득 담겨있는 전체 말씀을 가지고, 그 다음에 나에게 어떤 식으로 퍼부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우리가 그냥 바람을 받듯이, 그냥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다음에는 "통과, 또 통과!" 라고, 그렇게 이 세상을 향해서 통과시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를 증거하는 것인데, 즉 "야, 나에게 이런 것이 왔거든. 니는 들어봤나?" 라고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서 이렇게 정면으로 서게 되면, 그래서 자꾸만 쥐게 되면 자기 소유가 되는데, 그러면 그만 골치가 아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옆으로 서서 "통과, 또 통과" 라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야, 8명이 다 탔지? 그러면 '오라이' !!

지금 모든 교회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고 하면, 통과를 시키지 못하고 쥐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노아방주에 구원받은 자가 8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전세를 낸 차는, 아니 그 배는 분명히 크기 때문에 한 4000명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8명 타니까 그냥 '오라이' 라고 하면서 출발을 시켜버렸다는 겁니다.

그때 누군가가 "하나님, 빈 좌석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왜 노아방주의 문을 닫습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야, 너 이리 나와. 엎드려뻗쳐. 너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것이 빈 좌석으로 보는가? 나는 8명으로 꽉 찬 걸로 보이는데, 너는 왜 비어있다고 생각하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하늘나라가 과연 비어있는가?

사도행전을 공부해보면, 거기서 교인들이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서, 그렇게 성령이 임하면 하늘나라가 확장된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그렇게 확장될 성질이 아닌데,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공간개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확장이란 개념은 없고, 오직 수직적인 개념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있어버리면, 그것은 칸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으니, 그래서 비어있다고 본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즉 하늘나라는 결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혼자 있다고 여기니 비어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한 사람만 있어도 꽉 찬 것이고, 두 사람이 있어도 꽉 찬 것이고, 또한 세 사람이 있어도 꽉 찼다는 겁니다. 즉 혼자서 구원을 받아도 구원을 확실하게 다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왜 그렇지 않은가? 자기 몸이 중립이 아니고, 이미 악마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옆으로 서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이렇게 정면으로 서기 때문에, 그래서 악마가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 자신이 악마가 있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까도 이와 비슷한말을 했는데 말입니다.

◈ 그런데, 내가 신내림을 받았다면 !!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약에 신내림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자기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악마는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의 과거 경험에 의하면, 자기는 신내림 받았으니까 말입니다. 즉 자기가 뭔가 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1950년도에 신내림을 받아서 악마가 있다고 했다가, 1958년도에 교회에 나온 뒤에는 악마가 없다고 했다가, 다시 1960년도에 신내림 받아서 악마가 있다고 했다가, 1970년도에 다시 교회에 나와서 악마가 없다고 했다가, 그리고 또 앞으로 뭐라고 할지 미지수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그 사람은 본인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겁니다. 되풀이해서 계속 발전하면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인간은 근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보다도, 그 기준이 자기의 행위로 인한 창조에 있는 이상,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 사람은 그냥 자기 행함에 대해서 놓지 못한다는 겁니다.

◈ 회개하라 !! - 니 행함을 치워라 !!

이것만 더하고 10분 쉬겠는데, 성경에서 '회개하라' 라는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즉 다니엘 70년 포로생활에 있어서 '회개하라' 라는 말은 무슨 뜻인고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즉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된 것을 가지고, 그런데 거기서 다시 이방인처럼 행함으로 나온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늘의 비밀을 인간의 행함으로 가리운 것인데, 바로 그것에 대해서 회개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행함은 하늘의 비밀을 가렸으니, 그러면 그 행함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철거를 해야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철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환난' 인데, 그러니 철거할 때 누구도 같이 철거가 됩니까?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옆으로 서 있는 몸이 아니라, 정면으로 서서 바로 자기가 뭔가를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그런 몸, 그것도 역시 하늘의 비밀을 가리우는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몸도 역시 와장창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 짐승은, 구원을 위한 특별 초청 손님들 !!

그렇게 그 몸이 날아가도록,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작용이 곧 환난이고, 이런 환난이 일어나도록 돕기 위해서 특별히 초청된 손님을 두 글자로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짐승들께서 오셔서, 그것도 노시는 바다에서 친히 육지로 방문하셔서, 모든 인간의 행함이라는 몸을 다 죽여버리는, 그런 훌륭한 일들을 해주시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목 베임을 받은 자가 이미 구원을 받았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이제 10분을 쉽시다.


                                                           2009,10,09 오후 4시 10분에 마침.
                                                       2010,04,12 오후 7시 10분에 다시 마침.
 
                                          목사님의 목이 벌써 다 쉬었는데, 어떻게 하지? - 녹취 '구'

 첨부파일 : 09여름수련회(다니엘,스가랴)(강의정리)(1~9).zip (392.9K), Down:21
 구득영 (IP:203.♡.97.185) 10-04-22 21:55 
제가 느낀 바로는, 지금까지 이 목사님의 강의 중에서 최고의 명강의 !!
 강구만 (IP:121.♡.1.16) 10-04-22 22:27 
'나'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어 답이 없는, 죽은자 가운데서도 영으로 아들 만들기에 조금도 실수가 없으신 주님 입니다. 우리를 날마다 부끄러워 얼굴응 못들게 하시고 날마다 티끌에서 깨어나게 하시네요. 놀랍게도 우리는 주의 피로 새로 지음 받은 '교회' 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