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아가 강해:사랑과 생산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의 원함도 주님의 선제적 조치에 의해서 별 필요 없어 보이는 말씀 앞에 현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씀 앞에 이렇게 모이게 해주신 걸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이 세상에 필요한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지 말씀을 들으면서 보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란 아름다운 노래라 돼있지만 노래 중에 최고의 노래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비교급으로 시작하는 대목이 아가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 그리고 그 안의 내용들이 전부 다 비교급으로 엮여져있어요. 무엇보다 아름답다, 무엇과 같다. 이렇게 비교급으로 주어지는 것은 간극, 또는 간격, 다른 말로 하면 틈이 되겠지요. 틈을 점차, 점차 메워나가는 겁니다.
틈을 메워나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틈이 있다는 거예요. 틈은 뭐냐? 갈라져있다. 갈라져있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비교급으로 메워나가는 거예요. 이것보다 이것이 낫고 이것보다 이것이 낫고, 계속 그렇게 나가는 겁니다.
틈이 갈라져있다, 그리고 그 틈 메운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전제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인간은 영원히 벌어져있다. 두 번째, 계시가 없으면 벌어져있는데 계시가 투입되면 극복이 된다, 이러한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또는 하나님과 자연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운다면 그 메우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 같으면 사다리를 만들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걸쳐놓든지 아니면 드론 띄워서 메울 수 있겠는데 하늘과 땅에 사이에 다리 같은 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투입되는 게 아니라 사랑이 투입될 때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이 메워질 수 있느냐? 그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되지요.
사랑의 반대말을 뭐로 보면 이해하기 쉽겠지요. 뭐든지 어떤 개념을 잡을 때 반대말이 뭔지 알 때 원래 뜻을 정리하기 쉬워요. 사랑의 반대말이 힘입니다. 그러면 힘의 반대말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뭘 빼는 걸 말합니까? 힘은 모조리 다 빼는 걸 말해요.
힘이 있다 할 때는 반드시 힘 소유자가 등장하게 돼있어요. 최종 소유자입니다. 가장 힘센 쪽이 밑의 사람들에게 분배해주게 돼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에너지와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제공해주신 거라는 그런 관계가 성립되겠지요.
그런데 힘은 결국 소유자가 되고 소유자가 있다는 말은 소유자가 등장해야 되잖아요. 소유자의 등장은 내가 여기 있다. 있음. 있음은 같은 말로 존재라 할 수 있고. 내가 여기 있다. 뭘 가지고 있느냐? 힘을 지니고 있다, 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간격을 극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힘을 갖고 있는데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면 천국에 도달될 수 있겠습니까, 하면 이것은 절대로 천국과 지상의 갭은 메워지지 않아요. 연결되지 않습니다.
힘의 반대말이 사랑이라 했지요. 사랑은 특징이 있어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할 때 뭘 지니고 자기 자신이라 했습니까? 힘을 지닌 자, 힘을 소유한 자가 여기 있다고 본 거예요. 그게 나라고 보거든요. 그러면 반대니까 힘을 가진 나를 잊어버리면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내가 발휘할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내가 잃어버리면.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 천국에 가고 싶어도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어도 내가 못 놓는 게 있어요. 나의 역량과 나의 솜씨와 나의 스킬, 재주 그런 것들을 유지한 채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나의 아이큐 이런 것, 나의 학식, 덕식, 내가 선행을 많이 한 것. 이런 것들을 지니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빛나느냐 하면, 갈수록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더 붙잡아야 되죠. 붙들어야 되죠. 혹시 남한테 밀리지 않도록 남한테 질책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단단히 사수해야 되겠지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한 사람만 하면 돼요. 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의 기능이 뭐냐 하면, 바로 왕입니다. 왕이 나타나요. 왕의 일은 법에 의해서 처벌하는 겁니다. 처벌하는 기능이거든요. 왕 한 사람만 하면 돼요. 다른 사람은 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 1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가라” 솔로몬이 지은 최고의 아름다운 노래란 그런 뜻이지요. 솔로몬이 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이렇게 번역해도 괜찮아요. 어떤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솔로몬이 자기 자신이 왕이란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왕은 유일하게 최종적인 힘을 가진 거예요.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힘을 가진 자가 왕입니다.
그런데 힘만 있는 걸로 알고 있던 아름다운 왕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도 사랑의 노래인 거예요. 그러면 솔로몬이 사랑의 노래를 하면서 가사 내용은 그냥 현실화하면서 점차, 점차 무엇이 줄어들고 무엇이 늘어나느냐 하면, 자기가 가진 힘이 줄고 반비례해서 사랑이 증가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자기 낮춤, 자기 잃어버림이 증가하겠지요.
자기 이름이 증가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여인입니다. 여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계시를 가진 사람이죠. 힘으로 통치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힘을 쓰지 않고 힘을 내다버림으로써 잃어버림으로써 생산되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여인이에요. 여자에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피그말리온이라는 왕이 있거든요. 그 왕은 괴팍해서 모든 이 세상의 여자를 증오합니다. 마음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가 여자를 조각해요.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에게 부탁해서 거기에 생명을 부여해서 자기가 조각한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누구 소유냐 하면, 바로 왕 자기 소유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왕은 자기 힘을 잃었습니까, 더 확고히 했습니까? 더 확고히 했지요. 잃어버린 게 아니지요. 왕이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왕이 왕답지 못하고 왕의 권력을 내놨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왕이면서도 그 힘을 사랑으로 쏟아놓고 그 결과로 여인 하나가 등장해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로부터 이야기하면 안 되고 사랑은 어떻게 생기느냐? 이렇게 질문해야 옳거든요. 사랑은 자기의식에서 타인의식으로 전환하면서 이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저 사람이 될 때 저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게 있어요.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내 자리에서 저쪽 자리로 이동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한테는 구원받는 나는 없어요. 구원받는 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밀쳐버린 내 반대편에 구원받는 내가 들어있다 했잖아요. 내 반대쪽에. 기존에 있는 내 자의식은 십자가를 모독하고 십자가를 공격하기 때문에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십자가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 영광 대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그러한 요소 때문에 밀려버린 그분 안에서 없던 내가 새롭게 생성되는 것, 만들어질 때 그것이 바로 예수 안의 나라 했어요. 그러면 예수 안의 나는 내가 건너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건너갈 수 없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자의식은 남한테 건너가는 능력이 없어요. 반대지요. 저쪽을 내 것 만드는 성향이 있어요.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절대자기 때문에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남을 나한테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그런 성향이 있지 나를 버리고 저쪽으로 건너갈 게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 있어서 엄격한 의미에서 남은 없어요. 인간에게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타인이 그 현장에 내가 타인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규정을 해주지요. 내가 너에게 필요하다고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꽃은 나한테 와서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건 부모자식 간에도 다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각자 따로 놀아요. 부모자식,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가정에 방이 여러 개 있듯이 각자 따로 놉니다. 각자 따로 놀기 때문에 사실은 사랑이라는 게 없어요. 여러 사람이 살지요. 한 집에.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은 사실상 제대로 된 하나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첫 번째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 사랑이 본인이 필요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솔로몬은 사랑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힘을 원하고 있지 사랑을 원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태생이 그래요. 죽을 때까지 나만 챙기는 쪽으로 우리는 살게 돼있습니다. 아닌듯한 인상 취하지 마세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할 재주가 없어요. 남을 이용하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타인이란 내가 필요할 때 남이라고 명칭을 붙이면서 살짝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임시로 친구 아이가, 당신은 나의 아버지요, 너는 내 딸이다. 이렇게 붙이는 것이지 그것은 필요할 때 명칭을 부르는 겁니다. 그것을 어렵게 말해서 내 이름의 확장이라 하는데 상대 이름은 개무시하고 내 이름의 확장이에요. 내 이름이라는 내 존재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삼키는 그러한 본능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한테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양식과 태도가 그대로 누구한테 실행에 옮기겠어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게 다 그대로 적용합니다. 내게 필요한 하나님, 내게 필요한 예수님, 내게 필요한 성령이라는.
자기를 비운다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어떤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둘 다 미친 겁니다. 둘 다 정상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기존 노선에서 비켜가는 거예요. 삶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나는 것, 이것은 위반이고 파격, 또는 전위적인 것.
이사야 37장 36절 읽어보겠습니다. 앗수르 군대 히스기야 왕 유다나라 칠 때 그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이렇게 돼있어요. 감히 이스라엘을 치다니 한 번 혼나봐라. 그래서 그날 밤에 십팔만 오천 명 죽었습니다.
이 대목을 볼 때 우리가 익히 교회 와서 듣던 정말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에요. 하나님이 이 정도는 보여줘야 하나님이 하나님 믿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폭력적으로 완벽하게 자기 백성을 지켜줘야 우리가 하나님 믿는 어떤 즐거움, 보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렇거든요. 어딜 감히 나를 쳐.
그러니까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 싶은데 너무 힘이 없었는데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으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친히 지키지 못한 내 존엄성, 내 가치를 지켜주시되 아주 기적적으로 과격하게 파격적으로 나의 적을 박살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믿는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 바로 이거였어. 정말 하나님은 그때 살아 계시는 거예요. 간증하려 돌아다니고 난리에요.
내 몸이 암에 걸렸는데 암이 나았다. 정말 살아 계심.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런 류의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나에게는 하나님만이 필요하고 혹시 필요하다면 나와 같이 하나님 믿는 사람, 한 형제, 그 형제들이 모인 교회가 있으면 더는 뭘 바라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방금 예를 들 때 남자, 여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사람과 사람들이 나오지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 교인이 오십 명이다. 한 쪽은 오천 명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교회에 가겠습니까? 어느 교회에 가야 돈을 적게 내느냐 이 말이에요. 오천 명 교회 가지요. 점심 값 안 내도 교회 잘 돌아가니까. 벽돌로 잘 지어놨겠다. 또 건물 짓는다는 소리 안 할 거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오십 명 교회 속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오천 명 교회 가겠습니까? 보지도 않고 오십 명 교회 가지요. 사랑은 미친 거예요. 힘의 논리를 이탈한 겁니다. 돈의 논리, 힘의 논리, 출세의 논리, 승진의 논리, 건강의 논리를 다 벗어나는 거예요. 돈이나 승진 우리가 이런 것을 왜 선호하느냐 하면, 그게 내 존재를 강화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만약에 기도해서 잘 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뭉텅이 힘을 추가적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했더니만 자식이 너무 잘 돼서 아버지 유럽여행 보내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올 때 그걸 잘 됐다고 이야기합니까, 못 됐다고 이야기합니까? 집구석이. 잘 된 집구석으로 보지요. 잘 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아들이 탈북 여자 좋아해서 같이 북한 들어간다고 하면 그 집구석은 잘 된 집구석이 아니고 말아먹은 집구석이죠. 캐나다 대학 다니고 있는데 “엄마 나 보람 있게 살란다. 북한에 가서 선교할래.” “그렇구나. 내가 신앙적으로 잘 키웠구나. 그래 북한 선교 가라. 좀 조심하고.”
대학생이 21살이 뭘 알겠습니까. 철딱서니 없어서 인민일보 휴지통에 버렸더니 그게 걸려서 죽어 돌아왔잖아요. 그럴 때 주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올 수 없지요. 어떻게 키운 예쁜 내 자식인데. 그것 때문에 미국의 트럼프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더 심하게 했지요.
세상은 힘없이 못 산다는 건 애들도 아는 이야기에요. 꼭 필요한 게 뭐냐? 사랑이 아니에요. 힘이에요. 힘은 남자, 여자를 제치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남자, 여자 따지지 말고 남자든 여자든 돈 있는 남자, 돈 있는 여자가 중요하지 그냥 남자, 여자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공직에 있는 여자들, 교사, 약사, ‘사’자 붙는 여자 괜찮아요. 노는 여자? 골치 아파요. 뭔가 붙어야 돼요. 남자도 마찬가지고. 남자가 얼굴만 예쁘다고 호텔 사장과 연애할 수 없어요. 적어도 능력이 있어서 호텔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어야 돼요. 박보검처럼. <남자친구>처럼 그렇게 돼야 된단 말이죠. 인물도 되고 능력 있으면 금상첨화지요.
하지만 힘, 능력이라니까요. 능력이란 남자, 여자를 제치고 힘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어요. 힘 가졌는지 그것만 물어요. 힘 가졌어요? 힘 가지려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요? 기도하고 난 뒤에 얼마나 추가된 힘을 얻었습니까? 그걸 묻는다니까.
혹시 목사 된 사람에게 교회 개척하셨습니까? 제일 먼저 묻는 게 교인 몇 명입니까? 그 다음 묻는 게 헌금 한 주에 얼마 나옵니까? 거기에 여자 몇 명이고 남 자 몇 명이고 그건 안 물어요. 힘 되는 사람 물어요. 교인 오십 명인데 전부 다 kbs <동행>에 나오는 비리비리한 사람들, 이러면 아이고 골치 아프다. 괜히 물었다. 이렇게 돼요. 자수성가할 수 있는 그런 교회냐고 묻는 겁니다. 이거는 교회도 사업도 다 마찬가지거든요.
오늘날은 사람들을 원해요. 남자,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남자, 여자를 왜 원하지 않는가? 솔로몬처럼 자기가 남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생산하는 것에 왜 관심이 없는가? 남자, 여자 문제는 일단 돈이 있고 난 뒤에는 저절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 여자 앞에 전부 다 돈 있는 남자, 돈 있는 여자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내가 만약에 돈 있는 남자라면 여자가 예쁘고 이런 것은 골라잡을 수 있다는 거예요. 밥벌이도 못하는 남자가 여자한테 나와 결혼하겠습니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세상은 남자, 여자 우선이 아니고 바로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가 미워하는 사람 졸지에 망하게 하고 나한테 도와준 사람은 제대로 도와줘서 힘을 응축하고 힘을 키우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힘의 관계지요. 사랑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힘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물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랑을 톡 깨보세요.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돈 들어있고, 사랑이 사랑답게 되려면 제발 실효성 있는 사랑이 되려면 힘을 지닌 걸로 선물로 줘야 비로소 그때 사랑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힘을 제공할 때 그걸 사랑이라고 쓰고 힘이라고 읽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아가를 제치고 보는 이유가, 남녀 사랑 궁금해서 성경 보는 사람 없거든요.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미진하고 모자란 힘을 주시옵소서, 할 때는 아까 제가 인용했던 이사야에서 이스라엘 적을 작살내는 다시 말해서 나를 괴롭히는 자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내 대신 원수를 갚아주는 그런 하나님이 굉장히 영웅적이고 그야말로 자진해서 흠모할만한 그런 유일한 나의 타인, 남이 되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조차도 남이니까 내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 나를 위한 주지 주님을 위한 주는 역시 아니죠. 나는 잃어버릴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사랑은 미친 것이지요. 뭐에 미쳤느냐? 아낌없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 느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안 느꼈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대신 누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겠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진짜 그러면 미친 것이라 해서 세상 그런 사람 있습니까, 하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내가 노래 가사를 읽어드릴 테니까 그 가사 내용을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이은미란 가수가 맨발로 부른 <애인 있어요>란 노래에요. 내 눈에 그 사람만 보여요. 자기 자신을 안 본다 이 말이죠. 당신은 내 존재를 대신함으로써 난 당신만 보는 걸로 더는 소원이 없다는 거예요. 미친 거예요.
노래 부른 분이 여자니까 결혼할 사람에게 이렇게 나온다면 부모가 혀를 차면서 한참 좋을 때다. 너도 애 낳아봐라. 돈이 최고야. 너 왜 그렇게 철이 없냐. 남자 믿지 마라. 네 아버지 봐라. 가만있는 아버질 건드려. 옆에서 축구중계 보고 있던 남편은 가만있다 당해버려요. 네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 조졌잖아. 누가 뭐래? 가만있는 나를 왜 건드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고?
여기서 솔로몬의 계시에 의하면 사랑함으로서 비로소 사람들은 뒤로 물러갑니다. 사람들은 물러가고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가 전 인류의 대표자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계시를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왕에 의해서 메시아지요. 메시아에 의해서 새로운 여자가 탄생하게 되면, 그 여자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 여자와 남자 사이의 사랑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최상급으로 비교하니까 최고의 사랑이 나온다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그 두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천국은 어디 있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계시의 활동으로 없는 나라가 새롭게 펼쳐지고 만들어지는 거예요.
마치 제가 먹어봤던 솜사탕 기계 앞에서 봤습니다. 설탕을 부으니까 분명히 딱딱한 고체가 들어갔는데 설탕 덩어리가 들어갔는데 없는 공간에 뭔가 구름 같은 물체가 눈에 들어와요. 그러면 구름이냐 안개냐 하고 먹어보니까 그렇게 맛있어요. 미각이죠. 만져보니까 부드러워요. 촉각이죠. 냄새 맡으니까 향기로워요. 후각이죠.
아가를 여러분들이 수련회 오기 전에 읽어보셨습니까? 하여튼 남녀가 세세하게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후각, 미각, 촉각, 청각, 시각 모든 걸 동원해서 스캔, 완전히 훑어버려요. 위에서 아래로. 옷을 입지 않았지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창세기 2장이 그대로 재현되면서 잃어버린 낙원은 잃어버린 여자의 탄생으로 그 주변에 솜사탕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자연의 세계와 새롭게 등장한 남녀를 비교할 때 너는 꽃보다 어떤 향기보다 더 아름답다는 비교급이 아가의 전부를 채우고 있습니다.
아가는 향기의 책이에요. 아가를 통해서 새 창조가 풍기는 향기를 흠뻑 들이마셔야 돼요. 방법은 알려드리겠습니다. 향수 확 뿌리세요. 펼칠 때마다 이거는 발삼 향, 무슨 향, 향수를 뿌리면 돼요. 특히 놀라운 사실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향기가 난다는 거예요.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향기가 납니까? 이건 없습니다.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폐쇄되는 징후를 발산하거든요. 더럽게 환원되는 데서 오는 그러한 증상을 보여줘요. 20대에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나중에 그 사람이 80, 90 돼서 치매 걸려보세요. 사람이 나이 들면 몸에서 냄새나는데 그 냄새가 악취지요. 향기가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게 파괴돼 간다는 내부적인 모든 구조가 쪼그라드는 거예요. 무너지는 겁니다.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노인 되면 밖에 안 나오려 하잖아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노인들을 밖으로 유인해서 소비 늘리려고 지하철 공짜로 타게 하잖아요. 저도 공짜입니다. 소비 진작시키려고. 절대로 소비 진작 안 됩니다. 자기들끼리 까마귀처럼 모여 있어요. 겨울 되면 까만 옷 입고 죽 앉아있어요. 남자는 남자 까마귀, 여자는 여자 까마귀. 문제는 이 말씀대로 남자, 여자가 없다는 거예요. 뒤에서 보면 다 똑같아요.
남자, 여자란 없습니다. 그냥 남자도 사람으로 여자도 사람으로 환원돼요. 남자, 여자 될 때는 바로 새롭게 창조될 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때 남자가 남자다운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엔 두 종류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천국 가고 없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간음이란 뭐냐 하면 에스겔에 나와요. 음행이란 사랑하지 않을 때를 말합니다. 왜? 자기를 사랑할 기회를 못 잡고 있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고 나를 부술 어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남편과 너무 오래 살았는데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요. 누가 남편 사랑하랬어요? 남편 사랑하란 말이 아니고 나를 낮추고 나를 잃어버리면 아직도 남자나 여자로 대우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돼있어요.
문제는 자기가 힘을 쥐고 있으니까 이게 간음이 되고 음행이 되는 거예요. 누가 나를 사랑하는 조건 하에 사랑하겠다는 것은 힘과 힘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지 자존심 싸움이지 이건 사랑 아니에요. 사랑 아니라고 해서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사랑할 줄 몰라요. 오히려 사랑한다면 이건 미친 거예요. 사랑은 미친 짓이에요. 참 결혼이 미친 짓이구나.
사람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어떤 과정 뒤의 실적을 노리는 돼있지 과정 자체는 무시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실적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어디서 나온다? 그 과정, 자기를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나와요.
예를 들어서 왜 인간의 기도가 엉터리냐 하면, 기도는 반드시 뭘 노리게 돼있습니까? 기도의 응답, 기도의 실적을 노리게 돼있어요. 내 남편이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있다, 내 남편이 아직도 교회를 안 나오고 있다. 주여 제가 중보기도 하겠습니다. 중보기도 시작부터 어떤 기대와 목표 달성을 노리죠. 이 자체가 순수하지 않는 기도에요.
이거는 하나님을 자기 하인 부리듯이 부리는 거예요. 재주 있잖아. 곰 재주 부려봐. 내 앞에서 살아 있다면. 내 믿어줄게. 이번 일만 성사되면 십일조 할 테니까 재주 한 번 부려봐. 나무뿌리 뽑을 때까지 기도할 테니까 당신 살아 있다면 재주 한 번 부려봐. 그런 식이에요. 인간성이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든 예수를 믿든 망가진 게 어디 가겠습니까?
제가 지난 토요일에 장례식에서 갑자기 기도하게 됐는데 기도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만 70도 안 됐을 거예요. 요새 70에 돌아가시면 웬일이냐고 할 거예요. 암이 위에 전이돼서 돌아가셨는데 하도 외국에 돌아다니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제가 기도하면서 그랬어요. 70이면 많은 나이가 아닌데 송해 보세요. 아직도 버티고 있잖아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갑이고 인간은 을입니다, 라고 했어요. 을이 갑을 쥐고 흔들 생각마세요. 그 증거, 하나님이 갑이고 우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이번 장례식을 통해서 이번 죽음을 통해서. 그 네트워크에 우리가 말려들었다는. 네트워크라는 단어를 쓰면서 우리는 그 네트워크의 일부라고 이야기했어요.
사실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최고고 돗대(取って置き 소중하게 남겨둔 담배한개피)인 줄 알지요. 죽게 되면 내 모든 게 사라지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죽을 날이 10년 남은 것과 1시간 남은 것과 차이가 없어요. 빨리 들어오라고 호출하면 죽음이 부르면 가야 돼요. 아니 40년 남았다고 많이 남은 것 같아요? 내 일방적인 40년이지 부르면 쑥 가야 돼요.
죽음은 진공청소기입니다. 위이잉~~~ 아파트 실내 밀어보세요. 거기 있는 바퀴벌레 하나가 아직 내가 때가 안 됐는데 하고 까불어도 청소기 대면 쑥 딸려가잖아요. 세상은 너의 때를 위함이 아니다. 을을 위한 세상은 이 세상에 없어요. 갑이 갑질하기 위한 세상이지 을이 을로 인정받는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내놓아야 돼요.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돼요. 내 목숨을 바칠만한 그분을 만나야 됩니다. 내 목숨을 바쳐야 돼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믿고 넘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넘겨놓고 그 사람을 내 소유화시키는 본능이 우리 속에 작용하기 때문에. 예수 믿어줬으니까 예수 당신은 나한테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여자를 만듦으로써 솔로몬은 드디어 왕이 아니고 뭐로 변하느냐? 그 여인의 남자가 돼요. 드디어 사람들에서 여자와 남자가 생기는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둘이 만남으로 없던 새로운 게 등장해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고정된 사고방식이 있어요. 실체가 나란 몸 덩어리가 있으니까 실제로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공부하는 나, 밥 먹는 나, 사랑하는 나, 기뻐하는 나, 슬퍼하는 나가 우리가 아니에요.
공부하고 싶음에 말려든 나가 있고, 사랑이 일어남에 거기에 같이 끌려들어간 나가 있고, 배가 고파서 밥 먹게 되는 나가 있어요. 내가 배고픈 게 아니고 배고픔이 먼저고 그 배고픔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신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면 덩달아 거기에 을로서 따라가야 될 나가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타이밍이 우선이라고 돼있어요. 전도서 3장에 보면, 천하에 타이밍이 있으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이게 아가까지 넘어옵니다. 둘이 껴안을 때가 있고 둘이 헤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란 주체 자리에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바다에 파도 일 듯이 늘 울렁거리고 출렁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세상의 변화에 맞추기 위해서 보조적 위치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인간이에요. 울 때는 울라는 역할 하라고 나가 있고 웃을 때는 웃는 역할 하라고 나가 있는 거예요.
애 낳았다 하니까 기쁠 때가 있지요. 그런데 독감 걸리면 슬퍼버려요. 우리가 애 독감 걸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독감 안 걸리도록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때는 내가 주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어리기 때문에 주관 못해요. 다만 갑이 하신 일에 따라가기만 해도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고 그 사랑은 우리가 목숨 걸만한 겁니다.
사람이 팔십을 살았다.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지요. 냉정하게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80년 살았잖아요. 79년 11개월 29일 없어졌어요. 지금 있는 것은 뭐냐? 지금 내가 있다. 달랑 이것밖에 없어요. 80년 살았다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오늘 며칠이야? 오늘만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이 전부에요.
사랑의 특징은 미래라는 것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충족된다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사랑하면 오케이. 그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교재를 제가 썼습니다. 교재 1페이지에 서론 나오고 밑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충동으로서의 사랑]이라고 돼있지요.
이것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항상 어떤 개념을 잡을 때는 대비되는 비교되는 것을 염두에 두면 되지요. 욕망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란 말이지요. 욕망과 충동의 차이점은 욕망은 결핍에 의해서 불만족이지만 충동은 오히려 결핍 때문에 결핍을 통해서 만족하는 것이에요.
말을 그냥 던졌습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욕망과 충동의 차이점은 늘 만족하기 위해서 찾아가지만 그 결과는 늘 시답지 않아요. 늘 불만족으로 끝나는 겁니다. 이게 욕망이에요. 인간의 욕망. 그런데 충동이라 하는 것은 그 미흡함, 채워지지 않음을 통해서 만족도가 더 높아지는 거예요.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예를 들어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카페에 있는데 남자가 아침에 양치질을 제대로 못해서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었단 말이죠. 그럴 욕망은 뭐냐 하면, 내가 눈이 삐었지. 내 시각에 문제가 있어. 저걸 내가 뭘 좋다고. 오빠, 우리 헤어져. 불만족스러우니까. 그렇게 칠칠맞고 제 몸 하나 단장 못하는 인간하고 나를 못 맡기겠으니 헤어지자고 나와요. 이게 욕망이에요.
욕망으로서의 사랑은 상대방을 통해서 내가 사랑할 조건을 만들어서 거기에 상대방이 맞추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런 조건이 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배려를 해주겠노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랑은 욕망으로서의 사랑이죠. 욕망으로서의 사랑이 어떤 내용이냐? 교재 13페이지 봅시다. 고상한 십자가마을수련회 교재에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대중 뽕짝 가사를 쓴다는 것은 많이 낮춘 거죠.
김진룡 씨가 작사하고 노래는 조항조가 불렀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여자 노래라야 적당해요. 사랑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주인공을 여자로 생각해봅시다. 돌아온다던 그 말도 거짓말 세상의 모든 거짓말 다 해놓고 행여 나를 찾아와 있을 너의 그 마음도 다칠까 나의 자리를 난 또 비워둔다. 아이고, 부처 나셨네, 부처 나셨어. 이거 뭐예요? 여자가 맨날 거짓말 해놓고 혹시 찾아와서 마음 다칠까 걱정 되서 또 너의 자리를 비워둔다 이 말이에요.
또 가관이 뭐냐 하면, 이젠 더 이상 속아선 안 되지 이젠 더 이상 믿어선 안 되지, 해놓고는 다시 한 번만 더 너에게 나를 사랑할 기회를 줄게. 대단하네, 대단했어. 날 사랑하도록 기횔 줄게. 내가 배려해줄게. 이거 뭐예요?
욕망으로서의 사랑은 반드시 뒤끝이 있어요. 사랑 안 한다고 천명해놓고 내가 떠난 그 자리에 다른 사랑으로 내가 없는 자리, 내가 사랑 안 한 그 자리를 채우지 말라고 백지영이 이야기했어요. <사랑 안 해>란 노래 가사에 보면 나와요. 내가 없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랑으로 채우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놨어요. 야, 뒤끝 있지요. 나 떠나보내고 다른 사람 사랑하기만 해봐. 이 말이란 말이죠.
시간이 갔습니다만 신나거든요. 약간만 더 해보겠어요. 그러나 그런 사랑노래도 있지만 이런 사랑노래도 있어요.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명동콜링>이라고 카더가든이 불렀던 요새 뜹니다. <더 팬>이란 프로에서 나왔던데. 사랑도 두 종류가 있는 걸 아시고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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