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죽음
2007년 9월 30일 아가 8:5-7
(아 8: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단어들은 분홍빛이라든지, 아름다운 개념들이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 즉 ‘죽음’, ‘잔혹’, ‘홍수’. ‘불’, ‘음부’ 같은 단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나름대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립되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을 사랑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란 것은 어디까지만 적용되느냐 하면 자신의 죽은 것, 자신에게 두려운 일이 생겨버리면 다 헛것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아낌없이 주는 것’이란 한계점이 있는 그 한계점이란 자기가 진짜로 중요한 것이 위협되지 않는 경우만을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더라도 진짜 자기에게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그 사랑도 발휘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목숨 말고라도 두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존심이 깨어지는 것도 두렵고, 자신이 좋아하는 강아지가 해꽂이 당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획 잡은 놓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진짜 사랑이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 사랑인지요! 그런 어설픈 사랑으로 감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사랑하다고 접근하고 장담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랑에 탐복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허술한지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의 어설픈 사랑을 빌미삼아 우리를 사랑의 대상에서 삭제시켜 버리실까요?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 ‘죽음’이라든지 ‘음부’, 불‘이라는 단어들이 동원되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쉬운 애정 표현으로 주님의 사랑을 다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35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상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닌 사랑인지를 알리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방식으로 동원되는 것이 바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입니다. 평소에 상식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하다가 막상 이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 들이닥치면, 사랑이고 뭐가 간에 다 부인하고 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려움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은 이러하다’고 하셔도 참으로 그 사랑을 아는 순간은 우리 스스로 내민 사랑을 스스로 철수하고 철거시켜 버릴 때입니다. 즉 “하나님, 저는 이렇듯 큰 죄를 범했기에 아무 주님은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줄로 저는 믿습니다”하고 뒤로 후퇴해버리는 때가 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우리의 행세는 평소에 뭔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참된 주님의 사랑은 이런 두려움마저 추방되지 만듭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주님의 놀라운 사랑만 남게 되지요. 예를 들면, 갑자가 죽음이 엄습하게 되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그동안 받았다고 여긴 사랑의 효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아직도 내가 어리석게도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돼”라고 하면서 알아서 주님을 배반해버립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베드로가 그 일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 배신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한결같이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요, 이러한 사랑이 도장처럼 새겨진 사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상식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기초한 것을 사랑으로 알고 있기에 윤리와 상식이 깨어져버리면 사랑과 같이 깨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극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주님의 사랑의 관계로 끊어져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독생자가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사랑을 베풀었다는 말입까?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이나 혹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라는 로마서 8:32의 말씀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서 사랑을 나타내는데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사랑을, 그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하늘의 사랑을 알았느냐? 그렇다면 다 줘버려라. 너희 목숨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 걸고 수행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숨을 못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해도 그것은 주님의 사랑의 깊이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타락하고, 아무리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범죄했다할지라도 그 현상에서 주님의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목숨이 잃는 순간이 온다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역시 사랑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 목숨 그 후까지 보장하십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사랑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마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를 만들어줄 때에, 아담을 마취시켜 버렸습니다. 자신이 사랑이니 아니니 따질 입장에 있지도 못하게 하신 겁니다. 막상 눈 뜨고 보니 놀라운 사랑이 자기 곁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예상을 능가합니다. 우리가 감히 측정하지도 못할 지경으로 와계십니다. 우리의 그 어떤 두려움이나 그 어떤 공포도 사랑 앞에서는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정도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목숨 바친 그 사랑의 죽음이 우리의 상식적인 목숨이나 죽음보다 더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홍수라도 끌 수 없는 여호와의 불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사랑 앞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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